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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배치 1년 되던 날... 성주는 여전히 '전쟁터'

 

성주 주민들 366회 촛불 집회 개최... 서북청년단 등 극우단체들은 사드 찬성 집회

17.07.14 11:42l최종 업데이트 17.07.14 11:42l

 

 경찰은 13일 오후 사드가 배치된 소성리 마을회관 입구에서 서북청년단 등 보수단체와 주민들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도로 양쪽을 완전히 막았다.
▲  경찰은 13일 오후 사드가 배치된 소성리 마을회관 입구에서 서북청년단 등 보수단체와 주민들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도로 양쪽을 완전히 막았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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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들어오기 전에는 가족들이랑 영화도 보고 놀러 다니고 가족모임도 하고 좋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왜 우리 지역에 와서 가족과 이웃들을 망가뜨리는지, 북핵에 대응한다는데 사실이 아니잖아요. 우리 지역 사람들은 다 알아요..."

조유련(48)씨는 지난해 정부가 사드를 성주에 배치하겠다는 발표를 한 이후부터 성주는 지옥이 되었다며 "제발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 우리 가족 4식구가 함께 밥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흘렸다.

평범한 가정주부 사드 반대에 발벗고 나서 "사드 반입 생각하면 눈물만 나"
 
평범한 직장인으로,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았던 조씨는 지난해 7월 13일 정부가 성주 성산포대에 사드를 배치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삶이 변했다. 막연한 우려에 인터넷도 찾아보고 이웃들과 대화를 통해 안전과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사드를 반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 김항곤 성주군수도 삭발을 하고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쓰며 "사드는 결코 우리 지역에 들어올 수 없다"고 강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군민들이 힘을 합하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조씨는 SNS를 통해 주민들과 많은 의견을 나누며 사드 반대 촛불 집회에 열심히 나갔다. 카카오톡 단체채팅방인 '1318'방에서 매일 다양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평화를 상징하는 '파란나비' 리본을 만들고 팔찌도 만들어 주민들과 나누었다.

하지만 김 군수가 군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성산포대 대신 제3의 부지를 선택해 달라며 기자회견을 한 후, 많은 사람들이 돌아서는 것을 보고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성주군청 앞마당에 모여 "소성리도 성주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사드 반대"를 외쳤지만 이미 사드 배치 쪽으로 돌아선 관변단체 등은 오히려 아픈 가슴을 헤집어놓았을 뿐이다.
 
 13일 오후 서북청년단 등 보수단체가 사드가 배치된 성주 소성리 입구에서 집회를 하자 경찰이 충돌을 우려해 주민들을 고착시키는 과정에서 한 주민이 바닥에 넘어졌다.
▲  13일 오후 서북청년단 등 보수단체가 사드가 배치된 성주 소성리 입구에서 집회를 하자 경찰이 충돌을 우려해 주민들을 고착시키는 과정에서 한 주민이 바닥에 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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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는 지난 1년 중 사드가 반입된 4월 26일이 가장 소름끼치는 날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25일 저녁에 성주읍에서 열린 촛불집회를 마치고 소성리에 올라왔다"면서 "그날따라 경찰들이 엄청 많았다"고 말했다.

조씨는 "할머니들이 불안해 할까봐 노래도 부르고 기분도 풀어드리며 시간을 보내다 자정이 넘어 '여자들은 집에 갔다가 상황이 터지면 오자'고 해 집으로 갔다"며 "집에 가니 이미 1시가 넘었고 딸은 혼자 자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만일을 대비해 씻은 후 외출복을 그대로 입고 누워 있었는데 비상이 걸렸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곧바로 소성리로 차를 몰았는데 가로등이 다 꺼져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 상향등을 켰더니 경찰차가 새까맣게 올라가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씨는 "현장에 도착하니 경찰들은 주민들을 막고 있었고 할머니들은 밑에 깔려 한 분은 팔이 부러졌다"면서 "앰블런스 차량이 들어와야 하는데 경찰이 못들어오게 막아 군대 응급차량이 병원으로 이송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조씨는 "지금도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자다 보면 환청이 들리고 몇 번씩 깨게 된다"면서 "사드 때문에 마을이 쑥대밭이 됐는데 성주군은 '생명문화축제'를 열었다. 분해서 눈물만 계속 나왔다"고 말했다.

"사드는 북핵 막기 위한 방어용이 아니라 주한미군 위한 무기"

이혜경(48)씨는 "첨엔 사드가 뭔지도 잘 모르고 왜 반대해야 하는지도 몰랐다"면서 "휴대폰도 머리맡에 두고 자면 전자파가 나와 안 좋은데 사드레이더의 전자파는 얼마나 많이 해롭겠나"라고 말했다.

이씨는 "처음엔 주민들도 사드가 건강에 해롭다며 들어오는데 반대했지만 니중에는 북핵을 막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주한미군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라는 걸 알았다"면서 "사드는 한반도 평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사드 배치가 발표된 후 군수가 삭발을 하면서 막아내겠다고 해 물리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다"면서 "하지만 3부지를 찬성하면서 주민들이 길거리로 내쫓기고 애원해도 만나주지 않아 믿음을 저버렸다"고 김항곤 군수를 비판했다.

이씨는 이어 "제3부지를 찬성하면서 군수와 함께 움직인 단체들이 다 빠져나갔다"면서 "집회에 참석하면 군에서 지속적으로 전화가 오고 군에 관계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압박을 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무슨 일이 터지면 너희들이 참아라 한다. 국가가 하는 일인데 왜 희생을 하지 않느냐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한다"며 "사드의 본질을 안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무조건 종북,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은 소성리에 와서 주민들 처지를 본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미국은 괌에 사드를 영구배치 한다고 발표하지 않았다. 4년째 환경평가를 하고 있고 레이더 방향도 바다를 향하고 있다"며 "인근에는 주민들도 살지 않고 돼지 한 마리, 박쥐 한 마리만 있어도 환경영향평가를 하는데 우리는 인근에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무조건 안심하라고만 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서북청년단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13일 오후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 몰려와 사드 찬성을 외치며 주민들과 충돌했다.
▲  서북청년단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13일 오후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 몰려와 사드 찬성을 외치며 주민들과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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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성주 롯데골프장에서 불과 1.2km에 있는 김천시 남면 월명리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지만 정부는 환경영향평가도 실시하지 않은 채 기습적으로 사드 장비를 배치해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이씨는 "직장에 다니면서 3명의 자녀를 키우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동안 안타깝고 화가 나는 일을 보더라도 그냥 지나갔다"면서 "사드 배치 과정을 겪으면서 직접 행동하지 않으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호 유족들이나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드 배치 1년 되던 날 전쟁 방불케 한 보수단체 집회

사드배치를 발표한 지 1년이 되는 날도 성주 소성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서북청년단 등 극우단체들이 몰려와 사드 찬성 집회를 갖고 롯데골프장 부지가 있는 곳까지 행진을 하려다 마을주민들과 충돌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날도 마을주민과 극우단체 회원들을 갈라놓기 위해 수백 명의 경찰이 출동했다. 소성리 마을회관 입구를 둘러싸고 두 집단 간의 충돌을 막았다. 경찰이 마을 주민들을 막는 과정에서 일부 주민들이 넘어지기도 했다.
 
 국회 안전행정위 소속 윤재옥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일행이 13일 오후 사드가 배치된 성주군 소성리 입구를 방문해 주민들이 차량을 검문검색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지적했다.
▲  국회 안전행정위 소속 윤재옥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일행이 13일 오후 사드가 배치된 성주군 소성리 입구를 방문해 주민들이 차량을 검문검색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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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에는 두 야당 국회의원이 성주를 찾았으나 서로 다른 행보를 보였다. 먼저 국회 안전행정위 소속 윤재옥 의원 등 자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 4명이 오후 4시 50분경 소성리를 찾았다. 윤 의원은 "경찰이 공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고 있어서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찾았다"면서 소성리 주민들이 롯데골프장 부지로 가는 차량을 검문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윤 의원 일행은 하지만 소성리 입구 삼거리에서 보수단체와 마을주민들 간의 대치상황만 바라보았을 뿐, 마을주민들이 검문검색을 실제로 하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은 채 "경찰청에 법질서를 확립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개선이 안 되는 것 같다"는 말만 하고 발길을 돌렸다.

사드 반입부터 이미 불법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불법적인 통행을 막아선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윤 의원은 "국가가 불법적인 일을 했겠는가"라며 "그건 법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라고 말했다.
 
 성주 주민들은 13일 오후 8시부터 주민 300여 명이 모여 366일째 사드 반대 집회를 열었다.
▲  성주 주민들은 13일 오후 8시부터 주민 300여 명이 모여 366일째 사드 반대 집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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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대 정의당 국회의원은 13일 오후 8시부터 성주군청 앞 주차장에서 열린 사드 반대 366일째 집회에 참석해 주민들과 함께 했다.
▲  김종대 정의당 국회의원은 13일 오후 8시부터 성주군청 앞 주차장에서 열린 사드 반대 366일째 집회에 참석해 주민들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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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저녁 성주군에서 열린 366차 촛불집회에는 김종대 정의당 국회의원이 참석했다. 김 의원은 "전 세계가 성주를 바라보고 있고 이제 성주는 덩치 큰 강대국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고 위로했다.

김 의원은 "저는 미국 가서 사드배치 빨리 안 한다고 귀싸대기 맞고 중국 가서 사드배치 한다고 또 귀싸대기 맞고 국내 돌아와서 말 함부로 한다고 보수언론들에게서 또 맞았다"면서 "성주 와서 위로받으니 싸대기 세 대가 아니라 열 대라도 상관이 없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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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다음 100년 평화운동으로 대응'

(추가)사드1년 평화대토론, 비대위 해소 상시대책위로 전환
익산=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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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3  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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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는 사드배치 발표1년을 맞아 13일 익산총부에서 평화토론회를 개최, 교단차원에서 발족한 원불교성주성지비상대책위원회를 '상시'대책위원회 전환할 뜻을 밝혔다. [사진제공-원불교성주성지비상대책위원회]

원불교는 13일 사드 배치 반대 투쟁 1년에 즈음해 지난해 8월 말 교단 차원에서 발족시켰던 '원불교성주성지비상대책위원회'(원불교비대위)를 해소하고 '상시' 대책위원회로 전환할 뜻을 밝혔다.

원불교비대위는 이날 오후 원불교 익산총부 법은관에서 150여명의 교무 등이 참가한 가운데 '원불교 평화대토론-성지 수호를 넘어 평화운동으로'를 개최한 후 집행위원장인 김선명 교무가 토론 결과를 수렴해 발표한 '사드철회와 원불교 평화운동 제안'을 통해 "비상대책위원회를 해소하고 상시 대책위원회로 전환하여 성지수호와 사드 철거운동을 해갈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또 지난 1년간 '원불교는 평화입니다'라는 표어아래 현장에서 기도와 명상, 그리고 법회로 함께 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평화의 시대정신을 담아내고 깊이있는 연구와 외연확장을 선도할 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김 교무는 이번 제안이 "지난 1년여의 시간을 넘어 지나 온 교단 백년을 반추하고 이를 다음 백년의 에너지로 승화시켜 교단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지혜를 모아 보자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정부가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걸음에 발맞춰 좀 더 긴 호흡으로 그간의 긴장과 피로도를 풀어내고 효율성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원불교 평화운동을 선도할 수 있는 조직은 교단창립 초기의 조합정신을 되살려 '소태산평화연구조합'이나 원광대 대학원의 '종교평화학과' 등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의견은 즉시 교단에 전달되어 필요한 절차를 거쳐 곧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원불교 대구경북 교구장인 김도심 교무는 축사를 통해 "장기화되는 국면에서 '비상' 字는 떼어야 겠죠"라고 운을 떼고는 "지금이야말로 교무님 각자가 순행해 온 결과 얻은 삼대력(정신수양으로 얻는 수양력과 사리연구로 얻는 연구력, 작업취사로 얻는 취사력)이 아니라 교단적, 집단적 삼대력을 도출해 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교무들의 활발한 토론을 주문했다. 

   
▲ 원불교성주성지수호비상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인 김선명 교무가 토론회 참석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 건의안을 발표했다. [사진제공-원불교성주성지비상대책위원회]

토론회 참석자들은 사드철회 및 성주성지 수호운동으로 촉발된 원불교의 대 사회활동으로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이웃종교와 시민사회에 원불교의 평화운동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됐다며, 이번 계기에 관성과 관행에 젖어 있던 지난 백년을 성찰하고 원불교 다음 백년을 위한 유연한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명은 원불교비대위 상황실장은 '사드철회 및 성주성지수호 활동' 보고에서 "지난해 7월 13일 성주 사드배치 결정이 공식화된 직후인 14일 원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가 사드배치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교단 차원에서는 8월 31일부터 원불교대책위원회로 확대 개편해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지난 1년간 교단내에서는 '성주성지 수호'를 외치는 사드반대 입장과 '북핵안보 지지'를 앞세운 사드찬성 의견이 계속 대립해 온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토론회가 열리는 이날도 성주 소성리에서 극우단체와 경찰의 개입으로 주민들과 교도들이 탄압받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런 쉽지 않은 상황때문에)교단 일부에서 소성리 평화교당, 진밭교 교당의 기도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기도 하지만 그 교당은 평화시민들이 만든 것이므로 그들과 함께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 진행중 성주 소성리에서 발생한 경찰과 우익단체의 폭력사태로 원불교 교무 2명이 부상을 당한 상황에 접해 참석자들은 규탄 결의를 발표하기도 했다.
   
정상덕 교무는 '여섯 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원불교 평화운동'이라는 주제발표에서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의 '정신개벽운동'을 '평화운동'으로 바꿔 불러도 손색없다며, 르 코르뷔지에(예술), 라이너스 폴링(과학), 무함마드 유누스(경제), 함석헌(종교), 넬슨 만델라(정치), 마리아 몬테소리(교육) 등 각 분야 '평화운동가'의 성과에 비추어 소태산을 적극적으로 연결해서 바라볼 것을 제안했다.

낮선 시선으로 원불교 교법을 바라보는 가운데 고리타분하지 않은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 있고, 여러 분야를 아울러 고민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자발성.창의성, 공익성을 중심으로 광장에서 새로운 힘을 만들어가는 신신사회(New New Society)운동의 맥락과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원불교는 종교를 위한 종교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종교로 자리매김되어 일상에서 세상으로 평화가 확장되도록 하고, 평화가 평화에게 말을 걸어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도록 하는 실천방향을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음공부를 통해 내면의 평화가 일상이 되고, 남북통일과 평화운동, 반전반핵 평화운동, 사드배치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평화운동,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평화운동이 일상의 평화와 동시성 및 균형을 이룰 때까지, 이런 평화의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키우고 실천활동을 하는 것이 소태산 대종사가 말한 영원한 평화라는 것이다.

   
▲ 이날 토론회에는 150여명 이상의 원불교 교무.교도들이 참석해 사드배치 철회 진행상황과 원불교 교단 개혁방향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사진 - 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원광대 정역원의 원익선 교무는 '원불교의 평화운동과 전환기 교단의 변혁'이라는 주제발표에서 '이전 정부의 불법적이고 일방적인 사드배치는 원불교인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었으며, 무엇보다 원불교 교단에 큰 화두를 던지고 있다'며, 이번 사드배치 철회 투쟁이 원불교에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했다.

"사드 그 자체도 그렇거니와 불법으로 배치된 상황에 대해 어떠한 양보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타협도 용납할 수 없는 종교 그 자체의 생명이다. 자신의 성지에서 불법이 저질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에 대해 교법에 의거 항의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원 교무는 이 하나의 사건만으로도 원불교의 이상이 점점 쇠퇴하고 있는 징표로 읽을 수 있다며,  "오늘날 그 이념은 점점 쇠퇴하고 조직은 무기력해지고 있으며, 방편은 구태의연하고, 인적자원은 점점 감소하고 있다. 거의 모든 분야에 있어 근대적 방식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지금의 원불교를 진단했다.

이어 사회교화를 내건 원불교가 정면으로 현대사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무여한'의 법인 정신을 회복하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교단을 확립하며, 일상의 결사를 통해 원불교의 사회적 공약을 실천하는 원불교 스스로의 대변혁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 당초 이날 오후 5시까지로 예정됐던 토론회는 6시를 훌쩍 넘기도록 열띠게 진행됐다. 토론회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원불교성주성지비상대책위원회]

(수정, 추가-14일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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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녹색당·민중연합당, 선거제도 공동개혁안 발표

노동당·녹색당·민중연합당, 선거제도 공동개혁안 발표
 
 
 
편집국
기사입력: 2017/07/14 [01:5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노동당, 녹색당, 민중연합당 등 3개 원외 진보정당들이 선거제도 개혁안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 녹색당)     © 편집국

 

노동당녹색당민중연합당 등 3개 원외 진보정당들이 모인 정치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제정당 연석회의는 13일 오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선거제도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들 3개 정당은 정치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지 못하고 국정농단과 권력형 부정부패정경유착을 끊임없이 발생시키면서 기득권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불공정한 선거제도에서 기인한다며 최다 득표 후보만이 당선되는 현행 승자독식 위주의 선거제도는 다양한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기득권정치를 더욱 공고화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들 3개 정당은 정당득표율과 의석수의 비례성을 높이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 단체장선거에 결선투표제 도입 선거권 16피선거권 18세로 선거연령 인하 국회의원 정수 인구 13~14만명당 1명으로 확대 지역구 당선자가 정당비례득표율을 초과할 경우 초과의석만큼 의석 증가지역구와 비례는 1:1로 연동 지방선거 광역의원선거는 전면적 혹은 1:1 연동형 비례대표제기초의원 선거는 3~5인 선출하는 중선거구제 도입 국회진출 정당득표율 진입장벽(봉쇄조항)은 ‘1/의석수로 바꿔 실질적으로 봉쇄조항 폐지 등의 내용을 담은 개혁안을 제안했다.

 

나아가 연석회의 참여 정당들은 선거제도 개혁에 머무르지 않고 시민들의 자유로운 정치참여와 다양한 정치세력의 정치활동을 확대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며 오늘 1차 기자회견에 이어 시민과 정당의 정치활동을 제약하는 정당법과 정치자금법 등 전반적인 정치관련 제도의 개혁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한 연석회의는 정치선거제도 개혁에 공감하는 제정당 및 제정치단체의 참여를 넓혀나갈 것대시민 캠페인과 정치선거제도 개혁 공론화 프로그램을 운영할 것국회 정치개혁특위가 기득권을 유지한 채 독단적으로 운영되지 않도록 감시비판할 것 등의 계획을 밝혔다연석회의는 2230여개 노동·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정치개혁 공동행동과의 연대활동도 모색하고 있다.

 

이날 회견에는 민중의 꿈’ 주도로 지난 9일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한 새민중정당()의 김종훈 의원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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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선거제도 개혁으로 기득권 정치를 바꾸고 국민의 삶을 바꾸자!

 

– 기득권 정치를 유지시키는 불공정한 선거제도는 최우선 개혁과제 

– 정당득표율과 의석수 일치하는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 

– 2018년 지방선거 전올 정기국회 안에 선거제도 개혁되어야 

– 정치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시민들과 공동행동에 힘을 모아 나갈 것 

 

정치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지 못하고 국정농단과 권력형 부정부패정경유착을 끊임없이 발생시키면서 기득권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불공정한 선거제도에서 기인한다최다 득표 후보만이 당선되는 현행 승자독식 위주의 선거제도는 다양한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기득권정치를 더욱 공고화시키고 있다.

 

현행 선거제도는 정당이 얻은 득표와 이에 따른 정당의 의석수간 불일치가 심각하며그럼으로써 다수의 사표를 발생시켜왔다특정 거대 정당들이 정치를 독점함으로써 여성청년사회적 약자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사표에 묻혀 배제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선거제도의 공정한 개혁만이 다양한 계층과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다.

 

노동당녹색당민중연합당 등은 선거제도의 불합리성과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여 <정치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제정당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를 구성하였다연석회의는 몇 차례 실무회의를 거쳐 정당득표율과 의석수를 일치시키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합의하였다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만이 유권자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고 혁신적 사회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연석회의가 합의한 선거제도 개혁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회의원 선거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개혁하자정당득표율과 의석수가 일치하는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만이 민의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다.

2.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의 단체장선거는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결선투표제는 유권자들의 전략투표를 방지함으로써 민심의 왜곡을 없앤다유권자 과반의 득표를 유도함으로써 정당성도 얻을 수 있다다만 단체장 선거는 선거비용 부담을 덜기 위해 영국 런던시장선거처럼 결선투표제 효과를 발휘하는 보완투표제 등의 도입도 가능하다.

3. 선거권은 16세로피선거권은 18세로 선거연령을 인하하자. OECD국가들 대부분은 우리나라보다 선거권과 피선거권 연령이 낮다. OECD 수준에 맞추자.

4. 국회의원 정수는 인구 13-14만 명 당 1명으로 확대하자점진적으로 OECD 평균에 맞추자.(OECD국가 평균은 인구 10만 명 당 1명의 국회의원)

5. 국회의원 지역구 당선자가 정당비례득표율을 초과할 경우 초과의석만큼 의석을 증가시키고지역구와 비례는 1:1로 연동하자.

6. 지방선거 광역의원선거는 전면적 혹은 1:1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꾸고기초의원 선거는 3-5인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개혁하자

7. 국회의원선거의 국회진출 정당득표율의 진입장벽(봉쇄조항)은 ‘1/의석수로 바꾸자실질적으로 봉쇄조항 폐지함으로써 진정한 다당제체제로 전환하자.

 

이번 연석회의 기자회견은 선거제도 개혁에 초점을 맞추었다그러나 연석회의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시민들의 자유로운 정치참여와 다양한 정치세력의 정치활동을 확대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따라서 오늘 1차 기자회견에 이어 시민과 정당의 정치활동을 제약하는 정당법과 정치자금법 등 전반적인 정치관련 제도의 개혁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다.

 

또한 연석회의는 정치선거제도 개혁에 공감하는 제정당 및 제정치단체의 참여를 넓혀나갈 것이며대시민 캠페인과 정치선거제도 개혁 공론화 프로그램을 운영할 것이다국회 정치개혁특위가 기득권을 유지한 채 독단적으로 운영되지 않도록 감시비판에도 소홀하지 않을 것이다한편으로 필요하다면 국회 정치개혁특위와의 선거제도 개혁방향에 대한 토론의 장이 마련된다면 적극 참여할 예정이다그 동안 선거제도 개혁에 앞장서 왔던 <정치개혁 공동행동>(220여개 노동시민사회단체로 구성)은 정치개혁의 중요한 파트너다. <정치개혁 공동행동>과도 긴밀한 협력을 통해 다양한 연대활동도 전개해나갈 것이다.

 

정치가 바뀌지 않는다면 국민의 삶도 바뀔 수 없다유권자의 한 표가 제대로 선거결과에 반영되는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가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정신에도 부합한다국민의 평등권을 지키고 지역주의를 없애며기득권정치를 타파하는 정치개혁은 선거제도를 공정하게 개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제 대한민국도 공정한 투표방식을 가질 때가 됐다지금이 그럴 때다더 늦추지 말자.

 

2017년 7월 13

<정치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제정당 연석회의>

참가정당 노동당녹색당민중연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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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한미FTA 개정협상 공식 요구...‘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 명분 내세워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7/07/13 10:55
  • 수정일
    2017/07/13 10:5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USTR, ‘트럼프 대통령 공약 사항, 무역 적자 2배 증가’ 주장... 다음 달 미국서 특별공동위 소집 요구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자료사진)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자료사진)ⓒ뉴시스/AP
 

미국 정부가 우리나라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을 시작하자고 공식 통보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12일(현지 시간) 발표한 성명에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대표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미국 무역의 장벽을 제거하고 협정의 개정(amendments) 필요성을 고려하고자 한미 FTA와 관련한 특별공동위원회(Joint Committee)를 개최를 요구한다고 한국 공식 정부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USTR은 또 "무역 손실을 줄이고 미국인이 세계 시장에서 성공할 더 좋은 기회를 제공하려는 대통령의 의도에 따라 행동했다"고 밝혔다. 라이트하이저 대표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노동자, 농부, 농장주, 사업가를 위해 무역 적자를 낮추고 보다 나은 무역 협상을 진행할 것이라는 약속을 계속해서 지켜오고 있다"면서 이번 개정협상 통보 이유를 설명했다.

라이트하이저 대표는 또 "한미 FTA가 발효된 이후 우리의 대한국 상품수지(goods) 적자는 132억 달러에서 276억 달러로 두 배로 증가했고, 미국의 상품 수출은 실제로 줄었다"면서 "이는 전임 정부가 이 협정을 (급히) 인준하도록 요구하면서 미국민들에게 홍보(sold)했던 것과 꽤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미국)는 더 좋은 것(협상)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라이트하이저 대표는 특히, 주형환 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한국은 어떠한 무역 파트너보다도 중요해 관계를 강하하기 위해 자유롭고, 공평하며, 균형된 무역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양국 정상도 6월 정상회담에서 “양국 간 상호적 혜택과 공정한 대우를 창출하면서 확대되고 균형된 무역을 증진하기로 공약했다”면서 한미 FTA 개정협상이 시급(imperative)하다고 주장했다.

미 무역대표부가 7월 12일(현지 시간) 한국에 보낸 FTA  개정협상 통지문에서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정 무역'을 합의했다는 점과 FTA 체결 이후 미국의 무역적자가 두배로 증가했다고 주장했다.
미 무역대표부가 7월 12일(현지 시간) 한국에 보낸 FTA 개정협상 통지문에서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정 무역'을 합의했다는 점과 FTA 체결 이후 미국의 무역적자가 두배로 증가했다고 주장했다.ⓒ해당 문서 캡처

이는 청와대는 한미 정상회담 당시 한미 FTA 재개정 협상에 관해 합의한 바 없다고 밝혔으나, 미국 측이 해당 합의 문구 내용을 재개정 협상의 명문으로 활용하고 있는 대목으로 해석된다.

특히 라이트하이저 대표는 해당 서한에서 "특별공동위는 중요한 무역 불균형 문제를 다루고 미국의 대한 수출의 시장 접근성과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며 "더욱 균형 잡힌 무역 관계와 진실로 공정하고 평평한 운동장을 조성하는 진전을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개정협상 의지를 분명히 했다.

USTR은 또 "한미 자유무역협정문(KORUS) 22.2조의 규정을 들면서 30일 안에 양국 특별공동위를 개최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양측 실무진들이 구체적인 사항이나 어젠더(agenda)를 마무리 짓기 위해 다음 달(8월) 워싱턴 D.C,에서 특별위를 개최하자고 요구했다.

현재 한미 FTA 협정문에는 한쪽이 공동위원회 특별 회담 개최를 요구하면, 상대방은 원칙적으로 30일 이내에 응해야 한다. 미국 행정부는 다른 나라와의 무역 협정 내용을 개정하려면 협상 권한을 보유한 의회로부터 협상권을 위임받고자 본협상 개시 90일 전 의회에 통보하고, 30일 전 협상 목표와 전략 등을 의회에 보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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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영유권 분쟁’과 ‘강제징용노동자 문제 사죄 및 배상’의 전망

 
김이경의 민족이야기 한일관계, 독도이야기 세 번째
  • 김이경 우리역사연구가
  • 승인 2017.07.12 12:51
  • 댓글 0
 
 
▲사진 : 경상북도 사이버독도 홈페이지

1. 우리의 반일투쟁을 가라앉히는 명약 ‘일본의 독도문제 국제분쟁화 협박’

한동안 잠잠하던 독도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된 것은 1965년 한일수교협정 때였다. 우리정부가 ‘식민침탈에 대한 반성이 한일협정문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일본은 반성은커녕 ‘경제협력기금도 줄 수 없다’며 들고 나온 카드가 독도문제였다. 1962년 3월 일본의 고사키 젠타로 외상은 최덕신 당시 외무장관을 만나 “현안이 해결되더라도 영토문제(독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교정상화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알려졌다. 1962년 9월 일본에서 열린 한일 예비 절충 4차 회담에서 일본측 인사가 “사실상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도쿄에 있는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파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고 망언을 했다. 그런데 어이가 없는 것은 우리측 인사의 “중요하지도 않은 섬이니 한일회담의 의제도 아니므로 국교 정상화 후에 토의하는 식으로 별개 취급함이 어떠냐”는 대응이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과의 모든 교섭에서 독도문제가 제기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우리가 독도문제를 실질 지배하고 있는데, 굳이 ‘국제 분쟁화’시킬 필요가 있느냐고 주장하였다. 결국 일본의 독도 분쟁화 주장은 식민침탈에 대한 반성 없는 한일기본조약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다.

이때부터였다, 독도 문제만 나오면 우리는 전략적 인내(?) 정책(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것도 그냥 침묵이 아니다. 한일관계의 쟁점만 불거지면 일본은 ‘독도문제 국제분쟁화’를 들고 나오고, 우리는 그들이 더 시끄럽게 굴기 전에 알아서 쟁점을 조용히 잠재우는 기현상…. 최근에도 올해 초 경기도 의회가 독도에 소녀상을 세우겠다고 결의하자, 외무부가 일본이 독도는 자기의 땅이라며 발끈했고, 연이어 파랗게 질린 외무부 담당자가 경기도 의회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독도소녀상 설치를 반기던 경상북도 도지사까지 신중 모드로 돌아서는 해프닝을 벌이고, 급기야 경기도 의회의 모처럼의 결심은 온데간데없이 사그라졌다. 이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독도문제를 ‘국제 분쟁화’시키겠다는 일본의 협박은 전가의 보도처럼 우리의 반일 소동을 가라앉게 하는 특효약이 되어왔다.

2.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1965년 1월) 박정희가 일본과 맺은 독도밀약이 있다는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1962년 한일수교 논의가 제기되면서 식민지 침탈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우리측 주장에 대해 일본이 ‘독도 국제분쟁화’로 맞서자, 다급해진 박정희는 이 문제에 대한 일본과의 절충을 시도하기 위하여 독도밀약을 맺는다. 일본 정부의 특명을 받은 우노 소스케 의원과 정일권 국무총리간의 독도에 관한 비밀 합의사항인데, 박정희의 재가를 받았고 일본의 사토수상에게도 전달되었다고 하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사진 : YTN 뉴스 캡처

① 두 나라가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것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②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두 나라가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긋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③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늘리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하지 않는다.

박정희야 독도를 우리가 실효 지배하고, 어차피 일본은 자기네 것이라고 떠들어대니, 이정도의 절충안은 한일수교를 위해서는 불가피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밀약은 두고두고 일본이 한일관계에 우리를 협박할 수 있는 시비 거리를 만든 원천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역시 이 밀약대로 점거한 현상을 유지하려 할뿐, 일본이 독도를 들고 나오며 우리에게 시비를 걸 때 찍소리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넘어가기만을 바라게 된 원죄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 문서는 밀약이며 이리저리 알려지긴 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아니다(여기서는 그 과정은 생략한다). 이 문서의 법적인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이렇게 해서 사실상 독도문제는 가장 심각한 한일관계의 핵심쟁점으로 부각되게 된다. 혹자는 한일수교가 급한데 이렇게 해서라도 독도에 대한 우리의 실효 지배를 인정받으며 넘어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지 않느냐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1905년 독도부터 점령함으로써 한반도 강제병합의 신호탄이 되었던 우리의 영토 주권을 이런 식으로 처리함으로써 이후 두고두고 굴절된 한일관계를 만들어낸 원인이 되었다.

3. 독도는 우리가 실효 지배하는 이상 조용히 있으면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진짜 다케시마(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믿고 있으며 틈만 있으면 이 문제를 거론하며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자고 한다. 물론 양 국가가 다 동의하지 않는 이상 국제사법재판소는 현실화 전망이 없다. 그러나 일본이 이 문제를 가지고 군사화한다면?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된다면? 국제정치학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논하지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겠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군사적인 시위라도 할 경우 국제사법재판소에서의 해결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지금 일본이 틈만 나면 독도문제를 거론하는데, 그들은 당장 독도를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 그들의 계산을 대략 짐작해보자. 첫째, 한번에 K.O승을 거둘 수는 없지만 어퍼컷을 연속해서 날리고 우리가 계속 무방비로 당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대한민국의 무력함과 대한민국 독도 실효 지배 주장이 얼마나 내용 없는 것인가를 국제사회에 널리 각인시키자는 것이다. 둘째, 일본 자국 내 국민들에게 혐한 감정을 부추기려는 것이다. 일본 자신이 근대화시켜주었고 경제협력자금으로 돈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징징대는 대한민국을 용서할 수 없다는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일본 군국주의화의 불쏘시개 감으로 매우 적절하다고 보고 있다.

▲사진 : 일본 해상자위대 홈페이지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의 독도 방문처럼 이런저런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전 국민이 독도문제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저들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군국주의화를 위한 저들의 강력한 ‘패’이자 상징이다. 다음으로 역대 우리 정부가 그 문제를 쉬쉬하고 은폐한 채 때로 일본 시위용으로 압박 이벤트를 꺼내든 것은 한일관계의 본질을 은폐하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국민들의 반일감정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알지 못하는 진실이 많다. 우선 현재 일본 군국주의화의 본령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미일동맹의 하위동맹으로 위치 지워진 한일관계 밑에서 미국의 의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국민적 반일감정의 눈치를 보고 있는 이 위태로운 정황은 알지 못한다. 박근혜가 국민들의 반일정서 눈치를 보느라 일본과의 군사정보협정을 맺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애도 썼지만, 결국 10억 엔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배신하고 군사정보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알지 못한다. 결국 문재인 정권이 위안부 문제는 재협상하겠다고 했지만, 그것을 빌미로 맺어진 군사보호협정을 어떻게 할지는 한마디 말이 없다.

또 우리 국민들은 일본이 독도영유권 문제, 강제징용노동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 문제, 역사교과서 왜곡 등 모든 한일관계의 주요 쟁점들을 어떻게 치밀하게 일본 국내와 국제사회에 미리 포석을 깔고 대비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선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볼 일이다. 가장 현명한 정치인은 민중이라고 했던가? 국민들에게 알리고 판단을 물어야 한다. 가장 올바른 정치인과 정치세력이 늘 해야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 기본을 강화하면서 독도에 대한 저들의 논리의 허구성을 논파하고 한일 역사 왜곡의 실체에 과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강제징용노동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은 지금 한일관계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중 동력 중 하나이다.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운동이 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여론 마련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면 앞으로 정치적 해결의 방향을 찾아서 노력해야 한다. 이미 대법원은 2012년 강제징용노동자의 임금 청구 재판이 적법한 것임을 판결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외면하는 일본 기업과 정부, 또 마치 남의 일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 바라보는 정부의 태도, 이 모든 것을 바로잡고 강제징용노동자 선배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의 각성과 대책을 요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시금 생각해본다. 독도 강치 멸종사를 잊지 말자고….

김이경 우리역사연구가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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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핵무기를 어떻게 활용했나

 
['전쟁 국가' 미국] 대외 군사 개입을 위한 최후 보루
2017.07.13 01:29:55
 

 

 

 

미국의 평화운동가 조셉 거슨은 저서 <제국과 폭탄 : 미국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어떻게 핵무기를 이용했나>에서 핵무기는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핵심 수단이라고 단언한다. 

거슨에 따르면 1945년 이래 미국의 핵무기는 다음 다섯 가지 용도로 사용됐다.

첫째, 실제 전투용.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공격이 그것이다.

둘째, 미국의 적들과 동맹국들을 암묵적으로 위협함으로써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만일 미국이 핵폭탄을 사용하지 않고 소련군의 참전으로 일본이 항복했다면, 한반도의 분단 대신 패전국 일본이 미‧소의 공동 관리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핵공격을 가함으로써, 즉 소련에 대한 무력 과시를 통해 미국은 일본을 단독 점령했고 동북아에 대한 독점적 지배력을 행사했다. 

셋째, 선제 핵공격 위협을 통해 상대를 위협함으로써 미국에 유리한 조건의 협상을 받아들이도록 강요(1946년 3월 북부 이란 주둔 소련군 철수 강요. 베를린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 등).

넷째, (1949년 소련의 핵무기 확보 이후) 미국의 재래식 병력을 '의미 있는 군사 및 정치적 도구'로 만드는 최후 보루. 예컨대 미국이 공격하려는 제3세계의 적을 소련이 돕는 것을 핵 위협을 통해 저지(1973년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를 돕기 위해 소련이 개입하려 하자 미국은 핵위협으로 이를 저지했다). 또한 미국의 핵공격에 화학무기 등으로 대항하려는 제3세계 국가를 억제(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은 이라크 주변에 핵무기 700~1000기를 배치해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을 저지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군이 공격해 온다면 이스라엘에 화학무기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했었다.) 

다섯째, (1970년대 소련의 핵전력이 미국과 대등해진 이후) 비로소 '억제'가 등장한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 군사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억제'란 일반인들이 이해하는 억제와 그 의미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억제란 미국에 대한 타국의 선제 핵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펜타곤 지도자들에 따르면 억제란 '다른 국가들이 미국의 국익을 침해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2005년 채택된 미국의 합동핵작전교리(doctrine for joint nuclear operation)에 따르면 "억제의 핵심은 (핵 위협으로) 잠재적 적국의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쳐 (미국의 국익에) 해가 되는 행위를 스스로 피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아가 이 문서는 "분명히 말하건대 핵무기는 앞으로 50년간 미 군사력의 초석으로 건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핵무기는 미 제국의 유지를 위한 핵심 도구 

한마디로 말해 미국은 지난 70여 년간 핵무기의 위력을 앞세워 세계에 미국의 요구를 강요해 왔고 타국이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억제해 온 것이다. 

거슨은 "핵무기의 역할에 관한 미국의 대부분의 문헌들은, 핵무기의 본질적 기능이 선제공격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억제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과 연구자들은 미국의 핵무기가 제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것이라는 핵심적 사실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아이젠하워의 '대량 보복'에서 케네디의 '유연 대응', 그리고 클린턴의 '풀 스펙트럼 도미넌스(full spectrum dominance: 모든 군사력 부문에서의 압도적 우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선제 핵공격은 제국의 유지를 위한 핵심 수단"이라고 강조한다.

거슨의 이러한 지적, 즉 '미 대외정책에서 핵무기의 중심성'은 역대 미 정치지도자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닉슨 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 레이건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한 알렉산더 헤이그는 1979년 7월 24일 상원 군사위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이 '핵 선제 불사용' 원칙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방의 일부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 징병제를 부활하거나 병력 규모를 3배로 늘리거나 또는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까지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런 조치들을 취하지 않고 '핵 선제 불사용'을 서약할 경우, 서방은 재래식 전력과 지정학적 위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소련의 군사력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핵무기 믿고 재래식 군사개입, 비밀공작 자행 

한편 미국의 비판적 지성 노엄 촘스키는 미 대외정책에서 핵무기의 쓸모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우리의 전략핵무기 시스템은 미국의 재래식 군사행동에 대해 일종의 우산 역할을 한다. 즉 침략과 정부 전복 활동을 벌일 때 어떤 형태로든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해준다(미국의 핵무기 보복이 두려워 소련 등 제3자가 미국의 재래식 군사행동을 방해할 수 없게 된다는 의미). 

카터행정부에서 국방 장관을 역임한 해롤드 브라운은 이것이야말로 미국 안보시스템의 핵심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핵무기가 있음으로써 미국의 재래식 병력이 '군사력 및 정치력의 의미 있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략핵무기라는 우산이 있기 때문에 (중략) 미국은 우리의 공격 대상 국가를 도우려는 국가를 마음 놓고 충분히 협박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시키고 싶다면 (중략) 또는 중동지역에 신속기동군을 파견하려 할 때 (중략) 또는 인도네시아의 군부 쿠데타를 지원하고 싶을 경우 (중략) 또는 베트남을 침공하려 할 때 우리의 군사행동이 저지될지도 모른다는 아무런 걱정 없이 이를 실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를 방해하려는 그 어떤 세력도 겁을 주어 쫓아낼 수 있는 충분한 힘(전략핵무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핵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기에 타국에 대한 재래식 군사 개입, 중앙정보국(CIA) 등에 의한 비밀공작을 마음 놓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는 기본적으로 핵무기에 의존해왔다. 다른 대량살상무기와는 달리 핵무기의 효과는 즉각적이며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중략) 엄청난 파괴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겁을 주는 효과가 있다. (중략) 미국은 다른 모든 나라의 국민들에게 제대로 겁을 주기 위해 제멋대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미친놈이라는 국민적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됐다"고 비판했다. 
 

▲ 미국의 전략폭격기 B-1B '랜서'(가운데)가 지난해 9월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의 핵무기는 세계를 향한 국가테러의 핵심 수단이다. 1971년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해 베트남전 종식에 기여한 다니엘 엘스버그는 "피해자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금품을 요구하는 무장강도처럼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국제적 위기나 갈등, 또는 전쟁이 있을 때면 언제나 핵무기라는 총을 꺼내 들었다. 2차 대전 이후 제럴드 포드를 제외한 모든 대통령들이 (다른 나라들에) 핵전쟁의 위협을 가해 왔다"고 말한다.  

나아가 노르웨이의 저명한 평화학자 요한 갈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관총을 들고 학교 교실로 들어와 학생들을 인질로 잡은 채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학생 모두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한다면, 우리는 그를 위험하고 미친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국가 지도자가 수백만의 민간인들을 핵무기의 인질로 잡아두고 있는 상황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전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이중기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핵무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핵무기는 테러를 위한 도구이다"  

미국은 핵무기를 가질 권리가 있고 미국의 핵무기는 세계 평화를 위한 좋은 무기인 반면, 다른 나라들은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되며 타국의 핵무기는 세계 평화를 해치는 나쁜 것이라는 이중기준이 지난 70여 년간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해 오면서 핵무기는 이제 미국인의 정체성의 일부가 됐다. 미국 소설가 E. L. 독토로프는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1945년 이후 우리 마음속에는 누구나 폭탄을 품게 됐다. 그것은 처음에는 폭탄이었다가 다음에는 외교가 됐고 이제는 우리의 경제가 됐다. 어쩌다가 그토록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그 무엇이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게 되었을까? 당초 적을 무찌르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거대한 골렘(자동기계, 로봇)이 이제는 우리의 문화, 우리의 폭탄의 문화가 됐다. 우리의 논리, 우리의 신념, 우리의 비전이 됐다"  

미국 핵무기는 세계적 불안정의 근원 

필리핀 출신의 사회학자 월든 벨로는 미국의 핵무기야말로 세계적 불안정의 근원이며 핵무기 확산의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이 핵무기를 앞세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려 하는 한, 이에 대한 저항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핵무기 확산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요컨대 미국의 핵무기는 지배의 수단인 반면, 소련에서 북한에 이르는 후발 핵보유국의 핵무기는 기본적으로 저항, 또는 억제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핵무기를 먼저 없애지 않는 한 세계적인 핵무기 철폐는 불가능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핵무기 철폐를 위한 캔버라 위원회'는 1996년 '핵확산의 공리(axiom of proliferation)'라는 원칙을 발표했다. '어느 한 국가가 핵무기를 갖고 있는 한, 다른 모든 국가들은 핵무기 보유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위원회의 일원인 리차드 버틀러 호주 핵무기철폐 특임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원칙을 내놓은 근본적 이유는 정의, 즉 공정함이야말로 전 세계 모든 시민들에게 가장 심원한 중요성을 갖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핵확산 공리와 연결시켜 본다면, 핵보유 국가들이 자신들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비핵 국가들에 대해서는 핵 없이도 안보를 확보할 수 있다며 핵 포기를 설득하는 것은 완전한 실패로 드러났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UNSCOM(유엔 이라크핵감시위원회)의 마지막 의장을 역임한 버틀러 대사는 2002년 시드니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일생 동안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위해 일해 왔다. (중략) 핵 보유국과 비핵 국가들 간의 문제는 핵심적이며 영구적인 것이다. (중략) 바그다드에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이라크인들이, 200개가 넘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은 놔둔 채 왜 자신들의 핵무기 개발만을 추궁하는지 그 이유를 대라고 했을 때였다.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대량의 핵무기를 자랑스럽게 보유하고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 사람들이 자신들의 핵무기는 국가 안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앞으로도 계속 보유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편으로 다른 나라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서는 맹렬하게 비난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저 놀랄 수밖에 없다고" 

"이런 경험들에서 내가 얻은 결론은, 명백한 불공정함과 이중기준 등이 일시적으로는 거대한 권력의 압력에 의해 용납되겠지만 결국에는 본질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그러한 불공정함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물리학의 기본 법칙만큼이나 자명한 것이다" 

"나는 미국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중기준을 설득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완벽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높은 교육 수준에 사회의식이 투철한 미국 인들도 자국의 이중기준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비핵 국가들의 원망과 불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인들의 지독한 불감증 때문에 때때로 나는 화성인들과 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낄 때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핵무기가 이라크(가 보유하려 했던, 또는 북한이 개발하고 있는) 핵무기와 똑같이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중국의 핵무장과 북한의 핵개발 

버틀러 대사가 이라크 관리의 항변에 대해 직면했던 곤혹스러움을 중국 측도 느꼈다. 지난 4월 26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미중 관계와 중국의 북핵 대응'이라는 강연에서 중국 인민대 청샤오허 교수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려줬다.  

"2003년 미국의 파월 국무장관이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의 협조를 요청해 왔다. 당시는 2002년 10월 미국이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문제 삼으면서 제네바 기본합의가 파기된 이후였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고 핵 개발을 재개했다(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 이후 8년간 북한은 핵연료 생산 및 미사일 시험을 중단했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 등과 함께 6자회담 개최를 추진하고 있었다. 중국의 고위관리 다이빙궈와 푸잉이 평양을 방문해 강석주 외교부 부상에게 핵 개발 중단을 설득했다. 이에 대한 강석주의 대응은 '당신들도 (미국과 소련의 핵 위협에 맞서) 1964년에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다이빙궈 등은 '밥이나 먹자'며 대화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 제네바 합의 당시 미국측 수석대표였던 R.갈루치(왼쪽) 대사와 북한측 수석대표였던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 ⓒ연합뉴스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북한을 설득할 마땅한 명분을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중국 자신이 걸었던 길을 북한도 가겠다는데, 무슨 명분으로 말릴 수 있겠는가. 중국은 한국전쟁과 대만해협 위기 등에서 미국의 무수한 핵 위협을 받아온 데다 1958년 소련과 결별한 이후에는 소련으로부터도 핵 위협을 받고 있던 터였다. 결국 중국은 1960년부터 핵 개발을 본격화해 결국 1964년 10월 16일 첫 번째 핵실험에 성공했다.

당시 중국의 핵 개발은 미국에게 최대의 골칫거리였다.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중국은 미국에게 세계 최대의 깡패국가였다. 요즘의 이란이나 북한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이자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치른 최초의 전쟁, 즉 한국전쟁의 적대국이었던 중국이 핵무기를 가진다는 것을 미국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케네디 행정부는 중국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해 미소 합동으로 중국의 핵 개발 현장 로프노르에 대한 선제 핵 공격을 하자고 소련에 제안했으나 소련의 거부로 무산됐다. 또 중국이 최초 핵실험에 성공한 이후 존슨 행정부에서는 중국에 대한 단독 공습이 논의됐고, 핵 무장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숙적인 인도에게 미국의 핵무기를 제공하자는 기발한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미국의 대응은 핵클럽의 문을 닫는 것이었다. 1968년 체결되고 1970년부터 효력을 발휘한 핵확산금지조약(NPT)이 그것이다. NPT 체제가 성립하면서 국제적으로 공인된 핵보유국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등 5개국으로 한정됐다. 

NPT 체제 성립 이후 핵무기를 가진 나라는 인도와 파키스탄뿐이다. 인도는 1974년 5월 첫 번째 핵실험을(스스로 '평화적'이라고 주장한) 했으며 1998년 5월 11일과 13일 파키스탄 국경에 가까운 포크란에서 다섯 차례에 걸친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에 대항하여 파키스탄도 뒤이어 같은 달 28일, 단 하루에 발루치스탄 주(州)에서 여섯 차례에 걸친 지하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스라엘은 1960년대 중반부터 핵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도 백인 인종차별 정권 당시 6, 7개의 핵무기를 보유했었으나 1994년 만델라의 흑인 정권이 출범하면서 미국의 압력에 의해 핵무기를 해체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얼떨결에 핵보유국이 됐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은 미국이 주도하는 넌-루가 프로그램(Nunn-Lugar program)에 의해 보유 핵무기를 모두 해체했다.  

현재 세계에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등 5개의 공인된 핵 보유국과 함께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3개의 비공식 핵보유국이 있다. 뒤의 세 나라는 핵을 갖게 된 것은 미국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인도는 라이벌 중국에 대한 대항마로, 파키스탄은 서아시아 최대의 미 동맹국이기 때문이다.

이제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 하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북한이 미국의 적대국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후세인과 리비아 가다피의 운명을 보면 알 수 있다. 1970년대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던 후세인은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한 죄로 13년간 미국 주도의 가혹한 경제제재에 시달리다 2003년 있지도 않은 핵무기를 이유로 미국에 의해 제거됐다. 

가다피는 영국의 중재로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미국과 국교를 회복했으나 내부 반란을 틈탄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개입에 의해 권력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북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이 핵 개발을 확고하게 결정한 것은 2003년 4월이라고 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2003년 3월 20일) 직후다. 후세인의 운명을 보면서 핵 개발을 결심했다는 얘기다.

군사력으로 북한 핵 개발을 저지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군사력으로 타국의 핵 개발을 저지한 사례는 딱 한 차례 있다. 1981년 6월 7일 이스라엘의 이라크 오시라크 원전 공습이 그것이다. 이라크 후세인은 1970년대 초부터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바그다드 남부에 오시라크 핵시설을 운용했는데, 이를 단 2분 만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등 서방측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어쨌든 공습 작전은 대성공이었다(한국의 경우, 1970년대 중반 프랑스의 도움으로 핵 개발을 시도했으나 미국의 압력에 의해 중도 포기했다). 

1940년대 후반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을 때, 미 군사지도자들은 소련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선제공격을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중국의 경우는 앞에 얘기했다. 북한의 경우 1994년 6월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식 정밀 타격(surgical strike)을 계획하고 실행 준비까지 들어갔으나 당시 북한을 방문 중이던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로 무산된 바 있다. 군사력을 동원한 핵 개발 저지가 시도되지 못한 것은 그 파장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현재 북한의 핵능력은 1994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화됐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전쟁 위협을 무릅쓰고 북한 핵시설에 대한 정밀타격을 시행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얘기다.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과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장(DNI) 등 미국의 전‧현직 고위관리들, 전문가들도 같은 의견이다.  

그런데 북한의 핵 개발 과정을 살펴보면 인도, 파키스탄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드러난다. 인도, 파키스탄은 하루 또는 사흘 만에 5, 6차례의 핵실험을 해치운 반면, 북한은 2006년 첫 핵실험 이후 2016년까지 만 10년에 걸쳐 다섯 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순식간에 핵실험을 해치운 이유는 자명하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반대와 제재가 현실화되기 전에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 하자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10년에 걸쳐 핵실험을 했다. 국제사회에 대해 보란 듯이, '누가 나 좀 말려줘' 하는 식으로. 북핵 개발 초기, 미국과 북한은 핵 포기와 북미 적대관계 청산을 골자로 하는 합의를 맺기까지 했다. 2007년의 2.13 합의가 대표적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핵 포기와 북한의 체제 보장을 맞바꿀 수도 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1991년 미국을 방문한 김용순 당시 북한 외상이 아놀드 캔터 국무 차관과의 회담에서 주한미군 계속 주둔을 용인하면서까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열망했다. 이후에도 줄곧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해 왔다.  

과거 미국과 전쟁을 벌였던 중국과 베트남은 미국과의 화해 이후(중국은 1979년, 베트남은 1995년 국교 수립) 경제 개발에 나서면서 국제 사회에 완전히 복귀했다. 북한도 바로 그 길을 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4년 10월의 제네바 기본합의와 2005년의 6자회담 9.19 공동성명 등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두 번의 기회가 무산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미국은 북한에, 북한은 미국에 돌리고 있다. 그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일이다. 단 필자는 미국 쪽에 더 책임이 크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거 실패의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다. 

지난 6일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에서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반도 비핵화 추구'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 등 한반도 평화 체제를 위한 담대한 구상을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베를린 구상 5대 정책 방향의 첫 번째로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평화'라고 선언했다.  

올바른 출발이라고 본다. 물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정착은 쉽지 않은 과제다. 분단에 따른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 극우세력의 반발과 저항, 북한에 대한 남한 국민의 호의적이지 않은 여론, 남북한 관계 개선을 원치 않는 미국의 견제와 반대, 미국과의 협상을 중시하는 북한의 외면과 무시, 여기에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 등 첩첩산중이다. 

그러나 지난해 촛불 혁명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뜻과 지혜를 모을 수만 있다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니다. 민주화란 결국 '우리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 체제의 완성이란 결국 19세기 말 이래 외세에 의해 휘둘려온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의지와 힘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비상한 용기와, 지혜 그리고 무엇보다 단합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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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안중근 동상' 미스터리... 시진핑 지시 여부도 논란

 

의정부시 반응 '제각각', 6월엔 “모처에 보관 중” 7월엔 “한국에 없다”... 시민단체, 정보공개 청구

17.07.12 20:49l최종 업데이트 17.07.12 20:49l

 

 

 의정부시가 밝힌 '안중근 동상 설치 조감도'.
▲  의정부시가 밝힌 '안중근 동상 설치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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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지시로 제작돼 국내에 반입된 뒤 현재 의정부시(시장 안병용) 모처에 보관 중이라는 '안중근 의사 동상'의 행방이 묘연하다. 의정부시가 안중근 동상의 소재 여부를 두고 각기 다른 입장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동상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지시로 제작됐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 안중근 의사와 연고가 없는 의정부시에 동상이 세워진다는 점을 두고 의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시민단체는 "의정부시가 혈세를 들여 과정과 배경이 불명확한 보여주기식 행정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 6월 의정부시 관계자는 몇몇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안중근 동상이 5월 중순 인천항을 거쳐 의정부에 도착했다, 한중 관계를 고려해 그동안 공개하지 않고 모처에 보관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11일 의정부시 공보팀은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아직 안중근 동상이 국내에 들어온 게 아니다"라면서 "안중근 동상 제작이 추진 중에 있다"라고 밝혔다. 그동안 의정부시가 밝혀온 내용과는 다른 이야기다.

 

안중근 동상의 의정부시 유치는 안병용 의정부시장의 숙원사업이다. 의정부시는 그동안 "2013년 6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정상회담 당시, 시 주석이 안중근 동상 제작을 지시했다"며 "민간단체인 차하얼학회와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안중근 동상을 의정부시에 유치할 계획이다, 동상은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다"라고 밝혀왔다. 중국 동상 제작을 맡은 차하얼학회는 한화 16억 원을 들여 동상을 제작해 의정부시에 기증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안병용 시장의 관심 역시 지대하다. 안 시장은 2014년 9월 19일 차하얼학회가 개최한 차하얼 평화포럼에 참석해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고찰과 현대적 재조명>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 등 동상 유치에 공을 들여왔다. 같은 해에는 2014 안중근평화상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6월엔 "동상, 모처에 보관 중"... 7월엔 "동상, 현재 한국에 없다"
 

 지난해 12월 5일 오후 의정부 장암동 인근에서 열린 동부간선도로 개설 준공식에서 안병용 의정부시장이 축사하고 있는 모습.
▲  지난해 12월 5일 오후 의정부 장암동 인근에서 열린 동부간선도로 개설 준공식에서 안병용 의정부시장이 축사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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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정부시 관계자들은 그동안 나왔던 의정부시의 반응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복수의 의정부시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안중근 동상 세우기 사업은 현재 추진 중"이며 "안중근 동상은 현재 한국에 없다"라고 밝혔다. 이 사업에 관여했던 관계자 A씨는 "사드 때문에 한중 관계가 안 좋지 않나, 중국에서 동상을 제작한다고 해서 (지금의 외교 상황 상) 한국에 (동상을) 줄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렇다면 지난 6월 의정부시는 왜 '의정부시가 안중근 동상을 보관 중'라는 보도에 대해 정정보도요청 등의 조처를 취하지 않았을까. 의정부시 공보팀 관계자 B씨는 "(해당 언론 보도에 대해) 따로 대응하라는 지시가 없어서 정정보도요청 등을 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두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자 안병용 의정부시장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공보팀은 "시장님 일정이 바빠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의정부 시민모임 '버드나무포럼'은 12일 안중근 동상에 대한 의정부시의 엇갈린 설명을 비판하고 나섰다. 버드나무포럼은 의정부시에 '안중근 동상의 의정부 도착에 관한 정보 일체'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구진영 버드나무포럼 이사는 "행정 기관이 시민을 상대로 거짓말하면 안 된다, 만약 동상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의정부시는 관련 언론보도에 대해 정정보도를 요청해야 하고, 기사에 언급된 '시 관계자'가 누군지 밝혀야 한다"라며 "만약 동상이 도착했다면 의정부시는 어느 곳에 동상을 보관 중인지 밝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시진핑, 동상 제작 지시했다" vs. "한중 정상간 동상 관련 약속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7일 오후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회견을 마친뒤 환한 표정으로 악수하고 있다.
▲  박근혜 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6월 27일 오후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회견을 마친뒤 환한 표정으로 악수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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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동상의 제작 배경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다. 

의정부시는 그동안 해당 동상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지시에 의해 제작됐다'라고 밝혀왔다. 안 시장은 지난 2015년 5월 14일 의정부 예술의전당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한중 공공외교 평화포럼'(의정부시·차하얼학회 공동 주최)에서 "(2013년) 한중 정상회담 때 박근혜 대통령이 하얼빈역에서 역사의 흔적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하자 시진핑 주석이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동상 제작을 지시했다"라면서 "이에 차하얼학회가 쌍둥이 동상을 만들어 한국에 기증하자고 제안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하얼빈역에서 만난 2013년 6월 당시 보도를 살펴보면 시 주석의 안중근 동상 제작 지시에 대한 내용은 일체 없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 기념 표지석을 하얼빈역에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 협조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시 주석이 "관련 기관에 이를 잘 검토하도록 지시했다"라고 답했다는 기록은 있다.

외교부 동북아3팀 관계자는 지난 11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시 주석의 안중근 동상 제작 지시가 있었는지 파악된 게 없다, 한중 정상간의 논의에 따라 진행된 것은 안중근 기념관 개관뿐이다"라고 밝혔다. 

주중 한국대사관도 같은 반응이다. 주중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안중근 동상 제작과 관련해 한국과 중국 정부간 약속된 사안은 없다"라면서 "시 주석이 차하얼학회에 따로 지시했을 수 있는데, 이는 중국 국내 정치 사안이므로 외교 라인에서 확인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차하얼학회의 대표인 한핑밍(韓方明) 주석은 2016년 12월 의정부·차하얼 공공외교 평화포럼 연설에서 "차하얼학회가 의정부시 시민들에게 선물할 '대한의사 안중근' 대형 동상이 이미 완성돼 적당한 시기에 의정부 기차역 평화공원에 설치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의 지시가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었다. 이와 관련해 차하얼학회에 시 주석 지시 여부를 확인하고자 문의했지만,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안중근과 관련 없는 도시 의정부, 왜 동상 유치할까"

'왜 안중근 동상이 의정부시에 설치돼야 하나'라는 문제 제기도 있다. 구진영 이사는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나 왜 의정부시에서 이 사업에 적극적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의정부시가 밝힌 동상 설치 배경은 크게 세 가지다. ▲ 의정부시가 경기 북부 독립운동 활동의 근거지이며 평화·통일의 중추적인 곳에 있다는 점 ▲ 한중우호관계 증진 ▲ 중국인 관광객 유치가 바로 그것. 

하지만 안중근 의사 관련 단체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안중근의사숭모회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해당 인물과 연결고리가 있는 곳에 동상이 세워지는데 의정부시는 안중근 의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면서 "2006년에 중국 하얼빈에 세워졌다가 열흘 만에 중국 정부에 의해 철거된 안중근 동상이 (안 의사와 관련이 없는) 2009년 부천에 세워진 것도 부천시와 하얼빈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09년 부천시는 안중근 동상을 유치하면서 동상 주변에 '안중근 공원'을 조성했다. 또한 관련 단체는 이 공원에서 매년 안중근 의사 관련 행사를 열고 있다.

한편, 의정부시가 들여온다는 안중근 동상 디자인은 그동안 차하얼학회가 여러 단체 및 기관에 기증해왔던 동상 디자인과 동일하다. 차하얼학회는 2014년 4월 안중근의사숭모회에 소형 동상(높이 40cm가량)을, 같은 해 5월에는 북경은제예술관(北京银帝艺术馆)에 소형 동상을 기증했다.

안중근 동상을 둘러싼 의정부시의 불명확한 행보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구진영 이사는 "안중근 동상을 유치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의정부시가 투명하지 않은 과정으로 시민 세금이 투입되는 사업을 추진하는 건 큰 문제다"라면서 "게다가 시진핑 주석이 동상 지시를 했다는 등의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의정부 시정을 홍보하는 건 보여주기 행정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설령 안중근 동상이 설치된다고 하더라도 절차의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예산만 쓰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동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014년 4월 차하얼학회가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안중근 의사 소형 동상. 의정부시가 유치하겠다는 동상과 같은 디자인이다. 크기만 다를 뿐이다.
▲  지난 2014년 4월 차하얼학회가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안중근 의사 소형 동상. 의정부시가 유치하겠다는 동상과 같은 디자인이다. 크기만 다를 뿐이다.
ⓒ 안중근의사숭모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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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4년 5월 차하얼학회가 중국 북경은제예술관에 기증한 안중근 의사 동상. 의정부시가 유치하려는 안중근 의사 동상과 디자인이 동일하다.
▲  지난 2014년 5월 차하얼학회가 중국 북경은제예술관에 기증한 안중근 의사 동상. 의정부시가 유치하려는 안중근 의사 동상과 디자인이 동일하다.
ⓒ 차하얼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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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적 재일동포의 자유왕래를 허하라"

(추가) 조선적 재일동포 입국모임, '광화문 1번가'에 정책제안서 제출
김치관/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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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2  14: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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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적 재일동포 입국실현을 위한 모임’은 12일 국민인수위원회가 설치된 ‘광화문 1번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조선적 재일동포의 조건없는 자유왕래를 위한 정책제안서’를 제출했다.[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재일교포입니다. 남기고 싶은 말이 태산과 같이 쌓여 있습니다.
여권신청시 애국가강요 선서강요등등 협박하듯이 진행되는 영사관의 면담 등 내 나라 내 고향에 가는것이 어찌나 어려운지요.
대사관이 영사관이 과연 이런 직권을 이용해도 되는건가요...“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각계의 적폐청산 요구가 거센 가운데, 조선적 재일동포의 자유왕래 실현에 나서줄 것을 촉구하는 시민사회의 정책제언이 나왔다.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와 지구촌동포연대, 몽당연필 등이 참가하고 있는 ‘조선적 재일동포 입국실현을 위한 모임’은 12일 오후 1시 국민인수위원회가 설치된 ‘광화문 1번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조선적 재일동포의 조건없는 자유왕래를 위한 정책제안서’를 제출했다.

김명준 영화감독은 “작년 7월에 단체들이 모여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준비를 해왔고, 이번에 광화문1번가를 마감하는 시점에 정책제안을 하기 위해 모였다”며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도 열심히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조선적 재일동포들에게도 기회의 평등을’이라는 제목의 정책제안에서 “해묵은 적폐들 중에서도 항상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려왔던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재외동포들에 관한 문제”라며 “특히,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갔던 재일동포들은 일본정부의 차별과 탄압뿐만 아니라 분단으로 인한 체제경쟁의 희생자로 깊은 상처가 남아있다”고 강조했다.

1947년 일본 정부가 외국인등록령을 실시할 당시, 재일동포들은 ‘조선’적을 부여받았으며, 1965년 한.일 국교수립으로 ‘한국’적자가 늘었지만, 여전히 ‘조선’적을 유지하는 재일동포는 3만여 명.

이들 중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과 관련있는 이들도 있고, 조국의 분단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는 등 각각 다양한 이유로 ‘조선’적을 보유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들에 대해 정부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10조에 의거,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야 하지만, ‘조선’적은 ‘북한’적으로 취급해 여행증명서를 쉽게 발급하지 않고 있어 문제라는 지적이다.

실제 지난해 7월 국내 책 출판기념회 참석차 입국하려던 정영환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는 정부가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입국을 불허한 바 있다. 이러한 정부의 차별적 태도는 민주정부를 지나 보수정부 들어 뚜렷이 드러났다.

   
▲ 조경희 성공회대 HK교수가 조선적 보유자로서 방한 과정에서 겪은 생생한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민변 공익권변론센터 소장인 송상교 변호사가 조선적 재일동포들에 대한 입국 제한 조치의 법적 문제점을 짚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지금은 한국 국적자인 조경희 성공회대 HK교수는 “저의 경우에는 ‘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로 대한민국에 보내 줄 수가 없다. 통일됐다고 생각하느냐. 말도 안 되는 말을 하지 말라’ 이런 식의 협박 수준의 이야기들이 계속 있어 왔다”며 “2000년대 초반의 일이기 때문에 민주정권 시기에도 계속 이런 일이 있어 왔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도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남한이라는 곳은 조선적자들한테 절대로 갈 수 없고 가고 싶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땅이었는데 일단 특히 2000년대 이후에 그들이 가고 싶은 땅,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는 것은 큰 변화”라고 평가하고 “그것이 점점 2008년 이후부터 다시 후퇴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외교부가 밝힌 ‘조선적 재일동포 여행증명서 신청 및 발급 현황’에 따르면, 2006년 99.7%, 2007년 100% 의 여행증명서 발급률이 보인 반면, 2010년 43.8%, 2011년 39%, 2016년 34.6%으로 급감했다. 게다가 정부가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주지 않자 신청건수도 2005년 3천329건에서 2010년 401건, 2012년 44건, 2016년 26건 등으로 줄고 있다.

시민사회는 △여행증명서 발급 심사 완화 등 여권법 개정, △무국적 동포를 포함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 개정, △인권침해 방지와 기본권 보장을 위한 행정지침 마련 등의 정책을 제언했다.

그러면서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 등 과거 국가로부터의 인권침해에 대한 진실규명과 후속조치들을 통하여 미래지향적인 재일동포와 정부의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더 나아가 통일지향적인 관계형성을 위해서 조선적 재일동포들에 대한 자유왕래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최상구 지구촌동포연대 사무국장(왼쪽)과 김명준 감독이 광화문1번가에 정책제안을 제출하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기자회견을 마친 참가자들은 김명준 감독과 최상구 지구촌동포연대(KIN) 사무국장을 앞세워 ‘광화문1번가’에 정책제안서를 접수시키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기자회견 사회를 맡은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은 “오늘 이 정책제안을 접수하기 위해서 10일부터 인터넷을 통해 서명을 받았다”며 “오늘까지 모두 개인은 1,210명, 단체 15개, 전체 1,225 분의 찬동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10년 가까이 이렇게 못 오고 있다는 건 너무나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고 덧붙였다.

   
▲ 정책제안을 접수한 뒤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광화문1번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수정,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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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연 1조 간접지원’하는데…분담금 협상엔 7년째 빠져

 

등록 :2017-07-12 05:00수정 :2017-07-12 09:12

 

[미군기지이전 잃어버린 10년] ③ 
올해 분담금 협정 직접비용만 9507억원 
면세, 공짜 임대 등 간접지원도 엄청나
국방부는 7년째 집계조차 안해 
분담금 한국 부담 낮출 지렛대 포기
주한미군이 최근 5년 새 경기도와 서울시에서 최소 676억원의 지방세를 면제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주한미군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서울시로부터 144억원의 재산세·자동차세·지방교육세 등을 감면받았다. 같은 기간 경기도가 주한미군에 면제해준 지방세 중 추산 가능한 금액은 약 532억원에 이른다. 경기도의 경우 지방세 수입 중 비중이 큰 자동차세가 빠진 금액이어서 실제 면제액은 이보다 훨씬 클 게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한겨레>가 최근 한달간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김종대 의원(정의당)을 통해 입수했거나 직접 취재로 파악한 주한미군 간접비 지원 현황을 분석한 결과다.

 

한국이 주한미군에 제공하는 비용 지원은 직접 지원과 간접지원으로 나뉜다. 우선 주한미군은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SMA)에 따라 매년 일정액을 현금과 현물로 받는다. 여기에, 주한미군 한국군지원단(카투사), 사유지 임대료 및 보상·매입비, 기지주변 정비, 민원 해결 비용 등을 더한 게 정부 예산으로 집행되는 직접 지원이다. 올해 직접지원비는 분담금 9507억원을 포함해 1조원 안팎이다.

 

그러나 감춰진 비용인 간접 지원 평가액도 직접 지원 비용에 맞먹는다. 주한미군은 한국 정부와 맺은 ‘주둔군 지위협정(SOFA·이하 소파)’에 따라 기지 땅을 무상으로 공여받는다. 그 평가액이 전체 간접지원비의 약 70%를 차지한다. 또 대부분의 세금과 공공요금을 면제받고, 전기·가스·상하수도 등 공공 서비스 사용료는 최저요율을 적용받는다. 올해 초 시민단체 평화와통일을찾는사람들(평통사)의 정보공개 청구로 관세청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미군은 2011~2014년 사이에만 무려 1907억원의 관세를 면제받았다.

 

 

2014년 1월  9차 미군주둔비부담 특별협정 체결을 위한 10차 협상이 열리고 있는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앞에서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미군주둔비부담금 삭감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키워드 : < 9차 미군주둔비부담 특별협정 체결 10차 협상 >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시민단체 < 미군주둔비부담금 삭감 요구 기자회견 >
2014년 1월 9차 미군주둔비부담 특별협정 체결을 위한 10차 협상이 열리고 있는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앞에서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미군주둔비부담금 삭감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키워드 : < 9차 미군주둔비부담 특별협정 체결 10차 협상 >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시민단체 < 미군주둔비부담금 삭감 요구 기자회견 >
2013년 국방부는 이듬해부터 적용될 9차 방위비 협정 협상을 앞두고 국회의 요구로 ‘2008~2010년 주한미군 직·간접 지원 현황’ 자료를 제출한 바 있다. 2010년의 지원 총액 추계는 분담금 7904억원을 포함해 1조6749억원이었는데, 이 중 간접지원 합계가 8188억원으로 총액의 거의 절반(48.9%)을 차지했다. 이런 비중은 3개년 모두 비슷했다. 이후 지금까지도 주한미군 지원 총액에서 간접비가 차지하는 항목과 비중에 큰 변화가 없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올해 주한미군에 대한 직간접 지원 총액은 분담금 9507억원을 포함해 합계 1조8000억원 안팎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한미군 간접비 지원의 전체 규모와 내역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과세의 근거가 되는 ’과표’ 산출이 불분명한데다 미군 쪽이 정확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다수 지자체들은 소파 규정에 따라 미군 차량의 과세대장이 아예 없으며, 등록 현황을 관리하지도 않는다. 미군 기지 안 건물 등 보유 재산도 파악할 수 없다. 지자체들은 물론 중앙정부도 주한미군에 대한 정확한 세금 감면액을 알지 못하거나, 실제 감면액에 견줘 턱없이 적은 추정액을 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행정자치부 지방세특례제도과 관계자는 <한겨레>의 지방세 감면 자료 요청에 “지방세는 전국 233개 지자체가 직접 관리하므로 중앙정부가 세세하게 알 수 없고, 자료를 집계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는 2011년 이후로는 간접비 추산액을 집계조차 하지 않았다. 2013년 정기국회에서 진성준 민주당 의원(국방위)은 국방부에 ‘공식·비공식으로 확인한 주한미군 주둔 비용에 관한 내역 일체’와 ‘2011~12년도 주한미군 직간접 지원 현황’을 요구했지만 국방부는 자료를 내지 않았다. “(주한미군에 대한) 우리 쪽 직·간접 기여 평가액에 양국이 합의한 바 없고 합의되기도 어려우며, (제9차) 방위비 분담 협상을 진행 중이므로 이를 공개시 우리 쪽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지금까지 이런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방부 공보담당관실은 “2011년 이후 주한미군 간접지원 비용을 집계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다만 “내년부터 시작할 제10차 방위비 분담 협상을 앞두고 경제적 부담 경감 등 국익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간접비 재추산의 여지는 열어뒀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02415.html?_fr=mt1#csidx852fed8cf423ff4b84d66c92ba346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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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 '패닉'에 빠지다

 
국민의당 "제보 검증 못한 법적 책임…추미애 가이드라인 의구심"
2017.07.12 08:54:47
 

 

 

 

'문준용 특혜취업 제보 조작' 사건의 핵심 인물이던 이준서 전 국민의당 최고위원이 구속됐다. 검찰 수사는 국민의당 '윗선'으로 향할 전망이다. 국민의당은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안철수 전 대선후보도 더욱 곤혹스런 처지가 됐다.  

법원은 12일 새벽, 이 전 최고위원에 대한 검찰의 사전구송영장 청구를 받아들여 영장을 발부했다. 서울남부지법은 "범죄 사실이 소명되고 증거 인멸 및 도망 염려가 있다"고 발부 사유를 밝혔다.  

법원이 적시한 '범죄 사실'이란, 국민의당 당원 이유미 씨에 조작된 제보가 허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국민의당 대선캠프가 이를 공개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죄의 공범 혐의에 해당한다.  

이준서의 혐의는? 

검찰은 이 전 최고위원이 지난 4월 27일 이유미 씨를 만나 '문준용 씨와 미국 파슨스스쿨에서 같이 유학한 사람을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 증언 녹취를 구해 오라고 지시했다. 당시 이 전 최고위원은 안철수 대선캠프의 '2030희망위원회' 위원장이었고, 이 씨는 이 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이 전 최고위원은 녹취를 구해 오라고 시키면서 '이 일을 잘 처리하면 청년위원장이 될 수 있고, 청년위원장은 당연직 당 최고위원이어서 쉽게 비례대표 국회위원이 될 수 있다'고 대가를 약속한 것으로 검찰은 파악했다.  

이 전 최고위원은 이후 5월까지 수 차례에 걸쳐 이 씨에게 자료를 구해 오라고 압박했고, 결국 이 씨는 5월 1일 '카카오톡' 대화창 화면을 날조한 그림파일 11장을, 같은달 3일에는 남동생을 제보자인 것처람 꾸민 허위 음성파일 2건을 이 전 최고위원에게 보낸다. 이 전 최고위원은 이 자료가 언론에 보도되게 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여의치 않자 당 공명선거추진단에 전달, 같은달 5일과 7일 기자회견을 열게 했다.  

이 전 최고위원과 국민의당은 이 과정 전체에서, 당 지도부 및 공명선거추진단 간부들은 물론 이 전 최고위원 본인도 자료가 조작된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 전 최고위원과 당 간부들이 조작 사실을 알게 된 것은 6월 24일(이용주)·25일(이준서)에 와서였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5월 5일 기자회견 당시에는 이 전 최고위원이 조작 사실을 '알 수 있었'고, 5월 7일 기자회견 때에는 허위임을 알고 있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언급한 '미필적 고의'란 5일 기자회견 때의 상황을 말한다. 적어도 허위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응당 해야 할 사실 확인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자료가 공개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미필적 고의'에 이어 '부작위에 의한' 범죄라는 쟁점도 있다. 

다만 검찰도, 영장 청구 단계까지는 이 전 최고위원이 이 씨에게 '자료를 조작하라' 내지 '조작을 해서라도 자료를 가져오라'는 등 명확한 조작 지시를 했다는 혐의는 밝혀내지 못했다. 

국민의당 향하는 검찰 칼끝 

이 전 최고위원의 신병을 확보한 검찰은, 지금까지 밝혀낸 그의 혐의에 대해 기소를 준비하는 한편 보강 수사를 통해 그가 이유미 씨에게 조작을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지시했는지 등을 더 캐물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전 최고위원이 5월 5일에는 제보 내용이 허위일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고, 5월 7일에는 이미 허위임을 알고 있었다'는 검찰의 관점이 법원의 영장 발부를 통해 힘을 얻었다고 보고, 각각의 시점에서 국민의당 지도부와 공명선거추진단 간부들은 이 내용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나 조사하는 과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공명선거추진단 단장이었던 이용주 의원, 부단장이었던 김성호 전 의원과 김인원 변호사는 기자회견 전인 5월 4일 이 전 최고위원으로부터 조작된 자료를 넘겨받아 회견을 연 당사자들이다. 검찰은 이들이 5일 기자회견 시점에서 자료가 조작된 것임을 인지했는지, 이때까지는 몰랐다 하더라도 민주당 측의 반박 기자회견 후였던 7일 시점에서는 알 수 있지 않았는지 추궁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들이 제보가 허위임을 알았거나, 최소한 허위일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기자회견을 강행했다면 이들 역시 미필적 고의에 따른 허위사실 공표 혐의를 받게 된다.  

검찰은 앞선 참고인 진술 등을 통해, 공명선거추진단 간부들 역시 제보가 허위일 가능성을 인식했을 개연성이 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김 전 의원과 김 변호사를 이미 소환 조사했고, 이번 주 안으로 이들 두 명을 재소환할 계획이다. 이용주 의원은 아직 보좌진만 조사를 받았으나, 이 의원에 대한 소환도 곧 이뤄질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또 이 전 최고위원과 박지원 당시 국민의당 대표 사이에 5월 1일 약 36초간 전화 통화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박 전 대표가 조작 사실 혹은 가능성을 인지했는지에 대해서도 검찰 조사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박 전 대표는 이를 직감한 듯, 이날 새벽 트위터에 "처음부터 검찰 수사와 사법부 판단을 기다리자고 했던 저로서는 법정에서 사실 다툼이 예상되지만 현 (영장 발부) 결정을 수용한다"며 "저와 우리 당은 향후 검찰 수사와 사법부의 재판 진행에 성실히 협력하겠다"고 했다.  

국민의당 '정치적 신뢰' 추가 타격…安, 입장 발표 타이밍 '실기'

검찰 수사가 '사법적 책임'의 영역이라면, 정치적 책임의 영역에서도 이번 영장 발부는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도 있다. 

국민의당은 지난 3일 당 자체 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이유미 씨의 단독 범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발표 시점부터 이미 '만약 검찰 수사 결과가 당 자체 조사 결과와 다를 경우 치명타'라는 관측이 나왔었다. 이날 이 전 최고위원이 구속됨에 따라, 사태는 바로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미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당 지지율 꼴찌를 기록하고 있는 국민의당의 고심은 더욱 깊어지게 됐다. 국민의당은 '당 붕괴설', '정계개편설'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이번 사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당원 수가 전체적으로는 늘어났다며 애써 태연한 기색을 짓기도 했지만 이 기사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은 '당원 수도 조작한 것 아니냐'는 등 조롱과 불신 일색이었다. 

17일째 이어지고 있는 안철수 전 대표의 '침묵'도 더욱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안 전 대표는 사건 초기 '나도 잘 모르는 일이기에 섣불리 입장을 내기보다는 당 자체 조사나 검찰 수사 등을 통해 사실관계가 어느 정도 밝혀진 후에 정리된 입장을 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시기를 놓친 셈이 됐다. 국민의당 내에서도 '차라리 모르면 모르는 대로 초반에 입장을 발표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안 전 대표는 특히 자신의 총선 인재영입 '1호'였던 이준서 전 최고위원의 구속 여부를 주시했다고 한다. 상황을 종합해 보면, 안 전 대표는 이 전 최고위원 구속영장이 기각될 것으로 봤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측근인 김경록 전 국민의당 대변인은 지난 9일 페이스북에 "그 친구를 믿는다"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 전 최고위원이 구속되면서, 안 전 대표가 상황을 파악하고 입장을 정리하는 데 추가로 시간을 들이다 또다시 실기할 가능성도 있다. 

위기의 국민의당, 대응은? 

이런 가운데 나온 국민의당의 첫 반응은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 다시 한 번 국민 여러분께 진정으로 사과드린다"면서도 "추미애 민주당 대표의 '수사 가이드라인' 제시가 검찰 수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고 하는 등 상반된 논조가 혼재된 양상이었다.  

손금주 국민의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새벽에 낸 논평에서 이 전 최고위원의 구속을 받아들인다면서도 민주당을 향해 "앞으로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을 정략과 정쟁으로 왜곡·확대시키려는 시도를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했다.  

손 대변인은 이번 영장 청구로 인해 국민의당이 신뢰의 위기에 직면한 점을 의식한 듯 "영장(에 기재된) '범죄 사실'이 당 진상조사단의 조사결과와 다른 점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검찰은 이번 사건이 이유미 씨의 단독 범행이라는 사실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이 씨가 단독으로 조작한 제보 내용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한 이 전 최고위원에 대해 법률적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지원 전 대표는 반면 수사와 재판에 성실히 협력하겠다고 밝히면서 "이러한 사태에 대해 당시 당 대표, 상임선대위원장으로서 머리숙여 용서를 거듭 바란다"고만 했다. 

국민의당은 추미애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정치인들의 공격에도 직면할 예정이다. 민주당은 이날 아침 7시경, 이례적으로 이른 시간에 대변인 논평을 내어 "국민의당 '셀프 조사' 결과는 꼬리 자르기였음이 명확해졌다"며 "허위사실 공표 과정에 대선 당시 책임 있는 인사들의 암묵적인 지시나 묵인, 방조가 있었는지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공격했다. 
 

▲이준서 전 국민의당 최고위원이 12일 새벽 구속된 상태로 검찰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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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남북관계에서 북핵문제 거론말라

북, 남북관계에서 북핵문제 거론말라
 
 
 
박한균 수습기자 
기사입력: 2017/07/12 [12:0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8일 B-1B 편대는 F-15K 전투기 2대, F-16 전투기 2대와 함께 강원도 필승사격장 상공에서 북 핵심 시설을 정밀 폭격하는 실사격훈련을 진행했다.<사진-인터넷>    

 

통일뉴스, 다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재일 조선신보는 11일 ‘과녁은 북핵이 아니라 미국의 전쟁소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현재로서는 남조선당국이 북핵문제에 대하여 떠들어댐이 없이 북과의 대화에 나설 준비가 되어있는지가 관건적인 문제의 하나다.”라고 주장했다.

 

조선신보는 “조선반도(한반도) 긴장격화의 주된 요인인 미국과의 합동군사연습을 중지할 결단을 내릴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남조선당국이 북의 호소에 화답하여 자주와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을 실천하려 한다면 동족의 자위적 핵무력을 걸고 들 것이 아니라 미국의 호전적인 망동부터 차단해야 한다” 주장했다.

 

이어 “북측은 남조선당국의 관계개선의지를 귀에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가장 긴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풀어나가는 각오와 행동을 근거로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신문은 이번 한미정상회담과 독일 베를린 제안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북은 자주냐 외세추종이냐, 우리 민족끼리냐 한미동맹이냐 하는 중대기로에서 올바른 결심을 내려야 한다고 민족중시를 강조해 왔다.

 

하지만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한미동맹 강화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며 한미 양국은 미국의 핵전쟁위협에 대처한 북의 자위적국방력강화조치를 도발로 매도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최대의 압박’을 가해나가는데 의견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워싱톤에서 발표된 공동성명에 트럼프가 ‘조선반도의 평화통일환경을 조성하는데 있어 남조선의 주도적역할을 지지하였다.’ ‘남북간대화를 재개하려는 문재인의 열망을 지지하였다.’는 부분을 거론하면서 “트럼프의 지지는 미국이 남조선에 씌우는 올가미의 또 다른 표현이다.”고 주장했다.

 

또한 재미동포들과의 간담회에서 ‘남북관계에서 주변국에 기대하지 않고 우리가 운전석에 앉아 주도하겠다.’라고 말했다며 “미국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발휘되는 주도권은 북측이 주장하는 자주의 개념과 대치되는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한 연설과 관련해서 신문은 “조선의 ICBM 시험발사가 있은 후 남조선의 현 집권자는 독일을 행각하여 베를린에서 ‘대북제안’을 담은 연설을 하였는데 이것 또한 ‘친미사대와 동족대결의 낡은 틀’에 갇힌 채로 내놓은 ‘제안’이라면 북측의 호응을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신문은 “남조선당국이 미국의 대북 압박책동에 추종하면서 발휘하는 ‘주도권’이란 미국의 ‘북핵포기론’의 대변이나 북에 대한 군사도발, 제재봉쇄의 대리수행으로 될 수밖에 없다”고는, 그러기에 북측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이후 남측이 트럼프의 ‘승인’을 받고 “동족을 겨냥하여 미사일을 발사하는 훈련을 실시”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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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와 SBS의 이유 있는 침묵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07/12 12:34
  • 수정일
    2017/07/12 12:3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국가정보원 적폐청산 TF, 노무현 수사 개입·채동욱 사찰사건 등
국정원 국내정치개입 의혹 조사 나서며 ‘공범자들’에 사회적 주목
‘채동욱 혼외자식’ 조선일보·‘논두렁 시계’ SBS보도 진실 드러날까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2017년 07월 12일 수요일
 

문재인정부 국가정보원이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를 꾸리며 국정원의 국내정치 ‘도구’를 자처했던 언론계에 때 아닌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서훈 국정원장이 발표한 TF담당 진상조사 사안은 △대선개입 △극우단체 지원 △박원순 서울시장 제압 문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조작 △NLL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최순실 측근의 인사 전횡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개입 △채동욱 검찰총장 사찰 △불법 해킹 의혹 등이다. 이 사안과 관련해 확인 없이 국정원발 기사를 쏟아냈던 언론들은 국정원의 여론조작 공범이라는 사회적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가운데 특히 조선일보의 2013년 ‘채동욱 혼외자식 보도’와 SBS의 2009년 ‘논두렁 시계 보도’는 국정원과 언론간의 ‘유착’ 의혹 사례로 사회적 주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앞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CBS와 JTBC에 출연해 자신과 관련한 조선일보의 사생활보도와 개인정보 수집 배경에 의혹을 제기한 바 있으며 국정원 적폐청산 TF는 최근 ‘故 노무현 대통령 논두렁 시계’ 보도와 관련해 관련 언론담당관들을 불러 조사에 나섰다.  

 

▲ 2013년 9월6일 조선일보 1면.
▲ 2013년 9월6일 조선일보 1면.
 
2013년 9월6일 조선일보 보도로 촉발된 채동욱 총장의 사생활 논란은 결국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수사를 지휘하던 검찰총장 낙마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고, 원세훈 국정원장에 대한 선거법 위반 수사는 흐지부지 끝났다. 조선일보는 혼외자로 지목된 채아무개군이 거주하던 집과 학교기록을 공개하며 개인정보취득 경로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보도 당시 강효상 조선일보 편집국장은 이후 총선에 출마해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됐다.

 

2013년 당시 신경민 민주통합당 의원은 “곽상도 민정수석이 8월 중순 강효상 편집국장을 만나 채동욱 검찰총장 개인정보를 넘겼다”고 주장했으며 강효상 의원은 지난해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곽 수석을 비롯해 청와대 인사로부터 혼외자 정보를 들은 바 없다. 채동욱 보도는 취재팀이 발로 뛰어서 보도한 결과물”이라고 반박했다. 이와 관련 채동욱 특별취재팀 소속이었던 최재훈 조선일보 기자는 취재기를 통해 “강효상 편집국장은 고비 고비마다 굵직굵직한 정보를 취재팀에 건네주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번 국정원TF와 관련한 조선일보의 곤혹스러움은 지면으로 감지되고 있다. 국정원TF가 꾸려진 지난 6월20일부터 7월11일 현재까지 지면에 노출된 TF관련 기사는 단 한 건에 불과했다. 세계일보가 보도한 국가정보원 SNS장악대책 보고서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개입 사건 관련 파기환송심 내용도 조선일보 지면에선 찾기가 어렵다. 국정원TF는 국정원이 채동욱 관련 개인정보를 수집한 ‘진짜 동기’를 밝혀낼 계획이어서 조사결과에 따라 4년 전 조선일보 보도의 전말이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

 

▲ 2009년 5월13일자 SBS 보도 화면 갈무리.
▲ 2009년 5월13일자 SBS 보도 화면 갈무리.
 
SBS는 2009년 5월13일자 메인뉴스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양숙 여사가 자기 몰래 시계를 받아 보관하다가 지난해, 박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시계 두 개를 모두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단정적으로 보도했다. 이어 “비싼 시계를 논두렁에 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집에 가서 물어보겠다며 노 전 대통령이 답변을 피했다고 검찰은 밝혔다”고 보도했다.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졌고 열흘 뒤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보도는 현재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보도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은 2015년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논두렁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국정원이 언론에 흘린 것”이라고 폭로했다. 당시 국정원장은 원세훈씨였다. SBS는 당시 정보의 입수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증명책임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소송상 불이익뿐 아니라 언론사의 생명인 신뢰도의 타격도 불가피하다. 정보기관의 허위사실 유포에 가담한 ‘공범자’인 셈이기 때문이다. 국정원TF의 ‘논두렁 시계 보도’ 관련 조사에 대해 SBS를 비롯한 지상파3사는 관련 소식을 보도하지 않고 있다. 이유 있는 침묵이다. 

 

▲ 7월10일자 JTBC '뉴스룸' 보도화면 갈무리.
▲ 7월10일자 JTBC '뉴스룸' 보도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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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관광 중단 10년, "이제 재개할 때도 되지 않았나"

금강산기업, 개성공단과 형평성 맞춘 피해지원 촉구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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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1  19:2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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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기업협회는 금강산관광 중단 10년이 되는 11일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당장 금강산관광 재개가 어려운 조건에서 기업피해에 대한 보상을 촉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2008년 7월 11일 남측 관광객인 박왕자씨가 금강산관광 도중 장전항 북측 구역에서 피격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튿날부터 잠정 중단된 금강산관광은 벌써 10년째 중단 상태이다.

금강산관광 중단 10년을 맞아 금강산기업협회(금기협, 회장 신양수)는 11일 오전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 책임 아래 기업 피해에 대한 보상을 촉구했다.

특히 개성공단 입주기업에 대한 지원과 형평성을 고려해 금강산 기업에도 경협보험 가입 기업 수준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며, 빠른 시일내에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신양수 회장은 1998년 11월 18일 826명의 이산가족 등을 태운 금강호가 강원도 동해항을 떠나 북측 장전항에 입항하면서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다양한 남북교류협력의 시대를 열었으며, "분단 반세기 동안 대립과 갈등만 가득했던 한반도를 평화와 화해의 한반도로 탈바꿈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금강산관광의 의미를 되새겼다.

또 "그 시작과는 다르게 금강산관광의 중단은 남북대화의 중단, 5.24조치로 인한 남북경협과 신규투자 중단, 민간교류협력 중단, 이산가족 상봉 대폭 감소 등 남북관계의 극한 대치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이제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이 문닫고 박근혜가 대못박은 남북교류협력의 물꼬를 터서 하루 빨리 금강산관광을 재개하고 5.24조치를 해제하여 소중한 일터에서 다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빠른 시일내에 남북관계 개선이 어려운 이 시점에 금강산기업과 남북경협기업들의 피해를 보상하여 남측에서라도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금기협에 따르면, 금강산관광이 중단된 지난 2008년 7월 12일 이후 지금까지 만 9년동안 금강산지구에 785억원을 투자한 41개 중소업체(현대아산, 에머슨퍼시픽 등 대기업 9개사 제외)는 3차례에 걸쳐 182억원(투자액 대비 23%)의 남북협력기금 대출을 받았을 뿐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개성공단의 경우 2016년 2월 10일 정부의 전면중단 조치 이후 지난해 11월까지 각종 세제지원 804억원, 신규 대출금 2,726억원, 상환유예 4,552억원, 고용지원금 51억원, 근로자지원금 124억원, 투자금액의 90% 경협보험금 지급이 이루어졌으며, 경협보험 미가입 기업에도 투자금의 45%를 지원하고 유동자산 손실은 별도로 70%까지 지원하는 등 총 손실금액 대비 72.5%를 보상한 것과 비교하면 금강산기업에 대한 지원은 '형평성'에 너무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금기협의 주장이다.

금기협은 당장 경협재개가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를 믿고 금강산에 투자한 기업들이 다시 사업하는 그날까지 생활을 하고 버틸 수 있도록 '투자자산'(고정자산, 유동자산)과 영업손실에 대한 실질적이고 완전한 피해보상을 실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 왼쪽부터 신양수 금강산기업협회 회장, 서승우 코어세스 대표, 이종흥 금강산코퍼레이션 대표, 유동호 남북경협기업 생존권 보장을 위한 대책본부 본부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종흥 금강산코퍼레이션 대표는 "2015년 7월 10일 금강산기업인과 고성군민 간담회에서 당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는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수당이 되면 1호 법안으로 손실보상특별법을 만들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며, "언제나 금강산기업은 뒷전이었다. 정부가 기업들간 갈등을 조장하는게 아니라면 개성공단과 형평성에 맞게 힘든 사람들부터 먼저 보상해 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 "남북경협이 재개되었을 때 꼭 필요한 '남북경협사업 중단에 따른 손실보상 특별법안'이 조속히 국회를 통과해서 남북경협기업들이 안심하고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서승우 코어세스 대표도 "통일부가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업무보고를 통해 이미 정부로부터 확인된 피해액의 70%를 지원받은 개성공단 기업에 나머지 30%를 먼저 지원하고 금강산기업과 내륙투자기업 등에 대해서는 이후에 추진한다는 식의 정책을 밝힌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거꾸로 금강산기업부터 먼저 지원해야 한다. 또 개성공단 기업과 지원 내용에 차별을 두어서는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0월 4일부터 '남북경협기업 생존권 보장을 위한 대책본부'를 결성해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유동호 본부장은 전날 조 장관이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 업무보고에서 남북경협과 금강산 기업의 피해지원과 관련해 "당시 경협보험제도가 미비했다는 문제점과 함께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고 남북관계 복원을 위한 노력 차원에서 신속한 피해지원이 필요하다"고 한 언급을 거론하면서 '지난 10년간 상상할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고 감회를 밝혔다.

유 본부장은 "중단과 동시에 보상이 함께 이루어진 개성공단과 달리 남북경협, 금강산관광은 중단만 있었을 뿐 10년의 세월동안 단 한푼의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보험을 들고 싶어도 정부의 지원이 전무하였기에 보험을 들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형평성에 의거하여 경협 보험가입 업체 기준과 동일한 피해보상을 실시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말했다.

통일부는 남북경협 중단에 따른 기업 피해지원과 관련해 개성공단 입주기업을 시작으로 남북경협기업, 금강산기업 등과 잇달아 면담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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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배노동자는 살인노동·버스기사는 과로운전 ‘과로사회’

 

[아침신문 솎아보기] 이틀 30시간 운전, 휴식시간 보장 안 돼…분신한 집배원 노동시간, 새벽 4시반~밤 10시반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7년 07월 11일 화요일
 

열악한 노동현실에 대해 언론이 관심을 가졌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지난 9일 경부고속도로에서 광역버스 운전기사가 졸음운전을 해 7중 추돌사고가 난 것과 관련해 버스 운전기사들의 과로 근무실태에 대해 1면에서부터 조명했다. 경향신문은 1면에서 지난 6일 안양우체국 앞에서 분신한 집배원 사건을 다루며 그들의 과중한 업무에 대해 살폈다.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이 법정시한을 넘긴 가운데 노사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겨레는 노동계가 오랫동안 주장했고, 대선 당시 후보들도 어느 정도 합의했던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을 좀 미루자는 주장의 칼럼이 실렸다. 경향신문은 최저임금 인상이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라고 보며 최저임금도 주지 못하는 사업장은 정리하는 편이 낫다고 비판했다.  

다음은 11일자 아침종합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경향신문 “극단으로 내몰린 집배노동자…‘살인 노동 멈추라’”
국민일보 “법안처리 1건…정쟁에 막힌 정책” 
동아일보 “오늘도 저승사자와 달린다” 
서울신문 “지명 철회 검토…협치 구하는 靑” 
세계일보 “국정원, 野정치인 ‘사찰’ 검·경 표적수사도 종용”
조선일보 “송영무·조대엽 임명 늦추기로” 
중앙일보 “레미콘 공장 철거, 61㎡로 커지는 서울숲” 
한겨레 “‘골목상권’ 대기업 진출 특별법 도입해 막는다” 
한국일보 “文정부 두 달, 아직도 ‘반쪽 정부’”
 

 

오늘도 저승사자와 달린다 

동아일보는 1면에서 광역버스 운전사의 과로근무에 대해 다뤘다. 이 신문에 따르면 버스기사들이 졸음을 가리키는 말이 ‘저승사자’였다. 9일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에서 7중 추돌사고를 낸 광역급행버스 운전사 김아무개씨는 사고 당시 “시속 90km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눈이 감긴 것 같은데 갑자기 우당탕 소리가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앞바퀴가 붕 떠 있었다”고 말했다. 

 

 

▲ 11일자 동아일보 1면


사고 전날인 8일 김씨는 오전 5시부터 오후 11시반까지 19시간 가까이 일했다. 이날 운행거리는 약 639km로 서울~부산 최단거리 360km의 두 배에 육박하는 거리다. 김씨는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데 이튿날 운전대를 잡은 시각은 오전 7시15분. 동아일보는 “다음날 운행할 때까지 8시간 휴식 적용이 안 됐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현행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은 사업용 차량 운전사들이 2시간 이상 운행 때 반드시 15분 이상 쉬도록 하고 있다”며 “운행 간격도 최소 8시간 이상 유지토론 하고 있다”고 설명한 뒤 “김씨에게 이 규정은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결국 열악한 노동환경이 문제였다. 동아일보는 3면 “7대 신고하고 5대만 운행…출근시간대 15분간격 ‘돌려막기’”에서 “예고된 사고였다”며 “하지만 막을 수 있는 참사였다”고 표현했다. 이 신문은 “7중 추돌사고는 왕복 100km가 넘는 장거리 노선을 하루 5, 6회씩 달려야 하는 수도권 광역버스 운행시스템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고 분석했다. 중앙일보도 1면 제목을 “이틀 30시간 운전, 졸음 버스 만든다”고 뽑으며 휴식 없는 노동에 대해 지적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에 따르면 M5532번을 운행하는 오산교통은 지난해 8월 국토교통부에 ‘버스 7대로 15~30분마다 하루 40회씩 운행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해 허가를 받았지만 실제 투입된 버스는 5대 뿐이었다.

동아일보는 “국토부는 지방자치단체에 책임을 떠넘기고 지자체는 인력 부족과 업계 반발을 이유로 손을 놓았다”고 지적했다. 경기 광주시 경우 전담 인원 2명이 3000대 버스를 관리해야 한다. “서울시처럼 준공영제를 실시하는 곳은 지자체가 권한을 행사하지만 준공영제가 없는 지자체는 업체 ‘양심’에 맡기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중앙일보는 졸음운전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다뤘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는 2~3초만 깜빡 졸아도 일반 도로에서 100m 이상을 눈감고 운전하는 것과 같다”며 “졸음운전은 음주운전보다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고속도로안전청 보고서에 따르면 18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한 운전자는 혈중알코올농도 0.05%의 음주운전자와 상태가 비슷하고 21시간째 깨어있는 운전자는 알코올농도 0.08%때 수준처럼 둔해진다고 중앙일보는 전했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2012년부터 최근 5년간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졸음운전 사고는 모두 2241건이다. 치사율이 18.5%로 과속 치사율 7.8%, 전체 교통사고 치사율 11.1%에 비해 높은 수준이다.  

졸음운전을 막기 위한 장치 역시 설치가 쉽지 않다. 임종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8월 대형 화물차와 버스에 ‘차로이탈경보장치(LDWS)’와 자동긴급제동장치 등을 의무 장착케하는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같은해 12월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교통안전법’으로 수정됐고 사로이탈경보장치 하나만 의무장착으로 내용이 바뀌었다. 비용문제였다.  

중앙일보는 “미국이나 네덜란드, 이스라엘 등 첨단운전보조장치 의무 장착을 제도화한 국가에서는 차로이탈 경보장치와 자동긴급제동장치 등을 함께 장착하도록 하고 있다”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유럽 국가들의 도로상황을 확인했다. 프랑스는 4시간 30분 이상 연속 운전을 할 수 없고 그 사인 45분을 반드시 쉬어야 한다. 승객들이 휴게실에서 10분 만에 볼일을 마쳤지만 긴 시간을 기다린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기자가 ‘조금만 미리 출발할 수 없느냐’고 물었지만 이 역시 불가능하다고 했다고 전했다. 휴식시간은 모두 기록됐다. 미국도 의무휴식제도를 엄격하게 지킨다고 한다. 버스는 10시간, 화물차는 11시간 연속 운전 후 각각 최소 8시간, 10시간을 쉬어야 한다.

▲ 11일 경향신문 1면
▲ 11일 경향신문 1면

 

집배원들도 ‘살인노동’

경향신문은 1면과 2면에서 집배원들의 살인적인 노동현실에 대해 다뤘다. 지난 6일 경기 안양시 안양우체국 소속 21년차 집배원 원아무개씨는 ‘오늘은 일을 못 나가겠다’며 연가를 냈고, 오전 11시경 안양우체국 앞에서 음료수병에 든 인화성물질을 자신의 몸에 붓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는 전신에 2,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지난 8일 숨을 거뒀다. 한 동료는 경향신문에 “나 역시 너무 힘들었던 탓에 그가 자살할 거란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과로가 만든 참극이었다.

경향신문이 전한 동료들 증언에 따르면 원씨가 일하는 안양 지역은 최근 신도시 개발 등으로 물량이 급증해 안양우체국은 대표적으로 집배원 부족 우체국으로 꼽혔다. 그는 새벽 4시 반에 일하러 가 밤 10시 반에 퇴근한 것으로 전해졌다.

집배원 사망사고는 지난 5년간 75건, 올해만 12건이 발생했다. 자살은 원씨가 다섯 번째다. 주된 원인은 과로. 사회진보연대노동자연구소가 발표한 ‘전국 집배원 초과근로 실태조사’에 따르면 집배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55.9시간, 연평균 노동시간 2888.5시간으로 나타났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우정사업본부는 지난달 노동여건 개선책을 내놓고 주 52시간 초과 노동이 이뤄지는 일부 관서에 2018년까지 인력 100명을 충원하기로 했고, 안양우체국에도 위탁집배원 2명을 증원한다는 계획을 내놓았지만 구인에 차질을 빚으며 현재까지고 증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최저임금, 1만원 몇 년 뒤로 미루자? 

최저임금도 노동문제의 중요한 쟁점이다.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으로 올리겠다고 공약해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최저임금 결정 법정시간인 지난달 29일을 넘겼고 최종 마지노선인 오는 16일이 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노동계는 올해 최저임금 6470원보다 54.6%오른 1만원을 주장하지만 사용자 측은 2.4%(155원) 인상한 6625원을 제시했다. 

▲ 11일 한겨레 칼럼
▲ 11일 한겨레 칼럼

 

이런 가운데 한겨레에 최저임금 인상이 자영업자·중소기업들에게 부담이 되니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을 늦추자는 주장의 칼럼이 실렸다. 이강국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겨레 칼럼을 통해 “자영업자 비중이 높은 한국에서 영세한 자영업자들이나 중소기업들에 큰 부담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최저임금 1만원을 몇 년 늦추는 대신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물론 정부는 카드수수료 인하 등의 지원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가맹점업계의 불공정 관행과 임대료를 억제하기 위한 노력도 추진되고 있지만 이런 조처들에도 불구하고 급속한 최저임금 인상은 약자들끼리의 갈등만 심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것에 대해 장단점을 계속 나열하다가 “최저임금 인상을 생산성이 낮은 산업들을 구조조정하는 기회로 삼기 위해 세심한 정책수단들도 요구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자영업자 비중이 높다며 최저임금 1만원을 늦추자는 주장을 하면서도 이 교수는 “최저임금 1만원 논란이 단지 얼마를 더 올리느냐 누가 힘들어지느냐를 넘어 경제구조의 개혁을 위한 정치적 노력과 사회적 합의로 발전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최저임금 1만원에 대해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1만원 달성을 위한 여건 조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은 “최저임금은 노동자들이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금액”이라며 “1만원 정도는 돼야 주 40시간 노동 기준으로 월 소득이 209만원에 이르러 1인 가구 노동자 표준 생계비(월 215만원)에 근접한다”고 했다. 대선 후보들도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공약으로 내건 만큼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고 이 신문은 봤다.  

경향신문은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에 따르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는 지원책을 당장 마련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소상공인들의 몫을 채가는 프랜차이즈 본사나 대기업의 ‘갑질’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상공인vs노동자, 약자들끼리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프랜차이즈·대기업과의 관계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분석이다.  

경향신문은 “그러나 정부의 지원에도 최저임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청년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정페이’로 연명하려는 사업장은 정리하는 편이 낫다”며 “사회적 안전망을 우선 확충한 뒤 최저임금 1만원 한국 사회 산업구조를 개혁하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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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독창적인 고대 문명이 탄생하였다

한반도 문명의 뿌리와 성격
  • 박경순 우리역사 연구가
  • 승인 2017.07.11 11:01
  • 댓글 0

신석기 농업혁명이 고대문명 창조의 어머니라면, 청동기 문화는 고대문명 창조의 아버지이다. 일반적으로 고대문명은 곧 청동기 문명이라고도 한다. 청동기 문화에 기초해 계급이 발생하고 계급 지배도구로서 국가권력이 형성되면서 인류 최초의 고대문명이 탄생했다. 기원전 3000년경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기원전 3000∼2500년 사이의 인더스강 유역의 문명, 기원전 2000년경 황하 유역의 문명이 인류 4대 문명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이들 인류 문명 발상지는 신석기 농업혁명, 청동기 문화, 고대 국가, 문자의 발명 등의 과정을 통해 세계에서 맨 처음으로 독자적인 고대문명이 창조된 지역들이다. 물론 이집트 경우처럼 청동기 문화가 성립하기 이전 신석기 시대에 고대국가가 성립된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고대문명은 청동기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4대 문명에서 주목할 점은 중국의 경우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약 1000년 후에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는 유럽지역보다 1000여년 늦게 고대문명이 형성되었는가? 바로 이 점에서 한반도 청동기 문화와 고대 국가의 성립시기가 주목되고 있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연원을 밝히는 문제는 한반도 고대문명의 탄생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된다. 한반도에서 언제 고대문명이 발생했으며,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가는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연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연원을 외래에서 유입된 수입문화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대표적으로 기원전 13세기경에 시작된 카라수크 청동기 문화 전파론, 스키타이 청동기설, 오르도스 청동기설, 은나라 청동기설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어느 것 하나 청동기 문화의 이동경로나 유적 유물적 증거들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 외래 유립론들은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상한이 올라감에 따라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상한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난무하고 있어 아직 확정된 견해는 없다. 하지만 한반도 지역에서 기원전 12~13세기를 훨씬 뛰어넘는 청동기 유적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반영해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도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문화와 공존하면서 점차 본격화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교과서는 가장 보수적으로 연대를 설정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상한은 적어도 기원전 15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확증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들어 기원전 20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청동기 유적들이 다수 발굴되고 있어, 한반도 청동기 시대 개시 연대는 갈수록 올라갈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남 영암군 장천리에 있는 두 곳의 청동기 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수집된 숯에 대한 방사성 탄소 측정결과 그 연대가 각각 기원전 27세기, 기원전 24세기경으로 나왔으며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5기의 고인돌 유적에서 채취한 숯에 대한 방사성 탄소 측정결과 기원전 24세기경으로 나왔다. 또 한반도 청동기 문화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중국 동북지역(만주)의 청동기 문화도 기원전 20세기 이전으로 소급된다. 결정적으로는 북한에서 최근 청동기 유적 유물들이 다수 발굴되었는데 기원전 35세기까지 소급된다. 이러한 자료들은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외부유입론이 틀렸다는 확실한 증거들이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서 창조된 독창적 문화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중국이나 시베리아지역의 청동기 문화보다 훨씬 앞서 창조되었을 뿐만아니라 그 성격이 매우 독특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비파형 동검이다.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인데, 그 형태나 제작방법이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으로, 중국의 동주식 동검이나 오르도스 동검과는 전혀 다른 문화양태에 속한다. 중국의 동주식 동검이나 오르도스 동검은 검몸과 손잡이가 일체형이지만 비파형 동검은 검몸과 손잡이가 분리형으로 되어 있다. 또한 비파형 동검은 다른 지역의 동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파형태의 아름다운 모습을 띠고 있어 독창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유물로는 고인돌, 비파형 동검, 세형 동검, 팽이형토기, 미송리형 토기 등이 있는데, 그 어느 것 하나 독창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러한 점들은 한반도 청동기 문화가 그 어떤 다른 지역에서 창조되어 전래된 수입문화가 아니라 이 땅 한반도에서 살던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독창적으로 창조된 자주적 문화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즉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는 신석기 농업혁명을 이룩한 옛 유형의 한반도인(현대 한반도인의 직계 선조)들이 이 땅에서 독창적으로 창조한 자주문화이다.

▲ 비파형 동검(왼쪽) 동주식 동검(오른쪽)

그렇다면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이전까지는 현재 중국 동북지역(요동반도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이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었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비파형 동검이 요령식 동검으로도 불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북한에서 대동강 주변의 청동기 유적유물들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한 결과, 이 지역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원해서 한반도 전역과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확산되었음이 밝혀졌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표지유물은 팽이그릇(팽이형 민무늬 토기)이다. 이 그릇은 생긴 모양이 팽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대동강 유역 청동기 시대 집터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남쪽 한계선은 한강 하류 유역이다. 이 그릇은 신석기 시대의 밑창이 뾰족한 새김(빗살)무늬 그릇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그릇은 대동강 일대의 고인돌에서도 자주 나오며, 대동강 일대의 청동기 시대 집터에서는 반드시 출토된다. 이렇게 볼 때 팽이그릇을 남긴 집터의 주민들이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동강 유역의 청동기 문화를 팽이형토기 문화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동강 유역에서 발원한 팽이형 토기 문화의 분포영역은 남쪽으로는 한강 하류지역에 이르고, 북서쪽으로는 청천강 일대에 이른다. 이러한 분포지역은 고조선 초기 영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팽이형 토기(질그릇)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민무늬 토기(질그릇)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 팽이형 토기

그렇다면 대동강 유역에서 청동기 문화가 창조된 시점은 언제일까? 북한 고고학계에 따르면 대동강 유역의 팽이형 토기 문화는 1기~4기로 나뉜다. 1기는 고조선 건국 이전 팽이그릇만 쓴 청동기 시대이며, 2기는 고조선 건국 이후 팽이그릇과 미송리형 토기를 함께 쓴 시기이며, 3기는 팽이형 토기와 묵방리형 토기가 함께 나오며, 화독이 2개인 집터를 사용하던 시기이며, 4기는 집터에 주춧돌을 놓기 시작한 시기이다. 팽이형 토기 문화의 절대연대는 비파형 창끝이 나온 표대유적 집터에 의해 알 수 있다.이 유적 10호 집터에서 나온 묵방리형 단지를 열형광법으로 측정한 결과 4450±380년 전(측정 당시로부터)으로 나왔다. 이것은 비파형 창끝이 나온 용곡리 5호 고인돌 무덤의 절대연대(기원전 26세기)와도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묵방리형 단지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팽이형 토기 3기는 대체로 기원전 3천년기 후반에 속한다. 이 연대를 근거로 하면 미송리형 단지가 나온 2기는 기원전 3000년기 전반기로, 그보다 더 이른 팽이형 토기 문화 1기는 기원전 4000년기 후반으로 편년할 수 있다. 이러한 편년은 팽이형 토기 문화 1기에 속하는 평양시 삼석구역 표대유적 8호 집터에서 출토된 토기를 핵분열흔적법으로 절대연대를 측정한 결과, 5238±777년전(기원전 4000년기 후반)으로 나온 것으로도 증명된다. 또한 청동조각이 나온 성천군 용산리 1호 고인돌 무덤의 경우 뼈를 시료로 전자스핀공명법(ESR)으로 측정한 결과 측정 당시로부터 5069±426(기원전 31세기)이며, 핵분열 흔적법(FT)으로 출토된 질그릇을 시료로 측정한 결과 측정 당시로부터 5037±853(기원전 31세기)로 나왔다. 이러한 제반 사실들을 종합하면 대동강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원전 35세기)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 이는 신석기 시대 이래 우리겨레가 살았던 한반도와 요동반도 연해주 지역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해당되어, 이 지역이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발원지라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 대동강 지역에서 기원전 4000년기 후반에 시작된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30세기 초 고조선이 건국된 이후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어 기원전 3000년기 후반에는 전 지역이 청동기 시대로 돌입했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동아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가장 빠른 시기에 시작됐다. 중국은 기원전 20세기 초 하나라 건국과 함께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시베리아 지역의 청동기 시대는 그보다 훨씬 뒤쳐진다. 만주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3000년기 후반경부터 출토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우리겨레 청동기 문화에 속한다. 따라서 대동강 유역에서 발원한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는 동아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 문화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가 그 어떤 외부에서 유입된 수입문화, 모방문화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겨레의 창조적 지혜와 힘에 의해 독창적으로 창조된 토착문화라는 것을 실증해 준다.

한반도 문명의 탄생과정

인류의 고대문명의 발상지라 할 때 신석기 농업혁명을 통한 항구적 정착생활, 사회정치조직의 탄생, 청동기 문화의 탄생을 통한 농업과 수공업의 분업 체계의 형성, 잉여생산물 축적, 계급의 발생을 통한 계급사회로의 진입,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로서 고대국가의 탄생의 과정을 거친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신석기 농업혁명을 통한 농경문화의 탄생, 청동기 문화의 탄생을 살펴봤으며, 이를 통해 한반도에서 고대문명 탄생의 전제조건들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혔다. 한반도에서 계급의 형성과 고대 국가 성립과정을 밝히게 되면 한반도 고대문명 탄생과정의 비밀이 풀리게 된다.

한반도에서 계급이 언제 발생했을까? 계급의 발생은 신석기 농업혁명의 결과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고, 농업과 수공업의 사회적 분업이 발생하고, 사적 소유가 발생한 역사적 조건과 맞물려 이루어지며, 그것은 대체로 청동기 시대의 출발과 함께 한다. 농업과 수공업의 사회적 분업은 신석기 농업혁명으로 인해 농업생산물이 증대됨에 따라 잉여생산물을 비축할 수 있는 대형 질그릇이 필요했을 때 발생하며, 청동기의 발명과 더불어 확고히 고착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과정이 진행된 것은 신석기 후기부터 청동기 초기이다

대동강 유역에서 기원전 4000년기 전반기에 이르러 농업생산이 증대되어 잉여생산물을 축적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이는 이 시기에 해당되는 신석기 시대 유적인 남경 유적 31호 집터에서 높이 84cm나 되는 독을 비롯해 낟알을 담아두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이는 그릇이 10여개 나온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형 질그릇의 제작은 가내 수공업 형태로는 만들 수 없으며, 전문 수공업자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즉 농업과 수공업의 사회적 분업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위에서 예를 든 남경유적 31호 집터에서 질그릇이 120개나 쏟아져 나온 사실이 이를 방증해 준다.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에서 청동기가 초보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으며, 이로부터 수공업은 하나의 독자적인 생산 분야로서 지위를 확고히 차지하게 되었다. 청동기란 원래 전문적인 수공업자에 의해서밖에 생산될 수 없다는 것은 굳이 설명이 더 필요치 않다. 농업과 수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교역도 함께 발전해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 순수 팽이그릇 집터에서 돌돈과 같은 원시 화폐가 출현했다. 이러한 과정은 원시공동체적인 사회관계를 붕괴시킨 객관적 조건으로 되었다.

사회적 생산의 이러한 발전에 따라 가족 형태도 달라졌으며 사회관계에서도 일정한 변화가 발생했다. 생산의 기본단위가 가족농으로 바뀌고 이에 따라 일부일처제의 가족형태가 지배했으며 사회관계 역시 모계 씨족공동체 사회로부터 부계 씨족 제도가 확립되었다. 한편 공동체적 경리도 점차 촌락공동체(부가장적 공동체)로 바뀌었다. 이후 생산이 더욱 발전하고, 사유재산이 발생하였는데, 사유재산의 발생과 발전은 곧 촌락공동체의 붕괴를 초래했다. 혈연적 유대에서 벗어난 촌락공동체(마을공동체)에서는 집과 텃밭은 개별 가족이 소유하고 농경지와 벌목지 산림 같은 것은 공동소유로 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촌락공동체에서 재부의 축적은 집단의 공동경리와 종교 행사 등을 주관한 족장(추장)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족장을 중심으로 한 그 친족들은 그들이 차지한 특권을 이용해 공동체 소유의 토지를 자신들의 사적 토지로 만들었다. 이로부터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소유가 발생했다. 사적 소유의 발생은 필연적으로 생산수단을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가 생기게 하였다. 생산수단에 대한 이러한 소유에서의 차이는 빈부의 차이를 낳게 되었고, 재산상 불평등을 낳았고, 그리고 사회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로 분화되었으며, 그 결과 계급이 발생했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노예 소유자와 노예라는 적대되는 계급이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 계급이 발생한 것은 청동기 시대에 해당되는 기원전 35세기경이다. 이는 기원전 31세기에 해당되는 용산리 순장 고인돌 무덤에서 확인된다. 이 고인돌 무덤에 순장된 자들은 노예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고인돌 무덤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노예 노동이 사역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용산리 고인돌

결국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에 이르러 대동강 일대의 종족 연합체 내에서는 계급관계가 형성되어 권력과 재부를 독점한 계급과 그것을 갖지 못한 계급이 확고히 갈라지게 되었다. 권력과 재부를 독점한 계급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이용해 권력과 재부를 독점했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재부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이웃 종족들과의 전쟁을 빈번히 벌였다. 기원전 4000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는 것은 금탄리 유적과 남경 유적을 비롯해 불에 탄 집터들이 뚜렷이 보여준다. 평양시 사동구역 금탄리에 위치한 금탄리 유적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 2층은 신석기 유적이며, 3층은 팽이그릇 시기 청동기 유적인데, 팽이그릇 시기 청동기 유적에서 불에 탄 집터들이 다수 발굴되었다. 또한 이 시기 발굴된 집터에서 그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뿌리나루 활촉, 단검을 비롯한 전투용 무기들이 다수 발견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에 대동강 유역일대에서 생산력의 발전을 통한 잉여생산물의 축적, 농업과 수공업의 사회적 분업과 교역관계의 발생 발전, 사적 소유의 발생과 계급분화의 진행, 혈연공동체의 붕괴와 지역공동체의 형성 등의 과정이 진행됨으로써 고대 국가 형성의 역사적 전제 조건이 마련되어 갔다. 이와 함께 빈번한 종족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전쟁시대를 끝낼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강력한 힘을 갖춘 국가체제에 대한 시대적 열망이 높아져 갔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전제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여 기원전 30세기 초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 국가인 단군조선이 건국되었으며, 이 땅 한반도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문명이 창조되었다.

박경순 우리역사 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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