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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종업원 12명 인신구제청구...'국정원 답변서'가 '만능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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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6/06/22 09:46
  • 수정일
    2016/06/22 09:46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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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출석, 비공개, 녹음·속기 불허'파행...'재판부 기피'북한 종업원 12명 인신구제청구...'국정원 답변서'가 '만능열쇠'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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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21  15: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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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12명에 대한 인신보호구제청구 재판이 21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 523호 법정에서 비공개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12명에 대한 인신보호구제청구 재판이 21일 오후 2시30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523호 법정에서 진행됐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재판은 담당재판부가 인신보호구제청구 대상인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의 법정 출석 소환장을 발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재판부의 판단이 유포됨으로써 파행의 조짐을 보였다.

이들 종업원 12명 가족들의 위임을 받아 인신보호구제청구를 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은 2시간의 재판 끝에 재판부 기피신청을 내고 재판부 교체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날 재판은 2시간에 걸쳐 비공개로 진행됐으며, 법정에는 재판장인 서울중앙지법 형사32단독 이영제 판사와 국가정보원을 법률적으로 대리하는 법무법인 태평양 소속 변호사 2명,그리고 민변 소속 변호사 8~9명이 자리를 잡았다.

국정원 참고인으로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구 정부합동신문센터) 인권보호관인 박영식 변호사가, 민변 측 참고인으로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북한 공민 김련희 씨가 참석했으나 12명 종업원들이 법정에 나오지 않은 상황이어서 이들은 별도의 발언기회없이 법정에서 나와야 했다.

담당 재판부는 개정 전부터 비공개로 운영하겠다고 밝혔으나 민변 변호사들이 절차에 대한 이의를 제기해 이날 오후 2시 30분 방청객의 입장을 허용한 상태에서 비공개 재판을 밝힌 후 재판을 진행했다.

이영제 판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피수용자(12명 종업원) 보호를 위해 인정하는 경우라고 판단해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하겠다”며 재판의 비공개 진행을 선언했으나, 민변 채희준 변호사가 개정 선언 후 비공개 진행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절차상의 하자를 문제 삼아 제동을 걸었다.

   
▲ 채희준 민변 통일위원장이 재판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채 변호사는 이어 “피수용자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피수용자 보호를 사유로 한 비공개 재판은 부당하다고 판단, 이의를 신청한다”고 밝혀 잠시 휴정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재판장은 “이날 심문내용에 따라 피수용자의 보호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며, 변호사들의 이의를 기각했다.

재판을 마친 민변은 법원 정문 앞과 민변 사무실에서 약식 기자회견을 갖고 이날 재판의 석연치 않은 점을 조목조목 거론하며 재판부와 국정원을 성토했다.

채희준 변호사는 “이날 재판의 핵심은 북한 해외 식당 종업원들이 법정에 출석해 본인들의 진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민변은 그것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채 변호사는 “재판부는 ‘본인들이 출석을 거부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나도 그럴 생각이 없다. 오늘 모든 절차를 진행해서 종결하겠으니 별도의 보정을 기다린 다음 결정하겠다’는 생각으로 재판에 임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날 재판부가 △피수용자들에게 소환장을 발부해 놓고도 재판정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답변하면서, △그것도 피수용인의 안위를 이유로 국가보안법 사건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비공개 재판으로 진행하고, △재판과정의 녹음과 속기신청을 불허하는 등의 상황에서 더 이상의 재판진행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민변 변호인단은 재판정에서 재판부 기피신청서를 작성한 후 제출했으며, 재판장은 10분 가량의 휴정 후 변호인단의 기피신청을 받아들여 재판을 종결하고 다음 기일은 추후 지정하겠다고 말했다.

   
▲ 왼쪽부터 이재화, 채희준, 김용민 변호사.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날 재판부의 이와 같은 주요 결정은 모두 재판 하루 전날 제출된 국정원의 답변서를 근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변은 국정원 답변서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재판부도 변호인단도 재판 당시에는 숙지 하지 못했다며, '황당한 재판'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재판이 비공개로 진행된 상황이어서 공개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채 변호사는 기자회견 말미에 “변호인단이 상정했던 최악의 경우를 맞았다”며, 참담한 심경을 밝혔다.

이재화 변호사는 “국제사회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는 중요한 재판인 만큼 이후 재판부에서는 더욱 신중한 재판을 받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 기피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단독에서 합의부로 바뀌며, 통상 15일 정도의 시일이 걸린다.

한편, 국정원이 지난 3일 북한 식당 종업원들에 대한 보호결정을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이날 확인되면서 이 사안이 인신보호법상 쟁점사항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김용민 변호사는 국정원이 이들 종업원들을 현재의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구 정부합동신문센터)에서 필요한 조사를 끝낸 후에도 정착교육을 위해 설립된 하나원으로 보내지 않고 계속 보호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거꾸로 이들 종업원들을 즉시 센터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추가=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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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구 선생 회고록3권 ‘수학자의 삶’(7)


할아버지의 항일혁명운동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3권 ‘수학자의 삶’을 연재한다. 1권 ‘가짜 해방’, 2권 ‘찢어진 산하’에 이어진다. 1952년 대학 입학과 재학시절, 그리고 4.19혁명의 격동기에 대한 기록이다. 이 회고록을 통해 독자들은 친일잔재와 분단이 남긴 비극을 한 대학생의 고뇌를 통해 읽게 된다. 특히 군 복무 시기에 맞은 4.19혁명을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 게재된다.[편집자]

 
▲안재구 선생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조부 안병희 선생은 민족해방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운동가로 밀양 지역에서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나의 할아버지는 청년 시절부터 1945년 일제 패망까지 항일광복운동과 노농대중의 혁명운동에 헌신하셨다. 망국의 시기에 대한제국 정부의 전라남도 순찰사로 계셨던 종조부와 무관학교 시위연대 보병참위로 활동한 숙부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 할아버지는 한성학교에 입학했지만 중등과를 중퇴했다.

고향을 떠날 당시 할아버지는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고 서울로 올라갔다. 집안의 노비문서를 몽땅 불태우고, 그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땅까지 나누어주고는 그 시간부로 모두 해방을 선언했던 것이다. 또한 수산으로 가서는 상투머리를 잘라 백지에 싸서 왜놈 이발사에게 주고는 두암집 어른(아버지)에게 갖다드리라고 했다. 이 때문에 집안은 물론 고향 마을 전체에 큰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근대수학교육을 받은 할아버지는 한때 측량기사로 호구지책을 마련했으나, 3.1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항일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할아버지의 항일혁명 활동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을 연구한 학자들의 기록과 일제식민지 고등계 경찰의 수사기록문서와 검찰 행정사무의 수사기록과 증거자료, 당시 동아일보 등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할아버지는 1924년 12월6일 창립된 사회주의자동맹회에 집행위원으로 참여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주의자로서 항일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또한 적박단(赤雹團)이란 항일테러단체에도 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할아버지는 일본 유학생이나 지식인 출신과는 달리 자생적인 사회주의자였다. 당시 사회주의계열 운동의 파벌로 분류하자면 서울파 계열에서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서울파는 1921년 창립된 서울청년회 내부에서 김사국, 이영 등을 중심으로 해서 자생한 사회주의운동 세력으로 북풍회, 화요회, 조선노동당 등과 경쟁했던 그룹이었다. 할아버지는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을 강조했고, 또 평생을 그 원칙에서 항일혁명운동을 해오셨다. 그런 면에서 서울파가 내세운 자주적인 통일전선 노선에 동의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1920년대 중후반의 사회주의운동은 극심한 종파주의로 내부에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 좌절하고 실망한 할아버지는 이후 형평사(衡平社)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을 위해 1923년 4월 진주에서 결성된 조선형평사는 백정의 계급해방투쟁과 반일 민족해방투쟁이란 두 가지 투쟁을 함께 벌여나간 조직이었다. 할아버지는 조선형평사 총본부에서 발간한 잡지 <정진(正進)> 창간호(1929년 5월1일 발간)에 ‘형평운동의 정신’이란 글을 게재할 만큼 형평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당시 할아버지가 쓴 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대체 형평운동이라 함은 어떠한 의미로 어떠한 일을 하는지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려 한다. 이제 우리 동족이 조선 각지에 대개 40만명이나 있다. 조선 전 인구를 2천3백만이라 하면 2천3백만 분의 40만이라는 민족은 즉 우리 형평계급의 민족일 것이다. 하면 다 같은 조선민족이지마는 ‘백정’이니 ‘피쟁이’니 ‘갖바치’니 ‘천인’이니 하여 그 무엇이 특별한 조건이나 있는 것처럼, 왜 천대를 주며 학대를 주며 멸시를 하는가. 하고 또 우리로서는 그 어떠한 조건이나 있는 것처럼 천대와 박대에 슬픔에 신음하면서 억울한 한을 가지고도 의연히 짓밟히고 살아온 것은 무슨 이유일까?(중략)

조선 각지의 우리 계급 40만이 한 몸뚱이와 같이 되는 단결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의미로서 형평사라는 조직이 생겼다. ‘형평(衡平)’이라 함은 이 인간세상을, 이 인간사회를 저울대로 달아서 평탄하게 고르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 형평사가 남병산에 동남풍이 불 듯 비온 뒤에 죽순처럼, 곳곳마다 자유를 부르짖고 평등을 요구하며 정의의 함성으로 자유를 찾자, 평등을 찾자, 행복을 찾자 하는 것이 즉 형평운동이다.”

또한 할아버지는 일제 경찰의 분열 공작과 잔혹한 고문에 굴복하고 변절하는 등 도탄에 빠진 항일혁명운동 진영에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며 허무당(虛無黨)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허무당은 러시아에서 유래된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무정부주의운동이었다. 허무당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1926년 1월4일 허무당 선언문을 전국적으로 배포했다. 당시 선언문에서는 “혁명은 결코 언어와 문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유혈과 전사의 각오가 없이는 안 된다. 합법적으로 현 질서 내에서 혁명의 가능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저능아”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여러 차례 체포, 구속된 할아버지는 신분이 노출되어 더 이상 서울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종파분열로 점철된 운동에 실망감도 커졌다. 할아버지는 결국 다시 밀양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밀양에서도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1927년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연합해 결성한 통일전선 조직인 신간회에 적극 참여했다. 신간회 밀양지회에서 검사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중단 없는 항일혁명운동을 지속해나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나의 할아버지는 일제의 혹독하고 살인적인 폭압에 맞서 단 한 번도 적들에게 굴복한 일없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줄기차게 해방투쟁을 하셨다. 또한 억압받는 무산대중들을 위해 한 생애를 온전히 해방투쟁으로 일관하셨다. 그런 모습을 통해 내게도 대를 이어 민족해방, 민중해방을 위한 투쟁에 일관하도록, 해방투쟁의 전사로 살도록 가르치셨다.

할아버지는 왜놈들의 혹독한 사상전향공작을 끝까지 이겨내고 일제 말기에는 식민지 해방을 우리 민족의 역량으로 전취하기 위해 청년들과 함께 밀양의 북부산악지대로 들어가셨다. 그리고는 적의 무기를 탈취해 우리 손으로 해방을 맞이하려고 준비하셨다.

민족의 역량을 총결집해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자는 여운형 선생의 호소에 따라 밀양에서도 건국동맹 지부를 조직하셨고, 일제의 최후 발악적인 징용·징집에 반대해 산으로 들어온 청년들을 이끌고 밀양의 북부 화악산 밀림과 계곡에서 해방의 날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제의 패망과 함께 산 속의 청년들과 밀양의 북성거리로 입성했다.

그 길로 할아버지는 겨레의 원성으로 찌든 밀양경찰서를 접수했다. 치안대를 조직해 우리 조선 사람의 손으로 치안을 회복했다. 또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밀양지부를 조직한 뒤 항일운동의 선배인 김병환 선생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할아버지는 부위원장에 선임됐다. 할아버지는 환중인 위원장을 보좌하며 행정을 확보해 일제가 물러간 뒤의 혼란을 정리해나갔다. 일제의 만행을 피해 고향 땅을 떠났던 동포들이 일본에서, 중국과 동북 만주에서, 또 남양에서, 노령 땅에서 돌아오자 그들을 보살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말로 하는 애국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애국이 무엇인지, 운동가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 무엇이 참다운 운동가의 모습인지를 할아버지를 통해서 배웠다. 이제 팔십을 훌쩍 넘긴 내가 오늘날까지 후회 없는 삶을 살아온 것도, 또 앞으로 여생을 어떻게 마감해야 할 것인지도 바로 할아버지의 지난한 삶을 통해 배운 셈이다. 아직도 내 눈가에는 해방되던 날, 청년들의 무등을 타고 밀양 거리로 들어오시던 할아버지의 활짝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13살 때의 바로 그 기억이 오늘까지 나를 이끌어온 것이다.

[참고자료]

虛無黨宣言書

 

革命을 앞에 둔 朝鮮은 不安과 恐怖로서 呻吟하고 있는 이때를 當하여 爆破 放火 銃殺의 直接行動을 主張하는 虛無黨은 奮起하였다.

目下 朝鮮은 二重三重으로 暴惡한 敵의 迫害를 受하고 一步도 前進하기에 不可能한 最後의 悽慘한 絶頂에 서 있다.

2千萬 生靈은 危機一髮의 恐怖된 難境에 在하여 彷徨하고 死에 直面한 民衆의 現社會에 對한 呪咀는 衝天한다.

現在의 吾等은 希望도 理想도 將來도 何物도 없고 暴惡한 敵의 搾取와 虐待와 殺戮과 嘲笑와 侮辱이 有할 뿐인 暗黑한 修羅場에서 野望으로 血眼이 된 敵의 亂舞가 있을 뿐이다.

이의 戰慄할 現狀을 打破치 못하면 朝鮮은 永遠히 滅亡될 것이다. 我等의 理想으로 하는 最大多數의 最大幸福도 一種의 空想일 것이다.

暴惡한 敵은 政治 法律 軍隊 監獄 警察 等으로서 滅亡한 朝鮮의 命脈을 刻一刻으로 侵害하고 있다. 이 戰慄할 光景을 그저 黙過할 수 있겠는가 我等은 그냥 殺戮을 當하고 있을 수는 없다. 革命의 烽火를 點하자. 破壞의 義劍을 빼라. 義憤있고 血氣있는 者는 奮起할 時機는 왔다. 何等의 意義 及 價値없고 이 慘酷한 산보람은 얼마나 大衆을 爲해 하는 叛逆의 殉死가 痛快할 것이 아닌가. 我等을 迫害하는 暴惡한 敵을 向해 宣戰을 布告하자. 我等이 否認하는 現在의 이 兇暴 惡毒한 것이 蛇蝎과 如한 政治法律 及 一切의 權力을 根本으로부터 破壞하자. 이 戰慄의 光景을 破壞하는 方法은 直接 行動만이 있을 뿐 革命은 決코 言語와 文字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流血과 戰死의 覺悟가 없이는 안된다. 合法的으로 現秩序 內에서 革命의 可能을 信하는 者 있다면 그것은 低能兒이다. 我等은 死로서 盟約하고 暴力으로서 朝鮮革命의 完成을 期하고자 虛無黨을 組織하고자 한다. 革命 當時의 露西亞의 虛無黨의 行動을 習得하지 않으면 안된다. 我等 積年의 呪咀와 怨恨과 憤은 爆發했다.

我等을 搾取하고 虐待하고 殺戮하는 暴惡한 敵에 對해 復讐의 鬪爭을 開始하자. 朝鮮人이 受하는 虐待 悲哀를 切實히 感知하는 者라면 누구라도 虛無黨의 主張과 一致할 것을 確信할 것이다.

虛無黨의 主張을 反對하는 者는 民衆의 敵이다. 民衆의 敵은 爆破 放火 銃殺의 手段을 呼訴할 뿐이다.

暴惡한 敵의 虐待에 呻吟하는 民衆들이여 虛無黨旗幟 下에 集合하자. 彼의 慘忍兇暴한 敵을 一擧에 擊破하자. 最後의 勝利는 我等에 있다. 虛無黨萬歲 朝鮮革命萬歲

 

丙寅1月 虛無黨

편집국  news@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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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집단탈북’ 종업원들 하나원 안 보낸다

등록 :2016-06-21 01:21수정 :2016-06-21 07:52

 

집단 탈출 북한 해외식당에서 일하다 집단 탈출해 7일 국내에 들어온 탈북민 13명이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채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다. 이 사진은 통일부가 언론에 제공한 것인데, 이 장면이 언제 어디에서 촬영된 것인지는 통일부도 모른다고 밝혔다.  통일부 제공
집단 탈출 북한 해외식당에서 일하다 집단 탈출해 7일 국내에 들어온 탈북민 13명이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채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다. 이 사진은 통일부가 언론에 제공한 것인데, 이 장면이 언제 어디에서 촬영된 것인지는 통일부도 모른다고 밝혔다. 통일부 제공
13명 모두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6개월간 수용 예정…통상 1~2개월 그쳐 ‘이례적’
국정원, 통일연구원 연구자들 설문조사조차 거절…21일 법원 심리에도 불출석시키기로

 

중국 저장성 닝보 소재 북한식당에서 4월 초 ‘집단탈북’해 현재 국가정보원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옛 합동신문센터)에 70여일째 머물고 있는 남성 지배인 1명과 여성 종업원 12명을 정부가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에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는 일반적인 탈북자들의 정착지원 과정과 다른 이례적인 조처다. 국가정보원은 또 국무총리실 산하 통일연구원 소속 북한인권 연구자들의 이들에 대한 면담 신청을 관례와 달리 거절하고, 집배원의 법원 관련 서류 전달마저 두차례 거부하는 등 철저하게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원 관계자는 20일 “13명 북한식당 종업원 등을 하나원에 보내지 않고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6개월간 수용하기로 했다. 정착교육도 보호센터에서 받는다”고 밝혔다. 국정원과 수사기관은 탈북자를 최장 6개월까지 보호센터에서 합동신문할 수 있지만, 이는 위장탈북이나 간첩 혐의 등 의심스런 부분이 많을 경우다. 대개 탈북자들은 1~2개월 보호센터에서 조사를 받은 뒤 통일부 산하 하나원에 보내져 12주간 남한 정착 교육을 받게 된다. 이번 13명은 이미 정부가 ‘집단탈북’이라고 공개했기에 합동신문을 70일 넘게 벌일 까닭이 없다. 하나원 관계자는 4월 하순께 “북한식당 종업원 13명은 6월 초 보호센터에서 나와 하나원에서 정착교육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들을 보호센터에 6개월간 수용하는 것은, 이례적 ‘집단탈북’ 공개에 따른 ‘기획탈북’ 의혹의 확산을 막기 위해 외부 접촉을 차단하려는 의도라는 게 여러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예컨대 국정원은 이달 초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북한인권연구센터의 이들 13명에 대한 설문조사 요청도 거절했다. 통일연구원은 격주로 보호센터 탈북자들을 면담조사하는 등 연간 200명가량을 조사해왔다.

 

 

앞서 국정원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법원에 접수한 인신구제청구서 부본을 법원 명령에 따라 집배원이 여성 종업원 12명한테 직접 송달하려는 시도도 5월30일 두차례 거부했다. 담당 집배원은 이튿날 국정원 연락을 받고서야 청구서 부본을 이들 12명한테 전달할 수 있었다. 이때도 국정원 관계자는 집배원한테 ‘종업원들과 관련해 함구하라’고 요구했다. 국정원은 2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비공개 인신보호구제 심리에도 13명을 출석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정원 관계자는 “13명 대신 소송대리인을 법정에 참석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이례적으로 인신보호구제 관련 소송대리를 법무법인 태평양 소속 변호사 3명한테 맡겼다.

 

 

정부와 국정원은 이들을 비공개 법정에조차 출석시키지 않는 이유로 북한 가족들의 ‘신변안전’을 들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탈북자 비공개 원칙을 스스로 어기고 이들의 ‘집단탈북’을 즉시 언론에 공개한 사실 등에 비춰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자신이 탈북자이기도 한 한 탈북자지원단체 관계자는 “입국 3개월이 돼가는 시점까지 이들을 비공개 법정에조차 내보내지 않는 것은 기획탈북 의혹을 감추려는 시도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정부, 집단탈북 종업원들 꽁꽁 감추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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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모든 미군기지 사정권에 잡아넣었다고 경고

북, 모든 미군기지 사정권에 잡아넣었다고 경고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6/21 [02:1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이 사진은 2016년 3월 10일 조선인민군 전략군 서부전선타격부대가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장면이다.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날 발사된 탄도미사일은 4축8륜 자행발사대에 실려있었다. 조선의 언론보도는 자행발사대에서 발사된 그 탄도미사일이 목표지역의 설정된 고도에서 핵전투부를 폭발시켰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 탄도미사일이 화성-9호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화성-9호는 고도폭발식 탄도미사일이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 이 사진은 조선에서 해마다 '전승절'로 기념하는 2013년 7월 27일 평양에서 진행된 열병행진에 등장한 화성-7호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조선인민군 전략군은 2016년 3월 10일에 화성-9호 2발을 발사하였고, 3월 18일에는 화성-7호 1발을 발사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평안남도 숙천에서 동해 쪽으로 발사된 화성-7호는 약 200km의 고도를 유지하면서 약 800km를 날아갔다. 포물선 궤도로 비행하는 기존 탄도미사일의 항적은 그렇게 나타날 수 없다. 이번에 발사된 화성-7호는 2년 전에 발사된 화성-7호와 달리 비행고도를 조절하는 성능을 가진 개량형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특이한 형태의 궤도로 비행하는 화성-9호는 미국, 한국, 일본의 미사일방어망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최근 일본 돗토리현 해안가에서 발견된 탄두외피가 바로 이 미사일 외피로 추정되었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북은 20일 핵추진 잠수함 미시시피호를 비롯한 미국 전략무기의 한반도 전개에 대해 '핵보복 대응'을 거론하며 위협했다.

 

20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북한 국방위원회는 이날 대변인 담화에서 "날강도 미국의 가증되는 핵위협 공갈은 정의의 무자비한 핵보복 대응을 유발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담화는 미시시피호 한국 입항, 미국 민간 정보회사의 북한 정밀타격 시나리오 공개 등을 거론하며 "가증되는 핵위협 공갈은 우리의 자주권과 최고이익을 침해하고 이 땅에 무서운 핵재난을 들씌워보려는 미국의 가장 포악한 대조선적대시정책의 연장"이라고 비난했다.

 

담화는 이어 "핵전쟁은 결코 별다르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며 "투입된 핵타격수단들이 선정된 대상물에 대한 핵공격태세에 진입하면 그것이 곧 핵전쟁으로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담화는 "우리 군대는 'B-52H' 전략폭격기가 이륙하는 괌의 앤더슨 공군기지와 핵동력잠수함이 발진하는 해상침략기지들을 포함해 미국의 대조선 침략 및 병참보급 기지들까지 정밀타격권 안에 잡아넣은지 오래"라고 강조했다.


담화는 "우리에게는 평화가 소중하다. 조선반도의 긴장완화도 우리의 변함없는 지향이고 요구"라면서도 "우리는 평화를 구걸과 동정으로 얻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평화수호방식은 평화가 소중할수록 그를 해치려는 행위에 대해서는 그곳이 어디든, 그가 누구든 즉시적이고 무자비한 우리식의 앞선 선제타격을 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합뉴스는 한편 북한 조선중앙통신도 이날 논평에서 "미국 전략자산들의 투입은 공화국의 안전과 지역의 평화에 대한 엄중한 도전"이라며 "미국이 핵위협을 끊임없이 가증시키고 있는 조건에서 단호하게 맞서나가는 것은 나라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명백한 자위권 행사"라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대화에도 물리적인 조치에도 다 준비되어 있다"면서 "오늘날 조선반도 정세의 주요 변수는 미국이 어떤 자세에서 나오는가 하는데 많이 달려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은 조선노동당 제7차대회 이후 국방종합대학 현지지도 외에는 민생경제분야에 대한 현지지도에 집중하고 있으며 군사력을 과시하는 일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최신형 공격형 핵잠수함 미시시피호가 한반도에 나타나자마자 북의 언론들은 일제히 경고성 논평과 담화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 LA급을 대체하기 위해 만든 신형 공격형 핵잠수함 미시시피호, 핵순항미사일을 수십발 장착하고 다닐 수 있는 이 전략잠수함 한 척만으로도 북의 주요도시에 핵 공격을 가할 수 있다. 북은 이런 미군 전략병기가 한반도 주변에 나타난 것을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잠수함에서 북에 미사일을 발사할 징후가 조금이라도 감지되면 북이 먼저 핵미사일로 미군 거점을 모조리 초토화하겠다고 연일 경고하고 있다. 

 

특히 이번 보도에서는 핵전쟁 발발이 특별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발발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언급한 점은 매우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판단된다.

 

미국이 북을 핵으로 공격할 징후가 명백하다고 판단한다면 북은 먼저 핵선제타격을 가할 단호한 결심을 굳힌 상태라는 것이다.

 

문제는 최근 미국이 최첨단이라고 자랑하는 스텔스 핵전략폭격기 B-1, 가공할 무장을 탑재하는 핵전략폭격기 B-52, 수십발의 핵순항미사일을 장착하고 다니는 핵잠수함, 더이상 말이 필요없는 핵항공모함 전단 등 전례없는 핵타격장비들을 동원한 무력시위를 통해 핵무장을 강화하고 있는 북에 경고를 종종 전하고 있다.

경고와 실제 공격의 차이를 북이 어떻게 구별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구별이 결코 명백할 리가 없다.

 

전쟁사를 살펴보면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중동전쟁에서 훈련을 가장하여 무력을 최전선에 슬금슬금 배치한 후 불의에 선제타격을 가해 전쟁이 발발했었던 일 등 훈련과 실전이 연결되었던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북이 본격적인 핵보유국의 길로 나아간 최근 몇년간 미군이 훈련에 동원하는 무장장비는 언제든 전쟁을 바로 진행하고도 열번은 더 남을만한 전략적이고 방대하기 그지없다. 그것도 매년 최대치를 갱신하고 있다.

미군의 그 위험천만한 연례적인 전쟁훈련은 앞으로도 계속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이어지게 되어 있다.

 

다음으로 주목할 점은 북이 이미 한반도 주변 미군 전략거점을 타격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을 다 갖추고 그 성능을 계속 개량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북도 언제든 미군에게 선제 핵타격을 가할 준비를 끝낸 상황이며 그 능력을 계속 강화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준비가 끝났기 때문에 북은 미군의 움직임을 공격징후로 판단한다면 주저없이 핵선제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유고의 시민들도 전쟁이 그렇게 쉽게 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연평도 포격전 직후 우리 국민들도 처음엔 방송을 의심했었다.

지금도 북의 인민군 전략로케트부대가 일제히 한반도 미군부대와 태평양 미군 거점에 대해 일제히 핵선제타격을 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이야 몰라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부와 이 나라 전문가들이라도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 나라 전문가들과 당국자들도 미군 폭격기 한 대가 뜨면 한 나절 안에 북의 주요 레이더 기지를 완전히 초토화한 후 미군기들이 마음 놓고 북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 땅꺼지게 하고만 있다.

 

이 부분이 가장 걱정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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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MB-오세훈의 저주, 안전과 생명을 덮쳤다

 
‘너희들이 지난 2008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임병도 | 2016-06-21 10:11:1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TV조선 강적들에서 다룬 ‘구의역 사고’ ⓒTV조선 화면 캡처

 

TV조선 시사프로그램 ‘강적들’에서는 구의역 사고를 다루면서 ‘서울메트로 노조의 압력 못 이겨 부도덕한 회사 만든 박원순 시장도 사고의 책임 있다’라는 발언이 나왔습니다. 박 시장이 강성노조의 압력에 굴복했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진짜 주범은 귀족 노조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구의역 사고의 책임이 박원순 시장과 노조에 있다는 이 발언이 맞는지 알기 위해서는 누가 외주화를 시작했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너희들이 지난 2008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단계적으로 (인력을) 20% 줄이겠다는 것이 기본계획이다. 비능률을 줄이고 서비스의 질과 생산성을 높이는 게 목표다. 사람과 업무를 함께 분리하는 민간위탁(분사·分社) 방식을 택했다” (서울메트로 김상돈 사장)

2008년 서울메트로 김상돈 사장은 2010년까지 전체 인력의 20.3%인 2,088명을 줄이고, 민간위탁을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노조는 김 사장의 인력 감축과 민간위탁에 반발해 총파업을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서울메트로 김상돈 사장은 언론에 ‘노조가 휴가와 대체 근무 수당을 챙겨가고 있다’면서 도덕적 해이를 주장했습니다. 노조는 ‘사측이 외주화, 위탁 과정에서 전직 고위 인사와 서울시 낙하산 인사에 특혜를 줬다’며 ‘이들의 밥그릇을 챙겨주려고 편법으로 정년까지 연장하며 시민 재산인 공기업을 갉아먹고 있다’고 맞섰습니다.

 

▲2008년 9월 서울지하철노조 대시민 광고, 서울시와 공사의 외주화 강행 정책이 ‘낙하산 인사와 퇴물관료들의 이권 뜯어먹기’로 치닫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서울지하철노조

 

이명박 정권은 ‘공공기관 선진화 대책’을 외쳤고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은 ‘창의혁신 시정’이라는 명목으로 서울메트로 김상돈 사장이 추진한 편법, 탈법적 분사를 승인했습니다. 지하철역 유실물 센터, 구내운전, 전동차 경정비, 모타카·철도장비 운영, 스크린도어 관리는 외주화로 이어졌습니다. 이를 반대했던 노조 간부 70여 명이 해고, 직위해제를 140여 명이 고소, 고발을 당했습니다.

현재 서울메트로 경영진은 ‘창사 이래 최대 위기’라며 사죄하고 사표를 내는 등의 모습을 보입니다. 직원에게도 ‘혁명’해야 한다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노동자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구의역 사고 이전에도 벌어진 각종 안전사고와 지하철 노동자 자살 등의 근본적 원인은 2008년부터 진행된 ‘공기업 경영 효율화 정책’에 의한 구조조정이었습니다.

메피아와 지하철 문제의 책임은 박원순 시장과 노조가 아닌 서울시 지하철 외주화와 메피아 탄생의 주범인 이명박, 오세훈 전 시장, 강경호, 김상돈, 음성직 전 사장입니다. 이들을 조사하고 처벌해야 합니다.


‘박원순 시장이 밝힌 안전업무 직영화, 그러나 인력부족은 여전히 존재’

 

▲6월 16일 박원순 시장이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대책 기자회견에서 밝힌 안전 업무 직영전환 ⓒ서울시

 

지난 6월 16일 서울시는 ‘지하철 안전 업무 직영 전환 및 메피아 근절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구의역 사고 이후 드러난 안전 분야 외주화 및 메피아 특혜에 대한 근본대책이었습니다.

서울시는 민간위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서울메트로의 ①PSD(플랫폼 스크린 도어) 유지보수, ②전동차 경정비 ③차량기지 구내운전, ④특수차(모터카 및 철도장비)운영, ⑤역사운영 업무 등 5개 분야와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자회사인 도시철도ENG가 담당하는 전동차 정비, 궤도 보수 업무를 모두 직영체제로 전환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밝힌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외주화 문제를 직영으로 하겠다는 발표는 환영할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인력부족에 대한 대책이 더 보강돼야 합니다. 외주 현업 종사자는 776명인데 60세 이상과 전적자를 제외하면 334명만 현장에 투입됩니다.

2인 승무제를 하려고 해도 실제 현장에서는 1인 승무제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직영으로 운영되고 있는 도시철도의 PSD도 인력부족으로 점점 사고의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안전업무 직영화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지하철 노동자의 인력 충원이 보강되지 않는다면 완벽하게 안전사고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정규직, 인력 충원 발목을 막는 ‘총액인건비제’

 

 

인력을 더 충원해야 하는 문제를 박원순 시장 혼자서 해결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이유는 ‘총액인건비제’라는 제도 때문입니다. 총액인건비제는 ‘인력과 예산 운영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조직의 성과를 향상하기 위하여 각 시행기관이 당해 연도에 편성된 총액인건비 예산의 범위 안에서 기구․정원, 보수, 예산의 운영에 관한 자율성을 가지기는 제도’를 말합니다.

각 시행기관이 자율적으로 인력과 예산을 운영한다는 측면에서 장점이 있는 제도이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이명박 정부는 공무원 실질임금을 삭감하면서 정원 감축을 단행했습니다. 박근혜 정권은 ‘쉬운 해고’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총액인건비 기준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자율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중앙정부의 일방적인 통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박원순 시장이 무기계약직을 늘리게 되면 총액인건비를 초과하게 됩니다. 기획재정부의 방침인 총인건비 예산의 3.0% 이내 증액 인상 방침을 어기게 됩니다. 교부세가 삭감되는 불이익을 받습니다. 예산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박원순 시장이 직영으로 전환하고 인력을 충원하고 싶어도 불가능해집니다.

 

 

사고가 발생하면 원인이 존재합니다. 국민은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 지속적인 안전을 원합니다. 그러나 언론과 정부는 엉뚱한 곳을 가리키며 원인이라고 주장해 국민을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2008년 서울지하철노조는 ‘오세훈 시장의 계획 속에 벌어진 일인 만큼 서울시와 직접 교섭하고 싶다’고 요구했습니다. 서울시는 ‘노사 문제’라면서 한편으로는 ‘정부의 공기업 개혁을 서울시가 선도하겠다’며 서울메트로에 압력을 행사하며 개입했습니다.

MB의 공기업 선진화를 오세훈이 앞장서서 따르며 강행한 2008년 서울지하철 사태가 2016년 구의역 사고로 나타났습니다. 범인을 찾지 못하면 또다시 이런 범죄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진짜 범인을 우리는 찾아내야 합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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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 허덕이는 지방공항, 부담은 국민이 진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6/06/21 10:41
  • 수정일
    2016/06/21 10:4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신공항이 뭐기에④] 정치가 만든 지방공항들, 11곳에서 617억 적자

16.06.20 21:13l최종 업데이트 16.06.21 09:4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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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항하는 항공사가 없어 비행훈련원으로 쓰이고 있는 울진공항. AFP는 “1억4000만 달러를 들여 짓은 공항에 취항하는 항공사가 없다”며 울진공항을 2007년 황당뉴스로 선정했다.
ⓒ 부산지방항공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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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전국 11개 지방공항의 적자는 모두 617억 원. <오마이뉴스>가 한국공항공사를 통해 받은 지난 3년간의 지방공항 운영 실적을 보면 14개의 공항 중 김포, 김해, 제주를 제외한 모든 지방공항이 적자를 기록했다. 

영남권에서는 항공 수요 증가로 신공항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힘을 얻지만 지난해 대구, 울산(-114억 원), 포항(-78억 원), 사천(-44억 원) 공항은 적자였다. 대구공항은 그나마 사정이 나아서 2013년도 37억 원이었던 적자가 지난해에는 5억 원대로 줄었다. 

울산공항은 오히려 2013년 92억 원이었던 적자 폭이 지난해에는 100억 원으로 벌어졌다. 포항과 사천공항은 적자가 소폭 늘거나 줄어드는 제자리 수준이었다. 이는 KTX 등 내륙 교통망의 발달로 국내선 이용객이 크게 줄어드는 등의 변화 때문으로 분석된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흐름이 이어지고 있고 그 부담이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데 있다. 정부가 10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공항공사의 특성상 지방공항들의 적자는 정부의 부담이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아직 별다른 효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성 없던 지방공항들, 모두 장밋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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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공항공사가 밝힌 2015년 공항별 경영수지. 공사가 운영하는 14개 지방공항 중 11개가 적자를 기록했다. 11개 지방공항의 적자를 모두 합하면 617억 원에 이른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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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지역의 허브공항을 꿈꿨던 전남 무안국제공항이 기록한 지난해 적자는 89억 원. 120억 원의 운영비용이 들었지만 고작 30억 원밖에 벌어들이지 못해 생긴 손해이다. 이 무안공항의 경제성 타당성 조사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1998년 합격점을 받은 무안공항의 경제성은 이후 편익·비용 분석항목으로 계상할 수 없는 비목을 계상해 경제성 타당성을 돋보이게 한 것으로 드러났다. 878만 명을 예상한 무안공항의 이용객은 실제 10만 명 남짓에 불과했고, 166만 명을 예측한 강원도 양양공항도 수요는 뚜껑을 열자 2만 명에 머물렀다. 

울진공항은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1000억 원이 넘게 든 울진공항은 취항하는 항공사가 없어 지금은 비행훈련장으로 쓰이고 있다. 울진공항 건설에도 태백산맥 넘어 양양·봉화군 주민들까지 울진공항을 이용할 것이라는 뻥튀기 경제성 타당성이 밑그림이 됐다. 이를 두고 AFP는 "1억4000만 달러를 들여 지은 공항에 취항하는 항공사가 없다"며 울진공항을 2007년 황당뉴스로 선정하기도 했다. 

영남권 신공항 역시 2011년 국토해양부 용역에서는 합격점을 받지 못했다. "(100점 기준) 밀양은 39.9점, 가덕도는 38.3점의 평가를 받아 2개 후보지 모두 공항 입지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당시 정부의 판단이었다. 

기적에 가까운 공사비, 일단 짓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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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덕신공항 조감도.
ⓒ 부산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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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경제성이 낮다는 평가가 나오자 신공항 유치 희망지들은 이번에 기적에 가까운 공사비를 써냈다. 부산 가덕도에 공항을 지으려면 6조 원이 들 것이라 주장하고 있고, 밀양은 4조 6천억 원이면 활주로 2개짜리 공항이 만들어진다고 홍보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서병수 부산시장은 3조 원의 예산만으로 공항을 짓겠다고까지 선언하고 나섰다. 나머지 3조 원은 민자를 유치해서 보충하겠다는 계산이다. 이는 정부의 셈법과는 차이가 있다. 

2011년 정부가 파악한 2008년 기준 공항 건설 비용은 9조 5천억 원이었고, 2017년 이후 실제 사업에 들어갈 경우를 예상한 금액은 13~14조 원 가량이다. 무안과 양양공항을 30~40개 지을 수 있는 돈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제 사업에 들어갈 경우, 5조 8천억 원이면 만들 수 있다던 고속철도가 실제 20조 원이 넘게 쓰였던 것처럼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걱정이었다. 

전문가들의 우려 "공항건설은 다다익선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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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신공항 조감도
ⓒ 밀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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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희영 항공대 경영학과 교수는 "신공항이 현재대로 가덕이나 밀양으로 됐을 때는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단언했다. 허 교수는 "신공항으로 영남권 항공 수요가 모두 몰린다는 걸 가정하지만 추정된 수요가 정말로 신공항을 오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허 교수는 "현재의 공항 건설은 정부가 100% 투자하고 운영까지 떠안다 보니 생기는 문제"라면서 "정부가 책임을 지니 지역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어 공항 유치에 뛰어드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인천국제공항을 기획한 박연수 고려대 그린스쿨대학원 교수는 영남권 신공항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국제선 항공 노선과 승객이 확보되느냐인데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면서 "항공교통의 허브화 추세를 볼 때 미래도 불투명하고 국내경쟁 측면에서도 육상교통의 속도와 편리성을 볼 때 국토가 좁은 우리의 경우 항공교통의 경쟁력이 매우 낮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이미 국내 다른 공항건설에서 입증되었듯이 막대한 투자가 수반되는 공항건설은 다다익선이 결코 아니다"라면서 "국가전략과 백년대계의 관점에서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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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더스를 보며 100년 전 '악몽'을 떠올리다

 
2016.06.21 07:17:17
 
[장석준 칼럼] 100년 만에 다시 닥친 미국 진보 정치의 시험
 
그 해 미국 대통령 선거는 과거와 사뭇 달랐다. 평생에 걸쳐 독점 자본과 싸우며 사회 개혁에 앞장서온 한 상원의원이 공화당도, 민주당도 아닌 제3후보로 독자 출마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출마의 변은 "미국 민중의 정치, 경제 생활을 지배하는 독점 자본의 결합된 힘을 깨부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천연자원과 철도를 공공 소유로 만들고 부자 증세를 단행하겠다고 공약했다.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 선거가 아니라 직접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정치 개혁을 역설했고, 군비를 대폭 축소하자고 외쳤다.

그 동안 기성 양대 정당에 실망했던 많은 이들이 제3후보에게서 희망을 찾았다. 노동조합총연맹이 조직적으로 지원했고, 중서부에서는 부채로 신음하는 농가들이 지지하고 나섰다. 여러 분파로 나뉘어 있던 사회주의자들도 이번에는 한 목소리로 제3후보 주위에 결집했다. 제3후보는 공화당, 민주당 후보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3강 구도를 만들었다. 성급한 이들은 미국 정치에 드디어 공화당-민주당 양당 구도를 흔들 도전 세력이 등장한 것 아니냐고 분석했다.

한 세기 전의 '샌더스', 로버트 라폴레트 

안타깝게도 이는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야기는 아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 돌파구가 열리길 갈구하던 세계인의 바람과는 달리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낙마했다. <프레시안> 지면에 이미 썼던 것처럼(☞관련 기사 : 샌더스 열풍? 제국의 장벽은 높다!), 사실 민주당 경선에서 샌더스가 힐러리 클린턴을 누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민주당이 월스트리트 정당의 본분을 저버리지 않도록 보장하는 장치들은 강력했다. 

그렇다고 샌더스가 위의 이야기처럼 독자 후보 출마를 결행할 것 같지도 않다. 샌더스 자신이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클린턴 선거 운동에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샌더스 진영의 강경파 사이에서도 대선 이후 신당 건설을 주장할지언정 아예 이번 대선에 독자 출마하자는 목소리는 높지 않다. 공화당 대선 후보가 1964년 대선의 배리 골드워터(전 세계적 신자유주의 공세의 선구자 격이었던) 이후 가장 문제적인 극우파이기 때문에 독자 출마는 말도 꺼내기 힘든 형편이다. 

글머리에 소개한 '제3후보'는 실은 샌더스가 아니라 한 세기 전 그의 선배다. 1924년 대선에 '진보당(실제 창당은 하지 않은 종이 정당이었다)'이라는 제3당 명의로 출마한 로버트 라폴레트 상원의원이다. 

라폴레트는 위스콘신 주지사를 역임하고 상원에서 20여 년간 위스콘신 주를 대변한 원로 정치인이었다(1924년 출마 당시 69세). 본래 당적은 공화당이었다. 한데 이 시절의 공화당은 지금 공화당하고는 좀 달랐다. '공화당은 보수파, 민주당은 개혁파'라는 대립 구도는 뉴딜 이후에 뿌리 내린 상식이다. 20세기 벽두에는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공화당에도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혁신주의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라폴레트는 이러한 혁신파 공화당원 중 한 사람이었다. 독점 규제, 노동권 보장, 여성 참정권 등을 위해 싸워온 그의 정치 역정은 이미 전설이 돼있었다. 그는 이름보다는 '싸우는 밥(로버트의 애칭)'으로 통했다. 

라폴레트는 1924년 대선이 미국 정치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혁신주의자들이 지난 수십 년간 양당 안에서 사회 개혁에 진력했지만 부와 권력은 더욱더 월스트리트에 집중되기만 했다. 온전히 노동자, 농민의 입장에 서서 독점 자본과 대결할 새 정당이 필요했다. 라폴레트는 정치 인생 마지막을 이 과업에 쏟아 붓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대선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일단 라폴레트가 출마를 결행하자 순식간에 진용이 꾸려졌다. 하원에 한 석의 의석을 지니고 있던 미국 사회당은 오랫동안 재창당을 염원하고 있었다. 1901년 창당 이후 20년 넘게 활동해온 사회당은 미국 정치 지형에서는 영국 노동당처럼 노동조합의 조직적 지원을 받는 진보 정당을 새로 창당해야만 공화당, 민주당과 경쟁하며 성장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일부 젊은 노동조합 간부와 시민운동가들을 모아 '진보 정치 활동을 위한 회의(진보 회의)'를 꾸렸다. 

마침 분위기도 좋았다. 중서부 곳곳에서 '농민-노동당'이라는 공통 당명을 내걸고 노동자와 소농의 지지를 받는 주차원의 정당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 역시 진보 회의에 속속 모여들었다. 진보 회의는 라폴레트의 출마 선언을 당연히 두 손 들어 환영했다.

더 중요한 것은 노총(전미노동조합연맹, AFL)의 결합이었다. 실리주의자 새뮤얼 곰퍼스가 이끌던 당시 미국 노총은 사회당의 바람과는 달리 노동자 정당 창당에 동조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민주당 정부와 협력하는 데 맛들인 노총 집행부는 섣불리 영국 노동당식 실험에 나서서 기성 정당들과의 밀월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라폴레트 운동은 사정이 달랐다. 젊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진보 회의를 통해 라폴레트 선거운동에 적극 참여한데다 이 정도 대중적 흐름이라면 유력한 독자 정당이 등장할 가능성도 없지 않겠다 싶었다. 노총은 이례적으로 라폴레트 후보에 대한 지지, 지원을 천명했다.

1924년 대선에서 라폴레트 후보는 438만 표, 16.6%를 획득했다. 정치 거점인 위스콘신 주에서는 1위를 했고,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투표용지에 '사회당 후보'로 나왔는데도 2위를 했다. 미국 역사상 진보 좌파 성향의 제3당 후보로서는 전무후무한 득표였다.

다음해인 1925년에 사회당은 대선 성과를 바탕으로 독자 정당을 창당하자는 안건을 진보 회의에 제출했다. 그러나 대선 기간과는 달리 노총 집행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들이 결단하도록 만들기에는 500만 표로도 부족했나 보다. 사회당이 제출한 안건은 진보 회의에서 부결됐다. 

그러고 나서 몇 달 뒤에 라폴레트 의원이 노환으로 사망했다. 대선 운동의 피로가 노(老) 정치가의 건강을 급속히 악화시킨 것이다. 라폴레트 없는 진보 회의에는 이제 더 이상 어떠한 구심점도 없었다. 미국에도 강력한 진보 정당이 등장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는 이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기존 대중운동의 혁신이라는 장벽을 넘어야 

사회당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지만, 이들의 진단은 정확했던 셈이다. 새 정치 세력 구축의 열쇠를 쥐고 있었던 것은 분명 노동조합이었다. 영국 노동당이나 캐나다 신민주당의 사례에서 보듯이 노동조합 운동이 뒤늦게라도 독자 정치 세력화에 나선다면 진보 정당이 충분히 자리 잡을 수 있다. 반면 미국에서는 1924년 라폴레트 선거운동으로 진보 정치의 성장 잠재력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선택 때문에 진보 정당 없는 정치 지형이 굳어졌다. "미국 노동계급과 민주당의 불임의 결혼"(마이크 데이비스)이 시작됐다.

라폴레트 바람으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2015년에 미국에서는 돌연 샌더스 바람이 불었다. 이 바람은 클린턴의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과 함께 일단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샌더스는 대선 후보 경선을 접으면서 오히려 "정치 혁명은 계속된다"고 부르짖었다. 대선 본선에서는 클린턴의 당선(이라기보다는 트럼프의 낙선)을 돕는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새로운 투쟁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다. 그게 민주당 내부 개혁 투쟁으로 나타날지 아니면 독자 진보 정당의 길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기대가 크다. 하지만 자꾸 라폴레트 운동의 기억이 떠오른다.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던 그 때의 악몽을 과연 이번에는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샌더스 바람을 출발 삼아 미국 현실 정치 안에 진보 세력이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이 물음의 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열쇠를 쥐고 있는 게 누군지는 분명하다. 이번에도 이는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된 대중운동이다. 

물론 샌더스 운동에는 이미 나름의 사회적 토대가 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급속하게 신자유주의 질서에 회의를 품게 된 청년층이 그들이다. 이들은 대개 기성 대중 조직들 바깥에 있다. 어떤 점에서는 이들 조직에 비판적이며 자기 세대에 익숙한 문법에 따라 새로운 대중운동을 표방한다. 스페인에서는 이런 흐름이 포데모스로 나타났고, 영국에서는 제러미 코빈의 노동당 대표 당선으로, 미국에서는 샌더스 돌풍으로 나타났다.

21세기의 세계 상황에 더없이 어울리는 지지 기반이다. 그러나 이들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샌더스 진영이 맞부딪힌 두 개의 거대한 장벽에서 이게 드러났다. 두 장벽이란 바로 노동조합과 흑인 공동체(지역 사회)다. 물론 노동조합과 흑인 공동체 안에도 샌더스 지지파는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 엘리트들과 함께 '불임의 결혼'을 이어가는 지도부 아래서 다수는 클린턴 지지층으로 남았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두 장벽의 위력이 이러했다면, 이후 일상 정치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민주당 안에서 싸우든 새 정당을 건설하든 노동조합과 흑인 공동체를 뒤흔들고 이들을 지지 기반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샌더스 운동은 청년층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라폴레트 운동이 갇혔던 숙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노동조합과 흑인 공동체란 지난 세대의 대중운동이 시민 사회에 남겨놓은 진지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들은 변혁의 진지라기보다는 월스트리트를 대변하는 민주당 주류의 진지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바깥에서 등장한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은 이 오래된 진지들을 통째로 적으로 돌리거나 우회해서는 결코 미국 사회 전체의 대안으로 부상할 수 없다. 비록 수고롭더라도 이들 기성 대중운동을 혁신해서 새 세대 운동과 연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100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어떻게든 노동조합(과 흑인 공동체) 진영을 변화의 정치 쪽으로 끌어당겨야 하는 것이다. 샌더스 바람이 단막극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은 오직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게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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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만에 재조명되는 ‘한강하구 중립수역’

브룩스 대장은 왜 ‘민정경찰 투입’을 승인했나?[친절한 통일씨] 63년 만에 재조명되는 ‘한강하구 중립수역’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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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20  12: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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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정부는 유엔군사령부와 협의를 거쳐, 해군과 해경으로 편성한 민정경찰(Military Police)을 ‘한강하구 중립수역’에 들여보냈다. 불법 조업 중인 중국어선을 단속하기 위해서였다. 

정전협정 발효 이후, 이 지역에 남측 선박이 진입한 사례는 1997년 북측 양해 하에 '유도로 떠내려간 소 1마리 구출작전' 등 손에 꼽을 정도다. 민정경찰 진입에 대해서는 “63년 만에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군사분계선(MDL), 한강하구 중립수역, 그리고 북방한계선(NLL)

   
▲ 지난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때 노무현 정부가 작성한 지도. 붉은색 칠해진 지역이 '한강하구 중립수역'. [자료사진-통일뉴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윌리엄 해리슨 미국군 중장과 남일 북한군 대장이 각각 유엔군사령관, 북한 및 중국군 사령관을 대신하여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육상에 ‘휴전선’이라 부르는 ‘군사분계선(MDL)’을 확정하고, 그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km 후방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했다. 무장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구역인 ‘비무장지대(DMZ)’를 설치한 것이다. 이를 관리.감독하기 위해 각각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를 설치했다.   
 
정전협정은 또한 육상 군사분계선이 끝나는 지점에서 서해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한강하구 지역을 ‘중립수역’으로 설정했다. 좁은 곳은 폭이 약 900m인 강을 사이에 두고 양측 군대가 대치하고 있어, 완충지대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서해에는 훗날 유엔군사령관에 의해 ‘북방한계선(NLL)’이 그어졌다. 

국제법적으로 바다와 달리 하천에는 자유항해가 보장된다. 특히, 접경지역 하천에는 인접국들 간 무장충돌 방지를 비롯한 안보 우려 해소, 민간선박의 자유 항해를 보장하는 균형 있는 조치들이 필요하다. 정전협정 제1조 5항과 그 후속합의가 탄생한 배경이다.    

정전협정 제1조 제5항은 다음과 같다. “한강하구의 수역으로서 그 한쪽 강안이 일방의 통제 하에 있고 그 다른 한쪽 강안이 다른 일방의 통제 하에 있는 곳은 쌍방의 민간선박의 항행에 이를 개방한다. 첨부한 지도에 표시한 부분의 한강하구의 항행규칙은 군사정전위원회가 이를 규정한다. 쌍방 민간선박이 항해함에 있어 자기 측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육지에 배를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않는다.” 

지도상으로,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만우리에서 강화도 서도면 불음도까지 67km 구간이 한강하구 중립수역이다.

정전협정 제1조 제5항에 따라, 양측 군사정전위는 1953년 10월 3일 제22차 회의에서 ‘한강하구에서의 민용선박 항행에 대한 규칙 및 관계사항’을 채택했다. 1주일 뒤 발효된 이 규칙은 육상 비무장지대(DMZ)에 적용되는 규정을 중립수역에 준용하여, 군사정전위의 허가 없이 군용 선박과 병력, 무기.탄약을 실은 민용 선박 출입을 금지했다.

양측 모두 중립수역에서 쌍방 100m까지 진입할 수 없게 하고, 군사정전위원회에 등록한 선박에 한해서 중립수역 중앙으로 항해할 수 있게 했다. 

순찰 목적으로, 양측이 각각 최대 4척의 민정경찰용 선박, 24명을 넘지 않는 민정경찰 인력을 운용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다만, 상대편 만조 때 땅과 물이 경계를 이루는 선을 기준으로 100m 안으로의 진입은 금지했다.

중국어선 단속 근거는 군사정전위 ‘사전등록’ 

정부가 중국어선을 단속하는 직접적인 근거는 바로 ‘한강하구에서의 민용선박 항행에 대한 규칙 및 관계사항’이다. 

△선박이 중립수역에 들어오려면 군사정전위에 등록해야 하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고, △대부분 국적 표시 깃발을 달지 않았으며, △야간활동 금지 조항도 어겼다는 점을 들어, 중국 어선들을 ‘무단진입 선박’으로 규정하고 민정경찰을 투입해 단속한 것이다. 

문제는 정전협정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공동기구로 출범했던 군사정전위원회가 현재는 이름뿐이라는 데 있다. 

지난 1990년 2월, 한.미가 미군 장성이 맡아오던 유엔사 측 군사정전위 수석대표에 한국군 장성을 임명하자 북한은 군사정전위에 불참하고 별도로 판문점대표부를 출범시켰다. 중국 측도 군사정전위에서 탈퇴해 정전협정의 세 축 중 하나가 무너졌다. 이후 정전협정 사안은 북측 판문점대표부와 유엔사 군사정전위, 또는 북.미 군사회담 틀에서 드문드문 논의됐다. 북한이 지난 2013년 3월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한 이후에는 그 틀마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중국 어선의 ‘사전등록’을 받아줄 적법한 기구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중립수역에 자국 어선을 들여보내기 위해 중국이 북한을 건너뛰고 유엔사 측 군사정전위에 등록 신청을 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중국은 유엔사, 북한과 함께 정전협정의 당사자다.

한.미는 왜 지금 중립수역에 군.경을 들여보냈나?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에도 이 수역에서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이 이어지자 외교적 조치의 한계를 인식해 민정경찰을 운용하기로 한 것”이라는 정부 설명이다. 또, 유엔사 군사정전위 명의의 통지문을 통해, 미리 북측에 알렸다고 강조했다.

20일 현재, 북측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정부가 “한강하구에서 중국어선이 완전히 철퇴될 때까지 작전을 펼칠 계획”이어서, 향후 북측이 대응 행동에 나설 가능성은 열려 있다. 

이번 작전에 나선 한국 정부의 처지는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다만, 미군 장성이 사령관으로 있는 유엔군사령부가 한강하구 중립수역에서 63년 만에 민정경찰 작전을 승인한 배경에는 여전히 의문부호가 붙는다. 

우선, 한강하구를 비롯한 서해 일대에서 중국 어선들의 불법조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DMZ나 NLL과 마찬가지로, 한강하구에서 유엔사의 최우선 임무는 우발충돌 방지다. 유엔사가 63년 간 이 지역에 군.경을 들여보내지 않은 이유다.       

   
▲ 지난 15일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한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사진-청와대]

최근 변화라면, 지난 4월 30일 빈센트 브룩스 육군대장이 주한미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으로 취임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국 부임 전에 태평양 육군사령관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아.태 재균형’을 이행해온 대표적인 인사다. 인도-아시아-태평양 지역을 관할하는 태평양사령부에서 중국에 대한 군사적 견제방안을 입안해온 그가 ‘중국어선 단속’이라는 명분에 본능적으로 이끌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한강하구 중립수역에서 중국어선을 단속한 시점(6.10)에도 눈길이 간다. 

9일 새벽, 중국 호위함 1척이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접속수역에 진입했다. 미국의 ‘아태 재균형’에 보조를 맞춰 남중국해 문제 개입을 확대하던 일본이 동중국해에서 중국에 허를 찔린 것이다. 그 다음날 브룩스 유엔군사령관은 서해와 인접한 한강하구에서 중국어선을 단속하는 작전을 승인했다. 무려 63년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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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이재명’이 필요하다

 

[김종철 칼럼]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cckim999@naver.com  2016년 06월 19일 일요일
 

성남시장 이재명이 지난 6월 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작한 단식투쟁을 열하루 만인 17일 오전에 끝냈다. 그는 단식에 들어가면서 “박근혜 정부가 지자체 밥줄을 끊으려 한다면, 나도 끊겠다!”라는 글이 적힌 펼침막을 내걸었다. 그는 거기에 “김대중 대통령이 살리고 / 노무현 대통령이 키우고 / 박근혜 대통령이 죽이는/ 지방자치를 지키겠다”는 ‘결의’를 곁들였다. 이재명은 박근혜에 맞서 단식투쟁을 벌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동안 정부가 지자체들에 교육비니 기초연금제니를 떠넘기고 약 4조7천억원을 뺏어갔다. 정부도 인정하는 액수고 들려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그러니 전국의 226곳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220곳이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바로 부도가 나는 상황이다. 남아 있는 6곳이 경기도의 수원, 화성, 고양, 용인, 과천, 성남이다. 여기는 정부 보조를 전혀 받지 않고 자체 세입만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6곳에서 5천억원을 뺏어서 다른 지역에 나눠주겠다고 한다.”

박근혜 정권은 이재명의 이런 주장에 대해 설득력 있는 변명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집권 30개월이 다 되어 가는 현재 국민경제가 절망적 침체에 빠져 있는 마당에 기껏 시도한다는 것이 6개 도시의 세입을 빼앗아 나머지 220개 지자체에 나눠주는 ‘선심’을 쓰겠다는 것이니 누가 동의할 수 있겠는가? 이재명의 단식에 대해 정부쪽이 보인 반응은 행자부가 “2014년 1월 6일부터 2016년 6월 30일 사이의 특정 날짜를 지정해 이재명의 일정 내역을 제출하라”고 성남시 감사관실에 요구한 것뿐이었다. 이에 대해 이재명은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일정을 내놓으면 내 90일의 일정도 내놓겠다”고 응수했다.

 

▲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68년이 가까워지기까지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단식투쟁을 벌인 지자체장은 이재명이 처음일 것이다. 그가 제기한 문제도 민주제의 근간들 가운데 하나인 지자체의 존립을 위해서는 아주 중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극우보수언론과 주요 지상파 방송사들은 그의 단식투쟁을 철저히 외면해버렸다. 일부 진보적 매체들만이 보도와 논평을 내보냈을 뿐이다. 그러나 이재명의 싸움은 외롭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과 시민단체들, 그리고 야권의 정치인들이 그를 찾아 응원하고 격려했다.

이재명은 ‘입지전(立志傳)적’이라는 상투적 용어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투사’이자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대변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정치인이다. 그의 성장 과정 자체가 한국사회 소외계층의 고통과 수난을 상징하고 있다.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로 민주헌정을 뒤엎고 정권을 빼앗은 지 3년 뒤인 1964년에 태어난 이재명은 어린 시절부터 지옥 같은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했다. 그의 부모는 경북 안동의 산꼭대기 아래서 화전을 일구며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일자리를 찾아 경기도 성남으로 올라온 뒤 아버지는 시장에서 청소를, 어머니는 시장 화장실 문에서 ‘요금’을 받는 일을 했다. 그러니 5남 2녀가 반지하 단칸방에서 부모와 함께 새우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를 가까스로 마친 소년 이재명은 야구 글러브 공장에 다니다가 왼쪽 팔목뼈 하나가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해 지금도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그는 마음을 다잡은 뒤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중앙대 법대에 ‘월급’을 받는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는 6월항쟁 전 해인 1986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이 글의 제목을 “더 많은 ‘이재명’이 필요하다”라고 뽑은 까닭은 초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 자체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신음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밝은 기운을 안겨주고, 이명박근혜 정권이 숨통을 조아버린 민주주의를 되살리는 데 앞장설 정치지도자를 갈망하는 대중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재명은 지방자치 행정가로서, 정치인으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고, 그 일은 현재진행형이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성남시장에 당선된 그는 전임자인 이대엽(연기자 출신, 한나라당원)이 8년 동안 시장을 하면서 파탄 상태에 빠트린 재정과 운영을 빠르게 바른 궤도에 올려놓았다. 2014년 선거에서 성남시의 보수적 지역인 분당에서조차 압도적 지지를 받아 시장에 재선된 이재명은 청년 배당, 무상 산후조리, 무상교복 지원 등 가난하고 소외된 시민들을 위한 정책들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극우세력과 보수언론이 ‘좌파’라고 공격해도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내년 12월에는 19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다. 이미 오래 전부터 여권과 야권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이 ‘대권주자’ 명단에 올라 있고, ‘경마 중계방송’ 식으로 보도되는 여론조사 결과들에서는 수시로 순위가 바뀌기도 한다. 이재명은 지난 4월 18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정치BAR-라이브톡톡’)에서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사실상 공식으로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출마했을 때) ‘웃기네’ 정도가 되지 않아야 한다.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어야지 전혀 가능성이 없는데 나오면 한겨울에 뛰쳐나온 개구리 신세가 된다.” 그는 지난 1월 23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선 관련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대통령, 할 수 있으면 해야지, 안 되니 못하는 것 아닌가? 저 놈 대통령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2~3% 생겨났다. 하지만 (대권은) 주마가편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민심의 문제다.”

미국의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5% 미만의 지지율에서 시작해 클린턴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버니 샌더스는 자신이 수십년 동안 추구하고 실천해온 ‘민주사회주의적 가치와 정책’을 미국의 대중에게 더 알리기 위해 마지막까지 경선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재명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회 기득권 체제가 너무 강고하다. 그들이 볼 때 나는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이고 너무 원론적이다. 그래서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클린턴 지지자들도 샌더스에 대해이와 비슷한 우려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이재명이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그가 제시하는 정책과 이념은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저 후보야말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이라는 인식을 주권자들에게 심어주면서 다른 경쟁자들이 저런 장점을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년의 대통령선거는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수구보수적 체제가 영구화되다시피 하느냐, 그보다 진취적이고 결단성 있는 후보가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민주주의와 민생을 살리고 꽉 막힌 남북관계에 숨통을 터 통일의 길을 열 수 있느냐를 판가름하는 역사적 계기가 될 것이다. 야권에서 이재명 같은 정치인들이 선의의 경쟁에 더 많이 참여해서 최선의 결과를 이루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은 <뉴스타파>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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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경협 손실, ‘특별법으로 정당 보상해야’

홍익표 의원, 남북경협 손실보상 특별법 토론회 개최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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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19  21: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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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경제협력사업 중단에 따른 소실보상에 관한 특별법안 토론회가 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홍익표 더민주당 의원 주관으로 진행됐다. [사진제공-홍익표 의원실]

앞으로 기업의 귀책 사유없이 정부 정책의 변화로 남북경협 사업이 중단되거나 폐쇄되는 경우 헌법 제23조 제3항의 취지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하도록 하는 특별법의 제정과 함께 그 내용을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부의 개성공단 전면 중단 조치가 위헌임을 확인해 달라는 헌법소원심판청구를 대리하고 있는 김광길 수륜아시아법률사무소 변호사는 16일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국회의원이 주관한 ‘남북경제협력사업 중단에 따른 손실보상에 관한 특별법안 토론회’에서 앞으로 재개될 남북경협사업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는 이 같은 법률 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개성공단 전면중단 등 경협사업 중단이 안보상의 이유로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해 손실을 입은 기업 등에게는 정당한 보상이 지급되는 것이 헌법 정신에 부합하기 때문에 이미 발생한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서도 특별법의 제정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김 변호사는 정부가 경협중단으로 인한 손실에 대한 보상을 근거법률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있지만 헌법 제23조 제3항이 ‘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며, 경협사업 중단조치로 인한 재산권 사용제한으로 손실이 발생한 만큼 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위해 근거 법률의 제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더욱이 정부가 개성공단 전면중단 조치를 법적 근거없이 통치행위로 했다면, 보상 역시 별도의 법률근거가 없더라도 통치행위로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업 입장이라고 논박했다.

개성공단 중단 조치에 대해 정부는 “대통령의 고도의 정치적 행위에 따른 결정”이고 “긴급명령으로 한 게 아니라 정치적 결단이기 때문에 다른 법을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5.24조치 때도 그랬다.

김 변호사는 정부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1996년 “통치행위를 포함한 모든 국가작용은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통치행위도 당연히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며, 다만 당해 통치행위가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를 지켜 이루어진 것이 명백하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여 사법적 심사가 자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고 반박했다.

또 경협 중단 조치는 대통령의 헌법 제76조에 따른 긴급재정경제명령 또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제17조 제4항에 따른 협력사업 취소 또는 정지에 법적근거를 두고 발동해야 했지만 불가피한 경우 사후 국회 보고후 승인, 청문 절차 등 헌법과 법률에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하자가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정부가 5.24조치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근거로 최근 개성공단 전면 중단에 대한 국가배상을 부정하는데 대해서는, 당시 대법원이 개성공단에 관한 한 5.24조치로 인해 신규 진출과 투자 확대만을 금지하는데 그쳤지 경영활동 전면 중단을 포함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주로 판단했다는 점에서 이번 개성공단 전면 중단 조치와는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하에서 군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 물자, 시설 또는 권리를 징발하는 경우에도 징발법 제19조 및 제21조에서 ‘시가’를 원칙적 기준으로 보상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 계엄법 제9조의 2에서도 손실이 교전 상태에서 발생한 경우가 아닌 한 정당한 보상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점도 상기시켰다.

이에 대해 유욱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도 헌법 제23조 제3항을 근거로 국가는 공공필요에 따라 국민의 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희생된 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여야 하고 그 보상의 근거가 되는 법률도 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유 변호사는 “정부의 대북정책이 남북경협 중단을 야기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고도의 정책적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 남북경협 중단 자체가 불법행위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의 확고한 입장”이며, “남북경협 중단 결정이 명백하게 법률을 위반했다는 점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국가배상법상의 손해배상을 통하여 남북경협 중단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받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남북경협 중단으로 인한 손실 보상은 헌법 제23조 제3항에 따른 손실보상에 따라 해결하여야 할 문제이며, 이를 위해서는 보상의 근거가 되는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정당한 보상’에 충실한 입법이 되기 위해서는 공용수용 및 재산권 제한으로 인한 손실 보상에 관한 기본법이라 할 수 있는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의 보상 체계를 참조하여 특별법을 제정하되, 남북경협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손실보상 항목과 보상 내용을 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 이날 논의된 특별법은 기업의 귀책사유없이 정부 정책의 변화로 남북경협사업이 중단되거나 폐쇄되는 경우 그 절차를 규정하고, 헌법 취지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하도록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사진제공-홍익표 의원실]

이날 김서진 개성공단기업협회 상무이사는 지난 2월 10일 정부의 개성공단 전면중단 조치로 인해 기업들은 심각한 재산상 피해를 입었지만 이 피해를 보상해 줄 수 있는 법률적 근거가 없다보니 정부의 지원은 실제 기업의 피해규모와는 상관없이 예산 범위안에서만 이루어지는 한계가 있다고 개탄했다.

김 상무는 2008년 금강산관광 전면 중단으로 인한 금강산관광지구 투자기업의 피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지구 이외 내륙투자기업들이 5.24조치로 인해 입은 피해, 그리고 2013년 개성공단 잠정 중단으로 인한 기업의 피해 당시에도 손실보상에 관한 특별법 제정이 논의됐으나 번번이 정부 여당의 반대로 좌절됐다고 지적했다.

북한 내륙지역 투자기업과 임가공·교역업체를 대표해 김한신 ㈜G-한신 대표는 “그나마 개성공단 사업은 여론이 무섭고 총선도 있으니 보상·배상을 지원하겠다고 국민의 눈을 속이고 있지만, 약 1,100여 기업(내륙투자 49개사, 교역·임가공 1,048개사)은 8년 동안 아무런 대책없이 방치하고 관심 밖의 국민으로 치부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 대표는 정부가 지금까지 남북경협 중단으로 인한 기업들의 피해에 대해 단 한번도 조사한 적이 없다며, 정확한 실태조사와 이를 바탕으로 한 실효적 보상방안을 강구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를 위해 △국회와 정부내에 남북경협기업 피해조사처를 신설하고, △북한에 투자한 자산을 정부가 인수해 줄 것, 그리고 △경협기업과 근로자들에게 긴급생계비와 전업자금 지원, △경협기업 대출금 상환 유예 및 이자탕감, 채무 조정 등 구제방안 검토 등을 호소했다.

신양수 금강산기업인협의회 회장도 지난 19대 국회에서 입법 무산된 ‘5.24조치 등 경협사업 중단에 따른 손실보상법’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면서 “북한 핵문제로 금강산관광 재개가 당장 어렵다면 적어도 기업들의 투자자산에 대한 완전한 보상과 영업 중단에 따른 피해보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 회장은 “금강산 투자기업의 최우선적 바람은 남북관계가 안정되어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서 사업을 하는 것”이라며, “정부가 남북경협 사업을 영원히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투자기업들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손실보상과 피해지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경제협력사업 중단에 따른 손실보상에 관한 특별법' 주요 제안

김광길 변호사는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을 기초로 손실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 좋겠다며, 몇 가지 주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새로 제정될 손실보상에 관한 특별법은 ‘남북관계 상황의 변화에 따라 남북경협사업이 중단되어 이에 종사하는 우리 국민과 기업에게 발생한 경제적 손실에 대한 보상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적용 대상과 범위는 ‘남북경협 사업의 중단으로 인하여 손실을 입게 된 남북경협 사업자 전부’로 하고 △5.24조치로 인한 사업중단, △금강산관광사업 중단, △개성공업지구 중단, △개성관광사업 중단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 법에 따른 보상은 남북경협 사업 중단 당시 남북경협사업자의 북한 지역 투자자산의 국제시장가치 전부와 일실이익(逸失利益, 손해배상 청구 발생 사실이 없었다면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이익) 전부를 보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지연이자는 최대 3년까지 적용한다.

보상 절차가 완료된 물건의 소유권과 권리 등은 국가로 이전되고 통일부 장관이 이를 유지·관리하며, 이 경우에는 ‘국유재산법’을 적용하지 않는다. 이후 남북경협 사업이 재개되는 경우에는 보상금을 지급받은 사업자가 이 법에서 정한 금액을 국가에 지급하고 해당 권리를 환매할 수 있다. 사업자가 남북협력기금법 제8조 제4호의 보험금을 지급받았을 경우에는 보상금에서 보험금을 차감하도록 한다.

특히 손실보상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기 위하여 통일부에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9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되는 손실보상심의위원회를 설치하여 심리절차와 감정평가 의뢰, 실지조사권을 부여한다.

손실보상을 받고자 하는 자는 통일부장관에게 손실보상 청구를 하고 손실보상심의위원회는 청구일로부터 90일 이내에 손실보상에 관한 의결을 하도록 하며, 이에 이의가 있는 경우에는 의결서를 받은 날로부터 30일 이내, 불복시에는 90일 이내에 이의 신청을 할 수 있고, 이의신청 경과후에는 각각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토지이용권, △건축물 등의 토지의 정착물, 흙, 돌 등, △사업권, △북한에서 행하는 영업, 부대영업 등에 대한 보상금 산정의 구체적인 기준, 평가방법 등은 별도 시행령으로 정한다.

또 정부는 남북경협 사업중단으로 생활에 곤란을 겪고 있는 기업과 협력업체에 고용된 근로자에게 취업알선과 생계비 지급 등을 긴급 지원하되, 생계비 지원금의 지급기준, 금액의 산정 및 지급방법 등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통일부령으로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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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테러 지목 한국인을 대하는 국정원의 자세

국정원의 정보 수집으로 밝혀진 사실? 이미 인터넷에 공개된 내용’
 
임병도 | 2016-06-20 10:25:4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ISIL 해커 조직이 유포한 것으로 알려진 경기도 오산 주한미군 공군기지 위치정보 ⓒ국정원 보도자료

국정원이 6월 19일 ‘IS’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가 국내 미군 시설과 우리 국민을 테러 대상으로 지목했다고 공개했습니다. 국정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인 ISIL(IS의 다른 이름)이 우리 국민과 국내의 미국 공군시설을 테러대상으로 지목하고 시설 좌표와 신상정보를 메신저로 공개하면서 테러를 선동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국정원은 ‘우리나라의 경우 경기도 오산과 전라북도 군산에 있는 미국 공군기지의 구글 위성지도와 상세한 좌표, 홈페이지 등이 공개됐으며 국내 복지단체 직원 1명의 성명과 이메일, 주소가 공개됐다”며 ‘만약의 테러 가능성에 대비하여 주한 미군 공군과 군·경 등 유관기관에 해당 사실을 통보했으며 신상정보가 공개된 사람은 경찰을 통해 신변보호 조치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국정원이 배포한 보도자료를 받은 대한민국 언론사들은 앞다퉈 속보라며 IS의 국내 테러 가능성 관련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국정원의 ‘IS 한국인 테러 지목’ 사건은 알면 알수록 너무 허접합니다.

① 국정원의 정보 수집으로 밝혀진 사실? 이미 인터넷에 공개된 내용’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 6월 8일 공개된 IS Kill List ⓒ인터넷 사이트 캡처

국정원이 6월 19일 공개한 ‘IS 한국인 테러 지목’ 사건은 IS의 해커조직인 ”유나이티드 사이버 칼리파(United Cyber Caliphate)’가 6월 8일 #Kill_List라는 태그를 통해 알려진 내용입니다. 해외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이미 6월 8일 관련 사건이 공개됐습니다.

6월 19일 저녁부터 6월 20일 아침까지 쏟아진 뉴스를 접한 국민들은 불안감에 떨면서 국정원의 정보수집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정원이 배포한 자료도 해외 일반 사이트에서 알려진 내용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특별하게 테러 관련 정보가 업데이트된 것도 없습니다.

② 테러 지목 김씨 신변보호는 19일에서야 이루어져.

국정원은 보도자료를 배포하면서 테러 대상자로 지목된 김씨의 인적사항을 그대로 노출했습니다. 정보에 민감해야 할 국정원이 오히려 한국인을 위험에 빠뜨린 셈입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김씨의 가족은 언론 보도가 나온 6월 19일에서야 테러 대상으로 지목된 사실을 알았습니다.

경찰은 김씨에 대한 신변보호 통보를 받고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국정원이 경찰에 통보한 주소가 옛날 주소였기 때문입니다. 국정원도 김씨가 제대로 보호받는지 아닌지를 확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김씨 가족이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기 시작한 것은 언론에 김씨 관련 사건이 보도된 19일 저녁이었습니다. 인터넷에 테러 대상자로 지목된 지 10일이 지난 시점입니다.

③ 테러방지법 때문에 테러 방지 가능했다?

국정원은 IS 한국인 테러 지목 사건을 공개하면서 테러방지법 때문에 테러 위협 정보가 유관 기관에 즉각 전파될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국정원 주장은 테러방지법 때문에 테러를 예방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테러방지법이 꼭 필요하다고 그토록 주장했던 국정원이지만, 테러 위협에 대한 정보 수집부터 상황 전파, 감독, 신변보호, 그 무엇도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한국군에도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은 신형 K-2C 소총을 사용하는 사진과 암시장 등에 거래되고 있다고 알린 트위터 ⓒ트위터 화면 캡처

지난 1월 한국군에도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은 신형 K-2C 소총이 암시장에 팔린다는 내용의 트윗이 군사 관련 트위터 계정에 올라왔습니다. IS가 사용하고 있다는 영상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언론에서는 이라크에 수출된 총이 암거래 되고 있다는 가능성만 보도했습니다. 국정원은 아직도 정확한 경위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일 테러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국정원의 테러 예방이나 과정은 허접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6월 8일에 알려진 내용을 국정원이 왜 임시국회 전날인 19일에 공개했는지도 의문입니다.

국정원은 ‘정부는 테러방지법 시행으로 신설된 총리실 산하 대테러센터를 중심으로 범정부적 테러대응 체계를 구축하고 국제 테러단체의 동향을 예의 주시할 것’이라며 ‘테러 위협으로부터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믿기에는 국정원의 업무 처리가 너무 허술합니다. 국민이 아니라 국정원이 보호 받고 있는지 스스로 반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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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고 내게 날 수도... 3일 연속 밥 거른 적 있다"

 

[인터뷰] 구의역 사고 김군과 같이 입사한 은성PSD 19세 노동자들

16.06.19 10:22l최종 업데이트 16.06.19 10:22l
서울지하철 2호선 스크린도어 유지보수업체인 은성PSD 직원 박휘건, 이근준씨. 선릉역내 강남사무소에서 대기하다 고장신고가 들어오면 장비를 챙겨 현장으로 이동한다.ⓒ 권우성
"그 친구가 아니라도 언젠가는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온 국민을 슬픔에 빠지게 했던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가 일어난 지 열흘쯤 지났을 무렵, 사망한 김군과 같이 은성PSD에 입사한 공고 출신 19살 수리공들이 16명이나 남아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들은 오는 6월 30일 계약이 만료되고 이후 신분은 보장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다행히 지난 16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들을 전원 서울메트로에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한다고 발표해 이들은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지난 17일 오후 2호선 선릉역에 있는 은성PSD 강남사업소에서 이들 중 2명을 만나 정규직이 되는 소감, 업무상의 애로점, 사고재발 방안, 향후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

<오마이뉴스>가 만나본 이들은 갓 고교를 졸업한 앳된 얼굴의 대한민국 청년들이었다. 언론과 인터뷰하는 게 신기해서 들떠 보였다. 남들은 박봉이라지만 이에 관계없이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김군과 마찬가지로 월급 실수령액 144만 원 가운데 100만원을 저축해 언젠가 집을 마련하는 게 최고의 목표였다.

이들은 2인1조가 되면 아무래도 사고를 예방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기술 보완으로 "아예 선로에 사람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바쁠 땐 3일 연속으로 저녁식사를 못한 적도 있었다"며, 김군처럼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열악한 근무현실을 증언하기도 했다. 이들은 "아직 통보받은 게 없어서 근무조건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번 직고용으로 신분도 보장되고 급여도 오르게 됐다"며 서울시의 조처에 고마워했다. 또한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일한다는 게 재밌고 자랑스러우며, 10년 후에도 스크린도어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른바 '메피아(서울메트로에서 온 전적자들)'에 대해서는 일반의 예상과 달리 크게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듯했다. 서울시는 이들의 전문성이 떨어져 고용에서 배제한다고 발표했지만 이들은 오히려 "4년 반이나 근무한 그들이 어떻게 기술력이 없겠느냐"며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일을 배웠으며, 이들을 해고하고 신규직원을 채용하면 거꾸로 안전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고용이 계속 보장되는 줄 알고 들어왔는데..."
17일 오후 서울지하철 2호선 선릉역내 은성PSD(서울메트로 하청업체, 스크린도어 유지보수) 강남사무소에서 만난 이근준(왼쪽), 박휘건씨.ⓒ 권우성
다음은 이들과의 일문일답.

- 자기소개를 해달라.
"내 이름은 박휘건이고, 공고 신재생에너지과를 나왔다."
"나는 이근준인데, 역시 공고 자동차과를 나왔다."

- 언제 은성PSD 회사에 들어왔나.
"(박) 작년 11월 들어왔다."
"(이) 나는 한 달 늦게 12월에 들어왔다."

- 계약 만료가 올 6월 30일인데, 그렇다면 7-8개월밖에 일을 못하는 것 아닌가. 그걸 알고도 입사했나.
"(박) 회사가 바뀌어도 관리층만 바뀌고 아래 직원들은 그대로 간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쭉 보장되는 걸로 알고 들어온 거다." 

- 6월 30일 이후 회사를 더 못 다닐 수 있다는 얘기는 언제부터 나오던가.
"(박) 사고 나기 약간 전부터 나왔다. 서울메트로가 임금피크제를 하며 은성PSD를 자회사로 만든다고 하면서 우리 신분이 보장 안된다는 얘기가 나왔다."

- 그럼 많이 불안했겠다.
"(둘 다) 그렇다."

- 그만 두라면 어쩌려고 했나.
"(이) 다른데 취업하거나 바로 군대 가려고 했다."
"(박) 나도."

- 입사하기 전에 강남역이나 성수역에서 사고가 난 적 있다는 거 알았나.
"(박) 들어오기 전까지는 몰랐다."
"(이) 강남역은 알았는데 성수역은 몰랐다." 

-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입사할 마음이 생기던가. 어떤 학생은 그것 때문에 포기했다고도 하던데.
"(이) 그 일에 대해 위험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 이전에는 이 정도까지 아니었는데 이번 사고에는 사람들이 많이 분노하고 추모하는 분위기가 아주 높다. 왜 그런다고 생각하나. 
"(이) 나이가 어리다는 것 하고 가방에서 나온 컵라면 때문인 것 같다."
"(박) 직전에 일어났던 강남역 살인사건 때문에 감정이 올라와있을 때 이런 사고가 생겨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전광판만 믿고 들어갔다가 갑자기... 아찔했다"
17일 오후 서울지하철 2호선 선릉역내 은성PSD(서울메트로 하청업체, 스크린도어 유지보수) 강남사무소에서 만난 이근준, 박휘건씨.ⓒ 권우성
- 사고가 일어난 것은 언제 알았나.
"(이) 당일 바로 알았다. 사고가 오후 5시 57분에 났는데 6시에 팀장한테서 전화가 오더라. 나는 그날 휴무였지만 마침 구의동에 살아서 바로 가봤다." 

- 가보니 어떤 생각이 들었나.
"(이) 마음이 좀 그렇더라."
"(박) 전부터 그 친구가 아니라도 언젠가는 사고가 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는 사람이 사고 날 수도 있었는데, 그 친구는 강북사무소 소속이라서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 사고가 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왜 들었나.
"(박) 예전에 3호선에 있는 한 역에서 스크린도어 안쪽에서 작업하고 있었는데, 전광판에는 분명 열차가 없었는데 열차소리가 들리더라. 안전하게 나오긴 했지만 아찔했다. 전광판만 믿고 들어갔는데 출퇴근시간에만 운행하는 차가 중간에서 갑자기 들어와서 사고가 날 뻔한 거다."

- 작업하는 사람도 일반 승객들이 보는 그 전광판을 보고 일하나.
"(박) 그렇다."

- 열차가 들어오면 피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나.
"(이) 없다. 철로에 내려가면 벽쪽에 '개구멍'이라고 부르는 숨을 공간이 있긴 하다." 

- 숨진 김군은 왜 개구멍으로라도 피할 수 없었을까.
"(이) 열차는 10-4지점부터 들어오는데 9-4지점에서 작업하고 있어서 미처 피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박) 열차를 봤어도 몸이 굳었을 수 있다."
"(이) 열차가 바로 앞에서 불빛 켜고 오니까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 못 피했을 수 있다."

- 보통 열차가 두 정거장 전에 있을 때 들어가나.
"(박) 두 정거장 전에 아직 출발 안 했을 때 들어간다. 그래서 보통 약 4분의 여유는 있는데 당시는 퇴근시간이라서 배차시간이 짧았을 것이다. 배차간격이 1분이 안될 때도 있다."

- 이 사고는 왜 일어난 거 같나.
"(박) 추측은 할 수 있으나 정확한 건 사고 당한 당사자만 알 수 있다. 상황은 당사자만 아니까." 

"수리중 휴대폰 사용했다? 말도 안된다"

- 김군이 수리하는 중에 휴대폰으로 통화했다는 오보가 있었다.
"(박) 말이 안 된다. 한 손에는 센서를 닦는 걸레가 있어야 하고, 다른 한 손은 문을 잡고 몸을 지탱해야 한다. 그러니까 휴대폰을 들고 있을 수가 없다." 

- 문 어디를 잡나.
"(이) 아무 데나 잡히는 것을 잡고 있어야 한다." 

- 스크린도어 고장 중 가장 많은 게 센서 고장인가.
"(박) 그렇다. 센서에 들어간 이물질을 닦아주러 들어가는 것이다." 

- 그거 하는 시간이 보통 몇 분 걸리나.
"(박) 1-2분."

- 김군의 가방에서 컵라면이 나왔는데, 여러분도 보통 갖고 다니나.
"(둘 다) 아니다."

- 그럼 김군은 왜 갖고 다녔을까.
"(박) 진짜 밥을 못 먹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간식용일 수도 있다. 그것도 당사자만 알고 있을 것이다." 

- 실제 바빠서 식사를 못하는 적이 많나.
"(이) 바쁠 땐 3일 연속으로 못 한 적도 있다. 점심은 괜찮은데 저녁 퇴근시간 때가 문제다." 

- 출퇴근시간 때 고장이 많이 나나.
"(박) 타고 내리는 사람이 많으면 스크린도어도 열고 닫는 횟수가 많으니까 고장도 많을 수밖에 없다."

- 지금은 어떻게 일을 하고 있나.
"(박) 지금은 무조건 2인1조로 하고 있다. 메트로 전자관리소에서 나와 입회를 해야 작업을 할 수 있다." 

- 만약에 2인1조였으면 이런 일이 안 일어났을 거라 생각하나.
"(박) 아무래도 안 일어났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한 명이 같이 있으면 잡아서 꺼내줄 수도 있고 말해줄 수도 있으니까."

- 2인1조가 최선의 방법인가.
"(박) 아예 선로 안으로 안 들어가게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나 지금은 센서가 안에 있으니까..."

- 센서가 안이 아니고 밖에 있으면 되지 않나.
"(박) 안쪽에 사람이 끼면 센서가 감지하고 열려야 하는데, 사람이 안쪽에 끼지 바깥에 낄 일은 없잖나. 열차랑 문 사이에 사람이 갇힐 수도 있으니까." 

- 열차와 센서를 연동해 스크린도어가 열려있으면 열차가 못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던데.
"(이) 도시철도는 그렇게 한다는 얘기 들었다." 
"(박) 그러나 그 시스템도 고장날 수 있으니까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 사고 난 뒤 부모님 반응은.
"(박) 걱정 많이 하신다. 하필이면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느냐고, 다른 일 하라고 하시더라."
17일 오후 서울지하철 2호선 선릉역내 은성PSD(서울메트로 하청업체, 스크린도어 유지보수) 강남사무소에서 만난 박휘건, 이근준씨.ⓒ 권우성
"김군처럼 월 100만 원씩 저축... 집 사는 게 목표" 

- 전적자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박) 지금까지 그 문제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일했다." 
"(이) 애초부터 서울시랑 그렇게 계약을 맺은 건데, 일이 커지니까 그런 얘기가 나오는게 아닐까." 
"(박) 다들 열심히 하신다. 전적자인 팀장님한테 일도 많이 배웠다."

- 전적자들은 전문성이 없기 때문에 안전에 문제가 있어 퇴출시킨다는 거 아닌가.
"(박) 새로운 전적자들은 그럴 수 있는데, 오래 된 사람들은 기술력이 없을 수 없다. 옆에서 구경만 했어도 지금 있는 사람들은 몇 년씩 됐으니까 잘 하는 사람들이다." 
"(이) 그 사람들 다 내보내고 새로 충원하면 안전성이 더 떨어질 거다. 처음 왔으니까."

- 그간 신분이 불안했는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박) 아직 문서로 내려온 게 없으니까 모르겠다."

- 어제 서울시가 발표한 대로 직고용이 된다면 만족하나.
"(박)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일단 지금보다는 좋아지겠지. 임금도 올라가고, 안전도 보장되고, 계약 갱신 안 해도 되고."

- 월급도 200만 원으로 올려준다고 하던데.
"(박) 우린 감사하죠."

- 현재 월급이 160만 원 맞나. 언론에는 144만 원이라고 하던데
"(이) 144만 원은 세금을 제한 금액이다." 

- 그 월급에 만족하나.
"(박) 생활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부모님이랑 같이 사니까 거의 용돈 쓰듯 한다. 적금 좀 넣고." 

- 숨진 김군은 매달 100만 원을 저축했다던데.
"(이) 나는 90만 원 저축하고 나머지는 밥값하고 강아지 간식값으로 쓴다."

- 부모님은 안 드리나.
"(이) 드릴 돈이 없더라.(웃음)"

- 휘건씨는.
"(박) 난 100만 원 저축한다."

- 일반적으로 다 그렇게 하는구나.
"(박) 집에서 자고 먹고 하니까 그게 가능하다."

- 100만 원씩 모아서 어디에 쓸 건가.
"(박) 일단 모으는 거다. 최종 목표는 집을 사는 것이다." 

- 100만 원씩 저축해도 서울에서 집 사는 건 쉽지 않을 거다.
"(이) 대출을 많이 받아야겠지. 대출을 적게 받으려면 지금 조금이라도 많이 모아놔야 한다."

- 비정규직 문제나 노동현실의 불평등성 같은 것 생각해본 적 있나.
"(둘 다) 아직 거기까지는."
서울지하철 2호선 스크린도어 유지보수업체인 은성PSD 직원 박휘건, 이근준씨. 선릉역내 강남사무소에서 대기하다 고장신고가 들어오면 장비를 챙겨 현장으로 이동한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호출버튼을 눌러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한다. ⓒ 권우성
서울지하철 2호선 스크린도어 유지보수업체인 은성PSD 직원 박휘건, 이근준씨. 선릉역내 강남사무소에서 대기하다 고장신고가 들어오면 장비를 챙겨 현장으로 이동한다.ⓒ 권우성
"10년 후에도 이 일 하고 싶어... 자랑스럽다" 

- 자신의 10년 후 모습을 그려본 적 있나. 그 때도 스크린도어 일 하고 싶나.
"(박) 이게 가장 자신 있는 일이고, 재미도 있다." 

- 어떤 재미가 있나.
"(박) 처음 보는 것을 고쳐내거나, 다른 사람이 못한 것을 내가 가서 고치면 기분이 좋더라." 

- 꼭 스크린도어같이 위험한 일을 해야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잖나.
"(박)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그거밖에 없으니까." 

- 이 일을 하면 행복한가.
"(박) 그러기도 했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시민들이 지하철을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한다는 측면이 있다. 그런 게 자랑스럽기도 하다." 

- 사고가 난 다음에는 바뀌지 않았나.
"(박) 안 바뀌었다."

-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나.
"(박) 지금 상황이 별일 없이 잘 넘어가면 계속 하고 싶다."
"(이) 나도 마찬가지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 서울메트로가 근무시간만이라도 구내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패스카드를 좀 줬으면 좋겠다. 지금은 호출버튼을 눌러서 들어간다."

- 서울메트로는 왜 안 주나.
"(이) 모르겠다. 근무시간 외 부정사용을 우려하는 게 아닐까."

- 그 때문에 어떤 문제가 있나.
"(이) 버튼을 누르면 대부분 직원이 바로 나와 열어주지만, 직원들이 없을 때도 있다. 시간에 쫓겨 수리해야 하는 입장에서 곤란한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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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밀’ 수확 날, 콤바인도 부재를 알아차렸다


등록 :2016-06-18 13:39수정 :2016-06-18 14:10

 

백남기의 ‘마지막 밀’
경찰 물대포에 쓰러지기 이틀 전 파종
홀로 자라 야윈 밀알이 국가폭력 증거
초록이 지나간 것들 사이로 아직 초록인 것들이 뒤섞여 있다. 누렇게 익은 밀보다 밀 틈에 끼어든 푸른 사료작물이 웃자랐다. 초록에 찔리는 밀을 쓰다듬으며 박경숙(63)씨가 수확을 하루 앞둔 밭에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초록이 지나간 것들 사이로 아직 초록인 것들이 뒤섞여 있다. 누렇게 익은 밀보다 밀 틈에 끼어든 푸른 사료작물이 웃자랐다. 초록에 찔리는 밀을 쓰다듬으며 박경숙(63)씨가 수확을 하루 앞둔 밭에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농부 백남기(69)씨가 뿌린 ‘마지막 밀’이 수확됐습니다. 우리밀살리기운동에 헌신해온 그가 이 땅에 던진 메시지이자 ‘한국 농업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2500여평의 밀밭에서 1.3t의 알곡이 나왔습니다. 40㎏ 가마니로 32가마입니다. 평소 백남기씨는 그 밭에서 50~60가마를 거뒀습니다. 씨앗을 뿌린 농부가 국가 폭력에 쓰러진 뒤 혼자 자란 밀의 생육이 야윈 수확량에 그대로 반영됐습니다. 그의 후배들이 이 안쓰러운 밀의 보존·확산을 추진합니다. ‘백남기 밀’ 보존 프로젝트에 힘이 돼주시길 권합니다.

 

 

초록이 지나간 것들 사이로 아직 초록인 것들이 뒤섞여 있다. 누렇게 익은 밀보다 밀 틈에 끼어든 푸른 사료작물이 웃자랐다. 초록에 찔리는 밀을 쓰다듬으며 박경숙(63)씨가 수확을 하루 앞둔 밭에 있다. 지난해 11월12일 남편 백남기(69)씨는 그 밀밭에 직접 손으로 씨앗을 뿌렸다. 이틀 뒤 그는 서울에서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그가 7개월째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동안 그의 밀은 주인 없이 홀로 자라 야위었다. 수확기가 지난 밀밭에서 밀 아닌 것들이 밀을 굽어보는 상황도 7개월 동안 관리되지 못한 밀밭의 처지를 말해준다. 이튿날 오후 콤바인 한 대가 백남기씨의 마지막 밀을 수확했다. 밀을 거둘 기운도 의욕도 없던 아내는 “형님의 마지막 밀을 방치할 수 없다”는 남편 후배들의 권유에 힘을 냈다. 그 후배들을 위해 박경숙씨는 밀이 깎여나간 밭을 가로질러 새참을 내왔다. <한겨레> 토요판은 지난 12일과 13일 이틀 동안 백남기씨의 마지막 밀 수확을 취재했다. <한겨레>는 최근 한 달간 백남기씨 가족·대책위원회와 밀 수확 일정 및 판매·보존 방법을 논의해 왔다. 국가 폭력이 꺾어버린 한 농부의 꿈을 기사로써 지원한다. 전날 비를 뿌리던 하늘이 수확 당일엔 해를 내보냈다. 보성/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13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백남기씨의 아내 박경숙(왼쪽 셋째)씨가 남편의 후배들과 그가 남긴 ‘마지막 밀’을 수확하고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13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백남기씨의 아내 박경숙(왼쪽 셋째)씨가 남편의 후배들과 그가 남긴 ‘마지막 밀’을 수확하고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콤바인이 밀밭 한가운데서 멈췄다.

 

 

“아따 풀이 많아 부러요.”

 

 

콤바인을 몰던 남편 후배가 바퀴 사이에 걸린 초록색 식물을 빼내며 말했다. 밀보다 웃자란 사료작물이 콤바인 기계에 끼어 바퀴를 세웠다.

 

 

“이탈리안 라이그래스 때문에 그래요.”

 

 

박경숙(63)씨가 밀밭에 주저앉아 포대 자루의 입을 벌렸다. 콤바인에서 쏟아지는 밀알들을 손으로 긁어 자루 안에 밀어 넣었다. 남편이 남긴 밀을 한 알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쇠붙이인 콤바인도 남편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그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밀 아닌 것들이 콤바인을 세울 만큼 밀밭에 끼어들진 못했을 것이다.

 

 

쿠르르르릉, 엔진이 다시 끓었다. 푸드드드덕, 새들이 날아올랐다. 지난 13일 농부 백남기(69)의 ‘마지막 밀’이 콤바인 안으로 쓸려 들어갔다.

 

백남기씨의 아내 박경숙(왼쪽 둘째)씨가 남편의 ‘마지막 밀’ 수확을 도와준 후배들을 위해 새참을 내왔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백남기씨의 아내 박경숙(왼쪽 둘째)씨가 남편의 ‘마지막 밀’ 수확을 도와준 후배들을 위해 새참을 내왔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쓰러지기 이틀 전 파종한 밀밭

 

 

“남편의 손길”이 밀밭 전체에 묻어 있었다. 그가 경찰의 직사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기 이틀 앞서 파종(2015년 11월12일)한 밀밭이었다. 214일 전 백남기는 2500여평의 밭을 오가며 직접 손으로 씨앗을 뿌렸다. 평소 기계로 파종하던 그가 지난해엔 유독 손 파종을 고집했다. “힘들게 그러지 말고 기계로 하라”는 말에도 남편은 “운동도 되고 좋다”고 했다. 자신의 온기를 땅에 남겨두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아내는 생각했다.

 

 

쾌재쟁 쾌재쟁 쾌재재재쟁….

 

 

아내의 귀에서 꽹과리가 울었다.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가 걱정될 때마다 남편은 꽹과리를 치며 밀밭을 돌았다. 새벽에도, 해 질 녘에도, 잠에서 깬 직후에도 꽹과리를 들고 밀을 지켰다. 고구마를 파먹던 멧돼지가 자신을 피해 밀밭으로 질주했다며 남편은 꽹과리를 치고 돌아와 이야기했다. ‘그날’(지난해 11월14일) 이후 꽹과리는 입을 다문 채 집 툇마루에 엎드려 소리를 잃었다.

 

 

하루와 하루가 쌓여 7개월을 채웠다는 사실이 박경숙씨는 현실로 감각되지 않았다. 서울 종로구청 앞 사거리에서 병원으로 실려간 남편(외상성 경막하 출혈)은 계절이 세 번 바뀔 때까지 죽음의 곁을 벗어나지 못했다. 수술한 두개골은 아직 열려 있었고, 췌장 기능 약화로 인슐린을 투약받고 있으며, 5월초엔 감염수치가 치솟아 고비를 맞기도 했다. 패혈증을 우려해 자제하던 항생제도 의료진이 최고 단계로 처방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남편을 간호하던 아내가 밀 수확을 위해 내려와 있었다. 백수를 누린 친정 큰어머니의 장례에도 다녀왔다. “그렇게 수명대로 살다 가시는 게 순리”였다. “감기약 한 알 안 먹을 만큼 건강했던 양반이 생죽음을 맞고 있는” 상황을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날들”을 버텨오며 그는 혼자서 밀을 거둘 자신이 없었다. 1989년 밀 농사를 시작한 이래 남편 없는 수확은 처음이었다. “형님의 마지막 밀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는 후배들의 말을 따라 어렵게 날을 골랐다. 남부 지방에서 밀은 10월말~11월 중순 파종해 이듬해 6월 중순께 거뒀다. 한 주 뒤 장마가 예고되고 있었다. 콤바인을 빌릴 수 있는 날짜는 13일뿐이었다. 국가 권력이 칠순을 앞둔 농부를 때린 지 만 7개월에서 하루가 빠지는 날이었다.

 

 

낮 12시50분 콤바인이 밀밭에 진입했다. “빗물과 이슬이 말라 밀이 고슬고슬해질 때”를 기다려 수확은 시작됐다. 콤바인이 밀밭 가장자리를 돌며 크게 원을 그렸다.

 

 

밀밭으로 오르는 길마다 “백남기를 살려내라”는 펼침막(지난달 14일에 진행된 ‘밀밭 걷기’ 때 부착)이 출렁였다. 수십 년 전 보성읍내에서 생필품을 짊어지고 활성산(보성읍·웅치면·회천면을 잇는 해발 465m의 산)을 넘던 보부상들은 그 길을 지나 회천면 녹차밭에 닿았다.

 

 

밀밭은 본래 산이었다. 부부가 마을에 정착(1982년)하고 1년 뒤 밭(5천여평)으로 일궜다. 그해 솔껍질깍지벌레가 창궐했다. 군청은 농가마다 공문을 보내 소나무 벌목을 요구했다. 나무를 베고 뿌리를 캐냈다. 베어내지 않은 몇 그루의 소나무가 튼튼하게 자라 밭(2500여평)과 밭(2500여평)을 나누는 ‘운치 있는 경계’가 됐다.

 

 

물대포 맞기 이틀 전 파종한 밀밭
거무스름해지도록 수확 시기 넘겨
밀밭 전체에 묻은 백남기의 손길
살아도 산 것 아닌 시간 버틴 아내
후배들 도움 받아 ‘마지막 밀’ 거둬

 

1989년부터 우리밀 재배에 헌신
전국 돌아다니며 종자 구해 전파
‘보성 1호 농민’ 돼 주민들 설득
자택 공간 열어 수매까지 도맡아
광주·전남 우리밀살리기운동 개척

 

‘보성군 1호 우리밀 농민’ 백남기씨가 1990년대 초 자신의 집(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우리밀을 수매하고 있다. 수매 경로가 확보되지 않았던 우리밀살리기운동 초기 그는 자택 한편에 공간을 마련해 직접 수매 역할까지 맡았다.  박경숙 제공
‘보성군 1호 우리밀 농민’ 백남기씨가 1990년대 초 자신의 집(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우리밀을 수매하고 있다. 수매 경로가 확보되지 않았던 우리밀살리기운동 초기 그는 자택 한편에 공간을 마련해 직접 수매 역할까지 맡았다. 박경숙 제공

 

“지붕이 날아가 위가 뚫린 느낌”

 

 

부춘(富春)은 농민들의 ‘가난한 꿈’이었다. 보성 선씨와 수원 백씨가 그 꿈을 붙들고 부락을 이뤄 살았다. 춘궁기에도 넉넉하고 싶은 소망을 마을 이름에 담아 불렀다. 결혼(1981년 11월) 3개월 뒤 백남기 부부는 부춘마을(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에 신혼살림을 풀었다. 할아버지 작고 이후 10여년간 비어 있던 낡은 집이었다. 도시로 나가기 위해 공부하던 시대였다. 도시에서 공부한 아들이 비만 오면 지붕이 새는 집으로 들어간 ‘사태’를 아들의 부모(당시 광주광역시 거주)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최소 1700년대부터 9대가 그 집에서 삶을 물려주고 물려받았다. 부부는 그 집을 생명으로 가득 채웠다. 분홍빛 낮달맞이꽃과 보랏빛 솔잎국화가 마당을 채색했고, 촘촘히 솟은 대나무숲이 집의 등을 받치며 울타리가 돼줬다. 언제 심었는지 알 수 없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듬직하고 우뚝했으며, 소나무·감나무·동백나무가 어울려 마당의 풍경을 구성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온갖 새들이 제 소리를 터뜨리며 날아다녔다. 낯선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오이삼’(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날짜로 이름 지은 개)과 ‘팔일팔’(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일)은 열심히 짖었다.

 

 

각자의 기운대로 힘써 살아온 그 집의 일상에서 백남기만 빠져 있었다. 집주인은 돌아오지 않는데 제비는 올봄에도 찾아와 새끼를 까서 데리고 나갔다. 처마에 붙은 빈 제비집 하나가 제비의 자리를 기억하며 다음 봄을 기다렸고, 아내가 깨끗하게 씻어둔 하얀 고무신이 마루 밑에서 남편의 귀가를 기다렸다. 남편과 33년을 함께한 집에서 홀로 남을 때마다 아내는 “지붕이 확 날아가 위가 뚫려버린 듯” 황망했다.

 

 

콤바인이 밀을 삼키며 지나갔다. 기계엔 감정이 없었다. 백남기의 마지막 밀을 콤바인은 예년과 다름없이 빨아들였다. 기계는 탈곡된 밀알만 머금고 밀알을 잃은 지푸라기들은 뱉어냈다.

 

 

그 밭에서 부부는 1989년(당시 백남기는 가톨릭농민회 광주·전남연합회장)부터 우리밀을 재배했다. 백남기에게 우리밀은 ‘그저 여러 작물’ 중 하나가 아니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이 수매를 중단한 뒤 우리밀(자급률 0.2%)은 문자 그대로 씨가 말랐다. 농민들은 밀 재배를 포기했고 토종밀은 밭에서 사라졌다. 수입 밀이 우리밀을 멸종시킨 뒤 벌어질 일을 그는 우려했다.

 

 

그는 후배들과 우리밀 종자를 찾아 전국을 돌았다. 차도 안 다니는 시골길을 걸어다니며 촌로들이 약으로 남겨둔 씨앗들을 한 줌씩 얻었다. 2년 동안 모은 이름 모를 종자 24㎏을 다시 각 지역으로 내보냈다. 벼와 보리를 이모작하던 농가를 설득해 보리 대신 밀을 심게 했다. 백남기도 보성군의 ‘우리밀 1호 농민’이 됐다. 초기엔 그의 집 마당에 밀 가마니를 쌓으며 수매 일까지 도맡았다.

 

 

“동네 어르신들한테 밀을 심어보셨냐고 물었더니 당신들 부모가 심은 것은 봤지만 나는 안 심어봤다고 하세요. 그분들 연세가 70~80대셨는데도요. 그러면 기억을 더듬어보자 해서 밭에 쟁기질을 해서 퇴비를 놓고 골을 팠어요. 거기에 밀을 뿌리고 기다려봤어요. 그랬더니 나오더라고요.”(2013년 <광주평화방송> 대담)

 

 

1994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 때 그는 공동의장이 됐다. 광주·전남은 현재 전국 우리밀 생산량(올해 경작지 3만평·수확량 3만5천t·자급률 2% 목표)의 50%를 차지한다. 백남기는 맨 앞에서 운동을 개척했다.(최강은 광주·전남본부장)

 

 

콤바인이 운동장에 트랙을 만들듯이 밀밭을 깎아나갔다. 콤바인이 밭을 따라 돌수록 길은 넓어지고 밀은 줄어들었다. 밀알을 잃은 밀짚이 퇴비가 되기 좋게 절단돼 길 위로 뿌려졌다.

 

가뭄이 심했던 2000년 5월5일 백남기씨가 호스로 밀밭에 물을 주고 있다. 박경숙 제공
가뭄이 심했던 2000년 5월5일 백남기씨가 호스로 밀밭에 물을 주고 있다. 박경숙 제공

 

“농민은 사람 아니랍니까”

 

 

백남기의 책장은 농기구 창고 안에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책들이 삽, 낫, 톱, 망치 옆에서 그가 공부한 역사와, 갈등한 사회와, 고민한 농촌을 끌어안았다. <한국민중사> <영국노동운동사>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한국 농업·농민 문제 연구> 등이 <갈멜의 산길>(가톨릭 영성에 관한 책)과 이웃하며 치열했던 한 농부의 시간을 요약했다.

 

 

‘농자’는 한 번도 ‘천하지대본’이었던 적이 없었다. ‘부춘’은 바라지도 않았다. 대통령의 쌀값 인상(80㎏ 21만원) 공약이라도 그는 지켜지길 바랐다.

 

 

“언제는 정치가 농민을 대접했답니까. 재벌은 부채 탕감도 잘 해주고 보조도 잘 해주면서 농민은 생계유지도 못하게 만들었어요. 농민이 아무리 숨죽이고 산다고 어떻게 20년 동안 쌀값이 제자리걸음(15만원 안팎)일 수 있답니까. 농민은 사람 아니랍니까. 남편이 왜 서울까지 올라갔겠어요.”(박경숙)

 

 

후배 농민 최영추(64·전 보성군농민회장)가 콤바인이 흘린 밀 한 가닥을 주워 들었다. “낫으로 직접 벨 땐 까시락(보리나 밀의 깔끄러운 수염·전라도 방언)이 모가지와 겨드랑이를 찔러서 고생 많았제.”

 

 

지난해 11월14일 백남기는 보성 주암호에서 열리는 ‘자연지킴이 걷기대회’에 참가할 계획이었다. 전날 그를 만난 최영추가 서울 ‘민중총궐기’에 가자고 권했다. 당일 웅치면에선 백남기만 버스를 탔다. 경찰이 물대포를 쏠 때 보성군 버스는 돌아갈 채비를 했다. 형님을 찾을 수 없었던 최영추가 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 아침 박경숙씨는 남편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휴대전화가 없는 남편에게 최영추와 첫째 딸의 번호를 적어주며 일행과 떨어지면 공중전화를 찾아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럴 일 없을 것이네.” 남편은 말했었다.

 

 

최영추의 두 번째 전화는 남편이 병원으로 실려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형님을 찾아 헤매던 그는 구급차로 옮겨지는 한 남자를 봤다. 남자의 가슴에 형님이 달고 다니던 가톨릭농민회 배지가 있었다. 형님이 예정대로 주암호로 갔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그날 이후 최영추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콤바인이 탈곡한 밀알을 모아 곡물적재 트럭에 쏟아부었다.

 

 

밀이 잘려나간 밭을 가로질러 박경숙씨가 새참을 내왔다. 권용식(52·현 보성군농민회장)이 트럭을 몰고 가 머리에 인 새참을 받아 실었다. 사건 당일 그는 백남기를 태운 구급차에 올라 서울대병원까지 동승했다.

 

 

삶은 감자와 고구마, 달걀, 고추, 막걸리, 수박을 담은 빨간 고무대야 주위로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지난해 일 터지지 전에 수확한” 고구마와 앞집 밭에서 얻어온 감자가 더위 속에서 따뜻했다. “내가 뭔 정신으로 감자를 심고 있겄소.” 박경숙씨가 새참을 차릴 때 말했다. 지난해 가을부터 일상의 농사는 중단됐다. 밭에선 잡초가 채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랐다.

 

 

남편과 형님이 좋아했던 멸치젓을 삶은 달걀에 올려 먹으며 아내와 후배들은 굳이 그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날로 뛰는 농약값을 이야기했고, 헐값에 넘긴 매실을 이야기했으며, 우렁이를 활용한 친환경농법을 이야기했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떨칠 수 없는 그의 부재가 텅 비어가는 밀밭처럼 휑했다. 콤바인이 밀밭 중앙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감정 없이 알곡 빨아들이는 콤바인
밀 이삭 아래 뾰족이 돋은 잡초들
밀밭에 끼어들어 웃자란 사료작물
돌봄 못 받고 자란 안쓰러운 곡식
기계 멈춰 세우며 밭주인 부재 증거

 

7개월 키워 3시간 못돼 텅 빈 밀밭
평소 비해 크게 못 미치는 소출량
‘백남기 밀’ 종자 보존·보급 추진
판매 수익금은 기념사업회 종잣돈
“그의 뜻 많은 분께 가닿길 소망”

 

지난 13일 농부 백남기씨의 쾌유를 바라는 펼침막 너머로 콤바인 한 대가 밀을 수확하고 있다. 그는 경찰 물대포에 맞고 쓰러지기 이틀 전(지난해 11월12일) 이 밭에 씨앗을 뿌렸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13일 농부 백남기씨의 쾌유를 바라는 펼침막 너머로 콤바인 한 대가 밀을 수확하고 있다. 그는 경찰 물대포에 맞고 쓰러지기 이틀 전(지난해 11월12일) 이 밭에 씨앗을 뿌렸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의 부재가 텅 빈 밀밭처럼

 

 

콤바인이 다시 멈췄다. 이탈리안 라이그래스가 콤바인의 진격을 방해했다. 라이그래스는 바람을 타고 씨앗으로도 번졌지만, 퇴비로 뿌려진 소똥에서도 싹을 틔웠다.

 

 

주인의 부재는 밭에 정확히 새겨졌다. 수확 시기를 넘긴 밀은 불에 그슬린 것처럼 거무스름했다. 누렇게 익은 단계를 지나 거뭇해진 밀 이삭 아래로 초록의 잡초들이 뾰족했다. 빛깔도 때를 알아야 생육과 결실을 반영했다. 때를 모르는 초록은 싱그러움이기보다 누군가의 심장에 박힌 푸른 멍울 같았다.

 

 

작황이 좋지 않았다. 매년 2월 중순마다 치르던 ‘밀밭 밟기’도 올해는 건너뛰었다. 날씨가 풀려 들뜬 땅을 늦지 않게 밟아줘야 뿌리가 잘 붙고 수확량이 늘었다. 퇴비를 먹지 못한 밀알은 끼니를 거른 아이처럼 말랐고, 뽑아주지 못한 잡풀이 땅의 부족한 양분을 빼앗았다.

 

 

마을 후배 문영제(64)는 형님의 밀밭 밑에서 고구마를 키웠다. 가끔 형님 밭에 올라가 밀을 살피면 주인 잃은 밭의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어서 오소” 하며 그의 귀농을 독촉하던 형님이 정작 귀농 뒤엔 “저래 돼버렸”다. 문영제는 “혼자 자란 밀밭”을 볼 때마다 울화를 삼켰다. 그의 밭과 밀밭 사이에서 형님 부모와 조부모의 산소가 들꽃과 잡초로 무성했다.

 

 

“시신경을 다쳐 생존해도 앞을 볼 수 없대요. 호흡도, 체온도, 혈압도 스스로 조절을 못해요. 다시 일어나 돌아올 거라 생각 안 해요. 손이라도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아내는 “수도 없이 정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농사지을 기운도 재미도 바닥”이 났다. 박경숙씨가 짓는 밀농사도 올해가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논은 가을에 식량을 받는 조건으로 동네 주민에게 경작하도록 내줬다.

 

 

우리밀 농사가 돈을 벌어다 준 적은 없었다. 40㎏ 한 가마당 3만3천~3만5천원을 받았다. 종자값과 퇴비값, 기계값 등을 제하면 수익이 빠지지 않았다. 돈벌이를 생각해선 계산이 안 서는 밀 농사를 백남기는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남편과 밀을 수확하고 나면 아내는 그 자리에 콩을 심었다. 남편은 “도덕성은 100점이었지만 경제력은 0점”이었다. 콩을 거둬 담근 유기농 된장으로 아내는 부족한 생활비를 벌었다. 1984년 ‘소값 파동’(전두환 정권 당시 무분별한 소 수입으로 소값 폭락) 때 진 빚을 아직도 다 갚지 못했다. 빚의 정확한 액수도 남편에겐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뭘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혼자 할 수 없는 일들을 털어내며 아내는 ‘남편 없는 삶’을 맞고 있었다.

 

 

콤바인이 남은 한 줄을 밀고 있었다. “형님이 지켜온 밀을 이어갈 방법을 찾아야 할 거인디.” 최영추가 말했다. “오늘 수확한 밀을 가져다가 ‘백남기 밀’(상자기사)로 만들 거예요. 이 밭을 계속 일궈서 형님 이름의 밀로 보존하고요.” 최강은이 설명했다. “좋은 생각”이라며 권용식이 반겼다.

 

 

고령이 되면서 백남기는 밭의 절반 면적에만 밀을 뿌렸다. 그는 그루밀(국수용), 은파밀(국수용), 백중밀(국수용), 금강밀(빵용) 등을 재배하며 종자별 특성과 수확량을 검증해왔다. 그가 지난해 마지막으로 파종한 씨앗은 백중밀이었다. ‘백남기 밀 보존사업’도 그 백중밀에서 시작될 것이었다.

 

 

오후 3시30분 콤바인이 밀 수확을 끝냈다. 7개월을 자란 밀을 거두는 데 2시간40분이면 족했다. 백남기가 이 땅에 남긴 마지막 농사의 흔적은 그렇게 정리됐다. 밀밭에 더는 밀이 없었다.

 

 

지난해 11월17일 가족과 대책위원회는 강신명 경찰청장 등 7명을 살인미수 혐의로 고발했다. 한 달 뒤 고발인 조사를 한 검찰은 사실상 수사를 중단했다. 백남기의 씨앗이 싹을 얻고,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고, 다시 씨앗이 될 때까지, 국가 폭력의 책임자 중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야당은 ‘백남기 청문회’를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이 상시청문회법(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셨다지. 내가 미치지 않고 버티는 게 이상할 지경이에요.”

 

 

40㎏짜리 32가마

 

 

탈곡된 밀이 마을의 곡물 건조기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쏴아아아 소리를 내며 밀알은 수분 함량 12%(정부 기준)에 맞춰 말라갔다. “착잡하고 서운해요.” 건조 과정을 지켜보던 박경숙씨가 말했다. 밀의 수분이 마르더라도 그와 가족이 흘린 눈물은 마르지 않을 것이었다.

 

 

건조된 밀은 이튿날 주식회사 우리밀식품(대표 최강은)으로 운반돼 가공에 들어갔다. 수확 물량은 1.3t이었다. 40㎏짜리 32.5가마에 그쳤다. 백남기가 쓰러지기 전 소출량은 50~60가마였다. 밀은 몸무게를 크게 줄여 그의 빈자리를 증거했다.

 

 

남편의 마지막 밀을 거둔 아내는 다시 서울행 채비를 했다. 마당에서 하얀 나비가 너풀너풀 날았다.

 

 

 

보성/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그의 밀’을 지켜주세요

 

 

‘백남기 밀’ 보존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그의 아내 박경숙(63)씨와 후배 농민들은 13일 1.3t 분량의 밀을 수확했다. 지난해 11월14일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의식을 잃기 이틀 전 백남기(69)씨가 파종한 밀밭 2500여평에서 얻었다. 그가 이 땅에 남긴 마지막 농사의 결실이며 흔적이다.

 

“우리밀을 지켜온 형님의 사명감을 존중하고 그 의미를 기리는 쪽으로 판매·보존하려고 합니다.” 최강은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장은 설명했다.

 

우리밀은 정부가 수매하지 않는다.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국산밀산업협회,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이 수매해 생활협동조합이나 제분·가공업체 등에 유통한다. 그동안 백남기씨가 수확한 밀은 보성농협과 우리밀농업협동조합에서 수매했다.

 

그의 마지막 밀은 수매 절차를 밟지 않고 최강은 본부장이 전량 인수했다. 그는 광주·전남본부가 주주로 참여하는 ‘우리밀식품’(제분·면류 가공업체)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공장에서 정선된 씨앗은 오는 가을 백남기씨의 밭에 다시 뿌려진다. 보성군농민회가 주축이 돼 경작·재배한 뒤 ‘백남기 밀’이란 이름으로 종자를 보존·보급할 방침이다. 혼자 밀 농사를 이어가기 힘든 아내 박경숙씨는 사료작물 재배 농민에게 밀밭을 임대할 계획이었다.

 

알곡은 제분·가공해 밀가루와 국수·냉면으로도 판매한다. 제품엔 “백남기 농민이 파종했던 우리밀을 수확해” 만들었으며 “수익금은 백남기 농민 관련 기금(기념사업회 종잣돈 등)으로 사용된다”는 문구가 붙는다. 매년 수확되는 백남기 밀을 지속적으로 제품화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쓰러진 지 6개월째 되는 날(5월14일) 채취한 밀 이삭은 푸른빛을 유지한 상태로 보존처리했다.

 

박경숙씨는 남편의 이름을 딴 밀을 통해 그의 뜻이 전해지길 희망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계산하지 않고 우리 땅과 농촌, 먹거리를 살리는 데 헌신하신 분이에요. 그의 마음이 많은 분들께 가닿았으면 좋겠어요.”

 

백남기씨는 2013년 우리밀을 아껴달라며 이렇게 호소했다. “6월이 돼 비가 (많이) 오면 풀이 밀을 덮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밀을) 수확을 해서 세상에 내놓으니까 믿고 드셔주신다면 우린 더욱 힘을 얻을 겁니다. 유기농이다 친환경이다 뭐다 하지 않고 진짜 그대로 우리밀을 생산할 테니까, 소비자 여러분들이 우리 것을 많이 이용해주시면, (저희는) 신나는 우리밀 농사를 짓겠습니다.”(가톨릭농민회 광주대교구연합회 창립 40주년 기념 대담)

 

‘백남기 밀’ 주문: 우리밀식품 1588-6208, woorimil@hanmail.net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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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반전단체 앤서대변인 미대사관앞1인시위 ...

  • 미국반전단체 앤서대변인 미대사관앞1인시위 ... 미대사관·박<정부>탄압 148일째
  • 임진영기자
    2016.06.18 21:33:03
  • 18일 코리아연대(자주통일민주주의코리아연대)는 미대사관, 청와대, 서울구치소 앞에서 393일째<박근혜퇴진,미군떠나라> 1인시위를 진행했다.

     

    미대사관앞에서의 합법적인 1인시위에 대한 탄압은 148일째 계속됐다.

     

    미대사관앞 1인시위현장에서 평화와통일을위한국제포럼에 참가를 위해 서울에 방문한 외국인사들이 코리아연대의 1인시위에 연대와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도 경찰들의 폭압적 탄압은 계속됐다.

     

    현장을 보고 있던 미국반전단체 앤서의 대변인 데렉 포드는 직접 코리아연대의 플래카드를 빌려 들고 미대사관앞에 1인시위를 전개했다. 

     

    경찰은 외국인도 강압적으로 밀어냈다. 데렉 포드는 굴하지 않고 건널목 건너편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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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대사관앞에서의 합법적인 1인시위에 대한 탄압은 148일째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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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대화는 회복불능 국면, 북미 막후협상마저 깨진다면...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6/06/19 09:05
  • 수정일
    2016/06/19 09:0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남북대화는 회복불능 국면, 북미 막후협상마저 깨진다면...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6/19 [01:0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김정은 당위원장은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이 땅 우에 기어이 존엄높고 번영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고야말 것"이라고 말하며 조국통일을 향한 자신의 확고한 의지와 결심을 천명하였다. 특히 지금처럼 군 당국 사이의 모든 대화가 중단된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며 시급히 남북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와와 안전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7차대회 이후 북은 즉각적으로 여러 부문에서 연이어 남북대화를 제의해왔다.     ©자주시보

 

북이 "대화 상대는 얼마든지 있다"며 그간의 전략을 바꿀 가능성을 내비쳤다.

 

17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북의 민족화해협의회 대변인은 같은 날 담화를 통해 "박근혜가 우리와 마주앉지 않겠다고 앙탈을 부린다면 굳이 대화를 청할 생각이 없다"면서 "박근혜가 아니더라도 우리와 손잡고 나갈 대화의 상대는 얼마든지 있다"고 밝혔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고 한다.

 

대변인은 "우리의 대화 제의가 제재와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면전환용'이라는 것은 온 겨레가 염원하는 북남관계개선을 끝까지 기피하려는 대결광증의 집중적발로"라고 덧붙였다.

 

민족화해협의회 대변인은 또 "우리의 핵 개발이 북남관계 개선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것은 가장 파렴치한 흑백전도의 극치"라며 "우리의 핵 보유는 자기의 존엄과 자주권, 운명과 미래를 사수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자위적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는 핵 능력을 질적, 양적으로 강화하고 태평양 건너의 미국본토까지도 날려 보낼 수 있는 최첨단 전략 핵 타격 수단들을 꾸준히 개발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면서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에 대한 응당한 자위권행사이며 그 어떤 경우에도 이것이 도발로 매도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는 북은 전날에도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를 통해 "세계 최대의 열점 지역인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가장 최선의 방도는 우리의 자위적 핵 억제력을 백방으로 강화하는 것"이라며 핵 개발의 당위성을 강조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결국 북의 핵억제력은 미국의 핵위협에 대응하여 북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남측이 반대한다고 포기할 문제가 아니며 이것을 문제 삼아 남측이 북과 대화를 거부한다면 더는 박근혜 정부와 대화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 2011년 2월 8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열린 군사당국회담을 위한 실무회담 모습, 문상균 대령(국방부 북한정책과장, 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리선권 대좌(대령급, 왼쪽에서 두 번째) 북은 최근에도 군사당국자 회담과 그 준비를 위한 이런 실무회담을 하자며 날짜까지 제안하는 등 연속적인 대화제의를 해왔었다.    ©

 

하지만 연합뉴스 인용보도만으로는 '박근혜 정부가 아니어도 대화 상대는 얼마든지 있다'는 말의 의미가 남측의 차기정권을 의미하는 것인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의미하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인터넷을 검색하여 그 전문을 살펴보니 차기정부가 아니라 남측이 아니어도 북이 교류협력을 진행할 나라들은 많이 있다는 의미, 더불어 박근혜 정부가 대화에 나서지 않는다면 남측은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한 채 미국 등과 직접대화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풀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특히 미국과 결산을 통해 한반도 문제를 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박근혜가 아니더라도 우리와 손잡고 나갈 대화의 상대는 얼마든지 있다.   

희세의 대결*녀가 날로 숨이 꺼져가는 제 처지도 모르고 분별없이 날뛴다면 우리 역시 미국과 침략의 한배를 타고 반민족적망동에 광분하는 반역의 무리들과 최후의 계산을 할것이며 다시는 이런 얼간망둥이들이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매장해치울것이다.   

박근혜는 세치 혀로 불러들인 화가 얼마나 엄청난것인지 머지않아 몸서리치게 깨닫게 될것이다.]-17일 북 민화협 대변인 담화 중에서

 

북의 민화협이라면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 남북교류행사를 진행하는 북측 기관의 한 축이었는데 그런 기관에서 극단적인 어투로 가장 수위가 높은 비난 단어들을 선택하여 시종일관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고 있었다. 너무 극단적이어서 일부 단어는 삭제해서 인용하였다.

그리고 남측에 대한 북 기관의 담화 치고는 그 길이가 거의 비망록 수준으로 길었다.

 

최근 북이 연이어 남측에 대화를 제의한 배경과 의도가 무엇인지 구구절절히 설명하면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문제점도 북의 입장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었다.

 

특히 북은 박근혜 정부가 기어이 대화를 거부하고 북에 대한 강경대결정책 일변도로 나간다면 미국과 최후의 계산을 할 때 함께 계산할 것이라는 경고도 담았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통일을 위한 자체의 시간표와 계회표를 만들어놓고 그 실현을 위해 하나하나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북이 조선노동당 제7차대회에 남북대화 필요성을 역설하고 대회가 끝나자마자 연이어 대화제의를 했던 것도 시간표 구현의  일환으로 제기한 것이지 꼭 남측이 받아줄 것이라고 확신해서가 아니었던 것 같다.

 

전문에서는 한반도 문제의 본질적 해결은 미국과의 대화로 보고 있지만 남과 북이 서로 힘을 합쳐 한반도 위기 문제를 히결하고 통일을 이루어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또 세계 앞에 가장 떳떳한 방법이기에 그를 위해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보겠다는 차원에서 제기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미 북미 막후협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해외언론과 전문가들의 의견도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 북미 대화마저 깨진다면 그 다음 시간표가 무엇일지는 그간 북의 행보를 놓고 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이번 북 민화협 담화에서도 밝혔듯이 강력한 대미 핵억제력 과시가 아닐까 생각된다.

 

연합뉴스의 관련 보도에서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앞으로 우리 정부를 배제한 채 국제사회와 더욱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면서 "조심스럽긴 하나 저강도의 무력 시위나 대남 심리전을 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는데 일리가 있는 분석으로 판단된다.

 

다만 과연 저강도에서 끝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이미 올해 초 보여준 북의 무력시위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으며 전례없이 강력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보다 약한 후속 무력시위가 과연 무슨 효과를 가져올 것이며 다음 수순, 다음 시간표로서 의미가 있겠는지 하는 의문이다.

 

남북대화는 이대로라면 사실상 물건너 가고 있다. 막후에서 진행 중인 북미대화라도 잘 풀리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것마저 결실없이 끝난다면 그 다음 수순은 생각하기조차 두렵다. 올해 초 공개한 북의 핵억제력만 해도 그 내용을 따져보면 정말 무시무시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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