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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태권도, 2일 평양대극장서 첫 평양 합동시범공연

"내용이 좀 다를 뿐, 태권도는 남과 북이 같습니다"남북태권도, 2일 평양대극장서 첫 평양 합동시범공연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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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02  22: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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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태권도 시범단이 2일 오후 평양대극장에서 첫 평양 합동시범공연을 마쳤다.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2일 오후 평양 중구역에 있는 평양대극장. 남북 태권도가 처음으로 평양시민들에게 합동공연을 선보였다.

오후 4시(평양시간) 정각 사회자가 "온 겨레의 가슴을 새차게 들끓게 하는 남측 태권도시범단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2월 평창동계올림픽에서도 우리 민족은 하나, 태권도 뿌리도 하나라는 걸 세계에 과시했습니다”라며 공연 시작을 알리자 모든 관객이 전원 동시 기립해서 박수를 치면서 남북태권도 합동시범 첫 평양공연은 시작되었다.

먼저, 남측 세계태권도연맹(WTF) 시범단이 유려한 듯 절도를 갖춘 승무 시범에 이어 '고향의 봄' 음악에 맞춘 품새시범을 전개하고 곧바로 박진감 넘치는 호신술 시범을 선보이자 객석에서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이어 도복띠로 눈을 가린 채 발차기로 공중 표적을 정확히 가격하고 약 5미터 높이의 고공표적 3~4개를 발차기로 연속 격파하자 탄성과 함께 다시 한번 큰 박수가 터졌다.

25분간 이어진 남측 시범단 공연에 이어 북측 조선태권도위원회 시범단은 우렁찬 기합소리에 맞춰 '틀'(품새)시범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위력적인 송판깨기와 손발을 이용한 공중격파, 여성시범단원의 2대1, 3대1 겨루기 등 시범이 진행될수록 박수소리는 커져갔다. 윗옷을 벗은 단원의 몸을 각목으로 내리쳐 부러뜨리는 시범과 '조국통일' 구호에 맞춘 격파시범이 진행되는 동안 탄성과 환호성에 기합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 남측 태권도 시범단의 서범공연.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남측 시범단의 공연이 끝나고 평양 관객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남측 태권도가 화려하고 부드러운 반면, 북측은 절도 있고 사실적인 동작 위주의 시범이라는 차이가 확연했다. 또 남측이 '고향의 봄'을 관현악으로 편곡한 음악 등을 활용해 춤에 가까운 동작으로 화려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면, 북측은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손과 발을 이용한 위력(격파), 맞서기(대결) 등 사실적인 액션 위주의 동작들이 많았다. 

실전 무술을 방불케 한 북측 시범단의 30분 공연이 끝나고 북측 12명과 남측 16명의 시범단원이 5분간 합동 품새시범을 선보일 때는 남과 북의 태권도가 많이 다르지만, 역시 그 뿌리는 같다는 강한 느낌을 갖게 했다.

   
▲ 북측 태권도 시범단의 시범공연.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북측 태권도 시범단의 격파 시범.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북측 태권도 시범단의 격파 시범.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북측 태권도 시범단의 온몸을 이용한 각목 격파.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북측 관객은 공연 내내 표정에 큰 변화가 없었지만 고난도 시범이 벌어지면 즉각 박수를 치거나 환호성을 질렀고 짧지만 강렬했던 5분간의 합동공연이 마무리 된 뒤 남북 선수들이 손을 흔들어 인사하자 길게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이날 남북태권도 합동시범공연을 북측 인사로는 최휘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과 리일환 부위원장, 김경호 조선태권도협회 위원장이, 남측에서는 도종환 문화관광체육부 장관이 함께 지켜봤으며, 평양시민들로 보이는 관객들이 1,200석 규모의 공연장을 빈자리 없이 꽉 채웠다.

이날 합동 태권도시범이 열린 평양대극장은 1960년 8월 개관해 북한이 자랑하는 5대혁명가극을 공연한 종합예술극장이다.

   
▲ 남북태권도시범단의 대련 시범.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남북태권도 시범단 합동 시범공연이 끝나자 관람을 한 평양시민들이 기립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남북태권도 합동시범공연에 대한 평양 관객들의 환호와 기립박수.[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남북합동 태권도시범으로는 평양에서 처음 열린 이날 시범공연을 본 한 남측 관람객은 "남측 공연은 다채롭고 스토리텔링이 있어 뮤지컬을 연상시키는 반면 북측 공연은 사실적이고 실전무예에 가까우며 힘과 비장미가 느껴진다"는 비교 관람평을 내놓았고, 한 북측 관람객은 "태권도가 같긴 같구나. 내용이 좀 달라서 그렇지 남북이 같습니다"라는 통일지향적(?) 감상평을 밝혔다.

태권도 시범단은 3일 오후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진행될 예정인 남북합동공연을 마치는 예술단과 함께 그날 밤 전세기편으로 귀환한다.

   
▲ 최휘 북한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이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함께 이날 남북태권도 합동시범공연 관람을 했다.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북남태권도시범단 합동시범출연. '남측 태권도 시범단의 평양방문을 환영합니다!'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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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이 재활용 수거 맡는 한 ‘쓰레기 대란’ 해결 한계

등록 :2018-04-03 05:00수정 :2018-04-03 09:39

 

 

아파트가 직접 판매, 세계서도 드물어
민간 방식, 수익 안나면 언제든 재발
“공공부문이 재활용 수거 책임져야”
한 할머니가 빈 상자가 실린 손수레를 끌고 서울 마포구의 한 재활용센터에 들어서는 장면. 환경부는 폐비닐 등 수거 거부를 통보한 재활용업체들과 협의한 결과, 수도권 3개 시·도의 48개 업체 모두가 폐비닐 등을 정상 수거하기로 했다고 2일 밝혔다.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한 할머니가 빈 상자가 실린 손수레를 끌고 서울 마포구의 한 재활용센터에 들어서는 장면. 환경부는 폐비닐 등 수거 거부를 통보한 재활용업체들과 협의한 결과, 수도권 3개 시·도의 48개 업체 모두가 폐비닐 등을 정상 수거하기로 했다고 2일 밝혔다.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정부에선 계속 분리수거하라는데 업체에선 안 가져가겠다니 그냥 당분간은 종량제 봉투에 담아서 버리면 안 되겠습니까?”

 

2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한 아파트 관리소장은 밀려드는 주민 항의 전화에 울상이었다. 2일 환경부와 서울시는 재활용 분리·수거 업체들과 협의해 폐비닐 분리수거를 계속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서울시는 지난 3월28~30일 4개 수거업체, 선별장 7곳,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 25개 자치구 등과 간담회를 열어 “비닐류는 자원재활용법 제13조 및 환경부 지침에 의거, 재활용 가능 자원에 해당하므로 종량제 봉투에 넣어서 버리도록 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공지했다.

 

하지만 이날도 많은 아파트 단지들에선 비닐 쓰레기를 재활용품으로 내놓는 것을 막고 있었다. 정책과 현실이 따로 놀면서 주민들의 혼란은 여전했다.

 

이번 사태의 배경으로 꼽힌 재활용품을 아파트 단지와 수거업체들이 처리하는 방식에 변함이 없다면 ‘비닐 대란’은 계속되리라는 전망이다. 공덕동 450가구가 사는 한 아파트단지는 1년 동안 재활용업체에 폐지와 고철을 팔아서 번 돈이 5천만원을 넘었을 땐 집집마다 2만~3만원짜리 식용유 세트를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재활용품 값이 급락하면서 몇년 전에 1가구당 1천원, 1년에 단지 전체에서 4500만원을 수거업체로부터 받았던 계약을 올해는 1가구당 660원, 1년에 3600만원을 받는 것으로 변경했다.

 

2천가구가 사는 성북구 석관동 두산아파트는 2015년엔 재활용품으로 1년에 3천만원을 벌었는데 올해는 1200만원을 받는다. 재활용품 가격이 떨어지면서 아파트 경비원들도 피해를 보고 있다. 재활용 쓰레기 수집과 관리는 아파트 경비원들의 고유 업무가 아니다. 그래서 아파트 주민들은 재활용품을 팔아서 번 돈으로 경비원에게 특별수당을 지급해왔다. 그런데 재활용품 판매 수입이 줄면서 경비원들에게 주던 특별수당 7만원은 5만원으로 줄었고 올해는 그보다 적어질 전망이다.

 

이 아파트 전 입주자 대표였던 심재철씨는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지자체에서 재활용품을 모두 관리하고, 이익이 많이 나는 단지에만 수익을 돌려주는 구조가 돼야 한다. 재활용품 판매 대금으로 아파트 단지의 비용을 충당하는 구조에서는 관리비나 경비원 임금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서울시는 이번 비닐 대란을 계기로 모든 재활용품 수거를 공공에 맡기는 단지는 자치구 수거체계로 전환하겠다고 했으나 대부분 공동주택들은 폐지, 고철 등 값나가는 재활용품은 직접 팔고 비닐, 스티로폼은 자치구가 가져가기를 희망하고 있어 갈등의 여지는 그대로다. 다른 나라들은 공공이 재활용품을 직접 처리한다. 아파트 단지가 업체에 재활용품을 개별 판매하는 방식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재활용품을 이용하는 생산 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번 합의가 지속 가능할지도 불투명하다. 환경부와 업체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돈이 되지 않는 재활용 쓰레기를 처리할 곳이 없다’는 근본 문제는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다. 박필환 재활용수집선별협동조합 사무국장도 “당장 업체와 합의는 했지만 현실적인 안이라고 보기 어렵다. 장기적으론 재활용품을 활용하는 생산 시설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38842.html?_fr=mt1#csidx9d555af2ffa76d9851c9ceae24462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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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간 단 한 번도 ‘4.3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제주 지사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8/04/03 10:07
  • 수정일
    2018/04/03 10:0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제주 4.3사건은 진실을 규명해야 할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임병도 | 2018-04-03 08:44:5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오늘은 제주 4.3사건 70주년입니다. 제주를 비롯한 전국에서는 그동안 4.3사건을 알리기 위한 문화 공연과 동백꽃 배지 달기, 릴레이 인터뷰 등 다채로운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특히 그동안 제주 4.3사건 알리기에 소극적이었던 제주도민들도 적극 나서서 아픈 역사를 알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주 도민들의 노력에 제주 지사가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원희룡, ‘문재인 대통령에 공식 사과 요청’

지난 3월 28일 원희룡 제주지사는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도민과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원 지사는 담화문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4.3수형인’에 대해 명시적인 공식 사과를 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원 지사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제주도민에게 4.3사건에 대한 사과를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후보 시절에 “내년 ‘70주년 4.3 추념식’에는 저 문재인이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하겠다, 그 약속 반드시 지키겠다”며 “다시는 4.3이 폄훼되고, 모욕받지 않도록 저 문재인이 책임지겠다”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원희룡 지사가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에는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던 점과 비교하면, 그저 문재인 대통령을 끌어들여 정치적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희룡, ‘역사상 첫 현직 대통령이 참석’

<MBC 라디오, 양지열의 시선집중>

진행자 > 그러게요. 말씀하신 것처럼 억눌린 역사라고 하셨는데 사실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에 4.3 희생자 추념식 참석을 안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일 이제 70주년 추념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을 할 거라고 전망하는데 이뤄진다면 9년 만에 현직 대통령이 참석을 하는 거네요?

원희룡 > (이뤄진다면) 9년 만이 아니고 역사상 처음으로 오시는 겁니다.

진행자 >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인가요?

원희룡 > 네, 그렇습니다. 그런 만큼 의미가 크고요. 노무현 대통령님은 4.3추념식에는 아니었지만 제주방문 당시에 국가원수로서 공식사과를 하셨죠.

원희룡 제주지사는 4월 2일 ‘MBC 라디오, 양지열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4.3 추념식 참석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역사상 처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원 지사는 노무현 대통령은 공식 사과만 했지, 추념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58주기 4.3위령제’에 참석했습니다.

제주도 관계자는 원 지사의 발언이 문제가 되자, 추념식과 위령제의 명칭 때문이었다고 변명했습니다. 하지만 2014년 ‘4.3 희생자 국가 추념일’이 공표되기 이전이라도 대통령이 참석한 공식 행사였기에 역사상 처음이라는 말은 틀렸습니다.

#12년 동안 4.3 위령제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원희룡

원희룡 제주 지사는 제주 4.3사건 위령제나 추념식 등에 대한 역사를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제주 도지사로 당선되기 이전에는 단 한 번도 ‘4.3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 지사는 2014년 새누리당 후보로 도지사에 출마했을 때야 비로소 “지난 세월 사정이 있고 없고를 떠나 위령제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도 미안한 마음”이라고 사과를 했습니다.

지난 10년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단 한 번도 ‘4.3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주 도민들은 갈수록 격이 떨어지는 4.3국가 추념일 행사로 분노했지만, 원 지사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 4.3 위원회 폐지 법안에 찬성했던 원희룡

2008년 1월 21일, 한나라당은 제주도민의 아픔과 4.3사건의 진상규명 등을 노력했던 ‘4.3위원회’를 폐지하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당시 제주에서는 17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4.3위원회 폐지 반대 도민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한나라당 심판 운동이 전개됐습니다. 오죽하면 한나라당 제주도당조차 개정안 발의를 철회하라며 중앙당에 건의문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제주4.3위원회 폐지를 골자로 한 ‘제주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 공동 발의자 명단을 보면 원희룡도 있었습니다. 제주 출신이 오히려 제주 도민을 괴롭히는 법안에 서명한 셈입니다.

제주 4.3사건을 말하면서 화해와 치유, 평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진실이 규명되지 않은 사건에서 도대체 누구와 화해하고, 누가 치유받아야 할까요?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리고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평화’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아무 일도 없었듯이 지나간다면 똑같은 일이 되풀이됩니다.

제주 4.3사건은 진실을 규명해야 할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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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미-러 알래스카 거래의 비밀

[동아시아사 연구가 김종성의 역사 강의] 1867년 3월 30일 알래스카 매매

18.04.03 07:51l최종 업데이트 18.04.03 07:51l
글·영상: 김종성(qqqkim2000)

 

▲ 미-러 알래스카 거래의 비밀
ⓒ 황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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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3월 30일, 러시아와 미국이 알래스카 매매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영토 매매대금치고는 헐값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720만 달러(현재 한화 약 2조원)에 거래됐습니다. 러시아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뭘까요? 

단순히 알래스카의 가치를 몰라서였을까요? 러시아가 그렇게 한 진짜 이유를 탐구하다 보면, 19세기 세계 정치의 구도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동영상은 당시 국제질서의 관점에서 알래스카 매매계약을 조명했습니다. 

(기획 : 김종성 시민기자, 영상편집 : 황지희 기자)
 

 알래스카의 마지막 원시지대, 얼음산 맥킨리(본래 이름은 디날리)
▲  알래스카의 마지막 원시지대, 얼음산 맥킨리(본래 이름은 디날리)
ⓒ 박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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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유엔 총회서 ‘남·북·미 평화 공동선언’ 추진

[단독]9월 유엔 총회서 ‘남·북·미 평화 공동선언’ 추진

김재중·유정인 기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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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놀라게 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

[개벽예감 293] 강철궤도 위에 다시 울린 베이징행 특급렬차의 동음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8/04/02 [09:09]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세계를 놀라게 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

2. 조중친선관계를 원상복원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킨다

3. 백악관의 조미정상회담준비는 누가 주도하고 있을까?

4.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한반도 비핵화 대전략 

 

 

1. 세계를 놀라게 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

 

일요일 새벽이었다. 평양 하늘에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각, 진록색 특급렬차가 두 줄기 강철궤도 위에 힘찬 동음을 울리며 달리기 시작하였다. 2011년 12월 17일 생애의 마지막 순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타고 있었던 바로 그 진록색 특급렬차, 사회주의완성과 조국통일의 여명을 향하여 쉬지 않고 달려온 특급렬차였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8년 3월 25일 새벽,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외국방문역사가 깃든 그 진록색 특급렬차를 타고 역사적인 중국방문길에 올랐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리설주 여사, 그리고 최룡해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광호 부위원장, 리수용 부위원장, 김영철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리용호 외무상을 비롯한 고위급 수행원들이 탄 진록색 특급렬차가 압록강 철교를 건너 중국 단둥에 도착하였을 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위임에 따라 베이징에서 단둥까지 가서 대기하던 쑹타오(宋濤)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특급렬차에 올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정중히 맞이하였다. 단둥을 출발한 특급렬차는 3월 26일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사진 1>  

 

▲ <사진 1> 위쪽 사진은 2018년 3월 25일 새벽,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리설주 녀사, 그리고 최룡해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한 고위급 수행원들이 탄 진록색 특급렬차가 어둠이 아직 걷히지 않은 평양을 출발하는 장면이다. 아래쪽 사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탔던 진록색 특급렬차의 모습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외국방문역사가 깃든 그 진록색 특급렬차를 타고 역사적인 중국방문길에 올랐다. 특급렬차는 3월 26일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은 국빈방문이 아니라 비공식방문이었다. 그런데도 중국은 최상급 국빈방문의 격에 맞춰 극진히 영접, 환대하였다. 원래 중국의 국빈예우는 국빈방문 첫날 인민대회당에서 환영의식, 정상회담, 국가연회가 차례로 진행되고, 이튿날 국무원총리가 오찬을 마련하는 영접관례에 따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영접관례에서 벗어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베이징에 도착한 날 인민대회당에서 환영의식, 정상회담, 국가연회, 예술공연이 차례로 진행되었고, 이튿날에는 1773년에 건설된 청나라 황제의 별실인 양위안자이(養源齋)에서 특별오찬회담이 진행되었다. 특별오찬회담 직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리설주 여사, 그리고 수행원들은 중국국가과학원 전시관을 참관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은 3월 26일 인민대회당 둥다팅(東大廳)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과 3월 27일 양위안자이에서 진행된 두 정상의 특별오찬회담이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중정상회담 직후 인민대회당 진써다팅(金色大廳)에서 진행된 국가연회 연설에서 “나는 방금 습근평 총서기 동지와 조중친선관계발전과 절박한 조선반도정세관리문제들을 비롯하여 중요한 사안들에 대한 깊이 있는 의견을 나누었으며 조중 두 나라 사회주의제도를 굳건히 다지고 두 나라 인민들에게 행복과 미래를 안겨주기 위한 공동의 의지를 확언하였습니다”라고 밝혔다. 조선의 기록영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께서 중화인민공화국을 비공식방문하시였다 주체107(2018). 3. 25-28’에 나오는 해설에 따르면, 조중정상회담은 “허심탄회하고 건설적이며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였”으며, “두 나라 최고령도자 동지들께서는 이날에 진행된 첫 상봉과 회담을 통하여 호상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에서 견해의 일치를 이룩한데 대하여 만족을 표시하시였다”고 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국가연회 연설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번 조중정상회담에서는 조중친선관계를 발전시키는 문제와 한반도 정세를 관리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논의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논한다. <사진 2>

 

▲ <사진 2>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은 국빈방문이 아니라 비공식방문이었다. 조선로동당과 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형제당이므로, 김정은 조선로동당 위원장은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공식초청으로 중국을 비공식방문한 것이다. 중국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최상급 국빈방문의 격에 맞춰 극진히 영접, 환대하였다. 맨위쪽 사진은 2018년 3월 26일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환영의식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중국인민해방군 군악대가 두 나라 국가를 연주하는 동안 단상에서 기립하고 있는 장면이다. 가운데 사진은 인민대회당 진써다팅에서 진행된 성대한 국가연회석상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담화하는 장면이다. 맨아래쪽 사진은 국가연회와 예술공연이 끝난 직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담화를 나누며 밖으로 걸어나가는 장면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일정 중에서 조중정상회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특별오찬회담이었다. 그 까닭은, 특별오찬회담이 사실상 단독정상회담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8년 3월 27일 시진핑 주석은 펑리위안(彭麗媛) 여사와 함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리설주 여사를 위해 “가정적인 분위기의 특별한 오찬”을 마련하였는데, 특별오찬회담이 진행된 양위안자이는 일찍이 김일성 주석이 “중국의 선대수령들과 친선의 정을 두터이 하신 유서 깊은 곳”이라고 한다. 

 

그처럼 유서 깊은 곳에서 두 정상이 특별오찬회담을 했으니, 얼마나 허심탄회한 담화를 나누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오찬회장은 시종 화기롭고 혈연의 정이 차넘치였”는데, “조중 두 당, 두 나라 최고령도자들께서는 담화에서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와 의견들을 터놓고 말씀하시며 우애를 두터이 하시였다”고 한다. 요컨대, 양위안자이 특별오찬회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전날 정상회담에서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가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흉금을 터놓고 논의하면서 신뢰관계를 맺은 사실상 단독정상회담이었던 것이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조중정상회담 다음날인 3월 2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리설주 녀사, 시진핑 주석과 펑리위안 녀사가 양위안자이에서 특별오찬회담을 하는 장면이다. 1773년 청나라 황제 건륭제가 건설했다는 황제의 별실인 양위안자이는 일찍이 김일성 주석이 중국의 선대수령들과 만나 친선의 정을 나누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양위안자이 특별오찬회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흉금을 터놓고 중대사를 논의하면서 신뢰관계를 맺은 사실상 단독정상회담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 조중친선관계를 원상복원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킨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3월 26일 조중정상회담 직후 국가연회 연설에서 “이번에 우리의 전격적인 방문제의를 쾌히 수락해주”신 시진핑 주석과 중국의 당 및 국가지도간부들의 “지성과 극진한 배려에 깊이 감동되였으며 그에 대하여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시진핑 주석에게 중국방문과 조중정상회담을 제의하였고, 시진핑 주석은 그 제의를 흔쾌히 수락하여 조중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성사된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과 조미정상회담에 앞서 조중정상회담을 먼저 한 까닭은 무엇인가? 만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과 조미정상회담 이후에 조중정상회담을 제의하였더라면, 시진핑 주석과 깊은 신뢰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조중친선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조중친선관계를 발전시킬 결정적인 기회는 남북정상회담과 조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다가왔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 기회를 틀어쥐고 주동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과 조중정상회담은 2013년 이후 몇 가지 복잡한 사정들 때문에 멀어졌던 중국을 다시 조선의 편으로 끌어당기며, 전통적인 조중친선관계를 일거에 원상복원하였을 뿐 아니라, 조중친선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중국 홍콩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주석은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을 맞이하여 2018년 7월 26일 조선을 답방할 예정이라는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과 시진핑 주석의 조선답방예정은 전통적인 조중친선관계를 ‘핵문제’ 해결 이후의 새로운 친선관계로 발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로 된다.   

 

한반도 정세는 일차적으로 조미관계와 남북관계에 의해 변화되지만, 조중관계가 한반도 정세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조중친선관계는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며, 두 나라가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적 공동이익이다. 만일 조중관계가 불안정하면,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에서 평화와 안정의 실현이 그만큼 늦어지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건설도 늦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중정상회담 직후 국가연회 연설에서 “조선인민과 중국인민은 실생활을 통하여 자기들의 운명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하였으며,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잇닿아있는 형제적 이웃인 두 나라에 있어서 지역의 평화적 환경과 안정이 얼마나 소중하며 그것을 쟁취하고 수호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가를 똑똑히 새기고 있습니다”라고 언명하였던 것이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2018년 3월 26일 인민대회당 둥다팅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 장면이다. 사진 오른쪽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중심으로 좌우에 통역관, 리수용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영철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리용호 외무상이 자리를 잡았다. 사진 왼쪽에는 시진핑 주석을 중심으로 좌우에 통역관과 고위급 당간부 6명이 자리를 잡았다. 역사적인 조중정상회담에서는 조중친선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문제, 그리고 급변하고 있는 한반도 정세를 조중 두 나라의 공동이익에 맞게 관리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논의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시진핑 주석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조중친선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신화통신> 2018년 3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주석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중친선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네 가지 방안을 제의하였다고 한다. 네 가지 방안은 다음과 같다. 

 

1) 상호방문, 특사파견, 서신교환 등 고위급 교류를 활성화하는 방안

2) 전략적 소통을 위해 전통적 친선관계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 

3) 평화, 발전, 협력의 기치를 들고 상호이익과 인민복지를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방안  

4) 민간교류를 강화하고 청년세대교류를 증진하며 우의전통을 계승하는 방안   

 

위에 인용한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시진핑 주석이 제의한 네 가지 방안을 듣고 “내게 매우 큰 영감과 격려가 되었다. 선대 수령들께서 직접 맺으신 우의는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되고, 새로운 상황에서 중국과 우호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조선의 전략적 선택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화답했으며, 시진핑 주석도 다음과 같이 확언하였다고 한다.  

 

“중국과 조선의 전통적 우의는 두 나라의 선대 지도자들이 직접 만들고 이루어낸 소중한 자산이다. 선대 지도자들은 공동의 이상과 이념을 공유하고 혁명적 우정을 바탕으로 서로 지지하며 국제관계사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김정은 위원장 동지와 나는 중조관계발전을 직접 경험하고 목격했다. 그동안 우리는 전통적 우호관계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거듭 말해왔다. 중조관계발전은 역사와 현실, 국제관계와 지역정세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전략적 선택이자 유일한 선택이다. 상황에 따라 변해서도 안 되며, 변하지도 않을 것이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두 나라의 우호협력관계를 매우 중시한다. 이를 유지하고 강화하며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원칙이다. 우리는 중조관계의 장기적 번영과 안정적 발전을 위해 조선 동지들과 함께 초심을 유지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환영하는 국가연회에서 상영된 '중조친선 대를 이어'라는 제목의 기록영화 상영장면이다. 이 기록영화는 일찍이 중국을 방문하였던 김일성 주석이 중국 최고지도자들과 뜨겁게 상봉하는 역사적인 장면들, 그리고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 최고지도자들과 뜨겁게 상봉하는 역사적인 장면들을 연대순으로 보여주었다. 위의 사진은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 상봉하는 장면이다. 시진핑 주석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환영하는 국가연회에서 조중친선관계사 70년을 수록한 그 기록영화를 상영함으로써 두 나라 선대 최고영도자들이 맺은 조중친선관계를 대를 이어 강화발전시키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중정상회담 직후 국가연회 연설에서 “나는 이번에 중국을 처음으로 방문하였습니다. 나의 첫 외국방문의 발걸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된 것은 너무도 마땅한 것이며, 이는 조중친선을 대를 이어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고 이어나가야 할 나의 숭고한 의무로도 됩니다”라고 밝히면서 “조중친선관계를 새로운 높이에서 강화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당과 정부의 확고부동한 립장입니다”라고 언명하였다고 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과 조중정상회담 이후 두 나라는 전통적 친선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상승발전시키기 위한 소통, 교류, 협력을 실행할 것이며, 그로써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 정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이다.   

 

 

3. 백악관의 조미정상회담준비는 누가 주도하고 있을까?

 

위에 인용한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중정상회담에서 “현재 조선반도 정세가 빠르게 발전하고, 많은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애와 도의에 따라 적절한 때 시진핑 주석을 직접 만나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중정상회담 직후 국가연회 연설에서 “나는 방금 습근평 총서기 동지와 조중친선관계발전과 절박한 조선반도정세관리문제들을 비롯하여 중요한 사안들에 대한 깊이 있는 의견을 나누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위의 보도내용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중정상회담에서 최근 급속도로 변화, 발전하는 한반도 상황을 시진핑 주석에게 설명하였고, “절박한 조선반도정세”를 관리하는 문제를 논의하였음을 말해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언급한 “절박한 조선반도정세”는 역사적인 조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여러 가지 사변들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가오는 조미정상회담이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므로 절박한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조선과 중국은 조미정상회담의 당사자인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이 조미정상회담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조중정상회담에서 백악관의 조미정상회담준비와 관련하여 무엇이 논의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조미정상회담준비와 관련하여 단행한 다음과 같은 조치들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첫째, <뉴욕타임스> 2018년 3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마익 팜페오(Mike R. Pompeo) 국무장관 피지명자에게 조선과 미국 사이의 “비공개연락통로(back-channel communication)”을 유지하도록 지시하였는데, 팜페오가 국무장관에 지명되기 직전 중앙정보국장으로 근무하던 때부터 미국 중앙정보국은 조선 정찰총국과 비공개연락통로를 유지해왔다고 한다. 

 

한국 언론보도에 따르면, 조선 정찰총국은 인민무력부 직속기관에서 국무위원회 직속기관으로 확대, 개편되었는데, 이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정찰총국장으로부터 직접 정찰보고를 받는다는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팜페오 중앙정보국장의 정보보고를 직접 받고 있으며, 다른 한편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정찰총국장의 정찰보고를 직접 받고 있으므로, 두 정상은 미국 중앙정보국과 조선 정찰총국 사이의 비공개연락통로를 매개로 간접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셈이다. 그 비공개연락통로가 지금 실제로 사용되는지 알 수 없으나, 조미정상회담이 다가올수록 회담준비에 필요한 쌍방의 의사소통이 그 비공개연락통로를 통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2018년 3월 2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오하이오주 리치필드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이다. 그는 연설에서 현재 진행 중인 한미자유무역협정 개정협상을 조미정상회담 이후로 연기하겠다고 밝히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협박발언'을 날렸다. 그처럼 협박발언으로 협상상대의 기를 꺾어놓은 뒤에 자기에게 유리한 협상결과를 이끌어내려는 것이 그의 전형적인 협상술이다. 그러나 그런 협상술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미핵대결에서 패한 미국은 국가안보파탄위기에 빠져있으므로 조미정상회담에서 자기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협상할 수밖에 없는 궁색한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미정상회담에서 사용할 지렛대가 없다는 미국 정세분석가들의 우려섞인 목소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그처럼 궁색한 처지에서 조미정상회담에 끌려나가게 된 사정을 지적하는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둘째, 2018년 3월 22일 트럼프 대통령은 허벗 맥매스터(Herbert R. McMaster)를 국가안보보좌관직에서 해임하고, 존 볼턴(John R. Bolton)을 그 자리에 지명하였다. ‘악의 화신’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는 볼턴은 오는 4월 9일부터 국가안보보좌관직을 수행하게 된다. ‘악의 화신’이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등장하는 판이므로, 백악관의 조미정상회담준비가 좌초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은 역사적인 조미정상회담이 성과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일치된 견해와 입장을 가지고 있으므로, 볼턴의 등장으로 백악관의 조미정상회담준비에 난관이 조성될 수 있는 문제를 논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작한 무역전쟁에 맞서야 하는 시진핑 주석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의 화신’이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등장하기까지 하였으니,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그래서 시진핑 주석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한 직후인 2018년 3월 28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진핑 주석과 전화통화를 한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이 자기에게 조중정상회담이 “아주 잘 진행되었다”고 말했으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자신과 만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는 시진핑 주석의 전언을 3월 28일 아침 트위터에 올렸다.  

 

이런 정황은 시진핑 주석이 조중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의견일치를 보았던, 조미정상회담준비가 차질 없이 진행되기를 바라는 공동의 의사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런 공동의 의사를 전달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트위터에서 응답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이 조미정상회담준비를 직접 챙기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그런 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메시지는 사실이다. 팜페오와 볼턴이 각각 국무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하게 되었지만, 그 각료교체가 조미정상회담준비에 난관을 조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팜페오와 볼턴을 국무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에 각각 지명한 것은 그 두 사람이 강경파이기 때문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잘 따르는 충성파이기 때문이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CNN> 2018년 3월 29일 보도에서 드러난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기준으로 각료를 지명하거나 해임한다. 더욱이 그 보도기사가 지적한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각료들이 반대해도 자기 결심대로 밀고나가는 사람이므로, 조미정상회담준비는 그의 결심대로 추진될 것이다. 

 

 

4.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한반도 비핵화 대전략 

 

위에 인용한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중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대전략을 밝혔다. 누구나 직감하는 것처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한반도 비핵화 대전략은 조미정상회담의 성패를 좌우할 최고로 중대한 사안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주석에게 한반도 비핵화 대전략에 대해 얼마나 구체적으로 설명했는지 알 수 없지만, <신화통신> 보도를 통해 그 대전략 윤곽의 일부가 세상에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시진핑 주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조치를 취해 조선반도 긴장을 완화했으며, 평화를 위한 대화를 제의했다. 북남관계를 화해협력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북남최고위급회담을 하기로 했고, 미국과 대화하기 위해 조미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다. 남조선과 미국이 선의를 갖고 우리의 노력에 호응하면서 평화와 안전의 분위기를 조성해 평화실현을 위한 단계적 조치를 취한다면 조선반도 비핵화 문제는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 선대 수령들의 유훈에 따라 조선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려는 것은 우리의 시종일관한 입장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중국과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고 대화와 협상을 유지하며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기 바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한반도 비핵화 대전략은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것처럼 “남조선과 미국이 선의를 갖고 우리의 노력에 호응하면서 평화와 안전의 분위기를 조성해 평화실현을 위한 단계적 조치를 취한다면 조선반도 비핵화 문제는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는 문장에 집약되어 있다. 한국과 미국이 평화실현을 위한 단계적 조치를 취하고, 조선도 그에 상응하여 비핵화를 위한 단계적 조치를 취하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한반도 비핵화 대전략의 골자인 것이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중정상회담 석상에서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시진핑 주석과 중대사를 논의하는 장면이다. 좌중을 압도하는 패기와 자신감이 느껴진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중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단계적으로 실현해가는 대전략을 설명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한반도 비핵화 대전략은 조선의 핵폐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를 뜻하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를 단계적으로, 동시행동절차에 따라 실현하려는 것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전략이다. 오는 5월 말 열리게 될 조미정상회담은 조선과 미국의 두 정상이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를 합의하는 역사적인 회담으로 될 것이다.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는 미국의 핵무기는 물론, 핵무기 운반수단으로 되는 모든 종류의 미국군 항공기, 군함, 잠수함의 한반도 접근을 금지한다는 뜻이며, 미국의 핵우산이 한반도에서 철거된다는 뜻이며, 핵공격전초기지로 전진배치된 주한미국군기지들이 폐쇄된다는 뜻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며칠 전, 이름을 밝히지 않은 청와대 관계자 두 사람이 취재기자들에게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일괄타결과 단계적 해법을 각각 따로 언급하는 바람에 독자들에게 약간의 혼동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일괄타결과 단계적 해법이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는 데서 일괄타결과 단계적 해법은 전혀 상충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조미정상회담에서 어떤 해결방안이 일괄타결되면, 그 일괄타결된 해결방안을 순차적으로 이행할 단계적 동시행동절차(단계적 조치)도 동시에 합의되어야 한다. 조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는 해결방안을 일괄타결하면서도, 그것을 순차적으로 이행할 단계적 동시행동절차를 합의하지 않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   

 

조미정상회담에서 일괄타결 해결방안과 단계적 동시행동절차가 모두 합의되어야 하는 까닭은,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는 과정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 핵문제는 미국의 대조선적대정책에 의해 발생한 것이지만, 미국은 한국, 일본, 유엔안보리를 대조선적대정책에 끌어들여 대조선적대정책의 적용범위를 국제사회로 확장하였을 뿐 아니라, ‘핵문제’를 적용하는 범위도 단계적으로 확장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는 과정을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 미국과 한국이 취할 단계적 동시행동절차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그에 상응하여 조선이 취할 단계적 동시행동절차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나는 쌍방이 공정하고 대등한 원칙에 따라 밟아갈 단계적 동시행동절차가 아래와 같이 네 단계로 구분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제1단계 - 미국과 한국이 대조선합동전쟁연습을 중단하고, 그에 상응하여 조선은 핵시험과 미사일시험발사를 중단하는 동시행동절차가 진행된다. 

♦ 제2단계 - 미국, 유엔안보리, 중국, 한국, 일본이 대조선제재를 해제하고, 그에 상응하여 조선은 녕변핵시설가동을 중단하는 동시행동절차가 진행된다. 

♦ 제3단계 - 미국이 조선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그에 상응하여 조선은 무기급 핵물질을 폐기하는 동시행동절차가 진행된다. 

♦ 제4단계 -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그에 상응하여 조선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단계적으로 폐기하는 동시행동절차가 진행된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네 단계 동시행동절차가 모두 이행되어도, 조선은 국가핵무력을 폐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개념을 조선의 국가핵무력을 폐기시킨다는 뜻으로 해석하지만, 그런 해석은 주관적인 생각과 일방적인 요구를 한반도 비핵화라는 개념에 투영시킨 판단착오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은 조선의 국가핵무력을 폐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자기들의 주관적인 생각과 일방적인 요구만 분별없이 내세우고 있다. 

 

조미정상회담이 열리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핵시험 및 미사일시험발사를 중단하고, 녕변핵시설가동을 중단하고, 무기급 핵물질을 폐기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폐기하는 단계적 행동절차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시할 것으로 예견되지만, 국가핵무력을 폐기하겠다고 공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이 열핵탄두(수소탄)를 감축할 가능성은 있지만, 원래 핵감축은 핵군축협상에서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미국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한반도 비핵화 발언을 조선의 핵폐기라는 뜻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3월 5일 평양을 방문한 방북특사단에게 한반도 비핵화를 말했고, 지난 3월 26일 조중정상회담에서도 한반도 비핵화를 또 다시 말했는데,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조선의 핵폐기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다. 조선이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를 공식 천명한 때는 1988년 11월이었다. <사진 8>

 

▲ <사진 8> 이 사진은 미국의 핵무기와 전쟁수단들을 파철처럼 모조리 걷어내는 장면을 형상한 조선의 선전화다. 이 선전화는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의 의미를 형상한 선전화들 가운데 하나다. 지금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미정상회담을 고대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미정상회담을 고대하는 까닭은,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여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를 실현할 역사적인 일괄타결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핵전쟁연습을 계속 감행하면서 각종 핵타격수단들을 들이밀어 정세를 극도로 긴장시켰던 '핵제국'의 대조선적대정책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평화와 안정을 실현할 '백두산 대국'의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 대전략 앞에서 꺾이게 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승리를 확신하는 근거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지난날 6자회담에 참가하였던 송민순 당시 한국대표는 ‘빙하는 움직인다: 비핵화와 통일외교의 현장’이라는 제목의 자기 저서에서 2005년 7월 25일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개막식 기조연설에서 김계관 당시 조선대표가 “한반도의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고, 우리 최고수뇌부의 확고한 의지라고 하면서, 한반도의 남과 북을 비핵지대로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서술하였다. 김계관 조선대표가 한반도의 남과 북을 비핵지대로 만들자고 제안하였던 2005년 당시 조선은 아직 핵시험을 진행하지 않은 비핵국가였으므로,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라는 개념에는 조선의 핵폐기가 포함되지 않았다. 김계관 조선대표의 6자회담 개막식 기조연설에 따르면,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에서 처음 공식화된 한반도 비핵화라는 개념은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를 뜻하는 개념이다. 조선은 9.19 공동성명이 발표된 이후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라는 기존 용어에서 ‘평화지대’라는 말을 생략하고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는데, ‘평화지대’라는 말을 생략했다고 해서, 그리고 조선이 제1차 핵시험으로 핵보유국으로 되었다고 해서 선대 수령의 유훈인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의 의미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언급한 한반도 비핵화는 2005년 7월 25일 6자회담 개막식 기조연설에서 조선대표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확고한 의지라고 밝히면서 제안하였던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를 뜻하는 것이다. 요컨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한반도 비핵화 대전략은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를 실현하려는 것이지, 조선의 국가핵무력을 폐기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조선의 견지에서 보면,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는 조선의 자위적 핵무력은 그대로 놔두고, 미국의 침략적 핵무력만 제거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는 미국의 핵무기는 물론, 핵무기 운반수단으로 되는 모든 종류의 미국군 항공기, 군함, 잠수함들의 한반도 접근을 금지한다는 뜻이며, 흔히 핵우산이라고 부르는 미국의 ‘확장된 억제’가 한반도에서 철거된다는 뜻이며, 핵공격전초기지로 전진배치된 주한미국군기지들이 폐쇄된다는 뜻이다. 

 

오는 5월 하순 조미정상회담이 열리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핵시험 및 미사일시험발사를 중단하고, 녕변핵시설가동을 중단하고, 무기급 핵물질을 폐기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폐기하는 방안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시하면서,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를 실현하자고 제의할 것으로 예견된다. 그러면 트럼프 대통령은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예견하는 근거는 2018년 3월 19일 <자주시보>에 발표된 나의 글 ‘다가오는 조미정상회담, 낙관적 전망의 근거들’에서 자세히 논하였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지금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미정상회담을 고대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미정상회담을 고대하는 까닭은,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여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를 실현할 역사적인 일괄타결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확신은 “2018년은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승리의 해로 될 것”으로 전망한 올해 신년사에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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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들의 ‘빨갱이 프레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밝힌 글

[제주 4.3 항쟁 70주년] 金益烈장군 실록유고 ⑩
 
[마지막 글] 극우들의 ‘빨갱이 프레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밝힌 글
 
편집국  | 등록:2018-04-02 11:14:58 | 최종:2018-04-02 12:04:2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편집자의 글

제주 4.3 항쟁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습니다. 4.3항쟁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백과사전에서는 담담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근현대사에서 차별받고 소외를 받았던 민중들의 피맺힌 한이 담겨 있습니다.

4‧3과 김익렬(金益烈) 장군 - 부언 설명하자면 김익렬 장군은 조병옥의 모함으로 9연대장에서 해임되었으나 6.25때 많은 무공을 쌓은 후 3성장군이 되고 국방대학원장까지 역임한 우리나라의 정통 보수이자 후배 군인들이 손꼽는 참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사독재에 부역하지 않고 전두환 시대에 죽음이 다가오자 이 회고록을 집필하고 자신의 사후에 발표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의 유족들은 그 이후의 정권에서도 발표를 못하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주 제민일보의 한 눈 밝은 기자에 의해 그의 유고가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그 스토리도 재미있습니다만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여러 드라마에서도 나왔던 당시의 스토리, 즉 김 연대장이 김달삼과 산중에서 담판을 짓기 위해 본인의 부인을 인질로 보내겠다고 했던 그 미망인께서 아직 생존해 계십니다.

이 글은 그 시절 군인이 썼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정돈된 명문인데다 읽는 재미까지 있는 글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글이 갖는 의미는 4.3이후에 이 나라 극우들의 자양분이 되었던 ‘빨갱이 프레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밝힌 글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상황과 떼어놓을 수 없는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진실의길>은 김익렬 장군님의 회고록을 10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회고록을 제공해 주신 트위터리언 @Jin6148님께 감사드립니다.

 

 

 

24. 암살범의 군법회의

1948년 7월 말 박진경 대령 암살범인 주범 문상길 중위와 하수인 2명의 군법회의가 개최되었다. 장소는 지금은 남산도서관이 된 경비대 군기감 본부였다. 일제 때는 일본 신사(神社) 자리였다. 재판장은 이응준(李應俊) 대령, 범무사는 김완룡(金完龍) 소령이었다(이응준 대령은 초대 육군참모총장이며 김완룡 소령은 육군법무감을 역임하고 소장 예편함). 나는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하였다. 이 군법회의는 군인들과 그 관계자들만 참관‧방청할 수 있는 군법회의였으나 사건이 워낙 컸고 정치적인 성격도 띠어 연일 초만원이었다.

그러나 재판은 예상하였던 것보다 간단하게 끝났다. 검찰관의 심문에 범인들은 3인 모두 죄상 전부를 순순하게 인정하였으므로 재판은 1시간도 못되어 끝났다. 그들은 범행동기에 관하여 자기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다른 정치적 목적도 없었고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 군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민족반역자를 총살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이 군인의 임무라고 끝끝내 주장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사고를 저질러서 본의 아니게 김익렬 연대장에게 피해를 주어 죄송하다”고 사과하였다.

재판장 이응준 대령은 범인들에게 최후로 법정에서 진술할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범인들은 사전에 심적으로 서로 상의하여 두었던지 문상길 중위가 3인을 대표하여 “진술할 말은 별로 없으나 재판장 이하 전원과 김익렬 연대장에게 최후의 부탁이 하나 있으니 들어 주겠느냐”고 하였다. 재판장은 “들어줄 만한 말이면 들어줄 터이니 말하여 보라”고 하였다.

문상길 중위는 정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박진경 연대장님을 사살하였으나 본인 개인에 대해서는 대단히 죄송하게 여긴다”(처음으로 ‘연대장님’이라는 존칭어를 썼다. 그 전에는 줄곧 ‘민족반역자’라 하였다)고 말하고,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의 총애를 받은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 안다. 우리 3인에게 총살형의 선고를 내리는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이 법정의 성격상 당연히 총살형이 선고될 것이며 우리는 그 선고에 마음으로 복종하며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과 김연대장도 장차 노령하여지면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나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하여주기를 부탁한다”.

일순간 법정은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단상과 단하의 방청객 할 것 없이 전부가 안색이 굳어졌다. 이응준 대령은 창백한 안색을 짓고 한참 말없이 앉았더니 법정휴회를 선언했다. 재판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었다. 물론 전원 총살형이었다. 총살형은 수주일 후에 수색에서 집행되었다. 나는 임석하지 못하였으나 참관하였던 군인들의 말은 총살형 집행 당시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3인의 태도는 참으로 군인다웠다고 한다. 3인은 총살장에서도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이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최후에는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한 후 ‘양양한 앞 길을’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해괴한 것은 참관한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는 것이다. 하우스만 대위는 경비대 정보책임자로 박진경 대령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대령을 추천한 장본인이었다. 총살현장의 광경은 참관자들의 마음 속에 이렇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문인 신문기자 중에는 그 장면을 승화시켜 감상적인 기사를 써서 경찰의 주목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25. 김달삼의 사체검진

결과적으로 제주도민 수만의 생명을 앗아가게 만든 폭동의 두목 김달삼은 그 후 제주도를 탈출, 월북하여 해주(海州)에서 공산당에 입당하고 공산주의자의 영웅이 되었으며 그 후 다시 남파되어 태백산 지구 또는 지리산 지구 공산유격대 책임자로 활약하다가 6‧25직전에 태백산 지구에서 국군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전사(戰史)에는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주장에 회의적이다. 김달삼을 직접 상면한 자는 국군 현역장교 중에 나 한 사람뿐이다. 그래서 김달삼을 사살하였다는 현장마다 내가 가서 그 사체확인을 해야 했었다. 나는 7~8회에 걸쳐서 사체확인을 하였다. 그 중에는 공비들이 김달삼을 살해하여 투항했다는 경우도 있었고 김달삼 부대를 포위 전멸시키고 김달삼의 사체를 찾아냈다는 경우 등등 10여 회에 걸쳐 ‘사체 소동’이 있었다. 공식적인 검시만해도 7~8회가 된다.

그러나 내가 사체를 확인할 결과는 공명을 노린 부대장이나 정보관들이 꾸며낸 조작극이었으며 끝내 김달삼의 사체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김달삼은 제주도에서 사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김달삼에 대한 그 후의 여러 가지 영웅담은 공산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인 ‘가짜 김달삼’을 내세워 선전에 이용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진짜 김일성이가 따로 있음에도 김성주(金成柱)를 김일성이로 둔갑시켰듯이, 태백산 지리산 지구의 공비두목 김달삼도 여러 명의 ‘가짜 김달삼’이라고 보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김달삼의 사상성분 등에 관하여서는 불투명한 점이 많다. 그가 골수 공산주의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와의 담판때도 공산주의니, 사회주의니 등등의 용어는 여러차례 나왔으나 공산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노동대중이니 부르주아니 착취계급이니 하는 언사는 일언반구도 사용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사상을 논할 만큼 공산주의 이론에 밝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사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제주도민을 조직선동하여 폭동을 야기시켰다고는 보기 어렵다. 나와의 대화에서 그는 공산주의를 위해 도민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고 시종일관하여 폭동이 경찰이 도민재산을 불법 약탈하고 고문치사 강간 등을 자행하는데 항거하여 일으킨 자위수단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했었다. 거기에 군집한 폭도들도 같은 주장이었다.

설사 김달삼 일당이 공산주의자였다고 가정하더라도 폭동발생 초기의 상황에서는 공산주의 이론을 앞세워 폭도들에게 공감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제주도 대중의 지식수준으로 보아 공산주의 사상으로 폭도화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나는 김달삼이 유창한 서울 표준어를 사용했던 점이든지 도민의 생존과 자위 운운 했던 점 등으로 보아 김달삼은 제주도민의 전통적인 배타사상이 강한데다 객지생활에서 제주도 출신이라 하여 지방적인 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어 깊은 반감을 품게된 자가 아닌가 한다. 그 점에서 그는 대다수 도민과 폭도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본다.

또 김달삼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일제 때에 고등교육을 받은 자가 그 때까지 제주도에 잔류하여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제주도에서 성행하던 일본과의 밀무역에 관련된 자가 아닌가 한다. 김달삼과 동석하였던 나머지 폭도두목 대부분이 해풍에 그을고, 선원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자주 튀어나왔고, 당시 나포되어 있던 일본어선에 관한 성능과 일본까지 탈출하는데 필요한 연료의 소요량과 시간 등에 능통하였던 점 등이 나의 그런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폭도들과 면밀히 내통하던 자들 중에는 선주나 선원이 많았고, 이들은 발각되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쳐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나는 김달삼이 밀무역에 관계하다 쫓기는 몸이 되자 대의명분에 걸맞는 여러가지 근사한 정치적인 용어로 폭도들을 규합했던 게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김달삼의 본명은 李承晋. 日本 京都 城峯중학교와 東京 중앙대 예과를 다니다 학병을 기피 귀국, 부친이 살던 대구에서 8‧15해방을 맞았으며 46년 귀향, 大靜中에서 사회과 교사로 역사와 공민을 가르쳤고 남로당 대정면 조직책을 맡았음. 교편을 그만둔 뒤 47년 ‘3‧1사건’ 이후에는 남로당 도당간부로 활동했으며 4‧3발발 무렵에는 무장대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金을 밀무역 관련자로 본 필자의 견해는 주관적 체험에서 유추된 것으로 보인다 - 편집자).

26. ‘4‧3’에 대한 나의 소견

나는 제주도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경찰감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군정청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단순한 사건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 사건처리에 임하여 군정장관 딘 장군 이하 미국인들은 언어불통으로 정보를 오판해 결과적으로 우둔하기 짝이 없는 실책을 저질렀고, 자신들의 과실을 잘 알고 있던 경무부장 조병옥씨 이하 경찰은 사건해결 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까봐 진상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하였다. 거기에다 공명심에 눈이 어두운 박진경 대령까지 끼어들어 사건을 원인으로부터 살펴 풀어가려고 생각지 않고 각자가 사건처리와는 거리가 먼 자기의 목적달성에만 전념하다가 대폭동화한 것이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전부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폭동진압 책임자들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이민족이나 식민지 국민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토벌살상에만 주력을 한 것이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이나 군‧경 책임자들이 수만 명의 선량한 양민을 공산주의자와 구별없이 살해하고 자신의 보신과 공명만을 꾀한 것은 민족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후세 국민들은 이 기록을 보고 소수의 악인들이 저지른 죄가 수만명 국민의 불행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을 삼기 바란다.

제주도 4‧3사건에 관하여 사심없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역사에 기록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나는 이 글을 썼다. 이 사건에 관련되었던 자들 중에 사건의 내막을 소상히 알 수 있었던 자는 거의 전부가 제주도민에 대하여 크건 작건 범죄적 과실을 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죄상을 정직하게 역사에 기록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쓰여진 4‧3사건 기록을 훑어보면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당시 천하가 알다시피 민족적으로나 제주도민에 대하여 무죄하다. 오히려 도민들을 구출하려다 갖은 박해를 당한 사람이다. 또 사건을 정직하게 기록함으로써 이득이나 손해볼 것도 없다. 역사는 정직하게 사실 그대로를 전달해야만 후세에 참고가 되는 법이다. 허위조작된 것은 역사의 가치가 없다. 나는 이러한 정신에서 이 기록을 남긴다. 그런데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나의 무식의 소산이거나 교양부족에서 생긴 편견일 것이다.

특히 조병옥씨 일파의 죄상에 대하여 나의 규탄 질책이 지나치다고 꾸지람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고인이 된 이들의 죄상을 규탄하여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은 나의 자존심과 교양에 비추어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민족적 정의와 양심으로 도무지 용납될 수 없고 묵과할 수 없는 죄상들만 기록한 것이며 그들이 저지른 잘못은 내가 기록한 사실의 몇 배가 될 것이다.

나의 소감을 정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조병옥씨나 박진경 대령과 같은 군인은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고인의 죄상을 덮어두는 것이 인간적 예의라고 생각하나 침묵을 지키기에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나의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 <끝>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447&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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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 대량해고, 그리고 우리 안의 '비겁'과 마주하기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구조조정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부평의 어느 늙은 노동자 한 분이 천막으로 찾아왔습니다. 나 같이 늙은 노동자가 나가야 군산의 젊은 노동자들이 부평에 넘어올 수 있다면서, 오늘 사직서 쓰고 오는 길이라더군요. 힘내라면서 봉투를 주고 가셨습니다. 이건 아닙니다. 군산 살자고 늙은 노동자들 나가는 거 바라지 않습니다. 함께 살고 싶습니다."
 
지난 2월 23일, 부평역 광장이었다. 한국GM지부의 김재홍 군산지회장이 마이크를 잡고 이런 연설을 쏟아냈다. GM이 군산공장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한 지 꼭 열흘이 되는 날이었다. 당시 이 연설 내용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아주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사이드 경제>는 오늘 감히, 논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글을 써보려 한다. 
 
희망퇴직 = 사회적 비용 회피 노력 
 
구조조정 사업장에서 항상 인력 구조조정의 1단계로 활용되는 것은 '희망퇴직’이다. 정리해고 이전에 ‘해고 회피 노력’을 규정하고 있는 근로기준법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리해고로 직행할 경우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저항에 부딪히게 되어 자본 역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한다. 
 
그래서 자본은 희망퇴직 단계에서 최대한 많은 노동자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퇴직 위로금 몇 푼만 챙겨 스스로 걸어 나가도록 만든다. 정리해고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희망퇴직에 응하지 않으면 정리해고로 간다"는 협박을 극대화 하면서 말이다.
 
노사 합의로 희망퇴직을 시행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구조조정 사업장에서는 그런 사례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어느 사업장에서나 다양한 이유로 이직이나 퇴직을 준비하는 1~2%의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구조조정 사업장의 경우 자본가들은 이 정도 인력이 나가는 것으로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당연히 노사 합의는 불가능하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 자본이 일방적으로 희망퇴직 시행을 강행한다. 노동조합은 인위적 구조조정에 동의할 수 없기에 일방적 희망퇴직 실시에 강력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다. 대중조직을 책임져야 할 지도부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현장의 평범한 노동자들은 자본의 희망퇴직 강행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실 평조합원들은 복잡한 감정이 교차한다. 우선 노조를 무시한 일방통행이므로 당연히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구조조정을 온전히 막아낼 수 있을까? 솔직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 회사가 정말 정리해고까지 강행하면 어떻게 하지? 지금 결단을 하지 않으면 위로금도 못 받고 쫓겨나지는 않을까…. 
 

ⓒ연합뉴스

희망퇴직 과정에서 속삭이는 마음의 목소리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런 마음을 품게 된다. "만약 이번 희망퇴직에 많은 노동자들이 응한다면 정리해고 없이도 구조조정이 끝날 수 있지 않을까?" 이론적으로는 비슷하긴 하다. 자본은 인력 구조조정 목표를 정해놓는다. 이를테면 2009년 쌍용차의 경우 2646명이었다. 희망퇴직으로 1600여명이 나간 뒤에 정리해고 인원은 1000명으로 조정되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맞다 하더라도 결코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나 하나 살자고 어떻게 동료들에게 나가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런 생각은 가슴 속에만 묻어두고 다른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조용히 지켜보기 마련이다. 그러는 사이 이직이나 퇴직을 오래 전부터 고민해왔던 1~2%의 노동자들은 흔쾌히 희망퇴직원을 작성한다.
 
회사는 이를 빌미로 현장에 엄청나게 부풀려진 소문을 낸다. 누구 누가 나갔다더라, 이직한다는데 조건이 좋다더라, 퇴직 1~2년 남았으면 지금 나가는 게 금전적으로도 훨씬 이익이다 … 이러면서 노동자들의 가슴과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다른 때 같으면 대화도 별로 안하는 관리자들이 집까지 찾아오기도 하고, 술도 먹자고 하며, 갑자기 스킨십이 잦아진다.
 
사실 대부분의 구조조정 사업장에서 평범한 노동자들은 하루라도 희망퇴직을 고민하지 않은 이들이 없다. 아니, 이게 비단 평조합원들만의 얘기일까? 난다 긴다 하는 활동가들이나 간부들도 마찬가지이다. 한번쯤은 희망퇴직을 고민해봤을 것이다. 앞으로 닥쳐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용기와 기개를 갉아먹는다.
 
희망퇴직 결과에 대한 상반된 반응 
 
그렇다면 희망퇴직 결과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응은 어떻게 나올까? 예를 들어, 구조조정 목표치가 100%라고 했을 때 희망퇴직으로 60~70% 인원이 나간다면? 이론적으로는 정리해고를 해야 할 인원은 애초 100%에서 30~40%로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지금 한국GM이 겪고 있는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희망퇴직 한 번으로 무려 2,500명의 노동력이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정리해고를 비롯한 인위적 구조조정 숫자나 가능성은 줄어들었다고 느끼지 않을까? 아니다. GM은 이제 6000명 구조조정 설을 언론에 유포하며 불안과 공포를 더욱 조장한다. 
 
반대로 희망퇴직을 거의 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이론적으로는 회사의 구조조정 목표치, 즉 정리해고를 해야 할 인원이 거의 줄지 않게 된다. 그럼 노동자들은 더 불안을 느끼지 않을까? 회사는 거의 모든 인원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달려들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압도적 다수 조합원들이 노동조합 지침에 따라 희망퇴직에 응하지 않은 것이니 단결의 가능성을 훨씬 높게 보기 때문이다. 당장 손에 잡히는 전망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어깨 걸고 함께 일자리를 지키겠다고 결의한 동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회사의 반응은 어떨까? 희망퇴직을 거의 하지 않으면 그냥 정리해고로 가면 되니 아무 상관없는 것일까? 쌍용차에서 1000명이 아니라 2646명을 정리해고 하는 상황을 상정해보면 된다. 1000명 정리해고를 강행하는 것조차 노동자들과 거대한 전쟁을, 그리고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했다. 
 
결국 쌍용차는 거대한 전쟁을 치러야 했고, 노동자들의 거대한 저항과 시민들의 연대가 결합되어 정권과 자본은 정리해고를 100% 강행하지도 못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해고자 복직을 놓고 쌍용차는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지 않은가. 이 인원이 2배 이상으로 늘어난다면 회사 입장은 난처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한국GM에서 지난 2월에 희망퇴직원을 제출한 이들 대부분이 지난주 근무까지를 마지막으로 3월 31일자 퇴사 처리되었다. 이른바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한국에서, 정규직 노동자들도 퇴직 후엔 다시 전쟁터로 내몰린다. 얼마나 지옥같은, 불안한 삶이 펼쳐지겠는가? 벌써 2명의 희망퇴직자들이 퇴사하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했다.
 
남아 있는 이들에게도 미래의 불안함은 여전하다. 2500명이 희망퇴직으로 나갔지만 GM은 여전히 구조조정이 더 필요하단다. 심지어 지난달에는 희망퇴직·정리해고 절차가 더 필요하다는 둥, 노조가 더 양보하지 않으면 4월 20일에 부도 신청하겠다는 둥 협박의 강도를 더 높였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려 달라. 수치로, 명확한 근거로 말이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얘기를 해주면 당장 희망퇴직 쓸 테니까 말이다." 
 
수많은 동료들이 희망퇴직원을 작성했다. 매일같이 고민이다. 써야 되나, 말아야 되나?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묻기를 반복하다가 내린 결론이란다. 어느 사무직 조합원의 얘기이다.
 
그렇다. 나가는 이들도, 남는 이들도,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가는 이도, 남는 이도, 기분은 정말 더럽다. 우리들을 이렇게 만든 이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래, 바로 그들이다. 2500명을 절망퇴직의 길로 안내하고도 아직 부족하다며 추가 구조조정을 말하는 바로 당신들 말이다. 
 
부평 2공장에서 생산 중인 캡티바의 수명이 올해로 마지막이란다. 그래서 또 1교대 전환을 운운하고 있다. 창원공장에서 생산 중인 스파크, 그중에서 유럽 수출물량은 내년 상반기가 마지막이란다. 그렇지 않아도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는 중인데, 연말이 되면 이곳에서도 1교대 전환 얘기가 나올 게 뻔하다. 
 
군산공장에서도 똑같았다. 2014년 초에 주간조만 작업하고 야간조는 휴업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형태만 2교대지 사실상 1교대나 다름없었다. 당분간만 이렇게 가자고, 그렇게 본사에 우리 노력을 보여주면 나아지지 않겠냐고 했지만, 돌아온 것은 짭다운(생산량 축소)에 합의하고 비정규직을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비정규직을 내보내고 정상근무가 이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몇 달도 채 되지 않아 또다시 휴업이 늘어났다. 또다시 야간조만 휴업하는 사실상의 1교대가 시행되었고, 신차를 배정받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강요를 이기지 못해 1교대를 합의해 주었다. 또 비정규직이 내쫓겼다. 그 대가로 신차를 받았지만 1년 만에 공장 폐쇄 통보를 받았다. 이런 일이 다른 공장에서 벌어지지 않는다고 그 누가 장담하겠는가!
 
비정규직 우선해고가 벌어질 때에도 
 
구조조정이 벌어질 때 정규직을 향해서는 희망퇴직이 1단계이지만, 사실 사업장 전체로 보자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된다. 비정규직을 향해 계약해지·업체폐업 등의 공격이 벌어질 때, 정규직 노동자들의 마음 역시 매우 복잡하다.
 
비정규직 공격의 다음 차례가 정규직이라는 점이 분명하기에 회사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나서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나섰다가 나만 다치진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마찬가지로 내뱉기 힘든 마음을 품기도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먼저 나가면 그래도 정규직 고용은 탄탄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쫓겨나면 그게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위안이 되어줄까? 정반대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훨씬 강한 고용불안 심리에 빠져든다. 비정규직 해고에 한 번 눈감기 시작하면, 자본은 그걸 빌미삼아 한 번 더 눈감으라고 요구한다. 눈감지 않으면 정규직에게 직접 공격을 하겠다는 협박과 함께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 즉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똘똘 뭉쳐서 고용을 지켜낸다면 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회사가 비정규직을 내보내는데 실패했으니 이제 무조건 정규직을 공격하겠구나’ 이러면서 움츠려들까? 
 
이것 역시 정반대이다. 대다수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승리를 축하해준다.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우고 있기에 고용불안은 쉽게 날려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비겁과 연대 
 

▲ 김재홍 군산지회장. ⓒ오민규

부끄러워하거나 숨길 필요 없다.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걸출한 지도자부터 평범한 노동자들까지, 모두의 가슴 안에는 비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 위기의 신호가 울리면 비겁은 가슴 속에서 이렇게 떠든다. 희망퇴직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나가준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먼저 나가준다면~ 나만은 살 길이 열리지 않을까?
 
그런 비겁한 마음을 품으면 안 된다고, 노동자들끼리 연대해야 한다고, 공자님 말씀을 반복하면 상황이 나아질까? <인사이드 경제>는 정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다. 강철로 만들어진 심장을 가진 이가 아닌 이상, 저런 비겁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지 않은 노동자가 있을까? 그걸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대안이 되어야 한다. 
 
이런 부끄러운 마음을 어떻게 얘기할까? 아니다. 그런 마음을 그대만 품은 게 아니라 동료들 모두가 품고 있으니 두려워말자. 처음 얘기를 꺼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제대로 얘기를 해보시라. 동료들이 그대를 비난하지 않는다. "자네도 그랬는가, 나도 그랬는데…" 아마 모두가 똑같은 반응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비겁을 떨쳐내자고 얘기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똑같이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사실부터 먼저 솔직하게 말하자는 거다. 겁이 난다는 말을 동료들 앞에서 해버리면 오히려 겁이 사라진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경험해보자는 것.
 
2월 23일, 부평역에서 마이크를 잡은 김재홍 군산지회장의 연설에는 늙은 노동자 얘기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연설에 포함된 이 얘기야말로 그날 듣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우리 안의 비겁을 공개적으로 얘기할 때, 비로소 뜨거운 연대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1교대 전환하자고 할 때, 비정규직들에겐 참 미안한 얘기지만 눈 질끈 감았습니다. 결국 비정규직들이 쫓겨났어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나도 이렇게 제발 살려달라고 말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한때 세계 자동차산업을 쥐락펴락 하던 GM과의 힘겨운 싸움이다. 유럽과 남미의 각국 정부를 흔들며 협상을 벌여온 승부사들이다.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모두가 비겁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자각할 때, 거기서 각자의 부족을 채워주는 연대가 시작된다고 <인사이드 경제>는 확신한다. GM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노동자들의 자각과 연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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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남북미중 4자 대화? 그런 얘기 했을까 싶다"

문정인 "비핵화, 일괄 타결·순차 이행해야"... 청와대, 남북정상회담 정례화 가능성 열어둬

18.04.02 11:08l최종 업데이트 18.04.02 11:08l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자료사진).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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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하며 '남한·북한·미국·중국 등 4개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안했다는 보도에 대해 "그에 대한 정보가 없다"라면서도 "그간의 흐름이나 대화 진행속도에 비춰봤을 때 (시진핑 주석이) 그런 얘기를 했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2일 오전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말하며, 취재진이 '남·북·미 3자 정상회담에 대한 의지가 남·북·미·중 4자 정상회담보다 선행하나'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한반도 문제에 중국이 새로 개입하는 상황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남북미 정상회담을 고수하느냐'라는 질문에도 "남·북·미 정상회담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답했다. 종합하면 청와대의 의지는 '남한·북한·미국' 정상회담에 중점적으로 찍혀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1일 일본 교도통신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3월 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하며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개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복수의 미·중 외교 소식통을 인용한 보도였다(관련 기사: 교도통신 "시진핑, 트럼프에 남-북-미-중 평화협정 제의").

시 주석의 이런 제안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은 채 중국 측에 북한에 대한 압력 유지를 요청했다고 한다. 시 주석은 그 뒤 지난 3월 25~28일 방중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만나 회담했다.

문정인 "북한 비핵화, 일괄 타결·순차 이행해야"... 청와대 "학자적 소신·개인 의견"

4개국 간 평화협정 내용은 지난 2007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공동으로 발표한 10.4 정상선언에도 '종전선언'이라는 표현으로 언급돼 있다.

총 8개 항인 정상선언 중 4항에는 "현 정전체제를 종식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라는 내용이 있다.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특보는 지난 3월 31일 일본 도쿄 와세다대 강연 기조연설을 통해, 노 전 대통령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 당시 전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과 종전선언을 하는 데에 동의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7년 당시 남북 정상회담 때도 관련 내용이 언급됐고 당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4자 간 평화협정 체결에 동의했으나, 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주석이 답변을 주지 않아 '?자 또는 4자'라는 표현이 선언에 담기게 됐다는 게 문 특보의 설명이다.

문 특보는 이어 북한의 비핵화 관련해 "가장 좋은 것은 포괄적이고 일괄적인 타결로, 우리(한국) 정부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나 이를 주장할 것"이라면서도 "합의 이행은 순차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 "북한과 단계별로 주고받는 게 좋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문 특보의) 개인 의견"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청와대 핵심관계자도 "(문 특보가) 학자적 소신을 말한 것"이라며 "그에 대해 청와대가 일일이 코멘트 하진 않는다"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이 고위관계자는 문 특보가 "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1년에 두 번씩 남북 간 정상외교를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며 남북정상회담 정례화 가능성을 언급한 데 대해선 "북측과 협의는 안 됐다"라면서도 "여러 가지를 다 해볼 수 있다, 상대가 있으나 상대와 협의해본 뒤 결정되는 것"이라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한편 청와대는 앞서 한국 예술단의 '봄이 온다' 평양 공연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참석한 것과 관련해, "(남북 간 조율은) 없없다"라면서도 "좋은 일"이라고 평가했다. 이 고위관계자는 김 위원장의 공연 참석과 관련해 "김 위원장도 '(문 대통령이 북한 예술단 공연을 봤으니 자신이 남한 예술단 공연을 관람하는 게) 인지상정'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느냐"라며 "남북 화해와 대화를 진전시켜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관련 기사] 
김정은 위원장 "가을에 서울에서 공연하자"
평양에 울려퍼진 '봄'... 김정은-리설주 박수로 화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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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위원장 부부, 남측 예술단 단독공연 관람


김 위원장 "가을 공연 서울서 하자"...김영남.김여정도 동행
평양공연 공동취재단/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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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01  23: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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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일 동평양대극장에서 '봄이 온다'라는 주제로 열린 '남북평화협력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공연'에 참석, 손을 흔들고 있다. 오른쪽은 도종환 문체부 장관. [사진 - 공동취재단 방송 캡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1일 오후 6시 20분(서울시간 6시 50분)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북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공연'을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과 나란히 관람했다.

'봄이 온다'를 주제로 한 이날 공연은 오후 5시에 열릴 예정이었지만 북측이 7시로 늦춰달라고 요청했다가 다시 6시로 조정됐고, 실제로는 6시 20분에 개막됐다. 북측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람 편의”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참석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6시 20분께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고, 아나운서가 2층 귀빈석을 가리키며 직접 김정은 국무위원장 내외를 소개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조선로동당 제1부부장, 최휘 국가체육지도위원장,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 김창선 서기실장 등도 함께 했고, 도종환 문체부 장관과 김상균 국정원 2차장,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윤상 수석감독도 2층 귀빈석에 자리했다.

   
▲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도종환 문체부 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공동취재단 방송 캡처]

가수 서현의 사회로 백지영, 강산에, 윤도현밴드(YB), 레드벨벳, 최진희, 이선희,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등이 무대에 올랐고, 서현이 북측 노래 ‘푸른 버드나무’를 부르고, 조용필의 선창으로 ‘친구여’를 모든 공연자들이 부른 뒤 ‘다시 만납시다’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합창으로 2시간 공연이 마무리됐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공연을 관람하며 박수를 치기도 했고, 공연 후 출연진과 일일이 악수하며 격려하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한 출연진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은 공연이 끝나고 출연진을 격려하면서 “문화예술 공연을 자주 해야 한다”며 “남측이 ‘봄이 온다’라는 공연을 했으니, 가을엔 결실을 갖고 ‘가을이 왔다’라는 공연을 서울에서 하자”고 말했다. 아울러 “이런 자리가 얼마나 좋은지 문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고도 했다.

김 위원장은 “내가 레드벨벳 보러 올지 관심들이 많았는데 원래 모레 오려고 했는데 일정 조정해서 오늘 왔다”면서 “평양 시민들에게 이런 선물 고맙다. (부친인) 김정일 위원장에게 전하겠다”고 사례했다.

정부 고위관계자의 전언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북남이 함께하는 합동공연이 의의가 있을 수 있으나 순순한 남측 공연만 보는 것도 의미 있다”며 “문재인 대통령께서 합동공연 보셨는데 단독공연이라도 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는 2월 11일 평창동계올림픽 계기로 방남한 삼지연관현악단의 서울 공연을 김영남, 김여정 등 북측 고위급대표단과 함께 관람한 바 있다.

도종환 장관은 “남측 공연 중 노래와 가사에 대해 물어보는 등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전했다.

   
▲ 공연 직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도종환 장관과 악수를 나누며 사의를 표하고 있다. 왼쪽에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등이 보인다. [사진 - 공동취재단 방송 캡처]
   
▲ 공연 직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도종환 장관과 악수를 나누며 사의를 표하고 있다. 왼쪽에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등이 보인다. [사진 - 공동취재단 방송 캡처]

‘위대한 탄생’의 한 멤버는 “2층에 위원장님 계신다고 아나운서가 말하더라”며 “리설주 여사는 앉아있고 위원장은 박수를 막 쳤다”고 전했다. 아울러 “관객 분위기는 아주 감격적으로 반응해줬다”며 “그분이 와계시니까 무게가..(실렸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동평양대극장은 경계가 삼엄했고, 남측 기자들은 카메라 기자 1명 외에는 북측의 차단으로 공연장에 입장하지 못했다.


​(추가,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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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유엔 헌장 정신을 구현하라 ②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4/01 13:21
  • 수정일
    2018/04/01 13:2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대화를 통한 해결의 의의와 그 가능성
 
김종익 | 2018-04-01 08:18:2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 글은, 북한 핵 문제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합니다. 북한이 왜 핵 개발에 목을 매고 있는지, 그런 북한의 의도가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를 알게 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청일 전쟁, 한국 전쟁, 북한 핵 개발 이후, 한반도는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또 하나의 고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고비를 제대로 이해하고, 슬기롭게 넘어가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감춰진 ‘역사’를 보는 느낌입니다. 이 번역글은 분량이 길어 3편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 역자 주

우메바야시 히로미치梅林宏道
1937년생. 도쿄대학 수물리계數物理系 박사(磁性물리학). 태평양 군비 철폐 운동 결성 및 대표 취임. 저서로는 『저항의 과학 기술』(1982년), 『재일 미군』(2002년), 『미군 재편 - 그 목적은』(2006년) 등이 있다.


역사를 날조하는 여론 형성

북한은 예사로 거짓말을 하는 국가이며, 교섭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호소한 지난해 9월의 아베 수상의 유엔 총회 연설은, 안보리 결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연설 자체의 내용에서도 엄격하게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가 통감하는 것은,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북한은 핵, 미사일 개발을, 단념할 의도 따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화란, 오히려 북한에게는 우리를 기만하고 시간을 벌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습니다.”(2017년 9월 2일, 아베 수상 유엔 총회 일반 연설)

이렇게 단언한 아베 수상의 연설은, 어떠한 史實로 입증되고 있는 것일까. 한반도와 겨우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직접적인 당사국,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인 일본이라는 국가의 수상이 국민을 대표해 행한 이 연설은, 나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심사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것은 역선전Demagogie에 의한 선동이 아닐까. 

아베 수상이 증거로 내건 것은 두 가지 ‘史實’이었다. 하나는, 1994년의 북미 제네바 합의, 다음해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설립부터 2002년에 KEDO가 기능을 정지하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또 하나는, 6자 회담이 2005년 9월 19일에 한반도의 비핵화에 합의한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그 실시 단계로 걸음을 내딛고, 북한이 핵 실험을 반복해 2009년 6자 회담에서 탈퇴하기에 이른 과정이다.

먼저 KEDO 프로세스부터 생각해 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북미 합의를 유린하고, 이 프로세스를 붕괴시킨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다. 게다가 이 역사는 미국에서 케케묵은 이야기에 속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논쟁이 이루어져 온 것이며, 미국 공화당의 보수 강경파가 우라늄 농축 문제를, KEDO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용한 것이 사건의 본질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일본 수상이 유엔 총회에서, 새로운 정보도 아닌, 북한을 계략에 빠뜨리기 위해 들고 나오기에는 부끄러울 정도의 화제였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얄궂게도 아베 수상의 유엔 총회 연설 3일 후, 미국의 『The Nation』지에, 저명한 저널리스트 팀 쇼락Tim Shorrock이 KEDO 붕괴의 역사를 검증한 장문의 기사를 쓰고 있다. 이하는 다양한 문헌, 자료에 기초한 내가 요약한 KEDO 붕괴의 역사이다.

KEDO 프로세스는, KEDO가 북한에 2기의 경수로를 제공하고, 그 가동에까지 연결되는 重油를 제공하는 한편, 북한이 그때까지의 플루토늄 生産爐였던 黑鉛爐와 건설 중인 2기의 대형 흑연로 계획 등 관련 활동을 모두 동결하고, NPT에 잔류하는 것과 함께 IAEA 감시하에 둔다. 또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사용, 사용 위협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한다고 한 내용의 합의였다.

이 과정은, 북한의 스파이 잠수함 좌초 사건, 金昌里 지하 핵 시설 의혹 사건, 북한의 대포동 발사, 회의의 저항에 따른 미국의 중유 공급 정체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거의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 클라이맥스는 2000년 가을, 클린턴 정권 말기에 찾아왔다. 10월, 북한 권력 서열 2위인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회담했다. 거기에서 양국 관계의 개선 원칙에 대해 “상호 적의를 갖지 않는다”고 하는 획기적인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새로운 관계로 나가는) 중요한 첫걸음으로, 양국은 어느 쪽 정부도 상대에 대해 적대적 의도를 갖지 않는다고 말하고, 과거의 적의에서 자유로워진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앞으로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고 서약했다. …양국은 불신을 없애고 상호 신뢰를 구축해 중요한 불안 사항을 건설적으로 협의할 수 있는 분위기를 유지하도록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이것과 관련해 양국의 관계는, 상호 상대의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 원칙에 기반을 둔 것임을 재확인했다…”

10일 후에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답례 방문했다. 올브라이트는 회고록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인상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뭔가를 아는 총명한 남자” “고립되어 있었지만 정보통이다. 나라가 비참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고 고뇌도 보이지 않는, 자신에 차 있어 보였다”고 회고했다.

이 시기, 핵 문제만이 아니라 KEDO 프로세스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미사일 문제도 집중해 협의가 지속되었다. 클린턴 대통령 특별보좌관이었던 웬디 셔먼은 퇴임 후 곧바로 뉴욕 타임스에 「미사일 협의도 합의에 접근했다」는 제목의 글을 게재한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패하고 부시(아들) 정권이 탄생한 시점에서도, 클린턴 정권이 달성한 북미 관계의 도달점은 차기 정권으로 인계될 예정이었다. 부시 정권의 첫 국무장관이 된 콜린 파웰은 2001년 1월 상원에서의 인증 공청회에서 그 방침을 진술했다. 

그러나 체니 부통령, 럼스펠트 국무장관 이하 모든 네오콘 세력은, 강경한 북한 적대 정책을 주장하고, 그 영향은 노골적으로 표면화해 갔다. 먼저 2001년 말에 의회에 제출된 「핵 태세의 재검토(NPR)」는, 북한과 이란을 “만성적인 군사적 불안”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거나 숨겨 주거나 하며, 대량 파괴 무기 및 미사일 계획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고 지명하며 핵 공격 대상임을 시사했다. 이것을 안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발표해 “미국은 8년간 준수되어 온 양국의 합의를 깔아뭉갰다”고 비판했다.

“상호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2002년 1월 말에 이루어진 부시 대통령의 연두교서 연설에서, 더욱 공공연하게 깨졌다. 주지하듯이 연설은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부르며, “북한은 국민을 굶주리게 하면서 미사일과 대량 파괴 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정권”이라고 평했다. 다짐이라도 하듯이, 3월에는 서울을 방문해 “인민을 해방하지 않는 한, 저 남자, 김정일에 대한 생각은 변함없다”고 적의를 드러냈다. KEDO의 이행을 통해 도달한 관계 개선이라는 북미 합의는, 이렇게 하여 미국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었다.


우라늄 농축 문제의 진상

여기까지의 경과에 의해 우라늄 농축 문제를 꺼낼 필요도 없이, 미국 정권이 이데올로기적으로 KEDO 과정을 파괴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후, 부시 정권은 미국 정보기관이 입수한 우라늄 농축 계획에 관한 정보를 이용해, 북한의 합의 위반을 국제적으로 선전, 일본, 한국을 끌어들이면서 KEDO를 완전하게 매장했다.

당시 미국이 입수한 북한의 우라늄 농축에 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수준의 것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뭔가 시험적인 연구가 행해지고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당시는, KEDO가 제공하는 경수로는 아직 콘크리트 다지기가 막 시작된 단계이며, 원자로의 노심 반입 단계로 과거의 활동을 포함한 검증이 시작되는 긴 여정의 초반에 불과했었다.

북한이 핵무기 계획을 포기한 후를 예측한 NPT가 허용하고 있는 원자력에 관한 기초 능력 유지를 고려하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혹은 협상 소재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기초 기술 확보를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긴 역사를 가진 상호 불신을 불식시키면서 관계 개선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우라늄 농축 의혹에 관한 해명은, 미국 입장에서도 북한 입장에서도 극복해야 할 외교 과제로 파악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002년 10월, 국무 차관보 제임스 켈리가 평양을 방문해 우라늄 농축 문제를 북한에 내밀었을 때, 그에게는 어떠한 외교도 허용되지 않는 제한이 걸려 있었다. 당시 안전 보장 문제의 대통령 보좌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조차 회고록 속에서 우라늄 농축 문제를 외교 문제로 삼지 않았던 부시 정권의 사정을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짐(켈리 국무 차관보)에 대한 지시가 매우 융통성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것이 우라늄 농축 계획을 테이블에 올리는 단서가 될 것인가, 그것을 충분히 탐색할 수 없었다. 그는 상황을 워싱턴에 타전했다. 그것은 바로 누설되었다. 나로서는, 어떠한 교섭의 길도 끊어 버리는 강경파가 전보를 누설한 것이 뻔히 보였다. 북한이 분노해서 모든 것을 백지로 돌렸기 때문에, 강경파는 성공했다.”

당시의 일본 신문은, 북한이 비밀 우라늄 농축 계획을 인정했다는 큰 제목으로 도배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당사자들의 증언을 모두 읽어도, 북한은 우라늄 농축 계획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 대표단은 북한의 책임자였던 강석주 제1외무 차관과의 회담 후, 그의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협의했다. 그 결과, 우라늄 농축 계획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라고 미국은 해석했다. 실제 중요한 것은, 강석주는 이 건에 대해 “서로 의논해 가자”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앞으로도 염두에 두어야 할, 북한 외교의 특징에 관한 중요한 교훈이 시사되고 있다. 북한은, 상대국이 강하게 집착하는 문제를 재료로 삼으면서 자국에 유리한 교섭 결과를 끌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는 냉정한 교섭자라는 점이다. 당시 미국이 KEDO 프로세스를 유지하면서 우라늄 농축 문제를 협의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북한은 핵무기 개발로 나가는 利點을 찾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


한반도에서 유엔 헌장 정신을 구현하라 ①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1001&table=ji_kim&uid=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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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남 북 문화상 "형제끼리 마주앉은 것 같다"

평양 공연단, 고려호텔 도착...예술단, 공연 리허설
평양공연 공동취재단/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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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31  23: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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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일 김포공항을 출발해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남측 공연단 대표들이 공항 귀빈실에서 환영나온 북측 대표들과 마주앉았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앞으로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서 통일의 새 장을 써나가는 데서 한번 우리가 기수가 되고, 힘을 합쳐봅시다. 그러면 못해 낼 일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술단과 태권도 시범단을 이끌고 31일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맞이한 박춘남 북한 문화상은 “형제끼리 마주앉은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오전 10시 33분 이스트항공 ZE2815편으로 김포공항을 이륙한 예술단과 태권도 시범단 본진 120명은 한 시간 만에 평양국제공항에 착륙해 북한 땅을 밟았다.

단장을 맡은 도종환 장관과 부단장 김상균 국가정보원 2차장,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윤상 수석감독은 공항 귀빈실로 이동해 북측 박춘남 문화상, 현송월 단장, 김순호 부단장의 환영을 받았다.

   
▲ 평양 공연단 단장인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오른쪽)이 환영나온 박춘남 북한 문화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윤상 수석감독(왼쪽)이 북측 현송월 모란봉관현악단 단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실무회담 남북 대표로 만난 바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측 모란봉관현악단을 이끌고 왔던 현송월 단장은 “반갑다. 평양에 오니 우리가 기대가 크다. 유명한 가수들도 많이 오고, 성의껏 준비해 오니 기대가 크다”며 “빨리 만났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반겼다.

도종환 장관은 “꽃이 피었냐”고 묻고 “우리가 공연을 통해 만나면서 남북의 교류와 화해와 평화의 꽃도 활짝 피게 되길 바라겠다”고 인사했다.

박춘남 문화상은 남북정상회담 계획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중국 방문 등을 거론하며 “세계의 이목이 지금 평양으로 쏠리고 이런 때 또 한핏줄 한겨레인 도 선생 일행이 직접 예술단을 인솔하시고 평양에 왔으니까 정말 기회가 왔고 아주 도 선생은 행운이 깃든 분”이라며 “얼마나 좋냐”고 화답했다.

평양 공연단 일행은 려명거리와 김일성광장 등을 거쳐 숙소인 고려호텔에 도착해 점심식사를 마친 뒤 예술단은 다음날 공연을 위해 동평양대극장에 리허설을 하러 갔다.

   
▲ 가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해, 2005년 공연 당시 안내원을 다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16년만에 다시 평양을 찾은 가수 윤도현 씨는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2002년 MBC 평양 공연 이후 16년 만에 다시 평양을 찾은 가수 윤도현 씨는 “가슴이 벅차다”며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제일 크다. 16년 전과 지금 관객 반응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가장 궁금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2003년 처음으로 육로로 방북해 공연했던 가수 이선희 씨는 “다들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남측 공항에서 오히려 더 긴장을 했던 것 같다. 지금 긴장이 풀렸다”며 “잘하고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환대에 감사를 표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멤버들은 2005년 단독 공연 때 안내원을 다시 만나 반갑게 대화를 나눴고, 기타리스트 최희선 씨는 안내원에게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날 도착한 공연단 본진 120명을 포함해 방북단은 총 186명이고, 대표단 4명, 가수 11개 팀 총 25명, 태권도 시범단 22명, 정부지원단 17명, 기자단 10명 등으로 구성됐다.

   
▲ 고려호텔에서 내려다 본 평양 거리 풍경.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오랜 만에 남측 기자들의 카메라에 담긴 평양 사람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오랜만에 남측 취재진이 확인한 평양거리는 차량이 많지 않았고, 일반 승용차보다 택시가 더 많았다. 또한 평양국제공항에서 평양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계속혁신, 계속전진’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중의 뜻을 이어받자는 내용의 선전문구들도 눈에 띄었다.

‘봄이 온다’를 주제로 진행되는 ‘남북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공연’은 4월 1일 오후 5시(이하 평양시간) 동평양대극장에서 단독공연으로, 3일 오후 4시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남북 합동공연으로 펼쳐진다.

태권도 시범단은 4월 1일 평양 태권도전당에서 단독공연을, 2일 평양대극장에서 남북 합동공연을 갖는다.
 

   
▲ 걸그룸 레드벨벳이 고려호텔 직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숙소인 고려호텔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남측 공연단이 북측 언론의 요청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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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미디어 제국 징검다리는 중앙일보

[삼성 연재기고 (12)] CJ그룹과 지분 공유 삼성 출신, 중앙일보 의사결정 과정 참여 외국자본과 적극 협조

김춘효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편집위원 media@mediatoday.co.kr  2018년 04월 01일 일요일

한국 경제의 최대 권력이 삼성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한국 미디어의 최대 권력은 누구에게 있는가? 저자는 이건희로 대표되는 삼성 오너 일가라고 단언한다. 삼성은 한국 최대의 미디어 집단을 소유하고 있다. 삼성은 광고, 협찬 등으로 한국 언론에 가장 많은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의 미디어 통제력은 이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나온다. 삼성의 미디어 권력은 근본적으로 미디어를 둘러싼 제도 장악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일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삼성의 성장史, 삼성의 미디어 진출 역사, 이병철의 제국 통치 방식, 삼성家와 한국 파워 엘리트, 이건희의 범 삼성家 확장, 삼성 미디어 제국,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한국 미디어 (신문, 유료방송, 광고, 영화) 시장 구조와 삼성의 미디어 검열 영향력 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삼성 권력은 자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한국 미디어의 구조 장악에서 나온다.

한국 사회에 대한 삼성의 지배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삼성의 경제력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력의 뿌리가 되는 미디어 통제력을 정밀 분석할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분명해진다. 

이에 저자는 미디어오늘·자유언론실천재단과 함께 한국 미디어 통제 체제와 나아가 한국 사회 지배 체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삼성의 한국 미디어 통제에 대한 심층 연구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 편집자주 

목차는 다음과 같다. 

(01) 왜 삼성미디어 정치경제학인가 
(02) 삼성 제국과 내부 통제 라인 
(03) 이병철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한국 파워 엘리트 
(04) 한국 매스컴 속의 삼성 미디어史 
(05) 금융 자유화와 이건희의 범 삼성계 
(06) 누가 한국 신문 시장을 지배하는가 
(07) 누가 한국 광고 시장을 통제하는가 
(08) 누가 한국 영화 시장을 지배하는가 
(09) 누가 한국 유료 방송 시장을 통제하는가 
(10) 삼성 그룹의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11) CJ 그룹의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12) 중앙일보 그룹의 소유 구조와 이사회 
(13)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과 2005년 X-파일 
(14) 범 삼성가의 미디어 검열 방식 
(15) 누가 미디어 자유화의 최대 수혜자인가 
(16) 삼성 없는 한국 미디어를 위하여 

 

[ 미디어오늘 Beta Site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삼성과 대한민국 미디어 ]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8·15 해방직후 신문사를 경영 한 적이 있다. 당시 대구지역 사업가들의 친목단체 ‘을유회’ 소속이었던 이병철은 경영난에 봉착한 ‘조선민보’를 인수했다 (삼성비서실, 1988년 215쪽). 하지만 그는 이 신문사를 오랫동안 경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업적인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이병철은 사업 본거지를 대구에서 서울로 옮겼다. 효성 창업자인 조홍제와 엘지 창업자인 구인회와 공동으로 ‘삼성물산’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뛰어들면서 언론사와의 인연은 멀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1963년 이병철은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을 포함하는 언론사업 진출 의사를 밝혔다. 그는 언론사업 청사진을 이승만 정권 때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와 함께 그렸다. 그 결과 1964년 5월 ‘라디오 서울’을 개국했고 같은 해 12월 동양방송국(TBC)을 개국했다. 삼성은 1년 뒤인 1965년에 중앙일보를 창간했다. 사실 이병철은 1961년 중앙일보 창간을 위해 삼성 비서실에 신문창간 기획안 마련을 지시했다. 그는 특히 중앙일보 창간에 앞서 일본 3대 신문사인 아사히·마이니치·요미우리 신문사를 직접 방문하고 경영과 편집시설 등 신문제작 전반을 시찰한 후 중앙일보를 창간했다(삼성비서실, 1988년 225~226쪽). 중앙일보 창간 당시 이병철은 대표이사직을 홍진기는 부사장직, 이병철의 둘째아들인 이창희는 이사직을 갖고 경영에 참여했다. 중앙일보는 이렇게 ‘이병철-홍진기’ 통제 아래 종합 일간지로서 성장해갔다.

 

▲ 1965년 9월22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립자가 중앙일보 창간호를 보고 있다. 사진=이병철 자서전 호암자전
▲ 1965년 9월22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립자가 중앙일보 창간호를 보고 있다. 사진=이병철 자서전 호암자전
 
중앙일보는 사실 이병철 삼성 그룹의 중핵기업이다. 오너 일가가 직접 소유지분을 갖고 있고 경영에도 직접 참여한다. 이병철 셋째아들이자 홍진기 사위인 이건희는 1970년 초반부터 중앙일보 경영에도 참여했다. 이건희 부인인 홍라희는 1980년 초반까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에서 미술 등 문화관련 기사를 작성했다. 특히 홍라희 큰 동생인 홍석현이 1994년부터 중앙일보 경영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홍석현이 명실공히 중앙일보 최대 실력자가 된 것은 그 후 5년이 지난 1999년, 삼성그룹에서 분리하면서 부터다. 삼성그룹을 이어받은 이건희가 그의 형제와 삼성 중핵기업들이 갖고 있는 중앙일보 지분을 홍석현 등 홍씨 일가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이는 중앙일보 통제라인이 ‘이병철-홍진기’에서 ‘이건희-홍석현’으로 전환됐다는 걸 의미한다. 즉 중앙일보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가문과 정치 엘리트인 홍진기 가문이 창간 단계에서부터 공동 기획·운영한 가족 미디어 기업이다. 그 전통은 2018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9년, 불안한 중앙일보 독립 

중앙일보는 1965년 창간 이후 2000년대 복합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표1’에서 보듯 중앙일보가 관여하는 미디어 사업은 종합일간지 등을 포함하는 인쇄매체, 종합편성 케이블방송 등의 방송, 영화 투자와 제작 등의 영상 매체 그리고 광고 제작과 유통 등이다. 

 

▲ 표1) 중앙일보 연혁
▲ 표1) 중앙일보 연혁
 
중앙일보는 이병철과 홍진기의 통제 아래에 있던 1987년까지는 신문과 방송 사업에 집중했다. 하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신문과 방송 겸업을 금지하면서 방송 사업은 접어야했다. 그 뒤 이병철과 홍진기는 신문 등 인쇄사업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이건희가 삼성그룹을 인수 한 다음 중앙일보는 1996년 일본 다국적 광고회사인 덴츠와 50:50 지분으로 종합 광고대행사인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해 한국 10대 광고대행사로 성장시켰다. 그 뒤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부상한 1999년 이후 중앙일보는 인쇄매체뿐만 아니라 드라마 제작 등 영상 제작과 유통 그리고 영화관 사업까지 확장했다. 2005년 중앙일보 계열사는 79개에 달했다. 그 뒤 중앙일보가 광고회사와 반도체 장치 그리고 리조트와 편의점 사업 등을 묶어 보광그룹으로 분할하면서 중앙일보 계열사 숫자는 40개 내외로 줄었다.

 

중앙일보는 1999년 4월 삼성그룹으로부터 몇개의 반도체와 LCD 제작 기업, 제2금융기업, 편의점, 레저 스포츠, 광고와 케이블 등 미디어 사업 등을 넘겨받았다. 사업을 넘겨받음과 동시에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표2’에서 보듯 홍석현은 1998년 중앙일보 최대주주였지만 중앙일보를 혼자서 경영할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갖고 있는 지분을 제외할 경우 삼성 총수인 이건희와 그의 통제 아래에 있는 범 삼성가의 지분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홍석현은 중앙일보를 CJ그룹 계열사와 2010년까지 공동 소유하고 있다. 유민재단은 그의 부친인 홍진기를 기념하는 재단이다. 특이하게도 2016년 지분에서 보듯 중앙미디어네트워크가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홍석현 지분보다 더 많다. 이 회사는 2011년 중앙일보 유상증자를 통해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한 중앙일보 미디어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다.

 

▲ 표2) 중앙일보 대주주 변동
▲ 표2) 중앙일보 대주주 변동
 
하지만 1999년은 중앙일보에게 있어 가혹했다. 홍석현 중앙일보 최대주주가 탈세 혐의로 구속됐기 때문이다. 중앙일보가 삼성에서 분리될 당시 증여세와 법인세 등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백병규, 1999년 77쪽). 세금 탈루 혐의에 연관 된 기업들은 지난 1983년 홍진기가 설립한 텔레비전브라운관 부품업체와 반도체 장비기업들, 종합 레저시설, 1990년 일본 세이유 그룹과 제휴해 설립한 ‘훼밀리 마트’ 등이었다. 최대주주의 구속은 중앙일보에게 있어 최대 위기였다. 오너가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는 재벌의 경영방식에 비춰보면 오너의 부재는 통제라인 부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 중앙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중앙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홍석현은 구속에서 풀려난 뒤 중앙일보를 제외한 광고와 반도체 제조, 리조트, 편의점, 금융사업을 묶어 그의 형제들에게 사업을 분리해 줬다. 그 기업의 이름이 보광그룹이다. 중앙일보 그룹이 2005년을 두 개의 재벌기업으로 분할했다.

 

기업사냥, 중앙미디어 제국 발판  

 

홍석현은 구속에서 풀려난 이후 중앙일보를 복합 미디어 제국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 지분을 투자했다. ‘표3’에서 보듯, 중앙일보는 무료 신문사업, 방송 제작업, 영상 투자사업, 경제 신문, 연극과 뮤지컬 등 공연 투자사업, 종합편성채널 획득, 온라인 신문 등에 지속적으로 투자했다. 이들 투자기업들은 중앙일보가 영상 사업 분야로 진출하는데 교두보 역할을 한다. 

▲ 표3) 중앙일보 주요 타법인 출자 시기
▲ 표3) 중앙일보 주요 타법인 출자 시기
 
중앙일보도 CJ 그룹처럼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미디어 제국을 완성해 갔다. 이는 금융자유화 이후 재벌들이 미디어 사업 확장을 위해 사용한 ‘우회상장’ 기법과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우회상장이란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장된 중소기업을 인수한 다음 사업 내용에 미디어 사업을 추가하고 이름을 바꿔 재상장하는 수법을 말한다. 신주인수권부사채(BW:bond with warrant)는 새로운 주식 발행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된 신 금융기법이다. 하지만 재벌 오너들이 세금을 적게 내고 그룹을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다. 이건희 회장은 이재용 등 그의 자녀들에게 그룹을 상속하기 위해 삼성에버랜드와 삼성 SDS 그리고 제일기획 등 중핵기업을 상속 통로로 활용했다.

 

중앙일보는 계열사인 제이콘텐트리에서 우회상장과 BW 기법을 활용했다. 사실 중앙일보가 이 기업을 인수할 당시 이름은 일간스포츠였다. 이 신문은 사실 종합일간지 시장에서 중앙일보 경쟁사였던 한국일보가 소유한 스포츠와 연예소식을 주로 보도하는 대중지였다. 하지만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경영이 악화된 한국일보는 피혁제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상장사인 한길무역 지분을 획득한 다음 회사이름을 일간스포츠로 변경했다. 그뒤 사정은 ‘표4’에서 보듯, 이 회사 이름은 일간스포츠-아이에스플러스코프-제이콘텐트리로 개명했다.  

 

▲ 표4) 제이콘텐트리 연혁
▲ 표4) 제이콘텐트리 연혁
 
‘표5’에서 보듯, 이름이 변할 때마다 최대주주가 바뀌었다. 이 회사는 2001년에는 한국일보 소유였다. 2003년에는 한국일보사, 중앙일보사 그리고 매일경제신문가 공동소유했다. 그 당시 이름은 일간스포츠였다. 중앙일보사는 2007년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1년 뒤인 2008년 회사이름이 아이에스플러스코프 개명했다. 그뒤 중앙일보가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로 지정하면서 다시 이름을 제이콘텐트리로 바꿨다.

 

 

▲ 표5) 제이콘텐트리 대주주 변동 현황
▲ 표5) 제이콘텐트리 대주주 변동 현황
 

‘표6’에서 보듯, 중앙일보는 최대주주로 확정된 2005년 이후 영상과 영화 그리고 공연관련 사업으로 투자를 늘리고 있다. 대주주 변동이 있었던 2000년 초반 이 기업은 미디어 기업을 확대하지 않았다. 피혁회사가 소유할 당시에는 미디어 투자 기업이 아예 없다.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그리고 매일경제신문이 공동으로 이 기업을 소유할 당시에는 아예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상장된 중소기업이 미디어 투기 자본의 돈놀이터임을 암시한다.  

 

 

▲ 표6) 제이콘텐트리 타 미디어법인 출자
▲ 표6) 제이콘텐트리 타 미디어법인 출자
 
중앙일보는 제이콘텐트리를 영화 상영관 사업 확장 통로로 활용했다. 이 회사는 2007년 중소형 독립 영화 상영관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씨너스를 인수한 다음 영화 상영관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2010년 씨너스는 한국 3대 영화 상영관인 매가박스 지분을 인수하기 시작해 2012년 완결했다.

 

 

▲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 사진=중앙일보 제공
▲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 사진=중앙일보 제공
 
또한 홍석현의 중앙일보는 한국에 진출한 외국기업들과 협력해 미디어 사업을 확장했다. 휘닉스커뮤니케이션과 터너브로드캐스팅 그리고 팍스스포츠 채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전자는 직접적으로 외국 기업들과 지분을 공동투자하고 이사회 의사를 공유하지만 후자는 느슨한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중앙일보의 선택적 사항이기 보단 외국 자본의 속성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 미디어 시장에 진출해 있는 외국인들은 광고시장을 제외하곤 한국 시장에 자본을 투자하기보다 국내 파트너와 사업적 협력만을 유지하고 있다.

 

 

‘표7’에서 보듯,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은 한국 광고시장이 완전 개방된 1996년 설립된 이후 2003년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그 뒤 지속적으로 다국적 기업들과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휘닉스가 협력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은 광고를 대행보단 광고 제작에 더 치중해 있다. 오프라인 매체보다는 온라인과 모바일 광고에 집중하고 있다.

 

 

▲ 표7)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연혁
▲ 표7)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연혁
 

 

‘표8’에서 보듯, 다국적 기업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은 2014년 소유지분을 다른 기업에게 매각했다. 회사를 설립할 당시부터 유지하고 있던 동일 지분 비율이 2013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홍석규가 2014년까지 지분을 보유했다. 그 이후 그의 지분은 보이지 않는다.  

 

▲ 표8) 대주주 변동 현황
▲ 표8) 대주주 변동 현황
 
중앙일보는 삼성과 무관한가?

지금까지 중앙일보의 미디어 사업 확장 현황과 주요기업의 소유구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중앙일보는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홍석현이 소유지분과 경영권한 행사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2012년 이후 중앙일보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가 등장하면서 홍의 권한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왜냐하면 이 지주회사에 대한 정보가 베일에 쌓여있기 때문이다. 2016년 중앙일보 그룹의 소유권을 분석해 보면 신문과 잡지 등 인쇄 매체를 총괄하는 중앙일보(32.86%), 영화 제작과 영화관사업을 통제하는 제이콘텐트리(21.39%), 방송사업을 총괄하는 JTBC(21.39%), 온라인 미디어 선두기업인 조인스(100.0%), 미디어 서비스를 책임지는 중앙판교개발(72.82%)가 최대주주이다. 즉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에 대한 지분 정보는 공개돼 있지 않다. 

 

▲ 2016년 중앙일보 통제 라인. 그래픽=안혜나 기자
▲ 2016년 중앙일보 통제 라인. 그래픽=안혜나 기자
 
사실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는 2008년 중앙일보가 영어신문과 정기간행물을 발행하기 위해 중앙일보가 설립한 자회사다. 그런데 2010년 중앙일보사가 자산 약 6547억 원과 부채 5583억 원을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에 넘긴다. 그리고 2011년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이때 중앙일보와 CJ의 지분이 일부 줄어들었는데 그 뒤 2012년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가 최대주주로 등극한다. 1995년 삼성에버랜드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2011년 중앙일보에서도 일어났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중앙일보는 홍씨 가문의 것인가라는 점이다. 서류상으로는 홍석현과 CJ그룹이 공동소유하고 있다. CJ그룹은 이재현이 통제한다. 그러므로 중앙일보는 홍석현과 이재현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최대주주는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다. 홍석현과 이재현의 공조관계는 케이블 방송 회사인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와 ‘에이스토리’에서도 발견된다. 홍석현은 오리온시네마네크워크 지분을 2012년 매각했다. 이로인해 CJ와 사업적 협력관계가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013년 에이스토리 감사보고서를 살펴보면 양쪽 집안의 협력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2013년 지분 비율을 보면 중앙일보(8.32%)와 제이콘텐트리(8.32%) 그리고 CJ E&M(16.64%)이다. 2015년에는 2013년 지분에 보광 18호 콘텐츠조합(3.4%)과 보광 20호 청년창업투자조합(3.4%) 등이 더해진다. 즉 중앙일보와 CJ는 여전히 미디어 사업 협력자이다. 

 

▲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이 중앙일보 윤전기를 시찰하고 있다. 이병철 선대 회장(사진 오른쪽),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사진 왼쪽), 이건희 회장(이병철 회장 뒤), 이재용 사장(사진 가운데). 사진=삼성그룹
▲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이 중앙일보 윤전기를 시찰하고 있다. 이병철 선대 회장(사진 오른쪽),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사진 왼쪽), 이건희 회장(이병철 회장 뒤), 이재용 사장(사진 가운데). 사진=삼성그룹
 
마지막으로 중앙일보가 삼성그룹과 무관하다고 확언하기 어려운 점이 중앙일보 중핵기업 이사진 명단에서 발견된다. CJ도 2000년대 삼성 비서실이나 구조본부 출신들이 CJ 미디어 계열사 경영 총괄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중은 2010년이 넘어가면서 줄어들었다. 이와 달리 중앙일보는 그 비중이 줄어들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건희 삼성 회장의 고등학교 동창생이자 삼성그룹 비서실 출신이 홍석현 회장 측근에 배치돼 있다. 또한 재정을 감사하는 이사도 중앙일보 전반에 관여하고 있다. 특히 삼성그룹에서 분리할 당시 중앙일보에 배속됐다가 보광그룹으로 분할해 나간 휘닉스커뮤니케이션 등기 이사들이 삼성의 중핵기업 이사들이다. 이처럼 삼성맨들이 2010년 이후까지 중앙일보 주요기업 이사로 등재돼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볼 때 중앙일보는 온전히 홍씨 가문의 것으로 확인할 수 없다.

 

즉 중앙일보는 1965년 이병철-홍진기가 협력해서 창간하고 기반을 구축했다면 2018년 이 회사는 이건희-홍석현이 복합 미디어 기업으로 공동 소유 운영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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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철수, 지금 최적기다!

주한미군 철수, 지금 최적기다!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8/04/01 [11: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국민주권연대와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 3월 31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한미군사훈련 중단, 미군의 영구주둔 반대한다'는 집회를 열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국민주권연대와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 3월 31일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미군영구주둔 반대의 내용으로 집회를 열었다.

 

4월 1일은 평창올림픽으로 연기되었던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시작된다집회 참가자들은 평화와 통일의 바람이 불러오는 한반도에 한미합동군사훈련 완전 중단하라.’, ‘이 땅을 강점하고 있는 주한미군을 반대한다미군의 영구주둔 반대한다.’의 내용으로 연설과 다양한 문화행사로 미 대사관 앞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먼저 집회는 5명이 연설자가 나와 한미합동군사훈련 반대미군은 이 땅을 떠나라 등의 내용으로 연설을 했다.

  

▲ 31일 집회에서 연설을 하는 현유진 대학생당 대학생문제해결팀장, 양희원 강원대학생, 박민아 동덕여대학생, 윤태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교육국장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현유진 대학생당의 대학생문제해결팀장 연설에서 평창올림픽으로 연기되었던 한미연합군사훈련이 4월 1일부터 시작된다비록 규모와 일정은 축소되고 일부 전략무기들이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미연합훈련을 해도 되는가아무리 축소해도 북을 적으로 하는 군사훈련이며선제폭격의 성격을 띠고 있어 위험하다이것은 언제든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봄과 함께 평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한미연합훈련은 흐름을 역행하고 있다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남북북미정상회담 개최는 어느 때보다 대화를 통한 화해의 가능성이 높아진 지금한미연합훈련은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평화협정 체결과 관련해서 강원대 양희원 학생이 연설을 통해 우리 사회에 65년간 바뀌지 않는 정전협정이 있다수구보수 세력은 정전협정을 방패삼아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들에게 많은 피를 강요해왔다빨갱이종북과 같은 말로 국민들을 탄압했다정전협정은 도구 삼아서 그들의 집권을 유지해온 수구적폐 세력에게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 국민들의 새로운 뜻을 4~5월 보여줘야 한다그리고 북미정상회담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집회 참가자들이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하라','미군의 영구주둔 반대한다'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세 번째 연설자로는 동덕여대 노래패 놀해랑의 박민아 학생은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기간 싸늘했던 남북관계가 따끈따끈하게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한반도에 평화의 봄이 오고 있는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는 것이 있다바로 대북제재이다북은 양보해서 비핵화를 논의할 수 있다고 했는데트럼프는 북에게 여전히 최대의 압박과 제재로 유지겠다며 대북제재를 고집하고 있다미국의 행위는 옳지 않다남북북미 교류사업 활성화를 해야 할 것이며미국은 당장 대북제재를 해제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연설했다.

 

이어 윤태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교육국장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미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자로 내용으로 연설했다.

분단 78년이다우리 민족끼리는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우리 민족을 분단시킨 것은 미국이며, 78년 간 온갖 해를 끼쳐왔다그러나 이제 분단의 끝이 보인다민족이 만나고얼굴을 맞대니 그 어떤 외세도 두렵지 않다대화가 시작되는 시기에 우리 민족끼리 철석같이 손을 잡고 누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고 싸워나가야 할 것이라고 민족단결을 강조했다.

 

▲ 가극단 미래가 '주한미군 철수, 지금이 최적기다'라는 격문을 낭독하고 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마지막 연설은 가극단 미래가 주한미군 철수지금이 최적기다라는 격문을 낭독했다.

  

▲ 청춘의지성 소속 시사콩트 동아리 '퀵'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주제로 시사콩트를 선보였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문예공연을 보면서 함께 즐기는 집회 참가자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집회 2부는 미군철수, 제주4.3, 한반도의 평화통일 등을 주제로 대학생들의 시사콩트 노래패 악단 씽, 동덕여대 노래패 '놀해랑', 대학생노래패연합, 한국대학생노래패연합 '내일'이 노래공연을 선보였고, 청춘의 지성 율동패 '흥'의 율동 공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로 채워졌다. 

 

문화공연을 보는 집회참가자들은 흥겹게 박수도 치고노래도 부르며 함께 군사훈련 중단, 미군철수의 의지를 다졌다.

  

▲ 청춘의 지성 율동패의 공연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집회참가자들이 문예공연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이날 투쟁에는 노세대부터 젊은세대,아이들까지 함께 참여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노래악단 '씽'이 제주 4.3을 주제로 한 노래, '누가'를 부르고 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들어라 양키야'이 노래와 율동공연. 미국은 한미연합군사훈련 완전 중단하고, 이 땅을 떠나야 한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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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에서 발견된 백골 시신, 왜 모두 침묵했을까

[기획] 제주 4.3 생존자들의 끔찍하고도 생생한 증언, 영화 <레드 헌트>

 중산간지대로 대피한 주민들(1948. 5.)

중산간지대로 대피한 주민들(1948. 5.)ⓒ 미 국립기록문서관리청


일본의 패망 이후 해방을 맞이한 한반도는 좌우의 극심한 이념 대립과 정치적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진흙탕 싸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평범한 국민들이었죠. 

그중에서도 '제주 4.3 사건'은 수년에 걸쳐 수만 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가장 참혹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습니다. 육지와 단절된 제주도에서 벌어졌고 이념 문제까지 얽혀 있었기 때문에 진상이 밝혀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뜻있는 사람들의 줄기찬 노력은 계속됐고,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 작업 및 특별법 제정이라는 결실을 보게 됐습니다. 

4.3 사건 다룬 첫 번째 영화
 
 영화 <레드 헌트>의 한 장면. 생존자들의 기억은 수십년이 지나서도 생생하다.

영화 <레드 헌트>의 한 장면. 생존자들의 기억은 수십년이 지나서도 생생하다.ⓒ 조성봉


다큐멘터리 <레드 헌트>(1997)는 4.3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영화입니다. 당시에는 공개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웠던 소재를 다뤘기 때문에 제작부터 상영까지 공권력의 탄압을 받아야 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1992년 제주도 '다랑쉬굴'에서는 백골 시신 여럿과 그들이 은신했던 생활 흔적이 함께 발견됩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이들의 유해를 신속히 화장해 버리는 등 진실을 감추기에 급급했습니다. 왜 이들은 동굴 속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을까요? 왜 발견되고 나서 급히 화장되는 신세가 돼야 했을까요? 이런 의문은 4.3 사건의 전말에 대한 궁금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전반부에서는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4.3 사건의 정치·사회적 맥락을 짚어 나갑니다.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무장봉기만이 아니라, 그 전해인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있었던 무장 경관의 발포 사건이 4.3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적시합니다. 6명의 사망자를 낸 이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서 제주도의 민심은 악화됩니다. 일반인들과 공무원들까지 똘똘 뭉쳐 총파업을 벌일 정도였죠. 미 군정 당국은 극우 인사를 도지사로 임명하는 등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고, 이는 4.3사건 내내 악명을 떨친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 들어오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듬해 4월 3일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월 10일 선거를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납니다. 이 봉기를 주도한 남로당 인사들은 발생한 지 한 달도 안 돼 진압군과 협상을 벌이며 평화롭게 해결할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협상이 결렬되면서 진압군의 토벌 작전이 시작됩니다. 이후 군경과 서북 청년단이 제주도 전역에서 벌인 '빨갱이 사냥'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내면서 수년간 계속됩니다. 

후반부에서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끊이지 않고 계속됩니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끔찍한 기억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그날의 아픔을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입산한 반군이나 혹은 동조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제주도 중산간 지역의 수많은 마을을 초토화한 만행부터, 해안가 동네에서 공개적으로 자행된 집단 학살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증언은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 영화의 장점은 4.3 사건의 배경과 경과는 물론, 이후 벌어진 악몽 같은 토벌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인 제주도민이 아니더라도, 4.3 사건의 핵심적인 부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1989년 설립되어 증언을 채록하고 자료를 수집해온 '제주 4.3연구소'와 지속적인 취재를 통해 진실을 파헤치려고 노력한 '제민일보 4.3특별취재반'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물론 2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이긴 하지만, 그때 기준으로 봐도 투박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어체로 일관하는 해설이나, 짜임새가 부족한 구성 등이 그 예입니다. 하지만 관련 연구자 및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아낸 사료적 가치, 그리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소재를 최초로 다뤘다는 점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공권력이 국민을 저버린 사건
 
 영화 <레드 헌트>의 한 장면. 4.3을 겪은 사람들은 아직도 공권력에 치를 떨고 있다.

영화 <레드 헌트>의 한 장면. 4.3 피해자 유족들은 아직도 공권력에 치를 떨고 있다.ⓒ 조성봉


4.3 사건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 모습'이 전형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국가 혹은 공권력이 일반 민중의 기대를 수없이 배반한 사건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는 데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부터 시작된 이 '배신의 역사'는, 부패한 왕정과 일본의 식민 지배, 해방 이후의 권위주의 정부 등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이어졌지요.  

20세기 내내 우리나라 지배층은 정치적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데 공권력을 남용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5.18 광주 민주화항쟁은 4.3과 매우 흡사한 비극으로서, 무고한 국민을 거리낌 없이 학살한 것부터 '빨갱이' 탓을 하며 사후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까지 그대로 빼닮았습니다. 민주 정부 10년을 겪고 난 21세기에도 이런 일은 계속됐습니다. 

올해는 4.3 사건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활동이 시작됐고,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국가 공권력의 잘못에 사과한 적도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4.3 사건 추념식에 직접 참석할 예정입니다. 이렇게 역대 민주 정부가 4.3 사건의 진상 조사와 해결에 힘쓴 이유는, 과거의 잘못된 역사와 결별하고 진짜 국민을 위하는 정부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4.3 사건을 기억하는 일은 또한 평화를 염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은 평화밖에 없으니까요. 마침 우리나라는 곧 있을 남북 및 북미 간의 정상담을 통해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긴 여정을 다시 한번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레드 헌트>는 이런 시점에 보기 딱 알맞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이 담아낸 비극적인 역사는 평화 정착을 위한 중단없는 노력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 웅변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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