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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남북 경제협력·교류사업 모든 합의 무효' 선포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6/03/11 08:06
  • 수정일
    2016/03/11 08:0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조평통 담화, 금강산·개성공단 자산 청산...'특별조치 연속' 예고도(전문)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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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3.10  1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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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10일 대변인 담화를 통해 남북 간 경제협력 및 교류사업 등에 대한 무효를 선포했다. [캡처-조선중앙TV]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10일 오전 대변인 담화를 발표, 앞으로 남북 사이의 경제협력 및 교류사업과 관련한 모든 합의를 무효로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조평통은 특히 남측 당국이 일방적으로 금강산관광과 개성공업지구 가동을 전면중단했기 때문에 북측 지역에 있는 남측 기업들과 관계기관들의 모든 자산을 완전히 청산해버릴 것이라고 밝혔다.

조평통의 이번 대변인 담화는 최근 한국 정부가 발표한 독자적 대북 제재안에 대한 대응 성격으로 발표됐다.

조평통은 한국 정부의 독자적 대북 제재안에 대해 ‘북남관계를 모조리 차단한 괴뢰들의 광대놀음’이라며, “핵강국 지위를 흔들고 자위적 핵무력 강화를 위한 우리의 정의의 위업에 제동을 걸어보려 하는 것이야말로 가소로운 추태가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조평통은 “박근혜 역적패당에게 치명적인 정치·군사·경제적 타격을 가하여 비참한 종말을 앞당기기 위한 계획된 특별조치들이 연속 취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오늘과 같이 북남관계를 험악한 최극단 상태에 몰아넣은 책임은 한치 앞을 내다볼 능력도, 뒷일(뒷일)을 감당할 대안도 없이 무작정 객기를 부리며 미국 상전과 맞장구질을 해대는 특등바보, 사악한 반역의 무리인 박근혜와 그 패당에게 있다”고 거친 표현을 동원해 비난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담화(전문)>
박근혜 패당의 어리석은 《제재》놀음은 자멸을 더욱 재촉하게 될 뿐이다

우리의 수소탄시험 완전성공과 지구관측위성 《광명성-4》호의 성과적발사에 기절초풍한 만고역적 박근혜패당의 대결광기가 갈수록 가관이다.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유엔 《제재결의》가 조작되자 희색이 만면하여 돌아치던 박근혜패당이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는 격으로 우리에 대한 그 무슨 독자 《제재》라는 것을 발표하는 놀음을 벌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일군들과 단체들에 대한 《자산동결》 및 《금융거래차단》, 우리 제품에 대한 《반입통제》와 우리 항구에 들어왔던 선박들의 《입항금지》 등 황당무계한 내용들로 가득찬 이번 《제재안》에 대하여 말한다면 아무데도 소용없는 물건짝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돈줄》이니 뭐니 하며 북남관계를 모조리 차단한 괴뢰들의 광대놀음에 조소를 금치못하며 침을 뱉고 있다.

이번 《제재》발표 놀음은 우리의 주체탄, 통일탄 폭음에 완전히 얼혼이 나간 역적 패당의 단말마적발악이며 스스로 섶을 지고 불속에 뛰여드는 정신병자들의 어리석은 망동이다.

우리의 핵무력은 수십년세월 허리띠를 조이며 다지고 벼려온 철저한 자립, 자력자강의 산물이며 그것으로 하여 미국을 비롯한 적대세력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것쯤은 알아야 한다.

미국의 창녀인 박근혜 따위가 감히 존엄높은 우리의 핵강국지위를 흔들고 자위적 핵무력강화를 위한 우리의 정의의 위업에 제동을 걸어보려 하는 것이야말로 가소로운 추태가 아닐수 없다.

더욱 가련하고 불쌍한 것은 박근혜가 자기앞에 어떤 비극적종말이 다가오고있는지도 모르고 객기를 부리는 것이다.

우리 백두산혁명강군은 지금 적들이 움쩍하기만 하면 일격에 불마당질해버릴수있게 선제공격방식으로 전환하고 최후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박근혜패당은 더러운 숨통이 끊어지게 될 비참한 시각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여있다.

군사적으로 예민한 최전연지역을 통째로 내주어 남조선의 령세기업가들에게 살길을 열어주고 세계적인 명승지인 금강산에서 남측기업이 관광사업을 하도록 특전과 특혜를 베풀어준 우리의 은혜를 원쑤로 갚은 박근혜패당은 더 이상 이 땅에 살아숨쉴 자격도 없는 반역무리이다.

동족대결에 환장한 박근혜년이 북남관계의 마지막명줄이였던 개성공업지구마저 전면폐쇄한데 이어 또다시 무모한 독자《제재》놀음을 벌려놓으며 우리와 끝까지 대결하려는 독기를 서슴없이 드러낸 조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다.

1. 이 시각부터 북남사이에 채택발표된 경제협력 및 교류사업과 관련한 모든 합의들을 무효로 선포한다.

2. 남조선괴뢰패당이 일방적으로 금강산관광과 개성공업지구가동을 전면중단한것만큼 이에 따라 우리는 우리측 지역에 있는 남측기업들과 관계기관들의 모든 자산을 완전히 청산해버릴 것이다.

3. 박근혜역적패당에게 치명적인 정치,군사,경제적타격을 가하여 비참한 종말을 앞당기기 위한 계획된 특별조치들이 련속 취해지게 될 것이다.

제손으로 제눈을 찌르고 제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박근혜패당은 우리의 정당한 조치에 대하여 그 어디에 하소연할 것도 상소할데도 없을 것이다.

오늘과 같이 북남관계를 험악한 최극단상태에 몰아넣은 책임은 한치앞을 내다볼 능력도, 뒷일을 감당할 대안도 없이 무작정 객기를 부리며 미국상전과 맞장구질을 해대는 특등바보, 사악한 반역의 무리인 박근혜와 그 패당에게 있다.

우리 군대의 1차적인 타격권안에 들어있는 청와대소굴에 들어박혀 온갖 못된짓을 일삼고 있는 박근혜패당의 만고대죄는 반드시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주체105(2016)년 3월 10일
평양

<출처-조선중앙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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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이 공식 학문? 수상한 학술분류 변경

 

[단독] 연구비로 세금 투입 가능... 한국연구재단 "합리적 판단" 해명

16.03.09 21:15l최종 업데이트 16.03.09 21:17l

 

 

정부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한국연구재단(이사장 정민근)이 지난 2월 말 학술·연구분야에 '새마을운동'을 신설한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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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분야 분류에 '새마을'이 신설·추가됐음을 알리는 공지글(사진). 재단 담당자는 정당한 개정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절차적인 하자와 재단 내부 인사들의 관련성 등을 살펴볼 때 무리한 임의 개정에 가까웠다.
ⓒ 한국연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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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새마을운동 신설을 두고 재단이 박근혜 정권에 '코드 맞추기'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가 재단을 통해 정부 차원에서 '박정희 띄우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한국연구재단 측은 "합리적인 판단에 따른 신설이었고, 정부 차원의 지시는 전혀 없었다"라고 반박했다.

한국연구재단은 미래창조과학부의 지원금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준정부기관이다. 한국과학재단·한국학술진흥재단·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이 통합돼 지난 2009년 6월 출범했으며, 해당 분야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이 주 업무다. 2015년도 사업 총예산은 4조2224억 원이었고, 학술인문사회사업 예산만 2409억 원에 이르렀다.

1990년대 이후 처음으로 분류 개정... 새마을운동 신설돼

<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한국연구재단은 이전의 학술·연구분야 분류 중 지역개발과 지적학·지역경제·농촌개발계획 등을 삭제하고, 중분류에 '새마을/국제개발협력'과 더불어 '새마을개발협력' 관련 교육·훈련, 조직·리더십, 공동체·자원봉사 등의 분류를 신설했다. 이번에 신설된 새마을 학술·연구분야 영문명은 'Saemaul Undong(새마을운동)'이며, 목적은 '해당 분야 연구 활성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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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말,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분야 분류에 '새마을'이 신설·추가됐다(사진).
ⓒ 한국연구재단 개정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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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향후 새마을운동 연구에 합법적 연구비 지원이 가능하며, 관련 연구를 독려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재단 측 담당자는 "분류 분야가 만들어지면 일단 관련 분야가 하나로 모이기 때문에, 해당 지원 과제가 많아질 수는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새마을운동이 신설된 학술·연구분야 분류 개정은 1990년대 이후 처음이다.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분류의 다른 항목이 사회복지학·인문지리학·교과교육학 등임을 고려하면 '새마을운동' 분야의 신설은 다소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다.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 때 추진된 새마을운동이 한국 경제성장에 기여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또한 관련 학회도 존재하고, 소수이긴 하지만 이를 학문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 갑자기 새마을운동을 학술·연구분야에 신설한 것은 재단 차원의 '정권 코드 맞추기'거나 정부 차원의 '박정희 띄우기'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학문 분류에 정통한 인문학 분야 연구자인 A교수는 이런 사실을 제보하며 "언제부터 '새마을운동'이 공식 학문 분야로서 이런 위상을 주장하게 됐는지 모르겠다"라며 "새마을을 연구하는 곳은 특정 대학과 소수 연구자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코드 맞추기' 아닌가 싶다"고 지적했다.

A교수는 "연구재단의 분류체계 변경이 중요한 이유는 그에 따라 연구비 명목으로 세금이 투입되기 때문"이라며 "새마을 분야는 아직 학문으로 분류할 정도의 분야가 아니다, 과거 4대강 관련 온갖 학자들의 연구를 지원했듯 이를 통해 새마을운동을 연구하겠다는 일부 어용·관변학자들에게 연구비가 흘러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 새마을학회장 등 재단 내 '새마을 관계자' 다수

이와 관련, 흥미로운 사실은 재단 내에 이상하리만큼 '새마을 관계자'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번 학술·연구분야 분류 개정을 담당한 사람은 지난해 사회과학단에 근무했던 이광희 현 성과확산팀 팀장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팀장의 은사는 '새마을 전도사'로 알려진 노화준 영남대 새마을대학원 석좌교수이다.

또한 같은 팀 직원인 노유진 연구원은 지난 2011년 1월 노화준 교수와 함께 '새마을운동의 추진논리와 발전전략의 재음미'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지난해 3월 학술진흥본부장으로 선임된 이상엽 한서대 교수의 경우, 과거 대전·충남 지역 새마을 학회장을 지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광희 팀장은 "참고하기 위해 은사(노화준 교수)에게서 새마을 대학원에서 뭘 가르치는지 커리큘럼을 받았고, 이상엽 본부장이 새마을 전문가라고 해서 관련 자료도 받았다"면서도 "이상엽 교수가 이전에 새마을 학회장이었던 것은 몰랐다"고 말했다.

이상엽 학술진흥본부장은 특히 지난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만든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이기도 하다. 관련 사실 확인을 위해 수차례 재단 측에 전화했으나, 이 본부장은 비서를 통해 "지금 바쁘다", "실무자와 통화하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만 답변하며 통화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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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대 재단 이사장인 정민근 전 포항공대 교수(사진)는 박정희 대통령 재임 기간인 1970년~1974년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다녔다.
ⓒ 한국연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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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이사장인 정민근 포항공대 명예교수도 눈에 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재임 중인 1970~1974년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다녔다. 지난 2014년 취임한 정 이사장은 이후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대 (이공계 우대 정책을) 잘 시작했는데, 최근 20년간 연구자들을 너무 몰아붙였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처럼 연구자의 기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광희 팀장은 '정부 차원의 박정희 띄우기' 시선에 대해 "(정권 차원의) 외압이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고 일축했다. 이어 "용어는 학술연구분야 분류지만, 우리 재단에서는 이걸 학문 분류가 아닌 연구 분류로 보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한편 2016년 행정자치부 예산안에 따르면 '새마을운동 지원예산'으로 143억 원이 책정됐으며, 행자부는 국비 296억 원 포함 총 사업비 866억 원을 투입해 2017년까지 새마을 전시관·테마촌 등을 조성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는 2017년은 '박정희 탄생 100주년'으로, <CBS>에 따르면 경북 구미시에서는 '(박정희) 탄신 TF팀'이 운영되고 있기도 하다.

적합성 관련 공문 발송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문제는 이번 개정 과정이 합리적이었는지 여부다. 이 팀장은 "(이번 개정은) 2~3년 전부터 진행해왔고, 전체적인 분류체계 개정의 일환일 뿐"이라며 "제가 새마을 쪽 자료를 다 찾아봤고, 문제가 생길까 싶어 자문료를 주고 자문도 다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팀장이 "자문을 받았다"며 거론한 교수들은 "나는 개정에 반대했다, 공식 자문을 한 게 아니었다"거나 "(자문한 사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L교수는 기자가 '한국연구재단' 얘기를 꺼내자마자 "그건 대통령과 연결되는 굉장히 민감한 주제"라며 답변을 꺼렸다. M교수는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지역개발쪽 의견을 구하긴 했다"라며 "그런데 새마을 항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L교수는 "사실 새마을 쪽이 경제학이나 법학처럼 독립된 학문이 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면서 "정상적인 과정이면 이게 의제로 상정되지 않았을 텐데 상정이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새마을 쪽이 너무 무리하게 국제개발 쪽에 들어온 것"이라며 "제가 정말 전문가로 꼽는 분이 몇 있는데, 그중 새마을학회에 가입하신 분은 한 분도 없다"고 꼬집었다.

절차상 문제도 있었다. 재단 홈페이지에 공시된 '학술·연구분야 분류의 개정'에 따르면 분류개정은 5개 절차를 거치게 돼 있다. 학회와 단체, 연구자들의 의견수렴을 시작으로 해, 학회 명의로 개정 요청 공문을 받은 뒤 적합성 검토 결과가 담긴 공문을 재단 명의로 발송해야 한다. 하지만 국제개발 분야 관련, 관련 학회의 공문을 받았으면서도 여기에 적합성 검토 공문 발송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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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단 홈페이지에 공시된 '학술연구분야분류의 개정(사진)'에 따르면 분류 개정은 5개 절차를 거치게 돼 있다. 하지만 이 팀장은 이 절차를 빼놓은 뒤, "연구자들에게 알려주는 것(공지)으로 갈음한 것 같다. 알리긴 알렸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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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도 이러한 문제를 사실상 인정했다. 이광희 팀장은 "제가 관련 업무를 쭉 해왔는데 솔직히 이렇게 한 적은 없었다"며 "연구자들에게 알려주는 것(공지)으로 갈음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개정 절차가 법으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지원이 많이 오면 수요를 다 반영할 수 없으니까 저렇게 (복잡한 절차를) 해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개정 과정을 담당하는 정책연구팀에서는 "이번 개정은 학회 요청이 아닌 해당 과학단의 판단이었기 때문에 따로 공문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세부 전공은 전적으로 학문단에 의존한다"며 "분야 신설과 관련한 모든 사유를 정량적으로 판단하는 게 쉽지는 않다"며 이 팀장과는 다른 설명을 내놓았다.

"내부과제 분류하기 위한 기준" vs "가장 큰 목적은 연구비 지원"

이광희 팀장은 "새마을과 관련해 분류 개정 요청도 있었다"고 말했지만, 누가 요청했는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 팀장은 지난 2월 29일 대전청사에서 만난 기자에게 '새마을학 학문 분류 요청'이라는 문서를 보여줬지만 "개인 정보라서 연구자 이름은 말해 줄 수 없다"라며 "영남대 박 교수"라고만 말했다.

이 팀장은 "(개정 요청을) 보낸 건 연구자 1명이지만 나름 대표해서 보냈을 것"이라며 "요청이 왔는데 굳이 안 해줄 이유도 없었다"라고 전했다. 이어 "관련 지원 과제들이 있었다"며 그 근거로 2015년 출판지원사업 지원과제 200개 중 2개, 신진연구자사업 지원 1100여 개 중 9개가 새마을 관련 과제로 왔다"고 말했다.

적합성을 검토할 때는 개정 요청 분야의 연구자 수나 지원과제 건수 등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도 미흡했다. 예컨대 지리학의 경우 대한지리학회, 도시지리학회, 지리정보학회, 한국지역학회 등 수많은 학회가 있는 것에 반해 새마을 쪽은 '한국새마을학회', '새마을글로벌포럼' 외에는 찾기 힘들다. 공교롭게도 둘 다 경북 영남대학교 법정관 409호에 있다. 학회 인터넷 홈페이지는 접속이 안 될 뿐 아니라,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팀장은 "이쪽이 민감한 주제라 아무도 안 하려 했음에도 제가 진행했다"며 "저는 지역개발학회 자문을 받는 등 충분한 근거로, 소신 있게 판단해서 (새마을 분야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밖에서 보면 큰일인 것처럼 볼 수 있지만, (분류 개정은) 내부에서 과제들을 편하게 분류하기 위한 기준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이번 개정에 반대했다는 재단의 자문위원 L교수는 "분류 체계 변경의 가장 큰 목적은 연구비 지원"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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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선배'의 폭력, 교수 되고 싶어 참았다"

 
[인터뷰] '명문대 악마 선배' 사건 피해자 A씨
 
| 2016.03.10 07:29:51

'인분 교수', '악마 동기생'에 이어 이번엔 '명문대 악마 선배'가 대중의 공분을 사고 있다. 잘 나가는 교수 아버지를 둔 명문 사립대 대학원생이 교수 취업을 미끼로 3년 넘게 후배 대학원생에게 가혹 행위를 일삼은 것.

'악마 선배'가 저지른 행각들은 믿기 힘들 정도다. 귓바퀴 모양이 변형될 정도로 수십 차례에 걸쳐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골프채로 온몸을 두들겨 팼다. 변기에 머리를 박게 하고거나 심지어 변기 물까지 마시게 했다. 이러한 가혹 행위는 학교, 카페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떨어져 있을 땐 영상 통화를 통해 기합을 시키기도 했다. 

 

악마 동기생 사건에 이어 이번 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이유는, 가해자의 잔악한 수법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단, 상습적 폭행에도 피해자들이 입을 닫을 수밖에 없던 이유가 더욱 충격적이다. 바로 '취업' 때문이다.  

 

지난 9일, '명문대 악마 선배' 사건의 피해자 A 씨는 <프레시안>과 만나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는 "워낙 교수 되기가 어렵다 보니, 편한 길을 가고 싶었다"며,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했다. "내 바로 옆에 '금수저'가 있고, 그 사람이 잘 되면 내 자리도 챙겨준다고 하니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던 그의 고백은, '취업 전쟁' 속에서 '을'의 처지도 마다 않는 지금 청년 세대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준다.

 

 

▲A씨가 대학원 선배B로부터 구타당한 흔적. ⓒA씨

 


"차라리 나한테 질병이 있었더라면..." 

 

프레시안 : 가해자라고 지목한 그 선배와는 언제 처음 알게 됐나.

A : 2009년 학부 전공 수업에서 조모임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건 내가 대학원 진학 관련 상담을 요청하면서였다. B 선배 아버지는 다른 학교에서 잘 나가는 교수였고, B 역시 애초부터 교수할 뜻이 있었던 걸 알았던 터라 이것저것 물어봤다.

일적으로 손발을 많이 맞췄다. 2010년엔 주식 투자하는 사업을 같이 하기도 했고, 대학원 와서는 같이 논문 작업을 했다. 대학원에서는 지도교수가 도와줘야 실적이 잘 나오는데, 내 경우는 지도교수님과 원하는 주제가 서로 달랐다. 게다가 나는 영어를 잘 못해서 지도교수님이 원하는 만큼 속도를 내질 못했다. 그러던 차에 B가 나에게 같이 논문을 쓰자는 제안을 해서 지도교수님 몰래 둘이 논문 작업을 했다. B는 영어를 잘해서 B가 주로 영문 작업을 하고, 나는 한글로 논문 작업을 하다 보니 속도가 빨라져서 실적이 좋았다. 그래서 점점 더 지도교수와의 작업 대신 이쪽 일에 더 몰두하게 됐다. 


프레시안 : 마찰이 시작된 계기는? 
 

▲반복된 폭행으로 부풀어오른 귀. ⓒA씨

A : 대학원에 가면 할 일이 많다. 수업도 듣고 지도교수 일도 거들어야 하고, 학회 일도 해야 하는데, 거기다가 우리끼리 논문도 따로 쓰기로 했으니 업무량이 어마어마했다. 하루 수면 시간이 서너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피곤해서 할 일을 제 때 못 맞춘다거나, 조는 일이 몇 번 생기자 그때부터 괴롭힘이 시작됐다.

한두 시간 푹 자는 것도 아니고, 2~3분 눈만 감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많이 존다고, 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때렸다. 그게 2012년 9월 정도부터였다. 만나면 학교에서건 카페에서건 가리지 않고 얼굴이며 팔다리며 때렸다. 손으로 때리기도 하고 골프채로도 때렸다. 변기에 머리를 박게 하거나 변기 물을 마시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자꾸 내가 조니까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때린 거라고 하니, 차라리 '나한테 (잘 조는) 질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서로 떨어져 있을 땐 휴대폰 메신저를 통해 거의 5분 간격으로 지금 하는 작업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 내용이 중복돼도 졸았냐고 하고, 내용이 적어도 졸았냐고 했다. 내가 잠깐이라도 답이 없으면 졸고 있느냐면서 바로 영상통화를 걸었다.

영상통화 할 땐 주로 기합을 시켰다. 처음엔 같이 있을 때만 기합을 줬는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영상 통화로 벌을 주는 것이었다. 머리를 바닥에 박는 이른바 '원산폭격' 자세 하기. 변기에 머리 박기 등을 했다.

 


영상통화를 많이 하다 보니 휴대폰 요금이 많이 나왔다. 6개월 치 영상통화 요금만 53만 원이었다. 요금이 많이 나와 부모님께 죄송하니 영상통화 시간을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일부러 더 많이 걸었다. 

 

"골프채로 맞고도, 바빠서 아픈 걸 생각할 겨를 없었다"
 

ⓒA씨와 B씨의 휴대전화 메신저 내용. ⓒA씨

프레시안 : B가 그렇게까지 '갑질'을 한 이유는 뭔가.

: 그 사람이 나보다 3살 많은 선배이기도 했고, 또 사업을 할 때도 그 사람이 대표로 등록돼있었다. 그래서 뭘 하든 둘 사이에는 상하관계가 성립됐다. 위계 서열 의식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는데, 아마도 ROTC(학생군사교육단) 장교 경험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나를 마치 병사 다루듯이 대했다. 통화할 때도 군대식으로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했다. 대답할 때 목소리도 작으면 안 됐다. 왜 해야 하는지 반문하는 것도 싫어했다. 무조건 "예"라고만 해야 했고, 명령에 불복종하면 맞았다.

프레시안 : 폭행을 당하고도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나.
 
A :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바빠서 아픈 걸 생각할 겨를도, 화를 낼 겨를도 없었다. 골프채로 맞고 온몸이 땡땡 부어도 쉴 틈 없이 바로 카페 가서 작업해야 했다.

그리고 반항을 하면 더 맞았다. 나중엔 너무 힘들어서 두세 번 정도 연락을 완전 끊었은 적이 있다. 처음엔 달래더니, 나중엔 더 심하게 보복했다. 엄청나게 맞다 보니 연락을 끊으면 안 된다는 걸 기계적으로 학습하게 됐다.

 

 

"'해외파' 아닌 내가 교수를 할 방법이 없었다" 

프레시안 : 보도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 대부분이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왜 당하고만 있었을까'다. 왜 그렇게까지 참아야 했나. 

A : B를 통해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좀만 참으면 될 거라고 믿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교수 시장은 해외파를 선호한다. 유학을 알아봤는데,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닫고 포기했다. 그럼 국내 박사가 될 나로선 교수하기는 사실상 힘든 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도교수님이랑은 잘 안 맞았다. 반면, 선배랑 하는 작업은 성과가 잘 나왔다. 결정적인 계기는 B의 아버지 C 교수다. 언젠가 스포츠 경영 수업을 들었는데 꽤 흥미가 붙어서, B와 함께 이쪽 논문을 같이 쓰기로 했다. 그러다가 체육학과 교수인 C의 도움을 받게 됐다. 자기 아들과 작업을 한다고 해서 그런지 내게도 잘 해줬다. 아무래도 교수가 지도를 해주니 일하는 속도가 더 붙었다. 실적이 더 오르면서 점점 희망이 생겼다. 

또, 교수가 되려면 강의 경력도 필요한데, 그것도 B와 C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교수 임용에 필요한 강의 경력이 최소 1~2년인데, 강사 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런데 B가 자기 아버지 C를 통해 쉽게 강의 자리를 얻었다. 그걸 보면서 '나도 나중에 저렇게 강사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B가 하루는 C네 학교 한 연구실 앞에 서서 '여기가 나중에 네가 들어갈 자리'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분명 B한테 맞고 감시당하는 건 힘들지만, 그래도 자꾸 희망이 보이니까, 좀만 참고 버티면 나도 강사도 되고, 교수도 될 줄 알았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잘못된 판단이었다.

 

 

▲피해자 A씨와 선배 B씨가 나눈 휴대전화 메신저 대화 내용. ⓒA씨

 

 

"친구에게 폭행 사실 말할 시간도 없었다" 

 

프레시안 : B로부터 업무와 상관 없는 사적인 일도 강요받은 적도 있나.

: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데 매주 교회에 나갔다. 거기서 예배는 드리지 않고, 지하 식당에서 B 가족들 점심 식사 준비를 했다. B 아버지와 논문 관련 미팅을 해야 하는데, 그분이 워낙 바쁜 분이라 만날 시간이 일요일밖에 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 교회 목사가 모 대학 총장을 했던 터라, B가 나에게 교회에 올 것을 종용했다. '나중에 연이 될 거니 잘하라'며 점심 식사 준비도 강요했다. 

프레시안 : 주변에서는 이런 사실들을 몰랐나. 

A : 아마 학교에서 자주 보는 사람들은 눈치를 챘을 거다. 맞은 다음 날이면 귀가 퉁퉁 부어있었으니까. 어딘가에 괴로움을 호소하고 싶어도, 친구들에게 사정을 일일이 말할 수 없었다. 업무가 많아지면서, 약속을 잡고 친구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다. 밥 먹는 중에도 수시로 보고해야 하고, 전화도 계속 받아야 하니까 친구를 만날 수가 없었다. 새벽 2시 넘어서 퇴근하면 그때부턴 온전한 내 시간이었지만, 그때도 친구를 만날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업무에 차질이 없으려면 집에서 쉬어야 한다며, B는 나한테 퇴근 후 집에서 누워 있는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프레시안 : 가족들은 폭행 사실을 언제 알게 됐나. 

A : 내가 선배한테 맞고 다닌 걸 가족들이 아주 모르진 않았다. 처음엔 남자 선후배들끼리 투닥거리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큰 상처를 달고 오니까 부모님이 직접 B에게 문자를 보내 꾸짖었다. 아버지는 '군대 악질 상관처럼 굴지 말라'고도 하셨다. 근데 B는 "잘 모르는 일"이라는 식으로 답하거나, "서로 교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식의 기만적인 답장을 보냈다. 우리 형은 심지어 내가 집에서 B와 영상통화하는 걸 직접 보기도 했다. 형이 빨리 연을 끊으라고 했지만, 나는 "이번 작업만 마치면 끝내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작년 9월, 카페에서 정신없이 일하던 중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난 당연히 B선배일 줄 알고 군대식으로 응답했는데, 알고 보니 형이었다. 형이 화를 내며 당장 일 그만두고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때부터 가족들에게 사실을 다 털어놓고, 고소 준비에 들어갔다.

 

 

▲B씨가 A씨 부모와 나눈 휴대전화 메시지 내용. ⓒA씨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6개월 진단에 귀 수술 예정" 

프레시안 : 그동안 받은 육체적‧정신적 상처가 컸겠다. 

A : 아직도 여전하다. 곧 귀 수술을 받기로 했다. 맞은 데를 또 맞은 탓에 귀에서 피를 자주 뽑아야 했다. 피를 하도 많이 뽑다 보니 이젠 자동으로 피가 고여서, 접합하는 수술을 하는 것이다. 정신과도 다닌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6개월 진단을 받았다. 요즘은 좀 나아진 편이지만, 5분 이상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리고 B에게 맞았던 장소 가까이 있는 곳은 다 가기 싫다. 내가 다니는 병원 한 곳이 하필 B의 집 가까이에 있는데, 병원에 가면 괜히 혼자 두리번거리게 된다. 

프레시안 : 경찰 조사가 끝났다. B가 잘못을 일부 시인한 걸로 알고 있다. 사과는 받았나.

A : B 아버지가 몇번 찾아오고 연락을 했지만, 내가 일부러 계속 피했다. 마음 약해질까 봐. 경찰 대질신문할 때 돼서야 B를 처음 봤는데, 말로는 진심으로 사죄 드린다고 했다. 그런데 경찰조차 '사죄하는 마음이 안 느껴진다'고 할 정도로 영혼이 없는 말이었다. 합의 명목으로 공탁금을 넣었던데, 받자마자 돌려줬다. 지금 제일 우려하는 건 벌금형으로 끝나는 것이다. 법대로 처벌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A씨의 정신과 진단서. ⓒA씨



프레시안 : 인분 교수, 악마 동기생 보도를 보면 남 일 같지 않았겠다.

: 작년 인분 교수 사태가 이슈가 됐을 땐 한창 바빴을 때였다. 기사 같은 걸 볼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워낙 화제였으니 B랑 같이 얘기했는데, "우린 그 정돈 아니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 '악마 동기생'의 경우는 내 사례랑 너무 비슷해서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성적 학대가 없었다는 점 빼곤 취업을 미끼로 했다는 점이나 상습 폭행, 수시 보고 등 행태가 비슷했다. 

이런 일들과 엮여 내 사례도 언론에 보도되며 화제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언론 인터뷰를 하면 신분 노출이 될까 우려도 되지만, 한편으론 잘 됐다고 생각한다. 그쪽 집안이 워낙 재력도 있고 인맥도 넓다 보니, 내 사건이 은폐될까 봐 걱정이었던 참이었다.

 

 

'갑을 관계' 청산... "교수 포기 후회 안 한다" 


프레시안 : B 씨와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면서 사실상 진로가 막힌 셈인데, 후회되진 않나. 

: 후회하지 않는다. 당시엔 바로 옆에 '금수저'가 있고, '금수저'가 있고, 그 사람이 잘 되면 내 자리도 챙겨준다고 하는 데다가 실제로 성과도 보여주니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땐 워낙 경주마처럼 달리기만 했다. 내 행동이나 판단에 대해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보니 잘못된 길을 왔다는 생각이 든다. 워낙 교수 되는 게 어렵다 보니, 편한 길을 가고 싶어서 요령을 피우다가 이런 일을 당한 것 같다.

프레시안 : 앞으로 계획은? 

A : 학업은 완전히 중단한 상태다. 학적상으론 아직 휴학 상태인데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갈 마음도 없다. 아직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서, 하반기에 입대하고, 전역하고 나면 취업을 준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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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먹고 살 수 있도록 만 해달라는 거다"

<인터뷰> 개성공단 근로자협, 통일부 앞에서 1인시위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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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3.09  16:3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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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공단 근로자 협의회' 소속 서성길 문창기업 관리실장이 9일 낮 통일부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정부의 개성공단 전면 중단 조치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쫓겨난 개성공단 남측 근로자들이 8일부터 통일부가 있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9일 낮 1인시위를 벌이고 있던 서성길(47) 문창기업 관리실장은 “우리 근로자의 경우는 따로 지원 대책도 없고 아무런 것도 없기 때문에, 특별히 보여드릴 것이 없어 이렇게 나오게 됐다”며 “단지 먹고 살 수 있도록 만 해달라는 거다”라고 말했다.

서 실장은 “정부에서는 휴직 지원금이라고 해서 129만원인가 준다는데, 그것은 기업에서 고용유지를 했을 경우 지급되는 거고, 고용유지가 안 됐을 경우는 그마저도 못 받는 거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개성공단 남측 근로자들은 개성공단이 폐쇄된 뒤 권고사직으로 퇴사하거나 무임금 상태로 회사에 적만 올려두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 홍용표 통일부 장관(오른족)과 이석준 국무조정실장이 지난달 12일 개성공단 입주기업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정부합동대책반은 근로자 지원대책으로 △휴업·휴직에 대한 고용유지지원금 △체불임금사업자 융자 △근로자 생활안정 △최업성공패키지 등 실직 최소화 등을 제시했고, 고용유지지원금은 1일 4.3만원 한도로 최대 180일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근로자들이 가입한 4대보험은 30~50% 감면하고, 임금체불 시 융자와 근로자 생활안정자금 융자도 시행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1인시위에 함께 나온 홍재왕 GS아트라인 공장장은 “막상 나와서 이렇게 보니까, 우리 근로자들에게는 아무 대책도 없었다”며 “정부에서 현실성 없는 대책보다는 근로자들에게 대책을 세워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홍재왕 공장장은 “솔직히 막막한데, 이 길거리에 우리가 나오기까지는 큰 용기가 필요했고, 너무나 절실했기 때문에 지금 1인시위에 나오게 된 것”이라며 “솔직한 이야기로 나 혼자라도 개성공단으로 올라가고 싶다”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개성공단 근로자 협의회’(위원장 김용환)는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발족식을 갖고 서울 상암동에 사무실을 개소했다. 이들은 다음주 포괄적인 향후 계획을 발표하며, 오는 16일 ‘개성공단 기업 비상대책위원회’(공동위원장 정기섭 등)와 함께 임진각에서 행진을 벌일 예정이다.

서성길 “단지 먹고 살 수 있도록 만 해달라는 거다”

   
▲ 서성길 문창기업 관리실장은 “단지 먹고 살 수 있도록 만 해달라는 거다”고 요구사항을 밝혔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오늘 1인시위에 나선 취지는?

■ 서성길 문창기업 관리실장 : 특별한 건 없다. 우리 근로자의 경우는 따로 지원 대책도 없고 아무런 것도 없기 때문에, 특별히 보여드릴 것이 없어 이렇게 나오게 됐다.

□ 개성공단이 폐쇄된 후 근로자들은 어떤 상태에 있나?

■ 거의 대부분 휴직 상태다.

□ 회사에서 휴직 조치를 취한 것인가?

■ 아니다. 일부 회사는 권고사직으로 해서 퇴사한 분들도 꽤 많다. 그렇지 않고 권고사직은 냈으나 무노동 무임금으로 그대로 있는 분들도 있다.

□ 서 실장은 어떤 상태인가?

■ 사직서는 올렸는데 아직 처리가 안 된 상태다. 무임금 상태다. 회사에서 일할 장소가 없기 때문에 끌고 갈 필요성도 없고, 유지 자체가 힘들어 사직서를 받은 거다.

□ 정부의 지원은 없나?

■ 정부에서는 휴직 지원금이라고 해서 129만원인가 준다는데, 그것은 기업에서 고용유지를 했을 경우 지급되는 거고, 고용유지가 안 됐을 경우는 그마저도 못 받는 거다.

□ 1인시위를 하면서 요구하는 사항은?

■ 단지 먹고 살 수 있도록 만 해달라는 거다.

□ 구체적으로 어떤 요구인가?

■ 나의 경우는 당장 구직활동을 하고 있지만 일자리가 없다. 구직활동을 하고 싶어도 생계가 막막하니까 대리운전을 하든지 일용직 노동을 하든지 그렇게 해서라도 밥을 먹여 애들 학교를 보내야 하는 상황이다.

홍재왕 “나 혼자라도 개성공단으로 올라가고 싶다”

□ 정부에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사항은?

■ 홍재왕 GS아트라인 공장장 : 정부가 개성공단 폐쇄 결정을 내렸을 때는 기업이나 근로자한테 차후에 어떤 대책을 세워줘야 한다는 계산을 하고 폐쇄시켰을 것 아닌가? 그런데 막상 나와서 이렇게 보니까 우리 근로자들에게는 아무 대책도 없었다.

솔직히 막막한데, 이 길거리에 우리가 나오기까지는 큰 용기가 필요했고, 너무나 절실했기 때문에 지금 1인시위에 나오게 된 거다.

단지 우리를 어떻게든지 먹고살게는 해줘야 하는데, 정부에서 현실성 없는 대책보다는 근로자들에게 대책을 세워달라는 거다.

□ 개성공단 근로자 협의회는 원래 있었나?

■ 아니다. 지난주 수요일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정식으로 발족했다. 지금 참여하고 있는 분들이 천명 가까이 된다.

어쨌든 다 똑같은 상황에서 막막하다 보니까. 나 역시 너무나 억울해서 나와 있다. 억울해서.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고.

나는 개성공단에 들어갔을 때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했고, 들어가서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다. 회사 잘못도 아니고 근로자 잘못도 아니고, 정부가 내린 폐쇄 결정에 대해서는 거기에 따르는 대가는 정부에서 분명히 책임져 줘야 한다고 본다.

□ 홍 공장장은 어떤 상태인가?

■ 나는 휴직상태다. 막막하다. 회사도 피해자다 보니까 회사한테 월급 달라고 말은 못하고 ‘제발 사표는 보류해달라’고 회사에 요청해서 지금 휴직 상태로 있는 상황이다.

회사한테 바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렇다고 회사에서 당장 월급을 지급할 여력도 없기 때문에 정부가 대책을 세워주지 않는 이상 지금 방법이 없는 것 같아 길거리로 나오게 됐다.

□ 1인 시위는 언제까지 하고, 이후 계획은?

□ 어제부터 시작했고, 해결될 때까지 계속하려고 한다. 솔직한 이야기로 나 혼자라도 개성공단으로 올라가고 싶다.

개성공단 근로자 협의회 사무실이 상암동에 자리잡아 개소했고, 다음주 중에 포괄적으로 계획을 내놓기 위해 준비 중이다. 16일에는 임진각에서 개성공단 기업비대위와 함께 전체 행진이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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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핵무기 등 모든 공격수단, 발사만 기다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6/03/10 09:17
  • 수정일
    2016/03/10 09:1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침공 단행하면 도발 본거지 불바다 만들 것" 경고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6/03/09 [16:42]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이정섭 기자


 

조선은 "(한미가) 끝끝내 군사적 침공을 단행한다면 우리 군대와 인민은 상상 밖의 주체적 전쟁방식으로 도발의 본거지들을 순식간에 불바다, 잿더미로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연합뉴스는 9일 조선중앙통신이 논평에서 '우리의 경고를 오판하지 말라'는 제목을 통해 "미국과 괴뢰 역적들이 사상 최대 규모의 합동군사연습과 고강도 제재를 운운하며 제아무리 기고만장해 있어도 우리는 꿈쩍하지 않는다"며 이같이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지금 우리 군대와 인민은 우리의 생존공간을 핵참화 속에 몰아넣으려는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핵전쟁 도발광기에 전면대응하기 위한 총공세에 진입했다"며 "자위적 핵억제력으로 무진막강한 우리 공화국을 감히 어째 보겠다는 것이야말로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미국을 비난했다.

 

 

▲     © 이정섭 기자

 

중앙통신은 "실전 배비(배치)된 핵무기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군사적 공격수단들은 최고 수뇌부의 남조선 해방, 미국징벌 작전계획에 따라 남조선 작전지대 안의주요 타격 대상들과 아시아태평양지역 미제침략군 기지들, 미국 본토를 정밀 조준하고 섬멸적인 발사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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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탄강 따라 흐른 용암, 협곡 아래 돌베개 남겨

옛 한탄강 따라 흐른 용암, 협곡 아래 돌베개 남겨

조홍섭 2016. 03. 09
조회수 3053 추천수 0
 

[한반도 지질공원 생성의 비밀] <5-1> 연천권-현무암 협곡

 

 

 

  북한 680고지·오리산 화산 2번 분출
 철원 70m, 전곡 30m, 문산 3m 깊이로
 
 강줄기 따라 110㎞ 느릿느릿 흘러
 물길 메우고 지류로 역류
 
 부곡엔 용암호가 만든 재인폭포 절경
 차탄천엔 25m 높이 웅장한 절벽
 
 포천 영평천 합류 아우라지엔
 치약을 꾸역꾸역 짜낸 듯
 돌베개 모양 용암이 차곡차곡
 
 연천은 신생대 용암 분출뿐 아니라
 한반도 형성기 지각변동 중심지

 

yo5.jpg» 옛 한탄강을 따라 흐르던 용암이 역류해 고인 굳어 형성된 차탄천의 장대한 주상절리 협곡. 사진=조홍섭 환경전문기자

  
심해저 화산에선 용암이 직접 물속으로 흘러든다. 시뻘건 용암은 울컥 쏟아져 나오자마자 찬 바닷물에 거죽이 식어 검은 현무암이 된다. 하지만 용암이 계속 밀려들면 어느 순간 검은 껍질이 파열되면서 붉은 용암이 쏟아져 나와 새로운 현무암 덩어리를 만든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단면이 둥글고 기다란 베개 모양의 현무암 덩어리가 줄줄이 쌓인다. 이런 베개용암은 하와이나 대서양 심해저의 해저화산에서 생긴다. 그러나 우리나라 하천에서 과거의 베개용암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경기도 포천시 장수면 신흥리의 한탄강 아우라지가 그곳이다.
 
심해저 화산에서 생긴 것처럼

 

yo1.jpg» 강물속에서 형성된 둥글둥글한 아우라지 베개용암. 윗부분은 물위 용암이 굳은 주상절리이다. 사진=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최근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한탄·임진강 지질공원의 지질명소인 아우라지 베개용암을 3일 찾았다. 한탄강과 영평천이 합류하는 강변에 주상절리 협곡이 병풍처럼 서 있는데, 목재를 쌓아 놓은 것 같은 밑부분이 특이하다.
 
배를 타고 가까이 접근해 보았다. 지름 50㎝가량에 단면이 어금니처럼 생기고 길이가 80~100㎝인 원통형 현무암 덩어리가 통나무더미처럼 빼꼭하게 쌓여 있다. 동행한 신승원 강원대 지질유산환경연구소 부소장은 “표면이 급격히 식어 유리처럼 바뀌었고, 치약을 짠 것 같은 형태와 방사상으로 금이 가는 등 베개용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고 설명했다.

 

yo2.jpg» 베개용암의 단면. 거죽은 급랭해 생긴 유리질로 덮여있고 방사상 절리가 나 있다. 사진=곽윤섭 선임기자
 
바위가 녹은 액체인 용암의 온도는 900도에 이른다. 고온의 용암이 찬물과 만나 급격히 식으면 미처 암석의 결정이 만들어지지 않아 유리가 형성된다. 아우라지의 베개용암 곳곳에는 검은 유리 조각이 들어 있었다.
 
아우라지의 베개용암을 만든 대규모 용암 분출이 한탄강의 현무암 협곡을 형성했다. 한반도를 불바다로 만든 중생대 백악기의 화산활동 이후 한동안 잠잠하더니 신생대 제4기에 들어 다시 화산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백두산, 제주도, 울릉도와 함께 한탄강 상류에서 화산이 분화했다.
 
각각 50만년 전, 15만년 전 분출

 

orisan_2009.jpg» 한탄강에 다량의 용암을 분출한 기원지로 추정되는 북한 평강의 오리산(사진 왼쪽 아래 둥근 함몰체) 위성사진. 위는 평강 시가지이다. 2009년 구글 위성사진으로 현재는 분화구 주변의 농경지 개발로 함몰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위성지도로 북한 땅인 강원도 평강 근처를 보면, 지름 150m, 깊이 20m인 작은 분화구가 보인다. 이곳이 약 15만년 전 다량의 용암을 옛 한탄강으로 흘려보낸 오리산(해발 452m)이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21㎞ 떨어진 ‘680고지’는 또다른 용암 기원지로 약 50만년 전 분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두 분화구에서 흘러나온 용암은 철원에 큰 용암대지를 형성했고 이어 한탄강을 따라 전곡을 지나 분화구에서 110㎞ 떨어진 임진강 문산 부근에 이르렀다.

 

03431144_R_0.jpg» 용암의 끝자락_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화석정 부근의 임진강 모습.한탄강을 따라 110킬로미터를 달려온 용암은 임진강의 이곳까지 밀려 내려왔다.강변에 현무암 용암 절벽이 보인다. 사진=조홍섭 기자
 
최근 한탄강의 현무암층을 연구한 안웅산 제주시 세계유산·한라산연구소 학예연구사는 “그동안 한탄강 용암의 유출 시기와 범위를 놓고 논란이 많았지만 약 50만년 전 680고지 분화와 이보다 규모가 큰 약 15만년 전 오리산 분화 등 2번의 용암 분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물론, 분화 기원지가 북한이어서 직접 연구가 불가능해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한탄강의 용암은 백두산이나 한라산의 것보다 점도가 낮아 느릿느릿 먼 거리를 흘렀다. 오리산의 높이는 주변보다 150m 정도밖에 높지 않아 경사도가 한라산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지만 임진강 하류까지 용암이 흘러간 것이다.
 
용암의 깊이는 분화구에서 가까운 철원이 70m, 전곡 20~30m, 문산 2~3m에 이른다. 옛 한탄강의 물길을 메우고 지류로 역류하는가 하면 커다란 용암호를 이루기도 했다.

 

y05.jpg» 역류한 용암이 호수를 이룬 뒤 굳어 두꺼운 현무암층으로 쌓인 재인 폭포 현무암 절벽. 사진=곽윤섭 선임기자
 
연천읍 고문리에 있는 재인폭포는 그 과정에서 생겼다. 주상절리와 동굴, 돌개구멍 등이 절경을 빚는 이 폭포는 한탄강의 용암이 지류로 흘러넘쳐 용암호를 형성한 것이 시초였다. 주상절리 돌기둥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 절벽이 생겼고 폭포는 침식을 가속했다. 
 
지난 15만년 동안 폭포는 한탄강에서 350m나 안쪽으로 후퇴했다. 앞으로 5만년쯤 지나면 폭포는 아예 사라질 것이다.
 
종잇장처럼 구겨져 주름진 바위

 

yo10.jpg» 차탄천을 따라 난 약 10킬로미터 길이의 에움길을 걷다 보면 현무암 협곡과 함께 다양한 암석과 지질구조를 즐길 수 있다. 사진=조홍섭 기자

 
전곡에서 한탄강에 합류하는 차탄천에는 용암의 역류로 인한 현무암 협곡의 절경이 10㎞나 이어진다. 연천군은 이곳에 ‘차탄천 에움길’이란 지질 트레일을 조성했다.
 
차탄천의 은대리 왕림교 아래에는 높이가 25m에 이르는 웅장한 현무암 절벽이 펼쳐져 있다. 아파트 10층 높이의 주상절리 위와 아래엔 각각 덩어리 상태와 판을 쌓아놓은 모양의 현무암층이 놓여 있어 적어도 3개의 용암층이 쌓였음을 보여준다. 이곳은 옛 한탄강이 굽이치는 곳이어서 용암층이 깊게 쌓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yo5-2.jpg» 은대리 판상절리 모습. 기왓장을 쌓아놓은 형태로 현무암 절벽에 금이 가 있다. 형성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용암 위 아래의 수축률 차이로 인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곽윤섭 선임기자


이곳에서 500m쯤 하류로 내려가면 옛 한탄강의 강바닥과 함께 판상절리가 장관을 이루는 모습이 펼쳐진다. 현무암 절벽 밑부분에 강바닥에서 볼 수 있는 모서리가 둥근 자갈이 층을 이루고 있다. 
 
동행한 정대교 강원대 지질학과 교수는 “용암이 흐르기 전 옛 한탄강에서 쌓인 미처 굳지 않은 퇴적층”이라며 “자갈이 기울어진 방향을 보면 당시 강물이 어느 쪽으로 흘렀는지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yo5-1.jpg» 물살에 쓸려 일정한 방향성을 보이는 옛 한탄강 강바닥의 자갈층. 15만년 전 용암이 흘러내리기 전에 쌓인 층이어서 미처 암석으로 굳지 않았다. 바로 위 용암은 울퉁불퉁해 급히 식은 상태를 보여준다. 사진=조홍섭 기자


15만년 용암은 이 자갈이 깔린 옛 한탄강에 쏟아져 내렸을 것이다. 물이 끓어오르고 용암이 급격하게 식어 콘크리트를 부어놓은 것처럼 울퉁불퉁하게 굳은 층이 가지런한 강돌 위에 잇닿아 있다. 당시 이곳에 살던 전곡리 구석기인들은 이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두고두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yo6.jpg» 은대리의 옛 강바닥 퇴적층을 백의리 퇴적층이라 하는데, 고문리 양수장의 현무암 절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진=조홍섭 기자
 
은대리에는 지층이 종잇장처럼 구겨진 습곡을 간직한 바위가 눈길을 끈다. 정 교수는 “지하 10㎞에서 무르고 연해진 고생대 퇴적암이 2억~3억년 전 한반도가 대규모 지각변동을 받았을 때 이리저리 굽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yo7.jpg» 은대리 습곡. 지하 10킬로미터에서 부드러워진 퇴적층이 지각변동의 힘을 받아 구부러졌다. 사진=곽윤섭 선임기자
 
연천은 신생대 용암 분출뿐 아니라 한반도 형성기인 중생대 지각변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곳은 중·한 지괴와 남중국 지괴의 충돌대 가운데 북쪽 끄트머리에 해당한다. 대륙충돌 때나 생기는 고온·고압 환경에서 생성된 남정석, 석류석 같은 광물이 곳곳에서 나온다.

 

yo9_감람석.jpg» 고온 고압 환경에서 형성되는 광물인 감람석. 연천이 대륙 충돌대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사진=곽윤섭 선임기자
 
연천은 고구려와 신라가 격전을 벌였고, 후삼국 시대 태봉의 궁예가 몰락한 곳이다. 한국전쟁의 격전지이자 현재에도 군인 인구가 적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탄강이란 이름이 ‘원통해 탄식하다’는 한탄(恨歎)에서 온 것으로 아는 이도 있지만 실제로는 ‘커다란 여울’이란 뜻이다. 하지만, 한반도 땅덩어리에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 대격변인 대륙충돌이 이곳에 상처를 남긴 것 또한 사실이다.
 
연천/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공동기획: 한겨레, 대한지질학회, 국립공원관리공단 국가지질공원사무국, 한국지구과학교사협회

정대교 강원대 지질학과 교수 인터뷰 

“연천은 지질지대 백화점, 지질교육 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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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만큼 지구과학 교육에 좋은 장소는 우리나라에 또 없을 겁니다.”
 

정대교 강원대 지질학과 교수(사진)는 경기도 연천군 은대리의 판상절리와 백의리 퇴적층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생대 제4기의 용암이 굳어 주상절리와 판상절리를 이룬 바닥에 옛 한탄강 바닥이었던 퇴적층이 놓여 있다.

 

이 지역 기반암은 4억년 전 고생대 데본기의 변성퇴적암이고, 19억년 전 원생대 암석도 있다. “다른 지질공원이 한두 가지 특징적인 지질현상을 갖췄다면 여기는 다양한 지질지대의 암석과 지질구조를 두루 갖춘 드문 곳입니다.”
 

연천의 지질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은 2008년 발간됐다. 비무장지대 때문이었지만 지질이 복잡한 점도 작용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넓은 미산층이 이제까지 알려진 원생대가 아닌 고생대 변성암으로 얼마 전 밝혀지기도 했다. 한 지역에 여러 지질시대 암석 30종이 나오는 곳, 용암도 있고 화석도 있는 곳을 국내에서 달리 찾을 곳이 없다.
 

정 교수는 “하천변을 따라 현무암 협곡이 펼쳐져 아름다운데다 이런 지질학적 다양성과 수도권에서의 접근성을 고려한다면 지질학 교육에 최적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전곡 구석기 유적과 연계해 은대리 등 연천의 지질 명소들은 경기도 지구과학 교사 연수와 학생 연수에 널리 쓰여 연간 2000여명이 현장 답사를 위해 찾고 있다.
 

연천/글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사진 곽윤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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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지금 우리는 행복할까요?

[총선아바타_제주종합편]제주, 지금 우리는 행복할까요?
 
총선아바타의 중심은 4.13총선입니다.
 
임병도 | 2016-03-09 08:49:5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43일간의 총선아바타의 첫 번째 여정은 제주였습니다. 제주에 사는 아이엠피터는 서울 취재가 끝나자마자 전 날 밤에 내려왔습니다. 3월 3일 취재팀은 우여곡절 끝에 제주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걱정이 있었지만, 2박 3일 간의 제주 취재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총선아바타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총선아바타 제주편을 취재하면서 느낀 것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환상 이상으로 고민과 아픔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7년째 제주에 사는 아이엠피터조차 이번 취재를 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제주의 속살을 보기도 했습니다.

‘제주에서 한 달 살기 열풍’,’전국에서 가장 많이 찾는 여행지’, ‘이주민이 제일 많이 늘어난 섬’ 등 제주를 아름답게 보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여행객이 늘어나는 만큼 발생하는 교통사고와 공항 문제, 지역 주민의 동의 없이 이루어지는 해군기지와 제2공항, 거대 자본에만 의존하는 중산간개발,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벌어지는 쓰레기 대란과 환경 문제, 역사를 뒤집는 제주 4.3사건 재심사 등 제주 곳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기고 있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그 정도 아픔과 상처가 없는 땅이 우리나라에 없는 곳이 있느냐고. 맞습니다. 대한민국 땅 어디에도 아픔과 고민은 다 있습니다. 하지만, 왜 우리는 그 고통을 상식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나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는 왜 늘 무시당하나요?

총선아바타의 중심은 4.13총선입니다. 그러나 제주만큼은 선거를 왜 하는지 우리의 본질적인 고민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헌법에는 개인의 행복이 곧 국가의 기본이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의 행복지수는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제주에 살지만, 제주를 취재하면서 느낀 결론은 ‘제주, 지금 우리는 행복한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총선아바타 제주 종합편을 보시면서 제주의 고민을 함께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있는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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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의 대표자, 이진희를 만나다

 

 

 

 

 

 

 

본 코너는 4.13 총선특집인 <저평가 우량주를 찾아서>와 함께 

<20대 총선 잇(it)후보> 기획 중 하나다.

 

힘닿는 데까지 열쒸미 발굴할 예정이니,

독자분들도 주저 없이 추천해 주시라.

 

 

 

 

 

 

오늘은 딴지 선정 ‘20대 총선 잇(it) 후보’로 더불어민주당에 비례후보 공천을 신청한 전국시설노조 이진희 위원장을 소개한다. 생소하겠지만, 수십 년 동안 비정규직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활동을 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직함은 위원장이지만 동시에 아파트 관리업체의 전기기사로 20년 넘게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아파트 경비, 청소 등 시설 관리 분야는 노동권이 취약한 우리 사회에서도 노동 인권 침해의 대표적 사각지대로 불린다. 빈번한 해고로 인해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일부 몰지각한 주민에 의한 인격 테러를 당하는 을(乙) 중에 을 직종이다.

 

얼마 전 부산의 모 아파트에서 동대표가 경비원에게 90도 인사를 강요하여, 엘리베이터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에게 경비원이 허리를 굽힌 사진은 이런 현실을 가장 극명히 보여준 장면이었다. 이에 앞서 압구정 현대아파트에서는 경비원이 주민의 폭언에 시달린 끝에 분신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그해 말 경비원들은 모조리 해고되었다.

 

이진희는 이들 비정규직을 대표해 더민주의 비례대표 후보 공모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지금까지의 배경만 보자면 지역구 국회의원의 대표성 한계를 보완해 계층과 직능을 대변하기 위한 비례대표 제도의 목적에 부합하는 요건은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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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 리버럴, : 이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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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 이번에 더불어민주당 비례 대표 공모에 응모했는데, 느낌이 어떤가?

 

이 : 비례대표는 대중적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실감이 안 간다. 취업 이력서를 내고 합격 통보를 기다리는 심정에 더 가깝다. 서류가 통과되면 면접인데, 이번 인터뷰를 모의 면접이라 생각하고 있다.(웃음)

 

 : 그럼 면접에 대비하여 강도 높은 압박 인터뷰를 전개하겠다.(웃음) 삶의 이력을 보니 66년생에 아주대 경제학과를 중퇴하셨다. 운동권 학생이었는가?

 

이 : 80년대 시절 대학생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다 비슷한 경로를 통해 데모도 하고, 학생 운동하지 않았나? 특별한 이력이라고 볼 수도 없다.

 

 

노동운동 대신 생계문제로 전기기사 취업

 

 : 근데 왜 4학년 때 중퇴하셨나? 1년 남았는데... 그 동안 낸 등록금이 아깝지 않은가?

 

이 : 학생 시절에 공부 대신 데모만 했으니 졸업장이 있었다면 학교에 미안할 일이다. 평생 노동운동하겠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졸업장은 오히려 부담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 대졸 출신이 흔하고, 또 그들이 생계를 위해 생산직에 종사하는 게 특별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오히려 대학 출신이 생산직에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운동권이 노동운동을 목적으로 취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사측에서 경계를 많이 했다. 그래서 졸업장을 굳이 따야겠다는 생각은 안했던 것 같다.

 

 : 후회하지 않나?

 

이 : 후회 없다. 지금까지 인생이 후회되지 않는데, 대학 졸업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그래서 결심대로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는가?

 

이 : 성남 공단에 있는 한 업체에 취업했다. 한 1년간 프레스 일을 했는데, 92년도 총선 때 창당된 민중당에서 후보를 도울 일손이 너무 필요하다고 해, 일을 그만두고 선거를 도왔다. 그러나 민중당이 3% 지지율을 받지 못해 해산된 뒤 다소 공백기가 있었다. 당시 분당 신도시가 막 들어설 때였는데, 아파트 관리소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당분간 생계 방편으로 생각하고 들어갔다. 마침 전기기사 자격증이 있고 젊어서 쉽게 취업되었다.

 

 : 그럼 노동운동을 목적으로 취업한 것이 아니었는가?

 

이 : 그렇다. 사실 노동운동을 하러 들어간 곳은 1년 남짓 일하다 선거 때문에 그냥 나왔고, 생계를 위해 입사했던 아파트 관리업체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하게 될 줄은 당시에 생각도 못 했다. 그 당시 노동운동하면 공장 생산직을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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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계속 거기서 근무하고 있는가?

 

이 : 그렇다. 생계를 위해 취업해 여기서 노조활동을 한 것은 내 자신에게 있어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 다행이라고? 어떤 점에서?

 

이 : 사실 과거 80년대 운동권들이 노동운동을 목적으로 위장 취업하다 보면, 아무래도 의식화라는 목적으로 들어갔으니까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일종의 선민의식이 생겼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누군가를 의식화하겠다는 목적 없이 입사하여 같은 처지에서 일했기 때문에, 운동권으로서의 오만함 같은 것은 덜했던 것 같다.

 

 : 위장취업해서 노동운동했던 운동권들에게 그런 심리가 어느 정도 있었단 말인가?

 

이 : 뭐, 일반화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마르크스주의 서적 몇 권이랑 문건을 읽은 먹물 20대 청년이 수십 년 짬밥의 노동자들을 지도하러 현장에 들어갔다는 것이 상식적인 상황은 아니지 않나, 이런 생각이다.

 

 : 그래도 그들 때문에 노동운동이 발전했다는 면도 있지 않을까?

 

이 : 물론 훌륭한 노동운동가로 성장한 사람도 있고, 또 겸허하게 배우는 자세를 가졌던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권이 과연 노동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소모적인 정파라든가, 대중과 동떨어진 운동권 문화라든가 하는 부정적인 면도 같이 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국회 들어가면 노동인권법 제정하겠다.”

 

 : 이 위원장은 시설관리직 노동자이기도 한데, 최근 경비원들의 처지와 관련한 언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얼마 전 부산의 아파트 경비원이 동 대표에 의해 모든 주민에게 출근길 인사를 강요당한 사건이 있었다. 또 폭언에 시달린 압구정 현대아파트 경비는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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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모든 국민들이 분노를 감추지 않았던 사건이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그런 황당한 갑질을 비난할 만큼 건전한 상식을 갖추고 있다. 아파트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주민 대부분은 시설 관리인들과 이웃처럼 인간적 유대 관계로 잘 지내고 있다. 사실, 출근길 인사를 강요한 그 사진을 찍어 SNS에 고발한 것도 그 아파트 주민이다.

 

일부 입주민 대표자 몇몇이 그런 횡포를 부리는 것이 문제다. 그런 갑질에 관리인이 저항하기도 힘들지만, 아파트 주민들은 그런 횡포가 있는지조차 알지도 못하고, 안다고 해도 나서서 방어해주기도 쉽지 않다.

 

때문에 피고용인에 대한 인격적 모독과 같은 일에 대해서는 어떤 제도적 방어 장치가 필요하다. 비단 아파트 관리직만이 아니라 서비스직, 특히 감정 노동자들에 대한 인격 모독이 너무나 심하고 빈번하다. 스튜어디스에 대한 라면상무 사건에서 보듯이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폭언과 폭행 모욕을 주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회사는 고객의 모든 요구에도 감내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거의 서비스직 노동자를 노예 대하듯 하는 비상식적인 일마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유달리 서열문화가 강해서 그런지 다른 나라보다 심한 것 같다.

 

오죽하면 감정노동자의 약 40%가 중증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겠는가? 그런대도 갑질 횡포가 드러나면 도덕적인 비난만 한때 들끓고 만다. 강력한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내가 국회 들어가면 이들을 보호하는 노동인권법을 제정하여, 상식을 벗어난 갑질 횡포에 대해 회사가 노동자를 보호할 의무를 지우게 하고, 민형사상 배상 제도를 도입토록 하고 싶다. 그것만은 꼭 하고 싶다.

 

 

아파트 노조위원장, 아파트 주민대표 되다

 

 : 이진희 위원장은 어디에 살고 있나? 아파트인가 주택인가?

 

이 : 아파트다.

 

 : 아파트 주민으로서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의 관리인들을 보면 남다르게 느껴지나?

 

이 : 아파트 주민일 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주민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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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웃음) 이거 정말 아주 아이러니하다. 거주지와 근무지가 다르지만 어쨌든 노동자면서 동시에 사용자인 셈인데, 관리비 절감 차원에서 경비원을 해고하고 자동 방범 시스템 도입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 : 경비를 해고하고 방범 시스템 도입이 과연 주민복리에 더 좋은지는 의문이다. 무조건 안 된다고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주민들의 공정한 판단을 구해야 하지 않겠나? 인정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주민들은 절감되는 관리 비용보다 경비원분들을 통해 얻는 주거 편익을 더 가치 있게 보는 것 같다. 주민투표하면 부결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자동방범 시스템 업자들이 주민 대표에게 지속적으로 로비하는 영향이 크다고 본다. 얼마 전 가양동 아파트에서 그런 시스템 도입을 빌미로 경비원 해고를 강행했던 입주자 대표와 주민 대표와 갈등만 보더라도 그렇다. 주민 투표에서 두 차례나 압도적으로 부결되었는데도 그걸 강행하는 걸 보면, 몇 천 원 관리비 아끼겠다는 것이 입주자 대표의 본심은 아닌 것 같다.

 

 : 택배 받아주고, 쓰레기 분리수거 등의 일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닌데..

 

이 : 사실 택배, 쓰레기 분리수거는 경비원의 고유 업무가 아니다. 그럼에도 주민 편의를 위해 그 일을 해준 것이 이제 거의 고유 업무가 되다시피 한 것이다. 문제가 되었던 가양동 아파트 경비원들은 해고 반대 기자회견을 하러 가는 도중에도 단지에 널린 쓰레기를 줍고, 분리수거 포대를 종류별로 정리했던 사람들이다.

 

 

최저 임금인상 부담스러워하는 경비원

 

 : 해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아파트 경비원들과 청소원들 임금이 올라가면 주민들 부담이 약간이라도 늘어날 텐데... 이진희 위원장이 주민 대표로 있는 아파트에서는 관리인들의 임금을 얼마나 인상했나?

 

이 : 최저임금 인상률보다 더 높였다. 10% 넘는 수준이다.

 

 : 주민들 반발이 있지 않은가?

 

이 :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 아파트단지 세대가 300세대가 안 되는데도 불과 몇천 원 인상에 그친다. 주로 시간제 근무하는 분이 많아 임금 자체가 높지도 않다. 근데 사실 경비업무하시는 분들 중에는 높은 임금 인상을 부담스러워하는 분들도 있다.

 

 : 왜 그런가?

 

이 : 시설관리 업무는 고령자들이 많다. 짤리면 어디서 일자리 구하겠나, 그런 불안이 가장 크다. 임금 인상 때문에 큰 부담을 느껴 해고하지 않을까 불안하여 심지어 최저임금 인상을 싫어하는 분들까지 생길 정도다. 그래서 임금 수준보다 고용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 본인은 비정규직 대표로서 나왔는데, 그동안 비정규직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해왔나?

 

이 : 전국시설관리노조 조합원들 모두가 외주 용역업체에 속해 있는 분들이다. 내 자신이 비정규직 직원으로서 우리 조합원들을 대표해 20년 넘게 활동해 왔다. 조합원들과 함께 투쟁하고 교섭한 것은 노조위원장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진보정당에 결합해서 제도 개선 투쟁에도 앞장서왔다.

 

최저임금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경비원에게도 최저임금이 전면 적용될 수 있도록 입법 청원을 하고, 원청업체의 사용자성 인정, 위탁관리업체 변경 시 고용승계, 포괄임금제 철폐 등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현안 사항을 비정규직 보호법안에 포함시키도록 압박해 왔다.

 

리 : 용역업체, 외주.. 이런 업체에 근무하면 모두 비정규직인가?

 

이 : 정규직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조건이 붙는다. 첫째 정해진 기간이 없고, 둘째 사용사업주와 직접 고용하는 자가 정규직이다. 이런 조건의 정규직이 아닌 모든 피고용인은 모두 비정규직이다.

 

리 : 그러니까 간접고용은 고용자와 사용자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정규직 조건에서 벗어나 있는 건가?

 

이 : 그렇다. 예전에는 어떤 사업장에서 상시적으로 근무한다면 그 사업장 소속 노동자가 되는 것이 당연했지만, 기간제법, 파견법이 만들어지면서 갑자기 고용관행이 천지개벽처럼 바뀌어서 소속된 회사와 근무하는 사업장이 별개로 되는 일이 생겼다. 과거에는 그런 경우는 아주 특수한 직군에만 있었는데 이제 아웃소싱이 보편화되어서 상시적인 고용불안 체제다.

 

 

비정규직, 출구 규제가 아니라 입구 규제해야

 

리 : 최근 박근혜 정부는 비정규직 기간을 4년으로 늘리고, 파견법을 확대할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이 : 그것만큼은 단호히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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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 근데 2년 제한을 둔 현행 비정규직법이 통과될 때도 2년마다 해고하라는 법이라고 노무현 정부 때 노동계가 엄청 반대하지 않았나?

 

이 : 맞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기간제 노동자의 사용 기간에 제한을 두는 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원래 2년이라는 기간 제한을 둔 것은 그 정도 근무하면 상시, 지속적인 업무로 간주하여 정규직으로 채용하라는 것이 도입 취지인데 현실을 보면 얼마나 안이했던 생각인가? 그런데 그걸 오히려 4년으로 더 연장시키겠다는 것은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이렇게 출구 규제를 할 것이 아니라 입구에서부터 규제해야 한다.

 

리 : 입구 규제.

 

이 : 처음부터 사용제한을 두어야 한다. 이게 상시적인지 일시적인 일인지 아닌지는 대부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가령 은행 창구일은 일시적인 일이겠는가? 그래서 출구 규제가 아닌 입구 규제를 해야 한다.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고용 안정은 조직이나 직무에 대한 몰입을 끌어내기 위한 기본이다. 그래야 생산성도 좋아지고, 일의 효율성도 높아질 것 아닌가?

 

리 : 파견 남발도 그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 : 맞다. 아웃소싱이 직접 고용보다 비용절감에서 얼마나 효과 있는지도 의문이다. 내가 있는 업종만 보더라도 그렇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근무 장소와 일은 똑같은데 사장만 바뀐 꼴이다. 그런데 임금은 푹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원청회사가 아웃소싱업체에 주는 이윤을 생각하면 인건비 총액이 많이 주는 건 아니다. 결국 중간 아웃소싱업체에서 노동자 임금을 중간에서 갈취하는 효과밖에 더 있나? 공공기관의 경우는 직원 사우회가 아웃소싱업체로 둔갑해 퇴직한 임직원들의 노후보장 역할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파견 노동자가 그들 노후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셈이다. 조폭 수준의 중간 갈취다. 말이 아웃소싱이지 사실상 임금 가로채기 인력관리업체나 다를 바 없다. 간접고용이라는 이름으로 임금을 중간착취가 법으로 보장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박정희 시대 때도 중간착취를 법으로 금지했는데, 노동문제로만 본다면 그 시절보다 훨씬 퇴보한 셈이다.

 

리 : 맞다. 아웃소싱은 사실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회의론이 나오고 있다. 같은 일을 해도 소속이 서로 달라 소통도 잘 안 되고, 이직률도 높다. 이것이 제품의 질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가령 고객 상담 부문이 많이 외주화되는데, 고객 의견이 제품 개발에 반영되지 않는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 : 그렇다. 비정규직의 폐해는 노동자들이 가장 큰 피해자지만 결국엔 회사의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반드시 효율적이라고만 볼 수 없다. 비정규직 폐해는 너무나 명확히 드러나 있다. 이 문제를 두고서는 대한민국 미래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IMF 외환위기, 해고가 트렌드

 

리 : 사실 이전에는 우리나라도 일본과 비슷하게 평생 고용 비슷한 체제였는데, 비정규직법이 만들어진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 아닌가?

 

이 : 바로 그렇다.

 

리 : 시설관리분야도 IMF 위기 영향을 많이 받았나?

 

이 : 물론이다. 그때 생각하면 기가 막힌 게... 해고가 마치 트렌드처럼 퍼져나갔다. 물론 많은 기업이 도산하거나 위기에 처해서 노동자가 무더기로 짤려 나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던 곳도 많았다. 그런 곳에서 정리해고야 불가피하겠지만, 문제는 그런 영향과 전혀 무관한 곳에서도 해고를 마치 선진 경영의 기법으로 여기고 마구잡이로 할 때도 많았다.

 

리 : 그런 사회 분위기 기억난다. 미국의 해고왕 GE의 잭웰치의 경영론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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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ORTUNE>

 

이 : 가령 내가 근무하던 분당의 A 아파트 단지에서 관리업체와 계약을 해지하면서 거기서 수십 년 근무한 직원들을 다 같이 짤랐다. 그러면 그 일을 대체할 사람이 누군가가 또 와야 하지 않나? 그러면 옆에 있는 B단지, C단지 근무자들을 채용한다. 마치 순환 근무하듯 서로 돌아가며 해고하고 채용한다. 그러면 새로 채용된 사람들은 그 아파트 보일러실부터 구조까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알아가야 하지 않겠나?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해고가 민간 기관만이 아니라, 대학이나 공공기관에서도 비일비재했다.

 

제가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경기지역 전체로 노조를 조직하고, 마침내 전국 조직을 결성하게 된 계기가 바로 IMF 외환위기 때 무차별적으로 남발하는 정리해고 때문이었다. 노조 결성식을 위해 부산에 갔던 날 부산대에서 시설관리직원들이 용역업체와 계약해지와 동시에 모두 해고되었다. 해고통지서를 받아들고서 어쩔 줄 모르며 눈물만 훔치던 아주머니들 손을 붙잡고 그날 당일 총장실 점거투쟁에 들어갔다. 몇 달 동안 투쟁한 끝에 복직되었지만, 참 생각해보면 국립대학이란 곳에서도 그렇게 몰상식적으로 무분별하게 해고한다는 것이 참담했다.

 

리 : 그러니까 IMF로 신자유주의적 광풍이 불면서, 노동 유연성이 글로벌스탠다드로 제시되고...

 

이 : 그렇다.

 

리 : 그때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이 아니었나? 민주 진보 정권에서 신자유주의 앞장서 도입한 셈인데... 비록 집권이 오래전 일이지만, 바로 그 정당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건 모순 아닌가?

 

이 :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의 과오랄까 그런 한계에 대해서는 단호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리 : IMF가 강요한 구조조정 같은 거?

 

이 : 사실 외환위기가 없더라도 IMF가 요구한 일련의 정책들은 당시 정치권 모두가 추진하려던 정책이었다. 민영화, 재벌개혁, 주주 자본주의, 노동 유연화, 개방화, 규제 완화 그런 것들... 90년대 시대 상황을 생각해보자. 국내적으로는 민주화 10년 되고 처음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당시 민주화세력은 그동안 국가폭력에 저항해왔기 국가 기구라든가, 국가 주도 정책 전반에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반대 편향으로 민영화 같은 것을 민주화나 자유화 연장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다. 당시 세계정세도 비슷했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가 무너지면서 시장주의, 자유주의가 세계적인 대세였다. 심지어 사회민주주의 진영도 제3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물결을 받아들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펼친 정책도 당시 이러한 시대 흐름을 쫓던 것이다. 그러니까 신자유주의를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정체성이라고 무조건 규정할 수만은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다.

 

리 : 그래도 오늘날 양극화가 거기서 비롯되지 않았나?

 

이 : 물론이다. 그 시대 노동자와 서민들이 겪은 피해는 말할 수 없다. 빈부격차 심화는 세계적 현상으로도 번졌다. 그러나 80년대부터 시작된 이런 신자유주의 물결은 이제 곧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다. 미국의 샌더스 열풍, 영국 노동당 코빈의 등장, 피케티 현상 등은 아주 상징적인 사건들 아닌가?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지난 대선 때 경제민주화, 복지 정책이 최대 이슈가 되었다. 불과 몇 년 전 이명박의 ‘부자 되세요’ 선거 분위기와 비교한다면 상전벽해의 변화다. 미국이나 유럽이 1930년대 대공황을 겪은 후, 40년대부터 사회민주주의적인 가치로서 번영의 시기를 이끌었던 그런 시대적 분위기와 흡사해졌다.

 

 

신자유주의 시대 종말, 사회민주주의 시대 다시 찾아와

 

리 : 더민주당이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근거는 있나?

 

이 : 새누리당이 시장주의로 방향을 가져가고 있다면, 그와 차별성을 갖기 위해서라도 사회민주적 가치를 자기 정체성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리 :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뚜렷이 내세우는 건 정의당 같은 진보정당 아닌가? 왜 진보정당 노선을 취하지 않은가?

 

이 :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다. 우선 현행 소선거구제하에서는 양당제를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정치학에서 뒤베르제 법칙이라고도 한다는데 어쨌든, 제3의 정당은 한국에서는 안 된다. 우리와 비슷한 승자독식 소선거구제 갖고 있는 미국이나 영국도 백 년 넘게 양당제의 정치구조를 갖게 된 것도 다 그 때문 아닌가.

 

그래서 미국의 진보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민주당으로 들어가서 왼쪽을 차지했다. 미국 민주당은 대공황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원래 남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 보수정당이었는데, 대공황을 거치며 노동자 흑인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완전히 성격이 변화되지 않았나?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미국 민주당에서 샌더스가 뜬금없이 나타난 게 아니다. 루즈벨트 시절부터 뿌리가 있는 사회민주주의 풀뿌리 그룹이 민주당 내부로 들어갔고 그런 조직들이 마침내 샌더스로 발아된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조직이나 개인이라면 우리도 그런 중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한국의 제1야당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이 전략적으로 바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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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과연 한국의 진보정당들이 과연 진보적인가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다. 통진당 사태를 보더라도 그렇지만 민주노동당 시절 정파들의 행태를 보면 과연 우리 국민의 상식에 얼마나 부응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그리고 사실 정의당이 내건 정책과 이념이 지금 더불어민주당의 정강정책과 얼마나 차별화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리 : 지금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필리버스터를 중단시켰다. 이에 대한 생각은?

 

이 : 고육지책이라고 생각한다. 필리버스터 중단이 테러방지법 독소조항을 방임하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필리버스터를 지속할 경우 선거 연기라는 초유의 사태, 헌정 중단이라는 사태를 맞이할 수 있는 우려 때문에 불가피했을 것이라 이해한다. 다만 그 과정이 너무 급작스러웠다는 것은 좀 유감이다.

 

리 : 김종인 체제가 공천에 전권을 행사하고, 운동권 대신 전문성 있는 인사를 중용하겠다고 하는데 본인에게는 공천에 불리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 하하.. 비례대표 도입 취지대로 공천한다면 유리할 것도 불리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비례대표는 지역 대표의 한계를 보완해 다양한 계층과 직능 대표를 선출하여 국민의 대표성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난번 문재인 대표가 만들었던 혁신공천위원회에서 청년, 여성, 비정규직 등의 사회적 약자를 우선 배려하겠다는 공천 세칙은 비례 대표제 원리에 충실한 규정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대의기구 국회는 국민을 닮아야 한다. 그런데 19대 국회를 보면 법조인 비율이 15%에 육박한다. 우리나라 인구의 15%가 변호사나 판검사인가? 운동권도 심각하지만 문제는 특정 직업군이 이렇게 국회를 과다하게 점유하는 것 자체부터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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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타파>

 

제가 비정규직을 대표해서 나왔는데, 저보다 훌륭하고 능력 있는 다른 분이 비정규직 대표가 된다면 아무런 유감이 없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에 850만 비정규직을 위한 자리가 단 한 석도 남아 있지 않다면 정체성을 의심받게 될 것이다.

 

 

비정규직을 당으로 조직해 정권교체에 공헌할 터

 

리 : 맞다. 특히 비정규직 문제는 양극화 문제와 직결되는데 그들을 대변하는 사람이 이렇게 적다면 문제 해결 의지가 없는 것이다.

 

이 :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을 대신해주서 정말 고맙다. 사실 정규직 비정규직, 대기업 중소기업과 같은 이중화된 노동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우리나라 미래는 없다. 이 심각한 노동의 이중화 문제를 해결하는데 남은 생을 다 바치고 싶다.

 

리 : 끝으로 본인이 정치인으로서 어떤 전망을 갖고 있는가?

 

이 : 우선 당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는 정치인이 되는 것이 목표다. 우리 당 지지층을 보면 고학력, 젊은층, 전문직 등에서 지지율이 높지만, 상대적으로 저소득층과 비정규직들에게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다. 비정규직을 조직하고 이분들과 함께 정권교체에 기여하고 싶다.

 

리 : 장시간 인터뷰 감사하다. 비정규직의 목소리를 국회에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 이렇게 인터뷰까지 해줘서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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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노동자 850만 명, 노동자 3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이다.

 

'850만 명'이라는 숫자로는 심각성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사회 곳곳에서 밀린 이들, 언제 잘릴지 몰라 고용불안에 떠는 이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이들, 즉, 절벽을 등지고 사는 이들이 600만 명이라는 말이다. 

 

더 많은 이들이 절벽을 마주하기 전에 정치가 이 문제를 전면에서 다루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이자 노동운동 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그와 같은 사람이 필요한 순간이다. 우리에겐 '정치인'의 시각이 아니라 '노동자'의 시각으로 대변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번 총선으로 비정규직의 고통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그가 더 많은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바란다. 

 

 

 

 

리버럴

 

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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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위원장, “미제 핵으로 덮치려 들 때 핵으로 먼저 냅다 칠 것”

 
“핵 탄 경량화해 핵 탄두 표준화. 규격화 실현했다”만족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6/03/09 [07:44]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담력과 배짱은 어떻게 종결지어 질 것인가 세계는 김정은 원수의 일거수 일투족에 쏠리고 있다.     ©


김정은 제1위원장이 "핵 선제 타격권은 결코 미국의 독점물이 아니"라며 "미제가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핵으로 덮치려 들 때는 주저 없이 핵으로 먼저 냅다 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연합뉴스는 9일 조선중앙통신을 인용 이 같이 전하며 김정은 조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핵탄을 경량화해 탄도 로켓에 맞게 표준화, 규격화를 실현했다"고 밝힌 사실을 보도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핵무기 연구 부문의 과학자, 기술자들을 만나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지도하는 자리에서 "이것이 진짜 핵억제력"이라고 말했다.

 

▲     © 이정섭 기자

 

 

김정은 제1위원장은 이어 "우리식의 혼합장약 구조로서 열핵반응이 순간적으로 급속히 전개될 수 있는 합리적인 구조로 설계된 핵탄두가 정말 대단하다"며 "당의 미더운 '핵 전투원'들인 핵과학자·기술자들이 국방과학연구 사업에서 커다란 성과를 이룩했다"고 평가했다.

 

김 제1위원장은 "핵시설들의 정상 운영을 높은 수준에서 보장하며 필요한 핵물질들을 꽝꽝 생산하여 핵무기 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보다 위력하고 정밀화, 소형화된 핵무기들과 그 운반수단들을 더 많이 만들 뿐 아니라 이미 실전 배비한 핵 타격수단들도 부단히 갱신하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핵 선제 타격권은 결코 미국의 독점물이 아니"라며 "미제가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핵으로 덮치려 들 때는 주저 없이 핵으로 먼저 냅다 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     © 이정섭 기자

 

그러면서 "우리가 보유한 핵무력이 상대해야 할 진짜 '적'은 핵전쟁 그 자체"라며 "핵무력을 질량적으로 억척같이 다져나가는 것이 우리 조국강토에 들씌워질 핵전쟁의 참화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정당하고 믿음직한 길"이라고 핵무기 보유의 정당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날 자리에는 인민군 대장인 김락겸 전략군사령관과 홍영칠·김여정 당 부부장이 동석했다.

 

한편 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와 국방위원회, 외무성,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선인민군최고사령부 성명과 담화에 이어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제1위원장이 핵무기 부문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만나 미국을 상대로 강력한 발언의 경고를 이어 가고 있어 조-미 대결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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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5년…파시즘 국가로 질주하는 일본

 
[독서통]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
 
| 2016.03.09 09:23:08
2011년 3월 11일의 기억을 재생해 봅시다. 주말을 앞둔 TV에서 딴 세상 이야기인 듯한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일본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에서 발생한 진도 9의 강진으로 인해 쓰나미가 후쿠시마를 덮쳤습니다. 이에 후쿠시마 핵발전소 원자로 1호기부터 4호기가 모두 망가졌습니다. 놀란 주민은 방사선 피해를 우려해 고향을 신속히 떠나고 있습니다."
 
올해 3월 11일은 후쿠시마 사고 5년이 되는 날입니다. 핵폭탄의 야수성을 처음 알린 두 차례의 원폭, 핵발전소 사고가 일으킨 참사로 유라시아 전체가 떨었던 1986년의 체르노빌 사고에서도 우리는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웃 일본은 또 한 차례의 대형 핵발전소 사고로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뀐 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이 사고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한국은 물론, 사고 당사자인 일본마저 이런 일은 없었다는 듯 '핵발전소 올인' 정책을 바꾸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동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입니다. 중국 동부 지방, 한국 남동부 지방, 일본 동부 지방에 엄청난 수의 핵발전소가 밀집해 있고, 그 중간에 있는 북한은 연일 핵실험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제2의 후쿠시마' 사고가 이들 지역 어딘가에서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린 알 수 없습니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8일 '독서통'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를 다룬 새 책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서경식·정주하 외 지음, 형진의 옮김, 반비 펴냄)을 들고 후쿠시마 이후 극우 광기에 휩싸여 질주하는 일본을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말하는 이 책의 저자 서경식 도쿄 게이자이대학 교수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서경식 교수는 교토 시에서 태어난 재일 조선인으로, 박정희 정권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두 형의 구명 운동을 벌이며 한국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애초 문학을 공부하는 미술 애호가였던 서 교수는 그때부터 재일 조선인의 정체성, 국가폭력과 인권, 현대성과 문명 등을 전방위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서경식 교수는 후쿠시마 사고 역시 이 모든 문제가 응축된 파국적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김종배 <시사통> 대표와 강양구 <프레시안> 기자가 진행하는 독서통, 이번에는 서 교수를 모시고 후쿠시마 사고 5년의 시점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입니다. 
 

▲ 후쿠시마 사고 하루 뒤인 지난 2011년 3월 12일, 상공에서 촬영한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모습. ⓒAP=연합뉴스



 
후쿠시마, 한일 지식인을 잇다 
 
김종배 : 매주 화요일 오후 찾아뵙는 독서통 시간입니다. 금주의 책은 뭡니까?
 
강양구 : 며칠 후면 3월 11일입니다. '3.11' 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난 날이죠. 벌써 5년이 지났습니다. 
 
김종배 : 2011년이었죠? 저는 지금도 바닷물이 거세게 밀려들어 오는 무서운 영상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강양구 :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격납고가 수소 폭발로 날아가는 장면도 청취자 여러분 뇌리에 남아 있을 겁니다. 안타까운 건, 5년이 지났는데 세상이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죠. 
 
김종배 : 이제는 잊힌 일이 되었죠. 당시만 해도 별의별 얘기가 나왔죠. 한반도로 방사능이 오네 마네부터 말이죠. 지금은 일본산 수산물 얘기가 나올 때나 가끔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강양구 : 당시 21기였던 우리나라 핵발전소는 오히려 그사이 24기로 늘어났습니다. 북한에서도 핵폭탄을 실험하고 있고요. '3.11'이라는 비극에서 우리가 배운 게 없는 것 같습니다.
 
'3.11' 5년을 기념해 책이 몇 권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책을 오늘 갖고 나왔습니다.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입니다. 한일의 여러 지식인이 공동 작업해서 낸 책입니다. 오늘은 이 책의 대표 저자라고 할 서경식 도쿄 게이자이대학 교수를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마침 한국에 잠시 방문하셨습니다.
 
서경식 교수는 재일 조선인입니다. 서승, 서준식 두 형이 박정희 정권 때 간첩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는데, 당시 옥바라지와 구명 운동을 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재일 조선인의 정체성, 남북 관계, 한일 관계 등을 폭넓게 사유하게 되었죠. 그리고 이 경험을 계기로 국가폭력과 인권, 현대성과 문명 등으로 사고를 확장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책을 통해서 많은 독자와도 만났죠. <나의 서양 미술 순례>(창비 펴냄),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 펴냄), <소년의 논물>(돌베개 펴냄), <디아스포라 기행>(돌베개 펴냄), <나의 조선 미술 순례>(반비 펴냄), <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반비 펴냄) 등의 책이 있죠. 
 
김종배 : 애초 전공은 문학이었지만, 전방위 지식인으로 소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강양구 : 지금은 그렇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학문의 출발은 문학, 예술, 미학이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으로 사유의 폭을 넓히고 계십니다. 방금도 얘기했지만 요즘 서경식 교수의 사유는 '현대란 무엇인가'에 닿아 있습니다. 아마 교수께서 후쿠시마 사고에 깊이 몰두하신 이유도 여기와 연관이 있는 것 같고요.
 
김종배 : 서경식 교수님, 어서 오십시오. 
 
서경식 : 네, 안녕하십니까. 
 
김종배 : 간만에 한국에 오셨는데, 이 책 강연 때문에 들어오신 겁니까?
 
서경식 : 북 콘서트가 있습니다. 이 책의 공동 저자인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도 참가하고, 사진작가 정주하 작가도 함께합니다. 원저를 펴낸 일본 출판사 관계자도 한국에 왔고요. 
 
강양구 : 정주하 작가가 찍은 사진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주하 작가와 공동 작업한 이야기를 해주시죠. 
 
서경식 : 5년 전, 3.11 이후 3개월이 지난 6월에 제가 NHK 다큐멘터리 촬영 팀과 함께 후쿠시마를 찾았어요. 이후 한국의 한홍구 교수께서 이 사고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았죠. 그 해 여름에 일본에서 만났습니다. 마땅히 대신할 사람이 없어서 제가 후쿠시마 안내를 맡았죠.
 
당시 한홍구 교수께서 정주하 작가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정주하 작가도 동행했고, 후쿠시마에서 사진 작업을 했어요. 
 
강양구 : 그때 찍은 사진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제목의 순회 전시회도 하셨죠. 이 책을 내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사진전이라면서요?
 
서경식 : 네. 한홍구 교수와 정주하 작가, 그리고 제가 서울 시내 한 식당에서 전시회 제목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전시회 이름이 이상화 시인께서 지은 항일 시의 제목인데, 핵발전소 이후의 후쿠시마를 찍은 사진 전시회의 제목으로도 적절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후쿠시마 사람은 우리 민족을 식민 지배한 일본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편으로 일본이 추진한 핵발전소 정책 때문에 땅을 빼앗긴 사람이기도 하거든요. (양쪽이) 피해자로서 서로를 공감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전시회를 시작했습니다. 책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보도 사진이라기보다는 성찰을 촉구하는 사진이 대부분입니다.
 
김종배 : 텅 빈 들녘, 말라버린 나뭇잎, 폐허가 된 집 등을 사진에 담았어요.
 
이 책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여러 군데에서 전시회를 하면서 그곳에 참여한 여러분이 대화를 나눈 내용을 엮었습니다. 
 
강양구 : 한일 지식인이 각자 준비한 내용을 토대로 대화를 나눈 것도 있고, 이 발표나 대화를 들은 청중과의 질의응답 과정도 실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갈무리해 일본에서 먼저 펴냈고, 그걸 다시 번역해서 한국에서 펴낸 책이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이라고 정리하면 될 것 같아요. 
 
빼앗긴 들, 후쿠시마의 풍경 
 
김종배 : 정주하 작가의 사진으로 일본에서 사진 전시회도 하셨는데, 당시 반응이 어땠습니까? 
 
서경식 : 처음에는 (관람객을 모으기가) 어려웠어요. 후쿠시마 핵발전소를 주제로 한 사진이라고 하면, 흔히 보도 사진을 상상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이 사진 작품은 풍경 사진처럼 보이거든요. 후쿠시마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조금 어려울 수 있죠.
 
강양구 : '후쿠시마'라는 이름을 빼고 사진만 보면, 마치 우리나라의 시골 풍경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서경식 : 아, 그런가요? 일본 사람이 보기에는 전형적인 일본 동북 지방 풍경을 담은 사진이라는 말도 있어요. (웃음) 이렇게 풍경을 찍은 건 정주하 작가의 예술적 의도예요. 이 아름다운 풍경이 뭘 호소하는지 보는 이가 생각하도록 하는 사진이에요. 결론을 먼저 내리고 전시하는 게 아니라, 관람자가 작품을 보는 도중 생각하고 토론하는 계기를 만들자는 의도였어요. 
 
강양구 : 아무래도 대중은 강렬한 사진, 한눈에 봐도 사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사진을 원할 텐데, 이 사진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경식 : 그 대목에서 정주하 작가와 제 생각이 일치했어요. 직접 주제를 드러내는 사진은 오히려 잊히기 쉬워요. 반면에 생각을 추동하는 사진은 오랫동안 마음에 이미지가 남죠.
 
처음부터 이런 의도가 관람객에게 가 닿았던 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쉽지 않았죠. 순회 전시의 일본 내 첫 번째 장소가 후쿠시마 현지였어요. 사진을 본 분들 가운데는 미래를 희망 있게 보고자 하는 분도 있고, 절망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진전은 '함께 고민하자'는 거였지, '이게 결론이다!' 이렇게 미리 정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후쿠시마 현지에 탑이 하나 있어요. 현지인에게는 자랑스러운 고향의 상징인데,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온 분들이 이 탑을 건설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 우리 사진전의 제목이 이상화 시인의 시에서 따왔잖아요? 이 사진전을 본 후쿠시마 주민 가운데 "우리가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탑을 만들 때 조선인이 희생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했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시대도 다르고, 장소도 다른 두 개의 역사적 사건이 이 사진전을 계기로 교차한 것이죠.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이 더 깊이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고요.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총 여섯 군데서 사진전을 했습니다. 지금도 사진전 개최 요청이 계속 오고 있어서, 당분간은 계속 이어질 전망입니다. 
 

▲ 서경식 도쿄 게이자이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후쿠시마 5년 후, 달라진 건 없다 
 
김종배 : 이제 본격적으로 책 내용을 이야기해 보죠. 벌써 사고 5년이 지났는데 그곳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서경식 : 문제가 해결된 게 거의 없습니다. 일본 정부는 '언더 콘트롤(under control)', 문제가 해결됐다면서 피난민에게 귀향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1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귀향하지 않았습니다. 이분들은 정부 주장을 못 믿는 거죠. 정부에서는 "과잉 반응"이라는 입장인데, 바로 이런 정부의 태도야말로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방사능 폐기물 오염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어요. 폐기물을 버릴 장소도 없습니다. 핵발전소 사고 역시 수습되지 않았고요. 정부는 이런 점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방사능 오염이 수년 내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가 이러는 건 국가 책임 문제, 기업의 보상 문제 등이 다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일본 정부는 작년부터 다른 핵발전소를 재가동하기 시작했어요. 핵발전소 수출도 하니까... (후쿠시마가 여전히 위험하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 않죠.) 
 
김종배 : 얼마 전 아베 총리가 후쿠시마 근처에서 수산물 먹는 장면이 보도되더군요. 이런 걸 보는 국민 반응은 어떻습니까? 
 
서경식 : 양가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불안한 상황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 조금이라도 낙관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더구나 아베 총리가 "경기를 살린다", "주식 시장을 살린다" 하고 있잖아요? 아베 총리를 따라가면 지금보다 더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 사람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도저히 지울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일반인은 방사능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게 사실이잖아요? 더구나 정부가 발표하는 사실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이 존재하고요. 특히 여성, 주로 아이 키우는 여성이 그렇습니다. 
 
김종배 : 일본 정부나 과학계가 계속 후쿠시마 인근에서 추적 조사를 하지 않습니까?
 
서경식 : 조사는 하죠. 
 
김종배 : 그 결과는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습니까? 
 
서경식 : 지극히 자의적이죠. 예를 들어, 후쿠시마 아이들의 갑상선암 발병률(유병률)이 다른 지역보다 큽니다. 그런데 이 수치를 공개하면서 "핵발전소 사고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지역 아이들만 평상시라면 안 했을) 검사를 해서 이런 높은 수치가 나왔다는 식으로도 말해요.
 
그러나 체르노빌은 사고 수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문제가 끝나지 않았잖아요? 이런 일을 보면 도저히 이런 주장을 믿을 수 없죠. 
 
여론 조사를 하면 핵발전소 재가동을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일본에서도 50% 이상이에요. 아까 얘기했던 아이가 있는 여성처럼. 그런데 이런 민의를 반영하는 정치 세력이 없어요. 지금은 야당인 민주당 집권기에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났잖아요? 당시 노다 요시히코 수상이 사고 수습 선언도 했고요. (그러니 민주당에서도 이 문제를 걸고넘어질 수 없죠.)
 
더구나 도쿄전력 노동조합이 민주당 지지 기반이에요. 그러니 여당인 자민당은 물론이고 핵발전소에 반대하는 시민의 불안감을 해소할 야당 정치 세력도 없는 거죠.
 
김종배 : 도쿄전력 노조가 후쿠시마 핵발전소와 이해관계가 있으니, 민주당도 입 닫게 되는 거군요. 그런데 10만 명이 넘는 이재민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어요?
 
서경식 : 친척 도움을 받으며 임시로 다른 곳에 거주하고 있거나 도쿄, 오사카, 오키나와 같은 아예 다른 곳으로 가기도 했죠. 
 
'안전하다'는 믿음은 믿음일 뿐 
 
김종배 : 일본 정부는 손 놓은 겁니까? 
 
서경식 : 지원이 있긴 해요. 중앙 정부는 아니고 지방자치단체 중심으로. 도쿄전력의 위로금도 있고요. 그런데 4년이 지나면서 지원을 끊겠다는 통보가 잇따르고 있죠.
 
강양구 : 일본 정부로서는 이제 아무 문제가 없으니 지원하지 않겠다는 거군요.
 
서경식 : 맞아요. 
 
이 지점에서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남성의 경우 직업 문제도 걸려 있고,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 있는 경우도 있으니 후쿠시마로 돌아가려 해요. 반면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은 불안해서 돌아가려 하지 않죠. 그러다 보니, 불행히도 이 문제가 이혼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심각해요. 
 
김종배 : 아무래도 사회적 관계망을 중시하는 남성을 중심으로 후쿠시마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있군요. 
 
서경식 : 일본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개인이 자율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기보다 회사나 조직에 속해야 살 수 있다는 불안함이 있습니다.
 
김종배 : 한국인 중에는 '일본 여행하고 싶은데 어디까지가 안전하냐'는 식의 물음을 가지는 분이 많으세요. 
 
서경식 : (혀를 차며) 그건 너무 사태를 단순화해서 보는 거죠. 그런 시각은 금방 아베가 수산물 먹는 장면을 보면서 "괜찮다"고 믿어버리는 거로 연결됩니다. 물론 일본 정부도 농산물이나 수산물 방사능 검사를 합니다. 하지만 방사능이라는 게 어느 수준이면 위험하다는 기준 자체가 모호해요. 그렇다면, 소비자의 불안을 중심으로 최대한 보수적으로 판단해야죠. 
 
김종배 : 한국에서도 일본산 수산물 수입 문제가 이야기되긴 합니다. 하지만 논란이 되어야 함에도 그만큼 논란이 되진 않습니다. 
 
서경식 : 관련해서 한 말씀 드리자면, 한국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를 유지해왔어요. 저는 당연한 조치라고 봅니다. 그러나 일본의 혐한론자들은 이 문제를 두고 "한국이 반일 차원에서 우리가 고생하는 걸 좋아한다"는 식으로 여론몰이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수입 금지 조치는 국제 표준을 따른 거지, 한국인이 일본을 싫어해서 한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3.11 당시 한국에서는 "일본을 돕자"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죠. 저도 놀라울 정도였고요. 그런 움직임에 당시 일본인도 매우 놀랐죠. 
 
후쿠시마 이후, 극우로 질주하는 일본 
 
김종배 : 책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가 일본이 파시즘으로 회귀하는 전기가 되었다"고 하셨어요. 왜 이렇게 보셨어요? 
 
서경식 : 이런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기존의 정치 세력은 사실상 무력했습니다. 더구나 후쿠시마 사태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人災)의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국가 지도력 자체도 불신을 받았고요. 그럼, '누군가 강력한 지도자가 나와서 법적 한계를 넘은 지도력을 발휘해주면 좋겠다'는 심리가 생기죠. 
 
더구나 일본 시민 상당수가 이 사고로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안 그래도 중국과 한국이 대두하면서 일본이 '아시아 일등국'이라는 지위가 흔들리는 와중에 이런 사고가 터진 거죠. 그러니 역효과로 파시즘적 방향으로 사회가 굴러가기 쉬워집니다. 실제 사고 수습 과정에서 '우리는 힘이 있다', '우리는 부흥할 수 있다'는 공허한 외침만 커졌어요.
 
김종배 : 아베 정부의 극우 행보도 그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겠네요.
 
서경식 :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러니 올림픽 개최에 일본인이 그처럼 환호했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처럼 어려울 때 그런 큰 이벤트를 개최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재정을 더 의미 있는 데 써야 맞는데, '우리는 (후쿠시마 사태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을 문제없이 개최하고, 외국인을 많이 초청할 수 있는 나라'라는 환상이 (아베 정부) 지지로 이어지죠. 
 
중국이나 한국을 대하는 아베 정부의 국가주의적 태도가 오히려 인기를 얻는 원인도 여기에 있습니다. 
 
강양구 : 독일의 경우 1986년 이웃한 체르노빌 사고를 계기로 녹색당이 부상했고, 에너지 전환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확실하게 탈핵을 선언한 나라도 독일이잖아요? 똑같은 사고를 두고 독일에서는 긍정적인 변화의 흐름이 만들어졌는데, 왜 일본과 그 이웃인 우리나라는 반대 방향으로 치달을까요?
 
서경식 : 가장 큰 문제는 국민과 국가 사이의 거리에 있습니다. 국민이 국가와 자신을 일치해서 보는지, 국가에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보는지가 중요해요.
 
독일의 경우, 실질적으로는 문제가 많았습니다만, 전쟁 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나치와 단절됐죠. 시민 다수가 국가가 얼마든지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더 나아가 국민이 정신 차려야 국가가 제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전제로 두게 되죠. 국민과 국가 사이의 거리가 생긴 거죠.  
 
반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질주하다 결국 전쟁에서 졌습니다. 그런데도 전쟁에 책임이 있는 천황제를 존치했습니다. 또 다수의 시민이 전쟁 후에 국가와 기업이 주도한 '원자력 무라(핵마피아)'가 국민을 잘살게 했다는 식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김종배 : 책에도 "메이지 이후 일본은 바뀐 게 없다"고 쓰셨어요.
 
서경식 : 많이 바뀌긴 했죠. (웃음) 그러나 근간은 바뀐 게 없다고 봅니다. 지난해 아베 총리가 전후 70년 담화를 냈는데, 전쟁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어느 정도로 하느냐가 주목받았습니다. 그런데 "러일 전쟁으로 일본이 아시아 민족에게 용기를 줬다"는 식으로 담화를 시작했어요. 대한민국 사람이나 조선 민족이 이걸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김종배 : 우리나라 대통령은 호평했는데요? (웃음) 
 
서경식 : (웃음) 그 전쟁으로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됐는데, 그런 발언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죠. 그런데 '이 담화는 문제'라는 식으로 느끼는 일본인이 많지 않다는 게 진짜 문제예요. 대한민국과 조선 민족, 또 중국에 대해 어떤 사과를 담느냐가 주목되는 담화에서 러일 전쟁 승전을 언급한다는 게 너무나 도발적이고 모욕적인 거죠.
 
강양구 : 그게 아베의 특이한 역사관을 반영한 게 아니라, 일본 사람 대부분이 암묵적으로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서경식 : 그렇죠. 아베가 새삼스럽게 저런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에요.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 보수파가 꾸준히 한 얘깁니다. 이를 문제 삼는 일본인이 많지 않아요. 물론 이런 이야기를 문제로 보는 일본인도 있습니다. 하지만 힘이 약해요.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근본적으로는 메이지 시대 이후 바뀐 게 없다고 할 수 있죠. 
 
김종배 : 아베 정권이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본인의 상실감을 에너지원 삼아서 극우 행보를 펼치는 것도 그런 흐름과 맞닿은 거겠군요. 
 
서경식 : 조금 길게 말씀드리자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일본에 핵발전 정책을 도입한 당사자입니다. 1950년대에 말이죠. 나카소네가 일본이 패전했을 때, 핵폭탄이 터졌을 때 '앞으로는 원자력 시대'임을 느꼈다고 해요. 이 말이 뭐냐면, 일본도 핵폭탄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이를 목표로 1950년대부터 일본 에너지 정책을 바꿔서 핵발전소를 도입한 거예요. 
 
강양구 : 산업화를 위해서 핵발전소를 지었다기보다, 일본과 우리나라 공히 마찬가지인데,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부산물(플루토늄)로 핵폭탄 연료를 얻기 위해 핵발전소를 지은 거죠.
 
서경식 : 일본에는 핵폭탄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만들기 위한 방사성 폐기물 재처리 공장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래된 곳은 문제가 많습니다.) 특히 몬주 고속증식로는 지은 지 수십 년이 넘었는데,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요.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이 시설을 가동하고자 엄청난 돈을 씁니다. 정말 전력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핵무장을 위해서죠.
 
요즘은 일본 정치인도 이 얘기를 공공연히 해요. 일본 자민당 정치인 이시바 시게루는 예전 장관이었을 때 "일본은 핵무장에 대비해 플루토늄을 보유해야 한다"고 대놓고 이야기했어요. 
 
강양구 : 일본이 파시즘화한다고 말씀하셨는데, 한국에서도 최근에 테러 방지법 통과를 둘러싸고 진통이 있었습니다. 
 
서경식 : 테러라는 말을 누가,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해요. 이런 토론 없이 법안만 통과시키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입니다. "너는 테러리스트"라는 걸 누가, 어떤 식으로 규정할 거예요? 도널드 트럼프의 "이슬람교도는 모두 테러리스트"라는 식의 폭력을 우리가 허용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세계가 그런 위태로운 수준까지 왔다고 저는 봅니다.
 
테러를 방지하는 건 (테러 방지법과 관계없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그리고 일반 형법에 이미 그런 게 규정되었을 테죠. 그렇다면, '테러'라는 건 권력자가 자기가 보기에 안 좋은 행동을 예방하려는 핑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의 관방장관은 안중근 선생을 두고 "테러리스트"라고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이야기했어요. 한국에서 그걸 시인할 수 있습니까? 
 
저는 세계적으로도, 또 한국이라는 개별 나라의 입장에서도 사회적 토론 없이 이런 법안이 쉽게 통과되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 후쿠시마 이후 급격히 우경화하는 일본은 노골적으로 군사 대국화를 꿈꾼다. 지난해 7월 15일 일본 중의원 안보법제 특별위원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법안 표결에 반대하는 의사를 담은 종이를 들고 항의하고 있다. 집권당인 자민당과 연립 여당인 공명당은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 ⓒAP=연합뉴스

 
5년, 망각하기 좋은 시간 
 
김종배 : 잠시 곁가지로 빠져서, 지난해 연말 위안부 합의 얘기를 좀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일본 안에서는 합의가 어떤 식으로 이야기됩니까? 
 
서경식 : 대부분이 호의적으로 봅니다. 아베 정권이 잘했다고요. 대부분의 일본 시민은 위안부 문제를 골치 아픈,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문제로 봤어요. 그런데 아베가 "내가 해결하겠다"고 나서서 또 "끝냈다"고 하니, 호의적인 반응 일색이죠. 저는 그런 식의 재정적 해결이 말도 안 된다고 보지만요. 
 
김종배 : 10억 엔 주는 거로 정리됐죠. 
 
서경식 : 그렇죠. 물론 일부 우익은 "아베가 양보했다"며 비판합니다. 소수의 진보파도 이것이 말도 안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 (정치적으로) 중도 세력이 호의적으로 봅니다.
 
김종배 : 중도파가 호의적이라고요? 
 
서경식 : 네. <아사히신문>을 포함한 여러 신문이 "일부 전진했다", "이 기반 위에서 앞으로 새 관계를 구축한다"는 식으로 보도했죠. 
 
강양구 : 오늘 방송을 시작할 때 교수께서 "후쿠시마 사고 이후 변한 게 없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오히려 나빠지고 있군요. 
 
서경식 : 후쿠시마 사고가 하나의 계기였죠. 사회가 몰락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요.)
 
이 자리에서 이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터지고 한순간에 3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죽었어요. 그 중 3~5만 명 정도가 조선인이었어.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일본은 물론이고 여기(한국)서도 마찬가지죠.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작가 하라 다미키가 피폭 경험을 시나 소설에 녹였어요.
 
그중 대표작이 <여름의 꽃>이라는 아주 좋은 작품이죠. 그런데 그는 원폭 5년 후 도쿄 중앙선에 몸을 던져 자살했어요. 당시 한국 전쟁이 한창이었는데, 미국에서 다시 "원폭을 사용하겠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이 소식을 듣고 하라 다미키가 절망해 자살한 거예요. 그런 비극이 있었는데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폭탄을 다시 사용하려 하느냐는 절망으로 자살한 거예요. 
 
희생자가 누구냐를 떠나서, 그런 비극을 경험했음에도 그 사악한 수단을 버리지 못한다는 인류에 대한 절망감이죠. 하라 다미키가 도쿄에서 그런 얘기를 계속했습니다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어요. (후쿠시마 이후 지금과 마찬가지로)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죠. 이처럼, 5년이라는 시간은 망각하기 충분한 시간입니다. 
 
도쿄 사람은 왜 하라 다미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요? (핵폭탄에 희생된) 히로시마가 아닌 도쿄라는, 이런 지리적인 거리감이 작용했겠죠. 또 (앞으로) 핵폭탄이 터져도 그건 한국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니라는 거리감도 작용했겠고. 그런 자세 때문에 30만 명이라는 사람이 한순간에 학살당한 사건조차 잊어버린 겁니다.
 
이게 인간의 뭐랄까, 이겨내기 힘든 망각의 습관입니다. 그런데 정치인은 바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또 그래서 이용하고요. 
 
김종배 : 후쿠시마 이후 핵발전소가 하나둘 재가동될 때 저항이라든지, 논란은 없었습니까? 
 
서경식 : 있어요. 지역마다 아주 끈기 있게 저항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소수고, 고립되어 있고, 보도도 잘 안 됩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정치 시스템 자체가 문제입니다. 일본에서 정치는 기업과 결합해 이뤄지죠. 이런 사람이 지역 부흥이나 경제 개발을 강조해 국회의원이 되고, 국가 정책을 결정합니다. 그러니 일반인, 특히 여성 등 약자의 목소리는 안 들어줘도 문제가 전혀 없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거죠. 
 
김종배 : 선거 때마다 사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보다 중요한 건 여론이 정치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거죠. 
 
서경식 : 일본은 선거 제도가 소선거구제이기 때문에 (사표의 영향력이 커서) 투표율이 50% 가까운 수준으로 떨어졌어요. 너무 심각합니다. 
 
반핵 한일 시민 연대를 구상할 때 
 
강양구 :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이라는 책이 한국에서 나온 이유는 후쿠시마 사고가 한국에 던져준 교훈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내용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지금의 한국 상황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서경식 : 제가 아무래도 일본에 있으니까 한국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핵발전소 문제에 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한국도 핵발전소 대국, 일본도 핵발전소 대국, 중국도 핵발전소 대국이니까 동아시아라는 지역이 너무 위태로워요. 더구나 북조선(북한)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핵투성이인 지역이 지구에 없습니다. 더구나 서로 대립 관계니, 물론 이 관계의 가장 큰 책임은 일본에 있다고 저는 보는데요, 너무나 위태롭습니다.
 
강양구 : 중국에서 핵발전소가 밀집한 곳 가운데 하나가 산둥 반도죠. 거기서 사고가 나면 편서풍으로 인해 우리나라 수도권이 직격탄을 맞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청정한 지역이 규슈인데, 규슈 사람이 가장 불안해하는 게 한국의 동남권에 밀집한 핵발전소입니다. 이런 식으로 3국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경식 : 맞습니다. 핵발전소 사고의 피해가 국경을 넘는 거니까, 한일의 시민이 국경을 넘어 저항하지 않는 한 (이 위기를) 막아낼 수 없습니다. 국가를 중심으로 해서, 핵을 앞세운 기업을 중심으로 해서 사고하는 한 넘어설 수 없어요. 한일의 시민이 함께 대화하고,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지금 너무 위태로운 방향으로 급히 모두가 몰락하고 있어요.
 

▲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서경식·정주하 외 지음, 형진의 옮김, 반비 펴냄). ⓒ반비

김종배 : 한일 시민이 일종의 ‘반핵 연대’를 마련하고 공동 움직임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서경식 : 물론이죠. 2012년에 서울에서 핵 안보 정상 회의가 열렸습니다. 당시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이 책의 계기가 된 정주하 작가의 전시가 한국에서 열렸어요. 일본뿐만 아니라 핵을 유지하는 나라끼리 똘똘 뭉쳐 세계를 현 상태대로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런 세력에 대항해 시민이 연대해서 대안을 내고, 맞서서 저항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죠.
 
김종배 : 벌써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지 5년이 지났습니다.
 
강양구 : "5년은 잊기 충분한 시간"이라는 서경식 교수의 말씀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네요.
 
김종배 : 당시는 엄청난 충격이었는데요, 오늘 독서통은 당시 기억을 되살리면서 현재를 돌아볼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으로 여러 저자 중 한 분인 서경식 교수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5년 전 후쿠시마 사고를 어떻게 기억하고, 또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경식 :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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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09 07:26l최종 업데이트 16.03.09 07:2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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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발에 단식까지 정성욱 416가족협의회 인양분과장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세월호 특별법 개정과 특검 처리를 촉구하며 삭발하고 19대 국회 회기가 끝나는 10일 자정까지 80시간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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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하고, 삭발하는 거요? 아이들이 있는 분향소 앞에 서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2년 싸웠는데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잖아요."

세월호 유가족들이 또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고 유예은양 아버지)과 정성욱 인양분과장(고 정동수군 아버지)은 8일 국회 앞에서 세월호 특별법 개정안과 특검안의 처리를 요구하며 삭발 기자회견을 열었다. 전날 오후 4시 국회 앞 1인시위와 단식을 시작한 두 아버지는 19대 국회 회기가 종료되는 10일 자정까지 이를 이어갈 예정이다.

유가족들은 지난해 4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아래 특조위) 권한 축소'의 내용이 담긴 시행령을 밀어붙일 때, 이에 반대하며 단체로 삭발을 한 바 있다. 이날 삭발 기자회견 직후 두 아버지를 만났다. 부쩍 차가워진 날씨에 유 위원장은 "머리가 시리긴 시리네"라며 옅은 웃음을 내보였다. 옆에 있던 정 분과장은 "그 동안 많이 해봐서 단식은 일도 아니다"며 농담을 던졌다.

유 위원장은 "머리 깎고, 단식한다고 해서 뭐가 해결될 거 같진 않은데, 어쨌든 국회가 하고있는 짓이 너무 답답하지 않나"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어차피 평소에 입맛도 없고, 단식이라도 좀 해야 기사 한 줄이라도 나갈까 싶어 이렇게 국회 앞에 섰다"며 말끝을 흐렸다.  

"국회, 특검 요청 당연히 받아들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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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가족, 삭발 단식농성 돌입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세월호 특별법 개정과 특검 처리를 촉구하며 삭발하고 19대 국회 회기가 끝나는 10일 자정까지 80시간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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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세월호 특조위는 특별법 개정안과 '특별검사 수사를 위한 국회 의결 요청안(특검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황이다. 두 아버지는 이 두 안의 조속한 처리를 요구하고 있다. 특별법 개정안에는 그 동안 논란이 된 특조위의 활동기간과 예산을 명확히 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관련기사 : "조사 방해 막자" 세월호 유가족, 특별법 개정 청원). 

유 위원장은 "특별법 개정안을 낸 이유는 하나다. 특조위가 제 역할을 못하는 건 정부여당의 책임이 크고, 그 원인은 특별법이 가진 한계 때문이라고 봤기 때문이다"라며 "모호한 조항을 정부여당이 악용하는 것을 막고, 특별법을 만든 취지에 따라 특조위가 활동할 수 있도록 국회는 개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특검안과 관련해 유 위원장은 "특조위가 활동하는 동안 두 번의 특검을 요청할 수 있다"라며 "이를 국회가 받아들이는 건 논란의 대상이거나 토론할 거리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특별법 37조에는 "특조위는 특검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국회에 의결을 요청할 수 있다"고 나와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2014년 5월 유가족들과 만나 "검경 수사 외에 국정조사와 특검도 해야한다"고 말했고, 담화를 통해 "필요하다면 특검으로 모든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엄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유 위원장은 "그런데 특조위가 특검을 요청했더니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왜 이런 시기에 특검을 요청하나', '왜 정치공세를 하냐'라는 식으로 말하더라"라며 답답한 마음을 드러냈다. 지난 2일 원 원내대표는 "(특검안은) 이견이 있어서 처리되지 않은 사안인데 갑자기 왜 법사위에 내놨는지 모르겠다"며 "수용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아래는 이날 두 아버지와 한 인터뷰를 요약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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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가족, 국회 앞 농성 돌입 정성욱 416가족협의회 인양분과장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세월호 특별법 개정과 특검 처리를 촉구하며 삭발하고 19대 국회 회기가 끝나는 10일 자정까지 80시간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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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 이후 두 번째 삭발이다. 
정성욱 "답답하니까. 머리 밀어버리니 속도 시원하고…. 하아, 모르겠어요.  

유경근 "답답해서 머리 밀었어요. 머리 깎고, 단식한다고 해서 뭐가 될 거 같진 않은데, 어쨌든 답답하니까요. 제일 답답한 건 국회가 하고 있는 짓이죠. 말도 안 되고 상식에도 안 맞아요. 분명히 사인하고 합의문까지 작성한 내용들을 국회는 나몰라라 하고, 오히려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상황에서 언론은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총선 후보들에게 세월호 진상규명 의지 물을 것"

- 국회에 특별법 개정안 통과와 특검 수용을 요청하고 있다. 
유경근 "특별법 개정안을 낸 이유는 하나입니다. 특조위가 제 역할을 못하는 건 정부여당의 책임이 크고, 그 원인은 특별법이 가진 한계 때문이라고 봤던 거죠. 모호한 조항을 그들이 악용하는 거예요. 특별법을 만든 취지에 따라 특조위가 활동할 수 있어야죠. 그래서 개정안에 조사기한, 예산 등을 명확히 보장하라는 내용을 담았어요.

또 특조위가 활동하는 동안 두 번의 특검을 요청할 수 있어요. 특조위가 국회에 특검을 요청하면 국회는 이를 받아들여 의결을 하도록 돼 있습니다. 논란의 대상이거나 토론할 거리가 아닌 거죠. 근데 특조위가 특검을 요청했더니 원유철 새누리당 대표가 이렇게 말해요. '왜 이런 시기에 특검을 요청하나', '왜 정치공세를 하냐….' 완전히 막혀 있는 거죠. 

- 진상규명을 위해 특조위가 인양한 선체를 조사할 수 있어야 할텐데.
정성욱 "만약 6월에 특조위 활동을 끝낸다면 7월에 인양되는 세월호는 누가 조사하겠어요. 해수부가 주관하겠죠. 그럼 그냥 '이상 없다'하고 넘어갈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유경근 "특조위 활동 기한 자체도 중요하지만 특조위가 왜 존재하는 지 생각해봐야죠. 참사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특조위가 있는 거잖아요. 때문에 특조위는 누구보다 먼저 선체조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 증거가 있든 없든 조사해야 하는 거죠. 근데 인양된 세월호의 선체를 보지도 못하고 특조위 활동을 끝낸다? 이건 특별법 취지와 전혀 맞지 않는 거예요. 이번 개정안에 들어간 내용이 인양된 세월호 선체조사를 개시한 뒤 6개월 동안 특조위의 활동기간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10일까지 단식 및 1인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어떤 행동을 이어갈 예정인가.
유경근 "이번 19대 국회의 회기가 10일 자정에 끝나니, 그때까지 단식과 1인시위를 통해 국회에 특별법 개정안 및 특검 수용을 요구할 겁니다. 이번 회기에 처리가 되지 않으면 임시회가 4월에 또 국회가 소집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그때 똑같이 요구할 거고요. 총선 기간 동안에는 후보자들에게 같은 내용을 물을 겁니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약속하는 후보들을 발굴할 거예요.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정해진 건 없어요. 선거법도 따져봐야 하니까요. 다만 후보자 토론회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고, 일정 부분 총선시민네트워크와 연대해 우리의 목소리를 낼 생각입니다."

"유가족 한 풀기? 전국민 위한 안전사회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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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가족 위로하는 이석태 위원장 이석태 세월호특별조사위원장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세월호 특별법 개정과 특검 처리를 촉구하며 80시간 단식농성에 들어간 416가족협의회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며 손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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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시간 동안 물만 먹어야 하는데. 걱정되진 않나.
유경근 "뭐 그래봐야 나흘도 안 되는데요. 어차피 평소에 입맛도 없고(웃음). 이렇게라도 해야 기사 한 줄이라도 나갈까 싶어서…."

정성욱 "단식은 크게 걱정 안 된다. 그 전에 많이 해봤으니(웃음). 새벽에 좀 추운 건 걱정되더라."

- 궁극적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유경근 "우리 아이들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죠. 궁극적으로 우리 아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게 목표입니다. 하지만 이건 사실 우리 만의 일이 아닙니다. 제대로 진상규명해서 그것을 토대로 안전사회를 만드려는 거예요. 이에 대다수 국민이 동의하셨고, 특별법을 위한 서명도 해주셨어요. 그런데 점점 잊혀지는 게 안타까워요. 단순히 유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 이러는 것도 아니니까요. 우리 억울하니 알아봐달라, 우리 불쌍하니 쳐다봐달라, 이런 거 아니니까요."

정성욱 "지금 유가족들이 돌아가며 동거차도에서 세월호 인양 작업을 감시하고 있잖아요. 최근에 거기서 사고난 거 알아요? 그때 한 사람이 죽었어요. 근데 그 사람 결국 못 찾았어요. 우리 가족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사고 전이나 후나 바뀐 게 없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은 분향소에 잘 못들어가요. 애들한테 미안해서요. 2년을 싸웠는데 해놓은 게 없잖아요. 가서 아이들 앞에서 떳떳이 이야기 할 만한 게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 분향소에 들어가기가 미안한 거죠. 분향소 앞에 서는 거에 비하면 단식하고 삭발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 훨씬 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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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가족들의 삭발시위 정성욱 416가족협의회 인양분과장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세월호 특별법 개정과 특검 처리를 촉구하며 삭발하고 19대 국회 회기가 끝나는 10일 자정까지 80시간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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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4국의 제재공세에 맞선 조선의 비장한 결심

[개벽예감195] 주변4국의 제재공세에 맞선 조선의 비장한 결심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6/03/08 [11:52]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주변4국의 제재공세는 어리석은 자해행위
2. 자립경제와 경제제재의 끝장대결, 어느 쪽이 이기나? 
3. 치명적인 위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미국 
4. 2015년 10월 31일까지 ‘최후결전준비’ 완료한 로농적위군
5. 2015년 12월 10일까지 3년분 비상식량비축 완료한 조선
6. 최고영도자가 올해 금수산태양궁전을 홀로 찾은 까닭

 

▲ <사진 1>2016년 3월 2일 유엔안보리는 대조선경제제재 결의안 제2270호를 채택하였다. 지정학적으로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이번에 또 다시 유엔안보리를 통해 조선에게 제제공세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관계에서 공정해야 할 유엔안보리는 조선의 주장에는 귀를 막아버리고, 주변4국의 일방적인 주장만 받아들여 그들의 대조선제재공세를 정당화해주는 분별없는 거수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 주변4국의 제재공세는 어리석은 자해행위

 

동북아시아 지도를 펼치면, 동서남북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에 의해 둘러싸인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가 시야에 들어온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은 조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다. 조선을 둘러싼 주변4국은 핵탄과 수소탄,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전략잠수함을 가진 조선이 강해진 정치군사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고 세계의 자주화를 실현하려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조선의 수소탄 기폭시험과 지구관측위성 발사를 구실로 주변4국이 조선에게 재개한 제재공세의 노림수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조선은 국제관계에서 공정해야 할 유엔안보리는 조선의 주장에는 귀를 막아버리고 주변4국의 일방적인 주장만 받아들여 조선에 대한 제재공세를 정당화해주는 분별없는 거수기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지적하면서 아래와 같은 논거를 들고 있다. <사진 1>


2014년 현재 주변4국의 핵탄보유현황을 살펴보면, 미국은 7,300발, 중국은 250발, 러시아는 8,000발을 가졌고, 일본은 핵탄 6,000발을 만들 수 있는 무기급 핵물질을 가졌는데, 그런 핵강국들에 둘러싸인 조선은 핵탄을 한 발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유엔안보리의 주장은 천부당만부당하다며, 자기들은 핵탄과 핵물질을 끊임없이 생산, 보유하면서, 자기들이 둘러싸고 있는 조선은 핵탄을 한 발도 갖지 말고, 핵물질을 한 줌도 갖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유엔헌장의 기본정신을 저버린 대국들의 횡포 이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2016년 1월까지 주변4국이 위성을 발사한 정황을 살펴보면, 미국은 2,108개, 중국은 244개, 러시아는 3,491개, 일본은 197개를 발사했는데, 조선은 위성을 한 개도 발사하면 안 된다는 유엔안보리의 주장도 언어도단이라며, 자기들은 지난 수 십 년 동안 각종 위성을 끊임없이 쏘아올렸고, 올해에도 여러 차례 쏘아올리고 있으면서, 자기들이 둘러싸고 있는 조선은 위성을 쏘아올리지 말라고 가로막는 것은 유엔헌장의 기본정신을 저버린 대국들의 횡포라는 것이다.


조선은 100년 전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은 당시 사거리 50m의 화승대와 사거리 120m의 불랑기포밖에 없었던 조선봉건왕조를 현대식 무기로 포위압살하였지만, 오늘 핵탄과 수소탄,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전략잠수함을 가진 사회주의조선을 제재공세로 무너뜨리겠다고 하니, 그것이야말로 달걀로 바위를 치는 허망한 짓이는 입장이다. 핵탄과 수소탄,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전략잠수함을 가진 신흥군사강국으로 등장한 조선은 요즈음 스스로를 ‘백두산대국’으로, ‘태양의 나라’로 부르고 있는데, 그런 조선에게는 제재공세 같은 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감행하는 제재공세는 조선에게 통하지도 않는 전횡을 저질러 결과적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어리석은 자해행위로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 <사진 2>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경제제재를 받아온 조선의 체질 속에는 그 어떤 경제제재를 받아도 자기가 정한 경제발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면역체계'가 생겼다. 그 '면역체계'에 의해 조선의 경제는 차츰 강인한 체질로 바뀌어갔으며, 마침내 "최첨단을 돌파하라!"는 대담한 목표를 내걸게 되었다. 조선의 경제를 강인한 체질로 바꿔놓은 '면역체계'의 공식명칭은 사회주의자립경제다. 위의 사진은 조선의 1월18일기계종합공장에서 가동 중인 수직가공중심반 RV-50을 촬영한 것이다. 1월18일기계종합공장은 생산공정의 자동화, 무인화를 매우 높은 수준에서 실현한 최첨단 기계공장이다. 조선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경제제재를 받아오면서도, 자기의 체질 속에서 형성된 '면역체계'에서 자강력을 발동하여 세계적인 수준의 첨단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 자립경제와 경제제재의 끝장대결, 어느 쪽이 이기나?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유엔 역사상 가장 강력한 경제제재로 조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는 자극적인 언론보도가 요즈음 날마다 지면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언론보도가 과연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정보를 열거한다. 


첫째, 조선에 대한 경제제재는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무려 66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런 장기적인 경제제재는 조선의 경제발전을 가로막지 못했으며, 경제제재를 막아내는 면역력을 길러주었을 뿐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경제제재를 받아온 조선의 체질 속에는 그 어떤 경제제재를 받아도 자기가 정한 경제발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면역체계’가 생겼다. 그 ‘면역체계’에 의해 조선의 경제는 차츰 강인한 체질로 바뀌어갔으며, 마침내 “최첨단을 돌파하라!”는 대담한 목표를 내걸게 되었다. <사진 2>


조선의 경제를 강인한 체질로 바꿔놓은 ‘면역체계’의 공식명칭은 사회주의자립경제다. 조선이 피땀 흘려 건설한 사회주의자립경제란 자기의 자원과 자금, 자기의 기술과 노력으로 국가계획경제를 자립화, 자강화하는 경제라는 뜻이다. 
만일 조선의 경제가 자립화, 자강화를 높은 수준에서 실현하지 못했다면, 조선의 건국 이래 최악의 시련기였던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완전히 좌절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이 최악의 시련을 뚫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경제를 자립화, 자강화한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게 그런 토대가 있었기에 최악의 시련을 딛고 다시 일어나 오늘에는 인민생활향상과 과학기술강국건설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둘째, 2014년 11월 한국산업연구원 소속 연구원들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에 존재하는 기업체는 모두 2,891개로 추산된다고 한다. 그 가운데 화학공업부문 기업체는 363개, 광업부문 기업체는 360개, 기계공업부문 기업체는 269개, 동력산업부문 기업체는 261개, 건재산업부문 기업체는 207개, 경공업부문 기업체는 1,232개라고 한다. 조선에서 경공업부문 기업체의 수가 유난히 많은 것은, 다른 부문들에 비해 경영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체들이 경공업부문에 많이 분포되었음을 말해준다. 조선의 경공업은 각 지방별로 건설된 지방산업공장들에 의해 발전되어왔다. 
이러한 부문별 기업분포는 조선의 자원과 자금, 기술과 노력이 경공업보다 화학공업, 기계공업, 광업, 동력산업, 건재산업에 더 우선적으로 배정되어 산업생산의 현대화와 국산화를 추진해왔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최근 조선에서 산업생산의 현대화수준이 높아지고, 국산화비중이 늘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자립경제에서는 현대화수준이 높아지고 국산화비중이 늘어날수록 대외무역의존도가 그에 반비례하여 줄어들게 된다. 자기의 자원과 자금, 자기의 기술과 노력으로 산업생산의 모든 부문에서 현대적인 국산제품을 만들어내면, 다른 나라에서 그와 비슷한 상품을 수입할 필요가 없어지므로 당연히 대외무역규모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그와 달리,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사정은 정반대여서, 그들의 경제가 발전할수록 대외무역의존도가 급격히 높아진다.
원래 조선의 사회주의자립경제는 국제무역시장과 국제금융시장에 끌려 다니는 경제가 아니다. 국제무역시장과 국제금융시장에 질질 끌려 다니다가, 세계시장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혹심한 타격을 받으며 파산공포에 떨어야 하는 자본주의시장경제와는 정반대다. 2016년 3월 23일 한국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5년을 기준으로 조선의 대외무역규모는 한국의 대외무역규모에 비해 157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요즈음 자본주의시장경제의 내부모순이 세계적인 범위에서 급격히 악화되는 바람에 경제대국으로 자처하던 미국, 중국, 일본이 동반파산위험에 빠져 숨도 쉬지 못할 만큼 허덕이고 있지만, 세계자본주의시장에 편입되지 않고 자립노선을 가는 조선의 사회주의자립경제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경제강국은 국가경제의 자립화를 실현하고, 자강력을 키운 나라가 아닐까.

 

▲ <사진 3> 조선이 대외무역을 가장 많이 하는 상대국은 중국인데, 조선과 중국의 무역총액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조선과 러시아의 무역총액도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감소추세는 원래 매우 낮았던 조선의 대외무역의존도가 근래에 더욱 낮아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일 뿐아니라, 조선의 산업생산에서 현대화수준이 해마다 높아지고, 국산화비중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위의 사진은 조선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연결하는 신압록강대교다. 대외무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중국은 동북지방의 거점도시들인 단둥과 선양을 잇는 고속철도를 2015년 9월 1일에 개통하면서, 자기의 자금 22억2,000만 위안(한화 4,115억 원)을 들인 신압록강대교도 완공했지만, 중국과의 무역총액이 해마다 줄어드는 조선에서는 신압록강대교 개통이 급하지 않으므로 조중관계가 지금보다 좋아질 때까지 개통을 지연시키고 있다.     ©자주시보


조선의 주요무역대상국은 중국과 러시아인데, 조선이 그 두 나라와 거래하는 무역총액은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다. 이를테면, 조선과 중국의 무역총액은 2013년 65억4,000만 달러, 2014년 63억 달러, 2015년 54억3,000만 달러로 해마다 줄어들었고, 조선과 러시아의 무역총액도 2013년 1억1,270만 달러, 2014년 9,004만 달러, 2015년 8,400만 달러로 해마다 줄어들었다. 이러한 감소추세는 원래 매우 낮았던 조선의 대외무역의존도가 근래에 더욱 낮아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일 뿐 아니라, 조선의 산업생산에서 현대화수준이 해마다 높아지고, 국산화비중을 해마다 늘어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2015년 1월부터 5월까지 조선이 중국에서 들여온 5대 수입품목은 합성필라멘트사 직물(5,100만 달러), 화물자동차(4,900만 달러), 석유제품(3,700만 달러), 콩기름(3,700만 달러), 휴대전화기(3,000만 달러) 등이다. 합성필라멘트사 직물을 많이 수입한 것은 의류산업이 발전한다는 뜻이고, 화물자동차를 많이 수입한 것은 제품수송과 자재수송이 늘어난다는 뜻이고, 콩기름을 많이 수입한 것은 식품가공이 늘어난다는 뜻이고, 휴대전화기를 많이 수입한 것은 이동통신에 대한 인민들의 수요가 높아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위에 열거한 5대 수입품목들 가운데서 화물자동차 수입액만 전년도에 비해 늘어났고, 다른 4개 수입품목들은 수입액이 크게 줄었다. 이를테면, 합성필라멘트사 직물은 -25.3%, 석유제품은 -39.6%, 콩기름은 -11.4%, 휴대전화기는 -14.9%가 각각 줄었다. 이런 감소추세는 이들 품목들에 대한 국내수요가 줄었다는 뜻이 아니라, 조선에서 생산하는 이들 품목들의 국산화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대외의존도가 그만큼 줄었다는 뜻이다.    


위에 열거한 몇 가지 통계자료들은 최근 조선의 사회주의자립경제가 자기의 자원과 자금, 자기의 기술과 노력으로 자립화와 자강화를 매우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도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은 그처럼 국가경제를 자립화, 자강화한 조선에게 제재공세를 해보겠다고 자꾸 을러대고 있으니, 어찌 조선이 코웃음을 치지 않겠는가.  


셋째, 언제나 그런 것처럼, 외부에 쉽사리 공개되지 않는 비밀문서가 숨겨진 진상을 드러내주는 법이다. 조선에 대한 경제제재문제를 논할 때도, 언론매체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선정적인 보도에 귀를 기울일 게 아니라, 비밀문서에서 드러난 진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0년 전 유엔안보리가 대조선경제제재를 처음으로 결의한 이후 지금까지 그 제재조치가 어떻게 이행되었는지를 평가한 비밀문서의 내용이 최근 언론에 유출되었다. 유엔에 설치된 대조선경제제재전문가협의회가 작성한 비밀보고서가 그것이다. 그 비밀보고서를 인용한 <아에프페(AFP)> 2016년 2월 8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유엔안보리가 조선에게 경제제재를 계속해왔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다. 왜 실패했을까? 많은 유엔성원국들이 유엔안보리가 결의한 대조선경제제재조치를 무시하거나 그것에 무관심하여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유엔성원국들의 대조선경제제재 이행여부를 현지에서 직접 살피는 국제감독기구가 없기 때문에, 그 이행여부는 유엔성원국들이 스스로 작성하여 제출하는 이행보고서에 의해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유엔성원국들 가운데 대조선경제제재 이행보고서를 유엔안보리에 제출하는 나라는 소수의 친미추종국들밖에 없으며, 그 밖의 많은 나라들은 대조선경제제재조치를 무시하거나 그에 대해 무관심하다. 
설령 유엔안보리가 대조선경제제재 이행여부를 살피는 국제감독기구를 설치한대도 수많은 유엔성원국들 사이에서 복잡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국제교역현장들을 어떻게 24시간 살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유엔성원국들의 자발적 참여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는데, 위에 언급한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년의 제재경험은 그런 기대가 허망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4>

 

▲ <사진 4> 유엔에 설치된 대조선경제제재전문가협의회가 최근에 작성한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유엔안보리가 조선에 대한 경제제재를 처음 결의한 2006년부터 오늘까지 10년 동안 많은 유엔성원국들은 유엔안보리 대조선경제제재조치를 아예 무시해버리거나 그것에 무관심하여 이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엔성원국들 가운데 대조선경제제재를 이행하는 나라는 소수의 친미추종국들밖에 없다. 그래서 유엔안보리의 대조선경제제재는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도 지금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은 조선에게 더 강력한 경제제재를 가해보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위의 사진은 2016년 3월 5일 필리핀 수빅만에 입항하였다가 필리핀 정부에 의해 수색당하고, 압류당한 화물선 진텅호를 촬영한 것이다. 적재중량이 6,830톤인이 이 화물선은 인도네시아에서 축산사료를 싣고 중국 광둥성 진장항으로 가던 길이었다. 미국은 그 화물선이 조선의 화물선이라고 하면서 필리핀 정부에게 수색, 억류하라는 지령을 내렸지만, 그 화물선은 조선의 화물선이 아니다. 진텅호는 1997년에 일본 사세보중공업에서 건조되었으며, 소유주는 중국 홍콩에 있는 골든 쏘어 디벨롭먼트(Golden Soar Development)이며, 국적은 아프리카의 씨에라리온이며, 조선의 항구에 입항했던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2013년 7월 쿠바를 떠나 조선으로 향하던 중 파나마운하를 지날 때, 미국의 지령을 받은 파나마 정부에 의해 압류된 청천강호는 조선의 화물선이지만, 진텅호는 조선의 화물선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진텅호가 조선의 화물선이라고 우겨대며 필리핀 정부에게 지령을 내려 진텅호를 압류한 미국은 제 정신인가?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은 지난 10년 동안 대조선경제제재가 비록 실패했으나,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 강력한 경제제재조치를 결의하였으니 또 다시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그것은 큰소리가 아니라 헛소리로 들린다. 왜냐하면, 제재수위를 높였다고 해서, 유엔성원국들에게 없었던 자발적 이행의지가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엔안보리에게는 유엔성원국들이 대조선경제제재를 이행하도록 강제할 권한이 없다. 그런 까닭에 <뉴욕타임스>는 2016년 2월 26일부 보도기사에서 이번에 유엔안보리가 결의한 대조선경제제재가 실제로 이행될지 의심이 든다고 지적하였다. 
이행의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행조건이다. 이행조건이 제대로 갖춰졌어야 이행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월스트릿저널> 2016년 2월 28일 보도를 읽어보면, 이번에 유엔안보리가 결의한 대조선경제제재는 허점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보도기사에서 언급한 대조선경제제재의 허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조선의 수출품목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몫을 차지하는 무연탄과 철광석은 그것을 수출하여 벌어들인 금액이 조선에서 무기개발사업에 쓰인다는 증거가 있을 때만 제재를 받게 되었는데, 그런 증거는 있을 수 없으므로 조선의 무연탄과 철광석은 이전처럼 계속 수출될 것이다. 또한 조선의 수출품목들 가운데서 무연탄, 철광석 다음으로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의류와 수산물은 이전처럼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다른 나라에 수출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대조선경제제재가 조선의 자금줄을 끊어놓을 것이라는 언론매체들의 선정적인 보도는 사실과 다른 허풍선동임을 알 수 있다. 명백하게도, 대조선경제제재는 아무런 실효도 내오지 못하면서, ‘최후결전’을 향한 조선의 결심을 더욱 굳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된다. 그런 점에서, 주변4국이 이번에 대조선경제제재를 추가하기로 결의한 것은 회복하기 힘든 대실책으로 보인다.    

 

▲ <사진 5> 임기말년에 들어선 오바마 행정부가 대조선경제재재를 감행해놓고 몇 달 뒤에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퇴임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지금 조미적대관계에 조성된 일촉즉발의 위험한 정세는 그런 오판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사진은 조선인민군이 운용하는 저고도지대공미사일 자행발사대에 적힌 전투구호다. 이 전투구호는 조선인민군이 운용하는 모든 군사장비들에 적혀 있다. 그들의 결전의지가 보인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3. 치명적인 위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임기는 앞으로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래서 임기말년에 대조선경제제재를 감행해놓고 몇 달 뒤에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퇴임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지금 조미적대관계에 조성된 일촉즉발의 위험한 정세는 그런 오판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사진 5> 
미국에게 회복하기 힘든 깊은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혹심한 경우에 미국의 국가적 존립을 파탄시킬지 모르는 치명적인 오판의 책임은 오바마 행정부에게만 지울 수 없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조선이 미국에게 보낸 평화협정제안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조선의 핵무장과 위성발사만 막아보려고 끊임없는 압박공세를 가해왔던 미국의 역대 행정부들에게 원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원죄가 지금 미국을 건국 이래 가장 치명적인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미국이 빠져든 치명적인 위험은 6.25전쟁을 종식하지 못하고 교전행위만 중지한 조선과 미국의 정전상태에서 발생한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미국은 조선과의 관계에서 전쟁재발위험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미국태평양사령관 해리 해리스(Harry B. Harris)가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 2015년 5월 25일부에 실린 대담기사에서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조선이다. 그런 조선 때문에 나는 밤잠을 설친다”고 하면서 자기의 고달픈 심사를 털어놓은 것은 농담이 아니다. 그처럼 조선에게서 치명적인 위험을 느끼면서도 대국의 체면을 유지하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허장성세에 매달리는 미국의 말 못할 고통이야 얼마나 심하겠는가. 
무릇 생명유기체들은 자기에게 위험이 닥치면, 그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게 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생존본능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으로부터 치명적인 위험을 느끼는 미국이 그런 생존본능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최근 각종 전략무기들과 전술무기들을 한반도 전선에 줄줄이 들여놓고 있는 미국의 이상한 행동이 바로 그런 생존본능적인 반응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대조선무력시위는 자기에게 닥친 치명적인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생존본능적인 반응인 것이다. 조선은 이전에도 핵시험과 위성발사를 몇 차례 하였는데, 미국이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전례 없는 대규모 무력시위를 계속하는 것은 자신이 빠져든 치명적인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군사적 형태의 생존본능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 6> 

 

▲ <사진 6> 미국의 대조선무력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위의 사진은 2016년 3월 3일 부산 해군기지에 입항한, 미해군 7함대 소속 상륙강습함 본험 리처드호를 촬영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각종 전략무기들과 전술무기들을 한반도 전선에 줄줄이 들여놓고 있는 미국의 무력시위는 자신이 빠져든 치명적인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군사적 형태의 생존본능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대조선무력시위의 그런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문외한들은 미국이 각종 전략무기들과 전술무기들을 한반도 전선에 몰고 와서 조선을 위협하고 있다고 오판하고 있으며, 조선이 미국의 무력시위를 보고 겁을 먹었다고 착각하고 있다. 종미반북성향의 언론매체들이 대서특필하는 허위선전에 속아 넘어가면, 그처럼 현실을 거꾸로 바라보며 헷갈리기 마련이다. 
미국을 치명적인 위험에 빠뜨린 최근의 군사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려면, 아래와 같은 설명이 요구된다. 


 

▲ <사진 7> 사진 한 장이 많은 사연을 말해준다. 이 사진은 2014년 9월 9일 조선의 건국기념일에 즈음하여 평양에서 진행된 열병행진에 등장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로농적위군 방사포다. 이 방사포는 1984년식 240mm 18관 대동강 방사포인데, 사거리가 50.3km이며, 일반탄과 산포탄을 모두 발사할 수 있는 위력적인 타격수단이다. 그런데 위의 사진을 보면, 그런 강력한 타격수단을 조선의 협동농장들에서 사용하는 뜨락또르(트랙터)가 끌고 있으며, 여성대원 두 사람이 집총자세를 하고 방사포 발사대 아래에 앉아 있다. 평시에는 협동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여성들이 전시에는 240mm 18관 대동강 방사포를 끌고 전투에 나서는 것이다. 전시에 황해남도 남부의 어느 협동농장에서 그 방사포를 쏘면, 서울 한폭판에 산포탄이 떨어지게 된다니, 그것만 봐도 한국군이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정규군이 보유한 방사포 자행발사대는 바퀴가 푹푹 빠지는 논길이나 좁고 험한 산길을 가지 못하지만, 뜨락또르는 논길이건 좁고 험한 길이건 마음대로 기동하면서 가파른 산봉우리에도 올라가서 사격할 수 있다. 논과 산으로 뒤덮인 조선의 작전지형에 꼭 맞는 타격수단이 바로 뜨락또르 견인식 방사포인 것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정규군도 갖지 못한 240mm 방사포를 조선에서는 로농적위군에게 배치하였으니, 로농적위군의 화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그런 로농적위군 570만 명이 2015년 10월 31일을 기해 '최후결전준비'를 완료하였고, 2016년 2월 20일부터는 로농적위군 복장으로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결전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는 것인가?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4. 2015년 10월 31일까지 ‘최후결전준비’ 완료한 로농적위군 
 

조선에서 유출된 소식을 전한 미국 <자유아시아방송> 2016년 3월 1일 보도에 따르면, 2015년 10월 31일까지 통일전쟁준비를 완료하라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의 지시가 로농적위군에 하달되었다고 한다. 로농적위군은 직장마다 조직된 민간군사조직인데, 17~60세의 남자, 17~30세의 미혼여성에 해당하는 570만 명 병력으로 편성되었다. 로농적위군 산하에는 10만 명 병력으로 편성된 상비무력인 인민보위대도 있다.
위에 인용한 보도기사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로농적위군 570만 명에게 ‘최후결전준비’를 2015년 10월 31일까지 완료하라고 명령하였음을 말해준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로농적위군에게 2015년 10월 31일까지 ‘최후결전준비’를 완료하라고 명령한 것을 보면, 조선인민군의 ‘최후결전준비’는 그 이전에 이미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정규군부터 먼저 전쟁준비를 완료하고, 민간군사조직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반상식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조선인민군과 로농적위군이 2015년 10월 31일을 기해 ‘최후결전준비’를 모두 완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진 7>


조선에서 유출된 소식을 전한 미국 <자유아시아방송> 2016년 3월 1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2월 20일부터 모든 근로자들이 로농적위군 복장으로 직장에서 근무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이전에는 해마다 두 차례씩 진행되는 비상훈련기간에만 로농적위군 복장으로 근무하였는데, 이번에는 비상훈련기간이 아닌 데도 로농적위군 복장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조선에서는 학생들, 노인들, 가정주부들을 제외한 전체 근로자들이 군복차림으로 근무하는 통에 전시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한다. 
조선에서 유출된 소식을 전한 미국 <자유아시아방송> 2016년 2월 11일 보도에 따르면, 지금 조선에서는 올해 2016년에 “통일대전이 있을 것이라는 교양을 하고 있”으며, “올해 들어 (군입대를 위해) 신체검사를 받는 초모명사들을 (통일대전에 참전할) ‘통일병사’라고 부른다”고 한다.

 

▲ <사진 8> 2015년 6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뙤약볕 아래서 협동농장작황을 살펴보고 있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2015년 12월 10일까지 3년분 비상식량을 비축하라는 지시를 전국 각지에 하달하였다. 조선은 2015년 12월 말까지 각지의 양곡저장소들에 3년분 비상식량을 쌓아놓고, '최후결전'에 대비한 120만 톤 이상의 식량비축을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나라나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전투준비와 식량비축을 병행하는 법이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5. 2015년 12월 10일까지 3년분 비상식량비축 완료한 조선


조선에서 유출된 소식을 전한 미국 <자유아시아방송> 2016년 3월 1일 보도에 따르면, 2015년 12월 10일까지 군량미 확보를 완료하라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의 지시가 전국 각지에 하달되었다고 한다. 
조선에서 유출된 소식을 전한 미국 <자유아시아방송> 2016년 2월 11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 조선인민군에게 3년분 군량미를 비축하라고 명령한 때는 2015년이었는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집행상황을 점검해왔다고 한다. 이 보도에 따르면, 조선은 2015년 12월 말까지 각지의 양곡저장소들에 3년분 군량미를 쌓아놓고 ‘최후결전’에 대비한 식량비축을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나라나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전투준비와 식량비축을 병행하는 법이다. <사진 8>


3년분 군량미는 얼마나 많은 식량일까? 2010년 10월 4일 통일부가 국회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의 연간식량소비량은 27만 톤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런 추산에 따라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조선에서 2015년 12월 말까지 비축한 3년분 군량미는 81만 톤이다. 하지만 군량미를 군대의 연간식량소비량에 딱 맞춰 비축하는 경우는 없으며, 그보다 더 넉넉하게 비축해두는 것이 정상적이다. 한국 정부 고위당국자의 말을 인용한 <조선일보> 1997년 10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선이 비축한 군량미는 120만 톤이라고 한다. 이 보도가 나온 1997년은 조선이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혹심한 식량난을 겪던 시련기였는데, 그런 식량난 속에서도 군량미를 120만 톤이나 비축했었다면, 요즈음 식량생산이 늘어나 연간곡물생산량에서 한국을 앞지르게 된 조선은 군량미를 120만 톤 이상 비축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추산에 따르면, 2014~2015양곡연도에 조선은 594만 톤의 양곡을 생산하였다고 하는데, 군량미를 120만 톤 이상 비축하였다면 엄청난 분량이 아닐 수 없다. 올해 한국의 연간쌀수요량은 414만 톤에 이를 것으로 예견된다. 


그런데 조선에서 아무리 식량생산이 늘었다고 해도, 군량미를 3년분이나 비축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이전에 발표한 몇몇 글들에서 조선의 ‘최후결전’이 72시간 만에 조선의 승리로 신속하게 끝나게 될 것으로 예견한 바 있는데, 그런 초단기속결전을 대비하는 조선에서 왜 장기전에 필요한 3년분 군량미를 비축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것일까? <조선일보> 2011년 3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각 군단, 훈련소들의 지하갱도에 6개월분 군량미를 비축하였다고 하였는데, 2015년 가을에는 군량미를 4년 전보다 6배나 더 많이 비축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으니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조선이 비축한 3년분 군량미는 72시간 ‘최후결전’에 투입된 조선인민군에게 공급될 전시식량이 아니라, ‘최후결전’이 벌어지면 식량공급이 중단될 남측 동포들에게 공급할 비상식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에서 말하는 ‘최후결전’은 무징후선제기습으로 미국을 순식간에 패퇴시켜 분단체제를 무너뜨리고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전쟁이므로, 그런 통일전쟁을 수행한 조선은 통일국가에서 함께 살아야 할 남측 동포들의 생활안전을 보장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통일전쟁 직후 복잡해진 상황에서 그들에게 부족되는 식량을 공급할 준비도 미리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 <사진 9> 2016년 2월 23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중대성명을 발표하자, 이틀 만에 조선의 전국 각지에서 청년학생 150여 만 명이 그 중대성명에 적극 호응하여 조선인민군 입대, 복대를 탄원하였고, 그 이후에도 탄원대열이 계속 늘어났다. 위의 사진은 2016년 2월 26일 조선인민군 입대, 복대를 탄원하는 모임에 참석한 함경남도 청년학생들이 탄원서에 서명하는 모습이다. 그 아래의 사진은 같은 날 입대복대탄원모임을 진행한 남포시 청년학생들이 거리행진을 하는 모습이다. 지금 조선에서 말하는 '최후결전'은 수 백 만 청년학생들의 참군열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결전시각에 차츰 다가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6. 최고영도자가 올해 금수산태양궁전을 홀로 찾은 까닭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2016년 2월 23일 중대성명을 발표하였다. 중대성명은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은 무자비한 천벌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는가 아니면 뒤늦게라도 사죄하고 사태를 수습하는 길로 나가겠는가 하는 최후의 선택을 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진 9>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중대성명을 발표하자, 조선의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조선인민군 입대, 복대를 탄원하며, ‘최후결전’에 나설 집단적 결의를 표명하였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중대성명이 발표된 때로부터 2일 동안에 전국적으로 150여 만 명이 입대와 복대를 탄원하였으며, 탄원대열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청년학생들의 참군열풍 하나만 놓고 봐도, 조선의 결전의지가 충천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중대성명에서 ‘최후결전’의 1차 타격대상을 “청와대와 반동통치기관들”이라고 밝혔는데, “우리의 중대경고에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어리석은 군사적 망동에 매달린다면 그 근원을 깡그리 소탕해버리기 위한 2차 타격작전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최후결전’의 2차 타격대상을 “아시아태평양지역 미제침략군의 대조선침략기지들과 미국 본토”라고 지목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최후결전’이 1차에서 2차로 이어지는 연속타격전으로 진행될 것임을 예상하게 한다.

 

▲ <사진 10>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중대성명을 발표하기 1주일 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광명성절에 즈음하여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아 경의를 표하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해마다 2월 16일이 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조선인민군 고위급 지휘관들과 함께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아 경의를 표했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조선인민군 고위급 지휘관들과 함께 가지 않고, 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갔다. 선대수령들을 생전의 모습으로 모신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어떤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 위해 그곳을 홀로 찾은 것으로 생각된다. 2016년 2월 16일 조선의 최고영도자는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어떤 중대한 결단을 내린 것인가?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중대성명을 발표하기 1주일 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광명성절에 즈음하여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아 경의를 표하였다. <사진 10> 조선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탄생일로 기념하는 2월 16일에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아 경의를 표하는 것은 어떤 관례적인 행동이 아니라 선대수령에 대한 숭모와 의리를 중시하는 조선에서 최상의 예의로 된다. 그런 까닭에, 김정은 제1위원장은 해마다 2월 16일이 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조선인민군 고위급 지휘관들과 함께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아 경의를 표했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올해 2월 16일 김정은 제1위원장은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아 경의를 표할 때 조선인민군 고위급 지휘관들과 함께 가지 않고, 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갔다. 조선인민군 고위급 지휘관들은 당과 국가의 고위인사들과 함께 별도로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아 경의를 표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예년과 달리 홀로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아 경의를 표한 것은 뜻밖의 일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선대수령들을 생전의 모습으로 모신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어떤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 위해 그곳을 홀로 찾은 것으로 생각된다. 2016년 2월 16일 조선의 최고영도자는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어떤 중대한 결단을 내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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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전 할아버지가 못 이룬 야권 통합, 손자가 이룰까

 

김병로 국민의당 대표, 1963년 박정희에 맞서 야권연대 추진했다 무산… 손자 김종인 승부수 먹힐까

이재진 조윤호 기자 jinpress@mediatoday.co.kr  2016년 03월 08일 화요일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조부이신 가인 (김병로) 선생님을 꼽으셨다”
“그건 내가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요”
“76세에 당을 만들지 않았나. 조부님께서”
“77세요. 그 때 조부 연세와 내 나이와 똑같아. 우연인지 모르지만.”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조부 가인(街人) 김병로에 대해 떠올린 답변이다. 
 
김종인 대표의 리더십을 놓고 조부 김병로의 정치를 따라배웠던 경험이 바탕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조부 김병로를 떼놓고 김종인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야권통합과 관련해 할아버지의 뼈아픈 경험은 김종인 대표의 정치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김종인 대표의 조부 김병로는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을 변론하면서 민족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법부에 압력을 가할 때 사법부의 독립을 주장하며 '억울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라'며 맞받아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김병로는 1957년 12월 정년퇴직을 하고 본격적으로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1940년생인 김종인 대표는 부친이 일찍 사망하면서 조부 김병로 슬하에서 자랐고 자연스레 당시 할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정치를 배웠다. 
 
1963년은 김 대표가 야권통합 실패라는 쓰디쓴 경험을 배웠던 해였다. 당시 5. 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2년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해 정치인 4300여명의 공식적인 정치활동을 중단시켰다. 정치활동 규제는 이듬해 1월 1일 풀렸다. 
 
박 전 대통령은 군정기간 2년이 끝나면 민간에 정권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번복하고 공화당은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 전 대통령을 후보로 추대했다. 정치활동 규제가 풀리면서 야당은 박정희 후보에 대항해 바삐 움직였다. 그해 5월 김병로와 제2공화국 윤보선 전 대통령 등 민주당 구파 계열 인사들은 민정당을 창당했고 김병로는 대표 최고위원에 올랐다. 
 
김병로는 범야권의 대동단결을 통한 야당을 만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맞선 단일후보 조정 작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야권의 통합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윤보선을 대선 후보로 추대했지만 민정당은 범야 단일 정당을 만들기 위해 신정당, 민우당과 함께 3당 통합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대통령 단일 후보를 내세우려고 했다. 그래서 그해 8월 1일 만들어진 당이 국민의당이었다. 그리고 김병로가 민정당 대표 최고위원과 국민의당 대표 최고위원을 맡을 때 그를 보좌했던 사람이 김종인 대표였다. 
 
야권통합의 틀은 만들어졌지만 야권은 대통령 단일 후보 선출을 놓고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단일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 사람은 김병로, 윤보선, 허정 과도정부수반,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 등이었다. 1963년 10월 대선을 40여일 앞두고 국민의당은 창당대회를 열어 대선 후보를 선출하려고 했다. 군사 정권에 맞서 나라의 원로인 김병로를 대선 후보로 선출하자는 안과 당선 가능성이 큰 윤보선을 단일 후보롤 세워야한다는 안이 대립했다. 그리고 급기야 허정을 야권후보로 추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면서 단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은 난항을 거듭했다. 결국 윤보선은 민정당 후보로 독자 입후보했고 허정은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로 등록했다.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 맞서 야권에서 두 후보가 나오면서 분열의 패배는 예견된 일이었다. 대선 투표일을 10여일 앞두고 허정은 후보직을 사퇴했지만 이미 야권표가 분산돼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후보에게 15만표차로 패배했다. 김종인 대표는 조부 김병로의 집에서 윤보선과 허정이 모여서 한  단일후보 작업을 옆에서 지켜봤고 야권통합 작업이 후보 분열로 실패한 것을 목격했다. 대통령 선거 한 달 뒤에 치뤄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에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을 내줬다. 정치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야권 단일 후보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박정희 후보에 맞서 야권 후보가 승리했다면 역사의 큰 흐름이 바뀌었을 것이다. 김병로는 대선과 총선에서 야권이 실패한 것으로 보고 이듬해인 1964년 1월 숨을 거뒀다. 
 
김종인 대표를 잘 아는 한 관계자는 “가인 김병로, 할아버지를 평소 존경해오고 정치를 배웠던 김 대표에게 당시 단일화 과정은 큰 정치적 경험이 됐을 것이고 최근 김 대표의 공세적인 통합 메시지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가 국민의당에 야권통합을 전격 제안한 것을 두고 통합의 가능성을 높게 보기보다는 통합의 명분을 선점하겠다는 의도가 강하다는 분석이다. 타이밍상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을 때 조부 김병로처럼 통합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책임을 상쇄시킬 수 있다. 한편으론 야권 분열시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총선 전까지 어떤 식으로든 구체적인 야권통합을 거듭 제안할 가능성도 남아있다. 
 
김 대표가 공세적인 리더십을 펼치고 있는 것도 과거 조부 김병로의 야권 단일화 과정에서 '결단'의 정치를 지켜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오간다. 현재까지 야권통합을 할 의사가 없는 안철수 대표를 무시하는 듯한 언행도 철저히 상대방 측의 내분을 노리고 야권통합 주체를 세우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야당이 질 수밖에 없었던 게 야당 자체가 내부 갈등만 있지, 일치된 모습을 갖고 선거를 임하는 걸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김 대표는 "새누리당이 내각제 개헌이라도 만약에 해버리면 야당 역할은 일본의 야당 비슷하게 가게 되는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한국의 정치 경제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런 상황이 도래하는 걸 안타깝게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이 짓을 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종합하면 김 대표는 야권 분열상으로 인한 집권여당의 개헌 저지선 확보를 막는 것이 급선무이고 이를 막지 못하면 정권창출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상 시기 자신에게 전권을 주고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사진=민중의소리
 
야권 승리를 위한 내부 결속을 압박하고 국민의당에 공세적인 리더십을 펼치고 있는 것에 대해 긍정과 우려의 목소리도 공존한다. 
 
김 대표의 한 측근은 “김 대표가 우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략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한다고 봐야 한다. 타이밍을 잘 잡는다”며 “같은 이야기도 언제 던지느냐에 따라 굉장히 좋은 패가 되기도 하고, 또 쓸모없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심상정 대표, 박지원 의원 등 야권통합을 생각하는 정치인들은 많지만 이슈를 끌고 갈 타이밍은 김 대표가 가장 잘 포착한 셈”이라고 말했다.
 
더민주당 한 관계자도 “원래 야당 사람들이 도덕군자에 선비들이 많다. 그렇게 해서 이기면 가장 좋은데, 지금까지 내놓은 결과가 별로 없다”며 “정부여당은 언론에 돈, 각종 수사기관까지 다 동원하는데 얌전하게 당하기보다 공세를 펼쳐서 이슈를 주도하고 끌고가는 건 긍정적으로 본다. 정치가 신선놀음은 아니지 않나”라고 했다.
 
반면, 더민주당 한 보좌관은 “역할 자체가 선거에 이기기 위한 구원투수다보니 이기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과감하게 다 한다”며 “선거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기준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선거 승리라는 목표로 실용주의적 행보를 걷고 있지만 자칫 정체성 논란과 함께 노선 투쟁이 불거지면 김종인 대표의 리더십도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김종인 대표를 비롯해 공관위원들도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비선출이 선출에 비해 전권을 가진 부분에 대해 과도하다는 생각도 있지만 성과를 내고 있으니 대놓고 이야기하진 못하는 상황”이라며 “당장은 좋은 결과를 내고 있는데 대선 등 멀리 봤을 때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지에 대해서는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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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조선 성명 심각한 위협” 간주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6/03/08 09:29
  • 수정일
    2016/03/08 09:2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국무부 “조선 경고 심각하게 여기고 주시” 강조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6/03/08 [06:4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조선은 한미연합훈련을 전쟁연습으로 규정하고 움쩍하기만 하면 섬멸적 선제 타격을 하겠다고 미국과 한국에 경고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미국 국무부가 조선의 선제타격 발언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긴밀히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소리방송은 8일 미국은 조선의 모든 경고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으며 현 상황을 긴밀히 주시하고 있다고 미국 국무부가 밝힌 사실을 보도했다.

 

캐티나 애덤스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 7일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의 선제타격 위협과 관련해 이같이 말했습니다.

 

조선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과 조선국방위원회, 인민군 최고사령부, 정부사령부 등은 앞선 성명에서 미-한 연합군사훈련을 비난하면서 "무자비한 섬멸적 타격을 먼저 가할 만단의 선제타격 태세에 진입한 상태에 있다"고 경고했다.

 

애덤스 대변인은 이에 대해 미-한 군사훈련 실시 방식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그는 두 나라의 연례 군사훈련은 투명하고 방어적일 뿐아니라 40년 동안 미-한 연합사령부의 지휘 아래 정례적이고 공개적으로 실시돼 왔다고 설명했다.

 

애덤스 대변인은 한국 방어를 위한 양국의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동북아 지역을 보호하며 한반도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연합훈련을 실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키리졸브 독수리 훈련은 평양진격작전, 북안정화 작전, 조선 최고수뇌부 참수 작전 등을 목표로 진행하고 있어 애덤스 대변인의 설명은 전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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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 다음에는?


<칼럼> 정영철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정영철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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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3.07  0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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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수소탄 시험과 로켓 발사로 시작된 한반도 위기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 채택에 이어, 이번에는 우리 안에서 테러방지법과 북한인권법이 통과되었고 급기야 대통령이 북한의 ‘폭정’을 반드시 멈추도록 하겠다고 선언해 나섰다.

이쯤 되면 남북의 대화로의 출구는 사실상 막힌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도 출구 하나 쯤은 열어놓는다는데, 아예 출구를 막고 덤벼드니 ‘사생결단’이란 말은 이럴 때를 두고 쓰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우리 역시 출구를 막았으니, 우리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도 풀릴지 않는 것은 바로 그래서?(So what?) 그런 다음에는?(and then?)이다.

북한의 수소탄 시험, 장거리 로켓 발사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집단적인 응분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비군사적 제재로는 가장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번 제재안으로 인해 북한은 적지 않은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인민생활 향상을 최고의 과제로 제시한 북한의 김정은 체제는 이번의 제재로 인해 경제 여러 분야에서의 타격은 물론 국제사회의 이미지 재고에도 차질을 빚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의 제재가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의 근본적인 뿌리를 도려내기에는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하나는 안보리 제재결의안 채택 과정에서 보았듯이, 러시아 역시 한반도 문제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최근 년 간 북한과 러시아간의 여러 방면에서의 협력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한반도에의 깊숙한 개입은 지금까지 미국과 중국에 과도하게 의존하였던 우리의 대북정책을 다시금 돌아보도록 하게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제재결의안 채택 과정에서 비핵화와 평화협정, 그리고 협상으로의 유인 등의 출구 등이 아울러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일방적 제재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출구를 슬며시 열어놓은 것과 같다 하겠다. 이후 실제로 대화 국면으로 움직일지는 두고 보아야 하지만, 적어도 출구마저 꽁꽁 막아버리는 극단적인 처방은 제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의 일정을 보면 단기간 내에 제재 국면의 종식되고, 대화 국면이 열릴 가능성은 적다. 그럼에도 대화 국면의 출구를 고민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향후 큰 차이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북 확성기 방송과 조만간 개시될 군의 대북 삐라 살포, 그리고 유일한 통로였던 개성공단의 폐쇄 등으로 우리 스스로가 조그마한 출구마저도 봉쇄해버렸다. 여기에 대통령의 ‘북한 붕괴’를 연상시키는 ‘폭정’을 끝내겠다는 발언은 아예 대결을 공식화한 것처럼 들린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조만간 개시될 한미합동군사훈련과 이에 대응한 북한의 반발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게 될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긴장 고조는 주변국까지 관계되는 복잡한 동북아시아의 셈법에 우리 스스로를 가두게 될 것이다. 결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원하지 않는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익을 취하게 될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우리의 선택지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우리로서는 기분만 잔뜩 냈지, 실리는 챙기지 못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 바로 so what? and then?이다.

무릇 모든 정책은 비용과 편익을 따져야 하며, 정책 이후의 결과에 대한 대응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의 정책이 일관성을 가지고 지속될 수 있으며,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혹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중요한 교훈을 찾고, 차후의 개선된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정책은 지금 당장의 우리의 편익만을 따지고 있다. 편익과 동시에 발생하게 될 비용은?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까지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은 누누이 지적했듯이, 무엇을 하겠다는(what)것은 풍성하다 못해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떻게(how) 하겠다는 것은 보이지 않고 있다. 또, 여기에 덧붙여 이에 수반되는 비용을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것도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의 요인이 될 것이다.

지금의 경우에도 그렇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겠다는 목표는 뚜렷하다.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제재를 하겠다는 것이고, 나아가 우리 역시 개성공단 폐쇄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독자적인 제재를 가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 수반되는 비용은? 그리고 만약 이러한 제재가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한다면? 이미 이번 유엔 결의안에 대해 너무 많은 구멍이 있어서 실질적인 제재에 대해서 여러 전문가, 기관 등에서 의구심을 품고 있다.

핵과 미사일 개발의 근원을 도려내기 위한 제재라고 하지만, 슬그머니 출구를 열어놓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중국, 그리고 러시아까지도 제재와 함께 협상으로의 복귀를 차후의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북한에게 한쪽 출구를 열어놓고 선택을 은근히 종용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우리의 상황은 이러한 대비책이 전혀 없는 듯이 보인다. 당면의 응징이라는 조바심 때문에 ‘제재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장치를 남겨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누구의 표현처럼, 북한과 미국이 ‘바람이라도 피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한번 so what? and then?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은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정세 지형을 보아도 묻지 않을 수 없다. 핵과 미사일 개발과 시험에 따른 ‘응징의 국면’이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고, 북한에 유엔안보리 제재가 그러했듯이 각 국가의 이익이라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 유명무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언제까지나 매달릴 수도 없는 형편이다.

더욱이 이번에 미국과 중국이 보여준 모습은 미국의 협박에 중국의 양보가 아니라 전 세계를 이끌고 가는 G2로서의 위상과 역할이었다. 즉, 미국과 중국은 표면상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및 전 세계에 대한 지도국가로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가야 할지에 대해 상호 학습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이번의 미중간 합의, 그리고 러시아까지 발언권을 높이는 과정에서 ‘비핵화-평화협정’의 동시 병행추진이 이야기될 수 있었고, 미국마저도 이에 대해 절대적인 거부의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비핵화-평화협정’의 병행추진은 앞으로 ‘북핵 문제’에 대한 새로운 협상이 재개된다고 가정할 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 협상이 진행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과거의 평화협정 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높이에서 논의가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으로서는 제재와 동시에 병행추진의 의제를 던져놓음으로써 앞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협상의 주도권을 행사하거나 적어도 미국, 북한 그리고 한국에까지 여러 가지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중요한 지렛대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앞으로 일정 기간 동안 제재와 충돌, 갈등과 긴장의 고조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제재의 국면에서 우리 정부와 언론은 단편적인 몇 가지 정보와 제재의 효과를 놓고 정책의 정당성을 선전하게 될 것이다. 이미 단둥이나 중국에서의 몇 가지 소식을 통해 제재가 본격적으로 이행되고 있고 북한이 그만큼의 타격을 입고 있다는 식의 보도가 확산되고 있다.

그런 다음에는? 그런 다음의 ‘신의 한 수’를 고민하고 있을까? 현재까지 정부의 모습을 보면 적어도 ‘제재 이후’에 대해 어떠한 고민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제재에 올인(All-in)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정영철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문학박사, 2001)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 대학 방문연구원(2002-2003)
서울대 국제대학원 연구위원(2004-2006)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객원연구원(2007)
현재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중
 
주요저서로 북한의 개혁·개방: 이중전략과 실리사회주의(2004), 김정일 리더십 연구(2005), 서울과 도쿄에서 평양을 말하다(2008), 북한과 미국: 대결의 역사(번역서, 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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