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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콜론타이 관련

콜론타이에게 자유결합은 '성적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자유결합 사상과 중간계급 페미니스트들의 자유결합 사상은 구별되는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자유결합의 부르주아적 성격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다. 사실 자유결합 역시 '성적 위기'에 대한 중간계급의 대응이었다. 죽을 때까지 해체될 수 없는 관습적 결혼을 이혼의 자유가 허용되는 시민적 결혼으로 대체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부르주아적 가족의 안정성의 토대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여성들은 가족생활의 부담에서 해방되었지만, 자녀 양육의 부담은 홀로 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공산주의 공동체만이 가족을 폐지할 수 있는 원리로 이해된 것은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

 

사회변혁의 전제 없이 성해방을 꿈꾸는 부르주아적자유결합은 오로지 육체적 욕망에만 따르는 '날개 없는 사랑'으로 타락할 위험이 있었다. 노동자들 사이의 동지적 사랑은 이러한 위험성을 공동체 내에서 통제해야 했고, 이러한 새로운 도덕이 노동 공동체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발전시키는 원리가 되어야 했다. 또한 이러한 윤리가 공산주의적 토대에 근거한 사회적 관계의 재구성 과정에서 출현해야 했다. 이것이 콜론타이가 구상한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였다.

 

콜론타이가 사랑의 문제에 특히 주목한 것은 여성 억압의 원인이 단지 경제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차원에도 걸쳐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활동으로부터 여성의 소외는 여성으로 하여금 사랑만을 욕구하고 갈망하게 만들었고,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방해했다.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여성조차 사랑에 종속되는 상황이 발생할수 있었다. 사랑을 제외하고 여성에게 의미있는 일이 주어지지 않았던 과거 역사의 부담에서 여성이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소외에 대한 해답은 사랑과 일을 결합할 수 있는 여성의 능력과 이러한 여성이 가능하게끔 남성을 교육하는 것이다.

 

콜론타이는 제프리즈처럼 독신여성을 레즈비언으로 특권화하지 않고서도, 독신여성을 신여성의 특징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 독신여성은 콜론타이가 발견한 자유결합의 주인공이었다. 콜론타이에 의하면, 신여성은 자본주의적 발전이 가져온 대중적 현상이지만 이를 초과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신여성이 사적 가족경제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필수적인 노동을 행하는 '노동 단위'이기 때문이었다. 노동에 대한 새로운 태도로 인해 신여성은 '날개 달린 에로스'를 수용할 수 있었다. 신여성은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성적 욕망의 만족이 내면의 도덕적 의무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어야 했다.

 

 

- 이미경, "1세대 페미니즘", [페미니즘 역사의 재구성: 가족과 성욕을 둘러싼 쟁점들] 中 137-9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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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었던 고미숙의 [호모 에로스]와 이 구절이 서로 대화하고 있다. ㅋㅋㅋ

이 정도면 나도 독서의 경지에 올랐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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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가 대체 뭘 잘못했나?

사실 난 미네르바가 썼다는 글을 한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대충 요새 나오는 증시나 환율과 같은 경제위기와 관련된 글들이 넘쳐나고 있고 딱히 그의 글이 엄청나게 대단한 분석을 했을 거라는 기대같은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항간을 떠도는 온갖 '위기설'들은 굳이 미네르바와 같은 네티즌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겨레, 경향 같은 신문만 조금 봐도 다들 하는 얘기 아닌가? 게다가 루비니 같은 미국 교수들이 시나리오까지 제시하면서 세계경제 대공황을 예견하는데, 내일이면 당장 정부에서 달러매수를 금지할 것이라는 둥의 이야기가 뭐 그렇게 대수인가 싶었다. 적어도 나는...

 

그런데 그의 글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사실 나 같이 돈 한푼 없고 그래서 어디에 투자한 돈도 없는 사람들은 정부가 내놓는 각종 단기 경기부양책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다. (그런 만큼 별 기대도 안한다.) 그러나 당장 목돈을 주식이나 달러에 투자해서 mbn뉴스에 나오는 숫자놀이에 눈을 처박고 있는 사람들은 사정이 다르겠지... 또 자식 중에 누군가를 어학연수나 유학을 보내서 환율에 똥줄 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그런 사람들에겐 "조만간 정부가 달러매수 금지를 내릴테니, 빨리 달러를 준비해 두셔야 할 겁니다." 등의 경고는 "곧 산불이 날 것이니 대피하십시오" 정도로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미네르바가 뭘 잘못했는가? 정부는 그가 뭐 양치기 소년 쯤 된다고 생각하나? 자기가 하는 말 빼고는 다 뻥이라고 생각하는 명박이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지. 걔네들 생각처럼 아직 늑대가 나타나진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쪽 산 너머에서 늑대가 때거지로 달려들고 있는건지 아닌지 너네도 모르잖아. 혹시 모를 불안에 대비하라는 것이 허위사실 유포면, 97년 IM위기 직전에 캉드쉬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국엔 경제위기가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조중동 패거리들은 대체 왜 가만 냅두냔 말이다. 진짜 위기가 닥쳤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위기 아니라고 씨부려서 위기에 대한 대처도 못하게 만든 것이 더 큰 허위사실 유포 아니냐?

 

그리고 방금 전에 동아일보 기사 보니까, 전여옥이가 또 한 건 했더라. 미네르바가 신정아랑 비슷하덴다. 전문대 출신 주제에 명문대 출신에 금융회사에서 근무한 적 있다고 뻥친게 학력위조해서 교수된 신정아랑 비슷하다는 거다. 이런 정신나간 입방정을 보게나... 그렇게 해서 신정아는 교수가 되서 '부당이득'을 취했지만, 미네르바라는 사람은 30세의 무직이다. 그가 가짜 이력을 내세워서 얻은 '이득'(??)은 겨우 인터넷 상에서 '경제대통령'칭호를 받은 것 뿐이다. 그것도 명예라면 명예인가? 키보드 워리어의 제왕... ㅠ.ㅠ

 

사족이긴 하지만 덧붙이자면, 어떤 면에선 미네르바의 전문대 졸 학력은 지탄받을 일이 아니라 대단하다고 칭찬받아야 할 일 아닌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식민지 주구들이 판치는 이 나라 경제학 판도에서 일반인들이 경제학에 관한 기초적 상식만이라도 갖추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기껏해야 주식시세 정도 따지는 수준이지... 그런데 그는 혼자서 맨큐 경제학을 독학했단다. 나도 대학 2학년때 교양과목으로 경제학 원론 시간에 맨큐를 가지고 공부했는데, 너무 재미없어서 맨날 수업시간에 도망다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성적은 C를 받았다. ㅋㅋㅋㅋ 보수 언론들은 어려서부터 경제  교육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그렇게 떠들어 대면서 이렇게 혼자서 열심히 경제를 독학한 사람에게 무슨 자격으로 침을 뱉나? 그가 완전 헛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여전히 한국 경제에 논란이 되는 사안을 나름대로의 시선으로 날카롭게 짚어낸 것 뿐인데...

 

아, 한 마디만 더하면... 작년에 SERI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기업 부설 경제연구기관들이 경기예측이 거의 빗나갔다고 한다. 주식시장 분석은 거의 0점에 가까웠다. 이거 완전 국민들 상대로 한 대형 사기극 아닌가? 게다가 이들은 전문대 출신도 아니고 다들 한가닥 하는 대학들에서 경제학 박사까지 하신 분들 아닌가? 검찰은 빨리 이들부터 잡아들이길 바란다.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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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경성 트로이카 - 안재성

 

 

트로이카.

러시아 말로 '삼두마차'라는 뜻이다.

세 마리의 말이 동시에 같은 힘으로 수레를 끌면서 가야하는 구조.

이것이 바로 이재유가 1930년대 경성 일대에서 노동운동을 이끌면서 만들어내고자 했던 이상적인 조직의 형태, 바로 '경성 트로이카'의 모습이다.

 

요새 어쩌다보니 해방전후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이책 저책 뒤져보고 있던 차였는데,

안재성의 멋진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 우리집에서 버스타고 10여분을 달리면 나오는 도서관에 이 책이 있었고, 나와 경성 트로이카의 만남은 이렇게 손끝의 파르르한 떨림을 느끼면서 시작되었다. ^^;; (이런 책을 가까운 공공 도서관에서 이리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어찌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사실 시립, 구립 도서관을 조금만 뒤져보면 이런 보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사실 나는 이 책 제목만 보고 이 책이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소설은 아니라도... 아, 그럼 이 책은 어떤 부류로 넣어야 하나?

단순한 역사책이라고 부르기에는 '역사책'이라는 말이 너무 투박하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핵심 인물로 다루고 있는 이재유라는 인물의 평전인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그에 대한 평전이라고 하기에는 동덕여고 출신들의 운동사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 이 책은 남북한 어디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그래서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불굴의 투사들에 대한 정당한 기록, 바로 진정한 역사 다큐멘터리다. 특정인물에 대한 평전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영웅사관 따위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그 당시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의 고뇌와 열정의 숨결들을 세심하게 포착해 낸, 역사실록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든 첫 번째 느낌은 무엇보다 경성 트로이카의 구성원들 모두 결과적으로 매우 불행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남한에서는 물론이고, 북한에서조차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현상, 김삼룡같이 남한 땅에서 죽임을 당해 북한에선 혁명열사로 추앙받게 된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이들이 지도했던 남로당도 북한 노동당에게는 외면을 당했고, 그렇게 염원하던 공산주의가 북한에서는 실제 너무나 강압적이고 연고주의의 고루한 것으로  서서히 드러나자 낙담하고 운동을 포기한 이들도 있고, 그 이전에 일본 경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트로이카의 우두머리 이재유 등이 있다.

 

나는 어쩌면 우리 현대사에서 이들의 존재가 잊혀진 것이 사회주의 운동의 크나큰 비극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재유를 비롯한 트로이카의 일원들은 철저하게 대중의 힘의 근거한 사회주의 운동을 도모했고, 현장에 기초하지 않은 어설픈 이론주의로 대중을 계몽하려 하지 않았다. 때론 이런 입장 때문에 국제선을 주장하는 다른 사회주의 그룹이었던 권영태 그룹과 마찰을 빚기도 했으며, 이재유는 아직 초기단계에 있는 경성의 노동운동을 지도해야 한다는 이유로, 원산으로 옮겨 이주하 등과 노동운동을 함께하라는 코민테른의 명령도 거절한다. 경성 트로이카는 그야말로 일제치하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자주파 사회주의자'들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에 비하면 사실 김일성 등이 말하는 '자주'는 얼마나 빈약하기 그지 없는가? 그는 압록강 인근에서 무장투쟁을 하다가 탄압이 심해지자 소련으로 쫓겨가 적군부대 밑에서 수십명의 유격대만을 거느리고 활동했을 뿐이다. 게다가 해방 이후 소련의 지시에 따라 국내 여론을 무시한 채 진행된 신탁통치 지지운동은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국내 좌파세력의 괴멸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면 경성 트로이카의 주축 인물이었던 김상룡(당시 남로당 책임지도자)은 국내 인민의 여론을 감안하여 찬탁운동에 신중한 뜻을 내비쳤다.

 

그에 비하면 이재유의 트로이카는 아무리 심한 탄압에도 조선의 혁명은 국내 노동자 인민의 힘으로 이뤄야 한다는 일념으로 경성지역에서 연쇄총파업을 일으키는 등 엄청난 '자주적' 성과들을 만들어 냈다. 어쩌면 김일성 등의 해외파가 이재유 사후에 남은 국내파들을 압도한 것이 우리 역사의 엄청난 비극이지 않나 생각한다.

 

또한 이들은 사회주의는 철저히 대중운동에 기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권영태 그룹과의 통합논의 과정에서도 상부 단위의 음모적 논의를 통한 통합이 아니라, 공동의 대중투쟁 과정을 통한 사상적, 행동적 통일을 꾀했다.

 

2009년 벽두에 80년 전의 혁명가들의 족적을 따라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 경찰의 미행을 피해 신출귀몰해대는 식민지 혁명가들의 장엄한 삶의 파노라마를 보면서 때론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의 역사를 통해 다시 21세기 좌파의 새출발을 상상해 본다. 어차피 이젠 코민테른같은 국제적 지도부도 없다. 다시 이 땅에 진정한 '자주적 사회주의'가 꽃피울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트로이카의 마차를 끌 말들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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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중에서...

".... 처음엔  강학과 학강으로서 도저히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그녀를 설득해보려고 명자의 자취방으로  찾아가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한 학강이 아니라 한 여성노동자를 거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어..... 무슨 말인지 알겠니?"

동윤의 시선이 집요하게 민수에게 쏟아져내렸다. 동윤은 손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한모금 빨고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나는 문득 너와 또 우리 강학들을 떠올렸어. 만일 그들이 내게 이런 고백을 해왔더라면 어땠을까. 강학과 강학으로서 물론 이런 식으로밖에 처리하지 못했을거야. 그러나 .... 여지는 남겨두었을거야. 잊을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다시 새로운 관계로 시작될 수 있다는 여지... 명자의 집을 나서면서 나는 내 마음속에 그 여지가 없음을 알았어.... 최소한 명자가 내게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그애가 나를 동등한 사람으로 봤다는 것의 반증이야. 그러나 나는 그렇짐 ㅗㅅ했어. 나는 그 아이를 한 학강으로만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지. 그러나 명자는 달랐던거야. 그애는 날 인간으로서 사랑했고, 그러나 내가 강학이었기에 떠났어."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네 자신을 괴롭히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텐데. 그런 일에는 늘 환상이나 계층 상승욕구 같은 것이 작용한다는 건 너도 알잖아?"

".... 환상? 계층 상승욕구.... 아니야 민수야. 명자는 적어도 내게 환상을 갖지는 않았어. 그애의 편지 귀절 생각나니? 제가 끝까지 선생님을 사랑했더라면 선생님의 일대기에 오점을 남겨놓을 뻔했다고.... 그애는 날 정확하게 바라본 것인지도 몰라.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말이야."

"그럼 명자가 계속 남아서 널 사랑했으면 넌 정말 그걸 네 인생의 오점으로 생각했을 거란 말이니?"

"아니 그런 거하고는 달라."

동윤은 일어나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렇듯 불안하고 괴로워하는 동윤의 모습을 민수는 처음 보았다. 알듯 모를듯 동윤이 가지고 있는 저 소용돌이치는 어움의 깊이를 민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 민수야 넌 기꺼이 민중이 될 수 있겠니? .... 기꺼이 노동자가 될 자신이 있니? 민중과 선뜻 결혼할 수 있겠니?"

민수를 돌아보며 동윤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민수는 갑작스런 동윤의 질문에 대답 대신 입술을 앙다문다.

"민수야. 민중과 함께하기 위해, 그들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이 곳에 모였다.... 아까 네가 물렁한 벽이라고 표현했던가? 그걸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닐까?"

 

- 82-8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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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내내 말이 없던 연순이 고개글 들고 조용한 목소리로 민수를 불렀다.

"응?"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뭔데?"

".... 왜 강학들은 .... 우리에게 공부를 가르쳐줄까요? 돈도 못 버는 일인데.... 또 고생까지 해가면서.... 제가 본 대학생들은 옷도 화려하게 입고 다니던데 .... 이상해요."

"그건... 그렇게 해야만이 스스로 또 함께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야."

연순이 의하한 눈초리로 민수를 올려다본다.

"우린 서로 모르는 게 참 많다 그치?"

미소를 지으려 애썼지만 민수의 목소리는 서글프게 울렸다.

"행, 복, 해, 진, 다, 구요?"

낱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연순은 한자한자 힘주며 되물었다.

"그래 행복해지기 위해서지...."

민수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작았다. 언젠가 민수는 동윤에게 이미 행복해질 수 없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따뜻한 집안에서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바와 행하는 바의 괴리 대문에 심한 괴로움을 동반한 것이었다. 그래서 집을 나왔을 때 그리고는 산꼭대기에서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을 때 민수는 이제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적어도 예전의 그 미칠 것 같은 분열은 없었다. 그러나 대신 가난과 추위와 궁핍감이 몰려들었다. 그것들은 민수의 머리채를 휘업잡기도 하고 민수를 어두운 방구석에 내팽개치면서 그녀에게 속삭여대곤 했다. 자 이제 이런 철부지 방랑은 그만두는 것이 어때? 집에 가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부모님들을 일단 안심시키고 나서, 졸업이라도 한 뒤에.....

연순은 보도 블럭들을 비집고 나온 민들레를 바라본다. 가로등 아래 민들레의 노란 얼굴이 창백하게 떨고 있다. 왜 하필 저런 곳에서 피어나야 했을까. 연순은 문득 가슴이 아프다.

".... 선생님 요즘은 모순이라든가 사회의 나쁜 점들이 제게 아주 뚜렷하게 느껴져요. 예전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들, 제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저는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 것이 두려워요."

 

 

......

 

 

-90-91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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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혜섭의 곁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지섭은 재깍이는 시계소리와 싸우고 있었다. 이미 1차 약속 시간은 지나고 2차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어서서 이 병실을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누나의 희고 가느다란, 상처투성이 손을 한번 잡아보고 그리고 조용히 일어서서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섭은 일어설 수 없었다. 압제자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은 막상 그것이 구체적으로 다가왔을 대 공포어린 분노로 변했고 이윽고는 공포만이 남았다. 끝없이 바지가랑이를 잡아당기는 이 가난. 제가 여지껏 가졌던 분노들이 얼마나 관념적이었는가를 깨달으면서 지섭은 피투성이 붉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꼼작 않고 그 밤을 지샜다. 검붉은 해의 빛살이 닿을 때마다 그의 앞에 놓인 세상이 유리처럼 와르를 무너지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유리조각 위를 맨발로 딛는 것처럼 아픔만이 느껴졌다.

 

- 1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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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빛의 제국> 중에서...

남자는 왼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찌그러뜨려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그리고 다시 동사무소 안으로 돌아갔다. 모든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연료통 밑바닥에 가라앉은 몇 방울의 냉소를 연료 삼아 겨우 굴러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권태가 걸음걸음 바짓자락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공작원반, 흔히 130연락소라 부르는 그곳을 막 떠나온 기영은 그의 허무주의적 태도가 조금 놀라웠다. 이런 적지에서, 전두환 역도가 광주에서 수천의 인민들을 백주에 학살하는 땅에서 긴장도 적개심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와 돌이켜 보면 권태와 허무야말로 이 사회의 특질이었다. 권태는 무차별적으로 퍼져 있었다. 기영은 권태가 무엇인지는 알았으나 그것을 실제로 목도하기는 처음이었다. 그가 떠나온 사회에서 권태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에나 등장하는 추상적 개념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권태는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사회의 권태는 차라리 무류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적절한 동기부여가 부족한 상태라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어떤 자극만 주어진다면 금세 사라질 가볍고 허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맞닥뜨린 자본주의적 권태에는 무게와 질량이 있었다. 그것은 삶을 짓누르고 질식시키는 유독 가스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생겼다. 가끔 어떤 종류의 인간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아, 저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 라는 원초적인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경로로 포섭되었는지 모를 그 동사무소 직원이야말로 그런 사람이었다. 권태와 우울, 허무와 냉소, 후줄근한 옷차림과 매력 없는 용모가 어우러진, 잠시라도 함께 있기 불편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 전혀 엉뚱한 자리에서 기영은 그와 다시 마주쳤다. 1999년 여름. 그는 붉은 망토를 두르고 청량리역에서 자그은 나무 궤짝 위에 올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망토에는 검은 십자가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금박으로 경계를 삼았가 때문에 멀리서 보면 대학 응원단장의 복장처럼 보였다. 이마와 뺨으로 쉴새없이 땀이 흘러내렸고, 검고 푸른 파리들이 윙윙대며 그의 머리 주변을 맴돌았다. 기영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 달라져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말랐고 눈빛은 형형했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종말이 다가왔다고 외쳤다. 권태에 찌들어 있던 고정간첩은 어떻게 종말론자가 되었을까? 정말 되기는 된 것일까? 창녀와 경찰, 대학생과 노동자가 엇갈려 오가는 광장에 멈춰 서서 그는 광신도가 되어버린 고정간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영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영이 다가가자 무심한 얼굴로 종말론 안내책자를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이 발췌되어 조악하게 편집되어 있었다. 기영은 물었다.
"혹시 저 모르시겠습니까?"
남자는 기영을 쏘아보았다. 그러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로 몸을 돌렸다. 기영은 그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그가 짜증스런 얼굴로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왜? 내가 미친놈 같소?"
"그게 아니고 예전에 동부이촌동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만."
남자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랬다 한들 그게 무슨 송용이오? 다 소용없소. 그 책자를 보시오. 우리는 곧 돌려올림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날이 멀지 않았소."
약간은 버림받은 기분이 되어 광장을 떠나려 핮 ㅏ남자는 잰걸음으로 기영을 따라붙었다.
"실은 당신이 누군지 알아."
기영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상관없어. 난 이 세계의 비밀을 알았으니까. 그 전까지는 사는게 그저 답답하고 그래, 막막하기만 했지. 그렇지만 성령을 영접하는 순간 난 알았어. 지금까지의 인생은 모두 헛거였다는 걸. 속았던 거지. 어리석었던 거야. 이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낯짝들을 보라구. 행복한 얼굴이 있나? 다 벌버둥을 치며 꿀꿀이 돼지처럼 하루하루 사는 거야. 이 섹{가 왜 존재하는가를 모르기 때문이야. 모르니까 그냥 걸어가는 거야. 그걸 알면 더 이상 방활항 필요가 없어.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신대로 걸어가면 돼."
그의 장광설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기영은 물었다.
"정말 올해가 가기 전에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올라가고, 그들이 몰던 차는 운전자를 잃은 채 고가도로 아래로 처박히고, 남은 자들은 차라리 죽기를 바라며 고통 속으로 울부짖게 된단 말입니가?"
"인간으로 태어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경험해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습니까?"
붉은 망토를 입은 남자는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작고 못생긴 쪽박귀였다.
"너는 꼭 네 눈으로 보아야만 믿느냐? 이 귀로 똑똑히 들었다구. 주님께서 알러주셨어. 당신도 귀를 기울여봐.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사내는 다시 상자로 올라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기영은 광장을 떠났다. 물론 그해 말, 어디에서도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멀쩡했다. 서른세 명의 시민들이 보신각 종을 치는 가운데 새해가 밝았다. 연도 표시방식이 네 자리로 바뀌었다고 비행기가 추락하지도 않았고 기차가 탈선하지도 않았다. 그는 전국 백예순여섯 개 교회에서 종말을 기원하는 집회가 열렸다는 뉴스를 보며 붉은 망토의 사내를 떠올렸다. 혁명과 종말, 양자에게 모두 배신당한 사내와 전국의 백예순여섯 개 교회에 모였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종말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렇게 명확해졌는데 왜 아무도 자살하지 않을까? 종말이 이렇게 간단히 유예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잠시 궁금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오래 전 일이었다. 광화문의 대형 빌딩마다 'Y2K 문제 완벽 대비' 같은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자가발전기와 생필품을 장만하여 집에 틀어박힌 이들이 전세계적으로 수백만에 달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두 잊어버렸다. 가동을 중단한 핵발전소도 없었고 인공위성의 오작동으로 핵미살이니 날아가지도 않았다. 물론 그 법석 덕분에 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남한에서만 일조원이 투입됐다니까 미국이나 유럽에선 더했을 게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기영은 인간을 움직이는 두 가지 심리적 축을 두려움과 욕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세기말은 단연 두려움이 욕망을 압도했던 시기였다. 전쟁도, 전염병도, 폭동도 아닌, 난생처음 맞닥뜨린 기호에 대한 두려움. 2로 시작하는 네 자리의 숫자가 우리가 미처 짐작하지 못한 그 어떤 추상의 메커니즘을 통해 세계를 아수라장으로 만들리라는, 한편 과학적으로 들리지만 그 본질은 샤머니즘에 가까운 기이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그게 기영에게는 전혀 와 닿지를 않았다. 남의 주민등록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복잡한 암호의 세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기독교적 세계관과 무관하게 자랐기 때문일까. 어쨌든 만약 재난과 파괴의 신이라는 게정말 있다면 그런 식으로 등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온갖 난리법석을 떨며 요란스레 예정된 날짜에 나타나 그렇듯 맥 빠진 축제를 벌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진정한 재난은 인간의 상상력 저 너머에 서, 맥베스 성을 공격하는 버넘의 숲처럼 진군해올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이날 아침 홀연 그의 필립스 액정 모니터 화면으로 떠오른 바쇼의 하이쿠처럼.

 

- 79-84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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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산적이 단 일 주일만 마을을 다스린다 하자. 그놈들은 아마 하루도 안 돼 마을을 거덜내고 말 것이여. 그러나 일 년을 다스린다면 추수 때까지는 기다리겠고 사람들도 살려두겠지. 만약 십 년을 다스린다면 계획도 세울 거여. 다 굶어 죽으면 안 된까 밥과 옷도 주면서 다스리겠지. 삼십 년을 다스린다면 애를 낳느냐 안 낳느냐까지 신경을 쓸 거다. 삼십 년을 다스리는 산적, 고것이 바로 국가란 것이다."

 

- 1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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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의 만화에서 따온 까치라는 가명을 쓰던 더벅머리 친구와 역시 주둥이라는 가명을 쓰는 친구, 그리고 망치라는 가명을 쓰던 기영, 이렇게 셋이 어느 여름날 인천 월미도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소주와 바닷바람에 취해 바닷가 벤치에 축 늘어져 있던 까치가 문득 물었다.

"너희들은 혁명의 그날이 올 것 같냐?"

까치의 형은 까치보다 먼저 학생운동에 투신한 투철한 활동가였고 소수파인  PD의 핵심적 이론가 중 한 명이었는데 고등학생인 까치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가서 뭐 할 거냐, 부르주아의 개가 될 거냐, 그럴 바엔 차라리 공단에 바로 들어가서 노동운동을 해라. 날 봐라, 대학에 들어갔지만 곧 때려치우고 공장에서 활동하는데 너무 늦게 온 것이 늘 후회스럽다, 너는 일 년이라도 빨리 노동자가 되어 나와 같은 죄책감 없이 계급투쟁에 몸을 던지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책상도 없이 온 가족이 공유하는 단칸방에서 어렸을 때부터 어깨를 맞대가 함께 살아온 까치에게 형의 말은 무시하기 어려운 압박이었다. 까치의 형은 그의 교과서를 빼앗고 책상 대용으로 쓰던 사과궤짝도 갖다버렸다. 흥, 자기만 대학 가고 나는 가지 말라는 거냐. 대학을 다니다 그만두는 거하고 처음부터 안 가는 거하고 어떻게 같냐? 까치는 반발심으로 형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몰래,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합격 했다. 오히려 평소 성적보다 더 월등한 점수를 받았지만 그 역시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자기 형과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강의실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단지 형과는 다른 정파를 택해 NL이 되었고 곧 주체사상을 '사상원리'로 받아들였다.

주둥이가 까치에게 말했다.

"혁명의 그날이라.... 언젠가 오지 않겠냐?"

그러자 까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난 말이야,  실은 혁명의 그날이 올까봐 두려워."

"왜?"

".... 내가 좋아하는 만화방도 못 가고, 전자오락도 못 하고."

맨정이었다면 정색을 하고 따졌을 주둥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못 하겠지."

"미제를 축출하고 독재정권 타도하고 반제반봉건체제를 깨부순다 치자. 그래서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그런 세상이 온다 치자. 그 다음엔 뭘 하지?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

기영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아침 일곱시, 사이렌 소리와 함ㄲ ㅔ일어나 일제히 직장으로출근하고, 일요일은 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이 있을 때만 쉬고, 매일 밤 함께 모여서 하루의 일과를 총화하는 세상을 너희는 모를 것이다. 물론 거기서도 삶의 ㅅ즐거움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공터에서 배드민턴도 치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타고 친구들과 축구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골방에 틀어박혀 포르노를 보거나 이어폰으로 이글스를 듣거나 잔혹한 일본 만화를 볼 수는 없다.

주둥이가 옆에 앉아 있는 기영의 존재를 문득 의식하고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넌 어때?"

"글쎄, 아마 그런 건 못 하겠지. 까치 말대로 지루하긴 할 거야. 그렇지만 거기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 않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기영은 월미도에서 나눈 그날의 대화들이 생각나곤 했다. 바닷바람에선 자반고등어 냄새가 풍겼다. 어깨를 겯고 노래를 부르며 비틀거리던 휴가 장병들, 입술을 부비고 서로의 속살을 더듬는 연인들 사이에서 그들 셋은 오지도 않을 혁명 이후를 걱정하고 있었다. 결국 어린 혁명가들이 남몰래 걱정하던 ㅎ'혁명의 그날'은 오지 않았다. 대신 국제통화기금이 진주해 1945년 미군정이 그랬던 것처럼 남한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기영이 처음 보았던 팔십년대의 남한은 지금으 ㅣ남한보다 차라리 당시의 북한과 더 비슷했다고 할 수 있었다. 직장들은 대부분 평생고용을 보장했고 대학생들은 취업 걱정 같은 것은 거의 하지 않았다. 수입 대리석으로 로비를 장식한 은행과 대기업은 영원불멸할 것 처럼 보였다. 자식은 부모를 봉양했고 부모는 자식에게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체육관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선출되었으며 야당은 유명무실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경 너머의 세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는 북한의 구호는 팔십년대의 남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자원을 배분함에 있어 시장원리보다는 국가의 결정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공무원의 부패가 자심했고, 뇌물과 협잡이 사방에서 판을 쳤다는 점도 북한과 비슷한 점이었다. 고등학생, 대학생 할 것 없이 학도호국단으로 편성되어 일 주일에 며칠은 교련복을 입고 등교하고 한 달에 한 번은 온 국민이 민방위 훈련을 하느라 법석을 떠는 것도 북한과 다르지 않았다. 공습에 대비한 등화관제 훈련으로 서울과 평양 모두 몇 달에 헌 번은 캄캄한 암흑세상으로 변해버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남한은 팔십년대의 남한과 비슷한 점이 거의 없는,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나라였고, 당연히 북한과도 전혀 다른 종류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북한보다는 싱가포르나 프랑스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결혼한 부부들은 아이를 낳지 않고, 일 인당 국민소득은 이만 덜러에 육박하고, 은행과 대기업의 운명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매년 수십만 명의 외국인이 결혼과 취업을 위해 입국하고, 영어권 국가에서 공부하려는 초등학생들이 날마다 인천공항을 떠난다. 부산에서는 러시아제 권총이 팔리고, 인터넷으로 섹스 파트너를 찾고, 휴대폰으로 동계올림픽의 생중계를 보고, 페덱스가  샌프란시스코 산 엑스터시를 운반하고, 온 국민의 반 이상이 적립식 펀드에 투자하는 사회였다. 최고 지도자는 풍자를 감당할 카리스마도 없는 한갓 비아냥의 대상일 뿐이었고, 노동자 계급을 대표한다는 정당이 해방 이후 최초로 의회에 진출했다. 만약 기영이 처음 남파되었던 1984년에 누군가 이십 년 후 남한이 이런 사회로 변모하리라 예상했다면 아마 미친놈이란 소리를 들었을 것이었다.

 

- 196-199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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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파업] MB언론악법 당장 철회!!

나도 함께 하겠소...

덤으로 일제고사도 그만 뒀으면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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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교과서 논쟁, 기대 이하다...

요즘 나는 넘쳐나는 시간을 이용해 그 동안 못했던 공부들을 차근차근 하고 있는 중이다. 그 중 요즘 가장 관심을 많이 두고 있는 분야가 바로 '한국 근현대사'다. 역사공부가 모든 운동에 있어서 기본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있고, 게다가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변변한 역사 세미나 한번 한 적이 없어서 더욱 역사 지식에 배가 고팠던 터였다.

 

그런데 요즘 서울시 교육청의 고3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현대사 특강, 교과부의 현대사 교과서 수정 지시 등을 보면서 내 공부에 가속도가 붙었다. 하긴 지금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공부'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MBC 100분토론에서 했던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논란에 대한 토론을 인터넷 재방송을 통해 보게 되었다. 그런데... 100분토론을 통해 통쾌함과 환희를 느껴 본 적은 지난 광우병 논란 때 송기호 변호사, 우석균 정책실장 등의 달변을 통해서 받았던 것 외에는 한 번도 없었지만, 근현대사 교과서 관련 토론은 정말 기대 이하였다. 물론 미천한 지식이기는 하나 내가 최근에 공부한 현대사 지식으로 평가하자면, '기대 이하'라기 보다는 '수준 이하'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토론자로 나온 사람은 총 4명이었지만, 내 눈에는 거의 2명의 토론만 들어왔다. 한나라당의 신지호와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 책임지필자라는 교원대 교수.

 

당연히 내가 '기대 이하'라고 지목한 사람은 후자다. 물론 신지호야 골수 운동권 출신으로서 후일에 뉴라이트로 전향하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도 이력이 있는, 좌우파의 논리를 다 꿰고 있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나라당의 브레인에다 달변가이니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문제삼는 것은 신지호에게 밀린 '말빨'이 아니다. 토론의 구도 설정 자체가 틀려먹었다.

 

교수님은 줄곧 교과서 수정 지시의 비민주성, 절차 무시, 독단성만을 물고 늘어졌다. 이에 대해 신지호 (그리고 함께 나온 교과부 담당자)는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참여정부 때에도 비슷한 수정 지시가  있었는데 그 때에는 왜 문제제기를 안하다가 이제와서 난리냐고 맞받아 쳤다.

 

아, 이 따구로 토론하는데 누가 관심을 가져주겠나? 교과서 수정 지시가 언제 부터 시작되었고, 공문을 몇차례를 보냈으며, 언론에서 처음으로 문제제기가 된 적은 언제이며, 이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어땠으며... 이런건 당사자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문제 아닌가? 또한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정부는 나름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수정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설령 그 과정에서 규정을 벗어난 행위를 했다고 한들, 뭐 문제 되겠는가? 2MB정권이 하는일이 다 그런데... 사실 이제 절차상의 비민주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지난 광우병 사태 이후 정권 차원에서도 이골이 난 일이라 아주 내성이 생긴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백이면 백 헛수고로 돌아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지호가 아주 민감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치고 나오기 시작한다.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헌법정신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다." 허나... 그런데...

 

내가 재미없어서 중간도 채 보지 않고 꺼버려서 못봤는지는 몰라도, 이 교수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있는 답변 한마디를 못하신다. 계속 반복하는 것이, 이명박 정권의 비민주성, 정권의 입맛에 맞는 교과서 왜곡... 역사교과서 논쟁에서도 반MB전선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혹시 이 교수님은 정말로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정통성을 부정하시는 것일까? 그럴리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 양반을 좋게 봐서 좌파라고 한다해도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 만드는 일에 사회주의자 또는 아나키스트를 고용하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 교수님이 노무현 정권과 궤를 같이한 사람이라면 기껏해야 자유주의자 아니겠는가? 사상이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앉았었더라면 아래와 같이 말했을 것 같다.

 

 

뉴라이트는 그 긍정의 대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뉴라이트의 도식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긍정은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전 정권들에 대한 긍정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어쩌면 이것이 더 핵심적이다. 아무리 추상적인 수준에서 “나는 자유민주주의자요”라고 해도 뉴라이트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찬다. 반드시 ‘국부’ 이승만, ‘중흥조’ 박정희에 대한 입장이 따라붙어야 한다. 그들을 존숭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

 
역사 속에서 어떤 기원적 사건을 찾고 그것으로부터 정통성의 계보를 작성하는 것은 전형적인 주자학자들의 역사관이다. 주자학자들에게 지금 이 시대의 올바름은 과거 역사 속 올바름의 계보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 계보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이 시대의 올바름도 판가름할 수 있다.
 
(...)

 
이승만-박정희 전 정권의 계보와 대한민국 역사를 동일시하고 전자에 대한 긍정만이 대한민국의 현재에 대한 긍정이라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과연 이러한 17세기 조선 주자학자들의 역사관과 얼마나 다른가? 뉴라이트 역시 이승만의 건국 행위라는 기원적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박정희의 산업화, 작금의 세계화로 이어지는 어떤 정통성의 계보를 그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이 계보의 연장선 위에 서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으로, 즉 대한민국 안의 반(反)대한민국 분자(‘친북좌익’)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은가? 30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정신적 근친성은 참으로 놀랄만하다.

- 장석준, "진보좌파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시민과 세계> 2008년 겨울호 中

 

 

대한민국 60년 역사동안, 헌법은 얼마나 많이 바뀌었으며, 또 그 배 이상으로 사람들의 생각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가? 그렇게 대한민국은 '지배계급의 통치단위로서의 국가'라는 생각을 잠시 가려놓고 생각하면 얼마나 변화무쌍한 조직이던가? 또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그 변화를 위해 몸을 바쳤던가? 그렇다면 그런 몸부림들, 어떻게든 통일된 해방국가를 만들어 보겠다고 몸부림 쳤던 김구, 여운형 등을 암살하고 잘려진 나라를 만들었던 이승만은 얼마나 대한민국적인가? (허술하고 급조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노동자/농민의 권리와 민주적인 국가운영을 얼마간 보장했던 제헌헌법을 허물어 뜨리고 개발독재를 위한 헌법을 만들었던 이승만, 박정희의 행위는 또 얼마나 대한민국적인가?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정적으로 굳어진 유일한 형태가 아니라 대중의 열망과 투쟁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또 그래야 하는 체제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었나? 우리는 그러는 한에서 대한민국을 긍정한다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기만 한 토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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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중에서....

만일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위녕, 오늘 하루 쉬고 싶다고 투덜거리는 널 보내고 엄마는 이 글을 쓴다. 엄마는 네게 말하곤 했었지. 다만 네가 최선을 닿 성실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해 보면 절대로 취소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부를 잘하라느 압력을 그런 식으로 네게 교묘히 불어넣었는지도 몰라. 이 겨울, 국토대장정을 떠날 돈을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찾아다니는 너를 보며 엄마는 실은 네가 시험을 잘 본 것만큼이나 대견했단다. 아직 너는 어리니까 엄마가 조금 도와주어도 좋을 일인데 굳이 네 힘으로 하겠다는 것을 보며 우쭐하기가지 했단다. 그래서 엄마는 오늘 네게 <<내 발의 등불>>이라는 책 이야기를 해볼까 해.

 

닐 기유메트라는 신부님이 지으신 잛은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야. 늘 그렇듯이 별 기대 없이 책장을 열었는데, 뜻밖의 이야기가 있었다. 제목은 <천사 미니멜>이야. 짧은 이야기니까 좀 들어 볼래?

 

'마지막 천사가 창조되었을 때 그에게 '미니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모든 천사들 가운데 가장 완벽하지 못했기 대문이다'라는 구절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천사들은 보통 끝에 '엘'이라는 철자를 가지고 있지. 네 영세명인 미카엘라는 미카엘의 여성형이고 네 동생들 가브리엘, 라파엘이란 대천사들의 이름도 모두 그렇다. 미니멜이란 앞에 붙은 '미니'에서 짐작할 수 잇듯이 작고 보잘것없고 막내라는 그런 뜻일 테지. 당연히 천상에서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 미니멜은 절망하기 시작했어.(천상에서 보잘것없다 해도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나게 아름답고 또 위대한 존재라고 저자는 토를 달았다.) 그래서 미니멜은 죽기로 ㅈ결심한다. 그런데 천사는 불멸의 존재라, 자살이 불가능해. 방법은 하나. 자기를 만든 신에게 가서 자기를 그냥 없애 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단다.


신은 곰곰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사람들 세상에 피에타 상이 수백만 개 존재하고. 나이아가라 포포가 수백 개, 에베레스트 산이 수백 개 존재하다고 한 번 가정해 봐라. 그것들은 더 이상 독창적이 아니니 그 절대적 인 매력을 잃지 않겠느냐?
나의 창조물들을 자세히 보아라 어떤 눈송이도 똑같이 생긴 것이 없다. 나뭇잎이나 모래알도 두 개가 결코 똑같이 않다. 내가 창조한 모든 것은 하나의 '원본'이다. 따라서 각자 어떤 것과도 대치될 수 없단 거란다. ... 너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나는 너 없이도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지만 만일 그랬다면 세계는 내 눈에 영원히 불완전한 거으로 보였을 것이다. 너를 미카엘이나 라파엘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네가 너로서 존재하고 나의 고유한 미니멜이기를 원한다. 태초부터 내가 사랑한 것은 남과 다른 너였기 대문이다. 너는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꿈꿔 온 유일한 미니멜이다. 따라서 어느 날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느냐? 만일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할 수 없이 슬플 것이다. 영원히 눈물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한참을 이 구절을 붙들고 있었다. 왜냐구? 엄마도 가끔 생각하거든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에게는 왜 저 사람이 가진 저것이 없을까? 시은 왜 나에게 이런 재능을 주지 않았을까? 하고. 그런데 생각해 보게 된 거야. 나이아가라 폭포가 동네마다 있다면, 동네 뒤에는 다 에베레스트 산이 있다면, 피에타 상이 온 동네 교회마다 있다면..... 갑자기 말이야, 신기하게도 웃음이 나왔어.


닐 기유메트 신부님은 이 밖에도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신 분이야. 어떤 사람의 책이 좋으면 그 사람이 지은 모든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은 너와 내가 같아서 엄마도 이 분의 책을 다 찾아 읽었단다.


사랑하는 달, 가끔 여성지를 펼쳐들고 있으면 온몸이 오싹해 질 때가 있어. 온갖 성형외가 광고와 다이어트 광고들. 그건 이 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 잘라라, 붙여라, 꿰매라, 빼라..... 결국, 지금 너는 추하다!


위녕, 네 코에 대해 불만이라고 했지? 하지만 엄마가 아무리 생각해도 네 콘는 너의 입술과 세트를 이루는 아름다운 코야. 네 코가 엄마코를 닮았다면 너의 입술은 부자연서러웠을 거야. 성형외과 의사에게 들었는데 인간의 얼굴은 이목구비뿐만 아니라 심지어 턱선 어깨선과도 모두 조화를 이루도록 독특한 설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 그래서 얼굴 하나를 잘못 고쳐 놓으면 그 모든 균형이 무너져 내리고 그러면 그 균형을 어떻게든 되찾기 위해서 다시금 다른 이목구비에 손을 대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 진다고 하더구나.

 

위녀, 넌 엄마의 심미안을 전혀 믿지 않지만 너는 예쁜 아잉야. 그리고 엄마는 너를 사랑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위녕 너를 말이야. 만일 네가 없어지면 우준느 균형을 찾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 치겠니? 어느 시인이던가 그런 말을 했다.


한 송이 수선활르 피우기 위해 온 우주가 협력했으니 지구는 수선화 화분이다.'라고.
엄마는 오늘은 꼭 수영을 가려고 해. 온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엄마의 몸을 튼튼하게 지키려고 말이야.
자, 오늘도 좋은 하루!

 

- 40-4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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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신에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네 자신뿐이다.




위녕, 좋은 날씨가 계속된다. 하루 종일 공부해야 하는 너는 어쩌면 이런 날씨가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하겠다.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고 꽃들은 화사하고... 오늘도 가끔 창밖을 보고 있니? 그래 가끔 눈을 들어 창밖을 보고 이 날씨를 만끽해라. 왜냐하면 오늘이 너에게 주어진 전부의 시간이니까. 오늘만이 네 것이다. 어제에 관해 너는 모든 것을 알았다 해도 하나도 고칠 수도 되돌릴 수도 없으니 그것은 이미 너의 것은 아니고, 내일 도한 너는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그러니 오늘 지금 이 순간만이 네가 사는 삶의 전부, 그러니 온몸으로 그것을 살아라.

너는 어제 어처구니없이 당한 오해와 공격에 대해 엄마에게 오래도록 이야기했었다. 그래, 생각 같아서는 너에게 그런 짓을 한 사람에게 좇아가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항의하고 싶었단다. 하지만 일단 엄마는 여기서 한 박자 쉬기로 했어. 대신 네게 이런 편지를 쓰고 싶었단다. 그 순간, 네가 하지도 않은 일로 그가 너를 오해하고 사람들 앞에서 너를 망신당하게 했을 때, 그때 네 마음이 피 흘리며 아팠을 때, '정말, 정말, 너를 상처 입힌 것은 과연 누구였을까?'하는 편지 말이야.


'네 자신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네 자신뿐이다.'


이 말은 엄마가 안셀름 그륀이라는 신부님의 책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에서 읽은 구절이었어. 그 신부님은 성폭력의 상처를 가진 여성들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어떤 위로도 이 여성들을 다 위로하고 치유할 수 없지. 어린 시절의 성폭력은 그 여자들이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초래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역사에 희생당한 사람들, 테러에 희생당해 불행을 겪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지. 그런데 말이야. 성폭력이나, 광기의 역사나, 테러에 희생당해 불행을 겪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지. 그런데 말이야. 성폭력이나, 광기의 역사나, 테러에 희생당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도저히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와중에 그것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하거나 나는 오직 희생아라고 말하기 전에 조금은, 우리가 무언가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해. 그륀 신부는 이 여성들과 면담을 통해 이상한 사실을 발견한다.


고통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고통과 작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 고통을 놓아 버린 후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녕, 너는 이 이상하고 모순되어 보이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니? 이 무서운 진리를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 주변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단다. 가끔 엄마는 생각해. 진자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그 고통에서 그들이 헤어나올 방법을 함께 모색해 주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단다. 그런데 이들은 정말 여기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나 한 걸까? 하고 말이야. 가끔 그건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개는 그 고통이 가해지는 틀을 깨 버려야 할 때가 많으니까. 그건 미지(未知)이고 그것은 고통보다 더 두려운 거지.

그리고 다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 거야. 그것은 비단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뿐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상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그는 그것을 이렇게 써 놓았단다.


우리 모두는 늘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배심원석에 앉혀놓고, 피고석에 앉아 우리의 행위를 변명하고자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이해할 수 있겠니? 우리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를 늘 비난하는 사람들을 배심원 자리에 앉힌 것은 누구였을까? 피고석에 우리 자신을 앉힌 것은 누구였을까? 엄마가 많이 힘들던 어느 날,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것과 엄마가 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다르다고 느끼는 날 엄마는 이 구절을 읽었고, 책이 아니라 가슴에 붉은 밑줄이 손톱자국처럼 북북 그어지는 것 같았고 그리고 엄마의 녹슬어 가던 인생이 끼이익 하고 각도를 트는 소리를 냈다. 엄마는 오래도록 불행한 결혼을 끝내고 싶었지만 두려워서 그러지 못하고 있었어. 왜냐하면 아직 하지도 않은 이혼을 두고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그 비난들이 엄마의 귀에 들려오는 듯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이 구절을 읽자, 나는 왜 피고석에 앉아 있으며, 나는 대체 누구를 배심원석에 앉히고 있었나 싶었던 거야. 분명 내 자신은 내가 피고석에 앉을 만큼 잘못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엄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엄마를 비난하지 않았고 그럴 리도 없을 텐데, 엄마는 스스로 피고석에 앉아 내 결혼생활의 판결을 엉뚱한 이들에게 맡기려고 하고 있었던 거지. 그토록 중요한 내 인생의 판결을 나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의 손에 맡기려고 하다니.... 그날은 마침 오랜만에 외출을 하는 날이었는데 엄마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지인들과 술을 마신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라.

"나는 이제 피고석을 떠나겠어! 오늘부터 내 배심원들 다 해고야.... "

있잖아 위녕, 어떻게 그런 말을 술 마시고 반복했는지 모르지만 태어나서 술 마시고 얼결에 한 말중에 제일 나은 것 같아. 그 순간 엄마의 마음속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이 찾아왔단다. 해방감은 공포를 수반했지만, 적어도 나를 비난하기만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변명하고 있는 짓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만은 확실했고, 엄마는 그 어리석음이라는 확실함을 붙들고 일단 확실한 그것을 발길로 뻥 차 버림으로써 거기서 한 발짝 벗어나기 시작했단다. 아직도 그 순간의 감격을 기억해.

그륀 신부님의 이 말은 동방의 성자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사상에 기대고 있지,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344년경에 태어난 사람이었어. 그때나 지금이나 성자들이 대개 그렇듯 그는 모함과 오해에 시달린다. 사람들이 그를 골탕 먹일 방법을 의논했지. 그러나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어. 만일 그를 주교자리에 앉힌다면 그는 그 일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너무 훌륭한 주교가 될 것이고, 만일 그를 유배 보낸다면, 그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게 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굳세어질 것이며, 그를 죽인다면 그는 하느님을 위해 순교한다는 기쁨에 사로잡힐 것이라는 게 뻔했다는 거지. 그 무엇도 그를 삶의 기쁨에서 내몰 수 없었다는 것이야. 소크라테스가 말했던가. "그들은 나를 죽일 수는 있으나 해칠 수는 없다'고.

하는 수 없이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주교로 임명되는 구나. 344년이면 기원 후 겨우 4세기인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인데, 우리나라에 아직 삼국시대도 오지 않았던 그때에 말이야. 그때도 돈과 성공만 아는 젊은이들이 넘친 모양인지. (그때도! 와우!) 이 성자는 지금 들어도 이미 진부한 말을 하는구나.


당신이 당신을 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는 그 잣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의 힘인가? 당신이 틀림없이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도 돈이 힘은 아니다. 당신의 노예 생활을 모면케 해 주는 자유도 힘은 아니다. 인간의 힘은 참된 표상과 함께 갖게 되는 주의 깊음과 생활방식과 관련된 올바름이다.


그래, 여기서 드디어 표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구나. 참된 표상과  함께 갖게 되는 주의 깊음과 생활방식과 관련된 올바름 엄마는 이 구절에서 한참을 멈추었단다.

그륀 신부님이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인용한다면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자기보다 200년쯤 먼저 살았던 에픽테스토스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며 다시 말한다.


사람들은 사건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사건에 대한 표상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죽음이 끔찍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상이 끔직한 것이고 깨어진 꽃병 자체가 끔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과 꽃병을 동일시하여 꽃병이 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온 마음으로 꽃병에 집착하는 것이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돈은 꼭 필요하며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상처를 입힌다.


글쎄, 그렇다고 이 위대한 사람들처럼, 엄마가 죽음도, 깨어진 꽃병도, 일어버린 돈도, 나를 상처 입힐 수 없다고 큰소리치며 말할 날이 올까마는, 한 줄기 아주 가느다랗게 희망 같은 것이 엄마를 비추었단다. 내용이 어떻든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불행이라고 느끼는 것, 어찌 되었든 결혼을 이어 나가는 것이 행복에 대한 표상이고 이혼은 어쨌든 불행한 일일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 부자는 행복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표상들 예쁘고 날신하면 어쨌든 행복할 거라는 그런 표상들.... 표상은, 잘못된 표상들은 이제껏 내가 이름을 아는 사물과 사건만큼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고3 시절을 생각해 봤어. 엄마는 그때 난생처음으로 힘든 시기를 맞았단다. 외할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셔서 하나밖에 없는 집이 차압을 당하고 우리는 그야말로 거리에 나 앉게(말하자면 말이다) 되었던 거지. 엄마의 마음을 다줄 수 있었던 친한 친구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 버리고, 엄마가 짝사랑하던 사람은 어느 날 정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 나름대로 이보다 더 불행하긴 힘들다고 생각했지. 실제로 숨죽여서 많이 울었다.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은 우리 집안의 사정도 아니고 유학 간 친구도 아니고 짝사랑하던 사람의 부재도 아니었어. 그건 나의 이런 딱한 처지가 알려지게 되어서 반 아이들이 처음으로 엄마에게 가엾다는 눈치를 보내게 되었다는 거지. 지금은 꼭 그렇지 않다마는,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나 엄마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참을 수 가 없었어.

일부러 분식집에서 돈을 내었고 일부러 명랑한 척 떠들었다. 일부러 말이야. 맘속으로는 엄청 죽고 싶었는데(지금 생각하면 죽고 싶기까지? 그런데 그랬단다) 그걸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렇게나 힘든 일이었던 거야. 그때 생각했지. 죽고 싶다, 도망가 버리고 싶다. 그런데 말이야. 도망칠 곳이 없더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거야. 그러니까 온몸으로 고3을 맞을 수밖에.

그때 생각했어. 이왕 피할 수 없다면 끌려가지 말자고. 내가 끌고 가자, 휘둘리지 말고, 억지로 노예처럼 공부하지말고 내가 이 시간들의 주인이 되자고.

지금까지 생각해도 그때처럼 엄마가 열심히 살았던 적은 거의 없어. 다른 친구들은 고3이라고 빠졌지만 일요일마다 하루종일 가는 성당의 봉사활동도 빠지지 않았다. 책도 열심히 일었어. 친구들과 이야기도 많이 했고 새로운 친구와도 친해지게 되었지. 나중에 시간도 많아지고 집안 형편도 회복되었는데 가끔씩 그렇게 고3때 생각이 나는 거야. 그 이후로 한 번도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거지. 내가 생각하기 에 끔찍했던 불행들이 나를 분발시키고 나를 바른 자세로 살게  만들어 주었던 거야. 가끔 생각하곤 한단다. 나에게 있어 진정한 불행과 진정한 불운은 무엇일까?

에픽테토스는 노예였고 절름발이였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불구였다는 설도 있고 주인에게 맞아서 불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아무튼 그는 끔찍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이 틀림이 없다. 노예로 다시 로마로 보내졌을 때 그는 이미 행방된 노예인 에파프로디토스에게 고용된다. 그런데 해방 노예로서 노예의 비애를 잘 알고 있어야 할 에파프로디토스는 에픽테토스를 학대한단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알게 되었다고 해.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계속 그것을 전가한다고 말이야. 학대받는 며느리였던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학대하고, 딸이라고 설움당하던 어머니가 딸을 구박하고, 배고픔을 참으며 고생고생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저임금으로 아이들을 착취하고. 상처가 대물림되는 이유는 그것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이야. 만일 엄마가 너희들에게 어떤 의미이든 상처를 주었다면 엄마 역시 엄마의 엄마에게 받은 이ㅠ되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

에픽테토스는 그래서 거기서 자신과 상대방의 상처를 들여다 보고 그것을 극본한 다음, 말하지. 단언한단다.


인간은 자유를 원할 때에메나 자유로워진다. 다른 사람은 우리가 자신을 해치고 상처낼 때에만 우리에게 상처입힐 수 있다. 불행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믿음 선입견.... 즉 표상이다.


에픽테토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그륀 신부님은 각기 아릿아를 부르다가 이제 오페라의 끝 무렵에 와서 삼중창을 부르는 빅3처럼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만들어낸 생각에 일치하게끔 그 사람을 체험한다. 어느 한 사람을 열광적으로 찬탄한다면, 우리는 그가 저지른 가장 정신 나간 일도 황홀하게 바라보고, 유일하며 비범한 것으로 해석한다. 화난 안경이나 실망한 안경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그를 마음에 안 들고 불쾌하고 허약하며 아주 간사하고 부정직한 등등의 사람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표상과 표상을 투사하는 배후를 묻고, 사물과 사람들을 하느님의 빛 안에서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사물과 사람들을 대할 수 있다. 그러면 사물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위녕, 무엇인가에 표상을 투사하는 너의 배후는 무엇이니? 네 속에 없는 것을 네가 남에게 줄 수는 없다. 네 속에 미움이 있다면 너는 남에게 미움을 줄 것이고, 네 속에 사랑이 이있다면 너는 남에게 사랑을 줄 것이다. 네 속에 상처가 있다면 너는 남에게 상처를 줄 것이고, 네 속에 비꼬임이 있다면 너는 남에게 비꼬임을 줄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의미든 너와 닮은 사람일 것이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알아보고 사랑하게 된 것일 테니까. 만일 네가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너와 어떤 의미이든 닮은 사람일 것이다. 네 속에 없는 것을 그에게서 알아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네가 남에게 사랑을 주든, 미움을 주든 , 어떤 마음을 주든 사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네 것이 된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면  말 한마디 시선 하나가 두려워진다. 정말 두려워져.

위녕, 우리는 가끔 어처구니 없는 가시덤불에 걸리기도 하고, 모욕의 골짜기에 떨어지기도 하지. 너의 선의와는 아무 상관없이 너는 매를 맞을 수도 있고, 창피를 당할 수도 있어.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설사 그 일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일을 마음속으로 자리매김할 수는 있다는 거야. 그건 우리에게 달린 일이거든, 그리고 우리에게 달릴 수밖에 없는 일익도 해.

오늘 아침에 우연히 마주치게 된 모욕에 오늘 하루를 내줄 것인가, 생명이 약동하는 이 오월의 아름다움에 네 마음을 내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너 자신이지. 그것은 나쁘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너의 선택이라는 거야.

이 시간의 주인이 되어라. 네가 자신에게 선의와 긍지를 가지고 있다면 궁극적으로 너를 아프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 성적이 어떻든, 네 성격이 어떻든, 네 체중이 어떻든 너는 이 시간의 주인이고 우주에서 가중 귀한 사람이라는 생명이다.

위녕, 힘들다고 했지? 그래 힘들지. 누구나 그 시절을 다 힘들게 보냈어. 그런데 너의 힘듦은 진정 어디서 오니? 그래 이왕 힘든 거, 힘든 시간을 나를 분발시키고 나를 향상시키는 기회로 삼아 보면 어떨까? 미안하다. 그것이 힘든 걸 알면서도 이렇게 또 지당한 소리를 늘어놓게 되었구나, 그러나 위녕, 사실을 말하면 엄마는 네가 이 시기를 좀 잘못 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돼. 너는 아직 젊고 또 많은 기회가 있을 거야. 이 한 해로 너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도 안되고...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엄마의 미안한 사랑을 보낸다.왠지 오늘은 수영장이 임시 휴일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자, 오늘도 좋은 하루!

 

                                                                                                        - 98-111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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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로스> 발췌

yes24 출판사 리뷰

 

“내 몸과 삶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연애불능시대에 던지는 에로스 처방전!


대한민국 연애발달장애 : 고미숙의 분석과 진단

“미디어는 온통 사랑과 섹스를 쉬임 없이 쏘아 대고 있건만 정작 사랑의 열정을 누려야 할 청춘들은 사랑이 없는 비애를, 사랑할 사람이 없는 비애를 부르짖고 있었다(머리말 중에서).”
왜? 도대체 왜? 왜 그렇게들 사랑타령을 하고 연애를 하고 싶어 난리면서도 다들 연애를 못하는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다름 아닌 ‘연애’책을 쓰게 된 이유는. 마치, 무릇 모든 사람들의 삶이란 것은 사랑과 연애로 수렴되는 게 인생의 법칙이라도 되는 것마냥 모두가 연애를 하지 못해 안달인 이 ‘연애공화국’에서, 정작 제대로 연애하는 사람은 만나서 밥이라도 한 끼 사주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작금의 상황을 통탄하며 고미숙은 마침내 코뮌주의자의 사랑법을 펼쳐놓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의 총체적 연애발달장애에 대한 고미숙의 분석과 진단은 루쉰에서, 스피노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파블로 네루다에서, 『임꺽정』에서, 『동의보감』에서 나왔다. 고미숙, 그녀는 명색이 고전평론가가 아니던가.

▶인문학적으로 성찰하는 1080 전 세대의 사랑!
이 책에서 인문학과 사랑이라는 이질적인 조합을 만들어 낸 고미숙은 붓다의 수행, 『동의보감』의 양생술, 고전문학을 통해 기존의 실용서에서 주장하는 사랑의 ‘테크닉’, 혹은 ‘매뉴얼’과는 차별된 ‘사랑의 기술’을 설파하고 있다. 이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사랑의 기술은 비단 20~30대만의 사랑이 아니라 늙어서도 하는 연애, 자식과의 관계, 중년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사랑, 즉 1080, 전 세대의 사랑 모두를 포함한다. 바로, 사랑은 삶을 바꾸고,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까닭인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왜 다른 것도 아닌 ‘사랑’인가 하는 점이다. 고미숙은 사랑을 “대상이 나를 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어 가는 시공간적 인연의 장”으로 정의하고 삶과 사랑은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랑만큼 우리의 존재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 사건은 없다. 그리고 사랑만큼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에너지도 없다. 다시 말해 사랑은 기본적으로 ‘탈주선’을 그리고, 본질적으로 창조적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랑의 에너지는 단순히 성(性)적 열망을 넘어서 앎의 열망으로 우리를 이끄는 힘이 된다. 기존의 금지선을 벗어나 전혀 새롭고 낯선 매트릭스로 진입하게 하는 힘, 그것이 사랑의 본래 면목인 까닭에 우리 삶을 어떻게 하면 에로스로 가득 채울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자본과 망상으로 도배된 지금의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가 된다. 삶을 창조하는 에로스! 이 책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는 결국 그 창조적 에로스의 발견을 촉구하고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 혁명을 선동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 사랑에 대한 오만과 편견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이별에 대한 항변으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울부짖었지만 고미숙은 이 울부짖음에 오히려 반문한다.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라고. 사랑은 당연히 변한다. 사랑을 하는 마음과 몸이 변하기 때문이다. 변해 버린 마음과 이별의 순간, 이 모든 게 갑작스럽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보편적인 사랑의 전개과정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계절이 바뀌는 모습―찌는 듯한 무더위가 지나면 낙엽이 지고, 또 엄동설한이 찾아온다! ―이 어느 기점을 넘으면 금세 달라져 버리는 것처럼, 우리 삶도 그렇고 사랑도 역시 그렇다. 모든 태어난 것은 자라고 병들고 늙고 죽는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나고 자라고 쇠하고 소멸된다. 즉, 사랑도 생로병사를 겪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불멸의 판타지를 무참히 깨뜨리는 이 ‘무상성’은 지금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는 실로 엄청난 시한부 선고가 될지도 모르지만 사랑이 끝없이 변화하는 흐름이요 운동인 것처럼, 우리 자신도, 우리의 관계도, 그 흐름과 생성의 장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그 흐름을 전제로 한 사랑에서 관건은, 능동적으로 그 흐름을 타는 데에 있다.

▶사랑하는 대상이 바로 ‘나’라고?
사랑을 하다가 이별을 하는 사람들을 보자. 어떤가? 복수심이나 증오, 혹은 분노로 활활 타올라 재가 될 것만 같다. “내가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고, 얼마나 잘해줬는데…! 감히 나를 배신해!?” 화내고 소리지르고 복수를 다짐한다.
참 이상하다. 그 사랑과 헌신은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었던가? 혹은 원하지 않았다 해도 사랑의 시작, 그 사건의 원인은 어쨌거나 ‘내’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분노를 하는 것은, 자신의 사랑이 노동이나 거래였음을 역설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든 원인을 상대에서 찾는 것은 수동적인, 너무나 수동적인 사랑법, 즉 노예의 사랑법이다. 사랑을 대상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그 사랑을 선택한 ‘나’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일이다. 사랑은 나와 대상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발생하는 사건이고, 따라서 사랑과 대상과 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거늘.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늘 잊고 살고, 그래서 사랑에 늘 실패한다.
우리는 늘 나의 반쪽, 나의 이상형을 갈구하면서 ‘님’만 찾으면 나의 사랑이 완성될 거라 믿지만 그것처럼 순진한 착각도 없다. 사랑은, 전적으로 ‘나’의 문제이고,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그 사랑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랑이라는 흐름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므로 그 시작과 끝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한다. 사랑에 대한 지독한 오해와 편견과 착각으로 넘어지고 깨지고 허우적대는 가여운 영혼들을 보다 못한 고미숙이 제시하는 에로스 처방은, 사랑을 대상의 문제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 사랑하는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것!

▶실연과 짝사랑에 대한 전복적 재해석!
술과 눈물과 수염은 ‘실연’ 내지는 ‘이별’에 따라오는 자동완성기능이다. 이미 황폐해진 마음과 더불어 몸도 함께 망가진다. 실연의 아픔을 ‘불행’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별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이 착각에 빠지기가 너무나도 쉽지만,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이별이라는 상황과 이별을 맞이한 나의 상황에 객관적인 물음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실연은 불행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던 인연의 장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 다른 장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니 관건은, 그 아픔을 불행으로 변주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고미숙은 말한다.

“병에 걸리면 누구나 아프다. 하지만, 아프다고 해서 다 불행한 건 아니다. 통증과 불행을 동일시하지 말라는 거다. 병을 치유할 때, 통증의 유무가 유일한 척도가 되면 결국 진통제에 의존하게 된다. 그건 병을 치유한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병 역시 절대 위로와 연민으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 진통제가 몸을 나약하게 만들 듯, 동정과 위안 역시 존재의 능력을 한없이 떨어뜨린다.”(본문 178쪽)

이별이란 두 사람이 만든 인연의 장이 시간적 어긋남 속에서 비틀거림을 낳은 것일 뿐, 분노와 원망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랑은 권력 게임 혹은 자존심 경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실연에 대한 전복적 재해석!
뿐만 아니라 고미숙은 실연에 대한 편견과 더불어 ‘짝사랑’에 대한 기존의 편견도 속 시원하게 뒤집어 놓는데, 그녀가 말하는 짝사랑의 미덕은 이런 것이다. 시간 안 들고, 돈 안 들고,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희노애락의 흐름을 살필 수 있고,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을 느낄 수 있고, 그 전율로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꿀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느냐는 것. 짝사랑은 행운이라는 이 교묘한 반전은 수많은 연애 소수자들을 절망에서 탈출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한다면, 삶을 창조하라!

▶엄마도 아이도, 제대로 좀 살아 보자

한번 빠지면 어지간해서는 헤어나오기 어려운 늪이 있다. 그 늪은 바로 엄마. 엄마와 아빠의 과잉서비스. 그 달콤함에 빠지면 우리의 청춘들은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이유식을 먹어야 하는 ‘아이’로 남아 있게 된다. 엄마가 아이의 모든 것을 결정해 주고, 모든 것을 사주고, 입혀 주고, 먹여 준다. 이렇게 온실 속에서 자라게 되는 아이들은 이 ‘편안한 불행’이라는 역설적인 삶을 사는 대신 신체의 무능력과 영혼의 잠식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결국 엄마의 늪에 빠진 아이들은 자신의 열정을 찾지도 분출하지도 못하고 사그러져 간다. 모성의 탈을 쓴 이 연민과 집착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청춘을 들끓게 하는 폭풍을 삼켜 버리는 무시무시한 ‘늪’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엄마 자신을 가두는 늪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의 동선을 체크하고, 모든 걸 대신 해주려 하면서 엄마들은 자식들의 삶을 기어코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만다. 사랑의 이름을 한 ‘지배욕’의 모습이다. 그런데 가족 내의 조성이 이렇게 꾸려질 때 자식들의 청춘만 잠식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잃어버린 엄마의 삶 역시도 함께 잠식된다. 아들의 성적표, 남편의 월급, 넓어지는 아파트 평수밖에 자신의 기쁨이 될 수 없는 현실. 그것은 대한민국 엄마들의 삶과 삶에 대한 열정을 갉아먹는 좀벌레와도 같다. 물론 가족을 사랑하고, 아이가 잘되었으면 하는 모성애는 아름답지만, 진정으로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의 삶을 만들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먼저 창조적으로 만드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만든다 함은, 새로운 인연의 장과 네트워크를 만든다―봉사활동도 좋고, 시민운동도 좋고, 공부도 좋다!―는 말이고, 외부와 맺는 관계성을 확장시킨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진부하던 일상에도 힘과 탄력이 생기고 몸에서 내뿜는 기운도 당연히 달라질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줄 삶의 서사, 즉 ‘선물’이 생길 것이다.
사랑은, 대상에 집착하고 내면에서 웅크리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고 그 속으로 성큼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엄마들이여! 아이를 사랑한다면 먼저 자신의 삶을 창조하시라!

▶나를 창조하는 힘, 공부와 연애!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대상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과, 더 넓게는 이 세계와의 공존을 기획하는 일이다. 이 공존에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자신이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통한 삶의 창조, 그것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영역이다.”(본문 230쪽)
그렇다. 사랑은 둘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와의 공존을 고민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관찰하고, 그가 속한 세계를 관찰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과 세계와의 능동적인 소통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이 상생하는 연애의 비법이고, 삶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삶을 창조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를 구성하고 있는 내 몸의 리듬과 강도를 바꾼다는 말이다. 현재 나의 시공간적 장을 바꾸고 리듬을 만들면, 딱 그만큼 나의 미래가 바뀐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인생역전도 충분히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렇게 인생역전까지도 가능한 우리의 ‘사랑’은 종종 구속으로 변질된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질투와 광기, 변덕과 같은 힘에 끌려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에 붙들려서는 나를 바꾸는 연애, 삶을 창조하는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 부정의 중력장을 해체하려면 더 큰 긍정의 힘으로 공부하고 기뻐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과 대상과 나에 대해 적합한 인식을 하면 수동적이고 부정적 정서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까닭에, 공부와 앎이라는 네트워킹은 ‘나를 창조하는 힘’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명령은? “공부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

에로스 처방전

一. 돈 쓰지 말고 몸을 써라!
사랑이란 무엇보다 생명의 활기로 표현된다. 자신의 욕망을 자본의 프레임에 구겨넣지 말고 몸을 써라! 지금 당장 쇼핑몰에서 나오고, 자동차에서 내려라!

二. 실연을 행운으로 받아들여라!
한번 변곡점을 통과할 때마다 인생은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어 있다. 그때 케케묵은 인연에 발목이 잡힌다면 참으로 난감할 터. 그러니 그 전에 나를 버리고 떠나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三. ‘공부’하라!
앎의 크기가 내 존재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리고 사랑은 존재가 외부와 맺는 모든 관계를 포함한다.
따라서 운명을 건 도약, 운명을 건 사랑을 하고 싶으면 앎의 열정으로 불타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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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4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그 자신을 속이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남들을 속임으로써 그것의 종말을 고한다.

 


거듭 당부하거니와, 절대 상품을 주고받는 식으로 사랑을 확인하지 마시라. 물론 선물은 중요하다. 하지만, 진짜 소중한 선물에는 '삶의 서사'가 묻어 있어야 한다. 즉, 나의 일상의 리듬과 무관한 선물이란 그야말로 쇼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쇼"가 되는 순간, 아무리 정성을 다한다 한들 결국 화폐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 특히 요즘같이 상품과 예술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는 정성과 화폐가 분리되기 어렵다. 갖은 정성을 다한 선물일수록 가격에 비례한다. 따라서, 그 노선을 취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랑은 화폐권력의 장에 포획되어 버린다. 그 다음부터는 일상의 모든 흐름에 상품의 혼이 따라붙게 된다. 처음엔 얼떨결에 따라했던 작업들이 나중엔 자신의 본성인 양 전도되어 버리는 것이다.(197~8쪽)

 

 

왜 사회를 전면적으로 전복하기를 꿈꾸면서 사랑과 성적 관계에 있어서는 새로운 실험을 기획하지 않는 것일까? 사랑이야말로 혁명의 뇌관임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왜?(83쪽)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우리시대 모든 연인들이 연애와 쇼핑 사이의 이 은밀한 공모관계만 해체해도 신자유주의 체제는 휘청거릴 것이다, 라는. 세상에, 이렇게 간단하고 기막힌 혁명전략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청춘들이여, 아니 사랑에 빠진 모든 이들이여, 세상이 바뀌기를 정말 원하는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쇼! 하지 마라! 쇼! 그럼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가? 그래서 창의성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이 지닌바 특이성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는 사랑법을 창안하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사랑법을.(198쪽)

 

 

 

흔히 연애가 시작되면,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릴없이 유원지를 헤매거나 한다. 한마디로 온통 소비를 통해서만 사랑을 확인하려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힘으로 일어선 자 힘으로 망한다고, 소비로 맺어진 연애는 반드시 소비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사랑만큼 소중한 감정도 없지만, 사랑만큼 부서지기 쉬운 감정도 없다. 10년 이상을 한 이불 밑에서 알콩달콩 살던 부부도 순식간에 파국을 맞이하곤 하는데, 하물며 처녀총각의 연애야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함께 책을 읽으면서 데이트를 하면 돈도 덜 들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높아진다. 또 책을 읽으면 주고받을 이야기도 자연 많아진다. 그러면 말하는 능력, 서사적 힘도 절로 붙게 된다. 일석삼조! 아니 사조! - (208쪽)

 

 


사랑이란 단지 그 대상하고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이 살아가는 시공간과도 깊은 교감을 나누어야 마땅하다(이쯤에서 “사랑하는 대상이 바로 ‘나’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스스로 창조한다!”는 테제들을 암기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므로 사랑이 시작되면 내면에 웅크리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 속으로 성큼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힘에 의거하여 인연이 형성될 수 있고, 인연이 맺어진 다음엔 그렇게 만들어진 삶의 서사를 다시 나눌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인연이 생길 수도 있고. 암튼 이래저래 남는 장사다! - (226쪽)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 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참으로 신기한 인과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판에 나는 몸만 쏙! 들어가면 되는가? 실패한 다음엔 다시 몸만 쏙! 빠져나와 복수극을 펼치면 되고? 이렇게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있을까?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뭔가? - P. 15

 

 

 

‘불멸의 사랑’은 망상 중의 망상이다. 그건 마치 어린 아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어른이 된 다음에도 계속 끼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다. - P.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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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 - 박승옥

운전면허증 따지 않기로 결심하다.

 

얼마 전 학교를 졸업(정확히 말하면 수료. 아직 나에겐 토익시험이라는 장벽이 남아있다. ㅠ.ㅠ)하고 집에 내려와서 지내면서 가족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아온 게 하나 있다. 그건 다름아닌, 수능끝난 고3 수험생들이 제일먼저 자신이 '성인'임을 인증받기 위해 치르는 '운전면허시험'이다. 난 다른 친구들이 하나둘씩 운전면허 학원으로 달려가던 고3 수능 이후, 오전엔 영어회화학원을, 오후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는 친구를 따라 택견을 배우러 다녀서 사실상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데모'하는데만 쫓아다녔으니 운전같은거 배울 세가 있을리 만무하고...

 

'인생 살아가는데 운전면허는 필수다', '나중에 직장생활 어떻게 할라고 그러냐?', '차 한대는 있어야 살 수 있는거 아니냐?' 등등... 빨리 운전면허를 취득하라는 압박의 수단은 다양하다. 우리 가족들도 서서히 이런 말들로 나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맨날 주차 문제 때문에 이웃들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 운전하면서 온갖 짜증 다 부리는 운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운전같은거 진짜 재미없겠다고 생각해오고 있던 터라 최대한 이런 요구들을 회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일단 지금은 토익학원을 다니는 것을 핑계로 운전면허 취득은 내년초로 미뤄 놓은 상태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그 계획을 '취소'했다. 나는 내 소유의 차를 가지는 것은 물론 운전면허도 갖지 않을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내키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이제 아예 가슴속에 도장을 찍었다. '지구 천연자원을 파헤쳐 자연생태계가 그간 쌓아온 저금통장을 순식간에 까먹으며 지구온난화를 부추기는 온실가스를 배출해 나의 숨통을 조여오는 자동차 따위' 타지 않겠다고!! 나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안티-오토모바일리스트다!!!

 

 

 

자본주의의 '화석 에너지 동맹'과 결별을 선언하다!

 

물론 이런 개인적 선언은 뭇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기 딱 좋다는 것 정도, 나도 잘 알고 있다. "당신의 힘으로는 아프리카의 기아를 없앨 수도 없고, 지구 온난화도 막을 수 없지만..."으로 시작되는 대기업 홍보 광고따위가 이미 나를 비웃고 있질 않은가? "너 하나가 운전 안한다고 조그만 도시 하나의 대기 오염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으냐?"라고 비웃을 지 모른다. 또는 "너 그런 생각이라면 아예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마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대중교통과도 결별할 만큼의 배짱은 없다. 하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조금씩 그것들과 결별할 것이다. 지금 나는 충분히 운전면허증과 결별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래도 내 삶에 하등의 지장이 없다. (사실 나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데 실천을 안 할 뿐이다.) 이를 통해서 나는 지구 탄생 역사 45억년 중에 단 1%도 차지하지 않는 자본주의 근대 역사가 벌이는 화석에너지 강탈 동맹에서 조금이라도 빠져나오겠다는 것이다. 비단 자동차 뿐만이 아니다. 전기, 가스 사용량도 현격히 줄여서 '1인당 전기 사용량이 에펠탑 꼭대기에서 땅에 있는 자동차를 끌어올리는 힘과 같은' 이 정신나간 근대 에너지 동맹에서 서서히 탈퇴할 것이다. 난 이제 그 첫걸음을 뗐을 뿐이다. "나 자신도 못 바꾸면서 무슨 세상을 바꾸냐?" 내가 예전에 학교 후배들 갈굴 때 자주 쓰던 말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나도 이걸 실천에 옮기는 셈이다.

 

내가 왜 이렇게 극단적이고 황당하게 들릴 법한 생각을 하게 되었냐구? 그것은 거의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박승옥 저, 녹색평론사, 2007)의 책임이다.

 

 

 

 

 

잔치는 끝났다! 햇빛 에너지로 먹고 살자!

 

내가 이런 생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2008년 5월, 온 나라가 촛불로 타오를 때, 나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겠다고 거리에 섰다. 그러면서 광우병 문제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슈로 떠오르던 전 세계 식량 위기의 문제도 함께 공부했었는데,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 자본주의에 의한 생태계 순환 파괴에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생태위기에 관련된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의 한가지 단점부터 말하자면, 지겨우리만큼 비슷한 얘기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각각의 글들이 이 책을 내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지면을 통해 발표된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거의 모든 장에서 '피크오일'문제가 등장한다는 건 좀 심하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 또한 피크오일 문제는 아무리 입에 쉰내가 나도록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동의하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화석연료 문명, 즉 석유에 중독된 문명이다. 현대산업의 원동력은 값싼 석유이다. 20세기 들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석유는 자동차문명 사회를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주 모든 분야에서 석유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게끔 만들었다. (...)

인류는 수억년 전 만들어진 자연의 보물 석유와 각종 천연자원을 단 몇백년 만에 마구 퍼다 쓰고는 또 쓰레기로 마구 내다버리고 있다. 이는 미래세대의 저금통장을 몽땅 털어먹는 도둑질이자 미래를 소비하는 파렴치한 범죄행위이다. 호모 사피엔스, 즉 '슬기로운 동물'이라기보다는 재생 불가능한 쓰레기를 만드는 동물, 눈먼 소비중독의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정확할 듯싶다.

- 64-65pp

이렇게 석유에 중독된 문명이 석유가 고갈되는 사태가 발생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1956년 킹 허버트가 발표한 대로 1970년 이후 미국의 석유 생산은 정점을 지나고 있고, 다른 국가들도 거의 비슷한 길을 밟고 있는 상황에서 석유 에너지 체제를 고집하는 것은 기름을 지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설령 지금 한국 정부가 하고 있듯이 바다 곳곳을 쑤셔대서 새로운 천연자원의 저장소를 많이 발견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석유를 비롯한 화석에너지로 인해 가속화되는 지구 온난화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게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라는 점을 아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워낙 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 대중들에게 알려져서 새삼스러운 면도 없진 않지만, 이런 사실을 경제학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기존의 주류 경제학은 자연자원을 '무상의 선물'로 여기기 때문에(이에 대해서는 존 벨라미 포스터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석유 에너지의 '공급'을 변하지 않는 사실로 고정시켜 버린다. 그래서 주류 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의 성립과 석유 체제의 확립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이 없다. 석유를 이용해 달리는 자동차를 보급하기 위해 철도를 매입해 철도 노선을 없애버렸던 석유메이저들의 만행은 그저 자유로운 시장경제 활동의 하나로 인식될 뿐이니 말이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석유 메이저들이 아무리 주가를 올리기 위해 석유 매장량을 속일지라도 진실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저자가 주장하는대로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햇빛 에너지를 비롯한 재생가능 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 햇빛 에너지 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겐 '똥'으로 바이오매스 에너지도 얻을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바로 "똥은 에너지다"라는 장인데, 저자는 이 글을 통해, 자본주의 근대 문명이 우리 사회에 이식되면서 도입된 수세식 화장실은 사실상 퇴비나 동물 사료로 쓰일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원인 '똥'을 폐기물로 인식하게 하면서 물질의 자연적 순환을 가로막는 '퇴보'의 상징이라고 말한다.(예전에 <<소금꽃 나무>>의 저자 김진숙 지도위원이 강연할 때 수세식 화장실은 초국적 자본의 개수작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러나 볏집이나 왕겨등을 같이 넣어 똥을 썩히면, 여기서 발생하는 메탄가스는 전기로 이용할 수 있고, 남는 찌꺼기는 유용한 퇴비가 된다. 나는 유럽 몇몇 나라의 사민주의적 시스템을 동경하진 않지만, 이들 나라로 부터 배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똥'을 에너지로 활용하는 자연친화적 시스템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하루 빨리 이들 나라들 처럼 국가가 재생가능 에너지를 고가에 매입해 주는 전기매입법이 도입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생태적 전환,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사실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과 재생에너지 체제로 전환이 중요하다는 말은 하는 것은 쉽지만, 그 길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를 말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나야 일단 운전면허 안따기 부터 시작한다지만 이걸로만 그친다면 그냥 쇼에 불과하지 않겠나? 저자가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재생가능 에너지 체제는 지금과 같이 한전과 국가가 주도하는 에너지 독재체제가 아니라 동네에 마련된 소규모의 발전소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에너지 자립체제여야 한다. 제주도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서 바다에 해저케이블을 깔아놓는 해괴망측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에너지 체제의 생태적 전환은 대부분의 언론이 말하는 것처럼 첨단 기술 개발 여부에 달렸다기 보다는 석유 에너지 체제를 유지하려는 거대 자본과 국가의 권력을 민중들의 운동을 통해 얼마나 약화시킬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래서 저자는 자연스럽게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진로에 대해 고민한다. 그저 신사회운동, 부르주아 시민운동의 하나 쯤으로 생태운동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금융위기/생태위기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노동운동, 농민운동도 생태적 전환을 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되는 지점은 바로 '폭력시위'에 대한 것인데, 저자는 단호하게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폭력시위는 그만두고, 차라리 전경들 먹는 식단 재료들을 유기농으로 바꾸는 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고 잘라 말하기도 한다. 말의 뉘앙스로 봐서는 기존 운동방식을 비판하고 생태적 전환이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든 비유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현재 농민운동, 노동운동이 폭력적 상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조건에 대해 너무 쉽게 간과하고 보수언론과 비슷한 방식으로 일갈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된다.

 

올 해 초 민주노동당이 분당하고 진보신당이 결성될 시점에 '녹색'인사로 박승옥씨가 참여하는 문제를 두고 노동운동 진영에서 말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들의 논지를 대략 요약하면 '박승옥은 너무 우파 아니냐?'라는 거였다.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생태운동에 무게중심이 가 있는 사람을 '우파'라고 지칭하는 것도 그렇고, 그 반대편에서 노동운동의 행동양식을 무조건 '폭력적이다'라는 말로 몰아세우는 것도 보기 안 좋긴 마찬가지다. 서로의 조건을 이해하면서 변화의 지점들을 찾아갈 수는 없을까?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넘어서야할 또 하나의 벽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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