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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군사화', 그리고 파워엘리트의 탄생

[전쟁국가 미국·2강-②] 군산복합체와 안보 관료의 등장
2019.01.15 00:40:08
 

 

 

 

2차 대전은 미국 사회가 전면적으로 군사화되는 첫 번째 계기였다. 이 전쟁을 거치면서 군부가 대외 정책의 실세가 됐고, 대기업은 연방정부를 주요 고객으로 하는 군수산업이라는 새롭고 거대한 수요처를 확보했다. 군산복합체의 등장이다. 

또한 뉴욕에 근거를 둔 국제금융가와 대기업 국제변호사들이 연방정부의 안보 관료로 대거 발탁돼 미국의 대외정책을 전담한다. 이들 군부와 대기업, 안보 관료의 3자 연합은 이후 군사 개입에 의한 세계 경영을 추진한다. 파워엘리트의 탄생이다.

2차 대전을 통해 연방정부가 비대해지면서 전쟁을 결정하는 권한이 사실상 의회에서 행정부로 넘어갔다. 예컨대 반전 정서가 최고조에 달했던 1930년대 후반 미 의회에서는 미국의 해외 참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조항을 헌법에 추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민주당 루이스 러들로 하원의원이 발의한 이 결의안, 즉 '러들로 결의안'은 1938년 1월 의회 표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부결됐는데, 이를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정치력을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리스 내전 개입을 천명한 트루먼 독트린이나 한국전쟁 개입은 의회의 승인은커녕 상의조차 없이 결정됐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다. 

2차 대전의 경험은 미국이 세계를 경영하는 지침 역할을 했다. 그 요체는 군사주의였다. 강력한 군사력이 국내 번영과 세계 패권을 유지해준다는 믿음이었다. 이른바 안보국가(National Security State)가 그것이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안보 관료들은 스탈린을 히틀러와 같은 자리에 놓으면서 '뮌헨의 교훈'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가 히틀러에 양보한 뮌헨의 유화정책이 2차 대전을 불러왔다면서 결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이제 전쟁, 또는 전쟁의 준비는 필요한 것을 넘어 바람직한 것이 됐다. 그리고 정부의 최대 임무는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됐다. 파시즘과 맞서 싸운 어제의 동지 소련이 이제는 불구대천의 숙적이 됐다. 아니, 돼야 했다. 그들에게 소련과는 대화도 공존도 있을 수 없었다. 오직 군사적 대결만이 있을 뿐이었다. 

미국의 군사주의는 2차 대전 직후 약 18개월 간 급속한 동원 해제로 일시적으로 퇴조하는 듯했으나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의 발표로 재시동을 걸었으며 1950년 6월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면적 재무장이 단행되면서 미국 사회의 기본 구조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연방정부의 팽창 : 안보국가(National Security State)의 탄생

2차 대전은 미국의 연방정부를 급속하게 팽창시켰다. 그중에서도 안보 부문의 팽창이 두드러졌다. 전쟁이 일어나던 1939년 미 연방정부의 공무원은 80만 명이었고 이중 안보 관련은 10%였다. 전쟁 직후 공무원의 전체 규모는 400만으로 늘어났고 이중 75%가 안보 관련이었다. 전체 관료 숫자는 5배로, 안보 관련 공무원은 8만에서 300만으로 37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1939년에서 1945년 사이 연방정부의 세입 규모는 8.8배 증가했다. 그 돈은 누가 냈을까? 국민들이 냈다. 1차 대전 때 미국은 채권(Liberty Bond) 발행으로 전쟁 자금을 댔다. 반면 2차 대전은 국민 세금(소득세)으로 충당했다.  

1919년에서 1939년까지 미국에서 소득세를 내는 가구는 전체의 1.5~2.5%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3년이 되면 거의 모든 가구가 소득세를 낸다. 1945년에는 개인 소득세 세입이 기업 법인세 세입을 초과하면서 사상 최초로 소득세가 연방정부의 최고 세입항목이 된다. 이후 20년간 민간 소득의 8~9%가 소득세로 징수됐고, GNP의 10~11%가 국방비로 쓰인다.

이처럼 국민의 혈세로 모아진 전쟁 자금은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수 십 개 거대 기업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간다. '이익은 사유화, 위험은 사회화'라는 전쟁과 금융의 공통점이 입증되는 대목이다.  
 

▲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프레시안(최형락)

 
1930년대 중반 미 육군의 병력 규모는 약 14만 명이었고 1934년 국방예산은 2억 4300만 달러였다. 당시 미군이 보유한 무기는 반자동 소총 80정과 대부분 1903년에 만들어진 스프링필드 소총이 전부였다. 군에 대한 지원이 얼마나 미미했던지 1935년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가능하다면" 30일 치 탄약을 비축하는 게 목표라고 말할 정도였다. 1940년에도 미군이 보유한 중화기는 탱크 80대, 폭격기 49대가 고작이었다.

미국의 국방예산은 2차 대전이 발발한 1939년 30억 달러에서 참전 직후인 1942년 200억 달러, 그리고 1945년에는 450억 달러로 급속하게 늘어난다. 불과 6년 만에 15배나 증가한 것이다.  

전쟁 기간 병력 규모는 최대 1600만 명에 달했다. 전쟁 기간 미국은 탱크와 자주포 8만 8000대, 대포 25만 7000대, 기관총 200만 정, 폭격기 9만 7000대, 전투기 9만 9000대, 그리고 22척의 항공모함과 400척의 구축함 및 순양함을 생산했다. 그리고 원자폭탄까지. 그야말로 천문학적으로 군비가 증강된 것이다. 

미국 경제사학자 리차드 드 보프에 따르면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군사 관련 지출은 1939년 90억 달러에서 1945년 2000억 달러로 늘어났다. GNP 대비 군사 지출 비중은 1939년 1.5%에서 1945년 40%로 급증했다. 이에 따라 전쟁 5년간(미국은 1940년부터 전쟁경제체제로 전환했다) 미국의 연간 GNP는 무려 2배로 증가했다(6870억 달러).

로버트 힉스라는 학자는 미국의 2차 대전 전쟁비용을 8400억 달러로 추산한다(1940년 기준 : 인플레 감안 2012년 가격 13.59조 달러). 그에 따르면 1944년 미국의 군사지출은 GDP의 36%, 연방정부 예산의 86%에 달했다. (Depression, War, Cold War(2006), p.80~81, 로버트 힉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 수행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의 2개 전장에서 전쟁을 수행한 유일한 나라였다. 그러나 평상시 국방비의 수십 배에 달하는 거액의 전쟁 자금, 자그마치 1600만 명의 인력이 5년 가까이 전쟁에 동원됐다면 그 사회의 성격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즉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가 그 사회의 성격을 결정한다. 

게다가 관료제의 속성상 한 번 생겨난 조직과 기구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관료제도 일종의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의 생존을 모색한다. 2차 대전을 통해 팽창한 연방정부와 군부의 규모, 역할을 축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안보 국가, 전쟁 국가로의 변화는 2차 대전과 함께 시작됐다. 

군부의 부상 

2차 대전 동안 미 군부는 단지 전투만 수행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을 세우고 집행하는 가장 효율적인 정부기구였다. 즉 미국의 대외 정책은 군부가 주도했다. 국무부의 역할은 극히 미미했다. 2차 대전 때까지 미국의 외교관은 상류 계층, 또는 부호들이 맡았다. 이들의 역할은 주로 미국 기업의 해외 진출이나 영사 업무에 한정됐다. 인원도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정치 업무를 담당하는 외교관은 극히 적었다. 1944년 현재 국무부 총인원은 5,906명, 이중 정치 담당은 336명에 불과했다. 6%가 채 안 된다. 게다가 젊은 외교관 상당수는 군 장교로 징집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무부에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전쟁 수행과 관련된 계획과 집행을 군 합동참모본부에 의존했다. 그는 당시 국무장관인 코델 헐과 거의 대화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학교 동창인 섬너 웰스 차관을 통해 국무부와 소통했다. 1943년 열린 주요 국제 회담인 카사블랑카(1월), 카이로(11월), 테헤란(11월) 회담에 헐 국무장관은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합동참모본부가 참가했다. 국무부의 위상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루스벨트는 처칠과 회동했고 그 직후 합동참모본부를 창설했다. 당초 목적은 영국 참모본부의 상대 역할을 맡는 한편 육군과 해군 간 불필요한 경쟁을 막기 위해서였다(당시 공군은 별도 병과가 아니라 육군과 해군에 소속돼 있었다). 또한 해군의 윌리엄 리 제독을 군과 대통령 사이의 연락책으로 임명해 백악관에 상주시켰다.  

군은 대통령에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군부 지도자들은 다른 어떤 민간 관리보다도 훨씬 자주 대통령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조지 마셜 장군을 매우 높게 평가했던 루스벨트는 "귀관이 외국에 나가 있을 때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구려"라고 할 정도였다. 군부에 크게 의존했던 루스벨트가 합참의 건의를 거부한 것은 2~3차례에 불과했다고 한다.  

군부는 대외관계에 대한 모든 정보와 사고방식의 개념적 틀을 제공했다. 기업계를 대표하는 외교협회(CFR)가 1940년 시작된 '전쟁과 평화 연구'를 통해 전쟁 목표의 큰 원칙을 제시했다면, 1941년 12월 이후 군부는 실제 전쟁 수행을 통해 미국 안보전략의 입안과 집행을 담당한 셈이다.  

전쟁을 통해 미 군부는 주변적 기구에서 사회 전체의 자원을 통제하는 위치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군부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했다. 정치와 군사의 장벽이 무너졌으며 전략을 개발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군부는 정치에 깊숙하게 개입했다. 군역사가 월터 밀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국무부는 너무도 철저하게 소외된 반면, 군부는 너무도 확고하게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대외 전략과 관련해) 미국의 역사적 경험에서 참고할 만한 사례가 거의 없었으므로 전쟁에 관한, 그리고 국가정책에서 군사력의 역할에 관한 미 군부의 교조와 신념은 매우 중요하게 됐다"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전쟁의 주요한 결정들은 대통령과 합참, 그리고 루스벨트의 최측근 해리 홉킨스에 의해 내려졌다. 외교 회의를 준비하고 동맹국과의 협상을 담당한 것은 합참이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각각 아이젠하워와 맥아더가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합참은 "(미국과 해외, 정부와 군 간의) 모든 통신을 장악함으로써 다른 어떤 민간기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상황을 미리 알고 사전에 대비할 수 있었다"

아직 스탈린그라드가 독일군에 포위되어 있을 때(1942년 말~43년 초), 미 군부는 벌써 전쟁이 끝난 후 소련의 군사 위협에 대비한 군비 강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육군은 450만 병력, 해군은 60만 병력에 371척 주요 전함과 5000척의 보조 군함, 공군은 별도 병종으로의 독립과 70개 전투 그룹과 40만 병력을 요구했다. 미국 내 어떤 세력보다도 먼저 냉전을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 기간 쌓은 경험과 위상으로 말미암아 많은 군부 지도자들이 주요 외교 보직을 차지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마셜이다. 그는 1946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중국 국공내전 협상의 중재역을 맡은 데 이어 국무장관(1947~49년), 국방장관을(1950~51년) 역임했다. 

맥아더는 무려 7년간 일본을 지배했고, 미국 대외 전략의 핵심인 독일 정책을 담당한 것도 힐드링, 바이로드 등 군 출신이었다. 중앙정보국(CIA)도 창립 초기에는 호이트 반덴버그, 로스코 힐렌코터, 월터 베델 스미스 등 장군들이 국장을 도맡았다.

군산복합체 

2차 대전은 미국 경제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군수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 분야를 창출해낸 것이다. 이전까지 미국에는 군사 무기만을 생산하는 군수산업이란 게 없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군수산업은 미국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분야가 됐다.

전쟁 이전 군과 기업의 관계는 물과 기름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이후 군과 기업은 확고한 공생 관계를 맺는다. 군산복합체의 탄생이다. 

2차 대전 이전 미국의 기업가들은 군인을 시대에 뒤떨어진 야만적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앤드류 카네기나 헨리 포드 같은 미국 재계의 거목들은 상업적 평화주의자였다. 교역 확대가 인류 구원의 첩경이며 언젠가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단일 시장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산업 발전과 군사주의는 양립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군사주의는 순전한 낭비일 뿐이었다.

반면 군인들은 기업가를 이윤만 밝히는 유한계급이라고 경멸했다. 공공의 이익에 대한 봉사는 외면한다고 비판했다. 1906년 윌리엄 카터 장군은 "애국과 이윤은 전혀 별개"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1941년 3월 무기대여법(Lend-Lease) 제정을 통해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측에 무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1940년부터 군수물자 생산을 서둘렀다. 미국의 재무장은 헨리 왈라스, 해리 홉킨스 등 뉴딜주의자 주도에 의한 것이었다. 

당초 기업계는 군수물자 생산에 소극적이었다. 과잉 설비 투자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전쟁 수행을 위해 생산 설비를 확대했다가 자칫 유휴시설로 전락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루스벨트가 매년 비행기 5만 대 생산 계획을 제시하자 군과 기업계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 전쟁의 규모가 그 정도로 커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업계는 1차 대전 때처럼 연방정부 소유의 병기창에서 정부 주도로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것을 선호했다. 과잉 설비에 따른 위험 부담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제네럴 모터스(GM)는 1차 대전 때 생산설비를 전혀 확대하지 않았다. 자동차 생산은 이전처럼 유지하면서 군수물자 생산은 3500만 달러에 그쳤다. 2차 대전 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자그마치 120억 달러 상당의 군수물자를 생산한 것이다(340배 이상). 특히 GM은 1942년 2월부터 1945년 9월까지는 단 한 대의 상용차도 생산하지 않았다. 그 대신 377가지의 신형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정부가 아낌없이 연구개발비를 제공하고 생산설비를 지어주며 생산된 제품에 두둑한 이윤까지 보장하는데 군수물자 생산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기업계로서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만난 셈이다. 이제 '애국과 이윤'은 하나가 됐다.

게다가 전쟁을 거치면서 핵무기, 레이더 등 전혀 새로운 군수물자가 속속 개발됐다. 이제 미국 기업계는 연방정부라는 새로운 고객이, 확실하게 이윤을 보장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주문하는 전혀 새로운 성장 산업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정부 개입을 그토록 증오했던 미국 기업은 2차 대전 동안 정부 주도의 군수산업에 대해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기업의 자유를 외치며 정부 간섭을 그토록 싫어했던 미국의 기업이 거대한 정부 보조금으로 회생한 것이다. 전쟁 5년간 미국의 연간 GNP는 무려 2배로 증가했다(6870억 달러). 

정부 지원은 특히 대기업에 집중됐다. 연구개발의 40%가 상위 10대 기업에 몰렸다. 연방정부는 전쟁 기간 중 수백 개 군수공장 건설을 지원했으며 전후 헐값에 민간 불하했다. 260억 달러 중 170억 달러가 정부 지출이었다. 예컨대 유에스 철강은 2억 달러에 건설된 제네바 철강을 4750만 달러에 불하받았다. 정부 자금으로 개발된 특허권도 민간기업에 불하됐다. 감사 결과 7개 중 1개는 거의 공짜로 불하된 것으로 드러났다.

1차 대전 때까지 군수물자 계약은 경쟁 입찰이었다. 그러나 2차 대전 때는 74%가 수의 계약으로 바뀐다. 전시 중 경제 운용에 관한 권한이 대기업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참전 직후인 1942년 1월 루스벨트는 전시생산위원회(War Production Board)를 창설하고 이 기구에 군수물자 생산 계약에 관한 전권을 위임했다. 위원회 임원은 거의 모두 대기업 간부 출신이었다.
 

▲ 1942년 4월 14일 워싱턴 D.C의 해밀턴 호텔에서 전시생산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Picryl


이외에도 루스벨트는 자신의 행정명령으로 만든 각종 전시 연방 기구에 자그마치 1만 명의 기업 경영진들을 포진시켰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수행하려면 기업이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스팀슨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군수물자 생산 계약의 최우선 기준은 얼마나 빨리 납품할 수 있는가와 연구개발 능력이었다. 당연히 대기업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1941년의 경우 군사비 지출의 4분의 3이 상위 56개 기업에 몰렸다. 그중 3분의 1은 6개 기업(베들레헴철강, 제네럴 모터스, 듀퐁 등)이 차지했다. 끼리끼리 해먹은 것이다. '기업사회주의'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전시생산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했던 제네럴 일렉트릭(GE)의 찰스 윌슨 회장은 "중소기업이 탱크나 비행기 같은 복잡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면서 "국방 프로그램은 대기업이 할 일"이라고 강변했다.  

군수물자 생산은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제조원가에 일정 비율의 이윤(9~10%)을 보장해주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제작 원가가 적게 들어도 당초 책정된 대금은 모두 지급됐다. 비용이 더 들면 초과분을 보전해줬다. 

전쟁 후 군수산업 실태를 조사한 상원 국방프로그램특별조사위원회의 해리 트루먼 위원장은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 선물 나눠주듯 생산 계약을 분배했다 (중략) 이전 같으면 기업 스스로 위험 부담을 지고 1년을 꼬박 일해야 벌 돈의 3~4배를, 정부 보증하에 3개월이면 벌 수 있었다"고 비판했다. 

전쟁 특수가 어찌나 달콤했던지 군과 기업이 영구적 협력관계를 맺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1944년 GE 회장 찰스 윌슨은 '육군군수산업협회' 연설을 통해 앞으로도 장래의 전쟁 동원에 대비해 '영구 전쟁 경제(permanent war economy)'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군수물자 생산 기업의 임원 중 한 명을 예비역 대령으로 임명해 국방부와의 연락 역할을 맡기자면서 "최종적으로 군과 기업 사이에는 항구적인 협력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의 국가 정책은 미래의 전쟁에 대비한 산업 역량과 연구개발 능력 확보가 돼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럽고도 논리적인 결론이다. 이에 못 미치는 어떤 정책도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향후 산업계가 똘똘 뭉쳐 "정치적 마녀사냥"을 예방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죽음의 상인'이란 오명을 또다시 뒤집어쓸 수 있다"고 경고했다. 1930년대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2차 대전의 경험은 1930년대 대공황 기간 동안 땅에 떨어진 대기업의 대중적 이미지를 회복하게 해주었다. 대기업은 민주주의의 병기고가 됨으로써 이윤과 함께 애국적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GM이 히틀러를 무찌를 탱크를 생산해내면서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 좋다'는 사실을 이제 부정할 수 없게 됐다 

군의 과제가 변화하면서 기업과 군의 화해도 가속화됐다. 기술과 정치 문제에 대한 군의 개입이 확대되면서(정부 예산의 대부분을 국방 예산이 차지하고, 국방 예산의 지출로 공장, 병원, 주택, 교통 등 민간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침) 군인의 영웅적 윤리와 기업가의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 간의 경계도 희미해져 갔다.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 리차드 바넷은 저서 <전쟁의 뿌리>를 통해 "2차 대전의 경험은 미국 기업으로 하여금 군부를 이윤이 생기는 동맹세력으로, 미국적 생활방식의 영구적이고 합법적인 세력으로 인정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는 "미국에서 민간 기업의 발전은 공공 자금에 의해 뒷받침돼온 것이 사실"이지만 특히 "전쟁은 이들 민간 기업이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데 많은 기회를 제공해 왔다"고 말한다. 특히 2차 대전은 "미국의 생산 수단에 대한 핵심적 통제권(Commanding Height)을 민간 기업에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전쟁들이 가져다준 혜택을 그야말로 보잘것없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미국 민간 기업의 발전이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의 결과라는 신화를 정면 부정한 것이다. 나아가 실상은 공공의 지원에 의해, 특히 전쟁 이윤이 기업의 폭발적 성장을 가져왔고 그중에서도 2차 대전에 의한 혜택은 이전 전쟁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 즉 생산 수단에 대한 핵심적 통제권을 가져올 정도로 막대했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건국 이래 미국에는 상비군이 없었다. 직업 군대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할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상비군이 없으니 당연히 민간 군수산업이란 것도 없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군사경제가 경제의 근간이 될 정도가 됐다. 미국이란 나라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보 관료, 금융가와 국제변호사의 독무대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할 즈음인 1940년 6월 19일, 루스벨트는 공화당 출신의 월가 변호사이자 동부 주류세력(Eastern Establishment)의 원조 헨리 스팀슨(1867~1950년)을 전쟁부 장관(국방부의 전신)에 임명한다. 예일대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스팀슨은 이미 스페인전쟁 당시 전쟁부 장관(1899~1904년)을 비롯해 필리핀 총독(1927~29년), 국무부 장관(1929~1933년)을 역임한 정치거물이었다. 정계를 떠난 뒤에는 뉴욕의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자문변호사로 일했다.  

루스벨트가 공화당 출신의, 그것도 73세의 노정객을 국방 책임자로 발탁한 이유는 스팀슨이 말한 대로 자본주의 국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스팀슨은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전쟁부 장관으로 일했다. 

전쟁부 장관이 된 스팀슨은 자신과 같은 주류세력의 인물들을 끌어들였다. 존 매클로이와 로버트 로벳이 바로 그들이다. 스팀슨은 1940년 9월 매클로이를 비서실장으로, 12월에는 로벳을 공군 관련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 헨리 스팀슨 전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 센터

 
매클로이는 1941년 4월부터 차관보로서 전쟁물자 조달, 연합국에 대한 전쟁물자 조달(렌드리스), 징병, 정보 관련 일을 했다. 또한 전쟁 이후 2대 세계은행 총재, 점령 당시 독일 고등판무관을 역임했다. '의장(Mr. Chairman)'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동부 주류세력의 대부 역할을 했다.  

로벳은 1941년 4월부터 차관보로서 전략 폭격 등 미국의 공군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종전 직후 전쟁부가 출범시킨 로벳위원회를 맡아 CIA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1947년부터 1953년까지 국무 차관, 국방 차관, 국방 장관을 차례로 역임했다.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가 내각 구성을 처음 상의했던 인물이 바로 로벳이다. 

케네디는 당초 로벳에게 국방 장관을 맡기려 했으나 로벳은 건강 문제를 이유로 고사했다. 대신 국방 장관에 로버트 맥나마라, 국무 딘 러스크, 재무 더글라스 딜론을 천거했고 케네디는 이 제안을 모두 받아들였다.  

한편 제임스 포레스탈은 1940년 8월 해군부 차관을 시작으로 1944년 5월 해군부 장관, 그리고 1947년 9월에는 전쟁부와 해군부를 통합해 출범한 국방부의 초대 장관이 된다. 그는 1940년 해군부 장관에 임명된 프랭크 녹스에 의해 차관에 발탁됐다. 녹스는 1936년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루스벨트와 대적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1941년 국무부 차관보를 시작으로 국무부 장관까지 역임하면서 전후 미 대외정책의 골격을 짠 민주당 소속의 딘 애치슨이 있다. 스팀슨, 매클로이, 로벳, 포레스탈 등 공화당 출신과 애치슨 등은 전후 미국에서 냉전 시대의 현인들(Wise Men)으로 불린다. 이들이 주도한 대외 전략이 전후 미국의 번영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동부 뉴욕에 근거를 둔 금융가, 기업가 또는 대기업을 위한 국제변호사라는 점이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각각 국무장관과 CIA 국장을 역임한 존 포스터 덜레스와 알렌 덜레스 형제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요직을 맡은 이들은 미국 경제의 해외 진출을 염원하는 동부의 대자본,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했다. '미국 대기업에 좋은 것이 미국에 좋은 것이며, 미국에 좋은 것이 세계에 좋은 것'이라는 게 이들의 신념이었다. 

20세기 초에서 1920년대까지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이 미국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군사 개입을 했다면, 이들 냉전 시대의 현인들은 1945년 이후 미국 대기업의 세계 정복을 위한 대외 군사 개입의 길을 연 셈이다. 

리차드 바넷은 "1940년 이후 이들 국가 안보 관료들은 미국의 국익을 새로 정의했다"면서 루스벨트의 스팀슨 등용은 미 대외정책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고 지적한다. 

파워엘리트 

"2차 대전 이후 전쟁과 안보, 월가에 대한 구제금융이나 금리와 같은 진짜 중요한 결정은 누가 내리는가? 의회도 국민도 아니다. 군부와 대기업, 안보 관료들로 구성된 파워엘리트들이 내린다." 

미국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는 1956년 발간한 저서 <파워 엘리트>(The Power Elite)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 경제는 "민간 기업 경제인 동시에 영구 전쟁 경제"가 됐으며 이 체제 하에서는 대기업 최고경영진, 군부 지도자, 그리고 행정부 안보 관료가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파워엘리트다. 

밀스에 따르면 선거를 통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정책이나 조세, 그리고 국방비 이외 나머지 예산에 관한 배분 등 중간 수준의 정책들밖에 없다. 국가 안보, 그리고 금리와 같은 진짜 중요한 결정은 의회 정치에 바깥에 있으며 파워엘리트 내부의 권력투쟁에 의해 결정된다. 

미국 국민들이 정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회에서 직업 정치인들이 중간 수준 정책을 놓고 벌이는 다툼일 뿐, 국가 안보와 같은 진짜 중요한 정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의회 정치, 중간 수준의 밑에 있는 '일반 대중'들은 그저 TV에서 보여주는 정치 쇼를 보면서 그것이 정치의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다.  

밀스에 따르면 건국 이후 남북전쟁 때까지 미국의 경제는 소규모 농장과 공장을 소유한 개인사업자들에 의해 지배돼 왔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미국 경제는 "행정적,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2,3백 개 대기업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이들이 중요한 경제적 결정의 열쇠를 쥐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한때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불신 때문에 최소 규모로 유지돼 왔던 군부가 이제는 정부 내에서 가장 크고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부서가 됐다"는 점이다. 

군부 지도자와 대기업 경영진, 그리고 안보 관료들은 이른바 '회전문 인사'를 통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다. 즉 파워엘리트는 독점적, 배타적으로 미국의 대외, 안보, 군사 정책을 결정한다. 

특히 2차 대전 이전 미국인들은 자신의 역사를 "평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간혹 전쟁이 끼어드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미국 엘리트들은, 상호 공포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는 불편하고도 변덕스러운 휴지기라는 것 외에, 평화의 진정한 이미지를 가질 수 없게 됐다. 그들이 오직 유일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의 계획은 완전 장전된 피스톨뿐이다. 한마디로 전쟁, 또는 최고 경계 태세의 전쟁 준비만이 미국의 정상적이고 어쩌면 영구적 상태가 됐다." 

2차 대전은 기업 엘리트와 군부의 결탁을 가져왔다. 1961년 퇴임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처음으로 명명한 '군산복합체'를 만들어낸 것은 2차 대전이었다. 대기업과 군부가 결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군부가 기업의 생산 계획을 모르면 전쟁 계획의 완벽함을 확신할 수 없고, 기업 경영진이 전쟁 계획을 모르면 생산 계획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미국이 세계의 일에 개입을 하면 할수록 행정부의 권한은 커져갔고, 한때 의회에서 이뤄졌던 많은 결정들이 행정부로 이관됐다. 행정부의 권한이 비대해진 변곡점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 때였다.  

전쟁이 끝난다면 

하지만 전쟁이 끝난다면, 군수물자 주문이 끊어지고 수백만 참전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일감은 떨어지고 실업자도 수백만으로 늘어날 것 아닌가.

전쟁 역사가 가브리엘 콜코는 이미 1942년부터 전후 불경기에 대한 경고가 쏟아져 나왔다고 말한다.  

"1942년부터 경제 기획가들 사이에서는 전후 실업 사태에 대한 우려가 나왔고, 공식·비공식 기구들은 전후 국제 교역 부족, 원자재 부족, 투자 기회 부족에 대한 비관적 전망들을 나이아가라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당시 젊은 경제학자였던 폴 새뮤얼슨은 전쟁이 끝난 후 "정부 지출의 감축으로 500만 미국인이 일자리를 잃거나 노동시간의 상당한 감축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예측을 내놓았다.  

또한 딘 애치슨 국무부 차관은 1944년 11월 의회 청문회에서 전후 미국이 "해외 시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완전고용과 번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3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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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나뿐인 달력 "고국이 우릴 잊지 않고 있어..."

사할린 한인동포를 위한 달력, 1월 말 올해도 배달 갑니다

19.01.15 08:06l최종 업데이트 19.01.15 08:07l

 

사할린 한인들  지구촌동포연대가 제작해 선물한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들고 포즈를 취한 사할린한인
▲ 사할린 한인들  지구촌동포연대가 제작해 선물한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들고 포즈를 취한 사할린한인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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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달력 한 부가 배달됐다. 연말연시, 참 흔한 게 달력인데, 이 달력은 일반 달력과 다른다.

'1월이 1일부터 8일까지 다 빨간색이네?'
'한 주가 월요일부터 시작되네?' 
'이게 어느 나라 글자지?' 
'설 명절인데 검정색이네?'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만히 보니 음력 날짜도 있고, 한글로 한국 국경일과 절기, 명절 등도 표기돼 있다. 또 한국의 절기나 국경일에 대한 러시아어 설명도 있다. 가령, 소한은 'слабые морозы', 추석은 'Чусок, день благодарения', 이런 식이다. 도대체 이 달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잊지 않고 찾아와줘서 고마워
   

2019년도 '세상에 하나 뿐인 달력'  사할린 동포들을 위해 제작되는 음력 달력. 구정을 전후해 사할린 한인들에게 전달된다.
▲ 2019년도 "세상에 하나 뿐인 달력"  사할린 동포들을 위해 제작되는 음력 달력. 구정을 전후해 사할린 한인들에게 전달된다.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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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력의 이름은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이다. 러시아 달력을 기본으로 해서 음력일과 절기와 국경일 등을 한글로 표기한 달력인데, '지구촌 동포연대'(아래 킨)라는 시민단체가 사할린 거주 한인들을 위해 2013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제작된 달력은 사할린 한인들에게 전달된다.  

 

"사할린에 갔을 때 나이드신 동포들은 음력으로 일상생활을 챙기더라고요. 사할린 한인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부터 이주해 1938년 이후 강제동원 당한 후 남게 된 분들인데, 1~2세분들은 가족의 생일이나 제사 등을 음력 날짜로 세고 계시더라고요. 근데 사할린에는 음력 달력이 귀한 거예요. 그래서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만들기 시작했죠."

달력 제작 배경에 대한 킨의 최상구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달력을 만들고 전달하는 일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간단하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 제일 큰일이죠. 포털 사이트 '다음'의 '같이가치'를 통해 제작비를 모금하지만, 목표액을 달성한 건 딱 한 번뿐이었어요."

해마다 모금액이 줄어들다 보니 점점 제작 부수도 적어지고, 내년에도 달력을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란다.

달력에 들어가는 사진이나 그림은 작가들의 재능기부로 조달한다. 2018년 달력에는 생명과 삶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민중예술가 이철수 판화가의 작품이 사용됐다.

완성된 달력 500여 부는 화물편으로 미리 사할린으로 보내지고, 일부는 구정 즈음에 '킨 방문단'이 직접 들고 가서 사할린 한인들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전달한다. 

사할린의 한인동포들은 누구인가
 
사할린 코르사코프항    강제동원된 한인들이 처음 도착한 코르사코프항 전경
▲ 사할린 코르사코프항  강제동원된 한인들이 처음 도착한 코르사코프항 전경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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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재단에 따르면 2019년 현재 세계 170여 개국에 대한민국 인구 10%를 상회하는 740만 명가량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 중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처지는 남다르다. 사할린 한인의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 이후에 강제동원된 사람들과 그 후세들인데, 일제의 패망 이후에도 일본과 소련 및 남북한의 복잡한 셈법과 무관심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사할린에 남게 됐다. 더욱이 사회주의 체제하의 소련과는 수교는커녕 민간차원의 교류조차도 허용되지 않아 고국에 있는 부모자식의 생사도 모른 채 70년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가 북위 50도 이남을 일본에게 넘김으로써 북사할린은 소련이, 남사할린은 일본이 통치하게 된다. 그러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남사할린은 다시 러시아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남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된 한인들은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는 신세로 전락하게 됐다.

1930년대에 사할린섬에는 1700여 명의 한인들이 살았는데 자발적으로 이주한 북쪽 지역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 정권의 소수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북사할린에 거주하던 한인들 대부분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극동지역 전체에서는 약 17만 명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사할린 한인 방문단    매년 겨울 '하나뿐인 달력을 전달하기 사할린을 방문한 킨방문단 일행
▲ 사할린 한인 방문단  매년 겨울 "하나뿐인 달력을 전달하기 사할린을 방문한 킨방문단 일행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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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령인 남사할린 지역의 한인들은 일제강점기에 자발적 혹은 강제적으로 사할린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높은 임금'을 주는 '좋은 일자리'를 구해준다는 브로커들에게 속아서 온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30년대 말 석유·가스·석탄 등 자원개발을 위해 사할린섬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과 정부는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사할린 이주를 부추겼는데, 한국인 브로커들이 앞장서서 조선인들을 모집하고 사할린으로 이주시켰다. 

사할린 이주는 초기에는 민간 주도의 모집 형태가 주를 이루다가 1930년대 말이 되면 모집을 빙자한 강제동원으로 바뀌게 된다. 특히 1938년 '국가총동원령'으로 모든 물적·인적 자원을 자의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일제는 1939년 7월 '조선노무자 모집요강'을 통해 1942년 2월까지는 '모집'으로, 그 이후에는 '관의 알선'으로 강제동원을 실시했다. 1944년 9월부터는 아예 '징용령'을 시행했다.
  
사할린 한인 묘역      킨 방문단이 무연고 사할린 한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방문하고 있다.
▲ 사할린 한인 묘역   킨 방문단이 무연고 사할린 한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방문하고 있다.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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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모집요강에 속거나 강제징용된 한인들은 기차나 트럭으로 부산항까지 실려가 일본의 시모노세키항행 배에 태워졌다. 그곳에서 다시 사할린 최남단 코르사코프항으로 실려가 사할린 각지로 보내졌다. 

강제징용된 한인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 30대 장성한 남성들로 주로 탄광이나 도로 및 항만건설, 목재사업장 등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당시 사할린에는 미쓰이, 미쓰비시, 오지제지 등 일본 전범기업들이 다수 진출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이 운영하는 탄광의 수가 50여 개가 넘었고, 일본 최대 제지회사인 오지제지가 남사할린에서 운영하는 제지공장도 9개나 됐다.

1945년 일제의 패망소식을 들은 한인들은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코르사코프항으로 몰려들었지만 귀국선에 오를 수가 없었다.
 
망향의 언덕 사할린 코르사코프항
▲ 망향의 언덕 사할린 코르사코프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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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체결된 '소련지역에서의 철수에 대한 미·소 협정'에 따라 사할린 거주 일본인 29만2600명이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포츠담선언'에서 조선인은 일본인의 범주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당시 귀환하지 못한 한인의 수는 4만3000여 명에 달한다. 1956년 10월 9일 '소·일 공동선언'에 의해 일본인 아내와 조선인 남편 및 그 자식 200~300명만이 사할린에서 귀환했을 뿐이다.

일제에 의해 고통받던 사할린 한인들은 이번에는 소련사회의 차별과 억압 속에서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귀환만을 손꼽으며 '무국적자'로 살다 죽거나, 통일이 되면 귀환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북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다수였다고 한다. 

다행히 1990년대 시작된 '영주귀국사업'으로 사할린 한인 1세들이 뒤늦게나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한인 1세 550여 명은 아직도 사할린에 남아 있다.   

그들에게는 그냥 달력이 아니다
 
'세상에 하나 뿐인 달력'을 받아든 한인들      그들에게는 달력은 '고국이 자신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징표'와 같은 것이다.
▲ "세상에 하나 뿐인 달력"을 받아든 한인들   그들에게는 달력은 "고국이 자신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징표"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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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일행을 맞이하는 한인들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하다. 그분들에게는 달력도 달력이지만 '고국에서 사람이 온 것'이 더 반갑고 고맙다고 한다. "우리를 잊지 않고 먼 곳까지 찾아와 줘서 고맙다"라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분들도 있다.

한인들이 차려 내오시는 밥상에는 어김없이 김치가 있다. 고명을 얹은 잔치국수와 잡채도 모두 한국식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해 주신 한국음식을 먹으면서 자랐고, 또 먹어본 대로 만들기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사람이 한국음식 먹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들 하신다. 

역사 시간에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사할린 한인들의 이야기', 발음도 잘 안 되는 먼 타국땅에서 만나는 주름진 얼굴들 앞에서 죄스러움과 부채의식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작별을 고하고 돌아서는 발길은 언제나 무겁다. 
 
사할린 겨울 자작나무 숲    사할린의 겨울은 혹독하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날이 허다하고 눈은 기본이다.
▲ 사할린 겨울 자작나무 숲  사할린의 겨울은 혹독하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날이 허다하고 눈은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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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의 겨울은 몹시 춥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날도 허다하다. 바다까지도 꽁꽁 얼어붙는다. 산처럼 쌓인 눈과 눈보라는 기본이다. 사할린 한인회가 제공한 낡은 일본제 봉고차를 타고 짧게는 서너 시간, 길게는 예닐곱 시간을 달려 한인들을 찾아가는 길은 고단하다. 

여행의 낭만, 설레임 같은 것은 애시당초 없다. 그래도 해마다 찾아가는 이유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며 반기는 한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도 킨은 어김없이 1월 말에 '2019년도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들고 사할린에 계시는 한인들을 방문할 계획이다.  

* 지구촌 동포연대 홈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kin.or.kr
  
사할린의 겨울    한인들을 찾아가는 킨 방문단 일행.
▲ 사할린의 겨울  한인들을 찾아가는 킨 방문단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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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신년사에 제시된 두 가지 방략

[개벽예감 330] 2019년 신년사에 제시된 두 가지 방략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1/14 [09:30]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2019년 신년사에 제시된 두 가지 방략

2. 전민족적인 정치회합 개최하여 민족의 운명 바꾼다

3. 민족통일기구 수립으로 실현될 낮은 단계의 연방제

4. 모든 준비는 2016년에 이미 끝났다 

 

 

1. 2019년 신년사에 제시된 두 가지 방략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019년 신년사에는 평화통일문제와 관련된 특별한 내용이 서술되었다. 해마다 1월 1일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발표하는 신년사에는 통일국가건설위업에 관한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는데, 올해 신년사에는 통일운동가들과 통일학자들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특별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 특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과 남은 통일에 대한 온 민족의 관심과 열망이 전례 없이 높아지고 있는 오늘의 좋은 분위기를 놓치지 말고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하며 그 실현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나가야 할 것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하며 그 실현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나가야 할 것”이라고 언명한 것은,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는 매우 중대한 과업을 거론한 것이다.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는 것, 바로 이것이 2019년 신년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시한 통일방략이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9년 1월 1일 조선에서 방영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 방송화면에 나온 조선로동당 본부 청사의 야경사진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 본부 청사에서 2019년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2019년 신년사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이 서술되었다. 통일방략은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하며 그 실현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나가야 할 것이라고 서술되었고, 평화방략은 정전협정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밑에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도 적극 추진하여 항구적인 평화보장토대를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서술되었다. 2019년 2월에 열릴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체결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예견되고, 그 이후에 열릴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가 나올 것으로 예견된다. 이것은 평화와 통일의 새 시대가 개막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런 감격의 시대에 살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려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2019년 상반기에 개최될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를 이끌어내야 하고, 그 기본합의를 가지고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을 개최하여 평화통일방안을 확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예견하건대,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가 나온 뒤에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 개최되어 그것을 확정하게 되면, 8천만 민족이 그토록 열망하는 통일국가건설의 결정적인 국면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올해 상반기에 열릴 남북정상회담에서 과연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가 나올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생기는 까닭은, 문재인 대통령이 통일이라는 말 자체를 회피하고 있고, 올해 신년기자회견에서도 통일문제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일의지는 갖지 않았더라도, 신년기자회견에서는 겨레의 최고염원인 통일문제에 대해 슬쩍 한 마디 언급할 수도 있었는데, 그런 의례적인 발언조차 회피하였으니 너무 옹졸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의 태도가 그러할진대, 남북정상회담에서 어떻게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가 나올 수 있을까? 조국통일문제를 회피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옹졸한 태도 때문에 의문이 생길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눈여겨보면 그런 의문은 사라진다. 

 

(1) 2019년 상반기에 열리게 될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방문으로 성사되는 매우 특별한 남북정상회담으로 될 것인데, 주목되는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서울방문이 성사되기 전에 먼저 선결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는 점이다. 첨예한 적대관계를 완화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첨예한 적대관계가 유지되는 가운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군사분계선 대치지역을 통과하여 서울을 방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신변안전이 보장되지 않아 두렵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첨예한 적대관계를 그대로 두고 군사분계선 대치지역을 통과하여 서울을 방문하는 것은, 평화를 실현하려는 의지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서울방문이 성사되면 첨예한 적대관계가 완화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서울방문으로 남북 사이에 조성된 적대관계는 완화될 수 있지만, 조선과 미국 사이에 조성된 적대관계는 전혀 완화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에 조성된 적대관계 중에서 남북 사이에 조성된 적대관계보다 조선과 미국 사이에 조성된 적대관계가 더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래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열리게 될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조미적대관계를 완화하는 중대한 선행조치를 단행하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 견인하여 평화협정체결문제를 합의하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평화협정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방문을 위해 체결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철군과 통일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대전환을 이루어내기 위해 체결되는 것이다.  

 

2019년 신년사에는 통일방략과 함께 평화방략도 담겼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정전협정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련계 밑에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도 적극 추진하여 항구적인 평화보장토대를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합니다”라고 언명함으로써 자신의 평화방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누구나 예견할 수 있는 것처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평화방략은 남, 북, 미, 중 4자회담을 개최하고, 그 회담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9년 1월 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리설주 여사와 함께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회당을 방문하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펑리위안 여사와 상봉하고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그날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국가주석은 "조선반도 정세관리와 비핵화협상과정을 공동으로 연구조종해나가는 문제와 관련하여 심도 있고 솔직한 의사소통을 진행"하였다. 이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중국측의 측면지원을 이끌어냈다는 뜻이다. 2019년 2월 중에 제2차 조미정상회담이 열리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을 강력하게 설득, 견인하여 평화협정체결을 합의할 것으로 예견된다. 이처럼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체결문제가 합의되면, 그 합의에 따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기 위한 남, 북, 미, 중 4자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는 가운데 8천만 민족의 평화실현의지는 최절정에 이를 것이다. 바로 그런 평화분위기 속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적대관계가 완화되어 평화지대로 전변되기 시작한 판문점을 통과하여 서울을 방문할 것으로 예견된다. 우리는 이런 감격의 시대에 살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앞으로 열릴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 견인하여 평화협정체결문제를 합의하려면, 트럼프 대통령을 압박하는 강력한 측면지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새해 첫 정치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2019년 1월 8일 베이징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중국측의 강력한 측면지원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9년 1월 8일 조중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조선반도정세관리와 비핵화협상과정을 공동으로 연구조종해나가는 문제와 관련하여 심도 있고 솔직한 의사소통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발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조선측이 (미국에게) 주장하는 원칙적인 문제들은 응당한 요구이며 조선측의 합리적인 관심사항이 마땅히 해결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전적으로 동감하며 유관측들이 이에 대해 중시하고 타당하게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하면서 중국측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조선동지의 믿음직한 후방이며 견결한 동지, 벗으로서 쌍방의 근본리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정세안정을 위해 적극적이며 건설적인 역할을 발휘해나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처럼 1월 8일 조중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중국측의 강력한 측면지원을 이끌어냈으므로, 제2차 조미정상회담이 열리면,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 견인하여 평화협정체결문제를 합의할 것으로 예견된다.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체결문제가 합의되면, 그 합의에 따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기 위한 남, 북, 미, 중 4자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고, 8천만 민족의 평화실현의지는 최절정에 이를 것이다. 바로 그런 고조된 평화분위기 속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적대관계가 완화되어 평화지대로 전변되기 시작한 판문점을 통과하여 서울을 방문할 것으로 예견된다.  

 

북측의 최고영도자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하게 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민족의 평화실현의지가 최절정에 이른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8천만 민족에게 평화통일방안을 최상, 최대의 선물로 안겨주자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제의하고, 그를 강력하게 설득, 견인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그런 제의를 거부할 명분도 없고, 그런 제의를 거부해서 얻을 이익도 없다.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민족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런 제의를 거부해서도 안 된다.

 

돌이켜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4월 27일에 발표된 판문점선언과 2018년 9월 19일에 발표된 평양공동선언에서 민족자주의 원칙을 거듭 확인하면서,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해 남북관계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업들을 합의한 바 있다. 그러므로 2019년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지난해에 합의한 내용들을 또 다시 중복적으로 합의할 필요는 없다. 평양공동선언에 명시된 것처럼, “현재의 남북관계발전을 통일로 이어갈 것을 바라는 온 겨레의 지향과 염원을 정책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내용을 합의해야 하는데, 그 새로운 내용이 바로 평화통일방안인 것이다.  

 

(2) 올해 안에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강렬한 의지는 2019년 신년사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는 용기백배하여 북남선언들을 관철하기 위한 거족적 진군을 더욱 가속화함으로써 올해를 북남관계발전과 조국통일위업수행에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력사적인 해로 빛내여야 합니다.”

 

위에 인용된 문장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올해를 북남관계발전과 조국통일위업수행에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력사적인 해로 빛내여야” 한다고 언명한 것은, 올해 안에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함으로써 통일국가건설운동에 획기적인 전환을 일으키려는 강렬한 통일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2019년 상반기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여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진행하게 되면, 그런 강렬한 통일의지를 가지고 문재인 대통령을 설득, 견인하여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를 이끌어낼 것으로 예견된다.

 

 

2. 전민족적인 정치회합 개최하여 민족의 운명 바꾼다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은 서울방문과 남북정상회담에서 멈추지 않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신년사에서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하며 그 실현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나가야 할 것”이라고 언명하였을 때, 전민족적인 합의라는 말은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을 예고한 말이다.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할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남과 북의 정부당국은 물론이고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남, 북, 해외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들이 광범위하게 참가하는 정치회합으로 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상하면, 남측 통일부와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공동주최하고, 남과 북의 정당 대표들, 남, 북, 해외의 각계각층 대표들과 개별인사들이 참가하는 것이다. 

 

70년이 흘렀다. 전쟁화염 속에 흘린 민족의 피눈물은 얼마나 많았으며, 대결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은 고통과 불행은 또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는가! 하지만 전쟁화염도, 대결의 소용돌이도 막지 못했다. 그 누구도 감히 우리 민족의 가슴에 불타는 통일염원을 막지 못했다. 바로 그런 뜨거운 통일염원을 실현하는 것이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다. 지나온 70년을 돌이켜보면, 그 누구도 감히 통일국가건설운동을 가로막지 못했다. 수많은 유명무명의 통일운동가들이 통일국가건설위업에 한생을 바쳤고, 목숨까지 아낌없이 바쳤다. 바로 그런 숭고한 역사를 계승하는 것이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다! 

 

70년이 넘도록 분단의 불행과 고통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통일염원으로 가슴 태워온 우리 민족이 다시 자리를 차고 모두 일어나 자주통일강국을 향해 나아가는 민족운명의 전환은 전민족적 정치회합이 성대히 개최되어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고 자주통일강국건설을 준비해나가는 것, 오직 그 길밖에 없다. 바로 그런 민족의 활로를 열어놓기 위해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려는 것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이다. <사진 3> 

 

▲ <사진 3> 미국의 한반도분할점령과 민족분렬정책으로 국토분단과 민족분렬의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던 1948년 4월 하순, 남과 북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자들은 사경에 처한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고 자주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불타는 일념을 안고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1948년 4월 19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가 진행된 것이다. 위의 사진은 1948년 4월 22일 김일성 주석과 김구 선생이 연석회의 회의장으로 걸어가는 장면이다. 1948년 4월 남과 북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자들이 평양에 모여 민족분렬을 배격하고 자주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역사적인 회합을 진행하였던 때로부터 70년이 지난 2019년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기 위한 통일방략을 제시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위와 같은 정세발전을 거론할 때면, 통일국가건설운동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한반도분할점령과 민족분렬정책으로 국토분단과 민족분렬의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던 1948년 4월, 남과 북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들은 사경에 처한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고 자주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불타는 일념을 안고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1948년 4월 19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련석회의’와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가 진행된 것이다. 단독정부수립책동을 저지하고 자주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 개최된 것이다. 당시 서울에서 발간되던 <자유신문> 1948년 3월 30일부에 실린 ‘남북분렬 3년의 암운을 헤칠 서광’이라는 사설은 성사를 앞두고 있었던 전민족적 정치회합이 가지는 거대한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격정적인 필치로 서술한 바 있다. 

 

“이 회합은 조선민족이 요구하는 유일한 활로이며 따라서 이를 희망하는 열의가 남조선 방방곡곡에 충만되고 있다. 이 구국운동이야말로 5천년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자지를 표현한 것이요, 모든 사대주의와 타력의존주의를 박차고 힘있게 진군하려는 민족의 거보로서 세계의 아무도 정당한 민족의 요구와 지향을 막지 못할 것이며 국내의 누구도 이 충만된 의욕과 의지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평양에서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이 진행되었던 때로부터 40년이 지난 1989년 1월 1일 김일성 주석은 신년사에서 평화통일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정치협상을 제의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1989년 신년사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평양에서 북과 남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인사들을 대표할 수 있는 지도급 인사들로 북남정치협상회의를 가질 것을 정중히 제의”하면서, “남조선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총재들과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 백기완 선생을 평양에 초청”하였고, 남북정치협상회의가 가지는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사진 4> 

 

▲ <사진 4> 김일성 주석은 198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평화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남북정치협상회의를 남측에 제의하였다. 그 제의를 적극적으로 수락한 문익환 목사는 1989년 3월 25일 평양을 방문하였다. 위의 사진은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가 환하게 웃으며 다정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다. 미국과 반통일세력이 강요한 민족분렬을 넘어서 우리 민족끼리 화해하고 단합해야 한다는 심오한 뜻을 말해주는 영상이다. 1989년 4월 2일 평양에서 문익환 목사와 허담 당중앙위원회 비서의 공동명의로 발표된 공동성명은 연방제통일방안을 민족공동의 통일방안으로 인정하였다.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난 2019년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기 위한 통일방략을 제시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역사적인 서울방문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을 개최하는 것이 통일방략을 실현하는 올해의 정치일정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북남지도급인사들의 정치협상회의는 현 조건에서 가장 쉽게 민족의 의사를 모을 수 있는 민족적 대화의 마당이며 통일방도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이룩할 수 있는 합리적 방도입니다. 이 정치협상회의의 테두리 안에서 북과 남의 지도급 인사들은 다무적인 회담뿐 아니라 쌍무적인 대화도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조선의 지도급인사들이 건설적인 통일방안을 가지고 평양을 방문한다면 그들을 환영할 것이며, 그들이 내놓은 어떠한 제안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회의할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이 1989년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의한 때로부터 한 달이 지난 1989년 2월 4일 문익환 목사와 백기완 선생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일성 주석이 제의한 남북정치협상회의를 공식적으로 수락하고 그 회의가 성사되도록 노력할 것을 공표”하였다. 하지만 내외반통일세력의 저지에 가로막혀 그들의 방북은 성사되지 못했고, 문익환 목사는 1989년 3월 25일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평화통일방안을 협의하였다. 그 협의에 의해 나온 것이 1989년 4월 2일 평양에서 문익환 목사와 허담 당중앙위원회 비서의 공동명의로 발표된 공동성명이다. 공동성명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지 않고 일방이 타방을 압도하거나 타방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되며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고 명시함으로써 연방제통일방안을 민족공동의 통일방안으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난 2019년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기 위한 통일방략을 제시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체결문제를 해결하고, 역사적인 서울방문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서울에서 진행하고,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기 위한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을 개최하는 것이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을 실현하는 올해의 정치일정이다. 

 

 

3. 민족통일기구 수립으로 실현될 낮은 단계의 연방제 

 

남북정상회담에서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의제가 분단역사상 처음으로 논의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2000년 6월 15일이다. 그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으로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에서 민족공동의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려고 하였다. 남북정상회담 기록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연방제통일방안에 대해 오랜 시간에 걸쳐 상세히 설명하면서 연방제통일방안을 민족공동의 통일방안으로 합의하자고 제의하였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지도자 시절에 3단계 통일방안을 주장하면서 마지막 단계에서 ‘공화국연방’이 출현할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고, 1989년 4월 2일에 문익환-허담 공동성명에서 연방제통일방안이 민족공동의 통일방안으로 인정되었으므로, 연방제통일방안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질 생각되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저런 구실과 핑계를 대면서 그 제의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되어, 6.15공동선언 제2항에는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만 들어갔다. 그 조항은 다음과 같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기로 하였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2000년 6월 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적인 6.15공동성명에 서명하고 환하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치켜든 장면이다. 미국과 반통일세력이 강요한 민족분렬을 넘어서 우리 민족끼리 화해하고 단합해야 한다는 심오한 뜻을 말해주는 영상이다. 6.15공동선언에는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가 명시되었다. 그것은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서로 인정하는 기본합의다. 201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평화통일방안을 전민족적으로 합의하는 통일방략을 제시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19년 전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된 평화통일방안에 관한 기본합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민족공동의 통일방안으로 합의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남측의 연합제안은 남북으로 갈라져 살 수 없는 단일민족을 두 나라로 갈라놓고 평화적으로 공존한다는 평화공존방안이므로, 평화통일방안으로 될 수 없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지 못했고, 그 대신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서로 인정하는 기본합의에만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하려는 평화통일방안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인정하였던 19년 전의 기본합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평화통일방안으로 합의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판단하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6.15공동선언에 나오는 남측의 연합제안은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평화통일방안이라고 볼 수 없다. 연합제안은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지도자 시절에 주장한 ‘공화국연합제’를 뜻하는 것인데, ‘공화국연합’은 남과 북이 서로를 주권국가로 상호인정하고, 두 국가가 영국과 캐나다처럼 국가연합(union of states)을 실현하여 평화적으로 공존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8천만 민족이 염원하는 조국통일은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지, 단일민족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두 국가를 연합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민족은 수 천 년 동안 단일민족으로 완전히 융합되어 살아왔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에도 남북으로 갈려져 살 수 없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통일국가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단일민족의 존재방식이 평화통일방안을 논의하는 출발점이며, 평화통일방안을 확정하는 종착점으로 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남북으로 갈라져 살 수 없는 단일민족을 두 나라로 갈라놓고 평화적으로 공존하겠다는 것은 ‘평화공존’이라는 미명 아래 분단체제를 합법화하는 반민족적 범죄다. 8천만 민족이 염원하는 평화의 참된 의미는 단일민족을 두 나라로 갈라놓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교체하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두 나라의 평화공존을 말하는 것은 ‘평화적인 분단’을 장기화하여 북측을 그 무슨 ‘점진적인 개혁개방’으로 유인해보려는 흡수통합망상의 변종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국가연합-평화공존론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한 사람들은 단일민족을 두 나라로 갈라놓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은 쉽고, 단일민족이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힘들다는 착각 속에 빠져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평화통일방안은 연방제통일방안밖에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그런 까닭에 2016년 6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당, 단체 련석회의는 “온 겨레가 힘을 합쳐 분렬의 장벽을 허물고 조국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자 - 전체 조선민족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 연방제통일방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북남수뇌분들이 민족 앞에 확약하고 온 겨레의 지지와 찬동을 받고 있는 련방제는 가장 합리적이고 공명정대하며 유일무이한 우리 민족의 통일방식이다. 이것을 부정하면 북과 남은 어차피 총부리를 맞대고 싸울 수밖에 없다. 8천만 겨레가 꿈에도 소원하던 통일이 전쟁의 방법으로 이루어져서는 절대로 안 되며 그 누구도 이를 바라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가진 북과 남의 련방제통일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해도 우리 민족이 기어이 이 길을 가야 할 근본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략) 우리는 통일강국건설에서 그 누구를 본받을 것도 없고 다른 나라의 것을 그대로 따라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구체적 실정에 맞고 우리의 땅에 어울리는 련방제방식으로 우리가 소원하는 통일의 집, 우리 식의 통일강국을 세상이 보란 듯이 일떠세우자!”

 

그렇다면 6.15공동선언에 나오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에 대한 안경호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의 설명이 남측 일간지 <한겨레> 2001년 6월 17일부 대담기사에 실렸다. 대담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질문 - ‘민족통일기구’란 구체적으로 뭔가?

답변 - 민족통일기구는 국가기구다. 남쪽의 연합제와 북쪽 연방제의 공통점에 바탕을 두고 진행해나가는 것이다. 이 기초에는 1국가, 1민족, 2제도, 2정부에 기초를 둔 연합-연방제가 있다. 이런 근본기초에 대한 합의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쌍방이 통일방안에 대해 합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민족통일기구는 대외적으로 하나의 국가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질문 - 남북의 현 정부는 해소돼야 하는가?

답변 - 그렇지 않다. 두 정부의 정치, 군사, 외교권 등 현존하는 기능과 권한은 유지된다.

질문 - 민족통일기구는 어떻게 구성돼야 된다고 생각하나?

답변 - 국회와 행정기구 구성은 (남북) 쌍방이 우리 실정에 맞게 창발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위에 인용된 대담내용을 읽어보면,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출현하게 될 민족통일기구는 한시적인 남북정치협상기구 같은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의 두 정부가 행사하는 정치권, 군사권, 외교권을 민족의 공동이익에 맞게 조절하는 중앙정부이며, 국회와 행정부를 가진 명실상부한 통일정부이며, 대외적으로 통일국가를 대표하는 연방정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연방제통일방안에 대해 연구해온 통일학자들은 통일정부가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높은 단계의 연방제로 ‘진화’하게 된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예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출현하는 통일정부는 남과 북의 지역정부들이 수행하는 기능과 권한을 민족의 공동이익에 맞게 조절하는 임무를 점차적으로 강화하게 될 것이다. 그런 조절임무가 오랜 기간에 걸쳐 강화, 발전되면서 연방정부가 남과 북의 지역정부들에게서 군사권과 외교권을 각각 이양 받게 될 때, 그때 비로소 높은 단계의 연방제가 실현되는 것이다. <사진 6> 

 

▲ <사진 6> 위쪽 사진은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이 10.4선언에 서명하고 맞잡은 손을 치켜든 장면이다. 아래쪽 사진은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 20일 백두산 정상 장군봉에서 리설주 녀사와 김정숙 녀사와 함께 천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맞잡은 손을 치켜든 장면이다. 미국과 반통일세력이 강요한 민족분렬을 넘어서 우리 민족끼리 화해하고 단합해야 한다는 심오한 뜻을 말해주는 영상들이다. 수 천 년 동안 한 강토에서, 한 핏줄을 이어오며, 단일민족의 빛나는 역사와 문화를 창조해온 우리 겨레는 그 어떤 경우에도 남북으로 갈라져 살 수 없으며, 반드시 자주통일국가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 통일문제는 민족문제이며, 조국통일은 민족분렬을 극복하고 자주통일강국을 건설하는 민족 자신의 역사적 위업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통일국가건설운동은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완결될 것이다. 통일정부가 남과 북의 지역정부들로부터 군사권과 외교권을 아직 이양 받지 못하더라도, 통일정부가 수립되어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실현되면, 통일국가건설운동은 그것으로 완결되고 조국통일은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높은 단계의 연방제로 발전하는 것은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운동이 아니라, 통일국가 안에서 국가주권과 사회통합을 공고화하는 운동이다.   

 

주목되는 것은, 통일정부수립과 주한미국군주둔이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주적 통일정부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삼천리강토에 어떻게 외국군대가 한 명이라도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통일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평화협정부터 먼저 체결되고, 그 협정에 따라 주한미국군이 완전히 철수되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그 협정에 따라 주한미국군이 완전히 철수하면, 한반도 평화체제 위에 통일정부가 수립될 것이고, 반만년 민족사에서 가장 부강하고 문명한 자주통일강국이 8천만 민족에게 행복한 삶의 터전으로 될 것이다.    

 

 

4. 모든 준비는 2016년에 이미 끝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자신의 통일방략을 2019년 신년사에서 처음 제시한 것이 아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6년 5월 6일 평양에서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를 하면서 “북과 남은 여러 분야에서 각이한 급의 대화와 협상을 적극 발전시켜 서로의 오해와 불신을 해소하고 조국통일과 민족공동의 번영을 위한 출로를 함께 열어나가야 합니다”라고 언명하여 자신의 통일방략을 제시한 바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에 따라 북측은 그 방략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를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 직후에 이미 끝냈고, 그것을 실행할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지난 3년 동안 부단히 노력해왔다. 

 

2016년이라고 하면,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를 완전히 파탄시켰던 암흑기였으나, 북측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에 따라 전민족적인 정치회합을 개최하자는 공식 제안을 남측에게 보냈다. 2016년 6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당, 단체 련석회의는 “온 겨레가 힘을 합쳐 분렬의 장벽을 허물고 조국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자 - 전체 조선민족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우리는 온 겨레의 뜻과 힘을 합쳐 현 난국을 타개하고 북남관계와 조국통일위업수행에서 획기적 전환을 일으켜 나가려는 절절한 념원으로부터 조국해방 일흔한돐을 맞으며 전민족적인 통일대회합을 개최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북과 남의 당국, 정당, 단체 대표들과 명망있는 인사들을 비롯하여 진정으로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 회합에서는 민족의 총의를 모아 최악의 상태에 있는 조선반도의 현 정세를 완화하고 북남관계를 새 출발시키며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출로를 허심탄회하게 론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애국애족적이며 건설적인 이 제의에 해내외 각계층이 적극 호응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를 위한 준비사업에 착수할 것이다.” 

 

당시 북측은 호소문만 발표한 것이 아니라, 전민족적 정치회합 제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준비사업에 즉시 착수하였다. 2016년 6월 27일 북측은 “남조선과 해외의 당국, 정당, 단체 및 개별인사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제의하였다.

 

“우리는 조국해방 일흔한돐이 되는 올해 8.15를 전후하여 북과 남의 당국과 해내외 정당, 단체대표들, 각계인사들이 참가하는 민족적 대회합을 평양이나 개성에서 개최하되 회의명칭은 조선반도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북, 남, 해외 제정당, 단체, 개별인사들의 련석회의로 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남측에서 련석회의와 관련하여 시기나 장소, 참가대상과 토의안건 등 관심하는 문제들에 대한 건설적 의견을 내놓는다면 그것도 허심하게 검토하고 받아들일 충분한 용의가 있습니다. 당면하여 련석회의 개최를 실질적으로 추진할 준비위원회를 각 지역별로 내오고 그에 기초하여 전민족공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면서 남측과 해외에서 그 실천에 속히 착수하기를 희망하며 7월 중에는 합의되는 장소에서 북과 남, 해외대표들을 망라한 전민족공동준비위원회 결성과 관련한 실무접촉을 가질 것을 제의합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2016년 6월 2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는 “온 민족의 통일념원과 지향을 반영하여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제시한 주체적인 조국통일로선과 방침을 철저히 관철하며 민족의 자주적 운명과 통일번영의 휘황한 미래를 열러나가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을 강력하게 조직전개해나가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내오기로 결정하였다. 그로써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국가기구로 승격되었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5년 8월 15일 서울에 있는 장충체육관에서 남, 북, 해외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민족대회'를 진행하는 장면이다. 우리 민족끼리 단결하여 미국의 지배와 간섭을 배격하고 민족분렬을 극복하여 자주통일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과 노력은 지난 70년 동안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남, 북, 해외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자들이 평화통일방안을 합의하기 위해 모이는 전민족적 정치회합은 위의 사진에 나온 남, 북, 해외의 각당각파, 각계각층 대표자들이 참가한 민족대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민족사적 의의를 지닌다. 북측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을 실현할 모든 준비를 이미 2016년에 끝내고, 지난 3년 동안 유리한 조건들을 하나씩 만들어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9년 1월 1일부터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 정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에 따라 전변되기 시작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것만이 아니었다. 2016년 7월 9일 북측은 남측과 해외측에게 “조선반도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북, 남, 해외 제정당, 단체, 개별인사들의 련석회의”를 공식 제안하면서, 연석회의 북측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고 밝혔다. 연석회의 북측준비위원회는 위원장 1명, 각 부문을 대표하는 부위원장 14명, 각계층을 대표하는 위원 50여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연석회의 북측준비위원회 위원장은 김영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다. 김영철 부위원장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보좌하여 남북정상회담에 계속 배석하는 것은, 북측에서 전민족련석회의를 개최하는 준비와 전민족공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말해준다.  

 

2018년 1월 2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당, 단체 련합회의가 또 다시 ‘해내외의 전체 조선민족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호소문에서는 “전민족적인 통일대회합 실현을 위한 투쟁을 계속 줄기차게 벌려 민족대단결의 새로운 리정표를 세우고 전민족적 통일운동의 일대 전성기를 펼쳐나가자!”고 하였다. 

 

2019년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우리는 미증유의 사변들로 훌륭히 장식된 지난해의 귀중한 성과들에 토대하여 새해 2019년에 북남관계발전과 평화번영,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더 큰 전진을 이룩하여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온 민족이 <력사적인 북남선언들을 철저히 리행하여 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의 전성기를 열어나가자!>, 이 구호를 높이 들고나가야 합니다”라고 언명하였다. 

 

북측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을 실현할 모든 준비를 이미 2016년에 끝내고, 지난 3년 동안 유리한 조건들을 하나씩 만들어왔으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1월 1일부터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 정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일방략과 평화방략에 따라 전변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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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경의 ‘세계 지성과의 대화’ - 장하준 교수

[세계 지성과의 대화 ③]장하준 교수-Q. 문 대통령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조언은 “자린고비 경제 그만…복지재정 확 늘려라”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입력 : 2019.01.14 06:00:03 수정 : 2019.01.14 10:09:19

 


‘국가비상사태’라고 발언한 건, 지금 조치 안 하면 ‘큰일’ 경고

[세계 지성과의 대화 ③]장하준 교수-Q. 문 대통령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조언은 “자린고비 경제 그만…복지재정 확 늘려라”

어느 한 나라가 독자적으로 옴짝거리기 힘든 세계화된 경제질서다. 그로 인해 팽배해지는 불안을 다수의 경제학자는 자본주의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사진)에게 대담을 요청했다. 미처 응답을 받기 전, 장 교수는 한국 언론의 특파원들과 인터뷰를 하게 됐고, 기사화된 그의 ‘국가비상사태’ 발언은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속 한국 경제를 진단하려던 애초의 계획을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파고드는 방향으로 조정했다. 대담은 지난 4일 장 교수의 케임브리지대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안희경(이하 안) = 국가비상사태라고 말했는데, 긴급 재난상태인가요.

장하준(이하 장) = 재앙이 닥쳤다는 의미보다 지금 조치를 하지 않으면 큰일이 닥칠 수 있다는 의미의 비상사태죠. 언론은 무엇이든 물을 수 있고, 편집권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해요. 다만 야당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읽어내고, 여당에서도 자세히 읽어보면 의미를 알 텐데도 곡해하는 점이 좀 서글펐어요. (비상사태 얘기는) 일부에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이상 성장하는데 걱정할 일이냐고 하지만 OECD에서 한국은 중하위권밖에 안되거든요. 36개 국가 중 1인당 소득 기준으로 23등입니다. 

안 = 그래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0위권이잖아요. 

장 = 경제 수준을 이야기하려면 1인당 소득을 봐야죠. 덴마크의 1인당 소득은 우리의 2배지만 인구가 500만명이기에 경제 규모는 5분의 1밖에 안됩니다. 성장률을 언급할 때는 인구증가율을 고려해야죠. 2010년 이후 독일은 총성장률로만 보면 연평균 1.8%, 우리는 3%이니까 우리가 잘하는 것 같지만 1인당 소득성장률로 하면, 우리는 인구증가율 0.5%로 2.5%, 독일은 인구증가율 마이너스 0.2%이기 때문에 2%입니다. 2%와 2.5%는 큰 차이가 아니지만, 성장만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잖아요. 더 큰 문제는 지금 우리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가를 얘기하는 사회적인 지표입니다. 단적으로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예요. 1995년까지만 해도 자살률이 OECD 평균 이하였는데 지금은 평균의 3배죠.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고요. 

안 = 사회적인 지표가 나빠진 이유가 경제 때문인가요. 

장 = 그럼요. 복지가 안돼 있어 그렇습니다. 옛날엔 경제성장 속도가 빨라 일자리도 많이 생기고, 봉제공장이 문 닫으면 전자공장 가서 일하는데 4~5주 재교육받으면 됐어요. 지금은 필요한 기술이 고급화돼 철강·조선업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반도체 같은 곳으로 옮기고 싶어도 금방 갈 수 없습니다. 실업이 점점 더 무서워지고, 제대로 된 직장에서 밀려나면 갈 데가 없기 때문에 치킨집을 하는 거죠. 이 모두를 전체적인 패키지로 봐야 합니다. 

안 = 그래서 국가비상사태라고까지 진단한 건가요. 

장 = 비상사태라는 발언을 하게 된 것은 최근 중국이 무섭게 추격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빼고는 다 중국이 잠식하잖아요. 반도체도 중국이 국책산업으로 밀고 있어서 시간문제예요. 인공지능, 나노기술에선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고, 전체적인 경제 수준보다 첨단기술이 발달해 있죠. 우리는 답보상태이기에 지금 틀을 완전히 다시 짜지 않으면 5년, 10년 후에는 정말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정부가, 한두 가지 잘못해서 이 상황을 맞은 게 아닙니다. 우리 경제가 신자유주의적으로 구조화돼서 그래요. 그 때문에 투자도 떨어지고, 고용도 불안해지고, 국민들에게 앞날이 없는 나라가 된 지 벌써 20년입니다. 이를 보살피지 않고 또 5년이 흐르면 돌아올 수 없는 길에 들어갑니다.

■ 투자·고용·복지 새 틀 짜지 않으면…5년 뒤 한국, 돌이킬 수 없는 길 갈 것

세계적 경제학자인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경제의 목표는 다 같이 행복하게 잘 살자는 것으로, 이제 한국도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모두 모여 고민할 때”라며 “‘자린고비 경제학’을 넘어 복지제도 확대로 사회안전망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채영 사진작가

세계적 경제학자인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경제의 목표는 다 같이 행복하게 잘 살자는 것으로, 이제 한국도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모두 모여 고민할 때”라며 “‘자린고비 경제학’을 넘어 복지제도 확대로 사회안전망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채영 사진작가 

 

안 = 그 본격적인 시작이 자유무역협정(FTA)인가요, 아니면 그 전인가요.

장 = 1980년대 말부터 한국 엘리트들 가운데 미국 모델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어요. 기획원 관료들이 ‘경제계획을 없애야 한다’는 얘기를 해요. 자기 부처의 의무가 경제계획인데 경제계획은 나쁘다는 거죠. 거기에 문민정부가 들어서니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체제를 추진합니다. OECD도 가입하고, 기획원도 폐기하고, 경제5개년계획도 없애고, 산업정책 거의 폐기하고. 그런데 묘하게도 소위 운동권 출신들이 동조했어요. ‘산업정책은 군부독재가 하던 파쇼정책’이라는 식으로. OECD 가입 조건 중 하나로 자본시장을 상당히 개방하고, 해고를 쉽게 하는 의제도 들여왔어요. 그때 특히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주주자본주의 논리를 들여와 정부가 기업을 간섭하면 안된다는 주장을 했죠. 그 과정에서 외환위기가 터집니다.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영화에서 재경부 차관으로 나오는 사람을 통해 잘 그렸던데, ‘해고도 쉽게 하고, 구조조정도 쉽게 하는 시장주의를 퍼뜨려야 하는데 노동계, 시민단체에서 반대해 못하고 있다. 지금이 기회다’라는 거죠. 뒷얘기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이 깜짝 놀랐답니다, 저항할 줄 알았는데…. 

안 = 투항을 한 거죠. 

장 = 예. 신자유주의체제가 외환위기 이후 확립되면서 그 이후 정부들이 그 질서로 간 거예요. 물론 차이는 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완전히 극단적으로 나갔고, 노무현 정부는 FTA 하고 동북아 금융허브를 한다면서 김대중 정부보다 더 우파적으로 나갔습니다. 그래도 이 두 정부는 빌 클린턴이나 영국의 토니 블레어, 나중에 버락 오바마가 말한 제3의 길하고 비슷한 걸 합니다. 즉 경제를 시장에 맡기는 게 좋은데, 그러면 희생자들이 나오니까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골수 신자유주의는 ‘희생자 봐줄 필요 없다, 그들이 못나서 그렇다’ 하는 거고. 규제를 완화하고 경제를 대자본에 맡겨놓는 것은 똑같습니다. 

안 = 그로 인해 지금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정치적 반동이잖아요. 보수든 리버럴이든 똑같은 엘리트들이라고 거부하고, 미국은 극우보수에 표를 주고, 프랑스는 무산자의 저항으로 노란 조끼 입고 나서고요. 

혁신 10개 도전한다면 
한두개만 크게 맞으면 돼
실패할 위험 있는 것 해야 
진정한 혁신 가능해져

 

지금 문재인 정부에서 
확실한 좌파정책 안 하면
‘반엘리트 반동’ 나타날 것
 

장 = 세계적인 추세죠. 한국은 특수성이 있어 아직 그렇게는 안 갔지만 20년 동안 신자유주의가 왔다 갔다 하면서 그쪽으로 밀려가고 있어요. 결국 반엘리트, 반동이 나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확실한 좌파정책을 하지 않으면요. 

안 = FTA를 하면 국가는 축소되잖아요. 지금 다시 FTA를 잘하겠다 하고 응원받고, 예전 FTA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FTA가 없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합니다. 

장 = 신자유주의는 굉장히 반민주적인 체제예요. FTA나 투자협정을 맺어서 각국 정부가 하는 일을 국제조약으로 제약하고, 중앙은행이 됐건 규제기구가 됐건 많은 기관을 정치적으로 독립시키려고 해요. 우리는 옛날에 독재권력이 너무 개입했으니까 결정기관의 정치적 독립이란 말이 좋게 들리지만, 사실은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겠다는 겁니다. 물론 자유무역이 수준이 비슷한 나라 사이에선 서로 좋은 경우가 있지만, 수준이 다른 나라 사이에서는 선진국이 이익이죠. 후진국은 새 산업을 개발할 수가 없어서요. 노무현 정권 때 미국과 FTA 한다고 했을 때, 저는 ‘우리가 지금 미국 수준이 되는 나라냐, 그렇게 생각 안 한다’면서 반대했죠. 

안 = 어떤 정부든지 기업의 이윤 앞에 무력해지네요. 

장 = 호주는 미국하고 FTA 할 때 그 조항을 빼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ISDS)는 고사하고 관세만으로도 불리합니다. 선진국들은 평균 공산물 관세가 3%이고 한국은 7~8%예요. 우리는 많이 내주고 그쪽한테는 조금 받는 거죠. FTA 없을 때도 수출 잘했어요.

안 = 그럼 지금 FTA 폐기 쪽으로 나가야 한다는 건가요. 

장 = 저는 그 방향이 맞다고 생각은 하죠. 하지만 특히 미국하고는 국방이 얽혀있으니 이제 와서 안 하겠다는 건 어렵죠. 그러면 하지 않아야 할 족쇄를 스스로 채워놨으니까 다음 단계에서는 뭘 하면 좀 낫겠냐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안 = 당장 뭘 해야 되죠. 

장 = 같이 앉아 모색해야죠. 다시 산업정책을 정립하는 게 중요합니다. 미국은 자유방임주의, 개인의 기업가 정신으로 성공했다고 알려졌지만, 현재 미국이 앞선 분야 대부분은 1950년대부터 정부가 국방연구·보건연구 명목으로 돈을 쏟아부은 곳입니다. 컴퓨터, 인터넷, GPS, 터치스크린 다 미 국무부에서 개발했고, 반도체는 미 해군에서 개발했어요. 아이폰 기술의 99%가 국방연구에서 나온 겁니다. 그 기초기술을 기업이 가져다 발전시킨 거죠. 미 정부의 엄청난 개입이 없었으면 실리콘밸리도 생길 수 없었죠. 미국 제약산업도 연구자금의 30%가 정부에서 나옵니다.

안 = 무슨 명분인 거죠. 

장 = 보건연구죠. 미 전역에 있는 국립보건원에서 세금으로 연구하면 제약회사들이 그냥 가져다 상용화시켜요. 미국 정부처럼 기초연구에 투자하고 마음껏 쓰도록 간접적으로 보조하는 방식이 있고, 독일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중앙정부의 산업정책은 많지 않지만, 지방정부들이 우리의 산업은행 같은 금융기관을 갖고 있어요. 지방정부하고 지역은행, 지역대학, 그리고 프라운호퍼라고 반관반민 단체인데 연구기관으로 정부에서 기본적 돈은 주고 나머지는 기업 연구용역 해주며 운영하도록 하는 기관들 몇 십개가 있습니다. 

안 = 한국 정부도 R&D(연구·개발) 지원해 주잖아요. 다만 지원대상이 분산돼 있고, 한 해 평가를 해 다음 지원 여부를 결정하니 혁신보다는 안정적인 방향이지만….

장 = 혁신과정을 잘못 이해하는 겁니다. 혁신은 사기업이 하든, 과학자나 정부가 하든, 열 개 해서 한두 개 크게 맞으면 돼요. 정말 실패할 위험이 있는 것을 해야 진정한 혁신이 나오지, 안전한 것만 하면 그게 무슨 혁신입니까. 

안 = 그럼 예산을 편파적으로 쓴다는 비판도 나오고, 과용한다는 지적도 있으니 골고루 주는 거죠.

장 = 개념을 바꿔야죠. 컴퓨터도 유명한 얘기가 있잖아요. 1958년인가 토머스 왓슨 주니어 IBM 대표가 국회 청문회에서 앞으로 예상되는 컴퓨터 시장의 크기가 5대라고 했어요. 그때는 컴퓨터를 살 수 있는 곳이 미 육군, 해군, 공군, 국무부 이런 데밖에 없기 때문에 그냥 소련과 체제 경쟁에서 군사적 우위를 점유하기 위해서 했던 거죠. 나중에 그 기술이 세상을 바꿨지만, 그때 이윤만 생각했으면 문 닫았어야 할 산업이었죠. 

사회안전망이 있어야 
과감하게 직업도 바꿔보지
그러니 공무원만 되려고 해 
핀란드·스웨덴 같은 곳은
구조조정에도 저항 별로 없어
 

안 = 결국 철학이네요. 가치를 어디다 두느냐. 수익을 높일 산업을 키울 것이냐 아니면 공공성을 불러올 것이냐. 

장 = 경제는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안 = 목표는 뭔데요. 

장 = 목표는 다 같이 행복하게 잘사는 거죠. 자살 덜 하고, 서로 반목하지 않고, 직장 안정되고, 복지제도도 잘돼 있어 잘리면 어쩌나 걱정 안 해도 되는…, 그런 의미에서 경제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수단으로 쓰는 경제조차도 여러 목표를 갖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모펀드 하는 일이 뭡니까? 회사 사서 이윤 확 올린 다음 파는 거죠. (한국의) 제일은행이 좋은 예이죠. 뉴브리지캐피털이 사서 지점들 닫고, 사람들 자르고, 일 많이 시켜 이윤 왕창 올리고. 그 과정에서 직원들은 뼈 빠지게 고생하고. 그렇게 해서 이윤을 많이 냈기에 스탠다드차타드은행한테 되판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이윤 내는 경제도 있고, 독일같이 10년, 20년을 보고 이윤을 내는 경제도 있죠. 한때 독일에는 기업이 같은 지역에서 7년인가 10년 이상 사업하면서 종업원을 안 자르면 상속세 면제해주는 법도 있었어요. 그렇게 기업이 지역사회에 초석이 되고 그 사회와 얽혀 같이 살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도 합니다. 

안 = 답은 우리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장 = 옛날엔 밥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니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성장을 더 하자’라고 생각했죠.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죠. 지금은 그런 단계가 아닙니다. 국민소득 3만달러 나라에서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게 뭔가’를 생각해 봐야죠. FTA 많이 했다고 FTA 강국이다, 성장률 조금 높다고 우리나라가 잘한다, 이러면 주객이 전도된 사고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느냐’에 대해 제대로 얘기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어요. 

안 = 그 점에서도 논의되는 문제가 불평등인데요. 저는 최저임금제도를 사회안전망으로 봤습니다. 대학교육을 받은 중년들은 사실 주변에 최저임금 받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런데 그들이 발언권을 갖고 최저임금에 왈가왈부했습니다. 정작 노동하는 당사자는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요.

장 = 그렇죠. 저는 최저임금제에 찬성하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제가 문제가 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자영업자 비율이 엄청 높다는 겁니다. 

안 = 그래도 좀 줄어서 25%죠. 

장 = 미국 이런 데는 6%밖에 안됩니다. 자본가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사회안전망이 없기 때문에 치킨집 사장이 된 거란 말입니다. 자본가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을 자본가로 만들어놓고 너희도 자본가와 똑같이 행동하라니까 불만이 나오죠. 또 한 시간에 1000원 2000원 더 받는 게 중요한 사람들은 목소리가 없고요. 위쪽에 있는 사람들은 1000원, 2000원 더 받으려고 뭘 그러냐 그러든지 치킨집 사장이 1000원 더 줘야지 합니다. 그런데 1000원을 더 주면 사업이 위험할 수도 있거든요. 목소리가 있는 사람들이 그 현실과 괴리돼 있기에 잘 보지를 못하는 거죠. 노동권, 최저임금제, 그다음에 복지제도 이런 것들이 사회안전망입니다. 1950~1960년대 스웨덴 사민당 구호 중 하나가 영어로 ‘Secure people dare(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담할 수 있다)’였어요. 뭔가 안전망이 있어야 과감하게 새로운 선택도 하고, 직업도 바꿔보는데 우리나라엔 지금 그게 없어요. 다들 공무원 되려고 하는 게 뭐예요, 안전 찾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안전망을 만들어줘야죠. 핀란드, 스웨덴 같은 데는 실업급여가 최종 월급의 60~70%입니다. 2년 동안 받을 수 있고, 재교육해주고 직업 알선하고, 우리나라 입시 코디 붙듯이 해준다고요. 그러니 이들은 구조조정이나 기술혁신에 저항이 별로 없어요. 미국 같은 데는 90%가 노조 가입이 안돼 있으니까. 

안 = 우리도 노조 가입률 10%잖아요. 

장 = 우리랑 미국이랑 OECD에서 최저죠. 그렇지만 두 나라 다 조직된 10%는 직장을 잃으면 세상이 끝나니, 목숨을 걸고 싸우죠. 

삼성 이건희 회장 사망하면 
상속세 내고 지분율 낮아져
만약 투기세력에 넘어가면 
국민들이 10년·20년 고생

안 = 대기업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제 현실인데요. 이전 인터뷰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면 큰일 난다’고 한 말이 강도가 셌어요. 대기업 지배구도가 이끄는 산업 내 불평등 문제가 당장 이변이 일어나면 위기로 갈 수 있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하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해석의 여지가 너무 넓어요. 

장 =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면 상속세를 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지분율이 떨어지면 그룹구조가 와해될 수 있어요. 그냥 자본시장에 맡겨놓으면 뉴브리지가 제일은행 해먹은 식으로 날아갈 확률이 높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국민 경제에 안 좋겠다는 생각에, 주주자본주의 1주 1표 논리를 따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자고 차등의결권제를 내놓으며 예를 든 거죠. 너무 답답하니까 차라리 국유화를 해라, 우리 국민들의 피땀을 왜 남 주냐 하는 거죠, ‘외국 투기자본에 넘겨주느니 삼성특별법이라도 만들어 아예 다른 방식으로 관리하자’고 한 거죠. 이씨 집안, 정씨 집안을 봐주자는 얘기가 아닌데 양쪽에서 곡해합니다. 친재벌론자들은 사유재산을 침해하려고 하니 불순분자라 하고, 재벌개혁론자들은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어긋나니 친재벌론자라고 하고. 소액주주운동이 미국 같은 데서는 펀드매니저들이 하는 운동인데, 한국에서는 사회운동으로 승화시켜 중요한 일을 했죠. 그런데 이 방식이 성공하다 보니 재벌을 개혁하는 유일한 논리처럼 됐습니다. 저는 그게 아니라는 거죠. 스웨덴 제일의 재벌인 발렌베리 집안이 통제권을 갖는 기업의 시가총액이 스웨덴 전체 상장기업 시가총액의 반입니다. 한 나라 기업의 반을 한 가문이 가진 거예요. 차등의결권 때문에 가능하죠. 미국도 구글, 페이스북 이런 데서 차등의결권을 쓰거든요. 저커버그가 가진 주식은 28%이지만 차등의결권이 있어 의결권을 기준으로 하면 50% 이상을 그가 통제합니다. 많은 나라에서 씁니다.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서, 한 가문이 6대째 주요 기업의 절반을 통제하는데 그 면에서 보면 그렇게 불공평한 사회가 어딨어요. 그러나 스웨덴은 노동권을 강화하고 복지국가를 이뤄 세계에서 제일 평등한 나라 중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삼성, 현대 그 기업들이 투기자본에 넘어가면 국민들이 10년, 20년 고생합니다.

■ 경제 정책의 목표는 ‘다 같이 행복’…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이야기할 때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왼쪽)가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씨와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 교수는 “한국은 다시 산업정책을 정립하고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밝혔다.  황채영 사진작가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왼쪽)가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씨와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 교수는 “한국은 다시 산업정책을 정립하고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밝혔다. 황채영 사진작가

안 =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기업 중심 경제는 여러 면에서 불평등 문제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지요. 

장 = ‘재벌 때문에 불평등이 나온다’, 그건 문제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상위 1%는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들보다 잘살지 않는데 상위 10%는 잘사는 편이죠. 문제는 상위 10%지, 상위 1%가 아니거든요. 중소기업이 착취당한다고 하지만 그 중소기업주들은 노동자 착취 안 하나요? 재벌이 권력을 남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규제해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누진세로 많이 걷어 복지제도를 확대해 소득재분배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소득재분배를 하기 전 불평등도가 프랑스, 독일, 스웨덴 이런 나라도 미국과 비슷해요. 자기가 번 돈 세금 내고 정부 복지수당 받기 전 소득만 갖고 계산하면요.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세금 내고 복지 지급하기 전, 불평등도로 보면 제일 평등한 나라예요. 그런데 복지는 OECD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꼴찌잖아요. 복지 지출도 재분배 성향이 높지 않아서, 재분배를 하고 나면 평등도가 OECD 평균 이하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규제를 통해 불평등을 낮춘 거예요. 

안 = 어떤 규제를 말하나요. 

장 = 소농보호, 골목상권보호, 중소기업 고유업종,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굉장한 영향이 있습니다. 그런 보호가 있어서 시장소득만 보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평등합니다. 복지는 OECD 평균 지출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21%인데 한국은 10% 좀 넘어요. 하다 못해 신자유주의 모범생이라는 칠레보다도 작습니다. 미국이 복지 안 한다고 하지만 미국의 복지 지출이 GDP 대비 19%, 20% 돼요. 유럽은 대부분 28%, 29%이고. 불평등 문제를 획기적으로 바꾸려면 복지를 확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FTA 하고, 재벌들이 계속 성장하려면 규제 풀라고 하면서 점점 무너지고 있죠. 골목상권까지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어요. 

복지 없애고 기본소득만 준다? 
나는 100% 반대입니다
복지는 민영화하면 비용 올라가 
대규모 구매 때 값이 싸지는 것
누진세 걷어 ‘소득 재분배’해야
 

안 = 지난 호에서 카를로타 페레스 선생은 기본소득(UBI)을 제안했습니다.

장 = 기본소득은 잘 봐야 하는데, 옛날에 하이에크, 프리드먼 같은 사람들이 다 지지했거든요. 그 사람들의 주장이 뭐냐면, 딱 기본소득만 주고 복지는 다 없앤다는 겁니다. 실리콘밸리에 기본소득 지지하는 기업가들이 있는데 그들 중 많은 수가 그 영향을 받았죠. 복지를 없애는 대신에 기본소득 주자는 안에 저는 100% 반대입니다. 지금 복지가 잘된 선진국들은 사실상 기본소득이 있는 겁니다.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되잖아요. 다만 아동수당, 실업수당, 주택 보조 등 다 조건에 묶여 있으니까 일부 좌파에서 ‘그런 거 복잡하고, 경제구조도 바뀌어 파악하기 힘드니 일괄적으로 현금화해서 주자’는 거죠(안희경의 ‘세계 지성과의 대화’ 2-카를로타 페레스 참조). 저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우파식으로 세금은 국가가 강탈해가는 걸로 생각해서는 안되지만, 세금으로 공동 자금을 만들었으면 어떻게 쓰면 좋은지 얘기할 권리는 있다고 봅니다. 특히 교육, 보건 분야는 복지제도를 민영화하면 비용이 올라갑니다. 복지는 공동구매거든요. 국민 의료보험을 하면 의료비가 싸지는 이유가 의료보험을 대규모로 구매해서예요. 저는 기본소득을 줘서 사람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부분을 늘려주자 정도까진 찬성인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사회복지를 어떻게 바꿀 거냐 하는 점은 조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동수당 올려줄 테니 알아서 탁아시설 찾아라’ 이러는데, 탁아시설이 영리단체면 거기다 돈 주는 거죠. 공급은 늘어날지 모르지만 질은 보장이 안되고요. 

안 = 지금 그렇게 돼 있죠. 그렇지만 시장은 활성화돼 경제가 돌아간다는 주장을 합니다.

장 = 그런 거 가지고 경제가 잘 돌아갈 것 같으면 뭐 벌써 잘 돌아갔겠죠.

안 = 만약 이번 일요일에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뒷산을 오른다, 그러면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세요. 

장 = 지금 우리나라가 OECD 중에서 재정이 제일 탄탄한 나라 중 하나예요. 매년 재정흑자에다 GDP 대비 국채비율이 낮기로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등 5개 선진국 다음이 우리입니다. 오죽하면 OECD, 그 보수적인 데서도 한국한테 재정정책 더 적극적으로 쓰고 적자도 좀 더 내도 된다 권고할까요. 그런데 안 해요! 제가 ‘자린고비 경제학’이라 부릅니다. 무조건 안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거죠. 특히 교육·연구개발에 공공투자를 하면 나중에 더 큰돈이 돼 돌아와요. 대통령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담론 구조 자체를 바꿔주시라는 거예요. ‘우리나라같이 매년 재정흑자만 내는 나라 없다. 지금 복지가 필요하다. 복지 2배로 늘려도 미국 정도다. 유럽 수준 되려면 3배 이상 늘려야 된다.’ 기존 개념을 완전히 바꿔서 새로운 지평을 여셔야죠. 

안 = 페레스 선생과 인터뷰할 때, 한국은 노인 기초연금수당이 얼마냐고 묻기에 30만원이라 답했는데, “그 돈으로 살 수 있느냐”고 되물어 화제를 돌렸습니다. 

OECD 복지 평균지출 21% 
한국은 10% 좀 넘는 수준
노인연금 30만원, 창피한 얘기
 

장 = 창피한 얘기죠. 1970~1980년대 사고에서 못 벗어난 거고. 우파에서는 마치 복지가 없는 돈을 쓰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냥 오른쪽 주머닛돈을 왼쪽으로 옮겨 쓰자는 거예요. 어차피 다들 써야 할 돈, 모아서 체계적으로 쓰자는 겁니다. 좌파도 무상복지라고 하는데 왜 무상입니까? 가난한 사람도 다 세금 냅니다. 부가가치세 내잖아요. 그걸 무상이라고 하니까, 우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공짜만 바란다’고 비난할 빌미를 주죠. 다 같이 사고를 열어젖혀야 하는데,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나 진영 논리가 강하기 때문에, 그게 참 비극인데…. 그래도 지금 문 대통령 아니면 누가 그걸 바꾸겠어요. 

세수 호황이다. 초과세수가 26조원이 될 거라고 전망한다. 그 돈이면 일자리 21만개 더 만들 수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긴축을 비판하는 프레임조차 ‘일자리 만들기’라는 것이 안타깝다. ‘허리띠 졸라매기’를 더는 할 수 없는 이들의 고통은 여전히 뒷전이다. ‘자린고비 정책’이라는 장하준 교수의 일침이 귀에 쟁쟁거린다. 

■ 장하준 교수는…경제분야 세계적 명성, 대중에게 쉽게 풀어내
 
장하준(55)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다. 2003년 뮈르달상, 2005년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예프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 경제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2005년)을 지냈고, 2014년 영국의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Prospect) 선정 ‘올해의 사상가 50인’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영국 국립경제사회연구소(NIESR) 이사로 선임돼 5년 임기를 맡았으며, 2019년부터 3년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개발정책위원으로 임명됐다. 주요 저서로는 <사다리 걷어차기> <개혁의 덫> <쾌도난마 한국 경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국가의 역할> 등이 있다.
 
대중을 위해 경제학을 쉽게 설명하고자 노력해온 장하준은 인터뷰 말미에 모두 함께 경제를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돈으로 가치를 셈하는 사회이기에 사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개인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경제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안희경은 
 
[세계 지성과의 대화 ③]장하준 교수-Q. 문 대통령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조언은 “자린고비 경제 그만…복지재정 확 늘려라”
 
재미 저널리스트다. 2002년 미국으로 이주, 서구의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 모색 등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세계적 마음 전문가들의 인터뷰집 <사피엔스의 마음>, 레베카 솔닛 등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대화를 엮은 <어크로스 페미니즘>, 재러드 다이아몬드 등 세계 지성 11명과의 대담집 <문명 그 길을 묻다>, 놈 촘스키 등 세계 석학 7인과의 대담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윌리엄 켄트리지 등을 인터뷰한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등의 저서와 다수의 번역서를 펴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1140600035&code=100100#csidx2adbdb5cd60ffbf96e5d527b24623a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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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자한당 입당, 기독교를 무기로 대선까지 노리나?

도로 친박당? 자한당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 나와
 
임병도 | 2019-01-14 08:42:3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자유한국당에 입당합니다. 황 전 총리는 11일 김병준 비대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입당 의사를 밝혔고, 15일 오전에 자유한국당 입당식과 기자회견을 열 예정입니다.

황 전 총리는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처음 걷게 되는 정치인의 길이다. 개인적으로 걱정도 된다”며 “하지만 나라가 흔들리고 국민이 힘들어하고 계신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황교안 개인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만을 생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입당 이유를 밝혔습니다.

황교안 전 총리의 정치 도전은 이미 지난 대선과 지선에서 후보로 물망에 오르며 거론된 적이 있습니다.

이후 잠잠하던 황 전 총리는 보수 대선 주자 선호도 1위에 올랐고, 페이스북에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황 전 총리가 자한당에 입당한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당권에 도전한다는 뜻입니다. 황교안 전 총리의 자유한국당 입당이 주는 의미와 그 여파를 알아보겠습니다.


도로 친박당? 자한당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 나와

황교안 전 총리의 자한당 입당은 보수 대선 주자 선호도 1위 인물이 함께 하기에 지지율 상승세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도로 박근혜당’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황 전 총리를 중심으로 친박계와 TK(대구·경북), 전통 보수 지지층이 결집할 수 있지만, 친박 내부에서는 마냥 환영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선거구 조직위원장 선발 공개 오디션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병준 비대위원장 ⓒ자유한국당

당 대표 출마가 유력한 심재철 의원은 입장문을 통해 “박근혜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에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내 정권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황 전 총리가 박 전 대통령이 공격당하고 탄핵소추당할 때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라며 황 전 총리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김병준 비대위원장의 입장도 궁지에 몰렸습니다. 진박 공천에 관여한 사람이나 박근혜 정부 장관 출신 의원들의 불출마 선언까지 받으며 인적쇄신을 꾀했는 데, 박근혜 정권 핵심 인사가 당권을 잡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친박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박근혜씨의 의중도 반반 정도로 봐야 합니다. 친박이 힘을 얻을 수 있거나 결집하는 계기도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친박 신당이 아닌 황교안 개인의 정치적 욕망으로 토사구팽 당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황교안 전 총리가 자유한국당에 입당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에 따라 친박과 비박, 그리고 보수층의 지지 여부가 확실하게 나올 것입니다.


왜 하필 지금 자한당에 입당할까?

▲CBS 의뢰로 리얼미터가 조사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에서 황교안 전 총리는 보수층과 자유한국당 지지층에서 1위를 차지했다. ⓒMBN 뉴스 화면 캡처

이미 지난 대선에서도 출마가 거론됐던 황 전 총리가 왜 하필 지금 시점에 자유한국당에 입당할까요?

당시에는 “출마를 위해 권한대행의 대행을 만들 수는 없었다”는 말을 할 정도로 여건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탄핵 정국에서 출마해도 결과가 그리 썩 좋지 않으리라는 예상도 나왔습니다.

지금은 뚜렷한 보수 대선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선호도 1위가 지속되니 해볼만 하다고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금 자한당에 입당해야만 2020년 총선 공천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자유한국당은 2월 27일 전당대회를 엽니다. 이때 선출된 당 대표는 2020년 국회의원 총선 공천권을 쥐게 됩니다.

정당에서 공천권은 결국 권력으로 이어지고, 차기 대선까지도 영향력을 끼칩니다.

자유한국당은 오랜 비대위 체제의 진통 속에서 새로운 도로를 만들었고, 황교안 전 총리는 개통하자마자 무임승차하는 기회를 잡은 셈입니다.


황교안의 무서움, 기독교인이 결집한다

▲국무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간증집회를 하고 있는 황교안 전 총리. 구글에 검색해보니 그동안 다녔던 간증집회 모습을 볼 수 있다.

황교안 전 총리의 자유한국당 입당이 무서운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기독교인이 결집하는 무기를 황 전 총리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 전 총리는 자리에서 물러난 후 전국의 교회를 다니면서 간증 집회를 했습니다. 그가 다닌 교회만 해도 수십 곳이 넘습니다.

기독교의 특성상 간증집회를 하면 침석 한 교인 대부분이 그를 지지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성경 속 인물에 비유해 ‘요셉 총리’라고 불리는 황 전 총리의 모습은 종교적 믿음이 자연스럽게 정치인의 지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해 형제들의 질투로 노예로 팔렸다. 노예로 살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누명을 쓴다. 감옥에 있던 중에 왕의 꿈을 해몽해 결국 이집트의 총리까지 오른다.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제들이 먹을 것이 없어 찾아왔지만, 벌을 주는 대신에 용서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로 이주하는 계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갖은 고난을 겪지만 하나님을 믿어 성공하는 사례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요셉이다.

▲지난 2018년 12월 9일 춘천에서 열린 황교안 전 총리 간증집회 기념 사진 ⓒ침례신문 화면 캡처

태극기 집회와 보수층을 보면 교회를 다니는 50대 이상이 많습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황교안 전 총리는 아주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우선 법무부 장관에 국무총리 출신이라는 점은 아주 스마트해 보입니다. 여기에 자신이 믿는 종교를 생활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인물상으로 비칩니다.

황교안 전 총리는 중도 보수와 기독교를 묶을 수 있는 인물입니다. 실제로 그는 ‘황교안 전도사’라며 기독교 내부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기도 합니다. 이는 그가 대선까지 나올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습니다.

▲2004년 이명박 서울시장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청년·학생 연합기도회’에 참석, ‘서울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봉헌서를 낭독하고 있다. ⓒ 기독교TV(www.cts.tv) 화면 캡처

기독교인이 줄었다고 하지만 개신교 인구만 무려 천만 명에 가깝습니다. 이들이 정치인 한 명을 몰빵 하듯이 지지하면, 대선에서 당선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과거 ‘이명박 장로’는 선거에서 기독교인의 맹목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한국에서 기독교인의 지지는 쉽게 넘길 수 없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황교안 전 총리는 엘리트 관료 출신으로 정당 정치의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 스스로 뭔가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기보다는 권력자를 찾거나 남이 떠받들어 주는 코스만 밟았습니다. 정치적 역량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황교안 전 총리는 태극기 집회와 보수층의 구성하는 기독교인의 막강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보수 대선 주자로 한동안은 독보적인 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기독교인이라고 깨끗한 정치를 한다는 맹신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례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믿어도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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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북미간 ‘ICBM폐기-제재완화 빅딜설’에 움찔하는 미 대북 강경파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1/14 10:03
  • 수정일
    2019/01/14 10:0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한미동맹’ 내세우며 ‘북미합의’ 막는 속내... 참모 조언 거부하는 트럼프에 기대?

김원식 전문기자
발행 2019-01-13 21:54:25
수정 2019-01-13 21: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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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륙간탄토미사일(ICBM) 화성-15호 발사 장면.
북한 대륙간탄토미사일(ICBM) 화성-15호 발사 장면.ⓒ뉴시스/로동신문
 
 

“북미 간에 빅딜설이 가시화되자, 이를 방해하려는 미국 내 대북 강경파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최근 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에 관한 보도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이 기자에게 귀띔한 말이다.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는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데는 북미가 이견이 없을 정도다. 미국이 최소 5∼10년이 걸릴 이른바 ‘완전한 (북한)비핵화’ 완료 전에 기존 제재를 계속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풀지 않고는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앉을 일은 만무하다. 

그래서 이미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이른바 ‘물밑 합의설’이 파다하다. 즉, 미국 국민 위협 해소가 목표인 미국은 본토 공격이 가능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폐기하는 조건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포함한 대북제재 일부를 가시적으로 완화한다는 ‘빅딜설’이다.

이 ‘빅딜설’에 관해 북한이 어느 정도 합의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항상 ‘행동 대 행동’을 강조해온 북한이 특히, 상당 부분 대북제재가 완화된다면,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할 수 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이 ‘빅딜설’의 핵심은 이번 2차 정상회담에서 ‘ICBM폐기- 제재완화’에 북미가 합의하고 이후 곧바로 관계개선과 비핵화를 위한 핵사찰·검증을 위해 상호 연락사무소를 평양과 워싱턴에 개설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종전선언’을 시행하고 ‘평화협정’도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빅딜설’이 실제로 북미 간에 합의가 되고 추진돼 나갈지는 아직 미지수나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상당히 바람직한 방향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늘 전문가를 내세우며 ‘북미협상’ 자체를 반대하는 미국 내 대북 강경파들이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이들 강경파들은 최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미협상에 관해 “궁극적인 목표는 ‘미국 국민의 안전’이다”라는 언급에도 화들짝 놀라고 있다. 이들은 폼페이오 장관이 미 본토 타격이 가능한 ICBM 폐기와 대북제재 완화를 맞바꾸겠다는 속내를 드러냈다고 안절부절못한다.

당장 미중앙정보국(CIA) 출신 수미 테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은 최근 토론회에서 폼페이오 장관이 ‘북한 비핵화’란 표현 대신 ‘미국에 대한 위협 제거’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며, 북한 비핵화 목표 대신 ICBM 제거 쪽으로 대북정책을 수정하고 있다는 우려를 드러냈다.

그녀는 “북한은 그들의 목표인 핵보유국 지위를 얻기 위해 절대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쉽게 말해 북한의 비핵화 약속은 거짓이며, 북한이 ICBM을 폐기하더라도 이를 합의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같은 CIA 출신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도 최근 폼페이오 장관의 발언에 관해 미국이 미 본토에 대한 북한의 미사일 위협 문제만 해결되면 합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일으킨다고 내심 실토했다. 

그는 “(폼페이오 장관 발언처럼) 그렇게 하는 것은 일본과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어협정을 깨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쉽게 말해 겉으로는 미·일·한 안보동맹을 거론하면서, ‘ICBM폐기-제재완화’라는 북미 빅딜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북 강경파 중에서도 온화한(?)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북핵 특사는 “북미 협상이 진전을 보려면 양측 모두에서 선제조치를 내놔야 한다”면서 “북한이 먼저 탄도미사일 관련 조치를 취하고, 미국이 반대급부로 일부 제재 완화를 내놓는다면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얼핏 보면, 북미 간의 ‘ICBM폐기-제재완화’‘ 빅딜설을 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역시 “미국이 북한과 ICBM을 제거하는 수준에서 북한과 합의를 한다면 국제안보를 무너뜨리고 한·일과의 동맹이 훼손될 것이라는 사실은 미 행정부도 잘 알고 있고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대화’ 내세우면서도 ‘북한 불신’이 기본인 미국 내 북한 전문가들

좀 더 온화한(?)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량살상무기 조정관은 이에 관해 “트럼프 행정부의 목표는 완전한 북한의 비핵화지만, 단계적으로만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선순위를 정해 그 수순을 밟아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 비핵화는 동결·감축·폐기 단계 등을 거치는데. 미국은 일단 본토에 대한 직접적 위협 제거를 우선순위에 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쯤 하면, 아주 합리적인 말로 보인다. 한반도 비핵화 과정에서 거쳐야 할 수순으로 ‘ICBM폐기-제재완화’‘ 빅딜설을 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북한이 정의하는 한반도 비핵화의 핵심은 한미 안보동맹의 종식에 있다”면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을 유지하는 한 핵무기 사용이 가능한 만큼, 결국 북한은 비핵화 대가로 한미 안보동맹의 종식을 요구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쉽게 말해, 북한과 비핵화 협상을 계속해도 그들(북한)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미동맹의 종식이니, 이것을 잘 알아서 트럼프 행정부가 처신하라는 경고이다. 자칭 강경파가 아니라, 온화한 ‘대북 대화파’임을 내세우는 크리스토퍼 힐 전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어떨까?

그는 최근 북중정상회담 공동발표문에서 나온 ‘평화와 안정’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코드’라고 말했다. 얼핏 보면, 북중정상회담을 환영하는 것 같지만, 그는 “이러한 용어는 곧 주한미군 철수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이는 중국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지는 것”이라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6월 12일 오전 회담장인 카펠라 호텔에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자료 사진)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6월 12일 오전 회담장인 카펠라 호텔에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자료 사진)ⓒ뉴시스

다소 길게 기자의 눈에 전부 ‘대북 강경파’로 보이는 미국 내 이른바 ‘북한 전문가’들의 최근 북미 빅딜설에 관한 언급을 나열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나름 때로는 ‘한미동맹’을 내세우지만, 한마디로 북한은 믿을 수가 없으니, 어떠한 합의나 협상도 안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미국의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은 정상회담이든 고위급회담이든 완전한 핵폐기를 약속하고 이를 이행해야 하며, 5년이든 10년이 걸리든, 완료되고 난 다음에야 대북제재나 관계 정상화를 고려해 볼 테니 그러한 패전국 자인 문서에 사인하라는 것이다.

다시 지난해 3월 8일,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당시 정의용 안보실장을 만났던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 떠오른다. 정 실장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미정상회담 의사를 밝혔다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좋다. 4월에라도 당장(right now) 만나자”면서 환영했다.

주변에 있던 백악관 참모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로 “거 봐라. (북한과) 대화하는 게 잘하는 것”이라고 한술 더 뜨는 순간에는 주변 참모들은 마치 ‘사고 쳤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말문을 잃었다. 

끝내 참모들이 반응하지 않자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이 당신들 같은 참모들 말만 들어서 (북미관계가) 하나도 개선된 것이 없다”고 큰소리쳤다는 후문이다. 그래서 북미정상회담 발표도 백악관 관료가 아니고, 정 실장이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해야 했다는 전언이다.

“이제 세계경찰은 더는 싫다”면서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부터 공약을 이행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고집이 한반도 문제에 어떠한 결과로 귀결될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주변에 대북 강경파로 가득한 참모들 속에서도 홀로 ‘탑다운(Top-Down)’ 방식으로 싸우고 있는 그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유이다. 

김원식 전문기자

 

국제전문 기자입니다. 외교, 안보,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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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암선고 받은 부부 "삼성생명이 이럴 줄이야"

[수상한 암보험금 ①] 금감원서 손 들어줬지만 보험금 지급 미루는 보험사

19.01.14 08:22l최종 업데이트 19.01.14 08:22l

 

의사의 권유대로 치료받았을 뿐인데 보험회사는 '암에 대한 직접치료'가 아니라며 암보험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 금융당국도 환자들의 손을 들어줬지만 보험회사들은 법정에서 다퉈봐야 한다며 버틴다. 급기야 암환자들이 "약관에 적힌 그대로 암보험금을 지급하라"며 거리로 나섰다. 이들의 말을 들어봤다.[편집자말]

 

 유방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최재돈 씨가 지난 12일 경기도 성남시 자신의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롯데손해보험, 현대해상화재보험, 흥국화재는 암보험금을 지급했지만, 삼성생명만 요양병원에서 치료 받은 돈은 암에 대한 직접치료가 아니다는 이유로 지급을 미루고 있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  유방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최재돈씨가 지난해 12월 12일 경기도 성남시 자신의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롯데손해보험, 현대해상화재보험, 흥국화재는 암보험금을 지급했지만, 삼성생명만 요양병원에서 치료 받은 돈은 암에 대한 직접치료가 아니다는 이유로 지급을 미루고 있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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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생명에서 너무 심한 것 같아요. 진짜 삼성에서 이럴 줄 몰랐습니다. 대기업이니까 무슨 일 생겼을 때 (소비자에게) 잘해 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막상 보험금 줄 때 되니 이제 사람 취급을 안 하더라고요."

그의 목소리는 점차 높아졌다. 보험약관을 보여주며 암보험금을 주지 않는 삼성생명의 행태를 조목조목 고발하던 그는 돌연 한숨을 쉬며 "솔직히 너무 힘들다"고 했다. 지난달 12일 경기도 성남시 인근에서 만난 최재돈(54)씨. 그는 2016년 8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최씨는 "서울대병원에서 항암주사를 맞고 집에 있으면서 구토, 빈혈이 시작됐다"며 "화장실을 하루에 30번 가야 했고 밥도 못 먹고 누워만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수술한 뒤에는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어서 요양병원에 들어가 9개월 동안 치료 받았다"고 덧붙였다.

"다 죽어가는데 손해사정사가 '돈 못 준다'고 해"

 

작년 9월 집으로 돌아온 최씨는 롯데손해보험, 현대해상화재보험, 흥국화재, 삼성생명 등에 진단서, 영수증 등을 보내 암보험금을 청구했다. 삼성생명을 제외한 모든 보험회사에서 보험금이 나왔다. 그는 "요양병원에서 다 죽어가는 상황이었는데 삼성생명 자회사 쪽에서 손해사정사가 나와 '여기(요양병원)에서 치료 받은 돈은 못 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왜 못 주냐고 물어봤더니 요양병원이라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약관에 요양병원은 안 된다고 적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죠. 그랬더니 암에 대한 직접치료가 아니라서 못 준다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직접치료가 뭔가요?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이런 것만 직접치료라고 말해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전혀 그런 것도 안 해놓고, 딱 암에 걸리니까 자기네(삼성생명)들 편리하게 해석하면서 안 된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최씨는 스스로 요양병원을 찾은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빈혈이 심해져 병원에서 쓰러지자 의사가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서를 써줬다는 것. 그는 "서울대병원에서 의사 소견서를 받았다"며 "대학병원처럼 큰 병원에서는 암수술 이후 5일 정도만 입원시켜주기 때문에 환자들이 치료 받을 곳이 없어 요양병원에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형병원의 경우 6개월 정도 기다려야 수술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암환자가 많은데, 수술을 많이 하는 것이 병원 입장에서 이익이기 때문에 환자를 빨리 퇴원시킨다는 것이 최씨의 생각이다.

그는 삼성생명에만 3개의 보험상품에 가입한 상태다. 지난 1995년에는 홈닥터보험, 2000년과 2001년에는 여성시대건강보험, 뉴퍼스트클래스종신보험에 각각 가입했다. 그는 "삼성생명에만 온가족 보험료로 100만 원씩 나갔다"며 "옛날부터 갈빗집을 했는데 보험설계사들이 회식을 하고 나면 보험에 들어달라 해서 어쩔 수 없이 들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감원도 "보험금 지급 책임 있다" 했지만 삼성생명은 "조사 중"
 
 유방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최재돈 씨와 보험사에 대응하는 암환우 모임(보암모) 회원들이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암보험금 지급을 미루는 보험사를 규탄하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보험사에 종합검사를 실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  유방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최재돈 씨와 보험사에 대응하는 암환우 모임(보암모) 회원들이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암보험금 지급을 미루는 보험사를 규탄하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보험사에 종합검사를 실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18.12.18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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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생명이 보험금을 주지 않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최씨는 지난해 3월 금융감독원을 찾았다. 8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난해 11월에야 금감원 쪽 답변서가 나왔다. '보험사가 암입원과 관련된 보험금을 지급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 금감원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당국은 삼성생명에 보험금 지급을 재검토하라고 권고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후 회사는 현재까지도 보험금을 주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삼성생명은 자회사 삼성생명서비스손해사정 쪽 직원을 보내 다시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최씨의 남편 육경일(62)씨는 손해사정사가 부부를 다시 찾아와 보험금을 깎으려 들 것이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금감원에서도 지급해야 한다고 인정했는데, 손해사정사를 또 붙인다는 것은 합의하려는 것 아니겠나"라며 "필요한 서류는 다 냈는데 왜 또 온다는 것인지 황당했다"고 말했다. 보험회사가 소비자에게 보험금을 덜 주기 위해 자회사 쪽 손해사정사를 보내 보험금 삭감에 합의할 것을 요구하는 일이 흔하다고 육씨는 설명했다.

그는 "무조건 합의하려 한다"며 "원래 보험사가 줘야 하는 보험금의 50%, 30%로 깎으려 한다"고 말했다. 아내 최씨는 "요양병원에 있다 보니 보험금이 1000만 원을 넘어가면 보험금의 30%만 주는 경우가 많았다"며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고 그러면 안 된다"고 강하게 지적했다.

암 아니어서 보험금 못 준다? 의사는 "수술 중 암세포 손상됐을 수도"
 
 방광암 재발을 진단 받은 육경일 씨가 지난 12일 경기도 성남시 자신의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상세불명 방광의 악성 신생물’이라는 내용과 암 질병 코드가 적힌 진단서를 보여주며 다른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했는데 삼성생명만 지급을 거절하고 있다고 부당함을 호소했다.
▲  방광암 재발을 진단 받은 육경일(오른쪽)씨가 지난해 12월 12일 경기도 성남시 자신의 가게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상세불명 방광의 악성 신생물’이라는 내용과 암 질병 코드가 적힌 진단서를 보여주며 다른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했는데 삼성생명만 지급을 거절하고 있다고 부당함을 호소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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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가 암 진단을 받기 4달 전인 2016년 4월 남편 육씨도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 앞서 육씨는 최씨와 함께 1995년 삼성생명 홈닥터보험에 가입했다. 하지만 회사는 암세포가 겉에만 있는 상피내암은 암이 아니라며 보험금을 주지 않으려 하다 결국 절반 가량만 지급했다. 이후 육씨의 암이 두 차례 재발했고, 이때에는 보험금이 정상적으로 나왔다. 그렇지만 4번째 암이 재발하자 삼성생명은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조직검사 결과 암이 아닌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회사 쪽 주장이었다.

육씨는 "서울대병원에서 내시경을 하고 피검사까지 한 다음 암 재발이라는 진단을 받았다"며 "그런데 수술한 부위를 떼서 검사해 보니 암이 아니라 종양이라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육씨가 지난해 7월 받은 진단서에는 '상세불명 방광의 악성 신생물'이라는 내용과 함께 암 질병코드가 적혀 있다.

그런데 삼성생명 쪽 손해사정사가 의사를 만난 뒤인 지난해 8월에 나온 진단서에는 애매한 내용들이 추가됐다. '악성세포가 발견되지 않아 병리학적 진단은 양성종양임. 그러나 수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전기 소작에 의해 조직 검체가 열성 손상을 입어 악성 조직이 병리학적 검체에 발견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 다시 말해, 의사가 내시경으로 세포를 봤을 때는 암으로 보였는데 조직검사에서 암세포가 나오지 않은 것은 수술 과정에서 암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육씨가 더욱 의문을 품은 부분은 8월에 나온 진단서에도 앞서 나온 진단서와 똑같은 암 질병코드가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암치료를 목적으로 수술한 것이어서 암코드가 나온 것"이라며 "손해사정사가 진단서를 받은 날 같이 진료실에 들어가 의사를 만났는데, 두 사람이 잘 아는 사이 같았다"고 말했다. 이어 육씨는 "다른 보험사에서는 4번째 재발 때에도 보험금이 나왔다"며 "손해사정사가 찾아 오지도 않고, 서류만 주면 보험금이 지급됐다"고 했다.

금융당국 "암세포 안 나와도 수술비 지급해야"... 삼성생명 "육씨와 다른 사례"

앞서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아래 분조위)는 암 재발 소견으로 수술을 했으나 조직검사에서 암세포가 나오지 않은 경우에도 보험사가 암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육씨와 유사한 사례에서 금융당국이 소비자 손을 들어줬던 것. 지난 2015년 11월 분조위는 "암수술비 지급 여부는 약관대로 실제 수술의 시행목적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수술의 시행결과 종양의 유무만으로 결정할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보험회사는 이 같은 분조위 사례가 육씨의 경우와 달라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과거 분조위와 유사점이 없다고 판단했다"면서 "(이유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금감원에 해당 민원이 들어갔고, 당국에서 판단하게 될 것"이라며 "보험금을 지급하라는 권고가 나오게 되면 차후에 (지급 여부를) 검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이 관계자는 "지난 9월 분조위에서 요양병원 입원에 대해서도 암입원비를 지급하라는 결정이 나오면서 금감원이 최씨의 경우도 재검토하라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내부 절차에 따라 손해사정사를 통해 다시 한번 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육씨는 "어머니 병간호를 끝낸 뒤 편안한 노후를 보내려던 찰나 암 진단을 받으면서 보험회사의 횡포에 시달리게 됐다"고 분개했다. 
 
"20년 동안 갈빗집 장사하느라 고생했죠. 또 노인네 똥오줌 받아내느라 겁나게 고생하고, 장례 치르고 나니 암에 딱 걸려버린 거예요. 얼마 안 돼 아내도 암 진단 받아 많이 속상했죠. 그랬는데 보험사까지 난리를 치니... 황당했죠. 집도 팔려고 내놨어요. 아내랑 둘이서 편안하게 바닷가로 이사해 사는 게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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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일까지 가려면, 문화통합 준비해 나가야”

<신년 인터뷰> 늦봄 방북 30년, 문성근 통일맞이 부이시장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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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14  07: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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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환 목사 방북 30주년을 맞아 문성근 통일맞이 부이사장과 9일 일산 한 카페에서 신년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통일은 됐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평양을 찾아 김일성 주석과 포옹하고 ‘4.2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돌아와 수인(囚人)이 된 늦봄 문익환 목사. 아니 시인 문익환. 1989년 벽두에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는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를 쓰더니, 실제 저지르고 말았다.

“문목(문익환 목사)이 89년에 평양 방문 후에 서울에 오셔서 “통일은 됐어”라고 완료형으로 얘기를 해서 참 많은 사람들이 놀래고 어처구니 없어 했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참 맞는 말이었다.”

늦봄 문익환 목사의 아들 배우 문성근(66)은 문 목사 방북 30주년 소회를 “너무 아쉽다”고 했다. 문 목사가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과 서명한 ‘4.2공동성명’은 이후 6.15공동선언 등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실제로 4.2공동성명의 정신대로 남북관계가 흘러왔다면 통일은 이미 된 거나 마찬가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너무 아쉽다.” 문성근 통일맞이 부이사장은 9일 <통일뉴스>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아쉬움부터 토로했다.

“어떻게 보면 89년부터 2010년 그 사이에 우리가 마무리를 했어야 하는데, 마무리를 못하고 미-중 패권경쟁 시대의 틈바구니에 또 끼이는 상태가 됐으니까. 정말 통탄스럽다”는 것.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부터 본의 아니게 ‘시민정치운동’에 ‘공익근무’해온 그는 판문점선언 시대를 맞아 다시 본의 아니게 남북 문화교류의 일선에 서게 됐다. 당장 문 목사 방북 30주년을 기념해 4월 2일 즈음 가극 ‘금강’의 평양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포옹에 이어 후대들인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성근 부이사장의 포옹도 가능한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내가 남쪽에서 살아온 삶이 뭔가를 대표할 수준이 못되기 때문에 말씀드리기는 그렇다”면서도 “그 행사 때 김 위원장께서 대표단을 접견해주면 그건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한가닥 기대감을 내비쳤다.

오히려 정치 일선을 떠남으로써 몸에 맞는 옷을 입을 수 있었을까. 올해 8월 첫선을 보이는 평창 남북평화영화제의 조직위원장과 영화진흥위원회 산하 남북영화교류특별위원회 위원장, 6.15남측위원회 문예본부 준비위원장까지 도맡고 있는 실정.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공동응원가를 만드는 밀린 숙제부터 개성공단이나 비무장지대(DMZ)에 대규모 영화 촬영장을 만드는 일이나 남쪽 감독이 북쪽에 가서 영화를 찍는 일, 평창 남북평화영화제를 원산에서 공동개최하는 일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는 “남북관계가 다시 두 번째 기회를 맞으니까 문화예술계 전반에 계신 분들이 나한테 뭔가 해주기를 기대하는 게 있고, 나는 문목 때부터 문화예술이 동질성 회복에 가장 좋은 접근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그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거다. 그래서 이 일은 그냥 문목의 유업으로 알고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민족통일까지 가려면, 문화통합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며 “다른 체제로 70년 넘게 살아와 이질화된 걸 극복하는 데에는 문화예술이 가장 효과적이다. 영화가 대표적이랄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2002년 6월 문 목사의 부인 봄길 박용길 장로와 동생 문동환 선생의 안내로 문 목사가 나고 자란 중국 용정 명동촌을 방문했을 때 벌써 ‘노무현 대통령’을 시대정신으로 설파하던 그는 이제 ‘문화통합’이라는 새로운 기치를 들고 벌써 저만큼 앞선 걸음을 떼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이자 문익환 목사 방북 30주년인 기해년 새해를 맞아 9일 오전 10시 경기도 일산의 한 카페에서 문성근 통일맞이 부이사장과 나눈 신년 인터뷰 내용이다.

“민(民)이 움직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

   
▲ 문성근 이사장은 남북 문화교류의 길목을 맡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지난해가 늦본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이었고, 올해 문 목사 방북 30주년을 맞았다. 오랜 시간이라면 오랜 시간일 수 있는데, 소회가 있다면? 그때는 좀더 젊은 때였지 않나.

■ 문성근 부이사장 : 89년이니까, 그래도 서른 여섯이었다.

소회라면 너무 아쉽다. 문목이 89년에 평양 방문 후에 서울에 오셔서 “통일은 됐어”라고 완료형으로 얘기를 해서 참 많은 사람들이 놀래고 어처구니 없어 했다. “시적 통찰이다” 이렇게 찬양하는 분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때는 그 말씀을 이해하는 분들만 하셨던 건데,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참 맞는 말이었다.

그때 4.2공동성명에 포함된 정치군사회담과 다방면에 걸친 교류.접촉을 병행추진한다는 것, 그리고 고려연방제 전에 연합 단계를 도입할 수 있다는 의미, 올림픽에 단일팀으로 참가하고 단일기에 공동응원가 쓰고,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있었다. 그 이후에 보면, 6.15공동선언이 4.2공동성명의 축약이고, 10.4선언은 교류협력.경제협력에 대한 확대 버전이고, 판문점선언도 재확인 겸 발전이지 않나. 그러니까 결국은 근본적으로 그 합의 테두리에서만 움직이게 돼 있는 거다.

그때 89년 4.2공동성명 9항을 보고, 나는 경탄했다. 서명자가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 문익환과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이었다. 양자는 이 합의가 향후 있을 당국자 간의 논의에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 ‘건의한다’고 돼 있다. 아, 그거 보고 정말 놀랐다. 민간 차원의 합의였고, 당국 간에 이걸 재확인하라, 그리고 가자!

그걸 안 하고 ‘어’ 하는 사이에 30년이 지난 거다. 그런데 그냥 30년만 지났으면, 30년 지나서 다시 복원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89년은 분단을 강제했던 동서냉전이 붕괴 기미를 보이던 시점이다. 그러니까 냉전이 끝나면 우리는 분단돼 있을 필요가 없으니 어떻게 우리가 가까워질 거냐는 방법론을 토론하러 간 거였다.

그런데 그 좋은 국제정세가 대략 2010년에 끝나지 않나. 미-중 패권경쟁 시대로 들어가면서 동서냉전이 새로운 미-중 열전 시대로 이행된 거다. 어떻게 보면 89년부터 2010년 그 사이에 우리가 마무리를 했어야 하는데, 마무리를 못하고 미-중 패권경쟁 시대의 틈바구니에 또 끼이는 상태가 됐으니까. 정말 통탄스럽다.

이명박근혜 정권은 정말 반민족적인 매국세력이었다. 그런데 이제 지금이라도 해야 되는데 아슬아슬하고 참 그렇다.

□ 본론으로 들어가서, 지난해는 한반도에 특별한 해였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평가하고 올해를 어떻게 전망하나?

■ 북으로서는 ‘어떻게 하면 미국이 협상에 나올 거냐’ 그 방법론을 찾아 몇 십 년을 보냈지 않나. 이제 그 협상장이 만들어진 거다. 북은 북대로 그 협상 조건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힘든 세월을 보내온 거고, 남은 남대로 분단을 정치에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권을 운영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 오래 노력을 해온 거다. 남북 시민과 인민의 노력으로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노력에 깊은 존경과 지지를 보낸다.

양쪽 정상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미국인데,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미국은 트럼트 대통령을 제외하면 여야, 월가, 군산복합체 몽땅 다 반대하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로서는 남북이 이런 새로운 대화국면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해왔듯이, 이것을 이어나가 전 세계 여론에 호소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노력을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민과 정부가 같이 가야 되는데 지금은 완전히 정부 주도로 가고 있지 않나. 민들이 정부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저들은 지금 할만큼 다 했으니까 민이 움직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인 근거는, 다른 나라들은 국제정세나 각국의 이익에 따라서 남북문제를 보는데 우리에게는 기본인권에 관한 문제이지 않나. 문 대통령 말씀은 “우리는 5천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 김대중 대통령 말씀은 “ 삼국통일 이후 1300년간 단일통일국가로 죽 유지해왔는데 60여년간 남의 힘에 의해 분단됐다”, 비정상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거다. 우리는 같은 민족으로 같이 살아야 한다. 이게 당위이고 기본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지점을 강하게 세계 여론에 강조하고 호소하는 노력들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 좀더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

■ 종로5가 기독교 쪽에서 4월 27일 판문점선언 1주년 때 휴전선 155마일을 인간띠로 잇자는 걸 제안하겠다고 하더라.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인도에서 600만 여성이 나와서 인간띠를 했다고 들었다. 또 발틱 3국이 그걸 한 적이 있다. 89년 발틱 3국을 관통하는 620㎞를 인간사슬로 이어서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해 성공했다.

세계 여론에 우리가 호소하는 일이 필요하다. 인간띠잇기는 기본인권에 대한 접근이고, 사회과학적 접근도 필요하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중국의 입지가 강화될 것이라는 것이 미국의 가장 견제 요소일 것이다. 그러나 남북이 교류협력을 시작해서 경제공동체를 이루어 간다면 도리어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지 그렇게 미국을 배척하고 중국에 가까워질 리가 없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이 그것을 걱정했고, 그래서 베트남 전쟁 끝났을 때 물론 라오스, 캄보디아가 공산화 됐지만 베트남은 중국과의 오랜 갈등요인이 있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밀착하지 않지 않나. 우리도 그렇다. 우리 역사에 중국하고 좋은 일이 뭐가 있었나. 그러니까 사회과학적으로도 그렇게 볼 필요가 없지 않느냐. 미국에게 그런 점을 우리가 많이 강조했으면 좋겠다.

또 하나는 문화예술을 하다보니까 우리 한류가 이렇게 폭발할 것이라고는 사실 우리 종사자들도 생각을 못했다. 99년에 ‘스크린쿼터 사수투쟁’ 할 때도 이런 일이 올 거라고 생각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더라. 한국 영화사를 보면 폭발하는 결정적인 전환이 87년 6월항쟁이다. 6월항쟁 이전까지는 정부가 시나리오를 검열했다. 그러다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한국영화가 발전했고 그러면서 한류가 터지는 거다.

동북아를 기본으로 해서 지금은 한류가 남미, 아프리카까지 가는데 이 힘이 우리도 예상을 못한 거지만 우리에게 이런 힘이 있더라. 거기에는 촛불로 정권을 바꾸는 국민의 힘이 있는 거다. 이해찬 총리 말씀처럼 아시아쪽 정치에서 개혁세력이 살아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는 없다는 거다.

그 분은 정치인으로서 분석하는 거고, 저는 문화 쪽으로 보자면, 중국은 공산당 일당지배를 전제로 한 자본주의화를 시도하고 있는 거여서 그 체제를 바꿀 생각이 없다. 그들은 단계적으로 선출해서 올라가서 집단지도체제를 만드는, 자체 내 민주주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대의제도보다 우리 제도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이나 포퓰리스트가 국가지도자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중국은 그렇지 않다는 거다.

인정 여부를 떠나서 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 공산당이 국가를 만든 거라서 그대로 가는 거다. 그러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중국은 체제상 안 되고, 일본은 60년대에 이미 사회변혁을 국민이 포기했다. 그래서 이를테면 ‘오타쿠’라고 탐미적인 문화는 있어도 에너지가 넘치는 인류보편적이면서 굉장히 개성이 강한 그런 문화는 없다.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보편성을 가져야 한류처럼 외국에 퍼져나가는 건데, 그런 면에서 경쟁력은 우리가 압도적이다.

그렇게 보자면,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한국이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 도리어 미국의 입장에서 중국의 변화를 추동하는데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지금 저렇게 무역전쟁을 해서 힘으로 굴복시키려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나. 그런 면에서 한국의 효용성을 미국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지난번에 문 대통령이 유럽 가셨을 때 반응이 아주 냉담하지 않나. 미국은 대통령이 자꾸 이야기하고 해서 어느 정도 입력이 됐는데, 그냥 닫혀있다. 그리고 너무 먼 나라 이야기니까 자세히 공부도 안했고, 관심도 없다.

“해답은 문화에 있다”

   
▲ 1989년 문익환 목사는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났다. [사진출처 - 통일맞이]

□ 올해 문익환 목사 방북 30주년을 맞이해서 통일맞이나 문화계에서 어떤 구상을 갖고 있나?

■ 먼저, 통일맞이를 이야기하자면, 작년이 문목 탄생 100년이었다. 생신인 6월 1일에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던 수유리집을 사립박물관으로 해서 ‘통일의집’을 개관했다. 그리고 6월 2일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구에서 따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다오’ 행사를 서울역에서 가졌다. 노래패 우리나라가 문 목사 헌정공연을 만들어서 몇 군데 순회공연을 했다. 심포지엄도 했다.

북쪽에서 축사를 보내오고 했는데, 작년은 어떻게 보자면 남북관계가 재개되는 첫해였기 때문에 일단 당국자 간의 합의를 처리하는 데도 북쪽이 정신이 없어 민간 차원의 일들이 많이 진척되지 않았다. 이제 정상 간의 합의가 진행되는 부분이 맥락이 잡혔기 때문에 북쪽도 조금 여력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통일맞이 일도 문화계 전반에 대한 일도 조금더 진전이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지난 10.4선언 행사 때 (평양에)가서 이해찬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통일맞이 이사장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만났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한 거다. “내년이 문목 방북 30년이다. 기념행사도 갖고 가극 금강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평양 공연을 하면 어떻겠느냐?”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그 자리에서 흔쾌하게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그렇게 합의를 했다.

실무적으로도 내가 논의를 했다. 그래서 기념행사와 공연을 갖는다. 4월 2일 즈음해서 하기로 합의가 된 거다. 앞으로 실무적인 논의가 더 필요하다.

□ 금강 평양 공연의 취지에 대해 더 설명해달라.

■ 그 공연은 어떻게 보면 통일맞이를 태동시킨 공연이기도 하다. 문목이 89년에 새통체(새로운 통일 운동체) 통일맞이를 제안했지 않나. 늘 강조하셨던 것이 “너무 오랫동안 따로 살았는데 마음을 합쳐 가는데 가장 효과적인 게 문화예술이다” 그렇게 생각하셨다.

그 말은 독일통일 이후에 확인된다. 독일이 느닷없이 통일되는 바람에 동독 주민들이 일종의 2류 국민이 됐고 간극이 해소가 안 된다. 5,6년 지나고 나서 독일 지성계 전체가 “해답은 문화에 있다” 이렇게 컨센서스가 이뤄졌다고 한다.

이를테면 ‘트라기 고’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코미디 영화다. 트라기는 독일의 국민차다. 굉장히 사기가 어렵다고 한다. 아무튼 그걸 사가지고 있는 동독사람이 통일된 후에 그 차를 타고 유럽 전역을 여행하는 로드무비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면서 서독사람들이 동독사람들의 심리와 사고구조와 정서상태 이런 것을 굉장히 이해를 많이 했다는 거다.

통일 이후에 보도된 것들을 보면 동독사람들이 회사에 이력서 내고 인터뷰를 할 때 그렇게 화를 냈다는 거다. “내가 상품이냐. 나를 뭘로 보고 이러냐” 펄펄 뛰었다고 한다. 워낙 기본이 다른 데서 오는 오해나 이런 게 많은 거다. 실제로 문화예술 특히 영화, 드라마가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단은 그런 것을 문목이 생각하고 만들었고, 그것을 백프로 이해하고 있던 문호근이 ‘그러면 남북관계 개선되고 이럴 때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되겠다’ 그래서 만든 게 금강이다. 그래서 본인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2004년 참여정부 때 한 번 공연했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군중 씬’(mob scene) 같은 것, 아예 한 부분을 북쪽 공연단체가 맡아서 한다든지 남쪽에서 무대 설계 상세도면을 보내면 그쪽에서 제작을 한다든지 그래서 좀더 공동창작의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하면 더 근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금강 공연을 위해 배우를 모집 중인 것으로 안다. 배우를 뽑아서 공연을 준비하고, 평양에서 공연하고 순회공연하려면 시일도 촉박한 것 같다. 잘 추진되고 있는 건가?

■ 지난해 10월에 합의해서 올해 초에 공연하는 것은 굉장히 촉박한 거다. 특히 우리나라 뮤지컬이 워낙 산업화 돼 있어서 쉽지 않은 일인데, ‘남북교류에 나도 뭔가 하고 싶다’는 의사를 가진 분들이 많아서 연출과 스탭진은 빠른 시일 내에 아주 탄탄하게 잘 구성됐다. 그래서 오디션 공고가 나갔고, 6,7백명이 응모를 했다고 한다. 1월 중순에 오디션을 하고 1월 말부터 연습해서 4.2 즈음에 공연 가는 걸로 예정돼 있다.

그리고 남쪽 순회공연도 여러 도시들에서 관심을 보여서 확정해 가고 있는 단계에 있다. 성남시가 2016년에 금강을 공연했다. 그때는 남북관계가 풀릴 거라는 전망을 못하고 있을 때인데도 준비하는 단계로 성남시가 했다. 그래서 성남시와 서울, 경기도 등은 확정돼 있는 상태고 몇몇 지자체는 협의를 진행 중이다. 아껴써야 되지만 제작비도 공연하는데 지장 없을 수준으로 모였다.

이게 진전이 되면 통일맞이 주최로 북쪽 가극을 초청해서 남쪽 순회공연을 구성을 했으면 좋겠다. 북쪽도 남쪽과의 교류를 위해서 춘향전 같은 걸 만들어둔 게 있다. 문목 입장으로 보면, ‘피바다’나 ‘꽃파는 처녀’를 초청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북쪽 인민들이 이런 가극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다.

□ 통일맞이의 다른 사업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 문목이 김일성 주석과 합의한 사항 중에서 단일팀 같은 것은 다 진행되고 있는데, 딱 하나 공동응원가를 아직 못 만들었다. 겨레말큰사전은 2005년인가 참여정부 때 시작됐다. 그런데 공동응원가를 만들자 했는데 참 복잡하다. 작사, 작곡 문제가 있고 정서의 문제가 있고,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어쨌거나 방북 30년이니까 올해에는 숙제를 마저 했으면 좋겠다.

사실 남쪽에서는 이미 몇 사람이 만들었다. 그런데 좀더 규모를 키워서 공모도 하고 해서 여러 곡을 만들어 다 들어보고 투표를 받고 몇 개를 고르면 될 거 아니냐.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서로 왔다갔다 하면서. 이번 달도 남자 핸드볼 단일팀이 독일에서 경기를 하던데, 또 아예 올림픽도 같이 하자고 하는데, 올해 꼭 좀 성공시켜야 되겠다 다짐을 하고 있다.

그 다음에 4월 2일 즈음에 통일의 집에서 방북 30년 특별전 같은 것을 구상하고 있다. 북쪽에 일단 문목이 다니면서 방명록에 써놓은 글들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서 요청했다. 다큐멘터리나 사진은 많이 나왔기 때문에 방명록 영인본을 만들고 싶다. 북에서 사진을 찍어서 우리한테 주면 우리가 4월 2일 쯤에 개관 파티를 할 예정이다.

□ 문 목사 25주기 기념행사는 확정돼 있나?

■ 올해 25주기 묘소참배는 1월 19일 오전 11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진행한다. 하루 전인 18일 오후 6시 30분 서울시청 시민청 바스락홀에서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한다. 다큐는 95년에 만들어진 거다.

□ 2004년 문 목사님 10주기 때 북에서 대표단이 내려와 서울에서 공동행사를 가졌던 기억이 난다. 올해는 방북 30주년이고 4.2공동성명 기념일 즈음에 금강 공연단과 함께 방북을 추진하고 있는데, 사견이지만 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게 된다면 굉장히 역사적인 장면이 될 것 같다.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포옹에 이어 후대들인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문성근 부이사장의 포옹도 가능한 것 아닌가. 대를 이어 통일에 관한 협의를 하면서 파트너인 민화협이나 조평통과 민간교류 합의서 같은 것을 작성한다면 역사적인 새로운 매듭이 지어지는 것 아닌가. 꼭 정치인이나 통일운동가가 아니더라도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부담없이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좋은 생각인데, 내가 남쪽에서 살아온 삶이 뭔가를 대표할 수준이 못되기 때문에 말씀드리기는 그렇다. 그 행사 때 김 위원장께서 대표단을 접견해주면 그건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제넘어서 사실 생각을 안 해봤는데, 연구해 보겠다.

지연관현악단 여가수들, “발성이 달라졌다”

   
▲ 늦봄 문익환 목사 10주기를 맞아 북측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마석 모란공원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봄길 박용길 장로와 문성근도 눈에 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영화계에서도 남북교류와 관련된 직책을 맡은 것으로 아는데, 올해 계획은?

■ 제가 영화진흥위원회 산하에 남북영화교류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평창 남북평화영화제 조직위원장도 맡게 됐다. 또 최근에 6.15남측위에서 문예본부 활성화 안이 나왔다. 사실 6.15문예본부가 있기는 있었는데 작가회의 쪽만 다녔고 문예본부가 별로 뭘 안했다. 그런데 이번에 심양에서 6.15남측위와 6.15북측위가 회의를 하면서 문예부문의 논의구조를 좀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화부분도 좀 참여를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있었고, 새롭게 꾸리기 시작하는 거다. 나보고 준비위원장을 하라고 해서 일단 주섬주섬 이미 활동하던 데들 다시 모이고,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금강산 신년모임을 30,31일 하는데 그때 문예본부도 동참해서 부문별 모임을 갖고 기본적인 논의를 할 참이다. 문예본부 안에 장르별 대표들도 참여할 예정이다.

그동안은 문단 중심으로 남북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께서 문화예술 전반에 대해서 강하게 변화를 촉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현송월 단장이 이끄는 삼지연관현악단이 와서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충격을 줬다. 그런데 의상이 달라지고, 남쪽 가요를 넣어 선곡이 달라졌다고 주로 이야기하는데, 더 근본적인 변화는 발성이 달라진 거다.

서울공연 때 현송월 단장은 맨 마지막에 나왔고, 현 단장은 과거 발성이다. 그 전에 8명의 여가수가 번갈아 나왔고 곡마다 발성이 조금 다른 게 있지만, 사회주의는 가사 전달에 방점을 찍기 때문에 발성을 입 앞으로 내민다. 그래서 쨍쨍한 소리를 내고 그래야 멀리 전달이 된다. 그런데 그걸 ‘이선희 발성’ 정도로 뒤로 끌고 간 거다. 그러니까 가사 전달이 그 앞보다 훨씬 약화된다. 그런데 듣기가 편해진다. 북이 발성을 바꾼 것은 정말 놀라운, 굉장히 큰 변화다.

이를테면 영화 같은 경우가 당대회에서 “영화가 시대의 변화를 못 따라간다” 질타를 받았다고 한다. 올해 신년사에도 “시대와 현실을 반영하고 대중의 마음을 틀어잡는 영화와 노래를 비롯한 문예작품들을 훌륭히 창작”해야 된다고 했다. 대중의 마음을 잡는다는 게 중요한 이야기다.

전해듣기로는 당의 고위 정책담당자도 “남북합작영화에 관심이 있다. 평양의 세트장을 많이 써줬으면 좋겠다. 평화가 진전돼 안착이 되면 DMZ 안에 평화공원을 만들고 거기에 대규모 촬영장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정도의 언급까지 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굉장히 전향적인 거다.

과거 민주정부 10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나가 있어서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든다. 그러나 문화예술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걱정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맨 먼저는 사람이 덜 만나고 컨텐츠를 교환하는 방법이 있고, 두 번째는 학술교류 같은 게 가능하다. 사람이 덜 만나고 할 수 있는 건 많다. 촬영 장소만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고, 최종단계가 남쪽 배우, 북쪽 배우가 같이 하는 거다. 그것까지는 당장은 생각 안한다.

평화체제가 안착이 되면 대규모 촬영장을 만드는 것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는 사극을 하나 찍으려면 부안, 문경, 속초 다 다녀야한다. 아주 힘들어서 죽을 지경이다. 중국 경우에는 당.명,청 궁전을 그대로 200만평, 300만평 세트장을 세운다. 그게 낭비가 아니고 관광지가 돼서 돌아간다.

우리 경우에 워낙 국경이 가까워서 개성이 60킬로다. 서울역에서 인천공항도 60킬로다. 개성공단은 계획된 천만평에서 백만평만 쓴 거다. 거기 산도 있고 강도 있고 좋은데, 거기도 상관 없고, 아예 휴전선과 개성공단 사이에다 대규모 촬영장 겸 관광위락시설 등을 만들어놓아도 좋을 것이다.

북쪽이 관광업에 대한 노하우를 얻는 것도 있고, 우리의 경우는 굉장히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다. 자동차로 30분이면 간다. 거기 가서 촬영부터 마지막 후반작업까지 다 끝내버린다. 그러면서 서로 기술교류도 하고. 남쪽 경우에는 CG나 이런 것은 할리우드 것 받아서 할 정도로 발전이 돼 있다.

또 하나, 남쪽 영화인데 유실된 필름이 북쪽에 있다. 이게 왜 그러냐면, 우리가 영상자료 보관의 필요성을 잘 인식 안 해서 74년에 영상자료원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50년대, 60년대 필름이 망실된 게 많다. 그런데 그 망실된 작품 중에 상당량이 북쪽 국가영화문헌고에 있는 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워낙 영화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영상자료를 거기는 처음부터 모았다. 거기에 ‘남조선 영화’ 섹션이 있는 거다.

그 안에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 3’ 필름이 있다는 설이 있고,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 ‘만추’는 분명히 있다고 한다. “이건 민족자산이니까 우리 공유 좀 하자”, 북쪽에서 돈 한푼 안 들고 그냥 디지털 복사해서 넘겨주면 우리가 상영회를 한다. 북에서 우리가 퍼받는 게 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관심사안이기 때문에 민주정부 10년 동안에 우리가 말을 하면 들은 척을 안했다. 이번에는 이야기하니까 듣고 관심있어 했다. 우선 필름을 공유하고 이를테면, 부산영화제와 평양영화제가 자매결연을 맺어서 상호 돕자는 거다. 평창영화제에 북쪽 영화를 출품하고 개막식은 평창에서 하고 폐막식은 금강산에서 한다든지, 원산 갈마지구가 완공되면 평창과 갈마지구에 페리가 뜨면 공동개최를 할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베를린 영화제에 ‘원 코리아’ 섹션을 만들자. 베를린 영화제 측도 동의했다. 금년 2월에는 너무 촉박해서, 영화를 출품할 수는 없고 심포지엄은 할 수 있다고 해서 진행하고 있다. 독일은 분단국이었기 때문에 거기 가서 유럽 문화계에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우리는 같은 민족이고 같이 살아야 하는데 너네 너무 째려보지 말고 우리 좀 도와주라” 이런 거를 베를린 영화제에서 하는 거다.

그런 식으로 우선 영화제부터 교류하면 된다. 영화제는 작품만 오가고 한두 사람만 오가면 된다. 심사위원하고 발제자 정도. 북쪽도 부담이 없을 거다. 그게 좀 진행이 되고 나면 평양 세트장 활용과 로케이션 촬영도 가능할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강하게 북쪽에 제안하고 싶은 게 뭐냐면, 남쪽의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촬영감독하고 녹음감독 딱 두 사람만 데리고 평양에 가서 북쪽 영화사가 만드는 영화에 대본 작성 때부터 같이 참여해서 만드는 것이다. 남쪽 감독이 구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이데올로기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시나리오 작업부터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남쪽 감독과 같이 해보면 단숨에 세계 영화계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그게 불편하면, 남쪽의 세계적인 감독이 자기가 쓴 대본을 가지고 가서 북쪽 배우들하고 북쪽 스탭들하고 작업하는 거다. 물론 촬영과 녹음은 데리고 가야 한다. 촬영과 녹음은 완전히 상황이 너무 다르다. 나머지는 다 북쪽 인력을 가지고 영화를 한번 해보는 거다. 사람이 계속 만나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시간은 걸릴 것 같지만 그런 구상들을 하고 있다.

□ 평창 남북평화영화제는 올해 시작되나? 왜 8월인가?

■ 올해 8월에 제1회 영화제를 하는 거다. 다른 영화제들 일정을 고려하고 계절도 보고 8월로 잡은 거다. 남북이 궁극적으로 같이 가는 영화제는 시도된 적도 없다. 그런데 이번 평창 겨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해서 남북관계가 확 급진전된 됐다. 그 감격을 기념하고 유지 발전시키자는 거다.

그 다음에 강원도 입장에서는 강원도는 분구지역이다. 분단에 의해서 쪼개진 도고, 워낙 분단의 피해를 많이 본 지역이어서 도민들이 그 점을 굉장히 절절하게 많이 느끼기 시작한 거다. 금강산 막혀서 피해를 봤고, 평창에 북이 참가함으로 해서 덕을 봤고, 이런 걸 보면서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도민들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도민의 협조가 있을 수밖에 없는 영화제가 된다.

우리 영화 쪽에서는 남북평화를 주제로 한 영화제가 없는데 일종의 교두보가 돼서 북쪽 영화와의 교류협력을 만들어가는 아주 중요한 영화제가 되지 않겠는가. 궁극적으로 원산에 굉장히 큰 일종의 관광해변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영화제를 같이 가지고 가서 거기서 공동으로 하면 그쪽도 그냥 앉아서 홍보가 될 수 있는 측면도 있고 그러니까 장기적으로 좋을 것이다.

“공익근무는 충분히 성공했다”

   
▲ 시민정치운동에 '공익근무'를 마쳤다는 문성근 부이사장은 이미 남북 문화통합의 '공익근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지난해 개관한 통일의 집은 잘 운영되고 있나?

■ 늘 돈이 문제다. 개보수할 때 많은 분들이 후원을 해주셔서 큰 도움이 됐고, 아무래도 좀 부족하다. 후원회원들 모집도 꾸준히 하고 있고, 가족들이 부담하는 부분도 있다. 한 달에 그래도 천여명 정도씩 온다. 학생들이 공부 차원으로 오기도 하고, 관객들이 있어서 뿌듯하게 생각한다.

□ 수유리 인근에 여운형 선생 묘도 있고 지역을 잘 연결하면 좋을 텐데.

■ 강북구가 그 생각을 한다. 4.19묘역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민주통일 순례길’을 강북구가 구상하고 있고 서울시도 구상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 지나면 큰 그림이 만들어질 것 같다. 통일맞이가 주도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드리기는 어렵다.

□ 기념사업회 성격의 단체는 일반적으로 단체와 유족이 갈등이 있더라. 통일맞이는 가족과 단체가 일원화 돼 있나?

■ 그거는 좀 미묘한 측면이 있는데, 원래는 문호근이가 열심히 했고 문호근이 가고 제가 관계하게 됐다. 기념사업회와 가족과의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를테면 안창호 선생은 흥사단을 만들어 놓고 가셨고, 문목은 통일맞이를 두고 가셨는데, 대중의 뿌리깊은 조직체를 만들어놓고 가신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이라는 것은 민주화와 통일운동 했던 사람들의 공동사업이어야 한다. 이건 가족사업일 수 없다’는 생각이 저는 강하다. 통일의 집은 일단 재산이 있기 때문에 사단법인이나 교회나 이런 것은 유한하고 가족은 대대로 무한하기 때문에 그 건물을 가족소유로 두는 게 맞다. 그래서 가족이 깊이 관계되는 통일의집을 만든 건데, 통일맞이의 경우에는 조직체의 존속과 운영은 민주와 통일운동 진영의 일종의 책무다. 민주와 통일운동을 했던 분들이 유지해야 되는 일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는데, 이후 정치적 행보를 할 계획은 없나?

■ 전혀 없다. 연기가 내 본업이니까. 그동안 일종의 시민정치운동을 하다보니까 본업을 거의 도외시하고 그쪽에 매달리게 된 세월이 한 16년이 됐더라. 2001년부터니까, 공익근무는 이 정도 했으면 할 만큼 한 것 아니냐. 에너지도 떨어질 때 됐고 그러니까 본업에 충실할 생각이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다시 두 번째 기회를 맞으니까 문화예술계 전반에 계신 분들이 나한테 뭔가 해주기를 기대하는 게 있고, 나는 문목 때부터 문화예술이 동질성 회복에 가장 좋은 접근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그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거다. 그래서 이 일은 그냥 문목의 유업으로 알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민주정부 10년 때도 나한테 그런 주문을 해서 그런 일들을 그때도 조금 했었는데, 솔직히 북에서 응답이 없어서 아무런 실적을 낸 적이 없다. 이번에는 북쪽이 조금 변화한 모습이 감지돼서 좀 기대를 하는데, 여전히 체면을 구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성사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그 크기에 비해서 성사되는 일이나 이런 것들이 충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냥 또 망신을 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건 그냥 해야 되는 일이니까 해볼 참인 거다.

□ 민주정부의 재집권을 바랄 텐데,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것처럼 앞으로 그런 일에 또 나서야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굳이 그렇게까지 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민주진보진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을 본다. 첫 번째는 소득주도 성장이 효과를 좀 내야 된다. 두 번째는 남북관계 개선이 남쪽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는 것을 국민들이 체감해야 된다. 합치면, 경제가 나아져야 하는데 그 최고의 수단은 남북관계 개선이고 그 다음은 소득주도 성장일 것이다.

세 번째는 민주진보진영의 정당들이 시민참여형 정당으로 바뀌어서 지지자와 정당 간의 일체감이 커져야 된다는 거다. 그래야 이 정권이 연장돼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는 활동가들이 늘어난다. 그게 내가 이야기했던 ‘시민참여형 네트워크형 정당’이라는 거다. 다른 표현으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정당이다. 그것을 위해서 2010년부터 국민의명령 운동을 했던 거다.

그 제안이 문재인 대통령의 2012년, 2017년 대선공약이 됐고, 민주당내 전당대회가 열리면 당대표 선출 때마다 후보들이 그 공약을 했다. 지금 이해찬 대표가 박주민 최고위원에게 그걸 맡겨서 해나가고 있다. 내가 주장했던 것들이 정치권의 공식의제로 채택이 됐고 불가역이다.

그런데 지금 ‘연애인 팬덤(fandom)’ 현상이 정치권으로 옮겨오면서 굉장히 복잡한 양태를 보이고 있다. 정치권이 이 사람들의 심리나 행태를 잘 모른다. 연애인 사생팬클럽의 행태가 이해가 안 되는 거다. 그러니까 시민참여의 형태에 부정적인 효과가 두드러지고 있다. 그래서 속도를 늦출 위험성은 있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은 대세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 의제는 다 채택이 됐다.

나는 직업정치인이나 직업행정가가 될 욕망이 아예 없는 사람이어서 언제까지나 발런티어, 시민자원봉사자 행태를 보였다. 물론 출마도 했고 최고위원도 했지만 그것은 운동의 흐름에서 거기까지 가버린 거다. 일단 내 바람이 채택이 된 걸로 내 임무, 공익근무는 충분히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 문재인 정부도 촛불정신에 비하면 고전하고 있는 것 아닌가?

■ 지금은 경제 불평등 해소,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 그 첫 단계인 거고 통일단계까지는 수십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남북 교류협력의 안착과 경제불평등 해소,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대중들이 너무 표피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나 지금은 정권이 2년차 들어가다 보니까 일종의 피로도가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우리가 갖는 정치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인 것이지 않나. 우리 국민이 조금 참을성을 갖고 지켜보자. 이게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은 97년 IMF 전후에 완전히 다른 나라가 돼버린 거다. 97년 이후의 대한민국에서 최악의, 신자유주의에 포획된 구조 속에서 어떻게 개선을 해나갈 것이냐. 97년 이전이라면 훨씬 쉬웠을 건데, 훨씬 더 어려워진 환경 속에서 우리가 좀 나아지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걸 느끼고 응원해주는 수밖에 없는 거다.

□ 남북이 경제공동체에 더해 문화공동체, 민족적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특히 민주진보진영도 민족문제, 민족정체성에 소홀한 편인 것 같다. 개천절 공동행사의 경우 민주진보진영이 관심을 안 갖는 것 같다.

■ 자칫 ‘국뽕’ 같이 느낀다. 극우 같은 느낌이 드니까. 나는 정치운동하면서 제일 많이 느꼈던 게 뭐냐면, 이론은 현실에서 뽑아야 하는데 우리 지식인들은 외국에서 받아온 이론을 여기에 적용을 시키려 한다. 안 맞는 거다. 우리의 역사적인 배경과 국민적 특성이 있는데, 여기 맞춰야 되는데 그걸 못한다.

이를테면 ‘그래스루츠’(Grassroots, 풀뿌리 민중)라고 해서 인터넷과 SNS 이후에 여러 정치형태가 전 세계적으로 바뀌고 있다. 사실은 그걸 그동안 우리가 선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인식을 안 하고 자꾸 외국은 이렇다는 걸 소개한다. ‘포데모스’(Podemos, 스페인 좌파정당)가 어떻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이들이 문제다. 이를테면 국민의명령이 제안했던 제안서의 경우, 서구나 미국에서 변화하고 있는 정책들을 그대로 우리가 미리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아무도 그렇게 해석해주지 않는다.

어쨌든 일단은 경제통합의 실이익을 국민이 느끼게 해야 한다. 두 개 국가체제를 인정하자는게 아니라, 당장은 관심이 경제에 집중돼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민족통일까지 가려면, 문화통합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 문목이 통일맞이를 만든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다른 체제로 70년 넘게 살아와 이질화된 걸 극복하는 데에는 문화예술이 가장 효과적이다. 영화가 대표적이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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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왜 공무원 임용 10개월 만에 죽음을 택했을까

등록 :2019-01-13 09:10수정 :2019-01-13 10:43

 

 

[토요판] 김수정의 여성을 위한 변론/ ⑤ 직장 내 성희롱·성차별

공무원 임용 10개월 만에 생 마감
장례 뒤 확인한 친구와 카톡 대화
성희롱·성차별 시달린 사실 보여줘
“이쁜이” “커피 타 와라” “쉬었다 가자”

우울증 발병과 자살로 이어졌지만
공무원공단 공무상 재해 인정 안 해
“직장생활 부적응” “무능력했다” 등
가해자 황당한 진정서 증거로 제출

성차별·성희롱이 근무환경 악화 
여성들 견디기 어렵게 만들어

 

 

일러스트 조재석
일러스트 조재석
지난해 말 나는 국방부에서 주최한 대체복무제 마련을 위한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토론자 네명 가운데 유일한 여성으로 특히 더 긴장한 채로 토론을 진행했다. 군대도 가지 않는 여성이 군대 문제를 논할 자격이 있느냐는 자극적이고 일차원적인 공격이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시간여 토론의 말미, 한 참석자가 많이 참았다는 듯 나에게 말했다. “여자는 군대 갔다 오기 전에는 발언을 하지 말라.” 귀를 의심하던 중 옆자리 다른 토론자가 먼저 “차별적인 발언”이라며 항의를 했고, 나도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출산을 못하는 남자들은 출산정책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과 똑같다. 발언하시는 분은 남자인데 출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느냐”며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여성으로서 나는 늘 긴장된 삶을 살아왔다. 학생일 때도, 어른이 되어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뒤에도, 언제 어디서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성희롱·성폭력에서,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나의 능력이 저평가될까 봐 긴장하고 또 긴장하며 살아왔다. 쉰살이 다 된 지금도 나는 여성이라서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제지당하는 삶을 여전히 살고 있다. 이렇게 상시적인 긴장 속에서 고단하게 살고 있는 여성이 어디 나뿐인가. 지난해 초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뒤, 연극계 문화계 등 각계각층에서 이어진 여성들의 성희롱·성폭력 피해 사실 폭로와 이에 연대하는 #미투운동을 보면서 나는 그녀들에 대한 격려의 박수를 치기보다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전히 여성의 삶은 고단하다는 사실과 오직 위안이 되는 것은 ‘나도 당했다’고 외치는 슬픈 연대라는 사실 때문에….

 

 

친구 한명에게만 남겼던 ‘비밀’

 

죽은 뒤에 나를 찾아온 그녀는 20대 후반의 갓 결혼한 공무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찾아온 것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수년간 공무원이 되려 공부한 끝에 4전5기 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어렵게 공부해 공무원이 된 그녀가, 임용된 지 불과 10개월 만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대체 그녀는 왜 죽어야 했단 말인가. 그렇게 원했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그녀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한 삶만 꿈꾸면 됐는데 말이다.

 

그녀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그는 그녀의 휴대폰에서 친한 친구와 주고받은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확인하고서야 그녀가 왜 병이 들었고, 자살에 이르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공무원으로 임용된 뒤 성희롱과 성차별에 시달려온 것이다. 그는 그녀의 카톡에서 실명이 확인되는 가해자들의 성희롱 행위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였고, 인권위원회는 조사 결과 성희롱 사실을 확인했다. 이 일로 관계기관은 발칵 뒤집어져 성희롱 전수조사를 하고 성차별적 문화 개선, 엄벌 등의 성희롱 예방을 위한 제도 개선책을 마련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죽음이 공무상 재해가 아니라는 공무원연금공단(이하 공단)의 판단에 있었다. 공단은 그녀의 발병과 그로 인한 자살은 그녀의 기질로 인한 것일 뿐 직장 내 성희롱 등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봤다. 그녀가 당한 언어적 성희롱 몇번이 그녀의 우울증을 발병시키거나 악화시키기에는 미흡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녀는 입사 뒤 6개월간 시보(일종의 수습) 공무원이었다. 6개월간의 근무성적이 좋으면 정식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있었다. 그녀를 성희롱한 사람은 모두 그녀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 상급자였다. 정식 임용을 앞둔 그녀는 그들의 부당한 지시나 성희롱에 문제제기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녀의 근무공간은 매우 좁은 연구실 같은 곳이었는데, 그 좁은 공간에서 성희롱 가해자와 함께 근무해야 했고, 심지어 나중에 그녀가 성희롱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린 뒤에도 4개월 가까이 가해자와 분리되지 못하고 같은 공간에서 근무했다. 게다가 그녀는 가해자들을 포함해 직장 상사들에게 “이쁜이”라 불리며 수시로 커피를 타는 등 업무와 무관한 성차별적인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가해자를 알 수 있었던 여러차례의 성희롱 외에도 “나는 딸을 안을 때 가슴이 닿는 느낌이 좋다”, 회식 뒤 “쉬었다 가자” “둘이 같이 가서 옷을 골라달라” 등 직장 상급자의 농담을 가장한 성희롱 발언이 그녀 또는 다른 여성 동료들에게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음이 그녀가 남긴 기록에서 확인됐다. 그녀의 여성 상급자도 성희롱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들 또한 시보 공무원에 불과한 그녀와 다를 바 없이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못했다. 정식 공무원이 되고 승진을 해도 성희롱이나 성차별적인 관행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여성 상급자들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전히 암울할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을까.

 

농담 하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성 없는 예민한 여자로 찍히지 않기 위한, 상급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그녀의 침묵은 그녀를 병들게 하였다. 견디다 못한 그녀는 책임자에게 가해자를 특정하지 않은 채 성희롱을 여러차례 당했으니 성희롱 방지 교육을 실시해달라고 요청했다. 단 자신이 이런 요청을 한 사실은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튿날 가해자 한명이 찾아와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그녀는 사과를 받았다는 기쁨보다 가해자가 즉시 알고 찾아왔다는 사실에 더 큰 두려움을 느꼈고 “이 일은 앞으로 직장생활에서 나에게 두고두고 족쇄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카톡 메시지를 친구에게 남겼다.

 

소송 중 공단은 일부 성희롱 가해자가 직접 작성한 진정서를 증거로 제출했는데, 나는 그 내용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원래 직장생활 부적응 성격으로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정도였고 무능력했으며, 심지어는 그녀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열애 기사가 그녀의 죽음에 영향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기관의 징계까지 받고도 저런 내용의 진정서를 쓴 가해자들의 태도보다도 더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그 진정서를 증거랍시고 법정에 제출한 공단의 태도였다. 나는 공단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 반성은커녕 심각한 명예훼손적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한 가해자들의 태도에 비추어볼 때, 그녀가 생전에 가해자들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며 그녀의 자살이 공무상 재해로 인한 것임을 강조했다.

 

우울증으로 인한 그녀의 자살이 성희롱과 무관하다는 공단의 판단에는, 그녀가 우울증 진단과 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한번도 의사에게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유가 됐다. 그녀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하면서도 성희롱 피해 사실 등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우울과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상담 의사에게뿐만 아니라, 입사 동기들과 카톡으로 직장 내 고충에 대해 활발히 대화를 나눌 때에도 성희롱 피해 사실만은 밝히지 못하였고 남편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오직 친구 한명에게만 피해 사실을 토로했다.

 

이는 성폭력(성희롱도 넓은 의미의 성폭력에 해당한다) 피해자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모습이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원인을 자기 자신(자신의 행실)에게 돌림으로써 죄책감으로 우울감에 빠지거나 자해행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수치심 때문에 피해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넘기려고 하고, 치료를 받으러 가서도 피해를 당한 사실은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성희롱 피해 사실을 공개하더라도 피해가 회복되기 어렵고, 오히려 2·3차 가해는 당연한 부록이며, 결국에는 피해자 자신이 직장과 공동체에서 손가락질받고 쫓겨날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공단은 그녀의 이런 전형적인 태도를 오히려 그녀의 죽음과 성희롱 피해 사실이 전혀 무관하다는 근거로 사용하고 그녀의 기질만을 문제 삼은 것이다.

 

 

끝까지 노력했지만

 

나는 그녀의 우울증이 원래 그녀의 우울 기질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 초·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을 뒤지고 대학 친구들까지 찾아 그녀의 과거 생활을 추적했다. 쾌활하고 밝은 그녀였다. 수년의 긴 수험 기간을 견뎌낸 강인한 그녀였다. 그녀가 당한 언어적 성희롱만 떼어놓고 보면 ‘추행이나 강간도 아니고 언어적 성희롱 몇마디 들었다고 자살까지 하나’라고 반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언어적 성희롱 자체로 인한 고통을 회피하고자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언어적 성희롱을 비롯한 성차별적 근무환경에 수시로 노출되면서 우울증이 발병했고 급격히 우울증이 악화됐으며, 결국에는 병이 깊어져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녀가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성희롱과 성차별을 견뎌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 인내하면서, 때론 싸우면서 죽을힘을 다해 견뎌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소송을 하면서 그녀의 죽음의 억울함에 대해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규명하려 노력했다. 자살의 원인을 밝혀내는 철저한 심리적 부검(자살자의 가족을 비롯한 지인을 심층적으로 인터뷰하고 고인의 유서나 일기 등 개인적 기록과 병원 진료 기록 등을 분석해 자살의 이유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을 하여, 그녀의 우울증 발병과 악화의 원인이 수시로 발생하는 성차별과 성희롱을 견뎌야 했던 직장 내 환경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직장 내 성희롱이 경중을 불문하고 심각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은 성차별적 사고에서 비롯된 성희롱이 여성이 일하는 근무환경을 크게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성차별로 인한 근무환경의 악화는 결국 여성을 직장에서 견디기 어렵게 만들고, 여성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게 된다.

 

소송은 1심 패소, 2·3심 승소로 그녀가 사망한 지 수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판결문을 받아 들고 판결문에 기록된 그녀의 행적을 되새겨보았다. 그녀는 끝까지 살기 위해 노력했다. 병원을 찾아가고 약을 복용하고, 아이를 낳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도 마지막 순간 삶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생각하니 눈물이 솟구쳤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 피해자의 죽음과는 상관없는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의 생각처럼 그녀의 죽음 자체는 이례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여성이 직장 내 성차별과 성희롱, 성폭력으로 때론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을 받고, 실제 죽기도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많은 여성이 직장 내 성폭력 등 피해 사실 드러내기에 동참했다. 이는 여성들의 사사로운 투정이나 남성에 대한 모함이 아니라 직장과 사회에서 동등한 동료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자구책이다. 그나마 여성들이 말하고 외치고 드러내는 것은 지금보다 나아질 희망이 있다는 징표이다. 희망이 좌절되는 순간 그녀의 이례적인 죽음은 일상이 되어, 집단으로 절벽을 뛰어내려 자살하는 레밍처럼 모두가 손을 잡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 새해 벽두 희망의 좌절보다 희망의 실현을 믿고 싶다. 혐오와 차별의 언어보다 공감의 언어가 훨씬 더 힘이 세다는 것을 믿고 싶다.

 

 

▶ 김수정: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전문위원. 이주여성인권센터 법률지원단. 두 딸의 엄마로 주업은 작은 로펌의 생계형 변호사다. 성폭력, 가정폭력, 이주여성 등에 대한 법률 지원을 꾸준히 해왔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들 곁에서 손잡아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자 했고, 되고 싶다. 그녀들을 위한 변론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78139.html?_fr=mt1#csidxa7f71017b947a0a84677e2f4be6a3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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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전쟁과 달러기축체제의 위기(4)


- 윤곽을 드러내는 다극화 경제질서(끝)
  • 손정목 4.27시대연구원 국제분과장
  • 승인 2019.01.12 16:47
  • 댓글 0

- 윤곽을 드러내는 다극화 경제질서(끝)
  • 손정목 4.27시대연구원 국제분과장
  • 승인 2019.01.12 16:47
  • 댓글 0

세계경제의 불안정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한계에 이른 양적완화, 천문학적 부채위기가 전후 70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달러기축체제의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다. 미국이 최근 강력히 시행하고 있는 ‘대규모 무역전쟁’과 ‘금리인상’, 그리고 ‘경제제재의 남발’은 본질적으로 달러기축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3대 경제전략이다. 당연히 이에 대항하는 주요국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달러국채를 팔아치우고, 제재에 저항하면서 달러결제시스템을 우회하는 새로운 국제결제시스템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는 새로운 다극화된 경제질서로의 전환기에 서있다.[필자주]

1. 양적완화가 끝나고 있다

2. 금리인상과 무역전쟁 그리고 경제제재의 향방

3. 중국제조 2025와 미중 무역전쟁의 향방

4. 윤곽을 드러내는 다극화 경제질서

1) 세계질서 전환을 추동하는 ‘3대1’의 전략구도

2018년 세계정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북한(조선)의 핵무력 완성에 의한 북·중·러 3개 핵보유국간의 전략적 협력관계의 실현이다. 역사상 처음 북·중·러 대 미국이라는 3대1의 핵보유국간 대결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전후 미국 우위의 핵패권 구도가 완전히 무너지는 역사적 사변이다. 이 전략구도는 강력한 전쟁억지력으로 작동해 시리아전쟁을 필두로 아프가니스탄전쟁, 예멘전쟁, 그리고 65년을 끌어온 한반도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있다. 세계 각지의 전쟁이 거의 동시에 끝나고 있는 것이다. 전후 역사에서 미국이 개입한 주요 전쟁이 이처럼 한꺼번에 끝나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사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은 계속해서 세계의 경찰일 수는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시리아 주둔 미군의 전면철수 명령과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부분철수 결정 보도가 나온 직후다. 이에 대해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뉴스(Sputniknews)는 “(공식적인 그 발언이) 올해(2018년)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는 전문가 발언을 보도하였다. 그 이유는 ‘미국이 더 이상 해외 군사작전에 수백억 달러를 퍼부을 여력이 없음’을 드러낸 것으로, 이는 “미국 패권을 이루는 경제, 제도, 군사적 기초의 붕괴가 이제 가시화”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미 의회조사국도 지난해 11월 ‘러시아나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이 벌어진다면 패배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의회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이것은 군사력면에서도 미국이 러시아나 중국에 뒤진다는 솔직한 토로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제기되어온 ‘미국의 세기가 끝나고 있다’는 조짐이 이제 가시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렇듯 핵보유국간 3대1의 전략구도 형성과 미국의 ‘세계경찰 포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상당수 국내외 주류언론들은 미국의 세계경찰 포기가 트럼프 대통령의 지나친 미국우선주의의 산물이라거나 동맹국에 방위비를 더 내게 하기 위한 술수라는 등 트럼프 정부 정책위주로 보도하고 있다. 이런 류의 분석은 마치 트럼프 대통령이 마음을 바꾸거나, 대통령을 교체하면 언제든 미국이 세계경찰 지위를 회복할 것이라는 착시를 일으킨다. 그러나 본질은, 이제는 미국이 세계경찰 역할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핵무력 완성 3국의 전략적 단결과 미국의 군사력, 경제력의 위축으로 미국이 더는 세계경찰 노릇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환적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향수에 젖어있는 미 군산언복합체를 비롯한 추종, 동맹세력들은 어떡해서든 시리아 철군을 미루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유지하면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되돌리려 하고 있다. 올해는 이 전환적 흐름이 확고히 자리 잡는가 아니면 뒤로 더 밀린 것인가를 가르는 결전의 해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일 ‘대만동포에게 고하는 편지’ 발표 40주년 기념연설에서 “현재 세계는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변혁기”라고 규정하고 군에 전쟁 계획을 철저히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중국은 차제에 대만과의 통일까지 내다보고 있다. 러시아 역시 지난해 3월에 이어 12월에도 최첨단 극초음속 전략무기 ‘아방가르드’ 등을 선보이며 평화정착 흐름을 거스르려는 미국을 위축시켰다. 미국은 3대 핵보유국의 전략적 단결에 의한 강력한 전쟁억지력에 의해 더 이상 세계 각지에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확대하지 못할 것이다.

2) 다극화 세계경제질서의 주체 – 브릭스 플러스(BRICS+)

이러한 지정학적 변화는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질서의 근본적 변화과정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를 중심으로 한 남남협력의 강화는 달러기축체제를 끝내는 새로운 국제금융질서 수립과정과 맞물려 새로운 다극화 세계경제질서의 핵심 동력이다.

2017년 9월 중국 샤먼에서 열린 9차 브릭스정상회의에서 중국은 ‘브릭스 플러스’(BRICS+)라는 남남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고, 지난해 7월 10차 브릭스정상회의는 요하네스버그선언을 통해 다자주의 세계경제질서의 주체로서 브릭스 플러스를 제창했다. 주지하듯이 남남협력이란 주로 남반구에 몰려있는 개발도상국과 신흥국들간의 무역, 산업기술, 금융 등 전반의 경제협력을 의미한다. 이는 북반구 선진국들의 경제침탈에 대항한 신흥국들의 자주적 경제발전을 위한 협력체계로, 그간 아프리카-남미협력회의(ASA) 등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의 방해와 간섭으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 지난해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에 참석한 인도의 모디 총리(왼쪽), 중국의 시진핑 주석, 남아공의 라마포사 대통령,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브라질의 미셰우 테메르 당시 대통령.

그러나 이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중국을 중심으로 국제통화기금(IMF)를 대체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하고, 또 세계은행(IBRD)를 대체하는 브릭스 자체의 신개발은행(NDB)이 설립되어 브릭스만 아니라 기타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의 인프라 건설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자금지원 체계가 마련되었다. 이로써 남남협력은 미국 등 서방의 간섭과 방해를 배제하고 실질적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금융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기초한 브릭스 플러스는 기존 브릭스 국가들과 여타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들과의 연계를 강화하여 남남협력체제를 완성해 나간다는 브릭스의 전략방향이다. 즉 브릭스 자체를 확대하기보다 브릭스를 축으로 한 남남협력을 확대 강화한다는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이를 “보다 밀접한 파트너십 네트워크”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초강대국(미국)에 의한 경제제재나 경제전쟁이 없는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이 주연인 “새로운 유형의 국제관계”(a new type of international relations) 건설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 미국 중심의 패권적 세계경제질서를 신흥국, 개발도상국 중심의 다극화된 새로운 경제질서로 바꿔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의 실현을 위해 남남협력을 4차 산업혁명의 중심으로 발전시킨다는 “신산업혁명 브릭스 파트너십”(the BRICS Partnership on New Industrial Revolution)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남남협력을 기존의 신흥국간 호혜적인 무역, 금융, 기술교류 수준이 아니라 향후 세계경제를 주도해 나갈 첨단산업의 중심기지로 바꿔나간다는 전략이다. 자금과 첨단기술의 준비는 새로운 경제질서 구축의 핵심이다. 중국은 자국의 ‘일대일로’와 ‘중국제조2025’ 전략을 5대륙의 남남협력 체계인 브릭스 플러스에 기반한 “신산업혁명 브릭스 파트너십” 전략과 연동시키고 있다.

여기에 더해 브릭스는 기존 지역협력기구의 집합체(the aggregation of regional integration groups)로서 빔스(BEAMS) 건설을 선언하였다. 빔스는 아프리카 연합(AU), 상하이협력기구(SCO),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같은 기존 남남간의 지역협력기구를 더 큰 통합체계로 묶는다는 의미다. 중국 왕이 외교부장은 브릭스 플러스와 빔스를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남남협력의 가장 확장된 플랫폼”(most extensive platform for South-South cooperation with a global impact)으로 정의하였다. 브릭스는 남남협력체계를 개별 국가와의 네트워크 확대와 지역연합기구의 통합이라는 중층적 구조로 만들어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의 강력한 중심주체로 세우려는 것이다.

이같은 중층적 남남협력체계가 건설되면 내부거래에 사용되는 통화체제는 당연히 달러가 될 수 없다. 달러기축체제는 붕괴된다. 세계는 다극형에 맞는 통화체계를 갖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중‧러를 중심으로 한 여러 신흥국들은 ▲달러를 대체하고 새로운 기축성을 세우기 위한 금 보유 확대와 국가 차원의 암호화폐 준비 ▲국제달러결제시스템 스위프트(SWIFT)를 대체할 새로운 결제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다.

3) 2024년 달러 사용 폐기 선언과 RCEP

이와 관련해 달러 사용 폐기계획을 선명하게 내세운 국가는 러시아다. 러시아 재무부는 지난 해 10월 2024년까지 달러 의존에서 벗어날 것을 발표하였다. 달러 사용 폐기를 시한을 정해 발표한 경우는 처음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 정부는 무역결제를 달러 대신 루블로 할 것을 기업에 촉구하고, 특히 러시아가 세계적 우위에 있는 석유, 가스, 무기 수출 등은 루블로 거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 터키나 인도는 러시아 최첨단 미사일방어시스템(MD) S-400 구입대금을 루블로 지불하였다. 더불어 러시아는 지난해 보유한 미 국채 84%를 매각하고 그 대금으로 금을 사는 등 2000톤 이상의 금을 확보하여 루블의 신뢰성 제고는 물론 달러기축 폐기를 준비하고 있다.

사실 러시아가 달러 사용을 중단한다는 것은 러시아 일국에만 적용될 사안이 아니다. 러시아 주도의 국제협력체인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독립국가연합(CIS)은 물론 브릭스의 무역거래 역시 달러 사용 폐기를 지향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러시아는 미국과 자웅을 겨룰 정도의 군사대국이다. 이미 중동의 새판짜기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치, 군사적 힘의 우위는 경제질서 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이미 이란, 터키는 무역거래에 달러 사용을 줄이고 자국 화폐나 위안, 루블, 유로 비중을 높이면서 금 보유를 확대하고 있다. 터키는 유럽으로의 관문이고, 이란은 유라시아의 중심이다. 향후 중동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이란과 터키가 협력하여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를 견인하면서 안정화의 길을 열 것이다. 이 변화 과정에서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이들 나라와의 협력(남남협력) 아래 확대되면서 중동은 달러를 배제한 다극화 경제질서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이다.

또 브릭스의 일원인 인도는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와 루피와 바터제(barter. 물물교환)에 의한 거래, 중국과도 자국 통화 거래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달러가 부족한 베네수엘라와는 인도 의약품과 석유거래 바터제를 추진하고 있다. 인도가 사실상 돌아서면서 미‧일이 추진하던 중국포위전략인 인도-태평양 전략은 무너졌다(중국의 달러 사용 중단 관련 사항은 이 글 3편 참조 바람).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할 다극화 흐름은 중국 주도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다. RCEP는 아시아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 16개국이 참여하여 세계 인구 절반과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규모 경제협정으로 올해 최종 타결될 것으로 보인다. 이 협정이 주목되는 것은 처음으로 미국이 제외되고 중국 주도로 아시아의 통합된 경제블록(질서)이 건설된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 협정을 아시아지역 남남협력 모델로 세우려 하고 있다. 당연히 달러 사용을 당장 중단하지는 못하더라도 줄이게 되고 위안화 사용 비중은 대폭 늘 것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뉴스는 현 세계경제에 대해 ‘미국의 경제제재 남발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이탈로 사실상 국제무역기구(WTO)의 규정이 무력화된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RCEP는)중국을 비롯한 역내 국가들의 대안적인 국제 및 지역 무역 규정 마련을 위한 시도”라고 평가하였다. RCEP는 다극화 경제질서의 아시아지역의 축이 될 것이다. 지난해 말 발효된 일본, 호주 주도의 11개국 ‘포괄적, 점진적 환태평양경제공동체협정’(CPTPP)은 중국포위 성격을 폐기하고 RCEP와 협력할 수밖에 없다.

70년 이상 세계를 지배해온 달러기축체제가 그 수명을 다하고 있다. 그 기한이 러시아가 계획하는 2024년이 될지, 중국이 전망하는 2025년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얼마 남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런 대전환기에는 항시 과거의 향수에 젖은 자들에 의해 긴장과 혼란이 높아지는 법이다. 전쟁이 발발한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역사상 처음 출현한 핵보유국간 3대1의 전략구도는 강력한 전쟁억지력으로 작동하여 더 이상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은 없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은 바로 이러한 세계사적 대전환의 일환이다. 불가역적이다. 미국 패권체제 몰락은 그 시작과 함께 만들어진 인위적 분단장벽도 무너지게 할 것이다. 통일한반도의 출현이 가까워지고 있다. 고난의 역사를 이겨낸 통일한반도는 남남협력의 한 축으로 세계적 번영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끝)

손정목 4.27시대연구원 국제분과장  webmaster@minplus.or.kr

icon관련기사icon무역전쟁과 달러기축체제의 위기(3)icon무역전쟁과 달러기축체제의 위기(2)icon무역전쟁과 달러기축체제의 위기(1)

 

 

세계경제의 불안정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한계에 이른 양적완화, 천문학적 부채위기가 전후 70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달러기축체제의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다. 미국이 최근 강력히 시행하고 있는 ‘대규모 무역전쟁’과 ‘금리인상’, 그리고 ‘경제제재의 남발’은 본질적으로 달러기축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3대 경제전략이다. 당연히 이에 대항하는 주요국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달러국채를 팔아치우고, 제재에 저항하면서 달러결제시스템을 우회하는 새로운 국제결제시스템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는 새로운 다극화된 경제질서로의 전환기에 서있다.[필자주]

1. 양적완화가 끝나고 있다

2. 금리인상과 무역전쟁 그리고 경제제재의 향방

3. 중국제조 2025와 미중 무역전쟁의 향방

4. 윤곽을 드러내는 다극화 경제질서

1) 세계질서 전환을 추동하는 ‘3대1’의 전략구도

2018년 세계정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북한(조선)의 핵무력 완성에 의한 북·중·러 3개 핵보유국간의 전략적 협력관계의 실현이다. 역사상 처음 북·중·러 대 미국이라는 3대1의 핵보유국간 대결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전후 미국 우위의 핵패권 구도가 완전히 무너지는 역사적 사변이다. 이 전략구도는 강력한 전쟁억지력으로 작동해 시리아전쟁을 필두로 아프가니스탄전쟁, 예멘전쟁, 그리고 65년을 끌어온 한반도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있다. 세계 각지의 전쟁이 거의 동시에 끝나고 있는 것이다. 전후 역사에서 미국이 개입한 주요 전쟁이 이처럼 한꺼번에 끝나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사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은 계속해서 세계의 경찰일 수는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시리아 주둔 미군의 전면철수 명령과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부분철수 결정 보도가 나온 직후다. 이에 대해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뉴스(Sputniknews)는 “(공식적인 그 발언이) 올해(2018년)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는 전문가 발언을 보도하였다. 그 이유는 ‘미국이 더 이상 해외 군사작전에 수백억 달러를 퍼부을 여력이 없음’을 드러낸 것으로, 이는 “미국 패권을 이루는 경제, 제도, 군사적 기초의 붕괴가 이제 가시화”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미 의회조사국도 지난해 11월 ‘러시아나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이 벌어진다면 패배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의회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이것은 군사력면에서도 미국이 러시아나 중국에 뒤진다는 솔직한 토로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제기되어온 ‘미국의 세기가 끝나고 있다’는 조짐이 이제 가시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렇듯 핵보유국간 3대1의 전략구도 형성과 미국의 ‘세계경찰 포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상당수 국내외 주류언론들은 미국의 세계경찰 포기가 트럼프 대통령의 지나친 미국우선주의의 산물이라거나 동맹국에 방위비를 더 내게 하기 위한 술수라는 등 트럼프 정부 정책위주로 보도하고 있다. 이런 류의 분석은 마치 트럼프 대통령이 마음을 바꾸거나, 대통령을 교체하면 언제든 미국이 세계경찰 지위를 회복할 것이라는 착시를 일으킨다. 그러나 본질은, 이제는 미국이 세계경찰 역할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핵무력 완성 3국의 전략적 단결과 미국의 군사력, 경제력의 위축으로 미국이 더는 세계경찰 노릇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환적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향수에 젖어있는 미 군산언복합체를 비롯한 추종, 동맹세력들은 어떡해서든 시리아 철군을 미루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유지하면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되돌리려 하고 있다. 올해는 이 전환적 흐름이 확고히 자리 잡는가 아니면 뒤로 더 밀린 것인가를 가르는 결전의 해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일 ‘대만동포에게 고하는 편지’ 발표 40주년 기념연설에서 “현재 세계는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변혁기”라고 규정하고 군에 전쟁 계획을 철저히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중국은 차제에 대만과의 통일까지 내다보고 있다. 러시아 역시 지난해 3월에 이어 12월에도 최첨단 극초음속 전략무기 ‘아방가르드’ 등을 선보이며 평화정착 흐름을 거스르려는 미국을 위축시켰다. 미국은 3대 핵보유국의 전략적 단결에 의한 강력한 전쟁억지력에 의해 더 이상 세계 각지에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확대하지 못할 것이다.

2) 다극화 세계경제질서의 주체 – 브릭스 플러스(BRICS+)

이러한 지정학적 변화는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질서의 근본적 변화과정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를 중심으로 한 남남협력의 강화는 달러기축체제를 끝내는 새로운 국제금융질서 수립과정과 맞물려 새로운 다극화 세계경제질서의 핵심 동력이다.

2017년 9월 중국 샤먼에서 열린 9차 브릭스정상회의에서 중국은 ‘브릭스 플러스’(BRICS+)라는 남남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고, 지난해 7월 10차 브릭스정상회의는 요하네스버그선언을 통해 다자주의 세계경제질서의 주체로서 브릭스 플러스를 제창했다. 주지하듯이 남남협력이란 주로 남반구에 몰려있는 개발도상국과 신흥국들간의 무역, 산업기술, 금융 등 전반의 경제협력을 의미한다. 이는 북반구 선진국들의 경제침탈에 대항한 신흥국들의 자주적 경제발전을 위한 협력체계로, 그간 아프리카-남미협력회의(ASA) 등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의 방해와 간섭으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 지난해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에 참석한 인도의 모디 총리(왼쪽), 중국의 시진핑 주석, 남아공의 라마포사 대통령,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브라질의 미셰우 테메르 당시 대통령.

그러나 이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중국을 중심으로 국제통화기금(IMF)를 대체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하고, 또 세계은행(IBRD)를 대체하는 브릭스 자체의 신개발은행(NDB)이 설립되어 브릭스만 아니라 기타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의 인프라 건설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자금지원 체계가 마련되었다. 이로써 남남협력은 미국 등 서방의 간섭과 방해를 배제하고 실질적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금융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기초한 브릭스 플러스는 기존 브릭스 국가들과 여타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들과의 연계를 강화하여 남남협력체제를 완성해 나간다는 브릭스의 전략방향이다. 즉 브릭스 자체를 확대하기보다 브릭스를 축으로 한 남남협력을 확대 강화한다는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이를 “보다 밀접한 파트너십 네트워크”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초강대국(미국)에 의한 경제제재나 경제전쟁이 없는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이 주연인 “새로운 유형의 국제관계”(a new type of international relations) 건설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 미국 중심의 패권적 세계경제질서를 신흥국, 개발도상국 중심의 다극화된 새로운 경제질서로 바꿔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의 실현을 위해 남남협력을 4차 산업혁명의 중심으로 발전시킨다는 “신산업혁명 브릭스 파트너십”(the BRICS Partnership on New Industrial Revolution)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남남협력을 기존의 신흥국간 호혜적인 무역, 금융, 기술교류 수준이 아니라 향후 세계경제를 주도해 나갈 첨단산업의 중심기지로 바꿔나간다는 전략이다. 자금과 첨단기술의 준비는 새로운 경제질서 구축의 핵심이다. 중국은 자국의 ‘일대일로’와 ‘중국제조2025’ 전략을 5대륙의 남남협력 체계인 브릭스 플러스에 기반한 “신산업혁명 브릭스 파트너십” 전략과 연동시키고 있다.

여기에 더해 브릭스는 기존 지역협력기구의 집합체(the aggregation of regional integration groups)로서 빔스(BEAMS) 건설을 선언하였다. 빔스는 아프리카 연합(AU), 상하이협력기구(SCO),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같은 기존 남남간의 지역협력기구를 더 큰 통합체계로 묶는다는 의미다. 중국 왕이 외교부장은 브릭스 플러스와 빔스를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남남협력의 가장 확장된 플랫폼”(most extensive platform for South-South cooperation with a global impact)으로 정의하였다. 브릭스는 남남협력체계를 개별 국가와의 네트워크 확대와 지역연합기구의 통합이라는 중층적 구조로 만들어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의 강력한 중심주체로 세우려는 것이다.

이같은 중층적 남남협력체계가 건설되면 내부거래에 사용되는 통화체제는 당연히 달러가 될 수 없다. 달러기축체제는 붕괴된다. 세계는 다극형에 맞는 통화체계를 갖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중‧러를 중심으로 한 여러 신흥국들은 ▲달러를 대체하고 새로운 기축성을 세우기 위한 금 보유 확대와 국가 차원의 암호화폐 준비 ▲국제달러결제시스템 스위프트(SWIFT)를 대체할 새로운 결제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다.

3) 2024년 달러 사용 폐기 선언과 RCEP

이와 관련해 달러 사용 폐기계획을 선명하게 내세운 국가는 러시아다. 러시아 재무부는 지난 해 10월 2024년까지 달러 의존에서 벗어날 것을 발표하였다. 달러 사용 폐기를 시한을 정해 발표한 경우는 처음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 정부는 무역결제를 달러 대신 루블로 할 것을 기업에 촉구하고, 특히 러시아가 세계적 우위에 있는 석유, 가스, 무기 수출 등은 루블로 거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 터키나 인도는 러시아 최첨단 미사일방어시스템(MD) S-400 구입대금을 루블로 지불하였다. 더불어 러시아는 지난해 보유한 미 국채 84%를 매각하고 그 대금으로 금을 사는 등 2000톤 이상의 금을 확보하여 루블의 신뢰성 제고는 물론 달러기축 폐기를 준비하고 있다.

사실 러시아가 달러 사용을 중단한다는 것은 러시아 일국에만 적용될 사안이 아니다. 러시아 주도의 국제협력체인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독립국가연합(CIS)은 물론 브릭스의 무역거래 역시 달러 사용 폐기를 지향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러시아는 미국과 자웅을 겨룰 정도의 군사대국이다. 이미 중동의 새판짜기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치, 군사적 힘의 우위는 경제질서 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이미 이란, 터키는 무역거래에 달러 사용을 줄이고 자국 화폐나 위안, 루블, 유로 비중을 높이면서 금 보유를 확대하고 있다. 터키는 유럽으로의 관문이고, 이란은 유라시아의 중심이다. 향후 중동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이란과 터키가 협력하여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를 견인하면서 안정화의 길을 열 것이다. 이 변화 과정에서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이들 나라와의 협력(남남협력) 아래 확대되면서 중동은 달러를 배제한 다극화 경제질서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이다.

또 브릭스의 일원인 인도는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와 루피와 바터제(barter. 물물교환)에 의한 거래, 중국과도 자국 통화 거래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달러가 부족한 베네수엘라와는 인도 의약품과 석유거래 바터제를 추진하고 있다. 인도가 사실상 돌아서면서 미‧일이 추진하던 중국포위전략인 인도-태평양 전략은 무너졌다(중국의 달러 사용 중단 관련 사항은 이 글 3편 참조 바람).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할 다극화 흐름은 중국 주도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다. RCEP는 아시아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 16개국이 참여하여 세계 인구 절반과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규모 경제협정으로 올해 최종 타결될 것으로 보인다. 이 협정이 주목되는 것은 처음으로 미국이 제외되고 중국 주도로 아시아의 통합된 경제블록(질서)이 건설된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 협정을 아시아지역 남남협력 모델로 세우려 하고 있다. 당연히 달러 사용을 당장 중단하지는 못하더라도 줄이게 되고 위안화 사용 비중은 대폭 늘 것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뉴스는 현 세계경제에 대해 ‘미국의 경제제재 남발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이탈로 사실상 국제무역기구(WTO)의 규정이 무력화된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RCEP는)중국을 비롯한 역내 국가들의 대안적인 국제 및 지역 무역 규정 마련을 위한 시도”라고 평가하였다. RCEP는 다극화 경제질서의 아시아지역의 축이 될 것이다. 지난해 말 발효된 일본, 호주 주도의 11개국 ‘포괄적, 점진적 환태평양경제공동체협정’(CPTPP)은 중국포위 성격을 폐기하고 RCEP와 협력할 수밖에 없다.

70년 이상 세계를 지배해온 달러기축체제가 그 수명을 다하고 있다. 그 기한이 러시아가 계획하는 2024년이 될지, 중국이 전망하는 2025년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얼마 남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런 대전환기에는 항시 과거의 향수에 젖은 자들에 의해 긴장과 혼란이 높아지는 법이다. 전쟁이 발발한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역사상 처음 출현한 핵보유국간 3대1의 전략구도는 강력한 전쟁억지력으로 작동하여 더 이상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은 없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은 바로 이러한 세계사적 대전환의 일환이다. 불가역적이다. 미국 패권체제 몰락은 그 시작과 함께 만들어진 인위적 분단장벽도 무너지게 할 것이다. 통일한반도의 출현이 가까워지고 있다. 고난의 역사를 이겨낸 통일한반도는 남남협력의 한 축으로 세계적 번영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끝)

손정목 4.27시대연구원 국제분과장  webmaster@minplus.or.kr

icon관련기사icon무역전쟁과 달러기축체제의 위기(3)icon무역전쟁과 달러기축체제의 위기(2)icon무역전쟁과 달러기축체제의 위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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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쟁 목표는 '세계 경제 정복'

[전쟁국가 미국·2강-①] 2차 대전과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2019.01.12 11:52:41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서 박인규 이사장의 '전쟁국가 미국' 강연을 마련했습니다. 이 강연에서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해온 군사주의 노선이 현재 세계의 혼란과 부의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후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봅니다. 
 
<프레시안>은 지난해 12월 5일에 시작해 오는 3월 31일까지 격주로 진행되는 강연의 내용을 정리해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아래는 지난해 12월 19일 진행된 2회 강연을 보강한 내용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2차 대전은 미국에게 '좋은 전쟁(Good War)'이었다.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던 독일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를 무찌름으로써 인류의 해방자로 떠오른 한편 막대한 전쟁 수요로 대공황을 단숨에 극복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엔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등 전후 세계를 이끌어갈 국제 안보 및 경제 기구의 창설을 주도하면서 세계의 패권국가가 된다. 바야흐로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가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전쟁 말기 절대무기인 원자탄을 독점하면서 세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개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 즉 '미국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만능(omnipotence)의 환상을 품게 된다.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한 만큼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감, 또는 환상은 4반세기를 넘기지 못한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도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 군사주의의 실패를 의미한다. 군사력에 의거한 세계 경영이 파탄한 것이다. 미국은 왜 군사주의로 나아갔을까? 그 원인은 2차 대전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1차 대전보다 10배나 많은 전쟁 특수를 겪으면서 미국 경제가 전쟁 없이는 유지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을 통해 미국 경제는 '영구 전쟁 경제'가 됐고, 이는 다시 미국이라는 나라를 '영구 전쟁 국가'로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2차 대전은 1차 대전의 후속편이다. 1차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2차 대전의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즉 독일에 대한 과도한 배상금 요구가 나치의 득세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당시(1919년) 경제학자 케인스가 <평화의 경제적 귀결>(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이라는 책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배상금 규모가 독일의 정상적 경제활동을 통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유럽의 지속적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1, 2차 대전을 합해서 30년 전쟁(1914~1945년)이라고 부른다. 영국 패권이 무너진 후 세계 패권을 계승하기 위한 투쟁이 30년간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새롭게 뜨는 자본주의 국가는 미국과 일본, 독일이었는데 독일은 유럽을, 일본은 중국과 동남아를 독점 지배하려 했던 반면 미국은 세계 전체를 가지려 했다. 이로 인해 독일과 미국, 일본과 미국이 한판 붙은 것이 2차 대전이다. 2차 대전은 자본주의 열강의 패권 전쟁이었다. 

2차 대전의 결과 영국, 프랑스 등 과거 세계를 호령했던 유럽 국가들은 2선으로 물러나고 미국과 소련이 세계의 양대 주도세력으로 떠오른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식민지 민족들, 16세기 이후 서구의 세계 정복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노예로 전락했던 이른바 '제3세계'가 해방됐다는 점이다.  

1945년에서 1960년까지 약 60개의 국가가 해방됐다고 한다. 1945년까지 서구 세력(일본 포함)이 아니면 인간도, 나라도 아니었다. 제국주의 세력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사람 아닌 사람(unpeople)이자 사회 아닌 사회였다. 이들이 2차 대전 후 세계사의 무대에 당당한 주역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전쟁은 인명과 재산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 체제를 포함해 모든 것을 파괴한다. 1차 세계대전은 소련 혁명을 낳았고, 2차 대전은 중국 혁명을 초래했다. 기존 정치 체제가 파괴된 결과다. 나아가 전면적인 식민지 해방이 이루어졌다. 서구의 비서구 지배도 무너진 것이다.

식민지 인민들은 수 백 년 동안을 서구 자본주의에 당해왔다. 따라서 해방된 후 이들은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를 지향했다. 1945년 이후의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복원하려는 미국과, 민족 자결을 통해 스스로의 생존과 자유를 확보하려는 제3세계 '피압박 민중' 간의 대결로 압축해 볼 수 있다.  

미국의 2차 대전 전쟁 비용, 1차 대전의 13배 

미국은 독일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 등 세계 정복을 꿈꾸는 세력을 물리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했다고 믿는다. 또한 유엔과 IMF, IBRD 등의 창설을 통해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이루었다고 자부한다.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 발발까지, 즉 위기의 20년(1919~1939년)은 혼란과 불안정, 갈등과 대결의 시대였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패권 국가가 되고 나서 유엔을 통해 집단안보를 완성하고, IMF 등을 통해 자유무역체제를 복원한 후 비로소 세계는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이후 1970년까지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서유럽과 일본 등 동아시아)은 자본주의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한다('영광의 25년').  

이런 측면에서 미국이 2차 대전을 '좋은 전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2차 대전을 통해 세계의 해방자로 부각됐고, 세계 패권을 확보했으며, 이후 자본주의 진영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한국이 해방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2차 대전 덕택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도 '좋은 전쟁'이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또한 2차 대전을 일으킨 것은 미국이 아니라 독일과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이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런데 '좋은 전쟁'이란 인식의 보다 본질적인 이유로는 전쟁 특수가 있다. 즉 루스벨트의 뉴딜로도 극복하지 못했던 대공황을 전쟁 특수가 해결한 것이다. 

미국은 1941년 3월부터 1945년 8월까지 501억 달러 상당의 전쟁 물자를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 등 연합국에 제공했다(무기대여법 : Lend-Lease). 루스벨트 대통령이 말한 '민주주의의 병기고(Arsenal of Democracy)'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1차 대전 당시 JP모건이 연합국에 외상으로 판매한 군수 물자는 약 50억 달러였다. 그 10배의 전쟁 물자를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했다.  

렌드리스를 포함한 미국의 총 전쟁 비용은 2950억 달러로 1차 대전 때의(220억 달러) 13배가 넘는다. 이를 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 3조 9300억 달러, 4조 달러에 가깝다. 참고로 1939년의 미국 국방비는 30억 달러 정도였다. 평시 국방비의 약 100배를 4년 만에 사용한 셈이다. 공황의 원인이 수요 부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쟁 특수는 단숨에 대공황을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전쟁 특수는 일종의 극약 처방이다.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군수 물자 생산을 일종의 투자라고 치자. 그 투자는 일자리는 만들어내지만 결국에는 죽음과 파괴만을 초래할 뿐이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사회에 기여하는 생산적 결과를 낳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민수용 투자는 일자리 창출과 함께 사회적으로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따라서 군수 경제는 비상시에 단기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지속적일 수는 없다. 그런데 미국 경제는 2차 대전을 통해 '전쟁 중독'이라는 치명적 질병에 감염됐다. 이후에도 이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나치 격퇴의 수훈갑은 소련 

2차 대전의 실상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진실 한 가지가 있다. 미국이 2차 대전 승전의 최대 수훈 국가라는 것이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전장 모두에서 싸운 유일한 국가라는 점에서 일리가 없지는 않다. (영국과 프랑스는 동남아에서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밀렸고, 소련은 종전 1주일 전에야 대일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나치와의 전쟁에서 수훈갑은 단연 소련이었다.  
 

▲ 1945년 5월 베를린에 입성해 깃발을 내건 소련군. 뒤쪽으로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인다. ⓒ위키미디어커먼스


2차 대전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미국은 돈으로 때웠고 소련은 몸으로 때웠다고 볼 수 있다. 즉 미국은 주로 전쟁 물자 생산을 통해, 소련은 엄청난 인명의 희생으로 승전에 기여했다. 그 결과는 미국의 경제적 번영, 소련 경제의 초토화였다. 

소련은 군인 사망자 약 1300만 명을 포함해 3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반면 유럽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통틀어 미국과 영국의 군인 사망자는 60만 명 정도다. 레닌그라드 전투에서 사망한 소련군 숫자가 60만 명이다. 약 10만 명의 미군이 유럽 전장에서 사망했는데 이는 1945년 4월 말 베를린 공방전에서의 소련군 전사자와 같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군 전사자 대 소련군 전사자의 비율은 1 대 53이었다. 

2차 대전에서 전사, 부상, 또는 포로로 잡힌 독일군은 1350만 명인데(독일 성인 남성의 46%) 이중 1000만 명이 동부전선, 즉 소련과의 전투에서 발생한 것이다. 소련은 나치 병력의 5분의 4, 적어도 4분의 3을 대적했다. 나치 격퇴의 9할은 소련이 담당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전투의 대부분을 자국 영토에서 치른 소련은 경제적 피해도 막심했다. 1280억 달러 상당의 재산 피해, 당시 소련 GNP의 25년 치에 해당한다. 1945년 GNP는 1941년 대비 20%나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독일로부터 받아낸 전쟁 배상금은 고작 51억 달러였다.

반면 미국은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았고 따라서 전쟁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 본토에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단 6명. 당시 공군력에서 뒤졌던 일본은 폭탄을 장착한 기구를 제트기류에 태워 미국으로 보냈다. 산불 등을 유발할 목적이었는데, 이 기구 중 하나가 캘리포니아에서 터지면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미국은 연합국의 전쟁 물자 생산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엄청난 전쟁 특수를 누렸다. 대기업이 최대 수혜자였다. 막대한 이윤이 보장되는 정부 발주 전쟁 물자 계약 중 80%가 56개 대기업에 돌아갔다.  

일반 국민도 단맛을 봤다. 1940년 14.6%였던 실업률이 1944년 1.2%로 뚝 떨어졌다. 사실상 완전고용이다. 노동자 평균 임금도 1939년 주당 23달러에서 1945년 44달러로 90% 인상됐다(인플레율 25%). 지긋지긋한 대공황을 벗어난 것이다. 1930년대 맹위를 떨쳤던 반전 여론은 쑥 들어갔다. '총과 버터(Guns and Butter)'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즉 전쟁 경제와 민생 경제의 양립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널리 퍼져 갔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은 전 세계 GNP의 50%를 차지했고 금 보유량은 3분의 2가 될 정도였다. 당시 미국의 인구는 세계의 6%였다. 아시아와 유럽이 전쟁으로 초토화된 반면 미국은 더욱 번영하는 경제대국, 군사강국으로 우뚝 섰다. 같은 승전국이지만 미국은 부강해진 반면 소련은 피폐해졌다. 전쟁이 끝날 당시 미국의 경제 규모는 소련에 3배에 달했다.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미국은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제3세계 민중의 민족 자결을 위해 2차 대전에 참전했다고 대외에 천명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다. 즉 2차 대전은 미국에게만이 아니라 세계에도 '좋은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미국인의 인식은 현실에 부합하는 것일까?  

벨기에계 캐나다 역사가 자크 파월은 저서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를 통해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미국은 연합국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도 군수물자를 제공했고, 해방된 국가들의 민족 자결을 억압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병기고'라던 미국은 '나치의 병기고'이기도 했다. 전쟁 기간 나치 독일의 상당수 군수물자를 미국 기업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의 반(反)파시스트 세력을 일관되게 정치에서 배제했다.  

그는 "2차 대전은 파시즘과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미국의 성전이 아니라 기업의 이해관계와 돈, 이윤을 놓고 벌인 투쟁"이라고 규정한다. 미국의 전쟁 목표는 민주주의의 회복이 아니라 미국 경제의 해외 팽창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국 정책의 주된 동기는 자유, 정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미국 대기업을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분야 파워엘리트의 이익이었다.

"미국의 파워엘리트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그리고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했다. 민주냐 독재냐, 또는 평화적 수단이냐 군사력이냐는 중요하지 않았고, 미국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민주주의, 자유, 정의 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월뿐만이 아니다. 영국 역사가 A.J.P. 테일러는 "영국과 미국 정부는 히틀러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 말고는 유럽의 어떤 변화도 원치 않았다"고 지적한다. 정치, 경제, 사회의 어떠한 개혁도 원치 않았다는 얘기다. 

언론인이자 역사학자로 전쟁 중 워싱턴에서 일했던 브루스 캐턴은 사회 개혁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약속하는 듯 보였던 전쟁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부와 권력이 이전과 같은 사람들의 손에 집중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추축국들의 패배에만 전념했을 뿐, 다른 어떤 것도 얻지 못했다. [중략] 전쟁의 성과가 사회 및 경제 개혁을 가져오기 위해, 또는 그런 개혁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들이 엄숙하게 내린 결정이었다." 

한때 미 국무부 차관보로 일했던 시인 아치벌드 매클리시는 전후의 세계를 염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작금의 사태 진행을 보건대 우리가 만들 평화,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평화는 석유의 평화, 금의 평화, 해운업의 평화, 요컨대 도덕적 목표나 인간적 관심이 결여된 평화가 될 것이다." 

'전쟁의 정당화', 2차 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 

역사가 하워드 진의 평가는 더욱 매섭다. 그는 2차 대전을 통해 "파시즘 국가는 패배했으나 군사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 독재, 극악한 민족주의, 전쟁 등 파시즘의 요소들은 전후 세계에 널리 자리 잡게 됐다"면서 "우리는 파시즘에 맞서 승리를 거뒀지만, 그 결과 남은 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두 초강대국이 다른 나라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다투면서 파시스트 강국들이 시도했던 것보다 더 큰 규모로 새로운 세력권을 개척하는 세계였다"고 말한다. 소련은 동유럽에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와 한국, 그리고 필리핀에서.

그는 특히 "2차 대전이 세계인의 생각에 미친 치명적이고 심대한 장기적 효과"에 대해 주목한다. 그것은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존속시킨 것"이며 이로 인해 "1차 대전의 무의미한 살육 이후 철저하게 불신됐던 전쟁이 다시 한 번 숭고한 것이 됐다"는 점을 꼽는다. 이것이야말로 2차 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미국 국민을 어떤 비참한 모험으로 이끌고 가건, 또는 다른 사람들(한반도, 베트남, 이라크 등)에게 그리고 미국인 자신에게 어떤 파괴를 가하건, 2차 대전을 (국민의 전쟁 동원을 위한) 하나의 모델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나치즘 대신에 공산주의가 전쟁의 이유로 확실하게 자리를 차지했으며, 더 이상 공산주의라는 위협을 사용할 수 없을 때면 사담 후세인 같은 손쉬운 적이 히틀러에 비견될 수 있었다. 2차 대전이 절대 선이라는 가정은 전쟁 자체에 정의라는 후광을 만들어 주었으며(한국전쟁에 반대하는 대규모 저항운동이 없었음을 주목하라), 오로지 베트남 같이 극악무도하고 공식적 거짓말에 흠뻑 젖은 모험만이 이런 후광을 헤쳐 없앨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미국의 지배 엘리트가 창시한, "미국은 원초적으로 다른 나라 정치인들보다 우월한 도덕성을 갖고 행동한다는 그릇된 주장이 동시대인들의 반향을 얻고 그 이래로 미국 국민들이 받아들이게 된 것"을 문제로 지적하면서 이런 면에서 2차 대전 이후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 아닐뿐더러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2차 대전이 어떠했기에 미국은 전쟁을 정당화 했는가, 그 실상을 들여다본다.  

포드, GM 등 미국 대기업, '나치의 병기고' 

1940년 12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은 민주주의의 병기고'가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위한 무기 생산 공장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미 육군 조사관 헨리 슈나이더는 보고서를 통해 포드의 독일 자회사 포드 베르케에 대해 '나치의 병기고(Arsenal of Nazism)'라고 지칭했다.  

포드를 비롯한 제네럴 모터스(GM), 스탠다드 오일, IBM, ITT(국제전신전화회사, AT&T의 전신) 등 미국의 20개 주요 대기업은 전쟁 이전은 물론이고 전쟁 기간에도 나치 독일을 위한 군수품 생산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들 대기업은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은 물론 교전 국가인 독일에도 군수품을 제공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들에게 전쟁은 최고의 장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 대기업의 전쟁 장사를 미국 정부조차 막을 수 없었다.  

1940년 6월 26일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에서는 독일 상공인 대표단이 주최하는 나치 승전 축하 연회가 열렸다. GM의 간부인 제임스 무니 등 미국 대기업의 유명 인사가 참석했다. 7월 1일에는 미국 석유기업 텍사코가 뉴욕에서 축하 연회를 벌였다. 제임스 무니,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 등이 참석했다.  

1940년 6월은 독일이 프랑스를 정복한(6월 22일) 직후다. 나치는 1939년 9월 폴란드를 시작으로 1940년 4월 덴마크와 노르웨이, 5월 이후에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차례로 정복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한다는 미국의 한복판에서 미국 대기업 간부들이 참석하는 나치 승전 축하 연회가 열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미국 대기업이 제공한 군수 물자가 나치 승전에 커다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 대기업에게 민주주의와 자유보다는 사업과 이윤이 훨씬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사실 1차 대전 이후 독일은 미국의 최대 투자 대상 국가였다. 우선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330억 달러, 독일이 예상했던 액수의 2배) 갚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돈을 빌려야 했다. 미국에서 빌린 돈으로 영국과 프랑스 등에 배상금을 갚아나갔다. 

히틀러 이전부터 JP모건과 체이스은행(석유 재벌 록펠러 소유)이 전담하다시피 한 독일에 대한 대출은 1920년대 비틀거리는 독일 경제를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이들의 대독일 차관 업무를 전담한 것은 존 포스터 덜레스와 알렌 덜레스 형제가 임원으로 있었던 설리번 앤드 크롬웰이라는 법률회사였다. 두 사람은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각각 국무장관과 CIA 국장을 맡는다. 

1933년 이후 독일은 더욱 매력적인 투자처로 떠올랐다. 정권을 잡은 나치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불법화하고 노동조합을 해산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이 사업하기에 최적의 상태가 된 것이다.  

앞에 말한 포드 베르케의 경우, 1935년에서 1939년 사이 이윤은 20.4배 늘어난 반면 제조원가에서 인건비 비율은 1933년 15%에서 1938년 11%로 대폭 줄었다. 나치 독일에 대한 미국 대기업의 진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한마디로 독일의 경제 회복과 재무장은 미국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비약적 경제 성장을 이룬 두 나라가 있다. 독일과 소련이다. 독일은 가혹한 노동자 탄압과 대대적 재무장에 의해, 소련은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에 의해 비약적 경제 성장에 성공했다. 1930년대 미국의 노동계급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소련의 실험에 열광했고,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주목했다. 미국에서 1930년대를 '붉은 30년대(Red Thirties)'라고 부른 이유다. 

독일의 비판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려는 자는 파시즘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는 파시즘이야말로 가장 사악한 형태의 자본주의라는 뜻이다. 그러나 미국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탄압함으로써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낸 나치 독일에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1933년 독일을 방문한 윌리엄 크누센 GM 회장은 "독일 경제는 20세기의 기적"이라고 칭송했다. 1939년 3월 독일을 찾은 알프레드 슬로언 GM 회장은 그 전 해 나치의 체코 수데텐란트 강제 합병을 애써 무시하면서, 독일의 전쟁 행위는 "(우리로서는) 크게 이문이 남는 것"이며 독일의 국내 정치는 "GM 경영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1935년에는 듀퐁 등 대기업의 배후 조종으로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파시즘 정권을 세우자는 쿠데타 음모가 진행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미국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매료됐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영향을 준 것도 미국 기업인이었다. 히틀러는 자동차 재벌 헨리 포드가 1921년에 쓴 <국제 유대인>이란 저서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히틀러는 자신의 집무실에 포드의 초상화를 걸어놓았고, 1938년에는 그에게 독일의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 

미국 기업인들은 히틀러 정권이 얼마나 끔찍한 정권인지를 알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거래를 계속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운동가들을 투옥, 살해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국제결제은행(BIS)은 미국과 독일의 전쟁배상금 문제를 전담하기 만든 은행으로 1930년 스위스 바젤에 설립됐다. 이 은행은 2차 대전이 시작된 뒤에도 나치에 대한 금융서비스를 계속했다. 유럽에서 나치가 약탈한 금의 대부분이 BIS에 예치돼 적성국교역법에 의해 봉쇄됐을 현금을 나치에 조달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모겐소 미 재무장관은 BIS 임원 14명 중 12명은 "나치이거나 나치의 조종을 받는 자"라고 지적했다.  

한편 록펠러 소유의 체이스은행은 전쟁 기간에도 나치 부역세력인 프랑스 비시정권과 거래를 계속했다. 비시 정권과 나치의 중개자 역할을 하면서 전쟁 중 수신고가 2배로 늘어났다. 

이렇듯 미국 자본가와 나치 독일은 가까웠다. 유럽에서 2차 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 현재 250개 미국 기업이 독일에 4억 5천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중 58.5%는 상위 10개 기업이 점유하고 있었다. 투자액 비율로는 스탠다드 오일이 14%로 1위, 제네럴 모터스(GM) 12%로 2위였다. 1939년 GM, 포드의 독일 자동차 시장 점유율은 70%에 달했다. 이들은 2차 대전 발발 이후에도 전쟁 수행에 필요한 트럭, 탱크, 장갑차, 폭격기 등을 공급했다. 
 

▲ 2차 대전 당시 GM 오펠 공장에서 생산한 트럭. 나치 정부는 GM 오펠 공장에 "모범적인 전쟁 기업"이라는 명예를 부여했다. ⓒwww.opel.com


"GM이 없었다면 나치의 소련 침공은 불가능" 

포드와 GM은 한때 독일군 탱크의 절반 이상을 생산했고, 스탠다드 오일은 독일이 수입한 석유의 90% 이상을 공급했으며, IBM과 ITT 등은 전쟁 수행과 유대인 학살에 필요한 정보통신기술을 제공했다.  

일례로 나치의 소련 침공 직후인 1941년 7월, 독일의 석유 제품 수입 물량 중 미국산 비율은 44%였으나 9월에는 94%로 껑충 뛰어오른다(중립국 스페인을 통해 독일에 수입됐다). 독일 역사가 토비아스 예르작은 스탠다드 오일을 비롯해 미국 기업이 나치에 제공한 석유는 "총통을 위한 연료"라고 평가했다. IBM의 경우, 당시 홀러리스 카드천공기를 만들었는데 그게 열차 운행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색출하고 재산을 압수하며 처형하는 등에 이용했다. 

히틀러의 전쟁 물자 담당 장관 알베르트 스피어는 "미국 기업이 제공한 합성석유가 없었다면 폴란드 침공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 역사가 브래드포드 스넬은 "제네럴 모터스가 없었다면 나치의 폴란드 및 소련 침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포드, GM 등 미국 대기업이 이윤을 위해 나치에 협력했다면 나치 독일은 승리를 위해 미국 대기업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나치 정부에게 중요했던 것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기업의 국적이 아니었다. 그 기업이 얼마나 많은 전쟁 물자를 생산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길어야 2∼3개월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됐던 소련에 대한 전격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더 많은 비행기, 더 많은 탱크, 더 많은 트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전쟁 물자를 대량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은 포드 등 미국계 기업들만이 갖고 있었다. 헨리 포드가 창안한 대량 생산 기법, 즉 '포디즘'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치의 최고 전략 기획가인 헤르만 괴링과 전쟁 물자 담당 장관 알베르트 스피어는 포드나 GM 자회사의 경영에 대한 개입을 최대한 자제했다. 그리고 두 회사는 나치 정부의 목표치를 초과하는 대량생산으로 이에 보답했다.  

이에 따라 나치 정부는 GM의 오펠 공장에 "모범적인 전쟁 기업"이라는 명예를 부여했고, 더 많은 '기업가적 자유'를 허용했다. 독일 연구자 아니타 쿠글러는 오펠이 "자신의 모든 생산 및 연구 역량을 나치에 제공함으로써 나치의 장기적 전쟁 수행 역량을 증강하는 데 기여했다"고 결론지었다. 

"미국도 독일도 IBM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는 왜 이러한 기업들을 저지하거나 처벌하지 못했을까? 현대전은 산업전이다. 대기업의 도움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941년 12월 13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기업의 적성국과의 사업 거래를 허용하는 특별명령을 은밀하게 발표했다. 적성국교역금지법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으면 사업 거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역사가 찰스 히감은 루스벨트 정부가 "전쟁 승리를 위해 석유 기업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스탠다드 오일의 석유는 히틀러에게 중요한 만큼이나 미국에게도 중요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1942년 미국 정부가 적성국교역금지법에 따라 스탠다드 오일의 대독일 석유 공급을 처벌하려 했으나 극히 가벼운 처벌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스탠다드 오일 측은 "우리가 공급하는 석유가 없다면 미국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고 한다. 결국 스탠다드 오일은 약간의 벌금을 내는 것으로 처벌을 면했고 이후에도 나치와 계속 거래했다.  

IBM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IBM의 정보처리 기술은 미국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나치와의 유착을 막을 수 없었다. IBM의 나치 협력을 파헤친 역사가 에드윈 블랙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IBM은 전쟁보다도 큰 존재였다. IBM의 너무나 중요한 기술 없이는 미국도 독일도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히틀러도 IBM이 필요했고 연합국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전쟁부장관 헨리 스팀슨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하려면 전쟁 수행 과정에서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라고 말했다.  

반면 반전 평화주의자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은 전쟁을 막으려면 기업이 전쟁으로부터 이윤을 얻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윤이 남지 않는다면 기업이 전쟁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 이루진 것은 스팀슨의 견해였다.  

미국과 독일의 자본가들은 비록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상대방 적대 국가에 있는 자신의 자산이 "안전하게 유지되고, 적절하게 관리되며, 적대 행위가 끝나면 원상 그대로 반환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과 나치 정부는 (전쟁 행위와 무관하게 자본가의 재산은 절대적으로 존중돼야 한다는) 국제 자본주의의 불문율을 준수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대외적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2차 대전에 참전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 때문이었다. 또 반파시즘 전쟁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반파시즘 세력을 일관되게 억압했다.  

미국은 '민족 자결'을 억압했다 

1941년 8월 루스벨트와 처칠은 대서양헌장을 통해 전쟁이 끝난 후 피압박 민족의 민족 자결을 존중하며,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달랐다. 미국은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반파시스트 세력의 득세를 극도로 경계했다. 전후 미국의 핵심 목표인 세계의 문호 개방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3년 1월 미국, 영국, 소련은 카사블랑카 회의를 통해 독일의 항복을 공동으로 받는다는데 합의한다. 전후 처리를 미국, 영국, 소련 합의에 의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각국은 이때부터 자국의 전쟁 목표를 추구하면서 물밑 경쟁을 벌였다. 경쟁의 목표는 독일 수도 베를린을 먼저 점령하는 것이었다.  

또한 각국이 군사 점령한 국가의 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도 관심의 초점이었다. 카사블랑카 합의의 정신대로 미국, 영국, 소련 합의로 할 것인지, 아니면 군사 점령한 국가의 마음대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나아가 대서양헌장에 명기된 '민족 자결'의 원칙이 지켜질 것인지도 곧 드러날 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 영국, 소련 합의에 의한 전후 처리는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자기들대로, 소련은 소련대로 자국이 점령한 지역의 전후 처리를 단독으로 결정했다. 또한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 피점령국 국민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대서양헌장이 약속한 '민족 자결'은 공수표였다. 그 첫 사례가 이탈리아다.

1943년 여름,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시칠리섬을 거쳐 로마에 입성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점령한 미국과 영국의 이탈리아 처리는 피점령국 처리의 선례가 될 터였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참여를 배제한 것은 물론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세력을 무장 해제하고 국내 정치 참여를 철저히 막았다.

이탈리아에는 상당한 정도의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세력이 군사·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외국인 침략자에 대한 항전인 동시에 국내 보수 세력에 맞선 내전이기도 했다. 전통 엘리트, 즉 왕가와 군, 대지주, 은행가, 기업가, 그리고 교황청 등은 1922년 무솔리니의 집권을 도왔고 그로부터 커다란 혜택을 입은 세력들이었다. 레지스탕스는 이들 보수 세력을 권력에서 몰아내려 했다. 레지스탕스의 활동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 이탈리아의 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자 했다.

'무솔리니 없는 파시즘'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반파시스트 세력과 협력하는 것을 일체 거부했다. 미국과 영국이 보기에 이들의 지향이 너무도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반파시스트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들의 압도적 다수가 왕정 폐지를 비롯해 사회, 정치, 경제 분야의 급진적 개혁을 원했다.  

특히 처칠은 알프스 너머 유럽 대륙에서 급진적 개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반파시스트 세력을 소련의 볼셰비즘과 동일시했다.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의 요구를 이탈리아의 공산화로 본 것이다.  

결국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는 무장 해제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해졌다. 이탈리아 국민의 소망과 기대, 반파시스트 세력의 열정과 능력은 전후 이탈리아 복구에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미국과 영국은 이탈리아 왕가와 군, 대지주, 은행가, 기업가, 교황청 등과 협력했다. 이들은 무솔리니에게 협력한 대가로 커다란 혜택을 입었던 세력으로 대다수 국민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과 영국은 전쟁 이전 이탈리아의 구질서를 복원했다.

미국과 영국의 점령 이후 최초의 이탈리아 지도자는 무솔리니의 부역자였던 바돌리오 원수였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 국민은 '무솔리니 없는 파시즘'이라고 개탄했다. 무솔리니만 사라졌을 뿐, 과거의 억압적 구질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시칠리아 등의 마피아를 '반공의 보루'로 칭찬하면서 이들과 결탁했다. 이른바 마피아 작전(Operation Mafia)이 그것이다. 뉴욕의 전설적 갱 럭키 루치아노와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이 한통속이 돼 미국에 적대적인 정권의 전복 공작 등을 추진했다. 

미국 정보기관과 국제 범죄 조직이 마약 거래를 중심으로 비밀공작을 펼치는 것은 이후 현재까지 미국 대외 정책의 비밀스런 전통이 됐다. 미국은 카스트로 암살 시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전복 공작 등 의회 승인을 받을 수 없는 CIA의 불법적 반혁명 공작에 필요한 자금을 국제 범죄 조직의 마약 거래 대금으로 충당했다.  

프랑스에서는 어땠는가? 미국과 영국은 1944년 8월 프랑스를 해방시켰다. 이탈리아는 미국과 영국의 교전 상대국이었던 반면 프랑스는 어엿한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런던으로 망명한 드골 장군이 자유 프랑스를 대표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를 이탈리아처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한편 프랑스 본국에는 나치에 부역한 페탱 원수의 비시 정권이 레지스탕스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1944년 3월 '레지스탕스 헌장'을 발표하면서 전후 프랑스의 급진적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페탱과 드골은 매국노와 애국자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둘 다 보수적이었다. 반면 레지스탕스는 급진적이었다. 레지스탕스는 페탱을 경멸했고, 드골은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며 보수적이라고 보았다. 레지스탕스 내에서 드골 추종자는 극소수였다. 

전후 프랑스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서로 다른 구상을 갖고 있었다. 2차 대전으로 과거 대영제국의 위상을 잃고 작은 섬나라로 전락한 영국의 처칠은 전후 드골의 프랑스와 함께 미국과 소련에 맞설 수 있는 독자적 유럽 세력의 구축을 구상했다. 반면 루스벨트는 드골이나 레지스탕스보다는 페탱과 협력하는 것을 선호했다. 레지스탕스는 원천적으로 협력이 불가능한 상대였고, 드골은 처칠의 하수인(전후 프랑스가 미국보다는 영국에 기울 것을 우려)으로 보았던 것이다.  

미국은 나치의 프랑스 점령 후(1940년 6월)에도 비시 정권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다. 미국과 비시 정권의 외교 관계가 단절된 것은 1941년 11월 비시 정권에 의해서였다. 미국의 전쟁 목표는 1차 대전으로 산산조각이 난 세계 경제를 다시 한 번 단일한 자본주의 체제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에 고분고분하고 보수적인 인물이 프랑스 지도자로 적격이었다. 페탱을 선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미국은 드골의 집권을 막기 위해 드골을 마다가스카르 총독에 임명하자고 영국에 제의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상륙 후 미국은 비시 정부가 임명한 현지 총독 프랑수아 다를랑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려 했다. 드골은 격노했고, 미국 내에서도 나치 부역자와 협정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때마침 다를랑이 알지에에서 암살되면서 이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드골파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결코 드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를 지도자로 인정했다. 당시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은 자신의 일기에 드골에 대해 "잘난 체하는 데다 야망만 많은 속 좁은 인물"이라고 썼다.  

그러나 드골은 첫째 다를랑과 같은 비시 정권 부역자가 아니었고, 둘째 레지스탕스 세력처럼 급진적인 사회경제 개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애국자인 동시에 보수파라는 점에서 미국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전자는 프랑스 국민에게, 후자는 미국과 영국에 필요한 것이었다.  

스팀슨은 "드골은 나쁘다. 하지만 그 외의 선택은 더 나쁘다"고 실토했다. 특히 프랑스 공산주의자와 좌파가 소련과 관계 강화 움직임을 보이면서 이를 차단해야만 했다. 드골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미국 역사가 가브리엘 콜코는 "프랑스를 좌파로부터 구해낼 누군가가 필요했다", "미국은 드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자를 훨씬 더 싫어했다"고 말한다. 1944년 10월 23일, 미국은 드골을 프랑스 정부의 합법적 지도자로 인정했다.

연합국이 파리를 해방하기 수일 전, 레지스탕스는 자력으로 파리를 탈환하겠다는 목표 아래 무장 봉기했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본다. 며칠만 기다리면 이루어졌을 파리 해방을 위해 레지스탕스가 무모한 봉기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과 영국이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드골을 지도자로 내세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파리를 장악한다면 전후 프랑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특히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국가라는 점에서 수도 장악은 정치적 영향력과 직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의 봉기는 허망한 실패로 끝났다. 

영국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드골의 집권에 대해 "단 한 번도 전투를 하지 않은 장군, 단 한 번도 선거를 치르지 않은 정치인"인 드골이 전후 프랑스의 권력을 잡았다고 지적했다.

파월은 "드골이 레지스탕스의 정치적 영향력을 일정 부분 인정하고 상당한 정치적 개혁을 했지만, 그가 아닌 급진적 정부가 들어섰다면 레지스탕스 헌장에 제시된 더 급진적 개혁이 현실화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 "이탈리아와 프랑스 해방 후 미국과 영국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해방자는 해방된 국민들 스스로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보편적 원칙(대서양헌장의 민족 자결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프랑스의 피해는 그리스가 당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그리스 레지스탕스는 이탈리아 및 독일 파시스트에 대한 피어린 항쟁의 결과로 전후 집권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처칠과 스탈린의 밀약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1944년 10월 처칠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비밀 협상을 벌인다. 1944년 6월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그해 9월 라인강 도하를 위한 마켓 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에 실패함으로써 베를린 점령을 놓고 소련과 벌이던 경쟁에서 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처칠은 발칸반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몸소 모스크바까지 날아간 것이다.  

이 비밀 협상에서 양측은 헝가리, 루마니아, 폴란드 등은 소련의 세력권(소련이 90퍼센트), 그리스는 영국의 세력권(영국이 90퍼센트)으로 하고,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는 50 대 50으로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합의한다. 

이 비밀 합의에 따라 영국은 전쟁이 끝난 이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으로는 더 이상 그리스 우파를 지원할 수 없게 되자, 영국은 미국에 SOS를 쳤다. 이에 따라 미국이 영국을 대신해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게 되는데, 이때 바로 냉전의 공식적 기원으로 얘기되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다(1947년 3월). 핵심은 국제 공산주의의 음모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게 된 그리스 국민을 위해 그리스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스탈린은 처칠과 맺은 밀약을 '충실히' 지켜 그리스 내전에 일체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 레지스탕스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파에게 패배했고 이후 그리스는 군부 독재 등 숱한 고난을 겪게 된다. 결국 그리스는 미국, 영국, 소련 등 강대국 간 흥정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리스의 고난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국제 문제에 개입한다는 미국의 주장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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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1/13 10:11
  • 수정일
    2019/01/13 10:1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헌법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김용택 | 2019-01-11 10:34:0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대한민국 헌법 한 번 읽어보셨습니까?”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법)’ 회원이 손바닥 헌법책을 홍보하면서 건네는 말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간다. 가서 이렇게 홍보하다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이게 우리나라 헌법책입니다. 전문과 본문 130조 부칙 6조를 다 읽는데 1시간도 안 걸입니다.” “한 권에 500원에 보급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머니를 뒤져 1000원을 내고 한권을 가져 가시거나 5천원 혹은 1만원을 내고 “참 좋은 일 하십니다”하며 인사까지 하고 가는 분들도 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살다 삶을 마치는 국민이 자신이 한평생 살아 갈 나라의 헌법을 모른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우리나라 이름이 왜 대한민국인지 대한민국의 주인이 누구인지 주인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산다는 것 비극 중의 비극이다. 구체적인 통계를 내 본 일은 없지만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 헌법 전문과 본문 그리고 부칙을 다 읽어 본 사람이 몇 %나 될까? 아마 짐작건대 10%도 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초․중등 교과서에 헌법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과서에 나오는 헌법은 전문(全文)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에게는 ‘평등권, 자유권, 사회권, 청구권, 참정권’과 같은 권리가 있고 ‘교육, 근로, 납세, 국토방위, 재산권 행사의 환경 보전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배우는 정도다. 이것도 시험에 대비해 암기해 기억하는 관념적인 지식일뿐 권리와 의무는 양면성을 지닌 상대적인 관계로 국가가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다. 마치 평생 노동자로 살아 갈 청소년들에게 노동 3권이나 근로기준법을 가르쳐 주지 않듯이 말이다.

왜 학교는 헌법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을까? 왜 헌법재판소는, 왜 정부는 헌법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을까? 주권자가 주인의식, 민주의식을 가진 똑똑한 국민이 되면…? 군사정권이나 독재 권력은 주권자들에게 헌법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정경유착 정권, 친부자 정부는 내일의 주인공들에게 국정교과서를 통해 유신이나 자본의 논리를 정당화 한다. 독재정부는 주권자인 국민이 역사의식이나 민주의식, 비판의식을 가지면 설 곳이 없어진다. 그래서 가르쳐 주는 것만 배우게 하고 정직, 근면 검소’의 순종이데올로기를 체화시켜 왔다.

국민이 깨어나는 것을 반기지 않은 정부는 철학교육을 통해 판단능력을 길러주거나 헌법을 제대로 가르쳐 주인의식, 민주의식을 심어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의도적으로 외면해 왔다고 해야 옳다. 헌법을 알고 민주의식, 주권의식을 가진 국민들이 사는 나라에 유신헌법을 만들 수 있겠는가? 국정교과서를 만들 수 있겠는가? 헌법을 가르쳐도 단편적으로 관념적으로 또 지식으로서 헌법을 가르치면 국가주의 헌법보다 국민주의 헌법을 만들자고 할 것이고 우리나라 헌법보다 독일헌법이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헌법과 같은 헌법을 만들자고 요구하지 않겠는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런데 현행 헌법은 학살자 전두환이 유신헌법의 아류인 간선제의 제 5공화국 헌법을 만들어 이를 수호하려다 유월항쟁을 만난다. 위기에 처하자 후계자 노태우가 다급해 만든 게 현행 헌법이다. 유신헌법이나 제 5공헌법에 비해 상당부분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30년이 지난 늙은 헌법에 각계각층의 주권자들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 한계를 안고 있다. 특히 현행헌법은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대통령제의 권한 집중을 비롯해 건강권, 주거권, 노인, 청소년, 장애인의 주체적 지위 보장, 선거연령 하한등 주권보장을 위한 불완전한 직접 민주주의제를 보강해야 한다.

헌법은 국민교육헌장처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국가는 나와 모든 나인 우리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 줄 의무를 함께 지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은 보증한 문서다. 그것도 어린이나 노약자 혹은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가 제외된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당연히 누릴 권리라는 것을 선언한 헌장이 곧 헌법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이 헌장은 유엔총회가 제정한 세계인권선언이기도 하지만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헌법 정신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못 배우고 못났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홀대 받아서는 안된다는 선언이다. 국가는 주권자인 국민들에게 헌법을 알게 하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도록 헌법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국민을 우민화시키는 정부는 국가가 해야 할 책무를 이행하지 않는 나쁜 정부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30&table=yt_kim&uid=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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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300명 이상은 위헌이다? 그 주장이 틀린 이유

[주장] 선거제 개편으로 촉발된 국회의원 증원 논란... 헌법, 의석수 상한선 정한 적 없어

19.01.12 19:44l최종 업데이트 19.01.12 19:44l

 

정치개혁 제1소위 참석한 심상정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심상정 위원장과 자유한국당 정유섭 간사,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간사, 바른미래당 김성식 의원 등이 18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치개혁 제1소위에서 선거제도 관련 주요쟁점을 논의하고 있다.
▲ 정치개혁 제1소위 참석한 심상정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심상정 위원장과 자유한국당 정유섭 간사,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간사, 바른미래당 김성식 의원 등이 지난 2018년 12월 18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치개혁 제1소위에서 선거제도 관련 주요쟁점을 논의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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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제도 개편이 새해 벽두부터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2018년 12월 15일 여야 5당은 선거제도 개편안을 올해 1월 안에 합의 처리하기로 약속했다.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이 선거제 개편 없이 예산안을 처리할 수 없다면서 장외투쟁을 이어가자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합의 처리를 약속했던 것이다. 그 후 여야가 여러 차례 만나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만 치열한 수 싸움만 이어갈 뿐 제자리걸음이 계속되고 있다. 선거제 개편에 따라서 각 정당이 이해관계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지난 7일에도 문희상 국회의장 주재로 5당 대표가 만나 선거제 개혁과 관련한 논의를 계속했다. 이 자리에서도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구체적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야 3당은 선거제 개편을 한 목소리로 촉구하며 민주당과 한국당을 압박하고 나섰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국회의원 세비를 동결하고 특권을 내려놓는 등 대안이 있으니 당 의석수 증원에 집중하지 말고 국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치제도를 바꾸자는 주장"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도 "올해는 당리당략을 초월해 선거개혁을 할 수 있는 적기"라며 "의석 정수는 부수적 문제"라고 거들었다.

그러던 중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자문위원회가 지난 9일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국회의원 정수를 360명으로 증원하는 내용을 담은 선거제도 개혁 방안을 제안했다. 정개특위 자문위는 "현행 선거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국민의 의사(지지율)와, 선거 결과로 나타나는 의석수의 괴리가 매우 심각하다는 점", "현 제도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비례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라고 제안 이유를 밝혔다.

또한 자문위는 "국회 역사를 보더라도 국회의원 1인이 대표하는 인구수는 현 20대 국회가 제일 많다"며 "연동형 비례대표제 채택을 고려할 때 국회의원 수는 360명 규모로 증원하는 것이 적정하다"라고 주장했다.
 

선거제도 개혁 다짐한 손학규-정동영-이정미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이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정치개혁특위 구성 촉구 및 연내 선거제도 개혁 결의 정당-시민사회 공동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 선거제도 개혁 다짐한 손학규-정동영-이정미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이 지난 2018년 10월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정치개혁특위 구성 촉구 및 연내 선거제도 개혁 결의 정당-시민사회 공동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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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은 '200인 이상'만 말하고 있을 뿐 

 

소수정당들은 득표율에 따라서 당선자 수를 정하는 방안이 민의(표심)를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라며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한다. 또, 무엇보다 그렇게 해야 자신들이 교섭단체가 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거대정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교섭단체가 여럿일 경우 자신들의 의회 장악력이 줄어든다는 점을 고려한다.

그런데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은 의원 수를 늘리거나, 아니면 지역구 의원수를 줄이는 방법으로 비례대표 의원수를 늘려야 비로소 가능하다. 급기야 국회의원 정수를 300명 이상으로 늘리는 문제와 관련하여 정개특위 소속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은 위헌 가능성을 언급하며 부정적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위헌성 여부를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의원수를 늘리는 데 있어서는 자유한국당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개특위 자문위원의 제안처럼 의원수를 360명으로 늘리는 것이 과연 위헌적 요소가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지난 8일 김재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의석수를 늘리는 것은 헌법상 문제가 있다, (위헌성을) 제대로 판단하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즉, 헌법상 의원수에 대한 상한선이 적혀 있지 않다고 해서 의석을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입장이다. "(헌법상 하한선 규정은) 200석이 299석으로 과도하게 해석된다고 하더라도 299석이 한계선이며 300석은 위헌이라는 주장이 있다"는 요지다. 위헌성을 주장하면서도 위헌의 근거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국회의원 정수에 대한 우리 헌법은 '국회의원의 수는 법률로 정하되, 200인 이상으로 한다'고 규정할 뿐이다(헌법 제41조 제2항). 그리고 공직선거법에서는 국회의 의원정수라는 제목 아래 '국회의 의원정수는 지역구국회의원과 비례대표국회의원을 합하여 300명으로 한다'고 규정한다(제21조 제1항).

결국 우리 헌법이나 공직선거법의 규정은 국회의원 정수의 하한선을 규정하고 있을 뿐 상한선에 대하여는 언급이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의원 정수를 정하는 것은 200인 미만으로 할 경우에는 헌법개정이 필요하지만 200인 이상의 범위에서 몇 명으로 정할 것이냐의 문제는 입법 정책의 문제로 국회의 재량 사항인 셈이다.
 
 선거
▲  선거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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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큼 늘리는지'보다, '꼭 늘려야 하는지'가 먼저  

그렇다면 국회의원 정수를 무한정으로 늘리는 것은 어떨까? 아무리 상한선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많은 수의 국회의원을 뽑는 것은 헌법이 추구하는 대의제의 적정성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

우리나라의 국회의 기능이 어떤 것들인지, (인구수를 포함하여) 외국의 국회의원수와 비교했을 때 타당한지의 여부, 국민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국회의원수 등을 고려해서 적정한 수에 그쳐야 하는 것이다. 결국 상한선에 대한 규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국회의원 정수를 갑자기 2배수, 또는 3배수로 지나치게 늘리는 것은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반되어 위헌이 될 수도 있다.

정개특위 자문위가 제안한 국회의원 정수 360명은 헌법의 규정에 위반되는 것도 아니며, 과도하게 의원정수를 늘리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위헌성의 요소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헌법학자들의 기본적인 입장도 200명 이상의 범위 내에서는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더라도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한다. 사실 헌법 교과서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을 만큼 명백한 사항이다.

참고로 2012년 2월 29일 법률 재11374호로 개정된 공직선거법 부칙 제3조가 헌법에 위반되는지의 여부가 헌법소원 심판의 대상이 됐다. 이에 대하여 헌법재판소는 "헌법 제41조 제2항에 의하면 '국회의원의 수는 법률로 정하되, 200인 이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국회 의원정수의 결정은 헌법개정사항이 아니라 입법사항이라 할 것이다(헌법재판소 2012. 4. 10. 선고 2012헌마194 결정)"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의원정수를 360명 정도로 늘리는 것이 위헌성이 없다고 해서 의원정수를 늘리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의원수를 정함에 있어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열심히 일하는 국회, 그래서 의원수가 부족하다는 여론이 형성됐을 때 늘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지난 2일 KBS가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대한 의견'을 묻자 응답자의 46.4%(매우 동의, 대체로 동의)가 동의한다고 답했다. 반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인한 국회의원 의석수 증가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는 국민의 79%가 반대한다고 답했다(한국리서치 조사,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 2018년 12월 28일~29일, 유·무선 전화면접, 응답률 : 12.9% 표본오차 : ±3.1%p (95% 신뢰 수준),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신뢰가 아직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사실 국회의원의 수를 늘리면 무엇보다 정당의 힘이 그만큼 커진다. 정당 지도부의 영향력이 증가하게 된다. 우리 정당법에서는 정당의 민주적 운영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정당이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고 본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당이 특정계파의 사당으로 전락해서 운영된다면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게 된다. 결국 의원정수를 늘리는 문제는 정당의 민주적 운영이 담보되고, 국회가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한 다음에 추진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정범씨는 법무법인 민우 소속 변호사,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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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로 사는 이유

공동체로 사는 이유

조현 2019. 01. 11
조회수 1265 추천수 0
 

 

-공동체 사람들.jpg

 

책 표지-.jpg 몇년 전 브루더호프공동체인 미국 우드크레스트에 딸과 함께 머물며 그들이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가슴으로 공감했다.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와 디지탈 가공 세계의 쓰나미가 세상을 삼키고 있는 와중에서 브루더호프는 노아의 방주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선 신앙은 신앙이고, 삶은 다른 문제일 뿐이라고 여겨 신앙을 그저 삶의 액세서리 정도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않다.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순응, 또 신앙과 삶의 이분화를 당연시하는 풍토가 지배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드크레스트에서 지내면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삶과 신앙의 일치였다.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손자로 브루더호프의 장로였던 크리스토프 할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과 지내는 동안 공동체라는 것이 어떤 교리나 명제가 아니라 가슴에서부터 나오는 따사로움과 눈빛, 연민, 자애, 하나됨이나 노동과 실천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느껴졌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쓰나미에서 자신들만이 안전한 방주에 피신했다는데 자족하지 않고, 시리아와 네팔 등 재난으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형제들을 파견해 그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었다. 자신들끼리만의 행복한 공동체에 그치지않고, 지상 공동체를 위해 소명을 다하려는 고군분투였다.
 

손잡고달리는아이들.jpg

 

 브루더호프 공동체 창시자로 이번에 발간된 <공동체로 사는 이유>(비아토르 펴냄·김순현 옮김)의 저자인 에버하르트 아놀드(1883~1935)의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다. <공동체~>는 아놀드가 1925년 <치커리>라는 잡지에 ‘고백’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이다. 책으로 엮기엔 아주 짧은 글인데, 이 글에 대해 가톨릭 트라피스트 수도회 소속 신부이자 20세기 가톨릭의 대표적 영성가의 한명으로 꼽히는 토마스 머튼(1915~1698)이 해설을 썼다. 
 아놀드는 1920년 작가로서 장래가 보장된 직업과 베를린의 중 상류층의 특권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독일 중부 지방의 작은 마을인 자네르츠로 옮겨 산상수훈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세워 장애인과 고아 등을 돌봤다. 히틀러의 전쟁과 살육, 폭력에 반대하다 박해를 피해 피신중 부상을 입고 수술을 받다가 사망한다. 그 이후 브루도호프 공동체원들은 영국으로 피신해 영국에 브르더호프를 설립했고,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전세계 20여곳의 공동체에서 무소유와 비폭력, 사랑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수확물 나르기.jpg 

 아놀드는 ‘왜 공동생활인가’란 제목의 글에서 “모든 생명은 공동체로 존재하며 공동체를 근거로 삼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밝혔다. 아놀드는 공동체 건설의 핵심을 ‘믿음’으로 보았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맹자의 성선설과도 통한다. 즉 욕망과 감정에 부초처럼 표류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진리와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믿음은 인간을 사회적 관습이나 결점에 의거하여 평가하지 않고, 배금주의와 비열함과 흉악함으로 얼룩진 인간 사회의 이 모든 가면이 거짓임을 꿰뚫어 본다. 그러나 믿음은 인간 개성의 현저한 사악함과 변덕스러움이 인간 본래의 결정적 속성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다른 견해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신의 현재 본성만으로는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감정의 기복과 동요, 육체적·심리적 만족을 탐욕스레 추구하는 성향, 신경과민과 야망의 심리적 동인, 타인에 대한 영향력 추구, 인간의 모든 특권은 진정한 공동체 건설을 막는 장애물이지만, 인간은 이를 극복할 수 있다. 믿음은 이런 탐욕적 성향과 성격적 결함이라는 사실적 여건이 결정적인 것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하는 허구에 굴하지않는다. 그것들은 하님의 능력과 모든 것을 극복하는 그 분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이 현실보다 강하시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힘인 그분의 영이 모든 것을 이겨 낸다. 여기서 분명해지듯이, 궁극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공동체의 형성과 공동생활의 실질적 구축은 배제되고, 아무리 성가셔도 인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선이나 법의 강제력을 신뢰하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은 악의 실재에 부딪혀 좌절할 수 밖에 없다.”
 아놀드는 “선의 궁극적 신비에 대한 믿음,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는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동체 생활의 시도를 통해서만, 거듭나지 못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삶을 영위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삶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 즉 공동체를 형성하는 능력이되시는지를 분명히 알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체야 말로 사회·정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면서 “자유와 일치,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옹호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지만 무자비한 수단을 동원해 정반대의 집단들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투쟁은 함께하지않고, 오직 행동과 말을 일치시키는 단 하나의 무기인 사랑만으로 오늘의 타락한 상황에 맞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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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해설한 영성가 토머스 머튼 신부는 ‘공동체에는 개인의 성취와 친목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밝혔다. 토머스 머튼은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이 사막의 교부 두 사람이 ‘우리도 한 번 다투어 보자’고 ‘다투기 위해서는 소유욕 곧 무언가를 독점해 다른 이가 가지지 못하게 하는데서 비롯되니 주위에 있던 벽돌 두 개를 놓고 다투기로 해보자’고 한 일화를 소개했다. 일화에서 한 교부가 ‘이건 내 벽돌이요’하자 다른 교부는 ‘그래요, 형제님, 그게 형제님 벽돌이면, 형제님이 가지세요’하는 것으로 끝이난다.
 토머스 머튼은 “사람들이 다투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보다 재물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며 “재물을 초탈한 상태, 곧 청빈이 중요한 이유는 물질의 방해를 받지 않아야 사람을 좋아할 수 있기 때문이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토머스 머튼은 “우리가 사랑하고 헌신해야할 사람이 우리가 함께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다”고 한다. 그는 “우리는 곧잘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만을 우리의 이웃으로 여기곤 하는데, 이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더 있음을 알지 못해서”라며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사랑해야 하고, 공동체는 우리 자신의 공동체 너머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공동체의 기초는 민족성도 계급도 아니다”면서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차별이 만들어낸 적대 행위를 십자가 위에서 온몸으로 무효화하셨기에 우리는 차별하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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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도 브루더호프처럼 고군분투하는 밝은누리공동체와 은혜공동체, 오두막공동체, 민들레공동체, 사랑마을공동체 등 기독교공동체들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런 공동체적 고군분투는커녕 인간 자체를 귀찮아하며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문화가 대세로 빠르게 자리잡고 있다. 가장 효율적으로 계란을 생산하기 위해 A4용지 한장 크기의 케이지에 갇힌 양계용 닭들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철망을 치고 스스로 케이지에 갇혀 스마트폰으로만 소통하는 모습은 ‘나’보다 ‘우리’가 익숙했던 한국사회에서 불과 반세기 전만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상황이다. 한국은 이제 전세계에서도 디지털 의존도가 가장 높아 어느 곳에서나 스마트폰에만 코를 박고, 가까이에 가족과 동료들이 있어도 하나같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느라, 인간과 인간의 접촉이 줄어드는 매트릭스 세계로 빠르게 전환되어가고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혼인율과 출산율은 떨어지고, 1인가구 비율은 가장 빨리 상승하며, 초고령화는 가장 빨리 진행되고 있다. 거대자본에 의해 조종되는 매트릭스에 의해 공동체는 뿌리부터 뽑혀나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이 멀어질수록, 창조질서가 맘몬의 지배 질서로 바뀔수록 원래의 에덴동산을 회복하려는 갈망도 커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한국 기독교에는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희망을 모아 현실적 방주들을 수백개, 수천개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많은 크리스천들과 신앙의 열정이 있다. 한국기독교는 구한말과 일제의 어둠 속에서 한민족 공동체를 위해 인도주의적 봉사와 교육과 시민사회에서 횃불을 들었던 역사가 있다. 그런 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이제 맘몬에 순종하는 기로에 서있지만 말이다. 그 한국 기독교가 이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통해 다시 깨어나 위기의 민족공동체를 위해 다시 한번 횃불을 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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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음은 어둠 속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세계 어느 곳보다 공동체성의 붕괴로 자살율과 존속살해율,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을만큼 어둠이 깊기에 역설적으로 공동체운동의 찬란한 횃불이 타오를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이기도 하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동방의 횃불 코리아>에서 노래했듯, ‘마음에는 두려움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 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인 그런 코리아는 정부나 거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씨알들이 만들어낼수 있다는 믿음으로 서로 응원하고 위로하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도우며 우리 함께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만들어갔으면 한다.

 

*사진들은 부르더호프 공동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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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대가 래(來)하도록 우리가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새해 인터뷰] 민플러스가 만난 진보(1) 한국진보연대 박석운 상임대표
2019년은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남북-북미관계가 평화번영통일의 길로 확고히 넘어가는 분기점이다. 또한 문재인 정부가 중립화되는 가운데 과거수구세력이 재등장하는가, 미래세력이 올라오는가의 지점이 갈리는 분기점이다. 진보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방법론상의 차이도 있을 수 있다. 이에 신년을 맞이하여 주요 진보진영 대표자들의 인터뷰를 싣는다. 인터뷰 내용이 본사의 입장과 똑 같지는 않다. 그러나 진보운동을 진두에서 이끌어 가는 분들의 고민과 구상, 고언을 들어보는 의미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인터뷰:김장호 편집국장, 정리:선현희 기자 / 편집자 주]

 

▲ 한국진보연대 박석운 상임대표

- 격동의 2018년 무술년이 지나갔습니다. 촛불의 견지에서 2018년을 돌아본다면 어떻습니까?
"2018년은 촛불항쟁 이후 촛불정부의 역주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작년 이맘 때, 즉 2018년 초만해도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에 대해서 우리 민중들의 기대가 있었지요. 그런데 봄과 여름을 지나면서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 은산분리 확대라든지 이런 개혁 역주행이 느닷없이 그냥 치고 나왔어요. 경제실패의 모든 책임을 최저임금으로 돌리는 핑계잡기가 시작되면서 상당한 수준의 역주행이 시작중입니다. 그나마 '사법농단', '비정규직', ‘위험의 외주화’ 문제 등이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지만, 속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요.
이렇게 보면 2018년은 국면전환기로 볼 수 있습니다.
촛불항쟁시기에서 또 다른 새로운 시기로 전환이 되고 있는 것인데, 전환기라고 하는 이유는 기존 적폐들이나 기존 시스템은 무너져 가는데 새로운 시대의 시스템은 아직 구축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구(舊)시대는 거(去)하였으나 신(新)시대는 아직 래(來)하지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2019년은 신시대가 래(來)하도록 우리가 희망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문재인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있어야겠군요.
"적폐정산과 사회대개혁의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와 시민사회, 민중세력들은 이 과제에 대해서 ‘따로 또 함께’ 이렇게 협력해 나가야 할 부분이 있다고 봐요. 아직 악질들이 더 많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새로운 과제가 생긴 겁니다. 이른바 ‘개혁의 역주행 저지’라는 과제가 새로 생긴 거죠. 그래서 개혁역주행 저지는 문재인 정부와 우리가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겠죠.
노동민중세력들이 빨리 태세를 갖추고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일에 바로 착수 할 필요가 있는데, 실제로는 지금 굉장히 어지러운 상태인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 같은 경우, 민주노총 내부에 가치관의 혼동들이 있는 것 같고, 국면은 전환되고 있는데, 여전히 구시대적 사고, 구시대적 접근법에서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 노동민중진영이 구시대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먼저 정세인식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현재 토대는 변화가 없지만 권력관계는 변화된 상황입니다. 그래서 일종의 국면전환기적 정세인식이 필요한 거죠. 국면전환적 인식을 정확히 못하면 양 편향에 빠지게 됩니다. ‘토대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거다’에 집착하면 구시대적인 문법으로 계속 접근하게 됩니다. 반면에 ‘전환기적으로 변하고 있다’에만 집착하면 조급증에 빠지게 됩니다. 제가 ‘국면 전환기’다, ‘토대는 변화가 없지만 국면은 변화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토대가 변하지 않고 여전하다는 인식에 기반을 두면서도 국면이 전환되는 것에 맞게 문법이 달라져야한다’는 것입니다. 투쟁의 문법이나, 사회운동의 문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운동방식이 국면 전환에 맞는 방식으로 진화·발전해가야 하는데 그 점에 있어서 굉장히 미흡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운동의 진화 자체가 지체되고 있다고 봐야 할 상황입니다.

이러다보니 노동자·민중 세력들이 변방으로 밀려나가고 있습니다. 사회변화의 중심부에서 사회변화를 추동해 나가기보다는 계속 밀려가면서 변방세력이 되어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 원인은 상대방에도 문제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태세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촛불항쟁으로 세상을 바꾸고 권력을 바꾸었는데, 그 이후는 없는 거에요. 근본적으로는 노동자·민중정치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응당한 노동자·민중정치가 지체되고 있기 때문에 투쟁의 성과가 유실되고 마는 거죠. 그 거대한 촛불항쟁의 결과가 유실되고 만 거죠. 현재 ‘저들의 배반’을 얘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 노동자·민중세력들의 구조적 문제들에 대해서 깊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 촛불과제를 수행하는 문재인 정부의 역할에 대해 낙관적으로 보십니까? 비관적으로 보십니까?
"기본적으로는 촛불항쟁은 1단계만 성공한 거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대통령이라는 그 행정부 권력을 바꾼 거죠.
그 이후로 적폐의 온상인 의회권력을 못 바꿨고, 그와 연동돼서 사법적폐청산도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3권외에도 재벌적폐청산은 제대로 손을 못쓰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재벌에게 아부하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언론권력문제는 KBS·MBC정상화를 위한 행동을 하면서 그나마 물꼬를 튼 정도지만 아직 멀었고, 공안권력(국정원·검찰·경찰·기무사 등) 같은 경우는 깃발만 요란하게 흔들 뿐 실제로 된 건 별로 없는 상황이죠. 관료권력의 경우, 촛불항쟁으로 바뀐 대통령과 정부가 기존에 있던 관료들에게 포획당하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통령만 바꿨다’ 이 정도 된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권력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그나마 진보적’이고 그 외 나머지는 우클릭하는 일만 남은 셈이죠.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노동자민중정치세력들이 너무나 변방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민중정치세력은 국민적 관심대상도 아닌데다가 의미 있는 대안세력이라는 인식이 안되어 있는 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현 정치권력적 환경을 최소한 중립적으로 만들어서 활용할 것은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기득권 적폐세력들이 모든 권력을 다 가지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가 뭔가 해 줄 수 있을 거다’라고 생각하는 건 철부지들의 낭만적 이야기 수준입니다. 이른바 노동자·민중 등 좌파적 세력들이 적극적인 문제제기와 영향력 행사를 해줘야 결과적으로 좌우 균형을 잡고 중립적인 권력의 행사가 가능할 텐데, 그것이 약하니까 지금 촛불항쟁으로 만들어 놓은 성과가 유실되면서 계속 우클릭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문정부는 계속 끌려가고 있는 상황이죠. 좌측으로 진보쪽으로 당길 수 있는 세력이 너무 약합니다. 핵심은 노동자·민중의 정치가 지체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도 노동자·민중세력의 투쟁과 비판이 필요하다는 취지인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노동자민중세력의 투쟁과 비판은 그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고 다만 올바른 투쟁과 비판이 효과적으로 진행된다면, 문재인정부도 결과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겠죠.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자유주의 개혁정권입니다. 그나마 촛불항쟁의 열기와 그 흐름 덕분에 재벌권력과 바로 밀착해서 야합하는 양상들이 일정정도 견제되는 수준이라고 봐야죠. 문정부의 핵심들이나 골간이 곧바로 노동자민중들의 삶에 직결된 의미있는 혁신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낭만적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진보-보수’라는 용어가 완전히 왜곡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개혁세력을 진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책임은 노동자민중 세력이 무력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진짜 진보들은 제대로 힘을 못쓰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대중들의 눈에 진보세력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대중들의 눈에 보이는 수준에서는 극우적 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합리적으로 보이는 세력, 즉 자유주의개혁 세력을 진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는 오른쪽으로 심하게 쉬프트 되어있는 현실입니다. 권력집단 중에서 그나마 제일 진보적으로 보이는 문재인 대통령 자신은 잘 하고 싶겠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권력현장에서는 따로 노는(다르게 작동하는), 결과적으로 “빠탐풍” 현상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죠.

문재인 정부의 정책방향의 특징은 모순되는 것들을 얽어놓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재벌들 참가 못하게 하는 은산분리 확대를 추진하는가 하면 영리병원 허가하면서 내국인 진료불허한다는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반은 묶고 반은 푸는 이중적인 정책을 하고 있습니다. 줄타기를 하는거죠. 여기서 노동자민중들이 자유주의개혁세력과 함께 연대하여 적폐청산 등 특정과제를 풀어갈 수는 있겠지만, 모든 걸 의탁하면 안됩니다. 모든 걸 의탁했다가 안되면 과도한 실망을 하면서 분노를 표출하는 등 양극단을 널뛰기하듯이 할 수 있습니다. 힘을 갖고, 한편으로는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은 견인하고, 또 한편으로는 개혁역주행은 저지하는 등 견제와 견인을 입체적으로 추진해가야 하는 건데, 모든 것을 의탁해놓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노동자민중들은 필연적으로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거죠."

 

-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은 노동자민중진영이 문재인 정부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어떤 사람들은 노동자민중진영이 촛불정부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얘기하는데, 현실은 거꾸로입니다. 노동자민중들이 앞장서서 민중총궐기투쟁을 선도적으로 진행했고, 거기에 일반시민들이 대거 가세를 해서 촛불항쟁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선도적으로 앞장섰던 노동자민중들은 ‘팽’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도와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개혁세력들이 우리를 ‘팽’시킨 겁니다. ‘길을 닦아 놓으니 뭐가 먼저 지나간다’는 식이죠.
어떤 의미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싸운다기 보다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편으로는 똑바로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 나타나는 바와 같은 역주행에 대해서는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견인과 견제의 변증법적 통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면전환시대에 구시대적 문법으로 계속 얘기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저는 양쪽이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계속 최대강령과 반대만을 외치고 있는 사람들과 촛불정부 시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대응해야 한다는 사람들 모두 한계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 다시 노동자민중진영의 극복과제에 대해 보충해서 이야기해 주셔야겠네요. 결국 광장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물론 가두투쟁, 광장에서의 투쟁이 계속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외에 일상적인 정치·정책 활동의 중요성이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상황을 보면 그런데 담론투쟁에서 밀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어요.
최근 담론투쟁에서 밀리고 있는 대표적 사례가 ‘최저임금투쟁’입니다. 적폐세력들이 각종 통계와 사례를 왜곡·조작해 내면서 “최저임금 때문에 경제가 어렵게 되었다”는 식의 역공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민중세력들, 진보세력들이 정확하게 정책적 대응 활동, 즉 담론투쟁을 제대로 못 했습니다. 제가 최근 여러군데서 지적한 바가 있는데요. “기득권층의 역공에 대해 제대로 대응 못 하는 이유가 뭐냐, 돈이 없어서 정책역량을 상근을 못 시키면 관련 전문가들의 정책네트워크를 가동하여 민주노총이 적폐세력들의 역공에 대해서 대응적 담론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갔어야 한다”라고 말했지요. 상대방은 담론투쟁에 대해 길목을 잘 잡고 매우 효과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손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거나 분개만 하고있는 상태가 아닌가 걱정되는 것입니다. 담론투쟁의 중요성에 대해서 굉장히 허술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담론투쟁을 잘 해야 합니다. 담론투쟁이 잘되어야 광장투쟁이 함께 상승이 됩니다. 담론투쟁을 방어적으로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작년 한 해, 우리는 담론투쟁에 실패했고, 결과를 보니 문재인 정부에 의탁하고, 미흡한 것에 대해서는 원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내용을 갖고 담론투쟁 혹은 광장투쟁, 아니면 두 가지를 통합해서 한편으로 견인하고 한편으로 견제해 나가야 했는데, 속은 비어있으면서 의탁형태로 진행되다 보니까 ‘일희일비’(一喜一悲)하게 되는 것이죠. 현재는 ‘비’(悲)에서 ‘분노’로 변화발전해하고 있는 상황이기는 합니다."

 

- 중요한 이야기네요.
"노동자민중진영의 담론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유튜브 개설운영, 고민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노동민중진영이 자신의 대오를 제대로 못 만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운동적 측면이나 정치측면에서 전체적으로 점점 변방화되어가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그나마 요즘 문재인 정부나 제도권들이 떡수를 두기 시작하니까 노동자민중의 활동공간이 생기고 있지만, 이는 상대방의 실수에 기대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 약간의 성과도 점수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어요. 상당히 걱정입니다."

 

- 노동민중진영이 일상정치활동, 담론투쟁을 적극화하려면 어떤 대책이 필요합니까?
"제2의 노동자민중 정치세력화가 필요합니다. 2008년 민주노동당이 분열된 이후 2010~11년 진보정치세력이 통합을 추진했었습니다. 그때 저도 통합운동에 굉장히 공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기존에 있는 진보정치세력들간의 통합은 쉽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대중들 수준에서는 냉소주의, 허무주의, 한편으로는 심적 앙금이 깊게 남아있습니다. 진보정치통합에 대해 “웃기네”, “잘 되겠냐?” “그 쌔끼들!”과 비슷한 심정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통합해봐야 소용없다”거나, “잘 안된다”거나, 또 불신과 앙금이 너무 깊어서 정치세력들간의 통합방식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생각입니다. 더 큰 문제는 ‘노동자민중정치세력’에 대한 관심도 멀어졌습니다.
다양한 이견들이 많은 상황인데, 노동자민중 투쟁의 성과가 유실되고 있다는 노동자민중정치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지 않고, 돈·표·사람을 갈라쳐서 각개약진으로 껍데기만 모으려 든다면, 제대로 성과를 만들기 어렵습니다. 각개약진하면 힘이 안 됩니다. 대중들은 정치적 허무주의·패배주의·앙금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유주의 개혁세력에 줄을 서고, 의탁하는 현실 아닙니까? 노동자민중정치세력이 자신의 기반을 든든히 다지면서 서민(일반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단결과 연대의 확장 태세를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 제2정치세력화 방식은 민주노총 안에서 정치적 다원주의가 완강한데다가 이미 그런 시도가 두 차례나 실패한 건데요. 앞으로도 새로운 조건을 만들지 않는 한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정치적 다원주의라는 건 말 그 자체로는 그럴싸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자유주의 개혁세력들에게 줄 서는 것을 용인하자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제각각 판자집 지어가지고 판자집 더 예쁘게 가꾸면서 자족하자“는 수준의 얘깁니다. 정치적 다원주의로 가게 되면 분립되어 있는 각 진보정당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자유주의 개혁세력에게도 가게 마련입니다. 현실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민중들의 이익이 파편화되면서, 아마도 일본과 미국의 정치판처럼 되어 가는 겁니다. 사실 이미 각각 다른 정당들을 만들어서 운영해 왔고 또 서로간에 노선상 다른 점이나 앙금이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하나로 통합하기는 어렵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는 노선차이란게 대동소이(大同小異)라고 생각합니다만, 만일 서로 조금씩 다른 점들이 있다면, 이를 포괄할 수 있는 연합정당방식으로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총선까지 1년3개월밖에 안 남았는데, 이런 과제를 완수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 걱정입니다. 촛불항쟁의 1차적 성공을 2차 촛불혁명으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현재 노동자민중정치세력이 변방에 서있으면서 마치 “손따라 두는 바둑” 식으로 제각각 각개약진하니까 더 안되는 거죠.
앞서 말했듯이 정치적 허무주의·패배주의·앙금이 있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해소를 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을 허리에 매어서는 바느질이 안 된다’라는 속담이 있잖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그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다만 신속하게 거쳐야 합니다. 민주노총 내부에서 조직적 검토가 되도록 요청하고 더 토론하고 노력해서 기초를 만들어 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노동자민중세력의 사회운동방식에는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본래 사회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투쟁과 교섭’의 변증법적 통합과정을 거치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투쟁과 교섭을 입체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성과가 유실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나마 자유주의 개혁정권시대에는 그런 방법을 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민중세력은 ‘투쟁’이라고 하면 광장이나 길거리 가두투쟁만 생각합니다. 협소한 시각인 것이죠, 그 뿐 아니라 ‘일상적 정치투쟁’, ‘담론투쟁’도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강력한 투쟁은 사업장투쟁, 산업별투쟁, 거리투쟁, 정치투쟁 등이 입체적으로 배치될 때 위력을 발휘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강력한 투쟁에 기반하여 유효한 교섭을 추진해야 성과를 쟁취할 수 있는 겁니다. 유효한 교섭은 사업장교섭, 산업별교섭, 사회적 교섭이 중층적으로 입체적으로 배치될 때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사회적 교섭도 사회적 대화기구를 통한 요구관철과 노동자민중정당을 통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해결 등으로 중층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교섭”의 틀을 최상층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노사정대표자회의 등으로만 생각하면 협소한 시각입니다. 요구사항 관철을 위한 사회적 교섭을 만들어가는 핵심경로는 다양한 공간에서 입체적으로 배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사노위나 노사정대표자회의 등을 통해서는 그 단위에서 할 수 있는 사회적 교섭을 진행하고, 또 정치활동을 통해 해결할 문제는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통해 해결해 나가는 등 문제의 성격에 맞는 다양한 경로를 입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참여거부전략의 위험성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996년 민주노총 총파업과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 참여와의 관계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민주노총이 노개위에 참여해서 적극적인 법제도개선 의견을 내었으나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노개위 회의에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김영삼 정부가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악안을 날치기 처리했고, 이에 민주노총이 총파업 투쟁으로 맞받아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민주노총은 노개위에 참가하면서 노개위에서의 논의내용을 매개로 한 전 조합원 교육과 홍보선전 그리고 사전투쟁 조직을 통해 투쟁을 준비해 왔기에, 날치기 통과에 대해 준비된 총파업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과정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투쟁과 교섭의 변증법적 통합과정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링에 올라서 한번 싸워 볼 생각도 않고 미리 “링에 오르게 되면 패배할 것”이라고 지레 단정 짓고 링에 오르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은, 투쟁과 교섭의 병행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이 경우 그 링이 기울어진 링이냐, 또는 링에서의 룰이 편파적인 거냐 등을 따지고 시정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이 경사노위 참여조건으로 헌법과 국제법상의 노동기본권 보장 등을 선결요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적폐토대를 바꾸는데 있어서, 그 토대를 바꿀 수 있는 노동자민중역량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입니다. 내적 준비도 안 되어 있고, 사회적 분위기도 제대로 성숙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노동자민중들이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방향으로의 사회변화를 희망하는 세력들이 아직 약하다는 거죠. 실사구시하면서 힘을 더 키워야 합니다.
또 하나는 현재와 같은 전환기 국면에서는 사회공공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새로운 비전을 만들기 위한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사회운동, 노동자민중정치세력화 대책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목표로 걸고 거리투쟁이나 정치투쟁을 통해서 이슈화시키고, 정치세력화를 통해서 공세적으로 일반시민(민중)들이 실감나도록 가시화시키면서 또 일반 시민(민중)들과 함께 실천할 수 있는걸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되니까 대중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또 유효한 대안세력으로 가시화 되지 않아서 따라서 선택대상이나 고려의 대상도 잘 안 되는 상태라 좀 답답합니다."

 

- 경제상황이 안 좋은데, 여기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 주시죠.
"문재인정부가 경제문제는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혁신성장도 그렇고, 소득주도성장도 그렇고 다 ‘성장’에 중독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세계경제는 지금 성장이 둔화되고 있잖아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게 최저임금 올린다고 금방 바뀌거나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 신기루처럼 쫓아다니다가 금방 성과가 안나니까 다시 역주행 하는 것이 큰 문제인거죠.
혁신성장, 4차 산업혁명 어쩌고 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게 일자리 줄어드는 걸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됩니다. 과학·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4차 산업혁명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추세입니다. 핵심은 그걸 가지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4차 산업혁명에의 대응방향의 핵심문제는 고용감소가 나타나는 것에 대한 대책, 그리고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생기는 그 이익·이윤은 누구의 것이 되느냐 하는 2가지 문제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대응을 하면서 사회적 대응태세를 만들고 해결해나가는 방안을 모색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조차도 4차 산업혁명이 무슨 혁신성장의 동력이 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방식의 혁신성장을 거치면 결과적으로는 양극화가 더 심화 될 것이 뻔합니다. 여기에 어떻게 촛불세력이 사회적 통제를 만들 수 있느냐,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부동산, 주택문제도 우리나라 경제의 제일 큰 원죄적 문제입니다. 이런 원죄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주택개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주택소유자를 통제해야 하고, 현재 주택보유율이 103% 되는데 자가 보유율은 전국적으로는 57%, 서울은 47%쯤 되고 있으니, 이미 주택 숫자는 남아돌고 있는데, 무주택자는 너무 많은 상태인 겁니다. 그런데 주택과 건물이 투기의 대상으로 되니, 경제의 모든 잉여가 비생산적인 부동산으로 박히고 있는 거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주요 자원들이 생산적인 데로 안가는 겁니다. 투자가 건설로 집중되는 상황입니다. 지금도 이명박-박근혜 시절 최경환 등이 했던 주택투기·부동산투기 조장정책의 후과를 다 해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노동시장내부의 분단문제가 굉장히 심각합니다. 옛날에는 ‘걱정이다’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혁파를 해야 한다’는 수준까지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는 것을 얼치기정규직들이 반대하고 나섭니다. 큰 문제입니다. 광주형일자리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잘못 대응하면 민주노총이 ‘공공의 적’이 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습니다. 이미 그런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전문가들조차도 광주형일자리를 수용해야 한다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광주형일자리 문제는 구시대형 자동차산업의 중복 과잉투자를 조장해서 얼마 안있어 또 다른 큰 재앙을 잉태시킬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또 자동차산업이 거의 모두 민주노총 사업장이고 민주노총이나 민주노총 산하조직이 노사민정 합의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노사민정 합의라고 포장해서 선전하면서 마치 민주노총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괜찮은 일자리 창출을 반대해서 광주형일자리가 안되고 있다는 듯이 왜곡선전하고 있는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미 청년실업 문제가 매우 심각하고 특히 번듯한 일자리가 별로 없는 지역 등에서는 선동력이 매우 크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 노동시장 이중구조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대표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노동시장내부의 이중구조, 노동자간 단절과 이중화 문제는 ‘사회연대임금전략’을 전체적으로 공세적으로 치고 나간다라든지, ‘원청-하청 공동교섭’, ‘동일업종 공동교섭’, ‘산별교섭’ 등을 통한 연대임금전략 추진 등 획기적인 구조변화정책, 실업, 미취업, 비정규 ‘노동자계급’에게 감동을 만드는, 그래서 사회전체에 감동을 확산시키는 노동운동의 획기적 정책변화 방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공세적으로 ‘원청-하청 공동교섭’을 진행해서 “원청노동자들의 임금인상분을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인상분으로 돌릴 용의가 있다”는 등의 계급연대임금전략을 해보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계급연대임금전략의 시초를 만들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연대임금전략으로 진화해 가야겠죠.
민주노총 노동조합들이 기업단위로 ‘전투적 경제주의’에 집중해왔던 노동운동방식이 이미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 한계의 반발형태가 광주형일자리로 나타난 거죠. 엄청난 위기입니다. 아마도 젊은 청년노동자, 예비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노동자들은 광주형일자리를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자리를 매개로 노동자들을 경쟁시켜서 파멸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놓고 보아도 과잉생산체계를 조장하는 꼴이 되는 거고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설명은 길고 멀고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당장 감성적으로 또 실존적으로 광주형일자리가 굉장히 땡기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형일자리에 대해서 ‘찬반 구도’로 가면 본전도 못 찾습니다. 오히려 ‘원청-하청 공동교섭’의 틀을 짜고 ‘계급연대임금전략’으로 과감하게 방향 전환해야 합니다. 결국 노동운동의 전략과 가치의 대전환을 이룩하는 문제입니다."

 

▲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4.27 판문점선언 (사진 : 뉴시스)

- 4.27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이후 평화번영통일시대라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촛불의 가장 확실한 성과이며, 정말 다행스럽습니다. 2018년 엄청난 변화의 촉매제가 촛불항쟁인 것이죠. 북미간 대화는 서로가 필요한 것이기에 아마 몇 가지 장애가 나타나더라도 그 길로 갈 겁니다. 우리가 촛불항쟁으로 인해서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스럽고 보람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북 바로알기’를 하는 겁니다. 북에 대해 친숙하게 만드는 작업들이 가장 기본적인 우리 활동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 보면 잘못 주입된 게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나마 다행인 것이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것이 살아 있고, ‘강대국 사이에서 남북이 통일돼야 그나마 우리 살길이 열린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 측면을 다양하고 입체적 방향으로 잘 확장시켜 가는게 중요합니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아직 북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게 있습니다. 완전히 없애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최대한 효과적으로 녹여가야 합니다. 일반시민들의 감성과 결합해서 친숙하게 만드는 작업이 스며들 듯이 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 마지막으로 2019년 진보연대사업 구상은 어떻습니까?
"핵심은 민중공동행동을 확대·강화하는 겁니다. 민주노총이 진보연대에 참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민중공동행동을 강화해야하는 거죠. 그래서 한편으로는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민중정치세력화를 추동하는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노동자민중정치세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이견들이 많기때문에 신속하게 소통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노동자민중의 공동투쟁은 좀 더 고도화되어야하고요. 가두투쟁을 포기할 수 없는 거지만 담론투쟁을 더욱 강화해야 되겠죠. 입체적으로 해 보려고 합니다."

선현희 기자  shh412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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