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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보법 위반 옥살이’에도 포기할 수 없는 IT사업가의 꿈

김지현 기자 kimjh@vop.co.kr
발행 2019-04-21 21:00:48
수정 2019-04-21 23: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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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IT사업가 김호씨를 지난 18일 서울 합정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IT사업가 김호씨를 지난 18일 서울 합정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민중의소리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국가보안법이 말이 되느냐! 지금이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아니고!”

지난해 8월 9일 이른 아침. 가족들이 아직 단잠에서 깨지 않은 그의 보금자리에 공안경찰이 들이닥쳤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하겠다는 황당한 이야기에 김호씨는 이같이 말하며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이내 공무집행 방해로 수갑을 채우겠다는 경고에 차마 아이들 앞에서 수갑을 찰 수 없던 아버지는 경찰을 따라나섰다. 

당시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민족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고, 4.27 판문점 선언까지 성공적으로 치러진 이후다. 사람들이 모이면 ‘이러다 정말 통일되는 것 아니야?’라는 식의 대화가 기분 좋게 오가던 때였다. 

남북 평화 분위기 속에서 오래전부터 이어온 대북사업이 드디어 빛을 보겠구나 희망을 품은 그에게 국가보안법은 생각지도 못한 청천벽력이었다. 국가보안법은 그렇게 김씨의 보금자리로 쳐들어왔고, 남북교류협력 사업의 새로운 길을 제시해보겠다는 꿈을 무너뜨렸다.

갑자기, 국가보안법이라니! 

“낭떠러지로 떨어진 줄 알았어요. 제 희망이 짓밟혔어요. 울분이 가득 했습니다. 화가 너무 났어요. 독방에 있으면서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북한 건강식품 판매를 시작으로 2002년 일찍이 남북경제협력 사업에 뛰어든 그는, 2010년 5.24 대북 제재조치로 사업이 불가능해지자 IT사업으로 눈길을 돌렸다. 중국법인을 통해 북한 개발팀에 얼굴인식 프로그램 하청을 맡기는 제3자 무역 방식이었다. 간접적으로 북한과 접촉하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검찰은 양모씨 등 중국 중개인들을 구체적 근거도 없이 ‘북한 공작원’으로 지목하고, 김씨가 과거 학생 운동을 한 전력이 있다는 내용 등을 적어 공소장을 완성시켰다. 김씨가 ‘북한’이라는 존재를 숨긴 채 사업을 했고, 그 과정에서 북한의 ‘지령’에 따랐다는 것이다.

김씨는 인터뷰 과정에서 이 같은 검찰 주장에 반하는 서류를 공개했다. 2006년부터 2012년 까지 매년 통일부에 제출했던 대북 사업 계획서, 사업 내용 등이 담긴 접촉신고서였다. 검찰이 ‘존재를 숨겼다’고 주장한 양씨의 이름이 기재돼있었다. 

그는 양씨에 대해 “숨길 이유가 없다”며 “그의 정체성은 조선족, 중국국민이다. 사업을 위해 소개받은 수많은 중국 중개인 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검찰은 김씨 회사의 얼굴인식 기술 프로그램이 ‘악성 프로그램’이라며 ‘파일삭제’, ‘화면캡처’ 기능 등을 위험 요소로 꼽았다. 이러한 악성 프로그램이 북한의 목적에 따라 국내 주요 기관의 컴퓨터에 접속해 핵심 정보를 삭제하거나 빼내가는 등의 사이버 테러에 이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인식 프로그램으로서 ‘파일삭제’는 정상적‧필수적인 기능이다. 행정안전부 가이드라인에는 수집된 개인 영상정보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삭제하도록 돼있다. 영상 파일 속에서 얼굴을 인식해내기 위한 화면캡처 기능 또한 마찬가지다. 

검찰의 주장은 IT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경우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다. 김씨는 “기술에 대해 잘 모르는 대중들에게 근거 없는 공포감을 조성하려 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말에 변론해야 한다. 답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재판 초기 검찰은 이 같은 논리를 펼치며, 김씨의 회사가 납품한 얼굴 인식기술 프로그램에 ‘악성코드’가 심어져있다고 주장했다. 디지털포렌식, 증인신문 등을 통해 이를 입증하려 했다.

그러나 별다른 악성코드는 발견되지 않았다. 검찰이 진행한 디지털포렌식 결과를 통해서도 사이버테러로 볼 수 있는 파일 등은 추적된 바 없다. 

또한 검찰이 법정에 불러 세운 다수의 거래처 업체 직원들은 하나같이 “바이러스 피해 사례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실제 한 증인은 재판장이 김씨 측이 보낸 이메일에 첨부된 파일에 바이러스가 심어져있었느냐고 묻자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런 멍청한 짓을 왜 하느냐”고 반문했다. 상식적으로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족적이 뻔히 남는 이메일이 아니라, 직접 만나서 USB 등을 통해 건넸지 않았겠냐는 것이다.

법원 자료사진
법원 자료사진ⓒ민중의소리

‘위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처벌할 수 있는 국보법 

최근 검찰은 기존의 주장을 바꿨다. ‘현재로서 사이버 테러라는 결과가 일어난 적은 없었지만, 앞으로 그런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김씨 업체가 실제 사이버테러를 벌인 적이 없고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 사업 자체가 지닌 사이버테러 ‘위험성’ 자체로 국보법 혐의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악성코드의 존재 등 사이버테러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검찰, 김씨는 ‘입증을 못하니, 갑자기 위험 가능성을 강조하기로 전략을 바꾼 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든다고 했다.

김씨는 “위험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 그런 말장난을 검찰이 재판에서 하고 있다”고 격분했다.

검찰은 최근 재판부에 김씨에게 적용한 혐의인 ‘국가보안법 위반 상 군사상 기밀’은 “반국가단체에 대하여 비밀로 하거나 확인되지 아니함이 대한민국의 이익이 되는 사실, 물건 또는 지식 등 ‘모든 정보자료’를 의미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그러면서 “군사기밀보호법상 ‘군사기밀’과 구별되는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군사기밀보호법상 ‘군사기밀’은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아니한 것으로서 그 내용이 누설되면 국가안전보장에 명백한 위험이 따르는 정보를 뜻한다. 

김씨는 “이걸 보고 사건의 실체를 더 명확히 알게 됐다”며 “도대체 ‘모든 정보자료’라는 게 뭐냐. 이얼령 비얼령,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뭐든지 마음대로 ‘위험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된다. 그런 가능성 자체로 처벌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건 그냥 괴롭히는 거다. 결과적으로 북한과 사업을 하는 자체로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인데, 지금과 같은 평화 시대에 너무 부당한 처사다”고 울분을 토했다.

7일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떠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내외와 문재인 대통령내외가 환송행사에서 참석자들에게 박수를 받고 있다.
7일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떠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내외와 문재인 대통령내외가 환송행사에서 참석자들에게 박수를 받고 있다.ⓒ2018남북정상회담 공동사진기자단

검찰은 왜 나를 가뒀나? 

그는 요즘 들어 ‘대북사업을 하는 다른 큰 회사들도 많은데 왜 나 같은 피라미를 가뒀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한다. 김씨는 고민 끝에 ‘내가 운동권 출신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기소하진 못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영장을 보면 제가 학생 운동권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실질적으로 제 경력을 가지고 대중의 반북정서를 자극해 공포를 심어준 것이 아닌가요. 제 얼굴인식 기술 프로그램은 아직 판매가 된 것도 아니었고 개발과 투자가 더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운동권 출신이 아니었다면 이정도의 경제 교류를 가지고 문제 삼을 수 있었을까요. 검찰이 기소하자마자, 보수매체에서는 즉시 ‘운동권 출신 대북 사업가’라고 보도했습니다.” 

지난 설 명절을 앞두고 보석 석방된 그는 수감됐던 6개월 간 상당한 고객들과의 계약이 무산돼 사업을 새롭게 일궈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김씨에 따르면 그의 사업이 ‘국보법 위반’으로 지목되면서, 그의 사업체 외에도 남북협력으로 진행됐던 IT사업 전반이 타격을 입고 위축된 상황이다. 김씨 회사와 같이 중국법인을 통해 북한 기술자들에게 프로그램 기술 개발 하청을 주는 사업구조는 국내 IT 업계에서 알음알음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는 “북한의 기술력도 좋고, 이 분야 자체가 경쟁력이 있다 보니 대북사업 중 IT사업이 가장 성과가 좋다. 그런데 제 사건 이후 이 분야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며 “애니메이션 제작, 아이콘 디자인 사업 등 북한 하청으로 큰 수익을 냈던 과거 성공경험이 있는 업체들은 노하우도 있는 만큼 이런 사업을 다시 하고 싶어 하지만 제 사건이 터진 이후 겁을 먹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죄’보다도 제가 더 바라는 것은...”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남북 화해모드가 조성돼가는 과정에서, 제 사업과 같은 모범사례를 악의적으로 사장시키려 했다는 겁니다.” 

김씨는 자신 있게 그의 사업을 ‘모범사례’로 꼽았다. 

“사실 저희 얼굴인식 사업은 저를 구속하지 않아도 힘들었습니다. 앞서나갔던 분야였고, 저희가 국내 유일 사업체였으니까요. 저는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남북 경제협력의 정형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사업을 꼭 성공시켜서 그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남북 화해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사명감도 있었습니다. 오랜 개발 과정에서 사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지만 그래서 버텨올 수 있었는데….” 

그는 북한의 프로그램 개발 알고리즘의 경쟁력이 굉장히 좋다고 평가했다. 기술력과 개발자들의 근면성실함이 수준급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의 노동력이 값싸다고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북한에 사람이 많으면 얼마나 많은가. 결국은 최첨단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사업가적 관점에서의 의견을 밝혔다. 

김호씨는 남북 경제 관계에서 미국 달러에 의존하지 않도록 가상화폐 형식의 특수목적 화폐를 마련하는 사업을 구상해 진행하고 있다. 최근 산업은행에서 사업설명회를 가졌다.
김호씨는 남북 경제 관계에서 미국 달러에 의존하지 않도록 가상화폐 형식의 특수목적 화폐를 마련하는 사업을 구상해 진행하고 있다. 최근 산업은행에서 사업설명회를 가졌다.ⓒ김호 제공

김씨는 한 차례 좌절을 겪었지만, 다시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을 다하고 있다. 고객을 많이 잃고 위축된 얼굴인식프로그램 사업에 매진하는 것 외에도 또 다른 사업을 구축해나가는 일로 바쁘다. 건축업과 인공지능을 연결하는 사업, 남북 경제 관계에서 미국 달러에 의존하지 않도록 가상화폐 형식의 특수목적 화폐를 마련하는 사업 등을 구상하고 진행 중에 있다고 한다.

그는 “상황 탓만 해서는 안 된다. 이 시련의 의미가 뭘까 고민해보자. 그런 생각 끝에 다시 일어났다. 솔직히 스티브 잡스같은 대단한 혁명가는 아니지만, 길을 만드는 사람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길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씨는 마지막으로 “재판에 최선을 다해 임하겠다”면서도 자신의 ‘무죄’를 크게 바라고 있지 않는다고 했다. 

“저의 유무죄를 떠나서 이번 기회에 남북 정상회담과 공존할 수 없는 국보법의 문제점이 공론화됐으면 합니다. 이런 정상적인 남북교류 협력 사업조차 ‘이적’이라며 처벌하려는 공안검찰의 모순이 알려져 오히려 국보법 폐지 및 수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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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비핵화’보다 ‘북 친구화’가 빠른 해법이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4/22 08:59
  • 수정일
    2019/04/22 08:5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칼럼> 전현준 한반도평화포럼 부이사장
전현준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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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22  02: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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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은 대화 자체의 필요성에만 합의했을 뿐 미국은 한국의 ‘굿 이너프 딜(good enough deal·충분히 괜찮은 거래)’을 거부하였다. 미국이 우리의 ‘포괄적 합의 단계별 이행’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 정부는 핵 시설 리스트 신고와 대량 살상 무기(WMD) 동결·폐기를 포함하는 ‘일괄 타결식 빅 딜(big deal)’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만큼 ‘포괄적 비핵화 로드맵 합의 후, 단계적 이행’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대가 컷던 금강산 관광 재개는 일단 무산되었다. 미국의 강압적 태도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미국의 일방적 외교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2.27~28)을 무위로 돌렸다.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은 지난해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결과보다는 더 진전된 합의가 나올 것으로 기대를 했던 많은 국민들과 전문가들을 ‘멘붕’에 빠뜨렸다. 기대가 컷던 만큼 실망도 그만큼 컷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100년 대계인 ‘신한반도체제’를 준비했던 문재인 정부와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재개를 꿈꾸었던 관련 기업들의 실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일 것이다. 그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한 주역은 누구든 언젠가 응당한 책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북의 완전한 비핵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미국의 체제안전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북이 ‘안보의 보검’인 핵무기를 포기할 리가 만무하다. 북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핵무기 공격을 두려워해 왔고 그 가능성은 여전히 불식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핵안보에 대한 대체재(substitute goods)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북핵을 모두 폐기하라고 하는 것은 남의 안보 대체재 없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북핵문제 해결의 최선책은 ‘포괄적 합의, 단계적 이행’이다. 북과 미국이 북의 완전한 비핵화와 미국의 완전한 체제안전 보장을 합의하고 이것을 몇 단계로 나누어 이행하는 것이다. 상호 불신이 극심한 상황에서는 당면 과제를 ‘선후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방이 먼저 행동을 했을 때 타방이 똑같이 행동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배신을 감독하고 배신에 대해 책벌을 가할 주체가 없는 것이다. 이 때 최선의 방법은 동시에 행동하는 것이다. 조그만 것에서 신뢰가 쌓이면 더 큰 것으로 확장해 가는 것이다.

문제는 북핵 문제에 있어서는 이것조차 쉽지가 않다는 것에 있다. 미국은 단계별 해법을 죽도록 혐오한다. 미국은 1994년 10월 미북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 2007년 2.13합의, 10.3합의, 2012년 2,29합의 등이 소위 ‘단계별 동시행동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지만 북이 이를 모두 파기했다고 보고 있다. 볼턴과 같은 강경파들이 북의 단계[별 해법을 죽자사자 반대하고 최단기간내에 ‘빅뱅식’으로 비핵화를 실시하자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반대로 북은 위의 합의들을 미국이 깼다고 보고 만일 일시에 비핵화를 이룬다면 이후 미국은 CIA공작을 통해 ‘리비아식’으로 민중혁명을 사주하여 김정은 정권은 물론 주체사회주의 체제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인 방안은 우선 북을 ‘미국의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만일 북이 미국의 친구가 되면 북이 미국에게 핵무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된다. 지금은 미국과 북이 ‘백년 숙적’처럼 지내고 있으니까 북이 미국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미국이 북의 핵공격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일 두 국가가 친구가 되면 ’친구평화론‘에 입각하여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불법적 핵보유국인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지 않고 있다. 미국은 이들 국가들과 수교와 경제교류 등을 진행하여 친구로 지내기 때문에 이들의 핵공격을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북도 미국이 친구로 삼을 만한 충분한 전략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은 북과 친구가 됨으로써 북의 안보불안을 제거해주고 신뢰를 확보한 다음에 북의 비핵화를 본격화하는 것이 순서이다. 일부 논자들은 미국과 북이 친구가 되는 과정에서 북은 언제든 미국에게 핵무기로 위협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미국이 북을 친구로 만드는 과정에서는 북이 미국에게 핵무기를 사용할 필요도 이유도 없게 된다. 미국이 북을 죽이려 한다면 핵무기를 쓰겠지만 자신을 살리려고 하는 데 무슨 이유로 핵무기를 쓸 것인가?

만일 북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북도 그 즉시로 파멸적인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미국은 전략 및 전술무기를 6,500기 정도 보유하고 있다. 북은 기껏해야 몇 십 기를 가지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비정상적이지 않고서야 미국을 선제공격할 수는 없다.

결국 안보상 약자인 북이 핵무기를 쓸 필요가 없는 상황을 만들고 그 이후에 북핵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순서이다. 진정 북의 비핵화를 원한다면 북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 첩경이다. 다만 이 해법 또한 쉽지는 않다. 북을 친구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면서 북과의 적대적 상태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국내외의 안보 카르텔이 있기 때문이다.

 

전현준 (우석대 초빙교수, 한반도평화포럼 부이사장)

   
 

1953년생으로서 전남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북한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통일연구원에서 22년간 재직한 북한전문가이다.

2006년 북한연구학회장 재직 시 북한연구의 총결산서인 ‘북한학총서’ 10권을 발간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 동안 통일부 자문위원, NSC자문위원, 민주평통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민화협, 경실련 등 시민단체에서도 활동하였다.
현재는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는 「김정일 리더쉽 연구」, 「김정일 정권의 통치엘리트」, 「북한 체제의 내구력 평가」, 『북한이해의 길잡이』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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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배지 만든 박석인 대표, 그가 '오월 어머니'를 택한 이유

"노란 리본은 세월호, 그런데 5.18 상징은?"

[스팟 인터뷰] 5.18 배지 만든 박석인 대표, 그가 '오월 어머니'를 택한 이유

19.04.21 12:34l최종 업데이트 19.04.21 12:34l

 

 주먹밥을 머리에 이고, 횃불을 든 오월어머니. 박석인 광주 메이홀 대표와 임의진 목사 등 동료들이 오월항쟁 40여 년만에 만든 5.18배지. 홍성담 화백의 판화에서 그 형상을 빌려왔다.
▲  주먹밥을 머리에 이고, 횃불을 든 오월어머니. 박석인 광주 메이홀 대표와 임의진 목사 등 동료들이 오월항쟁 40여 년만에 만든 5.18배지. 홍성담 화백의 판화에서 그 형상을 빌려왔다.
ⓒ 메이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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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리본은 결코 잊지 말아야할 '세월호 참사'를 상징한다. 붉은 동백꽃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제주 4.3을 상징한다. 그리고 오월항쟁 40주기를 1년 앞둔 2019년 4월, 드디어 5.18항쟁을 상징하는 배지가 처음으로 탄생했다.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옆에서 광주 최초의 시민자생 예술공간인 '메이홀'을 11년째 운영하고 있는 박석인(의사) 대표. 박 대표는 20일 저녁 자신의 SNS를 통해 배지 하나를 공개했다. 배지는 머리엔 주먹밥 광주리를 이고, 손엔 횃불을 들고 행진하는 어머니를 형상화했다. 1980년 '오월어머니'의 모습이다.

"작년에 문재인 대통령도 참석한 제주 4.3항쟁 70주기 추모식에서 4.3을 상징하는 동백꽃 배지를 보았다. 누구나 동백꽃을 보면 제주 4.3을 생각한다. 그리고 노란 리본을 보면 세월호를 생각한다. 내년이면 5.18도 40주년을 맞는다. 그런데 5.18을 상징하는 아이콘 하나, 배지 하나 없다는 것이 늘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박 대표의 목소리에서 '이제사 해냈다'는 안도감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5.18배지 형상의 원형은 홍성담 화백의 오월판화 <횃불행진>에서 가져왔다.

홍 화백은 박 대표의 취지를 듣고 두말없이 사용을 허락했다. 메이홀 관장을 맡고 있는 다중예술가 임의진 목사가 구상 단계에서부터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고근호·주홍 작가가 이런저런 의견을 내며 감수했다. 판화의 형상을 배지로 만들어내는 디자인과 그래픽 과정에서는 서동환 <광주아트가이드> 편집장이 힘을 보탰다.

 
 5.18배지를 처음 구상하고 제안해 동료들과 함께 광주항쟁 40여 년만에 처음으로 5.18배지를 만든 박석인 메이홀 대표. 그가 5.18배지의 이미지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  5.18배지를 처음 구상하고 제안해 동료들과 함께 광주항쟁 40여 년만에 처음으로 5.18배지를 만든 박석인 메이홀 대표. 그가 5.18배지의 이미지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 메이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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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 화백의 판화에서 찾아낸 주먹밥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횃불을 들고 행진하는 어머니는 5.18을 상징하기에 손색이 없다. 주먹밥 광주리를 이고, 횃불을 들고 행진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희생과 나눔, 비폭력 대동세상 등 5.18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사비를 들여 우선 5.18 배지 1천 개를 만들었다. 오월어머니들과 5.18 관련자들에겐 무상으로 드리고 있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에겐 약간의 금액이라도 받고 팔 계획이다. 수익금이야 작겠지만 5.18의 의미와 가치를 허투루 하지 말자는 작은 실천의지를 서로 나누자는 생각에서다.

"이번에 만든 1천개의 5.18배지가 좋은 마중물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그래서 차량 스티커도 만들고, 엠블럼도 만들어서 5.18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특히 올해 5.18 추모식에서는 광주시민의 가슴에 달린 '주먹밥 아줌마. 주먹밥 어머니'를 보고 싶다. 그리고 내년 5.18 40주기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만든 5.18배지, 5.18아이콘과 함께 치렀으면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2004년부터 의료봉사를 해온 박 대표는, 지난 2008년 임의진 목사 등과 함께 광주 최초의 시민자셍 예술공간 메이홀을 만들어 해마다 <오월특별전>과 <세월호 추모전> 등을 개최하고 있다. '시민자생 예술공간, 메이홀(May Hall)'의 창립정신은 오월정신·광주정신이다.
 
 항쟁 40여 념만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5.18배지는 홍성담 화백의 판화 <횃불행진>에서 그 형상을 빌려왔다.
▲  항쟁 40여 념만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5.18배지는 홍성담 화백의 판화 <횃불행진>에서 그 형상을 빌려왔다.
ⓒ 홍성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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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북한에 대한 '완승' 전략으로는 역사 못만든다

윌슨의 '승리 없는 평화'와 트럼프의 '빅 딜'

 

 

 

세계외교사에 이름을 남긴 외교의 거장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외교 전략과 전술에 능해 국가의 이익을 적극 실현한 인물들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19세기 유럽질서의 토대를 마련한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19세기 후반 현란한 비밀동맹외교로 프로이센의 안보를 확보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 1970년대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어 내면서 미국의 국익을 최대화하려 했던 헨리 키신저 등이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외교이념과 시대적 과제를 제시한 인물들이다. 집단안보체제라는 새로운 개념을 바탕으로 국제연맹을 창설한 우드로 윌슨, 유엔의 역할을 단순한 '평화 관리'가 아니라 '평화 창출'로 설정하고 세계를 누빈 제2대 유엔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윌슨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들고 나온 '14개 조항'으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특히 '14개 조항'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는 우리의 3.1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윌슨은 1차 대전 참전여부를 고민하던 1917년 1월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제목은 '승리 없는 평화'(Peace without Victory). 연합국이 전쟁에 이기더라도 패전국을 완전히 굴복시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완승은 장기적 평화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 논거였다. 참전하면 승리해야 하고, 나아가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데, 그 방안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찾아낸 답의 일단이었다.  

비슷한 사고는 윌슨과는 결이 다른 외교 거장 비스마르크에서도 발견된다. 독일통일을 위해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이긴 다음, 프로이센은 1866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했다. 뛰어난 군사전략가 헬무트 폰 몰트케 덕분에 한 달 만에 승세를 굳혔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 진격해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군부 지도자들은 그러자고 했다. 왕 빌헬름 1세도 동조했다.  

하지만 재상 비스마르크의 생각은 달랐다. 오스트리아를 완전 굴복시키면 원한을 남기게 되고, 다음 전쟁 상대인 프랑스를 칠 때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군의 후미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군부와 왕을 설득해 빈 공격을 막았다. 덕분에 5년 후 프랑스와의 전쟁(보불전쟁)에서도 승리해 독일 제2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목하 빅딜을 고집하고 있다.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을 위시한 빅딜론자들의 주장을 들을 때면 위의 두 사례가 겹쳐 떠오른다. 북한이 핵무기, 핵물질, 핵시설, 다른 대량살상무기(WMD)까지 모두 폐기하면 경제제재를 해제하겠다는 게 빅딜의 개요이다. 
 

▲ 지난 2월 28일(현지 시각)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EPA=연합뉴스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이 중간단계에서 일부 제재 해제의 가능성을 언뜻언뜻 비추기도 하지만 명료한 것은 없다. 윌슨·비스마르크의 '승리 없는 평화'와는 대척점, 즉 '승리 있는 평화' 또는 완승전략이다. 완승은 불신과 적대감을 배태하는 길이고, 장기적 평화와는 반대의 길임을 잊고 있는 것이다.  

최근 북한의 반응은 트럼프 행정부의 완승전략이 장기적 평화는커녕 당장의 협상타결도 얻기 힘들 것임을 예고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북한은 최근 농업과 수산업의 발전을 강조하면서 자력갱생과 자립적 민족경제의 구호를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외치고 있다. 러시아와의 정상회담도 열어 북-중-러의 북방 삼각관계를 강화하려는 모양새다. 미국과의 장기 교착에 대비하고 있는 것일 게다.  

미국은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온건보다는 강경파가 힘을 더 얻을 공산이 크다. 대외정책에 관한 한 유화적인 주장보다는 강한 정책이 대중영합적이고 표를 모으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보면 지금의 미국 입장은 '빅딜 아니면 안 된다. 빅딜에 응하든지 아니면 내년 대선 이후에 보자'라고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트럼프가 3차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은 본인이 원래 주장했던 '기존 정치세력과 다른 접근을 통한 핵문제 해결', 즉 김정은과의 담판을 통한 비핵화의 가능성은 남겨두어, 미국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는 계속 갖고 있도록 하고자 하는 전략일 것이다. 그만큼 3차 북미 정상회담의 가능성은 낮아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트럼프의 거장 욕구다. 세계외교의 거장들이 했던 것처럼 완승보다는 항구평화의 길을 찾아 노벨평화상도 받고 세계외교사의 한 페이지도 장식하고자 하는 욕심을 발휘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미국이 두 단계건 세 단계건 단계를 나누어 비핵화하는 협상에 적극성을 보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이 협상의 기본을 상기하는 것이다. 협상의 기본은 상호신뢰다. 신뢰는 반복적인 주고받기 속에서 생긴다. '얼마를 주니까 얼마가 돌아오더라'라는 경험이 신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북미는 지난 70년 간 불신을 쌓아왔다. 그래서 깊은 신뢰가 필요한 빅딜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고, 불신을 신뢰로 바꾸어 가는 작업은 필수불가결이다. 그러자면 작은 규모라도 주고받기가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급선무이다. 그런 연후에야 '빅 딜'(Big Deal)이건, '패키지 딜'(Package Deal)이건,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이건 비로소 가능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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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장외투쟁 나선 자유한국당 “친문무죄·반문유죄냐...좌파독재 중단하라”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4/21 12:41
  • 수정일
    2019/04/21 12:4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황교안 체제 첫 장외 투쟁...“이미선 헌법재판관 임명 강행 즉각 철회하라”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9-04-20 17:47:56
수정 2019-04-20 18: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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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를 마친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청와대 앞까지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를 마친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청와대 앞까지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정의철 기자
 
 

자유한국당이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를 '좌파 독재 정권'으로 규정하며, "국민의 이름으로 심판하겠다"며 국회 밖으로 나왔다. 황교안 체제 출범 이후, 자유한국당의 첫 장외투쟁이다. 이들은 전날 문재인 대통령이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 임명 강행에 '인사 참사'라고 반발하며 즉각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20일 오후 자유한국당은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 대회를 개최했다. 집회에는 당 대표, 주요당직자, 의원, 당협위원장 및 당원 등 2만 여명(주최 측 추산)이 참석했다.  

자유한국당 시·도 당원들은 전국 각지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 광화문으로 모였다. 자유한국당의 상징색인 빨간색 계열의 옷을 입은 당원과 지지자들은 '문재인 STOP 국민심판'이라고 적힌 빨간 손피켓과 태극기를 흔들었다. 의원들의 규탄사에 흥분한 지지자들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욕설을 쏟아내며 고성을 질렀다.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참석자들이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정의철 기자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를 열고 현 정부의 독단적인 정부 운영을 규탄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를 열고 현 정부의 독단적인 정부 운영을 규탄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무대에 오른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문재인 정부로 인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삼권분립', '시장경제'가 무너져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로 단상에 오른 자유한국당 좌파독재저지특별위원장인 김태흠 의원은 "문 대통령은 헌법재판관으로 부적격인 이미선 후보자를 야당이 반대하자, 김경수·드루킹 댓글조작으로 정권을 잡은 세력답게 교묘하게 여론조작까지 하며 전날 임명을 강행했다. 그것도 해외에서 전자결재로 했다"며 "'주식 전문가' 이미선을 헌법재판관으로 임명 강행한 것은 국회를 무시하고, 국민마저 '개무시'하겠다는 대국민 선전포고"라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문 정부와 민주당은 재판부를 협박하고 협박해 김경수를 보석으로 석방시켰다"며 "한마디로 친문무죄, 반문유죄, 친문석방, 반문감방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의원은 "김정은이 좋아할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 김정은 대변인 노릇할 사람을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정권이 종북 정권이 아니고 무엇이냐"며 색깔론을 다시 꺼내들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이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손을 잡고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이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손을 잡고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10인의 전사 의원들이 단상에 올라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인사하자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자유한국당 김광림·주광덕·김도읍·장제원·곽상도·백승주·성일종·김종석·최연혜·임이자 의원은 문재인 정권에 맞서 싸우는 '전사 의원'으로 이날 소개됐다.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에 집회 사회자는 문재인 정부를 향한 '국민들의 준엄한 경고'라고 설명했다. 이날 대회에는 전희경 의원과 이인제 전 최고위원이 규탄사를 통해 문재인 정부를 맹비난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규탄 발언을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규탄 발언을 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이후 무대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올라서자 지지자들은 이름을 연호하며 환호했다.

나 원내대표는 "좌파 정권의 무면허 운전이 대한민국의 경제를 망가트리고 있다"며 "이념 포로 정권이 온통 국정 동력을 적폐세력 청산에만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의 지지율이 떨어지면 북한만 바라보고 있다"며 "이 정권은 북한하고 적폐청산만 아는 북적 북적 정권이라고 그랬다"고 자신이 했던 발언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미선 헌법재판관 임명과 관련해 나 원내대표는 "이미선 후보는 코드 사슬로 꽁꽁엮여 있는 후보"라며 "결국 이 정권이 헌법 재판관을 자신들 마음대로 쥐락펴락해서 헌법재판소가 아니라, '친문재판소'를 만드려고 했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후보(임명)를 강행한 것"이라고 외쳤다.

나 원내대표는 "왜 헌법재판소에 이렇게 집착하겠냐. 운동권 1기였던 노무현 정부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얼마나 극렬하게 투쟁했는지 기억할 것"이라며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국가보안법이 위헌으로 결정나면 우리의 노력도 소용이 없어진다. 막아야 하지 않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문재인 정부를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로 비유했다. 그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이 펼친 무자비한 포퓰리즘의 마지막 퍼즐이 사법부 장악이었다"면서 "차베스 정권이 사법부를 굴종하게 하고 복종하게 해서 비판하는 세력에게는 입에 재갈을 물리고 마음대로 감옥에 보내고 그렇게 해서 베네수엘라가 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저는 '엄마 정치인'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우리 자식들과 다음 세대에게 빚더미 대한민국을 물려주려는 포퓰리즘 정권을 막아달라"고 덧붙였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규탄발언을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규탄발언을 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황 대표가 단상에 오르자, 당원과 지지자들은 함성을 질렀다. '광화문에 처음 나왔다'고 말한 황교안 대표는 이날 대회에서 20분을 넘게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황 대표는 "문재인 정권은 한결같이 좌파독재의 길을 걸어왔다"며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좌파천국'을 만들어 놓았다"고 맹비난했다. 

황교안 대표는 "헌재재판관까지 청문회 무시하고 국민 반대도 무시하고 짓밟고, 주식 투자 코드 인사를 밀어부쳤다"며 "대한민국 헌법까지 자기 맘대로 주물러서 좌파독재 완성하겠다는 거 아니냐"고 주장했다.  

특히 황 대표는 "힘도 없는 지난 정권 사람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살아간다. 아무리 큰 병에 시달려도 끝끝내 감옥에 가둬놓고 있다"면서, "그래놓고 무려 8,800만건 댓글 조작해서 감방에 간 김경수를 말도 안되는 보석 판결로 풀어줬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친문무죄, 반문유죄, 유권무죄, 무권유죄 이게 이 정권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이런 거냐"라고 소리쳤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또한 황 대표는 "문 정권 대한민국 경제도 완전히 무너트리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해서 강하게 비난했다. 황 대표는 최저임금 1만원과 관련해 "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는데 최저임금만 잔뜩 올려준다"며 "일자리를 잃게 하고 있다. 자영업자, 소상공인 죄다 망하고 있는데도 최저임금만 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탄력근로제 확대와 관련해 "알바자리 구하려고 그래도, 그거 구하게 힘들게 만들어 놓고 있다. 그래놓고 일하고 싶어도 일 못하게 근로시간 줄여서 편하게 잘 살자(한다)"며 "굶어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쉬냐"고 말했다.  

황 대표는 "민노총(민주노총) 갑질에 대기업 수출이 줄어들고 있다"며 "귀족노조 파업하고 중소기업들은 줄도산에 직면해 있다. 불법파업, 불법 점거, 불법 폭행 온갖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발언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민노총 눈치만 본다"며 "그러니까 경찰도 검찰도 민노총 손 못대고 있다. 이러니까 어떻게 우리 경제가 살아나겠냐"고 말했다.  

황 대표는 "애국 시민들이 일어나야 한다"며 "문재인 대통령과 이 정권이 정신 번쩍 들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자유한국당은 이 정권의 좌파독재가 끝날 때까지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며 "제가 선두에 서겠다. 저의 모든 것을 걸고 좌파독재를 기필코 막아내겠다"고 소리쳤다.

이날 대회 말미에는,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단상에 함께 올라왔고, 민경욱 자유한국당 대변인이 자유한국당의 결의문을 낭독했다. 민 대변인은 "문재인 정부는 인사참사와 인사강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민 앞에 사과하라"며 "인사참사의 책임자인 조국 민정수석과 조현옥 인사수석을 즉각 파면하라"고 요구했다.  

민 대변인은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권의 독재에 맞서 당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강력한 조치를 총동원해서 국민과 함께 끝까지 심판할 것"이라고 결의했다.

집회 이후, 자유한국당은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부터 청와대 인근인 효자동 주민센터까지 가두행진을 펼쳤다.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를 마친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청와대 앞까지 행진하고 있다.
2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문재인 STOP!, 국민이 심판합니다!’ 규탄대회를 마친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청와대 앞까지 행진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양아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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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혁명회, '자주·민주·통일 4월혁명정신으로 민족모순 청산'

4월혁명 59주년 선언, '미국은 남북선언 이행 간섭말라'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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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19  12: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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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월혁명회는 18일 기독교회관에서 '4월혁명 59주년 행사'를 개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4월혁명 59주년을 맞는 18일 사월혁명회는 '4월혁명 59주년 선언'을 발표해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자주통일 이룩하자'고 호소했다.

사월혁명회는 이날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4월혁명 59주년 행사에서 발표한 '선언'을 통해 △불평등한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와 주한미군 전면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와 모든 양심수 석방 △ILO기본협약 비준, 최저임금제 개악, 탄력근무제 기간연장 등 노동법 개악 중단 △적폐청산 방해하는 자유한국당과 수구세력 척결을 '4월혁명의 역사적 소명'으로 결의했다. 

또 미국은 4.27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에 간섭말고 한반도 평화통일에 동참하라고 주장했다.

고철환 사월혁명회 공동의장은 인사말에서 "지금 한반도는 미국, 중국, 일본이라는 세계 1,2,3위의 패권국에 둘러싸여 있고 남과 북은 이들 패권국들과 겨루면서 자체 역량으로 우리 고유의 평화를 만드는 극히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남북화해의 당사자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민족자주의 정신으로 자주역량을 총동원하여 이들 패권국과 겨뤄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촛불과 함께 해 온 사월혁명회는 외세로부터의 자주, 독재로부터의 민주, 분단으로부터의 통일이라는 4월혁명 정신으로 무장하여 올해를 민족모순을 청산하는 원년이 되도록 적극 행동하겠다"고 다짐했다.

   
▲ 왼쪽부터 고철환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박흥섭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이호윤 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 상임대표,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연대사에서 "4월혁명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주혁명임과 더불어 평화통일로 가는 길목이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닌 우리 손으로 개척해려 한 선배 열사들의 헌신과 투쟁은 작금의 평화와 번영, 통일의 시대로 가는 주춧돌이 되었다"고 4월혁명 참가자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판문점에서 꽃피운 화해와 평화의 봄은 평양의 가을을 지나 번영과 통일로 나아가고 있으나 여전히 어려움이 적지 않다"며, 반통일 수구세력들은 망언을 일삼으며 평화로 가는 민족의 발목을 잡고 있고 미국은 여전히 대북제재를 무기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는 당사자로서의 역할에 부족함이 느껴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때일수록 민족의 줏대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주의 정신으로 뭉쳐야 한다. 역사적인 남북선언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의 시대를 함게 열어나가기 위한 전 국민적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가자"고 강조했다.

6.15남측위는 4월 27일 임진각에서 민족자주의 원칙을 분명히 확인하고 평화와 번영, 통일의 의지를 밝히는 평화인간띠잇기와 4.27판문점선언 1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한다며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호윤 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 상임대표는 전국 70여개 대학의 민주동문회가 모인 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는 모든 혁명의 '원조'인 4월혁명 참가자들의 직계 후배라고 할 수 있다며, "불의에 몸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선배들을 따라 배우겠다"고 참가자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지난해 4.27판문점선언 이후 6.12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것은 미국의 시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힘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에 미국이 끌려나온 것"이라며, "북미간 70년 격돌이 막바지에 이르렀으며, 우리 민족과 미국, 국제평화세력과 미국과의 대결로 확장되고 있다. 선배님들이 '자주, 민주, 통일'로 정리한 4월혁명 정신이 노선적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시대의 혁명은 판문점선언에서 천명한 평화, 번영,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라며, "4월의 사자들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외쳤던 것처럼 4월 27일 전국에서 1만명 이상이 임진각에 집결해 한반도의 평화혁명, 통일혁명이 일어나고 있음을 세계를 향해 외칠 것이다. 6.15, 8.15, 9.19계기에 평화세력들이 단결해 자주의 기치를 명확히 들겠다"고 밝혔다. 

정종성 한국청년연대 상임대표와 곽효남 진보대학생넷 대표는 4월의 함성을 계승해 한반도, 평화, 번영, 통일의 길을 열어나가는데 앞장서겠다고 결의했다.

   
▲ 대회 참가자들이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자주통일 이룩하자'는 제목의 4월혁명 59주년 선언문 낭독에 이어 결의를 다졌다.[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는 '4.27시대 평화와 통일위한 제2의 4월혁명을'이라는 제목으로 특별강연을 진행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사월혁명상 시상은 올해 생략됐으며, '4월혁명 59주년 행사'에 이어 2부에서는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가 '4.27시대 평화와 통일 위한 제2의 4월혁명을'이라는 제목으로 특별강연을 진행했다. 

이 교수는 1958년 미국의 핵무기가 한국에 반입되었다는 것이 기밀해제된 미국 의회 보고서를 통해 공식 확인되었고, 이승만의 하야와 1960년 4월혁명 직후 한국정부의 장관 임명 과정에 주한 미국대사가 시시콜콜 관여한 것도 드러났다고 하면서 그로부터 두 세대의 세월이 지났지만 미국의 간섭은 여전한데 이를 해결하자면 제2의 4월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사월혁명회과 민주노총, 한국진보연대는 19일 정오 수유리 4.19묘소에서 민족민주운동단체 합동참배식을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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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은 철저한 공격전’

노동신문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은 철저한 공격전’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9/04/21 [09:04]  최종편집: ⓒ 자주시보
 
 

 

북의 노동신문이 21일 경애하는 최고영도자동지의 시정연설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소식에 의하면 노동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의를 잘 알고 조국의 융성번영과 찬란한 미래를 앞당기기 위하여 힘차게 싸워나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은 현시기 사회주의 강국건설과 공화국 정부의 대내외정책과 관련한 문제들에 완벽한 해답을 주는 기념비적 문헌이라며 “(시정연설에서는현 정세와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선 우리 혁명의 요구우리 인민의 지향을 정확히 분석한 데 기초해 사회주의 강국건설에서 견지하여야 할 근본원칙과 입장과학적인 전략과 전술을 뚜렷이 밝혀주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시정연설은 사회주의 강국건설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국가건설사상을 철저히 구현해나갈 데 대한 문제로부터 나라의 모든 힘을 경제건설에 집중하여 사회주의의 물질적 기초를 튼튼히 다질 데 대한 문제북남관계개선과 조선반도평화보장을 위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혁명이 절실히 요구하는 문제들에 전면적인 해답을 주어 사회주의 건설과 우리 혁명발전에서 커다란 이론 실천적 의의를 가진다고 거듭 강조했다.

 

신문은 이번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의 역사적 의의 첫 번째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국가건설 사상과 업적을 계승 발전시켜 주체의 사회주의강국 건설이론을 비상히 풍부화한 데 있다며 “(시정연설은김일성-김정일주의국가건설이론을 더욱 심화시켜 국가건설과 활동에서 자주의 혁명노선을 견지하고 국가 활동과 사회생활 전반에 인민대중제일주의를 철저히 구현할 데 대한 원칙적 문제들과 사회주의 경제건설에서의 전략적 방침을 비롯해 우리 공화국을 영원히 김일성김정일동지의 국가로자주자립의 강국인민의 이상사회로 빛내어나가기 위한 방향과 방도를 뚜렷이 명시한 강령적 지침이라고 밝혔다

 

이어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로 우리 인민은 사회주의강국건설의 곧바른 길을 따라 힘차게 전진해 나갈 수 있는 위력한 사상 이론적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의 역사적 의의 두 번째로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아보려고 날뛰는 적대세력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우리 힘우리 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최대의 속도로 다그쳐 나갈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무기를 마련해준데 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구체적으로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적대세력들의 제재해제문제 따위에는 이제 더는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힘으로 부흥의 앞길을 열어나갈 것이라는데 대하여 천명한 것은 적대세력들의 정수리에 철추를 내리는 통쾌한 선언으로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시정연설은 철저한 공격전으로 일관되었다며 적대세력들의 제재 돌풍은 자립자력의 열풍으로 쓸어버려야 한다는 사상에는 남들이 가늠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자력갱생의 힘을 사회주의 건설을 추동하는 실제적인 원동력으로 전환시켜 놀라운 발전상승의 길로 질풍 쳐 내달리며 자력부강의 새 역사를 펼쳐나가려는 우리 당의 확고한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번 시정연설은 굴함 없는 공격정신으로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고 보다 큰 승리를 이룩하려는 절세위인의 드팀없는 의지와 자기 힘으로 부강조국을 일떠세우려는 우리 인민의 강용한 기상이 응축된 기념비적 노작이라고 강조했다.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 세 번째로는 우리 인민뿐 아니라 자주와 정의를 지향하는 세계의 모든 나라와 인민들에게 신심과 용기를 안겨주고 반제투쟁으로 힘 있게 고무추동한데 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이번 시정연설에서 북미 관계와 관련해 원칙적 입장을 밝힌 것은 대북적대시정책을 노골화하고 세계를 제 마음대로 농락하는 세력들의 책동을 무자비하게 짓뭉개버리는 김정은 위원장의 담대한 배짱으로 이는 북의 주민들뿐 아니라 국가의 근본이익과 관련해서는 티끌만 한 양보나 타협도 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자체의 힘으로 국력을 강화하고 번영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는 철리를 알려줘 세계 진보적 인민들에게 커다란 고무적 힘을 안겨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은 현시대에 제국주의와 어떻게 맞서 투쟁하여야 하며 자기의 존엄을 지키자면 어떤 입장과 원칙을 견지하여야 하는가를 깊이 새겨주었다고 강조했다.

 

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이 이번 시정연설에서 밝힌 남조선 당국과 손잡고 북남관계를 지속적이며 공고한 화해협력관계로 전환시키고 온 겨레가 한결같이 소원하는 대로 평화롭고 공동 번영하는 새로운 민족사를 써나가려는 확고한 의지를 피력했으며 이는 조국통일의 밝은 미래를 앞당겨오는 데서 우리 민족 모두가 변함없이 틀어쥐고 나가야 할 고귀한 지침이라고 강조했다.

 

신문은 마지막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에서 밝힌 투쟁의 기치강령적 지침을 백승의 보검으로 틀어쥐고 자기의 힘으로 앞길을 개척해 나가려는 북녘 주민들의 진군은 그 무엇으로써도 돌려세우거나 멈춰 세우질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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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만행의 역사는 지우려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기고] 5.18과 나의 인생 유전

 

 

 

 

 

자유한국당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모독한 김순례, 김진태 의원에 대해 '솜방망이' 징계를 내렸다. 사실상 '면죄부'를 쥐어 줬다는 비판도 나온다. 5.18은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자국민을 학살하고, 이를 통해 독재 정권을 낳은 최악의 인권 유린 사태였다. 과거의 사실이 밝혀진 오늘날까지도 그 후유증은 여전히 깊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 신군부의 언론 통제에 항의해 사표를 쓴 후 학자가 된 이상백 전 건국대 부총장이 최근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망언 사태를 보고 과거 자신의 경험담을 전해 왔다. 편집자.  
 
나는 교수이기 이전에 기자였다. 어언 39년의 세월이 건너간 옛 일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고 전두환 신군부가 당시 '언론자유 수호선언'에 가담한 기자들의 대량 해직 폭거를 자행하기 전, 나는 과감히 먼저 사표를 던지고 신문사를 떠났다. 광주 항쟁의 무력 진압에 항거하여 20대 후반부터 40대 초까지 오롯이 내 청춘을 바친 언론인 생활을 마감한 것이다. 그 후 보안사와 안기부의 지속적인 미행과 감시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으며, 한동안 실업자 생활을 면치 못하는 등 굴곡의 인생 유전이 시작되었다. 
 
얼마 전 몇몇 극우 성향 국회의원들의 '5.18' 폄훼 발언과 '600명 북한군 침투설', 전두환 씨의 광주 법원 출두로 광주민주화운동이 새삼 부각되었다. 한국동란 이후 가장 비극적인 참사로 기록되는 이 사건을 느닷없이 정쟁의 도구로 들고 나온 일부 보수 정치인들의 태도와 전 씨의 뻔뻔스런 발언에 탄식과 울분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윽한 동안 잊고 지내던 5.18 당시의 험악한 사회 분위기를 전하고, 그에 저항하여 기자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나의 사연을 말하고자 한다.  
 
5.18은 광주에서 일어났지만 그 불행은 전국적으로 확산됐으며, 나 역시 그런 불이익과 불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5.18은 전국의 각 직장의 운명은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개인사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비극이었다.  
 
김재규의 저격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자 이 나라 모든 국민의 가슴은 그 동안의 오랜 군부독재가 끝나고 이 땅에도 진정한 민주 정치가 구현되리라는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 이후의 나라 현실은 국민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박정희 정권 때보다 더 가혹한 신군부의 등장으로 귀결되었다.  
 
이에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지에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고, 마침내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자 전두환 일당이 공수부대를 투입, 무력으로 이를 제압하는 한편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한 방편으로 철저한 언론통제에 들어갔다. 신군부는 일간 매체에서 제작되는 신문이 시중에 배포되기 전 반드시 군 보안사의 검열을 거치도록 제도화 했고, 그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삭제하도록 강제했다.  
 
그 당시 군부의 검열을 받기 위하여 시쇄 몇 부를 들고 서울시청에 마련된 검열실을 다녀온 기자들의 참담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한 곳이라도 온전한 기사를 싣기 위하여 검열관과 치열한 실랑이를 벌이며 그 정당성을 역설했지만, 번번이 위관급 검열관의 강압에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허탈과 울분으로 상기된 표정들이 지금도 나의 안전에 어른거린다. 
 
평상시 같으면 이미 가판대에 진열되었을 시간이라 다시 조판을 할 수는 없고, 어쩔 수 없이 윤전기에 걸려 있는 연판에서 지적된 부분을 긁어내고 신문을 찍어내다 보니 곳곳이 여백으로 뻥뻥 뚫린 흉물인데다가 더러는 문맥조차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만신창이 신문을 독자들 앞에 내놓아야 했다.  
 
이와 같은 전대미문의 언론 탄압에 분개한 기자들의 저항 운동이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해 몇몇 신문사에서 암암리에 전개되고, 그 흐름 속에서 나의 인생행로도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1980년 당시 나는 동아일보 편집국 스포츠동아부의 편집기자로 재직하고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5월 하순, 같은 부서의 이계홍 기자가 은밀히 나에게 다가와 지금 편집국 내에서 뜻있는 기자들이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준비 중인데 이 선배도 동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즈음 사회부의 심송무 기자, 문화부의 박병서 기자, 국제부의 김재홍 기자 등이 주동해 이 선언을 준비 중이었다. 그 선언서에 서명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하여 각 부서에 실무 간사 한사람씩을 선정했는데, 그때 스포츠동아부에서는 이계홍 기자가 간사로 나섰다. 
 
나 역시 5.18 사태에 분개하던 터라 이 기자의 권유에 놀람과 함께 공감을 느꼈으나 내심 한편으로는 그 서명이 가져올 후환을 예감하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좀 더 생각해보고 가부를 알려주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철학도인 이 선배 같은 분이 서명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시고 결과를 알려주십시오." 
 
그날 밤 나는 이 문제로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섣불리 서명했다가 해직되는  것은 물론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군부정권에 체포돼 구속되고, 고문을 당할 수도 있었다. 당시는 항용 그랬으니까 각오해야만 했다. 이런 참혹한 상황에 내가 과연 동조해야 하는가?
 
이런 고뇌 중에도 문득 문득 되씹히며 떠오르는 것이 "철학도인 이 선배 같은 분이 서명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라는 이 기자의 목소리였다. 심각한 심적 갈등으로 엎치락뒤치락 하던 어느 순간 문득 다음과 같은 통렬한 자각이 나에게 다가왔다. 
 
"이른바 철학도로서 나름 지적 존재임을 자부해온 나에게 그 지적 존재로서 나의 존재가치를 드높여 주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일찍이 칸트가 지적한대로 내심의 도덕률일 것이다. 한갖 고상한 이론이 아니라 나의 행동의 원리로서 자각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내심의 외침 말이다. 한데 그동안 나는 그 외침에 과연 얼마나 귀를 기울이며, 그에 부응하고자 노력해 왔던가? 특히 결단의 대상이 나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경우, 과연 나는 이를 뿌리치고 내심의 외침, 곧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 왔던가? 아무리 좋은 사상이나 생각도 행하지 않으면 헛된 꿈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두려워하지 말고 나서자. 양심의 소명에 충실하자. 그것이 양심을 지킨 철학도로서의 책무다." 
 
이튿날 나는 출근하자마자 이 기자를 불렀다.  
 
"이형, 앞장서시오. 심송무 기자에게 갑시다." 
 
이렇게 해서 나는 5.18의 거센 물결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나의 '언론자유수호선언' 동참 소식이 알려지면서 소속 부서인 스포츠동아부 부원들의 미묘한 반응들이 침묵 속에 나를 긴장시켰다. 그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데스크였다. 그는 미리 부원들을 다잡은 뒤 나를 불렀다.  
 
"이상백 씨, 최고참 선배가 그럴 수가 있어? 선동하는 거요?"
 
분노가 묻어나는 일갈이었다. 그리고 그의 일장 훈시가 장황하게 이어졌다. 
 
"과거의 그 어느 정권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친 신군부가 마음만 먹으면 신문사 하나쯤 정간시키거나 폐간시키는 일쯤 식은 죽 먹기인 시국이요. 자중하시오. 선임기자가 선동하는 모습은 모양이 좋지 않소!"  
 
현 시국에 대한 기자들의 결사(結社)를 염려한 회사 당국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자들에 대한 선무 공작은 늘 그렇듯 평기자와 지근거리에 있는 데스크들의 몫이다. 최고참 기자에다 선임기자인 내 행동을 그는 20여 명 부서 기자들 앞에서 제압하면서 다른 기자들이 동요하지 못하도록 무언의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나는 후배기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처지여서 내 움직임 하나하나가 주시의 대상이 되는 상황이었다. 
 
데스크의 강압적 충고에 나는 한동안 꾹 참았다. 그러나 신군부의 폭력진압을 불가피한 일로 용인하는 듯한 그의 언동에 발끈하고 말았다. 욕설과 함께 심한 언쟁이 오가고 여태까지 흉허물없이 지내던 둘 사이는 한 순간에 회복하기 어려운 관계로 돌변했다. 노선상의 차이는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악화되었으나, 내 양심이 시키는 행동이었으므로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후 사측으로부터도 협박성 회유가 있었다. 고참 기자들이 선두에 나서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이 다각적으로 내려왔다. 나는 신군부와의 싸움 이전에 데스크를 비롯한 사측과 먼저 싸워야 하는 입장에 처하고 말았다.  
 
5.18 폭거에 대한 언론자유 실천운동은 독립운동을 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지난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루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모 부장이 나를 다방으로 불러냈다. 그분은 내 팔을 붙잡더니 사정하듯, 그리고 충고하듯 말했다. 
 
"이 기자, 뭐 언론자유 선언인가에 서명했다면서? 75년 광고 사태 때도 회사 경영에 큰 시련이 있었던 거 아시잖아. 제발 너무 나서지 말고 회사 안정에 협조하세요. 이 기자가 다칠까봐 걱정돼서 하는 말이요. 용기는 가상하지만 개인이 다칠 때 누가 보상할 것이요? 자중하시오."  
 
그분 말대로 내가 걱정되어 충고 한마디 해준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사 측의 압력임을 알게 모르게 시사해주는 것이어서 뒷맛이 씁쓸했다. 이런 때 회사가 구성원을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도리어 군부 편에 서는 듯한 압력에 나는 절망하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데스크와의 알력이 깊어졌다. 그와는 직급의 고하를 떠나 사사로운 입장에서 오랜 친구지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서로 눈을 맞추는 것조차 겸연쩍을 정도로 서먹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이 같은 그와의 반목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회사를 등에 업고 나를 짓누르는 것이라 여겨지자 더욱 참기 어려운 모욕감과 분노가 일었다.
 
자고로 심적 고통의 약은 한잔 술 아니던가? 나는 이래서 매일 저녁 청진동 뒷골목 소줏집에서, 또는 지금은 없어진 국제극장 뒤 카페에서 가까운 친구들과 후배기자들을 불러내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서는 귀가 시간에 늦곤 했다. 패거리 가운데는 타사의 박 모 후배 기자도 있었다. 그는 당시 진행되고 있는 광주 현지의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무언가 비선망이 있는 듯 했다.  
 
광주의 신문사 지국조차 폐쇄되다 보니 도통 안개 속인 그곳 소식을 우리는 그의 입을 통하여 생생히 들을 수가 있었다. 며칠 전엔 광주역 앞에서 시위대 몇 명이 죽고, 또 며칠 전엔 전남도청 앞에서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시 외곽에서도 탈출하던 시민들이 무더기로 총 맞아 죽고, 그리고 마침내 시민군이 무장했다고 하는 내용들이었다. 이런 내용을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뉴스를 다루는 기자들마저 몰랐으니 암흑세상이라고 해야 옳았다. 
 
그래서 그는 이런 참상을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는 신문사에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며 비분강개했다. 그래서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나보고도 이런 비굴한 지성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형도 삼시세끼 굶지 않을 텐데 왜 형답지 않게 꿍꿍 앓고만 있느냐며 취중이었지만 거칠게 나를 추궁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폭압권력에, 세상에 항변하는 절규였을 것이다. 나는 박 기자의 충동적인 권유 때문에서가 아니라,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작금의 여러 가지 내 처지를 생각하며 나도 이제 거취를 결단해야 할 때가 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마침내 사표를 쓰기로 결심했다. 문제의 서명으로 인해 언젠가 강제 해직이 될 수도 있는 처지인데 몇 주, 몇 달쯤 더 버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사내의 '언론자유실천위원회'가 정식 결성되기 전 사표를 던지고 회사를 나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사회의 첫 일터였던 신문사를 떠났다. 
 
그러나 결행은 했지만 내면의 갈등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당장 실업자가 된 공포감이 나를 짓눌렀다. 더군다나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등졌다는 아쉬움 때문에 견디기 어려웠다. 막상 떠나긴 했지만 정작 갈 곳이 없다는 현실이 또한 나를 암담하게 했다. 부모와 형제들, 자식을 거느린 장자로서 앞으로도 계속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섣부른 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 후회되기도 했다.  
 
광야에 내던져진 마음으로 한동안 거리를 헤매었다. 막상 사표를 던지고 나니 동료, 후배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영웅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내 양심의 소명에 따른 것인데, 혹 영웅주의적 모습으로 비쳐질까 주저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당장 개인적으로 좋은 면도 있었다. 아우들의 등록금 등으로 부채의 중압감에 허덕이던 나에게 퇴직금이라는 목돈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나는 석사학위를 갖고 있었고, 두서너 군데 강사를 뛰면 최소한의 생활은 버텨낼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강사라도 제대로 하려면 박사과정을 이수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뒤늦은 공부 끝에 박사과정에 적을 두었다.  
 
그런 어느 날 뜻밖의 보도가 나왔다. 전두환 정권의 문교부 장관이던 이규호 장관이 졸업 정원제를 시행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슨 대학 입학 정원을 현재보다 30% 이상 늘려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대신 졸업 시에 그에 비례한 30%를 탈락시켜 졸업을 어렵게 만든다는 제도였다. 치열한 입시 경쟁을 완화하여 입시생과 학부모의 환심을 사는 한편 졸업을 어렵게 함으로써 재학생들이 데모 따위에 한 눈을 팔지 않고 학업에 전념하도록 만든다는 궁리에서 나온 정권 나름의 묘책이었다. 
 
이렇게 학생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경우 교수의 수요 역시 급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당시 박사 과정에 있던 예비 교수들이 하나둘 대학 전임으로 자리를 잡았고, 나도 그 흐름에 편승하여 마침내 지방 대학에 자리를 얻었다. 본격적인 학자이자 교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곧 난처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언론자유선언'에 서명한 후 사표를 쓰고 퇴사한 이력으로 인해 안기부의 신원 조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였다. 다행히 그것은 별 문제 없이 넘어 갔다. 
 
신군부의 압력으로 신문사들이 '언론자유선언'에 참여한 기자들을 일제히 해직한 날이 1980년 8월 9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앞서 자진 사표를 던지고 나왔으므로 그들의 체킹 포인트를 비켜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었다. 교수 생활 초기에 기자 시절 '언론자유선언'에 서명한 사실과 이로 인해 사표를 쓰고 퇴직한 사실이 보안사의 정보망에 체크돼 또 다른 감시의 그물망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나의 연구실에 교무과장이 찾아와 엉뚱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날 오전 안기부 직원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최근 나의 동태를 묻고 갔다는 것이다. 아마도 신문사 시절에 있었던 일로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에게 학교에서의 나의 일상에 관하여 좋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했다. 특히 강의를 잘해서 학생들의 인기를 독점하고 있는 유능한 교수라고 전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난 학기말 수강생 수가 많은 교양과목 교수들을 상대로 시범 실시된 학생들의 강의평가에서 내가 최고점을 받은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얼마 후 건국대학교로 이직하게 되어 교수들에게 이임인사를 하던 중에 알게 된 일이다. 그 지방 출신으로 사회활동이 잦은 모 교수가 그 당시 내가 당국의 지시로 학교에서 파면을 당할 뻔했다는 저간의 사정을 귀띔해주었다. 요즘 생각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는 이처럼 독재 정권이 요주의 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사 전횡을 일삼던 시기였다.   
 
문제를 제기한 쪽은 안기부가 아니라 보안사였고, 보안사로서는 직무상 민간인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라 내 문제를 안기부에 이첩해 처리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는 보안사와 안기부라는 두 정보기관 간에 암투가 벌어지던 시절이라 그 지방 안기부 책임자가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은 교수를 공연히 잡으려 한다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면서 내 문제를 덮어버리는 바람에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그는 학군단장으로 평소 학내에서 호가호위하던 현역 육군 소령의 모함이 사건의 발단이었다고 했다. 공적인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학군단 학생들의 공결 처리를 요구하는 그의 제의를 거절한 일이 있은 후 그가 암암리에 내 뒷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정보기관에 문제 교수로 제보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동아일보에서 시국에 저항하여 사표를 던지고 나온 문제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문제교수로 낙인찍어 제보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대학 캠퍼스는 이렇게 정권이 다른 이들은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학내 감시 정보망을 구축해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가던 시기였다.  
 
그 무렵 나는 수도권인 부천에 거주하고 있었다. 겨울 방학 중 어느 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경찰 한 명이 찾아왔다. 조사할 일이 있으니 경찰서로 함께 가줘야겠다는 것이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정보과장이라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대뜸 "당신이 북한 체제가 남한보다 우수하다는 등 용공적 발언을 하고 다닌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자술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철학교수다. 평소 나는 강의시간에 '사회는 전투적인 혁명에 의해서만 발전한다'는 공산주의의 폭력성과 인민을 마르크스 레닌주의 및 김일성 주체사상이란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길들이는 북한식 교육을 소개하고 비판해온 사람이다. 그런 내가 북한을 두둔하고 다녔다니 동의할 수 없다"는 항변과 함께 자술서 작성을 거부했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정보과 형사들이 번갈아 들어와 회유와 협박으로 나를 어르고 달래며 자술서 작성을 강요했다. 이런 사태가 사흘이나 계속됐다. 그들의 협박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이런 감옥과 같은 부정의한 세상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였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최근 지방 상공인들과 관변 단체의 모임에 초빙되어 강연을 했던 일이 생각났다. 명색이 철학교수인지라 '사회 지도층과 도덕성'이란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했는데 "회사건 국가건 지도 계층의 윤리적 규범이 그 사회와 조직의 성패를 좌우한다. 특히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직자의 윤리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현실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데 공직자의 윤리의식과 민주의식이 절실히 요구된다"라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  
 
며칠 동안 경찰서에 붙들려 있는 나를 보고 심각성을 느낀 어머니와 동생들이 구명운동에 나섰다. 어머니는 부천시 부녀회의 임원이었고, 그곳 유력 인사의 부인들과 친분이 있었다. 또한 나와는 달리 초등학교 때부터 부천서 학교를 다닌 동생들의 동창생 가운데는 부친이 지방 명사인 친구도 있었다.  
 
어머니와 아우들이 그런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나의 구명 운동에 나섰다. 몇 분이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셨고, 예술인 중 원로 몇 사람들도 발 벗고 나섰다.
 
그들의 탄원 덕분이었을까? 쇼비니스트 풍의 정보과장과 달리 신사적인 인상의 경찰서장이 심사숙고 끝에 나의 훈방을 결정했다. 내 문제가 정보기관으로 이첩되었더라면 경찰서에서보다 더욱 혹독한 고초와 함께 교수직마저 부지할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될뻔한 일이었다. 이처럼 당시는 공포사회였다. 
 
이 모든 것은 동아일보 사직 사건으로부터 연원했다고 생각된다. 그때 이미 요즘 말하는 블랙리스트가 작성돼 나의 활동 공간을 알게 모르게 제약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다. 나는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여유를 부리고, 평소의 소신대로 의사를 개진했지만 그럴수록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에워싼 '작은 저항'이 이토록 끈질기게 내 인생의 시련으로 다가올 줄이야 나는 상상도 못했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는 내가 이럴진대 당시 광주 항쟁의 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감시는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몸이 오싹해진다.  
 
나는 사실 이런 글을 쓸 생각이 없었다. 80대 노년기에 이른 나로서는 한창 젊었을 때의 뜨거운 열망을 추억으로 간직하며 세상의 변화를 묵묵히 응원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데, 불과 수십 년 전의 일, 그것도 천하가 다 아는 5.18을 아무렇지 않게 폄훼와 왜곡, 조작까지 하는 자들을 보고 참을 수 없어서 펜을 들었다.  
 
역사를 지우려 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대로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 역사다. 화인처럼 더 생생히 부활하는 것이 역사의 정명(正名)이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시민정신이 깨닫고 있다. 때문에, 그것은 더욱 선명하게 깃발처럼 나부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정명의 정신으로 살아갈 것이다. 
 
필자 약력 
 
1939년 충남 홍성 출생.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졸업, 같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대학 졸업 후 1980년까지 동아일보 기자 등 언론계 종사. 
그 뒤 전주대 전임강사를 거쳐 건국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건국대학교 부총장 역임.  
저서로는 <존재와 시간의 사유>(건국대출판부) 
<종교-영원과의 화해>(공저, 황소와 소나무)  
<이성과 반이성>(공저, 지성의 샘) 
<자아와 실존>(공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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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네이버에서 '소상공인' 간담회가 열린 까닭

[현장] 박영선 장관, "최저임금 부작용 대비, 600만 소상공인 입김을 대변하겠다"

19.04.19 20:38l최종 업데이트 19.04.19 20:48l

 

 

 서울 네이버 파트너 스퀘어 내부 사진들
▲  서울 네이버 파트너 스퀘어 내부 사진들
ⓒ 류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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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아래 중기부) 장관이 19일 포털업계 대기업 네이버를 찾았다. 이곳에서 열린 소상공인 상생 현장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박 장관은 이날 오후 2시께 서울 네이버 파트너스퀘어를 방문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최승재 소상공인연합회 회장을 비롯한 11명의 소상공인연합회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중기부에 취임한 후 박영선 장관이 소상공인 업계와 간담회를 갖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박 장관은 이 자리에서 몇 번이나 '상생과 공존'의 가치를 강조했다. 박 장관이 직원들에게 직접 제안했던 독서 토론회에 필요한 책도 상생을 위해 지역 서점에서 사오겠다고 했다. 박 장관은 이날 참석한 박대춘 한국서점조합연합회장을 향해 "요즘 서점 사정이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며 "독서토론회에 필요한 책 중 절반 가량을 역사가 오래된, 작은 서점에서 사려고 한다"고 말했다. 

"4차 산업 방향성에는 공감하지만 연착륙 필요해"

 

박 장관은 '4차 산업'의 방향성에는 공감하면서 동시에 연착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장관은 "카카오톡이 처음 생겼을 때 (카카오톡쪽으로부터) '수익성으로 인해 회사가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는 연락이 오기도 했다"면서도 "그런데 (카카오가) 지금은 신기루가 된 것처럼, 변화하는 시기에는 위기와 기회가 함께 찾아온다"고 말했다.

이어 "소상공인 대부분이 온라인 쇼핑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면서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의) 상권 전환기인 이 때에 소상공인에 대한 피해가 크지 않도록 정부가 어떻게 4차 산업을 연착륙시킬 것인 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박 장관은 이 자리에서 소상공인과 상생하려는 기업들의 노고를 치켜세웠다. 박 장관은 "네이버의 경제관은 '네이버가 가진 일부를 내려놓고 소상공인과 함께 채워가자'는 것"이라면서 "오늘 파트너 스퀘어를 살펴보니 촬영이 필요한 소상공인들을 위해 네이버가 스튜디오를 제공하는 등 윈윈(WIN-WIN)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 네이버 파트너 스퀘어 내부 사진들
▲  서울 네이버 파트너 스퀘어 내부 사진들
ⓒ 류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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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박 장관은 이날 간담회에 앞서 파트너 스퀘어 시설 곳곳을 둘러봤다. 화장품 콘텐츠 촬영을 위해 만들어 놓은 스튜디오 앞에서 발걸음도 멈췄다. 네이버쪽 관계자는 박 장관에게 해당 스튜디오를 '소상공인들이 이용하도록 만든 곳'이라고 설명했다. 네이버 파트너스퀘어는 소상공인을 지원하기 위해 2013년 네이버가 만든 '상생형' 공간으로, 소상공인을 위한 교육 장소 및 스튜디오로 활용되고 있다.

박영선 장관, 대기업-소상공인 상생 모델로 '서울 네이버 파트너스퀘어' 언급하기도
   
이날 네이버 파트너스퀘어를 소상공인 간담회 장소로 선택한 것 이러한 가치를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영선 중기부 장관은 취임한 후 줄곧 '상생'을 강조하는 행보를 보였다. 지난 11일의 당진 전통시장 방문이 대표적이다. 박 장관은 이 시장을 이마트(노브랜드)와 지역 상인이 공존하는 '우수 사례'로 꼽으며, 자발적인 상생 문화를 만들기 위해 앞장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중기부 관계자는 간담회 후 브리핑을 통해 "박영선 장관의 대외 일정에는 상생과 공존이라는 테마가 있다"며 "앞으로의 정책적 행보 역시 한동안 상생과 공존 측면에서 지역 선정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최승재 소상공인연합회 회장은 간담회에서 박영선 장관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최 회장은 "장관님과는 오랜 시간동안 현장에서 울고 웃었다"며 "소상공인 전체가 인정하는 분"이라며 친밀함을 보였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은 최저임금과 주휴수당, 소상공인 기본법 등에 대해 차례대로 언급했다. 이 중 최 회장이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최저임금. 최 회장은 "(박 장관이) 청문회에서 최저임금 문제를 (회사) 규모별로 나눠 생각해 볼 문제라고 말했는데, 이에 공감한다"며 "소상공인뿐 아니라 저소득층 일자리도 줄어들고 있는데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했다. 

박 장관은 이에 대해 "현 정부가 최저임금에 대해 갖고 있는 방향성에는 공감한다"면서도 "부작용에 대해 더 대비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이어 "최저임금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정책을 하나 둘씩 만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며 "600만 소상공인들의 입김을 대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19일 네이버 파트너 스퀘어에서 열린 소상공인 상생 간담회에서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박영선 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  19일 네이버 파트너 스퀘어에서 열린 소상공인 상생 간담회에서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박영선 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 중소벤처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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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관건적 시기”…뚜렷해진 ‘줄타기 외교’

 

입력 : 2019.04.20 06:00:03 수정 : 2019.04.20 06:01:01

 

김정은 “관건적 시기”…뚜렷해진 ‘줄타기 외교’
 

시진핑에 보낸 편지서 친선 강조 
베트남에도 답전…우방과 밀착
러시아와 8년 만에 정상회담 등 
‘포스트 하노이’ 노선 강화 움직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줄타기 외교’가 뚜렷해지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자력갱생”을 ‘포스트 하노이’ 노선으로 내세운 이후 사회주의 연대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북·러 정상회담이 다음주(24일 혹은 25일) 개최될 예정이고, 중국·베트남 등 우방국과도 더 밀착하고 있다. 반면 미국과 한국에 대해선 연일 압박성 메시지를 던지며 ‘불가근불가원’식 거리를 두고 있다. 김 위원장이 올 연말을 비핵화 협상 시한으로 통보한 가운데, 미국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외교 공간을 확보하고 ‘장기전’에 대비해 협상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전략적으로 긴 호흡으로 움직여온 북한 외교가 또다시 변곡점을 맞는 흐름이다.

김 위원장은 최근 자신이 국무위원장에 재추대된 것을 축하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지난 17일 답전을 보냈다고 노동신문이 19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올해가 북·중 수교 70주년이라는 점을 들어 “조선반도의 정세 흐름이 매우 관건적인 시기에 들어선 오늘 북·중 친선협조 관계를 더욱 귀중히 여기고 전진시켜나가는 것은 중대한 사명”이라고 했다. “가장 진실한 동지적 관계”라고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응우옌 푸 쫑 베트남 국가주석에게도 “총비서 동지의 축하는 사회주의 강국 건설을 위한 우리 당과 국가와 인민의 투쟁에 대한 힘 있는 지지와 고무가 된다”는 답전을 보냈다. 그는 지난달 초 베트남을 방문했으며, 베트남식 개혁·개방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다.

김 위원장은 내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하노이 노딜’ 이후 김 위원장의 첫 외교 행선지다. 8년 만의 북·러 정상회담에선 경제협력 문제가 주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국제적 우군 확보·경제 지원 등 
‘장기전’ 대비 협상력 강화 해석
한·미엔 연일 압박 메시지 대조
 

김 위원장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에 제재 완화에 대한 지원사격을 요청할 것으로 예상된다. 안보리 제재에 따라 올해 말까지 해외에 있는 북한 노동자들이 모두 송환될 예정인데, 북한은 러시아에서 일하는 자국 노동자들의 체류를 희망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중국이 제재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러시아를 우군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반면 미국과는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15일 김일성 주석 생일(태양절)을 맞아 김 위원장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고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전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17일 신형 전술유도무기 사격 시험을 현지지도했으며, 북 외무성은 18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북·미 협상에서 제외시킬 것을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 축하 메시지와 ‘정상 간 신뢰’를 내비치면서도 미국을 압박하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남측에 대해서도 “오지랖 넓은 중재자가 아닌 당사자”가 돼달라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남북 교류협력 사업은 사실상 중지됐다. 개성 공동연락사무소의 정례 협의 채널인 남북 소장회의는 이날로 8주째 열리지 않았다. 

북한의 이 같은 태도는 자력갱생을 통한 경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사회주의 연대를 복원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미국으로부터 제재 완화를 받아내기 어려워진 만큼 국제사회에서 우군을 확보함으로써 비핵화 협상의 장기화에 대비하고 협상력을 높이려는 것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은 “북한이 핵 포기 카드를 들고 나왔기 때문에 사회주의 연대 등 국제관계 개선도 가능한 것”이라며 “미국과의 협상을 재개하기 전에 외교적 공간을 확보하고 체력을 강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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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방종지수’

‘저질언론지수’를 만들어 ‘자유지수’를 보완해야 한다
 
강기석 | 2019-04-19 13:47:5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국경 없는 기자회」가 18일 발표한 2019년 세계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41위를 기록, 아시아에서 가장 언론자유도가 높은 국가가 됐다.

지난 4일 ‘신문의 날’ 행사에 문재인 대통령을 수행한 한 청와대 언론 관련 인사로부터 “왜 우리나라 언론자유지수가 빨리 회복되지 않는 것이냐”고 걱정하는 말을 들었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보름 만에 화답을 내놓은 셈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언론자유지수는 계속 상승해 왔지만, 참여정부 때인 2006년 역대 최고 순위인 31위에 올랐던 달콤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 이 인사는 여전히 순위 상승에 목이 말랐던 것이다. 이 인사의 말을 들으면서 “그렇게 (수구)언론에 당하면서도 자유지수 순위 걱정이라니, 참 속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언론종사자로서 대한민국 언론자유지수가 상승했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나는 「국경 없는 기자회」의 언론자유지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언론 및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전 세계 비정부기구 활동가들과 언론인·인권운동가, 특파원들을 대상으로 △다원주의 △취재 및 보도의 투명성 △뉴스생산구조 등 여러 기준의 설문을 돌려 매년 순위를 정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언론의 자유를 구속하는 여러 요인 중 정치적 요인(권력의 침탈)을 특히 중시하며, 보도의 질 보다 제도나 틀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또한 기자 지상주의에 함몰돼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나는 「국경 없는 기자회」의 ‘언론자유지수’가 제대로 된 언론자유를 측정하려면 ‘언론방종지수’ 혹은 ‘저질언론지수’를 만들어 ‘자유지수’를 보완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한국의 경우 더욱 그렇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0&table=gs_kang&uid=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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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1주년 임진각 향해 '평화 카퍼레이드' 펼친다

6.15서울본부, 판문점선언 이행 각계 대표자 평화선언 발표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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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19  09: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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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서울본부는 18일 서울 미국대사관 앞에서 4.27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서울지역 각계 대표자선언 발표 기자회견을 갖고 오는 27일 임진각에서 열리는 평화 인간띠잇기 행사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의 시대를 내외에 선포한 4.27 판문점선언 발표 1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서울본부'(6.15서울본부)는 18일 서울 광화문광장 미국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오는 27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진행할 예정인 '평화 카퍼레이드'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또 현재 진행중인 4.27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평화선언 서명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먼저 서울지역 각계 227명의 대표자 서명을 공개했다.

이들은 미리 준비한 기자회견문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4.27판문점선언 1조 1항,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하고 이미 채택된 모든 남북선언들과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남북관계 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기로 한 내용을 상기하며, 철저히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해 힘을 모아내야 한다"며 "서울지역의 시민사회, 노동조합, 정당, 청년학생, 여성, 풀뿌리 등 각계각층의 서울 시민들과 함께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맨 앞장에 설 것이며, 더 많은 시민들과 함께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결의를 밝혔다.

이어 △4.27판문점선언 발표 1주년 기념대회 성사 △연내 금강산관광 및 개성공단 재개 △한미연합훈련 및 무기증강 반대,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 촉구 행동전을 다짐했다.

조헌정 6.15서울본부 상임대표는 "희망과 기대를 안고 지난해 4.27 1차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았고 그 후 두번의 정상회담이 더 있었으나 미국이 계속 평화의 대화를 저지하고 방해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지지부진,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오는 4.27 1주년을 계기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는 제2의 독립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순영 서울겨레하나 운영위원장은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는 그 어느 누군가가 허가하고 말고 할 사안이 아니다. 이미 남과 북의 합의로 열린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에 대해 미국이 뭐라고 언급하는 태도는 우리의 주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며, 미국은 도를 넘은 내정간섭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최은철 민주노총 서울본부 본부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제재와 관련해 지금은 적기가 아니라는 발언을 했는데, 그걸 판단하는 건 우리 민족 자신이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남과 북의 평화 번영을 가로막는 대북제재를 지켜 보지만은 않을 것 "이라며, "4월 27일 14시 27분부터 4시까지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임진각에서 이 땅의 자주, 민주, 통일과 평화, 번영을 바라는 노동자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강미경 노원겨레하나 운영위원장은 "지난 3월초부터 DMZ인간띠잇기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평화 통일을 바라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4.27에 한명이라도 더 DMZ, 임진각에 가야 한다는 주민들의 의지가 높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며, "당일 행사 참가 뿐만 아니라 이후 일상 생활에서도 더 넓고 깊게 주민들과 함께 평화 통일의 주인이 되는 활동을 벌여나가겠다"고 말했다.

   
▲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평화 카퍼레이드로 대북제재를 뚫는 모습을 표현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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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동물계 가수’인 비밀, 목 깊숙이 숨어 있다

조홍섭 2019. 04. 18
조회수 223 추천수 1
 
척추동물 유일하게 제2 후두 ‘울대’ 갖춰, 긴 기도를 공명통 활용
 
si1.jpg» 작은 새라도 우렁차게 노래할 수 있는 것은 후두에 이은 울대라는 추가 기관 덕분이다. 나타샤 베르츠비츠키 제공.
 
여름 철새인 휘파람새와 울새가 내는 아름답고도 커다란 노랫소리가 숲 속에서 들려온다. 하지만 정작 노래의 주인공을 찾아낸다면, 그 작은 몸집에서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오는지 놀랄 것이다.
 
다윈을 지지하며 진화론 보급에 앞장선 영국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는 일찍이 1872년 그 답을 내놓았다. “새는 다른 동물처럼 후두가 같은 자리에 있지만 장치가 하나 더 있다. ‘아래 후두’ 또는 울대(syrinx)가 기관 끝에 달려있는데, 이것이 놀라운 발성 기관이다.”
 
‘울대’라는 말이 탄생한 지 150년이 다 돼가지만, 동물 가운데 새들에게만 있는 이 기관이 어떻게, 왜 진화하게 됐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울대가 적은 힘으로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효율적인 장치여서, 이 기관의 진화가 일어났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프란스 골러 미국 유타대 생물학자 등 국제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플로스 바이올로지’ 7일 치에 실린 논문에서 새가 놀라운 노래 실력을 자랑하게 된 비밀은 울대가 기도 깊숙한 위치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란 이론을 밝혔다. 연구자에 참여한 잉고 틸츠 유타대 국립 음성 및 언어 연구센터 소장은 “흔히 잘 들리는 소리를 내려면 입이나 부리 바로 옆에서 발성하면 좋을 것 같지만, 우리가 발견한 건 그게 아니다”라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si2.jpg» 조류와 가까운 친척인 악어(왼쪽)와 오리의 기도 형태 비교. 위는 겉모습, 아래는 단면이다. B와 D에서 기관지가 갈라지는 곳에 있는 울대(보라색)를 볼 수 있다. 에반 킹슬리 외 (2018) ‘PNAS’ 제공.
 
공기호흡을 하는 거의 모든 척추동물에는 후두가 있다. 공기 흐름을 조절해 소리를 내는 데 이용하기도 하지만, 음식이나 물이 기도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밸브 기능을 한다. 기도 들머리에 있는 후두와 함께 새들은 기도 끝 양쪽 기관지로 갈라지는 부위에 울대가 있다. 새들은 울대를 소리를 내는 데만 쓴다. 울대를 마비시킨 새도 호흡에는 지장이 없었다.
 
연구자들은 굳이 후두를 두고 새로운 발성 기관이 왜 필요했나 확인하기 위해 컴퓨터 모델링을 이용해 기도에서 울대가 어느 곳에 자리 잡을 때 가장 소리가 잘 나는지 알아보았다. 그 결과 소리가 잘 증폭돼 소리를 쉽게 낼 수 있는 위치가 따로 있었다. 주 저자인 토비어스 리드 미국 미드웨스턴대 교수는 “울대가 자리 잡은 위치에서 발성 효율이 가장 높았다”며 “이는 울대와 부리 사이의 긴 기도가 소리를 증폭하는 공명통 구실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si3.jpg» 새가 작은 몸집으로 다양하게 진화하는 데는 효과적인 발성 장치인 울대의 출현이 필요했다. 나타샤 베르츠비츠키 제공.
 
새들은 공룡으로부터 분화해 진화하면서 소형화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새들은 척추동물 가운데 가장 목이 길다. 울대는 긴 목과 긴 기도를 소리 공명에 활용해 소형화의 길을 열어준 기막힌 발명품이었던 셈이다. 리드 교수는 “작은 새라면 크고 멀리 들리는 소리를 내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없다”며 “단지 발성 기관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훨씬 큰 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연구자들은 이번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새의 몸 형태가 어떻게 진화했는지도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울대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몸의 자세가 달라져야 했을 것이다. 또 포식자에게 들키지 않고 짝짓기 상대에게 신호를 보내는 ‘지향성’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머리와 몸, 목의 형태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Riede T, Thomson SL, Titze IR, Goller F (2019) The evolution of the syrinx: An acoustic theory. PLoS Biol 17(2): e2006507. https://doi.org/ 10.1371/journal.pbio.2006507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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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59주년,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4·19의거의 도화선이 된 3·15마산의거
 
김용택 | 2019-04-19 08:41:1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분단국가로 만든 장본인,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빨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든 사람. ‘빨갱이 제거’라는 명분으로 수만 명의 제주 양민을 학살하고 여수순천 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비롯해 보도연맹을 조작해 무고한 인민을 학살한 희대의 살인마, 부산정치파동, 국민방위군 사건, 발췌 개헌안, 김구선생님을 비롯한 조봉암… 등 민족의 지도자를 정적으로, 간첩으로 몰아 죽이고 공포정치를 자행한 인물이 수구세력들이 국부로 부르는 이승만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난민들이 지나가는 한강다리를 예고도 없이 폭파해 수많은 국민들을 죽이고, 서울 사수, 결사항전 하겠다더니 정작 자신은 부산으로 도망, 1952년 전쟁 중에 장기집권을 위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번째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이 이승만이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면서 혁명의 불꽃은 타올랐다.

<4·19의거의 도화선이 된 3·15마산의거>

3.15부정선거에 항의해 2·28 대구 학생들의 시위는 급기야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등 8개 학교로 그리고 마산으로 이어지면서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등학교) 입학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왔던 상고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체로 발견된다. 김주열군의 처참한 시신을 부산일보가 보도하자 마산시위는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까지 합세, 전국으로 확대되자 당황한 이승만 정부는 “적색분자들의 준동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조종해 일어났다”며 무마하려 했지만, 시위는 마산고, 마산상고,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고, 동래고… 로 서울과 대구, 부산 마산, 전주, 대전, 청주, 제주 등 전국으로 확산된다.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여러 단과대생들이 합세하였고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 이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 서울에서만 시위대의 규모는 10 만에 육박했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이성을 잃은 이승만정권은 경찰을 앞세워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 서울에서만 무려 10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분노한 시민들은 경무대, 중앙청, 대법원, 이기붕 사옥 등으로 몰려가 항의하고 이승만 독재정권과 자유당을 옹호하던 서울신문사에 불을 질렀고, 반공을 외치며 시민들을 압박하던 반공회관에도 방화했다. 서울 각지의 파출소들도 시민들에 의해 파괴되고 불살라졌다. 시위대는 카빈소총으로 무장,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성을 잃은 이승만 정권은 마침내 서울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는 시위를 진압할 수 없음을 확인, 무마하려 했지만 오히려 들불처럼 번지자 이승만정권은 계엄령은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수원 일대에 확대 선포란다. 그러나 분노한 민중의 시위는 1만명으로 늘어나자 마침내 서울대 교수단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에 합세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각 대학에서는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이 발표되고 초등학교 학생들이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합세하기에 이른다. 정권수호에 혈안이 된 이승만은 시위하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총에 맞아 사망하기에 이르고, 위대대는 10만으로 늘어나게 된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가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삼팔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이승만정권은 3.15부정서거를 규탄하는 국민들의 저항은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이런 성명서를 남기고 하와이로 야반도주함으로써 12년의 독재정권은 막을 내린다. 4.19혁명은 이렇게 사망 21명, 부상자 1,920명의 거룩한 희생으로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 한다는 헌법전문에 대한민국을 지키는 이정표를 남기고 마무리된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4·19혁명 59주년 아침 신동엽시인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를 읽으며 아침을 맞는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30&table=yt_kim&uid=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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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종분, 91년에 죽은 성대 김귀정이 엄마여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4/19 09:04
  • 수정일
    2019/04/19 09:0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민병래의 사수만보 4화] 김종분의 왕십리 노점 30년 세월

19.04.19 07:51l최종 업데이트 19.04.19 07:51l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봄볕이 꽃망울을 터트리며 어깨 위에 내려 앉아 놀던 것이 어제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봄기운이 홀연히 사라지고 꾸물꾸물한 날씨에 찬바람까지 더해져 겨울이 다시 온 듯했다.

김종분은 이래나 저래나 몸을 추스려 경동시장(서울 동대문구)을 향한다. 언제부턴가 비탈에 선 나무처럼 기울어진 몸, 아직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음을 고마워하며 버스에 올랐다. 남들은 꽃샘추위라며 겨울 외투를 다시 꺼내고 목도리까지 챙겼건만, 김종분은 홑겹 옷차림에 전대 자루 하나 걸쳤을 뿐이다.

"에구. 만 원에 가, 가자구."
"아이구! 할머니, 너무 하셔요. 용달 기본요금이 2만원이에요."
"무신 소리야, 늘 그렇게 갔어."
 

잠시 실랑이를 했지만 흥정은 싱겁게 끝났다. 김종분이 호박·오이·옥수수 등을 떼다가 왕십리 노점에서 판 세월이 벌써 삼십 년이다.
 
김종분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클로즈한 모습 행당시장에서 노점을 하며 더울때, 추울 때는 인근 맥도날드에서 잠시 피난(?)을 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
▲ 김종분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클로즈한 모습 행당시장에서 노점을 하며 더울때, 추울 때는 인근 맥도날드에서 잠시 피난(?)을 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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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생이니 올해 팔순이 넘은 나이. 기계 운반 일을 하던 남편이 50대 중반에 뇌진탕으로 세상을 등지자 그녀는 노점으로 나섰다. 그때 그녀의 나이 쉰 살이었다. 삼남매는 아직 생활 터전을 잡기 전이었다. 무작정 거리에 나가 좌판을 펼친 곳이 왕십리 행당시장 앞 건널목이었다.
 
경동시장에서 왕십리까지는 용달차로 10분 남짓거리, 고산자로를 따라 가다가 청계천을 건너면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있다. 그의 가게(?) 앞에 야채 상자를 내려놓으려니 바람이 매서워 천막으로 만든 그의 노점이 마구 흔들린다.

사실 구청에서 무허가노점을 단속한다고 천막을 뜯어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쫓겨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뜯어가면 뜯어가는 대로, 쫓아내고 전기를 끊으면 또 그런 대로 버티고 버티며 오늘까지 왔다.

"할머니, 요 오이 한 봉지 값 2000원 낼모레 줄게!"
"그려, 가지고 가. 요담에 줘."


오후 3시경, 막 장사를 시작할 때면 나타나는 동네 할머니다. 김종분은 2000원짜리 외상을 흔쾌히 달아준다. 그렇다고 장부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머릿속에 기억해두고 잊으면 잊는 대로 장사를 한다. 30년 세월, 한자리를 지켰으니 길거리 사랑방이 된 셈이다.
 
김종분 할머니가 손님에게 물건을 건네는 모습 김종분 할머니는 오후 3시부터 자정을 넘겨 새벽1시까지 자리를 지킨다.
▲ 김종분 할머니가 손님에게 물건을 건네는 모습 김종분 할머니는 오후 3시부터 자정을 넘겨 새벽1시까지 자리를 지킨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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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분의 가게는 두 평이 채 안 된다. 천막 한 구석에는 강냉이며 튀밥이, 앞에는 오이, 호박, 깐마늘, 가래떡이 귀한 손님상 보듯 가지런히 놓여있다. 안으로는 옥수수 삶는 큰 솥이 의젓하게, 가래떡 굽는 연탄화로는 얌전하게 앉아 있다. 양쪽 네 귀퉁이로는 얇은 쇠기둥이 한길 남짓 올라가 천막을 지탱해주고 있다.

여기가 그의 일터이며 삶의 터전이다. 늦은 시간엔 여기서 잠도 청했다. 자정 넘어 들어가면 아이들이 잠에서 깰까봐 걱정도 되고, 새벽시장에 늦지 않으려고 왕십리 대로변에서 경적 소리를 벗 삼아 잠들기도 했다.

김종분이 앉은 자리는 남향이지만, 앞으로 건물이 있어 하루 종일 볕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해가 있는 낮에는 견딜 만하지만 날이 저물면 한기가 느껴진다. 길바닥을 내달리는 차들이 일으키는 바람까지 더해지면 꽃샘추위도 한겨울 매운 추위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김종분의 옷은 늘 홑겹이다. '그날' 이후 몸에 천불이 나서 옷을 여밀 수가 없었다. 몸을 풀어헤쳐야만 열을 식힐 수 있었다.

벌써 27년 전, 성대 불문과 88학번이던 둘째 딸 귀정이가 숨진 날이 27년 전인 1991년 5월 25일이다.

그날 귀정이는 학교 가는 길에 치마를 입고 나갔다가 황급히 돌아와서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러려니 했다. 평소에도 아버지가 소주를 마시고 나면 빈병을 부지런히 나르기에 걱정이야 들었지만 별일 없으려니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딸은 그날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했었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아들 친구가 늦은 오후에 노점으로 찾아왔다. "귀정이 누나가 다쳐서 백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가보셔야 한다"는 얘기였다. 장사하던 중에 좌판을 치울 수도 없어 아들 친구에게 택시비를 쥐어주고 먼저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렇지만 김종분도 마음이 불안해, 장사를 그냥 벌려놓은 채 물어물어 백병원을 찾아나섰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박종철 아버지가 '귀정이 어머니'를 찾아 왕십리를 헤매고 다니셨다"고 한다. 도착하니 이미 백병원 앞은 시위대와 경찰이 거친 몸싸움을 벌이며 난리통이었다. "왜 막아, 폭력경찰 물러가라!!" 고함소리가 곳곳에서 일어나 귀가 떨어져나갈 정도였다.

경찰이 병원을 빈틈없이 에워싸서 들어가려 해도 계속 밀려나고 말았다. 그때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아버님 한 분이 "가족이니 길을 열어주라"고 해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입원했다는 딸을 보러왔건만, 병실로 안내하지 않았다. 설마 했지만 영안실로 인도받을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슴 고동이 쿵쾅대고 터져나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왜 병실로 안 가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외면했다. 순간 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넘어질 듯했다. 영안실은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천천히 방안에 들어서니 흰 천으로 쌓인 몸뚱이가 뎅그러니 놓여있었다. 사방 벽은 시퍼런, 징그럽게 시퍼런 색이었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외면하려 해도 몸뚱이는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비틀비틀대며 거의 무릎 걸음으로 다가가 흰 천을 걷어냈다. 눈에 들어온 것은 곱디고운 둘째 딸 귀정이었다.

그날 이후 김종분은 몸에서 열이 나 늘 식혀야만 했다. 그래서 옷을 여미고는 살 수 없었다. 살을 에는 한겨울 추위가 아니면 그저 옷을 벌려 놓고 있어야 열을 풀어낼 수 있었다.

"어머니 추운데 오늘도 나오셨어요? 옥수수 두 봉지 좀 주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구청 직원이다. 천막을 뜯어가며 못내 미안해하던 단속반 사람이다. 그 뒤부터 퇴근 무렵이면 가끔씩 들러 가래떡이며 땅콩을 한 봉지씩 사간다. 김종분은 옥수수에 가래떡까지 얹어 "어서 들어가 안식구하고 따순 밥 먹으라"고 인사를 했다. 어쩜 이 맛에 장사를 하는지도 모른다.
 
김종분 할머니가 옥수수를 찌는 모습 할머니 가게에서 옥수수와 가래떡이 제일 인기다.
▲ 김종분 할머니가 옥수수를 찌는 모습 할머니 가게에서 옥수수와 가래떡이 제일 인기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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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해가 떨어지니 제법 쌀쌀하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제야 김종분은 겨우 바람막이 하나를 꺼내 몸에 걸쳤다. 딸 귀정이가 좋아하던 꽃분홍색이다.

김종분은 백병원 영안실에서 5월 25일부터 6월 12일 장례식 날까지 꼬박 열아홉 날을 보냈다. 몸이 무너져 내렸지만 딸 귀정이의 친구들이 손잡아주고 어깨도 주물러주며 항상 곁에 있어주었다. 그때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던 문익환 목사님, 지선 스님, 이소선 어머니 등이 거의 함께 지내며 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민가협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도움 덕에 귀정이 옆을 지켜낼 수 있었다.

열아홉 날을 지내면서 김종분이 제일 힘들었던 때는 부검한다고 경찰이 병원 난입을 시도했을 때였다.

귀정이가 대한극장 앞 도로에서 경찰의 공세에 밀리다 압사한 날이 1991년 5월 25일이다.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에 맞아 숨진 날로부터 꼭 한 달 뒤였다. 당시 공안정국을 몰고 갔던 노태우 정부는 김귀정 사망으로 불리하게 된 정세를 서둘러 덮고자 부검을 명분삼아 시신을 뺏으려 했다.

그래서 '김귀정열사폭력살인대책위'의 사수대는 경찰과 매일 치열하게 싸웠다. 특히 격렬했던 날은 5월 30일이었다. 나중에 확인된 일이지만, 새벽 5시에 경찰은 백골단과 전경을 세 방면에서 한꺼번에 투입하는 작전을 전개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일명 '엘레베이터 작전'이었다. 80여 명의 백골단이 환자 보호자와 방문객으로 가장해서 병원 13층에 집결, 작전 개시와 함께 급강하, 영안실로 난입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관제데모작전'이었다. 시위대로 위장한 사복조들이 을지로 일대에서 전경과 맞붙은 뒤 쫒겨들어가는 것처럼 병원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백병원 뒤 중부세무서의 담을 굴삭기로 헐고 병력을 투입, 병원 정문을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경찰은 달려들었지만 사수대의 결사항전에 밀려 작전을 포기, 철수하고 말았다. 그날 부상자들이 특히 많았다.

김종분은 딸의 친구들이 피터지며 다치고 영안실에서 밤새우며 지쳐가는 모습을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우리 딸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상하는구나"하는 생각에 속상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바라보면서 눈만 껌벅껌벅할 뿐, 천불을 안으로 안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저녁 밥은 어떻게 할래요? 동태찜 시켜 먹을까?"

문득 생각에 잠겨있던 김종분을 꽃집 아줌마가 불러 깨운다. 행당시장 앞, 손바닥만 한 땅뙈기 안에서 어깨 나란히 노점 하는 이웃이다. 그 집 말고도 토스트, 칼국수, 군밤장사 이렇게 서넛이 (지금은 칼국수 장사가 죽었지만) 서로 수십 년을 의지하며 함께 했다. 저녁 끼니 때가 되면 라면을 끓이기도 하고, 시켜 먹기도 하며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식구다.

동태찜을 나눠먹고 가래떡과 옥수수를 몇 봉지 겨우 팔고 나니 어느덧 자정이 가까이 온다. 이때쯤 되면 몸이 한결 춥고 졸음까지 밀려온다. 발 앞에 연탄난로를 몸 가까이 더 끌어안아 본다. 김종분은 늘 자정을 넘겨 한시까지 장사를 한다. 밤 11시가 넘어 사람들 발길도 잦아지면 장사도 시원찮다. 그렇지만 김종분은 늘 새벽 한시 경까지 거리를 지킨다. 아니 졸음에 못 이길 시간까지 스스로를 가둬둔다.

그날 6월 12일은 참으로 길었다. 아니 11일부터 헤아려보면 더 긴긴 날이었다. 장례식을 위해 귀정이를 성대로 옮기던 날, 뜻하지 않게 성균관 유림들이 교문을 막고 나섰다. "성균관에는 정몽주·퇴계 선생 등 성현 39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초대 총장이었던 김창숙 선생 장례 때도 시신이 들어오지 않았다"며 운구를 저지했다.

그날따라 비는 추적추적 내렸고 늦은 오후여서 땅거미까지 지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생들은 무릎을 꿇었다. 여학생들은 치마를 입은 채 맨살을 아스팔트에 드러내놓고 애원했다. "귀정이가 마지막으로 교정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라며... 그 간청 덕에 운구는 정문을 피해 도서관 옆문으로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6월 12일 성균관대 금잔디광장을 출발한 장례행렬은 파고다공원 앞에서 1차 노제, 대한극장 앞에서 2차 노제를 치렀다. 그리고 딸이 다녔던 무학여고 앞을 거쳐 밤 늦게 모란공원에 묻힐 수 있었다.
  
귀정이를 보내고 난 후 김종분은 자정을 넘기고 나서야 노점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몸을 부대껴야 집에 가서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을 열고 자야 했다. 문을 닫고서는 잠이 들지 못했다. 옷을 풀어헤쳐야 하는 것처럼 문을 열어놓아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자정이 넘으니 저 멀리 달빛은 맑아지는데 왕십리 가로등은 끔벅끔벅 졸기 시작했다. 큰 길가에 차 소리도 조금씩 잦아든다. 이때가 장사를 거둘 시간이다.

김종분은 연탄난로 불을 끄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전기가 끊긴 이후에는 가로등 불빛만 의지해 야간장사를 한 지 제법 오래되었다. 분홍빛 바람막이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고 남은 오이며 호박을 대충 수습해 천막 안으로 밀어놓고 얼기설기 동여매 쇳대를 채웠다.

예전에는 이 천막 안에서 많이 잤다. 그런 다음 날이면 귀정이와 큰딸은 늘 성화를 했다.

엄마 기다렸는데 왜 안 왔냐고, 
너희들 잠 깨울까봐 그냥 거기서 잤다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엄마 몸 상한다고.

그렇게 티격태격 말다툼을 했다.
그렇게 살가웠던 귀정이. 이제 한 달 남짓이면 28주기 기일이 다가온다.

고맙게도 딸의 친구들은 '김귀정추모사업회'를 만들어 일 년에 세 번 어버이날·설날·자신의 생일날을 잊지 않고 찾아와주었다. 그것도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그게 참 힘이 되었다. 그리고 왕십리의 무학여고 동창들도 때때로 찾아왔다. 와선 안부도 묻고 쪽파 한 단 사며 몇 만원씩 전대에 밀어 넣어주기도 했다.

어떤 날은 와서 "어머니 감기 든다"며 목도리를 둘러주고 갔고 작년에는 팔순잔치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귀정이를 잃어 아팠지만 더 많은 딸과 아들을 얻었다는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귀정이의 언니인 큰 딸과 동생인 막내 아들 녀석은 늘 성화다. 간청도 많이 한다. "이제 그만 노점 일 걷으시라고, 쉬셔야 한다"고.

그렇지만 김종분은 행당시장 건널목 앞 이곳을 떠날 수 없다.
귀정이와 3남매를 키워낸 이 곳,
귀정이의 친구들이 늘 찾아오는 이 곳,
왕십리의 거리 사랑방이 된 이 곳을 벗어날 수 없다.
산동네에 판잣집이었지만 첫 집을 장만했던 이 곳, 왕십리를 떠날 수가 없다.

김종분은 몸을 기우뚱거리며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제 집으로 가는 길이다.
김종분의 천막노점을 비추던 가로등도 졸린 눈을 부비며 따라 일어난다. 앞서서 종종 걸으며 찬바람을 막아주고 길을 비춰준다.
왕십리의 별빛 달빛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녀가 가는 길에 빛살을 보태준다.
밤하늘 어스름 어딘가에는 귀정이의 웃음, 귀정이의 속삭임이 번지는 듯하다.

"엄마 오늘도 고생했어, 사랑해..."

김종분은 눈을 꿈벅꿈벅하며 한마디 내뱉는다. 썩을 년, 꿈에 한 번도 안 보이면서...
 
김종분 할머니의 귀가길 새벽 1시까지 장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 김종분 할머니의 귀가길 새벽 1시까지 장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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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분 할머님의 이력 
38년 화성에서 출생 
62년 인천으로 시집 
67년 왕십리 이주 
88년 남편과 사별 
88년 왕십리 행당시장앞에서 노점 시작
91년 둘째딸 김귀정을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잃음
2018년 팔순연 
2019년 팔순이 넘은 지금도 행당시장앞 거리를 지키고 있음
 
김귀정을 돌아보는 사진들
김귀정의 초상 성대 불문학과 88학번 김귀정은 91년 공안통치분쇄 시위과정에서 산화하였다.
▲ 김귀정의 초상 성대 불문학과 88학번 김귀정은 91년 공안통치분쇄 시위과정에서 산화하였다.
ⓒ 김귀정 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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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여고 재학시절의 김귀정 김귀정은 왕십리 무학여고를 나왔다. 무학여고시절의 모습, 맨 왼쪽이다.
▲ 무학여고 재학시절의 김귀정 김귀정은 왕십리 무학여고를 나왔다. 무학여고시절의 모습, 맨 왼쪽이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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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원 영안실에서 통곡하는 김종분 여사  91년 5월25일부터 6월11일까지 김귀정열사는 백병원 영안실에 있었다.
▲ 백병원 영안실에서 통곡하는 김종분 여사  91년 5월25일부터 6월11일까지 김귀정열사는 백병원 영안실에 있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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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 열사의 무덤앞에서  김귀정 열사는 91년 6월12일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모셔져 있다.
▲ 김귀정 열사의 무덤앞에서  김귀정 열사는 91년 6월12일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으로 모셔져 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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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의 운구행렬 김귀정은 6월11일 장례를 위해 성대로 옮겨져왔다.
▲ 김귀정의 운구행렬 김귀정은 6월11일 장례를 위해 성대로 옮겨져왔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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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림이 학교진입을 막자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 성균관 유림이 학교진입을 막자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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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림이 김귀정의 성대운구를 막자 빗속에서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 성균관 유림이 김귀정의 성대운구를 막자 빗속에서 간청하는 귀정이 친구들의 모습 성균관 유림은 성현이 모셔져있는 곳에 시신이 들어갈 수 없다며 막았다. 이에 간청하는 재학생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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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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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91년 김귀정열사 사망규탄 투쟁현장의 모습 김귀정 열사의 사망을 계기로 공안통치 분쇄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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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의 장례행렬 91년 6월12일 성대를 출발한 장례행렬은 파고다공원, 대한극장, 무학여고를 거쳐 모란공원에서 마쳤다.
▲ 김귀정의 장례행렬 91년 6월12일 성대를 출발한 장례행렬은 파고다공원, 대한극장, 무학여고를 거쳐 모란공원에서 마쳤다.
ⓒ 김귀정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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