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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항쟁 양심수 전원석방 역사 재현해야 진정한 촛불혁명

87년 6월항쟁 양심수 전원석방 역사 재현해야 진정한 촛불혁명
 
 
 
공동취재단 
기사입력: 2017/07/11 [01:54]  최종편집: ⓒ 자주시보
 
 

 

[↑2017.07.08 광화문에서 진행한 <박근혜가 가두었던 그들이 돌아 온다-양심수석방문화제>의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의 발언 동영상]

 

 

▲ 8일(토) 저녘 광화문에서 진행한 <박근혜가 가두었던 그들이 돌아 온다-양심수석방문화제>     © 양심수후원회

 

 

치열했던 87년 6월항쟁으로 분출된 민주주의 열망을 모아 88년 12월 양심수 전원석방을 이루어낸 역사가 있다. 30여년 전의 일이다. 민주주의 탈을 쓴 노태우정권이었지만 결국 그도 강력한 국민들의 투쟁에 의해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에 의해 구속된 모든 시국사범과 양심수 전원석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6월항쟁 못지 않은 뜨거운 국민들의 열망이 분출했던 2017년 촛불혁명! 새 정부도 들어섰지만 아직도 이땅 감옥에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적폐정치에 맞서 싸우다 구속된 수백명의 양심수들이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꽉 막힌 옥방 찜통 더위와 싸우며 신념과 양심을 지켜 싸우고 있다. 

 

그 양심수 전원석방을 이루어내기 위한 본격적인 투쟁의 봉화가 광화문 광장에서 타올랐다.  

양심수석방추진위원회’가 7월 8일(토) 저녘 광화문 광장에서 <박근혜가 가두었던 그들이 돌아 온다-양심수석방문화제>를 거행한 것이다.

 

이 행사를 통해 민가협, 민가협양심수후원회원들과 사회진보와 민주주의, 통일 위해 헌신해 온 모든 인사, 단체들이 근 한 달여 진행한 ‘양심수석방 보라색엽서 보내기’ 실천을 총화하면서 민주주의 새로운 진로를 개척할 태세를 가다듬었다. 

 

특히 민중연합당 당원들은 ‘양심수석방 보라색엽서 보내기’ 실천을 성과 있게 집중시키는 1차 마감과 함께 1천여 명이 참가하는 촛불퍼포먼스로 ‘양심수석방문화제’를 힘있게 열었다. 

 

민가협 그리고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은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라 ‘30여 년 전 양심수 전원석방의 역사를 반드시 재현해 내야한다’고 못 박았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중에도 2천여 명의 양심들은 근 4시간의 ‘양심수석방문화제’를 지키고 빛냈다. 줄기차게 진행된 공연의 빛과 소리, 노래와 춤사위로 우리가 촛불이고 양심수들이 촛불이라는 것을 강력히 발산하였다. 우리를, 양심수를 가두고서는 그 누구도 촛불정부라고 말할 수 없다고 외쳤다.

 

▲ 민간협어머니들과 함께 단상에 오른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양심수 전원석방을 반드시 이루어내자고 절절히 호소하였다.     © 양심수후원회

 

관련하여 권오헌 명예회장은 명쾌하게 설파했다.

 

“양심수 왜 석방해야 되는가? 간단합니다.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양심수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수는 자기 양심에 따라 활동한 사람입니다. 개인 또는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공동의 선을 위해서 투쟁하다 감옥에 간 사람들, 자기가 하는 일을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속을 두려워  하지 않고 불이익을 감내하면서 활동하다 감옥에 간 사람들, 그 시대의, 당대의 의인들이기 때문에 석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정부가 ‘사람이 먼저’, ‘국민이 주인’이라고 한다면 양심수는 한마디로 사람 중의 사람이며 국민 중의 국민이라는 주장이었다. 사람만이 유일하게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공동선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촛불정권이 ‘적폐세력을 아무리 단호하게 처벌해도 양심수가 석방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살아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양심수석방 여부는 진짜 민주주의와 가짜 민주주의, 진짜 촛불정권과 가짜 촛불정권을 가르는 시금석이라는 선언이었다.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은 가슴이 타는지 목 메인 음성을 혼신을 다해 토해내며 강조했다.

 

“양심수 문제는 양심수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문명사회라면 단 한 사람의 양심수도 있어선 안 된다.며 대만이 1987년 국가보안법을 폐지했을 때 중국의 공산당을 지지하고 중국의 통일을 주장하다 구속되어 형을 살던 단 한 사람의 양심수가 마지막으로 석방되었다.”

 

단 한 사람의 양심수라도 옥에 갇혀 있는 한,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결코 민주주의 인권국이라 말할 수 없다는 일갈이었다.

 

장장 수십년, 이 땅의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 조국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온 권오헌 명예회장은 사실 지금 건강이 위중한 상태다.

권오헌 회장은 발언을 마치며 함께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르자고 제안하였고 2,000여 참가자들은 뜨거운 목소리로 노래를 함께 부르며 권오헌 명예회장의 뜻을 비상한 각오로 받아 안고 단 한 명의 양심수마저 모두 석방시키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 승리 확신이 어린 힘찬 노래 소리는 뜨거운 여름밤 광화문 네거리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 <박근혜가 가두었던 그들이 돌아 온다-양심수석방문화제>     © 양심수후원회

 

 

*참고자료

 

[양심수석방추진위원회]

 

제안자

권영길(민주노총 지도위원) 권오헌(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김상근(경기도 교육연구원 이사장) 김중배(전 문화방송 사장) 도 법(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문경식(한국진보연대상임공동대표)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소장) 박석운(한국진보연대상임공동대표) 박순경( 615공동실천 남측위원회 전 상임 고문) 백기완( 통일문제 연구소 소장) 법 안(조계종 전 중앙총회 부회장) 이해동(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 위원장) 이창복(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이정이(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부산본부 상임대표) 정연순(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정진우(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센터소장) 조영건(구속노동자 후원회장) 조순덕(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의장) 지 선(조계종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 청 화(조계종 전 교육위원장) 최병모(전 민변 회장) 한충목(한국진보연대상임공동대표) 함세웅(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이사장)

 

공동추진위원장

함세웅(안중근기념사업회 이사장),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오종렬(5.18민족통일학교이사장), 권오헌(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조순덕(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의장), 조영건(구속노동자 후원회 회장), 이창복(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상임대표의장), 김상근(한국기독교 교회 협의회 비상시국 대책위원회 위원장), 최병모(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전회장), 이해동(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배은심(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 회장), 정동익(사월혁명회 상임의장), 박순경(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전상임고문), 박중기(추모연대 상임고문), 김정숙(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감사), 문정현(신부), 권영길(민주노총 지도위원), 김중배(전 문화방송 사장), 문규현(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상임대표), 윤한탁(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명예의장), 이정이(615남측위부산본부상임대표), 임기란(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명예회장),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장남수(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 정혜열(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조헌정(전태일재단 이사장), 안학섭(통일광장 회원), 권낙기(통일광장 대표), 한상렬(한국진보연대 상임 고문), 법 안(조계종 전 중앙종회 부회장), 청 화(조계종 전 중앙종회 부회장), 도 법(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지 선(조계종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 시 공(실천불교승가회 상임대표), 효 진(실천불교승가회 집행위원장), 퇴 휴(전 조계종 교육부장), 일 문(실천불교승가회 공동대표), 혜 조(청련사 주지), 재 범(인월사 주지), 정진우(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소장), 김성복(NCCK인권센터 이사), 황필규(NCCK인권센터 서기 이사), 이 적(민통선 평화교회), 박철(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의장), 강은숙(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총무), 유시경(성공회교무원장), 최재철(천주교 수원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한만삼(천주교 수원교구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나승구(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이영선(천주교 광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권오준(천주교 춘천교구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나핵집(한국기독교장로회 열림교회), 남재영(기독교대한감리교 빈들교회), 박승렬(한국기독교장로회 한우리교회), 강해윤(원불교 봉도수위단원), 김선명(원불교 성주성지수호비대위집행위장), 김성근(원불교 상계교당), 오광선(원불교 궁동교당), 정상덕(전 원불교 개벽교무단 회장), 임진택(연출가), 신경림(시인), 윤민석(음악가),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소장), 심재환(통일의 길 공동대표), 김주영(한국노총 위원장), 김동만(한국노총 상임지도위원), 이호윤(전국민주동문회 상임대표), 장 건(한반도 통일을 위한 평화행동 상임대표), 정연순(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한상권(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대표), 황인성(수원 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 김희선(여성독립운동단체기념사업회 회장), 이강실(전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손미희(전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권오희(615남측위여성본부상임대표), 김성은(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이사장), 김영순(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안김정애(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상임대표), 최진미(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김한성(615남측위학술본부장/연세대교수), 장임원(민교협초대의장/중앙대명예교수), 김세균(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민웅(성공회대 교수), 김애영(한신대 교수), 송주명(한신대 교수), 홍성학(교수노동조합위원장/충북과학대교수), 이규재(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의장), 정현찬(한국가톨릭농민회 회장), 문경식(한국진보연대 공동상임대표), 노수희(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부의장), 송무호(공안탄압저지시민사회대책위 대표), 박석운(한국진보연대 공동상임대표), 한충목(한국진보연대 공동상임대표), 강병기(민중의 꿈 상임대표), 김영호(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김순애(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윤기진(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의장), 윤택근(민주노동자 전국회의 의장), 정종성(한국청년연대 상임대표), 김 식(한국청년연대 공동대표) (이상 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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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때문에 묻힐 뻔했던 세계 최초 ‘한국인 위안부’ 영상

박근혜 정부가 외면했던 위안부 할머니, 서울시가 손을 잡아주다
 
임병도 | 2017-07-11 08:39:3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7월 5일 서울시와 서울대인권센터가 공개한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영상 ⓒ서울시-서울대인권센터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알릴 수 있는 영상이 73년 만에 최초로 발굴됐습니다. 지난 7월 5일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는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 있던 한국인 위안부 영상을 찾아내 공개했습니다.

한국인 위안부의 모습이 담긴 영상은 당시 미‧중연합군으로 활동했던 미군 164통신대 사진대 배속 사진병이 1944년 9월 8일 직후 촬영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소장해왔습니다.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서울대 정진성 교수 연구팀, 이하 서울대 연구팀)는 2년여간의 끈질긴 발굴 조사 끝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자료를 찾아내, 73년 만에 세상에 나오게 됐습니다.


‘세계 최초로 공개된 위안부 영상’

 

▲기존에 공개됐던 일본군 위안부 사진과 이번에 공개된 영상을 보면 영상 속 인물들의 얼굴과 옷차림이 동일했다. ⓒ서울시-서울대인권센터

 

그동안 한국인 위안부 관련 증언과 문서, 사진 등이 공개된 적은 있었지만, 실제 촬영된 영상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세계 최초입니다.

영상에는 민가 건물과 중국군,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1944년 9월 7일 미‧중연합군은 일본군이 점령했던 송산을 점령합니다. 이때 일본군 위안부로 있던 24명 중 10명이 생존해, 미‧중연합군의 포로로 잡혔습니다. 영상은 미‧중연합군 점령 다음 날인 9월 8일 촬영된 것입니다.

영상 속 여성과 대화하는 군인은 미‧중연합군 산하 제8군사령부 참모장교 신카이 대위(중국군 장교)로 추정됩니다. 나머지 여성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상 속 여성이 한국군 위안부라고 입증할 수 있는 근거는 2000년 고(故) 박영심 할머니가 자신이라고 밝혔던 사진과 영상 속 인물들의 얼굴과 옷차림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송산에서 쿤밍 포로수용소로 이동해 작성된 포로 심문 보고서를 보면,포로 명단 가운데 고(故) 박영심 할머니의 이름도 명확히 표기돼 있었습니다.

위안부 관련 문서가 대부분 일본 정부, 군의 공문서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굴한 이 영상은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 후 묻힐 뻔했던 영상’

 

▲ 박근혜 정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각종 위안부 관련 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하거나 축소했다.

 

이번에 공개된 영상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참상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증거였지만, 하마터면 공개되지 못하고 묻힐 뻔했습니다.

영상을 발굴한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미국 자료 조사 사업을 위해 여성가족부의 예산을 받아 서울대 인권센터를 지원하기로 했는데 지난해 1월 (여가부 예산지원이) 돌연 취소됐다”라며 “12·28 합의 직후였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2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문미옥 의원도 여가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에 반대한 단체에 대해 국고보조금 지원을 중단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강 교수는 “12·28 합의(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여러 압력이 있어 어려웠는데 서울시에서 지난해부터 후원해 결실을 맺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서울시와 서울대 연구팀은 한국인 위안부 영상의 존재에 대한 단서를 포착하고 2년 전부터 추적했습니다. 연구팀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수백 통의 필름을 일일이 확인해 이번 영상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만약 오랜 시간 발굴하고 추적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외면했던 위안부 할머니, 서울시가 손을 잡아주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기리는 추모공원인 ‘기억의 터’ 제막식. 박원순 서울시장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함께 했다. ⓒ서울시

 

지난 박근혜 정부에서는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각종 예산을 대폭 축소하거나 제외했습니다. 그러자 서울시와 박원순 시장이 나섰습니다.

앞서 말했던 영상도 서울시의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의 하나로 발굴됐습니다. 서울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추모하는 공원인 ‘기억의 터’도 조성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활안정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사업’ 예산 삭감을 하자, 서울시가 하겠다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지난 3월 1일 박원순 서울 시장은 지난해 스웨덴 ‘예테보리 지속가능발전상’을 수상하며 받은 상금 5천만 원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캠페인에 기부했습니다. 박 시장은 1990년대 초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법적 지원 활동에 참여했는데,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에서 한국 측 검사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박원순 시장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위안부’ 연구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원이 갑자기 끊긴 상태에서 정부가 하지 않으면 서울시라도 지원하겠다는 마음으로 서울대 연구팀과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사업을 추진, 오늘과 같은 결실을 얻게 됐다”며 “이러한 불행한 역사도 기록하고 기억해야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 만큼 앞으로도 서울시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과 자원을 집중해 역사를 기억하고 바로 세우는데 앞장서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빼앗긴 나라의 백성으로 고통받았던 국민을 위로하고, 그들의 아픔을 기억하는 일은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비록 지난 정부에서는 하지 못해 서울시가 나섰지만, 이제라도 정부와 서울시가 함께 꼭 이룩해야 할 역사적 소명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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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없는 무죄...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 34년 만에 무죄 확정... 역사에 남을 '고문조작'

17.07.10 22:05l최종 업데이트 17.07.10 22:05l

 

 2017년 6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사진 속 인물들은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
▲  2017년 6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사진 속 인물들은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
ⓒ 진실의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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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

2017년 6월 29일 오전 10시 20분,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의 재심 선고공판이 열리는 서울중앙지방법원 425호 법정. 법정을 가득 메운 가족들은 숨소리조차 죽이며 귀 기울이고 있었다. 법정에 앉아 있어야 할 피고인들 자리에는 아들들이 앉아있었다. 

판사는 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들을 일일이 지적하며, 그것이 과연 공소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지를 살폈다. 34년을 기다려온 순간. 판사의 주문은 짧았다. "피고인은 무죄.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의 요지를 공시한다." 

 

"아버지, 들으셨지요!" 

피고인석 최봉준(최을호씨의 아들)씨가 외쳤다. 그 순간 방청석을 메운 가족들은 박수를 치며 오래 참아왔던 속울음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부둥켜 안으며 "살아만 계셨더라면..." 눈물바람이었다. 

그렇다. 지금 이 법정에 서서 마땅히 법원의 사과를 들어야 할 세 명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최을호씨는 마지막까지 간첩이 아니라고 외쳤지만, 끝내 사형 집행을 당했다. 최낙교씨는 서울지검 정형근 검사의 공소제기 후 구치소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최낙전씨는 9년 감옥살이 끝에 풀려났으나 경찰의 집요한 보안 관찰 감시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피고인 없는 슬픈 재심, 무죄 판결.

그날 법정에서 판사는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국가가 범한 과오. 1982년 8월, 남영동 대공분실 이근안과 수사관들이 고문해서 간첩단으로 조작하고, 서울지검 공안검사 정형근이 적극 동조해서 간첩으로 기소한 사건. 재판 내내 고문을 당해서 허위로 자백했을 뿐, 간첩이 아니라고 호소한 피고인들의 주장을 외면한 채, 이근안의 수사기록과 정형근의 수사 그대로 판결문이 작성된 사건. 이른바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이다. 

그 일은 1982년 8월,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작은 시골 마을, 김제군 진봉면 고사마을에서 벌어졌다. 해마다 이 마을에서는 8.15를 기념해 동네 축구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전날 밤 동네 어른 최을호씨가 낯선 사람들을 따라 갔는데 밤이 되고 다음 날이 돼도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온 마을을 뒤졌다. 진봉지서에 행방불명 신고를 했다. 마을 이장으로 동네의 신임을 받아온 조카 최낙전씨도 숙부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전주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던 최낙전씨의 형 최낙교씨도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그 조카들도 8월 22일 아침을 기해 사라졌다. 몇 달 뒤. 그들은 '간첩죄'로 기소돼 법정에 세워졌다. 

치안본부 대공분실 이근안의 '수사기록'

이들을 납치하듯 끌고 간 이들은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이 속해있던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다. 수사관들은 남영동 분실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된 9월 25일까지 외부와 완전히 차단한 채 고문수사를 자행했다. 

수사관들은 이들의 '약점'을 이용했다. 약점은 1958년에 발생한, 도저히 피해갈 수도, 어찌해볼 수도 없었던 사건이었다. 최낙교씨와 최낙전씨는 형제이고, 최을호씨는 그들의 숙부. 일찍 부친을 여읜 두 형제는 숙부와 함께 큰 집에 모여 살았다. 1958년 4월, 6.25전쟁 당시 헤어졌던 숙부 최규인씨가 김제 고사리 최을호씨를 찾아왔다. 인천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안부를 물었다. 1년이 지나서 다시 찾아온 최규인씨는 최을호씨에게 좋은 일자리를 봐뒀다며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최규인씨의 말과 달리 북한이었다. 돌아올 방법도 없어서 20일간 강제로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귀향했다. 최을호씨는 "북한의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했고, 시간이 흘렀다. 7년이 지난 1966년 7월, 최을호씨 가족은 이사를 하고 최낙전씨가 살게 된 그 집에 무장한 남성 2인이 찾아왔다. 그들은 최을호씨를 찾았고, 최을호씨를 겁박해 강제로 이북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20일 이후 다시 고향집으로 데려다 줬다. 최을호씨는 이번에도 두려운 나머지 신고하지 못했고, 이후 북한에서 더 이상 연락이 없자 그렇게 무관하게 살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농사일에 전념해왔다. 

최을호씨가 북한과 접촉한 것은 1958년부터 1966년까지 발생한 일이었다. 1982년 8월 이근안이 이들을 체포한 시점에는 이미 공소시효도 지나간 일이 됐다. 하지만 이근안과 남영동 수사관들은 원하는 자백이 나올 때까지 이들을 고문했다. 이들이 체포되기 전까지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자백. 

이근안과 남영동 수사관들이 작성한 수사기록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들이 눈에 띈다. 구속영장이 발부된 날은 1982년 9월 25일이고, 최을호씨의 1회 진술서 작성일은 9월 22일이다. 진술서는 모두 52쪽인데, 1958년 최규인씨의 첫 남파 때부터 1977년 8월까지의 범죄사실을 자백하고 있다. 128장에 달하는 1회 피신 작성일은 9월 23일, 110장에 달하는 2회 피신조서 작성일도 9월 23일이다. 

묻고 답하는 방식의 신문조서가 23일 하루 동안 무려 238장이나 작성된 것이다. 최낙교·최낙전씨 역시 1회 진술서, 피신조서에서 범죄사실을 전면 자백하고 있으며, 범죄 장소 약도까지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수사기록 어디에도 혐의를 부인하는 조서는 없다. 간첩활동을 했다는 직접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단 한 번도 부인하지 않은 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백하고 있는 것이다. 20년 이전에 벌어진 일들까지 상세하게 진술해 200장이 넘는 조서를 하루에 모두 작성했다는 것.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자발적으로 작성한 진술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최을호씨는 43일간, 최낙전씨와 최낙교씨는 35일간 불법감금된 상태에서 고문 수사를 당한 결과라는 뜻이다. 

"심문 받을 때의 그 악몽을 되살리고 싶지 않은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이며 몸서리쳐지는 것은 배지도 않은 애를 내놓으라 했을 때 저는 이미 제 자신을 포기했던 것이며 뱃가죽에는 지금 그 흔적이 역연하게 남아있습니다." - (최낙전씨 상고이유서)

"지하실로 끌려 내려간 나는 그 침대에 눕혀졌습니다. 누워있는 상태에서 커다란 혁대 같은 것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묶었습니다. 그들은 저의 엄지 발가락에 전기선을 묶었고, 철제 침대 옆에 있는 스위치로 전기를 넣었습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고, 소리를 질러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입안에 커다란 주전자로 물을 쏟아붓는 것이었습니다. 배가 남산처럼 불러오니까, 거구의 수사관이 내 몸 위에 올라타더니 배를 팍 눌러댔습니다." - (참고인 최연석 진술서)

'거구의 수사관'은 이근안이었다. 이근안과 수사관들이 이 가족을 영장도 없이 40여 일 넘게 장기 감금하고, 고문수사를 했던 것은 하나의 자백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최규인으로부터 포섭돼 체포될 때까지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무인포스트를 활용하여 무전을 보내는 등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 결과는? 성공이었다. 수사관들은 가족관계를 이용해서 더욱 압박했다. 딸들을 데려와서 조사를 하고, 툭하면 가족을 다 잡아들이겠다고 협박했다. 

"제가 제일 겁이 났던 일은 옆방에서 들리는 위협과 신음소리 때문이었습니다. 큰 어머니(서순녀)가 바로 옆방에 있었습니다. 수사관들이 막 소리 지르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너 하나쯤 죽어 나가도 우리는 아무 상관없다'는 소리가 내 방까지 크게 들렸습니다." - (최을호 딸 최명자 진술서) 

고문으로 신음하는 소리를 서로 듣게 하고, 네가 인정하지 않으면 조카가 죽는다고 협박하면서 그들은 원하는 각본을 만들어나갔다. 조카가 고문당하며 지르는 소리는 숙부에게 고문 그 자체였다. 아버지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딸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원하는 대로 자백을 '해줘야 했다.' 수사관들의 고문과 협박, 그것을 견디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하는 진술에 이르러야 고문은 잠시 멈췄다. 글씨를 못 썼던 이한테는 보고 베껴 쓰라고 했다. 그림 그리듯이 진술서를 작성했다. 그렇게 해서 간첩단 사건은 만들어졌다. 

모두 다 아는 국가기밀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수집해 누설한 간첩. 국가기밀이라고 하면 대단한 것 같아도 그것의 실체를 알고 나면 황당하다. 이들을 '간첩'으로 만든 국가기밀은 최을호씨가 살던 고사마을의 심포, 거전, 망해초소 현황, 최낙교씨가 근무하는 초등학교 근처 황산 미군 미사일 기지 그리고 최낙전씨가 예비군훈련 받으러 갔던 고사초소 대간첩 비상훈련과 초소 현황이다. 

굳이 탐지할 의도가 없이도 오며 가며 볼 수 있는 관공서들이다. 말은 거창하지만 실제 사실을 알고 나면 헛웃음이 나올 내용들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공지의 사실도 국가기밀"이라는, 성립하기 어려운 형용모순의 대법원 판례 때문이었다. 
 

 수사기록 628쪽. 최을호씨, 최낙교씨가 탐지했다는 해안초소.
▲  수사기록 628쪽. 최을호씨, 최낙교씨가 탐지했다는 해안초소.
ⓒ 진실의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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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밀이 된 초소 현황을 보면 "초소에 경찰관 또는 전투경찰 수명이 배치되어 있고 선박과 통행인을 감시한다"는 요지다. 해안에 초소를 설치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해안을 경비하고 통행 선박과 사람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자명한 이야기가 국가기밀로 둔갑했다. 고사초소와 망해초소는 최을호와 최낙전 집 뒤에 있는 산 넘어 있고 심포초소와 거전초소도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동네 아이들은 초소에서 놀았고, 어른들은 조개 잡으러 나가는 길에 반드시 그곳을 들르게 돼 있어 자연스럽게 인지하게 되는 장소였다. 하지만 이들의 범죄사실에는 수도 없이 초소 이야기가 나온다. 20년 넘도록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이들이, 20년 동안 해안초소 현황만 반복적으로 탐지했다는 설정 자체가 어설프다. 

공작금 "한화 1000원권 500매" 

간첩사건에서 공작금은 간첩활동을 입증하는 주요 증거가 된다.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에서도 공작금이 등장한다. 최을호씨는 남영동에서 작성한 진술서에서 1966년 입북해 공작금으로 "한화 50만 원, 즉 1000원권으로 500매"를 받았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그 돈 가운데 일부를 최낙교에게 공작금으로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최낙교씨의 진술서. "일금 20만 원인데 한국은행 1000원권 200매 1다발"의 공작금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  최낙교씨의 진술서. "일금 20만 원인데 한국은행 1000원권 200매 1다발"의 공작금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 진실의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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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교씨 역시 최을호씨한테 "일금 20만 원인데 한국은행 1000원권 200매 1다발"의 공작금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한국은행이 1000원권 지폐를 최초 발행한 때는 1975년 8월 14일이다(한국은행 누리집, 화폐연대표). 2차 입북에서 돌아온 최을호씨가 최낙교씨에게 '공작금'을 줬다는 1966년 당시엔 한국은행 1000원권 화폐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최을호씨와 최낙교씨는 자신에게 불리한 허위의 사실을 적극적으로,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근안이 이 사건을 수사한 1982년에는 1000원권 지폐가 있었다. 이근안은 화폐가 어떻게 변천했는지를 자세히 알지 못했고, 오직 수사 당시 존재했던 화폐만 알고 있었기에 착오를 일으켜 가짜 증거를 만든 것이었다. 
 

 한국은행 누리집에 나와 있는 화폐연대표. 천원권은 1975년 8월에 발행됐다.
▲  한국은행 누리집에 나와 있는 화폐연대표. 천원권은 1975년 8월에 발행됐다.
ⓒ 한국은행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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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이 '발견'한 최낙교의 무인포스트

'무인포스트'도 공작금처럼 간첩사건에서 공식처럼 등장한다. '북한에서 간첩에게 숫자로 된 지령방송을 내보내면 간첩은 암호문을 가지고 난수를 해독한다. 그리고 그 지시사항에 따른 내용을 난수로 다시 만들어 미리 약정된 무인포스트에 파 묻는다.' 이처럼 무인포스트는 간첩임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열쇠라 할 수 있다. 김제 가족 간첩단 사건에서도 무인포스트가 당연히 등장했다. 

 : "그러면 피의자가 3차 전문지령을 받고 한 일은 무엇인가요."
답(최낙교) : "67.8. 일자 불상... 3차 전문지령에 따라 67.8. 하순 일자 불상 20:30경 집에서 '동조자 1명 포섭 중임'이란 내용의 보고서를 보고용(발신용) 난수로 변신암호로 작성(약 15조로 기억)하여 비닐로 싸서 준비한 페니실린병에 삽입 준비하여 약정 장소인 동리 뒷산 국사봉 정상에서 남쪽 약 10지점의 최우호 묘비석 뒤 중앙에서 약 10cm 떨어진 지점에 약 10cm 깊이에 묻고 그 위에 표지석을 올려놓아 북송케 한 후 돌아왔으며..."
문 : "그러면 피의자는 무인포스트를 통해 보고한 것이 북괴에 전달되었는지 확인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 다음 4차 전문지령 시 확인되었습니다." 
- 수사기록 1016~1018, 최낙교 피의자신문조서

이 조서만 살펴보면 최낙교씨는 명백한 간첩이다. 이근안이 작성한 실황조사서는 무인포스트로 삼은 '최우호 묘비석'의 위치와 사진까지 첨부돼 있었고, 직접 묘비의 크기를 재는 사진까지 있었다. 
 

 최낙교 무인포스트 실황조사서, 이근안이 실제 답사하여 조사하는 광경.
▲  최낙교 무인포스트 실황조사서, 이근안이 실제 답사하여 조사하는 광경.
ⓒ 진실의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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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보안이 곧 생명인 간첩들이 바로 집 뒤에 있는 산에 무인포스트를 둔다? 게다가 실황조사서 사진을 보니 비석이 아주 깨끗했다. 1959년 5월 뒷산을 답사해서 묘비석을 무인포스트로 선정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을 보면, 1982년 이근안이 사진을 찍었던 묘비는 최소한 23년은 됐을 것이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기에도 이끼 하나 없이 깨끗했다. 최우호씨 묘비를 찾아서 비석을 살펴봤다. 비석 맨 앞 부분에 "최우호가 이미 죽은 지 27년이 지났다"고 돼 있었고, 이 비석이 세워진 경위와 과정이 적혀 있었다. 최씨 족보를 찾아서 최우호씨 사망 년도를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묘비석 맨 마지막 줄에 적혀있는 글귀. 묘비를 세운 시기가 적혀있어야 할 부분에 '强圄大荒落小春下浣'(강어대황락소춘하완)이라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고대 중국에서 쓰던 고갑자(古甲子)였다.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가 고갑자와 대응관계를 이룬다. '강어'(强圄)는 음양오행을 뜻하는 천간(天干) 가운데 '정'(丁)을 뜻한다. '대황락'(大荒落)은 12지지(地支) 가운데 '사'(巳)를 뜻한다. 따라서 '강어대황락'(强圄大荒落)이란 '정사(丁巳)년이 되는 것이다. 1977년이다. '소춘'(小春)은 음력 10월을, '하완'(下浣)은 21일부터 말일까지를 뜻한다. 

결국 '强圄大荒落小春下浣'은 '1977년 음력 10월 하순'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낙교씨가 무인포스트로 정했다는 1959년은 물론이고 암호문을 매몰했다는 1967년에도 이 비석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근안이 사건을 수사했던 1982년 사건 당시 이 비석이 있었다는 점이 열쇠다. 이 무인포스트는 이근안이 '발견'해서 간첩 활동 증거로 사용한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근안은 고갑자를 몰랐고, 그래서 우리는 이근안이 이 사건을 조작했음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최우호씨의 묘비. 사진 왼쪽 상단에 '强圄大荒落小春下浣'(강어대황락소춘하완)이라고 적혀 있다. 이를 종합하면 최우호씨가 죽은 시점은 1977년 10월 21일부터 말일 사이다.
▲  최우호씨의 묘비. 사진 왼쪽 상단에 '强圄大荒落小春下浣'(강어대황락소춘하완)이라고 적혀 있다. 이를 종합하면 최우호씨가 죽은 시점은 1977년 10월 21일부터 말일 사이다.
ⓒ 진실의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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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길어졌다. 이근안의 수사기록은 피해자들이 흘린 피눈물의 흔적이다. 피해자들을 사형으로, 자살로 내몰았던 기록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수사기록은 진실의 편린들을 꼼꼼히 담아내고 있었다. 

수사기록을 하나씩 파헤치다 보면 의혹은 더욱 쌓여간다. 마치 허위로 만들어진 산더미 같다. 이근안과 수사관들은 40여 일이 넘도록 고문으로 짜내고 맞춰나갔다. "24년 동안 암약해온" 간첩으로 만들었으니 제 아무리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이근안이라도 거짓의 흔적만큼은 다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근안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나 그 수사기록이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지고 사실관계를 따져 묻게 될 것을. 
 

 공안검사 정형근(왼쪽)과 '고문기술자' 이근안(오른쪽).
▲  공안검사 정형근(왼쪽)과 '고문기술자' 이근안(오른쪽).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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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지령을 받아 무인포스트까지 설정하며 북한과 암호문을 주고 받았다고 이근안에게 '자백'한 최낙교씨. 그는 검찰로 송치된 이후 정형근 검사의 조사를 받았다. 이근안과 정형근. 2인의 이름은 공안수사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들 아니겠는가. 정형근 검사는 이들이 40여 일 넘도록 남영동에서 불법수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최낙교씨, 최낙전씨를 몰아붙였고, 심지어 남영동 수사관을 대질시키며 이근안의 수사를 동조했고 완성시켰다. 

"검사실에 들어갔더니, 최낙전 조카가 와 있었습니다. (중략) 낙전이가 계속 부인을 하니까 정형근 검사는 윽박지르면서 기록을 던지고 나가버렸습니다. 조금 후 낙교 조카를 불렀습니다. 낙교 역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중략) 검사실에 있는 어떤 사람이 우산대로 낙교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눈도 찌를 것처럼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저를 불렀습니다. 나도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전화기를 들고 '들어오세요' 그러더군요. 바로 나를 고문한 수사관 2명이 들어왔습니다. 나한테 같이 가자면서 진짜로 데리고 가려고 양팔을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 (참고인 최연석씨 진술서)

최낙교씨는 공소제기가 된 이후 수감 중이던 서대문구치소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정형근 검사는 자살이라고 결론지었으나 가족들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최낙교씨의 죽음은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남은 최을호씨와 최낙전씨는 피고인이 돼 법정에 서게됐다. 그리고 탄원서를 수 없이 법원에 제출했다. 강제로 이끌려 북한에 다녀온 뒤 신고하지 못한 잘못은 있겠지만, 간첩은 아니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외면했다. 이근안과 남영동 수사관이 만든 의견서 그대로 공소장이 됐는데, 판결문은 공소장과 겉표지만 달랐다. 1심에 이어 대법원까지 가면서 탄원서를 쓰고 또 썼다. 그러나 최을호 사형, 최낙전 15년형의 1심 판결은 대법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이근안과 남영동의 불법감금, 고문수사는 간첩을 조작하는 데 필요조건이었다. 간첩 조작이 완성된 데는 검찰과 법원의 묵인 혹은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던 것이다.  

1985년 5월 27일, 최을호씨는 사형을 집행당했다. 그날 사형장에 입회했던 문장식 목사는 그가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아무런 간첩활동도 안했는데 간첩 누명 쓰고 공산주의자로 낙인 받아 죽는 것이 억울합니다. 나는 간첩이 아닙니다." <문장식 목사의 사형장 일기 아! 죽었구나 아! 살았구나>에서 문 목사는 "애절하게 울부짖는 그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라고 그날을 기억했다. 

15년형을 선고받은 최낙전씨는 9년 감옥살이 끝에 석방됐다. 그러나 경찰의 보안관찰법에 의한 집요한 감시가 그를 옥죄었다. 1991년 9월 30일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석방된 지 4개월 만이었다. 

이들의 죽음은 당시 경찰과 검찰이 어떻게 서로 동조하고 묵인하면서 평범한 일가족을 간첩으로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판사와 검사 등 법률 기술자들이 법에 무지한 평범한 시민들을 어떻게 사지로 떠밀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공모로 인해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아버지였고, 남편이었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어린 자녀들과 부인들은 '간첩'이라는 차가운 외면과 따돌림 속에서 피눈물로 살아가야 했다. 

34년 만에 무죄로 밝혀지고, 법원은 "위법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헌법에 보장된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채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행위를 한 범법자로 낙인찍힌" 피고인들과 최낙교씨에게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검찰은 항소를 포기했다. 무죄가 확정됐다. 그러면 다 끝난 것일까. '무죄'라는 추상적인 꽃다발을 부여받은 억울한 죽음들은 이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인가. 고문조작에 개입한 수사관, 검사 등 그 어느 한 사람 처벌받지 않았다. 공소시효의 방패 뒤에 숨거나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엉뚱하게 간첩으로 엮은 국가보안법은 한 글자도 고쳐지지 않았고, 대공 수사실은 그대로인 채 대상을 바꾼 수사를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보안관찰은 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은 가능한 것인가. 최을호, 최낙교, 최낙전... 그들의 슬픈 죽음은 지금 우리들에게 재발방지의 보증이라는 근본적인 숙제를 던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송소연님은 (재) 진실의힘 상임이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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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 조미협상은 없고 굴복회담만 있다

[개벽예감 256]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 조미협상은 없고 굴복회담만 있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7/07/10 [12:54]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언젠가는 오리라고 예상한 그 날은 7월 4일

2. 오전 9시 정각은 1초도 어길 수 없는 발사시각

3. 세계 어느 지역도 타격할 수 있는 극강의 전략무기

4. 사거리연장비결은 고효율 로켓추진제와 고출력 로켓엔진

5. 조종전투부에 들어간 모의열핵탄두와 스크램젯 

6. 마지막 남은 절차는 조미협상이 아니라 굴복회담

 

▲ <사진 1>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화성-13형 시험발사 하루 전인 2017년 7월 3일 조선국방과학원이 올린 보고서 겉표지에 최종결재친필을 남겼다. "당중앙은 대륙간탄토로케트 시험발사를 승인한다. 7월 4일 오전 9시에 발사할 것! 김정은 2017. 7. 3"이라고 쓰여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7년 7월 4일을 화성-14형 시험발사일로 정해준 것이다. 거기에는 깊은 사연이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 언젠가는 오리라고 예상한 그 날은 7월 4일

 

올해가 가기 전에 언젠가는 오리라고 예상한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2017년 7월 4일 화요일, 평양시간으로 오전 9시 조선이 마침내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단행하였다. 8축16륜 발사대차에 실려 사격위치로 이동한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엄청난 굉음과 불줄기와 후폭풍을 내뿜으며 창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조선이 사상 처음 진행한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는 대성공이었다. 

 

화성-14형 시험발사소식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를 뒤흔들던 날, 조선을 반대하는 제국주의진영과 자본주의국가들은 핵공포에 사로잡혀 전율하였고, 조선을 지지하는 반제자주진영과 사회주의국가들은 탄성을 올리며 환호하였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choronos)을 깨뜨리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kairos)이 오면, 사회주의와 그자본주의, 제국주의와 반제자주로 대립하는 적대적 모순관계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조선이 화성-14형 시험발사로 자기의 핵무장을 완성하였음을 입증한 그 날, 이 행성에서 바로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화성-14형은 2017년 7월 4일에 발사되었다.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화성-14형 시험발사날짜를 직접 정해주었는데, 시험발사날짜가 7월 4일로 지정된 데는 사연이 있다. 

 

미국인들에게 7월 4일은 1776년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신대륙에서 벌어진 혁명전쟁에서 영국군을 이긴 독립군이 아메리카합중국의 창건을 선포한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이다. 지난 7월 4일은 아메리카합중국 독립 24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메리카합중국이 독립 214주년을 맞은 바로 그 날, 조선과 미국의 군사전략균형이 와장창 깨져나가면서 조미핵대결의 막판승부가 결정되었다. 독립 241주년을 맞은 날부터 미국 전역은 조선의 핵공격권 안에 놓였고, 그로써 건국 이래 241년 만에 처음으로 숨통이 조여드는 핵공포를 느끼며 전율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미핵대결이 지속되어온 지난 24년 동안 미국은 조선의 핵무장을 가로막아보려고 정치력, 군사력, 외교력, 경제력, 정보력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니, 미국 역사에서 2017년 7월 4일은 그런 참담한 실패의 날로 기록되었다.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소식을 전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화성-14형 시험발사는 “참으로 절묘한 시점에 거만한 미국놈들의 면상을 후려”친 것이다.   

 

그와 달리,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7월 4일은 분단역사에서 처음으로 남과 북이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을 담은 7.4공동성명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한 통일열망의 날이다. 지난 7월 4일은 7.4공동성명 발표 45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었다. 조선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4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이끌어온 조선의 핵무력건설을 7.4공동성명에 천명된 조국통일위업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4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이끌어온 조선의 핵무력건설은,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서술방식을 빌리면, “핵무력을 완성하여 남조선 강점 미제침략군을 철수시키고 자주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용약 일떠선 조선이 산악을 뚫고, 격랑을 헤쳐 넘으며 투쟁해온 험로역경”이었다. 장장 40년에 걸친 험로역경을 뚫고 핵무력 건설을 영도해온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핵무장 완성의 날을 보지 못하고 2011년 12월 17일 지병으로 서거하였지만, 그 유업을 계승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 후 5년 6개월 동안 ‘국방과학전사들’을 이끌고 그야말로 불철주야 긴장한 전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조선의 핵무장을 완성하여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였고, 그로써 조미핵대결의 막판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었다. 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업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업인 핵무장 완성을 7.4공동성명 발표 45주년이 되는 날에 실현한 것이다. 조선에서 살지 않는 우리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조선에게 지난 7월 4일은 그런 거대한 의미와 깊은 사연과 뜨거운 열망이 파도처럼 한꺼번에 밀려든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 <사진 2> 이 사진은 2017년 7월 4일 오전 9시 정각 화성-14형이 어느 이름 모를 계곡에서 발사되어 창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장면이다. 발사순간, 거대한 굉음과 불줄기와 후폭풍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사격위치는 평안북도 구성에 있는 방현비행기공장 근처의 계곡이다. 사격위치를 개활지가 아닌 계곡에 정한 까닭은, 주한미국군과 한국군의 감시레이더가 계곡 안에서 움직이는 정황을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 오전 9시 정각은 1초도 어길 수 없는 발사시각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소식을 전한 조선국방과학원 보도에 따르면, 화성-14형은 “우리나라 서북부지대에서” 발사되었다고 한다. 서북부지대는 어디인가? 미국의 온라인 매체 <38노스(North)> 2017년 7월 6일 분석기사에 따르면, 화성-14형의 사격위치는 평안북도 구성에 있는 방현비행기공장 근처의 어느 이름 모를 계곡이라고 한다. <사진 2>는 화성-14형이 그 계곡에서 발사되는 장면이다. 사격위치를 개활지가 아닌 계곡에 정한 까닭은, 주한미국군과 한국군의 감시레이더가 계곡 아래서 움직이는 정황을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성-14형은 2017년 7월 4일 오전 9시 정각에 발사되었다. 평양시간으로 오전 9시는 서울시간으로 오전 9시 30분이다. 2017년 7월 4일 오전 9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정해준 발사시각이므로, 조선의 로켓공학기술자들은 1초도 틀리지 않고 9시 정각에 발사하였다. 그런데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는 조선이 화성-14형을 오전 9시 40분경(평양시간으로는 오전 9시 10분경) 발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발사시각으로부터 무려 10분이나 지난 뒤에서야 발사사실을 간신히 포착하였음을 말해준다. 초음속 타격수단들이 정신을 차릴 사이 없이 마구 날아다니는 초고속화된 현대전에서 10분 동안이나 적정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있었다면, 그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전시에 한국군이 조선인민군의 미사일공격을 ‘절대로’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소식을 전한 조선국방과학원 보도에 따르면, 화성-14형은 “예정된 비행궤도를 따라 39분 간 비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 태평양사령부는 조선에서 발사된 화성-14형을 37분 동안 추적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발사시각으로부터 2분이 지난 뒤에서야 발사사실을 포착하였음을 말해준다. 2017년 7월 5일 한국 국방부는 국회 국방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화성-14형이 “상승단계에서 최대속도 마하 21 이상으로 비행한 것을 제시했다”고 한다. 화성-14형이 초기상승단계에서 마하 10으로 비행하였다고 낮춰 보더라도, 미국은 화성-14형이 발사된 때로부터 2분 뒤에, 그러니까 화성-14형이 대기권을 훌쩍 벗어나 400km 고도에 이르렀을 때 뒤늦게 발사사실을 포착한 것이다. 전시에 주한미국군기지에 배치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조선인민군의 미사일공격을 ‘절대로’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 <사진 3> 이 사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곁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주황색 전신방호복을 입은 기술자들이 화성-14형 2단 연소제통에 액체연소제를 주입하는 장면이다. 천장에 달린 실내조명등이 환한 빛을 뿌리고, 동녘하늘을 어슴푸레 물들인 새벽여명이 유리창마다 비껴있는 것이 보인다. 이런 정황은 탄체조립, 전투부조립, 연소제주입, 산화제주입 등 일련의 준비공정이 이른 새벽부터 미사일조립시설 안에서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일반적으로,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 내부의 장치들은 전투부, 2단 산화제통, 2단 연소제통, 2단 로켓엔진, 1단 연소제통, 1단 산화제통, 1단 로켓엔진 순으로 배열된다. <사진 3>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현장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주황색 전신방호복을 입은 기술자들이 화성-14형 2단 연소제통에 액체연소제를 주입하는 장면이다. 그 사진을 보면, 천장에 달린 실내조명등이 환한 빛을 뿌리고, 동녘하늘을 어슴푸레 물들인 새벽여명이 유리창마다 비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황은 탄체조립, 전투부조립, 연소제주입, 산화제주입 등 일련의 준비공정이 이른 새벽부터 미사일조립시설 안에서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 <사진 4> 이 사진은 화성-14형을 지상에 수직으로 세워놓은 뒤에 발사대차를 분리하여 다른 곳으로 보내는 장면이다. 2017년 5월 14일에 시험발사된 화성-12형처럼, 화성-14형의 사격법은 차탄분리식이었다.이 사진에 나타난, 탄체가 수직으로 세워진 바닥은 원래 밭으로 보이는데, 며칠 전에 콘크리트로 다져졌다. 지반이 무른 밭에 탄체를 세워놓으면 탄체무게를 이기지 못해 지반이 기울어질 수 있으므로 콘크리트로 다져놓은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선의 미사일기술자들은 화성-14형 발사준비작업을 실내에서 끝낸 뒤에 8축16륜 발사대차에 싣고 사격위치로 이동한 다음, <사진 4>에서 보는 것처럼 화성-14형 탄체를 지상에 수직으로 세워놓고 발사대차를 분리하여 다른 곳으로 보낸 직후에 발사하였다. 2017년 5월 14일에 시험발사된 화성-12형처럼, 화성-14형의 사격법은 차탄분리식(車彈分離式)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미사일조립시설을 출발한 발사대차가 사격위치까지 이동하고, 사격위치에서 탄체를 수직으로 세우고 발사대차를 분리시키면, 그것으로 외부에 노출되는 발사준비작업이 모두 끝난다는 점이다. 미사일조립시설을 출발한 발사대차가 사격위치까지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0분으로 추정되고, 사격위치에서 탄체를 수직으로 세우고 발사대차를 분리시키는 시간은 길어야 약 5분이다. 다시 말해서, 화성-14형의 발사징후가 노출되는 시간은 약 15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속도를 전쟁승패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여겨 ‘속도전’이라는 전쟁전략을 매우 중시하는 조선인민군이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준비에 30~40분씩이나 소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화성-14형 시험발사는 미국 정찰위성이 평소에 집중적으로 감시하는 방현비행기공장 일대에서 진행되어 미국이 발사 징후를 포착할 수 있었지만, 전시에는 미국 정찰위성 감시망 밖에 있는 지하기지 안에서 발사준비작업이 진행될 것이므로 미국 정찰위성이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징후를 약 15분 안에 포착해야 하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화성-14형은 교전상대의 감시망에 발사징후를 거의 노출하지 않고 기습적인 선제타격을 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임을 알 수 있다. 백악관이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소식을 듣고 핵공포를 느낀 까닭이 거기에 있다.   

  

▲ <사진 5> 이 사진은 화성-14형이 발사 직후 상승비행을 시작하는 장면이다. 조선국방과학원은 화성-14형의 사거리를 밝히지 않았지만, 정점고도를 알면 사거리를 추산할 수 있다. 탄도미사일 사거리는 정점고도의 4배에 이른다는 것이 공인된 추산법이므로, 그런 추산법에 따르면, 정점고도가 2,802km인 화성-14형의 사거리를 약 11,200km로 추산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국방과학원이 화성-14형으로 미국의 심장부를 타격할 수 있다고 밝혔으니, 화성-14형의 사거리는 12,000km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워싱턴을 핵공격권 안에 넣으려는 핵무장 완성의 길을 걸어오며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든 조선은 화성-14형을 사거리가 12,000km인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만들었던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3. 세계 어느 지역도 타격할 수 있는 극강의 전략무기

 

미국, 러시아, 중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고각이 아닌 정상각으로 발사하였을 때 정점고도는 대체로 1,200km에 이르고, 비행시간은 30분 정도다. 이것이 기존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일반적인 성능지표다. 지난 5월 14일에 시험발사된, 미국 본토 서북단을 타격할 수 있는 화성-12형의 비행시간도 30분 11초였다. 

 

그런데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소식을 전한 조선국방과학원 보도에 따르면, 화성-14형은 “정점고도 2,802km까지 상승하여 933km의 거리를 비행하였다”고 한다. 화성-14형의 정점고도가 다른 나라 대륙간탄도미사일 정점고도보다 2배 이상 높아진 것은 화성-14형을 최대고각으로 발사하였기 때문인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화성-14형의 비행시간이 다른 나라 대륙간탄도미사일 비행시간보다 9분 정도 더 길다는 사실이다. 극초음속으로 비행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이 9분 동안 비행하는 거리는 엄청나게 길다. 이를테면, 화성-14형이 마하 11의 속도로 9분 동안 비행하는 경우, 그 거리는 2,000km나 된다. 

 

조선국방과학원은 화성-14형의 사거리를 밝히지 않았지만, 정점고도를 알면 사거리를 추산할 수 있다. 탄도미사일 사거리는 정점고도의 4배에 이른다는 것이 미사일전문가들이 공인하는 추산법이므로, 그런 추산법에 따르면, 정점고도가 2,802km인 화성-14형의 사거리는 약 11,200km로 추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진 5>

 

그런데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화성-14형은 “미국의 심장부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로케트”라는 것이다. 강원도 원산에서 미국 워싱턴까지 직선거리는 11,871km이므로, 화성-14형으로 미국의 심장부를 타격할 수 있다는 말은 그 사거리가 12,000km에 이른다는 뜻이다. 워싱턴을 핵공격권 안에 넣기 위한 핵무장 완성의 길을 걸어오며 그 목표에 따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든 조선은 화성-14형을 사거리가 12,000km인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만든 것이 분명하다. 조선으로서는 사거리가 12,000km 미만인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만들 필요가 없다. 만일 조선에서 유럽쪽으로 화성-14형을 쏘면 광활한 아시아대륙과 유럽대륙을 넘고 넘어 런던에 도달할 수 있고, 미국쪽으로 화성-14형을 쏘면 광대무변한 태평양과 북미대륙을 넘어 워싱턴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국방과학원은 보도기사에서 화성-14형을 “세계 그 어느 지역도 타격할 수 있는 최강의 대륙간탄도로케트”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미국은 화성-14형을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면서 “대륙간 사거리를 가진 탄도미사일”이라는 괴상망측한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부질없는 요설에 지나지 않는다.  

 

 

4. 사거리연장비결은 고효율 로켓추진제와 고출력 로켓엔진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구조적 특징은 시험발사장면에서 누구나 육안으로 쉽게 알 수 있다. 그 특징을 요약하면, 8축16륜 발사대차에 탑재하는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는 점이다. 이런 구조적 특징은 화성-14형의 우수성을 말해주는 것인데, 이에 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발사방식에 따라 고정발사식과 이동발사식으로 분류되는데, 탄체가 너무 길고 무거워 발사대차나 핵열차에 싣지 못하는 초대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수직갱 고정발사대에 장착된다. 그러므로 발사대차나 핵열차에 실리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수직갱 고정발사대에 장착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에 비해 당연히 탄체가 작고 가벼운 법이다. 탄체가 작고 가벼운 이동발사식 대륙간탄도미사일은 탄체가 크고 무거운 고정발사식 대륙간탄도미사일에 비해 기술공학적으로 더 진보된 전략무기다. 

 

둘째, 선진적인 로켓공학기술을 가졌다는 러시아와 중국은 8축16륜 발사대차에 싣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3단형으로 설계하였지만, 조선은 8축16륜 발사대차에 싣는 화성-14형을 2단형으로 설계하였다. 이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고 하면 응당 3단형을 생각해오던 기존관념과 도식화된 설계방식을 탈피한 독자적인 설계다.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소식을 전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화성-14형은 “그 누구의 지원이나 기술이전에 의한 모방이 아니라 철두철미 우리의 과학기술에 기초한 개발창조의 길에서 새롭게 탄생한 대륙간탄도로케트”라는 것이다.

 

조선이 2012년 4월 15일 태양절 100주년 열병식에서 처음 공개한 화성-13 대륙간탄도미사일은 기존 대륙간탄도미사일 설계법에 따라 만들어진 3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조선의 로켓공학기술자들이 기존 3단형 설계도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어내기까지 2년이 걸렸다.   

 

독자적인 2단형 설계는 조선의 로켓공학기술자들이 화성-14형을 러시아나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들보다 탄체길이를 짧게, 탄체무게를 가볍게 설계하였으면서도 사거리를 12,000km로 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작고 가볍게 설계했으면서도, 사거리를 늘인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 비결은 적은 분량에서 강한 분사력이 나오는 고효율 로켓추진제와 작고 가벼우나 강한 추력을 내는 고출력 로켓엔진을 만드는 최첨단 로켓공학기술에 있었다. 조선이 개발한 고효율 로켓추진제와 고출력 로켓엔진에 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사진 6> 이 사진은 화성-14형이 상승비행하는 장면이다. 분사구들이 내뿜는 분사화염이 투명하게 보인다. 이것은 화성-14형이 붉은색 분사화염을 내뿜는 적연질산을 산화제로 쓰지 않고, 사산화이질소를 새로운 산화제로 썼음을 의미한다. 사산화이질소는 자동점화성이 매우 강한 고효율 산화제다. 또한 화성-14형은 비대칭디메틸하이드라진이라는 액체연소제를 썼는데, 이 액체연소제는 고효율 무색화학물질이다. 그러니 화성-14형 분사화염이 투명하게 보인 것이다. 매우 강한 추력을 낸 것은 물론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사진 6>은 화성-14형이 상승비행을 하는 장면인데, 분사화염이 투명하게 보인다. 이전에 조선에서 발사된 탄도미사일의 분사화염은 붉은 색을 띄었으나, 화성-14형의 분사화염은 투명해 보인다. 이것은 화성-14형이 붉은색 분사화염을 내뿜는 적연질산(red fuming nitric acid)을 산화제로 쓰지 않고, 사산화이질소(dinitrogen textroxide)를 새로운 산화제로 썼음을 의미한다. 사산화이질소는 자동점화성이 매우 강한 고효율 산화제다. 또한 화성-14형은 비대칭디메틸하이드라진(unsymmetrical dimethyl hydrazine)이라는 액체연소제를 썼는데, 이 액체연소제는 고효율 무색화학물질이다. 그러니 화성-14형 분사화염이 투명하게 보이면서도 강한 추력을 낸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사산화이질소와 비대칭디메틸하이드라진이 상온에서 보관할 수 있는 화학물질들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화성-14형이 액체추진제를 쓰면서도 마치 고체추진제를 쓰는 미사일처럼 미리 액체추진제를 주입해두었다가 임의의 시각에 즉각 발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화성-14형을 탑재한 발사대차가 사격위치로 이동한 뒤에 액체추진제를 주입할 필요 없이 약 5분 만에 즉각 발사될 수 있었다. 화성-14형은 무징후기습발사에 적합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그와 달리, 등유를 연소제로 쓰고, 액체산소를 산화제로 쓰는 탄도미사일은 무징후기습발사에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액체산소는 극저온, 초고압에서 액체상태가 되는데, 액체산소를 상온에서 오랜 시간 동안 놓아두면 기화현상이 일어나 모두 날아가 버리므로, 반드시 발사 직전에 주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탄체를 수직으로 세워놓고 발사 직전에 산화제를 30~40분 동안 주입하면, 무징후기습발사는 불가능하다.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소식을 전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조선에서 “새로 개발된 비추진력이 훨씬 높은 2계단 발동기”가 화성-14형에 장착되었다고 한다. 2계단 발동기라는 말은 2단 추진체에 들어가는 로켓엔진이라는 뜻이다. 강력한 2단 로켓엔진을 새로 개발하여 화성-14형에 장착한 것인데, 그 신형 2단 로켓에 관한 설명이 없어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연소제와 산화제를 액체상태로 연소하는 게 아니라 가스화하여 기체상태로 연소함으로써 매우 강한 추력을 내는 전류동-단계식 연소로켓엔진(full-flow staged combustion rocket engine)을 1단 로켓엔진으로만 쓴 것이 아니라, 2단 로켓엔진으로도 쓴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5월 14일에 시험발사된 화성-12형은 그 신형 고출력 로켓엔진을 1단 로켓엔진으로만 썼다. 이 신형 고출력 로켓엔진은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부피가 크므로 커다란 1단 로켓엔진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만, 크기가 작은 2단 로켓엔진으로 쓰려면, 설계를 다시 하여 소형화해야 하는데, 로켓엔진 소형화 설계는 기술공학적으로 매우 힘들다.  

 

적은 분량에서 강한 분사력이 나오는 고효율 로켓추진제와 작고 가벼우면서도 강한 추력을 내는 고출력 로켓엔진을 만드는 최첨단 로켓공학기술을 가진 미사일강국만이 사거리가 12,000km에 이르는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 수 있다. 조선이 이번에 시험발사한 화성-14형은 바로 그런 최첨단 로켓공학기술로 만든 세계 정상급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소식을 전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을 “이 행성 최강의 대륙간탄도로케트보유국으로 되도록 정력적으로 령도”하였다고 한다.  

 

▲ <사진 7> 이 사진은 2015년 10월 10일 8축16륜 발사대차에 실려 조선로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에 등장한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촬영한 것이다. 당시 나는 이 사진에 나타난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 화성-14형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화성-14형은 전혀 다른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조선에서 만든 두 종의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구조적 특징을 살펴보면, 첨두가 뭉뚝한 전투부와 첨두가 뾰족한 전투부를 구별할 수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5. 조종전투부에 들어간 모의열핵탄두와 스크램젯 

 

이 <사진 7>은 2015년 10월 10일 8축16륜 발사대차 4대에 각각 실려 조선로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에 등장한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들 가운데 하나다. 당시 나는 이 사진에 나타난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 화성-14형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화성-14형은 전혀 다른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이번에 시험발사된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 화성-14형이면, 그 사진에 나타난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무엇인가? 조선이 그 사진에 나타난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공식명칭을 공개하지 않았으므로 알 수 없다. 

 

조선에서 만든 두 종의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구조적 특징을 살펴보면, 첨두가 뭉뚝한 전투부와 첨두가 뾰족한 전투부를 구별할 수 있다. 2015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에서 8축16륜 발사대차에 실려 등장한 익명의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첨두가 뭉뚝한 전투부를 장착한 것이었고, 이번에 시험발사된 화성-14형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음 첨두가 뾰족한 전투부를 장착하고 있었다. 이런 첨두모양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사진 8> 이 사진에 나타난 물체는 2016년 3월 14일 조선이 탄도미사일 대기권재돌입환경모의시험에서 사용한 재돌입체인데, 첨두가 뭉뚝하다. 이것은 이미 2016년 이전에 조선이 첨두가 뭉뚝한 재돌입체를 만들었음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사진 8>에 나타난 것은 2016년 3월 14일 조선이 탄도미사일 대기권재돌입환경모의시험에서 사용한 재돌입체인데, 첨두가 뭉뚝하다. <사진 9>는 미사일조립시설을 출발하는 화성-14형 발사대차를 촬영한 것인데, 첨두가 뾰족한 전투부가 보인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조선은 첨두가 뭉뚝한 재돌입체와 첨두가 뾰족한 재돌입체를 각각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첨두가 뭉뚝한 재돌입체는 익명의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장착된 것이고, 첨두가 뾰족한 재돌입체는 화성-14형 2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장착된 것이다. 

 

▲ <사진 9> 이 사진은 2017년 7월 4일 아침, 평안북도 구성 인근에 있는 방현비행기공장 부근의 미사일조립시설을 출발하는 8축16륜 발사대차의 이동장면이다. 발사대차에 실린 화성-14형의 전투부는 첨두가 매우 뾰족하게 생겼다. 이것은 조선이 첨두가 뾰족한 재돌입체를 만들었음을 말해준다. 조선은 뭉뚝한 첨두와 뾰족한 첨두 가운데서 어느 한 가지를 택하여 재돌입체를 통일적으로 만들지 않고, 왜 두 종류의 첨두를 모두 만드는 것일까?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선은 뭉뚝한 첨두와 뾰족한 첨두 가운데서 어느 한 가지를 택하여 재돌입체를 통일적으로 만들지 않고 왜 두 종류의 첨두를 모두 만드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세 갈래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재돌입체를 뭉뚝한 첨두로 만들면 고극초음속으로 대기권에 재돌입할 때 발생하는 초고열이 재돌입체 내부로 전달되지 않아 내부전자장치들의 안전성이 유지되는 장점이 있지만, 뾰족한 첨두로 만든 재돌입체에 비해 돌진낙하비행속도가 느린 단점도 있다. 그와 달리, 재돌입체를 뾰족한 첨두로 만들면 고극초음속으로 대기권에 재돌입할 때 대기마찰로 발생하는 초고열이 재돌입체 내부로 전달되는 단점이 있지만, 뭉뚝한 첨두로 만든 재돌입체에 비해 돌진낙하비행속도가 빠른 장점도 있다. 

 

재돌입체 표면에서 대기마찰로 발생하는 초고열이 재돌입체 내부로 전달되지 않게 차단하려면, 열전도율이 낮은 특수소재로 재돌입체 표면을 만들어야 한다. 2016년 3월 14일 탄도미사일 대기권재돌입환경모의시험에서 첨두가 뭉뚝한 재돌입체가 사용되었는데, 화성-13 대륙간탄도미사일에 들어가는 공처럼 생긴 핵탄두 첨두부에 바로 그 뭉뚝한 재돌입체가 장착된다.

 

첨두가 뭉뚝한 재돌입체를 대기권재돌입환경모의시험에서 사용한 뒤로 조선의 로켓공학기술자들은 근 1년 동안 노력하여 열전도율이 낮은 신종 특수소재를 개발하여 첨두가 뾰족한 재돌입체를 새로 만든 것이다. 화성-14형 시험발사소식을 전한 조선의 언론보도에서 “우리가 새로 개발한 탄소복합재료로 만든 대륙간탄도로케트 전투부 첨두의 열견딤특성과 구조안정성을” 최종적으로 확증하였다고 지적한 것은 바로 그런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였음을 의미한다. 화성-14형 시험발사소식을 전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재돌입시 전투부에 작용하는 수천℃의 고온과 가혹한 과부하 및 진동조건에서도 전투부 첨두내부온도는 25~45℃의 범위에서 안정하게 유지되고 핵탄두폭발조종장치는 정상동작하였으며 전투부는 그 어떤 구조적 파괴도 없이 비행하여 목표수역을 정확히 타격하였다”고 한다.   

 

▲ <사진 10> 이 사진은 미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전투부를 촬영한 것인데, 뭉뚝한 전투부 안에 여러 발의 핵탄두가 들어간 모습이 보인다. 첨두가 뭉뚝한 전투부에는 조선이 만든 소형화, 표준화, 규격화된 핵탄두가 6발이 들어간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둘째, <사진 10>에서 보는 것처럼, 첨두가 뭉뚝한 전투부에는 조선이 만든 “소형화, 표준화, 규격화된 핵탄두”가 6발 들어가고, <사진 11>에서 보는 것처럼, 첨두가 뾰족한 전투부에는 폭발위력이 메가톤급인 열핵탄두(thermonuclear warhead) 1발이 들어간다. 화성-14형 시험발사소식을 전한 조선의 언론보도에서는 화성-14형을 “대형 중량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대륙간탄도로케트”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대형 중량핵탄두는 2016년 1월 6일 오전 10시 조선이 첫 기폭시험을 진행한, 핵탄두를 기폭장치로 사용하는 열핵탄두(수소탄)를 뜻한다.

 

▲ <사진 11> 이 사진은 첨두가 뾰족한 전투부에 메가톤급 열핵탄두 1발이 들어간 것을 묘사한 컴퓨터합성사진이다. 열핵탄두는 수소탄두를 뜻한다. 화성-14형 전투부가 뾰족하게 생긴 것은, 거기에 메가톤급 열핵탄두 1발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언론매체는 화성-14형 탄두무게를 700kg으로 추산하였는데, 그런 무게를 가진 미국의 열핵탄두는 폭발위력이 1.45메가톤이나 된다. 이것은 상용폭약 145만톤이 폭발하는 엄청난 파괴력이다. 만일 조선이 그런 열핵탄두가 장착된 화성-14형을 쏘면, 미국 본토는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 것이다. 화성-14형은 극강의 전략무기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미국 텔레비전방송 <CNN>은 화성-14형의 탄두무게를 700kg로 추산하였다. 미국이 만든 열핵탄들 가운데 무게가 700kg인 것은 W-28인데, 그 폭발위력은 1.45메가톤이다. 이것은 상용폭약(TNT) 145만톤이 폭발하는 엄청난 파괴력이다. 만일 조선이 그런 열핵탄두가 장착된 화성-14형을 쏘면, 미국 본토는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 것이다. 화성-14형은 극강의 전략무기다. 

 

▲ <사진 12> 이 사진은 사격위치에 도착한 발사대차가 화성-14형 탄체를 들어올려 지상에 수직으로 세우는 장면이다. 그런데 화성-14형 전투부를 유심히 살펴보면, 길이가 꽤 긴 3중 원뿔형임을 알 수 있다. 전투부에 들어가는 재돌입체를 조종형 재돌입체로 설계하였기 때문에, 전투부가 3중 원뿔형인 것이다. 조종형 재돌입체는 중간비행단계에서 자동항법장치를 작동하여 재돌입체의 비행방향을 전환하고 비행자세를 바로잡으며 날아간다. 그렇게 포물선형 궤도에서 이탈하여 수평비행을 하면서 비행방향을 전환하면, 교전상대가 발사한 요격미사일을 피할 수 있고, 미사일방어망을 간단히 뚫고 들어가 초정밀타격을 할 수 있다. 조종형 재돌입체가 그처럼 기묘한 비행방향전환능력과 초정밀타격능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초음속연소램젯이라고 부르는 초소형 로켓엔진이 전투부 안에 장착되었기 때문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셋째, <사진 12>에 나타난 화성-14형 전투부를 유심히 살펴보면, 전투부가 길이가 꽤 긴 3중 원뿔형임을 알 수 있다. 화성-14형 전투부는 전형적인 3중 원뿔형이다. 하필이면 왜 3중 원뿔형으로 만들었을까? 전투부에 들어가는 재돌입체를 조종형 재돌입체(maneuverable reentry vehicle)로 설계하였기 때문에, 전투부가 3중 원뿔형인 것이다. 

 

조종형 재돌입체는 중간비행단계에서 자동항법장치를 작동하여 재돌입체의 비행방향을 전환하고 비행자세를 바로잡으며 날아간다. 중간비행단계에서 수평비행도 할 수 있다.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소식을 전한 조선의 언론보도에서 “전투부 분리 후 중간구간에서 중량전투부의 자세조종특성을 재확증”하였다고 서술한 것은 화성-14형에 조종형 재돌입체가 들어있었음을 말해준다. 

 

조종형 재돌입체는 중간비행단계에서 포물선형 궤도에서 이탈하여 수평비행을 하면서 비행방향을 전환할 수 있으므로, 교전상대가 발사한 요격미사일을 손쉽게 피할 수 있고, 미사일방어망을 간단히 뚫고 들어가 초정밀타격을 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그런 조종형 재돌입체가 들어간 전투부를 조종전투부라고 부른다.

 

조종형 재돌입체가 그처럼 기묘한 비행방향전환능력과 초정밀타격능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초음속연소램젯(supersonic combusting ramjet)이라고 부르는 초소형 로켓엔진이 전투부 안에 장착되었기 때문이다. 이 초소형 로켓엔진을 스크램젯(scramjet)이라고 약칭한다. 조선이 지난 6월 21일 평양 룡성구역에 있는 ‘산음동미사일연구소’ 경내에 있는 지상분출시험장에서 진행한 초소형 로켓엔진 지상분출시험은 바로 그 스크램젯의 성능을 판정하기 위한 지상분출시험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2017년 6월 26일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 ‘오리무중에 빠진 미국의 전쟁전략, 막판승부만 남은 조미핵대결’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4249)

(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4249)

 

 

6. 마지막 남은 절차는 조미협상이 아니라 굴복회담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소식을 전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시험발사를 앞두고 위용을 드러낸 화성-14형을 바라보면서 “미제와의 기나긴 대결이 드디여 마지막 최후계선에 들어섰다”고 말했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조미핵대결의 막판승부가 결정되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성공이 주는 정치적 의미다. 미국 본토 전역이 조선의 핵공격권 안으로 들어왔으니, 핵무장 완성의 길을 달려온 조선은 이겼고, 핵무장을 가로막으려던 미국은 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 들어가기 전에 대통령 당선인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막아보려고 온갖 술책을 다 써보았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패인은 조선의 엄중한 경고를 듣고서도 우물쭈물하며 부질없는 ‘압박타령’이나 장황하게 늘어놓은 데 있다.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소식을 전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시험발사준비를 지도하면서 “우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우리의 의지를 시험하는 미국에 똑똑히 보여줄 때가 왔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2017년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준비사업이 마감단계에 이르렀다고 밝혔고, 4월 15일 태양절 열병식에서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들이 전격적으로 공개되었으며, 5월 14일에는 미국 본토 서북단에 도달할 수 있는 화성-12형 시험발사가 진행되었으며, 6월 21일에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조종전투부에 들어가는 ‘스크램젯’을 지상에서 분출시키는 시험이 진행되는 등 화성-14형 시험발사를 단행하겠다는 사전경고를 여러 차례 보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용단을 내리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면서 ‘압박타령’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던 것이다.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으로 조미핵대결의 막판승부가 결정되었으니, 이제는 조미핵대결을 종식시킬 마지막 절차만 남은 셈이다. 그 마지막 절차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조미협상이 아니다. 조미핵대결에서 조선이 승리하고, 미국이 패하게 되었으므로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조선정책에서 구상하였다는 조미협상은 진행할 필요가 없어졌고, 오직 미국이 조선에게 무릎을 꿇는 굴복회담만 남아있다. 앞으로 조미협상은 없고, 굴복회담만 있을 뿐이다.

 

미국은 조선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라도 무서운 핵공포에 짓눌려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굴복회담에 끌려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조선에게 굴복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도, 어쩔 수없이 미국은 굴복회담에 끌려 나올 수밖에 없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화성-14형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을 때 “앞으로 심심치 않게 크고 작은 <선물보따리>들을 (미국에게) 자주 보내주자고 호탕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이 굴복회담에 끌려나올 때까지, 조선이 화성-14형 이외에 다른 대륙간탄도미사일들을 계속 시험발사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사진 13>

 

▲ <사진 13> 이 사진은 화성-14형 시험발사가 성공한 직후, 사격위치에서 미사일조립시설로 돌아온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시험발사에 참가한 군인들이 열렬히 환호하는 가운데 손을 들어 답례하는 장면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앞으로 심심치 않게 크고 작은 <선물보따리>들을 (미국에게) 자주 보내주자고 호탕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시였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이 조선에게 무릎을 꿇는 굴복회담에 끌려나올 때까지, 조선이 화성-14형 이외에 다른 대륙간탄도미사일들을 계속 시험발사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압박타령'을 그만두고, 굴복회담에 끌려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시간은 너무도 촉박하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물론 트럼프 행정부는 이른바 ‘최대 압박과 제재’로 극도의 좌절감을 표출하면서, 당분간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며 정세를 약간 복잡하게 만들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완전패배를 앞두고 나타나는 일시적인 동요현상에 불과하므로, 굴복회담은 불가피한 귀결이다. 

 

미국이 조선에게 무릎을 꿇는 굴복회담은 어떤 회담인가?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소식을 전한 조선의 언론보도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그 굴복회담은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과 핵위협이 근원적으로 청산되”는 회담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지난 64년 동안 끈질기게 거부해온 평화협정을 체결하도록 강제하고, 주한미국군 철수를 공약하도록 강제함으로써 미국의 대조선적대정책과 핵위협을 근원적으로 청산하는 역사적인 회담, 바로 그것이 미국이 조선에게 무릎을 꿇는 굴복회담인 것이다. 

 

미국이 무릎을 꿇는 굴복회담이 성사되는 날, 우리 민족에게 통일염원을 실현하는 결정적인 국면이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역사가 일찍이 알지 못하는 이런 대격변, 대전환은 지난 72년 동안 분단체제 아래서 너무 많은 불행과 고통과 역경을 겪어온 우리 민족 앞에 위대한 통일국가의 미래가 펼쳐지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제 그 불행과 고통과 역경을 한꺼번에 가셔줄 조국통일의 날이 상상을 초월하여 우리 민족 앞에 성큼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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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9조 더 쓰고 ‘지각 이전’…미8군 내일부터 평택행

 

등록 :2017-07-10 05:01수정 :2017-07-1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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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지 이전 잃어버린 10년 ① 

미8군사령부 11일 평택 입주식
다음달까지 이전 완료할 계획
올해 용산기지 주요 이전 완료
용산 주둔 64년 만에 마침표

애초 2008년 완료 계획했지만 
전작권 환수 무기한 연기 대가
연합사 남겨 이전협정 무력화
사업비용은 7조→16조로 눈덩이
문 대통령, 3년전 “재비준해야”
서울시 용산에 위치한 미8군 사령부가 다음달까지 경기도 평택 험프리기지로 이전을 완료할 계획인 것으로 확인됐다. 용산기지의 대규모 부대 이동이 올해 말까지 예정된 것으로, 주한미군 자체를 뜻해온 미8군이 용산에서 철수하긴 주둔 64년 만에 처음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때 협정을 맺은 ‘기지 이전 사업’은 보수정권을 거치면서 10년가량 늦어지고 비용도 16조원대(가장 최근 추계·2010년 기준)로 불며 ‘누더기’가 되었다. 본격 쟁점이 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박근혜 정부가 기존 약속을 뒤집고 2014년 용산기지에 한미연합사를 남기기로 한 결정은 문재인 대통령이 의원 시절 강하게 비판까지 한 터다.

 

미군기지 이전이 애초 계획에서 수차례 지연, 후퇴하고 비용도 16조원대로 불어났다. 2010년 계산이다. 미8군은 다음달, 나머지 주요 부대는 올해 말 이전을 완료할 방침인 서울 용산기지 일부 풍경.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미군기지 이전이 애초 계획에서 수차례 지연, 후퇴하고 비용도 16조원대로 불어났다. 2010년 계산이다. 미8군은 다음달, 나머지 주요 부대는 올해 말 이전을 완료할 방침인 서울 용산기지 일부 풍경.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주한미군 관계자는 9일 <한겨레>에 “용산기지의 8군·주한미군사령부 등이 7월초부터 차례로 이전할 계획”이라며 “소규모 기지 이전이 진행돼 왔지만 용산기지 주요 이전은 올해 말, 경기북부의 2사단 이전은 내년 완료할 것”이라고 밝혔다. 8군사령부 입주식(리본커팅)은 11일 평택기지에서 열린다. 미군 쪽은 이사 리허설도 진행했다. “8군이 4~6주 내 도착하면 평택기지 규모가 1200명 증가”하는 등 향후 용산기지와 2사단 병력·가족 등 1만2천명가량이 옮겨갈 계획으로 전해진다.

 

한·미 양국은 2002~2004년 용산기지이전협정(☞열쇳말)을 맺어 국내에 흩어진 40개의 미군기지를 평택과 대구 중심으로 통폐합시키기로 했다. 이에 근거를 둔 ‘주한미군 기지이전 사업’은 애초 2008년이 완료 시점이다. 최초 양국 합의에 의한 미군 최대 해외주둔지 건설 사업으로서 동맹의 새 시험대로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용산기지 이전 취지부터 크게 훼손된 상태다. 한미연합사 등 조건부 잔류 시설이 무장 늘어온 탓이다. 대사관 직원 숙소, 방호시설 등까지 남아 당분간 기지 본체의 25% 이상(일부 추정 포함)이 남게 될 형국이다.

 

한미연합사는 용산기지이전협정상 주한미군·유엔사령부와 함께 맨 먼저 평택기지로 이전(2006년 말)하기로 했다. “서울 도심의 미군시설을 신속·완전하게 한국 국민들에게 반환해야 한다는 여망을 반영하는 것”(2004년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 회의)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2014년 10월 미국에 요청해 전시작전권 환수를 무기한 연기한 대신, 미군 요구대로 한미연합사는 용산기지, 2사단 화력여단은 동두천기지에 남기기로 결정했다. 현재까지 협정 개정이나 국무회의 심의도 없어 위헌 가능성이 제기된다.

 

사업 초기 7조원대의 기지이전사업비는 이제 16조원을 넘어섰다. 한국 8.9조원, 미국 7.1조원으로 국방부는 말하지만, 실은 전체 94%(15조원) 안팎이 한국 돈이다. 이 또한 2010년 추계라 “다시 추계 중”이라고 밝힌 2017년 사업비는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다.

 

미군이 용산기지 이전을 사실상 마치려는 올해 하반기가 ‘기지 이전의 정상화’를 논의할 거의 마지막 기회란 지적이 나온다. 적어도 연합사 잔류 여부·규모 등을 놓고 협정 개정 등을 통해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4년 국정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남북간 국방비 15배, 경제력 차이는 40배가 넘는데 전작권 환수가 안 되는 건 말이 안 된다. 동두천·용산에 미군이 (더) 잔류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법적·행정적·재정적 문제를 설명하고 (협정의) 국회 비준을 다시 받아야 한다”며 “부끄럽지 않으냐”고 따졌다. 당시 국방부(한민구 국방장관)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임인택 임지선 조일준 최현준 스티븐 브로윅 기자 imit@hani.co.kr

 

 

 

■ 용산기지이전협정(Yongsan Relocation Program)·연합토지관리계획(Land Partnership Plan) : 주한미군의 안정적 주둔 여건, 효율적 국토 활용 등을 목표로 전국에 산재한 주한미군기지를 평택, 대구 중심으로 재배치하며 공여 토지는 반환받기로 한 협정이다. 2002~04년 체결·개정한 뒤 국회 비준을 받았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02096.html?_fr=mt1#csidx5f27d8012eed30f88a785296a3f4f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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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한반도문제 사태 심각성 못 깨달은 미국 정치권

아직도 한반도문제 사태 심각성 못 깨달은 미국 정치권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07/10 [04:45]  최종편집: ⓒ 자주시보
 
 

 

 

7일 유튜브에 공개한 김어준의 파파이스 151차 방송에서는 함께 미국을 방문했던 측근들이 나와 문재인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 후일담과 평가를 들려주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드배치를 기정사실화했다고 언론에 알려져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를 수행했던 김경수 의원에 따르면 실제론 환경영향평가와 같은 민주적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을 뿐 배치를 무조건 기정사실화하지는 않았다는 내용 등 몇 가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의 상, 하원 의원들과 간담회에서 상원의원과의 설전이 인상적이었다. 

 

김경수 의원에 따르면 한 상원의원이 '문 대통령이 평창올림픽 남북공동개최나 개성공단 재개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자 문재인 대통령도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간 미국이 제재와 압박을 그렇게 가했지만 북핵무제는 점점 더 심각해기지만 했다. 중국과 러시아라는 뒷문이 있기 때문에 제재를 가해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제재를 하는 것도 결국 북을 협상탁에 나오게 하기 위한 것 아니냐, 그것을 위해 이제는 제재는 제재대로 하더라도 대화를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식의 답변을 내놓아 미국 상원의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었다고 한다.

 

중국이 대북압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 같다는 백악관과 미 의회의 불만에 대해서도 문재인 대통령은 '그래도 중국이 노력을 하기 때문에 북이 올 들어 아직 핵시험을 하지 않고 있는 면도 있다고 본다. 부족한 부분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미국, 중국, 한국이 서로 협력해서 잘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식의 답변도 내 놓았다고 한다.

 

▲ 문재인 대통령이 올브라이트 파월 등 전진 국무장관 등 주요 간부들이 소속된 CSIS 씽크탱크(정책연구소) 주최 토론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 자주시보

 

결론적으로 김경수 의원 등 파파이스에 나온 출연자들은 공통적으로 한미정상회담 공식 성명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대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인정했다는 내용을 넣었던 것 즉, 남북관계 해법 운전대를 문재인 대통령이 쥐는 것을 미국이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평했다. 이런 인정은 김대중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인정받았던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그 미국의 인정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동력을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일정하게 확보한 셈이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그렇게 교민들과의 만남에서 남북관계 해법의 운전대를 쥘 수 있게 되었다며 그렇게 흥분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하지만 파파이스 방송을 보고 나니 더 걱정이 되었다. 지금은 1차남북정상회담 때와는 차원이 달라졌다. 그땐 북에 핵도 대륙간탄도미사일도 공개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올브라이트의 방북이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으로 이어졌다면 한반도문제, 북미대결전 문제가 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북은 이미 수소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국이 되었다. 이미 만든 무기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북의 주장이다. 미국에서 지불해야할 대가도 그때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북핵폐기를 절대적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더라도 성과를 남길 수 있을 지 우려된다.

 

더 큰 문제는 미국 대통령과 미국의 상, 하원 의원들의 대북관이다. 아직도 중국이 적극적으로 대북 제재와 압박에 나서면 북이 굴복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 중국 외교부에서는 공식적으로 '북은 압박을 가할수록 더 강하게 반발하는 나라라며 중국이 북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사실상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런데 아직도 중국의 대북 압박에 기대서 북을 굴복시키려는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더불어 한국 대통령에게 남북관계를 개선해도 좋다고 인정했다는 내용을 버젓이 한미정상회담 공동 성명에 적어 넣고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서 북핵 폐기를 이끌어내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점이다. 

미국이 인정하고 말고 하는 것 자체가 한국은 미국의 속국이라는 말과 같다. 미국의 핵위협 때문에 북은 핵무장력을 개발 강화해가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속국이 나서서 평화요 번영이요 아무리 선심을 베푼다고 한들 과연 북이 비핵화에 나서겠는가. 그럴수록 북은 더욱 더 미국과 승부를 보려고 할 것이며 최고의 대미 압박 무기인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능력 향상에 더욱 매진하게 될 것이다.

 

결국 북핵문제는 죽으나 사나 미국과 북이 만나 풀어야할 문제다. 미국이 북과 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 남북관계 개선을 지지하고 도움을 준다면 북미대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일정한 도움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상원 의원은 개성공단도 문재인 대통령에게 함부로 재개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있는데 정말 북과 대화로 문제를 풀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미국 안보당국자들은 의원들과 달리 사태의 심각성과 해법 방향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미국 의원들과 백악관 관료들의 태도를 보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정말 미국의 정치권이 이런 수준인 줄은 몰랐다. 

 

그래서 북이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을 단행하고 성공시키자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 대사 등이 군사력 사용까지 입에 올리고 B-1B 전략폭격기를 한반도에 진출시켜 대북타격훈련을 진행하

는 등 연일 대북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반도 주변 동맹국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어 한반도 주변 친미 동맹의 파산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더 강한 북의 군사력 과시를 유발하여 더욱 더 한반도 정세를 격화시키고 북미전쟁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왜 생각하려 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북의 핵무장력이 강화되면 될수록 친미동맹 와해 속도는 더 빨라지고 미국의 위상은 추락하는 등 미국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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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철도 민영화 되돌릴 골든타임이다

 
[기고] 시간 끌수록 문제는 고착화된다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 앞엔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남북관계를 둘러싼 안보 문제에 일자리 창출과 청년실업 해소, 비정규직 문제, 검찰 개혁, 방송 개혁, 교육 개혁, 재벌 개혁, 부동산 문제 등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이런 현실에서 철도 개혁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문제로 비쳐질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철도 정책은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정권 초기부터 방향을 잡고 끈기 있게 추진해야 잘못 설계된 정책 노선을 제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    
 
이미 철도 정책의 나아갈 방향은 정해져 있다. 용인 경전철 혼란과 의정부 경전철 파산의 교훈은 무엇인가? 만성 적자구조였던 코레일이 비로소 흑자를 내다가 다시 적자 공기업의 굴레로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강남 지역 주변의 고속철도 이용자들에게만 할인 혜택이 주어지나?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같은 것들을 원천적으로 막는 방법은? 철도 현장에서 계속되는 노동자 사망사고를 막는 길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물음에 답을 달다 보면 철도가 가야할 방향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극단적인 효율화 논리와 경쟁, 민영화 드라이브가 이제까지의 철도 정책이었다. 이런 정책 기조 속에 시설과 운영이 분리되고 수서발 고속철도 민영화가 추진되다가 현재의 SRT체제로 자리 잡았다.  
 
최근 철도 민영화 정책의 수호자로 나선 <중앙일보>는 적극적으로 과거의 정책을 옹호하고 나섰다. <중앙일보>는 김대중-노무현을 거친 철도 개혁 정책을 문재인 정부가 원위치 시킨다는 자극적 제목으로 최근 신임 장관이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 방향에 제동을 걸고 있다. 현재까지 이어져온 철도 정책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개혁 정책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권은 출범초기부터 이전 정권이 초래한 IMF 구제금융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 짐을 짊어졌다. 
 
IMF는 기업에 대한 강력한 구조조정과 공기업 민영화를 지원 조건으로 내걸었다. 공기업 민영화는 국가기간산업을 국제투자자들의 수익추구 장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추진하게 된 정책이었다. 또한 이시기 득세했던 신자유주의의 위력은 민영화를 통한 공기업 개혁이 그럴듯한 정책 아젠더처럼 보이게 했다. 
 
노무현 정권이 김대중 정권의 정책을 이어받았다면 철도 민영화는 진즉에 추진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때에 마지못해 결정된 철도 민영화 정책이 노무현 정권 때 폐기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건재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전 정권에서 철도민영화에 사활을 걸었던 국토부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참여정부의 코드에 맞추는 척 하면서 철도 민영화를 위한 기본 틀을 관철시켰다. 그것이 시설과 운영의 분리, 철도에 시장 경쟁논리 관철 이었다. 철도 관련 정보를 독점하고 원하는 방식대로 가공할 수 있는 관료들은 새로 출범한 정권을 길들이려 들었다.  
 
결국 본색이 들어난 것은 이명박 정권 때였다. 대우건설에 수서고속철도를 떼어주겠다는 노골적인 민영화 정책이 대우건설, 한국교통연구원, 국토부의 삼각 협력에 의해 진행됐다. 철도민영화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노무현 정권 때 국토부가 법안에 교묘히 이식한 경쟁논리를 담은 철도산업발전기본법의 취지를 따른 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상하통합이나 SRT 통합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개혁 정책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게 아니다. 다국적 금융 산업계의 이익을 보장하는 IMF컨설턴트들에 의해 제기된 공기업 민영화를 억지로 받아들여야 했던 김대중 정권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례를 듬뿍 받은 관료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참여정부 시절의 철도정책을 시민을 위한 것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그 첫 단추는 코레일과 SRT의 통합이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일부 교수들은 경쟁체제가 도입되어 여러 가지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긍정적 효과란 것들은 통합구조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경쟁체제의 효과라는 것들은 아전인수식 해석에 따른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반대로 분리체제가 지속될 경우 발생될 폐해들은 시간이 갈수록 극심해 질 전망이다.  
 
경쟁체제를 옹호하는 교수들은 진정한 효과가 드러날 때 까지 만이라도 현 체재를 유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신기루는 시간이 지나도 신기루 일 뿐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문제는 더 고착화 되고 이해관계는 첨예화 된다. 시간을 끌수록 현 체제를 기득권화 시키게 된다. 이것이 효과가 드러날 때 까지 기다려보자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행동해야 할 때 가만히 있어보자는 사람들의 말을 듣다가 철도 개혁의 중요한 골든타임을 놓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취임사에서 부동산 정책은 투기세력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결정한다고 당당히 밝혔다. 이것은 부동산 정책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철도 정책역시 시민 다수의 이익이 보장되는 공공성 위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재벌이나 고위 관료들, 이들과 카르텔로 엮인 세력들이 철도 정책을 주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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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민중정당(준)이 떴다

김종훈 의원 상임대표 선출… “일하는 사람들 직접정치시대 열겠다”

새민중정당 창당준비위원회가 떴다.

김종훈 의원 등 250여명은 9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새민중정당 창당 발기인대회에 이어 창당준비위원회 발족식을 갖고 새민중정당(준)의 공식 출범을 알렸다.

새민중정당 발기인들은 이날 창준위 발족 선언문을 통해 “우리 사회 곳곳에 켜켜이 쌓여 있는 낡은 적폐를 청산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노동자 정치시대, 일하는 사람들의 정치시대를 열겠다”며 “‘함께 살자’, ‘노동존중의 사회로 가자’는 기치 아래 불평등 사회를 청산하고, 전쟁위험이 상존하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자주와 평등의 나라, 통일된 나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새민중정당 창준위는 △‘하나의 진보’를 실현하는 진보대통합당 △당과 노동조합, 당과 대중조직의 전략동맹으로 상호 발전하는 당 △당의 기초조직인 분회가 살아 움직이는 당원의 당 △현장과 광장, 여의도를 연결하는 새로운 정치 실현 등을 활동 방향으로 제시했다.

창당발기인대회에서 창준위 상임대표로 선출된 김종훈 의원은 “오늘 이 자리는 피와 땀, 눈물의 결정체로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모인 것”이라며 “많은 결심과 결의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더 단단하고 강력하고 활기 넘치며 그 어떤 탄압에도 부서지지 않는 정당을 건설하갰다”고 말했다.

발기인대회에선 강규혁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 김영표 빈민해방실천연대 공동대표, 이영순 전 국회의원을 공동대표로 선출했다. 농민을 대표할 공동대표는 13일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추천을 받아 선출할 예정이다.

새민중정당(준)이 이날 발족함에 따라 광역 시‧도당 창당 작업은 물론, 기존 진보정당들과 합당 논의를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새민중정당(준)은 늦어도 9월에는 신설합당 방식으로 새 진보정당을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이날 창준위 발족식에서 김창한 민중연합당 상임대표는 축사를 통해 “촛불광장에 함께하면서 역사의 주인은 민중이라는 진리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며 “촛불혁명 이후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함께 열고, 진보집권의 시대를 함께 열어갑시다”고 말했다.

▲사진 : 김종훈 의원실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net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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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경축사에 ‘남북 특사교환’ 제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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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7/07/10 08:27
  • 수정일
    2017/07/10 08:27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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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 -박창일 정창현 조성렬 홍익표
김치관/조정훈 기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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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0  02: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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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뉴스>는 5일 국회의원회관 제1간담회의실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주제로 좌담회를 개최했다. 박창일 평화3000 운영위원장과 정창현 전 민족21 대표,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토론자로 참여했고, 이계환 통일뉴스 대표가 배석했다.[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6.29~30)을 가진 나흘 후,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지난 4일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고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촛불 민심을 업고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이 국내 적폐청산은 물론 꽉 막힌 남북관계도 잘 풀어나가길 기대했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통일뉴스>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5월 26일 진행한 ‘대북정책 토론회 - 문재인 정부의 대북 독트린은 무엇?’의 후속편으로 긴급 전문가 좌담회를 지난 5일 국회의원회관 제1간담회의실에서 개최했다.

박창일(신부) 평화3000 운영위원장과 정창현 전 민족21 대표,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토론자로 참여했고, 이계환 통일뉴스 대표가 배석했다.

토론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분야 인선과 정책 등에 우려를 표하고 남북 특사교환 등 대담한 접근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다양한 제안을 내놓았다.

박창일 신부는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대북 전문가가 없다”며 공무원들도 “2007년 이전에 했던 것에 맞춰서 변화된 상황을 캐치업하지 못한 것 같다”고 짚고 “지난 9년 동안 남북관계의 진행 과정과 여론 동향, 북한의 핵무장 수준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창현 전 대표는 북한의 ICBM 시험발사에 대해 “단둥은행과 한.미 정상회담을 보면서 준비해놨다가 최종적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사인하면서 쏜 것”이라며 “유엔 안보리에서 추가 대북 제재 결의가 나오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단계로 가면 북한이 추가로 핵실험을 할 수 있다”고 진단해 주목된다.

그는 북한이 “속도전을 강조하면서 핵무력 강화 부문, 관료주의 부정부패 청산, 경제 발전 부문에 집중”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북한은 추가 핵실험을 하기 전에 남쪽보다 미국과 협상하기 위해서 여러 경로로 접촉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조성렬 책임연구위원은 “본격적인 남북대화가 이루어지려면 정치적 합의나 군사적 긴장완화 등 큰 틀의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며 “정치.군사회담과 스포츠, 종교, 인도적 사안 등 두 개를 과감하게 병행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남북 공동의 집’ 구상이라는 이름을 제안하고 싶다”며 “남북기본협정을 토대로 공동안보 개념으로 해서 문재인 정부 5년 내에 실현할 것을 최종 목표로 해보자”고 제안했다.

아울러 대북정책 독트린으로 ‘핵.미사일 문제와 별도로 민족의 문제는 북한과 협의해서 해결한다’는 ‘핵.미사일과 남북관계 분리론’을 제시하고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 총리급 인사가 참가해 “기존 남북합의를 존중하고 변화된 현실에 맞게 내용을 재조정한 새로운 포괄합의서를 만든다”는 것을 포인트로 삼는 일련의 남북관계 개선 로드맵을 제시하기도 했다.

홍익표 의원은 “통일외교안보 분야 인선이 지연되면서, 또 6.15공동행사가 원활히 소통할 채널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무산되면서, 새 정부의 대북정책이나 구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아쉽다”며 “북한도 좀 문재인 정부에 시간을 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8.15광복절 메시지가 중요하다”며 “현재 교착국면을 타개하는 구체적인 제안을 해서 그걸 실제 북한이 받을 수 있을만 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대북특사 방식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정창현 전 대표는 “현재 상황에서 특사교환을 하려면 우선 남북이 단절된 상황이니 공개 또는 비공개 실무접촉을 해야 한다”며 “그 과정에서 북한에게 적극적으로 남북대화에 나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토론자들은 대체로 현 정부가 기존 참여정부 시기의 ‘기능주의적 접근법’에 머물러 있고 통일외교안보 라인의 인적구성도 미흡하다고 진단했으며, 특히 미국의 ‘용인’을 받아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 핵동결을 설득하는 것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한목소리로 우려를 표했다. 북측과의 대담한 접근으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중.일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

홍익표 의원은 “현재 교착국면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결국 관료들에게 맡기기 보다 대통령 스스로 결단하고 판단해야 할 부분이 커진 것”이라며 “북한 최고지도자를 직접 겨냥한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5일 오후 4시 국회의원회관 2층 제1간담회의실에서 진행한 좌담회 내용이다.

 

북 ICBM 시험발사, ‘단둥은행 제재 탓?’
정창현 “추가제재 실행시 핵실험 할 수 있다”

   
▲ 좌담회는 북한의 ICBM 시험발사와 한.미 정상회담, 김정은 정권, 대북 독트린 등 폭넓은 주제로 3시간여에 걸쳐 진행됐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통일뉴스 : 원래는 좌담회 주제를 문재인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분야 인선 평가, 한.미 정상회담 평가, 김정은 정권 진단, 대북 독트린 모색, 네 가지로 제시했다. 그런데 어제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발사했다. 따라서 현안부터 다뤄보겠다.

어제 북한이 ICBM을 전격 발사하고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ICBM 시험발사를 예상했나? 의미와 파장을 어떻게 보나?

■ 조성렬 : 그동안 미국이나 우리 국방 당국자들은 북한이 ICBM을 실제 발사하려면 2~3년 걸릴 것이라고 평가해 왔다. 그런데 7월 4일 아침 우리 시각으로 9시반에 북한이 미사일을 쐈다고 했을 때도 사거리가 930km 정도라고 발표해서 그것이 장거리탄도미사일이라고 충분히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실제 높이가 2,300km가 넘게 나오고 북한 방송에서 특별중대발표한다고 하면서부터 ICBM일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었다.. 그동안 미국과 국방부 평가들이 북한의 탄도미사일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ICBM이라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 홍익표 : 북한의 도발이나 핵실험을 예상했느냐에 대해서는 딱히 ‘이것이다’는 몰라도, 통상적으로 한.미 정상회담이 있거나 한.중, 미.중 정상회담 같은 북한과 관련한 중요한 논의가 있으면 북한은 반드시 거기에 대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다.

그런 측면에서 한.미 정상회담 이후에 북한이 나름대로의 화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ICBM일 것이라고 예측하지는 못했다.

7월 4일도, 이미 북한이 2006년과 2009년에도 미국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했던 사례가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지 않다. 북한이 기존에 했던 패턴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ICBM 여부는 논란이 되어 왔는데, 기술적 축적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오늘 확인된 북측 발표자료를 꼼꼼하게 확인해보니까 기술적인 내용까지도 어느 정도는 구체적으로 진보가 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탄소복합재료라는 것은 대부분의 무기강국들이 사용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소재라고 한다. 북한 발표가 탄소복합재료를 써서 첨두, 미사일 앞부분의 열견딤 특성과 구조적 안정성, 재진입 등을 봤다는 거다. 보통 어느 나라든 실험하는 것이다.

대개는 떨어진 탄피를 확보해서 결과를 봐야하는데, 바다에 떨어진 걸 회수하기도 어려워 최종적으로 실험결과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육상에 떨어뜨릴 수도 없고.

하지만 대체로 자기들이 생각한 높이, 비행거리, 시간, 탄착점까지는 어느 정도 설정했던 값의 근사치까지 간 것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자기들은 성공했다고 한 것 같다.

   
▲ 북민협 부회장이자 평화3000 운영위원장인 박창일 신부.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박창일 : 민간인들의 방북을 거부했을 때 뭔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상적으로 민간인 방북을 진행하다가 쏘면 복잡해진다.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도 이야기했고, 몇 번에 걸쳐서 ‘임의의 시간, 임의의 장소’에서 발사한다고 했다. 과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아직은 아닐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했는데. 이거 뭐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ICBM 시험발사에 성공했다면 대단한 기술발전이 아닌가 싶다.

□ 통일뉴스 : 정확하게 예상했던 발사는 아니었지만 흐름은 있었고, 북한의 탄도미사일 기술 수준이 기존의 관측에 비해 앞선 것 같다는 평가가 많이 나왔다.

■ 조성렬 : 작년에 이미 탄도미사일 첨단부의 대기권 재진입 모의실험을 했다. 여기서 핵심은 삭마기술인데, 고열을 받을 경우 탄두첨단부의 외부가 조금씩 껍데기가 벗겨지듯이 볏겨지면서 탄두첨단부 안쪽의 열을 차단하는 것이다.

북한당국이 국방과학원 명의로 발표한 성명에도 보면 탄두첨단부의 내부온도가 25~45도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핵탄두에 영향을 안 미친다는 것이다. 삭마기술을 확보했다는 것은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이 성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거리는 별개의 문제이다.

마지막 남은 작업은 통상적으로는 모의방사물질을 탄두에 넣고 쏴서 실제로 터트리는 것이다. 함정을 출동시켜 핵탄두가 터질 때 방사능이 나오는 걸 확인하면 100%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재진입과 단분리 실험만 실시한 것으로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다고까지만 했다.

□ 왜 우리 정부는 ICBM이라고 안하고 ‘ICBM 급’이라고 하나?

■ 홍익표 : 미국도 클라스(class)라고 썼다. 82도 고각으로 쐈기 때문에, 실제 표준각도로 쏠 때 얼마나 날아갈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추정컨대 8천km 가까이는 비행이 가능하라고 본다. 그러나 실제로 나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ICBM 급이라고 하는 것 같다. 대개 6천km 이상 날아갈 때 ICBM이라고 간주한다.

   
▲ 북한은 4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사진출처 - 로동신문]

□ 통일뉴스 : 북한의 ICBM 발사가 어떤 파장을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하나?

■ 정창현 : 10월 정도까지는 북한이 저강도로, 미사일을 쏘더라도 고체연료를 활용한 미사일 실험을 하겠다 생각했는데, 그 예상을 깬 것은 단둥은행에 대한 제재 때문이라고 본다.

대북 압박이나, 제재를 추상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북한이 그냥 넘어가는데,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시되면 그것에 대한 대응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센 강도로 가야 한다’는 그런 기본 흐름이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작년 1월 핵실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단둥은행과 한.미 정상회담을 보면서 준비해놨다가 최종적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사인하면서 쏜 것 같고, 앞으로 최소 6개월 정세 흐름에 대한 판단을 했다고 본다.

지금 구도로 가게 되면 결국 유엔 안보리에서 추가 대북 제재 결의가 나오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단계로 가면 북한이 추가로 핵실험을 할 수 있다. 미국이 독자적으로 추가제재에 나서면 중국도 이에 반발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북한이 핵실험의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전에 탄도미사일 발사가 이뤄져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어떤 일을 하다가 중간에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가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부 대립국면을 거쳐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핵실험까지 북한이 하게 되면 우리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숙제로 남아 있다. 국내 정치의 압력을 견뎌내면서 우리 정부가 지금 기조, ‘그래도 민간교류는 간다’는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일지 주목된다.

다만 북한은 추가 핵실험을 하기 전에 남쪽보다 미국과 협상하기 위해서 여러 경로로 접촉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압박’ 한국은 ‘미국 용인 하에 대화’
홍익표 “북한은 문재인 정부에 시간 줘야 한다”

□ 통일뉴스 :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우리가 운전석에 앉겠다고 했는데, 이번 ICBM 발사는 미국을 겨낭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우리 정부의 구상이 어그러지는 것 아닌가?

   
▲ 북한 전문가로 손꼽히는 정창현 <민족21> 전 대표.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정창현 : 한국의 주도성, 주도적 역할이라는 게 3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대단히 원칙적으로 의미로 한반도문제의 주도권을 우리 정부가 갖는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를 조정해 나간다는 의미로, 이러한 측면이라면 큰 문제가 없다.

이때 우리 정부의 주도적 역할은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고, 남북대화가 원활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한미관계나 북미관계에서 우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둘째는 한미합의에 따라 그 틀안에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북한을 설득해 대화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번에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합의해준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북한을 설득한다는 것이다. 설득의 내용이 동결하라든지, 동결 조건 하에서 남북관계 풀고, 어떤 부분에 투자한다든지 이런 의미의 주도적 역할이다.

셋째는 우리가 주도적 역할이 미국을 설득해서 1999년 ‘페리 프로세스’ 같은 미국의 대북정책의 전반적 로드맵을 만드는 데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남북관계가 풀려나가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선순환구조를 만들어가는 데서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주도적 역할’을 이러한 3가지로 측면에서 보면 이번 한.미 공동성명은 표면상으로 두 번째 역할론에 가깝다. 그래서 우려스러운 내용이다. 과거의 사례를 통해 볼 때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 통일뉴스 : 한.미 정상회담으로 주제가 흐르고 있다. 홍익표 의원은 어떻게 평가하나?

■ 홍익표 : 이번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의도는 우리 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높이는 것이었다. 남북관계에서 한국의 중심적 역할을 인정받는다면, 비핵화를 위한 제재 국면이라 하더라도 인도적 지원이나 사회문화 교류를 통해서 대화의 모멘텀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최대한 압박하면서도 대화도 병행하자고 한 차원에서, 제재국면과 어긋나는 게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대화의 물꼬도 주도적으로 틀 계획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쉬운 것은 표현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대통령의 의도는 있었다고 본다.

   
▲ 문재인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지난달 30일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사진출처 - 청와대]

■ 정창현 : 북한에서는 공동성명만 보고 판단을 할 텐데, 공동성명 문안만 보면 결국 우리의 주도적 역할을 미국에게 동의를 받아서, 북한식으로 ‘미국 가서 승인받고 와서, 미국이 승인해 준 울타리 안에서 관리한다’는 것이다. 인도지원하고 이산상봉하고 체육교류하고 그런 틀에서 한다는 것 아니냐는 판단을 할 수 있다.

따라서 한미정상회담이나 국제사회와의 논의에서 나온 우리의 입장을 6개월이면 6개월, 1년이면 1년, 아니면 문재인 정부 5년 기간에 기본 목표가 뭐고, 그걸 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미국에 가서 우리의 목소리를 찾아오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이번과 같은 성명이 나온 것이라는 전반적인 설명과 논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의 내부구조로 볼 때, “이게 뭐냐?” 당연히 원칙적인 문제로 ‘사대외교, 굴종’ 등의 원색적인 비난성명이 나올 수밖에 없다.

■ 홍익표 : 통일외교안보 분야 인선이 지연되면서, 또 6.15공동행사가 원활히 소통할 채널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무산되면서, 새 정부의 대북정책이나 구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아쉽다. 사실 한.미 정상회담 전에 그런 게 필요했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북한도 좀 문재인 정부에 시간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도 취임식 즈음해서 시간을 좀 달라는 이야기를 진보 쪽에서도 여러 차례 했는데,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했다.

이번에도 핵실험까지 하면 대화 재개가 많이 지연될 가능성이 있다. 북도 새로운 정부에 대해 조금 여지나 시간을 줬으면 좋겠다.

■ 정창현 : 북한에서 뭔가 판단할 때, 결국 둘 중 하나의 명분을 저쪽에 줘야한다. 하나는 6.15라는 명분을 줘서 대남 관계자들이 회의 결정과정에서 힘을 갖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북미관계 진전이 이뤄져서 외무성 라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야 한다.

일단 이번 ICBM 발사는 우리를 겨낭한 게 아니라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판단한다. 우리로 보면 짜증나고 답답하긴 한데, 현재 북한은 미국과의 유리한 협상을 염두에 두고 행동을 하고 있다고 본다.

□ 통일뉴스 : 한.미 정상회담 끝나고 트럼프 대통령이 공동언론발표문에서 ‘자국방어, 시민보호’ 등을 언급했는데, 이례적이지 않나?

■ 홍익표 : 그건 너무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물론 미국 내에서도 ICBM과 핵이라는 북한의 무기체계 진전에 대한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웜비어 사건이 그런 내용을 포함시키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미국 사회에서 핵문제보다 그 사안이 훨씬 더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나쁘게 하거나 분노시킨 측면이 있다. 미국 시민을 지키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 통일뉴스 : 정서적으로는 그렇게 이해되지만 ‘자국 방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서 주목해 봤다.

■ 조성렬 :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합의한 것은 사실상 최대 압박과 관여인데, 두 개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기보다 미국은 계속 압박한다는 거고 한국은 미국의 용인 하에 대화를 통해서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 본다면, 미국은 최대한의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ICBM 발사를 굳이 한국을 배려해서 늦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국 측을 만나 봐야 미국이 용인한 범위 안에서 북한을 설득하고 (북핵을) 동결시키는 역할이 주어졌을 것이라고 본 거다.

미국이 6월 29일 단둥은행 제재를 발표하였고 그에 앞서 6월 1일에는 러시아 기업 세 군데와 개인에 대한 제재가 있었다. 일련의 제재들이 6월 들어서 본격화되고 있기 때문에, 북한 입장에서 한국과의 대화를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본다.

아쉽다고 한다면, ‘최대 압박.관여’에서 우리가 미국의 압박에 대해 어느 정도 완화하도록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드러난 것은 미국의 최대압박 뿐이다. 북한이 우리를 무시했다기 보다는 미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한 것이 아닌가 싶다.

■ 홍익표 : 우리 정부도 장관 인선이 늦어지고 인수위 기간이 없다는 아쉬운 측면이 있지만, 하우투(how to)가 잘 안 보인다 게 문제다.

제재와 대화를 병행하겠다고 했는데, 국제적 연대를 통한 제재는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만 대화국면을 어떻게 풀겠다든지 관여를 어떻게 하겠다는 등 구체적인 것들은 현재로서 보이지 않는다. 원칙적 이야기만 하고 있다.

사실 과거 박근혜 정부도 제제와 대화를 병행하겠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결국 대화는 없고 제재만 있었다.

한 가지 걱정은 자칫하면 문재인 정부도 의지는 있었는데 “어어~” 하다가 북한의 계속되는 추가적 도발에 제재 악순환에 빠지면서 결국 변변한 대화조차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화 시도의 기회조차 상실하는 게 그게 제일 우려스럽다.

정치군사회담과 적십자.체육회담 병행해야
홍익표 “대담한 접근 필요.. 대북특사 방식 제안”

□ 통일뉴스 :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 독일 방문에서 뭔가 대북 정책이나 제안을 내놓으려 한다고 들었다.

■ 홍익표 : 있을 것이다. 기조가 완전히 바뀌지 않겠지만, 이번 ICBM도 있었고 해서 약간의 보충하는 내용이 있을 것이다.

■ 조성렬 : 우리가 박근혜 정부 하에서의 남북관계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박근혜 정부때는 ‘드레스덴 선언’ 이후에 ‘4대 소통로’를 이야기하면서,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큰 것을 한다고 했는데, 북한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지금 문재인 정부도 스포츠나 종교 교류, 인도적 지원 등을 마중물 삼아서 남북대화를 복원하는 계기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남북대화가 이루어지려면 정치적 합의나 군사적 긴장완화 등 큰 틀의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박근혜 정부 때와는 다른 방식의 대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 박창일 : 북의 입장은 확실하다. 정치군사적 문제의 해결을 먼저 하고 가자는 것인데, 우리는 반대하지 않나. 방법론의 차이인데, 그럼 이 정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북에서 요구하는 것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정치군사적 대화를 먼저 하자고 했을 때, 정치적인 것은 크게 논의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군사적인 게 항상 문제다. 서해북방한계선(NLL) 문제부터 시작해서 주한미군까지 다 끌어낼 건데 해결이 되겠나.

   
▲ 안보 전문가로 손꼽히는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조성렬 : 지난 6월 23일 북한 민화협에서 9가지 요구사항을 발표했는데, 물론 우리가 그걸 다 들어줄 것은 아니지만, 내용들을 보면 북한이 원하는 정치회담이나 군사회담의 기본적 윤곽은 나온다고 생각한다.

우리 입장과 북한 입장을 절충한다면, 북한은 어쨌든 정치회담, 군사회담 성과를 확대하는 데 스포츠나 종교, 인도적 문제를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우리가 선이후난(先易後難)보다 정치·군사회담과 스포츠, 종교, 인도적 사안 등 두 개를 과감하게 병행하는 방향으로 치고 나갈 수 있지 않나 싶다.

특히 북한이 ICBM을 발사했고,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졌기 때문에 군사문제에 대한 제안 같은 것도 우리가 과감하게 제기할 수 있다. 실무회담은 의제를 정하기 위한 회담이니까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만날 수는 있다고 본다.

■ 박창일 : 우리가 군사회담을 할 때 손해되는 게 뭐가 있을까. 그렇지만 군사회담 해서 우리가 미사일 문제라든지 핵문제를 거론할 수 없지 않나. 북한은 “너희와 관계없이 우리는 미국과 하니까 빠지라”고 하는 건가?

■ 홍익표 : 그런 측면에서 과거와 같은 전통적 관점에서 벗어나 대담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대북특사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의제를 제한하지 않고, 사회문화, 인도적 사안들이 특사회담에서의 결과물로서 하나둘씩 실현된다면 특사회담의 모멘텀을 이어가면서 정상회담에서부터 군사훈련, 긴장완화, NLL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다고 본다.

의제에 제한 없는 특사 간 회담을 통해서 의제를 조율해야만 최소한 북한이 추가도발하는 것을 제어하는 명분이 될 것 같다. 누군가 김정은 위원장에게 추가적 도발을 막자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도 그 이야기를 못할 것 같다.

■ 박창일 : 군사회담을 한다면 북한은 첫 번째로 내세울 것이 군사훈련 중단이고, 주한미군 철수도 거론할 텐데, 이걸 우리 정부가 받을 수 있겠나.

■ 홍익표 : 군사회담을 하지 말고, 좀더 정치회담을 해야 한다고 본다. 군인들이 만나는 회담은 하위구조로 가야 하고 정치회담을 해야 한다.

정치회담을 시작한다면 당장 군사훈련 중단까지는 몰라도 축소나 문정인 특보가 이야기한 전략자산이 참여하지 않는 방식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면 최소한 특사나 대표가 남과 북을 왔다갔다 하는 기간 동안이라도 북한이 동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추가행동을 중단할 수 있는 명분을 북한 스스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회담이 그냥 지리하게 연장된다면, 국민 지지나 국제사회 지지를 끌어내기 힘들기 때문에, 이산상봉이나 여러 가지 형태의 교류 등은 그 회담의 성과물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6자회담 복귀문제나 북미관계 정상화 등 높은 차원의 문제까지 모든 의제를 다 테이블에 올려놓고 하고싶은 말을 하는 특사회담을 해보는 게 어떨까 싶다.

■ 조성렬 : 특사파견보다는 특사교환이라는 표현이 일방적이지 않아 더 느낌이 좋다. 특사교환은 남북관계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 통일뉴스 : 일각에서 농담조로 차라리 사건이 터져서 2015년 ‘8.25 합의’처럼 전격적인 고위급 회담이 열리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상황이다.

북한이 ICBM을 시험발사해 당연히 제재는 이야기하겠지만, 역발상으로 “이거 심각한 문제다. 만나자”라고 던질 정도는 돼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가 그렇지 못할 것 같다. 문정인 특보의 발언 정도도 ‘꼬리 자르기’를 했지 않나.

■ 조성렬 : 발상의 전환 보다는 홍익표 의원이 제안한 ‘대담한 접근’이 되면 좋겠다.

7월 4일 북한이 ICBM을 쏴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설사 북한이 안 쐈더라도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북한은 그런 기술을 지금 개발해 놓은 거 아닌가.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걸 쐈기 때문에 남북한이 특사교환을 통해서 이 부분을 유예시킬 수가 있다는 말이다.

특사교환을 하는 동안에는 북한이 우리식 표현으로 ‘도발’이고 ‘추가적 시험’을 하지 않는다면 그게 모라토리엄 아닌가. 오히려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문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특사교환을 제안하고 정말로 전권을 위임한 특사단을 교환해야 한다.

핵심은 북한이 원하는 이야기를 한 번 다 듣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그래서 북한 측의 정리된 입장을 서울이나 평양에서 논의하고, 타결을 모색하는 것은 판문점에서 하든가 하면 될 것 같다.

당장 판문점 연락사무소, 서해.동해 군통신선이 단절돼 있는데, 복원조치부터 실질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대담한 접근을 제안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이자 국정자문기획위원회 위원인 홍익표 의원.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홍익표 : 북한도 우리도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거다. 지금 북한의 상황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으면 상황을 바꾸기 힘들 거라고 본다.

낮은 단계의 스포츠 교류나 인도적 교류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 실험을 동결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은 아니다.

예전 같이 ‘선이후난(先易後難)’으로 쉬운 걸 앞세우고 어려운 것은 뒤에 놓는다는, 이런 개념은 아니다. 어려운 것, 쉬운 것 가릴 것 없이 한 바스켓에 넣고 해봐야한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지 않다.

실제로 이미 2007년에 경험해 보니까, 철도 연결할 때부터 정치군사회담이 선행되지 않으면 경제교류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수준의 합의가 여타 분야의 합의를 이끄는 구조로 전환된 게 2005년, 2006년부터인 것 같다.

이미 과거 전통적 방식, 햇볕정책이 했던 기능주의적 접근은 일정정도 한계에 도달했다고 본다. 개성공단 폐쇄로 사실상 갈 때까지 가지 않았나 싶다.

□ 통일뉴스 : 가장 현실적으로 우리도 한미합동군사연습 잠정 중단 등 정치군사적 카드가 있어야 협상이 가능하지 않나.

■ 홍익표 : 오해가 있는데, ‘우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도 이야기할 게 많다. 왜냐하면 핵.미사일 문제가 미국과 북한 간에 중심적으로 최종적으로 해야 할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잖나.

그 문제에 대해서 그동안 미국이 좀더 개입해서 하는 게 우리가 하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한발 물러섰던 것이지, 우리가 관심이 없거나 의제를 주도할 능력이 없다고 보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가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조성렬 : 이명박 정부 때 북미 비핵화 회담에 앞서서 남북 비핵화 회담을 요구했고, 실제 발리에서 두 차례에 걸쳐서 남북 비핵화회담을 했다.

별도의 비핵화회담을 하자는 제안은 아니고, 포괄적 의제를 갖고 대화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사의 권한이 좀 세야 한다고 본다.

정창현 “북한에게 논의의 근거 마련해줘야 한다”
박창일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대북 전문가 없다”

   
▲ G20 정상회의 참석차 독일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6일 베를린시청에서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을 통해 대북정책 구상을 밝혔다. [사진출처 - 청와대]

□ 통일뉴스 : 문제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다. 정창현 전 대표가 볼 때 북한이 이런 특사교환 제안을 받을 상황인가?

■ 정창현 : 특사 카드는 언제든 쓸 수 있는 방인이긴 한데, 중요한 것은 특사에게 어떤 내용,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주느냐이다. 현재 상황에서 특사교환을 하려면 우선 남북이 단절된 상황이니 공개 또는 비공개 실무접촉을 해야 한다.

실무접촉을 하든 다른 통로를 통해서 접촉하든, 먼저 특사교환과 의제 등을 타진해야 하고, 타진 과정에서 전반적인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북한에게 적극적으로 남북대화에 나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줘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문재인 정부가 선의를 갖고 하겠다는 정도 가지고는 북쪽에서 받기 어렵지 않겠느냐 생각된다.

정치군사적 문제에서 북한이 관심 있는 한미합동군사연습이나 NLL 문제에서 우리가 어느 선까지 논의가 가능하다는 시그널을 주게 되면 북측은 그 시그널에 따라서 이산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이나 체육회담 등을 수용할 수 있다는 거다.

북한은 정치군사문제를 앞세우고 있지만 그러한 문제가 논의될 수 있는 조건과 일정이 제시되면 분위기 조성차원에서라도 쉬운 문제부터 단계적 논의에 나올 수 있다고 예상한다. 지금까지 모든 남북관계에서 남북대화는 그렇게 이뤄져온 것이다.

■ 박창일 : 북의 또 다른 입장이 제재와 대화는 병행할 수 없다고 한다. 정치군사적 회담이 중요하다고 하는 반면, 제재와 대화는 병행될 수 없다는데, 북의 입장이 대화하면 좋지만 제재를 풀라는 거다. 더구나 단순한 제재가 아니라 국제적 제재도 포함되지 않겠는가.

■ 정창현 : 미국이 풀어야 할 제재가 있고, 우리가 풀어야 할 제재가 있다고 본다. 5.24조치를 공식적으로 해제한다고 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사회문화 교류, 인도지원 교류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제재가 해제될 수 있다.

□ 통일뉴스 :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도 큰 장벽으로 남아있다.

   
▲ 정창현 전 대표는 북측과의 사전접촉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정창현 : 회담을 받겠다고 한다면 회담을 해야 한다. 문제는 북한이 선행해서 해야 할 조치들이 있고, 우리가 대비해야 할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금강산관광 재개의 경우 북한이 ‘금강산 국제특구법’을 개정해야 하고, 개성공단의 경우에는 북한이 요구하는 임금 인상과 업종 다변화 문제가 논의되어야 재개가 가능할 것이다.

다른 군사정치적 문제를 떠나서 임금 인상 문제는 당연한 것이고 어렵지 않은 문제다. 그런데 업종 문제가 난제다. 북한은 첨단산업이 들어와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이것은 대북제재와 직접적인 연계가 돼 있는 상황이다. 북핵 대화의 진전상황과 연계해 이 문제를 장기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문제는 아마도 여러 차례 협의와 논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오래 걸릴 수도 있다. 오히려 다른 사업을 진행하으로써 자연스럽게 재개논의를 앞당길 수 있다.

예를 들면 철도연결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대승적 차원에서 하자든지, 신의주까지 가는 철도로 중국과 물류를 하려면 새로운 업종을 전진기지로 삼아야 한다든지, 이런 합리적인 구상을 가지고 북한의 요구를 일정하게 수용하고, 국내의 반대여론도 낮춰야 한다.

□ 통일뉴스 : 좋은 의견들이 많은데, 실제로 문재인 정부가 이러한 구상들을 세워 추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 박창일 : 통일외교안보 라인이 옛날 사고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프레임을 바꿔서, ‘프레임 시프트’를 해서 새로운 담대한 제안을 할 수 있는 그런 구조로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년 금방 간다.

■ 정창현 : 통일외교안보 라인에 임명된 인사들을 볼 때, 대체로 노무현 정부 시절의 경험과 사고 수준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것 아닌가 우려가 된다. 우리가 경협 약속을 해주면 이산상봉이나 체육교류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섞인 생각인 것 같은데 냉정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스스로 핵보유국이고, ICBM 발사에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심각한 수준에서 북한이 가지고 나올 청구서에 대해 우리의 입장에서 의제를 재설정하고, 설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내부적 이견이 안 나오게 부처별 협의가 필요하고, 원활하게 진행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잘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 통일뉴스 : 그렇다면 현재의 통일외교안보 라인을 바꾸든지 외곽에 또다른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고 보나?

■ 박창일 :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대북 전문가가 없다고 봐야 한다. 대통령이 무주에 가서 연설하는데 황당하게 평창 동계올림픽 단일팀 이야기하고, 공동입장 이야기하는 수준이다.

공무원들이 문재인 정부 출범할 걸 알고 2007년 이전 것을 꺼내서 공부들 많이 했다고 한다. 코드를 맞춘 거다. 그런데 2007년 이전에 했던 것에 맞춰서 변화된 상황을 캐치업하지 못한 것 같다.

또 예전 일은 ‘내가 다 안다’는 식의 분위기도 있다고 들었다. 지난 9년 동안 남북관계의 진행 과정과 여론 동향, 북한의 핵무장 수준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특히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점을 고려해야 한다.

□ 통일뉴스 : 북한 내부의 변화와 북중관계도 중요한 요소라고 보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 정창현 : 북중관계는 특별히 더 나빠지고 좋아지고 하는 징후는 없는 것 같다. 중국의 경우 ICBM 발사까지는 ‘쌍잠정, 쌍궤병행’의 틀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대응하리라고 본다. 북한도 아마 그런 판단을 하지 않았나 싶다.

다만, 핵실험은 다른 차원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한 번 더 실험을 해서 실천배치 가능성을 실증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북중관계는 핵실험을 하기 전까지는 큰 변화는 없을 것이고, 중국도 북한에 영향을 미치는 제재에는 선뜻 나서기 힘든 상황 같다.

최근 북한의 문헌을 분석해 보면 경제 건설과 핵무력 병진노선을 표방하며 각 기관별로 속도전을 하고 있는 양상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군부는 핵과 미사일 개발을 속도전으로 하고 있다. 예상보다 빠르게 핵과 미사일 개발에 성과를 내고 있는 느낌이다.

당과 내각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 관료주의, 부정부패 등과 같은 ‘적폐’를 청산하는데 주력하자고 강조한다. 일반 주민들이 그동안에 불만을 가져온 적폐청산이다. 우리가 이른바 ‘공포정치’라고 하는 대대적 사정과 물갈이 작업을 하고 있고,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경제부분은 아직까지 큰 문제가 없이 진행되는 것 같다. 전문가들은 ‘시장’과 ‘돈주’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는데, 북쪽의 경제변화를 자본주의 시장화 개념으로 봐서 그렇지 북쪽 내부도 자연스럽게 경쟁과 효율성이 확대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북도 전략적 노선에 기초해서 그 밑에서 푸는 것은 유연성을 주고 있다. 그래서 경제 부분에서 이른바 자강력주의에 대한 일정한 자신감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 광복거리 슈퍼나 상점에 중국제품이 거의 깔려 있었는데, 지금은 북한의 경공업제품이 절반을 넘어섰다는 방북기도 있다.

특히 경공업이나 생필품 분야에서, 예를 들면 과자나 사탕이 10년 전에는 형편없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디자인부터 맛까지 중국이나 우리와 거의 똑같아졌다. 커피믹스도 등장하고.

간식부터 치약, 칫솔, 양말 이런 기본 생활용품은 국영상점이나 마켓에서 북한이 자체생산과 유통, 소비하는 그런 단계로 도시부터 가고 있다. 북한에 대한 평가는 다르겠지만 북한 내부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일정한 자신감을 갖게 된 것 같다.

지금 기조를 보면 기본적으로 속도전을 강조하면서 핵무력 강화 부문, 관료주의 부정부패 청산, 경제 발전 부문에 집중하고 있고, 내부적으로는 1990년대, 2000년대 초반 김정일 시대보다는 좋다는 내부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이런 부분이 북한 스스로가 대외적으로 강경하게 나오는 내부적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북한 경제가 어렵다든지 어떤 경제적 제재를 가하면 북한 정권에 큰 타격을 준다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 통일뉴스 : 단둥은행 제재는 특이하지 않나?

   
▲ 박창일 신부는 북측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박창일 : 단둥은행은 실질적으로 북한과 거래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둥은행을 리스트에 올렸는지 모른다. 형식적으로 광은 내면서 중국도 내부적으로 피해가 없으니까.

농상은행 같은 큰 중국은행들은 북한과 거래를 안 한다. 미국과 거래가 끊어지면 안 되니까 아예 스스로가 안 하는 거다.

‘세컨더리 보이콧’은 정말 복잡한 문제다. 전선의 확대를 가져오는 것이다. 사드가 들어와서 중국이 끌려들어와 복잡해졌듯이, 추가제재하면 대북제재가 아니라 국제적인 전쟁이 되는 거다.

□ 통일뉴스 : 아직까지 김정은 위원장이 국제무대에 본격 데뷔하지 않았다. 정상회담이나 해외 순방을 언제쯤 누구랑 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 정창현 : 김정은 위원장이 대외무대에 나오는 것은 2013년부터 내부적으로 준비했고, 2015년에는 중국도 행사가 많고, 남북 간에도 수요가 있을 것으로 보고 준비를 많이 한 것으로 안다.

결국 두 가지 요인이다. 내부적으로 논쟁해서 ‘지금 나갈 시점이 아니다’라는 의견이 다수를 이뤘던 거고, 대외적 조건들이 생각보다 받쳐주지 않아서 그런 거다.

북미 간 대화국면이 열리면, 당연히 김정은 위원장이 대외순방을 하고, 러시아나 중국을 먼저 가고 우리하고 정상회담하는 구도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상회담이 열려있다고 이야기를 꺼낸 것은 북쪽 입장에서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일 것이다.

조성렬, 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 공동의 집’ 제안
홍익표, 대통령 8.15 경축사에 ‘구체적 대북 제안’ 필요

   
▲ 6일 독일 G20 정상회의에서 한미일 정상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사진출처 - 청와대]
   
▲ 6일 독일 G20 정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출처 - 청와대]

□ 통일뉴스 : 문재인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이름짓기, 즉 ‘네이밍’과 북핵문제를 포함한 ‘대북 독트린’을 제안해 보면 좋겠다.

■ 조성렬 : 신정부의 대북정책 명칭 가운데 제일 잘못된 게 '햇볕정책 2.0' 같은 것일 거다. 노무현 정부 때의 평화번영정책도 그다지 잘된 네이밍은 아니다. ‘평화번영을 위한 무슨 무슨 정책’이 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햇볕정책은 잘 만든 이름이다.

개인적으로 ‘남북 공동의 집’ 구상이라는 이름을 제안하고 싶다. ‘남북 공동의 집’은 우리가 민주당 공약에 나온 남북기본협정을 토대로 공동안보 개념으로 해서 문재인 정부 5년 내에 실현할 것을 최종목표로 해보자는 것이다.

남북기본협정에는 군사문제에서의 잠정협정이 들어가고, 보건협정이나 사회문화협정, 경제협정 등 포괄적인 내용이 들어간다.

남북 잠정협정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현재 핵과 미래 핵은 어느 정도 해결하고 과거 핵은 북한이 최후 수단으로 과도기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에, 북한이 철수를 주장해 온 주한미군도 용인되는 것으로 한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대북정책의 독트린은 ‘핵.미사일 문제와 별도로 민족의 문제는 북한과 협의해서 해결한다’는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핵.미사일과 분리된 남북관계 발전’이 되는 셈이다.

현실적으로 약간 역풍도 걱정되지만 결국 7.4공동성명 때 북한을 실체, 대화상대로 인정해 패러다임을 확 바꿨던 것처럼, 현재 북한이 ICBM까지 성공한 상태에서 할 수있는 것은 ‘핵.미사일 가진 북한과도 민족문제는 이야기한다’는 차원에서 분리해서 발전시킨다는 거다.

□ 통일뉴스 : 원래 평창 동계올림픽을 명분으로 내년 한미합동군사연습을 잠정 중단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한다는 구상이 있었다고 들었다. 문정인 특보의 우드로윌슨센터 발언도 그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고.

   
▲ 조성렬 책임연구위원은 ‘남북공동의집’ 구상을 제시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조성렬 : 원래 구상은 대통령 취임 후 9개월만에 열리는 평창올림픽을 타이밍으로 해서 기존 남북합의를 존중하고 변화된 현실에 맞게 내용을 재조정한 새로운 포괄합의서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시간이 필요하면 폐막식에 북한 총리급 인사가 와서 남북이 서명해서 일단 남북관계를 정상화시킨다는 것인데, 군통신선, 판문점 연락관 등 문제를 정상화하는 것도 포함된다.

한미합동군사연습 축소 내지 연기에 대해 평화로운 평창 동계올림픽을 내세워 미국을 설득할 수 있고, 그러려면 북한도 일단 핵·미사일 활동의 모라토리엄까지는 해줘야 한다.

그 뒤 본격적으로 6자회담을 재개하여 내년 봄부터 북한 핵프로그램의 동결을 위한 협상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문 대통령의 말처럼 비핵화까지는 지난한 일이겠지만 현재핵인 핵물질과 미래핵인 물질을 계속 만드는 핵관련 시설을 없애는 거다. 이미 가진 과거핵의 부분은 장기적 과제로 삼아 최종적인 비핵화는 미뤄놓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교류협력이 강화되면, 대통령이 말한 ‘하나의 시장’을 위한 남북경제협정이나 보건협정, 사회문화협정을 맺으면서 마지막 4년차 말, 5년차 되기 전에 포괄해서 남북기본협정을 체결하면서 낮은 단계의 남북연합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 공동의 집’의 수립을 선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홍익표 : 지금 우리가 문재인 정부 독트린을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정권 내부에서, 키신저 처럼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구상해서 발표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독트린이 뭐라고 말하기는 적절치 않다.

독트린이라는 네이밍보다 ‘문재인 정부에서 이 정도 하면 좋겠다’는 원칙 정도를 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국무위원 임명이 대충 다 끝나가고, 중요한 정상회담을 마치고 8.15 광복절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관례적으로 8.15 광복절에는 민족문제, 남북관계 메시지가 나왔고, 국내적으로나 북한도 그렇고 미국도 관련국도 다 관심있게 볼 거다.

8.15선언 때 담겨야할 내용은 원론적인 것보다 좀더 ‘키’라고 할까, 문제를 풀 수 있는 구체적인 뭔가가 제시되어야 한다고 본다. 디테일한 제안이 필요하다.

정말 우리가 운전대를 잡았다면 어디로 갈 건지 이런 이야기는 필요하다. 현재 교착국면을 타개하는 구체적인 제안을 해서 그걸 실제 북한이 받을 수 있을만 해야 한다.

잘못하면 10.4선언 10주년 기념일도 물탄 듯 넘어가고 나면 북한은 연말 결산 들어가서 회담에 안 나온다. 내년 2월말 3월초 키리졸브 훈련까지 감안하면 내년 5,6월까지 그냥 갈 수 있다.

우리가 북한 탓만 하면 안 된다. 미국 탓도 마찬가지다. 내가 반성하는 것은 ‘미국이 이래서, 북한이 이래서’라고 하는데 그것도 결국 우리의 능력이다.

북한이 그런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미국을 모르는 것도 아니라면 문재인 정부는 그런 현실적 조건에서 그럼 우린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이 사람들을 움직여서 할 것인가라는 실질적인 능력과 역량을 국민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현재 국면에 아쉬운 것은 문재인 정부가 여전히 햇볕정책, 평화번영정책을 이어가는 수준의 문제의식에 머물러있다면, 변화된 환경을 돌파하기도 어렵고,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의 성공적인 대북정책이나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가기 어렵다고 본다.

거꾸로 나는 대통령보다 주변 사람이 훨씬 더 대통령보다 소극적이라고 본다. 대통령의 의지를 한발 더 나가서 밑에 있는 사람들이 펼쳐주어야 하는데, 대통령의 생각을 옥죄는 듯한 인상을 준다.

대선과정에서도 그랬다. 실제로 문재인 당시 후보랑 이야기해보면 매우 적극적이고 대담한 구상도 가졌는데, 밑으로 가면 그게 잘 안 된다. 남북관계에 대해서 잘못하면 ‘박근혜 정부 시즌 2’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 통일뉴스 : 정리해 보면, 문 대통령이 8.15선언을 계기로 현실성있는 대북제안을 내놔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문 대통령 주변은 그런 인적 구조가 안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적 구조 재편이든 또다른 참모조직이 필요한가?

■ 홍익표 : 그렇게 까지는 동의하지 않는다. 현재 구성된 통일외교안보 라인업을 보면 안정적이고 실무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관 임명한지 얼마나 됐다고 능력이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니냐.

그렇다면 현재 교착국면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결국 관료들에게 맡기기 보다 대통령 스스로 결단하고 판단해야 할 부분이 커진 것이다.

새로운 전략단위를 구성하는 것도 답이 될 수 없다. 누가 대신 총대를 맬 수도 없다. 대통령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해야 한다.

남북 합의를 토대로 미.중.일 설득해야
홍익표 “북 최고지도자 직접 겨냥한 메시지 필요”

   
▲ 김정은 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고위간부들이 고 김일성 주석 23주기를 맞은 8일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고 ICBM 시험발사 성공을 보고했다. [사진출처 - 로동신문]

□ 통일뉴스 : 사드 배치 문제와 한중관계가 현안으로 남아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배치 자체를 기정사실화 해 문제가 더 어려워진 것 아닌가.

■ 홍익표 : 사드 문제는 대통령이 밝힌 워딩 대로 갈 수밖에 없다. 한.미 간 기존합의는 특별한 돌발변수가 없는 한 바꾸기 어렵다. 정책이 옳냐 그르냐를 떠나 현실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다만 환경영향평가는 어느 동맹국이라도 우리 국내법 절차를 따라야 하고 우리 대통령도 확고하고 미국에 전달했고, 미국도 부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환경영양평가 결과는 사드배치 철회가 아니라 성주의 다른 곳, 제3의 장소를 찾는다는 거다. 그러면 자연스레 시간이 늘어날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을 벌면서 상황 변화를 위해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사드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근원적으로 남북관계 개선, 북미관계 대화 진전, 6자회담이든 다자간 틀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다양한 대화틀이 재가동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드 배치를 막을 명분과 수단이 없다.

□ 통일뉴스 : 사드 배치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중국과의 관계에서 걸림돌이 될 것 아닌가.

■ 조성렬 : 얼마전 일본 니카이 특사가 방한했는데, 혼자 온 게 아니라 3백여 명을 데려왔는데 관광업자들이라고 하더라.

일차적으로 중국의 사드 보복이 미치는 영향이 관광객 감소와 같은 관광산업이니까, 일본이 일본 관광객을 유치해서 중국으로부터 받는 압박을 일시적으로 완화시켜 주겠다는 식으로 온 것 같았다.

우리가 중국에 무역의존도가 26%인데, 그걸 낮춰서 사드 보복 효과를 상쇄시키는 구상인 것 같다. 그걸 통해 중국의 사드 보복을 완화시켜, 한국을 중국의 영향권에서 점차 떼어내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 홍익표 의원은 대담한 접근이 필요하다며 남북 특사회담을 제안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홍익표 : 원론으로 돌아가면, 사드 문제를 포함해서 앞으로 4년 반 남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성패는 앞으로 6개월여가 중요하다. 지금처럼 과거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려고 하면 안 된다.

첫째, 기능주의적 접근, 햇볕정책이나 평화번영정책이 했던 쉬운 것부터, 단순교류부터, 이런 방식을 재탕삼탕 고려한다면 그다지 좋은 결과를 거두기 어렵다.

둘째, 북한 최고지도자를 직접 겨냥한 메시지가 필요하다. 그와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 위원장을 대상으로 한 메시지와 채널을 갖지 않으면 대북정책을 가동조차 하기 어렵다.

셋째, 대담하고 높은 수준의 접근법과 함께 최고지도자를 움직여서 그 성과를 우리가 갖고 미국과 중국에게 아주 구체적인 요구를 우리가 제안해야 한다.

공동의 목표가 북한의 변화와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의 안정이라고 한다면 그 부분에서 표면상으로는 중국, 일본, 미국이 공동의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목표와 비전을 공유한 속에서 북한 최고지도자, 북한과 소통한 결과를 가지고 거꾸로 우리가 중국, 미국, 일본에게 구체적 상황에 대한 요구를 적극 제시해야 하는 거다.

대통령이 직접하든 문정인 특보처럼 제3의 인물을 통해 여론화하든, ‘당신들이 원하는 정책목표를 달성하려면 당신들도 그 정도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여론을 주도해야 한다.

이런 전략적 고려가 없다면 쉽지 않다고 본다. 그렇기에 그런 디자인을 누군가 해야 한다.

■ 조성렬 : 우리가 제한된 조건에서나마 대담하게 북한을 설득하고, 이걸 가지고 공동의 목표 하에서 미국, 중국, 일본을 설득한다는 그림에 공감대가 이뤄지는 것 같다.

미국이 용인하는 제한적 접근이 아니고, 남북 간의 협의를 확실하게 해서 이걸 갖고 거꾸로 미.중.일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주도권을 확보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 홍익표 : 중국의 관심은 동북아의 평화와 협력이다. 그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공동의 목표다. 미국과 일본이 원하는 것은 북한의 변화와 한반도 비핵화이다.

북한 변화라는 건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데, 이건 ‘레짐 체인지’가 아니다. 북한의 변화라는 것은 일정하게 경성국가에서 연성국가 정도로 변화는 정도다. 그런 측면에서 시장경제도 확산되고 북한이 국제사회 규범과 룰을 존중하는 정도의 변화를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도 미국과 다를 바 없다.

동북아 평화와 협력, 북한의 변화와 한반도 비핵화에서 우리가 미.중.일과 생각이 갖다는 걸 자꾸 설명하고 ‘너희도 그런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대통령이나 우리 정치인들,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어법을 많이 구사해야한다고 본다.

□ 통일뉴스 : 여러 노력으로 공을 들이다가도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쏜다든지 핵실험하면 모든 노력들이 유야무야되고, 국내 분위기가 얼어붙곤 했다. 이와 관련한 우리사회 내부의 정리정돈이 필요할 것 같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또 상황이 달라질 것이 우려된다.

■ 홍익표 : 핵실험이나 ICBM 등에 일희일비하면 박근혜 정부랑 똑 같다.

물론 아주 무시할 수는 없다. 잔매에 장사 없다고, 이런 게 반복되면 수습이 안 된다. 그러면 우리 여당과 지지층 내에서부터 강경한 발언이 쏟아지고 박근혜 정부 때처럼 된다.

그러면 문재인 정부에서 ‘북한이 잘못해서’라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 그건 우리 잘못이다.

북한이 잘해서가 아니라 북한은 원래 그럴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걸 알면서도 막지 못하고 방치하는 하면 대북정책의 무능인 것이다.

조금 있으면 북한이 핵실험 할 거고, 내년에 키리졸브훈련 하면 북한은 장거리로켓 발사할 것이고, 미국은 거기에 격분해 더 강력한 제재를 할 거고. 이런 게 눈에 보이는데 인도적 지원, 스포츠 교류만 매달리면 그건 너무 한가한 거다.

중국은 이번 ICBM 발사를 짐작했던 것 같다. 직전에 ‘한반도 상황이 매우 엄중하다’고 경고도 했다. 사실은 한.미 양국에 경고한 것이다. 특히 한국은 피해가 클 건데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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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북 영유아 영양실조 개선 위해 국제·민간기구와 협력”

 

등록 :2017-07-08 23:31수정 :2017-07-08 23:54

 

8일 G20 정상회의에서 인도적 지원 재개 방침 밝혀
“보건·의료 분야 지원은 정치 상황과 연계 말아야”
한-미 정상회담서도 대북 인도적 지원 재개 공감대
파리협약 지지하며 “온실가스 감축 목표 차질 없이 달성”
문재인 대통령이 8일 오후(현지시간) 독일 함부르크 주요 20개국 (G20) 정상회의장인 메세홀에서 안토니오 구테헤스 UN사무총장과 양자회담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8일 오후(현지시간) 독일 함부르크 주요 20개국 (G20) 정상회의장인 메세홀에서 안토니오 구테헤스 UN사무총장과 양자회담 하고 있다. 연합뉴스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8일(현지시각) 북한 영유아 영양실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인도적 지원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회원국들에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지20 정상회의 3세션 발언에서 “한국은 북한의 영유아 영양실조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틀 안에서 체계적이고 엄밀한 모니터링과 함께 지원이 이뤄지도록 국제기구와 민간단체와 협력하고자 한다”며 지20 회원국들의 관심을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2017년 유엔 보고에 따르면 북한은 전체 인구의 41%, 특히 5세 미만 아동의 28%가 영양실조 상태”라는 점을 거론하며 “보건·의료 분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 연계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의 이 발언은 최근의 핵·미사일 문제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식량·의약품 지원을 인도적 차원에서 재개하겠다는 것으로, 지원 물품이 당사자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게 국제기구나 민간단체에 운송·전달 과정 전반을 맡기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달 말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는 강화하되,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막지 않는다’고 양국 정상이 합의한 것의 연장선에 있다. 당시 양국 정상은 “북한의 취약계층에 대한 대북제재 조치의 영향을 최소화하도록 한다는 데 공감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주의적 사안을 포함한 문제들에 대한 남·북 간 대화를 재개하려는 문 대통령의 열망을 지지했다”고 공동선언에 명기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인도적 지원을 통해 경색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이를 통해 복원한 남북 간 대화 통로를 정치·군사적 협상 채널로 발전시켜 북한 핵·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한 마중물로 삼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이날 발언에서 의료 취약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방침도 내놓았다. 문 대통령은 “한국은 세계보건기구(WHO)의 ‘긴급대응기금’에 적극 기여할 예정”이라며 “의료 취약국인 개발도상국을 위해서도 2020년까지 13개국에 총 1억달러 지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또 “분단과 전쟁으로 대량 난민사태를 겪었던 경험과 연대감을 바탕으로 전세계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겠다”고 문 대통령은 강조했다.

 

파리 기후변화 협정에 대한 충실한 이행 의지도 밝혔다. 문 대통령은 “유엔에 제출한 2030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차질 없이 달성하겠다”며 “에너지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 친환경·저탄소 에너지로 대체하는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고 밝혔다.

 

함부르크/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801994.html?_fr=mt1#csidx174c66d9f843435be0288fcc4e88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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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뒤에 있는 아베를 저격하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07/09 12:18
  • 수정일
    2017/07/09 12:1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리뷰] MBC PD수첩 ‘군함도, 그리고 아베의 역사전쟁’…군함도 강제징용 지우려는 일본 우익들 파헤쳐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7년 07월 08일 토요일

지난 1월 영화 ‘군함도(감독 류승완, 26일 개봉예정)’ 예고편이 공개되자 일본 산케이신문은 지난 2월 “영화 ‘군함도’가 역사를 날조했다”고 반박하는 등 잊힌 역사가 주목을 받고 있다. MBC PD수첩이 지난 4일 ‘군함도, 그리고 아베의 역사 전쟁’ 편에서 군함도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만나 피해현황에 대해 듣고, 아베 정권이 어떻게 역사를 왜곡하는지 다뤘다.

섬의 모양이 군함을 닮아 군함도로 불리는 나가사키현 ‘하시마’엔 최근 관광객이 많이 몰리고 있다. 2015년 하시마가 세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하시마에서 석탄이 발견되자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바다 속 석탄개발에 뛰어들었다. 1916년 일본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를 지어 탄광촌이 형성됐다. 일본에선 산업혁명의 유적이 됐다. 

▲ MBC PD수첩 4일 방영된 '군함도, 그리고 아베의 역사 전쟁' 편 화면 갈무리. 군함도 모형도
▲ MBC PD수첩 4일 방영된 '군함도, 그리고 아베의 역사 전쟁' 편 화면 갈무리. 군함도 모형도
 

 

하지만 1943~1945년 사이 약 800명의 조선인이 하시마에 강제로 끌려가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석탄을 채굴했다. PD수첩 취재진은 직접 하시마를 찾아 관광객 견학이 금지된 곳에 과거 조선인 합숙소가 있다는 사실, 해설사가 일본의 ‘영광스러운 역사’만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파악했다. 섬을 소개한 책자에도 일본의 부끄러운 역사는 보이지 않았다.  

취재진이 만난 하시마 탄광 강제징용 피해자 김형석(97)씨는 74년 전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1943년 음력 10월20일, 양력 11월17일. 이장이 나를 불러 징용장이 왔으니 이 사람들을 따라가라 그래요. 미쓰비시 탄광에서 노무자, 인수하러 온 사람이더라고요. 당시엔 일본사람들한테 찍소리도 못하죠. 내 이름이 가네모토 교쿠치, 번호는 4416번. 탄광안이 어찌나 더운지 팬티만 입었고, 땀이 흘러 탄가루 묻은 손으로 눈을 닦아 눈이 못쓰게 돼버렸죠.” 

목숨을 걸고 헤엄을 치다 죽은 이들을 기리는 비석이 섬 맞은편 육지에 있다. 탈출에 성공해도 도착한 곳은 일본 땅이었으니 조선인에 대한 인권침해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는 가늠하기도 어렵다. 확인된 사망자만 122명, 유골의 행방은 알 수 없다. 1974년 하시마가 폐쇄되면서 위패와 명부 등을 다 태웠다. 미쓰비시가 만든 공양탑은 통행로부터 막혀있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건 ‘가해국에 대한 면죄부’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산업혁명 유산으로 2015년 나가사키 관련해 23곳을 지정했는데 그 중 7곳에서 조선인 강제노역이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은 인류보편의 가치, 즉 평화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지정하는데 가장 평화와 인권이 짓밟혔던 곳이 등재된 것이다.

▲ MBC PD수첩 4일 방영된 '군함도, 그리고 아베의 역사 전쟁' 편 화면 갈무리
▲ MBC PD수첩 4일 방영된 '군함도, 그리고 아베의 역사 전쟁' 편 화면 갈무리
 

 

2015년 유네스코에서 일본 측은 강제동원 피해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고, 유네스코는 강제동원의 역사도 모두 공개할 것 등을 조건으로 등재를 했다. 하지만 등재 직후인 같은해 7월6일 일본은 입장을 바꿨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forced to work’라는 표현은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했고, 4일 뒤 아베 총리는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오는 12월 일본이 유네스코에 관련 보고서를 제출해야하는데 강제동원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취재진은 일본의 속뜻을 더 파고들었다. 유네스코 등재는 아베 총리실에서 직접 나선 것으로 알려져있다. 아베의 지역구이자 고향인 야마구치현에 있는 ‘쇼카 손주쿠’ 역시 군함도와 함께 2015년 유네스코에 등재됐다. 쇼카 손주쿠는 1850년대 일본의 사상가 요시다 쇼인(1830~1859)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학당이다. 유수록(1854)에 따르면 요시다 쇼인은 “서둘러 군비를 정비해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캄차카반도와 오호츠크해를 빼앗고 조선에게 조공을 바치게 하라”며 정한론을 주장한 인물이다.

이 제자들이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성공한 주역들이다. 쇼카 손주쿠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사상이 전수된 공간이다. 요시다 쇼인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조선침략의 핵심역할을 맡은 이토 히로부미(초대 조선통감, 1·5·7·10대 일본총리)다. 쇼카 손주쿠 인근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 옛집도 명승지로 치장해놨다고 PD수첩 취재진은 전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 이노우에 가오루 조선 주재 일본공사는 일본 내무대신도 역임했는데 1876년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데 역할을 했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실질적 배후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조선·미국은 필리핀을 각각 지배하기로 인정한 ‘가쓰라-테프트 밀약’의 장본인 가쓰라 타로(11·13·15대 일본총리) 역시 요시다 쇼인의 제자다.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18대 일본총리)는 1910년 한일강제합병을 완성한 인물이고, 데라우치에 이어 2대 조선총독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1919년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책임이 있다.

▲ MBC PD수첩 4일 방영된 '군함도, 그리고 아베의 역사 전쟁' 편 화면 갈무리
▲ MBC PD수첩 4일 방영된 '군함도, 그리고 아베의 역사 전쟁' 편 화면 갈무리
 

 

요시다 쇼인의 제자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아베 총리의 고조부다. 태평양전쟁 당시 내각 장관이었던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체포됐다가 풀려나 56·57대 일본총리를 지냈다.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 평화헌법에 부정적 입장을 취했는데 아베 총리는 이 뜻을 이어받고 있다. 2013년 아베 총리는 요시다 쇼인의 묘를 참배했다.

하시마와 쇼카 손주쿠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박근혜 정부 당시 한일위안부합의와 더불어 반성 없던 전범국 일본의 부담을 국제사회가 덜어준 꼴이 됐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현재 진행 중인 역사왜곡에 대해 실질적인 문제제기가 왜 필요한지 알려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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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B-1B 폭격기, 북 ICBM 대응 한반도 전개


강원도 필승사격장에서 실사격훈련 첫 공개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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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08  1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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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공군 B-1B랜서 폭격기 2대가 8일 한반도 상공에 전개, 실사격훈련을 실시했다.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 대응한 훈련이라고 주한미군사령부가 밝혔다. [사진출처-미 태평양공군사령부]

미 공군 폭격기 B-1B랜서 2대가 8일 한반도 상공에 전개, 실사격훈련을 실시했다. 이번 훈련은 지난 4일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에 대응한 것이며, 공개적인 실사격훈련은 처음이다.

공군과 주한미군사령부는 이날 "미 공군 B-1B 랜서 폭격기 2대가 괌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출격, 한반도 상공에 전개됐다"며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를 포함한 북한의 점증하는 미사일 발사 움직임에 대응한 일련의 조치"라고 밝혔다.

이번 전개에는 한국 공군 F-15전투기, 주한미 공군 F-16전투기가 합류했으며, B-1B폭격기는 이날 강원도 필승사격장 상공에서 불활성 무기를 방출, 북한을 폭격하는 실사격훈련을 실시했다. 미 태평양사령부는 B-1B 폭격기 전개 및 실사격훈련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B-1B폭격기가 가상의 북한군 탄도미사일 발사대를 폭격한 뒤, F-15전투기가 지하시설을 폭격하는 방식으로, 미 폭격기가 공개적으로 실사격훈련을 한 것은 처음이다.

   
▲ B-1B 폭격가 8일 강원도 필승사격장에서 실사격훈련을 실시했다. 실사격훈련이 공개된 것을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출처-미 태평양공군사령부]

이번 훈련에 대해 태랜스 오샤너시 미 태평양공군사령관은 "동맹국 파트너에 대한 북한의 행동은 위협적"이라며 "우리의 연합공군은 완벽하고 치명적인 능력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토머스 버거슨 주한미군 부사령관 겸 미7공군 사령관도 "미 폭격기는 치명적인 군사옵션 중 하나"라며 "이번 임무는 한.미 동맹가 한반도의 지역안정을 유지하고 방어하기 위해 최대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원인철 공군작전사령관도 "한.미 공군은 적이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도발하더라도 즉각 대응해 적 도발을 응징하고 추가도발 의지를 말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반도 전개를 마친 B-1B폭격기 2대는 괌으로 향하는 중 동중국해 해상에서 일본 공군자위대 F-2전투기와 함께 훈련을 실시했다.

제리 마틴즈 주일미군사령관은 "우리는 미.일 동맹을 비롯해 일본 등 동맹국들과 우리는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준비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한.미는 대북 무력시위의 일환으로 지난 5일 동해안에서 연합 탄도미사일 사격 훈련을 실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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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미국 제재엔 추가 시험, 군사적 공격엔 통일성전

북, 미국 제재엔 추가 시험, 군사적 공격엔 통일성전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07/09 [05:3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장면  

 

북이 7일 외무성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담화를 통해 화성-14형 시험발사에 대응하여 미국이 제재와 압박을 가하며 추가적인 시험으로 군사적 공격을 가한다면 통일성전으로 대답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7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북 외무성 대변인은 이날 담화를 통해 "미국이 비상히 높아진 우리 공화국의 종합적 국력과 전략적 지위를 그 무슨 제재 압박으로 허물어보려 할수록 우리는 미국에 크고 작은 '선물보따리'들을 계속 보내주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큰 선물은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과 같은 전략무기를 작은 선물은 상용무기와 소형핵과 중단거리 미사일과 같은 전술무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에서 전략무기는 미국 본토 타격무기이면서 파괴력이 큰 무기로 단 몇 발만으로도 미국 전역을 초토화할 수 있는 무기, 전술무기는 한반도와 일본 등의 미군기지 등 거점을 타격하는 용도의 무기의 의미로 사용해왔다.

 

결국 전략무기를 확장억제력으로 삼아 전술무기를 이용한 미국과의 대결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하나하나 공개함으로써 언제든 전쟁으로 미국을 굴복시킬 군사적 힘이 있음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이는 정치적 측면에서 미국의 핵우산정책 파탄, 나아가 미국의 패권의 붕괴를 의미하며 군사적 측면에서는 해외주둔 미군기지를 언제든 타격할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미국이란 나라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릴 힘이 있음을 증명하는 의미가 있다.

특히 북과 미국은 정전 즉, 전쟁을 잠시 중단하고 있는 휴전상태, 다시말해서 실질적인 전쟁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에 이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은 이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으며 어떻게든지 북과의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 해결방법 중에 전쟁도 있다. 북을 군사적으로 공격하여 제압하는 것이다. 승리만 한다면 가장 완벽하게 미국의 안전을 담보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미 북이 수소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에 성공했기 때문에 사실 북과 전쟁은 쉽지 않게 되었으며 북이 더 강력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공개하면 더더욱 어렵게 된다. 그래서 북이 더 강해지기 전에 군사적으로 공격하려는 움직임이 미국 안에서 일고 있다.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 대사도 화성-14형 시험 발사에 대한 제재안을 논의하는 유엔안보리 회의석상에서 원하지는 않지만 북이 계속 도발을 하게 되면 군사적 옵션 즉, 대북 군사적 공격 방식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실제 한미합동으로 대북 핵심 군사시설을 타격하는 훈련을 진행했으며 7일에는 죽음의 백조라는 B-1b 전략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에 날아와 폭탄투하훈련 하는 모습을 언론에 공개하는 등 대북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7일 연합뉴스의 또 다른 기사에 따르면 노동당 외곽기구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는 7일 대변인 담화에서 '화성-14형' 시험발사에 대응한 이런 한미연합 탄도미사일 사격훈련 등을 언급하며 "미국의 단말마적 발악으로서 트럼프 행정부의 대조선(대북) 적대시 책동이 극히 무모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우리 군대와 인민은 트럼프의 미치광이 같은 군사적 선택에 기꺼이 대응할 만단의 준비가 이미 되어있다"며 "앞으로 심심치 않게 크고 작은 선물 보따리들을 자주 보내주어 미국을 더욱 불쾌하게 해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사실상 ‘전쟁할테면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태평화위 대변인은 "미국의 음흉한 선제공격 기도를 대화니, 주도적 역할이니 하며 가리워(가려)보려는 남조선 당국도 일단 전쟁이 터지면 무사할 수 없다"고 덧붙였는데 이는 미국과 전쟁이 터지면 바로 남측으로 밀고 내려오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가 없다. 

실제 북은 미국이 0.001mm라도 침범한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일성전을 벌여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입장을 계속 밝혀오고 있다. 

결국 참수부대를 보내건, 외과수술식 타격을 가하건 북 수뇌부 집무실을 골라 타격을 하건 북에 대한 작은 공격이라도 가한다면 바로 통일성전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조금도 무섭지 않다며 앞으로도 계속 크고 작은 선물보따리를 미국에 보낼 것이라고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외무성이건 아태평화위건 이렇게 미국에게 앞으로도 계속 선물보따리를 보내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북의 대미결전의지, 북미대결전 최종판가리 의지를 확고하게 굳힌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그러면서도 북은 대화를 통한 북미관계문제 해결을 또 다시 촉구하였다. 북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 "우리를 보는 미국의 전략적 시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며 미국은 지체 없이 대조선 적대시정책을 포기하고 우리에 대한 핵위협 공갈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북에 대한 안전이 담보되면 북의 핵과 미사일 문제도 미국과 협상할 의지가 있음을 북은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북에 대한 핵위협을 제거하는 것은 주한, 주일미군기지의 철수와도 연결되는 문제이며 적대관계 청산은 북미평화협정 체결을 의미한다. 이는 사실상 동북아에서 미국의 군사패권포기를 요구한 것이어서 미국으로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내용이다.

 

하지만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닌 해결방법은 이 대화의 방법밖에 없다. 미국의 고민이 깊어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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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광장에 모인 촛불시민들 “박근혜 정권이 가둔 양심수 석방하라”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 석방 문화제

옥기원 기자 ok@vop.co.kr
발행 2017-07-08 21:59:33
수정 2017-07-08 21:5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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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촛불의 힘으로 감옥문을 열자! 1000인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우산으로 촛불을 만들고 있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촛불의 힘으로 감옥문을 열자! 1000인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우산으로 촛불을 만들고 있다.ⓒ양지웅 기자
 

“한상균, 이석기, 배태선, 이미숙, 김홍열, 이상훈, 최민, 김혜영, 지영철, 김한구, 이영수···”

‘양심수 석방 추진위원회’가 선정한 ‘양심수’ 38명의 이름이 광화문 광장에 울려 퍼졌다. 1000명의 시민이 노랗고 하얀 우산을 활짝 펴 촛불을 형상화하며 양심수 석방을 염원했다. 이들은 “양심수 석방은 가장 용기있는 개혁”이라며 “노동자, 민중을 위해 싸우다 박근혜 정권 때 감옥에 갇혔던 양심수 전원을 석방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촛불의 힘으로 감옥문을 열자! 1000인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촛불의 힘으로 감옥문을 열자! 1000인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양지웅 기자

8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 석방 문화제’가 열렸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2천여명(주최측 추산) 시민이 광장을 찾아 촛불을 들었다.

이날 문화제를 주최한 ‘양심수 석방 추진위원회’는 “감옥 안에 양심수를 그대로 두고는 인권을 말할 수 없다”며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게 가장 용기있는 개혁인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촛불시민들이 다시 광장에 모였다”고 말했다.

이날 문화제는 작년 겨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집회 당시 사회자, 연출팀, 가수 등이 함께 무대를 꾸몄다. 사회자 김덕진, 박진, 윤희숙, 가수 이한철, 박준, 손병휘 등 촛불집회에 함께 했던 반가운 얼굴들이 무대에 오를 때 참가자들은 큰 박수로 호응을 보냈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촛불집회 사회를 봤던 김덕진 천주교인권위 사무국장과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윤희숙 전 한국청년연대 상임대표가 사회를 보고 있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촛불집회 사회를 봤던 김덕진 천주교인권위 사무국장과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윤희숙 전 한국청년연대 상임대표가 사회를 보고 있다.ⓒ양지웅 기자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촛불과 함께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촛불과 함께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이날 문화제는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과 노동자 양심수, 통합진보당 해산과 내란조작 양심수, 동성애자 양심수, 국가보안법 양심수 등 주제로 나눠 총 4부로 진행됐다.

노동자 양심수 석방 문제와 관련해 민주노총 박병우 대외협력실장은 무대에 올라 “한상균 위원장을 비롯해 15명의 노동자들이 노동권 쟁취를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갔고, 국제노총 등 전세계 노동·인권단체들은 이들이 석방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며 “8.15사면 때 한 위원장 등이 석방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새정부는 이에 합당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란음모조작사건 변호를 맡았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하주희 변호사는 “내란조작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문제는 감옥에 갇힌자들과 10만명의 당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중요한 의제를 제시하는 한축이 무너진 것”이라며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고 탄압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석방되고 당원들의 명예가 회복되는게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가수 이한철이 공연하고 있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가수 이한철이 공연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촛불의 힘으로 감옥문을 열자! 1000인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현수막을 펼치고 있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양심수석방문화제에서 촛불의 힘으로 감옥문을 열자! 1000인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현수막을 펼치고 있다.ⓒ양지웅 기자

이날 문화제는 각계 단체 대표들의 발언과 가수들의 공연으로 다채롭게 꾸며졌다. 참가자들은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날씨해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한편, ‘양심수 석방 추진위원회’는 향후 양심수 38명의 감옥문을 열기 위한 활동을 이어갈 방침이다. 현재 세종문화회관 인근에서는 양심수 석방 서명과 독방 체험, 피켓 시위 등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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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팔뚝 천만 개 자르고, 개선문 세우다

 
[유라시아 견문] 브뤼셀 : 다문화사회와 다문명세계
2017.07.08 12:26:12
 
 

 

 

 

1. 암흑의 핵심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다. 선입견이 무섭다. 편견이 무겁다. 색다름을 새로움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고정관념이 고약한 장애물이 된다. 낯선 것을 익숙한 틀로써 변형하여 재단하기 일쑤이다. 20대의 세계관으로 반세기 여생을 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글줄이나 읽었다는 이들일수록 그러하기 십상이다. 단단하기보다는 딱딱하다. 그렇게 아재가 되고 꼰대가 되어간다. 살아가기에는 편할 것이다. 그 편리함을 신념이나 신조로 근사하게 포장할 수도 있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최대한 선입견을 버리려고 애쓴다. 머리를 말랑말랑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천진한 눈으로 천일 견문을 이어가려고 했다. 그 훈련이 통 안 통하는 곳이 브뤼셀이었다. 


아는 게 병이다. 나는 네가 지난 세기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아는 만큼 여행의 경로도 달라졌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데르뷰덴이다. 중심가에서 동남쪽으로 뻑은 소와인 숲에 자리한다. 구태여 시내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곳부터 찾은 것이다. 몽고메리 역에서 44번 트램을 타면 된다. 목적지가 종점인고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었다. 느긋하게 창 밖을 감상할 수 있었다. 광대한 녹지 사이로 여러 나라 깃발이 보인다. 각국 대사관이 밀집한 외교가와 고급스런 주택지도 스쳐간다. 과연 유럽의 수도다운 풍경이다. 트램역에 내려서도 곧장 공원이 펼쳐진다. 아름드리 수목들에 곳곳에 조형된 연못들도 어여쁘다. 일요일 점심, 가족끼리, 친구끼리, 연인끼리 오순도순하다. 저 멀리 눈에 드는 코끼리 동상마저 살아 걸어 다닐 것 마냥 생기가 돌고 활기가 넘친다. 마침내 왕립 중앙아프리카 박물관에 당도한 것이다. 

 

▲ 왕립 중앙아프리카 박물관. ⓒ이병한

 

 

5년 전이다. 박사 논문을 쓰면서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를 추적했다. 베이징과 자카르타와 델리와 콜롬보와 카이로와 모스크바에서 발간된 자료들을 모으고 읽어갔다. 1960년대, 중소논쟁의 한복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작가들도 친소파와 친중파로 나뉘어 다투었다. 유'이'(二)하게 이구동성을 이룬 주제가 있었으니, 첫째가 미국과 베트남전쟁이요, 둘째가 벨기에와 콩고 내란이었다. 베트남에서의 미국만큼이나 콩고에서의 벨기에 또한 악명이 높았던 것이다. 그 상징으로서 자주 거론되던 장소가 바로 이 박물관이었다. 사료로써 문자로서만 접했던 장소를 드디어 두 눈에 담게 된 것이다.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레오폴 2세와 직결된다. 1865년부터 1905년까지 재위했다. 그가 콩고에서 수집한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박물관이다. 건축가 샤를 지로(Charles Girault)에 명하여 루이 16세 양식의 궁전처럼 지었다. 1897년 브뤼셀에서 열린 콩고 박람회의 성과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였다. 내부로 들어서니 높은 돔 천장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 아래 야생동물 표본을 비롯하여 고무, 커피, 코코아 등 식물 자료도 풍부하다. 코발트, 망간, 우라늄, 아연, 다이아몬드 등 광물자원 샘플도 다채롭다. 민속 공예품과 토속 악기, 전통 의상 등도 전시되어 있다. 연중 다양한 특별전과 특강이 열린다고 한다. 벨기에는 물론 유럽에서, 아니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아프리카 연구소가 되었다. 나는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벨기에는 소국일뿐더러 신생국가이다. 겨우 19세기에 등장한 새파란 나라이다. 이 작은 나라의 일개 국왕이 본국의 80배에 달하는 콩고를 '사유지'로 확보했다. 유럽의 후발국가로서 아시아에서의 식민지 획득은 힘들었다고 한다. 최후까지 남은 미답지가 아프리카의 콩고 강 일대였다. 1876년 아프리카 협회를 설립하고, 1882년에는 (동인도회사를 모방한) 콩고회사를 출범시킨다. 그러나 이미 회사 운영을 대신하여 식민지 통치로 전환되던 제국주의 시절이다. 콩고회사 또한 곧장 식민지 기구로 변질된다. 콩고의 위치가 절묘하다. 아프리카의 한복판에 자리한다. 서쪽에서는 프랑스가, 동쪽에서는 영국이 강세였다. 중간 중간 독일과 이탈리아, 포르투갈의 식민지들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콩고를 차지하면 아프리카에서의 세력균형이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럴 바에야 소국의 왕에게 이 땅을 맡기는 편이 낫다는 담합에 이른다. 레오폴 2세의 사유지에 합의함으로써 완충지대를 설정한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1885년 '콩고 자유국'이다. 


자유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유럽의 식민통치 가운데서도 가장 잔혹한 장소였다. 혹은 개인 재산이었으므로 더더욱 자유롭게 착취가 자행되었다. 자동차 발명으로 타이어 수요가 폭발하던 무렵이다. 천연 고무 가격이 급상승한다. 국왕의 사고 속으로 막대한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졸부는 좀체 어질기가 힘들다. 벼락부자의 채찍질이 더욱 거칠어졌다. 중노동에 항의하는 이들은 오른쪽 팔을 베어버렸다. 그 형벌로 희생된 숫자가 '천만'을 헤아렸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표기가 잘못된 것인가 동그라미를 그리고 물음표를 달았다. 그런데 카이로에서 나온 문서에서도, 타슈켄트에서 작성된 문헌에서도 '천만'이라는 숫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17세기의 균형이 붕괴되어버린 19세기의 초상이었다. 몸통에서 떨어져 나와 뒹굴거리는 천만의 까만 팔뚝이 벨기에의 선입견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100년이 더 지난 오늘날의 벨기에 인구가 천만이다. 착잡하기보다는 참담하다. 그 '문명화 사업'의 본질을 일찍이 꿰뚫어본 예외적인 사람도 있었다.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이 바로 벨기에의 콩고 수탈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이 작품을 모티브로 삼아 베트남으로 무대를 옮겨 제작된 영화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이다.  

 

 

▲ 생캉토네르 개선문. ⓒ이병한

 

 

샤를 지로는 세기의 건축가였던 모양이다. 브뤼셀이 자랑하는 생캉토네르(Cinquantenaire) 개선문 또한 그의 작품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거대함에 압도된다. 파리의 개선문보다 더 크지 싶다. 벨기에 건국 50주년을 기념하여 188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건설된 것이다. 그런데 규모가 너무 커서 최종 완성된 것은 1904년이라고 한다. 양 날개로는 왕립미술역사박물관과 왕립군사박물관이 들어섰다. 천만의 팔뚝을 잘라내며 축적한 거대한 부가 이곳 브뤼셀에서 찬란한 건축물로 승화한 셈이다. 식민지 경영은 너무나도 달콤했던 모양이다. 1960년 콩고가 독립한 이후에도 그 중독된 맛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광산 지역만 분리 독립시키는 교묘한 방안을 획책했다.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여 지방 세력의 무장투쟁을 독려했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콩고 내란이 시작된 것이다. 베트남전쟁과는 달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960~70년대 인도차이나의 밀림에 못지않은 지옥의 묵시록이 펼쳐졌던 장소가 아프리카의 콩고이다.  


생캉토네르 광장에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따뜻한 봄 햇살에 싱그러운 녹음. 음침한 제국주의 시대와 콩고 내란의 그림자는 말끔하게 소거되었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에게는 망각이라는 축복이 수여된다. 역시 아는 게 병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나는 좀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즐길 수가 없었다. 이 예쁘장한 중세풍 도시가 되레 야속하고 얄미웠다. 빅토르 위고가 '위대한 광장'이라고 찬탄해마지 않았다는 그랑플라스의 회화적 아름다움 앞에서도 어쩐지 배알이 더욱 꼬이는 것만 같았다. 바삭함과 촉촉함이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 벨기에 와플마저도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차라리 독주가 땡겼다.  

2. 아세안의 기적 

빨빨거리고 돌아다니지 않는다. 관광 명소를 즐겨 찾지도 않는다. 점과 점 사이 선 잇기를 좋아한다. 명소와 명소 사이, 도시의 공기를 들이킨다. 하늘과 태양과 구름을 나침반 삼아 무작정 걷는 쪽이다. 카메라도 잘 챙기지 않는다. 카메라를 메는 순간 렌즈가 주인이 된다. 정작 나는 목줄 찬 안내견이 된 기분이다. 카메라는 어디까지나 '업무용' 장비일 뿐이다. 발길 닿는 대로 하염없이 걷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가 보이면 진지를 차리고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곳에서 사람들 구경하는 것이, 사피엔스를 관찰하는 것이 훨씬 더 재미나다.


이튿날 진을 친 곳은 룩셈부르크 광장이다. 마주 편으로 유럽의회 건물이 내다보이는 명당자리다. 지붕을 반원형 돔으로 처리했다. 유럽연합(EU)을 상징하는 파란색 유리창이 돋보인다. 햇볕을 받아 푸른빛을 반사한다. 의회 내부를 구경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싶지가 않았다. 킨들을 열어 EU에 대하여 지젝이 쓴 글을 읽는 쪽이 내 스타일이다. 그런데 다른 책 한 권이 다운로드 된다. 싱가포르대학의 키쇼어 선생이 선물로 보내오신 것이다. 벌써 2년 전이다. 싱가포르 건국 50주년을 기하여 뵈었다. 당시 아세안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노라는 얘기를 들었다. 2017년 8월이 아세안 창립 5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새 2년이 훌쩍 흐른 것이다.  

▲유럽의회. ⓒ이병한


2017년 아세안은 노벨평화상을 노리고 있다. EU가 수상한 것은 2012년이다. 5년 사이 무척 머쓱하고 민망해졌다. 영국은 이미 EU와의 결별을 선택했고, 각 나라에서 선거가 열릴 때마다 또 다른 이탈국이 생길까봐 브뤼셀은 전전긍긍한다. 극우파만 준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젝 같은 동유럽의 급진좌파 지식인들도 소련의 위성국에서 벗어났더니, 서유럽의 내부 식민지가 되었다며 EU 해체를 목청껏 외쳐댄다. 좌/우 양쪽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동네북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에 비하자면 아세안의 성취가 훨씬 값지다며 세계의 관심을 환기하고 촉구하는 것이 <미라클>의 취지였다. 서문에 이어 본문까지 내쳐 읽게 된 것은 '다문명 세계'라는 접근 때문이었다. EU의 다문화사회가 문명간 공존의 방법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아세안(ASEAN)이야말로 여러 문명을 아우르는 독보적인 국제기구라고 자부하는 것이다. 다문화사회와 다문명세계라? 색다른 접근이다. 새로운 발상이다. 뇌가 말캉말캉해진다. 미끼에 훅 낚였다. EU 본부를 앞에다 두고 ASEAN 책을 읽느라 꼬박 한나절을 보냈다. 

 


유라시아의 극서에 자리한 유럽과 달리 동남아시아는 2000년이 넘도록 유라시아 문명의 교차로였다. 크게 4번의 물결로 가름해볼 수 있다. 인도의 물결, 중국의 물결, 이슬람의 물결, 유럽의 물결이다. 마지막을 제하고는 비교적 순탄하고 평화로운 물결이었다. 그래서 동남아시아는 지구상에서 문화적, 종교적, 언어적, 민족적 다양성에서 단연 으뜸인 곳이 되었다. 2억5000만의 무슬림에 1억4000만의 불교도에 1억3000만의 기독교인에 7000만의 힌두교도가 더불어 살아가는 풍요로운 땅이다. 세속적 관점에서도 다양한 체제가 공존한다. 왕국과 공화국이 있는가 하면, 공산당이 다스리는 사회주의 국가도 여전하다. 인류의 축약도이자, 압축된 지구인 것이다. 지구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다문명 세계, 다체제 지역이 문명의 충돌 없이, 이념과 체제의 갈등 없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음을 인류에게 증명해 보였다는 것이다. 출범 당시 만해도 전망은 무척 어두웠다. 1967년, 동남아시아는 세계의 화약고였다. '아시아의 발칸'이라고도 불리었다. 베트남 전쟁은 최고조로 격화되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깊숙이 휘말려들었다. 태국과 필리핀의 미군기지는 풀가동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갓 분리 독립한 싱가포르는 존속을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양대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또한 영토 분쟁으로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다. 내륙부도 해양부도 온통 전운에 휩싸였던 시점에 아세안이 출발했던 것이다. 돌아보니 주역들의 면모가 참으로 흥미롭다. 태국의 타낫(Thanat Khoman)은 프랑스에서 교육받았다. 와인을 사랑하고 유럽 문학에도 조애가 깊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철저한 반식민주의자이기도 했다. 라모스(Narciso Ramos)는 필리핀에서 태어났다. 미국의 역사에 정통한 기독교도였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의 이념으로 필리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말릭(Adam Malik)은 수마트라에서 태어난 무슬림이다. 네덜란드어에 농하고 영어도 구사했다고 한다. 수카르노와 더불어 반식민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라작(Abdul Razzk)은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리콴유를 만나고 영국에 맞선 반식민주의 운동에 동참한다. 라자라트남(S. Rajaratnam)은 스리랑카의 타밀계 힌두 집안에서 태어났다. 싱가포르로 이주한 후에 반식민주의 운동에 가담한다. 불교도 태국인, 크리스천 필리핀인, 두 명의 무슬림, 그리고 싱가포르의 힌두교도까지. 이들이 모여서 아세안 선언에 조인했던 것이다. 단순한 국가간 회합이 아니었다. 출발부터 문명간 연합체였다. '역사적 동남아'에 정치적 형식을 부여하여 현대적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아, 장탄식이 새어나왔다. 깨달음은 항상 늦다. 1967년 8월의 방콕이 얼마나 위대한 순간이었나를 이제야 알아챈다. 동남아를 누비고 다녔던 2년 전만 해도 눈에 들지 않던 대목이다. 인류의 미래를 앞서 제시했다. 21세기의 선취라고 할만하다. 상상력을 가동해 본다. 기독교도인 트럼프와 유교 좌파인 시진핑과 정교회 신자인 푸틴과 무슬림 하메이니와 힌두교도 모디가 한 자리에 모여서 세계평화, 태평천하를 다짐하는 근사한 조합을 공상해 본다. 흔하디흔한 국가간 회담(United Nations)이 아니다. 문명간 연합(United Civilizations)이다. 기가 막히는 장면이다. 기똥찬 장관이다. 유투브에서 "We dare to dream, We care to share. Together for ASEAN."을 노래하는 '아세안의 길'을 찾아 들었다. 소름이 돋는다. 등잔 밑이 어둡다. 유불도에 기독교와 이슬람까지 혼합시킨 베트남의 민간종교 까오다이 사원도 다시 챙겨보았다. 

▲ 호치민의 까오다이 사원. ⓒ이병한

 

 

5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불안했던 지역을 가장 안정적인 지역으로 탈바꿈시킨 아세안은 향후 50년의 장래도 다짐하고 있다. 첫째는 아래로, 민간으로의 하방이다. 둘째는 아세안 모델의 수평적 확산이다. 민간이 주도하는 기구로 진화함으로써 각국의 정권교체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20세기형 국제기구의 한계를 혁파해갈 것이라고 한다. 국제기구에서 민제(民際)기구로 조직 성격을 전환시켜간다는 것이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아세안 도시연합으로 공동주최하는 획기적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아세안 모델을 세계화하는 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21세기의 'CIA', 중국(China), 인도(India), 미국(America)의 패권 경쟁을 억제하는 창조적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인도양과 태평양의 평화를 견인하는 주역이 되겠다는 것이다. 21세 전반기의 G2 미국과 중국, 21세기 후반기의 G2 중국과 인도가 천하삼분지계의 중지를 모을 수 있는 방편으로 아세안을 활용하라는 것이다. 2067년을 내다보는 담대한 구상이다. 아세안 100주년을 준비하는 원대한 목표이다.  


감탄을 연발하다 문득 고개를 들자 EU 의회가 달리 보인다.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네덜란드 깃발이 나부낀다.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를 통치했던 프랑스의 깃발도 펄럭인다. 필리핀의 국명에까지 흔적을 남긴 스페인의 깃발도 눈에 든다. 그런데 말레이시아부터 미얀마까지 다스렸던 영국의 깃발은 그새 사라졌다. 브뤼셀의 고위 관료들은 영국과의 이혼 소송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 정중앙에 자리한 파란색 EU 깃발이 옹색하다. EU는 '다문명 세계'에 값하는 조직인가? 기독교 일색일뿐더러 '자유주의 근본주의'로 획일화된 기구가 아닌가? 냉전의 주박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난 모임인가? 그제야 건물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무장인력들이 도드라져 보인다. 경찰만이 아니라 특공대까지 투입되어 경비가 삼엄하다. 벌써 EU 의회를 겨냥한 테러가 두 차례나 일어났다. 좌파도 불만이요, 우파도 불평이며, 무슬림들은 불안하고 불편해 하는 기구이다. 유럽과 아랍, 기독교와 이슬람의 평화공존은 난망해 보일뿐더러, 유럽의 동부와 서부 사이에 패인 골도 무척 깊다. 어느 쪽이 신세계화와 진세계화에 부합하는 미래형 혁신체인가? 혹 EU가 ASEAN을 견문하고, 그 노하우를 한 수 배우고 익힐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일방적인 학습에서 교학상장, 상호진화로. ASEAN의 노벨평화상을 축원하는 답신 메일을 보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3. '1989년 체제' 

눈썹이 꿈틀 솟는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본부를 지켜보고 있자니 심란하다. 마음이 어지럽다. 2년간 삭혀온 불만이 터질 것만 같다. 명색이 유라시아 견문이건만,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회고해 보고 싶었다. 천 년 전 아랍문명의 절정을 구현했던 이라크의 바그다도도 눈에 담지 못했다. 기독교가 탄생한 시리아 땅도 밟아볼 수 없었다. '이슬람 사회주의'를 구축했다는 리비아의 살림살이도 관찰하지 못했다. 이 곳곳에 구멍이 뚫린 공백지대가 대개 NATO군의 폭탄이 투하되었던 장소이다. 아프간부터 리비아까지, 남아시아부터 북아프리카까지 '민주화'라는 이름의 무질서를 양산하는 전위부대였던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고, 나의 이념과 체제와 가치관을 기어코 남에게도 주입시키겠다는 십자군의 못된 습성을 NATO군이 계승하고 있는 것 같다. 
 

▲ 나토 본부. ⓒ이병한


NATO는 명백하게 냉전기의 산물이다. 그런데 냉전 종식 한 세대가 흐르도록 NATO는 해체되지 않았다. 커녕 도리어 몸집을 불리고 근육을 키웠다. 동유럽의 위성국들과 소련에서 분리 독립한 신생국가들까지 거느리는 비대한 조직이 되었다. 군산복합체의 총화로 진화한 것이다. 그러나 그 오월동주도 변곡점에 이른 듯하다. 2016년 나토 창설 60주년을 지나 올해 61번째 회합에서 미국과 유럽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유럽의 좌장 메르켈이 트럼프에 대한 불편한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포스트-아메리카 세계의 도래를, 유럽의 독자노선을 공공연하게 천명한 것이다. 대서양 사이로 구미(歐美)가 멀어진다. 영국의 이탈로 흔들리는 EU에 이어 NATO 마저도 미국과 독일의 갈등으로 내연한다. NATO 최강 부대의 하나였던 터키마저 멀어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파죽지세로 동진하던 지난 30년의 기세가 크게 한풀 꺽인 것이다. EU도 NATO도 결정적인 전환기이다. 

 


브뤼셀에서 정작 EU와 NATO를 깊이 천착하지 않았다. 뜬금없이 ASEAN를 더 자세히 살폈다. 엉뚱하달 수도 있겠다. 퉁치고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EU의 속성과 NATO의 실체를 살피는 데에도 동유럽이 훨씬 요긴하다. 1989년 공산주의 정권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져간 이후, EU에 포함되고 NATO에 편입되어 갔던 지난 30년을 복기하는 편이 더욱 이롭다. 그 중에서도 요체는 발칸 반도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20세기를 열고, 유고내전으로 20세기를 마감한 '암흑의 핵심'이었다. 탈냉전 이후 NATO군의 첫 공습이 단행된 곳도 발칸이었다. 발칸을 '자유민주 세계'로 평정한 이후에 남아시아부터 북아프리카까지 종횡무진 활약한 것이다. 고로 1989년 역사의 종언에 임하여 서구화의 막차에 올라탄 발칸의 경험을 반추하는 편이 EU와 NATO로 상징되는 구세계화의 적폐를 밝히는데도 유용할 것이다. 이미 경제적 복속과 군사적 종속으로 점철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이 무르익고 있었다. '1989년 체제'에 대한 자성과 비판으로 '다른 유럽', '다른 백년'에 대한 담론이 분출하고 있었다.


서구와 러시아 사이 발칸이 자리한다. 유럽과 아랍 사이 발칸이 위치한다. 지난 백년에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교착하고, 지난 천 년에는 기독교와 정교회, 이슬람이 교차했던 곳이다.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 소비에트연방과 유럽연합까지. 서유라시아 천년의 제국사가 응축된 장소가 바로 발칸이기도 하다. 다시 기차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한다. 유럽 내부의 다문명세계, 발칸 행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에 올랐다. 
 

▲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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