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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촛불집회 1주년, 우리 광장에서 다시 만나요!

[일상 비틀기]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인권상' 수상, 촛불시민의 자존감 잊지 말고 살아요

17.10.26 20:43l최종 업데이트 17.10.26 20:43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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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만 명이 참여한 소등 퍼모먼스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공범처벌과 적폐 청산의 날-8차 촛불집회'에서도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1분 암흑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본집회가 시작된 이후 6시 40분께 촛불집회에 참석한 65만 명이 일제히 동참하며 "박근혜는 퇴진하라. 박근혜를 구속하라. 황교안은 물러나라. 김기춘을 구속하라"고 외쳤다.

이들은 "대한민국은 아직도 겨울 공화국이다"라며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혼돈의 시간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기 위한 촛불이 되겠다"는 마음을 모아 소등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이들은 "곧 새벽이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어둠은 아직 물러가지 않았고 잘못이 없다. 모른다. 버티겠다고 한다"며 "스스로 물러갈 어둠이 아니기에 촛불을 끌 수 없고 더 크게 타 올라야 한다"고 말했다.
▲ 60만 명이 참여한 소등 퍼모먼스 지난 2016년 12월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공범처벌과 적폐 청산의 날-8차 촛불집회'에서도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1분 암흑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본집회가 시작된 이후 6시 40분께 촛불집회에 참석한 65만 명이 일제히 동참하며 "박근혜는 퇴진하라. 박근혜를 구속하라. 황교안은 물러나라. 김기춘을 구속하라"고 외쳤다. 이들은 "대한민국은 아직도 겨울 공화국이다"라며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혼돈의 시간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기 위한 촛불이 되겠다"는 마음을 모아 소등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이들은 "곧 새벽이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어둠은 아직 물러가지 않았고 잘못이 없다. 모른다. 버티겠다고 한다"며 "스스로 물러갈 어둠이 아니기에 촛불을 끌 수 없고 더 크게 타 올라야 한다"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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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대한민국의 촛불시민 이창희라고 합니다. 우선, 촛불혁명의 성공을 축하하며 대한민국의 1700만 촛불시민을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뉴스를 듣지 못했다면, 해결되지 않은 일상의 고단함에 치여서 우리가 같이 만들어낸 '승리'를 까맣게 잊어버릴 뻔했습니다. 이 상을 계기로 그날들의 승리에 나도 촛불 한 개를 더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며, 질척한 현실에 방치되었던 저의 자존감을 다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2016년 겨울, 촛불이 타오르던 광장에 있었습니다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지난해 10월, '최순실'이라는 낯선 이름을 뉴스에서 듣게 된 후로 저는 놀라운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동안 이해가 되지 않던 정부의 모든 행위들이 납득이 되기 시작했거든요. 그들이 왜 저렇게 국민을 무시하려 했는지, 국민의 기대와는 전혀 관계없이 정책을 결정하는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에게 '대한민국'은 왜 이렇게 가혹하게 대하는지, 정말 혼란스러웠던 그 모든 상황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던 거예요. 

'설마' 했던 것들이 사실로 드러나고, 우리끼리 반목하며 서로 싸우게 만들었던 이유도 '국정 농단 세력'의 이익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너무나 허탈했어요. 정권 내내 '대한민국'으로부터 배신당하면서 '정말 이민을 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촛불이 타오르고 광장에 자리를 펴고 앉을 수 있었던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져요. 지난해 11월 12일이었을 거예요. 제가 참석했던 첫 번째 촛불집회였는데, 시민 문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광화문에 자리를 펴고 앉은 순간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광장에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도, 국가와 권력에 대해 이렇게 환한 광장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런 기분 아세요? 너무 좋아서 자꾸 웃음이 나고, 입으로는 함성에 동참하여 깔깔거리고 있는데, 자꾸 가슴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상황 말입니다. 그날, 제가 그랬어요. 기괴한 장면이죠. 한낮의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권력에 반대한다'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거든요. 

얘기가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는데, 죄송해요. 2015년 11월 14일에도 저는 광화문에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광화문 광장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8차선 대로에서, 누구 하나 빠져나갈 수 없도록 빽빽하게 쳐 놓은 차벽 안에 갇혀 있었죠. 대한민국의 모든 경찰에게 총동원령이라도 내려진 것처럼 광화문 광장엔 경찰들로 가득했고, 1차 민중총궐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사거리의 통제구역 안으로 몰아넣어졌어요. 

그날 시위대와 합류하려던 시민들은, 빽빽한 차벽 사이로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좁은 통로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가 있었답니다. 게다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은 국민에게 열어준 '개구멍'을 통과하는 우리를 여기저기에서 채증하며, 계속 겁을 주는 겁니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조심해' 하는 듯한 압박이 계속 느껴졌어요. 

여지껏 '겁먹은 시민'으로만 살았는데... 그날 광장이 열렸습니다
 
2015년 11월 14일의 광화문 광장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던 경찰들을 보며 들었던 생각. '이 나라 도둑들은 오늘이 장날인가?'
▲ 2015년 11월 14일의 광화문 광장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던 경찰들을 보며 들었던 생각. '이 나라 도둑들은 오늘이 장날인가?'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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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된 시위는 제대로 행진 한 번, 구호 한 번 외쳐보지 못했어요. 그날의 언론 보도로는 '반정부 전문 시위꾼들에 의한 폭력집회'라고 했지만, 그곳에는 저처럼 '나라에 기대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크게 얘기하고 싶었던 우리 '일반 시민'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우리가 경찰이 쳐 놓은 통제선 안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던 동안, 살수차가 물을 뿌리기 시작했고 백남기 농민께서 쓰러지신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에도 무력했고, 분노는 했지만 힘을 낼 수가 없었어요. 내 편이 누구인지 몰랐고, 어디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났거든요. 백남기 어르신에 대한 폭력을 보고 나니, 저는 더 겁이 났어요. 나도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 국가는 저를 그렇게 '공포심'으로 길들였던 거죠. 

다시 2016년이네요. 그렇게 '겁먹은 비겁한 시민'으로 너무 오래 살다 보니, 그저 '도망쳐야겠다'하는 생각밖에는 못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광장이 열린 거예요. 기적 같았어요.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넬 수 있다는 것, 미소만으로도 '우리가 기대하는 희망'을 전달할 수 있다는 연대감, 정말 기적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어요. 흘러내리는 눈물도 벅찬 가슴도, 제가 첫 번째 집회를 위해 나간 광장에서 느꼈던 그 모든 감동을 대변하는 것이었겠죠. 이 감동은, 아마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던 광장의 축제를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테고요. 

그러다가, '그 사진'을 찍게 된 거예요(관련 기사: '시위대 농민' 기념사진, 무릎 굽혀 찍어준 경찰관). 아직 광장의 열기가 계속 이어지던 오후 9시 30분쯤, 저는 슬슬 광장을 벗어나서 서울역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포항 가는 마지막 기차가 오후 10시 20분에 있었거든요). 모르는 길도 아니었고, 지하철을 타기엔 광장에 모인 100만 명의 시민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다만,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은 시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사람들의 바다를 거슬러서 헤엄치는 게 힘들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간신히 걷다 보니, 눈앞에 남대문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거기에 계셨어요. 벼 이삭이 그려진 붉은색의 전국 농업인 연합회 깃발과 그분들의 흥겨움을 기꺼이 사진으로 남겨주신 경찰관 말이에요. 갑자기 제 머릿속에는 정확히 1년 전, 그러니까 2015년 11월 14일의 광장에서 대치했던 그분들이 떠올랐어요. 아, 그때는 서로에게 그렇게나 심하게 상처를 주던 분들인데, 오늘은 이렇게나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계시다니! 다시 눈물이 흘렀고, 저도 그분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왔어요. 

'(제게 좋은 순간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덧 '탄핵' 촛불집회 1주년, 광장에서 다시 만나요
 
2016년 11월 12일의 촛불집회를 마치고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던 순간이예요. 저도 이분들이 서로를 위해 무릎을 굽히고,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행복했답니다. 감사합니다!
▲ 2016년 11월 12일의 촛불집회를 마치고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던 순간이예요. 저도 이분들이 서로를 위해 무릎을 굽히고,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행복했답니다. 감사합니다!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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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집회에서의 감동으로 그 후로도 여러 번 '상경투쟁'을 이어갔어요(고백하자면, 그냥 재밌어서, 광장에 모인 우리에 행복해져서 올라갔던 것이지만 말입니다). 친구들도 가족들도 광화문에서 만나는 것으로 약속을 잡았네요. 울진의 제 동생은 애들 셋을 데리고 거의 매번 참석해줘서, 제가 그 방에서 신세도 많이 졌네요. 막내 조카가 그 당시 네 살이었는데, 우리의 광장이 어떤 모습으로 기억에 남았을지 궁금하기도 해요. 그 아이들이 살게 될 대한민국은, 더 이상 국민을 버리지 않는 나라이길 원했던 촛불이니까요. '촛불의 목표'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에요.

이렇게 또 1년이 지나서, 2017년 11월이 다가오고 있네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깜짝 놀랐어요. 저, 정말 세상이 바뀐 것을, 그것도 '우리 힘으로' 바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거든요. 억울하지만 '촛불 시민' 이창희가 '생활인' 이창희로 바뀌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지 않아요.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출근하는 아침이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윗사람의 지시에 한없이 주눅 들어서는 '나 아니어도 될' 자리에서 '자존감은 집에 두고 나올걸' 후회하며 살고 있더라고요. 그러다가, '인권상' 수상이라니요! 갑자기 놀라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제 '조급함'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기다리는 시간이 갑갑해지는 것도 어쩔 수가 없겠지요. 짙은 구름을 걷어내고 환하게 얼굴을 드러낸 햇살이, 울창한 나무를 뚫고 바닥의 들풀들에게 닿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잘 알아요. 그럼에도 자꾸만 조바심이 고개를 들고는 '저것 봐, 햇살은 저 큰 나무들이 다 가져가고 있잖아' 말할 때는 너무 두려워요. 분명히 세상은 바뀌었고 2015년의 11월의 물 대포도 2016년 11월의 빽빽한 차벽도 모두 사라진 평화로운 광장과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이 환하게 웃고 계신 데 말이에요. 

다시 짐을 챙겼습니다. 1년 전과 똑같은 꽃무늬 가방에 광장 바닥의 한기를 막아줬던 천 원짜리 깔개를 조심스레 접어 넣었어요. 크지 않은 배낭이지만,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가 불러올 감기가 두려워 얇은 목도리와 작은 담요도 꾸역꾸역 챙겼습니다. 자꾸만 조바심으로 불안은 커지고, 먹구름이 걷혔다고 '한편이었던' 우리끼리 또 싸우게 될까 봐서 아직은 두렵지만, 완성되지 않은 촛불의 염원을 다시 기억해 내야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구겨졌던 자존감도 햇살에 말려서 다시 마음에 챙겨 넣어야 할 테고, 우리 모두가 같이 바라는 희망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런 건 어때요?

'다스는 누구 겁니까?'
'우리끼리 싸우면 누가 좋아할까요?'


다시 한번, 뜻깊은 상을 통해 사라지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멋진 승리를 우리 모두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냈다는 것을, 글을 읽으시는 '우리 촛불시민들'도 잊어버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혁명은 끝나지 않았으니, 우리 광장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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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헌 선생, 이제 미국과 끝장을 봐야

[목요집회] 권오헌 선생, 이제 미국과 끝장을 봐야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10/27 [02:4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1142차 목요집회, 2017년 10월 26일 탑골공원 삼일문 앞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권오헌 회장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16일 서울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서 양심수전원석방과 국가보안법철폐를 위한 민가협·양심수후원회 추최 1142회 목요집회가 어김없이 열렸다. 이번 집회는 우연히 남북해외 3자연대 집회로 진행되어 더욱 의의가 컸으며 참여자들도 평소 2배나 모였다.

 

위중한 병마와 싸우고 있는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여는 말 연사로 나와 “28일은 박근혜 적폐정권에 항거를 시작한 촛불시위 한 돌이 되는 날이다. 국민들은 뜨거운 투쟁의지로 적폐정권 몰아내고 촛불정부를 세웠다. 현재 곳곳에 쌓여있는 적폐를 청산 해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적폐 중에 최악의 적폐인 분단적폐와 억압구조는 바뀌지 않고 있다. 특히 국정원과 적폐정권들이 조작한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12명 북 여성종업원문제와 통합진보당 폭압적 해산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한다.”며 문재인 정부의 각성과 국민들의 적폐청산 투쟁 동참을 정열적으로 호소하였다. 

 

▲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양심수들을 위해 매주 목요집회에 참석해온 권오헌 회장,

양심수들의 재판이란 재판은 다 참여하였고

전국 구치소를 돌며 양심수들에 힘과 용기를 주었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그러면서 권오헌 회장은 이어 “또 하나 지적할 것은 미국의 한반도 주변 합동해상훈련문제이다. 한 척의 항공모함이 이미 와 있고 트럼프 방한에 맞추어 두 척이 더 온다고 한다. 미국은 제너럴셔먼호사건 등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 첫 발을 내 디딜 때부터 꼭 함포를 몰고 와서 우리 민족을 폭력적으로 겁박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챙겼다. 지금 항공모함을 끌고 한반도에 오는 트럼프도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며 이제는 우리민족이 이런 미국의 폭압을 끝장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였다.

 

집회 후에 대담에서 권오헌 회장은 “어제 무리하게 등산을 해서 밤에 잠을 한 숨도 못 자 집회 도중 눈이 자꾸 감겼다.”고 했었는데 연설을 할 때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뜨거운 포효를 터트렸다. 그만큼 분단문제 미군문제만 나오면 온몸이 바로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열렬한 애국의 피가 그의 가슴에서 언제나 식지 않고 끓고 있었던 것이다. 

 

▲ 송영애 미주 양심수후원회 동포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이번 목요집회에서는 로스앤젤레스 사는 송영애 미주 양심수후원회 동포도 참석하여 연단에 섰다. 송영애 동포는 “벌써 목요집회가 1142회나 되었다. 그간 어머님들과 선생님들이 얼마나 고생하셨겠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목요집회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양심수를 전원 석방하고 국회에서 하루빨리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굳은 연대의지를 표했다.

 

▲ 김련희 평양시민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이어 확성기를 잡은 김련희 평양시민은 “나는 이념도 잘 모르고 정치도 모른다. 오직 북녘에 있는 가족들과 단 한번만이라도 오붓하게 둘러앉아 식사 한 끼 해보고 싶은 게 소원이다. 이런 사람의 초보적인 꿈마저 무참히 짓밟는 나라가 무슨 인권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더군다나 현재 한반도는 전쟁위기가 일촉즉발이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남과 북이 서로 적대시하지 말고 힘을 합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김련희 동포는 연설 말미엔 충혈된 눈물어린 눈을 감추지 못했다. 가족 말만 되뇌어도 그렇게 눈이 충혈되고 있는 것이다. 

 

▲ 민중당 서울시당 최나영 공동위원장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10월은 자주시보 후원확대의 달입니다.

기자는 퍽 늘었는데 점점 정기후원이 줄어들어 후원히 절실한 상황입니다.

애독자 여러분들의 따뜻한 후원격려부탁합니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 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5885

 

김련희 동포로부터 확성기를 이어받은 민중당 서울시당 최나영 공동위원장은 “정치는 결단이다. 적폐세력 이명박근혜정권 퇴진을 위해 열심히 투쟁하다가 투옥되어 옥중고초를 겪고 있는 양심수들의 전원 석방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제는 결단해야 한다. 8.15때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이제 물리적 시간이 퍽 지났다. 겨울이 오기 전에 결단을 내려라.”라며 문재인 정부의 양심수 전원석방 결단을 강하게 촉구하였다.

 

▲ 지영철(왼쪽), 이동근 씨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마지막으로 지영철, 이동근 민족민중당 관계자들이 출소 인사를 하였다. 이들은 먼저 길바닥이지만 민가협 어머니들과 원로 선생들에게 넙죽 큰 절부터 올렸다. 

지영철 씨는 “힘든 감옥 생활이었지만 지지, 지원해주고, 투쟁해준 사람들 덕분에 고립된 곳에서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다. 나와 보니 세상은 여전히 감옥이다. 더 열심히 투쟁하겠다.”며 굳은 의지를 피력했다.

 

 

이동근 씨도 “옥중으로 들어오는 밖의 투쟁 소식,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정성스런 편지에 큰 힘을 얻었다. 그 힘으로 감옥 안에서 나 스스로를 혁신하는 투쟁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출소해서 행복했다. 더 큰 행복을 위해 더 열심히 자주통일투쟁을 전개하겠다. 승리를 확신한다.”며 계속적인 투쟁의지를 밝혔다.

 

▲ 2017년 10월 26일 목요집회에서 시민들에게 나누어 준 6대종단 양심수 전원석방 촉구 유인물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2017년 10월 26일 삼일문 앞 1142회 목요집회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2017년 10월 26일 삼일문 앞 1142회 목요집회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2017년 10월 26일 삼일문 앞 1142회 목요집회, 적폐정부와 싸운 이들이 왜 감옥에 지금도 있어야 하는가.자녀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이들을 부모형제 아내와 남편 가족들의 품으로 어서 돌려보내야 한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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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국정원·군·경찰 동원 ‘여론 조작’…MB에 매일 보고

 
입력 : 2017.10.26 06:00:05 수정 : 2017.10.26 06:00:57
 

ㆍMB 청와대, 사이버 댓글 공작 ‘배후 조종’ 확인
ㆍ홍보 박형준·소통 김철균 라인 ‘친정부 여론몰이’ 주도
ㆍ여론동향 파악·댓글 공작 동시 진행…전면 수사 불가피

[단독]국정원·군·경찰 동원 ‘여론 조작’…MB에 매일 보고
 

이명박(MB) 정부가 벌인 댓글 공작의 실체가 25일 전모를 드러냈다. 이명박 청와대가 ‘사이버 컨트롤타워’를 두고 댓글 공작을 진두지휘했으며, 국가정보원과 군 사이버방위사령부 등은 수족 노릇을 한 사실이 파악됐다. 

사이버 컨트롤타워가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된 점, 댓글 공작 지휘부인 국민소통비서관실이 인터넷 여론동향을 이 전 대통령에게 매일 보고한 점 등을 감안하면 이 전 대통령의 댓글 공작 지시·관여 정황도 뚜렷해졌다. 

국정원과 군 말고도 경찰의 댓글 공작 개입 의혹도 제기됐다. 이 전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가 불가피해졌다. 

■ 대통령 직속 ‘사이버 컨트롤타워’ 

경향신문이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을 통해 입수한 유관기관 보고 문건(2008년 7월23일 작성) 내용을 보면, 사이버 컨트롤타워는 홍보기획관실과 위기정보상황팀 등 두 축으로 편제됐다.

“국가를 위협하는 해킹, 사이버 테러 등에 대비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위기정보상황팀은 차두현 전 KIDA 연구원이 팀장을 맡았다. 문제는 홍보기획관실-국민소통비서관실로 이어지는 다른 축이다. 문건은 국민소통비서관실의 역할을 “국정 관련 인터넷 공간 통제를 위한 컨트롤타워”로 규정했다. 

국민소통비서관실의 업무는 “사이버상 여론 수집·분석” “불법 폭력시위 주동자 및 악성 루머 유포자 색출” “인터넷 토론방 내 악성 게시물 대응 및 정부 시책 옹호글 게재” 등이다. 인터넷 여론조작이 주요 업무였던 셈이다. 

문건에는 국민소통비서관실 업무 내용과 관련해 “보안 유지 요청”이라고 적혀 있다. 청와대가 국민소통비서관실의 업무 내용에 대한 보안 유지를 요구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청와대도 국민소통비서관실 업무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면 문제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 인터넷 여론 수집, MB에게 보고 

국민소통비서관실은 국정원·국방부·경찰 관계자 등과 주기적으로 회의를 하고 인터넷 여론동향 및 인터넷 공간 통제 방안 등을 논의했다. 문건에는 국민소통비서관실이 국정원·경찰 등을 통해 인터넷 여론을 수집한 것으로 나와 있다. 

청와대에 ‘사이버 컨트롤타워’가 생긴 이후 군 사이버방위사령부 등의 댓글 공작이 본격화된 것을 보면 국정원과 군의 댓글 공작 역시 국민소통비서관실의 지휘를 받아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경찰의 댓글 공작 개입 여부도 주목된다. 

이철희 의원은 “법 집행기관인 경찰이 불법적 댓글 공작과 여론조작에 버젓이 참여했다는 건 처음 밝혀진 사실”이라며 “경찰은 더 이상 남의 일처럼 외면 말고 과거청산과 재발방지책 마련에 전면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소통비서관실은 국정원·경찰·군을 통해 인터넷 여론동향을 수집한 뒤 분석해 한 쪽짜리 일일 여론동향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매일 이 전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같은 기관이 2009년 4월2일 작성한 문건에는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에서는 ○○(해당 기관) 제공 자료 중 평균 2건 이상을 포함하여 ‘일일 여론동향 보고서(1P)’를 생산, 대통령님을 비롯한 BH 수석실 내 148명에게 일일 단위로 배포”라고 적혀 있다.


국정원과 군의 인터넷 여론동향 파악이 댓글 공작과 동시에 진행된 점을 보면, 해당 보고서에는 단순 여론동향뿐 아니라 ‘조치 방안 및 결과’ 등 불법적 댓글 공작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홍보기획관은 박형준 전 의원, 국민소통비서관은 김철균 한국인터넷전문가협회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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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신화'는 처음부터 없었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10/26 12:11
  • 수정일
    2017/10/26 12:1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인터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저자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③·끝
2017.10.26 02:46:53
 
 

 

 

 

2013년부터 <프레시안>에 연재됐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중 박정희 유신 체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단행본 9, 10, 11권이 발간됐다. 이번에 발간된 세 권은 1972년 10월 17일을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유신 쿠데타'와 관련 △유신을 왜 일으켰나(9권) △왜 유신 체제를 막지 못했나(10권) △유신의 뿌리, 일본 군국주의(11권) 등을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는 1945년 해방 후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민주화 흐름을 짚어보는 기획으로 해방과 분단을 다룬 1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을 다룬 2권, 이승만 독재와 이에 맞선 조봉암의 비극을 그린 3권, 4월 혁명을 다룬 4권에 이어 5권부터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탄생과 전개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 유신 체제를 해부하는 세 권의 단행본에 이어 향후 6월 항쟁에 이르는 과정도 다뤄질 예정이다. 

<프레시안>은 촛불 시위 1주년이자 11월 14일 박정희 탄생 100년을 맞아 저자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를 만나 촛불 시위의 의의를 되새김과 동시에 유신 체제와 한국의 앞날을 조망하는 인터뷰를 마련했다.  

촛불 시위가 없었다면 박근혜 정부 하에서 성대한 박정희 탄생 100주년 행사를 지켜봤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서 교수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박정희 신드롬'이 만연해있다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인터뷰는 지난 12일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프레시안>은 이번 인터뷰를 세 편에 나누어 소개한다. 마지막 편으로 "박정희가 경제는 살렸다"는 주장의 맹점을 짚어봤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유신'이라는 명칭은 메이지유신(1868년)에서 따온 것으로 흔히 이해된다. 그러나 1936년 2·26쿠데타를 일으킨 황도파 군인 등 군국주의자들이 쿠데타 등으로 강력히 요구한 쇼와 유신이 그 원형이라고 지적하셨다. (2·26쿠데타는 일본의 청년 장교들이 조선 총독을 지내기도 한 사이토 마코토를 비롯해 주요 인사를 살해하고 강력한 군부 통치를 요구했던 사건이었다. 토론과 협상에 의한 정치를 부정하고 강력한 군부 통치를 추구한 것이다.편집자)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는 열등생이었다가 만주 군관학교 이후 우등생이 됐다는 대목도 흥미로웠다. 박정희의 국가 운영 방식이 일본 사관학교의 군대식 교육과 만주국 국가 운영에 그 원형이 있다고 했는데, 결국 일본 식민 시대의 국가 운영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서중석 : 박정희가 메이지 유신을 중시했다는 것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회상을 통해 나온 말이다. 기시는 만주 침략의 핵심 인물이었고 연합국에 의해 A급 전범으로 지목됐는데도 두 번이나 일본 수상을 지내면서 박정희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줬다. 그의 글에는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메이지 유신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게 사실이라면 박정희가 5.16 쿠데타 직후에 쓴 글들, 특히 <우리민족의 나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 등의 책에 메이지 유신 지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한 문장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언급이 전혀 없다. 특히 <국가와 혁명과 나> 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한 항목으로 다루고는 있는데도 이런 말이 한마디도 안 나온다. 추측건대 메이지 유신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것은 박정희가 기시에게 외교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박정희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는 1936년 젊은 군인들이 일으킨 2.26 사건에서 큰 감명과 감동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무엇보다도 쇼와 유신과 박정희 유신 체제가 닮은 점이 많다. 기성 민간 정치인에 대한 불신, 강력한 통치, 군대식의 능률적 사고 등이 그렇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박정희는 쇼와 유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에 재학중일 때, 일본 육사에 있었을 때, 또 만주군 군인이었을 때 군인 사회를 풍미했던 것이 쇼와 유신이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박정희가 이른바 국가개조 운동으로 재건 국민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는데 그때 <조선일보>에는 재건 국민 운동은 일제 말기 군국주의 일본의 전시 동원 국민 운동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재건 체조는 일제 말기의 라디오 체조를, 신생활복은 국민복을, 국민가요는 말 그대로 일제 말기의 국민가요를 연상시킨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이 쓴 글에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 등 국민 개조 운동, 국민 교육 헌장이 쇼와 유신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 교육 헌장은 메이지 교육칙어, 황국신민서사와 연관시켜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국기에 대한 맹세와 애국조회, 국기 하강식 등 국가주의 맹세의 의례와 교련과 체육의 모의 수류탄 던지기 군사교육, 충효교육, 라디오 체조와 내 집 앞 쓸기 운동, 국민가요 부르기, 퇴폐풍조 일소와 미풍양속 고취, 반상회, 고도 국방 체제를 목표로 한 총력 안보 체제, 국가 통제형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이 일제가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에서 실행했던 국가주의를 본 떠 되살린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유신 체제는 일본 극우가 꿈꿨던 쇼와 유신의 한국형 변조라는 지적인데 대체로 적절한 평가라고 본다.  

유신 체제는 쇼와 유신의 군국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쇼와 유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만주 인맥이라고 평가되는데,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 중심 인물로 체포됐을 때 살아난 것도 국내 만주 인맥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박정희 정권과 경제적 관계를 포함해서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 자들이 아베의 외조부 기시를 비롯한 만주 인맥이다.  
 

▲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 10, 11권 (서중석 지음, 오월의 봄 펴냄, 2017)


프레시안 : 그런데 대다수 국민은 박정희의 경제 개발 공로는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박정희의 경제 개발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한국인 중 상당수가 1960~70년대의 경제발전을 박정희의 공으로 이해하고 있다. '개발 독재'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붙어있던데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특히 유신체제가 경제 발전에 효율적이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그래서 이 점을 특별히 유의해 검토하고 있다. 

<현대사 이야기> 8권 전체가 박정희 집권기의 경제 발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담았고, 9권에서 유신 쿠데타를 다룰 때도 이 문제를 포함했다. 앞으로 유신 붕괴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다루려고 하는데, 경제가 유신 붕괴에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미쳤는가를 살펴볼 예정이다.  

일부 진보 세력의 '개발 독재' 주장은 심각한 허점을 안고 있다. 우선 3공화국과 유신체제가 삼척동자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백히 다른 정치체제인데도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박정희 유신 체제의 경제 정책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이 중화학 공업인데, 1970년대에 한국에 중화학 공업 시설들이 많이 세워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거나 간과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유신체제 붕괴에서 경제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대만도 1972년 10대 건설 계획을 세우며 1970년대 내내 중화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우리의 경우 1972년 유신 체제 이전에 중화학 공업은 이미 포항제철이나 비료공장 등 중요한 시설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1972년에서 76년까지 진행된 제3차 경제개발계획도 1971년에 구체적 계획이 다 세워졌다. 즉 이 개발 계획은 유신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중화학 공업화를 1973년 1월에 선언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평가가 아니다. 

박정희는 1971년 7월 1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중화학 공업을 선언한다. 그는 앞으로 중화학 공업 시대의 막을 올리고 한강 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유신과 중화학 공업화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박정희 스스로도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유신 체제 같은 강권 체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개발 독재론자나 중화학 공업 건설과 관련한 글 등에서 보면 1973년 정부의 각종 특혜 정책으로 중화학 공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고 하는데, 이것도 사실과 거리가 있다. 1974~75년 중화학 공업에 대한 투자는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는 두 해 다 경제성장이 둔화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중화학 공업을 시작하려면 엄청난 자본이 투자돼야 하는데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재벌들은 그 정도의 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한국 경제에 기적이 출현했다.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74년부터 '중동 건설 특수'가 나타났다. 석유 폭등으로 떼돈을 번 산유국들이 대규모 건설공사에 착수한 것이다. 이것은 다 알다시피 박정희와도, 유신체제와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중동특수에 맞춰 한국은 1975년부터 몇 십억 달러씩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현대를 포함해 몸집이 엄청나게 커진 업체들이 있었고, 1975년을 전후로 해서 부동산 투자와 투기가 벌어졌다. 

여기서도 건설 업체들이 상당한 부를 가져갈 수 있었다. 즉 중화학 공업화의 발판은 유신 체제가 아니라 중동 건설 특수에 따른 막대한 외화 수입, 그리고 부동산 투자 투기에 따른 대기업의 막대한 이윤 창출이었다.  

이런 요소들이 작용하면서 국가가 보증해주는 차관을 가지고 중화학공업에 투자해서 누가 경쟁에서 선두를 달리느냐가 당시 재벌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대재벌로 성장하는데 중화학 공업처럼 좋은 게 없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중화학 공업에 투자했다. 그러다 보니 엄청난 과다 중복 투자 현상이 일어났다.  

유신 체제 붕괴에는 경제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1978년 12.12 선거에서 여당이 심각한 패배를 당했는데 당시 공화당과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에게 경제통인 김정렴 비서실장, 남덕우 부총리 등을 포함해 경제 각료를 교체하라고 요구했다. 경제 문제가 심각해져서 선거에 패배했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가 나온 것이다.  

대통령은 처음에 말을 안 들었지만, 김정렴 회고록에 따르면 계속 이러한 요구가 나왔고 결국 김정렴은 9년여 만에 비서실장에서 물러났다. 남덕우 등 경제 각료를 다 바꿨다. 

1979년 YH 여성 노동자 신민당 농성 사건과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이 거리에 나오면서 시작된 부마항쟁 역시 유신 체제의 경제 정책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고 이에 따라 유신 체제가 경제 파탄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 유신의 심장을 쏘겠다고 한 것도 부마항쟁 현장에 다녀오면서부터였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 회고록에는 김재규가 경제 문제에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고 나온다. 
 

▲ 박정희 정권은 군사 작전을 하듯이 밀어붙여 수출을 늘렸다. 그 밑바탕에는 노동자들을 말 그대로 쥐어짠 병영 같은 공장이 있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은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YH 여성 노동자들. YH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은 유신 체제의 몰락을 앞당겼다. ⓒ연합뉴스


유신체제에서는 특히 재벌 중심의 팽창 정책이 주조를 이뤘는데, 유신 체제를 지키기 위해 성장 경제를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화학 공업 투자가 일어난 이유도 과도한 성장 위주 정책 때문이었다. 결국 박정희가 1979년 1차 조정을 했지만 이어 정권을 차지한 전두환이 두 차례에 걸쳐서 대대적으로 조정을 했어야 할 정도였다. 1979, 80년에는 중화학 공장 가동률이 40~60%에 머물고 있었다.

박정희의 고도성장정책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피부로 느끼게 했고 너무나도 지독한 투기 광풍에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1978년 한 해에 지가가 48%가 올랐다. 부마항쟁 때 낮에는 학생들이 시위를 이끌었지만 밤에는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샐러리맨도 있었지만, 가지지 못한 자, 당하고 사는 사람들, 소외된 자, 실업자, 저임금 노동자 등 20대 안팎이 시위 대열에 대거 합류했고, 세금 폭탄으로 불만이 컸던 상인들도 가세했다. 김재규는 이를 민란으로 규정했다.  

물론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해에 중동 노동자 송금액이 11억 달러를 넘어서 기록적이었고, 현대의 총 매출액이 36억 달러로, 미국 종합경제지인 <포춘>이 집계하는 기업 총 매출액 순위에서 세계 98위에 올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1978년에는 노풍(통일벼 계열 신품종)벼 피해도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작물 시험장 책임자인 박노풍의 이름을 따서 노풍으로 불린 새 볍씨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새로운 볍씨가 나왔으면 실험 단계를 충분히 거쳐야 하는데 박정희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빨리, 많은 양을 수확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장려했다. 박정희 정권은 12·12선거 나흘전인 12월 8일 이듬해부터는 노풍을 재배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이미 돌아선 농민들의 마음을 붙잡기는 역부족이었다. 농민들은 박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향했다. 

1978년 후반기부터 나빠진 경제는 1979년에 한층 악화되었고, 1980년 경제성장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5.6%(전두환 회고록 등), -5.2% 등으로 나온다. 남한이 1953년 휴전협정 이후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일각에서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것은 잘못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박정희가 얼마나 경제를 잘못 운영하고 있었는지가 막 드러나고 있었던 시점이었는데 김재규가 조급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박정희 유신 체제가 경제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지를 미처 깨닫게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한미 동맹과 촛불 민심 

프레시안 : <현대사 이야기>에는 유신 선포 하루 전 미국 대사관에 관련 사실을 통보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한국에서 미국이 민주주의 수호자라는 인식은 1980년 광주항쟁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바뀐다. 하지만 1960년 4월 혁명이나 1987년 6월 항쟁 때는 미국이 강경 진압을 막았다는(그리하여 민주화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한미 동맹을 절대시하는 측과 자율성을 늘려야 한다는 측이 대립하고 있다. 촛불 민심을 받들어 자주적 외교를 하라는 요구도 적지 않다. 하지만 북핵 위협이 커지면서 남한 정부의 운신 공간이 좁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내 민주화가 대외 관계의 민주화로 나아갈 길은 없을까 

서중석 : 미국은 자신의 국익 범위 내에서 한국의 민주화와 관련한 역할을 했다. 기본적으로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4월 혁명 때만 해도 미국은 4월 18일까지 3.15 부정선거를 용인하고 이승만-이기붕을 인정하는 가운데 한국 문제를 바라봤다. 그런데 4.19 시위를 보면서 달라졌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한반도에 대한 새로운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때가 됐다고 본다.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한반도 문제와 동북아 문제를 풀어가기가 어렵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한말에도 있었고, 그러면서 중립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한반도의 중요성은 해방후 미·소 점령 아래서, 특히 좌우 합작 세력에 의해 강조됐다. 친미파로 미 군정 입법의원 의장이었던 김규식은 '친미 반소'나 '반미 친소'는 모두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그건 자주적 입장을 망각하고 미·소 양국의 조선에 대한 진정한 협조를 방해하는 행위라고 질타했다. 

미 군정에서 민정장관을 지낸 안재홍도 미국과 소련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중심을 바로잡고 '중앙당'으로서의 길을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길만이 통일 독립을 보장하고 국익을 최대화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이 친미파임에도 왜 이런 주장을 했는지, 이들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울리고 있는 때가 지금이라고 본다. 
 

▲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해 새로운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990년을 전후로 전 세계적으로 냉전이 와해되는 가운데.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한반도가 여기서 벗어나려면 전략적 사고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김규식과 안재홍, 여운형 등이 활동할 때만 해도 미·소 두 나라가 가장 중요했다. 그렇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한국은 4강 시대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됐다. 21세기 들어오면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세계 4강으로 부상했는데, 이 4강은 모두 한국을 둘러싸고 있다. 한반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4강시대를 맞게 되었다. 

1990년 전후로 냉전이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은 1992년 중국과 수교한 이후 경제 및 문화 관계가 강화되면서 굉장히 긴밀해졌다. 중국은 어차피 우리와 이웃하면서 여러 측면에서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국가였는데, 이제는 경제적으로 한국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로 부상했다.  

한국 경제의 돌파구로서 남북 관계라든지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진출해 유라시아 시대를 여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한반도가 중·러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북핵 해결도 4강과 머리를 맞대야 한다. 전처럼 한쪽에 따라다니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고, 우경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전쟁국 가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우리는 중국과 협력해 대응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미국은 이러한 일본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일본을 중·러에 대한 대항마로 이용하기 위해서다. 미국은 이런 차원에서 한·일 군사관계도 권고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는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는 것도 불사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길만이 우리의 살길이며 미국에 대해 할 말을 해야 한다.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찾아온 4강 시대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 4강에 대해 자주성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김규식이나 여운형, 안재홍 등이 친미친소를 중요시했던 것은 두 나라로부터 강력한 지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친미친소만이 두 나라로부터 주체성 자주성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두 나라가 경쟁적으로 한반도를 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이 점은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에서 아주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때를 전후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 중국은 1992년 한국과 수교 이후 북한과 관계가 아주 심하게 틀어졌는데 이 때 북한에 대한 원조를 강화하고 김정일이 8년 만에 중국을 방문해 최상의 환영을 받고 장쩌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해 7월 김정일은 평양에서 푸틴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더 놀라운 것은 그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김정일과 포옹을 하고서는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가능성을 속삭였다는 점이다. 미국 못지 않게 북에 적대적이었던 일본은 그해에 갑자기 북한에 대한 식량 원조를 크게 늘리고 2002년 고이즈미 수상의 평양 방문을 진행했다.  

이 나라들이 김정일이 좋아서 그랬을까? 남북 협력시대가 열릴 때 북한에 일정한 관계를 갖는 것이 동아시아 또는 세계 정책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에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동북아 정세는 또다시 경색됐다. 

2000년대에 사는 우리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안목으로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대처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사드 배치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아무런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급작스럽게 배치를 결정했다. 더군다나 탄핵을 받은 상황에서 이른바 사드 '알박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현 문재인 정부가 전쟁 반대를 명확히 선언하고 그에 따르는 노력을 하는 것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과연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비판도 받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4강 시대에 얼마나 자주성,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새로운 관계를 열어가는 데 관건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대해 명료한 인식과 확고한 실천이 요구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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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적폐청산 핵심 ‘서버’ 조사…이를 막는 ‘내부자들’

[단독] 국정원 적폐청산 핵심 ‘서버’ 조사…이를 막는 ‘내부자들’

등록 :2017-10-26 09:15수정 :2017-10-26 10:57

 

기로에 선 국정원 개혁발전위·적폐청산 TF
지휘부 지시·특수활동비 내역 등 
서버 검색, 국정원 직원이 전담
TF 외부위원은 제공 자료만 분석

엉뚱한 자료 보내거나 누락도
검찰 수사 지연·혼선 사례 반발

채동욱·RCS건 부실조사 유발
서버 검색 문제와 관련 있는듯

검찰 “선별 압수수색 허용해야”
국정원 “파견검사 필요따라 접근”
‘쥐를 잡자(MB 잡자) 특공대’, ‘이명박 심판 국민행동본부’ 회원들이 25일 낮 서울 논현동 이명박 전 대통령 집 앞에서 이 전 대통령의 구속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들은 이날부터 학동역 6번 출구 인근에서 단식도 진행한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쥐를 잡자(MB 잡자) 특공대’, ‘이명박 심판 국민행동본부’ 회원들이 25일 낮 서울 논현동 이명박 전 대통령 집 앞에서 이 전 대통령의 구속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들은 이날부터 학동역 6번 출구 인근에서 단식도 진행한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전 정부 국가정보원의 불법 정치공작 관련 각종 문서와 기록이 저장된 ‘서버’ 검색은 국정원 적폐청산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꼽힌다. 그곳에 실행 계획과 지휘부의 지시 사항, 공작 실행 후 보고서, 특수활동비 집행 내역 등 모든 근거 자료들이 보관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 국정원(원장 서훈)이 기밀·보안 등을 이유로 서버 검색을 ‘내부자’인 보안요원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놓고 있어, 자칫 부실 조사와 미완의 개혁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또 국정원이 검찰에 수사의뢰한 사안들의 경우 서버에 보관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본 자료조차 누락한 채 보내지 않거나, 엉뚱한 자료를 보내 수사 지연과 혼선을 초래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는 것으로 25일 파악됐다.

 

 

 
국정원 내부 사정에 정통한 복수의 관계자는 최근 <한겨레> 기자와 만나 “국정원의 적폐와 관련된 모든 문서와 기록들이 저장된 서버 검색은 개혁 작업이 시작된 이래 적폐청산 티에프(TF) 소속 내부 요원들이 전담하고, 조남관 감찰실장을 비롯한 티에프 파견 검사 4명은 이 작업에서 배제돼 있다. 티에프는 이들 ‘내부’ 요원들이 검색해서 가지고 온 자료들을 토대로 분석과 판단을 하는 상황”이라며 “보기에 따라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모양새’로 비칠 수 있다”고 말했다. 조 실장을 포함한 파견 검사 등 티에프 구성원은 국정원법에 따라 ‘직원 신분’으로 적폐청산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서버 검색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정원 대변인실 관계자는 “국정원 감찰실장과 파견 검사가 필요에 따라 국정원 서버에 접근해서 조사하고 있다”며 “서버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건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는 실태를 왜곡하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티에프 상황을 잘 아는 또 다른 관계자는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국정원 개혁위원 일부가 신현수 국정원 기조실장을 만나 ‘파견 검사들이 직접 서버 검색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했지만 그 뒤로 상황 변화가 없다”며 “23일 공개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 개인정보 유출사건, 아르시에스(RCS·원격통제시스템)를 통한 민간인 사찰 사건 등의 조사 결과가 부실한 것도 최초 서버 검색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런 방식은 참여정부에서 활동했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보다 후퇴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안병욱 전 진실위 위원장은 “과거 진실위 때는 마이크로필름 목록에서 키워드 검색으로 우리가 보려 하는 문서를 찾아야 했는데, 그 검색을 할 때마다 진실위 조사관 등이 검색 요원들 옆에 붙어 앉아 제대로 검색하는지를 확인하고 검증했다”며 “그쪽에서 찾아 넘겨준 것만 봐서는 조사와 검증에 한계가 명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우려는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가 ‘이달 말’까지로 활동 시한을 정하면서 더욱 커지고 있다. 이 관계자는 “개혁위는 이달 말까지 15개 청산 과제 대부분의 결론을 내고, 그때까지 처리 못 한 사안은 감찰실에 넘기기로 했다”며 “그렇게 되면 현재 티에프에는 검사 4명만 남아 ‘고립된 섬’처럼 되지 않겠느냐”고 우려했다.

 

검찰에서도 국정원의 부실한 자료 이첩 등으로 불만이 누적되면서 검사들이 선별적으로라도 국정원 서버를 압수수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수사에 필요한 디테일한 자료가 전혀 오지 않고 있다. ‘우리는 던지는 거로 임무를 다했으니, 나머지는 검찰이 재주껏 알아서 해보라’는 식이다. 국정원의 태도를 보면 ‘이 사람들이 개혁 의지가 있나’ 의심까지 하게 된다”고 말했다.

 

검찰은 국정원의 조직 보호 논리가 작동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이버 댓글 외곽팀의 경우 수사의뢰를 하면서 거기 투입된 특별활동비 예산과 집행 내역 등을 기록한 원장과 전표 없이 개별 영수증만 ‘달랑’ 보내왔다고 한다. 또 공작에 관여한 것으로 파악된 직원이나 관련자 명단에서 이름을 가리거나 지우고 보낸 사례도 있다고 한다. 검찰의 다른 관계자도 “모든 공작에는 시행계획과 지휘서신, 사후 보고서 등이 있게 마련인데 그런 걸 보내온 적이 없다. ‘자료를 왜 안 보내느냐’고 따지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시간 끌다가 대놓고 엉뚱한 자료를 보내오는 것도 봤다”고 했다.

 

검찰은 수사가 지체되고, 수사팀 규모를 계속해서 키워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는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2013년 댓글 수사 때도 심리전단 명단을 (국정원이) 넘겨주지 않아 수사가 필요 이상으로 장기화됐었다”며 “검사들이 수사상 필요한 자료와 기록을 서버에서 찾을 수 있도록 선별적인 압수수색이라도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16096.html?_fr=mt1#csidxa95e8b8f66d8e88b031bf2c6cf0e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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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뒤, 방사능 수산물이 식탁에 오를 수 있다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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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7/10/26 11:03
  • 수정일
    2017/10/26 11:03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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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 수산물 규제 조치에 대한 WTO의 판단은 '부정적'...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17.10.25 21:02l최종 업데이트 17.10.25 21:02l

 

 시민방사능감시센터,서울방사능안전급식연대 등 환경단체 회원들이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정문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산 수산물 수입제한 조치와 관련해 진행중인 세계무역기구 (WTO)분쟁의 결과가 패소할것이라는 전망이 짙어지고 있다"며 정부의 긴급한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  시민방사능감시센터,서울방사능안전급식연대 등 환경단체 회원들이 지난 9월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정문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산 수산물 수입제한 조치와 관련해 진행중인 세계무역기구 (WTO)분쟁의 결과가 패소할것이라는 전망이 짙어지고 있다"며 정부의 긴급한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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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한국 정부가 WTO(세계무역기구)로부터 '일본 수산물 WTO 분쟁 패널 최종보고서'를 송부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보고서는 WTO 규정에 따라 공개되지 않았지만, 내용은 긍정적이지 않으며 패소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2013년 9월 일본산 수산물 수입규제 조치로 그나마 확보했던 먹거리 안전에 다시 구멍이 뚫리게 생겼다.

전혀 뜻밖의 결과는 아니다. 2015년 일본 정부가 WTO 제소 절차를 준비하던 시점부터 현재까지 정부가 제대로 된 대응을 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미량의 방사능은 먹어도 괜찮다는 태도를 가진 원자력공학자를 '방사능안전관리 민간전문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위촉해 대응해 왔다. 

이 위원회의 활동 내용은 시민사회에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발표한 자료를 통해 어느정도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민간전문위원회는 단 두 차례의 현지조사만으로 해체했다. 현지 조사 내용도 후쿠시마 주변의 수산물 7건과 표층수 4건에 불과했다. 

후쿠시마 수산물 이제는 안전한가?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6년이 넘고 있다. 물론 지금은 사고 초기처럼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유출되는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수습이 완료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후쿠시마 원전 안에는 녹아내린 핵연료 냉각을 위해 원자로에 쏟아 부어 생겨난 방사능 오염수를 보관 중이다. 지난 7월 도쿄전력 회장은 탱크에 보관 중인 약 78톤의 오염수를 바다로 방출하겠다고 말했다가 일본 어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입장을 번복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녹아내린 핵연료를 수습할 방안을 아직 찾지 못했고, 언제 완료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2014년 9월 도쿄전력은 하루에 스트론튬90이 약 48억 베크렐, 세슘137이 20억 베크렐이 바다에 방류되고 있다고 밝혔다. 박완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6년 국정감사에서 일본 후생노동성 홈페이지에 게시된 일본산수산물 방사능검사 결과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수산물 검사건 총 1만 8868건 중 1976건(10.5%)에서 세슘-134와 세슘-137이 검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방사성물질이 검출된 수산물 중 40%인 803건이 후쿠시마현이 원산지였다. 또한 방사성물질이 검출되는 수산물의 원산지가 우리가 수입금지규제 조치를 취하고 있는 후쿠시마 주변 8개현에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 주있다. 특히 후쿠시마현에서 세슘 기준치인 100Bq/kg을 초과한 경우가 7건이었는데, 최대 160 Bq/kg까지 방사성 물질 세슘이 검출되기도 했다.

일본산 수산물 수입규제의 배경

사실 후쿠시마 사고 직후 한국정부는 일본산 수산물을 비롯한 식품과 공산품 등에 대해 제대로 된 방사능 검사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만큼 엄격한 규제를 취하지 못했다. 검사 인력과 장비는 부족했고, 사고 이전의 규제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했다. 그러다 보니 일본산 수산물 등에서 방사성물질이 검출되어도 기준치 미만이라는 이유로 전량 시중에 유통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은 일본산만 아니라 국내 유통 중인 수산물에 대한 전체적인 불신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 수산물의 특성상 원산지 표기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둔갑하는 게 쉽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또한 방사성물질의 오염 여부는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시민들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결국 수산물 기피 현상까지 벌어졌다. 소비자뿐 아니라, 어민, 상인들까지 일본산 수산물 수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정부는 이러한 국민들의 요구를 반영해 2013년 9월 후쿠시마 등 주변 8개현에 대한 수산물 수입을 금지하고, 기준치 미만이라도 방사성물질이 검출될 경우 추가 핵종(스트론튬, 플루토늄)에 대한 검사를 요구하는 규제조치를 실시하게 됐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국내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는 가운데 23일 오후 부산시 기장군 고리원전 앞바다에서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노후 원전 수명연장 반대 및 폐쇄, 원전 건설 반대 등을 요구하며 고무보트로 해상시위를 벌이고 있다.
▲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국내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는 가운데 지난 2011년 부산시 기장군 고리원전 앞바다에서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노후 원전 수명연장 반대 및 폐쇄, 원전 건설 반대 등을 요구하며 고무보트로 해상시위를 벌이고 있다.
ⓒ 환경운동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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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 수산물 수입규제 이후 

일본산 수산물의 수입규제 조치는 수산물의 방사능 불안을 해소하는 데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규제 조치 이후 4년이 지나가는 지금 국내 유통 중인 수산물에 대한 기피 현상은 어느 정도 사라졌다. 

실제 일본산 수산물의 수입 및 검사 현황을 보면 상당히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규제 조치 시행 전까지 2년 6개월의 기간 동안 총 131건에서 방사성물질이 검출된 수산물이 있었지만 단 1건도 반송 없이 시중에 유통됐다. 하지만 규제 조치 시행 이후 지난 2014년 7월까지 총 5건에서 방사성물질이 검출되었고, 모두 반송 처리 되었다. 

방사성물질 검출 건수도 대폭 줄었지만, 실제 검출된 수산물들이 시중에 유통되지 않고 반송된 것이다. 이는 일본의 수산물에서 이제 더 이상 방사성물질이 검출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입 업자들이 방사성 물질이 검출된 수산물을 들여오지 않을 뿐이다. 

왜 일본은 한국을 제소상대로 택했을까?

후쿠시마 사고 이후 중국, 러시아, 대만 등 일본과 인접해 있는 나라들은 각각 일본산 농수축산물 등에 대해 다양한 규제를 실시하고 있다. 생산지, 품목 등에 따라 수입금지, 방사성물질검사증명서, 산지증명서, 전수검사, 샘플검사 등 각국의 상황을 고려하여 다양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일본과 거리가 먼 미국과 EU에서도 일부수입금지, 검사증명서 등의 요구를 하고 있다. 

일본산에 대해 한국만이 유별나게 조치를 하고 것이 아니다. 일본산 수산물 전체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지 않으며, 점점 수입량도 늘어 후쿠시마 사고 이전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한국 정부만 유독 WTO 제소 상대로 삼았다. 한국 정부의 미온적 대처와 외교적 무능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지난 정부는 시민사회를 배제한 채 원자력 전문가들을 앞세워 대응을 진행했다. 방사능 기준치 이하니,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일본의 방사능 오염 조사를 제대로 했을지 의문이다. 

심지어 지난 2015년엔 일본 정부와의 관계 개선의 카드로 일본산 수산물 수입 금지 해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관련 기사 : '일본산 수산물' 실상 이런데, 그냥 먹으라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등한시한 정부의 안일함과 국내 원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될까 전전긍긍하는 원자력 전문가들이 '사실상 WTO 패소'라는 결과를 낳은 것 아닐까. 

먹거리 안전을 지키는 것은 정부의 기본 임무

일본산 수산물 WTO 분쟁이 끝나지 않았다. 내년 1월 최종 결과가 공개되면 항소할 수 있고, 2019년에나 그 결과에 대한 이행을 하게 된다. 남은 기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또 현재의 결과에 대해 어떤 대책을 마련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정부는 계속 이 사안이 비공개라는 이유로 국민들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공개할 수 없는 문서를 공개하는 것 자체가 아니다. 지금까지 정부가 대처해온 방식의 문제를 인정하고, 좀 더 적극적인 대응을 하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불신을 해소하고, 최소한의 알권리를 보장하라는 거다. 외교적 대응은 하더라도 대책 마련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민관합동대응기구 등을 통해 소통하고 지혜를 모으는 것도 필요하다. 정부는 지금까지 대응전략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대응 방안을 시급히 내놓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안재훈씨는 환경운동연합 탈핵팀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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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세는 한국전쟁 직전과 비슷

현 정세는 한국전쟁 직전과 비슷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10/26 [05:56]  최종편집: ⓒ 자주시보
 
 

 

▲2017년 10월 말 한반도 주변 해역에 여느 한 국가의 무력과 맞먹는 항공모함이 3척이나 오게 된다. 미국이 전쟁으로 북의 핵보유를 막으려고 해도 이제 시간이 몇 달 남지 않았다. 미국은 전쟁이나 굴복이냐 기로에 서서 북에 대한 불의의 타격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한미일 무력은 물론 나토무력까지 끌어들여 16일부터 한반도 동, 서해에서 사상최대 규모의 연합해상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최대 절정의 시기엔 레이건 호, 루즈벨트호 두 척의 항공모함과 미시건호  등 핵잠수함 3척에 이지스 구축함 등 각종 함선 40여척, B-1B 랜서 초음속 폭격기, F-22 랩터 스텔스 전폭기 등 미국의 핵심 전략자산들이 총동원되며 F-16 등 한국과 일본의 공군력도 동원된다.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토의 함정과 전투기들도 이번 연합해상훈련에 참가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는 북이 그렇게 극렬 반발했던 키리졸브-독수리 한미합동군사훈련보다도 더 방대한 규모의 무력동원훈련이다. 

 

훈련 내용과 성격도 심각하다. 구체적인 내용은 미국에서 밝히지 않고 있지만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종합해보면 사이버전을 결합한 참수작전과 북 해병들의 상륙작전 저지 및 대북침투훈련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23일엔 미국 민간이 피난훈련까지 진행하여 우리 국민들 속에서 정말 미국이 북과 전쟁을 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하였다.

 

이중에 가장 위험한 내용이 바로 참수작전이다. 이미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한 북과 전면전은 미국에게 부담스런 일이 되었다. 북 수뇌부의 동선을 위성감시와 항공정찰, 사이버추적 등으로 파악한 후 원형공산오차 1-2미터급의 초정밀타격이 가능한 순항미사일 등을 동원하여 수뇌부 제거 공격을 단행하거나 그라울러와 같은 전자정찰기를 동원하여 북의 레이더망을 무력화시킨 후 미 데브그루와 같은 참수작전 전문 특수부대원들을 고공침투시켜 북 수뇌부를 제거하고 헬기 등을 동원하여 퇴각시키는 시나리오를 이미 짜 놓고 있으며 이를 이번에 집중 연습하는 훈련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말도 되지 않지만 미국은 수령중심국가라서 북의 수뇌부만 제거하면 사실상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미국의 기도에 대해 북의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와 같은 단체는 성명을 통해 "일단 사이버전과 배합된 '참수작전' 강행 기도(시도)가 포착되면 그 즉시 우리 식의 무자비한 선제타격전이 개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의 '북침핵전쟁연습반대 전민족비상대책위원회'도 "예상 밖의 시각에 상상밖의 타격에 직면하게 된다는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사전 경고나 특별한 움직임이 없이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쳐버리겠다는 것이다. 

 

실제 북의 노동신문을 보면 이런 엄청난 규모의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의 미국 주도 연합해상훈련이 보름여 진행되고 있는데도 그에 대한 비난이 거의 없다. 대신 우리민족끼니나 조선의오늘과 같은 대외언론을 통해서 연일 강경한 성명들을 발표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한국전쟁 직전의 상황과 매우 흡사한 것이어서 심각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1950년 6.25 전쟁 얼마 전부터 미국은 미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켰다. 물론 장교들은 그대로 두어 언제든 미군을 당장 확대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북과 러시아 등은 당시 유엔회의 등에서 미군 맥아더가 채병덕 국방장관과 같은 한국의 군 수뇌부를 일본으로 불러다가 전쟁 날짜까지 확정하고 전쟁준비를 은밀히 진행하였다고 첩보자료를 폭로하며 미국의 북침전쟁에 기도에 대해 맹비난을 가했다. 이제 막 해방을 이룬 북이어서 대외적으로 미국의 전쟁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지만 특별한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 한국전쟁 당시 탱크를 앞세우고 전격적인 공격으로 단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김일성 주석은 미국의 공격에 따른 전쟁을 예견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북은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그런 러시아 등의 지적을 무시해버린채 은밀한 움직임을 이어갔으며 북의 김일성 주석은 '이제 전쟁은 피치 못할 일'이라고 판단하자, 은밀히 군사적 대응 준비를 진행시켰다는 것이 북의 주장이다.

모내기 농촌지원을 명분으로 대규모 후방병력을 휴전선 인근으로 몰래 이동시키는 등 만반의 준비를 신속하게 준비하였다고 한다.

하여 북과 러시아가 유엔 등에서 폭로한 대로 6월에 전쟁이 터지자 김일성 주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 전선에서 반돌격 명령을 내려 순식간에 파죽지세로 남측으로 밀고 내려왔다는 것이 북의 주장이다. 실제 단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북 주민들은 열심히 모내기를 하고 공장에 나가 일을 하였지 전쟁이 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남한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미군들이 사상최대규모의 훈련을 하고 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미국이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대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 최고 강성 반북주의자이자인 펜스 부통령까지 한반도 핵문제는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갑자기 대화타령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북도 노동신문의 경우도 이번 훈련에 대한 간단한 비판 기사 몇 개뿐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얼마전 북미 사이에 물밑접촉이 진행되고 있고 뭔가 진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기사를 발표한 바 있다.

 

▲ 트럼프의 '화염과 분노', '이북 완전파괴' 등의 발언을 내놓자 극렬한 반미시위에 나선 북 주민들 

 

그 기사가 나간 후 본격적으로 미군 훈련이 진행되었고 북의 대외사이트에서도 본격적으로 연일 강성 반발 기사들이 소개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신문. 조선중앙텔레비젼보도 등 북의 대내 언론들은 이 연합해상훈련에 대해 특별한 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여기서는 북의 북부지구철길건설, 수력발전소건설 등 경제건설모범단위 소개와 모란봉 악단 등이 참여하는 음악무용종합공연 전국 순회공연 소식들을 주로 보도하고 있다.

 

사실, 미국에게는 북의 완전한 핵무장을 전쟁으로 막을 수 있는 시간은 이제 몇달 남지 않았다. 폼페오 미 CIA국장이 향후 몇 달 안에 북이 완전한 핵보유국이 될 것이라고 발표한 것도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정말 전쟁을 결심했다면 오히려 미국 내에서 대화타령이 더 많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불의의 타격을 해야 가장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행동이 뒤따르지 않은 말로만의 대화타령은 오히려 더 위험한 신호일 수도 있다고 본다.

 

트럼프 대통령이 곧 한중일 순방에 나선다. 그의 동북아 순방에 맞추어 중동에서 활동하던 니미츠 항공모함까지 한반도 주변 수역으로 오게 된다. 이미 기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 주변 서태평양지대에 미 항공모함 3척이 전개되는 셈이다. 항공모함 한 척이면 평범한 나라의 경우 나라의 전체 군사력과 맞먹는다. 핵무기까지 사용한다면 그 이상이 된다. 그런 엄청난 전략자산이 3척이나 한반도 주변에 오게 되는 것이다.

핵잠수함은 이 항공모함보다 더 무서운 전략자산이다. 여기에도 최대 150여발의 핵순항미사일 등이 장착되는데 그게 3척이나 한반도 주변 핵역으로 집결하여 현재 대북타격훈련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 미국 공격용핵잠 투싼이 조지워싱턴 항모를 호위하며 훈련에 임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북미사이의 전쟁은 언제든 발발할 수 있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너무나 평화로운 상황에서 갑자기 터질 우려가 높다. 

 

물론 한국전쟁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북의 군사력이 강해졌기 때문에 미국도 쉽게 북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전쟁이 꼭 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는 것이며 실제 흐름을 면밀히 살펴보면 우려할 점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북의 완전한 핵보유는 미국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절대로 두고 볼 수 없는 것이 북의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다. 

 

문재인 대통령과 관련 부처는 이점을 염두에 두고 불의의 전쟁 발발을 막기 위해 모든 지혜를 다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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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퍽 늘었는데 점점 정기후원이 줄어들어 후원히 절실한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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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외교관 “평양 시민들, 미국과 전쟁에서 승리 확신”

 
피슬러 전 SDC 평양사무소장 “현지 주민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적극 지지, 자신감”
▲사진 : 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평양 시민들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토마스 피슬러 전 스위스 국제개발협력처 평양사무소장이 밝혔다.

스위스 국제개발협력처(SDC. Swiss Agency for Development and Cooperation)는 스위스 외무부 산하기구로 개발도상국과의 포괄적 파트너십 형성을 위한 ‘협력’사업을 담당하고 있으며 피슬러 전 소장은 지난 2013년부터 지난달까지 4년 동안 평양에서 근무한 외교관이다. 그는 지난 23일 미국의소리(VOA)와 전화인터뷰에서 “현지 주민들이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적극 지지하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인터뷰 요지를 소개한다. 원문은 존칭으로 쓰였지만 평어체로 한다.

- 4년 전과 비교해 북한의 가장 큰 변화는 뭐라고 보나?

“지방은 눈에 띄는 변화가 없는 반면 평양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교통량이 많이 증가했고 건물도 많이 들어섰다. 사회 기반 시설도 향상됐고. 휴대전화 사용도 많이 늘어나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4년 전엔 없던 전기자전거가 지금은 평양 거리의 자전거 5대당 1대 꼴로 크게 늘었다. 한대 당 300달러 정도 되는 걸 고려할 때 북한 가정의 지출이 많이 증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북한의 전력 사정은 좀 나아졌나?

“평양과 평양 외곽의 전력 사정은 최근 상당히 좋아졌다. 지난 1년 동안 정전이 거의 없었다고 할 정도다. 외교 공관에서 정전은 1년에 5~10차례 정도, 각각 10분쯤 있었는데, 전력 부족 때문이라기보다 전기 보수 관리 차원에서 전기를 차단한 것으로 보였다. 2014년과 2015년만 해도 30분이나 1시간에 한 번 정전이 됐다. 정전은 20분에서 길게는 1시간 정도 지속됐고. 하루에 총 8시간 정도는 전기가 끊길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 이와 비교하면 현재 전력 상황은 크게 나아진 거다.”

- 평양 외에 지방도 자유롭게 다니실 수 있었나?

“네. 아무 문제없었다. 필요하다면 한 달에 몇 차례고 방문할 수도 있었다. 일과 관련해 자유롭게 갈 수 있었고 허가도 항상 나왔다.”

- 지방을 방문하면 주로 어떤 일을 했나? 현지 주민들과 대화도 나눌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저희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 현장을 둘러보고 앞으로 어떤 사업을 어느 장소에서 진행할 수 있을지 살펴봤다. 지방 주민들하고도 제약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지방 주민들은 저희를 매우 반겨줬다.”

- 접근할 수 없던 지역도 있었나?

“저를 포함해 외국인들이 갈 수 없는 지역은 자강도 뿐이었다. 국가 안보상 이유라고 들었다.”

- 스위스 국제개발협력처는 구체적으로 어떤 대북 지원 사업을 했나?

“식수 위생사업과 토양 침식을 막기 위한 산림녹화 산업, 경사지 관리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또 예산의 상당 부분은 유엔 세계식량계획을 통해 분유를 전달하는 데 사용된다.”

- 북한 당국은 SDC의 대북 지원 활동에 협조적이었나?

“매우 협조적이었다. 저희는 23년 동안 평양에 정부사무소를 두고 인도주의 활동을 해왔는데 그 동안 훌륭한 협력 관계가 형성됐다. 인민위원회나 정부 부처 관계자들뿐 아니라 고위층 등으로부터도 필요한 모든 지원을 받고 있다. 이것은 상호 신뢰와 투명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저희는 사업 현장에 언제든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고 앞으로 사업을 진행할 곳까지 미리 살펴볼 수 있다.”

- 북한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을 꼽는다면.

“평양 국제개발협력처 사무실에 15명 정도의 북한 직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김정은 위원장과 국가에 절대적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 제가 근무했던 미얀마 등 다른 여러 나라에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의문들이 풀리지 않는 어려움도 컸다. 북한에서 4년이나 생활했지만 아직도 북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아직 의문들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 북한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직후 현지 분위기는 어땠나? 핵실험 영향으로 백두산 화산이 폭발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없었나?

“주민들은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요구 받는 것 같다. 만약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그들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백두산 화산 폭발 가능성에 대해선 전혀 우려하고 있지 않았다.”

- 김정은 위원장의 행적과 정책을 볼 때 그를 어떤 지도자로 평가하나?

“김정은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든 것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는 답으로 대신하겠다.”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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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검색에서 삭제된 MB아들 이시형

‘청탁 받고 비판 기사 숨긴 네이버’ 이시형 뉴스가 쏟아지는데도 인물정보 없어
 
임병도 | 2017-10-24 08:41:4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네이버 검색창에 역대 대통령 이름을 입력한 뒤 나온 인물 정보. 다른 대통령은 모두 가족 정보가 나오지만, 유독 MB만 아들과 딸의 정보가 없다.

 

네이버 검색창에 역대 대통령의 이름을 입력하면 인물 정보가 나옵니다. 대통령의 출생과 사망 일자, 가족, 학력, 수상 기록 등의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역대 대통령들과 다르게 ‘이명박’이라고 검색하고 나온 인물 정보에는 가족으로 ‘배우자 김윤옥’씨만 나옵니다.

오래전 작고한 최규하 전 대통령조차 배우자와 아들 이름이 정확하게 보입니다. 박정희도 ‘배우자 육영수, 딸 박근혜, 딸 박근령, 아들 박지만’이라고 나옵니다. 박근혜씨도 ‘아버지 박정희, 어머니 육영수, 동생 박근령, 동생 박지만’이라고 가족 정보를 모두 공개합니다.

전두환, 노태우는 물론이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인물 정보에도 배우자와 아들, 딸의 정보가 나오지만 유독 ‘이명박’ 인물정보에는 아들 이시형씨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나오지만, 네이버에는 삭제된 MB 아들 이시형’

 

▲포털 다음과 네이버 검색창에 ‘이명박’을 입력하고 나온 인물 정보. 다음에는 가족 정보가 나오지만, 네이버에는 배우자 김윤옥씨만 보인다.

 

대한민국 포털 사이트에서 원래부터 MB아들 이시형을 제외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포털 다음’에서 이명박을 검색하면 ‘배우자 김윤옥, 아들 이시형, 딸 이주연, 딸 이승연, 딸 이수연’이라는 가족 정보가 모두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시형씨가 MB의 숨겨진 아들도 아닌데도 네이버가 가족 정보를 제외하고 있는 점은 참으로 이상해 보입니다.

네이버가 인물 정보에서 아들 이시형씨를 제외하고 있다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포털 사이트에 ‘이시형’을 검색한 결과, 다음은 동명이인 정보 속에 기업인 이시형이라고 MB 아들 정보가 나오지만, 네이버에는 정보가 없다.

 

다음에서 ‘이시형’을 검색하면 ‘기업인 이시형, 의학박사 이시형, 공무원 이시형’이라는 동명이인의 검색 결과를 모두 보여줍니다. 기업인 이시형을 클릭하면 MB의 아들 이시형의 인물정보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네이버에서 ‘이시형’을 검색하면 ‘의학박사 이시형’씨가 나오고 아래에 ‘공무원 이시형, 뮤지컬배우 이시형’이라는 동명이인의 정보가 보여집니다. MB의 아들 이시형씨는 아예 검색 결과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시형 뉴스가 쏟아지는데도 인물정보가 없다니’

 

▲네이버 뉴스에는 수천 건이 넘는 이시형씨 관련 기사가 올라와 있다.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나 관련 뉴스가 별로 없다면 인물정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시형씨는 다스는 물론이고, 과거 내곡동 사저 논란 등으로 뉴스에 계속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특히 이시형씨는 ‘이명박 아들 이시형’, ‘다스 실소유주’, ‘이명박 아들’ 등 MB와 다스 관련 연관 검색어는 물론이고, 수백 건 이상의 관련 뉴스가 보도되고 있어 국민들이 더욱 정보를 필요로 하는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형씨의 인물정보가 없다는 점은 네이버가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는 의혹을 받을 만합니다.


‘청탁 받고 비판 기사 숨긴 네이버’

 

▲네이버 한성숙 대표 이름으로 올라 온 기사 배치 관련 공식 사과문

 

네이버는 그동안 검색어 조작 및 삭제, 기사 배치 조작 등의 의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네이버는 조작은 절대 없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지난 20일 네이버 한성숙 대표는 청탁을 받고 뉴스면 배치를 조작했다며 ‘공식 사과문’을 게재했습니다. (관련기사:네이버, 축구연맹 청탁받고 ‘비판 기사’ 숨겼다)

네이버는 “감사 결과, 네이버스포츠 담당자가 외부의 기사 재배열 요청을 일부 받아들인 적이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며 “앞으로 이러한 의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당 조직의 편제 및 기사 배열 방식에 대해 다양한 보완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네이버의 말을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2012년 내곡동 사저 비리가 나왔을 때도 네이버에 ‘MB아들 이시형’이 나오지 않아 지적됐지만, 아직도 똑같기 때문입니다.

2016년 국감에 나온 자료를 보면 네이버의 인터넷 뉴스 이용 점유율은 55.4%로 국내 1위입니다. 기성 언론 매체 등을 포함한 130여 개 사이트의 점유율을 합산한 것보다 높습니다. 국내 여론 영향력 점유율도 18.1%로 지상파 3사는 물론이고 주요 언론을 모두 제친 1위였습니다.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네이버가 제대로 정보를 보여주지 않고 숨긴다면, 그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받을 수 있습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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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서기 전에…“전교조 교사 한 달 내 조치” 징계 속도전

[단독]새 정부 서기 전에…“전교조 교사 한 달 내 조치” 징계 속도전

조미덥·남지원 기자 zorro@kyunghyang.com
입력 : 2017.10.25 06:00:02 수정 : 2017.10.25 06:01:00

 

ㆍ황교안 ‘법외노조 알 박기’ 어떻게 했나
ㆍ교육부, 진보 성향 교육감 전임 허가 ‘직권 취소’ 통보
ㆍ전교조 반발…대선 교육 이슈 부각시켜 ‘이념전’ 유도

[단독]새 정부 서기 전에…“전교조 교사 한 달 내 조치” 징계 속도전

황교안 전 대통령 권한대행(60·사진)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징계 지시와 교육부의 이행은 5·9 대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두고 속도전으로 진행됐다. 당시는 박근혜 정부의 전교조 법외노조 결정에 대한 행정소송이 진행돼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황 전 권한대행 지시 이후 교육부와 전교조의 갈등이 불거지고 각 대선 주자들은 전교조 법외노조에 대한 입장을 내놓으면서, 이념적 이슈가 대선의 전면에 부각되기도 했다.

■ 대선 전 전교조 징계 속도전 

지난 대선을 앞두고 각 시·도교육청은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에 대해서 “대선 후 전교조 법외노조 결정이 재검토될 가능성이 크다. 차기 정권에서 다뤄야 한다”(조희연 서울시교육감 3월29일 기자회견)는 입장이 다수였다. 교육부에서도 정권 교체가 유력한 상황에서 전교조 전임자에 대한 조치를 대선 뒤로 미루자는 기류가 강했다. 

하지만 황 전 권한대행이 지난 3월30일 국정현안 관계장관회의에서 “법외노조인 전교조 전임교사에 대한 일부 교육청의 휴직 허가는 불법이 명백한 만큼, 신속·단호하고 분명하게 조치할 것”을 지시한 후 상황이 급변했다. 4월 한 달 동안 빠른 속도로 징계가 진행됐다.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이 24일 경향신문에 공개한 온나라 국정관리시스템 자료에 따르면, 교육부는 지난 4월 총리실에 황 전 권한대행 지시 이후 전교조 전임자 16명에 대해 허가 취소를 요구하거나 중징계를 진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진보 성향 교육감이 있는 교육청에 대해선 전임 허가에 대한 직권 취소를 통보했다. 전교조 전임자에게 연차를 허가한 학교장에 신분상 조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전교조 관계자는 “교육부가 압박을 넣기 전엔 전임 허가를 내주려던 전남·세종 교육청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서울의 경우 교육부가 전임 허가를 직권취소했다”며 “기존 전임자는 다수가 직위해제되고, 시·도교육청 징계위에 회부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대선 후 정권이 바뀌면서 각 교육청에서 징계가 실제 이뤄진 곳은 없다”고 했다. 

교육부는 황 전 권한대행의 ‘전교조에 예산 지원 중지’(4월6일 국정현안 관계장관회의) 지시에 대해서도 “4월14일 각 시·도교육청에 관련 법령에 따른 엄정한 예산 집행을 요구했다”고 총리실에 보고했다. 

■ 대선을 전교조 이념전으로 

교육부의 징계 속도전에 전교조가 강력히 반발하면서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는 대선의 교육 분야 핵심 이슈로 부각됐다. 황 전 권한대행이 전교조 문제를 이슈 중심으로 만들어 대선을 이념전으로 이끈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대선 주자들은 전교조 문제를 놓고 엇갈렸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캠프는 당시 “대법원의 판결을 지켜보겠다”며 “국제사회가 전교조 합법화를 요구하고 있다. 노동3권을 보장한 헌법과 노동조합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교조 합법화에 가까운 의견이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면서 입장 표명은 유보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교원노조법 개정, 법외노조 통보 취소 등의 방법으로 전교조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전교조에 대한 비판적 논조를 확고히 한 것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였다. 홍 후보는 4월9일 언론 인터뷰에서 “사회 좌편향을 이끄는 전교조를 반드시 응징하겠다”면서 전교조와 전면전을 선언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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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찰청, 자주시보 김병길 대표를 보안법 피의자로 조사

대구경찰청, 자주시보 김병길 대표를 보안법 피의자로 조사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10/24 [22:23]  최종편집: ⓒ 자주시보
 
 

 

[↑2015년 7월 1일 수원지방검찰청 앞에서 박창숙 통일인사 구속규탄 기자회견에서 열열하게 박근혜 정권과 국가보안법을 규탄하는 김병길 대표]

 

▲ 자주시보 자원봉사 활동을 했던 박창숙 씨 국가보안법 구속 규탄 집회에서 보안법을 규탄하는 김병길 대표     © 자주시보

 

▲ 2015년 8.15민족대회 행사에 참여한 자주시보 김병길 대표, 8월 1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자택 압수수색을 받았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24일 대구경찰청 보안수사대가 대구 모처 보수대 조사실에서 본지 김병길 대표를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 위반혐의로 약 7시간 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진행했다.

 

제주도에서 구속된 필명 '홍익인간' 인터넷 논객에게 꾸준히 자주시보 기사를 우편으로 보내 준 점을 문제 삼아 지난 8월 1일 김병길 대표의 집을 전격 압수수색했던 보수대에서 관련 조사를 진행한 것이다.

 

당시 제주도 보안수사대에서 압수수색을 나왔다고 했고 압수수색 결과 집에서 특별히 나온 것이 없었으며 컴퓨터 하드만 복사해 갔는데 컴퓨터에도 인터넷에 소개된 노동신문 중에 미처 다 보지 못한 것들을 후에 보려고 저장해 둔 것이 좀 있었을 뿐이었고 제주 보안수사대 수사관들도 '홍익인간' 사건과 관련하여 알아볼 것이 있어서 그런다.'며 '별 문제 아니라고 했다.'해서 압수수색 후 본지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특별한 주목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돌연 태도를 바꿔 여든이 훨씬 넘은 본지 김병길 대표를 북에 동조한 것으로 보이는 한호석 소장 글 등을 옥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포했고 몇 년 전 서프라이즈에도 몇 편 올린 것을 확인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하겠다며 7시간이 음침한 보수대 사무실에 억류하고 온갖 질문과 압박을 가했다고 한다.

 

김병길 대표는 "한호석 소장 글 등 자주시보의 글이 그렇게 문제가 되면 자주시보에 올리지 못하게 해야지 합법적인 언론사로 등록된 자주시보의 기사가 보안법에 위반이 되는지 안 되는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그런 글을 서 너명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준 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라며 수사관들에게 당당히 맞섰다고 말했다.

 

참고로 본지 자원봉사활동을 해온 박창숙 씨 보안법 재판에서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기사를 페북에 게시하고 여기저기 퍼트린 혐의에 대해서 재판부는 무죄를 판결한 바 있다.

 

본지 김병길 대표를 참고인이 아닌 피의자로 조사를 시작한 이상 본지에서는 이를 비상사건화 하고 적극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당장 자문변호인단과 협의결과 앞으로 경찰 조사는 일절 대답하지 않고 묵비를 행사할 것을 김병길 대표에게 권하였고 대구지역 민변과 연계를 취해 담당 변호사 선임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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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형'도 모자란 박근혜, 용서받을 방법은 이것뿐이다

[송경동 시인이 띄우는 편지] 반성 없는 박근혜의 '인권' 운운,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 마주하라

17.10.24 19:59l최종 업데이트 17.10.24 20:52l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 연장 후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1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 연장 후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1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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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신의 새로운 법무팀인 국제법률 자문회사 MH그룹이 CNN을 통해 '당신(박근혜 전 대통령)의 감옥 생활에 심각한 인권 침해가 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고 한다. '더럽고 차가운 감방에 살고 있으며, 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불을 계속 켜놓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고, '침대도 없이 딱딱한 바닥에서 자고 있다'는 내용 등이다. 유엔 인권위원회에 위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할 예정이라고도 했다. 

법무부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당신은 일반인 수용자 열 명이 쓰는 공간에 해당하는 10.08㎡, 3.2평의 독실에 거주하는 '특혜수용자'로 '바닥 난방 시설과 텔레비전, 관물대, 수세식 화장실이 구비된 적정 면적의 수용실에 수용돼 있다.', '충분한 진료 기회와 운동 기회를 부여받고 있다'고 하고 '계속 불을 켜놓고 있다'는 인권 침해 제기에 대해서는 '수용자 관리와 보호를 위해 (야간에도) 수용실 내 전등 3개 가운데 1개를 켜놓고 있으며, 밝기는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정도로만 조도를 조절하고 있'기에 '수면에 불편함을 끼칠 정도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제대로 된 침대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국내 모든 수용자들은 침대 대신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도록 돼 있'고 당연히 매트리스가 제공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인권 침해' 운운한 박근혜, 감옥 인권에 대한 직무유기 증거일 뿐

 

가까운 2011년 11월 초순 경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기획 혐의로 부산구치소 독방 생활을 경험했기에 법무부의 설명이 95% 정도는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5%를 말하라면 수면용 전등의 조도가 좀 더 낮아야 편히 잠을 청할 수 있다는 정도이다. 물론 내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법무부의 설명대로 당신 방 안의 조도가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정도'로 '수면에 불편함을 끼칠 정도는 아니'라면 아마도 당신은 대한민국 사람치고는 가장 쾌적하고 아늑한 감옥 생활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감옥에서의 인권 침해 운운은 혹여 타국의 기준이라면 모를까, 대한민국 내에서는 투정 같은 것이다. 만약 서울구치소가 '더럽고 차가운 감방'이라면 그건 당신이 대통령으로 있을 당시 감옥 인권에 대한 관심과 책임이 부재했다는 직무유기 증거 중 하나일 뿐. 전국의 구치소 중 가장 깨끗하고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곳이 서울구치소다. 

정반대로 내가 살던 부산구치소는 당신이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예의 '더럽고 차가운 감방'의 전형을 지니고 있었다. 전국에서 제일 오래된 구치소로 진즉 철거하고 새로 지었어야 했다. 촛불시민정부는 그렇게 하리라 믿어본다. 공안사범이기는 매양 마찬가지인 당신과 나의 헌법적 차이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살던 독방은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3.2평보다 1/5 정도 작은 0.67평이었다. 아무리 작아도 화장실은 최소 크기로 있어야 하는 걸 생각하면 당신이 사는 방은 실제로는 훨씬 더 클 것이다. 

더더욱 부산구치소는 '바닥 난방시설'은 고사하고, '관물대'도, '수세식 화장실'도 없었다. 앉으면 엉덩이와 머리가 닿는 좁은 '뺑끼통'(감방 안에 있느 변기)에 물 호스 하나만 달랑 달려 있었다. 나는 거기서 '응가'도 하고, 세수도 하고, 과일도 씻어야 했다. 하루 세 번 바닥 변기 위에 식기를 놓고 씻는 건 필수였다. 나는 경건하게 나를 닦는다는 마음으로 식기와 함께 변기를 정성스레 닦곤 했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는 그 뺑끼통에서 식기를 닦는 일이 어느 고요한 절에서 수행하는 일처럼 귀하게 여겨졌다. 내가 나를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는 오랜만의 안식을 준 이명박씨가 고맙기도 했다. 어쩌다 얻은 라면박스를 '뺑끼통' 위쪽에 딱풀로 간신히 붙여놓은 간이 관물대는 여지없이 압수당했다. 

0.67평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양계장에 갇힌 닭으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평수였다. 옆으로 서면 어깨가 닿는 너비에 길이는 내 키가 쏙 들어가는 관 정도의 크기였다. '오래 살다 보면 사람도 광어처럼 옆으로 뉘어지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방이 들어오지 않아 그해 겨울 내내 모포 두어 장을 끌어안고 온몸이 '시아시'(차게 됨)가 된 상태로 얼어 지내야 했다. 열흘에 한 번쯤 매트리스를 걷으면 내 몸의 온도에 기생하는 허연 곰팡이가 오래된 마룻바닥에 엉덩짝보다 크게 피어 있었다. 

하루 30분쯤 쪽창 사이로 잠깐 내방하는 햇빛 한 줄기에 얼굴을 대고 해바라기처럼 따라다니기도 했다. 햇볕만 쬘 수 있다면 해바라기의 휜 목처럼 내 목이 휘어도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내가 살던 층 아래 1층 독방촌은 더 열악해 종일 햇빛 한 줄기 들지 않았다. 내 방보다 작은 아래층 방은 과거엔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주로 살았다는데 내가 살던 당시에는 대부분이 다양한 국적의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아무리 타국인이지만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그들이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모른다. 

여하튼 이 정도는 되어야 감옥 인권 침해에 대해 논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신이 대통령일 때 국가세금으로 수백만 원짜리 침대를 몇 개나 청와대 안으로 들이고, 수억의 양장비를 쓰고, 보톡스 등을 맞으며 수정궁에서 여왕벌처럼 지낼 때 대한민국 감옥의 인권이 이러했다. 먹을 게 불충분해 영양실조 상태라는 말 역시 당신이 사는 감옥의 쥐들도 웃을 일이다. 

기본 급식과 부식 외에 일반 수형자들도 지금은 영치금만 있으면 언제든지 닭고기살과 햄과 삶은 달걀과 빵과 사과와 귤과 컵라면 등을 일주일에 두 번 구매해 싸놓고 먹을 수 있다. 감옥의 인권이 좋아진 게 아니라 감옥의 상술이 좋아진 것이다. 밖의 세상처럼 철저히 빈익빈 부익부인 사회. 감옥 안에서도 특권을 누리며 사는 당신의 영치금 통장이 비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은 '감옥의 인권 침해'를 감시하고 개선했어야 할 대통령이었다
 

국감장에 신문지깔고 드러누운 노회찬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19일 오전 서올 종로구 감사원에서 열린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지난 12월에 헌법재판소가 서울구치소 내 과밀수용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는데, 당시 수용자 1인당 가용면적은 1인당 1.06㎡(약 0.3평)에 불과했다”며 국감장 바닥에 1인당 가용면적인 신문지 2장반을 깔고 드러누웠다.
▲ 국감장에 신문지깔고 드러누운 노회찬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19일 오전 서올 종로구 감사원에서 열린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지난 12월에 헌법재판소가 서울구치소 내 과밀수용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는데, 당시 수용자 1인당 가용면적은 1인당 1.06㎡(약 0.3평)에 불과했다”며 국감장 바닥에 1인당 가용면적인 신문지 2장반을 깔고 드러누웠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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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조사에 따르면, 당신이 대통령이던 시절 수만 명의 일반 재소자들은 하루 24시간을 당신이 쓰는 방의 1/10쯤에 해당하는 1.06㎡에 갇혀 있어야 했다. 지난 8월엔 부산고등법원이 1.06㎡이하 면적에 수용됐던 재소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정부 패소판결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노회찬 의원의 이야기대로 '유엔에 탄원서를 내야 할 사람은 일반 재소자의 열 배 넘는 공간을 쓰고 있는 박 전 대통령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 하에서 하루 24시간 1.06㎡에 갇혀 있었던 수만 명의 일반 재소자'들이다. '정작 인권침해를 당한 사람은 일반 재소자들'이고, 당신은 당시 행정의 총책임자인 대통령으로 '인권침해의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당신이 지금 대한민국 '감옥의 인권'을 얘기하고 싶다면 먼저 바로 누워 당신 얼굴 위로 침부터 뱉어야 한다. 당신은 얼마 전까지 그 감옥의 인권 침해를 감시하고 개선했어야 할 대통령이었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반성하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그러므로 빨리 나만을 풀어달라'가 아니다. 당신이 정말 한 나라의 대통령쯤은 했던 이라면, 왜 저 수형수들은 저리 좁게 자며, 왜 저 수형수들에게는 깨끗한 관복이 지급되지 않으며, 왜 소내 면회시간과 운동시간은 이리 짧으냐며, 왜 어떤 책은 여전히 반입이 되지 않는 거냐고 일반수들을 대신해 '소내 인권'을 위해 싸워주는 것이다. 때로 그렇게 일반수 모두의 인권 신장을 위해 싸우다 징벌방으로 끌려가더라도 감옥 안에서 '양심수', '공안수'라는 사람들이 했던 역할이 그런 일이었다. 

제발 역사 속 모든 '양심수', '공안수'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기를. 나처럼 촐랑거리는 사람도 그곳에서만은 말을 줄이고 힘없는 수형자를 도울 일이 없는지를 찾으며 생활의 모범이 되기 위해 힘썼음을 알기를. 공안수라는 이름으로 어떤 특혜도 입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을 알기를. 

당신이 국내 변호인단을 위장 사임케 하고 선임했다는 영국의 로펌 MH그룹도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당신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로드니 딕슨 변호사가 그간 변호했던 이들은 대체로 수많은 이들의 '인권'을 짓밟은 자들이었다. 대량학살로 사형선고를 받은 리비아의 전 대통령 카다피의 차남 사이프 카다피와 세르비아 내전 당시 민간인 살해 혐의 전범으로 기소된 하라디나이 코소보 총리, 그리고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 반군에게 군수품을 제공하고 부당 이득을 취득한 라이베리아 전 대통령 찰스 테일러와 방글라데시 테러범 하스나트 카림 등이 로드니 딕슨 변호사가 그간 변호해 온 이들이다. 혹 그런 무시무시한 '인권'의 반열에 오르고 싶었던 것인가. '인권'을 미끼로 유엔 등에 국제적인 백색 로비를 해서 신의 한 수라도 얻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건강 악화로 병보석을 따내고, 가택 연금 등을 무기로 구속을 면하는 정치 협상의 국면이라도 열고 싶은 것인가. 

당신의 죄질은 일반 재소자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어떤 재소자도 청와대를 왕궁으로 만들고 한 나라의 역사책을 개인들의 족보책으로 만들려고는 하지 않았다. 국민들이 아무런 권한도 부여한 바 없는 비선 실세들에게 국가 정보와 권력을 부당하게 넘기지 않았다. 국가 재산을 빼돌려 착복하거나, 화이트리스트들을 육성하는 데 불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왕국에 저항하는 공무원을 부당하게 내쫓고 재벌에게 특혜를 주며 거액의 삥을 듣지도 않았다. 1만 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철저히 인권을 유린하지 않았다. 

블랙리스트는 법조계와 보건복지계 방송언론계를 막론하고 전방위적으로 존재했다는 게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 어떤 범죄자도 헌정을 유린하고 총체적인 국정 농단과 파탄으로 한 나라를 무정부 상태의 혼란으로 이끌지 않았다. 당신의 파면을 둘러싼 찬반 집회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이만 네 명이다. 당신의 죄를 묻기 위해 1700만 명에 이르는 국민들이 지난해 겨울부터 올봄까지 생업을 놓고 거리로 뛰쳐나와야 했다. 그 죄과를 일반 재소자들의 기준으로 물으려면, 미안하지만 '천년의 형'을 언도해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당신은 단 한 치의 반성도 없다.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 보복'이라고 한다. 내가 한 일은 하나도 없고, 모두 모르는 일이라 한다. 아랫사람들이 했을 거라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의 모습 그대로다. 감옥에 갇혀서도 자신의 수첩 속에 적힌 세상밖에 모른다. 모두가 온돌형으로 살아가는 대한민국 감옥에서 '침대가 없'어 인권 침해라는 당신에게서 비루한 한 생을 본다. 아직 찬바람도 불지 않은 10월부터 바닥 열선이 들어오는 온돌에 누워 '춥다'는 타령을 하는 당신에게서, 프랑스 혁명 당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했다는 유명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올리게 된다. 알려진 대로 그는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단두대에 세워졌다. 

그러나 한국의 감옥은 당신을 단두대에 세우지 않을 것이다.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다분히 상식적인 법의 잣대로 당신의 죄를 물을 것이다. 그렇게 물어도 만년의 형이 부족할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블랙리스트 작가들의 책 수백여 종을 세종도서 선정에서 부당하게 배제시킨 것으로 확인된다. 권당 1천 권씩 100명의 작가라치면 10만 권의 책이 전국의 도서관으로 갈 수 없었다. 10만 권의 책을 읽을 100만 명의 시간이 사라졌다. 100만 명의 독자가 가질 1억 개의 상념의 시간이 불법으로 도난당했다. 

진정 배웠어야 했던 건 '독재의 추억' 말고 '독재의 처참한 말로'였다 
한 권의 책이 쓰이기까지 최소 3년여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할 때, 당신과 당신의 수족들은 백 권의 책이 쓰인 3백 년의 아픈 시간을 빼앗고 그 시간에 주리를 틀었다. 당신이 배제시킨 수백 편의 연극을 볼 수만 명 관객의 수십만의 시간이 강탈당한 것이며, 수백 편의 연극을 만들기 위해 청춘을 불태운 수천 명의 젊은 연극인의 앞날을 짓밟고 빼앗은 것이다. 당신과 당신 전임인 이명박이 집권한 10년 내내 1만 명의 블랙리스트가 빼앗기고 짓밟혀왔던 시간을 모두 더하면, 그들의 작품과 만났어야 할 수천만 명의 눈과 입과 귀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당신은 감옥에서 보내야 할까. 

그런 당신이 황후 같은 수용생활을 하며 기껏 '침대'를 들어 말하는 '인권'이 참 가당찮다. 그런 당신이 예전 청와대에서 '영예'라 불리며 살던 시절, 당신의 아버지에 의해 얼마나 많은 이가 그 감옥으로 영장도 없이 끌려가 고문받았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이가 의문사로 사라져야 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학생이 녹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군징집 당해 얻어터져야 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이가 간첩으로 조작되어 죄 없는 감옥살이를 해야 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이가 빛도 들어오지 않는 벌방에 흑수정이 채워진 채 던져져야 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이가 사상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강제 전향공작 고문에 온몸이 아득해져야 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 학생이 정의를 외쳤다는 까닭으로 끌려가야 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책이 금서로 낙인찍혀 압수당하고 불태워졌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표현들이 억압당하고 차별당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법자'(은어 : 법무부 자식들이라는 뜻으로 무전유죄의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뜻함)가 진짜 '더럽고 차가운 감방'에서 최소한의 인권(인권이라는 말은 장기수로 복역하다 출소한 서준식 선생에 의해 1990년대 초반에야 한국사회에 비로소 이식되었다)도 보장되지 않는 비인간적인 생활을 해야 했는지 아는가. '뺑끼통'에서 구더기가 떼로 올라오는 방에서 칼잠을 자 보았는가. 얇디얇은 군용 모포 한 장으로 겨울을 나 보았는가. 한 달에 한 번 허연 비지 한 조각이 구경할 수 있는 고기의 전부였던 그런 시절을 아는가. 그것조차 힘없고 나약한 이들은 모두 빼앗기고, 매일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아도 그것이 갱생의 길이라 했던 당신 아버지의 '인권' 개념을 아는가. 

'그런 시절을 생각해 당신이 아무런 주장도 하지 말고 입 닥치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무슨 연좌제도 아니고 아버지의 죗값을 당신이 대신 치르라는 말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감옥 인권이 그만하면 됐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도리어 대한민국의 감옥 인권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져야 한다. 우리는 당신을 포함해 감옥 안의 그 어느 누구도 마땅히 치러야 할 죗값 이외의 인권을 유린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어떤 체벌도 인격 유린도 없기를 바란다.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배웠어야 했던 건 '독재에 대한 달콤한 추억'이 아니라 당신 아버지가 걸은 '썩은 독재의 처참한 말로'였다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부터라도 배워야 할 것은 당신이 짓밟은 수많은 '천부인권의 시간'에 대한 반성과 이해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기본 정신이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는 정말 최소한의 시민의식이다. 세상의 모든 부의 원천은 자연에서 빌려 온 물질과 그 물질을 가공해내는 모든 인간의 협업과 노동을 통해서만 나오기에 그 주인 또한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깨달음이다. 전쟁이 아닌 평화가, 예속과 굴종이 아닌 자주가, 억압이 아닌 자유가, 독점이 아닌 나눔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다. 

그렇게 당신이 진정으로 얻어야 할 '인권'은 당신 바깥에 있지 않고 당신 안에 있다. 시종에게 둘러싸인 비운의 왕녀처럼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인생 안에 있다. 이제라도 나는 당신이 '과거의 감옥'에서 나와 오늘의 햇빛을 환하게 쐬었으면 좋겠다. 감옥의 시간을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1700만 명의 촛불의 시간을 얻어 사는 거라고 여겨도 좋겠다. 

세상의 작은 빛 하나, 작은 바람 한 점, 작은 씨앗 하나, 작은 날갯짓 하나에서도 생명의 거룩함을 보게 되는 값진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없이 낮아지고 작아져 비로소 당신의 겸허한 삶 하나가 도리어 크고 귀한 '인권' 하나가 되어 다가오는 그런 날, 우린 비로소 당신을 용서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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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1년, 박정희 체제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인터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저자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①
2017.10.24 10:28:22
 
 

 

 

 

2013년부터 <프레시안>에 연재됐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중 박정희 유신 체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단행본 9, 10, 11권이 발간됐다. 이번에 발간된 세 권은 1972년 10월 17일을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유신 쿠데타'와 관련 각각 △유신을 왜 일으켰나(9권) △왜 유신 체제를 막지 못했나(10권) △유신의 뿌리, 일본 군국주의(11권) 등을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는 1945년 해방 후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민주화 흐름을 짚어보는 기획으로 해방과 분단을 다룬 1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을 다룬 2권, 이승만 독재와 이에 맞선 조봉암의 비극을 그린 3권, 4월 혁명을 다룬 4권에 이어 5권부터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탄생과 전개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 유신 체제를 해부하는 세 권의 단행본에 이어 향후 6월 항쟁에 이르는 과정도 다뤄질 예정이다. 

<프레시안>은 촛불 시위 1주년이자 11월 14일 박정희 탄생 100년을 맞아 저자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를 만나 촛불 시위의 의의를 되새김과 동시에 유신 체제와 한국의 앞날을 조망하는 인터뷰를 마련했다.  

촛불 시위가 없었다면 박근혜 정부 하에서 성대한 박정희 탄생 100주년 행사를 지켜봤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서 교수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박정희 신드롬'이 만연해있다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인터뷰는 지난 12일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프레시안>은 이번 인터뷰를 세 편에 나누어 소개한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최형락(프레시안)


프레시안 : 지난해 10월 말 박근혜 정부의 이른바 '국정 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후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당하면서 조기대선이 치러졌다. 1960년 4월 혁명 이후 부마 항쟁, 광주 항쟁,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이번 촛불 시위의 의의는 무엇일까?  

서중석 : 4월 혁명과 부마항쟁, 광주항쟁과 6월 항쟁을 이어받은 위대한 민주주의 운동이자 우리 사회를 새롭게 만들려는 운동이었다. 특히 11월 하순에서 12월 초에 100만 명이 참여한 집회가 두 번 열렸는데, 이는 1960년 4월 19일 서울 집회와 1987년 6월 10일, 18일, 26일에 있었던 집회를 떠오르게 했다. 촛불 시위대의 함성을 들었을 때 우리 사회에도 정의가 뜨겁게 살아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런 모습을 보며 감명을 받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다. 

1960년 4월 혁명 때는 200명 가까운 희생자가 나왔는데, 이는 광주항쟁 때 희생자와 비슷하다. 6월 항쟁 당시 10일~26일에 국한시켜서만 보더라도, 시위 참가자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지독한 최루가스를 견디며 불굴의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투쟁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말 이런 대단한 투쟁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광주나 부마항쟁 또한 두말할 필요 없이 대단했고.  

이러한 투쟁들은 우리 사회를 크게 바꿔 놓았다. 4월 혁명이 1945년 8·15에 이은 제2의 해방이라고 생각하는데, 4월 혁명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고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됐다.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1인 독재정권을 세우는 데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지 11년 이후에나 가능했다는 점도 4월 혁명의 영향이 얼마나 심대했는지를 보여준다. 4월 혁명의 힘 때문에 박정희가 좀 더 빨리 독재정권을 세우고 싶었어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도 4월 혁명의 진한 여운이 남아있다. 1980년대에 4.19를 전후로 대학가에서 목소리가 나오고 민주화운동이 강렬해졌다. 여기에 5월, 광주를 기억하면서 훨씬 더 큰 투쟁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6월 항쟁으로 가게 되는 것인데, 4월 혁명이 계속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6월 항쟁은 제3해방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항쟁을 통해 민주화의 도도한 흐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비록 중간에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훼손시키는 행위를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이 항쟁으로 획득한 절차적 민주주의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고 본다. 6월항쟁은 또한 문화혁명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우리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는 학문적 예술적 자유를 누렸고, 언론의 자유도 확대되었다.  

그런데 촛불 시위가 '촛불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속단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촛불 시위 이전에는 박근혜 정권이 그렇게 몰락할지는 예견하지 못했다.  

프레시안 : 이번 촛불 시위가 4월 혁명이나 6월 항쟁과 다른 구체적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촛불 시위는 '박근혜 퇴진'이 중심이었다. 한때 박근혜 퇴진 주장은 <조선일보>나 종편(종합편성채널)에서도 찬동했다. 그게 당시 국민들의 일반 의사였다. 이는 4월 혁명이나 6월 항쟁과 같은 고난의 투쟁 속에서 이뤄진 성과와 차이가 있다. 

또 촛불 시위에서 민주화 및 우리 사회의 미래와 관련해 4월 혁명이나 6월 항쟁과 같은 강한 메시지가 있었는지에 대해 좀 회의적이다. 촛불 시위가 대단한 역할을 했지만, 그 역할 이상으로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프레시안 : 촛불시위는 박근혜 정권이 만들어 낸 민주주의 역행을 바로잡은 정도지, 새로운 길을 뚫어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뜻인가? 

서중석 : 민주주의를 복구했다는 부분은 성과가 있지만 역행을 바로잡았다는 측면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촛불 시위를 촛불 혁명으로 승화시키려면 폭넓은 민주주의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독일의 정치 교육, 곧 민주주의 교육을 연상할 수 있는데, 그 민주주의 교육은 박정희 신드롬을 해체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 교육에서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대단히 특이한 중요성을 갖는 게 있다. 그게 바로 현대사 교육이다. 다른 나라들은 현대사에 대해 기본적인 소양이 있다. 그런데 한국은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 학생 등이 현대사에 대해 막연하게 추측만 하고 감성적‧획일적‧도식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깊이 있는 인식이나 명료하고 분명한 인식을 못하고 있다. 

진보세력이 1980년대 인식에서 얼마나 나아가고 있는지도 반성해야 한다. 뉴라이트가 주장하고 있는 것들을 일반 사람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있게 반박하고 잘 설명해줄 수 있는지, 이런 능력이 결핍돼있지 않은지 점검해봐야 한다. 현재와 같은 상태라면 과연 한국에 미래가 있을까? 박정희 신드롬이 약화될 수 있을까? 촛불 시위가 촛불 혁명으로 승화될 수 있을까? 

한국사람들은 굉장히 역동적이다. 이게 지금까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현대사에서 긍정적 역할을 한 기본 요인이 돼왔다. 그런데 거기에 지적 능력이나 성찰이 수반되지 못한다면 이를 뛰어넘는 사유를 할 수가 없다. 일제시기부터 지금까지 형성된 수구 세력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여기에 포함된다.  

현대사에 대해 어느 때보다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민주주의 교육을 시켜야 한다. 수구세력이나 뉴라이트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합리적 보수와 진보주의가 이땅에 뿌리 내리도록 하는 활동을 해나가야 한다.  

촛불 시위가 혁명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지적 성찰적 노력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갖춰져야 한다. 북핵 문제 대처, 한반도 평화 달성, 국제사회에서 자주성과 자율성을 갖는 데에도 현대사에 대한 명료한 이해와 북한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은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 지난해 12월 3일 사상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 전경 ⓒ프레시안(최형락)


'유신'이 몸에 밴 박근혜, 새 시대와 어울리지 않았다  

프레시안 : 촛불 시위의 배경을 두고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일단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능함과 반민주적인 사고가 가장 표면적인 이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서중석 :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나는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이 우리 사회에 좋은 방향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한 가지는 해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관련 기사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망쳤고 우리 미래의 암적인 장애 요인이 '박정희 신드롬'인데, 이 신드롬이나 박정희에 대한 지지 열기를 크게 감소시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이게 박근혜 대통령의 최대 공로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박근혜가 박정희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과 함께 박근혜의 무능 때문에도 박정희 정권이 우리가 상상하던 것과 다르다는 인식을 할 수 있게 하지 않겠냐는 예측이었다.  

2012년 대선 당시 민주화 운동 세력이나 민주 언론이 과연 선거에 적극적으로 임했냐 하는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후보는 문제가 심각하니까 떨어뜨려야 한다는 노력을 벌였고, 역사학자들도 이만열 선생이 중심이 돼서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모 일간지에 장기간에 걸쳐 유신 체제의 성격에 대해 글을 쓴 것도 그 일환이었다. 

나도 학술 발표 등을 통해 유신 체제 비판 활동을 했다. 선거를 얼마 앞둔 발표에서 유신 말기의 정치적 경제적 난맥상, 박정희의 정신적 상황, 왜 그렇게 철옹성처럼 보인 유신 체제가 쉽게 붕괴되었는가 등을 분석하면서 박근혜와 최태민 관계를 비중있게 다뤘다. 

발표장에서 발표를 마친 뒤 그 자리에 참석한, 잘 아는 정치인으로부터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에 대한 자료가 더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도 이상하게 정치권과 언론에서 당시 박근혜-최태민 관계의 문제점을 별로 거론하지 않았다. 

당시 정치인들에게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불미스러운 소문이 중요한 게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박근혜의 대응을 보면 박근혜가 제대로 국정을 운영할 사람인지, 옛날식으로 표현한다면 나라를 망칠 사람인지 아닌지를 잘 보여준다고 그 정치인에게 역설했다. 그래서 이 점을 정치권에서 크게 문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의 '라스푸틴'으로 불리는 최태민의 권고에 의해 '구국여성봉사단'이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이들은 유신 체제를 수호하는 일역을 맡았다. 그런데 그 당시 최태민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치안본부에서 최태민을 조사했다. 하지만 이를 조사했던 치안본부 관계자들만 사표를 내는 일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와 최태민이 밤에 자주 만난다는 소문이 돌 때 청와대 민정 수석비서관이 최태민의 비행을 조사해서 여러 차례 박정희에게 보고했는데, 이 역시 먹혀 들지 않았다. 또 1978년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최태민에 대해 뒷조사를 한 결과 최태민이 재벌들이 기탁한 수십억 원을 횡령하고 불륜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대통령에게 이걸 보고했는데, 박정희는 김재규와 그 보고서를 작성한 간부를 앉히고 다른 쪽에 최태민과 박근혜를 앉혀서 소위 '친국'이라는, 있을 수 없는 이상한 짓을 했다. 

그런데 이런 중요 기관의 보고나 ‘친국 사건’이 있을 때 박근혜는 아주 강하게 반발하면서 그런 사실을 부인했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이를 유야무야한 일로 덮으려고 했다. 나중에는 검찰에서도 조사했는데 중앙정보부 조사와 별 차이가 없다고 나왔다. 

내가 특별히 강조한 것은 이거다. 이렇게 많은 문제들이 드러났다면 박근혜가 최태민과 관계를 단절하든가, 구국여성봉사단 활동을 다른 방식으로 한다든가 하는 조치를 취했어야 했고, 최소한 잘못을 인정해야 했는데 박근혜는 전혀 이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그래서 1990년대와 그 이후에도 계속 말썽이 났다. 이는 박근혜가 어떤 행태의 정치를 할 것인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이 부분을 대선에서 크게 문제 삼고 부각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나 말이다.

또 한 가지 학술 발표나 다른 자리에서 역설했던 것은 박근혜가 유신 체제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고, 그 유신체제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인간은 청소년기나 청년기에 받은 영향이 평생을 간다고 하는데, 박근혜는 젊었을 때 유신체제밖에 보고 배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유신체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육영수가 사망한 이후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했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었다. 

더군다나 박근혜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익히거나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를 못했다. 만나는 사람도 굉장히 협소했고, 그들은 박근혜를 추켜올리기만 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만한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데는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 지난 2013년 2월 25일에 열린 제 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지난해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박근혜 4촌 형부인 김종필은 <시사저널>에 박근혜가 아버지, 어머니의 나쁜점을 그대로 닮았다고 말했다. 역사가 아이러니한 것이 사실 박근혜가 아버지 때문에 인기가 높아졌고 대통령까지 됐다고 볼 수 있는데, 바로 그 아버지 때문에 박근혜가 결국은 탄핵을 받아서 쫓겨나게 됐다고도 볼 수 있다. 아버지 때의 경험, 유신 체제 때의 잘못된 경험이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유신 시대 대통령은 왕보다도 더 힘이 강했던 '지존(至尊)'이었고, 절대적 위치였다. 여성관계든 어떤 분야든 일반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을 넘어선 행위를 해도 아무도, 어떤 기구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유신시대 때의 박정희와 같은 위치를 가질 수 없는 민주주의 시대였다.  

여기서 큰 간극이 생겨나는데 그걸 박근혜가 이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동안 공주로만 존재했기 때문에 유신 시대의 현실을 몰랐고, 더군다나 새 시대가 시작된 2000년대를 과연 체감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현실감이 상당히 결핍될 수 있었다고 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번에 출판한 회고록에 박정희 권력은 절대권력의 마성이 너무나 강했다고 평가했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식으로 써놓은 셈이지만, 이 말 자체는 틀린 게 아니라고 본다.  

박정희는 당시 스스로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박근혜는 그걸 옆에서 항상 배웠다. '사적 권력의 무한정한 질주' 라고 할까? 바퀴 빠진 수레가 어디론가 질주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 상태에서 국가 운영의 심각한 일탈현상이 일어났다. 유신 시대에 박근혜가 이런 것들을 아주 잘못 배운 것이다.  

그러다보니 박근혜 정부에서는 중요한 일에서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많았다. 예컨대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북한이 곧 붕괴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붕괴쪽으로만 몰고 갔고,-일부에서는 최순실 쪽에서 그런 관념을 심어줬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어쨌든 북한에 대한 그런 시각을 가지고 강경 일변도로만 나갔고 북핵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만약 제대로 대처했다면 지금 북핵 문제가 저 정도까지 될 수 있었을까? 박근혜 정부는 북핵 문제가 더 이상 커지지 못하도록 실질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개성공단 문제만 해도, 개성공단이 갖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성이 있는데 공단 중단 결정을 할 때 과연 공론화 과정을 거쳤는지 의문이다. 또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합의할 때도,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결정할 때도 그랬다. 당시 교육부 책임자도 실제로는 소극적이었다. 심지어는 <조선일보>에서도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국정화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한 사설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순식간에 결정됐으니, 위에서 밑으로 내리꽂은 거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드 배치 결정도 북한과 관계뿐만 아니라 중국‧러시아 관계를 비롯해 한국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이 있음에도 성급하게 결정됐다. 박정희 때 옆에서 보고 배운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일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막걸리 마시고 모내기 하는 모습 때문에 서민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유신 체제 하에서는 성장 위주 정책을 쓰면서 재벌과 가진 자 중심으로 모든 정책을 펴나갔다. 노동자나 서민 위주의 정책은 거의 없었다. 아파트 정책만 보더라도 당시 언론에서도 서민층을 위한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지만 대형아파트 중심으로 지어졌다. 이것도 유신체제의 성장 위주 정책과 관련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YH여성노동자신민당농성사건, 부마항쟁 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박근혜 역시 서민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세월호 사건이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세월호가 침몰했을 당시에, 인명 구조를 위해 가장 중요했던 그 시간에 박근혜가 뭘 했는지 국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지 않나?  

박정희가 서민을 무시한 정책을 계속 펴다가 YH 사건, 부마항쟁이 일어나 유신 체제가 붕괴했다. 세월호 침몰이 박근혜 몰락의 하나의 큰 요인이 되기도 했다.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박근혜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한 것이 오히려 이후에 정치를 하는 데 큰 걸림돌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체제, 촛불 이후에도 여전하다 

프레시안 : 지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당선됐을 때 일부에서는 두 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안착됐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제는 진보와 보수의 건전한 정책 대결이 있을 거고 민주주의가 퇴행하지는 않을 거라는 전망이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보수가 다시 정권을 잡으면 민주주의가 퇴행할 수 있다는 예측도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행태를 보면 후자가 현실이 된 것 같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그 강도는 약하지만 점진적 쿠데타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유신 체제와 흡사한 면을 보였다. 이제 촛불 시위로 박정희 체제가 끝났다고 볼 수 있을까

서중석 : 성급한 판단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물론 박근혜의 퇴진과 구속으로 박정희 신드롬이 상당히 많이 훼손됐다. 그렇지만 박정희의 망령이 수구 세력을 다시 살려냈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불러낸 상황을 다시 한번 되돌아봐야 한다. 박정희 신드롬으로 이득을 보는 세력이 강고하게 존재하는 한 박정희 신드롬은 상당한 힘을 가질 수 있고 박정희 체제도 결코 끝나지 않는다.  

박정희 신드롬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할까? 중요한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현대사 전공자로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 그에 대한 지지가 집권 기간이었던 18년보다 사후에 더 강고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박정희만 환생하면 우리 경제가 살아나고 우리나라가 잘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이는 분명히 착각인데, 그러한 박정희 신드롬이 존재했고,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박정희가 집권하던 18년 동안 그가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현대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다. 박정희 신드롬이 한창이었을 때 열기를 보면, 집권했을 당시에는 더 강력한 지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볼 수 있지만 그야말로 착각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첫 번째 치른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윤보선 민정당 후보를 간신히 15만 표 차로 제치고 당선됐다. 서울에서는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윤보선이 이겼다. 당시 윤보선과 벌인 사상논쟁에서 누가 더 유리했는지의 문제는 둘째치고, 남도 지방이 수재로 큰 피해를 입었던 상황이 영향을 미친 측면이 있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미국에서 들여온 밀가루를 이때 대규모로 살포했다. 이게 박정희 당선에 더 큰 원인을 제공했다. 그래서 밀가루 선거, 밀가루 대통령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밀가루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박정희 표가 많았다. 이 때문에 이 선거를 남북 선거라고도 부르는데, 전라도‧경상도에서도 도시에서는 윤보선이 이긴 곳이 많았다. 

1967년 대선이 박정희가 가장 표를 많이 얻은 선거인데 여기서도 전라도와 충청남도, 경기도, 서울 등 서쪽에서는 박정희가 모두 패배했다. 박정희가 집권했던 1965~66년부터 우리 경제가 좋아지고 있었는데 서부지방에서 신선함이 없는 윤보선이 이겼다는 것은 박정희 지지가 여전히 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박정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특정 지역에서 표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특히 경제 개발이 시작되면서 혜택이 경상도에 집중됐고, 영남에서의 압도적 지지로 서쪽 지역에서의 열세를 뒤집었다. 

1971년 대선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계속 초긴장 상태에 있었다는 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박정희-김대중 후보가 용호상박 백중지세의 기세로 맞붙었다. 도무지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선거였다. 물론 여기도 결정적으로 특정 지역의 몰표가 더 크게 선거를 좌우했다. 

유신 체제에서는 '과연 이게 선거냐'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선거만 있었지만, 그나마 1978년 12월 12일 치러진 총선이 예전 선거와 유사했다. 당시 이 총선에서 신민당은 공화당보다 1.1% 더 표를 얻었다. 여기에 통일당이 얻은 표까지 합하면 야당이 여당에 8.5%나 앞섰다. 유신체제에서, 그것도 긴급조치 9호가 국민을 벙어리로 만들었던 때 치러진 선거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선거에 가깝게 치러진 선거가 이거 하나였는데, 여기서도 박정희가 졌다. 

박정희가 집권 시절에 이른바 '경제대통령'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됐다면 1971년 선거에서 그렇게까지 아슬아슬한 시소 게임을 벌였을까? 유신체제가 경제에 그렇게 유리한 체제여서 경제를 발전시켜놨다면 12.12선거에 농민까지 반대를 찍은 결과가 나왔을까? 그런데 죽은 박정희가, 2000년대 이후에 두 번의 정권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다. 
 

▲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 10, 11권 (서중석 지음, 오월의 봄 펴냄, 2017)


그러면 박정희 신드롬은 무엇이 문제일까?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회의나 부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문제다. 우리 사회에 꼭 민주주의가 필요하냐,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 한국인에게 민주주의가 적당한 거냐는 등의 말이 2000년대 치러진 선거에서 공공연하게 등장했다. 파시즘적인 증상이나 징후가 2000년대까지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 셈이다. 민주주의가 맞지 않는다는, 유신 체제 때 주장했던 것이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이명박 당선에 기여했던 성장‧경제 제일주의도 박정희가 유신 시대에 그렇게 부르짖었던 주장이었다.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여기에 빠져 있는데 이 주장이 강한 영향을 갖고 있는 한 박정희 신드롬이나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은 생겨날 수 없다고 본다. 

또 하나의 요소는 반공주의다. 요즈음은 ‘종북’이라는 말이 더 쉽게 다가오지만, 박정희 시기의 반공주의는 이승만 시기의 반공주의와도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박정희 시대를 겪은 사람들은 기억이 나겠지만, 당시 반공교육을 받다 보면 북에는 인간이 아닌 흡혈귀 혹은 이리나 승냥이가 사는 땅 같았다. 오죽하면 북한을 방문했던 소설가 황석영이 방북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에서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그런 희화적인 말을 했을까. 

박정희는 끊임없이 남침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전 국가를 병영 국가화했고 전 국민을 간첩 잡기에 동원했다. 애인도, 친척도, 이웃도 간첩이 될 수 있다면서 전 국민이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신드롬의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두 인간성을 파괴하는 효과를 낳는다.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만큼 인간성이 마멸된 것 아닌가? 성장‧경제 제일주의가 추구하는 세상에서는 서민이 존재할 수 없고 일반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특히 반공주의가 심하게 인간성을 파괴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박정희 신드롬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면 박정희 신드롬이 왜 이런 위력을 갖게 됐을까?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되돌아보지 못한 것 같다. 

핵심은 반공교육이었다. 유신체제에서 반공교육은 인간성을 이렇게 까지 파괴시킬 수 있느냐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북한 주민들에 대해 증오심이나 적개심을 갖게 하는 것이 과연 초등‧중등학교 시기의 교육 내용으로 적합한 것이지 의문이다. 어떤 내용이든, 어떤 방식이든 초중등학교 학생들에게 증오나 적개심을 키우는 교육은 잘못된 교육이다. 

장구한 세월의 군사 독재 문화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박정희가 집권하던 18년 동안 성장기를 가졌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2012년 대선 때 투표장에 많이 갔던 50~60대 다수가 여기에 해당하는 세대다. 당시 이들에게 대통령은 박정희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박정희=대통령'이라는 등식 속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특히 유신 치하에 들어가면 학교 교육이나 TV를 통해 박정희가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인지 끊임없이 주입당했다. 1970년대에는 1950, 60년대랑 달라서 여성들도 대부분 고등학교를 진학했기 때문에 교육의 역할이 훨씬 커졌고 내용적 측면에서도 박정희 때의 반공교육이 이승만 때보다 훨씬 더 강했고 구체적이었다. 

또 박정희 유신 체제 시기에는 그 이전과 달리 TV나 라디오가 상당히 많이 보급돼있었다. 1970년대 말에는 가구당 TV가 한 대는 있을 정도로 많은 TV가 보급됐다. 당시 별다르게 즐길만한 대중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한 뒤 TV를 봤다. 그런데 뉴스든 연속극이든 정부 홍보물이든 TV 프로그램이 주로 반공 또는 박정희 대통령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물론 유신체제, 그것도 긴급조치시대여서 박정희 비판은 어디서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2012년 50, 60대의 투표 성향을 두고 본인들이 땀 흘려 일한 것이나 고난을 젊은 세대가 몰라준다는 점에 대한 반발이라는 분석이 나왔는데 이 점도 중시해야겠지만, 더 크게 작용한 것은 유년기 청년기에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고, 이것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 다수에 의해 박근혜 정권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현대사에서 박정희 신드롬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게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 미래는 있을 수 없고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새로운 관계망 형성도 생겨날 수 없다. 

'박정희 신드롬', 민주화 세력에게도 책임 있다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이 국민들을 상대로 엄청난 선전전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화 세력들이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측면도 여전히 국민들 사이에 '박정희 신드롬'이 강하게 자리잡은 원인이 됐던 것 같다.  

서중석 : 민주주의 가치를 추구하던 세력도 성찰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박정희 신드롬의 중요 요소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있는데, 적지 않은 한국인이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된 데에는 민주주의 세력도 잘못한 것이 있다.  
 

▲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최형락(프레시안)

물론 1970, 80년대에는 민주화 세력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다. 그렇지만 1987년 12월 대선 때 양김(통일민주당 김영삼,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이 적절히 대응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양김이 저질렀던 '대통령병'이 고스란히 1987년 대선 때 되살아났다.

민주화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세력의 상당수가 김대중 당시 평민당 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김후보를 지지했다. 그런데 이게 그 사람들과 입장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또 양김의 출마 때문에 노태우 정권이 등장한 것을 볼 때 과연 적절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행위가 일반 사람들에게 민주화운동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준 측면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수구 보수 세력들 사이에 민주화 세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었는데, 마치 그에 대한 근거라도 생긴 것처럼 이제 민주화 세력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을 강조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일정하게 민주주의의 퇴조를 불러왔다.  

1988년 4.26 총선에서는 어땠나? 단적으로 말해서 소선거구제는 지금까지 아주 심각한 지역주의가 뿌리 깊게 살아있게 만든 계기였다. 당시 재야에서 이제는 양김이 단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또 실패했고, 그러면서 특정 정치가가 강력하게 주장했던 소선거구제가 채택돼 87대선보다도 더 심한 지역주의가 자리 잡게 됐다. 

여기에 중대선거구를 주장했던 김영삼 측이 득표에서는 평민당보다 4% 이상 앞질렀지만, 부산·경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제3당으로 전락하면서 코너로 몰렸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고 정치적 생존을 위해 노태우-김종필 측과 합당을 선택했다. 지역주의는 박정희 신드롬의 온상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망국병이었다.

그런데 더 놀랍고 무서운 일은 독재정권 아래서 선명 야당을 주장했던 김영삼 쪽 정치인들이 김영삼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 신한국당이나 한나라당 등에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민자당 탄생 이전에는 야당 세력이 강했던 경상도 지역이 전부 특정정당 지지세력이 되고, 호남처럼 어느 한쪽으로 몰표를 던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됐다. 이런 상황이 우리 정치를 계속 힘들게 했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커졌고 수구 세력들은 그것에 대한 자신들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과거의 잘못이나 악행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르고 뻔뻔스럽게 나와도 괜찮은 분위기가 생긴 것도 우리의 미래, 즉 촛불 혁명을 가로막고 있다. 촛불 시위와 박근혜 구속 이후에도 수구적 정당과 언론은 그 이전과 다름없는 소리를 계속 외치고 있다. 이것도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하자 심지어 유신체제 수호에 앞장섰던 유신정우회 정치인들까지 잘못을 시인했다. 6월항쟁 직후에도 그런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특히 전두환·신군부정권을 찬양했던 언론계가 반성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선과 총선, 노태우 정권의 등장과 민자당의 출현 이후 전두환 정권에 붙었던 정치인이나 신문 종사자, 지식인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특히 전두환 신군부의 입법회의나 민정당에 가담했던 민간인들이 반성을 하지 않은 채 야당 당수까지 되고, 진보적 언론인으로 각광을 받는 것도 혼란을 초래했다.  

민자당 출현 얼마 후부터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신드롬은 1995년 해방 50년을 맞으면서 수구 언론의 노력도 가세해 힘을 얻었고, 1997년 외환위기-IMF사태가 일어나자 날개를 단 듯했다. 여기에 뉴라이트가 등장하면서 그들 나름의 현대사 논리까지 발전시켰는데, 여기에 대응해야 할 측에서는 별다른 지적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2016년 촛불 시위가 갖는 한계로 이런 부분들이 논의되기 어려웠고, 또 여전히 경제 제일주의 등 박정희 신드롬이 깔려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아직도 위태롭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양극화 부분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지 않았나. 

서중석 : 김대중 대통령이 신속한 경제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러면서 주요 공기업을 외국자본에 많이 넘겨줬다. 약간 더디더라도 참았어야 했는데 강하게 긴축 정책을 벌이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썼다. 노무현 정부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쳤다.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고 박정희 경제정책의 유산도 작용해 새로운 모색이 힘들어진 측면도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민주화 세력이 제대로 국정 운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은 인상을 일부 국민에게 주게 됐다. 그래서 박정희-전두환 시대에 대해 회고적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이는 퇴행적 사고를 갖게 만들었다.  

프레시안 : 촛불시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신드롬은 여전히 죽지 않고 강고하게 남아있고, 일종의 세력으로 구축돼 있는 상황인 것 같다.  

서중석 : 과거에 대한 성찰이 결핍되면 그렇게 될 수 있고, 이른바 정계와 재계, 언론계의 기득권 세력은 박정희 신드롬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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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향한 분단의 현실, 연해주를 가다

대륙을 향한 분단의 현실, 연해주를 가다희망래일 대륙학교 2기의 2박3일 연수 동행기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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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24  07: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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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오전 10시 10분.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약 2시간 40분의 비행. 분단은 하늘길도 끊어놓았다. 그렇게 비행기는 중국 간도지역 상공을 지났다. 

사단법인 '희망래일'(이사장 이철)이 운영하는 대륙학교 2기생 등 30명은 13일부터 15일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하산 등 연해주 연수를 떠났다. 대륙의 꿈을 안은 이들의 연해주 기행, <통일뉴스>가 함께했다.

   
▲ 러시아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변에 자리한 '이상설 선생 유허비'. 선생의 유해가 뿌려진 곳이다. 올해는 헤이그밀사사건 110년,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기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수이푼강. 이상설 선생의 유해는 동해로 향했을 것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기행단은 곧장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약 1시간여에 걸쳐 이동한 버스는 일행을 이상설 선생 유허비로 안내했다. 이상설. 1907년 고종 황제의 밀지를 받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세계에 알리려던 인물. 

북만주에서 만주리까지 총괄하는 대종교 북도본사를 맡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상설 선생은 1917년 연해주에서 병사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원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마라."

선생의 유언을 산자는 야속하게도 그대로 받들었다. 동해로 흐르는 수이푼강. 헤이그밀사사건 110년,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기. 이 곳에 이상설 선생의 유해가 뿌려졌다는 표식이 덩그러니 남았다. 선생의 유해는 분단된 한반도 동해를 오르내리리라. 

   
▲ 발해 옛터 '솔빈부'. 말을 기르던 곳으로 광야가 펼쳐졌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일행을 태운 버스는 보다 더 오랜 역사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발해 옛터 '솔빈부'. 5경 15부 중 말을 방목해 기르던 솔빈부는 말그대로 광야였다. 늦가을의 바람이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었다. 잊혀진 역사 발해 그리고 후손들은 일제의 억압을 끊어내고자 이 땅을 다시 찾았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하느냐"라던 윤심덕의 자조섞인 노래가 어울린 듯 아닌 듯. 독립투사들은 과연 너른 발해 옛땅을 달리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분단의 역사, 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상념에 들게 하는가. 솔빈부에 부는 바람은 어제도 오늘도 같으리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기행단은 최재형 선생 고택을 방문했다. 우리의 역사에서 잊혀진 최재형이라는 이름 석자 만큼이나 고택은 형편이 낡고 초라했다. 여기저기 벗겨진 페인트, 스산하기만 한 집안.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살았던 선생의 온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 러시아 한인사회의 표상, 최재형 선생이 1918년부터 1920년까지 거주한 고택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최재형. 러시아 한인사회의 표상.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배후인물. 1860년 8월 함경북도 경원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로 이주한 선생은, 가난에 못이겨 11살의 나이에 가출했다. 그리고 러시아 선장 부부의 보살핌으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검은머리 러시아인'에 그치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검은머리 미국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 한인 지도자로 재러 한인의 생활안정과 동포 자녀 교육 사업에 힘을 썼고, 러일전쟁 이후 국권수호를 위해 의병운동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으로 선임되는 등 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였다.

하지만 일본은 연해주 지역 러시아혁명세력을 제거하고 한인 독립운동을 말살시키기 위해 1920년 '4월참변'을 일으킨다. 선생도 참변으로 희생됐다. 그리고 분단과 함께 '최재형'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역사책에서 사라졌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선생의 고택을 박물관으로 탈바꿈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더욱 뜻깊은 것은 한국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고, 러시아 정부가 협조하고 있지만, 공사의 주체는 바로 고려인들이라는 것. 어스름한 시각에도 고려인들은 공사장에서 한창 선생의 뜻을 복원하고 있었다.

현재 학교로 쓰이는 '전로한족중앙총회결성' 장소를 지나 고려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고려인 문화센터'를 방문했다.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건립된 문화센터에서 펼쳐진 공연은 북한식 조선춤이었다. 분단의 역사는 해외에서 통일된 느낌이랄까. 고려인 청소년들로 구성된 '아리랑 가무단'의 공연이 분단의 현실을 느끼게 해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고려인 문화센터에서 고려인 청소년들로 구성된 '아리랑 가무단'이 북한식 조선춤인 칼춤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우수리스크에서 하룻밤을 보낸 기행단은 이튿날 14일 조선인 이주와 고려인 강제이주의 긴 여정을 더듬었다. 

라즈돌로예역.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를 잇는 연해주 1번 국도와 북한, 러시아, 중국을 잇는 대륙횡단 열차 중간 기착지. 작고 허름한 역에서 1937년 고려인들은 강제 이주길에 올랐다. 극동지역에서의 일본 정보원 침투를 차단한다는 이유로, 스탈린은 고려인을 열차에 강제로 태웠다. 

18만여 명의 고려인들은 야간에, 라즈돌로예역에 집결해 맨몸으로 중앙아시아로 떠나야 했다. 슬픔을 간직한 역사 내부에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입김이 공기를 감싸고 나라 잃은 백성의 서글픈 눈망울이 여기저기 맺혀있는 듯했다. 우리는 고려인의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기행단을 태운 버스는 조선인이 처음 연해주 땅을 밟던 포시에트항, 목허우로 향했다. 버스가 달린 도로는 하산과 라즈돌노예를 잇는 군사전용도로로, 최재형 선생이 당시 조선인을 모아 건설했다. 100년이 가까운 도로는 여전히 러시아 연해주의 유일한 도로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 도로에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곡괭이질을 하며 땀을 흘렸을까.

   
▲ 라즈돌로예역. 1937년 소련의 강제이주정책으로 18만 여 명의 고려인들이 이 곳에 집결에 중앙아시아로 떠나야 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러시아 최초 조선인 마을 '지신허'로 향하는 길.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상념에 젖었을 찰나, 13도의군 유인석 장군이 1년간 머물렀다는 바라바쉬 마을을 지나 러시아 최초의 조선인 마을인 '지신허'에 도착했다. 1860년 이전부터 두만강 주변에 살던 조선인들은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들어갔다. 1863년 최운과 양응범이 농민 13가구를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마을을 이뤘다.

1864년 60가구 308명에서 1868년 165가구, 1869년 766가구가 거주하고 1900년대에는 1천6백명이 살았다. 1937년 강제이주정책으로 마을이 해체되기 전까지 '지신허'는 대륙을 향한 조선인들의 꿈이 서린 곳이었다. 

가수 서태지의 기부로 '지신허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고 하지만, 기행단은 철망에 가로막혀 대륙을 꿈꾼 조상의 발자취를 까치발을 들어 바라만 봐야 했다. 

우수리스크를 출발한 지 4시간이 가까웠을 시각,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도착했다. 한말 의병운동의 중심지로 평가되는 '연추'가 바로 이곳이다. 

   
▲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자리한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 세 차례의 이전으로 이 곳에 위치하게 됐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대륙학교 2기 연해주 연수에 참가한 이들이 단지동맹비 앞에서 '기다리다 목 빠진 역장'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연추의 첫 방문지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 1909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투사 12명은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를 잘라 피를 모아 '대한독립'을 적었다. 그리고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역사를 기리기 위한 '단지동맹비'의 이력은 말그대로 수난의 길이었다. 2001년 추카노보 강변에 세워졌지만, 상습 침수지대에 있어 방치된 상태였다. 2007년 비석은 이전했지만, 러시아 정부가 국경수비대 발급 출입증이 없는 외국인 출입을 제한해 접근이 어려웠다. 그러다 2011년 크리스키노에 현지 농장을 갖고 있는 유니베라(옛 남양알로에)의 협조로, 유니베라 농장 앞에 우뚝섰다. 지금은 꾸준히 제대로된 관리를 받고 있다고 한다.

동양평화론을 펼친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기리고자, 대륙학교 2기생들은 희망래일이 펼치고 있는 '기다리다 목 빠진 역장'을 연출했다. 의사의 뜻이 분단을 넘어 통일로 그리고 대륙으로 뻗어가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다.

   
▲ 러시아 크라스키노 전망대에서 바라본 연추 일대.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크라스키노 전망대. 1938년 두만강 부근에서 소련과 일본의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한 것을 기념한 하산전투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발해 옛성 염주성과 연추가 한 눈에 보이는 곳.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박차를 가해 말 달려왔다는 지역. 이성계는 자신이 세운 나라가 일본에 의해 망할 것을 알았을까. 

탁트인 조망을 뒤로한 대륙의 꿈은 점차 분단의 현실에 다가섰다. 기행단은 포시에트항에 도착했다. 첫 한인 도착지라는 느낌보다 가로막힌 남북.러 경제협력의 터라는데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포시에트항은 러시아 시베리아 석탄을 실은 열차의 경유지이다. 이곳을 거쳐 하산역을 지나 북한 나진항으로 열차가 내달린다.

하지만 지난 9월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러시아 측의 외국인 출입불허 조치로 정작 가보고 싶던 북.러 경제협력의 현장은 볼 수 없었다. 박근혜 정부 당시 '5.24조치' 예외로 인정받아 세 차례 시범운송까지 진행됐지만, 정부의 독자 대북제재로 중단된 상태.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내세워, 나진-하산프로젝트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으리라던 꿈은, 문재인 정부의 강력한 대북제재와 압박으로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 포시에트항. 러시아 시베리아 석탄을 실은 열차 중간기착지로, 열차는 하산역을 지나 북한 나진항으로 향한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5시간 가까이 밤길을 내달려, 안타까움의 심정으로 지친 몸을 느낄 겨를도 없이, 버스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리고 기행 마지막 밤을 보냈다.

15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아침은 청량했다. 독수리 전망대에 올라 러시아 극동지역 부동항인 금각만을 바라보고, 블라디보스토크역, 블라디보스토크항, 혁명광장, 영원의 불꽃, 니콜라이 2세 개선문 등을 둘러봤다. 그리고 이어진 기행은 또 다시 마음을 저미게 했다.

먼저, 철제 울타리 넘어 조명희 문학비를 바라봤다. 일제당시 러시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민족문학가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동참했으며, '낙동강', '짓밟힌 고려' 등 저항시를 발표한 작가. 하지만 그는 1937년 일본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됐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문학비는 방문객의 체온을 느끼지 못한 채 쓸쓸히 철망 너머 한 켠에 서있었다.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조명희 문학비. 철제 울타리에 가로막혀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신한촌 기념비.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마지막 방문. 버스는 신한촌 기념비로 향했다. 일제시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잡고 있던 한인들은 개척리에 모여살았다. 그러나 1911년 러시아 당국은 페스트 창궐을 이유로 한인들을 서북편 외곽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잡초가 무성한 자갈밭을 일구며 한인들은 '신한촌'을 형성했다. 새로운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뜻이다.

1937년 강제이주 이후 신한촌에 러시아인들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 곳이 신한촌임을 증명하는 '신한촌 기념비'가 세워졌다. 물, 바람, 구름처럼 떠돌아야 했던 한인을 기억하려는 듯 세 개의 기둥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고령의 고려인이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었다. 너희들,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이 이곳에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듯. 신한촌 기념관을 건립하고자 하는 그의 꿈은 우리 모두의 몫이었다.

2박3일의 짧은 기행이 끝났다. 간도 하늘 위를 날던 비행기는 일본 열도를 따라 내려왔다. 3시간이 넘는 비행. 대륙으로 향하던 선조들이 걸어갔던 길을 오늘의 우리는 빙 둘러가야 했다. 분단의 아픔은 금단의 선으로 남아 남한을 섬으로 만들었다. 대륙을 향한 꿈은 분단의 현실을 직시할 때 꿀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을 끊어내는 힘은, 바로 우리자신, 평화를 향한 외침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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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계속된다” 28일 ‘촛불 1주년’ 집회 연다

퇴진행동 기념위 “적폐청산‧사회대개혁 위해 광화문광장서 한번 더 촛불”
▲사진 : 뉴시스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킨 광화문 촛불집회를 이끈 시민사회단체들이 오는 28일 촛불집회 1주년 기념집회를 열어 “촛불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는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촛불 1주년’ 선포 기자회견을 열어 “민주주의를 되살린 1700만 촛불의 역사적 항쟁을 기념하고, 촛불 국민의 명령이었던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을 촉구하기 위해 광화문광장에서 한 번 더 촛불을 든다”고 밝혔다.

퇴진행동은 지난해 10월29일 1차 집회를 시작으로 올해 4월29일까지 모두 23차에 걸쳐 박 전 대통령 탄핵을 이끈 연인원 1700만이 참여한 촛불집회를 주도했다. 퇴진행동은 지난 2월엔 사회대개혁 실현을 위해 재벌체제 개혁, 정치·선거제도 개혁, 좋은 일자리·노동기본권, 위험사회 구조개혁 등 ‘10대 분야 100대 촛불개혁과제’를 발표하기도 했다.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는 회견에서 “촛불이 밝혀진 지 1년이 다 됐고 정권이 교체된 지 6개월여가 지났지만 해결된 과제는 2%에 불과하다”면서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것, 진척되고 있으나 아직 미흡한 과제는 52%로 나타났다”고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이 미흡한 현실을 우려했다.

박석운 퇴진행동 기록기념위 공동대표는 “100대 개혁 과제 중에서 이재용 등 재벌총수 구속과 검찰의 청와대 편법근무 방지 2개 과제만 해결됐다”면서 “100대 과제 중 국회 입법과제가 69개로 나타난 것을 볼 때 국회의 역할이 매우 높아야 하다. 그러나 일부 야권은 적폐청산을 정치보복이라고 규정하며 적폐청산 사회대개혁을 거부하고 있다. 촛불이 국회로 옮겨붙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강자 공동대표도 “1700만 촛불 시민은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지만 적폐청산을 위해 내세웠던 100대 과제들이 얼마나 실현됐는지는 의문이 든다. 촛불은 계속된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는 촛불집회 1주년을 기념해 오는 28일 오후6시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은 계속된다’는 주제 아래 대규모 집회를 연다고 밝혔다. 집회에선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시민자유발언과 예술인들의 문화공연, 그리고 ‘소등 퍼포먼스’ 등도 펼쳐진다. 집회를 마친 다음엔 청와대 인근 청운동치안센터 방향으로 거리행진할 계획이다.

퇴진행동 기록기념위는 또 내년 3월10일 탄핵 1년을 앞두고 다체로운 행사를 계획 중이다. 12월9일 국회에서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시민들의 토론회를 연다. 내년 2월께엔 학술토론회를, 3월엔 세계 집회시위 주역들을 초청한 국제토론회도 개최한다. 또 촛불백서를 만들어 전국의 공공·대학 도서관과 온라인에 무료로 배포하고, 광화문광장에 바닥 동판 형태로 기념물을 설치할 계획이다.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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