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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요청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화답하다

 
지방자치와 중앙정부는 상명하복 명령 체계가 아닌 동반자
 
임병도 | 2017-07-17 08:10:5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장면1: 청와대

“오늘은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에 관한 논의 때문에 모셨다. 11조2000억 규모의 추경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그 가운데 3조5000억원은 지방교부세와 지방재정교부금 형태로 지자체로 내려가게 된다. 중앙정부가 선심성으로 내려보내는 것은 아니고 간섭할 성격도 아니지만, 추경의 목적이 그래도 일자리를 조금 많이 만들어서 청년 고용절벽의 어려운 경제를 극복해보자는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지방의 일자리를 만드는 데 집중해달라” (문재인 대통령)

지난 6월 14일 청와대에서는 17개 시도지사 간담회가 열렸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11조 규모의 추경 예산을 국회에 제출했다며, 그중에 3조5천억을 지방 자치단체가 쓸 수 있게 내려보내겠다고 밝혔습니다.

쉽게 풀이하면 추가 예산 중 30% 정도를 지방 자치단체가 쓸 수 있도록 하는데, 그 예산을 되도록 일자리를 만드는 데 사용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장면2: 서울시청

서울시 2조313억 규모 추가경정예산 편성, 시의회에 제출

“이번 서울시 추경은 정부의 일자리 추경과 연계해 일자리 창출 효과를 높이고, 복지․대기질․도시안전 등 시급하면서도 시민들이 원하는 민생사업이 적기에 추진될 수 있도록 편성했다” (장혁재 서울시 기획조정실장)

지난 7월 12일 서울시는 2조 규모의 추경을 편성했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시는 이번 추경 예산 중 38개 일자리 사업에 1,351억 원을 반영했습니다. 추경이 서울시 의회를 통과해 집행된다면 약 1만3,000명 이상 직·간접 신규 일자리(직접 1만1038명, 간접 2233명)가 만들어집니다.


‘문재인 대통령 일자리 정책에 박원순 시장이 화답한 이유’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6월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시도지사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일자리 추경 편성 요청과 일자리 정책에 서울시도 일자리 추경을 적극 편성하겠다고 호응했습니다.

이번에 서울시가 밝힌 추경 예산에 대규모 일자리 예산이 포함된 이유입니다.

왜 박원순 시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에 빠르게 예산을 편성하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을까요? 혹시라도 대통령이 말했으니 무조건 따르겠다는 ‘묻지마’ 정책일까요?

아닙니다. 물론 과거 정부라면 대통령이 한마디 하면, 서울시장은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의 말을 듣지 않으면 지방 예산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중요한 역할을 하듯, 지방자치단체도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과거 정부는 예산이라는 무기를 통해 지방자치 단체를 통제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문재인 대통령이 예산을 먼저 주겠다고 밝혔고, 박원순 시장은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정책에 맞춰 서울시도 노력하겠다며 예산을 편성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청와대에 일자리 상황판을 만들며 최우선 정책으로 일자리 정책을 추진했다. (상) 박원순 시장은 2015년부터 일자리 대장정을 통해 서울시 일자리 정책을 계속 추진해왔다. (하) ⓒ청와대,서울시

 

박원순 시장이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정책에 빠르게 호응한 이유는 이미 박 시장이 일자리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원순 시장은 2015년부터 ‘일자리 대장정’을 하고 있습니다. 취준생 청년들을 비롯해 현장 노동자와 기업, 주부 등을 만나 일자리의 문제점을 듣고, 일자리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최우선 정책으로 펼치는 일자리 정책을 이미 박원순 시장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자리 대장정을 매년 하는 박 시장 입장에서는 정부의 일자리 정책과 연계하면, 더 큰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방자치와 중앙정부는 상명하복 명령 체계가 아닌 동반자’

대한민국은 지방자치제를 시행하는 국가입니다. 그러나 지방자치가 잘 되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앞서 말한 ‘예산’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중앙정부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통령과 지방자치단체장의 관계는 항상 수평이 아닌 상명하복의 명령 전달 체계로 운영됐습니다. 지난 정부에서 박원순 시장이 구상하고 추진했던 정책들을 중앙정부가 막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시도지사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시장, 도지사들이 서로 인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은 ‘수도권과 지방이 상생할 수 있는 ‘지방분권공화국’ 연방제에 버금가는 강력한 ‘지방분권제’를 만들겠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그런데 헌법 개정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개정 이후에도 시행까지 시간이 더 걸릴 것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시도지사 간담회라는 형태로 (모임을) 정례화할 생각”이라며 “시도지사들도 대통령과의 회의에서 논의하거나 지원받고 싶은 사항은 언제든지 회의 개최를 요청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상명하복 체계가 아닌 동반자가 돼야 합니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좋은 정책을 중앙 정부가 베끼거나,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정책과 연계해 서울시도 예산을 편성하는 모습은 가장 이상적인 ‘지방자치제’의 모습 중 한 장면입니다.

대통령과 서울시장은 경쟁 관계가 아닌 국민을 위해 함께 나가야 하는 존재로 국정과 시정을 운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존재 여부는 국민과 시민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면 일이 됩니다.’라는 일자리 대장정의 구호처럼 정부와 서울시가 함께 하면 양질의 일자리가 생길 것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364 

 

▲지난 6월 14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시도지사간담회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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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베를린선언 이후의 남북관계

<칼럼> 이승환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이승환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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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7  04: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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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정상회담,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그리고 ‘신베를린선언’과 G20 정상회담 등이 이어진 지난 열흘 남짓의 나날은 한반도평화와 관련된 문재인정부의 기대와 희망, 현실과 한계가 착종한 시기였다.

“국제사회의 합의가 쉽지 않고,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인 우리에게 합의를 이끌어낼 힘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는(조선일보 2017.7.11.) 문 대통령의 말 그대로 한반도가 처한 현실의 벽과 무게가 그만큼 무겁고 복잡하다.

신베를린선언: 햇볕정책의 진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일련의 국제외교무대에서 기대 이상으로 한반도호의 ‘운전자’다운 면모를 보였다. 문재인정부의 한반도평화 구상과 로드맵이 담겨 있는 ‘신베를린선언’에는 북핵문제에 대한 견정한 해결의지와 국내외의 강경한 대북여론을 끌어안으려는 신중한 배려와 균형감각이 깊게 배어 있다.

무엇보다 신베를린선언을 통해 문 대통령은 북한의 ICBM 발사에 대해 “매우 실망스럽고 대단히 잘못된 선택”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북한 붕괴 불원, 흡수통일 불추진, 인위적인 통일 불추구, 대북적대시정책 불추구’ 등의 이른바 ‘대북 4노(No) 원칙’의 기조를 재확인하고, “군사적 긴장의 악순환이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더욱 더 ‘대화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는, 대화를 통한 평화 추구의 원칙적 입장을 분명히 천명했다.

반면 문 대통령은 ‘북한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반도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수립’의 도정에서 “북한이 핵 도발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더욱 강한 제재와 압박”에 나설 것이며 심지어는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압박의 의지도 동시에 드러내 보였다. 많은 논란을 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에는 두 가지 포석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압박과 대화의 병행, 즉 ‘더 많은 대화’를 위해 ‘더 많은 압박’을 구사하려는 전술적 배합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미국의 압박정책에 동조하기 때문에 (미국과 보수층의) 남북대화 재개에 대한 반발도 잠재울 수 있다”(한국일보 2017.7.8.)는 청와대 관계자의 한마디로 요약된다.

또 하나는 기존의 압박 일변도에서 대화와 관여를 강화하는 정책적 변화만이 아니라 대북정책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20년간 지속된 서독의 동방정책처럼 ‘정권이 바뀌어도 국민의 지지와 국제사회의 협력을’ 얻을 수 있는 대북정책의 초석을 놓기 위해 국내외 강경여론을 끌어안는 배려가 대북압박 강조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김대중·노무현정부 시기의 소위 ‘포용정책 1.x’ 시기에 대한 문재인정부 나름의 성찰의 산물이다.

‘더 많은 압박’으로 ‘더 많은 대화’(?)

그러나 신베를린선언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의미 부여와 국제외교무대에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복잡한 현실과 장벽을 헤쳐나가기 위해 문재인정부의 한반도평화구상은 더 많은 질문과 비판에 담금질되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 ‘더 많은 압박과 더 많은 대화’ 주장에 대해서는 오래된 논란이 존재한다. ‘미국의 대북압박에 동조하기 때문에 남북대화에 대한 반발을 잠재울 수 있다’는 주장은 현실에서는 오히려 반대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은 일련의 남북 민간교류 시도를 전부 거부하면서 그 이유를 “남측 당국이 미국의 부당한 반공화국제재에 동참해 나서고 있는데 대해 우리 인민들이 격분해하고 있는 분위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대북압박 동조가 남북대화에 대한 미국 등의 이해를 얻을지는 몰라도 북한의 대화문턱을 더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압박과 대화의 병행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압박의 한계와 목표가 분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압박과 별개로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또다른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중국 압박을 위해 한미일 3국 안보협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북한의 정상적 경제활동까지 봉쇄하는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까지 검토하겠다는 것은 대북압박의 한계와 목표를 한참 넘어서는 일임은 물론이고 한반도평화체제의 환경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또 압박으로 대화 혹은 더 나아가 핵포기를 유도하겠다는 시도는 이미 지난 20년 동안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북한을 대화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압박과 별개의 노력이 투자되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지고 있다.

대화와 협상의 입구에 들어서는 방안과 관련하여 국내외적으로 가장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쌍중단론’이다. 대북적대시정책의 상징인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중단·축소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이 본격적 대화국면을 이끄는 현실의 유일한 조건이라는 이 주장은 한국의 시민사회가 일찍부터 제기해왔고 중국은 물론 미국의 조야에서도 그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미합동군사훈련은 합법이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은 불법이므로 양자의 교환이 불가하다는 외교 당국자의 ‘기준’ 설정으로 ‘대화로 가는 유일한 입구’는 사실상 봉쇄되는 형국이다. 안보딜레마가 엄존하는 한반도 상황에서 군사력 태세의 합법·불법의 기준 논란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시간제한이 있는 북핵 로드맵

한미정상회담에 대해 격렬히 비난을 퍼부었던 북한은 문재인정부의 신베를린선언 등에 대해서도 일단 부정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사실상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조선신보』는 베를린선언의 ‘대북제안’에 대해 “친미사대와 동족대결의 낡은 틀에 갇힌 채로 내놓은 제안이라면 북측의 호응을 기대할 수 없다”며 “조선반도(한반도) 긴장 격화의 주된 요인인 미국과의 합동군사연습을 중지할 결단을 내릴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문재인정부가 을지프리덤가디언 연합훈련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고 대남정책의 방향을 결정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조선신보 2017.7.11.)

문재인정부의 ‘더 많은 압박과 더 많은 대화’는 결국 다시 ‘쌍중단’의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북한은 ICBM 능력의 일정한 완성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협상테이블에 나오기보다는 ‘대북제재에는 추가 시험, 군사적 공격에는 핵 확전 위협’으로 대응하는 비례성 핵능력 강화노선을 견지해나갈 것이다. 이는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만약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또다시 제재결의가 나온다면 우리는 그에 따르는 후속조치를 취할 것이며 정의의 행동으로 대답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확인되고 있다.(조선중앙통신 2017.7.14.)

향후 북한은 ICBM을 비롯하여 목표한 핵능력의 확보 국면에 들어섰다고 판단하면, 그때부터는 남한과 일본, 괌 등을 대상으로 하는 ‘북한 생존에 필수적인 핵능력’에 대해서는 협상 불가를 고수하면서, 미국과는 ICBM 폐기 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이는 베를린선언이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던 김대중정부 당시의 남북관계 내외 환경과 문재인정부의 그것이 크게 다른 상황임을 의미한다. 문재인정부의 북핵 문제 시간표는 지난 시기와 달리 ‘북핵문제가 임계점에 임박해있는’ 시간제한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즉 지금 과감하지 않으면 이후 더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반도 핵문제는 본질적으로 ‘북한의 게임’이 아니다. 북핵문제가 임계점에 달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핵이 ‘북한의 자위력’이 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화하는 역설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북한이 미국 본토에 대한 2차 핵타격능력을 일정한 수준에서 갖추게 될 경우, 한미 당국은 실제로 ‘모든 옵션’을 검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미국 트럼프정부는 한국의 핵무장이나 한반도 전술핵 배치보다 북한이 20여기의 핵무기 수준에 머물러 있을 시기에 선제 타격하는 것을 더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정부가 핵무장이나 전술핵 배치에 강한 반대의사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신베를린선언의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언급이나, “6.25 이후 최고의 위기 상황”이라는 문 대통령의 발언은 바로 이런 우려스런 상황 전개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북한의 기회도 시간제한이 있다

더구나 전술핵 없는 북한의 핵 억제전략은 근본적 한계가 있다. 전략핵무기로는 위협과 협박은 가능하지만 실질적 핵 억제전략을 구사하기는 어렵다. 또 만의 하나 핵무장 도미노가 일어나 동아시아의 핵무기 경쟁이 현실화되면 북한의 안전은 더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러시아도 그런 상황은 결코 용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북한 역시 핵문제가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에 동결 협상에 나서는 것이 한반도의 파국을 막는 길이고 북한의 안전을 최대의 실익과 함께 확보하는 길이다.

북한이 문재인대통령의 신베를린선언에 대해 일방적 거부 대신 구체적 내용을 조목조목 따지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북한은 신베를린선언의 4대 제안을 우선 가능한 부분부터 수용해서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임해야 한다.

특히 휴전협정 64주년을 맞아 군사분계선에서 적대행위를 중단하자는 제안과 10.4선언 10주년을 맞아 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하자는 제안은 남북의 군사당국 회담과 적십자회담을 통해 즉각 실현 가능한 제안들이다.

북한이 남북관계 재개의 조건으로 제기하는 해외 북한식당의 여종업원 송환문제는 국정원의 과거 활동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와 적폐청산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남측의 여건상 어떤 결정도 내리기 어려운 문제이고, 또 그 과정 자체가 상당한 시간을 요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남측 당국이 오는 27일 정전협정 체결일을 맞아 MDL에서 확성기를 통한 심리전 방송 중단 등의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할 경우, 북한 역시 적절한 시점에 이러한 신뢰구축 노력에 호응해서 군사당국 회담에 나서는 것이 순리이다. 이 조치는 북한이 주장하는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의 중요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과를 10.4선언 10주년의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가야 한다. 남북관계의 복원 과정이 시작되면 ‘더 많은 대화’를 위한 소위 ‘올바른 조건’ 제약도 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미가 북한 핵·미사일 동결이 협상을 통해 이뤄야 할 목표의 하나라고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축소·중단이 대화나 협상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협상을 통해 북한이 획득해야 할 목표의 하나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문재인정부 초기에, 남측만이 아니라 북한 역시 정확한 현실인식에 바탕하여 과감한 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반도평화는 과거 ‘도발-제재-추가 도발’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임계점을 넘어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한반도평화 프로세스에는 남측만이 아니라 북한의 기회 역시 ‘시간제한’이 부과되어 있다.

* 이 글은 필자의 7월 12일자 <창비주간논평> “한반도 운전석에 앉은 문재인정부: 신베를린선언 이후의 남북관계”를 토대로 일부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이승환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이승환은 1958년 경북 포항에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정치학 석사)을 거쳐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승환은 통일맞이 정책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또한 민화협 집행위원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여에 걸쳐 남북 민간교류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15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그가 쓴 글로는 “문익환,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창작과비평, 통권 143호, 2009), “6월항쟁 20년,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통일담론”(창작과비평, 통권 137호, 2008), “2000년 이후 대북정책담론 연구”(북한대학원, 2008) 등이 있다.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lsh2k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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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외교부의 거짓말, 美 "일부 한국입양아 자동시민권 못받아"

 
[심층 취재- 한국 해외입양 65년] 1. 추방 입양인 - ②
2017.07.17 07:02:28
 
 

 

 

 

※이 기사는 이경은 국제인권법 전문가, 제인 정 트랜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의 도움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 

 

3살 때 미국으로 입양됐다가 지난 2011년 추방당한 팀이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한국에서 그의 존재를 증명해줄 수 있는 유일한 문서는 호적(현 가족관계등록부)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호적은 가짜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국에서 1970-80년대 해외입양을 보낼 때 서류를 간소화하기 위해 거짓으로 '고아호적'을 만드는 게 일종의 관행이었다. 아담 크랩서 씨도 자신의 본래 이름인 '신성혁'이 아닌 '신송혁'이란 이름의 '고아호적'을 입양기관에서 만들어 입양 보냈다. 이 '고아호적'에 대해 아담의 추방 재판 판사는 '불법으로 입국했다'고 문제 삼기도 했다.  

한국은 입양 보내려고 '고아'를 만들어냈다 

국제인권법 전문가인 이경은 박사(서울대학교 법학과)는 "입양특례법이 시행되는 2012년까지 기아 발견에 의한 단독 호적(고아호적) 발급 숫자와 국외입양 아동의 숫자는 놀랍도록 유사하다"며 "이는 과연 60여 년간 한국에서 국제입양이 가정이 필요한 '고아'들에게 가정을 찾아주기 위한 절차였는지, 아니면 국제입양을 위한 '고아'를 만들어 내기 위한 절차였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한다"고 지적했다.  

 

(출처: <국제입양에 있어서 아동권리의 국제법적 보호>, 이경은, 서울대학교 법학과 박사 학위 논문, 2017)  

'가짜 호적' 문제에서도 드러나듯이 2012년 8월, 입양특례법 개정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 전까지 한국 정부는 해외입양 과정에 공식적으로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4대 입양기관(홀트아동복지회, 동방사회복지회, 대한사회복지회, 한국사회봉사회)에 맡겼다. 한국의 입양기관들은 마찬가지로 미국의 사회복지체계 내에 들어가 있지 않은 미국의 사설 입양기관들을 파트너로 삼아 한국과 미국간 해외입양 업무를 전담해왔다. 입양이 해외의 양부모들에게 수수료를 받을 수 있는 '돈벌이 수단'이 되면서 관련 절차는 '간소화' 됐다. 2014년 입양아동 현수가 양아버지에게 맞아 죽은 사건은 미국 입양기관이 양부모 심사를 얼마나 허술하게 하는지 보여준다. 추방 입양인 문제의 근원 역시 입양 보내기에만 급급한 이런 입양 시스템에 있다. 

미 국무부 "한국 입양 아동, 자동으로 시민권 받을 수 없다. IR-4비자 받으면" 

입양인 국적 취득 문제를 둘러싼 인권 논란이 거세지자 미국 의회는 2000년 아동시민권법(Child Citizenship Act 2000, CCA)를 통과시켰다. 이 법은 2001년 2월 발효됐으며, 당시 '입양이 완료된' 만 18세 이하 입양인은 별도의 시민권 획득 절차를 밟지 않아도 자동으로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됐다.  

외교부 영사서비스과는 입양인 국적 취득 문제에 대한 질문에 "CCA로 동법 발효시 만 18세 이하 입양인(1983년 2월말 이후 출생)은 일괄적으로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답했다. 외교부는 추방 입양인인 아담, 필립 등 모두 1970년대 입양 간 경우라서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답변은 사실이 아니다. 2014년 이전까지 입양된 대다수 한국 입양인들은 이전에 입양된 이들과 마찬가지로 시민권 미취득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왜? 한국 입양 아동이 받은 비자 때문이다. 입양특례법 개정으로 가정법원을 통한 입양재판이 제대로 진행되기 시작한 2013년 중반이 돼서야 한국 아동은 CCA가 자동으로 적용되는 IR-3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입국했다. CCA가 발효되기 시작한 2001년부터 2013년까지 IR-4 비자를 받고 입국한 아동 1만5498명은 미국에서 입양이 완료된 사실이 확인돼야만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 

미국 국무부(허치슨 디 스코트)는 <프레시안>에 보낸 서면 답변을 통해 "2000년 CCA는 일부 입양아들에게 자동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미국 입국시 부여되는 비자 유형에 따라 자동 시민권이 부여되기 때문에 이와 다른 비자를 받은 입양아도 자동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받을 수는 없다"며 "IR-4 비자를 받으면 자동으로 미국 시민권을 받을 수 없다. IR-4 비자를 받은 어린이는 미국 법정에서 입양될 때 시민권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출처 : 미 국무부, 미 국무부의 연도별 비자 발급 통계에서 한국 통계를 찾아 집계했다.) 

한국, IR-4 비자를 가장 많이 받은 나라 

 

한국은 IR-4 비자를 가장 많이 받은 나라다. 상대적으로 IR-4 비자를 적게 받은 2012년 미 국무부 통계를 보면, 미국은 전 세계 1506명의 아동에게 IR-4 비자를 발행했고 이 중 628명이 한국 아동이다. 한국은 이 비자를 가장 많이 받은 나라였고, 우간다(226명), 콩고민주공화국(211명), 에티오피아(114명), 모로코(57명) 순으로 IR-4 비자를 받았다.

만약 IR-4 비자를 받고 간 입양 아동의 양부모가 필립이나 팀, 아담의 양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서의 재입양 절차를 빼먹는다면, 이 입양인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없게 되며 추방 위험에 노출된다.  

해외입양의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도 이런 문제에 대해 2012년 이후에야 알았다. 복지부는 2012년 추방 입양인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미국 입양아 시민권 취득 문제에 대한 전수조사를 처음으로 실시했다. 당시 이 업무 담당자 중 한 명은 당시 CCA 적용이 안 되는 18세 이상 성인 입양인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18세 미만 아동은 전수 조사 대상이 아니었다. 이 조사를 통해 파악된 시민권 취득 미확인자가 2만3000여 명이었다. 

현재 해외입양 업무를 맡고 있는 김혜지 아동복지정책과 사무관은 "현재 조사된 국적 취득 미확인자 1만9000여 명은 2012년에 입양 간 아동까지 포함한 수치"라면서 IR-4비자 문제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사무관은 "2012년 첫 조사 이후 언제 비자 문제를 인지하고 관련 통계에 포함시켰는지 시점은 정확히 모른다"고 덧붙였다. 

한국 출신 아동이 우간다, 콩고 등 아프리카 저개발국가 출신 아동들보다도 더 시민권 취득 문제에 취약한 이유는 앞서 지적한 입양 제도에 있다. IR-3비자는 입양이 발생하는 나라에서 입양 재판을 받고 입양 부모가 입양아동을 직접 만났을 경우에 주어진다. 에티오피아, 가나, 아이티, 온두라스는 해외입양의 경우, 입양 부모가 반드시 2번 방문하게 한다. 러시아는 입양 부모가 3번 방문할 것을 요구했다(러시아는 미국으로의 해외 입양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기도 한다). 중국, 콜롬비아, 부룬디. 코스타리카, 인도, 홍콩은 입양 부모가 7주까지 머무르면서 입양 절차를 직접 밟도록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2012년 입양특례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입양부모가 한국에 한 번도 오지 않고 입양기관을 통해 모든 절차를 대리할 수 있게 했다. '우편 주문 아기'가 가능한 시스템이었다는 얘기다.  

UN 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의 입양은 반드시 권한당국의 결정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21조의 a)고 규정하고 있다. 이경은 박사는 "한국은 1991년 UN 아동권리협약에 가입하면서, 이 조항은 유보하였고, 아직도 이 유보를 유지하고 있다"며 "UN 아동권리협약 가입국 196개국 중에 입양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21조의 a를 유보하고 있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미국 정부도 아동의 입양절차의 완료와 시민권 취득을 담보할 수 없는 한국으로부터의 입양절차가 취약한 것을 알면서도 한국 출신 입양 아동의 입국을 허용해 오고 충분한 아동보호 조치를 외면해 왔다"고 비판했다. 

결국 한국과 미국의 허술한 입양 제도, 또 이를 뻔히 알면서도 감독과 제재를 하지 않은 양국 정부 때문에 '추방 입양인'이라는 비극이 발생했다.  

현재 미국 해외입양인 중 약 3만50000명이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되는 가운데, 보건복지부가 파악한 한국 출신 중 국적 취득 미확인자는 1만9429명이다. 전체 국적 미취득자 중 절반 이상이 한국 출신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 한국의 입양정책에서 당사자인 입양인들이 배제되고 있다며 항의하는 입양인들의 시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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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북에 군사회담·이산상봉 적십자회담 동시 제안

 

군사회담 21일·적십자회담 8월1일 개최 제의…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 후속조치

17.07.17 08:59l최종 업데이트 17.07.17 09:29l

 

 서주석 국방부 차관이 17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남북군사당국회담 개최를 북한에 제의하고 있다.
▲  서주석 국방부 차관이 17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남북군사당국회담 개최를 북한에 제의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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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17일 오전 9시 26분]

정부가 17일 북한에게 군사회담과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서주석 국방차관은 이날 오전 9시에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군사분계선에서 일체의 적대행위 중지를 위한 남북군사당국회담'을 하자고 북한에 제안했다. 김선향 대한적십자사(한적) 회장 직무대행도 같은 시각 서울 중구 남산동 한적 본사에서 북한 조선적십자회에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두 기관이 동시에 남북회담을 제안한 것이다. 

서 차관은 "지난 7월 6일 우리 정부는 휴전협정 64주년이 되는 7월27일을 기해 남북이 군사분계선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하여 남북간 긴장을 완화해 나갈 것을 제안한 바 있다"며 "이 제안에 대한 후속조치로 국방부는 군사분계선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하기 위한 남북군사당국회담을 7월 21일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개최할 것을 북측에 제의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북측은 현재 단절되어 있는 서해지구 군통신선을 복원하여 우리측 제안에 대한 입장을 회신해주기 바란다"며 "북측의 긍정적인 호응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적대행위 상호 중단에 대해 포괄적으로 협의하게 될 것" 

그는 "(발표문 중)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일체의 적대행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에 "현 단계에서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특정하기보다는 북한의 반응들을 보면서 검토해 나아갈 것"이라면서 "군사 분계선에서의 적대행위 상호 중단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협의하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김선향 대한적십자사 회장 직무대행이 17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에서 이산가족 상봉 추진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개최를 북한에 제의하고 있다.
▲  김선향 대한적십자사 회장 직무대행이 17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에서 이산가족 상봉 추진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개최를 북한에 제의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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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향 한적 회장 직무대행도 "지난 7월 6일 우리 정부는 '베를린 구상'을 통해 역사적인 10.4 정상선언 10주년이자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추석이 겹치는 올해 10월 4일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행사와 성묘 방문을 진행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며 "대한적십자사는 추석 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 개최 등 인도적 현안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8월 1일 판문점 우리측 지역 '평화의집'에서 가질 것을 제의한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측에서는 김건중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을 수석대표로 하여 3명의 대표가 나가게 될 것"이라고 밝히면서 "우리측 제안에 대한 조선적십자회측의 입장을 판문점 남북 적십자 연락사무소를 통해 회신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 직무대행은 '북한의 호응 가능성'에 대해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6.15선언과 10.4 선언에 입각한 진정성 있는 제안에 북측이 호응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정부의 이번 제안은 서주석 차관 등이 밝힌 것처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 독일에서 발표한 '베를린 구상'의 후속조치다. 당시 문 대통령은 "쉬운 일부터 시작해 나가자"며 10.4선언 10주년이자 추석 당일인 10월 4일에 이산가족 상봉 행사 개최와 휴전협정 64주년인 7월 27일을 기해 군사분계선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상호 중단한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북한이 이번 제안에 응할 경우, 지난 2015년 12월 남북 차관급 회담 이후 1년 7개월여만의 남북 당국회담이 성사되는 것이다. 군사회담만으로는 2014년 10월 비공개접촉 이후 33개월 만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지난 21015년 10월 상봉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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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병우 문건'은 대통령지정기록물인가?

 
[전진한의 알권리] 최순실 국정농단, 블랙리스트 의혹 밝힐 기회
2017.07.15 12:18:44
 

 

 

 

지난 14일, 박근혜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전임 민정수석이 생산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류 300여 종이 발견되어 파문이 일어나고 있다. 문건에는 삼성경영권 승계 및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기록들도 포함되어 있어 관련 재판에 증거자료로 활용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 지정기록물인지 알 수 없어 일단 원본은 대통령기록관에 이관하고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되어 사본은 검찰에 인계했다"라고 밝혔다. 
 
일부 언론에서는 위 문건공개 및 기록을 검찰로 인계한 것이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비판했다. 위 기록이 대통령지정기록물 및 비밀기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대통령기록물법을 근거로 위 자료처리가 적법한지 여부를 분석해보도록 하자. 
 
우선 대통령기록물법에는 대통령기록물의 종류로 대통령지정기록물, 비밀기록, 일반기록(공개 및 비공개기록)으로 구분하고 있다. 대통령지정기록물로 지정되면 목록 및 내용을 15~30년 동안 대통령기록관에 봉인조치 된다. 즉 외부에서 대통령지정기록물의 존재자체를 알 수 없게 된다. 세월호 7시간, 군위안부 관련 한일 회담 관련 기록 등이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봉인 되었다고 외부에 알려졌지만, 세부적 정확한 내용은 여전히 알 수 없다. 
 

ⓒ연합뉴스

이번에 청와대가 공개한 문건은 대통령지정기록물일 가능성이 희박하다. 대통령지정기록물은 원칙적으로 대통령 퇴임이후에 대통령기록관 이외에는 존재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현 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지정기록물인지 여부를 인지할 방법도 없다. 비밀기록여부도 논란이 되는데, 비밀기록은 보안업무규정, 군사기밀보호법에 따라 문건마다 1급, 2급, 3급, 대외비를 별도 표시해두어야 한다. 하지만 박수현 대변인에 따르면 위 문건에는 비밀여부를 표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비밀기록도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청와대는 이번 문건이 관련 재판에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다며, 대통령기록물 사본을 증거자료로 제출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판례는 '십상시 문건' 및 10.4 남북정상회담록 초본 삭제 등 대통령기록물 사본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대통령기록물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 문제도 대통령기록물법 위반여부와도 관계가 없다. 
 
일반 대통령기록물의 경우 대통령기록물법 제 16조(공개)에 ‘대통령기록물은 공개함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제1항에 해당하는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에는 이를 공개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즉 대통령기록물을 공개하는 것이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공개가 원칙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공개법 비공개대상정보에 해당하더라도 문건의 중요성(공익검증 및 이익형량)을 판단해 공개로 얼마든지 전환할 수도 있다.  
 
아울러 국정기록비서관실은 위 기록을 발표당일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했는데, 이는 대통령기록물법 제 12조(회수) 절차를 밟은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기록물법 제 12조는 '중앙기록물관리기관의 장은 대통령기록물이 공공기관 밖으로 유출되거나, 이관되지 아니한 경우에는 이를 회수하거나 이관받는 데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정기록비서관실은 위 법절차에 따라 신속하게 대통령기록관측과 이관절차를 밟아 이관을 완료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에서 발견된 문건에 대해 현 정부가 공개한 것은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 오히려 위 문건으로 인해 검찰과 관련 재판부가 최순실 국정농단 및 블랙리스트 관련 의혹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반대로 위 문건 발견은 박근혜 정부가 대통령기록물 관리를 얼마나 엉망으로 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하고 싶다. 300여종이 넘는 기록을 문재인 정부에게 참고용으로 인계인수 했을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향후 진정한 의미에서 대통령기록물의 위력을 경험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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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걱정하는 것은 중국의 영향력”

 『일대일로의 모든 것』 저자 이창주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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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6  00: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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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일대일로의 모든 것』을 펴낸 이창주 중국 상하이 푸단대학 박사과정 수료자를 5일 시내 커피숍에서 인터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중국’ 하면 요즘 떠오르는 단어 중에 사드와 일대일로(一帶一路)가 꼽힐 것이다. 그만큼 시진핑 시기 중국의 대외정책에서 일대일로는 유명하고 중요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대일로가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를 합친 철로와 해상로 확보, 즉 중국이 서진과 남하를 통해 뻗어나가는 교통망 정도의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중국 상하이 푸단대학(復旦大學)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창주가 최근 펴낸 『일대일로의 모든 것』(서해문집)이라는 책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3년여 동안 중국 현지 곳곳을 누비며 직접 확인한 내용들을 토대로 했기 때문. 

그는 지난 5일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일대일로는 “공간에 뿌리를 둔 세계화”라며 “구상과 전략이 혼재돼 있는 개념”임을 강조했다. “중국이 애매모호하게 얘기하는 것들을 깔끔하게 정리”한 결론이다.

그는 책에서 “중국은 중국 전 지역을 연계성으로 개발하고 묶으며 일대일로로 진화해 나가고 있다”면서 “중국은 동아시아와 유럽을 두 축으로 하는 일대일로 공간 네트워크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또한 정책구통, 시설련통, 무역창통, 자금융통, 민심상통이라는 5통을 운영 메커니즘으로 삼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일대일로의 구상과 전략을 구분해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구상은 경제적 자유주의 개념이고 전략은 중상주의적인 개념이 들어가 있다”며 “구상은 서로 같이 협력하여 파이를 키워나가자는 것이고, 세계의 공공재 제공에 중국이 공헌하겠다는 얘기고, 전략은 그 내에서 중국의 국가이익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나아가 “전략의 개념을 깨우치기 위해 3년동안 지난한 활동들을 했던 것”이라면서 “19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중국의 전반적인 전략을 살펴보면, 첫 번째는 에너지자원 확보, 두 번째는 해외시장 개척, 세 번째는 영향력의 확보”라고 요약했다.

   
▲ 이창주, 『일대일로의 모든 것』, 서해문집, 2017.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중국이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인 일대일로 ‘구상’과 중국이 내심 추구하는 일대일로 ‘전략’이 같을 수만은 없다는 진단인 셈이다. 그 중에서도 ‘영향력 확보’가 가장 민감한 영역.

그는 “공간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영향력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최근에 사례도 있었다. 첫 번째는 한국 사드 관련된 경제관계의 악화, 두 번째는 몽골에 달라이라마가 방문했을 때 몽골의 지하자원 통관절차를 고의적으로 늦춤으로써 일종의 영향력을 행사한 적도 있다”고 짚었다.

일대일로가 북한에 미치는 영향을 묻는 질문에는 “중국이 북한에게 일대일로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고 한들 북한이 걱정하는 것은 중국의 영향력 부분일 것”이라며 “대표적인 상징물로 신압록강대교가 있다”고 예시했다. 중국이 건설한 중국 단둥과 북한 신의주를 잇는 신압록강대교가 북한 측의 호응이 없어 완공된 채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역으로 그는 “한국이 주도하여 북한지역, 특히 부담이 가지 않는 라선특별시라든지 이런 지역을 중심으로 한 광역두만강개발계획(GTI) 지역 투자를 할 수 있는 국제금융협력기구를 조직할 수 있다면 중국 주도의 일대일로가 아니라 한반도의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좀 더 안정적으로 북한의 의심을 불식시켜가면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한국 주도성을 주문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중시하는 것은 GTI가 있지만 금융기구까지 같이 들어가고 6자회담과 같은 북핵문제 완화를 이야기하는, 안보와 경제지역협력체를 연동해서 조직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는 진전된 제안도 내놓았다. 물론 그만큼 난이도는 높아지고 실현가능성은 줄어들 것이다.

그는 “북방경제와 한반도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중.러 국경지역, 북.중.러 국경지역, 북.중 접경지역까지도 우리가 세밀히 살펴보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 주도의 콘소시엄을 만들어 그 지역 발전을 안정적으로 이끌어도 좋다”고 제언했다. 그가 주된 관심사를 갖고 현장답사를 여러 차례 진행한 곳이 바로 이들 접경지역이다.

구체적으로 “단둥에 위치한 축구화공장의 경우, 토지는 중국의 토지를 쓰지만 인력은 북한의 노동력을 쓰고, 자본이라든지 기술은 한국의 것이 들어간다”며 “5.24조치로 인해 북한 노동력을 쓰는 것이 불법적으로 돼 있는데, 만약 북.중 접경지역에 있는 한국기업들이 예를 들어 훈춘이나 도문이나 단동에 있는 한국기업들이 북한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고, 그들이 편한 인프라를 통해 안정적 물류네트워크를 확보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움을 준다면, 그 경제권에 대한 활성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과 북한 김정일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해 “앞으로도 힘들 거라 본다”면서도 “송유 자체를 끊어버리거나 무역제재를 본격화해서 아예 무역 통관을 다 닫아버리는 것은 중국 입장에서도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한 “중국이 북한에 행사할 수 있는 힘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인터뷰 하루 전날인 지난 4일, 북한이 대륙간탄두미사일(ICBM)을 시험발사한데 대해서는 “중국의 주변지역, 특히 베이징과도 매우 가까운 지역에서 이러한 불안정적 요소가 발생했다는 것, 두 번째는 북한이 중국을 제외하고 혹시 미국과 협상테이블에 앉고 싶어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 중국의 입장을 곤란케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중 간에 뜨거운 감자인 사드 문제에 대해서는 “갑작스럽게 결정된 부분도 있고, 중국은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인데 대화의 과정, 설득의 과정이 생략됨으로써 피해도 있었다고 본다”며 “현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 교민들 같은 경우에는... 정신적인 붕괴 수준을 넘어서 물질적 붕괴 수준도 겪고 있다. 일부 파산까지 가고 있는 사업체들도 있고, 물론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국인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많이 어두워졌”다고 전했다.

또한 “사드 이후에 중국 내 분위기는 모든 사람들이 한국을 좋아했다가 매니아 층으로 축소되는 과정이 있었다”며 “한국이 소프트파워 강국으로서 그 공간플랫폼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그런데 최근 그 같은 이미지가 많이 흔들리면서 아쉬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오해를 불식시켜 가면서 한국의 상황을 잘 인식시켜주고, 우리도 양보할 수 있다는 협상하자는 태도로 상대의 체면을 살려주는 전략을 취하면서 대북문제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게” 필요하다면서 “제일 시급한 문제는 지도부 간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민간교류를 활용할 수 있다고 하면 사드 문제도 조기에 해결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중국의 개혁개방 시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포석이 닦여져 나와서 동수상응(動須相應)의 전략을 통해서 네트워크를 닦아가면서 일대일로 전략으로 종합됐다”고 말했고, 책에서는 일대일로의 정립 과정을 3단계에 걸쳐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또한 시진핑이나 리커창 외에도 일대일로영도소조 조장을 맡고 있는 장가오리 부총리와 ‘중난하이(中南海) 최고 브레인’ 왕후닝 일대일로영도소조 부조장 등의 역할도 소개하고 있다.

일대일로를 국내, 유라시아, 글로벌 수준의 일체양익(一體兩翼)으로 파악하는가 하면, “유럽의 실크로드 전략, 미국의 실크로드 전략, 일본의 실크로드 전략, 그리고 러시아나 인도의 실크로드 전략까지 역사적으로 망라”하기도 했다.

그는 “원래 초고는 이번 책의 세 배 정도 두껍고 그림과 삽화, 그래프도 많이 들어간 건데 그래프와 수치는 다 빠졌다. 대중서적으로서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조정했다”고 밝히고 “일대일로 책을 더 보강해서 완성해 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5일 오전 11시 서울 시청 인근 한 커피숍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일대일로, ‘공간에 뿌리를 둔 세계화’

   
▲ 그는 일대일로는 “공간에 뿌리를 둔 세계화”라며 “구상과 전략이 혼재돼 있는 개념”임을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일대일로의 모든 것』 출간을 축하한다. 이 책이 나오게 된 계기와 과정을 소개해 달라.

■ 이창주 : 2013년 9월과 10월에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라는 두 가지가 시진핑 주석에 의해 정식으로 국제사회에 제안됐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14년부터 중국 내에서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당시 내가 KMI(한국해양수산개발원) 중국연구센터 현지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내 첫 번째 책이 나왔다. 『변방이 중심이 되는 동북아 신 네트워크』라는 책이다.

그 책과 이 책이 맥이 닿아있다. 첫 번째 책 역시 ‘중국이 어떤 식으로 세계전략을 펼치고 어떻게 동해로 진출해 나가느냐, 그래서 한국은 어떻게 이를 기회로 삼아 동북아네트워크를 만들거냐’가 주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서 2014년에 중국의 많은 지역들에 출장을 다니게 됐다. 예전에는 자비를 들여 주요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개인적으로 주민들과 대화하면서 다녔다면, 출장은 주요거점지역들 중심으로 물류회사, 혹은 인프라 관련 주요 공사, 그리고 국가기관들을 방문해서 내가 인터뷰도 해보고, 통역도 하고, 보고서도 썼다. 그런 식으로 출장지원을 하게 됐다.

2013년에는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말 자체가 형성돼 있지 않고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라는, ‘실크로드’라는 말이 강조돼 있을 때였다. 내가 출장지원 다니면서 중국어로 대화 하니까 ‘실크로드’라는 말을 자꾸 듣게 됐다. 그래서 ‘한국 역시 실크로드 건설에 많은 참여를 했으면 좋겠다’는 중국 측의 제안도 내가 통역을 하게 됐던 것이다.

특히 출장지원 때는 언론사, 한국 국가기관, 연구기관의 출장지원을 다녔기 때문에 그들의 질문사항에 더해서 나의 궁금한 점을 동시에 질문할 수 있어서 궁금증들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대일로라는 말은 2014년부터 중국 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신조어로서 등장하게 됐다. 그때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내가 외교 전공자인데 물류분야에 통역지역, 출장지원을 하다 보니까 외교와 물류의 관점을 동시에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하게 됐다.

그 이후로도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수많은 자료들을 취합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 알게 됐던 인맥들을 총동원했고, 그때의 노하우를 살려서 궁금한 지역을 직접 가서 현지상황을 보고 조사도 했다. 사진은 내가 다 촬영한 것들이다.

블로그에 현장사진들을 페이지수 매겨서 칼라본으로 다 올려놓았다. 책에서는 삭제된 그림과 삽화들도 많이 있다. 인터넷으로 같이 보면 이해하기 편하게 만들어 놨다.

원래 초고는 이번 책의 세 배 정도 두껍고 그림과 삽화, 그래프도 많이 들어간 건데 그래프와 수치는 다 빠졌다. 대중서적으로서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조정했다.

□ 단행본으로 완성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책으로 엮어내는데 어려움이 없었나?

■ 엄청 많았다.

일단, 일대일로에서 ‘일대’가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의미하고, ‘일로’가 ‘21세기 해상실크로드’를 이야기하는 거다. 벨트를 대(帶)라고 이야기하고 로드를 로(路)라고 이야기한 거다.

그런데 이 명칭에 대한 편견을 벗겨내는 작업이 어려웠다. 무슨 말이냐면, 일대일로에 편견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진하는 거다. 혹은 남하하는 거다’라는 편견이 있는데, 사실은 이게 잘못된 것이다.

서진, 남하는 하나의 스텝일 뿐이고, 중국이 사통팔달한 그야말로 모든 길은 중국으로 통하는 그러한 물류네트워크, 공간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주안점이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서진이나 남하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나 스스로 깨우치기까지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그리고 일대일로에 관련된 모든 용어들을 하나하나 잡아가는데 주안점을 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일대일로 자체가 모호한 개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개념들을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용어의 개념, 배경, 출처, 이런 것들을 잡아가는 과정에 시간이 많이 할애됐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일대일로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철로를 이야기하는 거다’라고 오해하는 분들도 있고, 혹은 중국의 18개 성시(省市)만 포함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도 많다.

그런데 내가 직접 중국에서 만난 전문가들, 유명 교수들이 아니라 정말 실무진, 혹은 현장전문가들이다. 통계를 관리하는 분들, 인프라를 관리하는 분들, 예를 들면 TCR(중국횡단철도), TMGR(몽골종단철도) 관계자들, 그리고 항만공사 관계자들을 방문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중국 중앙에서 물류 전공자들, 외교 전공자들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를 취합했다.

그래도 들은 내용들은 그대로 이 책에 실은 것이 아니라 다시 관련된 논문이나 신문, 중국정부 발표자료, 이런 것들을 검색해서 근거로 확보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뿐만 아니라 ADB(아시아개발은행),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자료라든지, 전체 맥을 이해하기 위해서 세계경제사라든지 이런 것들까지도 다 역으로 추적하는 과정에서 보게 됐다.

그 과정에서 일대일로라는 것이 구상이자 전략이라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동시에 매우 종합적인 영역이 엮여서 만들어진 말 그대로 중국의 국가 전략이자, 중국이 국제사회 제안한 구상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됐다.

이 출판 준비 과정은 지난하게 스스로를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스스로 갖고 있던 편견들을 깨는 과정이 제일 힘들었다.

시진핑 “영향력 추구하지 않겠다”

   
▲ 그는 중국 각지와 북.중.러 접경 등을 답사하며 일대일로의 현실태를 파악했다. 상하이 양산항을 찾은 저자. [사진제공 - 이창주]

□ 일대일로를 공간적 네트워크로 해석하기도 하고 중국의 구상이자 전략으로 정리했는데, 원래 이렇게 제출됐는지, 또 중국에서도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 좋은 질문이다. 일대일로가 무엇인지 한 문장으로 줄여서 말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예전부터 ‘공간을 베이스로 한 자유무역지대 건설’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의미지만 ‘공간에 뿌리를 둔 세계화’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기존에는 세계화가 없었냐. 당연히 있었지만 그때는 금융이나 자본, 투자 중심의 세계화였다고 한다면 지금은 서로의 공간을 연결하면서 물류의 효율성을 높이고, 그로 인해 지역경제공동체를 형성해서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게 중국의 주장이다.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화를 강조하는 추세인데, 그래서 공간에 뿌리를 둔 세계화 전략이라고 보고 있는 거다. 그런데 일대일로 구상 부분은 내가 해석하는 게 아니라 중국에서도 통용되는 이야기다. 중국이 애매모호하게 얘기하는 것들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제시해 본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중국이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까지 이야기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일대일로 책이지만 유럽의 실크로드 전략, 미국의 실크로드 전략, 일본의 실크로드 전략, 그리고 러시아나 인도의 실크로드 전략까지 역사적으로 망라해서 쓴 것이다.

이 책은 1,2,3부로 구성돼 있는데 2부 ‘일대일로의 탄생비화’ 부분에서 그 내용을 다뤘다. 사실 미국이 1999년, 2006년, 2011년 실크로드 전략법안을 내서 중국과 러시아를 봉쇄하는 듯한 전략을 개시한 바 있고, 여기에 연계해서 아시아 회귀 전략이 들어갔던 것이다.

거기에 미국을 축으로 TT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와 TTIP(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을 통해 환태평양과 환대서양 지역에 중국이 아닌 미국을 중심으로 한 메가급 자유무역지대를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오바마 시기까지의 이야기다. 트럼프 시기에는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시진핑 주석이 일대일로를 이야기하면서 봉쇄전략을 무너뜨리고 중국이 경제적인 것을 베풀면서, 그 지역에 인프라를 건설하고 지역공동체를 만들고자 노력하겠다고 일대일로 공동건설을 제시하게 된 거다.

이 이야기를 다루면서 또 하나 발견한 것이 있다. 일대일로는 시진핑 주석이 제시한 거지만 중국의 개혁개방 시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포석이 닦여져 나와서 동수상응(動須相應 -바둑에서 돌을 움직일 때 주위의 돌과 호응하도록 한다는 뜻)의 전략을 통해서 네트워크를 닦아가면서 일대일로 전략으로 종합됐다.

지금 설명한 건 전략이다. 구상과 전략의 차이점은 구상은 이니셔티브(initiative)고 전략은 스트레티지(strategy)다. 구상은 경제적 자유주의 개념이고 전략은 중상주의적인 개념이 들어가 있다. 구상은 서로 같이 협력하여 파이를 키워나가자는 것이고, 세계의 공공재 제공에 중국이 공헌하겠다는 얘기고, 전략은 그 내에서 중국의 국가이익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시진핑 주석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구상에 대한 내용이다. 국제사회에 공개하지 않으면서,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것은 전략적인 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대일로는 구상과 전략이 혼재돼 있는 개념이라고 본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중국이 원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일대일로 구상이고, 내가 여기에 쓰고 있는 내용은 구상과 함께 전략의 개념이 같이 들어가 있다. 전략의 개념을 깨우치기 위해 3년동안 지난한 활동들을 했던 것이다.

□ 구상은 대외적으로 많이 천명된 거고, 그렇다면 전략의 핵심은 뭐라고 간파하나?

■ 19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중국의 전반적인 전략을 살펴보면, 첫 번째는 에너지자원 확보, 두 번째는 해외시장 개척, 세 번째는 영향력의 확보라고 생각한다.

이 중에서 제일 조심하는 게 영향력이라는 부분이다. 시진핑 주석은 절대 패권을 추구하지 않고 중국식 모델, 예를 들면 ‘베이징 컨센서스’를 수출하지 않고 영향력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나는 공간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영향력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최근에 사례도 있었다. 첫 번째는 한국 사드 관련된 경제관계의 악화, 두 번째는 몽골에 달라이라마가 방문했을 때 몽골의 지하자원 통관절차를 고의적으로 늦춤으로써 일종의 영향력을 행사한 적도 있다.

물론 중국의 핵심이익을 침해한다고 중국이 판단해 그런 조치를 취할 수는 있는데, 주변국가들 입장에서는 일종의 영향력 행사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 에너지자원을 매개로 하지만 주로 외부로 뻗어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 중국은 1993년부터 자체의 원유 생산량을 소비량이 초월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부터 중국의 경제성장력과 중국의 원유 소비량은 정비례해서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이 추구했던 전략이 쩌우추취(走出去) 해외진출 전략이다. 해외로 나간다는 전략이다. 이 주요한 결과물이 ‘앙골라 모델’과 ‘진주목걸이 전략’이다. 그것이 지금은 일대일로까지 이어진다.

중국이 주로 채택했던 방식은 해외 자원이 나오는 지역에 투자를 하고, 그쪽 지역의 인프라 건설시장을 확보하고, 상품시장을 확보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원유라든지 천연가스를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중국까지 운송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한 세트로 전략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아프리카 뿐 아니라 이란을 포함한 중동지역, 중앙아시아지역, 당연히 카스피해지역까지도 범위 내에 들어가 있었고, 동북지역 위쪽에 위치한 바이칼호부터 연해주까지 이어지는 시베리아 라인도 전략범위 내에 포함됐던 거다.

이제는 그런 자원확보도 중요하지만 그 범위를 뛰어넘어서 다양하고 복합적인 인프라를 건설해서 유라시아대륙과 아프리카지역을 망라한 공간 네트워크를 서로 연결해서 윈윈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가자는 것이다.

중국이 정책구통(政策溝通)이라 하는 것인데, 지역협력 거버넌스를 함께 활용하여 중국 위협론을 불식시키고 서로 발전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가겠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보면 유럽, 미국, 일본이 기존에 러시아와 중국을 제외하고 만들었던 네트워크에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네트워크 개념으로써 일대일로가 들어감으로써 주요 경제체 사이에 위치한 국가들은 자연스럽게 힘의 균형을 성취할 수 있게 된 시대가 도래했다고 나는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그리고 아세안, 아프리카, 중동까지 포함한다고 보면, 그쪽 지역은 일대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 제시한 일대일로, 러시아가 이야기하고 있는 유라시아경제공동체, 그리고 트라세카(TRACECA, Transport Corridor Europe-Caucasus-Asia)란 이름을 썼던 유럽의 실크로드전략도 있다. 그 다음에 미국이 제시하고 있는 ‘아시아 회귀 전략’ 플러스 ‘실크로드 전략 법안’이 있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다 깨지고 있지만.

주요 경제체 사이에 위치한 국가들은 균형전략을 적절히 취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국가가 인도, 그 다음이 아세안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에너지 자원, 해외시장 개척에 대한 전략적인, 중상주의적인, 중국의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영향력 부분은 아직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향후 중국이 어떻게 주변국가들에 신뢰를 주느냐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북한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대중국, 대러 경제의존도”

   
▲ "중국이 사통팔달한 그야말로 모든 길은 중국으로 통하는 그러한 물류네트워크, 공간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주안점이 있는 것이다." [자료제공 - 이창주]

□ 중국의 일대일로 추진이 한반도와 어떤 연관이 있고, 남북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가장 중요할 텐데, 어떻게 보나?

■ 일단 가장 고민되는 주제다. 일대일로의 핵심은 결국 중국 주도의 자금으로 주변지역 인프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실크로드기금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아시아지역에는 AIIB뿐만 아니라 ADB(아시아개발은행)도 있고, 각 지역협력체, 혹은 지역개발은행이 복합적으로 투자할 수도 있다.

현재 기존의 고립정책으로 혹은 ‘전략적 인내’ 전략으로 북한을 고립을 시켜왔으나 중국과 러시아에 의한 북한경제와의 교류는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북한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대중국, 대러 경제의존도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일 것이다.

중국이 북한에게 일대일로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고 한들 북한이 걱정하는 것은 중국의 영향력 부분일 것이다. 물론 중국이 아무리 아니라고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한 걱정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이 자기 자금으로 북한과 인프라를 연결하고, 그걸 통해서 중국이 민심상통(民心相通)이라고 이야기하는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겠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북한은 의심을 거두지는 않을 것이다.

대표적인 상징물로 신압록강대교가 있다. 나 역시 신압록강대교가 잘 될 걸로 믿었지만 현재도 개통되지 못한 상황으로 방치돼 있다. 이는 어찌보면 북한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공간에 굳어져 있는 것 아닌가 판단해 본다. 물론 ‘세컨더리 보이콧’이라는 조치에 대한 걱정도 존재하는 게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주도하여 북한지역, 특히 부담이 가지 않는 라선특별시라든지 이런 지역을 중심으로 한 광역두만강개발계획 지역 투자를 할 수 있는 국제금융협력기구를 조직할 수 있다면 중국 주도의 일대일로가 아니라 한반도의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좀 더 안정적으로 북한의 의심을 불식시켜가면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중시하는 것은 GTI(광역두만강개발계획, Greater Tumen Initiative)가 있지만 금융기구까지 같이 들어가고 6자회담과 같은 북핵문제 완화를 이야기하는, 안보와 경제지역협력체를 연동해서 종합적으로 레짐을 조직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현재는 일대일로라는 이름으로 동북3성 지역, 시베리아 연해주 지역, 그리고 환동해권까지도 중국이 앞으로 더 많은 투자와, 인프라 건설, 민간교류를 확대시켜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에서 북한을 하나의 공백으로 두지 말고 서로 안정적으로 연계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는 한국과 일본 역시도 환동해 경제발전과 더 나아가 북방경제 연결에 있어서 중심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 역할에 있어서의 거버넌스로써의 6자회담 GTI 혹은 관련된 금융기구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핵 동결부터 시작하는 조치로 갈 수 있다는 북한의 입장,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한미군사훈련도 같이 연동해서 군축을 논의할 수 부분으로까지 갈 수 있다고 하면 미국 역시 설득의 여지는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생각을 해본다.

□ 실제로 북.중 간에 철도.도로 연결이라든지 물류센터 건설, 국경지대 특구개발 같은 것이 떠오르는데, 생각보다 진전이 안 되는 것 같다. 이유가 뭐고 전망은 어떤가?

■ 최근 흑룡강성도 몇 군데 다녀오고 개발계획도 살펴보고 왔다.

경제특구를 논의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투자의 안정성이 보장되느냐. 그리고 그만한 매력이 있느냐. 물류환경은 어떠한가’ 등이 다 수반돼야 한다.

그런데 중국의 일대일로에서도 핵심단어 중의 하나는 가치사슬이다. 생산요소의 국제화이다. 예를 들어 단둥에 위치한 축구화공장의 경우, 토지는 중국의 토지를 쓰지만 인력은 북한의 노동력을 쓰고, 자본이라든지 기술은 한국의 것이 들어간다. 그것 역시 어떻게 보면 이 지역 내에 국제화된 공장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5.24조치로 인해 북한 노동력을 쓰는 것이 불법적으로 돼 있는데, 만약 북.중 접경지역에 있는 한국기업들이 예를 들어 훈춘이나 도문이나 단동에 있는 한국기업들이 북한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고, 그들이 편한 인프라를 통해 안정적 물류네트워크를 확보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움을 준다면, 그 경제권에 대한 활성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예를 들어 훈춘만 해도, 그 지역에 있는 쌍방울이나 훈춘포스코물류단지가 북한의 노동력을 쓸 수 있다면 당연히 가격경쟁력이 발생할 것이다. 동시에 훈춘에서 대련으로 물류라인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근처에 있는 라진항이라든지 혹은 자루비노항으로 가는데 통관절차까지 간소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당연히 부산항을 모항으로 삼는 물류네트워크도 우리가 새롭게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중국은 북.중 접경지역 뿐만 아니라 중.러 접경지역, 북.중.러 접경지역, 중.몽 접경지역까지 복합적으로 인프라를 건설해서 연계하려는 다양한 움직임이 존재한다.

특히 물류라는 게 상품교류뿐만 아니라 관광을 포함한 민간교류까지 함께 들어가는 개념이기 때문에 만약에 한국이 그쪽 지역에 대한 건설에 참여할 수 있다면 더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그릴 수 있고 중국과 러시아 역시 매우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푸위안과 라선, 북.중.러 접경지역 주목

   
▲ 6월 9일 답사한 러시아 접경지역에 위치한 중국 푸위안 심수항. [사진제공 - 이창주]

특히 북방경제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우리가 중국과 러시아에 접근하기는 상대적으로 편하지만 북한은 어려운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서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국경을 끼고 있는 지역에 대한 투자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최근 다녀온 흑룡강성 푸위안(抚远)이 있다. 러시아 연해주의 하바로프스키 건너편에 있는 도시로서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만나는 지역이다.

지난달 중순에 다녀온 이유는 중국 동북지역 일대일로 지역이어서 현장답사를 진행했다. 가봤더니 일단 일대일로 건설을 위한 인프라가 많이 형성돼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기차역, 공항, 그리고 수심이 깊은 심수항이 있다. 사할린까지 빠지는 흑룡강(러시아 아무르강)이 존재하는 곳이다.

헤이시아쯔다오(黑瞎子岛)라는 섬을 중심으로 중국 측 다리와 러시아 측 다리가 연결돼 있어 이 지역 개발도 본격화될 것으로 현지매체에서도 다루고 있었다. 하바로프스키는 연해주에서 가장 큰, 인구가 많은 도시다.

하바로프스키에서 중국 흑룡강성 성도인 하얼빈과 직선으로 연결하려면, 하얼빈-자무스(가목사)-푸위안-하바로프스키로 연결돼야 한다. 현재 하얼빈에서 자무스까지 고속철도가 건설 중이다. 현지에서는 궁극적으로 푸위안을 거쳐 하바로프스키까지 고속철도가 연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푸위안이 매우 작은 도시임에도 하얼빈까지 고속도로가 이미 연결돼 있다. 그리고 기차역에서 심수항까지 철로가 직접 연결돼 있어서 이걸 철송(鐵送)이라고 한다. 해륙복합운송체제가 이미 형성돼 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중국이 북방경제에서 대련~하얼빈 라인을 축으로 만저우리와 연결되는 TMR(만주종단철도) 라인, 모하(漠河), 헤이허(黑河), 그 밑으로 중국 동쪽 끝에 있는 푸위안, 그 밑에 수이펀하(绥芬河), 둥닝(东宁), 그리고 훈춘까지 이어지는 중.러 접경지역을 연결하기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계획되고 진행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북방경제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동북3성과 연해주 중심으로 우리는 바라보고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북방경제와 한반도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중.러 국경지역, 북.중.러 국경지역, 북.중 접경지역까지도 우리가 세밀히 살펴보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러시아 하바로프스키나 블라디보스톡 지역에 대한 투자를 진행한다고 하면 중국과 러시아가 각각 투자가 매우 불안정한 지역이고, 그쪽 거버넌스가 안정적으로 진행될지 의구심이 있으므로 국경지역에 대한 투자를 함께 진행함으로써 중.러 양국의 장점을 동시에 활용하며 그 안정성을 꾀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하바로프스키에 공간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 건너편에 있는 중국 푸위안에 연동해서 발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러시아에 위기가 있을 때 중국 측을 활용하고, 중국에 위기가 있을 때 러시아 측을 활용할 수 있는 국경지대의 공단을 한국 주도로 건설해도 괜찮지 않겠나.

물론 북.중.러 접경지역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라선특별시에서도 두만강동이라든지, 북.중.러 접경지역에 위치한 두만강역 인근에 있는 원정리라든지 이쪽 지역에 공단을 세운다거나 혹은 물류단지를 세운다거나 그리고 라진항 근처에 물류단지를 세움으로써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혜택도 많이 있을 것이다.

라선특별시 자체적으로 전기공급이 안정적이면 상관없는데 그럴 수 없는 부분이 있으므로 우리가 훈춘 발전소 지역의 전기를 원정리 물류단지로 끌어와서 활용한다거나 혹은 러시아 측의 천연가스 같은 자원이라든지 전력을 끌어와서 라진선봉지역에 위치한 우리 공단을, 혹은 국제공단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이런 식으로 북한의 노동력이라든지 자원이라든지 전력이라든지 혹은 우리가 역으로 북방경제 혹은 환동해경제권으로 나가는 그러한 시장진출 부분에 있어서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 혹은 전략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그쪽 부분에 대한 주도적 진출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AIIB, ADB에도 한국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 주도해 NEADB(동북아개발은행)을 설립한다거나 해서 AIIB와 ADB를 동시에 묶을 수 있는 협력의 금융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한국 주도의 콘소시엄을 만들어 그 지역 발전을 안정적으로 이끌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공간 네트워크와 현재 안보문제를 엮을 수 있는 종합 시스템을 한국이 가져가면 비전이 있지 않을까 고민해 본다.

“북한이 중국 제외하고 미국과 협상테이블에?”

   
▲ 북.중.러 접경지역 개발계획. [사진제공 - 이창주]

□ 시진핑 주석 집권 2기가 예정돼 있는데, 북.중 정상회담은 언제쯤 가능할까?

■ 앞으로도 힘들 거라 본다.

시진핑 주석의 연임은 당연히 결정된 것인데, 그 연임 과정에서 어떻게 안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느냐, 그리고 또 연임이 5년에서 그칠지 혹은 개헌을 통해 더 연장을 할 것인지 논란이 중국 국내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 자체 내에 그런 안정적인 연임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는 대북관계에 더 주안점을 둘 확률이 높다. 지금 이미 그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과의 신형대국관계를 주장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주변 안정성을 확보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다. 연임 과정에서, 특히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 문화를 감안했을 때 만약에 주변에 계속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면 안 되기 때문에 중국에서 그 문제를 조심히 다루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감안해보고 현재 제재국면을 더 강화시키려하고 있는 움직임 속에서 중국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다는 것은 좀 어렵지 않겠나 본다.

□ 최근에 미국이 단둥은행에 대해 ‘사실상의 세컨더리 보이콧’이라는 제재조치를 취했는데 중국 측 반응은?

■ 중국 입장에서는, 북.중 관계는 조심히 접근한다. 예를 들어서 만약 중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아예 제재국면으로 들어가서 봉쇄를 한다고 하면 당연히 동북지역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되고,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국내 균형발전전략이라든지 일대일로전략이라든지 이 부분에 있어서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국은 북핵 실험을 못하게끔, 특히 트럼프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그 부분이 나오지 않았나. 트럼프 대통령은 ‘최대의 압박과 관여(Maxium pressure and engagement)’라고 이야기했는데 미국이 북한에 직접 보여주는 모습은 결국은 제재밖에 없었던 것 같다.

결국 아웃소싱을 중국에 맡겼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왕이 외교부장도 이야기하듯이 투 트랙으로 가고 있다. ‘쌍잠정’이라고 핵실험과 한미연합훈련을 같이 잠정적으로 줄여나가는 방법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특히 중.러 공동성명에도 그 부분이 포함된 걸로 알고 있다.

중국의 입장은 북한을 붕괴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국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게 북.중 간의 정상회담이라든지 극적인 모습을 연출하기에는 중국 국내정치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지방간의 교류는 계속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송유관에 송유하는 문제라든지, 무역, 자원은 당연히 못 나오겠지만 농산품이 들어가거나 이런 건 당연히 진행될 것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공동개발 부분도 제한적이기는 하겠지만 일부 건설이 계속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북.중.러 접경지대의 관광단지도 이미 북한 측 유람선 부두가 상당부분 완성돼 있는 걸 확인할 수 있고, 도문시에 새로 건설되고 있는 교량도 마찬가지다. 경제협력 부분이 아예 끊기거나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한다.

□ 어제 북한이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했고, 우연히 중.러 정상회담도 있었다. 북한이 ICBM을 발사한데 대한 중국의 입장이나 반응은?

■ 북한의 그런 모습에 좋아할 수 없다. 격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 외교부가 항상 하는 얘기가 냉정하고 투오샨(妥善), 즉 타당하게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번 ICBM도 마찬가지지만 지난 5월 14일 베이징에서 열렸던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 개막 당일 새벽에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건 정말 중국 입장에서는 체면 구긴 것이라 할 수 있다. 핵실험은 아니었지만 중국이 일대일로를 국제사회에 더 알리기 위한 플랫폼을 준비했는데 북한이 프레임을 그쪽으로 가져가 버려 중국 당국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게 북.중 교류에 있어서도 일부 영향을 잠시나마 줬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현재 ICBM 발사 부분에 있어서도 중국이 당혹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미국의 독립기념일 그리고 미국을 염두에 둔 듯한 고각, 발사거리로 시험발사해 ICBM을 성공했다고 발표한 것은 결국은 북한이 미국을 협상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두 가지가 걸린다. 중국의 주변지역, 특히 베이징과도 매우 가까운 지역에서 이러한 불안정적 요소가 발생했다는 것, 두 번째는 북한이 중국을 제외하고 혹시 미국과 협상테이블에 앉고 싶어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곤란한 부분이 발생했다고 본다.

특히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는데 안보적인 부분을 다 제외한다 하더라도 당장 중국 주식에 영향을 준다. 투자환경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는 결코 기뻐할 상황이 아니고 당연히 곤란스럽고 곤혹스러울 거다.

특히 한.미 정상회담 결과가 나왔고 중.러 정상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발표가 나왔다는 것은 협상테이블에서 그 화제가 당연히 논의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본다.

□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좋지만은 않은 상황인데, 중국의 압박과 제재의 수위와 강도, 영향력 정도를 어떻게 평가하나?

■ 중국의 힘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국내 분석 내용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중국이 북한에 행사할 수 있는 힘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송유관의 송유량을 조절한다든가 그런 조치가 최근에 있었다는 것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송유 자체를 끊어버리거나 무역제재를 본격화해서 아예 무역 통관을 다 닫아버리는 것은 중국 입장에서도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조치를 취한다면 북한은 핵실험을 다시 해서 중국 국내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고, 중국이 갑자기 북한을 완전 고립시켜서 중국이 북한의 불안정성을 초래하게끔 만드는 것은 중국 입장에서도 리스크가 있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 미치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현재 바라보고 있는 수준의 범주 내에서 왕복하다 끝날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한국이 어떤 해결 방법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한국과 중국과 러시아가 어떻게 협력하느냐 이야기일 수도 있고,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직접 풀어나가느냐 문제도 있을 수 있다.

한.미.일 간에는, 한.일관계는 차치해두더라도 한.미관계는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방문해 정상회담을 통해 신뢰를 어느 정도 구축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결국 사드국면에서 한국,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풀려갈 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한.중 간에 사드라는 현안이 걸려있고, 조만간 정상회담도 있다. 사드 문제와 이번 ICBM 발사를 가지고 한.중 정상이 마주하면 어떤 결과가 예상되나?

■ 사실은 군비경쟁으로 가느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레짐을 형성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협상력을 갖기 위해 그만큼의 압박의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결국 군축으로 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1991년 우리가 이미 도출했던 한반도비핵화협정이라든지, 이게 나온 과정에서도 서로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양보하면서 진행했다. 이런 지혜를 다시 한 번 발휘해 국제공조 속에 한국이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전 정권이 한.중 지도부 간의 신뢰를 많이 망가뜨린 부분이 있다. 중국이 사드배치에 대해 한국 전 정부에 여러 차례 물어봤을 때 ‘그럴 리 없다’, 혹은 ‘3NO’라고 이야기해 왔는데 갑작스럽게 결정된 부분도 있고, 중국은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인데 대화의 과정, 설득의 과정이 생략됨으로써 피해도 있었다고 본다.

실제로 내가 중국측 인사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새로운 대통령이 나왔으니까 한.중 정상회담이라든지 본격 진행돼야 하지 않겠느냐 말하면서도 ‘그렇게 만나고 나서 대통령이 한국으로 돌아가서 사드배치 결정을 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이런 식의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양한 채널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오해를 불식시켜 가면서 한국의 상황을 잘 인식시켜주고, 우리도 양보할 수 있고 협상하자는 태도로 상대의 체면을 살려주는 전략을 취하면서 대북문제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게 현안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 자주성도 중요한데 더 중요한 건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한국의 주권 사항이니까 중국은 아예 여기에 개입하지 말라’는 식의 대화 보다는 ‘중국이 어려워하는 부분이나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준비가 돼 있다 거기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해 보자’, 한국이 취할 입장은 이거다.

인도가 일대일로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고?

   
▲ 란저우에서 촬영한 중국 고속기차. [사진제공 - 이창주]

□ 베트남이나 태국 등 인접한 국가들의 중국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

■ 사실은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복합적인 감정이 다 있는 것 같다. 어찌됐건 중국이 거대시장이고, 최대 투자원임에는 분명한 사실이고.

최근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것 중에 태국과 말레이시아, 싱가폴을 종단하는 고속철도 라인 건설이 있는데, 태국을 횡단하는 고속철도는 일본이 수주를 받게 됐다. 이게 대표적인 케이스다.

아세안 지역의 경우 그야말로 힘의 균형전략을 취하면서 최대한의 이익을 창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한 세력, 한 국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면서 그쪽지역의 허브가 될 수 있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본다.

중국은 달콤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면 남중국해 문제라든지 아세안 각 국가들과 첨예한 갈등 문제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아세안 자체 내에서도 10개 모든 국가가 공동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또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가 또 있을 수 있다.

책 내용에도 나오지만 아세안이 사실 연계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영어로는 커넥터비티(connectivity)고 중국에서는 호련호통(互聯互通)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아시아개발은행에서 이야기한 연계성을 가장 빨리 받아들인 지역이 아세안이었다. 또 시진핑이 AIIB 설립을 처음 제안했던 곳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였다. 자카르타는 아세안의 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결국은 AIIB라든지 ADB라든지 협력개발 프로젝트가 동시에 들어가는 곳 중에 한 곳이 아세안이다. 그리고 APEC하고 인도양 쪽으로의 진출 부분에 있어서도 아세안의 역할이 지대하기 때문에 중국에게 있어서는 아세안이 중요한 전략지이기도하다. 아세안 지역은 힘의 균형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대일로를 배척할 필요는 없는 거다.

인도가 일대일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국제여론에서 뜨거운 이슈이기도 하다. 중국이 매우 중시해서 인프라를 건설하고 투자하고 있는 국가가 파키스탄인데, 카슈미르 지역이 파키스탄과 인도와의 치열한 영토분쟁지역이기 때문에 인도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중국은 신장 위구르에서 국경을 지나서 카슈미르를 지나서 파키스탄을 종단해 과다르항까지 연결하는 건설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중국이 원유운송이 가장 많은 호르무즈 해역과 단거리로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루트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이나 국제여론이 인도가 일대일로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는 듯한 여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본다. 물론 일대일로 건설이 매우 민감한 문제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고 보지만 일대일로 구상이 깨진다고 보지는 않고 역시 ‘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세계화’는 꾸준히 진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대일로 구상은 ‘공간 베이스 세계화’이고, 일대일로 전략은 ‘중국 특색의 마셜플랜’이다. 일대일로 전략은 분명 중국 주도로 하는 것이지만, 일대일로 구상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대일로 전략 부분에 있어 제동이 걸렸다면 그 분석을 인정하겠지만 일대일로 구상 자체가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발언이라 생각한다.

일대일로 구상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 심지어 미국, 남미국가들까지 다 포함된다. 어떤 국가의 주도 자본에 의해서 투자가 되든 공간 개발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 호련호통 부분이기 때문에, 인도와의 갈등 때문에 일대일로 구상이 깨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올해 6월 9일 SCO(상하이협력기구)에 파키스탄과 인도가 동시에 가입했다.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6개 국가에서 다시 파키스탄과 인도가 포함되면서 8개 국가가 정식회원 국가가 됐다.

그런데 상하이협력기구도 이러한 호련호통 연계성 개념을 추진하자고 서로 성명을 발표한 적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을 포함한 중국, 러시아 그리고 그 사이에 들어있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까지 서로 인프라를 건설해서 경제공동체를 만들자는데 큰 방향은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결과물이 러시아 발트해에서 카스피해를 지나 이란을 거쳐 인도 뭄바이항과 싱가포르까지 연결하는 남북경제회랑이라는 플랜이 있다. 유엔 ESCAP(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라는 기관에서 이미 연구과제로 발표한 바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게 본격적으로 건설될 거라는 뉴스가 나오니까 서양 매체에서는 러시아와 인도가 일대일로를 제끼고 자기들만의 실크로드 전략을 전개하려 한다고 이야기 나온 바 있는데 이 역시도 편견 가지고 보고 있기 때문에 나온 내용이라고 본다. 오히려 중국이 제시한 일대일로 구상에서는, 그 역시도 일대일로 구상을 이루는 중요한 파트라고 보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중국의 전략 부분에서는 배제된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구상과 전략을 구분해서 바라보는 게 매우 중요하다.

또한 사실 미국의 전체전략에서 중요한 허브는 인도였다. 그러나 현재는 오바마의 전략이 대부분 와해되고 미국의 ‘아메리카 퍼스트’ 전략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인도가 좀 더 다원화된 경제연결 구도를 가져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종합적인 것을 봤을 때 중국과 인도, 아세안, 러시아, 일본, 유럽, 심지어 미국까지 전체가 다 참여하고 있는 이러한 공간 중심 세계화는 일대일로 구상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일본은 아세안과 인도,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개발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움직임을 뉴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이 전체적인 네트워크에 있어서 일대일로 전략과 연결했을 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을 자신감도 어느 정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대일로 구상 속에 일본이 들어가서 일대일로 전략과 경쟁하는 구도로 향후 움직임이 확보될 것이라고 본다.

이런 전체 전략과 구상 속에서 중앙아시아,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까지 이르는 전 지역이 연계성, 그러니까 공간에 뿌리를 둔 세계화를 중심으로 힘의 균형이 발생할 것이라고 나는 전망해 본다.

한중 사드 문제, 시급한 문제는 지도부 간의 신뢰 회복

   
▲ 롄윈강(連雲港) 컨테이너항만 중국횡단철도(TCR)기점. [사진제공 - 이창주]

□ 사드 문제로 인해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의 현지 체감 정도는 어떤가?

■ 현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 교민들 같은 경우에는 한국 자체 내에서도 문제가 있지만, 정신적인 붕괴 수준을 넘어서 물질적 붕괴 수준도 겪고 있다. 일부 파산까지 가고 있는 사업체들도 있고, 물론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국인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많이 어두워졌고 한국의 브랜드가 흔들리면서 자연스럽게 상품으로까지, 사업으로까지 연결이 된다고 생각한다.

□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에서의 한류 흐름을 어떻게 보나?

■ 한국 자체에 대한 매니아가 존재하기 때문에 눈치를 보면서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사드 이후에 중국내 분위기는 모든 사람들이 한국을 좋아했다가 매니아 층으로 축소되는 과정이 있었다.

제일 시급한 문제는 지도부 간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대일로 자체가 중국이 하드웨어 부분을 건설하고 그 위에 민간교류라든지 문화의 다원화를 구축하겠다는 것인데, 한국이 소프트파워 강국으로서 그 공간플랫폼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그런데 최근 그 같은 이미지가 많이 흔들리면서 아쉬움이 있다.

민간교류를 활용할 수 있다고 하면 사드 문제도 조기에 해결될 수 있다. 오랫동안 인간관계를 가지고 현지주민들과 현지 관공서와 스킨십을 해오면서 생활해온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까지 다 포용해서 중국 전역에 지역방송사처럼 신호를 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가져가는 것이 중요하다.

□ 이후 활동 계획과 저술 계획은?

■ 당분간은 논문을 완성하고, 중국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현장답사를 계획해보려 한다.

저서계획은 조금 신중하게 접근하려 한다. 다작 보다는 스스로의 연구역량을 키워나가면서 좀 내용이 있는 책을 출판해보고 싶다. 도전을 다시 한다면, 혹은 허락된다면 일대일로 책을 더 보강해서 완성해 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다. <끝>

 

(수정,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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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 문재인대통령 베를린선언 조목조목 비판

노동신문, 문재인대통령 베를린선언 조목조목 비판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7/07/15 [14:59]  최종편집: ⓒ 자주시보
 
 

 

15일, 노동신문은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진로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는 장문의 개인 논평의 글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북은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에 대해 “전반 내용들에는 대결의 저의가 깔려 있으며, 평화와 북남관계 개선에 도움은 커녕 장애만을 덧쌓는 잠꼬대 같은 궤변들이 열거돼있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논평에서 먼저 “일명 ‘베를린선언’이라고 자칭하는 이 ‘평화구상’에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대한 존중, 리행을 다짐하는 등 선임자들과는 다른 일련의 립장들이 담겨져있는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고 하였지만 곧 “평화의 미명하에 늘어놓은 전반내용들에는 외세에 빌붙어 동족을 압살하려는 대결의 저의가 깔려”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논평은 “외세의존과 동족대결의 본심이 그대로 녹아있는 ‘한반도평화구상’의 실체를 파헤쳐보자.”며 구체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에 대해서 조목조목 비판했다.

 

 

먼저, ‘잘못된 출발 엇나간 방향’이라고 주장했다. 

 

논평에서 “현 당국자가 자기 땅이 아닌 남이 나라 땅에서, 자기 민족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 앞에서 밝혀는가” 하면서 이것은 “자기 민족보다 외세를 우선시하고 외세에게 의존하여 모든 문제를 풀겠다는 사대적 근성의 발로이고 외세의 지지를 받아 몸값을 올려보려는 천박한 사고의 극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베를린 선언’에서 “도이췰란드식 통일경험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주고 있다.느니 뭐니 하며 마치도 이 나라가 조선반도통일의 표본이라도 되는 듯이 억설을 늘어놓은 것이다.”라고 지적한 뒤 “내외가 공인하는바와 같이 도이췰란드식 통일이란 다름아닌 전형적인 ‘흡수통일’이며 이러한 방식을 우리나라 통일에 적용해야 한다는 망발은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체제통일’을 공공연히 추구하겠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나 같다. 이것은 남조선의 현 당국자도 존중하고 계승하겠다는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전면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지금 남조선당국자는 베를린에서 하루아침에 장벽이 무너지고 서도이췰란드의 주도하에 통일이 이루어진 것을 환상적으로 대하면서 그러한 ‘기적’이 조선반도에서 일어나기를 고대하지만 그야말로 노루잠에 개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남조선 당국이 진정으로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바란다면 남의 나라의 통일경험을 운운하며 불순한 목적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북남선언들에 밝혀진 평화와 통일의 진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에 구현하는 길로 나와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두 번째로 ‘적반하장의 평화타령’이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베를린 선언’에서 가장 많이 표현한 것인 ‘평화’라는 단어라고 하면서 “남조선 당국자는 이번에 조선반도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도전은 북핵’이며 우리의 핵 페기야말로 조선반도평화를 위한 근본조건으로 되는 듯이 떠들어댔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 공화국에 대한 미국의 침략적 도발행위와 핵전쟁위협, 그에 추종해온 남조선의 친미호전세력의 군사적 망동이 극단적인 조선반도정세긴장의 근원이라는 것은 국제사회가 공인하고 있는 사실이다.”며 “우리는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로운 환경을 원하지만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강탈하고 정상적인 국가발전의 길을 가로막으며 우리 제도를 완전히 붕괴압살하려 피를 물고 날뛰는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을 비롯한 추종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선군의 총대를 더욱 굳건히 틀어쥐고 최강의 자위적 핵억제력을 갖추는데 국력을 총집중하지 않으면 안되였다.”고 하며 북의 핵 억제력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또한 “이미 우리는 책임있는 핵보유국으로서 침략적인 적대세력이 핵으로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국제사회앞에 지닌 핵전파방지의무를 성실히 리행하고 세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라고 표명했다”며 “우리의 핵은 호혜적이고 선의적인 상대라면 그 누구에게도 결코 위협으로 되지 않는다. 남조선당국이 동족과 손잡고 관계개선과 통일의 동반자로 나선다면 우리의 핵을 두려워하고 문제시할 리유가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오늘날 진실로 조선반도의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은 미국의 시대착오적이며 날강도적인 대조선적대시정책이고 침략적인 핵전쟁위협이다.”고 강조했다. 

 

 

세 번째로 ‘언행상반의 대화협력타령’이라고 베를린 선언에 대해서 비판했다.

 

논평에서 “남조선당국은 현 집권자가 발표한 ‘한반도평화구상’의 골자는 북과 남이 대화와 협력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관계개선을 이룩하자는 것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당장 그 무슨 실천적 조치라도 취할 듯이 여론몰이를 하고 있”지만 “날줄도 모르면서 활개짓만 한다고 소리만 요란할 뿐 내용을 들여다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다.”고 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대화 강조가 빈껍질이라고 비판했다. 

 

구체적으로 남북대화의 “‘옳바른 여건’이란 다름 아닌 우리가 핵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고 ‘적절한 조건’이란 대북강경일변도를 주장하는 미국이 북남대화와 협력을 승인한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남조선당국자들이 대화니, 관계개선이니 하며 귀맛 좋은 말을 늘어놓지만 사실상 상전과 손발을 맞추어 우리의 핵페기를 유도하고 압박하는데 선차적인 관심과 목적을 두고 있으며 대화도 북남관계도 여기에 복종시키려 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어 논평은 “실지로 남조선의 현 집권자는 대화제안놀음의 리면에서 우리에 대한 국제적인 제재압박을 더욱 강화해보려고 기승을 부려댐으로써 자기의 본심을 여지없이 드러내놓았다.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부터 우리의 핵심지점들을 타격하는 ‘평양타격동영상’을 만들어 내돌리고 필요하면 ‘참수작전’도 불사하겠다는 용납 못할 망발까지 공공연히 줴쳐대였는가 하면 주요20개국수뇌자회의에서 우리의 정정당당한 자위적조치인 대륙간탄도로케트발사를 규탄하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해야 한다고 생떼를 부리였다. 이 나라, 저 나라의 수반들을 분주하게 찾아다니며 ‘북에 더 엄중한 제재와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피대를 돋구다 못해 ‘돌아올수 없는 다리를 건느지 않기를 바란다.’느니, ‘마지막 기회’라느니 하고 우리를 자극하는 수작질도 꺼리낌없이 해대였다.”고 비판했다.

 

계속해서 논평은 “남조선의 현 당국이 전임자들과 달리 북남관계개선과 대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지금껏 미국에 추종하여 극악무도하고 반인륜적인 반공화국제재와 압살책동에 가담해온 죄행부터 똑바로 반성하고 우리 민족끼리 정신에 진실로 충실하여 동족과 끝까지 손잡고나가겠다는 의지를 내외에 천명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논평은 ‘근본문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남조선집권자는 ‘비정치적인 교류협력사업을 정치, 군사적상황과 분리해 추진’하겠다느니, ‘쉬운것부터 시작해나가자.’느니 하면서 ‘리산가족’상봉개최와 체육교류, 민간급 교류협력 사업부터 우선적으로 추진하겠다고 기염을 토하였다.”며 이에 대해 “우리는 북남사이의 체육문화교류나 인도주의적 협력사업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외세에 의해 갈라진 민족분렬의 아픔을 가시고 동족간에 혈연적, 정서적뉴대감과 민족적공통성을 되살리기 위한 이런 사업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중단되여서는 안된다는것이 어제나 오늘이나 일관된 우리의 립장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가장 첨예한 적대적 관계에 놓여있는 북남사이에 대결구도의 청산이라는 근본문제의 해결을 외면하고 그 어떤 비정치적교류나 협력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한 뒤에 “일방의 선의와 노력으로 한두번 의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이 실현되고 몇 건의 비정치적교류협력사업이 성사된다고 해서 북남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거나 전쟁의 위험이 덜어지지도 않는다는 심각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하기에 오늘 겨레가 한결같이 요구하는 것은 북남관계의 근본적개선이며 새로운 통일시대의 개척이다.”고 주장했다.

 

이어 “반통일의 적페를 가시고 제2의 6.15시대로 가는 로정에서 북과 남이 함께 떼여야 할 첫발자국은 당연히 북남관계의 근본문제인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는 것이다. 남조선집권자가 선차적인 문제로 들고 나온 비정치적교류협력이라는 것은 북남사이에 대결상태를 해소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히 론의되고 실천되게 되어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논평은 “친미보수 정권하에서 격화된 불신과 반목, 적대와 대결로 복잡하고 첨예하게 꼬인 북남관계를 겨레의 지향과 념원에 맞게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려정에서 첫출발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그 첫출발은 반드시 필요한 것부터, 반드시 풀어야 할 근본문제부터 시작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논평에서 “남조선당국은 겨레의 지향과 대세의 흐름에 역행하여 외세의존의 길을 고집할것이 아니라 동족이 내민 손을 잡고 북남관계개선과 자주통일을 위한 옳바른 길에 들어서야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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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으로 치부된 풍수, 자연을 만나 과학이 되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7/07/16 11:04
  • 수정일
    2017/07/16 11:0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명당은 만드는 것'... 공간의 부족함을 채워준 한국의 비보풍수

17.07.15 19:42l최종 업데이트 17.07.15 19:42l

 

 

경상북도 안동 내앞(川前)마을 초입의 반변천이 굽이쳐 흐르는 곳. 임하댐의 보조댐이 있는 곳에 작은 섬이 하나 있다. 섬 안에는 노송들이 늘어서 있다. 이름하여 개호송(開湖松). 내앞마을 의성김씨 후손들이 문중 이름을 걸고 보존해온 숲이다. 조선 성종 때 입향조(入鄕祖)인 김만근이 소나무 종자를 심어 조성했다. 임진왜란 직후 홍수로 숲이 유실된 적은 있지만, 세금을 내기 위해 나무를 베어 팔아야 하는 처지에 몰렸을 때도 문중 결의를 통해 지켜왔다.
 

 ▲ 내앞마을 개호송숲. 원래는 반변천 가에 조성된 숲이지만 댐 건설로 물이 불어나면서 일부가 물에 잠겨 섬으로 변했다.
▲  ▲ 내앞마을 개호송숲. 원래는 반변천 가에 조성된 숲이지만 댐 건설로 물이 불어나면서 일부가 물에 잠겨 섬으로 변했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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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나무가 없으면 내앞마을도 없음이 분명하다(無此松卽無川前必矣). 내앞마을은 우리 종사(宗祀)가 있는 곳이다. 종족의 기반이 흥하고 피폐함은 이 소나무에 달렸으니, 조상을 존중하는 뜻이 크다면 어찌 이 소나무를 보호하는 것에 마음을 다하지 않겠는가.'

1697년 의성김씨 후손 99명이 서명한 마을 결의문 <개호송금완의(開湖松禁完議)>의 일부다. 글에서 숲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1737년에는 문중 사람의 옥바라지 비용을 마련하려고 나무를 베어 판 것을 반성하는 <동중추완의(洞中追完議)>도 남겼다.

 

'후에는 마을 사람 가운데 비록 경향(京鄕)의 옥사를 만나는 집이 있을지라도 이 소나무에 대해서는 다시는 감히 마음을 내지 말고 선조들이 정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도대체 왜 의성김씨 후손들은 한낱 소나무 숲의 보호를 위해 그토록 각별히 노력해왔을까?

열린 수구를 막아주는 내앞마을 개호송숲

'무릇 수구가 엉성하고 널따랗기만 한 곳에는 비록 좋은 밭 만 이랑과 집 천 칸이 있어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본 후 구해야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삶의 터전을 구할 때는 가장 먼저 수구가 닫혀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이다. 수구는 물의 통로이자 바람의 통로다. 풍수에서는 수구가 좁아야 명당으로 통한다. 자연환경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준다는 믿음을 전제로 좋은 땅을 찾는 이론인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이다.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수구가 넓게 터져 있으면 겨울의 차가운 북서 계절풍을 막을 수 없고, 물이 다 빠져나가 농업용수 공급이 어려워진다.
 

 ▲ 의성김씨 집성촌인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는 독립운동 유공자를 85명이나 배출한 집안이다.
▲  ▲ 의성김씨 집성촌인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는 독립운동 유공자를 85명이나 배출한 집안이다.
ⓒ 강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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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앞마을은 이중환이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봉화 닭실마을과 더불어 영남의 4대 길지로 꼽은 곳이다. 4곳 모두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인 데다, 명당이어서 풍수에서는 이런 곳을 집터로 삼으면 재물이 모이고 자손이 번성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애초 내앞마을은 명당이 되기에는 한 가지 흠이 있었다. 마을 서쪽의 지나치게 넓은 수구였다. 개호송은 바로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된 인공 숲이다. 굳센 기상의 소나무들이 열린 수구를 막고, 마을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가려주는 구실을 했다. 자연이 만든 땅에 사람의 힘을 보태 명당을 만든 것이다. 의성김씨 후손들이 수백 년간 정성을 다해 개호송숲을 지켜온 이유다. 이처럼 땅의 모자람을 채워 명당으로 만드는 방법을 비보풍수(裨補風水)라 한다.

전통적 풍수의 명당 개념을 무너트린 비보풍수
 

 ▲ 보물 제450호인 안동 의성김씨 종택. 지금도 후손들이 살고 있다.
▲  ▲ 보물 제450호인 안동 의성김씨 종택. 지금도 후손들이 살고 있다.
ⓒ 강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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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풍수는 한국 풍수의 특징이다. 풍수의 기원으로 알려진 중국에는 비보풍수 사례가 많지 않다. 우리나라 풍수는 신라 말기의 승려이자 한국 풍수의 시조인 도선국사가 주장한 비보설의 영향을 받았다. 도선의 전기를 기록한 <고려국사도선전>에는 비보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이 만약 병이 들면 곧 혈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병이 낫는다. 산천의 병도 그러하다. (중략) 흠이 있는 땅을 보살피고 치료하며 보완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그 흠결이 있는 곳에 사찰을 세워 비보하는 방법이다.'

도선은 선승, 곧 선불교의 승려였다. 선불교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열린 교리를 내세운 불교의 종파다. 이는 도선이 주장한 비보설, 곧 '비보를 통해 어디든 명당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과 흡사하다. 우리나라의 풍수는 도입과정에서 도선에 의해 선불교 사상과 결합하였다. 비보풍수가 한국 풍수의 특징으로 불리게 된 사상적 배경이다.
 

 ▲ 신라 말의 승려인 도선국사(827∼898)의 초상화.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언하기도 한 도선은 태조 이후 고려 왕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  ▲ 신라 말의 승려인 도선국사(827∼898)의 초상화.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언하기도 한 도선은 태조 이후 고려 왕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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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도 있다. 고려 시대, 태조 왕건은 국가의 쇠망을 막으려고 국토 곳곳에 비보소, 곧 땅의 기가 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절을 세웠고, 무신정권 때는 산천비보도감을 두고 국토의 지형을 살펴 비보를 시행하는 일을 맡겼다. 비보풍수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국가 운영 원리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조선 시대에는 어땠을까? 왕실이나 양반뿐 아니라 서민들까지 비보풍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풍수지리를 연구해온 최원석 경상대 인문학부 교수는 "조선 중기 이후 불교가 쇠퇴하고 마을이 형성되면서 살기 좋은 마을 입지를 가꾸는 과정에서 비보가 필요하게 되었다"며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비보풍수가 성행하게 된 실천적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평원이 많은 중국과 달리 대부분 분지로 이루어진 한국의 지형적 배경도 비보풍수에 영향을 미쳤다. 분지는 땅의 한쪽 입구가 열려 있고 좌우의 산이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 대부분이다. 최 교수는 "그런 지형이 바로 비보가 필요한 지형"이라며 "이러한 지형적, 사상적, 역사적, 실천적 배경을 토대로 한국의 풍수에 비보라는 특징이 생겨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보는 풍수의 발전적 사조입니다. 전통적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은 굉장히 제한적인 요건을 갖춰야 하는데, 그런 땅은 사실 1%도 되지 않습니다. 비보풍수는 땅에 의지한 자연적 상태에서의 명당, 그 논리에서 탈출했기 때문에 의미가 큽니다. 자연 의존적인 측면을 벗어난 것이죠. 부족한 땅을 얼마든지 좋은 땅으로 만들어서 활용하게 합니다. 자연의 힘에 사람의 힘을 합쳐서 지속가능한 명당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비보풍수는 과학이다

풍수는 흔히 미신으로 치부된다. 이는 풍수가 비과학적인 사상이라는 편견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하지만 한국의 비보풍수는 과학적 기능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내앞마을 개호송과 같은 마을 숲이다. 마을 숲은 비보풍수 중에서도 나무를 심어 흉살을 막는 '동수 비보'에 해당하는데, 마을로 불어오는 바람을 숲을 조성해 막거나 송림을 가꾸어 홍수방지와 방풍에 이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 경상남도 남해군 방조어부림. 숲의 그늘 때문에 물속이 어두워지면 깊은 심해인 줄 착각한 물고기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  ▲ 경상남도 남해군 방조어부림. 숲의 그늘 때문에 물속이 어두워지면 깊은 심해인 줄 착각한 물고기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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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에는 천연기념물 방조어부림이 있다. 1640년경, 전주이씨 후손들이 조성한 마을숲이다. 거센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림, 거친 파도나 해일을 막는 방조림, 물 위로 그늘을 드리워 물고기를 불러들이는 어부림 등의 역할을 해서 방조어부림이라 불린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의 임수>에는 이 마을숲의 재해방지 효과가 기록돼 있다. 

'남해 물건리 숲이 40년 전 남벌된 다음 폭풍이 불 때 마을의 피해가 컸다. 이 숲의 방풍효과는 물건리와 비슷한 주변 지형을 갖추고 있으나 보호림이 없는 인접 마을 대진포와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중략) 1933년 8월27일 폭풍으로 논농사와 목화 농사 피해가 물건리에서 각각 20%와 40%, 대진포에서는 각각 50%와 100%가 발생했다.'

이 밖에도 신라 진성여왕 때 함양 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이 강둑을 따라 심은 2만여 그루 나무숲인 함양 상림은 이 지역의 수해를 예방했다. 조선 시대 서애 류성룡의 형인 류운용이 안동 하회마을에 심은 1만여 그루 소나무 만송정은 둑을 보호하며 낙동강의 범람을 막았다. 비보풍수 목적의 마을숲을 단순한 미신의 산물이라 볼 수 없는 이유다.

풍경이 환자를 치유한다
 

 ▲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만송정 숲. 지금은 1만여 그루가 아니라 수백 그루만 남아있다.
▲  ▲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만송정 숲. 지금은 1만여 그루가 아니라 수백 그루만 남아있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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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비보풍수의 과학적 기능은 재해방지에 국한된 걸까? 독일 출신 미국 환경심리학자 로저 울리히(Roger Ulrich)는 1984년 <사이언스>에 숲의 치유 효과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쓸개 제거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기록을 관찰했다. 그가 연구한 46명 환자 중 일부는 창을 통해 작은 숲이 보이는 방에 있었고 나머지는 벽돌담을 마주했다. 그는 각 환자의 바이털 사인, 투약량, 진통제의 종류, 입원 기간 등 건강상태를 나타내는 여러 지표를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작은 숲이 내다보이는 침대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이 벽돌담이 내다보이는 자리에 입원해있던 환자들보다 24시간가량 먼저 퇴원했다. 창밖으로 자연풍광이 내다보이는 곳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은 진통제도 덜 복용했다.

서던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비더먼 교수는 "보는 것이 낫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경치나 노을, 숲 같은 경치를 볼 때 엔도르핀이 분비되는 세포들이 활성화한다. 안도감을 느끼는 환경이 병을 낫게 해주는 이로운 신경전달물질들의 분비를 도와 결과적으로 환자의 치유를 돕는다.

환경심리학자들은 이를 두고 생물 애호(Biophilia)라고 한다. 사람이 살아있는 다른 유기체에 끌리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신경과학자들의 연구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할 때 행복감을 느끼는데 환자들은 나무와 꽃이 잘 보이는 공간에서 더 빨리 치유된다. 치매 환자들이 숲길을 산책하고 정원에서 차를 마실 때 인지기능의 퇴화가 늦춰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나무가 가까이 있고 꽃이 근처에 있어야 만족감을 만들어내는 세로토닌이 더 많이 분비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분비가 줄어들어서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꿈꾸었던 지관들
 

 ▲ 경북 영주시에는 백두대간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이용하여 국민건강을 증진하고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조성된 산림치유원이 있다.
▲  ▲ 경북 영주시에는 백두대간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이용하여 국민건강을 증진하고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조성된 산림치유원이 있다.
ⓒ 국립산림치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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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자연환경을 어떻게 조성해야 거주민들이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낄까? 어떤 환경 속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까?' 예전에는 대중을 위한 이런 고민을 치열하게 한 이들이 바로 지관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사는 환경을 개선하고 바꿔 나가려 했다.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환경을 개선하고 바꾸는 것. 그것이 지관의 일, 그리고 비보풍수의 본질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례와 경험에도 풍수는 예나 지금이나 미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묘지 풍수 폐해가 극에 달했던 조선 시대에는 음택풍수에 대한 비판이 풍수 전체로 옮겨붙었다. 실사구시를 강조한 다산 정약용은 "살아계신 부모님이 자식 잘되라고 그 자식과 마주 앉아 두 손 잡고 훈계해도 어긋나기가 쉬운데, 하물며 죽은 사람이 어찌 살아있는 아들에게 복을 줄 수 있겠는가"라고 풍수를 비판했다.

그렇지만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풍수지리를 바라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현대 심리학과 임학계의 연구결과들은 비보풍수가 더 이상 애니미즘 사상에 의한 유물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실용학문임을 증명한다.

인간은 환경을 개선하며 살아간다. 유리창이 깨지면 유리를 갈아 끼우고 비가 새는 집에서는 지붕을 고친다. 이러한 실질적 개선 외에도 심리적 위안을 목적으로 한 다양한 유형의 환경개선이 이루어져 왔다. 창밖 풍경이 거슬릴 때는 커튼을 치거나 담을 쌓거나 나무를 심어 시각적으로 차단한다.
 

 ▲ 경기도 여주 신륵사 다층 전탑도 국가와 왕업의 중흥을 위해 세워진 비보다.
▲  ▲ 경기도 여주 신륵사 다층 전탑도 국가와 왕업의 중흥을 위해 세워진 비보다.
ⓒ 박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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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문장가 김수온이 "여주는 낙토(樂土)인데 신륵사는 이 형승(形勝)의 복판에 있다"며 높이 평가한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도 약점이 있었다. 남한강의 물줄기가 계속 치고 때리는 장소에 터를 잡은 신륵사는 홍수가 나면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신륵사 석탑들은 보기 드문 곳에 세워졌다. 대개 탑들은 중요한 예배 대상 중 하나이기에 경내 중심부, 곧 금당의 본존불 앞에 세우기 마련인데 신륵사 다층 전탑은 절의 동남쪽, 그것도 강기슭 바위 위에 서 있다. 그리고 탑이 수해를 막아줄 거라 믿으며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

기가 센 터에서는 절이나 탑을 세워 강한 땅의 기운을 누르는 것처럼 기운이 허결한 지역에는 상징적인 의미의 산을 조성해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고, 음기가 강한 '여근곡' 아래에는 남근석을 세워 균형을 맞췄다.

다른 예로 관악산은 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화기를 진압하기 위해 물의 신수(神獸)인 해태상을 세웠다. 충주 계명산은 처음에는 오동산 또는 삼항산이라고 불렸는데 지네를 퇴치하기 위해 지네의 천적인 닭을 방사하며 계족산이라 이름을 변경하기도 했다. 흉한 모습의 산이 마주 보이는 마을에서는 마을 앞에 미륵불을 세웠다. 마을 사람들은 그 미륵불이 마을을 수호해줄 것으로 믿고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

사람은 상호작용의 산물

'어떤 장소는 사람에게 보다 좋은 또는 보다 나쁜 영향을 미친다. 인류문화는 특정한 장소 안에서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 장소가 인간에게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은 바람과 태양 빛에 달렸으며 물과 토양도 중요하다. 이 네 가지는 신체뿐 아니라 인간의 선악에도 영향을 미친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의 말이다. 서양의 풍수지리가로 불리기도 하는 그 또한 환경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은 환경과 DNA의 상호작용 산물이다. 매일 그 날의 날씨와 소음, 분위기, 주변인들 그리고 거주 공간과 같은 물리적 환경들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산을 비롯해 우리를 둘러싼 주위 환경들이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상징성을 가지고 정신적 위안을 주는 비보들이 합리를 추구하는 과학 문명에 밀려 단순히 미신으로만 치부돼도 되는지 의문이다.

한국의 비보풍수는 풍요로운 삶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전통적·지리적 지혜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몫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비보풍수#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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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들을 위한 축제에 스님들이 나와 자리를 편 이유(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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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올해의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이날 광장에 천막을 치고 자리잡은 100여개의 부스 중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도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스님들은 "미안하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했다.

1

[효록 스님]

- 오늘 어떤 계기로 나오게 되셨어요?

= 불자들 중에 성소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법회를 하고 있는데요. 오늘 퀴어퍼레이드를 축하하기 위해서 법회 함께 하시는 분들과 나왔습니다. 3년전부터 오기는 했는데 부스를 마련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효록)

위해서, '여러분 옆에 종교가 같이 있으니까 외롭지 않고, 약간이라도 힘이 됐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나온 거죠. (월엄)

- 올해 부스를 차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 대한불교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에서 소수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는데요, 몇년전부터 성소수자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희 불교가 사회적 문제에 좀 소극적이고 뒤처진 경향이 있는데, 작년에는 나오려고 하다가 준비가 좀 늦어졌고, 올해 나오게 됐습니다. (효록)

s

- 부스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포스트잇에 무언가를 쓰고 붙이고 있던데 어떤 내용인가요?

= 축제에 오신 분들이 불교계에 바라는 점을 적어주신 거고요. 한 명 한 명 보면 소외 받는 개인일 수 있지만 이렇게 뜻을 모아놓으면 이들이 사회의 비주류가 아니라 주류가 되는 것이거든요. 함께 이야기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서 쓰는 겁니다. (월엄)

-기억에 남는 포스트잇 메시지 내용이 있나요?

= 제일 기억에 남는 건 "Love is love." 사랑은 사랑이다, 그게 제일 기억에 남는 거 같아요. 정말 사랑은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사랑이 차별이 되고 편견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월엄)

2

[월엄 스님]

- 부채에 쓴 '차별 없는 세상 우리가 부처님'은 어떤 의미인가요?

= 저희가 살고 있는 해가 2017년인데요, 지금으로부터 거의 2600년전에 부처님이 사시던 그 시대에, 부처가 당시에 소외되고 고통 받고 차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법회를 마련하고 이들을 돌보면서 생활했습니다. 지금 저희 불교가 성소수자들과 함께 한다는 건 부처님의 제자로서 당연한 일이고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나누고 그들과 함께 자비심을 실천해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 거 같아요. 조금 늦어서 미안한 감이 있습니다. (효록)

= 이게 올해 우리 조계종에서 내세우는 표어가 되겠는데, 불교에는 원래 차별이 없습니다. 부처님도 중생들과 차별 없이 지냈고요, 남자 여자로, 혹은 성정체성으로 차별하는 건 불교에서 있을 수 없습니다. 평등이 불교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성소수자뿐 아니고 대한민국의 비정규직 등 여러가지 차별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마음에서 만든 표어입니다. (월엄)

4

- 혹시 일상에서도 알고 지내는 성소수자가 있으신가요?

= 제가 성소수자 법회를 시작한 지 3년쯤 됐는데, 시작하고 보니까 "스님, 저도 성소수자예요"하고 커밍아웃하는 사람이 많았고요. 불자들 중에서 성소수자 부모들도 계셨고요. (효록)

= 가까이에는 없는데, 보통 자기 주위에 성소수자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그게 죄가 되는 분위기가 있어서 말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제가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저희 학교 학생회장이 커밍아웃을 한 적이 있어요. 당당한 모습이 괜찮다고 생각했고 열정도 느껴지고, 공감도 했었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성소수자 역시 사회의 주류로서 당당하게 자기를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요. (월엄)

555

3

- 조계종을 대표해서 한국의 성소수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요?

= 지금까지 저희 불교가 성소수자들이 외로울 때 홀로 놔둔 것 같아서 좀 미안하고요. 너무 외롭게 둔 거 같아서 정말 미안해요. 불자들만이 아니라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 또는 이웃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성소수자들에게 관심이 부족했던 것에 대해서 미안합니다. 앞으로 저희가 좀더 관심을 가질 거고요. 차근차근 해나가겠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이 어떤지 저희들에게 알려주시고요. 어떤 면에서 보면 저희들을 일깨워주셔야 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한쪽이 한쪽을 일방적으로 돕거나 지지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돕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돼 있으니까, 서로 서로 도와가면서 성장하면 좋겠습니다. (효록)

- 그중에서도 지금 커밍아웃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요?

= 커밍아웃을 고민하고 있는 분들의 고충을 들어보면 특히 부모님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한 자책감, 미안함까지 여러가지 감정이 많은 것 같아요. 커밍아웃을 하든, 하지 않든,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고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매우 많다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효록)

- 포스트잇을 직접 쓴다면 어떤 내용을 쓰실 건가요?

= 여러분 곁에 우리가 항상 있으니까 외롭지 않다, 힘을 내시라, 그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월엄)

영상/ 이윤섭 비디오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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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캐비닛 문건, 박근혜·이재용·김기춘·우병우 잡을까

 

특검이 압수수색 못한 청와대 문건, 사무실 정리 중 발견

최지현 기자 cjh@vop.co.kr
발행 2017-07-14 20:37:26
수정 2017-07-14 23: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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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14일 오후 춘추관에서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에서 발견된 회의 문건과 검토자료 관련 브리핑을 했다. 박 대변인이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자필 메모로 보이는 문건을 공개하고 있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14일 오후 춘추관에서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에서 발견된 회의 문건과 검토자료 관련 브리핑을 했다. 박 대변인이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자필 메모로 보이는 문건을 공개하고 있다.ⓒ뉴시스
 

청와대가 박근혜 정부 때 사용하던 민정수석실 캐비닛에서 발견했다며 14일 공개한 문건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재판과 수사에 직결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삼성 경영권 승계 지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 등 주요 사건에 대한 핵심 증거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후 춘추관 브리핑을 통해 "민정수석실 공간을 재배치하던 중 7월 3일 한 캐비닛에서 이전 정부 민정비서관실에서 생산한 문건을 발견했다"며 300종에 달하는 문건 가운데 일부 내용을 공개했다.

박 대변인에 따르면, 이번에 발견된 문건에는 ▲수석비서관 회의 자료 ▲2014년 6월11일부터 2015년 6월24일까지 장관 후보자 등 인사 자료 ▲국민연금 의결권 등 각종 현안 검토 자료 ▲지방선거 판세 전망 등 기타 자료가 포함돼 있다.

이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청와대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하려고 했지만, 청와대 경내 진입조차 못하고 확보에 실패했던 자료들이다. 그 일부 자료가 고스란히 민정비서관실 한쪽 캐비닛에 남아 차기 정권에 의해 발각된 꼴이다.

최순실과 공모한 혐의로 구속기소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최순실과 공모한 혐의로 구속기소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박근혜·이재용 뇌물죄 입증할까

이번에 발견된 문건 중 '국민연금 의결권 관련 조사'라는 제목의 문건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죄를 입증할 만한 정황을 담고 있다.

이 문건에는 ▲관련 조항 ▲찬반 입장 ▲언론 보도 ▲국민연금 기금 의결권 행사 지침 ▲직접 펜으로 쓴 메모의 원본 ▲또 다른 메모의 복사 ▲청와대 업무용 메일을 출력한 문건 등이 들어 있다고 박 대변인이 전했다.

박 대변인은 "특히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지원 방안을 검토한 내역도 포함돼 있다"며 대통령 기록물로 볼 수 없는 자필 메모의 일부 내용을 구두로 공개했다.

이는 ▲삼성 경영권 승계 국면 → 기회로 활용 ▲경영권 승계 국면에서 삼성이 뭘 필요로 하는지 파악 ▲도와줄 것은 도와주면서 삼성이 국가 경제에 더 기여하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모색 ▲삼성의 당면과제 해결에는 정부도 상당한 영향력 행사 가능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대응 ▲금산분리 원칙 규제완화 지원 등의 내용으로, 지난 2015년 7월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을 독대할 당시 청와대에서 준비한 '말씀자료'에 나온 것과 거의 일치한다.

박 대변인은 "관련 자료들이 이번에 발견됨에 따라 그 사본을 검찰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측은 이 메모를 작성한 사람이 누구이고, 누구의 발언을 적은 것인지 등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향후 검찰 수사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적은 메모라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뇌물죄 재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해당 메모의 내용은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의 삼성 경영권 승계를 도와주는 대가로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의 승마훈련 지원 등을 요구했다는 특검과 검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한편, 청와대의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지원했다는 이 부회장 측의 주장을 뒤엎는다는 점에서 두 사람에게 모두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다. 뇌물공여 혐의로 기소된 이 부회장에 대한 재판은 8월 초에 마무리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국정농단의 또 하나의 핵심 사건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된 정황도 이번에 발견된 문건에서 드러났다.

박 대변인은 "문화예술계 건전화로 문화융성 기반 정비, 건전보수권을 국정 우군으로 적극 활용, 문체부 주요 간부 검토, 국·실장 전원 검증 대상, 문화부 4대기금 집행부서 인사 분석 등도 들어있다"고 밝혔다. 현재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 관리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있다. 이들은 모두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몰랐다고 부인하고 있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14일 오후 춘추관에서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에서 발견된 회의 문건과 검토자료 관련 브리핑을 했다. 사진은 박 대변인이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자필 메모로 보이는 문건.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14일 오후 춘추관에서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에서 발견된 회의 문건과 검토자료 관련 브리핑을 했다. 사진은 박 대변인이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자필 메모로 보이는 문건.ⓒ뉴시스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 자필 메모도 추가 발견

이번에 발견된 문건 중에는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자필 메모로 추정되는 자료도 포함돼 있었다. 박 대변인은 이전에 공개된 필적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사본을 직접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김 전 수석의 자필 메모가 맞다면, 이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사항 또는 청와대 내부 회의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해당 메모에는 청와대가 각종 현안과 정부 정책을 입맛에 맞게 밀어붙이기 위해 여론전을 펼치거나 수사 및 재판에 개입한 정황 등이 담겨 있다.

메모에는 '일부 언론 간첩사건 무죄판결 - 조선 간첩에 관대한 판사, 차제 정보 수사 협업으로 신속 특별행사법 입법토록 → 안보 공고히', '전교조 국사교과서 조직적 추진 - 교육부 외에 애국단체 우익단체 연합적으로 - 전사들을 조직, 반대 선언 공표'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대리기사 남부 고발 - 철저 수사 지휘 다그치도록'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에 대해 박 대변인은 "아마도 당시 세월호유가족대책위원회 대리기사 폭행 사건 관련 내용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공개된 것 외에도 더 많은 내용이 담겨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300종 가운데) 자료로서 가치 없는 것들도 있어서 그런 건 빼고 일부만 복사해서 검찰에 넘기는 것"이라며 "이 문제는 여러 가지 수사와 현재 진행 중인 재판 내용일 수 있어서 더 자세히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이날 공개된 일부 문건의 작성 시기가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민정비서관(2014년 5월부터 2015년 1월까지)과 민정수석(2015년 1월부터 2016년 10월까지)으로 근무한 시기와 겹친다는 점에서, 해당 문건이 모두 우 전 수석이 직접 생산했거나 그의 산하 민정비서관실에서 생산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우 전 수석에 대한 추가 혐의 수사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14일 오후 청와대 민원실에서 지난 7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발견된 전임 정부의 기록물들을 국정기록비서관실 관계자가 대통령기록관 관계자에게 이관하고 있다. 청와대는 원본은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하고 사본은 검찰에 제출했다.
14일 오후 청와대 민원실에서 지난 7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발견된 전임 정부의 기록물들을 국정기록비서관실 관계자가 대통령기록관 관계자에게 이관하고 있다. 청와대는 원본은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하고 사본은 검찰에 제출했다.ⓒ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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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국가 자존감 회복할 수 있는 기회됐으면”

민문연 등, 이준 열사 110주기에 안국동 집터 표석 제막식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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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4  18: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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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 열사 110주기인 14일, 서울 안국동 152번지 해영회관 앞에 이준 열사 집터 표석이 설치됐다. 왼쪽이 이준 열사 집터에 포함되는 안국동 153번지로 지금은 'ANGUK 一五三' 빵집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준 집터

이준(1859~1907)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파견될 때 살던 집이 있었다. 이준의 아내 이일정이 1905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부인상점을 연 곳이기도 하다.

2017년 7월 서울특별시”

1907년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으로 출발했던 이준 열사의 집터에 그의 110주기인 14일, 자그마한 표지석이 자리잡았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 152, 153번지 일대, 지금은 덕성학원 해영회관 좌측 앞쪽이다.

이준 열사는 1907년 4월 22일 이 집에서 떠나 서울역에서 부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이상설과 합류,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 을사늑약의 부당성 등을 알렸지만 일본측의 방해 등으로 회의 참석을 거부당해 분격을 참지 못한 채 음력 7월 14일 순국했다.

   
▲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집터를 비정하게 된 과정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이준 집터(안국동 152번지, 장송루 자리)와 주요 인접 공간의 위치 관계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1927). [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이 집터를 비정한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날 오후 1시 해영회관 8층에서 열린 제막식에서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당시에 특사의 출발지로서 이준 열사의 집터에 대해서는 기존에 안국동에 있었다는 정도만 알려졌고, 구체적인 지번 위치는 최근까지 미확인 상태에 있었다”며 그간 문헌과 현지조사 과정을 설명한 뒤 “소유주 변천 관계를 대조해 본 결과 이준 열사의 집터는 안국동 152번지와 아울러 153번지도 함께 포함한 구역일 가능성이 높다”고 특정했다.

또한 “이 집은 1905년 2월부터 1907년 헤이그사건 직후까지 이준 열사와 가족이 거주했던 곳”이라고 소개하고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상점’이 있었던 공간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1905년에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에 의해 개설된 부인상점에 대해서는 황성신문 1905년 6월 16일 소개기사가 남아있다”는 것. 실제로 이 집터를 비정하는데 ‘안국동가로변(현 지나요리점 장송루 자리)에는 일정상회라는 한 부인상회가 생기었으니 그것은 정미년에 해아사건으로 내외의 이목을 경동케 하던 고 이준 씨의 부인 이일정 씨의 경영한 바이다’라는 『별건곤』제16.17호(1928년 12월) 기사가 중요한 단서가 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올해 3월 종로구청을 통해 표석 설치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했고, 지난 3월 20일 서울시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의 심의를 거쳐 표석설치 안건이 확정돼 이날 110주기 기념일에 제막식이 진행된 것.

   
▲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인 함세웅 신부가 여는말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70여 명의 참석자들은 이준 열사 110주기에 집터 표석이 제막된데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준 열사 맏딸 무섭의 손자인 조근송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유족대표는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사의를 표하고 “후손이라고 해서 덕은 못 보고 피해만 많이 봤다”며 “연좌제보다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건국절’을 주장하는 이들이 이준열사기념사업회를 전횡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일반인들이 이준 열사에 대해 “헤이그에서 할복 자살했다 밖에 모른다”며 월남 이상재, 도산 안창호와 더불어 3대 웅변가였고,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보광학교 설립, 초대 검사보 활동, 개혁당 활동 등이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인 함세웅 신부는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며 “2017년 우리 시대에 새로운 특사, 이준 열사의 삶과 정신을 주변 분들에게 알리는 주역이 돼야겠다”고 당부했다.

조광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이준 열사의 발자취를 찾아 방대한 문헌자료를 조사한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 여러분들의 헌신적 노력에 감사드린다. 표석 설치의 장소를 제공해준 학교법인 덕성학원 이사장에게도 고마운 말씀을 전한다”고 인사하고 “일성 이준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우리는 이 표석의 설치를 통해서 더욱 지향하고 우리의 미래의 지표로 삼아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임 덕성학원 이사장 직무대행은 “이준 열사의 집터가 우리 덕성학원 산하건물이라는 데 무한한 영광을 느낀다”면서 “오늘 이준 열사의 순국 110주기 집터 표석이 역사교과서를 입맛대로 바꾸려 시도하고 친일을 미화하고 독재를 찬양하는 반민족적 행위들을 넘어 우리사회의 상식회복 초석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 제막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박원순 시장(오른쪽)이 함세웅 신부와 박상임 덕성학원 이사장 직무대행 등과 함께 덕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런 일은 대한민국 정부가 먼저 나서서 해야 할 일인데 미처 다하지 못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런 일을 하게 된 것이 한편으로는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부끄럼움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민족문제연소에 고마운 마음이다”고 사례하고 “우리들이 할 일이 있으면 서울시도 함께 이런 일에 나서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박 시장은 특히 “2년 후면 2019년 3.1만세 그리고 상해임시정부, 건국 100주년이 돌아오는데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새로운 정부가 취임했으니까 이런 많은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우리가 정말 독립국가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영종 종로구청장도 “종로구는 많은 역사적 흔적들, 문화적 흔적들,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곳들이 너무 많다”며 “이 시설들이 더 잘 관리되고 많은 분들이 오셔서 편하게 보실 수 있도록 잘 안내하고 잘 관리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이 제막식에 앞서 전시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1920-30년대 광목에 그려 실전에서 사용한 태극기(오른쪽), 혈흔이 선명하다. 왼쪽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광목 위에 찍어 100부를 제작한 태극기.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제막식 기념행사를 마친 참가자들은 해영회관 전면 좌측에 마련된 표석 앞에서 제막식을 갖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편, 이날 제막식장에는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이 ‘이준 열사와 그의 동지들’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개최, 1920-30년대 독립군 태극기와 이준 열사 친필 유묵, 이준 열사 부인 이일정 여사의 기고문이 실린 <동아일보> 창간 3호(1920.4.3), ‘105인 사건 검찰 조서’ 원본 2책 등 50여 점의 자료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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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저격수' 김상조 "삼성, 재판부 속이고 있다"

 

[39차 공판] 공정위 휴가내고 증인 출석... '승계작업' 조급함이 화불렀다고 지적

17.07.14 23:41l최종 업데이트 17.07.14 23:41l

 

 

이재용 재판 증인으로 출석하는 김상조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 이재용 재판 증인으로 출석하는 김상조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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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단의혹 특별검사팀의 '삼성 과외선생님'으로 알려진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다. 시민운동가에서 장관급 공무원으로 신분이 달라졌지만, 그의 '삼성 저격'은 여전했다. 

재판 초반 김 위원장은 "취임한 지 딱 한 달인데, 공직자로서 증인으로 나오는 데에 많은 부담을 가진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재판이 이 부회장과 삼성, 한국경제의 미래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며 "시민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휴가를 쓰고 관용차 말고 개인 차량을 직접 운전해 개인 자격으로 왔다"고 했다. 

증인 신문이 본격적으로 이뤄지자 그는 거침없었다. 김 위원장은 삼성 뇌물사건의 밑바탕에는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목적이 깔려있다고 강조했다. 또 삼성이 그동안 비자금 사건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던 만큼 대통령이 '부의 세습도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원론만 말해도 이 부회장의 지배력 강화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통령이 우호적이지 않으면 승계 작업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거침없는 김상조 "물산 합병 등은 경영권 승계의 부분"

 

특검은 삼성이 이 부회장의 원활한 경영권 승계를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비선실세'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 승마훈련 지원과 미르 등 재단 출연이란 뇌물을 건넸다고 본다. 또 그 대가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무사히 합병시켰고, 삼성생명의 금융지주회사 전환을 추진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삼성과 변호인단은 이 일들은 승계와 전혀 무관한, 경영활동일 뿐이라고 반박해왔다.

김 위원장은 삼성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문지석 검사 질문에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삼성물산 합병이나 삼성생명의 금융지주회사 전환은 개별회사 차원의 경쟁력 제고라는 의미가 없지 않지만, (경영권 승계의) 기승전결에서 한 부분들을 차지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특히 이 작업들이 "그룹 전체,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미래전략실 결정 아래 이뤄졌다"며 주요 사안들의 이사회 결의가 있기 전 김종중 당시 미래전략실 전략팀장(사장)에게 들었다고 설명했다.

금융지주회사 전환을 국제보험회계기준 변화(IFRS4 2단계 도입)에 맞춰 추진했을 뿐이라는 삼성 주장을 두고는 "잘 모르거나 재판부를 속이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IFRS4 2단계는 금융그룹 통합감독시스템으로 삼성이 이해 못했을 리 없다. 정확히 알고 있다. 왜냐면 이걸 가장 많이 주장한 게 저다. 삼성은 당연히 (강한 비판세력인) 김상조가 뭘 하는지 안다. 모를 리 없다. 그런 삼성이 금융지주회사 전환을 IFRS4 2단계 도입 대비라 하는 것은 재판부를 기만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는 "이 부분이 특검 참고인으로 갔을 때 가장 놀라웠다"고도 했다. "삼성이 정말 너무 무리한 방식으로 일을 추진한 것 아닌가 의구심이 들어서였다"는 것. 

김 위원장은 삼성생명을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하려면 지분과 자산, 부채 등을 정리하는 일에 많은 시간과 재원이 필요하고 유배당 보험계약자 배당문제도 걸린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삼성이 이 방식을 택한 것을 두고는 "국민이나 보험계약자를 무서워하지 않는 건 이해했는데, 감독당국을 아예 바이패스(우회)하려 한 것 같다, 과연 (금융위원회가) 승인해줄 것이라 생각했는지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묵인 없인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삼성은 강력한 정황증거로 꼽히는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수첩에 '경영권 승계'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의 독대 때 '거래'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삼성이 감독당국이나 청와대와 얘기할 때 이 일들을 '경영권 승계 때문에 한다'고 얘기할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는 안종범 전 수석 수첩의 금융지주회사 관련 내용 중 '은산분리'는 '금산분리'의 오기 같다며 "삼성은 금산분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지주회사를 만들어 국제경쟁력을 높이려 한다는 명분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삼성, 박근혜 정부에서 빨리 승계작업하려다..."
 

재판 출석하는 이재용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재판 출석하는 이재용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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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위원장은 삼성 에버랜드 사건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건 '기승전결'에서 기에 해당할 뿐이라고 했다. 그는 "삼성이 현재 소유구조를 유지하는 한 이 부회장은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CEO가 될 수 없다"며 승과 전에 해당하는 작업이 삼성물산 합병과 삼성생명 지주회사 전환 등이라고 했다. 이어 결은 바이오로직스 등 새로운 사업부문에서 성과를 내 이 부회장의 경영능력을 인정받는 것이라며 "삼성이 이 일을 (우호적인) 박근혜 정부에서 빠르게 진행하려 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삼성의 조급함, 그리고 무리수가 이번 사건의 근본 원인이라는 게 김 위원장 생각이다. 그는 "불가능한 일, 불법적인 것을 만들어주려는 미래전략실 참모들의 판단을 이재용 부회장이 끊지 못했다"고 했다. 또 "다른 그룹은 아예 이렇게 할 생각을 안 하는데 삼성만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 모든 가능성을 사전에 틀어막는 방식으로 일한다"며 "삼성이 많은 비판을 받는 이유"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 부회장이 다시 경영 결정을 할 때 제가 말한 방향으로 간다면 오늘의 불행이 궁극적으로 축복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변호인단은 그가 "정확한 사실을 모르면서 추측과 단정을 하고 있다"며 평가절하했다. 이현철 변호사는 "승계작업의 의미를 굉장히 포괄적이고 막연하게 말한다"며 "이건희 회장 와병 후 이뤄진 일이면 정상적인 구조개편 모두 승계작업이라고 한다"고 했다. 또 "특검 수사와 프레임을 맞추려고 평소 견해를 바꿨다"며 "오늘 진술은 증거가치가 없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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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자들: 살아서 쫓겨난 나라로 죽어서 돌아간 남자

 

등록 :2017-07-15 09:44수정 :2017-07-15 10:54

 

 

추방입양인의 죽음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5월21일 아파트 14층에서 투신했다. 그는 한국인 상필로 입양 갔다가 미국인 필립으로 추방됐다. 7월13일 오후 그의 유골함이 54일 만에 납골당 밖으로 나와 미국행 비행기(양부모 전달)를 탔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중 첫 사망자였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상필의 투신 이틀 전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한국인 모원(가명)으로 입양 갔다가 미국인 이언(가명)으로 추방됐다. 7월14일 상필이 미국행 비행기를 탄 다음날 그는 재판을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중 정부가 파악한 첫 사례였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들이 2009년(1명), 2011년(2명), 2012년(1명), 2014년(1명), 2016년(1명) 한국으로 추방됐다. 그들은 모두 한국인으로 태어나 미국인으로 살다가 ‘미국인이 아니다’라며 추방당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6명(정부 파악 인원 전체)이었다. 상필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경로를 좇았다. 한 존재가 버려지고, 양도되고, 추방되고, 거부되는 입양 정책의 모순이 그의 길에서 선연했다. 상필과 모언의 뒤섞이고 엇갈리는 경로를 좇았다. 추방 사실조차 인지되지 못한 ‘무중력 인간’이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추방된 두 사람의 길에서 타들어갔다. 한국과 미국이 탁구 치듯 주고받은 6명의 경로를 한데 모았다. 입양과 추방의 ‘이중 환란’이 밀어붙인 동정 없는 세계가 보였다. 유골함 앞에 세워진 액자에서 상필은 살았을 때 볼 수 없던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 위에서 두 개의 언어가 두 개의 이름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상필!” “SORRY, PHILLIP!”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5월21일 아파트 14층에서 투신했다. 그는 한국인 상필로 입양 갔다가 미국인 필립으로 추방됐다. 7월13일 오후 그의 유골함이 54일 만에 납골당 밖으로 나와 미국행 비행기(양부모 전달)를 탔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중 첫 사망자였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상필의 투신 이틀 전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한국인 모원(가명)으로 입양 갔다가 미국인 이언(가명)으로 추방됐다. 7월14일 상필이 미국행 비행기를 탄 다음날 그는 재판을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중 정부가 파악한 첫 사례였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들이 2009년(1명), 2011년(2명), 2012년(1명), 2014년(1명), 2016년(1명) 한국으로 추방됐다. 그들은 모두 한국인으로 태어나 미국인으로 살다가 ‘미국인이 아니다’라며 추방당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6명(정부 파악 인원 전체)이었다. 상필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경로를 좇았다. 한 존재가 버려지고, 양도되고, 추방되고, 거부되는 입양 정책의 모순이 그의 길에서 선연했다. 상필과 모언의 뒤섞이고 엇갈리는 경로를 좇았다. 추방 사실조차 인지되지 못한 ‘무중력 인간’이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추방된 두 사람의 길에서 타들어갔다. 한국과 미국이 탁구 치듯 주고받은 6명의 경로를 한데 모았다. 입양과 추방의 ‘이중 환란’이 밀어붙인 동정 없는 세계가 보였다. 유골함 앞에 세워진 액자에서 상필은 살았을 때 볼 수 없던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 위에서 두 개의 언어가 두 개의 이름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상필!” “SORRY, PHILLIP!”

 

 

▶ 미국에서 추방된 한 입양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친부모로부터 버려졌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국으로부터 버려졌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첫 양부모로부터 버려졌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국으로부터 버려졌습니다. 오직 자신의 의지로 행한 것은 죽음뿐이었으나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내몬 것은 누구의 의지였는지 그는 죽어가며 물었을지 모릅니다. 그를 추방한 나라로 그의 뼛가루를 돌려보내며 입양인들은 ‘해외입양 종결 선언’을 대통령에게 촉구했습니다.

 

 

2017년 7월13일 상필 혹은 필립이 밤 10시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김 혹은 클레이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그의 삶 대신 죽음을 태웠다. 김상필 혹은 필립 클레이는 살아서 쫓겨난 나라로 6년 만에 죽어서 귀국했다. 두 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어느 이름으로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모여 그를 배웅했다. 모원 혹은 이언은 상필 혹은 필립이 날아오를 때 구치소에 있었다. 장 혹은 테일러는 김 혹은 클레이가 투신하기 이틀 전 고시원에서 체포됐다. 장모원(가명) 혹은 이언 테일러(가명)의 길이 김상필 혹은 필립 클레이의 길과 겹쳐졌을 때 장은 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 뒤를 ‘사건’이 따랐고 사건 뒤엔 길도 나뉘었다. 두 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어느 이름으로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김상필 혹은 장모원의 길을 걸어오고 걸어갔다.

 

지난 5월24일 김상필씨(필립 클레이)의 장례식에서 동료 입양인들이 운구를 준비하고 있다. 중앙입양원
지난 5월24일 김상필씨(필립 클레이)의 장례식에서 동료 입양인들이 운구를 준비하고 있다. 중앙입양원
‘에스코트’로 인계된 상필

 

1974년 12월 한국인 김상필이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기록되지 않았다. 상필보다 3개월 먼저 장모원이 태어났다. 그의 고향도 기록되지 않았다. 상필의 출생 두 달 앞서 최남철(가명·1973년생)이 미국으로 입양돼 노먼 모스(가명)가 됐다.

 

1978년 11월 천규호(가명·1970년생)가 미국으로 입양돼 앨빈 카터(가명)가 됐다.

 

1979년 3월 신성혁(1975년생)이 미국으로 입양돼 양부모에게 5년간 학대당한 뒤 파양(1984년)됐다.

 

1981년 12월 상필은 생후 7년을 꽉 채운 날 버려진 아이로 발견됐다. 태어난 날짜(12월30일)와 발견된 날짜(12월30일)가 우연히 일치했을 수도 있었고, 발견된 날짜에 맞춰 태어난 날짜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었다. 어디서 버려졌고 얼마나 오래 버려졌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상필은 서울 남대문경찰서를 거쳐 ㅁ수녀회 보육원으로 인계됐다. 모원은 출생 직후 인천의 거리에서 발견됐다. 추정된 날짜가 그의 생일로 기록됐다. 누가 그를 모원으로 부르기 시작했는진 알 수 없었다.

 

1982년 3월 상필은 ㅁ수녀회 보육원에서 ㅊ의집(고아원·서울에서 경기 성남으로 이전해 폐원)으로 보내졌다. 인천의 고아원에 맡겨진 모원은 1976년 4월 대한사회복지회로 보내졌다.

 

1982년 6월 ㅊ의집 의뢰를 받아 홀트아동복지회가 상필의 해외입양 수속을 밟았다. 상필은 추정되는 아이였다. 상필이 버림받는 과정은 기록에서도 흐릿했다. 친부의 폭력을 피해 아들을 데리고 도망한 친모가 상필을 포기했다는 사실만 홀트는 기록(ㅊ의집 관계자 면담)할 수 있었다. 상필의 앞날은 기록된 시간보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이 규정했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을 기억해줄 사람이 상필에겐 없었다. 모원도 추정되는 아이였다. 그의 출생과 유기는 상필만큼의 윤곽조차 갖지 못했다.

 

1983년 10월 상필이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로 입양됐다. 만 9살이 차가고 있었다. 만 6살 이상은 ‘연장아’라고 불렸다. 생을 얻은 지 10년도 안 된 아이들이 입양의 세계에선 나이가 너무 많았다. ‘수요’가 적은 연장아 상필에겐 1년4개월 만에 희망자가 나타났다. 상필을 낳은 나라는 버려진 아이를 키워낼 의무를 민간과 국경 밖으로 떠넘기며 책임을 내려놓았다. 상필을 보내며 ‘해외입양 1위의 아동수출국’이란 지위와 입양 수수료를 외화로 얻었다. 한 해 1천명 이상(916명이었던 2011년에야 1천명 이하로 감소)이 국외로 입양되던 시기였다. 한국에 와서 만나보지 않고도 양부모는 아이를 ‘고르고 배달받을 수 있던’ 때였다. 한국인 상필은 ‘에스코트’(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유학생이나 기업체 직원이 아이를 데려가 공항에서 양부모에게 넘겨주는 일종의 자원봉사)로 양부모에게 인계되며 미국인 필립이 됐다. 모원은 상필보다 6년 빨리 이언이 됐다. 1977년(만 2살) 2월17일 미국 위스콘신주로 에스코트됐다. 비행기 안에서 자다 깬 순간이 그의 인생 기억의 첫 장면으로 남았다.

 

1984년 7월 필립이 미국 부모로부터도 버려졌다. 기억이 형성된 ‘연장아 필립’은 첫 양부모를 만났을 때부터 아팠다. 버려지고 입양되고 이국의 나라로 보내질 때마다 충격과 당혹이 차곡차곡 쌓여 그의 마음을 갉았다. 양부모는 상필을 오래 인내하지 않았다. 입양 9개월 만에 필립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재입양 가정도 필라델피아에 있었다. 그 집엔 6명(친자녀 4명+필리핀 입양아 1명+위탁아 1명)의 아이가 있었다. 부부는 필립을 인내해줬다. 두 번째 양부를 따라 필립의 성은 클레이가 됐다. 이언의 양부는 의사였고 양모는 레스토랑 체인을 운영했다. 친자녀 셋을 두고 있었다. 이언도 양부의 성을 따라 테일러가 됐으나 테일러로서 좋은 기억은 없었다고 훗날 말했다. 4자녀 이상에게 주어지는 복지혜택과 세금감면을 위해 자신이 입양됐다고 이언은 생각했다. 버려지고 입양된 기억은 없었지만 버려지고 입양된 자로서의 삶이 모원의 마음을 갉았다. 8살(1982년)이 됐을 때 양부모는 이언에게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치료제를 투약했다. 12살(1986년) 땐 이언을 위스콘신주의 기숙 군사학교에 입학시켰다. 사격과 군사훈련을 하는 학교가 이언에겐 교도소와도 같았다. 이언이 2년 만에 퇴학당하자 양부모는 다른 주의 군사학교로 멀리 보냈다.

 

1988년 8월 박진수(가명·1981년생)가 미국으로 입양돼 마이클 로스(가명)가 됐다. 88올림픽 개막 20일 전이었다. 매년 ‘해외입양 금메달’을 목에 거는 나라는 올림픽 개최 자격이 없다며 국제사회가 비난했다.

 

1989년 4월 신성혁이 미국 오리건주로 재입양돼 아담 크랩서가 됐다. 두 번째 양부모로부터도 죽음의 경계까지 가는 학대(양부모 체포)를 당했다.

 

1993년 3월 INS(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Services·이민귀화국) file number: A23 509 133 TC/RCS. 양부모가 필립의 미국적 취득을 시도한 기록이 입양기관의 문서에 남았다. 병원과 소년원을 오가는 동안 필립은 시민권 심사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어떤 양부모들은 입양 절차를 시민권 취득으로 잘못 알았다. 어떤 양부모들은 절차와 비용 문제를 이유로 책임을 간과했다. 미국인이 됐다고 믿었으나 ‘공식 미국인’이 아니란 사실을 모른 채 살아온 입양인들이 많았다. 여권을 만들거나 투표를 하거나 범죄기록 조회 과정에서 ‘미국인 아님’이 확인된 입양인이 속출했다. 이언의 양부모는 이언의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지 않았다. 이언이 18살(1992년) 때 양부모는 ‘가족의 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이언은 테일러의 집을 나왔지만 테일러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경기도 고양시 벽제중앙추모공원에 안치된 김상필(필립 클레이)씨의 유골을 납골당 관계자가 반출하고 있다. 이문영 기자
경기도 고양시 벽제중앙추모공원에 안치된 김상필(필립 클레이)씨의 유골을 납골당 관계자가 반출하고 있다. 이문영 기자
‘내 나라’에서 거듭 쫓겨나는 사람들

 

2001년 필립은 아동시민권법(Child Citizenship Act)의 ‘예외인간’이 됐다. 1940년대 이후 전세계에서 35만여명의 아이들이 미국으로 입양됐다. 3분의 1인 11만1100여명이 한국에서 갔다. 시민권을 얻지 못한 입양인들은 법적 불이익과 ‘비국민’에게 닥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됐다. 입양과 동시에 시민권자가 되도록 하는 법이 이해 미국에서 시행됐다. 법은 만 18살(1983년 출생) 미만만 적용 대상으로 했다. 성인이 된 입양인들은 심사를 받고 자력으로 시민권자가 되라며 제외했다. 필립은 만 26살이었다. 원하지 않았어도 주어졌던 ‘미국인 됨’이 원해도 따기 힘든 자격증이 됐다. 상필의 정신질환과 약물중독도 이 무렵부터 악화됐다. 이언도 예외인간이 됐다. 양부모의 집을 떠나 한인들이 많이 산다는 도시를 찾아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는 5년 동안 노숙인으로 살았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에게 안정된 일은 주어지지 않았다. 길에서의 시간은 자신을 잊어야 버틸 수 있었다. 이언은 거리에서 약을 접했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2009년 11월 앨빈 카터가 입양 31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돼 다시 천규호가 됐다. 사장의 지시에 따라 트럭 배송을 한 그가 자신도 모르게 마약운반범이 돼 있었다.

 

2011년 3월 필립이 코카인 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0년 사이 우울증이 심해졌다. 폭행, 절도, 약물복용 등이 잦아졌고 정신병원 입원과 수감 횟수도 늘어났다. 최소 20여차례 체포됐고, 18차례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9차례 수감됐다고 필라델피아 법정은 기록(7월4일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보도)했다. 교도소 수감 중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이 미국 당국에 확인했다. 30년 가까이 살아온 땅에서 필립은 그날부터 ‘불법체류자’가 됐다. 이언은 2004년부터 아시아인들이 많은 하와이로 건너가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흔들려온 몸과 마음을 고정해줄 못은 하와이에도 없었다. 약물복용으로 다시 체포됐다.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이 하와이 경찰에 확인됐다. 34년 동안 ‘내 나라’로 알고 살아온 땅에서 이언은 법을 어겨 체류하는 ‘남의 나라 사람’이 돼버렸다.

 

2011년 7월 한국이 입양 보낸 필립을 미국이 28년 만에 추방했다. 한국이 포기해 필립이 된 그에게 미국은 ‘다시 상필이 되라’고 통보했다. 그의 삶은 버려짐의 연속이었다. 친부모로부터 버려졌고, 한국으로부터 버려졌으며, 첫 양부모로부터 버려졌고, 미국으로부터 버려졌다. 2001년 9·11 이후 미국은 추방에 온기를 두지 않았다. 구금 상태에서 비시민권자로 확인되면 추방과 기약 없는 구금생활 중 선택해야 했다. 미국 이민국 직원들은 상필을 인천공항에 내려둔 채 돌아갔다. 여비도 제공하지 않았고 도움을 청할 연락처도 주지 않았다. 이언은 필립보다 3개월 먼저 추방(4월4일)됐다. 이언 테일러가 입양 34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돼 다시 장모원이 됐다. 정체성은 누가 골라주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상필과 모원은 스스로 고민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한국과 미국이 그들의 정체를 주고받았고, 주고받는 대로 따를 것을 강요당했다. 버려진 입양인들을 미국이 추방하는 절차도 버리는 것이었다. ‘이태원을 찾아가면 한국어를 몰라도 살 수 있고 찜질방에서 자면 방값을 줄일 수 있다’는 정보가 이민국이 모원에게 베푼 호의의 전부였다.

 

2012년 6월 상필이 강원도 횡성의 ㅅ선교회로 보내졌다. 그는 서울 영등포의 공원에서 노숙 상태로 교회 목사에게 발견됐다. 미국 땅에 처음 내렸을 때 이상의 충격과 공포와 분노가 한국으로 쫓겨온 그를 휩쓸었다. 상필로 돌아왔으나 그는 필립이었다. 상필일 때의 언어를 잃었고 상필일 때의 기억도 거의 남지 않았다. 그에게 한국은 물기 한 방울 얻을 길 없는 사막 한복판일 뿐이었다. ㅅ선교회는 추방 한인들에게 쉼터를 제공해왔다. 그들을 돕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부터 소개받은 추방인들이 찾아왔다. 2000년대 중반까진 입국 공항의 경찰 외사계가 선교회로 보내기도 했다. 1990년대말부터 거쳐 간 추방인들 중 4~5명의 입양인이 있었다고 선교회 대표는 전했다. 입양을 민간에 맡겨온 국가는 추방입양인들의 돌봄도 오랜 기간 민간에 넘겼다. 모원은 이민국 직원이 알려준 대로 이태원을 찾아가 찜질방 생활을 했다. 갖고 있던 돈이 떨어졌을 때 모원의 노숙은 다시 시작됐다. 37살의 모원이 출생 직후 버려진 상태 그대로 되돌아갔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갔으나 되돌리고 싶은 삶은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모원은 2011년 8월 이태원 거리에서 한 해외입양인에게 발견됐다. 그는 찢어진 바지를 입고 짝이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과 나이, 노숙 경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 여름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 노숙인 상필과 모원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몸을 스쳤을지도 모른다. 내리지도 않은 뿌리를 두 번이나 통째로 뽑힌 그들에겐 땅을 더듬을 실뿌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7월13일 저녁 인천공항 지하 식당에서 오명석(존 컴프턴. 해외입양인연대 자문위원)씨가 김상필(필립 클레이)씨의 유골을 들고 출국(미국 양부모에게 전달)하기에 앞서 입양인들과 마지막 추도식을 준비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7월13일 저녁 인천공항 지하 식당에서 오명석(존 컴프턴. 해외입양인연대 자문위원)씨가 김상필(필립 클레이)씨의 유골을 들고 출국(미국 양부모에게 전달)하기에 앞서 입양인들과 마지막 추도식을 준비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파악되지 않는 ‘무중력 인간’

 

2012년 7월 상필이 경북 청송의 ㅈ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ㅅ선교회에서도 그는 추방의 고통을 호소했다. 마음이 혼란스러워질 땐 거리를 나체로 헤매기도 했다. 선교회는 “건강이 너무 안 좋아 협력 관계에 있는 ㅈ병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언어불통으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던 상필이 두 차례 병원 탈출을 시도했다. 모원을 발견해 돕던 사람들(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 대표, 김도현 뿌리의집 원장)은 2011년 가을부터 보건복지부와 중앙입양정보원(중앙입양원의 전신)을 찾아다니며 사태 파악과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모원은 한국 정부가 처음 접한 추방입양인(시민권 취득 여부 조사 계기)이었다. 모원의 존재가 확인된 뒤에도 비영리단체와 개별 의료인들의 도움이 있었을 뿐 행정지원은 준비되지 않았다. 2016년 6월 이태원에서 노숙하던 모원은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라’는 노인을 때려 경찰에 체포됐다. 며칠 뒤엔 진료받던 정신과의원에서 소란을 피우다 ㅇ시립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됐다.

 

2012년 8월 입양 38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된 최남철이 은행강도로 체포(2017년 2월 가석방)됐다. 살아남으려고 그는 장난감총을 들었다. 그도 상필이 다녀가기 전 ㅅ선교회에 머물렀다.

 

2012년 9월 상필이 홀트일산복지타운으로 거주를 옮겼다. 중앙입양정보원에서 전환한 중앙입양원(입양특례법에 따라 설립)이 상필의 입양기관이었던 홀트에 요청했다. 홀트는 상필의 추방 사실을 이때 인지했다. 홀트 이사장이 미국 양부모에게 상필의 옷과 진료기록 등을 받아와 건넸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모원이 폭행 건으로 경찰서에 신고됐다. 정부가 추방 사실을 파악했지만 여전히 중력은 모원에게 미치지 않았다. 상필도 모원도 ‘무중력 인간’이었다. 최남철도 천규호(추방 뒤 정부 파악까지 5년)도 잡아당겨줄 끈 하나 없이 한국에 던져졌다. ‘연고 제로’의 대기로 쏘아올려진 그들은 삶을 지탱해줄 공적 자장에 들어가지 못한 채 둥둥 떠다녔다.

 

2012년 12월 거친 행동으로 마찰을 빚은 상필이 ㅁ병원(경기 고양)에 입원했다. 추방은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국가와 국가가 벌이는 외교 사안이었다. 미국은 입양인들을 쫓아내면서 그 사실을 한국에 통보하지 않았고(외교부 재외동포과 “현재 추방 통보는 의무사항이 아니어서 구금 상태의 입양인이 한국에 영사조력을 신청해야 사실 확인 가능”), 통보받지 못한 한국은 입양인의 추방과 입국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현재 한국 정부가 인지(복지부 입양정책과 “추방 뒤 국내 입양인 사회를 통해 알음알음으로 알 뿐 정확한 수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하고 있는 추방입양인은 6명(에이케이 샐링 해외입양인연대 사무총장 “내가 아는 경우만 최소 10명”)이다. 정부가 미리 알고 있었던 사례는 신성혁(2016년 11월 추방)뿐이었다. 방송(문화방송 <휴먼다큐 사랑>)으로 추방이 예고됐던 그는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픽업(중앙입양원)될 수 있었다. 파악되지 않는 시간 동안 파악되지 않는 사람들은 거리잠을 자고, 정신병원을 떠돌고, 장난감총을 구했다.

 

2013년 10월 상필이 중앙입양원 긴급구호시설 ㄹ의집(위탁운영. 현재 폐쇄)에 입소했다. 추방 2년 만에 그는 한국 정부의 긴급구호대상이 됐다. 상필은 목소리가 좋았다. 그는 환청을 들었고 그 좋은 목소리로 환청 속 누군가와 대화했다. 세상의 시끄러움을 견딜 수 없을 땐 귓속에 씹던 껌을 끼워 넣었다. 모원은 상필 입소 한 달 전 ㄹ의집에 와 있었다. 서울역에서 벌거벗고 노숙하던 모원은 ㅇ시립정신병원에 두 번째 강제입원(8월)된 뒤 퇴원했다. 석 달 차이(기록상)로 태어나 석 달 차이로 추방된 상필과 모원이 한 달 차이로 입소해 ㄹ의집에서 만났다. 방 두 개짜리 집에 네 명이 살았다. 상필과 모원이 같은 방을 썼다. 모원이 상필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사진 속에서 모원의 미소와 상필의 무표정이 대비됐다.

 

2013년 11월 상필과 모원 사이에 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마음을 앓는 두 사람을 한방에서 지내도록 한 것이 잘못이었다. 모원이 두 차례 입원했던 ㅇ시립정신병원에 상필이 강제입원(2014년 2월 퇴원)됐다.

 

2014년 4월 마이클 로스가 입양 26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돼 다시 박진수가 됐다. 금지약물 소지로 수감 중 ‘시민권 없음’이 확인됐다.

 

2014년 11월 상필(5월 ㄹ의집 재입소)과 모원 사이에 두 번째 폭행 사건이 있었다. 모원이 자신의 물건을 훔친다고 상필이 오해했다. 상필의 폭행으로 모원의 두개골이 함몰됐다. 모원은 뇌수술을 받았고 상필은 교도소에 수감(2년)됐다.

 

2015년 7월 모원이 이태원에서 폭행사건으로 구치소에 수감(징역 8개월)됐다. 뇌수술을 받은 뒤 그는 ㄹ의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다. 공포의 기억이 깃든 방에서 사는 게 무섭다고 했다. 고시원에서 자고 이태원 식당에서 일하다 폭행에 연루됐다. 2016년 3월 출소한 그는 법무부 보호복지공단(옛 갱생보호공단) 서울지부에 입소됐다.

 

2016년 11월 아담 크랩서가 입양 37년 만에 한국으로 추방돼 다시 신성혁이 됐다. 두고 나온 물건을 찾으러 양부모 집에 들어간 그는 주거침입과 절도죄 등으로 전과자가 됐다. 상필, 모원, 규호, 남철, 진수, 성혁 6명은 모두 1983년 이전 출생자였다. 1950년대부터 2016년까지 한국이 전세계로 보낸 해외입양인은 16만6512명(복지부가 성가정입양원·대한사회복지회·동방사회복지회·홀트의 입양기록을 토대로 파악)이었다. 복지부가 밝힌 ‘미국 시민권 취득 미확인 입양인’은 1만9429명이다. 한국펄벅재단과 수백 개의 고아원이 직접 입양시킨 사람들을 놓친 수치다. 태미 고 로빈슨 한양대 교수(입양과 시민권 문제 연구)는 전체 입양인 수를 20여만명으로 추정했다. 시민권 미확인자들 중 6%의 ‘상필들’(시민권 취득 최종 거부)이 있을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허상’이 만든 비극

 

2017년 3월 교도소 출소(2016년 12월) 뒤 머물던 보호복지공단(경기북부지부)에서 상필이 ‘위험행동’으로 퇴소 처리됐다. 두 달 전 상필은 새벽에 휘발유를 마시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이유를 묻는 중앙입양원 상담팀장에게 그가 말했다. “아마 죽고 싶었던 것 같다.”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의사소통이 힘들고, 많이 외롭다고 했다. 상필은 미국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최소한 영어권 나라로라도 갈 수 있길 바랐다. 그 바람을 준비하고 실행하기에 상필은 너무 지쳐 있었다. 은평구 정신요양시설에서 입소상담을 받았으나 생계급여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입소를 거부했다. 상필은 교도소 수감으로 끊긴 일반수급(생계급여+의료급여)을 회복하고 싶어 했다. 보호복지공단에서 퇴소(1월)된 모원은 서대문구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새벽에 고함을 지르는 그를 경찰이 출동해 ㅇ시립정신병원에 강제입원(3번째)시켰다.

 

2017년 4월 상필은 홀트일산복지타운(고양시) 건너편 원룸에서 지냈다. 한 달 전 정신요양시설 입소를 거부한 그가 택시를 타고 홀트로 찾아왔다. 원룸(홀트가 방값·생계비 지원)에서 살며 근처 지역도서관을 찾아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모원은 정신병원을 나와 고시원(서대문구청이 사례관리)에 방을 잡았다.

 

5월19일 모원이 고시원에서 체포됐다. 다툼을 벌이던 고시원 총무가 신고했다. 경찰이 출동해 신원을 조회했을 때 모원의 수배 사실(지난해 경찰 출석 요구 불응)이 조회됐다. 모원은 생활의지가 강했다. 보호복지공단에 있을 때도 생선포장을 하며 돈을 벌었다. 모원은 본래부터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어소통이 안 될수록 자극을 받았고 자극을 받을수록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모원의 거듭된 수감은 고시원 생활과 무관치 않았다. “고시원은 안 된다고 관계기관에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고시원은 평생 한국에서 산 사람도 버틸 수 없는 최저 생활공간이다. 이 땅에서 살 권리를 보장하지 못한 국가의 실패를 반성하는 차원에서라도 원룸 수준 이하는 안 된다. 풍부한 언어 서비스와 의료지원, 일대일 사례관리가 주거와 함께 제공되는 센터가 시급하다.”(김도현) 모원은 구치소에 수감됐다.

 

5월20일 상필이 원하던 일반수급을 회복했다.

 

5월21일 밤 11시45분. 상필은 고양시의 이름 고운 아파트에 있었다. 원룸에서 10여㎞(차량으로 30분 거리) 떨어진 장소였다. 원룸에서 아파트로 가는 길마다 ‘도시의 평소’가 즐비했다. 물오른 가로수가 초록으로 생동했고,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 신호등 앞에서 시계를 봤다. 그에겐 없는 가족들이 도로 양쪽 아파트마다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상필이 결코 진입할 수 없는 공고한 일상이 도처에 충만했다. 그가 왜 그 아파트로 들어섰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14층 복도 시시티브이(CCTV)에 찍힌 상필이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원룸에선 휘발유로 추정되는 액체가 페트병에 담겨 발견됐다. 상필은 추방 뒤 사망(폐파열, 팔다리 및 골반 골절, 흉부손상)한 첫 입양인이었다. 유서는 없었다.

 

5월24일 상필의 장례가 치러졌다. 두 개의 이름으로 불렸지만 어느 이름으로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성혁도 상필의 관을 들었다. 그는 “(상필의 영정에서) 나의 내일을 본다”고 했다. 한국 입양정책의 개선은 입양인들이 스스로의 눈물을 닦는 과정이었다. 2011년 그들의 노력으로 입양특례법이 개정(법원의 허가해야 입양 인정 등)됐으나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상필은 끝나지 않는 해외입양의 역사와 부재하는 추방통제 시스템(복지부 “인구아동정책관이 3월말 미 상·하원 의원 보좌관 면담 때 1983년 이전 출생자의 시민권 보장 법안 발의 요청”)의 틈에서 죽었다. 미국 내 입양인들이 로스앤젤레스 한국 총영사관 앞에서 필립의 죽음을 애도하며 항의(5월30일)했다.

 

6월23일 모원에게 검찰이 징역 8개월(폭행)을 구형했다.

 

7월11일 입양인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문재인 대통령에게 ‘해외입양 산업’의 종결을 촉구했다. 입양 활성화 대신 미혼모 등 원가정 보호를 우선하고, 시민권 취득 실패를 해결할 입양 사후 시스템을 시행하며, 추방입양인들을 위한 주거·의료·취업 등 복지 서비스 제공을 요구했다. 88올림픽 때의 수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평창동계올림픽(2018년 2월9일) 전 종결 선언’을 호소했다. 시몬 은미(뿌리의집 대외협력팀장)는 물었다. “쫓겨 되돌아오는 입양인들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가. 입양이 우리에게 더 좋은 삶을 제공할 것이란 믿음은 허상이다.”

 

7월13일 오후 3시. 벽제중앙추모공원에 안치된 상필의 유골을 입양인 오명석(미국명 존 컴프턴. 해외입양인연대 자문위원)이 반출받았다. 오후 6시. 입양인들이 인천공항에 모여 상필을 보내는 마지막 추모 모임을 열었다. 밤 10시. 오명석이 상필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날아올랐다. 상필의 유골은 7월19일 필라델피아의 양부모에게 전해질 것이었다. 사망 직후 유골 인수 의사를 묻는 오명석의 이메일에 양부모는 “고맙다”고 답했다. 상필의 미국 재입국은 죽었으므로 가능했다. 그는 자신을 추방한 나라로 뼛가루가 돼서야 돌아갈 수 있었다. 모원도 날고 싶어 했다. 그는 영화 <스타워즈>의 제다이가 되길 꿈꿨다. 자신을 떠넘겨온 두 나라의 하늘을 자유롭게 걸어다니고(skywalker)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동댕이쳐져온 그의 시간을 ‘포스’가 붙들어주길 소망했는지도.

 

7월14일 모원의 재판이 속행했다. 선고가 예정돼 있던 7월5일 재판에서 새로운 사건이 병합됐다.

 

*해외입양인연대(02-325-6585) 후원: 국민은행 375301-04-000710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02935.html?_fr=mt1#csidxd6ef9012627e37aaa6167c3ddc172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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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가 매일 하는 기도

달라이라마가 매일 하는 기도

청전 스님 2017. 07. 14
조회수 835 추천수 0
 

 

-달라이3.jpg» 종교 달라도 이렇게 친밀할 수가. 파키스탄 국경지역 누브라 방문한 달라이라마가 환영 나온 무슬림들 중 한 할아버지의 염소수염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치고 있다. 

 

이곳 다람쌀라는 심한 우기로 연일 비와 찐한 운무속 입니다.

인도에서 유일하게 우기가 없는 지역아니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이 라닥 지방 입니다.

달라이라마 존자 노구에 건강이며 여러가지 이유로 우기철에는그쪽 방문과 당신 정진의 시간으로 보내시지요.

누브라 지방은 바로 파키스탄 국경과 맞닿은 지역이라서 아주 민감한 곳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쪽에 매년 들어가는데 미리 특별 허가서(딱 주일)를 얻고가는 도중에 가며오며 대여섯번 검문검색을 당하는 곳이기도 합니다제가 애정을 가지고 가는 곰빠()이 세군데 기가막힌 자리에 있답니다또 히말라야 주 능선을 넘는데 고개는 만년설로 세계 최고 높은 차량 고개로칸둥라(5608m)를 넘어야 합니다가끔은 한여름에도 폭설로 며칠간 두절되기도 하지요인도 군인들이 늘 비상 대기 한답니다.

 

-달라이1.jpg» 달라이라마가 군용 헬기로 이동하는 중

 

 

 

-달라이2.jpg» 험한 고개 넘어 법문을 듣고자 많은 주민 차량이 고개를 넘어간다. 

 

 

-달라이4.jpg» 파키스탄 국경이라서 무슬림 신도들이 많은데 그들도 달라이라마에 대해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환영을 나온다.

 

 

-달라이5.jpg» 절 밑에 마을 학교 아이들이 피리소리에 맞춰 환영 노래를 부른다.

 

 

-달라이6.jpg» 달라이라마를 보는 얼굴들에 모두가 감사와 희열, 감동이 베어있다.

 

 -달라이7.jpg

 

이 세상에서 많은 유명인사가 있지요만 달라이라마는 사람을 위한 성직자로 우리에게 늘 빛과 희망이다.

당신께서 많은 나라를 다니시며 불교 말씀 보다는 미래의 인류를 위한 두가지 말씀 ㅡ 인간성의 향상과 종교간의 화합을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다.

달라이라마가 늘 하는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행복은 부처가 줄 수 있는 기성품이 아니다행복은 당신의 행위로 부터 나온다.

 

세 가지 R을 따라야 한다.

자신에 대한 존중타인에 대한 존중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Follow the three Rs : Respect for self, Respect for other, Responsibility for all your actions.

 

성공여부는 성공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했는가라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늘 반복해서 말씀드리는거지요만 또 다시 한번!

 

매일 매일깨어날 때 생각하라,

오늘은 내가 살아있어서 행운이고,

나는 소중한 인생을 가지고 있고,

나는 그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지 않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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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한국정부, 고국으로 추방된 입양인 통계조차 없다

 
[심층 취재- 한국 해외입양 65년] 1. 추방 입양인 - ①
2017.07.14 00:06:05
 

 

 

 

이 기사는 이경은 국제인권법 전문가, 제인 정 트랜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의 도움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 

 

# 필립 이야기

필립 클레이, 한국 이름 김상필. 2017년 5월 21일, 그는 경기도 일산의 한 아파트 14층에서 몸을 던져 42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죽었지만, 생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 그는 여덟살 때 미국으로 입양돼, 29년을 미국에서 살았다. 그러다 2011년 한국으로 추방됐다. 필립의 양부모가 그의 시민권 획득 절차를 밟지 않아, 미국 시민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 입양인 필립은 왜 고국 아파트 14층에서 뛰어내렸나?)

생전에 필립과 교류했던 존 컴프턴(해외입양인연대 자문위원) 씨는 "한국에 입국할 당시 그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고, 아는 사람도 한 명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미국 정부는 '범죄를 저지른 불법 체류자'라는 이유로 필립을 '출생국'으로 추방했다지만, 그에게 한국은 타국이나 다름없었다.  

필립은 한국에서 5년 동안 매우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필립은 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기도 했고, 노숙자 보호시설, 교도소 등을 전전했다.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입양원에서 그의 한국 생활을 도왔다지만, 턱없이 부족한 지원이었다. 그는 결국 '자살'로 미국과 한국에서의 힘겨웠던 삶을 내려놓았다. 컴프턴 씨는 "필립을 입양 보낸 입양기관과 한국 정부는 그에게 적절한 관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필립의 비극은 적절한 행정적 도움과 교육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생전에 컴프턴 씨 등 지인들에게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여러 번 밝혔던 필립은 죽어서야 미국으로 돌아간다. 입양인들의 노력으로 양부모에게 연락이 닿아 유골을 인도받겠다는 의사가 확인됐다. 홀트는 '개인 정보'라는 이유로 필립의 양부모의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는 컴프턴 씨의 요구마저 거부했다. 필립의 유해는 7월 13일 한국을 떠나 19일 양부모에게 인도된다고 컴프턴 씨는 밝혔다.  

 

 

▲ 필립 클레이 씨의 유골이 13일 인천공항을 떠나 19일 미국에 있는 양부모에게 인도된다. 사진은 13일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 가진 필립을 위한 작은 추도식 장면. ⓒ프레시안(전홍기혜)



# 팀 이야기 

팀, 한국 이름 모정보.('고아호적'에 기재된 이름으로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팀은 3살 때인 1977년 미국으로 입양됐으나, 34년 만인 2011년 서울 이태원에서 노숙자로 발견됐다. (관련기사 : 미국 입양된 아이가 34년만에 이태원 노숙자로 발견된 사연)

노숙자로 발견됐을 당시 팀은 신분증도 없었고, 본인의 이름, 나이 등에 대해서도 정확히 이야기하지 못했으며,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당한 의미도 제대로 몰라 스스로를 '세계시민'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가 가진 돈은 1달러도 안 됐고, 찢어진 바지에 짝짝이 신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팀은 어릴 때부터 정신분열증 증상이 있었고, 아마 이런 이유로 양부모와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숙자로 발견된 팀을 돕기 위해 트랙에서 양부모들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팀이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했다"며 더 이상 연락을 취하지 말아달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팀은 '뿌리의 집'(해외 입양인 지원을 위한 비영리 민간단체)의 도움으로 겨우 주민등록을 하고 주민등록증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과정을 도와준 제인 정 트랜카 씨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추방 입양인들이 한국의 관공서를 통해 신분증을 만들고, 일시 거주 지원 등 입양인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에 신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뿌리의 집 김도현 목사는 보건복지부와 팀을 입양 보낸 입양기관인 대한사회복지회에 팀의 장기적인 치료와 보호를 책임지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대한사회복지회 측은 팀에게 '모텔비 200만 원'을 지원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고 김 목사는 밝혔다. 결국 팀은 서울시립 은평병원에 강제 입원조치 됐다. (관련기사 : 34년만에 노숙자로 발견된 팀, 그 후 이야기) 정신분열 증상이 종종 폭행으로 표출되는 모습을 보인 팀은 이후 정신병원과 교도소를 왔다갔다하면서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 격리된 상태로 지내고 있다. 

# 아담 이야기 

아담 크랩서, 한국 이름 신성혁. 그는 3살 때인 1979년 두 살 위인 누나와 함께 미국으로 입양됐다.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뒤, 혼자서는 도저히 남매를 키울 수가 없어 보육원의 권유로 입양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으로 가면 잘 먹고 교육도 잘 받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첫 번째 양부모는 아담을 가죽벨트로 때리고 지하실에 가두는 등 학대를 했다. 5년 뒤 아담과 누나는 버림을 받았고, 누나가 다른 가정으로 입양이 되면서 남매는 헤어져야 했다. 

2년 정도 보호시설을 전전하다가 아담은 크랩서 부부에게 다시 입양이 됐다. 크랩서 부부의 집에는 3명의 친자식, 5명의 입양아동 이외에도 위탁아동 등 늘 10여 명의 아이들이 함께 지냈고, 때문에 지역 언론 등에는 '모범적인 입양 가정'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크랩서 부부는 입양아와 위탁아동들을 상대로 구타, 폭행 뿐 아니라 성적학대까지 일삼았다고 한다. 

이들 부부의 악행은 1999년 위탁아동 중 1명이 친부모에게 알리면서 외부로 드러났다. 이들은 강간 3건, 강간 미수 1건, 학대 14건, 폭행 2건 등으로 기소됐으나 재판 기간 동안인 3개월간 투옥됐다가 5000달러의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 아담은 또 다시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재판에서 '학대를 받지 않았다'고 거짓 증언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재판이 끝난 뒤 크랩서 씨에 의해 길거리에 버려졌다. 2번의 입양과 2번의 버림, 16살에 거리의 노숙자로 전락한 아담은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이처럼 학대만 일삼던 양부모들이 아담의 시민권 문제에 신경을 써줬을 리가 없었다. 

아담은 2015년 가정폭력 등 범죄로 이민국 구치소에 수감됐고, 2016년 10월 24일 이민국 재판에서 추방 결정이 내려졌다. 아담의 이야기는 MBC 다큐멘터리 <사랑> 등 국내 언론 뿐 아니라 <뉴욕타임스>에도 보도되며 추방 입양인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미국에 자녀가 3명이 있는 아담은 추방 이후 미국에 있는 가족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 아담의 사연을 다룬 다큐멘타리 ⓒMBC 화면 캡처



입양 보내면 끝? 아니다 

'입양'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다. 특히 해외입양은 아동이 태어난 가정과 문화, 국가라는 개인 정체성 형성의 기본 조건 자체가 바뀌는 일이다. 그러나 아동은 이 결정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못한다. 태어난 가정에서 떨어져 나와, 출생 국가가 아닌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서, 생면부지의 부부를 새로운 부모로 맞아 그 가족의 일원이 되기까지 입양 아동의 의사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결정을 하기에 불가능한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모든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맡겨진다. 

입양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다. 입양 아동에겐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 과제로 주어진다.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진 가족 구성원들, 전형화 시켜본다면 백인 부모 (형제들) 속에서 동양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해야 하는 일이다. 2002년 스웨덴의 국제입양아동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입양인은 현지인보다 자살률이 3.7배 높고, 약물 중독은 3.2배, 범죄 경력(투옥)은 1.5배 높았다. 또 결혼하는 비율도 현지인 56퍼센트의 절반인 29퍼센트, 취업률은 현지인 77퍼센트 대비 60퍼센트다. 취업을 하더라도 입양인의 50퍼센트는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수입 범주에 속했다(연구 대상 아동 1만1320명 중 8700명이 아시아 출신이었고 대부분이 한국 출신이었다).

 


하지만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낸 한국 사회는 입양을 보낸 것으로 '끝'이라고 여겨왔다. (한국은 1953년 해외입양을 시작해 약 20만 명의 아동을 해외입양 보냈다고 추산한다.)  

'추방 입양인'의 존재는 한국 정부가 자국의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내는 일을 얼마나 무책임하게 처리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디오피아, 과테말라, 필리핀도 이렇게 자국의 아동을 방출시키진 않았다. 아동의 국제입양은 출신국의 입양법, 수령국의 이민법, 입양법, 국적법적 절차를 모두 거쳐야 완료되는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절차다. 한국의 입양법과 제도가 60여년 동안 이런 과제에 무지하거나 외면해온 탓에 성인이 된 입양인들이 이중, 삼중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미국에 추방 위기 한국인 입양인 더 있다…오스트리아도 국적 미취득 문제 있다

미국과 같은 아동 수령국 입장에서 입양은 '이민'의 한 종류이기도 하다. 때문에 입양을 위한 입국과 국적 획득 과정을 분리해 관리할 수밖에 없다. 필립, 팀, 아담 등 한국으로 추방된 입양인들은 모두 양부모가 아동의 국적 취득 절차를 따로 밟지 않았다. 이런 입양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미국 정부 입장에서 이들은 추방 대상인 '불법 체류자'가 된다. 컴프턴 씨에 따르면, 현재 미국 네바다와 텍사스 주에도 추방 위기에 처한 한국 출신 입양인들이 있다. 

또 입양인들의 국적 취득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태미 고 로빈슨 한양대 교수는 "미국으로 입양된 입양인들만 시민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며 "오스트리아에서도 한국 출신 입양인들의 국적 미취득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 정부에 이들 입양인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한국에서 입양을 보낸 나라가 20여개 나라가 되기 때문에 정부 대 정부의 협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12일 입양인들이 산업화된 해외입양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프레시안(전홍기혜)



미국 내 국적 미취득 입양인 중 과반 이상이 한국 출신이다

미국 해외입양인들의 시민권 취득을 위한 단체인 '입양인 권익 캠페인(The Adoptee Right Campaign)'은 현재 미국 해외입양인 중 약 3만5000명이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한다. 보건복지부는 현재 미국으로 입양된 이들 중 1만9429명의 국적 취득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국적 미취득 입양인 중 절반 이상이 한국 출신 입양인인 셈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한국과 미국의 입양제도에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로빈슨 교수는 "추방 입양인 문제는 한국의 입양 역사를 제대로 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해외입양의 가장 큰 특징은 민간 국제입양기관이 입양 업무를 위탁, 대리하며, 그 과정에서 외국의 양부모로부터 수수료를 챙긴다는 것이다. 4대 입양기관(홀트아동복지회, 동방사회복지회, 대한사회복지회, 한국사회봉사회)가 입양 실무를 담당하는 기관이며, 2012년 입양특례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국가 기관이나 사법 절차는 입양 과정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이 '자국 국민의 보호'라고 본다면, 입양 과정을 민간기관에 맡겨놓았다는 것은 그 기본적인 역할을 방기했다는 말이다. 미국에서 해외입양 실무를 담당하는 기관 역시 미국 정부의 사회복지체계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사설 기관이다.

국제인권법 전문가인 이경은 박사(서울대학교 법학과)는 "한국에서 국제입양은 시장 원리에 의한 사적기관이 주도했다"며 "그러다보니 송출국이나 수령국이 아동보호를 강화하는 법제가 아니라 국제입양의 절차와 기준을 대폭 간소화하여 사적기관의 입양의 중개과정을 수월하게 하는 법제로 대응했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해외입양이 60년이 넘도록 '국가'라는 틀 밖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해외입양 아동의 가장 기본적인 안전망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적 취득' 문제마저 발생하게 됐다는 지적이다. 입양특례법에서 '입양인의 국적 취득 여부를 입양기관이 확인해 정부당국에 보고'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이 박사는 이 조항이 그나마 국외로 입양된 아동의 최소한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라면서 "그 최소한의 의무조차 정부와 입양기관은 외면해 왔다"라고 말했다.  

복지부는 지난 2011년 이태원에서 팀이 노숙자로 발견된 사실을 알고 난 뒤에서야 미국으로 입양된 이들의 시민권 취득 문제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이를 통해 2012년 당시 2만3000여 명의 입양인들의 시민권 취득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이전까지는 관련 통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혜지 보건복지부 아동복지정책과 사무관은 "2012년 첫 조사 이후 입양기관들을 통해 통계를 계속 업데이트해서 1만9000여 명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복지부의 조사 역시 정확한 통계라고 보기 힘들다. 이 숫자는 4대 입양기관을 통해 해외로 입양된 아동의 국적 취득 여부를 확인한 수치다. 로빈슨 교수는 "4곳 이외 다른 입양기관을 통해 간 입양인들을 포함하면 한국이 지난 65년간 입양을 보낸 아동의 수는 복지부가 집계한 16만5000명보다 훨씬 많은 20만 명이라고 보는 게 맞다"며 "미국과 호주 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펄벅재단을 통해서도 상당 수의 한국 아동이 입양됐지만 이 숫자는 한국 정부 통계에 들어와 있지 않다"고 했다. 그는 또 지난해 60세인 한국 출신 입양인이 미국 시민권을 뒤늦게 취득한 사례를 언급하며 "이 분은 고아원을 통해 직접 입양이 보내진 경우"라면서 "65년 동안 400여 개의 고아원을 통해 직접 입양 보내진 숫자도 누락돼 있다"고 밝혔다. 

외교부 "추방 입양인 통계 없다" 

추방 입양인 문제는 한국과 미국 정부의 책임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정책의 가장 기본이 되는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외교부 영사서비스과는 "미국에서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상태로 우리나라에 추방된 입양인에 대한 통계는 없는 상황"이라며 "이는 입양 여부, 범죄 여부 등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이 영사접견 등 당사자의 진술에 기초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외교부는 "해외입양인이 미국 사법당국에 의해 추방이 확정될 경우 본인 또는 미국 사법당국이 우리나라 재외공관에 입국을 위한 여행문서(여권 또는 여행증명서) 발급을 요청하게 된다"며 "재외공관은 여권법 등 관계법령에 의해 여행문서를 발급하되, 우리나라 국적 진위 여부 및 인도적 사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도록 하고 있다"고 추방 절차에 대해 설명했다. 

이경은 박사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추방되는데 입양인인지 몰랐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며 "적어도 해당 업무를 맡은 담당자 차원에서는 인지했으나 이런 현황을 파악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 아닐까 한다"고 문제제기했다.  

복지부 김혜지 사무관은 "복지부에서는 중앙입양원을 통해 추방 입양인에 대한 현황 파악과 지원 업무를 하고 있다"며 "현재 중앙입양원이 관리하고 있는 추방 입양인은 5명이다. 6명이었는데 김상필(필립) 씨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컴프턴 씨는 "내가 알고 접촉한 추방 입양인은 8명"이라고 말했다.

 

 

 

▲13일 필립의 유해가 미국으로 돌아가기전 인천공항에서 입양인들은 작은 추도식을 가졌다. 생전에 필립과 알고 지낸 컴프턴 씨가 고인의 유해를 꺼내고 있다. ⓒ프레시안(전홍기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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