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대응책 있다” 중 군부 호언장담,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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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리터리 차이나-윤석준의 차·밀] “사드 대응책 있다” 중 군부 호언장담, 이유는? | |
| 윤석준 | 등록:2018-02-02 12:48:27 | 최종:2018-02-02 12:59: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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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찾아 헤매다 고시텔서 사망한 그 입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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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8일, 보건복지부는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 비준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한국이 이 협약에 서명한 것이 2013년 5월이니, 4년 5개월만이다. 이 협약은 입양을 최후의 수단으로 여길 것을 강조하면서, 불가피하게 입양을 보낼 경우에도 국내 입양을 우선으로 하고, 해외입양의 경우 양국 정부가 나서서 양부모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는지 검증하고 입양아 국적 취득을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세계최대의 '고아 수출국' 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한 협약이다. 정부가 비준동의안을 제출하면서 남윤인순 의원 등은 그에 걸맞은 입양특례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관련 단체들의 반발로 법 개정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관련 기사 : "우리는 아동 일부를 포기합니다…언제까지?").
최근 몇 년 동안 해외로 입양되었던 국제입양인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언론을 통해 간간이 알려졌다. 바로 한 달 전에도 '얀'의 사연이 보도되었다. 노르웨이로 입양된 '얀'이 한국으로 돌아와 5년 동안이나 친부모를 찾아 헤매다 결국 고시텔에서 사망한 것이다. 그의 사례는 왜 우리가 '아동 최우선의 원칙'에 입각해서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의 내용을 지켜나가야 하는지 보여준다. '얀'의 경험은 그만의 특수한 것이 아니다.
2003년 <미국교정정신의학회지>에 실린 논문 "청년이 된 국제입양아 - 스웨덴 코호트 연구"는 발표된 지 무려 15년이 흘렀음에도 오늘날 한국사회에 중요한 교훈을 던져준다. 당시 스웨덴 연구진은 국가 통계자료를 기반으로 전국적인 추적조사 연구를 진행했다.
1968~1975년 사이에 태어난 5942명의 스웨덴 입양인 자료를 이용하여 가족과 고용조건, 정신 건강 문제, 학력 등을 확인하고, 이를 일반 인구집단, 이민자, 그리고 입양 가족 내 다른 형제자매들과 비교했다. 연구대상이었던 입양인 5942명 중 3237명이 동아시아 지역 출신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2658명이 한국에서 태어나 입양된 이들이었다. 나머지 중에서 1422명은 남아시아, 871명은 라틴아메리카, 412명은 아프리카 출생자였다.
분석 결과, 전 연령에서 성인 입양인들은 일반인구집단에 비해 정신질환, 약물남용, 알코올 중독 등 정신건강 문제를 더 자주 겪고 있었다. 장기간의 실직을 경험할 가능성 역시 입양인들이 더 컸고, 그러다보니 장기간 사회복지 수혜를 받는 경우도 더 많았다. 학력 수준은 일반 인구집단과 비슷했지만 사회경제적 위치를 고려해보면 그렇지 못했다. 즉, 입양된 가정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일반 인구집단과 비슷하다고 할 때 평균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교육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의 학력은 이민자 집단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일반적으로 어머니의 교육수준이 자녀의 대학 진학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입양아들의 대학진학 가능성은 어머니의 교육 수준과 관련이 없었다. 입양인들은 같은 연령대와 비교했을 때,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가능성도 더 낮았다.
한편 보다 어린 나이에 스웨덴으로 입양된 이들일수록 정신건강 상태와 학력 등의 지표가 더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입양 연령을 0~1세, 2~3세, 4~6세로 구분한 결과, 4~6세에 스웨덴으로 입양되어 온 경우 모든 면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보였다.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 출신인 경우에 정신건강 상태와 교육 수준, 고용 상태, 사회복지 수혜 여부 등 모든 면에서 결과가 좋았고, 남성보다는 여성 입양인의 결과가 좋았다.
연구진은 비슷한 교육 수준을 가진 스웨덴 출신자에 비해 국제 입양인들이 장기간 실업을 많이 경험하는 것은 눈에 띄는 외모 차이가 차별을 초래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학력조건이 비슷할 때, 스웨덴 출생자들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유럽권 이민자들이 비유럽권 이민자들보다 일자리를 쉽게 구하는 현상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국제입양인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경우가 더 적은 것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복지국가 모델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스웨덴에서조차' 국제 입양이라는 사건이 아동기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5년 7월, 국내 언론에는 "나는 입양 한인이다"라는 제목으로 미켈 룬 아너선(28세)의 이야기가 실렸다. (☞바로 가기 : "나는 입양 한인이다" : 스칸디나비아 입양 한인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
그는 생후 5개월에 덴마크로 입양되었고, 25년 동안 스스로 덴마크 인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대체로 행복하게 자랐던 그는 2012년 학교에서 한국에서 온 교환 학생들을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자신이 태어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정체성 갈등을 겪으며, 자신의 상황을 "두 의자 사이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덴마크에도 스웨덴에도 미국에도, 수많은 미켈 룬 아너선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입양인들에게 '정체성에 대한 권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사람마다 정체성 갈등을 겪기 시작하는 시기와 이유, 그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과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원 가정 양육을 우선한다'고 선언한 것, 그리고 유엔아동권리협약 제 7조에서 아동이 자신의 출신에 대해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그만큼 인간에게 '정체성에 대한 권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입양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부모, 입양아를 맞아들인 새로운 부모, 이 과정을 연계하고 돌봄을 제공한 여러 단체와 선의의 자원봉사자들. 이들 모두가 입양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각자의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동 최우선의 원칙'이다. 실업과 차별, 고립으로 어려움을 겪는 입양인들, 무엇보다도 정체성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입양 아동과 청소년, 성인들의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입양특례법 개정에서 아동 최우선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북 외무상, 유엔총장에 미국의 핵전쟁도발책동 완전 중지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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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가족'으로 살아야 했던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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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조력자 된 선생님, 16살 소녀가 겪은 슬픔
"엄마는? 엄마는 안 잡혀갔어?"
나? 나는 경찰에 잡힌 적이 없다. 게다가 그해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라 2년이 지나서야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영화 <1987>엔 등장인물이 많다. 그중 가장 눈에 잡힌 인물은 고 박종철 열사의 가족이다. 부검 장소에 뒤늦게 나타난 삼촌은 부검을 지켜보며 눈이 충혈된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킨다.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갈 수 없는 자리가 삼촌이 선 자리였고 '운동권 가족'의 선 자리이기도 하다.
누군가 민주화 운동을 할 것인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운동권 가족'이 될 것인가는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가족은 다만 당하고 견디고 버텨내야 한다. 수많은 가족이 모욕을 당했고 두려움에 떨면서 '운동권'을 뒷바라지했다.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다.
'운동권' 아들 뒷바라지 했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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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1987>의 한 장면.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고 있다. | |
| ⓒ CJ엔터테인먼트 | |
엄마는 어느 날, 난생 처음으로 아들이 다니는 대학교 교수님의 전화를 받는다.
"지금 ○○이가 교정에서 미친X처럼 날뛰고 있으니 빨리 오셔서 데려가세요."
순진한 엄마는 그 전화를 받고 가슴이 덜덜 떨렸다. 가게 문을 닫고 자식을 잡으러 학교로 쫓아갔다. 그 뒤로 엄마는 전화벨만 울리면 한동안 가슴이 벌렁거렸다 한다.
어떤 날, 집에 왔는데 엄마가 없었다. 문 앞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는데 형사 아저씨 둘이 왔다.
"왜 안 들어가니? 열쇠 없니?"
아저씨가 물었다.
한 아저씨가 윗집 슈퍼에 다녀와서 또 물었다.
"슈퍼사장님 말씀이 너 방금 집에서 나왔다던데 열쇠 있으면서 우리 때문에 안 들어가는 거지?"
거짓말을 하는 아저씨의 모습이 너무 기가 막혔다. 슈퍼 아저씨가 없는 말을 만들어서 했을 리는 없으니 거짓말은 형사들이 하는 게 분명했다. 더 이상 말대꾸하기 싫어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 집으로 향했다. 아저씨들은 내 뒤통수에 대고 '버릇이 없네' 하는 말을 했다.
또 한번은 집에 압수수색을 하러 형사들이 닥쳤다. 형사들은 책장과 서랍을 뒤지더니 책 몇 권을 가져갔다. 그들이 가고 아버지는 책이란 책을 다 꺼내서 던져 버렸다. 집안엔 비명이 쏟아지고 물건이 부서졌다. 그 난장판은 결국 엄마가 치웠고 우리는 그렇게 '운동권 가족'이 되어갔다.
"오빠 직장이 어디니?" 담임쌤의 질문
1986년, 담임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불렀다. 나의 고1 선생님은 대학원을 갓 졸업한 새내기 남자 선생님이었다. 큰 키에 마른 몸매로 손가락까지 길고 하얬다. 가르치는 과목은 내가 좋아하는 수학이었다. 선생님은 길고 하얀 손에 분필을 잡고 칠판에 그래프를 척척 그려냈다. 우리는 모두 선생님의 솜씨에 감탄했다.
우린 화이트데이 때 선생님께 사탕을 사 달라고 졸랐다. 종례 시간에 선생님은 사탕이 가득 든 봉투를 들고 오셨고 교실엔 환호성이 터졌다. 선생님은 얼굴이 발개지도록 쑥스러워하시곤 교실서 나가셨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나는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싫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오라고 하신 거다. 선생님은 내가 낸 가정환경 조사서에 오빠 이름 옆 칸을 손으로 가리키셨다. 오빠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였다.
"여기 직장이 어디인지 안 썼더라. 직장이 어디니?"
내 몸의 모든 촉수가 곤두섰다. 여태까지 학교에서 부모님의 직장에 대해선 자세히 물어도 내 형제자매에 대해 자세히 묻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오빠는 형사가 압수수색까지 한 인물이다. 형사가 찾아온 거 같았다.
"어디 다니긴 하는 거 같은데. 회사 이름은 잘."
"아니, 이상한데 어떻게 고등학생이나 된 동생이 그걸 모를 수가 있어? 이상하지 않아? 선생님은 이상한데."
선생님은 날 몰아세웠다. 갑자기 화가 났다. 이렇게 윽박지르면 내가 그걸 술술 말할까? 내가 그리 순진하게 보이나?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어졌다.
"동생이 그런 거 모를 수도 있지 뭘 그러세요."
"아니, 넌 선생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담임은 내게 화를 냈다. 형사의 부탁으로 담임이 나에게 내 형제의 행적을 물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게 된 건 그 이후에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선생님, 교수님... 당신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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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1987> 스틸컷 | |
| ⓒ CJ엔터테인먼트 | |
얼마 뒤, 형사들은 결혼한 큰 언니의 시댁까지 찾아갔다. 외국에 사는 언니가 친정에 무슨 일이 있냐며 국제전화를 해서 형사가 사돈댁까지 찾아 갔다는 걸 우리도 알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관계가 사돈이 아닌가? 사돈댁까지 형사가 찾아갔다니 우리 학교 찾아 오는 건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학교에 찾아온 형사가 담임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다면 담임은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 86년은 전두환 독재 정권 시절이니까. 그것까진 이해하겠다. 하지만 선생님은 제 형제가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나에게 '이상하다'며 윽박지른 것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꼭 그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의 바닥을 나에게 보였어야 했을까?
나는 열여섯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제일 슬펐던 것은 고등학생인 내가 선생님을 아무 이유 없이 마냥 좋아하는 그 마음을 더 이상 품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거다. 결국, 난 선생님도 믿지 못하는 학생으로 자랐다.
그해 연말에 오빠는 구속된다. 엄마는 오빠를 면회 가다가 고 박종철 열사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엄마가 느꼈을 고통을 나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몇 개월 뒤, 오빠는 집행유예를 받고 나온다. 고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은 6월 9일 이후로 시내에는 시위 때문에 한동안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엄마는 아침에 고등학생인 나를 위한 도시락을 두 개 싸주고 집에 안 들어오는 오빠를 위한 도시락을 싸서 집을 나섰다. 서울역에서 신촌까지 걸어갔다. 자식의 생사를 확인하고 자식에게 밥을 먹이고 엄마는 또 그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께 저녁을 차려 드려야 했으니 엄마의 발걸음은 급했다.
서둘러 걷던 엄마는 시내방향으로 걸어가는 아줌마 무리를 만난다. 수십 명의 아줌마들은 네 명씩 줄지어 명동 성당 쪽으로 가고 있었다. 엄마는 저이들은 식구들 저녁도 안 짓고 어디를 가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저렇게 많은 엄마가 저녁도 안 짓고 나섰으니 세상이 정말로 바뀌긴 바뀌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민가협 어머님들이 아니었을까? 엄마는 그렇게 회상한다.
1987년 '운동권' 가족들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살았다. 우리 집 말고도 더 많이 고생한 가족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 수많은 엄마, 아버지, 배우자에게 애 많이 쓰셨다. 그리고 고생하셨다. 위로의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형사의 조력자로 나섰던 우리 담임 선생님.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 한 교수님. 독재에 조력했던 일부 교육자들은 영화 <1987> 보고 언제가 되든지 꼭 한번은 반성했으면 좋겠다. 팔순의 우리 엄마도 당신의 전화를 잊지 못하고 당신이 함부로 윽박지르던 학생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 않고 있으니.
‘세월호 특조위 방해’ 의혹 해수부 전 장관·차관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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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조위 방해’ 의혹 해수부 전 장관·차관 구속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 4·16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한 혐의를 받는 김영석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유학배 전 차관이 구속됐다.
양철한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는 1일 "범죄혐의가 소명되고 도망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김영석 전 장관과 윤학배 전 차관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앞서 서울동부지검 형사 6부(부장 박진원)는 지난달 30일 이들에 대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해수부 내부 법적 검토를 무시하고 세월호 특조위 활동 기간을 고의로 축소하는 등 특조위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해수부 직원들과 세월호 특조위 파견 공무원에게 세월호 특조위 내부 상황과 활동 동향 등을 확인해 보고하도록 하고, 이를 바탕으로 직원들에게 세월호 특조위 활동에 대한 각종 대응 방안을 문건으로 작성하고 시행을 지시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검찰은 세월호 특조위 대응 문건 작성에 청와대가 개입했는지 여부에 대해 집중적으로 확인할 방침이다. 해수부 내부 감사 결과에서도 세월호 인양 추진단 실무자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세월호 특조위 관련 현안대응 방안' 문건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해양수산비서관실과 협의했다고 진술했다.
“다시 가다니 굉장히 감격” “꿈인가 생시인가” 셀렘과 반가움 교차한 남북 스키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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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식령스키장서 1박2일 남북 스키훈련...1일 북측 선수들과 함께 귀국

“여러분 지금 막 (북한 영공을) 통과했습니다. 누군가가 앞서 걸었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게 됐습니다. 굉장히 감격스럽습니다.”
1월 31일 오전 강원도 양양국제공항에서 북한 갈마비행장으로 향하는 아시아나항공 전세기 차호남 기장의 안내 방송이 기내에 흘러나왔다. 기내에는 타고 있던 스키 선수단의 긴장감과 설렘이 교차했다.
이들은 이날부터 1박2일 동안 북한 원산 마식령스키장에서 북측 선수들과 스키 합동훈을 갖기로 한 남측 선수단이다. 이는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열리는 문재인 정부의 첫 남북 스포츠교류 행사이다.
대한스키협회 임원과 선수로 구성된 남측 선수단을 싣고 갈마비행장까지 비행할 예정이었던 아시아나 전세기의 이륙 여부는 출발 당일인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확정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미국이 9월 대통령 행정명령(13810호)으로 발표한 독자 대북제재 때문이었다. 이 행정명령은 북한에 착륙했던 항공기는 180일간 미국에 착륙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미 간 막판 협의 끝에 정부는 이번 전세기 운항은 미국 독자 제재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미국 측의 승인을 받았고, 가까스로 전세기는 이륙할 수 있게 됐다.

“선생님이 다시 오실 줄 알았어” 스키협회 반갑게 맞이한 북측
이른 아침에 양양국제공항에 도착한 남측 선수단의 표정은 밝았다. 난생 처음 가보는 북한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하는 동시에 기대감을 높이고 있었다.
선수들은 모여서 손을 들고 ‘화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김현수 선수(단국대, 22)는 “좀 긴장되기는 하지만 재밌는 경험일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재혁 전 알파인스키 국가대표 감독은 “정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이렇게 생각했다”며 불과 며칠 전 정부로부터 남북 합동훈련 제안을 받았을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굉장히 기대가 된다. 남북이 이렇게 합동 훈련을 한다는 데 대해서 정말 스키선수로서 스키인으로서 굉장히 영광”이라며 “가서 북측 선수들과 좋은 훈련을 해서 좋은 결과를 얻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출국장에서도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모습이 연출됐다. 이주태 통일부 교류협력국장은 전세기 탑승을 위해 국제선 출발장에서 내민 표를 보고 항공사 직원이 고개를 갸웃하자 “저희는 북한에 가는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뒤에 줄 서있던 사람도 “저희 방북하는 겁니다”라고 부연했다.
표 받아든 직원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신기하다는 듯이 표를 유심히 보다가 되돌려줬다. 그 뒤로는 항공권 검사가 순조롭게 이뤄졌다.
전세기는 ‘역 디귿(ㄷ)’ 모양으로 비행해 갈마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김철규 갈마비행장 항공역장과 리항준 체육성 국장이 남측 선수단을 맞이했다. 리 국장은 남측 김남영 대한스키협회 부회장에게 “선생님이 다시 오실 줄 알았어”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스키장 정상에서 남북이 함께 외친 “우리는 하나다”
남측 선수단은 갈마비행장에서 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려 마식령스키장에 도착했다. 마식령호텔 식당에서 가진 점심 메뉴는 무려 19가지나 됐다. 남측 선수들은 “이렇게 잘 나올 줄은 몰랐다. 맛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어 설질 등을 확인하기 위한 프리스키 훈련이 오후 3시부터 1시간 반 가량 실시됐다. 남측 알파인 선수들은 북측 선수들과 같이 스키를 타기도 했다.
남측 박제윤 선수는 “선수 입장에서는 굉장히 훈련하기가 좋은 스키장이었다. 설질도 괜찮았다”며 “지형 변화가 많고 슬로프의 각이 클수록 좋은데, 이 스키장은 그런 측면에 있어 좋은 조건을 갖춘 스키장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또 남북 선수들은 곤돌라를 타고 스키장 정상으로 올라가서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선수들은 스키복에 번호를 달고 훈련에 임했다. 남북은 스키 합동훈련을 할 때 선수들이 옷에 단 번호표 위는 초상 휘장, 태극기 등 아무것도 달지 말자고 서로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틀째인 1일 오전에는 알파인 스키와 크로스컨트리 스키 종목에서 남북이 친선경기과 공동훈련을 한다. 훈련을 마친 뒤 이날 오후에 전세기를 타고 돌아올 때에는 평창 올림픽에 출전하는 북한 스키 선수들을 포함한 북한 선수단 일부와 함께 올 예정이다.


역사는 6.15 자주통일 헌법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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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6.15 자주통일 헌법을 요구한다 | |||
| 기사입력: 2018/02/01 [11:0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기초한 자주통일 평화번영 헌법 개정을 촉구하며 문재인 대통령과 국회, 제정당사회단체, 국민들과 해외동포들에게 보내는 6.15 10.4 국민연대 호소문>
우리는 조국의 분단을 막고 민족통일국가를 세우기로 결정한 역사적인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70돌이 되는 올해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기초한 자주통일 평화번영 헌법 개정을 통하여 국민주권 실현과 분단 적폐 청산을 완수할 것을 문재인 대통령과 국회, 제정당사회단체, 국민주권자들과 참정권을 갖는 해외동포들에게 열렬히 호소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헌법 개정과 관련해 “헌법은 국민의 삶을 담는 그릇”이라며 “국가의 책임과 역할, 국민의 권리에 대한 우리 국민의 생각과 역량이 30년 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30년이 지난 옛 헌법으로는 국민의 뜻을 따라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또 “국민의 뜻이 국가운영에 정확하게 반영되도록 국민주권을 강화해야 한다. 국민의 기본권을 확대하고, 지방분권과 자치를 강화해야 한다”며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는 국민과의 약속”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불멸의 업적인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소중히 이어갈 것과, 그와 관련한 법제화를 공약했다.
국민주도헌법개정전국네트워크는 국회에 제출한 ‘개헌 15대 과제’ 청원서에서 “촛불정신을 반영해 헌법 전문 및 총강 규정이 개정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민주권을 유린해온 식민과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고 자주통일 평화번영을 완수하는 것은 촛불시민혁명의 본질적 요구이다. 6.15 시대에 맞게 개정 헌법의 전문에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 대강령인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과 평화번영의 실천강령인 10.4 선언을 핵심으로 담아내야 한다.
또한 4.19혁명에 이어 5.18민중항쟁, 6.10항쟁, 촛불시민혁명을 민주이념으로 개정 헌법 전문에 명시하고, 헌법 전반에 걸쳐 이러한 전문의 정신이 관통되도록 해야 한다.
도탄에 빠진 민생을 살리려면 무엇보다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실천해 남북경제공동체를 발전시켜야 한다. 6.15 10.4 선언을 짓밟은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통일경제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가계부채는 1500조원에 육박하고 기업부채와 정부부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국민경제는 총체적 파산 직전에 몰려 있다.
그동안 6.15 10.4 자주통일 평화번영을 가로막은 정치인들의 민생 ‘복지타령’은 분단기득권에 안주한 정치기술자들의 구두선이며 속임수에 지나지 않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기초한 자주통일 평화번영 헌법으로 유무상통 공리공영의 남북경제공동체의 길을 활짝 열어야 천문학적 규모의 분단비용을 복지로 돌려 민생을 살리고, 온 겨레가 행복한 통일복지국가를 실현할 수 있다.
또한 외국자본이 지배하는 분단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고, 남북의 인적 물적 자원을 공동 개발해 청년실업을 비롯한 일자리문제를 전면 해결하고, 내수를 살려 기업이 열 배 백 배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통일복지국가의 남북경제공동체가 실현되면 남과 북은 세계 최고의 물류기지, 금융의 중추, 관광대국으로 발전할 것이며, 골드만삭스 같은 외국 신용평가기관이 전망한 바와 같이 머지 않아 세계 1등국가로 우뚝 설 것이다.
역사는 6.15 10.4 자주통일 평화번영 헌법을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은 국민주권자들의 기본권 중의 핵심이며, 한세기 식민과 분단의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정의와 역사정의를 높이 세우는 길이다.
우리는 이러한 국민주권을 보장하는 개헌을 위해 6월 국민투표 실시 전에 분단 적폐 중의 적폐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모든 양심수를 석방할 것을 촉구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국회, 제정당사회단체, 국민주권자들과 참정권을 지닌 해외동포들이 분단기득권의 권력구조 재편 논의에 매몰되지 말고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기초한 자주통일 평화번영 헌법 개정에 지혜와 힘을 모아줄 것을 다시 한번 호소한다.
2018년 2월 1일 <6.15 10.4 국민연대 상임대표 박해전> |
탈핵 이야기 1 - 황분희 월성원전 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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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째별 | 등록:2018-02-01 08:25:55 | 최종:2018-02-01 10:24: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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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갖춘 스승 만나면, 머릿속에서 지진이 일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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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기의 뷰] 세계 지성들과 만났던 인터뷰어 안희경의 '키워드'
"세계의 석학들은 생존 가능한 사회, 억압 없는 사회를 만드는 답을 한국인이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성취해온대로 또다시 다수의 삶을 지켜낼 변화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창을 열어 밖을 바라보려고, 더 멀리 보려고 안경알만 닦아왔던 내게 석학들이 꺼내준 것은 거울이었다. 내 안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 결국 답은 내 안에 있었다."|<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오마이북, 2013)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관념,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습관이 된 희망 속에서 더 가지고 싶다는 욕망은 성장의 동력으로 격려받았다... 국내총생산(GDP)과 국민총소득(GNI)의 숫자가 높아진 동시에 빈부의 차이가 커지면서 우울한 국민도 함께 늘어나는 이 진행 방향을 성장과 발전이라고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문명, 그 길을 묻다>(이야기가있는집, 2015)
"'다수의 약자들은 왜 강자를 위한 선택을 할까?'라는 물음을 떨칠 수 없었다. 답은 '내 마음을 흔드는 힘의 실체를 살피지 못해서가 아닐까'로 모아졌다... '나'의 삶이 가능한 조건을 보다 깊이 살핀다면 '나'는 세상 모든 생명과 연결되어 보살핌을 받는 존재라는 자각도 이어지리라 기대한다. '나'의 안녕을 위해 지구 전체가 안녕해야 한다는 각성은 공존의 미래를 건설하는 진전이리라. 이성의 동물이라는 우리가 그 이성을 하루에 몇 분이나 써가며 사는지 점검해보고 싶었다."|<사피엔스의 마음>(위즈덤하우스, 2017)
꾸준히 세계 지성들과 만나 그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오마이뉴스>와 <경향신문> 등 미디어를 통해 그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건넸다. 못다한 이야기는 인터뷰어의 시각이 담긴 글로 다듬어, 호흡 긴 독자들을 위해 단행본 책으로 펴냈다. 이처럼 혜안을 갖춘 지성과 눈 밝은 독자의 '가교' 역할을 하는 이가 있다. 재미작가이자 전문 인터뷰어 안희경씨다.
세계 지성들과의 대화로 엮은 '문명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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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희경 작가. | |
| ⓒ Adam Singsinthemountain | |
지난 2013년부터 2년 주기로 펴낸 세계 지성들과의 인터뷰 책은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문명, 그 길을 묻다>, <사피엔스의 마음> 등 3권. 안희경은 이를 '문명 3부작'이라고 부른다. 이와 별도로 지난해 12월에 펴낸 <어크로스 페미니즘>(글항아리)은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주제별 대화를 담았다.
대학교 4학년 때부터 SBS와 불교방송(BBS) 리포터로 활동했던 안희경은 8년 동안 불교방송 PD로 일했다. 1998년과 2000년 한국방송대상 우수작품상을 받으며 잘나갔던 그는 지난 20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다가, 번역 일과 본격적인 취재 활동에 나선 건 지난 2009년부터다. 큰 범주에서는 언론 활동이지만, 팀 플레이를 했던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단독 플레이어로 뛴 셈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안희경은 한 해에 두 번 정도 한국을 방문한다. 지난해에도 12월 초에 들어왔다 올해 1월 초에 돌아갔다. 그 기간 동안 <사피엔스의 마음>과 <어크로스 페미니즘> 등 새책을 주제로 서울과 대구 등에서 독자들과 '북 토크'를 가졌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작가 안희경을 만났다. 독자들에게 에너지를 주기 위해 본인의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쓴 탓일까? "이번엔 약간 번아웃(burnout)된 상태에서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자주 쓰는 키워드가 있다. 그 키워드를 좇다보면, 그 사람의 관심사와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나와 우리, 약자와 사회, 개인과 망(網), 문명과 미래, 왜(Why)... 안희경의 글과 말에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다.
기자가 생각하기엔, '안희경의 키워드'에 등장하는 '나'는 객체이자 주체다. '우리'는 뜻을 함께 하는 공동체이자 사회다. '약자'는 말 그대로 공동체 안의 마이너리티다. '망(網)'은 네트워크로 직역하기 어려운 미묘한 차이를 담고 있다. 점선일 수도 있고, 실선일 수도 있지만, 눈에 띄거나 손에 잡히는 개념은 아니다. '문명'과 '미래'는 성찰이자 지향이다. 그 모든 것에는 '왜?'라는 꼬리표가 달린다. 그리고 그 말과 글은 마치 망과 같은 '생각 기차'로 연결된다. '조합'이 아닌 '결합'의 형태다. 그 안에서 사유가 똬리를 튼다.
"지혜를 갖춘 스승을 만나면, 머릿속에서 지진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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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암 촘스키와 인터뷰하는 안희경 작가. | |
| ⓒ 김아람 | |
"저도 미국에선 마이너리티에요. 한국에 사는 동남아 사람들을 보면 자매같은 느낌을 받아요. 나도 미국에서는 이방인이자 여성이고 사회적인 약자이니까요. (미국 생활) 처음에는 미소를 많이 지었어요. 약자는 미소를 많이 머금게 돼요. 아이들이나 강아지도 귀여운 얼굴이 우성이듯. 오래 살다보니 지금은 (그런 강박에서) 조금 벗어났어요. 남들이 그렇게 보거나 말거나 (신경을 덜 쓰게 됐지요.)"
안희경의 키워드에 등장하는 '약자(마이너리티)'는 탐구 대상일뿐만이 아니라 본인의 처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조건의 다름에 따라 차별받지 않아야 하는 소중한 공동체의 일원이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책을 읽다가 '머리 속에서 팝콘이 터지듯'이라는 표현을 봤어요. 맞아요. 지혜를 갖춘 스승들에게 만남을 청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듣다보면 팝콘이 터지듯 머릿속에서 지진이 나요. 이 분들을 섭외해서 만나는 게 중요하지만, 만나서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가 더 어렵고 중요해요. (누구나 물어봐서) 이미 답변했던 이야기를 나누려면 뭐하러 찾아가겠어요. 현장과 밀착된 이야기, 내 질문을 던져야지요. 내가 느끼는 아픔이 무엇인지, 막막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내 것으로 꽉 차서 가지 않으면 그 분들에게 지혜를 얻기가 어렵죠."
안희경의 '인터뷰 로드'는 고단한 여정이다. 지난 2014년 <경향신문>에 '문명, 그 길을 묻다'를 연재할 때 재레드 다이아몬드, 노암 촘스키, 지그문트 바우만, 장 지글러, 원톄쥔, A.T. 아리야라트네 등 시대의 스승에게 배움을 청하는 길을 나섰다. 같은 이름의 책 서문에서 안희경은 20만리가 넘는 그 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서울과 부산의 겨울에서 영국 리즈의 겨울로, 다시 파리의 겨울을 거쳐 혹한의 폭설주의보가 내린 보스턴의 겨울까지 옷깃 여미며 가슴 데우는 시간을 가졌다. 봄, 2월부터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캘리포니아 꽃의 향연을 4월 대륙의 동쪽 끝 뉴저지에서 망울 터지는 벚꽃으로 다시 맞았다. 남부 캘리포니아, 서울, 타이베이, 일본 시나노 오오마치의 여름에서 뉴헤이븐 예일대 고즈넉한 가을의 문턱까지, 그렇게 사계절 내내 마음을 품으며 순례했다."
"아, 대화의 또다른 심도는 쉼표에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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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루야마 겐지. | |
| ⓒ 안선영 | |
궁금했다. 얼굴 한 번 마주 보기조차 힘든 지성들을 어떻게 만나서 속내를 끄집어냈을까. 그 비결은 무엇일까? 결론은 '공짜 점심이나 왕도는 없다'는 것이다. 공을 들였는데도 인연이 안돼 못 만난 이들도 있고, 대부분 만남을 청한 뒤 최소 수개 월이 지나야 만날 수 있었다. 한 가지 명확한 건, '역지사지' 해서 그들이 지금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를 심도깊게 고민하는 정지작업이 중요하다는 것. 그런 뒤 온 힘을 다해 '내가 왜 당신을 만나야 하는지, 만나려고 하는지'를 편지(이메일)로 띄웠다. 그렇게 주사위는 던져졌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등 다수의 책이 소개돼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일본의 작가 마루야마 겐지. 그는 독설(직설)과 은둔의 작가로 불린다. 안희경은 마루야마 겐지를 만날 때도 출판사를 통해 그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집단의식을 드러내보고 싶다"고. 마루야마 겐지는 일관되게 국가라는 허상과 허울 속에서 잠든 개인의 이성을 흔들어 깨우는 일을 해왔기에, 인터뷰에 흔쾌히 응했다. 만나지 못하면 인터뷰는 성립되지 않는다. 핵심을 꿰고, 마음을 담은 제안이 아니면 움직이기 어렵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살불살조(殺佛殺祖)'도 역설적으로, 부처를 만나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안희경이 세계 곳곳을 다니며 지성들과 '면대면 인터뷰'를 추구하는 까닭은, 그들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눈을 마주치고 호흡을 살피는 것도 인터뷰의 중요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분과 인터넷 전화 '스카이프'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아쉬움이 많았단다. 그건 네이티브가 아니라서 갖는 언어의 한계만은 아니다. 오히려 교감의 제약 탓이 더 컷다.
지성들과 '면대면 인터뷰'를 하면서 안희경은 '쉼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인터뷰를 할 때 질문이 매끄러운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은 예전보다 영어가 늘어 질문도 길어졌지만, 처음에는 머리 속에서 번역기가 작동하니까 '포즈(pause)'가 발생해 오래 걸리는 거예요. 예전에 한국에서 방송할 때는 매끄러웠는데. 그래서 고민을 했죠. 내가 호응을 잘 하면 저 분의 답변 내용이 더 깊어질까? 그런데, '포즈' 때문에 질문이 매끄럽게 쑥 들어가지 못하니까 오히려 상대(인터뷰이)가 더 깊게 내려가더라구요. 아, 대화의 또다른 심도는 '포즈'구나. 침묵이 끌고가는 심도가 있구나. 이걸 배운 거죠."
반전이 숨어 있었던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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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그문트 바우만과 인터뷰하는 안희경 작가. | |
| ⓒ 안선영 | |
다른 일도 그러하듯 인터뷰도 종종 뜻한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가벼운 답변을 예상하고 던진 질문인데, 예상 외로 답변이 길어질 때도 있다. 더 난처한 건, 예상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어렵사리 잡은, 분초를 다투는 지성들과의 인터뷰 때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상황은 노력한다고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애초 예상했던 상황과 다르게 진행됐던 인터뷰에 대해 물었다. 안희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영국 리즈에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을 만났을 때 그랬어요. 시대를 대표하는 사회학자에게 사랑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어요. 인터뷰를 시작한 지 5분쯤 지나자, 한 여성 분이 들어왔어요. 그러더니 바우만이 '진짜 사랑 얘기는 이 사람이 전문가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난감했어요. 바우만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 건데, (인터뷰를) 망친 거잖아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 분도 사회학에서 이름난 석학이었어요. 폴란드 초대 대통령의 딸인 알렉산드라 야신스카 카니아는 바우만의 부인이었어요. 알렉산드라에게서 사랑의 객체와 주체의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뜻 깊은 이야기였고, 완전 반전이었죠. (지성들과 인터뷰를 계속하다보니) 예상했던 인터뷰 각이 종종 틀어진다는 걸 알게 됐죠. 그 분들과 인터뷰를 할 때는 (질문을 다 못한다고 해도) 고민해간 키워드 서너 개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지난 2017년 1월 9일 바우만은 9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고작 두 번의 만남을 가졌을 뿐이지만, 매번 내 무지의 더께를 쪼개어 세상을 한 뼘 더 깊숙이 들어가 통찰하도록 해줬던" 바우만의 별세 소식을 듣고 안희경은 무릎이 꺾였다. 그리고 바우만이 전해주려고 했던 사랑의 진실을 떠올렸다. 바우만, 촘스키, 반다나 시바 등 우리시대 사상의 거장들은 "처음부터 바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라고 안희경은 말한다. 그러나 바우만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심연으로 사라졌다.
"아, 목숨 값을 하며 살아야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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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미작가 안희경. | |
| ⓒ Corky Lee | |
"밥상의 사회주의화요."
앞으로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는 무엇이냐는 물음에 안희경은 이렇게 답했다. 기회가 되면 '유기농 투어'를 하고 싶단다. 왜? "가장 중요한 복지는 누구에게나 양질의 먹거리를 제공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사슴이나 코요테도 스스로 자기 먹을 것을 찾는데, 자본의 질서 아래서 인간은 돈을 벌어야 먹고 살기 때문에 정작 스스로 먹고 사는 방식을 잃어버렸다는 거다. '문명 3부작'의 후반부에 마음을 좇다보니, 진짜 중요한 게 몸이라는 걸 깨달았단다. 자본주의의 질주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을 흙에서 찾아보겠다는 안희경은 요즘 '자립'이라는 키워드에 골몰하고 있다.
안희경의 이런 고민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든 게 아니다. 몇 해 전, 안희경이 '365일 우주로 향해 열린 키친'이라고 불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걸치 선원(Green Gulch Palm Zen Center)'에 갔을 때였다. 유기농 농사를 짓는 그 곳에서 모종을 심어놓은 모판을 봤다. 모판에 붙여놓은 테이프에 수많은 벌레들이 달아붙은 채 죽어 있었다. 그걸 보고 깨달았다.
"내가 먹고 사는 것에는 이렇게 많은 생명들이 연결돼 있구나. 아, 목숨 값을 하며 살아야 하는구나."
마지막으로 물었다. '안희경에게 글쓰기는 무엇이냐'고? 잠시 머뭇거리다 답이 돌아왔다.
"쥐뿔도 못 쓰는데 무서워요. 그래서 나를 다독여요. '글은 지웠다가 다시 쓰고 고치면 되잖아'. 고치고 고쳐서 쓴 글이 조금이라도 세상을 고치고 바꿀 수 있다면... 내 아이가 웃을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
[관련 기사]
“한달 110만원…최저임금 비판하는 분들 이 돈으로 살아보라”
본문
등록 :2018-01-31 05:00수정 :2018-01-31 08:56
전기장판 고장나도 구매 망설여
창피하지만 이게 생계비 전부
‘최저임금 생활자’ 3인의 목소리
“많은 돈 벌겠다는 욕심 없어
삶 지탱하려면 최저임금 절실”
최저임금이 시간당 7530원으로 오른 지 꼭 한달이 됐다. 최저임금 16.4% 인상 뒤 ‘기업 부담이 커지고, 고용이 줄고 있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제기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대통령선거 당시 약속했던 ‘최저임금 1만원’(2020년) 목표가 자칫 흐려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당수 ‘최저임금 노동자’의 목소리는 숱한 논란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구 생계를 대부분 책임지는 ‘핵심 소득원’의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가는 대형마트 노동자와 제조업 사내하청 노동자, 인디뮤지션 등을 만나 그들의 눈에 비친 ‘최저임금 논란’을 따라가봤다.
통장이 아닌 ‘텅장’(텅 빈 통장)이었다. 월급은 매달 10일 꼬박꼬박 통장에 들어왔다. 그러나 입금과 동시에 사라졌다. 꼬박 10년을 일했지만 남는 것은 마이너스 통장 대출 1천만원이 전부다. 올해 마흔여섯, 중학생 아들을 혼자 키우는 여성 마트노동자 박성실(가명)씨의 삶은 팍팍했다.
박씨는 10년 전 남편과 이혼했다. 당시 5살인 아들과 자신의 생계를 위해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30대 중반에 일자리 구하기는 만만치 않았다. 겨우 자리잡은 곳이 대형마트인 홈플러스 매장이었다. 첫 2년은 시간제로 일했다. 이후 무기계약직 자리를 얻었다. 박씨는 마트 영업시간에 따라 하루 7시간씩 3교대로 하루 종일 서서 일했다. 환불과 반품 처리 등 주로 고객상담 업무를 맡았다.
박씨 임금은 늘 시급 기준으로 최저임금보다 고작 몇원 많았다. 지난해 세금 등을 떼고 통장에 찍히는 돈은 한달 110만원 남짓에 그쳤다. 월급은 통장을 ‘스쳐가는’ 것만 같았다. 임대주택 임차료와 관리비 16만원, 아들 학원비 25만원, 보험료·통신비 등 고정지출로만 월급 절반이 훌쩍 날아갔다. 한창 자랄 나이인 아들 식비는 차마 줄이지 못한다. 통장에 현금이 없다는 것이 박씨한테는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최대한 아껴 쓴다고 해도 월급보다 지출이 많으니까 현금 거래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어요. 가끔 경조사 생기면 현금서비스를 받았어요. 저축도 거의 못 했는데 빚만 남았네요.”
2013년부터 경기도 안산의 한 제조업 사내하청업체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 김미애(34)씨도 최저임금 생활자다. 하루 종일 서서 조립과 검수 업무를 한다. 원청업체 쪽의 물량 압박 탓에 화장실 갈 시간도 없어 물도 못 마시고 일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받는 임금은 최저시급보다 50원 많은 수준에 그쳤다. 월급은 130만원 남짓이다.
남편도 학원강사를 하며 한달 120만원 남짓을 벌어, 가구 소득은 250만원을 조금 넘었다. 두 사람이 살기에는 빠듯했다. 신혼집 전세자금 대출 2천만원도 갚는 중이고 최근엔 시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병원비도 보태야 했다. 살림살이는 더 팍팍해졌다.
“월급 받으면 장부터 보는데 먹는 것도 줄여야 했고, 마트를 갈 때에는 늘 할인되는 품목만 샀어요. 병원비도 제법 나갔는데 그럴 때면 휘청하는 거죠.”
김씨한테는 최근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3월 출산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출산·육아용품도 사야 하고, 산후조리원 비용도 엄청 비싸잖아요. 자연분만을 할 수 있으면 다행인데 제왕절개하면 병원비도 만만치 않게 들어갈 테고요.”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고령 노동자한테 노후 준비는 먼 이야기다. 김미애씨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심아무개(56)씨는 1년 넘게 투병하던 남편을 5년 전 떠나보내야 했다. 자녀는 이미 충분히 컸지만, 자신이 퇴직하거나 병원 신세라도 지게 되면 그들한테 짐이 되지는 않을지 그게 걱정이다.
심씨는 “남편의 입원 기간에 정작 치료비보다 간병비가 더 많이 들었다”며 “그 이후 의료실비보험에 간병인보험까지 들어, 매달 빠져나가는 보험료만 해도 꽤 된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도 감당하기 힘든 노동을 11년째 하고 있는 심씨는 손가락·허리 등 어느 한 곳 성한 데가 없다. 빠듯한 생활에 노후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해 걱정이다. 그는 “생계를 꾸려나가기에 바빠 정년퇴직 이후에는 얼마 안 되는 국민연금으로 살아야 할 형편”이라며 “의료비와 노후 준비가 가장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인디뮤지션 임솔잎(가명)씨는 1인 가구다. 음반 작업과 생계 활동을 함께 하려고, 지난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한달 160시간 정도 해서 120만원 정도를 벌었다. 서울에서 혼자 살면서 집세·공과금·생활비를 감당하고 있다. 작업비를 모아야 하는 만큼, 임씨의 살림살이는 더욱 빠듯했다.
“겨울에는 난방비만 해도 아무리 아껴도 7만~8만원씩은 나가서 더더욱 부담이 돼요. 전기장판이 고장났는데도 구매를 망설일 정도였어요.”
최저임금이 곧 임금의 전부이고 이 돈으로 생계를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이들한테 최저임금이 갖는 의미는 더없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한겨레>가 한국노동패널조사 결과를 살펴보니, 최저임금 수준 임금을 받는 노동자 10명 가운데 7~8명은 가구의 ‘핵심 소득원’(가구주나 그 배우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보조 소득원’으로, 최저임금을 ‘알바 시급’쯤으로 여기는 일각의 분위기에 이들은 갑갑함을 느낀다.
“최저임금으로 한달이라도 살아본 뒤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저임금 때리기’에 몰두하는 정치권과 언론 등을 향해 여러 최저임금 생활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형마트 노동자 박씨는 “안 아픈 곳 하나 없이 골병이 들 정도로 몸과 마음을 상해가면서 고작 ‘용돈벌이’에 나서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창피해서 말을 잘 못 한다뿐이지 다들 생계를 위해 나와서 일한다”고 말했다. 사내하청노동자 심씨도 “본인들이 와서 직접 (최저임금만으로) 살아보면 차마 그런 얘기를 못할 것”이라며 “정신 나간 소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이들한테, 이번 최저임금 인상은 어떻게 다가올까? 인디뮤지션 임씨는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라고 답했다. 임씨는 “계속 시급 6500원에 머물러 있었으면 아르바이트를 계속하지 못하고 음악 작업을 미루는 상황이 왔을 것”이라며 “같은 시간을 일해도 한달에 20만원을 더 벌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매우 크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사내하청노동자 김씨도 “주 8시간을 일하면 월 150만원은 벌 수 있으니 생활이 조금은 나아지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대출금 빨리 갚고, 남편과 한달에 하나씩 자신을 위한 선물을 사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청노동자 심씨는 “월 20만원이 오른다고 해도 애초 받던 월급이 워낙 적어 많은 여유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며 “상여금을 기본급에 녹여서 최저임금 인상에도 실제 임금이 오르지 않은 곳도 많은데 정부에서 이런 ‘꼼수’를 규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인원 감축이나 휴게시간 증가 등 ‘꼼수’ 없이 최저임금 인상폭만큼 월급이 많아졌다는 서울 광진구의 한 아파트단지 경비노동자 우아무개(60)씨는 “돈이 모이면 사는 게 생동감 들고 재미있다”며 “그동안 애들 키우느라 노후 준비는 생각도 못했는데, 가족들과 외식도 하고 저축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이 꼭 지켜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빼놓지 않았다. 마트노동자 박씨는 “나처럼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지탱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한테 최저임금은 정말 절실하다”고 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2차례 방북 취재 “있는 그대로 취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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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31 09:3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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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인터뷰] 연희미용고 학생이 ‘미용사’란 꿈 대신에 마주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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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18/01/31 11:01
- 수정일
- 2018/01/3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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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앞두고 폐교 날벼락… 수업거부에 나선 학생들 “우리 선생님들 돌려주세요”

“우리들의 선생님들을 돌려주세요.”
30일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 위치한 미용 전문 고등학교인 서울연희미용고를 찾았다. 학교 입구에서부터 게시판과 계단벽면, 심지어 학교 교무실에도 “선생님을 돌려달라”는 수많은 쪽지와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지난 26일 금요일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은 담임 선생님 다섯 분의 복직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였다. 전날에 이어 이날도 400여명의 전교생은 수업을 거부하고 지하 1층 예배당에 모였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부당한 해고를 철회하고, 학교 법인화를 요구하기 위해 모였다”고 입을 모았다.
이곳에 모인 학생 대부분은 졸업 후 미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진학했다고 말했다. 꿈을 위해 통학시간이 왕복 3시간 가까이 걸리는 군포나 통학이 불가능한 전라남도·광주·제주도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은 하 나 같이 최초로 세워진 미용학교의 명성과 학생들을 위해 온갖 열의와 성의를 다하는 선생님들을 믿고 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 선생님들 중 상당수가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했다. 사실상 학교는 폐교 수순을 밟고 있었다.
학교 졸업식을 앞둔 지난 26일(금요일) 학교 측은 이들 선생님들에게 해고통지서를 나눠줬다. ‘신분증명서 반납과 업무 인수인계, 출근은 29일(월요일)까지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아직 학생들 생활기록부조차 작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해고 선생님 중에는 학생들의 학교생활정보를 담당하는 선생님도 포함돼 있었다. 최근 설립자로부터 학교를 상속받은 박모씨 등은 학생들의 올바로 교육받을 권리나, 선생님들의 교권은 안중에 없었다. 학교를 이어갈 생각이 없던 이들은 부동산 매각하듯 팔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폐교절차를 밟아갔다. 해고사유 또한 황당했다. ‘2018년 학생 수 감원에 따라 학교 존속을 위한 경영상 해고’가 그것이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돌려 달라”며 일어선 이유다.


헤어디자이너를 꿈꾸던 17세 학생의 호소
“우리 선생님들이 왜 해고당해야 하나요”
연희미용고에서 만난 2학년 최은진(17) 양의 꿈 역시 ‘미용사’였다. 경기도 군포에서 통학을 한다는 최양은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 반대하는 부모님을 수차례 설득시켜 지원을 하게 됐다고 했다. 최양은 처음 학교에 합격했을 당시를 심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학교 발표가 있는 날, 시간을 딱 맞춰서 홈페이지에 접속했어요. 합격이었어요. 함께 있던 친구들도 모두 기뻐해주고, 저도 좋아서 부모님께 연락드리고, 담임 선생님도 잘 됐다고 해주셨어요. 꿈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됐다는 희망을 느꼈어요. 그런데…”
그만큼 가고 싶었던 학교이기에, 지각과 결석 한 번 없이 1년을 열심히 다녔다고 했다. 수학선생님은 자신 없던 수학에 처음으로 흥미를 갖게 해줬고, 헤어미용·피부미용·네일아트·메이크업 선생님들은 끊임없이 기술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지도해줬다고 말했다. 그런데 학교설립자이자 교장이 지난해 7월22일 숨지면서 폐교 소식이 돌았고, 불안과 혼란스러운 상태로 그동안 수업을 받아왔다고 지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던 중 지난 26일 선생님 다섯 분이 한꺼번에 해고를 당하면서 “학생들이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폐교 소식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부모님께 어떻게 어디서 어디까지 설명을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졸업은 보장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애들도 다 갈팡질팡 못하고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 7~8월 계속됐어요. 두려움에 떨었어요. 선생님이 수업에 들어오시면 항상 학교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어요. 그러면 선생님들이 저희를 안심시키며 그렇게는 절대 안 될 거라고 했어요.”

그나마 학교 폐교를 막고자 애썼던 선생님들이 해고를 당하자, 최양을 비롯한 모든 학생들이 분개했다. 최양은 “금요일(지난 26일) 선생님들이 부당해고를 당하고 단톡방에 미안하다는 글을 올렸다”며 “이 소식을 듣고 선배들과 힘을 합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학교에 비리가 정말 심하다는 얘기를 들어왔다”며 “이번에 학교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가 문을 닫는 것은 물론, 선생님들은 계속해서 부당해고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양의 말처럼 학교 설립자이자 지난해 숨을 거둔 박모 교장은 그동안 학교 돈을 자신의 주머니에서 꺼내 쓰듯 함부로 유용해 왔다. 현재 학교를 상속받은 자녀들을 각각 국제협력팀장과 부팀장으로 허위 임명시킨 뒤 학교 돈으로 해외 현장학습에 동행시키는가 하면, 자신이 회원으로 있는 단체에 회비 6천여만원을 냈던 것이 시교육청 실태조사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잠시 교육당국으로부터 받아왔던 인권보조비가 끊기기도 했다. 학교는 뻔뻔하게도 운영을 잘못한 지점은 감추고, 교사들에게 고통분담을 강요하면서 인건비를 삭감했다.
이런 학교의 행태에 분노한 연희미용고 학생들은 주말에 피켓을 만들었다. 한 학년 높은 선배들은 따로 자리를 만들어서 준비를 했다고 최양은 전했다. 그리고 월요일(29일) 선배들을 따라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를 시작했다. 현 교장이 있는 5층 교장실로 올라가 선생님들의 부당해고를 철회하라고 외쳤다. 이 같은 사태를 설명하는 최양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 “선생님들이 잘못한 것도 없고, 해고할 만한 사유도 없는데, 저희와 계속 함께 했던 선생님들인데, 그 선생님들이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까 모두가 울컥하고 슬퍼하고…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에요.”

‘학교의 횡포’, ‘교육청의 무책임’에 짓밟힌 학생들
최양은 답답한 마음에 교육청에 전화를 걸었다. 최양은 담당자를 찾고 “저희 한 번만 더 와주셔서 저희 학교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요청했다. 돌아온 담당자의 답변은 “이 상태로는 안 된다”였다. 다짜고짜 수업에 복귀하란 말 뿐이었다. 이에 최양은 “수업을 하려면 선생님들이 필요한데, 안 계시다”고 했지만, 담당자는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학교기물을 마음대로 부수고, 지금 질서를 유지하지 않기에 학교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고 협박조에 가까운 목소리로 몰아 부칠 뿐이었다. 학교 곳곳에 대자보와 쪽지를 붙이긴 했지만, 기물을 부순 것은 없다고 학생들은 황당해 했다.
또 교육청 담당자는 “교감선생님과 선생님들이 지도하지 않냐, 당장에 모여서 전화만 하라고 지도하고 있나”라며 마치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시켜서 교육청을 압박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쏘아 붙였다. 교육청 담당자와 통화했던 내용을 쏟아내는 최양은 교육청에 큰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최양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는 거고, 이 시위도 그렇고, 선생님들은 학교에 오도록, 수업에 들어가도록 계속 얘기한다. 왜 선생님들이 시키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묻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최양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전날 학교상황을 살피러 온 교육청 관계자의 행동에도 실망하고 있었다. 29일 오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학부모들도 학교에 찾아와 사태해결을 촉구하자, 교육청 관계자들은 이날 학교를 방문했다. 학교 상속자인 현 이사장 두 명도 참석한 자리였다. 학생들과 학부모·선생님들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교육청 관계자들은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은 사유재산이어서 우리가 관여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진학한 학교에서 최은진 양이 만난 세상은 ‘부당해고로 무참히 짓밟힌 선생님들이 교권’, ‘폐교 수순에 따른 진로진학에 대한 위협’, ‘학교 권력자의 교비유용’, ‘정부기관 관계자의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삼키듯 주먹을 움켜쥔 최양은 “학생들 의견 하 나도 안 들어주는 교육청에 전화를 할 때마다, 제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들 부당해고 당하고, 마음도 추스르기 어려웠을 텐데, 학교는 가족들에게 해고통보사실을 먼저 알려버리고. 가정까지 건드리는 게 너무 속상해요. 그리고 저희도 한 가정의 자녀고 대한민국의 미래잖아요. 이렇게 어렵게 용기내서 아우성 치고 있는데, 이 소리를 듣고 저희에게 좀 관심을 가져줬으면… 응원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한편, 학부모들은 31일 오전 11시 학교에 모여 함께 서울시교육청을 방문할 계획이다. 또한 해고당한 5명의 교사들도 해고철회를 요구하며 계속해서 출근을 이어갈 예정이다. 학생들은 교육청 앞 집회시위를 오는 2월2일 경찰서에 신고한 상태며, 해고 교사들의 복직과 학교 법인화가 해결될 때까지 수업거부와 집회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서지현 검사의 8년과 안태근 검사의 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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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수치심에 매일 밤 가슴 쥐어뜯어"... 가해자는 권력 등에 업고 출세 가도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한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은 지난해 6월 서울중앙지검 수사팀과의 부적절한 '돈 봉투 만찬' 파문으로 면직 처분됐다. 이전까지 그는 검찰과 법무부에서 주요 요직을 거친 전형적인 '엘리트 검사'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박근혜 정권에서 권력의 핵심과 연결된 검찰 실세였다. 피해자 서 검사가 고통 속에 보냈던 8년 동안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국회의원에게도 뻣뻣했던 검찰 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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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태근 검찰국장 정상출근 '돈 봉투 만찬사건'의 당사자인 안태근 법무부 검찰국장이 19일 오전 경기도 과천시 법무부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2017.5.19 | |
| ⓒ 연합뉴스 | |
안 전 국장은 지난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94년 서울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법무부 검찰국 검사,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 2부장, 법무부 정책기획단장, 대검 정책기획단당, 서울서부지검 차장 등을 지냈다. 2013년에는 박근혜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전문위원을 거쳐 법무부 인권국장에 임명됐고, 2015년에는 검찰 인사와 예산을 총괄하는 검찰국장이 됐다. 법무부 검찰국장은 고검장 승진 1순위로 꼽히며, 검찰총장추천위원회에도 참석하는 최고 요직이다.
안 전 국장이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돈 봉투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2016년 11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법무부 검찰국장으로 출석해 '부산 엘시티 비리 의혹' 사건과 관련해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질문을 받았다. 노 의원이 "엘시티 사건에 대해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보고가 되고 있느냐"라고 묻자 안 전 국장은 "기억이 없다"라고 답했다. 당시 우병우 민정수석의 검찰 수사 개입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에 노 의원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보고 안 했으면 안 한 거지, 보고 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라고 질책하자 "보고 안 했을 수도 있고. 아니, 제가 보고한 기억이 없다"라고 말했다. 노 의원이 "답변을 그따위로 하는가? 보고한 사실이 없는 게 아니라 기억이 없다고?"라고 하자 "그럼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민을 대신해 질문하는 국회의원에게 성의 없는 답변만 늘어놓자 노 의원은 "막장입니다. 막장"이라고 혀를 찼다.
안 전 국장은 이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도 등장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당시 우병우 민정수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우병우 라인'이었던 셈이다. 그중에서도 안 전 국장은 검찰 인사와 예산을 총괄하는 검찰국장으로 우 전 수석의 최측근 역할을 했다. 그리고 수차례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압수수색 정보가 새어 나가는 등 우 전 수석에 대한 검찰 수사가 번번이 어긋나자 안 전 국장의 이름이 거론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하던 박영수 특검팀은 안 전 국장과 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른 2016년 7월부터 10월 사이에 1000차례 이상 통화한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검찰은 우 전 수석의 가족회사 ㈜정강 등을 압수수색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안 전 국장은 "우 수석과 업무상 통화를 했다"라고 해명했지만, 4개월간 1000차례 통화는 하루 8건 이상을 했다는 것으로 단순 업무상 통화라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회의원 앞에서도 뻣뻣하고, 정권 실세와도 막역했던 안 전 국장이 시련을 겪은 것은 지난해 6월 '돈봉투 만찬' 사건이 터지면서부터다. 지난해 법무부·대검찰청 합동감찰반에 따르면 이영렬 전 서울중앙지검장과 안 전 국장은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했던 검찰특별수사본부(특수본) 간부 6명, 검찰국 과장 2명이 참석한 만찬 자리에서 돈봉투를 돌렸다. 안 전 국장은 특수본 간부들에게 70만∼100만 원씩, 이 전 지검장은 법무부 과장 2명에게 100만 원씩 격려금을 줬다.
이에 안 전 국장은 곧장 사의를 표명했지만, 징계절차가 진행되면서 우선 대구지검으로 좌천됐다. 결국, 지난해 6월 법무부는 이 전 지검장과 안 전 국장에게 중징계인 면직을 의결했다. 면직이 확정됨에 따라 이 전 지검장과 안 전 국장은 퇴직금과 연금은 정상적으로 받지만, 2년간 변호사 개업은 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두 사람은 지난해 9월 "면직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행정 소송을 낸 상태다.
안 전 국장은 이후 최근 종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앤조이> 보도에 따르면 안 전 검사는 지난해 10월 온누리교회에서 간증(신앙고백)을 하며 "30년 동안 공직자로 살아오며 나름대로 깨끗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순탄하게 공직생활을 해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뜻하지 않은 본의 아닌 일로 공직을 그만두게 되었고, 주변의 많은 선후배·동료·친지들이 '너무 억울하겠다'며 같이 분해하기도 하고 위로해 주었다"라고 말했다.
'돈봉투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공직을 떠났다는 얘기다. 그는 또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이 얼마나 마음고생 많냐고 묻지만, 하나님을 영접할 기회를 주시고, 교만을 회개할 기회를 주신 거라 생각하니 처음 느꼈던 억울함과 분노도 사라졌다"라며 "믿음 없이 교만하게 살아온 죄 많은 저에게 이처럼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해주신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양을 올린다"라고 말했다. 안 전 국장의 간증 영상에는 그가 울먹이는 모습도 담겨 있다.
"그날 '그 사람'의 그 눈빛이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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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TBC에 출연한 서지현 검사. | |
| ⓒ JTBC | |
안 전 국장이 권력을 등에 업고 출세 가도를 달리는 동안 서지현 검사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
그는 3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 지난 8년간 참을 수 없는 수치심에 매일 밤 가슴을 쥐어뜯었다"라며 "그날 '그 사람'의 그 눈빛이 떠오르는데 잠을 이룰 수가 있었겠느냐"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안 전 국장을 뜻한다. 서 검사는 또 "그날 충격이 너무 커 화장실에 쓰러져 있다가 집에 있는 아이 생각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귀가했다"라며 "이후 그날의 트라우마로 유산을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앞서 서지현 검사는 검찰 내부 통신망에 올린 글을 통해 "2010년 10월 30일 한 장례식장에서 법무부 장관을 수행하고 온 당시 법무부 간부 안태근 검사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했다"라며 "소속청 간부들을 통해 사과를 받기로 하는 선에서 정리됐지만, 그 후 어떤 사과나 연락도 받지 못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서 검사는 "갑작스러운 사무 감사를 받은 이후 검찰총장의 경고를 받고, 통상적이지 않은 인사발령을 받았다"라며 "납득하기 어려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이유를 알기 위해 노력하던 중 인사발령의 배후에 안 검사가 있다는 것을, 안 검사의 성추행 사실을 현 자유한국당 의원인 당시 최교일 법무부 검찰국장이 앞장서 덮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에 안 전 국장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오래전 일이고 술을 마신 상태라 기억이 없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라며 "다만 그 일이 검사 인사나 사무감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사실상 성추행 사건 자체는 부정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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