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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15
    빈곤과 관심(조순경) - Attention(S.W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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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과 관심(조순경) - Attention(S.Weil)

조순경: 빈곤의 비가시화, 빈곤소탕작전(도시위생 처리), 남성노숙자의 가시화/빈곤여성의 비가시화, 주의와 관심.

시몬 베이여(S.Weil): Misere(pauverete) invisible, Attention oubliee(perdue).

 

 

빈곤과 관심 / 조순경 강의(여정민 정리)  

 

'고용'이 화두다. 실업급여 수급자는 매월 최대 규모를 갱신하는데 새 일자리는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실직자가 늘어나니 자연스레 '먹고 사는 일'이 고민이다. '빈곤의 확대'가 우려되는, 유례없는 전 세계적 경제 위기다. 그 첫 피해자가 여성과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임이 확인되고 있다. 정부가 이런 저런 대책들을 내놓지만, '부자 감세' 규모에 비하면 턱없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쏟아진다. 복지 등 사회 안전망 확충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지만, 정부는 일단 기업을 살려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대체 이 위기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조순경 이화여대 교수는 14일 "빈곤이 우리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며 "빈곤 극복을 위한 일차적인 과제는 빈곤하고 차별받는 현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자리를 잃고 "우리에게도 착취당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는 이들의 참혹한 현실이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조 교수는 이날 이화여자대학교 국제교육관 LG컨벤션홀에서 '지구화 시대 빈곤과 여성 노동'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국제학술회의에서 "빈곤은 친밀한 관계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며 이 같이 주장했다. 조순경 교수의 이 같은 문제 제기는 그간 이뤄졌던 빈곤 연구와 전혀 다른 차원의 접근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조 교수는 1980년대 중반,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에서 해고당한 노동자가 한 이 이야기로 실업의 공포를 명료하게 설명했다. 조 교수는 "일본 등 외국에서 수입된 자동차로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서 자동차 산업의 메카인 디트로이트 거리는 실업자로 넘쳐났고 이들에게 일자리를 갖는다는 것은 임금 수준과 근로 조건을 떠나서 특혜로 보이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금융의 세계화는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안정성을 심화시켜 왔다." 특히 "그 불확실성은 일차적으로 저임금 근로자와 저소득층에 피해의 부담이 전가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전혀 이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 교수는 "그동안 연구자들이 가졌던 환상 가운데 하나는 국가 혹은 시장이 노동여성 빈곤의 문제를 일정 정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사실"이라고 단언했다. "어쩌면 우리는 국가에 대해 지나치게 과도한 기대를 해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20년간의 경험을 통해 볼 때 국가와 시장은 일하는 여성들의 빈곤을 해결하는 주체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거는 국가가 주도하는 빈곤의 비가시화다. 북경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중국 정부가 치른 대대적인 빈민 소탕 작전은 단적인 예다. 조 교수는 "이런 방식으로 도시들이 '위생 처리'되면서 시민들의 시야에서 빈곤한 현실은 멀어져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정은 우리도 다르지 않다. 조 교수는 이화여대 정문 앞의 '달동네'가 고층 아파트로 재개발되면서 매일 등하교 길에서 마주치던 "빈곤의 현실은 학생과 교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그 가운데서도 이미 10년 전 외환 위기 때, "'자발성'으로 포장된 강요에 의해 대규모로 퇴출당했던" 여성은 최근에도 1차 피해자가 되고 있지만, 그들의 빈곤은 "더 더욱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거주할 곳이 없는 남성은 거리의 노숙자로 가시적으로 드러나 보인다. 여성에게 노숙은 성폭력 위험에 노출되는 것과 같기에 머물 곳 없는 여성들이 가게 되는 곳은 숙식을 '보장'해 준다는 티켓다방, 성매매 업소다."

지난 2월 통계청 조사 결과 1년 전에 비해 여성 취업자는 13만9000명이 줄었다. 같은 기간 남성 취업자는 2000명 줄어 남녀 취업자 감소폭의 차이는 무려 70배나 된다. 그러나 그들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조차 없다."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노동조합도 대외적 힘의 여부와 별도로, 여성 조직율 자체가 하락하고 있다. 여성 노동자의 노조 조직율은 지난 1997년 19.5%에서 2005년 5.1%로 늘기는커녕 오히려 14.4%포인트나 감소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다. 여기에는 언론 등 미디어도 한 몫 하고 있다. 조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주요 미디어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와 이미지가 사라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며 "빈곤한 이미지의 제거는 마치 지구상에서 빈곤이 사라져 가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고 말했다. "빈곤이 일상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보도 가치가 있는 뉴스 거리가 되지 않는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집단이 그들의 소리를 들리게 하기 위한 방법은 평상시와 다른, '특별한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죽음을 각오한 단식, 삭발, 쇠사슬로 온 몸을 감기 등등의 퍼포먼스는 그들의 소리를 사회에 알리기 위한 수단이다."

 
"빈곤은 친밀한 관계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는 조 교수의 지적은 통계나 과학, 논리를 통해서 빈곤 문제를 해석하는 기존의 연구와는 또 다른 발상의 전환이다. 조 교수는 "관심과 보살핌이 있는 관계에서 빈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공동체의 해체가 빈곤을 확대시키는 또 한 축이라는 얘기다.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빈곤하다는 것은 5분의 4는 빈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빈곤하지 않은 사람들이 빈곤한 사람들의 삶에 지속적 관심을 가지고 공동체적 의식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빈곤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효용과 효율의 가치가 지배해" 이미 원자화, 개별화된 사회에서도 특히 실업과 고용불안은 더 넓은 관계의 결핍을 초래한다.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나의 삶에 타인이 부재하다는 의미"이며 "고용의 임시성은 노동현장에서의 사회적 관계의 형성 및 노동공동체 형성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노출되지 않은 소위 '미개 사회'에서는 한 사회 공동체가 통째로 빈곤한 상황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의 개인들은 굶어죽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가 "관계의 부재가 빈곤을 야기하는 하나의 원인이라면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은 공동체적 관계의 부활, 나눔과 돌아봄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는 "나눔을 '선한 마음'으로 가능한 도덕적 행위나 개인 차원의 구도행위"로 생각하는 것을 벗어나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나눔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지, 활성화시킬 제도적 장치는 무엇인지, 정규직은 왜 비정규직의 삶에 무심한지, 빈곤 해결과 차별 해소의 방법으로서의 관계 형성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등은 연구가 필요한 과제다." 물론 조 교수의 이 같은 고민이 당장 눈앞에 닥친 경제 위기의 해법은 될 수 없다. 정부는 오직 '가진 사람'의 세금을 깎아주는 데만 혈안이 돼 있고 관계조차 결핍된 이들을 위한 현실적 생존 방안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눔'이라는 화두는 '꿈같은' 얘기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선 학계를 향해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고 요구하는 조 교수의 질문은, 어쩌면 점점 더 각박해지는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구상의 빈곤은 지식의 부재로 인한 것이 아니다. 직접 겪을 때까지 아무리 알려주고 말해도 못 알아듣는 인간 인식 능력의 한계가 하나의 원인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간의 복잡한 욕망 구조,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 때문일 것이다. 교육자로서, 그리고 연구자로서 대학에 있는 나 자신의 이해와 관심, 내가 있는 자리,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거리두기를 하고 냉정하게 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정민 기자, "사라지는 목소리…'착취 당할 기회를 달라'": 조순경 교수 "국가가 빈곤 해결? 그건 환상이다", 프레시안 기사입력 2009-04-14 오후 6:53:07)


 

An Interview with Simone Weil trailer

 

 

ATTENTION / Simone Weil (Paris, le 3 février 1909 - Ashford, le 24 août 1943)

 

L’attention est un concept clé de l’anthropologie philosophique de Simone Weil, depuis les premiers écrits philosophiques (à partir de 1925) jusqu’aux grands textes des années 1942 et 1943. Dans son « autobiographie spirituelle », elle écrit au père Perrin : « À quatorze ans je suis tombée dans un de ces désespoirs sans fond de l'adolescence, et j'ai sérieusement pensé à mourir, à cause de la médiocrité de mes facultés naturelles. (…) Je ne regrettais pas les succès extérieurs, mais de ne pouvoir espérer aucun accès à ce royaume transcendant où les hommes authentiquement grands sont seuls à entrer et où habite la vérité. J'aimais mieux mourir que de vivre sans elle. Après des mois de ténèbres intérieures j'ai eu soudain et pour toujours la certitude que n'importe quel être humain, même si ses facultés naturelles sont presque nulles, pénètre dans ce royaume de la vérité réservée au génie, si seulement il désire la vérité et fait perpétuellement un effort d'attention pour l'atteindre. (…) Plus tard, quand les maux de tête ont fait peser sur le peu de facultés que je possède une paralysie que très vite j'ai supposée probablement définitive, cette même certitude m'a fait persévérer pendant dix ans dans des efforts d'attention que ne soutenait presque aucun espoir de résultats » « Attente de Dieu, pp. 38-39 ; Œuvres, pp. 768-769 ».

La philosophie de Simone Weil n’est pas d’abord une philosophie de la condition humaine (des conditions d’existence), ni une philosophie du travail, ni une critique des idéologies, ni une philosophie de l’histoire, ni une métaphysique du don, ni une doctrine politique et sociale (bien qu’elle soit tout cela), c’est d’abord une interpellation. Un appel adressé à tout homme, quels que soient ses aptitudes intellectuelles, « n'importe quel être humain, dit Simone Weil, même si ces facultés naturelles sont presque nulles ». En cela, elle est restée cartésienne. La philosophie de Simone Weil est fondamentalement une éthique – non pas une loi, car le bien véritable est au-delà de l’opposition entre le bien et le mal, mais un travail de transformation, ou de conversion de soi, qui suppose un effort d’attention.

 

Qu’est-ce que l’attention ? L’attention est un effort, mais n’est pas un effort de la volonté, encore moins une espèce d’effort musculaire, car il n’y a pas d’attention véritable qui ne soit portée par le désir et l’amour. « L'attention est un effort, le plus grand des efforts peut-être, mais c'est un effort négatif » [14]. Il ne s’agit pas de faire quelque chose, mais bien plutôt de se retenir de faire, de renoncer à exercer une emprise, de laisser être autre chose que soi, et c’est pourquoi faire attention est si difficile : « L'attention consiste à suspendre sa pensée, à la laisser disponible, vide et pénétrable à l'objet (…). La pensée doit être vide, en attente, ne rien chercher, mais être prête à recevoir dans sa vérité nue l'objet qui va y pénétrer » [15].

L’attention véritable suppose que je renonce à moi et à « mes » pensées. Renonçant à moi, à mes pensées, à ma perspective, j’accède à la vérité. Car, c’est lorsque « moi » je ne suis pas là que la vérité se manifeste. Lorsque « moi », je laisse des traces, c’est qu’il y a erreur. Prenons un exemple. Dans une opération aussi simple que « 7 + 8 = 15 » : si je pense « 7 + 8 = 16 », c’est moi qui me trompe, il y a trace de ma personne dans l’opération. Mais lorsque je pense « 7 + 8 = 15 », il n’y a pas trace de ma personne, ce n’est pas « moi » qui fais que « 7 + 8 = 15 ». Ainsi, la personne s’efface pour autant que l’intelligence s’exerce. Penser consiste à établir des relations, mettre des termes en rapport, s’extraire de tout ce qui singularise un individu et que Simone Weil nomme « la personne ». L’exercice de l’intelligence est éminemment impersonnel. La vérité et la perfection sont impersonnelles. Penser signifie accéder à l’universel. La vérité n’est pas faite par la pensée ; au contraire, c’est l’âme, lorsqu’elle renonce à la perspective qui est la sienne, c’est-à-dire à ses intérêts, qui s’ouvre à la vérité et au réel : « Tant que l'homme tolère d'avoir l'âme emplie de ses propres pensées, de ses pensées personnelles, il est entièrement soumis jusqu'au plus intime de ses pensées à la contrainte des besoins et au jeu mécanique de la force. S'il croit qu'il en est autrement, il est dans l'erreur. Mais tout change quand, par la vertu d'une véritable attention, il vide son âme pour y laisser pénétrer les pensées de la sagesse éternelle » [16].

[14]↑ Attente de Dieu, p. 92 [관심이란 어떤 노력이고 어쩌면 가장 크다란 노력이다, 그러나 부정적 노력이다.]
[15]↑ Attente de Dieu, pp. 92-93 [관심이란 자기 생각을 중지시키는 것에서 이뤄진다. 즉, 생각이 대상에 대하여 텅빈 상태로 파고들도록 스스로의 처분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은 비워져야 하고 기다리지만 아무것도 찾지 않는, 그러나 스스로가 파악한 사물을 가식없는 진리 속에서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16]↑ L'Enracinement, p. 366 ; Œuvres, p. 1211

 

La vie de l’esprit consiste à faire attention. Et cela à tous les niveaux. Résoudre une équation mathématique ou traduire un vers grec suppose de faire attention. Aimer signifie renoncer à soi et faire attention à autre chose que soi. Cela vaut inséparablement pour l’amour de Dieu et pour l’amour du prochain. Qu’est-ce que prier, sinon faire attention à celui qui se donne, qu’est-ce qu’aimer, sinon faire attention : « Ce n'est pas seulement l'amour de Dieu qui a pour substance l'attention. L'amour du prochain, dont nous savons que c'est le même amour, est fait de la même substance. Les malheureux n'ont pas besoin d'autre chose en ce monde que d'hommes capables de faire attention à eux. La capacité de faire attention à un malheureux est chose très rare, très difficile (…). Presque tous ceux qui croient avoir cette capacité ne l'ont pas. La chaleur, l'élan du cœur, la pitié n'y suffisent pas. La plénitude de l'amour du prochain, c'est (…) savoir que le malheureux existe, non pas comme unité dans une collection, non pas comme un exemplaire de la catégorie sociale étiquetée ‘malheureux’, mais en tant qu'homme, exactement semblable à nous, qui a été un jour frappé et marqué d'une marque inimitable par le malheur. Pour cela il est suffisant, mais indispensable, de savoir poser sur lui un certain regard » [17].

 

L’attention est une disponibilité, une orientation de la pensée qui écarte toutes les pensées particulières (personnelles), qui fait le vide et attend. Car le bien réel ne peut venir que du dehors. Nous ne pouvons pas fabriquer quelque chose qui soit meilleur que nous. Ainsi, l’effort tendu véritablement vers le bien ne doit jamais aboutir et se termine en désespoir. C’est alors, lorsque nous n’attendons plus rien de notre attente que, du dehors, don gratuit, merveilleuse surprise, vient le don. La vérité n’est pas essentiellement l’objet d’un discours, mais d’une expérience qui suppose une transformation à la racine même de notre sensibilité : « Nous sommes dans l’irréalité, dans le rêve. Renoncer à notre situation centrale imaginaire, y renoncer non seulement par l’intelligence, mais aussi dans la partie imaginative de l’âme, c’est s’éveiller au réel, à l’éternel, voir la vraie lumière, entendre le vrai silence » [18a].

 

Il faut « se vider de sa fausse divinité, se nier soi-même, renoncer à être en imagination le centre du monde, discerner tous les points du monde comme étant des centres au même titre et le véritable centre comme étant hors du monde »[18b]. C’est à un décentrement de soi qu’appelle Simone Weil. Renoncer à soi-même, renoncer à toutes nos idoles, que ce soit notre « moi » ou notre prestige social, pour consentir au réel et désirer un bien qui n’est pas de ce monde. Cette manière de vivre, Simone Weil n’a cessé de l’indiquer par sa vie et son œuvre, de multiples façons et en s’y reprenant à chaque fois. Peu avant de mourir, elle confie à Maurice Schumann : « En mettant à part ce qu’il peut m’être accordé de faire pour le bien d’autres êtres humains, pour moi personnellement la vie n’a pas d’autre sens, et n’a jamais eu au fond d’autre sens, que l’attente de la vérité »[19].

[17] ↑ Attente de Dieu, pp. 96-97
[18] ↑ a  b  Attente de Dieu, p. 148 [a. 우리는 비실재 속에, 꿈 속에 있다. 우리가 상상적 자기중심성을 포기한다는 것, 단순히 지적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영혼의 창발적 부분까지도 포기한다는 것, 그것은 실재에, 영원에, 아니 차라리 참된 여명에 눈뜨는 것이고 참된 침묵(무언의 진리)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b.(나의 생각이) 스스로의 거짓 신성성을 버리고, 스스로를 부정하고,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상상을 포기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똑같은 자격으로 중심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세상의 바깥에 있는 것과 같은 진짜 중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19] ↑ Ecrits de Londres, p. 213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이 내게 합당할 지에 대해서 잠시 접어둔다면, 개인적으로 내게 있어서 삶이란 '진리에 대한 기대' 외의 다른 의미를, 아니 심연에서는 그 어떤 다른 의미도 갖지 않는다.]

 

Dernière modification de cette page le 29 mars 2009 à 15:53.
Wikipedia® http://fr.wikipedia.org/wiki/Simone_Weil#cite_ref-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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