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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TF, 북 여종업원 사건 킨타나 유엔북한인권특별보고관과 협력해 갈 것

민변 TF, 북 여종업원 사건 킨타나 유엔북한인권특별보고관과 협력해 갈 것
 
 
 
박한균 기자 
기사입력: 2017/12/13 [23:4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기획탈북의혹사건대응 TF팀장을 맡고 있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장경욱 변호사는 “김련희씨는 평양시민이다. 본인 의사로 한국에 입국하지 않았다는 것이 본인 의사로 명백히 확인되었음에도 정부당국은 가족들과의 상봉을 막고 있다. 나아가 김련희씨의 페이스북 활동 등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일체의 활동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려 하고 있다. 이는 적대적인 분단 대립 구조의 모순 덩어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현실”이라면서 “김련희씨와 보안수사대에 함께 들어가서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고 퇴거할 예정이다. 그리고 서울 UN인권사무소에 오헤아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을 만나서 이 상황을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자주시보, 박한균 기자

 

오헤아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이 12일 유엔 총회 보고서에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사건’을 포함시킨 것에 대해 “인권과 인도주의 관점에서 자신이 검토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고 특히 북 여종업원들 가족들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고 이유를 밝혔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사건 대응TF'는 12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같이 전했다.

 

이날 TF 소속 4명의 변호사들은(장경욱, 채희준, 천낙붕, 오민애 변호사) 오전 11시 30분 서울 유엔인권사무소에서 방한 중인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과 만나 이 사안과 관련해 1시간 20여분 동안 면담을 진행했다.

 

이 면담에서 변호사들은 킨타나 보고관에게 인신보호구제심사청구, 변호인 접견거부처분 취소소송 등 국내 소송 진행경과와 유엔 자유권위원회에 대한 개인진정, 자의적구금실무그룹에 대한 긴급청원 및 유엔 인권이사회 ‘법관과 변호사의 독립을 위한 특별보고관’, ‘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에 대한 긴급청원의 진행경과를 설명하였고, 유엔 개인진정서와 긴급청원서, 한국 정부 답변서 등 유엔 내 인권구제절차에서 제출된 자료 일체를 전달했다.

 

변호사들이 킨타나 보고관의 관할권에 대하여 질의하자 “북한 내외의 북한 주민의 인권과 인도주의 위기 전반에 걸쳐 관할권이 있다”고 답했으며, 변호사들은 “향후 이 사안을 비롯하여 한국 내 탈북자 인권침해 문제(북송 희망 탈북자 문제, 탈북자 간첩조작 사건, 한국 내 탈북자 차별 문제)에 대하여 킨타나 보고관과 연계를 갖고 적극적으로 진정 및 청원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과 관련하여 킨타나 보고관은 “이 사안은 인권의 문제로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에 따라 처리해야 할 것이고, 그 전제로서 변호인들이 자유롭게 여종업원들을 만날 수 있어야 하고, 여종업원들과 북 가족들이 만날 수 있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확인된 의사에 따라서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면서 “본인 의사에 반해서 왔으나 여기 남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의 경우에는 귀순공작의 결과로 그런 의사를 가지게 된 개연성이 있으므로, 이에 유엔에서 신속히 변호인 접견을 중재해달라는 것과 함께 판문점이든 서울 유엔인권사무소이든 북 가족들과 종업원들의 상봉을 신속하게 주선해주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한편 킨타나 보고관에게 이 사안과 관련하여 그가 제72차 유엔총회에 보고한 보고서 내용 중 종업원들이 한국행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다는 기술을 한 것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조사결과에 대하여 질문하자 “자신의 의견이며, 한국 정부의 설명에 의문을 갖고 있다. 그래서 변호사들을 만났다”고 밝혔다. 이어 “유엔 내에서 이 사안을 계속 다루고 있고 그 과정에 여종업원들을 추가로 만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위 보고서에 ‘여종업원들이 현재 구금상태에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했다’고 했으나 변호사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국정원이 여전히 여종업원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설명하자 “현재 서울 유엔인권사무소에서 계속 확인 중인 사항”이라고 답변했다.

 

마지막으로 킨타나 보고관은 변호사들에게 “나는 인권과 인도주의 관점에서 객관성, 공정성, 독립성에 기반해서 활동하는 유엔 보고관으로 우선, 북측 부모들에게 킨타나 특별보고관을 만났고 이 사안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달라”면서 “북한을 방문하여 북측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도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변호사들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킨타나 보고관과 협력하여 이 문제해결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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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알고있던 홍준표는 가짜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12/14 11:00
  • 수정일
    2017/12/14 11:0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여운환, 홍준표를 쏘다 ①] 그는 왜 말하려고 하는가

17.12.14 09:33l최종 업데이트 17.12.14 09:33l

 

지난 1991년 홍준표 당시 광주지검 강력부 검사에 의해 조직폭력단 '국제PJ파 두목'으로 기소됐던 여운환씨가 입을 열었다. 그는 <오마이뉴스>와 이틀간 총 7시간에 걸쳐 자신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사이에 있었던 '사나웠던 운명'을 숨가쁘게 털어놨다. <오마이뉴스>는 20회에 걸쳐 그 '사나웠던 운명의 증언'을 풀 스토리로 연재한다. 이 기사는 여는글에 이어 본격 인터뷰 연재 첫번째다. <오마이뉴스>는 여 대표의 인터뷰 내용과 관련해 홍 대표의 해명과 반론을 듣고자 수차례 접촉을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다만 홍 대표의 한 측근인사는 "그것은 검찰(검사)이 불의한 깡패세력을 소통한 사건"이라고 반박했다. <오마이뉴스>는 이후라도 언제든지 홍 대표의 반론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힌다. [편집자말]
 여운환 아름다운컨벤션 대표가 지난 10월 25일 광주의 한 호텔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여운환 아름다운컨벤션 대표가 지난 10월 25일 광주의 한 호텔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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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이야기가 많다고 들었다.
"내 입장에서는 홍준표한테 원한이 얼마나 깊겠어? 지금도 집사람은 (이야기가 알려지는 것을) 마다해. 내 얘기가 사회에서 거론되는 것 자체를 굉장히 염려할 정도여. 나는 홍준표라는 희귀한 정치인 때문에 졸지에 조직폭력배 두목으로 알려지면서 내 인생은 완전히 혼돈에 빠져들었어. 홍준표에 의해 이런 굴레('국제PJ파의 두목'으로 낙인찍힌 것 - 기자 주)가 씌워져 버리니 내가 받는 불이익이 너무 엄청나버려. 대한민국에서 조직폭력배 두목으로 각인되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겠어?

오죽하면 내가 집사람에게 이렇게 얘기했겠어? '아들들한테도 다 변명하고 사돈들도 다 알게 됐지만, 지금 손녀가 셋인데 그 애들한테 어떻게 일일이 대답할 수가 없지 않냐? 그래서 내가 포기할 수가 없다. 혹시라도 지금 사는 모습이 흐트러질까, 생활이 깨질까 두려운 모양인데, 내 생각도 좀 해주라. 당신은 이대로가 행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내가 홍준표에게 거짓을 만들어서 말하면 내가 당할 수 있으나, 팩트를 갖고 이야기하는 거니 아무리 거대 야당의 대표라고 하지만 내가 뭔 불이익을 받겠냐? 세상이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잃을 게 있다면 얼마나 더 잃겠냐? 사업 안하면 그만이고.' 

 

집사람도 반듯한 전남도청 공무원이었지. 도지사 비서실에서 죽 근무했던. 그런 집사람으로 봐선 얼마나 기가 막혀겠어? 집사람은 나랑 초등학교 동기야. 한 5년 연애하고 결혼했어. 내가 1977년 1월에 결혼했으니 올해로 41년 됐어. 만난 지는 46년 됐고. 누구 말대로 천생연분이라고 할 정도로 권태 한번 안 느꼈어. 그런데 나 땜에 어머어마하게 고생했어. 내가 몇 년씩 감옥살이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 재산은 재산대로 엄청나게 없어지고. 그러니까 여자로서는 두려울 수 있어. 얻을 것은 미비하고."

- 내가 잡지사 기자로 근무할 때 한국 조폭의 역사를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그 기사의 마지막 대목이 당신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래서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질문지를 받아보고 내가 할 이야기가 많겠구나 생각했다. 내가 홍준표의 '모래시계 검사' 타이틀은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이것 이상으로 홍준표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게 어디 있겠어? 내 말이 합당치 않은 이야기고 나 혼자서 만들어낸 이야기라면, 홍준표가 나를 찍어 죽일라고 할 거 아녀? 가만 두겄어? 자기가 알고 있는 비하인드(숨겨진 이야기)라도 꺼내지 않겠어? 그런데 말 한자리 못하고, 말하자면 노 코멘트 해불잖아. 홍준표가 노 코멘트할 사람이야? 절대 안 할 사람이야. 나는 홍준표를 너무 잘 알아. 

내가 조사받을 때 타자수가 여자였어. 근데 홍준표가 막 서서 왔다갔다 하면서 조사를 하더라고. '이때 검사는 창문 밖을 내다본다' 별 소설 같은 지문도 다 쓰라고 해. 재판부에 (검사의 고뇌 등) 현실적인 것을 막 얘기하고 싶은 거야. '이때 피의자는 고개를 숙인다'라고 쓰라고 해. 내가 인자 반성한다는 그런 것을 지가 연출한 거야. 

난 그런지도 모르고 듣기 싫어서 '검사님, 내가 뭘 반성합니까? 내가 뭘 반성할 게 있다고 반성을 해요?'라고 따졌어. 그러면 홍준표가 '지금도 당신은 말이야' 하면서 얘기해. 홍준표 말하는 투가 정말 싫었어. 수갑 찬 손으로 주둥이를 한 대 쳐불고 싶을 정도였어. '긍께 검사님, 좀 앉아서 조사하시라고요. 어지럽게 왔다갔다 하지 마시고.' 나도 얼마나 전라도 말을 (많이) 써불었겠어? 긍께 홍준표는 어쨌든 내가 싫은 거야. 오죽하면 내가 재판 중에 '저 검사 정신감정 좀 하는 게 좋겠다'고 했겠어? 글고 내가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디 홍준표가 우리 변호사한테 욕을 하더라고. '저 새끼' 어쩌구 하면서." 

"날 활용해 홍준표는 모래시계 검사가 되고"

- 원래 2부짜리 인터뷰를 생각하고 왔다. 1부는 국제PJ파사건이고, 2부는 이용호 게이트다. 그래서 인터뷰 시간도 굉장히 길 수밖에 없다. 오늘 이야기가 안 끝나면 내일 다시 시간을 내서 인터뷰를 이어갔으면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내가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 것이 있어. 인자 이용호 문제와 홍준표 문제를 섞으면 안돼. 이용호 문제는 우습지도 않아. 3류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친구의 현란함에 당시 검사가 놀아났어.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들려드릴게." 

- 이용호 게이트를 얘기할 시기는 아니다? 
"이용호 게이트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황당한 스토리가 전개됐는지 알 수 있는데 그렇게 가면 내가 바라는 취지가 소설화 돼버려. 남한테 소설같이 들려선 절대 안되는 이야기인데." 

- 그럼 이번 인터뷰에서는 홍준표와 국제PJ파 관련 이야기만 하고 싶다? 
"이용호 게이트는 나한테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가 아녀. 홍준표로부터 시작된 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이어진 고통 중 하나일 뿐이야. 

그럼 이야기를 풀어나가 볼까? 우선 내 이야기를 하자면, 1974년도에 폭력 전과가 한 번 있었어. 그리고 홍준표를 1991년에 만났지. (폭력 전과가 있었던 1974년 이후부터) 1991년도까지 내가 경찰서나 파출소에라도 잡혀가서 조사받거나 입건된 적이 한 번도 없었어. 홍준표가 내가 국제PJ파를 만들어서 활동한 두목인 것처럼 만들었는데 그것 자체가 너무 잘못됐어. 홍준표가 나를 국제PJ파 두목으로 기소했지만, 그 공소사실 전체에 대해 조목조목 무죄를 받았다. 

내가 1심부터 대법원까지 무죄를 받은 사건을, 홍준표는 자기가 기소한 대로 유죄를 받았다고 지금까지 얘기해왔어. 내가 조폭 두목으로 활동해온 사람처럼 매도하고. 본인은 나중에 나를 적절하게 활용해서 무슨 턱도 없이 모래시계 검사가 되고, 나도 드라마 <모래시계>의 일부 모델이 됐어. 홍준표 인생과 내 인생이 너무 많이 바뀌었어. 나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홍준표는 나를 잘 활용해서 오늘날의 홍준표가 됐고. 

하지만 홍준표는 사실 조작된 과거로 날조된 영웅담을 만들어냈던 거야. 대한민국이 알고있던 홍준표는 가짜다. 옛날에 흔하게 보안사범이나 간첩으로 조작한 것들이 많은 시간이 지나서 다 밝혀지고 있는데, 그런 데만 조작이 있는 게 아니라 내 사건도 완전히 조작됐어. 판결문에서 다 밝혀진 내용이야. 지금이야 그런 일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 환경이지만 30년 전에는 정말 안 그랬어. 

나는 그때 검사의 권력이 죄만 없으면 별 거 아닌 걸로 생각하고 세게 싸움을 붙었어. 조금도 굽히지 않고, 검사의 부당함에 많이 반발하고 그랬제. 그런데 나는 검사의 권력이 저렇게 함부로 쓰여지면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직접 체험했어. 당시 홍준표는 자기 혼자 힘으로 안되니까 당시 검사장을 꼬드겨서 이런 일들을 만들었어." 

- 그 검사장이라면 문정수 광주지검장을 말하나? 
"그렇다. 그분은 마치 홍준표의 말이 사실인 것처럼 믿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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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제8차군수공업대회에서 핵무력 질량적 강화 천명

북, 제8차군수공업대회에서 핵무력 질량적 강화 천명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12/13 [04:5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2017년 12월 11일 평양에서 진행된 제8차 군수공업대회 

 

▲ 2017년 12월 11일 제8차 군수공업대회 주석단의 김정은 국무위원장   

 

12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11일 평양에서 제8차 군수공업대회가 김정은 국무위원장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고 12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하였다.

 

통신은 "대회에는 대륙간탄도로켓(ICBM) '화성-15'형 시험발사 성공에 기여한 성원들을 비롯하여 나라의 국방력 강화에 크게 공헌한 국방과학연구부문, 군수공업부문의 과학자, 기술자, 노력혁신자, 일꾼들과 연관 단위 일꾼들, 근로자들이 참가했다"고 밝혔고 태종수 노동당 부위원장은 이날 보고를 통해 "최고영도자(김정은) 동지의 눈물겨운 애국 헌신과 굴함 없는 공격 정신에 의하여 우리 조국은 남들이 수십 년을 두고도 이루지 못할 군사적 기적들을 불과 1∼2년 안에 이룩하며 세계적인 핵강국, 군사강국의 전열에 당당히 들어설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중앙통신은 태종수 부위원장이 "다시 한 번 영웅적 투쟁을 벌여 우리 식의 위력한 주체무기들을 더 많이 개발·생산할 데 대하여 언급했다"라며 "오늘의 대성공을 더 큰 승리를 위한 도약대로 삼고 계속 박차를 가하여 국가핵무력을 질량적으로 더욱 강화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유튜브에 소개된 북 보도 영상을 보니 태종수는 항일무장투쟁시기 '두 자루 권총정신'과 한국전쟁 시기 '군자리정신'을 계승하여 '국방과학연구사업과 국방공업을 세계 최고의 경지로 올려세울 수 있는 자립적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평하고 관련 일꾼들이 최선을 다해 "혁명무력 강화와 전민무장화에 적극 이바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2017년 12월 11일 제8차 군수공업대회에 참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 핵무장력을 질량적으로 강화에 전민 첨단무기 무장화까지

 

이는 수소탄과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지금까지 이룬 위력적인 국방력은 더 높은 국방력 구축의 자신감의 토대로 작용하고 있어 이를 기반으로 더욱 그 위력을 높이고 더 많은 양의 핵무기를 만들어실전 배치할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의 무기만으로도 미국에서 불안으로 잠 못 이루겠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오고 있는데 이보다 더 위력적인 핵과 미사일을 대량생산하여 실전배치하게 되면 미국에게는 끔찍한 악몽이 아닐 수 없을 것같다.

 

특히 인민군을 중심으로한 혁명무력 강화는 물론 전민무장화에도 이바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을 보면 구형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노농적위대도 곧 첨단무기로 완벽하게 무장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게 되면 노농적위대의 구형무기는 세계 반미반제진영으로 수출, 이전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고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길 결정을 내리자 온 세계의 무슬림들이 성조기를 불태우며 일전불사를 외치고 있는데 미국과 이스라엘이 세계 곳곳에서 무슬림들과의 치열한 피의 전쟁에 말려드는 것이 아닌가 우려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어서 국제적인 북 무기 수요는 더욱 많아질 우려가 높다. 

유격전이 중심인 반미반군들은 작고 가벼워 휴대하기 편한 북의 기관총, 7호발사관 등 북한제 무기를 매우 선호하고 있어 수요는 무궁무진한 상황이다.

 

그렇게 구형무기를 판 돈으로 신형무기를 개발하여 인민군대만이 아니라 전민을 신형첨단무기로 무장시키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 2017년 12월 11일 제8차 군수공업대회 

 

✦ 못만들 무기가 없다는 자신감

 

태종수의 발표가 끝나고 여러 토론자들의 발언이 있었는데 지난 기간 "국방공업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 정보화" 추진과 국가핵무력 완성, 그리고 "우리식의 위력한 주체무기생산에서 거둔 커다란 성과 경험"을 발표, 공유하였으며 단시일에 최첨단 무기의 일대비약을 이루어 낸 방도들도 발표되었다.

 

특히 토론자들은 "김정은 최고영도자동지가 하라고 하시는 대로만 하면 그 어떤 첨단 요새도 다 점령할 수 있으며 세계가 알 수도 없고 흉내낼 수도 없는 주체조선의 영웅신화들을 끊임없이 창조해 나갈 수 있다는 혁명의 천리를 심장에 깊이 새겼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해와 올해 세계 최첨단을 뛰어넘는 위력적인 재래식무기와 전략무기를 한달이 멀다하고 연이어 공개하여 세계적인 충격파를 일으켜왔는데 그런 위력적인 무기 하나하나 개발하는과정에 구체적인 지침을 주며 지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토론자들은 "당의 병진로선을 결사관철하는데 있어서 과학기술에 의거하여 자력갱생의 무궁무진한 위력을 발휘해나간다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귀중한 경험을 얻게 되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토론에서는 국방과학부문과 군수공업부문의 결함과 교훈도 분석총화되었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북 언론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낡은 사고방식, 외국을 무조건 모방하려는 자세 등이 그 내용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 2017년 12월 11일 제8차 군수공업대회에 참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

 

✦ 화성-15형은 초대형 중량급 핵탄두 장착 미 전역 타격 가능

 

이번 대회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태종수 노동당 부위원장이 이날 보고를 통해 "최고영도자(김정은) 동지의 눈물겨운 애국 헌신과 굴함 없는 공격 정신에 의하여 우리 조국은 남들이 수십 년을 두고도 이루지 못할 군사적 기적들을 불과 1∼2년 안에 이룩하며 세계적인 핵강국, 군사강국의 전열에 당당히 들어설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정말 수십년 걸릴 국방무기개발을 단 1-2년만에 만들어내는 속도 그 자체가 공포가 아닐 수 없다. 남측의 과학자 전문가들도 한 달여 간격으로 신형 미사일을 마구 시험발사하는 북을 보며 "놀라운 일"이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고 일부 기자들은 아마도 오래 전에 만들어 놓은 것을 꺼내서 시험발사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추정을 내놓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번 8차 군수공업대회에서는 순전히 자력갱생의 정신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탁월한 지도로 그때그때 개발한 무기임을 확인해준 것이다. 아마 이런 속도라면 내년이면 미국을 능가하는 최첨단 무기들이 본격적으로 공개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실 지금까지의 무기는 미국도 가지고 있는 무기이다. 물론 수소탄의 구체적 성능, 탄도미사일의 요격회피기동능력 등은 지금도 미국보다 더 우수할 지 모르나 북이 그렇게 찍어서 발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북이 공개하는 무기들에는 미국에도 없는 신기술들이 많이 접목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정말 북의 무기개발 속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은 미국편이 아니라는 아우성이 왜 미국 워싱턴타임스, 뉴욕타임스와 같은 제도권 보수언론에서 나오는지 이해가 된다.

 

태종수 부위원장은 더불어 '북극성'을 수중과 지상 임의의 공간에서 전략적 타격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핵공격 수단으로, '화성-12'를 대형중량 핵탄두를 장착해 태평양 전 지역을 타격권에 두는 로켓으로, '화성-14'를 수소탄을 미국의 심장부에 날려 보낼 핵운반 수단으로, '화성-15'를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초대형 중량급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완결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각각 자평했다.

 그러면서 그는  "화성-15형 시험발사의 대성공은 국가핵무력 완성의 역사적 대업, 로켓 강국 위업을 빛나게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이룩된 민족사적인 대승리, 조국청사에 특기할 대사변"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북이 북극성과 화성-12, 14, 15형을 어떤 목적으로 개발한 것인지를 이렇게 명백히 밝힌 것이다. 특히 화성-14형은 대형 중량급 핵폭탄을 미국 심장부로 보내기 위한 것이고 화성-15형은 초대형 중량급 핵탄두를 미국 전역에 보내기 위해 개발한 것이라는 지적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화성-14형은 미 본토의 주요 거점 타격용이라면 화성-15형은 단 발로 미국 전역을 마비시킬 수 있는 초대형 EMP탄을 장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임을 암시한 것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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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기지 반대” 강정마을 10년 투쟁사···구럼비의 상처 치유될까

[정리뉴스] “해군기지 반대” 강정마을 10년 투쟁사···구럼비의 상처 치유될까
입력2017-12-13 11:32:00
 
준공식을 하루 앞둔 2016년 2월25일 제주 해군기지 모습. 연합뉴스

준공식을 하루 앞둔 2016년 2월25일 제주 해군기지 모습. 연합뉴스

정부가 지난 12일 제주 해군기지 공사 지연의 책임을 묻기 위해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단체를 상대로 제기한 34억5000만원의 구상금 청구 소송을 철회했다. 참여정부 때부터 추진된 제주 해군기지는 10년 동안 갈등이 계속되면서 주민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강정마을의 거센 반대에도 결국 해군기지는 완공됐고 주민에게는 수십억대의 구상금과 전과 기록이 남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구상권 철회와 사법처리 대상자의 사면을 공약한 바 있다. 지난 10년 동안 강정마을의 투쟁사를 되짚어봤다.

 

2007년 4월 제주도청 회의실에서 김장수 국방부 장관이 김태환 제주지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 해군기지와 관련한 국방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2007년 4월 제주도청 회의실에서 김장수 국방부 장관이 김태환 제주지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 해군기지와 관련한 국방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수용 결정(2007년 5월14일)
 

김태환 제주지사는 2007년 5월 기자회견에서 “제주도민 여론조사 결과 해군기지 건설에 대한 찬성의견이 높게 나옴에 따라 서귀포시 대천동 강정마을을 제주 해군기지 최우선 대상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최우선 대상지로 선정된 강정마을 주민들은 찬반으로 나뉘어 갈등했고 시민단체는 김 지사의 퇴진과 해군기지 철회를 요구하며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제주, 해군기지 수용 결정…반대委 “승복못해”▶제주 해군기지 유치 주민갈등 ‘부글부글’
 

■제주 시민단체들, 해군기지 반대 릴레이 단식농성(2008년 10월13일)
 

제주도 내 시민단체들이 서귀포시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릴레이 동조 단식농성에 나섰다. 강정마을회 강동균 회장은 제주도청 앞 인도에서 단식농성을 벌였지만 제주도는 공무원과 경찰을 동원해 농성 천막을 강제 철거했다.
 

▶[지자체소식]제구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릴레이 단식▶제주 해군기지 법정싸움 조짐…주민 찬반 갈등 격화
 

■제주지사 주민소환 투표율 미달로 부결(2009년 8월31일)
 

강정마을 주민과 제주지역 3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김태환 제주지사 주민소환운동본부’가 해군기지 문제로 김 지사에 대한 주민소환투표를 실시했으나 11%의 투표율로 무산됐다.
 

▶김태환 제주지사 직무 정지▶김태환 제주지사 “대화하겠다”
 

2010년 1월 오전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인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 해안에서 굴삭기 위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던 주민들을 경찰이 끌어내려 연행하고 있다. 한라일보 제공

2010년 1월 오전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인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 해안에서 굴삭기 위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던 주민들을 경찰이 끌어내려 연행하고 있다. 한라일보 제공

■헷갈리는 제주 해군기지 판결(2010년 7월15일)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위한 국방부 변경승인 계획은 위법하진 않으나 절차에는 하자가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반대 주민 측은 “국방부의 절차적 잘못을 인정한 것”이라며 “기본계획을 전제로 이뤄졌던 모든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해군 측은 “새로 변경고시된 계획이 유효하다는 것인 만큼 전체적으로 문제는 없다고 본다”라고 말해 같은 판결을 놓고 양측의 해석이 달랐다.
 

▶헷갈리는 ‘제주 해군기지 판결’ 논란 증폭▶“제주 해군기지 사업, 법으로도 정당성 없음 입증”
 

■제주 해군기지 부지 재선정 논의(2010년 9월9일)
 

강정마을회는 2010년 8월 주민투표를 통해 “강정마을을 제외한 해군기지 후보지역을 대상으로 마을총회나 주민투표 등 민주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유치를 희망하는 곳이 없으면 해군기지를 수용할 수 있다”는 ‘조건부 수용’ 제안서를 제주도와 도의회에 제출했다. 이를 받아들여 제주도는 9월 안덕면 화순리·사계리, 남원읍 위미1리 등 3곳 주민에 해군기지 유치 찬반 의견을 물어 부지를 재선정하기로 했다. 10월 3개 마을 모두 해군기지 유치를 반대한다는 공식입장을 통보해 입지 선정 문제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11월 강정마을회는 “단 한 차례 마을총회조차 개최되지 않았다”라며 ‘조건부 수용’을 백지화했다.
 

▶제주 해군기지 부지 선정 ‘처음부터 다시’▶제주 해군기지 입지선정 원점으로▶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 반대” 재천명
 

■제주도, 해군기지 공식 수용(2010년 11월15일)
 

우근민 당시 제주지사는 제주도의회 본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제주도정은 강정마을에 제주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정부정책을 받아들이고 적극 지원하겠다”라고 밝혔다. 중단됐던 건설공사도 3개월만에 재개되면서 시민단체들이 반대운동을 벌였다. 일부 주민들이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제주도, 해군기지 공식 수용▶제주 해군기지 반대투쟁 본격화
 

2011년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이 해군기지 공사현장에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제주군사기지 반대대책위원회 제공

2011년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이 해군기지 공사현장에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제주군사기지 반대대책위원회 제공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운동 전국으로 확산(2011년 6월19일)
 

전국 116개 시민사회단체들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 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를 구성해 서울과 제주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다. 해군기지 공사가 진행 중이던 서귀포시 강정마을 중덕 구럼비 해안가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시민단체들의 천막이 세워졌다. 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 등 5개 야당은 진상조사단을 구성했다.
 

▶‘해군기지 건설 논란’ 야 5당 진상조사단 구성▶국내 대표적 미술인들도 제주 해군기지 반대▶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전국 확산▶“시민단체와 연대해 해군기지 건설 막는다”
 

■강정마을에 공권력 투입(2011년 9월2일)
 

해군이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사회단체로 법원에 제기한 공사방해금지 등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졌다. 2일 새벽 강정마을에 전격적으로 공권력이 투입됐다. 경찰 병력 1000여명은 이날 오전 6시쯤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주민과 시민활동가에게 퇴거명령을 내린 뒤 농성 컨테이너 철거를 시도했다. 해군은 공사에 차질을 빚게 되자 주민 등 40여명을 공사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시공사들은 주민 10여명에게 수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경찰, 제주 강정마을 점령… 주민들 “계엄 방불”▶[사설]제주 강정마을 공권력 투입 자제해야▶법원 “해군기지 공사방해 안된다”▶경찰, 강정마을 공권력 투입…주민 연행▶‘해군기지 반대’ 연행자 197명에 달해
 

2012년 3월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공사 관계자와 경찰이 한 활동가를 끌어내고 있다. 연합뉴스

2012년 3월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공사 관계자와 경찰이 한 활동가를 끌어내고 있다. 연합뉴스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 발파작업 개시(2012년 3월7일)
 

해군이 갑작스럽게 구럼비 바위를 발파하며 공사를 강행하자 제주도는 태도를 강경하게 전환해 공사정지 행정명령을 검토하겠다며 일시 공사정지를 요청했다. 제주도는 2009년 국방부·국토해양부와 기본협약을 체결하면서 크루즈선박이 입·출항할 수 있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으로 건설하기로 합의했는데 이러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봤다. 발파를 저지하는 마을 주민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경찰이 강제 진압하면서 연행자가 속출했다.
 

▶강정마을 구럼비 발파 ‘초읽기’…7시 경찰 진압작전 실시▶경찰, 구럼비 바위 발파 저지 주민 강제 진압…12명 연행▶반대 한목소리 제주도와 밀어붙이는 중앙정부의 ‘정면 충돌’
 

■제주 해군기지 예산 ‘날치기 통과’(2012년 11월28일)
 

국회 국방위원회가 2013년도 제주 해군기지 건설 예산안을 새누리당 단독으로 처리했다. 반발한 강정마을 주민들과 문정현·문규현 신부 등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예산안을 전액 삭감할 것을 요구하며 삭발식을 했다.
 

▶제주해군기지 예산 ‘날치기 통과’에 거센 반발▶“제주해군기지 예산안 날치기 처리 반대” 삭발·단식
 

2013년 1월 강정마을 주민들이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사 중단과 철저한 검증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2013년 1월 강정마을 주민들이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사 중단과 철저한 검증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제주해군기지 명칭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으로 변경(2013년 2월14일)
 

국방부가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추진되고 있는 제주해군기지 건설사업 계획의 명칭을 공식적으로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건설사업으로 변경했다. 강정마을회는 이에 대해 형식적인 명칭변경일 뿐 제주해군기지는 여전히 국방·군사시설로 건설되고 있다며 규탄했다. 제주도는 크루즈선박의 안전한 입·출항이 공식 확인됐다며 해군기지를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수용’ 입장 정리▶제주해군기지 명칭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으로 변경
 

■원희룡, 주민 진상조사 제안(2014년 6월24일)
 

원희룡 제주지사 당선자가 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 사태 해결을 위해 주민들이 직접 진상조사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주민들의 조사 결과를 검토한 뒤 사과나 보상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강정마을회는 마을총회를 열고 진상조사를 수용할 것인지 토론을 벌였으나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해 진상조사 일정은 기약없이 연기됐다.
 

▶원희룡 제주지사 당선자 “강정마을, 주민이 진상조사”▶강정주민 “속고 또 속아, 제주도 진정성 어떻게 믿나”▶해군기지 골 너무 깊었나 … 진상조사 일정 기약없이 연기
 

■강정마을 군 관사 반대 농성천막 강제철거(2015년 1월31일)
 

국방부가 제주 해군기지 내 관사를 건립하기 위해 부지에 설치된 반대 농성 천막을 강제철거했다. 국방부는 철거에 해군측 용역 100여명과 경찰병력 900여명 등 1000여명을 투입했다.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다.
 

▶강정주민 “동의없이 마을에 군 관사 건립” 반발··또다시 일촉즉발▶제주 강정마을 농성 천막 31일 철거… 충돌 불보듯▶해군 군 관사 철거 강행 강정마을 충돌
 

2015년 8월5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단체가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 해군기지 공사 전후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2015년 8월5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단체가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 해군기지 공사 전후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제주 해군기지 앞 연산호 군락 폐사(2015년 8월5일)
 

강정마을회, 제주군사기지저지범도민대책위원회 등은 제주와 서울에서 동시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해군기지 인근 연산호 군락지의 해상공사 전후 변화상’을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을 공개했다. 범대위는 모니터링 결과 2012년 이전에 비해 연산호의 상당수 종이 사라졌으며 남은 종도 개체 수가 줄어들거나 생육상태가 악화돼 위기를 맞고 있다고 밝혔다.
 

▶해군기지 공사 3년… 제주 강정 앞바다 죽어간다▶[사진]해군기지 공사 3년, 제주 강정은 죽음의 바다 1▶[사진]해군기지 공사 3년, 제주 강정은 죽음의 바다 2▶[사진]해군기지 공사 3년, 제주 강정은 죽음의 바다 3
 

■제주 해군기지 완공(2016년 2월26일)
 

제주 민군복합항(제주해군기지)이 서귀포시 강정해안을 건설부지로 확정한 지 9년 만에 완공됐다. 강정마을회는 같은 날 해군기지 정문 맞은편에서 강정마을을 ‘생명평화문화마을’로 선포하고 생명평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가기로 했다.
 

▶[정리뉴스]제주해군기지, 그리고 강정마을의 지난한 9년
 

강정마을 주민들이 해군의 구상권 청구 철회를 촉구하며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박미라 기자

강정마을 주민들이 해군의 구상권 청구 철회를 촉구하며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박미라 기자

■해군, 강정 주민에 34억 구상권 행사(2016년 3월29일)
 

해군이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한 강정 주민과 시민단체 등을 상대로 구상권 행사에 나섰다. 강정 주민과 시민단체 활동가 등 120여명이 해군기지 건설공사를 방해해 손실이 발생했다며 34억5000만원을 물어내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해군, 제주기지 반대 주민들에 “34억 물어내라”▶[현장에서]“수십억 물어내라니…” 다시 천막농성 나선 강정주민▶“해군, 강정주민 등 구상권 철회를”
 

■정부, 구상권 소송 철회(2017년 12월12일)
 

정부가 제주 강정마을 구상권 청구소송을 사실상 철회하는 법원의 ‘강제조정안’을 수용했다. 지난달 30일 법원은 “상호간 일체의 민·형사상 청구를 제기하지 아니한다”라는 내용의 강제조정 결정문을 정부로 송달한 바 있다.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사회단체는 환영의 입장을 밝히면서도 최종적으로 구상권 소송이 철회된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며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속보]정부, 제주 강정마을 구상권 소송 취하···“갈등 치유와 국민 통합 위해”▶강정주민 “구상권 소송 철회 환영…최종 확인까지 마음 놓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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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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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러슨 미 국무, “북과 전제조건 없이 만날 준비 돼”

(추가) 맥마스터 보좌관, “지금이 충돌을 피할 최후, 최선의 기회”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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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13  10: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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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12일(현지시간) 국제교류재단 주최 세미나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출처-미 국무부]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 측에 전제조건 없는 대화를 제안했다고 <연합뉴스>와 <CNN>이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북미 직접대화의 조건으로 북한 측의 진지함, 비핵화 의지를 강조하던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이전 입장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한때 대북 전문가들 사이에서 회자되다 가라앉은 ‘탐색적 대화’ 구상에 가까워 보인다. 

이날 한국 국제교류재단 등이 워싱턴DC에서 주최한 ‘환태평양 시대의 한·미 파트너십 재구상’ 토론회에 참석한 틸러슨 장관은 “우리는 언제든지 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전제조건 없이(without precondition) 첫 만남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 일단 만나자”라고 말했다.  

“그런 후에 우리가 로드맵을 그리기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이 당신의 (핵)프로그램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테이블에 올 때만 우리가 대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그것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해왔다.”

틸러슨 장관은 “일단 만나서 날씨 얘기라도 하자”고 했다. “당신이 흥미가 있다면 사각 테이블인지 둥근 테이블인지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다.” 다만, ‘탐색적 대화’가 진행 중일 때 도발은 없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우리는 ‘조용한 시기(a period of quiet)’가 필요하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틸러슨 장관의 발언은 “(북한과의 대화는) 시간 낭비”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과 엄청난 거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틸러슨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입장 차이로 인해 계속 사임설에 시달리고 있다. 

<CNN>에 따르면, 이날 오전 국무부 직원들과의 대화에서 틸러슨 장관은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박 캠페인은 한계가 있다면서 “그들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결정은 그들 정권이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현재의 경로를) 계속 간다면, 외교관들에게는 속수무책인 지점을 넘어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허버트 맥마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날 영국 씽크탱크 ‘폴리시 익스체인지’ 주최 행사에 참석해 “(지금이 북한과) 충돌을 피할 최후의 최선의 기회”라며 “시간이 소진되고 있다”고 밝혔다고 <뉴스위크(인터넷판)>이 보도했다. 맥마스터 보좌관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은 김정은 축출이 아닌 한반도 비핵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12일 베이징공항에서 기자들로부터 ‘미국과 직접 대화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자성남 유엔 주재 북한 대사는 “조건이 갖춰지면 대화할 수 있다”고 답했다. ‘조건’에 대해서는 “우리가 요구하는 조건”이라고만 했다.

한국 정부 당국자는 13일 “대화에는 열려 있는 데 결국 ‘비핵화 대화’라는 점에서 맥락은 기존과 같은 것”이라고 과도한 해석을 경계했다. 다만 “평화적 외교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걸 미 국무장관이 강조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 

새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도 ‘국무장관 발언에 대한 성명’을 통해 “북한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는 변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북한은 일본, 중국,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를 불안하게 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북한의 행동은 누구에게도 좋지 않고 북한에도 확실하게 좋지 않다”고 주장했다. 

(추가,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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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언론’ 오보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언론이 오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수록 생존을 위협받게 될 것
 
임병도 | 2017-12-13 08:17:4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시민이 올린 SNS 글을 검증 없이 보도한 동아닷컴

 

12월 11일 동아닷컴에는 <복직 박성호 기자, 신동호 저격 “기왕이면 사표 쓰시지>라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MBC에서 해직됐다 <뉴스데스크> 신임 앵커로 낙점된 박성호 MBC 기자가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을 저격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사는 오보였습니다.

MBC 신동호 국장이 물러난다는 동아일보의 기사를 공유하고 ‘기왕이면 사표도 쓰시지’라는 글을 쓴 사람은 MBC 박성호 기자가 아니라 동명이인인 일반 시민이었습니다.

동아닷컴의 기사가 나오자 여러 매체에서 앞다퉈 같은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당연히 모든 보도 내용은 ‘오보’가 됐습니다.

“MBC 복직 박성호 기자, ‘기왕이면 사표도 쓰시지’ 신동호 저격”(매일경제)
“‘앵커 낙점’ 박성호 기자 ‘신동호, 기왕이면 사표도’”(데일리안)
“뉴스데스크 박성호 앵커, 신동호 국장 교체에 ‘기왕이면 사표도 쓰시지’”(아시아경제)
“복직 박성호 기자, 신동호 국장에 ‘기왕이면 사표도’ 일갈”(스포츠 서울)

이런 오보가 나오게 된 배경은 최승호 PD가 MBC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과거 언론 부역자들에 대한 거취 문제가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언론은 이들의 싸움을 부추기려고 했고, 때마침 MBC 기자와 같은 이름의 계정에 글이 올라오자 옳다구나 하고 검증 없이 쓴 것입니다.

언론의 오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오보는 사라지지 않을까요? 오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언론이 여론을 어떻게 조작하려고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북풍을 위한 외신의 오역’

 

▲연합뉴스는 트럼프 대통령과 페리 전 미국 국방 장관의 말을 오역 보도했다.

 

연합뉴스는 12월6일 <페리 전 美국방 “北, 실전형 ICBM보유때까지 시험발사 안멈출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미국의 전직 국방 장관이 무기 관련 세미나에서 ‘미국과 일본이 독립적인 핵전력을 갖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보도했지만, 이 기사는 오보였습니다.

특히 발언 당사자인 월리엄 페리 전 장관은 직접 트위터에 연합뉴스와 조선일보 등을 지목하며 “나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어떤 나라에서든 핵무기 배치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연합뉴스 워싱턴 특파원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서 기름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Long gas lines forming in North Korea)라며 북한 상황이 ‘나쁘다’고(Too bad!) 말한 내용을 ‘가스관’이라고 오역한 적도 있습니다.

기레기 대참사,트럼프 트윗 ‘오역’을 그대로 받아쓴 언론사들

외신 오역이 발생하는 이유는 북한과 관련한 일명 ‘북풍’ 때문입니다. 북한과 관련한 기삿거리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보도하니 오역과 오보가 난무합니다. 단순 오역의 문제가 아니라, 북풍을 통해 정치적 여론을 형성하려는 의도로도 풀이될 수 있습니다.


‘오보라도 괜찮아, 노무현만 죽일 수 있다면’

 

▲참여정부 시절, 조선일보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왜곡 보도했다.

 

오보 사례를 조사하면 제일 많이 나오는 언론사 중의 하나가 ‘조선일보’입니다. 참여정부 시절, 아니 훨씬 이전부터 조선일보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오보를 수십 차례 쏟아냈습니다.

2004년 조선일보는 <검찰 두 번은 갈아 마셨겠지만>이라는 제목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의 측근 비리 수사에 불만을 나타냈다고 보도했습니다. 검찰 수사권의 독립을 강조했던 노무현 대통령을 무너뜨리는 보도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5년 조선일보는 “확인 결과 (갈아 마시겠다는) 발언을 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바로 잡는다”며 정정 보도를 했습니다.

조선일보는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 책임 있습니다. 회피하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민생파탄 책임 없다”라고 보도했습니다. AP통신의 기사를 인용해 노무현 대통령이 ‘수개월 간에 걸친 비판’을 받았다고 보도했지만, AP통신 원문에는 노 대통령이 ‘악의적인 비판을 받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분명 오보임을 알면서도 조선일보가 왜곡 보도를 한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매장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악의적인 왜곡 보도가 연일 언론에 등장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 시절 내내 ‘무능한 대통령’으로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소릴 들었습니다.


‘속보 경쟁, 검증 따윈 필요 없어’

 

▲ 메르스 사태 당시 보건복지부는 한국일보의 오보를 지적했다. 그러나 YTN은 해명 자료가 나온 뒤에 오보를 냈다. 연합뉴스는 기상청 직원의 통지문을 검증 없이 보도했다.

 

재난 사고 때마다 오보는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세월호 참사 때는 ‘전원 구조’라는 오보가 나와 국민의 분노를 유발했습니다.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던 2015년 6월 11일 저녁 8시 30분경 YTN은 ‘메르스 감염 삼성병원 의사 사망’이라는 속보를 내보냈습니다. 메르스 감염 사망자가 대부분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기에 젊은 의사의 사망 소식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그러나 YTN의 뉴스 속보는 오보였습니다.

YTN보다 먼저 오보를 낸 언론은 한국일보입니다. 한국일보는 오후 6시 33분 ‘메르스 감염 삼성서울병원 의사 뇌사’라고 보도했습니다. 이후 보건복지부는 8시 10분 해명자료를 배포했습니다. 그런데도 YTN은 검증 없이 8시 30분에 오보를 냈습니다.

2016년 연합뉴스는 강원도 횡성에서 6.5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속보를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지진은 횡성이 아니라 에콰도르에서 발생했습니다. 기상청 직원이 실수로 보낸 통지문을 검증하지 않고 보도해서 난 오보입니다.

포털사이트로 뉴스를 소비하는 시대에서 먼저 속보를 내는 언론사는 수십 만의 조회수를 선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검증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무조건 포털 사이트 메인에 배치될 수 있고, SNS에 공유될 수 있다면 오보라도 괜찮습니다. 이제 언론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클릭 수 ‘장사를 하는 인터넷 회사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오보’

▲ 해외 언론은 오보를 낸 기자에게 징계를 내리고, 방송사 사장 등은 오보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도 했다.

2015년 1월 조선일보는 ‘지상파 광고총량제’ 도입을 비난하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종편을 운영하는 조선일보 입장에서 광고가 지상파에 몰린다면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 기사는 자사 언론사를 보호하기 위한 오보였습니다.

오보를 낸 기사의 지면을 보면 대문짝만합니다. 그러나 정정 기사는 구석에 아주 조그맣게 나옵니다. 왜 정정기사는 오보의 크기만큼 나오지 않을까요? 자신들의 실수를 드러내기 싫다는 언론의 오만함입니다.

트럼프 관련 오보를 낸 미국 ABC방송은 담당 기자 브라이언 로스에 대해 1개월 정직 징계를 내렸습니다. 일본 니혼TV 사장은 허위 증언에 따른 단 한 건의 오보에 책임지고 사퇴를 했습니다. 정치인 성범죄 오보를 보도한 영국 공영방송 BBC 사장 조지 엔트위슬은 “방송국의 최고 편집권자로서 ‘뉴스나이트’가 보여준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unacceptable) 언론 보도에 대해 책임지고 사퇴하는 것이 명예로운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라며 사퇴했습니다.

오보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 언론은 오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누구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기자들은 처벌도 없고 징계도 무겁지 않으니 오보를 내도 무감각해집니다. 당연히 오보가 사라지지 않고 또 나옵니다.

과거에는 오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민들은 캡처 또는 특정 사이트의 페이지를 영구 저장하는 방식 등을 통해 오보를 기록하고 공유하기도 합니다. 가짜 뉴스가 무분별하게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뉴스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과 판단력은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사는 ‘저널리즘’의 원칙과 기본을 지키기보다 ‘클릭 장사’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언론이 오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수록 신뢰도는 떨어지며, 생존을 위협받게 될 것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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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차 막아 세우고, 크레인에 오른 '깡패 신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7/12/13 11:48
  • 수정일
    2017/12/13 11:4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작은책 올해의 인물] 길 위의 신부, 문정현

17.12.13 09:38l최종 업데이트 17.12.13 09:38l

 

이 글은 직접 취재 외에 <한겨레> 2010년 6월 1일자부터 10월 8일자까지 김중미 작가가 구술 정리한 '다시 길을 떠나다', <통일뉴스>의 '문정현-죽음을 건너 순교자의 삶 살고파', <인물과 사상>(2008년 3월호) 등을 참고했습니다. -기자말 
 

전쟁은 생명을 죽이는 끔찍한 폭력이다 11월 8일 광화문에서 서각기도를 하시는 문정현 신부
▲ 전쟁은 생명을 죽이는 끔찍한 폭력이다 11월 8일 광화문에서 서각기도를 하시는 문정현 신부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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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9일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옆에는 문정현 신부가 13일째 서각 기도를 하고 있었다. 트럼프 방한에 반대하는 기도였다. 문정현 신부 앞에는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온몸으로 깎는 반전 평화 새김展', 그 뒤로는 '반전 평화'라고 글자가 쓰인 커다란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문정현 신부는 나무에 새긴 글자를 조각칼로 정성스럽게 파고 다듬었다. '평화로운 한반도 나라다운 나라', '반전 평화', '전쟁은 생명을 죽이는 끔찍한 폭력이다'라는 글자를 새겼다. <작은책>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올곧게 한길을 걷고 있는 문정현 신부를 올해의 인물로 뽑았다. 문정현 신부의 일생을 엿본다.
   
문정현 신부는 어떤 사람일까. 1990년 폭로된 보안사의 디스켓에 담긴 그의 신상은 이렇다.

 

"개인 번호 169 문정현. 전북 지역의 대표적 문제 인물. 외고집에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별명은 '깡패 신부'. 3, 4공화국 당시 반정부 활동으로 수감." 

문 신부는 그 뒤로 깡패 신부, 전문 시위꾼 등으로 불렸다. 하지만 문정현 신부는 누구보다도 생명과 평화를 사랑한다. 생명을 경시하고 폭력을 숭배하는 자들 때문에 1966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거의 일생을 길에서 보냈다. 아직도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와 싸우고 있고, 미 공군기지로 의심되는 제2공항 건설을 저지하는 싸움을 하고 있다. 
 

문정현은 1940년 8월 20일, 전북 익산시 황등면 황등리에서 태어났다. 옛날 지명이 이리였던 현 익산시는 충남 논산과 전북 군산 사이에 있다. 황등면은 조그만 마을이다. 서쪽으로는 아직도 전라선 완행열차가 다니는 황등역이 있고 동쪽으로는 KTX 기찻길이 지나가고 있다. 

문정현의 집안은 5대째 천주교 가정이었다. 친가 할아버지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 무릎'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는 주일이 되면 황등에서 익산(당시 이리) 시내까지 8킬로미터가 되는 길을 걸어서 미사를 다녔는데 문정현도 늘 따라다녔다. 

열 살 무렵 익산본당(이리본당, 지금의 창인동성당)의 이기순 신부가 문정현을 보더니 세례명을 불렀다.

"바르톨로메오, 이리 와 봐라. 너 신부님 안 될래? 신학교 가라."

문정현은 어리둥절했지만 그 말이 머릿속에 탁 박혔다. 문정현은 그때부터 신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문정현이 열 살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1950년 6월 말께 남하한 인민군과 남쪽 경찰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실탄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나고 대포 소리가 요란했다. 곧 이어 살던 마을은 인민군 세상이 되었다. 문정현이 다니던 황등초등학교는 인민군 의용군 훈련소가 됐다. 

인민군들이 떠나자 다시 미군이 들어와 황등초등학교를 차지했다. 미군들은 동네 아이들을 뽑아서 설거지를 시켰다. 아이들은 난로에 주전자 물을 데워서 설거지를 해 주고 시레이션(C-Ration)이라는 미군 전투식량과 다른 먹을 것들을 받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앞에서 미군 두 명이 문정현을 불렀다. 흑인과 백인 병사였다. 손짓 발짓으로 문정현을 언덕배기에 세우고 머리 위에 국방색 깡통을 올려놓았다. 문정현은 군것질거리라도 생길까 싶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그들이 5~6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카빈총을 꺼내더니 머리 위에 올려놓은 깡통을 겨냥해서 쏘는 것이 아닌가. 문정현은 혼비백산했다. 미군 병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훗날 문정현은 그 미군 녀석의 하얀 이가 두고두고 떠올라 화가 났다.

문정현은 신학교를 거쳐 1958년,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평범한 신학생이었던 문정현은 순종하는 모범생이었다. 신학교는 보수적이고 엄격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정치의식이나 사회의식은 전무했다. 철학과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지만 문정현은 그냥 군사정변이 일어났나 보다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군에서 전역한 뒤 2년 만에 복학을 했다. 

문정현은 1966년 12월 16일, 스물일곱 살에 전주 중앙성당에서 한공렬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을 받을 때 선택한 성서 구절은 '주의 제단에 돌아가리라'였다. 사제로서 첫 미사는 바로 다음 날 고향 본당인 이리의 황등성당에서 올렸다.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첫 부임지는 전주 전동성당이었다.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일본에서 김포공항으로 오던 중 행방불명이 됐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연행된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민청학련의 관련자 180여 명이 불온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 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한 것이다. 1972년 10월 '유신 체제 발족'과 1973년 8월 8일에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 반대 투쟁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이 반대자들의 뿌리를 뽑고자 조작한 사건이었다. 

1974년 5월 27일 이철, 김지하를 포함한 55명이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으로 사형과 징역 2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민청학련에 자금을 대 준 혐의로 윤보선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 지학순 주교가 구속됐다. 문정현은 "감히 주교를 구속해?" 하는 분노로 정권의 실체와 사회를 깨닫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정현은 명동의 서울대교구청을 갔다. 김수환 추기경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서자 초췌한 모습으로 바닥에 앉아 있던 부인들이 문정현이 입고 있는 신부복의 로만칼라를 보고는 대뜸 서명용지를 내밀었다. 그이들은 1964년 8월 박정희가 조작한 인민혁명당(인혁당) 주범으로 몰린 우홍선·이수병·김용원 씨의 부인들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0년 뒤인 1974년 4월 25일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으며, 이들이 인민혁명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의 국가 전복 활동을 지휘한 것'으로 발표했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구속된 인혁당 관련자 23명 가운데 8명은 사형, 나머지는 무기에서 15년까지 중형을 받은 상태였다. 이들은 빨갱이로 몰려 그 가족들까지도 친척과 이웃들에게 기피 인물이 되어 있었다. 서명용지엔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윤보선 전 대통령, 윤형중 신부의 서명이 있었다. 문정현은 두말없이 서명을 했다.

"그때 나는 인혁당에 대해 처음 들었다. 이럴 수가 있나. 그때부터 나는 성당에서 강론할 때 인혁당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바로 정보부, 경찰, 보안대 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밀착 감시였다. 전주 효자동 성당 주임 신부로 있었는데 내 침실 창문 바로 밑에서 나를 감시하고 길 건너 남의 집 담, 소금집이라는 데가 감시 본부였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수시로 내 방문을 따고 들어와서 뒤졌다. 통장을 찾으려고. 솔직히 난 통장이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회에 발언하기 시작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을 판결하는 날이었다. 그때 문정현 신부는 대법원에 와 있었다.

"BBC 방송하고 국제앰네스티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취재하러 왔는데 난 통역과 안내를 맡았다. 법정에 올라가는데 판결이 끝나고 가족들이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들이 들고 있는 가방이랑 물건들을 가지고 법대고 뭐고 막 까무러치듯이 휘젓고… 사복 경찰들이 몸부림치는 유족들을 끌어내리고, 처절했다."

그날 문 신부를 비롯한 다른 신부들은 응암동 성당에서 잤다. 새벽에 유족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함세웅 신부가 받았는데 얼굴이 노래졌다. 처형한 거다. 우리는 바로 서대문구치소에 갔다. 전투경찰이 꽉 차고 유족들이 와 있었다. 선고하고 바로 사형시킨 거니까. 거기서 몸부림치고 유족들 끌어안고. 그런데 시신 한 구를 태운 장의차 한 대가 응암동로터리에서 잡혔다고 하더라. 택시 타고 쫓아갔다. 장의차를 못 가게 하루 종일 씨름했다. 함석헌, 윤보선 씨 부인, 문동환 목사. 또 누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없었으니까. 나는 장의차 바퀴 바람을 빼기도 하고, 껌을 씹어서 키를 넣는 구멍에 집어넣기도 하고, 신문지를 말아서 머플러(배기통)에 집어넣기도 했지. 경찰이 나를 끄집어내려고 기를 썼다."

경찰은 결국 크레인을 동원해 그 장의차를 달고 가려고 했다. 

"정권은 고문한 흔적을 없애려고 벽제화장터에 넣으려고 했던 거지. 나는 크레인을 타고 올라가 그 위에서 연설했다. '인혁당은 조작이다, 하루도 안 돼서 죽이는 법이 어딨냐'고."

경찰이 문정현 신부를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아스팔트로 떨어졌다. 무릎 연골이 파열됐다. 문 신부는 그때 다친 무릎 때문에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장애인이 됐다.

문정현 신부는 종로5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관에서 목사들이 진행하는 목요기도회를 알게 됐다. 그해 7월부터 시작된 기도회에는 여러 성직자들과 인혁당, 민청학련 학생 가족들이 함께했다. 문정현은 사제단의 시국 미사나 기도회를 빠지지 않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며 억울함을 알렸다.
 

 문정현 신부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감행된 ‘3.1 구국선언’에 참여한 대가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수인번호 1003번이 그의 이름이었다.
▲  문정현 신부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감행된 ‘3.1 구국선언’에 참여한 대가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수인번호 1003번이 그의 이름이었다.
ⓒ 평화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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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구국선언, '당당히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김지하 시인 구명 운동을 하고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는 함께 뜻을 모아 1976년 3월 1일 저녁 6시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 미사를 거행했다. 문정현 신부는 2부 구국 기도회에서 김지하 시인의 어머니가 쓴 호소문을 대신 읽었다. 그리고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했고 마지막으로 이우정 교수가 '3·1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했다.

유신정권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3·1절 미사를 '3·1 명동사건'이라고 이름 붙이고 국가 전복 내란을 기도했다며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중앙정보부는 3·1절의 종교 행사를 개신교와 가톨릭의 성직자들을 한꺼번에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 경찰은 문정현 신부가 자고 있던 전주 해성학교 기숙사에 들이닥쳤다.

"기숙사에서 잠자는데 새벽에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됐다. 마당까지 다 파헤쳤더라. 전주경찰서에서 서울시경으로 갔다. 거기 들러서 남산 육본 밑에 한성산업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곳으로 갔다. 2층집이었다. 몇 사람이 와 있었다. 얻어맞지는 않았다. 안기부 요원 세 명이 붙어서 며칠 동안 잠을 한숨도 안 재웠다. 

다시 중정 6국으로 끌고 가더라. 거기서 4일 밤낮으로 조사받았다. 옆방에서도 누군가 조사를 받는지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에 겁이 나기보다는 더 이가 갈리고 용기가 났다. 다시 검찰청으로 가서 구속됐다.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 신부 셋이 모두 구속됐다는 소문을 거기서 들었다."

문정현 신부는 연행된 뒤인 두 달 만에 면회가 허락됐다. 동생 문규현이 신부 서품을 받는 날인 5월 3일, 어머니와 문규현 신부가 면회 와 처음으로 만났다.

"언젠가는 어머니를 뵐 텐데 울까 봐 걱정 많이 했다. 어머니가 나를 보고는 쫓아오더니 허리를 잡고 '우리 아들 김대건 신부 돼야 돼' 아, 참. 대견한 어머니다. 울고 그럴 줄 알았더니. 대견한 어머니다. 평생 우리를 위해서…." 

문정현 신부가 감옥에 있던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다. 문정현 신부는 '유신정권'이 종지부를 찍는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꼈지만 곧 공포심이 생겼다. 철창문이 열릴 때마다 '나를 데려가려고 오는 건가?' 무서움에 떨었다. 좁은 방을 뱅뱅 돌며 기도를 했다.

"'내 생명을 구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내가 끌려가 죽더라도 비굴하지 않게, 당당하게 죽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아무 일 없이 1979년 12월 8일 문정현 신부는 석방됐다. 1980년 1월 16일 전주 중앙성당으로 발령이 났다. 전주 중앙성당은 주교좌성당이었다. 감옥에서 갓 나온 문정현 신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것은 김재덕 주교가 대외적으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을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문정현 신부는 전두환 정권에서도 굽히지 않았다. 미사 때마다 정치에 군인들이 나서면 안 된다고 말했다. 미사 중에 정보 계통 사람들이 눈에 띄면 미사를 중단하고 내쫓아 버렸다. 신자들 중에는 겁먹는 사람도 있었고, 문 신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1985년 문정현 신부는 전주 중앙성당에서 전북 장수군 계내면 장계리에 있는 장계성당으로 부임했다. 

"가톨릭 농민회 활동을 많이 했다. 함평 고구마 사건부터 노풍 피해 보상 운동, 취락 구조, 소 파동 싸움도 굉장했다. 군청을 점거하고 경찰지서에다 농민 깃발을 꽂고, 잡혀가고, 꺼내 오느라고 단식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 시골 바닥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성당에 최루탄이 날아 들어오고… 무전기를 뺏긴 경찰이 소방차를 가져와서 성당 화장실을 퍼 내고… 피 터지게 싸웠다."

'분신 같은' 오두희와의 만남, 노동운동의 시작 

문정현 신부는 1988년 익산(당시 이리) 창인동 본당 신부로 부임했다. 거기서 '익산 노동자의 집' 실무자로 온 오두희를 만났다. 학생운동 이후 '전북 지역 최초 여성 위장 취업자'였다. 수배 생활은 길었다. 꽤 오랫동안 공권력을 피해 성당에 숨어 살았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이른바 '유화 국면'이 시작됐을 때 많은 수배자들처럼 오두희도 수배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가톨릭 전주교구에서 운영하던 '군산 노동자의 집' 사무국장이 됐다. 지금도 평화바람에서 함께하고 있는 그는 26년 넘도록 분신처럼 문정현 신부의 사목 활동을 받쳐 준 동지가 되었다. 

그 무렵 익산에서는 쌍방울·한성·경성고무 따위의 크고 작은 사업장에서 노조 결성과 어용노조 반대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의 집'으로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새로 부임한 문정현 신부에게 쉽게 신뢰를 보이지 않았다. 문정현 신부 역시 핍박당하는 노동자들 속에 있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소통에 미숙한 점이 많았다. 노동자의 집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마음에 안 들 때도 많았다. 어느 날 노동자의 집에 들렀다. 사제관 아래 아주 가까이 있던 노동자의 집에서 밤새도록 소주병 부딪치는 소리, '찍찍' 베 찢는 소리가 났다. 화염병을 만드는 소리였다. 참다못해 인터폰으로 소리를 질렀다. "밤새워 화염병을 만들 거야?" 노동자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집회 나가잖아. 경찰이 페퍼포그 쏘잖아. 시위 현장에서 어린 노동자들이 경찰한테 맞아 다친 채로 끌려가는 걸 보면서 '화염병 더 없냐? 왜 그거밖에 안 만들었어?' 하고 소리쳤어. 이율배반이야. 당하다 보니까 노동자 계급성을 깨달아. 그 사람들한테 뭐 이익, 도덕을 따지냐. 굼벵이가 밟혔어. 꿈틀거리는 건데. 이런 의식으로 변하더라고."

문정현 신부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노동자들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노조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코디언을 배우고 연주하게 된 것도 노동자들과 어울리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때 한참 유행하던 행진풍의 노동가요를 멋지게 연주해 노동자들과 같이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시위 현장에서는 격려해 주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성당은 늘 경찰의 사찰 대상이었고, 집회의 마지막 집결지는 항상 그곳이었다. 그때는 창인동성당이 '노동자 투쟁의 메카'라는 소리도 들었다. 노동자들이 성당으로 모이면 경찰들은 성당을 향해서 최루탄을 쏘아 대고, 노동자들은 돌멩이로 막으며 대치를 했다. 그때마다 문정현 신부는 노동자의 편에 서서 앞막이를 충실히 했다. 그렇게 차츰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어 갔다.

조성만의 유서, 실형 받은 동생... "이겨 내자"

5공화국이 막을 내릴 무렵 문정현 신부는 또 다른 의식을 일깨워 준 존재를 만난다. 그이가 직접 영세를 주었던 제자, 조성만이다. 조성만은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던 성당 벗들을 바라본 뒤 할복 투신했다. 스물넷 짧은 삶이었다. 유서에는 '한반도 통일, 미군 철수, 군사정권 퇴진, 서울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서울시청에서 장례 행렬이 100만 인파였다. 모교에 왔고, 집을 들러서 망월동으로 갔지. 나보다도 걔가 지금도 눈을 부릅뜨고 있다니까. 당시는 내가 성만이의 스승이었지만 지금은 성만이가 나의 스승이지."

조성만의 죽음은 통일 논의에 물꼬를 텄다. 주한미군 문제와 통일 문제를 하나로 바라보게 해 준 계기가 됐다. 그동안 문정현 신부가 매달려 왔던 우리 사회의 모든 부조리들이 결국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됐음을 깨닫게 됐다. 그 무렵 임수경이라는 대학생이 방북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마침 문정현 신부의 동생 문규현 신부는 미국 메리놀 신학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새로운 부임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문정현은 정의구현사제단으로 하여금 문규현 신부를 이북으로 보내 임수경과 함께 분단의 장벽을 넘어오게 했다. 문규현은 판문점에서 돌아오자마자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3년 5개월 실형을 살아야 했다. 

"문규현 신부가 임 씨와 함께 걸어서 휴전선으로 들어온 뒤에 감옥에 갇혔을 때 어머니와 면회를 갔지. 몸이 반쪽이더라고. 이게 다 내 작품인데, 피눈물이 흘렀지. 동생을 사지로 몰아넣었지만 자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야. 어머니는 김대건 신부 이야기를 했고, 나는 '고생했다, 이겨 내자'라고 한마디 했지."

문정현 신부는 1995년 메리놀 신학교에서 신학석사(MTH) 학위를 받은 뒤에 페루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해 8월 말 전북 군산의 오룡동성당으로 발령이 났다고 연락이 와서 서둘러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군산에서는 미군기지 활주로 사용료 문제가 불거져 있었다. 우리 민항기들은 군산 미군기지 활주로를 사용했고 사용료와 유지보수비를 미군 측에 지불해 왔다. 그런데 1997년 초, 미군 측은 그 비용을 4배 이상 올려 달라고 요구했다.

"말이 되지 않지. 우리 땅을 공짜로 내주고 기한도 없이 사용하면서 우리 민항기가 활주로를 사용한다 해서 사용료를 받고 유지보수비까지 내고, 거기다 또 4배까지 올려 달라 한단 말인가?"

문정현 신부는 '활주로 사용료 반대를 위한 군산시민모임'을 조직해서 매주 금요일 오후 2시에 집회를 하기 시작했다. 문 신부는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했다. 반미 투쟁의 시작이었다. 결국 활주로 사용료 인상안 일부는 철회됐다. 문 신부는 또다시 1998년 5월 '군산 미군기지 우리땅 찾기 시민모임'을 만들었다. 

문정현 신부는 매향리 폭격장 폐쇄 투쟁과 3년간의 군산 미군기지 싸움에서 비로소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소파)의 불평등을 실감했다. 미군기지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피해나 미군의 범죄에 대해 한국 정부는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한국정부는 군산 미군기지에 무단침입을 했다는 혐의로 문정현 신부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런 모순은 군산만의 일이 아니라 미군기지가 있는 이 땅 곳곳의 문제이며, 오키나와·괌·하와이·타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정현 신부는 이런 모든 원인이 소파(SOFA), 즉 한미행정협정 또는 주둔군지위협정을 불평등하게 맺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소파 개정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끈질긴 투쟁 끝에 2001년, 소파는 또 한 차례 개정됐다. 살인, 강간, 유괴 등 12개 중범죄를 저지른 미군 범죄자의 신병 인도 시점이 '재판 종료 후'에서 '기소 시점'으로 바뀌었고, 미군은 한국의 환경 법령을 존중한다는 특별 양해 각서를 체결했다. 소파의 불평등 조약이 어느 정도 개선된 셈이다. 그 이후 미군 범죄가 꾸준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문정현 신부가 바라는 세상은 아직 아니었다. 2002년 여름, 미군 장갑차 사고로 두 명의 여중생이 죽었다. 한국은 소파협정을 맺은 이후 처음으로 미군 측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지만 미군 측은 이를 거부한 채, 자기들끼리 재판을 했고 가해자들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2002년 겨울, 분노한 시민들 10만이 광화문 일대에 모여 촛불 시위를 했다. 문정현은 그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봤다. 언젠가는 이 땅에도 평화가 흐를 것이라 믿었다.

"약장수처럼 평화를 공유하자" 평화유랑단의 시작 

그 무렵 미국이 9·11 사건을 빌미로 석유를 겨냥한 이라크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국정부에 파병을 요청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다. 국익을 위해서 전투 병력이 아닌 의료·후방 지원을 맡는 지원부대를 파병한다고 결정했다. 문정현 신부는 놀랐다.

"우리도 이미 전쟁을 겪어 그 비극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분단이 된 상태이고, 이로 인해 아픈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박정희 정권 때도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전쟁에 파병한 아픈 역사가 있다. 그런데 또다시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 국익을 앞세워 참여한다는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였다. 정부가 파병을 하면 우리는 전범국가의 국민이란 오명을 써야 했다."

문정현은 평화유랑단을 만들고자 했다. 옛날 '약장수'처럼 사람들이 모인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담을 나누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유랑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각 지역의 환경운동단체·노동운동단체·인권운동단체·사회복지운동단체를 만나서 평화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자, 또 각 지역의 현장에서 판을 벌여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람이 모이면 같이 이야기를 나누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하려니 음향시설도 필요하고, 영상시설도 필요하고, 또 기본적으로 흥을 돋울 수 있는 악기도 필요했다. 다행히 70년대산 독일제 벤츠 미니버스를 마련했다. 미술행동센터에서는 차에 그림을 그려 주어 일명 '꽃마차'란 평화유랑단의 마스코트가 탄생하게 됐다. 

인터넷을 이용해 단원을 모았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였다. 생태·환경·인권운동을 하던 사람, 아나키스트, 윤여관 선생, 노래 잘하는 보리, 고철. 전주·인천·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7명이 모여 '평화유랑단 평화바람'을 결성했다. 거기에 문정현과 오두희까지 아홉 명이 2003년 11월 14일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발대식을 했다.
 

9월 13일, 국방부는 빈집을 철거하겠다며 다시 포클레인과 용역깡패들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대추리 노영희 할머니는 경찰을 막아세우고 "당신들도 낳아 길러준 부모가 있을 텐데, 부모같은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절규했다. 국방부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마저 부수길 서슴지 않았다. 9월 13일, 국방부는 빈집을 철거하겠다며 다시 포클레인과 용역깡패들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대추리 노영희 할머니는 경찰을 막아세우고 "당신들도 낳아 길러준 부모가 있을 텐데, 부모같은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절규했다. 국방부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마저 부수길 서슴지 않았다.
▲ 대추리 노영희 할머니 지난 2006년 9월 13일, 국방부는 빈집을 철거하겠다며 대추리에 다시 포클레인과 용역깡패들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대추리 노영희 할머니는 경찰을 막아세우고 "당신들도 낳아 길러준 부모가 있을 텐데, 부모같은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절규했다. 국방부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마저 부수길 서슴지 않았다.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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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까지 옮긴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

평택에 미군기지를 확장한다고 했다. 문정현 신부가 2004년 12월 평택 대추리에 직접 들어가서 들어 보니 주민들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군이 들어와 군용 활주로를 만든다고 쫓아냈다. 새로 마을을 일궈 정착하나 했더니 1952년 한국전쟁 때 다시 미군 활주로를 연장한다고 해서 쫓아냈다. 

보상 따위를 꺼낼 수도 없는 시절이어서 미군들이 마구잡이로 불도저로 밀어 버렸다. 그래서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갯벌에다 움막을 짓고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새로 땅을 만들어야 하니 일손이 모자라 도두2리에서는 네 살짜리 아이를 바구니에 넣어서 나무에 걸어 놓고 일하다가 아이가 도랑에 빠져 죽은 일도 있었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황새울을 문전옥답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대추리에는 그때 생겨난 '황새울영농단'이 있었다. 김지태 이장을 중심으로 김택균·신종원 세 사람이 나서서 마치 형제처럼 이심전심으로 일을 했다. 영농단에는 온갖 농기계와 연장이 다 갖춰져 있어 그 넓은 땅에 짓는 농사를 모내기부터 추수까지 기계로 할 수 있고, 농기구도 스스로 고쳐 쓸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함께 일하며 밥을 먹고 술도 한잔 마시며 구수한 입담을 나누었다. 대추리만의 고유한 풍경, 오랫동안 만들어진 마을 공동체와 문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삶 자체가 평화였다. 그 평화를 빼앗긴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새울영농단의 세 지도자는 공동체를 보존하려고 애썼다. 이들은 2003년 7월 1일 대추리·도두2리·안정리 주민들로 '미군기지 확장 반대 평택시 팽성읍 대책위원회'를 꾸려 줄기차게 투쟁했다. 그러던 2004년 9월 1일, 주민 동의 없는 국방부의 일방적인 특별법 공청회에서 항의하던 주민 대표들과 평택 지역 사회단체 회원들이 경찰에 강제 연행되었다. 그날 저녁부터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은 '우리땅 지키기 팽성주민 촛불행사'를 시작했다.

문정현 신부는 그동안 어떤 투쟁에 참여하든 이름만 얹고 마는 형식적인 투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는 곳까지 옮겨서 싸운 적은 없었다. 대추리 주민들과 함께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하기로 결정한 뒤, 아예 마을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2004년 12월 문정현 신부, 오두희, 여름, 반지, 밥, 마후라, 해밀, 팥공, 두시간, 이렇게 모두 아홉 명이 대추리로 들어갔다. 

정부는 2006년 5월 4일 '여명의 황새울 대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행정대집행을 저질렀다. 새벽 5시, 동틀 무렵 포클레인을 앞세운 용역 700여 명과 12000명이나 되는 전투경찰이 새까맣게 몰려왔다. 군 병력도 2700명이나 됐다. 아비규환이 일어났다. 평택 지킴이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대추초등학교에서 끌려 나왔다. 

노인들이 울부짖고 서러움과 분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까무러쳤다. 부상자가 200명이 넘었고, 연행된 사람이 600명이 넘었고, 200여 명이 입건되고 40여 명이 구속됐다. 다음 날 다시 전투경찰이 마을로 몰려와 군화를 신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는 사람들을 체포해 갔다. 935일 동안 들었던 평화의 촛불이 꺼졌다. 노무현 정부 때였다.

문정현 신부는 청와대 앞 화단에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하지만 세상은 대추리 주민의 삶이나 그의 단식에 관심이 없었다. 월드컵 응원하는 소리만 들렸다. 청와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문 신부는 21일 만에 단식을 접었다. 공황 상태에 빠졌다.

대추리에서 지적장애인들의 공동체인 '작은자매의 집'으로 돌아왔다. 텃밭을 일구어 보려고 했지만 힘에 부쳤다. 약해지는 자신이 서글퍼졌다. 문정현 신부는 작은자매의 집을 그만두고 은퇴하기로 했다. 교구의 허락을 받고 난 뒤에 2008년 1월 24일, 은퇴 미사를 했다. 

작은자매의 집을 눈물로 떠난 뒤 그는 그쪽으로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 마음을 다스려 보자고 대추리에서 어깨너머로 본 서각을 해 보기로 했다. 대추리에서 만난 이윤엽 작가가 인사동에 함께 가서 서각 도구를 마련해 주었다. 문정현 신부는 '껍데기는 가라',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같은 문구를 붓글씨로 써서 서각을 했다. 

문정현 신부는 군산 옥봉리로 내려갔다. 2007년 1월 23일 무죄로 판결난 인혁당 사건으로 받은 배상금으로 허름한 집을 사서 수리했다. 그해 3월 15일 집들이를 하고 오두희, 구중서, 딸기와 함께 공동체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제주 서귀포 강정마을에서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제주 해군기지 유치 결정을 내린 뒤, 건설을 강행하고 있었다. 강정마을 해안엔 길이 1.2킬로미터, 너비 150미터에 달하는 보기 드문 거대한 단일 용암너럭바위로서, 용천수가 솟아나 국내 유일의 바위 습지를 형성하고 있어 매우 보전 가치가 높은 구럼비 바위가 있었다. 

문정현 신부는 2011년 7월 6일 제주도 강정마을로 이사했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 이어도로 000-0. 문정현 신부의 새로운 주소지다. 문 신부는 이날 새벽 5시에 군산 집에서 일어나 오전 10시 반에 장흥 노력항에서 선박 오렌지호를 타고 2시간 가까이 비안개를 헤치고 제주 성산포에 도착했다.

"정부와 해군에 대한 분노보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보다, 국가 권력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강정마을 주민들의 절규가 내 가슴을 치고 내 몸뚱이를 제주로 향하게 했다."
 

 평화바람 식구들과 시민들은 아직도 해군기지 앞에서 깃발을 들고 있다.
▲  평화바람 식구들과 시민들은 아직도 해군기지 앞에서 깃발을 들고 있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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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에서 활동하는 참모' 오두희는 망설였다. "대추리의 아픔이 너무 컸고, 국가가 한다고 하면 할 것이기에 신부님 혼자 갔다 오시라"고 했다. 며칠 뒤 모두가 싸움이 끝나 간다고 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이제야 공간이 열리고 있다"는 걸 역설하며, "진짜 평화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얘기해 나가겠다"고 말하면서 강정으로 갔다. 오두희는 강정마을 투쟁에서 시급한 건 '재정 사업'과 '장기 투쟁 대비'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하는 건 주민들 지원이다, 언젠가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정현 신부와 평화바람 식구들은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립 반대운동을 지원하려고 '강정평화상단'을 꾸렸다. 평화상단에서는 강정에서 직접 만든 소라와 전복젓갈을 비롯해 참조기젓갈, 다시마, 소금, 고등어를 판매하고 있다. 문정현 신부는 "많은 분들이 한 번이라도 제주 강정에 찾아오면 좋겠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고, 이곳이 콘크리트로 덮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직접 제주에 찾아오기 어려운 분들도 평화상단을 통해 제주 강정 바닷가를 지키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정현 신부와 평화바람 식구들은 2017년 제 18대 선거 때 문재인이 당선되기를 바라면서 선거운동을 했다. 하지만 박근혜가 당선됐다. 오두희는 박근혜가 당선된 뒤 주민등록을 아예 강정으로 옮겼다. 살려고 보니 공간이 필요했다. 2년 동안 준비한 끝에 2015년 '성프란치스코센터'가 완공됐다. 문정현 신부가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해 받은 국가배상금을 종잣돈으로, 시민 모금을 더해 강정에 평화의 거점을 세웠다.

문정현 신부는 해군기지 반대 미사를 하다가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2012년 4월 6일 미사 중 진입한 해경과 몸싸움을 하다 강정포구 방파제 주변에 쌓아 놓은 7미터 높이의 테트라포드(4개 뿔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추락했다. 허리뼈 세 곳이 골절당하는 중상을 입었다. 평소 지병인 심근경색증이 있는데다가 단식 투쟁도 한 적이 있어 쇠약해진 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건강을 회복해 다시 길 위에 섰다.
 

구상금 34억 원 박근혜 정부는 이들에게 구상금 34억 5천만 원을 청구했다. 문재인 정부는 아직 답이 없다.
▲ 구상금 34억 원 박근혜 정부는 이들에게 구상금 34억 5천만 원을 청구했다. 문재인 정부는 아직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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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 해군기지의 이상한 이름

제주 강정 주민들과 문정현 신부는 9년 동안 저항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부는 국가안보사업임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기지 건설을 강행했다. 이에 맞선 강정마을 주민과 활동가들의 저항은 처절했다. 하지만 결국 2016년 2월 26일 제주 해군기지가 들어섰다.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요상한 이름을 달았다. 

농사와 어로 작업밖에 모르던 주민들은 국가안보사업을 방해하는 '종북 세력'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게다가 해군은 해군기지 공사를 방해했다며 강정주민 등을 상대로 34억 5000만 원의 구상권을 청구했다. 기소된 피소송인이 121명이니 1인당 2850만 원가량 되는 돈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둘째 문제다. 중요한 건 "지난 10년 동안 발생한 국가 폭력의 실체"를 밝혀내는 '진상 규명'이다. 진상 규명이 되면 잘잘못이 가려지고 구상권은 자연스레 정리될 것이다. 이들의 투쟁이 정당했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구상권 청구 소송은 철회하고 사법처리 대상자는 사면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바 있다. 

그런데 요즘 국토부가 그 좁은 제주에 제2공항을 세우겠다고 나섰다. 세계자연유산이니 유네스코 3관왕이니 하며 선전하는 중이다. 지난 4월, 김방훈 제주도 정무부지사는 "제주 제2공항 건설 관련 10개 오름 절취 계획은 전혀 없다"고 밝혔지만 주민들의 걱정은 여전하다. 

문정현 신부와 활동가들은 제주 해군기지가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처럼, 미공군기지의 또 다른 위장된 이름으로 '제2공항'이라고 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그래서 제주 시민단체들은 '제주 제2공항 반대 성산읍대책위'를 결성해서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김경배 위원장은 제주 제2공항 건설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 하라고 요구하면서 35일째(2017년 11월 13일 현재)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강정마을 평화미사 2017년 11월 13일 문정현 신부는 다시 강정으로 돌아가셨다. 바로 다음날부터 다시 평화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강정마을 평화미사 2017년 11월 13일 문정현 신부는 다시 강정으로 돌아가셨다. 바로 다음날부터 다시 평화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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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3번째 미사, 그는 어김없이 돌아갔다 

광화문에서 트럼프 방한에 맞서 2017년 10월 26일부터 2017년 11월 11일까지 '길위의 신부 문정현, 온 몸으로 깎는 반전 평화 새김展' 서각 기도를 했던 문정현 신부는 11월 12일 다시 제주 강정마을로 되돌아갔다.

11월 13일, 문정현 신부는 어김없이 해군기지 앞에서 강정 생명 평화 미사를 봉헌했다. 그날이 3833회째였다. 문 신부는 2010년 6월 1일부터 광화문에서 보름 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주며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가 끝난 뒤에는 또 '어김없이' 해군기지 앞,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해군제주기지' 표지판 앞에서 깃발을 들고 있었다.

"해군기지 없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없는 강정마을 강정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앞에서 투쟁하고 있는 문정현 신부
▲ 해군기지 없는 강정마을 강정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앞에서 투쟁하고 있는 문정현 신부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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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월간 작은책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안건모#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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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의 ‘노인 부양’ 9명에서 16명으로 증가

고령화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임병도 | 2017-12-12 08:52:0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서울시가 펴낸 ‘2017서울통계연표’ ⓒ서울시

 

서울에서는 하루 평균 206명이 태어나고, 119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서울시가 공개한 ‘2017 서울통계연보’를 보면 서울시 총인구는 1,020만 4천 명으로 전년 대비 9만3,081명이 감소했습니다.

작년 하루 157쌍이 부부가 됐고, 49쌍의 부부가 이혼했습니다. 781만 명이 지하철을, 428만 명이 버스를 이용했으며, 교통사고로 0.95명이 사망했습니다.

서울시가 펴낸 ‘2017 서울통계연보’를 보면 다양한 통계를 통해 지금의 사회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노인 인구의 증가입니다.


‘ 노인 인구는 증가, 출산은 감소’

 

▲2016년 서울시 인구구조 형태, 70세 이상 인구가 두 번째로 많다. ⓒ서울시

 

2016년 서울시의 평균연령은 41.1세로 2015년 40.6세보다 높아졌습니다. 2005년 35세와 비교하면 6세 이상 높아진 셈입니다. 평균 연령이 높다는 것은 인구의 구성비 중 노인 인구가 증가했음을 의미합니다.

서울시의 인구 구조 형태를 보면 70세 이상 인구가 849,073명으로 45세~49세 인구(893,889명) 다음으로 많습니다.

일일 출생 건수를 보면 2015년 227명에서 2016년 206명으로 거의 20명 가까이 줄어들었습니다. 2001년 251명과 비교하면 무려 46명이나 출산이 줄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으니 당연히 학교에 다니는 인구(만6세~21세)는 2011년 180만 명에서 2016년 150만 명으로 30만 명이나 감소했습니다.

저출산 추세에 따라 어린이집 보육 아동 수도 23만7천 명으로 2015년에 비해 1천 명 가까이 감소했습니다. 어린이집 수도 6,368개소로 전년(2015년 6,598개소)보다 줄었고, 초등학교 교원 1인당 학생 수도 2011년 18.1명에서 2016년 14.8명으로 3.3명 감소했습니다.

결국, 서울시는 태어나는 아이들보다 노인 인구의 증가율이 훨씬 빠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인 부양, 2005년 9명에서 2016년 16.8명까지 늘어났다’

 

▲서울시 연도별 인구구성비 및 부양비 현황 ⓒ서울시

 

‘생산가능 인구’는 15세에서 64세까지의 연령대를 말합니다. 생산가능 인구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유소년(0세~14세)과 65세 이상 노인을 부양하는 일입니다.

유소년(0세~14세)인구 감소로 생산가능 인구(15~64세) 100명당 부양할 유소년은 2005년 21.9명에서 2016년 15.2명으로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증가하여 생산가능 인구 100명당 2005년 9.4명 부양하던 것이 2016년에는 16.8명까지 늘어났습니다.

‘노인 부양비’는 2005년 9.45에서 2016년 16.8%까지 증가했습니다. 생산가능 인구의 노인 부양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증가하는 노인 부양,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서울시 연령별 인구 비율 및 노인부양비율 추이 (윤민석, 서울연구원 도시사회연구실) ⓒ세계와도시

 

생산 가능 인구는 감소하지만 노인 인구의 증가 폭은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2012년에는 생산가능 인구 7.4명이 노인 1명을 부양했습니다. 그러나 2039년에는 생산가능 인구 2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합니다. 당연히 7명이 1명을 부양할 때보다 훨씬 큰 비용을 부담해야 합니다.

노동인구는 감소하면서 부양해야 할 노인이 증가하면 당연히 사회적 비용도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인 복지에 지출이 늘어날수록 출산 등의 예산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이는 저출산의 증가로 이어져 생산가능 인구가 계속 감소하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됩니다.

앞으로 정부와 서울시는 고령화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노인 일자리 확대나 저출산 지원 대책 등은 효과가 그리 높지 않아 더 다양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2015년 서울지하철 무임수송인원 및 무임수송 손실 비용.

 

 

노인 기준 연령을 높이거나 은퇴 시기를 늦추는 방안 등을 마련해 사회적 비용 부담을 최대로 줄여야 합니다.

서울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일본의 몇몇 자치단체는 재정적인 문제로 노인의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를 없애거나 기준 연령을 75세로 조정하기도 했습니다.

유교 성향이 강한 대한민국에서 노인 부양 문제를 지적하면 비판이 따릅니다. 그러나 노인 인구의 증가에 따른 사회적 비용 부담 문제를 현실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단순히 비용으로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노인 인구가 사회구성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사회 제도를 변화하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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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방중 가장 큰 목표는 신뢰 관계 회복”

[CCTV] 인터뷰, “남북협력이 북 안보 지켜줄 수 있다”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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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12  07:2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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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은 중국 국빈방문을 앞두고 중국 관영방송 [CCTV]와 인터뷰를 갖고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캡쳐사진 - 통일뉴스]

중국 국빈방문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은 북핵 문제에 대해 △북핵 불용 △강력한 제재와 압박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이라는 원칙을 재확인하고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강인한 희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8일 오후 4시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중국 관영 [CCTV]와 인터뷰를 가졌고, 이 인터뷰는 11일 밤 11시 30분(서울시간, 북경시간 10시 30분) 첫 방송을 탔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선은 북한이 오판을 멈추고 인식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며 “북한과 같은 이런 작은 나라가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뒤처진 그런 나라가 오로지 핵 하나만 가지고 안보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오히려 남북 간의 평화와 협력이 북한의 안보를 지켜줄 수 있다. 과거에 남북관계가 좋았던 그 시기에 북한은 안보에서 아무런 위협이 없었다”며 “한국과 중국이 보다 긴밀하게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노력을 해 나간다면 나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미사일 능력이 정말 빠른 속도로 고도화하고 있다”며 이럴 때일수록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강인한 희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한국과 중국 양국이 긴밀히 협력해 나가면서 새벽을 앞당기는 그런 노력을 함께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10월 31일 ‘한중 관계 개선 관련 양국 간 협의 결과’로 봉합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체계)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한 거듭된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도입을 결정하게 된 것”이라며 “앞으로도 사드가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한 방어 목적을 넘어서서 중국의 안보적 이익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한국은 각별히 유의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미국으로부터도 여러 번 다짐을 받은 바 있다”고 덧붙였다.

   
▲ 질문자는 사드 배치에 대한 확실한 의사표명을 유도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캡쳐사진 - 통일뉴스]

대통령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질문자는 ‘10.31 협의’ 당시 공동발표문에 포함된 “MD 구축,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 등과 관련하여 중국 정부의 입장과 우려”를 거론하며 “CCTV를 시청하고 있는 우리의 수억 명의 중국 시청자들을 위해서 한국 정부의 입장,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노력하겠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달라”고 주문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은 이미 사드에 관한 한국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것은 결코 새로운 입장이 아니다. 과거부터 한국이 지켜왔던 입장을 말씀드린 것이다”고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그런 입장에 대해서 서로 깊은 이해를 이룬 것이 10 월 31 일자 양국 간 협의였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10.31 협의’에 표기된 중국의 우려를 ‘깊이 이해’한다는 수준의 기존 스탠스를 유지한 셈.

중국은 ‘10.31 협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우려 사항인 △MD 구축,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에 대해 이른바 ‘3 NO’를 한국 정부가 명시적으로 천명해줄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촉구하고 있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 결과를 공동성명 대신 ‘공동언론발표문’으로 내기로 사전 조율된 것도 이같은 이견 때문이다. 공동언론발표문은 ‘양자 간 언론에 발표할 내용을 서로 사전에 조율해서 각자 언론에 발표하는 형식’이다.

문 대통령은 “사드문제는 시간을 두면서 해결해 나가기로 하고, 또 그것 때문에 양국의 다양한 관계가 가로막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사드문제는 별개로 해결해 나가면서 양국 간에 경제·문화 또는 정치·안보 또는 인적교류·관광, 이런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25 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제 한.중 양국은 경제 분야 외에 다양한 다른 분야에서도 함께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정치.안보.문화.인적교류 분야 등을 꼽고, 경제분야도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 분야 협력과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 일본, 중국에서 연이어 이어지는 이 올림픽들을 잘 활용한다면 우리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이루어나가는 데 아주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그렇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남북 간의 평화를 위해서도 아주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중국의 협력을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이번 방중의 가장 큰 목표를 한.중 양국 간에 신뢰 관계를 회복하는데 가장 큰 역점을 두고 있다”며 “근래 얼마 기간 동안 양국 간의 신뢰 관계가 상당히 무너졌다”고 짚고, “이번 나의 방중으로 양국 관계 신뢰를 회복하고, 또 양국 국민들 간에 서로 우호 정서가 증진될 수 있다면 큰 보람”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아울러 “이번 중국 방문에서 시 주석과 세 번째 만나게 되는 만큼, 시 주석과 ‘라오펑요우’(老朋友), 오랜 친구 관계가 되고 싶다”며 “시 주석과 나 사이에 국정철학에서도 통하는 면이 많은 만큼, 앞으로 양국 관계를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새로운 시대를 함께 열어나가고 싶다”고 각별한 친밀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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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EA는 미국의 하수인인가

2007년 '북한-시리아 핵 협력설'의 진상 <하>
2017.12.12 00:53:31

 

 

 

2007년 9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제기된 '북한-시리아 핵협력설'은 당시 진행되던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가로막은 중대한 걸림돌이었다. 특히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2011년 5월 발표된 보고서를 통해 북한이 시리아에 영변형 원자로를 지어준 것을 기정사실화 했다. 북한을 핵확산의 주범으로 지목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독립연구자 가레쓰 포터는 1993년부터 10년간 북한 핵시설을 모니터링 했던 IAEA 사찰관 등의 증언을 통해 이스라엘이 공습으로 파괴한 시설은 원자로가 아니라 이미 5년 전 폐기된 미사일 격납고였다고 밝혔다. (☞ 원문 보기 : How Syrian-Nuke Evidence Was Faked) 지난 기사에 이어 포터의 기사 중 2번째, '시리아 핵 개발 증거는 어떻게 조작됐나'를 소개한다. 편집자 (☞ 2007년 '북한-시리아 핵 협력설'의 진상 <상> : 북한은 어떻게 악마화되었나)  

최고의 북핵 전문가를 검증팀에서 배제 

2008년 5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 유스리 아부샤디는 안전담당 사무부총장 올리 하이노넨에게 곧 구성될 시리아 원자로 검증팀에 자신을 끼워달라고 요청했다. 아부샤디는 CIA가 '시리아 핵개발 증거'라며 공개한 동영상을 면밀히 분석해 불과 이틀 후인 2008년 4월 26일, 문제의 시설이 북한식 원자로일 수 없다는 점을 엘바라데이 사무총장 등에게 알린 바 있다. 그는 북핵 문제가 불거진 1993년부터 10년간 영변 원자로를 감시해 왔으며 이 문제로 북한을 15번이나 방문한 최고의 북핵 전문가였다.  

그러나 하이노넨 부총장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부샤디를 검증팀에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사찰관은 자신의 조국에 대한 사찰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IAEA의 불문율을 그 이유로 댔다. 아부샤디는 자신은 시리아가 아니라 이집트 출신이라고 항변했다. 이에 대해 하이노넨은 "하지만 자네는 아랍 국가 출신이고 무슬림이잖아!"라고 받아쳤다. 

결국 아부샤디는 검증팀에서 배제됐다. 아마도 그가 처음부터 CIA의 이른바 '시리아 핵증거'를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레쓰 포터는 이 문제에 관해 하이노넨에게 논평을 요구했으나 하이노넨은 응답하지 않았다. 

2008년 6월 하이노넨 부총장과 2명의 사찰관으로 시리아 핵 개발 검증팀이 구성됐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공습한 알키바르 시설물 인근에서 시료를 채취했다. 그리고 2008년 11월 첫 보고서를 통해 공습 현장에서 채취된 우라늄 입자들을 분석한 결과 "인위적 가공의 흔적이 보인다"고 밝혔다. 즉 누군가가 우라늄을 가공했다는 말이고, 이는 알키바르 시설이 핵프로그램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포터에 따르면 복수의 전 IAEA 사찰관들은 하이노넨의 시료 분석 및 결론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우선 2011년까지 IAEA 검증 및 안보정책 조정국장을 지낸 타리크 라우프는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의 방사성 동위원소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3, 4개 연구소에 분석을 의뢰해 그 결과가 모두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 IAEA의 원칙"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시리아의 경우, 이 시료들을 분석한 연구소들에서 인공 처리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시료 채취 3개월 후인 2008년 9월 말,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이 직접 "현재까지 우리는 어떠한 핵물질의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후 다른 연구소에서 인공 처리의 흔적이 '처음 발견'됐고 이것이 11월 보고서의 근거가 된 것이다. 이는 IAEA의 핵물질 분석 절차 및 기준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포터는 지적한다.
 

▲ 이스라엘이 공습한 시리아의 건물. 위성으로 촬영됐다. ⓒ미 정부


알키바르 사찰관의 고백 

이보다 더 충격적인 고백이 있다. 하이노넨 검증팀에 참여했던 몽골 출신의 사찰관 오를로흐 도르즈카이다프의 고백이다. 그에 따르면 알키바르 시설물 주변에서 채취된 모든 시료들에서 인공 처리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반면 유일하게 양성 반응을 보인 시료는 이른바 원자로 건물 옆 지원 시설의 화장실에서 채취된 것이었다.  

그는 최초의 핵처리 증거가 '발견된' 직후 이 사실을 미국 출신의 전직 IAEA 고위 사찰관 로버트 켈리에게 털어놓았다. 켈리는 포터와의 인터뷰에서 도르즈카이도프가 이른바 최초의 핵처리 증거가 나온 직후 너무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누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전했다. 켈리는 미 에너지부 산하의 원격탐지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이라크에 대한 핵사찰에서 책임자로 일했던 인물이다.

도르즈카이도프는 이후 IAEA를 퇴직하고 몽골로 돌아갔다가 2015년 12월 사망했다. 켈리는 그의 사망 이후에야 그의 고백을 포터에게 전했다. 

포터는 이메일을 통해 하이노넨에게 켈리의 증언에 대한 논평을 요구했으나 하이노넨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포터는 미국의 저명한 핵전문가이자 하이노넨과 몇 차례 논문을 공동 저술한 바 있는 데이비드 올브라이트가 2013년 1월 자신이 속한 연구소의 웹페이지에 알키바르의 우라늄 입자 시료는 "원자로 옆 건물의 탈의실에서 발견됐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포터는 만일 알키바르 시설이 원자로이고 여기서 핵활동이 이루어졌다면 방사성 우라늄이 건물 내부에서만 발견될 수가 없으며 건물 외부에서도 다량으로 검출됐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 켈리는 포터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에 대한 "가장 합리적 설명"은 '교차 오염', 즉 사찰관의 옷 등 외부에서 묻혀온 우라늄 입자가 내부에 원래 있던 것으로 오인된 경우라고 말했다. 교차 오염에 대해서는 앞에 말한 타리크 라우프도 같은 의견이었다.

1990년대 초 이라크 핵사찰팀의 책임자였던 켈리에 따르면, 당시 IAEA 분석 결과 이라크가 우라늄을 무기급인 90%까지 농축했던 것으로 나타나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는 IAEA 연구소에 있던 우라늄 입자가 실수로 시료에 포함된 결과였음이 밝혀졌다. 즉 교차 오염으로 인한 잘못된 분석이었으며 이러한 사례는 종종 있었다는 것이다. 

흑연감속로가 파괴됐는데 방사성 흑연이 전혀 없다? 

그러나 2008년 11월의 첫 보고서에서 아부샤디가 가장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방사성 흑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다. 영변 원자로는 흑연감속로이다. 만일 키바르 시설이 흑연감속로이고 이스라엘 공습 당시 가동 중이었다면 수 백 톤의 방사성 흑연이 사방으로 흩어졌어야 마땅하다. 당연히 하이노넨 검증팀이 방사성 흑연을 검출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검증팀은 알키바르 현장에서 방사성 흑연을 검출해내지 못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008년 11월 13일, 보고서 초안을 놓고 벌어진 회의에서 아부샤디는 이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하이노넨은 "아직 흑연 시료의 방사성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아부샤디는 "방사성 흑연이 뭔지 모르십니까? 방사성 흑연은 금세 확인할 수 있습니다"라고 쏘아붙였다. 

이 문제에 대한 포터의 질문에 대해서도 하이노넨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첫 보고서가 11월 중 발표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부샤디는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현 상태로 보고서가 발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저의 전문가적 소견으로는 (방사성 흑연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검증팀의 분석 결과와 결론은 서로 모순됩니다. 즉 알키바르 시설은 원자로(흑연감속로)일 수가 없습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예정대로 발표됐다. 그리고 며칠 후 엘바라데이의 특별보좌관 그레이엄 앤드루는 아부샤디에게 "이 문제에 관해 더 이상 (사무총장에게) 이메일을 보내지 말 것"과 "조직의 방침을 따를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IAEA 내에서 누구보다 북한 원자로를 잘 아는 전문가는 이른바 '북한-시리아 핵 협력'의 현장 검증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검증팀의 보고서에 대한 이의 제기도 묵살됐다. 이후 IAEA는 2년 반에 걸쳐 '북한-시리아 핵 협력'에 대한 보고서를 9차례 발표했지만 방사성 흑연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만 2011년 5월의 최종 보고서에서 흑연 시료 입자가 "너무 작아서 제대고 순도 분석을 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을 뿐이다. 그리고 보고서의 결론은 알키바르 시설은 북한 지원 하에 비밀리에 건설된 원자로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 오크리지 국립핵연구소에 근무했던 핵공학자 베라드 나카이는 흑연 입자가 방사성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반박했다.

하이노넨은 어떤 사람인가? 

알키바르 현장 검증을 책임졌던 IAEA 사무부총장 올리 하이노넨은 2010년 8월 IAEA를 떠났다. 그리고 한 달도 채 안 돼 하버드대의 과학 및 국제문제 벨퍼센터에 자리를 꿰찼으며 이후 이란 핵 협상에서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는 또한 민주주의수호재단의 과학 및 비확산 담당 선임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스라엘 리쿠드당 정부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 지난 2007년 올리 하이노넨 국제원자력기구(IAEA) 부총장(가운데 붉은 넥타이)과 칼루바 치툼보 안전조치국장 등 4명으로 구성된 IAEA 실무대표단이 북한 핵시설 폐쇄를 위한 사전 협의를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모습. ⓒ연합뉴스


시리아 핵보고서와 북핵 협상 

미 CIA가 북한-시리아 핵 협력의 증거라며 11분짜리 동영상을 공개한 것은 북핵 신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실무팀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2008년 4월 24일이었다. 즉 북핵 협상이 진전을 보이자 이를 가로막기 위한 의도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IAEA의 시리아 핵 검증과 북핵 협상은 관계가 없을까? 시기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IAEA가 시리아 핵 검증에 착수한 2008년 6월 북한은 영변 냉각탑을 폭파했다. 6월 27일이다. 2007년 2.13합의에 따른 북핵 불능화의 첫 가시적 조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8월 11일로 예상된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이다. 북한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영변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재가동에 들어갔으며 사용 후 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방사화학실에 대한 IAEA 감시요원들의 접근도 차단했다.  

다급해진 미국은 10월 1일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를 평양에 급파해 북한과 협상했고 결국 10월 11일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했다. 그리고 11월 IAEA는 북한-시리아 핵협력에 대한 첫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와 관련, 당시 IAEA 수장인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의 당시 발언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아스라엘의 공습 사실이 알려지고 한 달 여 후인 2007년 10월 28일 그는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스라엘이 공격한 시설물이 비밀 핵시설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증거도 제공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나아가 "어떤 국가가 핵 관련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으면 우리(IAEA)에게 와야 하는 시스템이 있으며 가서 조사할 권한은 우리가 갖고 있다"면서 "선제 폭격을 하고 나중에 질문을 하는 것은 이 시스템을 허물고 어떤 의혹에 대한 해결에도 이르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IAEA의 시리아 핵 검증이 시작된 지 3개월 후인 2008년 9월 말에는 "현재까지 우리는 어떠한 핵물질의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과연 무엇이 IAEA로 하여금 북한-시리아 핵 협력을 확신하게 만든 것일까? IAEA는 1957년 미국 주도 하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연구와 국제적 공동관리를 위하여 설립된 국제기구다. 하지만 미국의 하수인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예컨대 1993년에는 IAEA 헌장에도 없는 북한 군사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했다가 북한의 거센 반발을 샀다. 1990년대 초 이후 이라크에 대한 광범위한 사찰로 이라크가 핵무기 건설을 포기했음을 알고도 이를 빌미로 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막지 못했다. 

우리는 북한-시리아 핵 협력을 기정사실화한 2011년 5월 IAEA 보고서가 왜, 어떤 과정을 거쳐 채택됐는지 구체적 사정을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이 보고서가 실제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IAEA 보고서가 북한-시리아 핵협력에 대한 국제 사회의 공식 견해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도 북핵 문제 해결의 중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끝)  

 

inkyu@pressian.com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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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면이 직접 밝힌 'YTN 보도국장' 거부 이유

[영상 인터뷰] 노종면 "최남수 사장 내정자, MB 칭송하고 노 전 대통령 조롱한 사람”

17.12.11 19:13l최종 업데이트 17.12.11 19:15l

 

▲ [오마이TV] 노종면이 직접 밝힌 ‘YTN 보도국장’ 거부 이유
ⓒ 조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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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이명박 전 대통령)를 칭송하는 칼럼을 쓰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롱하는 칼럼을 쓴 사람을 YTN 사장으로 받는다?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9년 만에 회사로 돌아와 '보도국장'으로 내정됐던 노종면 YTN 기자는 망설임이 없었다. YTN 새 사장으로 선임된 최남수 내정자가 사장으로서 부적합한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며 "최남수 같은 사람이 사장으로 온다면, YTN 해고자들의 복직은 의미가 없다"고 단언했다. 

앞서 YTN은 사내 공지글을 통해 지난달 30일 "노사 간에 합의된 단체협약 제20조에 따라 차기 보도국장에 앵커실 부장 노종면을 내정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노 기자는 YTN 노조에 '최남수 사장 내정자의 적폐청산 의지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YTN 노조와 최남수 사장 내정자는 4차례 만났지만 인사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만 확인했다. 노조는 '구본홍·배석규·조준희 전 사장 체제에서 3년 이상 보직을 맡았던 간부의 보직 임명자격을 잠정 보류하자'고 제안했으나 최 내정자가 이를 거부했다.

결국 노 기자는 "사장의 적폐청산 의지, 언론개혁의 자격 등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떤 직을 맡는 것도 무의미하다"며 보도국장직을 거부했다. YNT 노조도 8일 오전 서울 상암동 YTN 사옥에서 사내집회를 열고, 최남수 내정자 퇴진 투쟁을 다시 시작한다고 밝혔다. 

오마이TV가 노종면 YTN 기자를 만나, 보도국장 내정과 거부까지의 고민을 직접 들어봤다.
 

 노종면 YTN 기자.
▲  노종면 YTN 기자.
ⓒ 조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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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김종훈 기자, 영상취재·편집: 조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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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정의당-민중당, 전교조 법외노조 철회 촉구

전교조-정의당-민중당, 전교조 법외노조 철회 촉구
 
 
 
편집국
기사입력: 2017/12/12 [00:0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전교조와 민중당이 법외노조 철회를 촉구하는 공동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 민중당)     © 편집국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은 11일 국회에서 정의당민중당과 잇달아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정권시절 자행된 법외노조 철회와 성과급-교원평가 폐지를 촉구했다.

 

기자회견참가자들은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는 고용노동부 장관이 내렸던 행정처분을 취소하거나 노조법 시행령 9조 2항을 폐기하는 것으로 철회시킬 수 있다며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려보자는 정부의 태도는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6만 전교조 조합원의 고통에 눈감겠다는 것이라고 문재인 정부의 즉각적인 행동을 촉구했다.

 

또한 참가자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공공부문 성과퇴출제가 폐지됐지만 교원 성과급과 교원능력개발평가는 여전히 시행 중이라며 성과급과 교원평가제를 이대로 유지한다면 줄 세우기식 평가로 교사 간의 협력을 저해하고 학교 현장에서 불필요한 갈등이 계속 양산될 것이며이는 교육의 질 하락으로 연결되어 학생들의 피해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는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 촛불시민혁명으로 탄생한 정부라고 자임하고 있다혁명이 일어났는데 무엇이 변했나며 국정농단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전교조의 노동조합 자격을 박탈한 일이며적폐 중의 적폐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노 원내대표는 지금 정치인 사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전교조의 원상회복이라며 잘못된 조치로 노동조합 자격을 잃은 전교조를 원 위치시킬 책무가 바로 촛불시민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 전교조와 정의당이 법외노조 철회를 촉구하는 공동기자회견을 진행라고 있다. (사진 : 전교조)     © 편집국

 

<민중의소리보도에 따르면 민중당 김종훈 상임대표는 참교육을 하겠다는 의지만으로 (전교조 선생님들은법외노조가 되고 길거리로 내몰렸다며 좌고우면 하면 안 될 일이다진심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간곡히 호소하는 마음으로 정부에 당부한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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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전국교직원노동조합 공동 기자회견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은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법외노조 통보와 노동기본권보장성과급-교원평가 폐지를 위해 총력 투쟁해 왔습니다그리고 이는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이는 전 정권의 교육적폐를 청산하고 교육현장을 협력과 자치로 바꾸기 위한 너무나 정당한 요구입니다.

 

그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전교조는 5월 9일 문재인정부 출범이후 지금까지 긴 시간동안 여러 경로로 충분하게 전교조의 요구를 전달하였고, 7개월이라는 기간은 누가 보아도 문재인 정부가 귀를 기울이고 방안을 마련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그러나 아직도 바뀐 것은 없습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이후 이미 국제노동기구(ILO)와 유엔사회권위원회는 문재인 정부에 ILO협약87호와 98호의 비준을 요구하였습니다그리고 이 내용은 이미 문 대통령의 공약에도 포함되어있습니다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이미 이를 위한 행정적 작업에 착수했어야 합니다문 대통령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시민의 기본권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그러나 문 대통령이 취임하고서도 교육노동자의 기본권은 회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다는 헌법상의 기본권은 정략적인 이유로 미루어둘 문제가 아닙니다고용노동부는 법외노조 통보의근거가 된 노조법 시행령을 삭제하고 연내 전교조의 법외노조를 철회하여야 합니다고용노동부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전교조와 직접 만나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답변하고서도 아직까지 한 번도 전교조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지 않았습니다이는 전교조뿐만 아니라 국민 앞에서 한 약속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처럼 교원을 경쟁시키고 평가를 앞세워 교사를 통제하려는 길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교육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개혁에 착수하여야 합니다교육현장에 도입된 교원평가와 성과급은 이미 실패한 정책으로 판명이 났고, 90%가넘는 압도적 다수의 교원들이 성과급과 교원 평가 폐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상황에서 교원평가성과급 폐지의 요구는 비단 전교조의 것만이 아닙니다교육부는 정부가 지금까지 추진해 온 성과연봉제 방침 폐기와 같은 선상에서 성과급과 교원평가를 연내 폐지하여야 합니다.

 

전교조는 그동안 안으로 눌러왔던 요구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전국의 교사들이 오는 15일 연가투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문재인 정부는 공약을 이행하는 차원에서도 교사들의 연가투쟁 이전에 전교조의 요구를 수용하여 교육현장에서 이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전교조와 정의당은 함께 연대하여 문재인 정부에게 사태해결에 신속히 나설 것을 요구하며 아래의 사항을 다시 한번 촉구하는 바입니다.

 

첫째박근혜 정권의 적폐인 전교조 법외노조를 철회하고 교원·공무원의 노동기본권을 조속히 보장해야 합니다.

 

둘째교원들간의 무분별한 경쟁을 부추겨 교육공동체의 협력을 파괴하는 성과급과 교원평가를 폐지해야 합니다.

 

셋째정부와 교육부는 이상의 요구를 하루빨리 받아들여 전교조 지도부가 단식을 중단하고 교육을 혁신하는 본연의 활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2017년 12월 11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정의당

 

 

 

<민중당-전국교직원노동조합 공동 기자회견문>

 

전교조 법외노조 철회문재인 정부가 결단해야 한다.

 

2013년 10월 24박근혜 정부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계를 20세기로 되돌린 것이었다(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을 보면 전교조는 박근혜 정부의 주요 감시와 탄압 대상이었고 법외노조 통보 역시 그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법외노조 통보 이후 전교조 6만 조합원은 4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민주주의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왔고, 1,700만 국민의 촛불혁명의 결실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을 때 비정상의 정상화를 기대했다그러나 새 정부 출범 7개월이 지나도록 전교조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법원에서 소송이 진행 중인 세월호 기간제 교사 순직자 인정과 관련해 대통령의 업무 지시로 조치를 취한 바 있다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또한 고용노동부 장관이 내렸던 행정처분을 취소하거나 노조법 시행령 9조 2항을 폐기하는 것으로 철회시킬 수 있다.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려보자는 정부의 태도는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6만 전교조 조합원의 고통에 눈감겠다는 것이다. ‘촛불 정부를 자처하면서 우리 사회의 대표적 적폐인 이 사안을 외면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공공부문 성과퇴출제가 폐지됐지만 교원 성과급과 교원능력개발평가는 여전히 시행 중이다성과급과 교원평가제를 이대로 유지한다면 줄 세우기식 평가로 교사 간의 협력을 저해하고 학교 현장에서 불필요한 갈등이 계속 양산될 것이며이는 교육의 질 하락으로 연결되어 학생들의 피해로 이어질 것이다교육 적폐인 교원 성과급과 교원평가를 폐지함으로써 자율적이고 전문적인 교사들이 교육현장의 주인이 되어 교육개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교조 교사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철야농성을 벌인지 오늘로 41일째이다법외노조 철회성과급 및 교원평가 폐지 요구에 힘을 싣는 목소리가 학교 현장과 시민사회로 번져나가고 있다민중당도 이들과 함께 적폐 청산을 위해 힘 모아 싸울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좌고우면 할 것이 아니라 촛불 민심과 역사적 당위성을 믿고 호시우보하길 바란다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한 때다.

 

2017년 12월 11일 

민중당전국교직원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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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군사회담에서 펠트먼 평양방문까지

[개벽예감277] 조용한 군사회담에서 펠트먼 평양방문까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7/12/11 [13:57]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리처드 클락과 샤오위안밍의 조용한 군사회담

2. 화약고 안의 불장난은 자구책이며 전선이동징후

3. 펠트먼을 평양에 보낸 구떼헤스의 구상

4. 55년 만에 되살아난 우탄트의 기억

5. 구떼헤스의 중재시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

 

1. 리처드 클락과 샤오위안밍의 조용한 군사회담

 

조선이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2017년 11월 29일 <AP통신>에 흥미로운 기사 한 편이 실렸다. 제목은 ‘북조선과의 긴장 속에서 미국과 중국이 진행한 조용한 군사회담’이다. 보도기사에 서술된 “조용한 군사회담(quiet military talks)”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하나는 고위급 군사회담이 아니라 준고위급 군사회담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비공개 군사회담이라는 뜻이다. 그날 비공개 군사회담은 워싱턴에 있는 국방대학교(National Defense University) 교내에서 진행되었다. 국방대학교는 미국 국방부가 직영하는 고등군사교육기관이다. 또한 그 비공개 군사회담에는 미국군 합동참모본부 기획국장인 리처드 클락(Richard D. Clarke) 육군 중장과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연합참모부 부참모장인 샤오위안밍(邵元明) 육군 소장이 각각 회담대표로 참석하였다.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그날 진행된 미국-중국 준고위급 군사회담은 조섭 던포드(Joseph F. Dunford) 미국군 합참의장이 지난 8월 15일 중국 베이징에서 팡펑후이(房峰輝)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만나 고위급 군사회담을 진행할 때 준고위급 군사회담을 열자고 합의하였고, 그 합의에 따라 지난 11월 29일에 열린 것이라고 한다. <워싱턴포스트> 2017년 8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던포드-팡펑후이 군사회담에서는 미국군 합동참모본부 기획국장 리처드 클락과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연합참모부 부참모장 샤오위안밍을 각각 대표로 하는 ‘합참대화기구(Joint Staff Dialogue Mechanism)’라고 부르는 상설회의체를 개설하기 위한 합의서를 채택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2017년 11월 29일 워싱턴에 있는 국방대학교에서 진행된 준고위급 군사회담은 미국-중국 합참대화기구 제1차 회담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조용한 군사회담에서 어떤 의제가 논의되었을까?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7년 8월 15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조섭 던포드 미국군 합참의장이 팡펑후이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의 영접을 받으며 그와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는 장면이다. 당시 던포드-팡펑후이 고위급 군사회담에서 준고위급 군사회담을 열자고 합의하였는데, 그 합의에 따라 2017년 11월 29일 워싱턴에 있는 국방대학교 교내에서 미국-중국 합참대화기구 제1차 회담이 열렸다. 합참대화기구는 상설회의체다. 이 회담에는 미국군 합참본부 기획국장 리처드 클락과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연합참모부 부참모장 샤오위안밍이 각각 대표로 참석하였다. 미국 언론보도에 따르면, 미국-중국 합참대화기구 제1차 회담에서 쿠바미사일위기에 대한 공동의 사례연구결과가 논의되었다고 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AP통신>은 2017년 11월 29일 보도기사에서 지난 8월 중순 베이징을 방문한 던포드 미국군 합참의장은 팡펑후이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에게 조선의 “우발사태(contingencies)들”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였고, 양측은 “발생할 수 있는 갈등(conflict) 또는 핵재앙(nuclear disaster)의 위험”에 대해 논의하였다고 하면서, 이번에 워싱턴에서 진행된 미국-중국 합참대화기구 제1차 회담에서도 그 문제를 또 다시 논의하였을 것이라는 중국문제전문가들의 추측발언을 인용하였다. 던포드-팡펑후이 회담에서 논의되었다는 ‘갈등’이라는 것은 조미핵대결 위험이 극도로 고조된 상황을 뜻하는 말이고, 그 회담에서 논의되었다는 ‘핵참화’라는 것은 조미핵대결이 우발사태를 도화선으로 폭발한 핵전쟁상황을 뜻하는 말이다. 

 

조미핵대결→우발사태→핵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사태와 관련하여 <워싱턴포스트> 기고자 데이빗 이그네이셔스(David Ignatius)는 2017년 12월 5일 그 신문에 실린 자신의 글에서 미국 국방부 고위관리가 전해준 말을 인용하면서 미국-중국 합참대화기구 제1차 회담에서 “쿠바미사일위기에 대한 공동의 사례연구(a joint case study of the Cuban Missile Crisis)”가 진행되었다고 밝혔다. 

조미핵대결이 최종국면에 접어든 지금, 미국 군부 대표들과 중국 군부 대표들이 상설회의체를 개설하고 쿠바미사일위기 사례연구를 진행하였다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쿠바미사일위기 사례연구를 진행한 것은 조미핵대결 최종국면과 쿠바미사일위기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으로 보고, 조미핵대결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쿠바미사일위기를 재평가하는 토론을 진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미국-중국 합참대화기구 제1차 회담에서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고, 오판을 어떻게 예방하고, 오해의 위험을 어떻게 줄이느냐 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고 지적한, 미국 합참본부가 <AP통신>에 보내온 보도자료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회담에서 그들은 조미핵대결이 우발사태를 도화선으로 하여 핵전쟁으로 폭발하지 않도록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고, 오판을 어떻게 예방하고, 오해의 위험을 어떻게 줄이느냐 하는 해법을 쿠바미사일위기 해결경험에서 찾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조미핵대결 최종국면과 쿠바미사일위기를 비교하면서 어떤 해법을 찾아보려는 논의는 미국군 합참본부에서만 진행되는 게 아니다. 조미핵대결 해법을 쿠바미사일위기 해결경험에서 찾아보려는 미국의 전직 외교관리, 정치분석가, 언론인들의 주장과 견해들이 올해 들어 미국의 주요언론매체들에 지속적으로 보도되었다. 온라인에서 눈에 띄는 것만 추려내더라도, 2017년 4월 16일 <뉴욕타임스>, 8월 9일 <워싱턴포스트>, 8월 23일 <더 네이션(The Nation)>, 9월 25일 <포츈(Fortune)>, 10월 26일 <허핑턴포스트(Huffington Post)>, 12월 6일 <뉴스윅(Newsweek)> 등이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보도하지 않고 있지만, 지금 미국에서는 조미핵대결 해법을 쿠바미사일위기 해결경험에서 찾으려는 논의가 빈번하게 진행되는 중이다. 

그러므로 그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도 조미핵대결 해법을 쿠바미사일위기 해결경험에서 찾으려는 내부논의를 진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 주요언론매체들이 활발히 논의하는 가운데, 최근에는 미국-중국 합참대화기구 제1차 회담에서까지 논의된 문제를 정작 책임 있는 당사자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외면하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조선이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자, 조미핵대결을 종식시킬 시간과 기회를 잃어버려 다급해질 대로 다급해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그 문제를 논의하였다면, 지금쯤 그와 관련된 움직임이 나타나는 게 정상이다. 아래에 서술한 두 가지 움직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2. 화약고 안의 불장난은 자구책이며 전선이동징후 

 

2017년 12월 6일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은 팔레스타인의 알꾸드스(Al-Quds)를 이스라엘 수도로 공인한다고 선언하고,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알꾸드스로 이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람들이 무심코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그 도시의 아랍어 명칭은 알꾸드스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 명칭이다. 이스라엘이 불법적으로 강점한 그 도시는 팔레스타인의 고유한 영토이므로, 독도를 ‘다께시마’라고 부르면 안 되는 것처럼 알꾸드스를 ‘예루살렘’으로 부르면 안 된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트럼프 대통령의 그런 결정은 무리수를 넘어 자충수를 둔 것이었다. 트럼프의 자충수가 미국과 중동에 얼마나 큰 해악을 불러오게 되는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트럼프 이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미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유대인계 정치세력을 의식한 나머지 자기들의 대선공약에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알꾸드스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약방의 감초처럼 어김없이 집어넣곤 하였지만, 집권한 뒤에는 그 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슬그머니 접어두었다. 왜냐하면, 미국이 알꾸드스를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는 경우, 전 세계 이슬람국가들과 격렬한 충돌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고, 국제사회와 유엔으로부터 백악관으로 몰아칠 반대와 저항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폭탄뇌관 같은 그 문제를 대선공약 안에 슬쩍 끼워 넣었다가, 백악관에 들어간 뒤에는 흐지부지 넘어가는 관례를 불문율처럼 지켜왔던 것이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7년 12월 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팔레스타인의 알꾸드스를 이스라엘 수도로 공인한 문서에 서명한 뒤에 그 문서를 자랑스럽게 취재진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마익 펜스 부통령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알꾸드스로 이전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이스라엘이 불법적으로 강점한 알꾸드스는 팔레스타인의 고유한 영토일 뿐 아니라, 전 세계 이슬람교도들의 성지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런 알꾸드스를 아랍민족의 적인 이스라엘에게 넘겨주겠다는 망발을 늘어놓았으니 거대한 화약고 안에 들어가서 불장난을 하는 꼴이다. 그는 왜 그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자해행동을 저지른 것일까?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그 ‘불문율’을 제 손으로 깨버렸다. 거대한 화약고 안에 들어가서 불장난을 하는 꼴이다. 미치광이 대통령의 ‘불장난’이야말로 중동에서 극도의 정치혼란과 새로운 전쟁위험을 불러일으키고, 국제사회에서 반미테러위험과 미국의 외교고립을 겹겹이 자초하는 자해행동이 아닐 수 없다. 미치광이 대통령의 ‘불장난’에 격노한 팔레스타인 민중은 곧바로 항쟁(Intifada)에 궐기하였고, 이스라엘군은 그들의 항쟁을 난폭하게 진입하고 있다. 미국-이스라엘 침략동맹에 맞서 싸우는 팔레스타인 민중항쟁이 차츰 격화되면서 중동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갑자기 왜 그런 자해행동을 저지른 것일까? 미국의 정치분석가들은 제각기 이 문제에 대한 여러 해석들을 내놓았는데, 최근 백악관을 불안과 공포에 몰아넣은 이른바 트럼프-러시아 내통사건에 대한 특검수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러시아 내통사건이란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긴 직후인 2016년 12월 당시 그의 최측근이었던 마이클 플린(Michael T. Flynn)이 쎄르게이 킬스약(Sergey Kilsyak) 당시 워싱턴 주재 러시아 대사와 은밀히 접촉하였던 사건이다. 지금 특검의 수사방향은 그 비밀접촉이 미국 대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를 파헤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있다. 

 

2017년 12월 1일 전격적으로 특검에 기소된 플린은 자신과 킬스약의 비밀접촉이 트럼프의 사위이며 백악관 선임고문인 재럿 쿠쉬너(Jared C. Kushner)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는 ‘폭탄진술’을 내던졌다. 이 ‘폭탄진술’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쿠쉬너가 플린에게 전달한 지시는 곧 트럼프 대통령 자신의 지시였기 때문이다. 만일 플린에 이어 쿠쉬너까지 줄줄이 특검에 기소되면,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내통’을 쿠쉬너에게 지시한 정치적, 법적 책임을 피할 길이 없어진다. 이것은 정치생명을 끊어버릴 실각위기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엄습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위중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특검에 기소당할 위험에 빠진 쿠쉬너를 구출하려는 ‘긴급구조’를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긴급구조’를 요청한 지지세력은 워싱턴의 정계 및 관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대계 미국인 정치인맥이다. 이들 유대계 미국인 정치인맥과 직통하는 사람이 재럿 쿠쉬너의 아버지인 찰스 쿠쉬너(Charles Kushner)다. 찰스 쿠쉬너는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이스라엘 총리에게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정치자금을 보내는 5대 후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유대복고주의(Zionism)를 지지하는 부동산개발업자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대계 미국인 정치인맥을 움직여 쿠쉬너를 위험에서 구출하려면, 그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 숙원이 바로 알꾸드스를 이스라엘 수도로 공인하는 대통령의 조치다. 이런 내막을 살펴보면, 자해행동처럼 보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그 결정은 실제로는 궁색스러운 자구책인 것이다.  

 

알꾸드스를 이스라엘 수도로 공인한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을 놓고 미국의 언론매체들이 보도한 분석기사의 논지는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그 결정 속에 깔려있는 속셈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아래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진 3>

 

▲ <사진 3> 팔레스타인의 알꾸드스를 이스라엘 수도로 공인하는 문제는 커다란 '폭탄뇌관'이므로, 당연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신중히 논의, 결정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 문제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의제로 꺼내놓았을 때, 그의 핵심측근들인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을 비롯한 대다수 성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의견에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다수의 반대의견을 돌려세우고, 자기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그들을 설득할 강한 명분을 꺼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전선이동론이었다. 전선을 한반도에서 중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논리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트럼프 대통령이 알꾸드스를 이스라엘 수도로 공인하는 문제는 커다란 ‘폭탄뇌관’이므로, 그가 백악관 집무실에서 혼자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문제는 당연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논의, 결정되었다. 미국 언론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그 문제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의제로 제기하자, 논란이 일었다고 한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측근들인 렉스 틸러슨(Rex W. Tillerson) 국무장관과 제임스 매티스(James N. Mattis) 국방장관이 반대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꾸드스를 이스라엘 수도로 공인하는 경우, 미국에게는 얻을 것이 별로 없고, 잃을 것이 거의 전부일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그 핵심측근을 반대의견으로 끌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이 반대하였다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성원들 대다수가 반대한 것이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성원 대다수의 반대의견을 돌려세우고 자기 의사를 관철하려면 그들을 설득할 강한 명분을 꺼내놓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꺼내놓은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전선이동론이었다. 전선이동론이란 전선을 한반도에서 중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논리다. 다시 말하면, 미국이 조선을 상대로 벌여왔으나 이미 패색이 짙어진 한반도 전선에서 발을 빼고, 그 대신 중동에서 새로운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요즈음 정치력, 군사력, 경제력이 날로 약해지고 있는 미국에게는 이전처럼 한반도와 중동의 두 전선에서 동시에 싸울 수 있는 힘이 없다. 미국이 이른바 ‘두 개의 전쟁전략’을 폐기한 지도 오래 되었다.     

그런 미국이 이미 패색이 짙어진 조선과의 핵대결을 무모하게 계속하면서 그와 동시에 중동전쟁을 벌이는 확전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어느 한 전선을 택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패색이 짙어진 조선과의 핵대결을 포기하고, 새로운 중동전쟁의 길을 택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조선과의 핵대결을 포기한다는 말은, 조선의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성공으로 미국이 사실상 패한 핵대결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조미핵대결을 종식시킬 협상의 길을 택한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며칠 전에 트럼프 대통령이 ‘화약고 안에서 저지른 불장난’은 자신에게 몰아닥친 정치위기에서 탈출하려는 자구책인 동시에 전선을 한반도에서 중동으로 이동시키려는 징후라고 말할 수 있다.  

  

▲ <사진 4> 이 사진은 리용호 조선 외무상이 2017년 12월 7일 조선을 방문한 제프리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을 만나는 장면이다. 펠트먼을 평양에 보낸 사람은 안또니오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이다.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은 조미핵대결을 종식시키기 위해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를 서겠다고 나선 것이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펠트먼의 조선방문을 계기로 조선과 유엔사무국은 각이한 급에서 내왕하면서 의사소통을 정례화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한다. 구떼헤스가 이끄는 유엔사무국이 핵대결을 벌이는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과연 중재를 제대로 설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엔사무국의 중재 이외에 다른 대안을 찾기 힘들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3. 펠트먼을 평양에 보낸 구떼헤스의 구상  

 

2017년 11월 29일 워싱턴에서 미국-중국 합참대화기구 제1차 회담이 진행된 때로부터 엿새가 지난 12월 5일 평양국제공항에 착륙한 고려항공 여객기에서 낯선 미국인 한 사람이 내렸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그 미국인 손님은 유엔사무국 정치부 수장인 제프리 펠트먼(Jeffrey D. Feltman) 유엔사무차장이었다. 그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미국 국무부에서 중동담당 국무차관으로 일하였는데, 미국 국무부는 2012년에 그를 유엔사무차장에 천거하여 임명되도록 하였다. 그런 배경과 경력을 가진 사람이 조미핵대결위기가 고조된 시점에 평양에 나타난 것이다. <사진 4> 

 

<교도통신> 2017년 12월 9일 보도에 따르면,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을 평양에 보낸 사람은 안또니오 구떼헤스(Antonio Guterres) 유엔사무총장이다. 그 보도기사에서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은 “북조선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북조선과 관계국 간의 의미 있고, 열린, 건설적 대화가 가능한 환경을 마련하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유엔사무국이 조미핵대결을 종식시키기 위해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를 서겠다는 말이다. 

중국 <신화통신> 2017년 12월 8일 보도에 따르면,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의 중재의사를 전하기 위해 평양에 간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은 원래 3박4일이었던 체류일정을 하루 더 연장하였다고 한다. 체류일정은 연장한 것은 조선 외무성과 유엔사무차장 사이에서 대화가 원만히 진행되었음을 말해주는 징후였다. 

 

징후는 즉각 현실로 되었다. <조선중앙통신> 2017년 12월 9일 보도에 따르면, “우리측과 유엔사무국측은 이번 유엔부사무총장의 방문이 우리와 유엔사무국 사이의 리해를 깊이 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앞으로 각이한 급에서 래왕을 통한 의사소통을 정례화할 데 대하여 합의하였다”고 한다. 각이한 급에서 내왕을 통한 의사소통을 정례화한다는 말은,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를 서겠다는 유엔사무국의 제안을 조선이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한 각이한 급에서 내왕한다는 말은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의 조선방문을 예고한 것으로 해석된다. 

 

2017년 9월 말 최선희 조선 외무성 북아메리카국장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였을 때, 이고르 모르굴로브(Igor V. Morgulov) 러시아 외무차관이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를 설 용의가 있다고 하였지만, 조선은 러시아의 중재제안을 거절하였다. 2017년 11월 17일 쑹타오(宋濤)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특사로 평양을 방문하여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안을 제시하였으나, 조선은 중국의 중재안을 거절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조선은 유엔사무국의 중재제안을 받아들였다. 

 

러시아의 중재제안와 중국의 중재안을 각각 거절한 조선이 유엔사무국의 중재제안을 받아들인 까닭은,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의 정치성향이 중재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은 포르투갈 사회당 총비서로 재직하던 기간에 국제사회주의(Socialist International) 의장과 포르투갈 총리를 겸임하였던 중도좌파 정치인이다. 중도좌파 구떼헤스가 이끄는 유엔사무국이 핵대결을 벌이는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과연 중재를 제대로 설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엔사무국의 중재 이외에 다른 대안은 찾기 힘들다. 

  

 

4. 55년 만에 되살아난 우탄트의 기억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조선이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성공으로 자기의 핵무력을 완성한 2017년 11월 29일 미국 워싱턴에서는 미국-중국 합참대화기구 제1차 회담이 진행되었는데, 그 회담에서 조미핵대결 해법을 찾기 위해 쿠바미사일위기 사례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55년 전 쿠바미사일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중재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쿠바미사일위기→우발사태→핵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극심한 불안과 공포 속에서 중재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유엔사무국이었다. 55년 전 유엔사무국의 중재경험은 아래와 같다.

 

쿠바미사일위기가 격화되면서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던 1962년 10월 26일 당시 유엔사무총장이었던 우탄트(U Thant)는 미국, 소련, 쿠바 3국 사이에서 적극적인 중재노력을 펼치겠다는 의사를 공식 발표하였다. 우탄트는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면, 그에 상응하여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중재안, 다시 말하면 소련의 핵무력 철수와 미국의 쿠바 불가침을 맞바꾸는 중재안을 미국과 소련에게 각각 제시하였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60년 11월 20일 쿠바미사일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재노력을 펼치던 우탄트 유엔사무총장이 유엔본부 청사에서 양측 대표들과 회담을 마치고 촬영한 것이다. 사진에서 우탄트의 왼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미국측 회담대표들이고, 그의 오른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소련측 회담대표들이다. 이 사진을 보면, 우탄트 유엔사무총장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만 중재노력을 펼친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미국, 소련, 쿠바 3자 사이에서 중재노력을 펼치면서 쿠바미사일위기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니끼따 후르쇼브(Nikita S. Khrushchev)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우탄트의 중재안을 받아들이면서 소련이 미국과 협상하는 동안에는 소련군 미사일을 실은 수송선을 쿠바에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요즈음 쓰이는 말로 표현하면, 핵동결을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1962년 10월 27일 쿠바혁명군은 자국 영공을 침범하여 공중정찰을 감행하던 미국군 고고도정찰기 U-2를 S-75 지대공미사일로 격추하였다. 쿠바미사일위기가 최고조로 치닫고 있던 시점이었으므로, 미국은 그 사건으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오늘도 미국은 오산공군기지에서 U-2를 매일같이 군사분계선 상공으로 출동시켜 조선에 대한 공중정찰을 감행하고 있고, 조선인민군은 S-75를 개량한 번개-1 지대공미사일을 실전배치하고 U-2가 군사분계선 상공을 조금이라도 넘어서기만 하면 격추해버릴 즉시발사태세를 갖추고 있다. 

 

55년 전, 미국 군부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실행위원회는 쿠바혁명군의 U-2 격추에 대한 보복으로 쿠바무력침공을 주장하였다. 백악관과 펜타곤은 무력침공을 떠벌였으나, 존 케네디(John F. Kennedy) 당시 대통령은 남다르게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가 각료들과 군부의 무력침공주장에 맞장구를 치지 않았던 까닭은,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소련과의 핵전쟁을 두려워하는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흥미로는 사실은, 케네디가 후르쇼브도 자기처럼 겁쟁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그래서 케네디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면, 소련이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 전쟁은 곧 핵전쟁으로 될 것으로 우려하면서 공포를 느꼈다. 바로 이것이 케네디가 쿠바무력침공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였던 원인이다. 하지만 케네디만큼 겁쟁이였던 후르쇼브에게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는 경우, 미국과 핵전쟁을 벌여서라도 쿠바를 끝까지 지켜주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만일 케네디가 쿠바침공을 명령하였더라면, 미국군은 군사력이 약한 쿠바를 점령했을 것이다. 이처럼 쿠바를 점령할 기회를 놓쳐버린 겁쟁이 케네디는 쿠바침공에 광분하던 전쟁광신자들의 저격으로 암살당하였으니, 그 때가 쿠바미사일위기로부터 1년이 지난 1963년 11월 22일이었다. 

 

겁쟁이 케네디가 쿠바무력침공을 결정하지 못하면서 마음속으로 기대를 걸었던 것은 우탄트의 중재노력이었다. 그래서 케네디는 소련이 국제사찰단 감시 하에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면, 그에 상응하여 쿠바에 대한 불가침을 보장하고, 터키에 전진배치한 미국군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우탄트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터키는 자국 영토에 배치된 미국군 미사일들이 철수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케네디는 그것을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1962년 10월 28일 후르쇼브 서기장은 케네디 대통령이 제시한 협상조건을 받아들였고, 그 사실을 피델 알레한드로 까스뜨로 루쓰(Fidel Alejandro Castro Ruz) 쿠바공화국 수상(당시 직책)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까스뜨로는 자기와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케네디와 타협하여 쿠바에서 핵무력을 철수하려는 후르쇼브의 비겁하고 굴욕적인 처사에 격노하였다. 

 

위기상황이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자, 우탄트 유엔사무총장이 다시 중재에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쿠바를 방문하여 까스뜨로 수상과 회담하였다. 그 자리에서 우탄트는 격추당한 미국군 정찰기 U-2 조종사의 시신을 미국에 반환해줄 것과 국제사찰단이 쿠바에 입국하여 소련군 미사일 철수과정을 감시할 수 있게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국제사찰단 입국을 쿠바의 주권침해로 본 피델 까스뜨로 수상은 국제사찰단 입국을 거부하였고, 미국군 정찰기 조종사의 시신만 반환하였다. <사진 6> 

 

▲ <사진 6> 1962년 10월 28일 피델 까스뜨로 쿠바 수상은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타협하여 쿠바에서 핵무력을 철수하려는 후르쇼브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비겁하고 굴욕적인 처사에 격노하였고, 후르쇼브-케네디 비밀협상을 전면 거부하였다. 까스뜨로 수상은 쿠바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5개항을 발표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미국과 끝까지 싸울 결의를 표명하였다. 위쪽 사진은 쿠바미사일위기 당시 까스뜨로 수상이 반미결사항전에 나선 쿠바혁명군 고사포부대를 시찰하는 장면이고, 아래쪽 사진은 쿠바혁명의 영원한 지도자들인 피델 까스뜨로와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가 담화하는 장면이다. 체 게바라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그의 혁명생애만큼 강렬한 인상을 안겨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우탄트의 중재안을 거부한 피델 까스뜨로는 쿠바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5개항을 발표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미국과 끝까지 싸울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반미결사항전을 결의해 나선 쿠바혁명군과 쿠바인민은 전투동원태세에 진입하였다. 그가 제시한 평화안은 미국은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와 경제제재를 중단할 것, 미국은 쿠바 정부에 대한 전복활동, 무력침공, 침투공작을 중단할 것, 미국은 쿠바 선박에 대한 해적행위를 중단할 것, 미국은 쿠바 영공 및 영해에서 모든 불법행동을 중단할 것, 미국군은 쿠바의 관따나모 해군기지에서 철수할 것 등이었다.  

 

겁쟁이 케네디와 비겁한 후르쇼브는 비밀협상으로 쿠바미사일위기를 해결하였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들의 비밀협상을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결의한 쿠바는 케네디-후르쇼브의 해법을 걷어차 버렸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발생한 쿠바미사일위기가 케네디-후르쇼브 비밀협상으로 종식된 이후에도, 미국과 쿠바 사이에서 발생한 쿠바미사일위기는 종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쿠바미사일위기가 1962년 10월 28일에 종식되었다는 주장은 쿠바를 제외시킨 미국과 소련의 편중된 시각으로 쿠바미사일위기를 바라본 반쪽짜리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1962년 11월 2일 후르쇼브는 아나스따스 미꼬얀(Anastas I. Mikoyan) 소련 제1부수상을 쿠바에 급파하여 국제사찰단을 받아들이라고 피델 까스뜨로 수상을 여러 날 동안 설득해보았으나, 까스뜨로 수상은 그런 굴욕적인 요구를 거부하면서 쿠바의 주권과 자존심을 지켰다. 그렇게 되자 미국이 조작해놓은 국제사찰단은 미국 공군 해상정찰기의 공중지원을 받는 가운데 미국 해군 군함을 타고 쿠바 영해로 접근하여 쿠바 영해 밖에서 대기 중이던 소련 수송선들에 승선하여 사찰놀음을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5. 구떼헤스의 중재시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

 

위에 서술한 쿠바미사일위기 해결경험을 보면, 유엔사무국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발생한 위기를 해소하는 데서 중재역할을 수행한 것은 분명하지만, 미국과 쿠바 사이에서 발생한 위기를 해소하는 데서는 중재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은 군사력이 약한 쿠바를 얕잡아보고 국제사찰단을 들이밀려는 주권침해의도를 버리지 않았고, 쿠바는 반미결사항전을 결의하고 자기의 자주권을 지키려는 투쟁정신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유엔사무국의 중재노력도 허사로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보면서, 조미핵대결과 쿠바미사일위기를 굳이 비교한다면, 조미핵대결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타협가능한 대결보다는 미국과 쿠바 사이의 비타협적인 대결에 더 가깝다. 조선은 전략적 핵압박공세로 주한미국군을 철수시켜 자주권을 지키려고 하고, 미국은 조선의 전략적 핵압박공세를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주한미국군을 철수하지 않겠다고 버티기 때문에 조미핵대결은 비타협적인 대결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타협적인 대결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고, 수세에 몰려 얻어맞는 쪽이 공세를 펴며 들이치는 쪽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멀지 않아 종식될 것이다.

 

그런데 미국 언론매체들이 보도한 내용만 읽어보면, 이번에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이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을 조선에 파견한 중재시도가 백악관과의 사전조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유엔사무국이 백악관에게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추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미국의소리> 2017년 12월 5일 보도에 따르면,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의 조선방문은 유엔사무국이 미국 정부와 협의를 거쳐 추진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하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2017년 1월 1일 안또니오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이 2017년을 평화의 해로 만들자고 전 세계에 호소하는 장면이다. 지금 그는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노력을 펼치려고 하지만,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타협적인 핵대결이 유엔사무국의 중재로 과연 종식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유엔사무국이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떠맡을 중재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아메리카제국의 체면을 고려하여 미국의 굴복을 굴복이 아닌 타협처럼 포장해주는 중재역할로 될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017년 12월 5일 헤더 노어트(Heather A. Nauert)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언론설명회에서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이 조선에 갈 때 미국 정부의 어떤 메시지도 지참하지 않았고, 미국 정부를 대표하여 조선을 방문한 것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하나마나한 소리다. 왜냐하면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은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이 중재를 시도하기 위해 조선에 보낸 유엔사무국의 외교사절이므로, 처음부터 미국의 의사를 조선에 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이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을 조선에 파견한 것은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하려는 노력이므로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이 유엔사무국으로 돌아가면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은 그를 통해 전달받은 조선의 의견을 백악관에게 전달할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타협적인 핵대결이 유엔사무국의 중재로 과연 종식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물론 유엔사무국이 중재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조미핵대결 최종국면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예견할 수 있다. 유엔사무국이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떠맡을 중재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아메리카제국의 체면을 고려하여 미국의 굴복을 굴복이 아닌 타협처럼 포장해주는 중재역할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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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대 좋은 뉴스'는?

[사회 책임 혁명] 탄핵되고, 탈핵되고, 사회책임 강화됐다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KSRN·대표 김영호)는 2017년 한 해 동안 한국 사회가 보다 책임성 높은 사회로 진일보하는 데 기여한 사건과 이에 역행하는 사건을 모아 '올해의 7대 뉴스'를 선정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중심으로 한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집행위원회(위원장 안치용 한국CSR연구소장)가 집담회를 통해서 '7대 좋은 뉴스(Good News)'와 '7대 나쁜 뉴스(Bad News)'를 선별했다. 먼저 '7대 좋은 뉴스'를 발표하고, 다음 주에 '7대 나쁜 뉴스'를 전할 예정이다. 새해에는 좋은 뉴스만 넘쳐나길 기원한다. 

1.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에너지 정책 

지난 7월 8일 문재인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를 통해 원자력발전과 석탄화력발전 중단을 골자로 하는 에너지 정책을 공개하면서 국가에너지 정책의 대전환을 천명했다. 정부는 지난 6월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8기의 일시 가동 중단을 시작으로, 고리 원전 1호기 영구정지, 탈원전 로드맵 발표까지 확고한 탈원전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10월 정부가 발표한 탈원전 에너지 정책 로드맵에 따르면 신규원전 건설계획은 백지화된다. 원전은 2017년 24기, 2022년 28기가 되지만 2031년부터는 18기, 2038년에는 14기까지 단계적으로 감축되며, 이러한 원전의 단계적 감축 방안을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31년)과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2038년)에 반영할 방침이다. 또한 현재 7%인 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을 2030년에는 20%까지 확대함으로써 태양광ㆍ풍력 등과 같은 청정에너지를 확대 공급할 계획이다. 

2.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확정 및 사회책임투자위원회 설립

국민연금이 내년 하반기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고 사회책임투자위원회를 설립한다. 지난 10월 31일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연금기금을 관리 및 운용하는 최고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에 사회책임투자 관점에서 기금운용을 평가하고 모니터링하는 '사회책임투자위원회'를 별도로 설치하기로 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기업에 대해서는 연금투자를 제한하거나 투자처를 다른 기업으로 변경하겠다는 방침이다. 12월 1일에는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내년 하반기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을 공식화함으로써 국민연금이 지분을 보유 중인 국내 주요기업에 대한 지배구조 감시가 본격화한다. 그간의 국민연금 행태에 비추어 사회투자위원회 설립과 스튜어드십 코드의 도입 결정은 매우 의미 있는 사건으로, 국내 금융 시장의 사회 책임 투자 진전에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3. 산업발전법 개정안 국회 통과 

지난 11월 24일 국내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촉진을 위한 5개년 계획 수립을 골자로 한 '산업발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속가능경영 종합시책을 5년마다 수립해야 하며 연차별 세부계획도 함께 수립해 시행해야 한다. 따라서 첫 번째 지속가능경영 종합시책은 오는 2018년 11월 24일까지 수립된다. 현행 산업발전법 제19조 제1항에 '정부가 기업이 경제적 수익성, 환경적 건전성, 사회적 책임성을 함께 고려하는 지속가능경영 활동을 추진할 수 있도록 종합시책을 수립·시행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동안 실제로 종합시책이 수립되지는 않았다. 이 법안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지속가능경영 촉진이 정부 차원에서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 

지난 2월 17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 '비선실세' 최순실 씨에게 거액의 뇌물을 건넨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특검팀이 확보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에는 세 차례에 걸친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단독 면담 사실과 이 자리에서 경영권 승계가 논의된 정황 등이 담겨 있는 것으로 전해졌고, 이는 구속영장 발부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이후 재판부는 "대한민국의 최고 정치권력자인 대통령과 대규모 기업집단의 정경유착 병폐가 과거사 아닌 현재진행형이었다는 충격에 대한 신뢰감 상실은 회복 어렵고, 피고인들이 삼성그룹 대표 임원들이란 점에서 사회와 경제에 미친 부정적 영향 크다"며 1심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철옹성 같았던 삼성에 대한 최초의 법적 단죄임과 동시에 부도덕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계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5. MBC 최승호 사장 선임, 공영방송의 사회책임 강화 

지난 7일 MBC 대주주 및 관리감독기구인 방송문화진흥회는 새 MBC 사장에 최승호 PD를 내정했고, 이어 MBC 주주총회에서 선임이 최종 확정됐다. 이로써 최승호 신임사장은 지난달 해임된 김장겸 전 사장의 잔여 임기인 2020년까지 MBC 사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최 신임사장은 2010년 을 통해 4대강사업 문제점을 다루다 경영진과 갈등을 빚었고, 지난 2012년 파업 참여를 이유로 해고된 후 1997일 만에 사장으로 복귀하게 됐다. 최 신임사장은 첫 출근일인 8일,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와의 공동선언문 발표를 통해 지난 2012년 해고된 MBC 언론인 6명을 전원 복직시킨다고 밝힘으로써 지난 9년간 권력이 정보기관을 동원해 자행한 방송장악의 역사를 청산하기 시작했다. 최 신임사장의 선임을 계기로 MBC 정상화 및 공영방송의 사회책임 실현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6. 노동이사제 논의 본격화 

지난 7월 발표된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는 "2018년부터 공공기관 감사 독립성 강화 및 노동이사제 도입을 통한 공공기관 지배구조 개선"이 명시됐다. 이후 최근 KB금융지주 임시 주주총회에서 노동자 추천 사외이사 선임안에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부결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노동이사제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노동이사제는 이사회 기능이 정상화하면서 비윤리적 경영을 견제할 가능성을 높여주고 노사관계를 안정시킴으로써 기업의 효율성 및 사회적 효용을 늘릴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중에서는 서울시가 2014년 도입 계획을 밝힌 데 이어 현재 공공부문에서 노동이사제(근로자이사제)를 시행하면서 근로자 100명 이상인 공공기관에서는 노동자 대표 1~2명이 이사회에 이사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7. 최흥식 금감원장, 기업의 사회적 책임 공시 추진 

지난 9월 최흥식 신임 금융감독원장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독려하기 위해 비재무적 정보의 공시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저출산 대응 노력, 환경 보호, 노사 관계 등과 같은 비재무적 사항(ESG : 환경, 사회, 지배구조)을 공시하도록 해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한 기업이 시장에서 인정받도록 하고, 국민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알고 투자할 수 있도록 공시 범위를 확대하겠다는 의미다. 실제로 지난 3월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는 기업의 윤리경영, 지배구조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정보를 사업보고서에 기재 공개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아직은 자율공시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지만, 투자자 입장에서 그동안 접하기 힘들었던 기업의 비재무적 정보를 앎으로써 투자 판단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효과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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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민 기자 jmnoh@mediatoday.co.kr  2017년 12월 11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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