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23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9/22
    미국發 금융위기가 우리집에 미친 영향(3)
    구르는돌
  2. 2008/09/12
    [서평] 성.노.동 - 여이연 성노동 연구팀(12)
    구르는돌
  3. 2008/09/10
    언론들은 어서 특종을 보도하라!(1)
    구르는돌
  4. 2008/08/30
    [발췌독] 자본주의와 생태: 모순의 성격 (존 벨라미 포스터)
    구르는돌
  5. 2008/08/28
    불교 코포라티즘을 넘어서자.(1)
    구르는돌
  6. 2008/08/15
    반독재 투쟁은 시효만료?(2)
    구르는돌
  7. 2008/07/31
    교육감 선거 패배, 그러나 다시 시작이다!(1)
    구르는돌
  8. 1999/11/30
    구르는돌

지역주의 타파가 노무현의 업적??

며칠전에 서점에 가서 잠깐 고종석씨의 <경계긋기의 어려움>이라는 책을 봤다.

거기 한 꼭지의 제목이 "정동영 생각"인데, 아주 인상깊었다.

지난 대선 전에 정동영이 광주를 찾아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서 이명박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단다. 그런데 고종석씨는 그에게 징징거리지 말라고 훈계한다. 사실 정동영이 주도해서 창당한 열린우리당의 기본 모토가 "호남표 절반을 버리고 영남표 절반을 가져온다" 였다는 거다. 결국 그런식으로 지역주의 깨자는 거였고... 지들이 호남표 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는 어디서 또 징징거리냐... 뭐 요런 말씀이시다...

 

아, 요걸 보고 있자니 왜케 웃기는지??

요런 방식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노무현의 '업적'이라고 칭송되고 있는

지역주의 타파라는 것도 전혀 대단할 것 없는 정치수작일 뿐인 거다.

노무현이 떨어질 것 알면서도 부산을 끊임없이 찔러본 것은, 당장엔 실패해도

결국 그게 자신의 주가를 올리는 것이라는 점을 그 자신은 알았다는 거다.

지금 식으로 생각하면 이것이 곧 '민주당 외연확장'인 셈이고....

한 마디로 노무현은 이 전략을 수행하는데 있어 선봉장에 섰던거다.

그게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거랑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거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진중권 자살세 발언, 변희재에 덜미를 잡히다!!!

결국, 진중권 스토커 변희재의 승리인가?

아, 세상의 일반적 시선으로 보자면 나는 변희재의 승리에 안타까워해야 하지만

왜 "고것 참 쌤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까?

 

소위 진보 지식인이라는 인간들이 이번 노무현 사망 사태를 두고

보여준 신앙고백의 최종 결말이 어떤 것인지 진중권은 가감없이 보여줬다.

그리고 결국 뒷통수를 맞았다.

 

진중권, 자살세 발언 "아프게 반성한다"

 

그 동안 진보신당 게시판에 노무현의 지난 행적들을 비판하면서 추모 분위기에 일정

거리를 두려는 사람들에 대해 독설을 퍼붓더니 결국 지는 이미 몇해 전에

스러져간 목숨들을 향해 자살세를 걷어야 한다느니 아주 막되먹은 소리를 했구나...

 

난 진정, 진보신당이 진중권 같은 자를 빨리 퇴출시켜야 한다고 본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지 못한자가 진보의 탈을 쓰고 춤추는 꼴을 어떻게 더 봐줘야 하나?

여하간에 변희재나 진중권이나 똑같은 '적대적 공범자'일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어이없는 프레시안

어제 내가 노무현 대통령 사망 이후 진보적 인사, 지식인들이 보이는 신앙고백 행태에 대해 비판한 글을 프레시안 독자 기고에 보냈다.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그 전날에 썼던 글("노무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법")도 보냈는데, 안 실렸다. 글이 너무 길어서 그랬나 싶어 이것의 약 5분의 3 분량으로 다시 써서 보내니 내 글이 '당첨' 된 것이다.

 

아, 근데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가끔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시는 분들이 자기 글이 신문 편집진에 의해서 아무렇게나 편집되어 글의 의도가 훼손되었다고 불평하는 글들을 좀 본 적이 있는데, 그 기분이 뭔지 알 것 같다.

 

아, 솔직히 글의 제목까지 바꿀 필요는 없지 않냐?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라는 제목은 "나는 똑같이 슬퍼할 것이다"라는 뭔 소린지 알 수 없는 제목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프레시안 글 보러가기)

 

게다가 소위 노무현 지지자들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내용들은 다 짤려있었다. 내가 욕쓴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잘려 나가야 할 이유를 당췌 모르겠다. 인터넷 신문 기사라 분량 맞출 필요도 없을 텐데, 이렇게 편집권을 남용하나?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나, 이건 내 글이 요즘 프레시안의 편집방향과 배치되기 때문인 점도 있는 것 같다. 실제 내 글은 오늘 12시부터 2시 반 정도까지 초기화면에 떴다가 사라져버렸다. 내 글에 이상한 댓글 단 노무현 지지자로 보이는 이상한 사람 빼고는 거의 본 사람이 없다는 거다. ㅋㅋㅋㅋ

 

대신 프레시안 초기화면은 노무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자는 결의를 담은 격문들로 가득차 있다. 그래도 프레시안은 괜찮은 언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된장찌개!!!! 완전 속았다. 프레시안은 제발 2006년에 노무현 정권이 FTA추진할때 어떤 기사를 썼는지 한번 찾아보길 바란다. 이렇게 앞뒤 안 맞는 짓들을 하다니....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무현 사망으로 한국사회가 집단 환각에 빠졌다!!!

갈수록 내 독설이 늘어만 간다.

 

어쩐담. 나 이런 성격 버릴려고 했는데, 우리 전능하신 노짱께서 내 의지를 또 꺾어놓으셨다.

 

아, 노짱 탓만 할 것은 아니지.... 노무현이 아이스크림 먹는 사진까지 뿌려대며

 

그를 신화화하는 언론도 한 몫 하고 있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이스크림 먹고, 봉하마을서 자전거타는 노무현이 소탈해 보이고

 

탈 권위주의적으로 보인다면, 그것과 아주 같은 방식, 똑같은 의미로

 

청와대 사저에서 출퇴근할때 자전거 이용하고, 대선광고에서 시장 아줌마랑 뜨거운 포옹

 

을 나누었던 이명박도 그에 못지않게 소탈하고 탈 권위주의적으로 보인다.

 

내 말이 틀렸나? 얼마 전 어린이날에 이명박도 초딩들 앞에 모아놓고 퇴임 후 환경운동

 

하고싶다고 말했단다. 이명박이 환경운동 한다면 개구라고, 노무현이 한다고 하면 진심어린

 

서민적인 면모인가? 엎어치나 매치나 이명박은 4대강 갈아엎으려는 놈이고, 노무현은 이미

 

새만금 갈아 엎은 놈인데...

 

 

아, 그리고 요즘 방송 보니까 노무현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데 기가막힌 장면이 있었다.

 

1. 노무현이 모 연설장에서 주머니에 손넣고 약간 불량한 자세로 말하는 사진. 그 장면 나도 기억하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대통령 품위에 맞지 않는 자세와 언행이라고 비난의 화살을 날렸었다. 그런데 요새 언론에서는 이게 탈권위주의적인 카리스마를 나타내는 모습이란다. 아, 앞으로 나도 사람 많은데서 말할 기회 있으면 주머니에 손 넣고 고개 쭉 빼고 다녀야 겠다. 카리스마 있어 보이게.

 

2. 어제 밤 집에 오는길에 동네 호프집 밖에 설치된 뉴스에서 나온 장면. 노무현 임기 당시 서민 대통령으로서의 면모를 모아서 보여준단다. 김선일씨 이라크에서 피랍되었을 때, 자국민의 안위를 고민하며 고뇌하는 모습이 나온다. 소파에 앉아서 턱을 괴고 한껏 인상을 찌푸리면서. 아, 그랬던 그가 내렸던 결정은 무엇인가? 그의 결정으로 김선일씨는 처참한 시체로 돌아왔는데, 얼굴 한번 찌푸린 사진 한방에 노무현은 서민적인 대통령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노무현 그 보다 먼저간 영령들이 다시 한번 기절하실 노릇이다.

 

이놈의 대한민국, 전부 다 집단 환각에 빠진 것이 틀림 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김상봉 교수 한겨레 기고글에 달린 댓글

 

 

 

   
2009/05/26 17:14:44 신고하기

이 정도의 자기성찰조차 왜 고해성사를 요구하냐며 진보신당은 노무현에게 빚진 거 없다고 하다니 참으로 강팍하고 편협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 콕 꼬집어서 "진보신당"입니까? 그냥 "진보세력"이라고 해도 될텐데말이죠. 그런데 hkcsp님, 노동자 농민들에게 진보신당 민노당 당신들이 어떻게 비추는지 아십니까? 녹슨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봐도 부끄러움을 못느끼는자가 가장 끔찍한 자입니다.

 
 
 
 
   
2009/05/26 17:14:19 신고하기

김상봉교수님의 글은 이런 저의 부끄럽고 착잡한 여러 감정들을 다 함께 녹여 주는 가장 감동적인 글이었습니다. "진보신당은 노무현에게 빚진거 없다"며 "고해성사를
요구하지 말라"는 글을 남긴 이도 있지만, 우리는 모두 척박한 이 사회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공모자이기도 합니다. 악의 자양분은 방관과 침묵이니까요.

 
 
 
 
   
2009/05/26 17:13:00 신고하기

노무현의 죽음을 보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한편 명박이 검찰넘들 큰일났네 쌤통이다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의문과 찝찝함, 노무현 정권때 죽은 노동자들, 난 그들의 죽음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었나? 세상은 하나도 변한게 없는데 그들이 죽지 않았았다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2009/05/26 16:33:36 신고하기

동 시대를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하여 분노와 좌절을 함께 느끼며 후대에 어떤 말로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순수하고 정제된 관념으로 추이를 명확하게 말하는 분들이 우리 사회에 건재함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감사하다.

 
 
 
 
   
2009/05/26 16:33:12 신고하기

부디 이 나라에 광명한 날이 도래하여 도도히 흐르는 정의의 물결에 몸을 실어 만민이 함께 가슴을 부둥켜 안고 함박웃음을 지을 그 날이 오길 두 손 모아 기도드린다.

 
 
 
 
   
2009/05/26 15:34:00 신고하기

hkcsp//젊은 사람 같은데... 아는지 모르겠지만... 님 같은 경우를 두고 좌익소아병이라 한다오... 그의 소속집단이 개인의 훌륭함을 보장하는 건 아니지 않소...

 
 
 
 
   
2009/05/26 12:24:08 신고하기

도대체 교수님이 그의 죽음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살아남은 다른 진보세력에게 고해성사를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의 죽음과는 무관하게 그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적어도 그간 민주당 세력을 비판해 왔던 진보세력은 노무현에게 빚진거 없습니다.

 
 
 
 
   
2009/05/26 12:23:22 신고하기

참으로 황당한 글입니다.
김상봉 교수님은 진보신당 당원으로서 강령작성의 총 책임을 맡기도 하셨던 분입니다. 그런 교수님의 정치적인 위치에서 이런 글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생명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과 그로 인해 고인을 추앙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은 전혀 별개이며, 후자는 앞으로 전개될 정치에 오히려 해악일 뿐입니다. 다름 아닌 죽은 정치인의 유령이 산 정치를 지배하는 사태가 올 것이 두렵습니다.

 

 

맨 밑에 두개가 내가 단 댓글이다.

그 위에는 대부분 나의 댓글에 대한 공격.

 

아무래도 저 사람들의 댓글로 봐선 아무래도 김상봉 교수의 글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위안이 되었나 보다.

 

그런데 어쩌나.... 저렇게 한 번 위안 받고 나면 하룻밤 잠은 편히 잘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현실은 전혀 바뀌지 않는데... 노무현이 남기고 간 파괴적인 유산은 그대로인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인을 추앙의 대상으로 만들어 자신들을

토닥토닥 어루만져주는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죽은 노무현과 산 이명박, 두 괴물의 쌍두마차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한국 사회의 정치를 질식시키고 말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고등학교 2학년 때, 잠깐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다. 그 때까지는 나도 순수한 마음이 조금은 남아있던 터라 그냥 봉사활동같은 걸 여러사람들과 함께 다니고 싶다는 마음에 짝궁이 다니던 교회에 따라갔다. 그런데, 한 두어번 갔을때쯤에 교회에 발길을 뚝 끊어버리게 만드는 일을 겪게되었다. 그것은 바로 통성기도 때문이었다. 목사의 지시에 따라 신도들이 다같이 일어나더니 옆사람과 손을 잡고 목놓아 울부짖으며 기도를 한다. 여러사람이 한꺼번에 울부짖으니 각자의 기도내용이 뭔지 알 수도 없다. 다들 ‘용서하소서’라는 말은 반복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이런 ‘과격한’ 기도 행위가 낯설었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들 다 울면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나만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으려니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나도 뭔가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할 일을 생각해 내려고 애를 썼다. 결국 엄마, 아빠, 누나한테 잘못했던 것들을 생각해 내어 조금씩 목소리를 내 보았다. 아, 그런데 끝까지 눈물은 안 났다. 좀 억울하다 싶으면서도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한 ‘간절한 기도’에 함께하지 못한게 못내 찝찝했다. 그러나 그 일 이후로 한달도 안되어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있지도 않은 슬픔을 쥐어 짜낼만큼 내 감정의 상상력은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8년 후인 2009년 오늘, 나는 또 다시 통성기도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많은 시민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 수도 봉하마을에만 60만, 전국적으로는 20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는 ‘지못미’ 바람이 불고 있다. 사회원로인사라는 사람들은 앞다투어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읊조린다. 친노인사라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워오던 (주로 진보진영) 인사들도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데 대한 죄스러움을 드러낸다.
 
 
나는 왜 이 ‘통성기도’가 불편한가?
 
8년 전 내가 마주쳤던 그 교회의 통성기도 현장에서처럼, 지금의 한국사회는 나를 비롯해 그의 죽음에 울부짖지 않는 사람들을 참으로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인터넷에 오가는 글들을 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참으로 매정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생각이 한나라당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보라“는 사상검증을 받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런 네티즌들의 공격적인 태도보다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진보진영 인사들의 신앙고백이다. 통성기도를 할 때, 단상에 선 목사는 신도들의 죄의식을 북돋기 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울부짖는다. 있는 힘껏 목소리를 쥐어짜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도 한다. 이를 통해 신도와 목사 모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전능하심에 감동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느낀다. 지금 진보진영 인사들이 보이고 있는 작태가 이런 공허한 믿음을 강요하는 목사들의 모습과 다를바가 뭔가?
 
무엇보다도 노무현 대통령 임기 당시 온갖 진보적 운동단체의 대표는 다 맡아왔던 오종렬씨의 언사는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서민후보’였다고 추켜세우고는(프레시안은 이 기사를 전하면서 처음엔 ‘민중후보’라는 표현을 썼다가 ‘서민후보’라는 표현으로 바꾼 이유가 뭔지 해명해 주길 바란다), ‘장렬히 산화’했다고 말한다. 그가 수도 없이 한 집회장 발언들을 생각해 볼 때, ‘장렬히 산화’했다는 표현은 노동·민중열사들의 분신에나 쓰는 표현이다. 그런데 그는 노무현도 ‘장렬히 산화’했다고 말한다. 즉 ‘노무현 열사’라는 것이다. 오종렬씨에게 묻는다. 그는 이 표현을 쓰는데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는가? 비정규직의 삶에 비관하여 목숨을 끊고도 노무현에게 ‘민주화된 시대에 낡은 투쟁방식을 고집한다’고 비난을 들어야 했던 이용석 열사의 얼굴을 대하고도 감히 ‘장렬히 산화’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노무현은 왜 자살을 선택했는가? 수사과정에서 의문점이 많이 남는 것이 사실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는 권력형 비리에 대한 수사를 받다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든 자신을 믿었던 이들에 대한 미안함에서 였든지 간에 말이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 등 이 모든 숭고한 가치들은 그의 마지막 선택과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 그런 그에게 열사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오종렬씨의 발언에 분노를 금치 못하는 것이 오직 나뿐일까?
 
또 김상봉 교수가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한 시대의 종말을 애도함>)을 보자. 그는 “그(노무현)가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을 때, 나는 깊이 좌절하고 실망했으나, 생각하면 그것은 그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한계였다. 자본이 절대 권력이 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 한계 앞에서 변절하거나, 세치 혀로 한계를 넘어갈 때, 그는 자기 방식으로 시대의 한계와 끊임없이 부딪혔고, 결국 좌절했다.” 라고 말한다. 이 무슨 궤변인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의 당당한 자기고백이 ‘우리 시대’(대체 이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386인가?)의 한계였다고 말하며 그에게 면죄부를 주고는 그의 삶은 치열했다는 찬사로 마무리짓는다. 그리고 글의 말미에서 “뜨겁게 사랑했으므로 내가 미워했던 마음의 벗이여, 잘 가오. 그대 영전에 오래 참았던 울음 우노니, 그대 나 대신 죽어, 내 마음에 영원히 살아 있으리.”라고 뜨거운 연정을 표시한다. 이로써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그 ‘시대’의 잔혹함을 못이겨 목숨을 버려야만 했던 수많은 열사들의 이야기는 노무현이 ‘시대의 한계와 끊임없이 부딪치는’ 동안 벌어진 한낱 에피소드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이 사랑고백에 담긴 무한한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침몰하는 듯 보였던 자유주의 개혁세력에게 힘찬 찬송가가 되어 입에서 입으로 불려질 것이다.
 
 
누가 노무현의 무덤 앞에 무고한 제물을 갖다 바치는가?
 
김상봉 교수의 말대로 그가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면, 그 상징은 진작에 스러졌어야 했다. 그의 일생, 적어도 90년대 이후 ‘정치인 노무현’의 일생이 상징하는 바는 민주도, 정의도, 평등도 아닌 오히려 그 훈장을 밟고 일어서 기지개를 편 탐욕과 착취의 시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2007년,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부 충격을 통한 개방과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추진된 한미FTA에 반대하며 스러져간 어느 평범한 택시 노동자의 삶이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다.
 
그의 죽음 앞에, 그가 진작에 버렸던 민주, 정의, 평등이라는 가치를 제물로 갖다 바치지 말라. 그의 죽음 앞에, 이미 이 세상엔 없는 소중한 열사들의 정신을 제물로 갖다 바치지 말라.
 
나는 노무현이 투신했다는 뉴스를 접한 지난 토요일 오후, 시내의 작은 영화관에서 2006년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확장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농민들의 삶을 기록한 ‘길’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농민들은 절규했고 울부짖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한 시간 내내 나도 그들과 함께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그 정직한 농민들에게 눈물을 선사한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러므로, 나에게 노무현을 위한 눈물을 강요하지 말라.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 나는 오로지 평택 대추리에서 스러져간 뭇생명들에 안타까워 하는 딱 그 만큼만 노무현이라는 소중한 생명의 (억울한) 스러짐을 애도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무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법

1/
 
전국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분위기로 숙연하다. 그런데 나에겐 추모의 분위기에 마음이라도 보태고 싶어지면서도 망설여지는 일들이 보인다. 그런 모습 때문에 여러 고민이 들어 또 이렇게 짧지 않은 글을 쓰려 한다.
 
많은 이들이 노 전 대통령은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분이고, 그래서 그의 개혁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그와 대립각을 세워오던 진보정당들에서도 이런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검찰조사 등으로 안타까운 상황에 놓였으나, 대통령 재직중에 정치개혁의 초석을 놓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진보신당 논평) 심지어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는 이런 사태가 오기까지 침묵해온 자신들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단다. 이건 웬 고해성사인가?
 
고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나누고 애도를 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재임기간 내내 그의 경제개혁은 물론이고 정치개혁에 있어서도 진정성 없음을 비판해 왔던 진보세력에서 갑자기 이런 태도로 돌변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 나는 이런 태도가 ‘애도’와는 하등 상관 없는 것이라고 본다. ‘애도’라는 것은 하나의 소중한 생명이 남아 있는 다른 생명들 곁을 떠나감을 슬퍼하는 것이지,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핑계로 또는 그 죽음의 억울함에 기대어 결국엔 그가 옳았음을 인정하는 ‘고해성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2/
 
한편 나는 지난 주말 많은 이들의 추모 분위기 속에서 조금은 다른 종류의 슬픔을 느꼈다.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까 봉하마을을 찾아온 조문객들이 조중동 등 언론사들의 왜곡보도를 규탄하면서 하는 말이 "당신들, 어디 노무현 같이 훌륭한 대통령을 이 나라에서 다시 만나 볼 수나 있는 줄 알아?"였다. 2004년 탄핵사태 때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비극적인 방식으로 ‘메이저 보수세력’의 희생양이 된 '마이너 보수세력' 노무현은 점점 시민들 사이에서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인의 최대치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지난 탄핵반대 촛불집회에 나왔던 많은 시민들이 결국 4.15총선 투표장으로 가서 민주당 후보를 찍을 것을 종용받았던 것처럼, 지금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많은 시민들도 그런 반복되는 역사의 순환 속으로 복귀할 것을 강요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3/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니 이런 말이 있더라.
 
"인간 노무현의 특이성은 ('도덕성'의 붕괴라는) 이 사실을 '수치'(shame)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었다. 그만큼 그의 주이상스는 한국 사회의 평균을 넘어서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죽음은 한국 부르주아의 위선을 외설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 이택광 블로그  (http://wallflower.egloos.com/1909217)
 
내가 대학을 다녔던 딱 그 기간만큼 대통령직에 있었던 그의 정책 대부분에 반대했던 나이지만,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위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자살을 그만이 가진 도드라진 자존심 때문이라 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고... (물론 성격을 파악하는 문제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진실로 간주할 수는 없지만...) 노무현이 이명박, 전두환과 대립적으로 보이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비자금 수천억원을 챙긴 놈은 떵떵거리면서 골프치러 다니고, 전과 14범에다가 성매매를 일삼는 비서관을 청와대 내에서 거느리고 있는 대통령도 고개 뻣뻣이 들고 다니는데, 그에 비하면 노무현이 뭐 그렇게 잘못을 했냐는 항변, 나올만도 하다.
 
 
4/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무현 지지자들은 노무현을 죽인 ‘공범’들을 색출해 내 분노를 쏟아내려는 듯 하다. 그런데 한승수, 박근혜, 정몽준 등의 조문이 저지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동영의 조문이 저지된 것은 나로선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동영이 임기말의 노무현 대통령을 많이 씹기는 했지만, 정적(政敵) 수준은 아닌데 굳이 막을 필요 있나? 그런 생각이 들던 와중에 프레시안에 실린 다음 글을 보고 노무현 지지자들의 심성 밑바닥에 있는 사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대통령직에 계실 때 그 수모와 고초를 당하시고도 당당한 의지를 보이셨기에, 언제까지나 꿋꿋하시리라 믿었습니다. 진보라는 사람들이 허망한 몽상을 쫓느라 님을 공격하고 등을 돌려도 희망을 간직하시기에, 늘 저희 곁에서 등불이 되어 주실 줄만 알았습니다. (...)
대통령님을 괴롭힌 모든 인종들을 지목해서 조목조목 비난하고 싶습니다만, "원망 마라"고 하신 당부를 지금은 따르겠습니다. 검찰이 법으로 사람을 잡는 인간사냥개 노릇을 한 것이 아닌지도 지금은 따지지 않고, 얼치기 진보들의 자기방어용 결벽증이 대통령님께 얼마나 부담스러웠을지도 지금은 들춰내지 않고(...)
 
권위주의적인 표현인 ‘각하’라는 표현을 김대중 대통령때부터 쓰지 않는게 관례가 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에게 ‘각하’라는 극존칭을 써가며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노무현을 공격했던 이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여기에 맞장구를 치려는 듯, 일부 네티즌들은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타살에 진보/보수를 막론한 모든 언론사와 정치세력들도 공범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단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치적 분위기는 분명히 진보냐 보수냐, 또는 개혁이냐 수구냐 같은 이념논쟁이 아니라, ‘노무현’이냐 ‘非/反노무현’이냐 라는 대립구도를 띠고 있는 듯 하다.
 
 
5/
 
노무현의 죽음이 현 정권의 정치보복에 의한 타살이라는 점을 백번 인정한다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연루된 이번 사건 또한 이전 정권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권력형 비리의 한 사례라는 것이다. 물론 액수로 치자면 군사정권 시절에 비자금 조성한 놈들과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분명 그들 사이에도 64억이라는 돈이 오갔다. 검찰의 강압적, 저인망식 수사의 문제점을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피해자일 뿐이라고 하는 건 순 억지일 뿐이다.
 
또한 노무현의 도덕적 결벽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그래봤자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평균적인 도덕성이 심각하게 하향평준화된 상황이라 상대적으로 그의 도덕성이 높아보이는 것일 뿐이지만), 처음부터 그를 둘러싼 민주당 세력이 부패했다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이다. 2002년 대선 때 민주당이 불법대선자금 119억여원을 모금했고, 그 중엔 삼성에서 받은 30억원도 있었다.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참여정부가 태생부터 거대 기업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 그래서 참여정부의 부패실상은 암흑 세력의 유혹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씨앗 자체가 부패의 토양에 심어졌다는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에 따르면 ‘참여정부’라는 이름도 삼성 구조조정 본부에서 만들어준 이름이라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개인의 카리스마적 정치 스타일과 탈권위주의적 언행 등은 대중들에게 이런 미묘한 차이를 커다란 간극인 것으로 이해되게 했으며, 이런 차이에 기반해 결집한 ‘노사모’등은 이른바 ‘3김정치’에 후속하는 패거리 정치를 만들어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터진 (그들의 상징적 존재인) 노무현의 죽음은 급기야 지금과 같은 악무한적 원한과 분노의 정치로 귀결되고 있다. 나는 바로 이것이 고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번 사건이 낳은 가장 비극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시민들의 정치적 상상력은 ‘노무현이냐 이명박이냐’하는 양자택일식 선택지 안에서 한계지워질 것이고, 이명박도 노무현도 아닌 제3의 길을 추구해 왔던 진보운동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억압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사건은 당연하게도 표면상으로는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권력이 죽은 권력을 살해한 사건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죽은 정치인의 유령이 산 정치를 지배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6/
 
소중한 생명의 죽음을 앞에 두고 너무 매정한 말만 쏟아놓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다른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바로 ‘소중한 생명의 (억울한) 죽음’이기에 애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에게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에게도 ‘정치인 노무현’이 훌륭해 보일때가 있었다. 대통령 후보시절, 모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반미 좀 하면 어떠냐’는 발언으로 청중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장면을 본 고3시절의 나 또한 함께 박수를 쳐 주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웹서핑 중에 발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파업중인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앞에서 행한 연설문을 보고 왠지모를 생경한 감동이 느껴졌다.
 
“여러분! 이번 여러분의 파업은 법률상 위법입니다. 그런데 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 산동네의 철거민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도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해서 따뜻하게 등 눕힐 수 있는 구들장이 필요하고 그 사람 자식들도 밥 먹던 상이나마 행주로 닦아 책 놓고 공부할 수 있는 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법에 위반되었다고 무허가라고 집을 뜯어버립니다. 노점상들도 그렇습니다. 입에 풀칠을 하려고 나와 있는 노점상들을 도로교통법을 걸어 목판을 차버립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집에 불이 나 다섯 가구가 몽땅 타버렸는데 피해액이 백만 원도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목판 하나는 전 재산입니다. 밥 못 먹게 하는 법,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여러분! 헌법에는 노동3권을 명시해놓고 방위산업체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입만 열면 안보, 전쟁 위협을 하면서 비행기로 3분 거리에 있는 서울에 왜 63빌딩을 짓습니까? 방위산업체 쟁의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을 콱 밟아버려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합니다. 또 말로만 하지 말고 악법은 국민의 손으로 철폐시켜야 합니다. 노동자가 놀면 온 세상이 멈춥니다. 그 잘났다는 대학교수, 국회의원, 사장님 전부가 뱃놀이 갔다가 물에 풍덩 빠져 죽으면 남은 노동자들이 어떻게든 세상을 꾸려 나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노동자가 모두 염병을 얻어 자빠져 버리면 우리 사회는 그날로 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 경제, 사회관계 등 모든 것을 만들 때 여러분이 만듭니까? 그게 바로 오늘 한국의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 우리 다함께 노력합시다.“
 
많은 이들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지 않는다. 비정규직 법안을 만들어 수 많은 이들을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고, 한 평생 땅에만 의지해 정직하게 살아온 평택 대추리 농민들을 내쫓아 미군기지를 들여오고, 게다가 컴퓨터 게임하듯 소중한 생명들을 짓밟았던 미국의 이라크 학살동맹에 참여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여전히 나에게 비판의 대상일 뿐이다. 또한 나는 그가 ‘민주화된 시대에 분신이라는 낡은 투쟁 방식을 고집한다’고 비판했던, 그의 재임기간에 죽어간 수많은 열사 노동자들을 그곳에 가서 꼭 만나뵙고 그들에게 사과하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인간’ 노무현을 추모한다. 발톱이 빠질 정도로 고문당한 부산지역 운동권 대학생들을 변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노동자 파업에 함께 나서 이 땅에 ‘법’이 가야할 길이 어딘지를 고민했던 ‘변호사’ 노무현을 추모한다. 그런 ‘인간’ 노무현은 2009년 5월 23일 보다 훨씬 전에 죽은 것이 분명하지만, 오늘 우리가 추모해야 할 노무현은 단연 후자라고 생각한다.
 
 
7/
 
고인의 죽음을 진정 애도하는 길은 무엇일까?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이들을 고인의 무덤 앞에 제물로 갖다 바치고 ‘나야말로 진정한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다’라고 외치는 신앙고백은 올바른 애도의 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땅의 ‘정치’ 자체를 죽음으로 내모는 길이다. 모르긴 몰라도 고인은 이 땅의 ‘정치’까지 자신의 동행자로 만들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남긴 유산을 올곧게 평가하자. 그것이 진정 한 생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살기 위하여', 그리고 <에코페미니즘>

 

포스터 사진이 큼직한 것이 마음에 든다.

왜 난 저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윤도현의 <이 땅에 살기 위하여>라는 노래 제목이 생각났을까?

전혀 느낌이 다른 노래는 아니긴 하지만... 뭐 그건 그렇고...

 

지난 16일(벌써 2주나 되었네ㅋㅋㅋㅋ)에 돌돌이와 해장국집딸과 함께 대전아트시네마에서 본 다큐다.

게다가 덤으로 '살짝 부담스러운' 감독과의 대화까지 ㅋㅋㅋㅋㅋ

 

다큐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새만금의 끝물막이 공사를 진행하려는 정부에 맞서 (이제는 육지가 되어버린) 섬마을 사람들은 삶을 건 투쟁을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건'들에 부딪치게 된다.

 

사건1) 새만금을 죽이는 노무현은 개XX라는 선정적인 언술로 매스컴을 탄 도올 김용옥이 주민들의 농성장에 찾아와 3일간 단식투쟁을 한다. 그 3일동안 농성장은 언론들로 북적였고, 새만금의 이야기는 공중파를 타고 좀 알려지나 싶었다. 그러나 도올은 3일 뒤 빠이빠이했고, 그 일 때문에 괜히 지역 유지들과 주민들과의 마찰만 더 심해졌다.

 

사건2) 끝물막이 공사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투쟁 방향을 놓고 주민들 사이의 격론이 벌어진다.

주민대책위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분들(대부분 남성)은 보상을 더 받아내는 쪽을 요구사항을

돌리자고 했고, 이에 반대하는 분들(대부분 여성)은 끝까지 해수유통을 고집했다.

여기서 굳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표식을 단 것은 그만큼 이 다큐에서 이 여성어민들의 존재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 다큐에서 가장 인상적인 명대사를 남기신 이순금 이모님(이모님이라는 표현은 이강길 감독이 쓰는 표현. 이런 표현이 맞나 싶으면서도 딱히 다른걸 못찾겠어서 일단 패스)을 비롯하여 많은 여성농민들은 누구보다 비타협적인 투쟁을 요구한다. 왜냐면 해수유통만이 자연과 함께하며 살아온 자신들의 삶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이 아닌 이상 다른 어떤 곳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뭐 요약도 아니고 정리도 아니고 글이 아주 요상하게 되어버렸는데,

여튼 이순금 이모님의 명대사는 이렇다. "갯벌에서 일할 때 나는 날아다니는 새들 조그만 낙지들 하고 노느라고 남들의 2/3밖에 못잡아, 그래도 난 일하는게 너무 즐거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가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하면서 부자는 아니지만 가난하지 않게 살 수 있으니..."

 

아, 진짜... 글로 옮겨놓으니 느낌이 팍 죽어버리네... 여튼 궁금하면 다큐를 직접 보시고...

이 분들이야말로 에코페미니즘을 온 몸으로 실천하시는 분들이다.

 

 

 

!@#$%^&*

에잇, 진짜 글이 너무 허접한 걸.... 난 왜 맘먹고 쓰질 않으면 항상 이렇게 막가는 글을 쓰는 걸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발췌독] 이반 일리히 - 병원이 병을 만든다

현대의 의료가 민중의 건강에 가하는 위협은, 교통량과 그 강도가 민중의 기동성에 가하는 위협, 교육과 미디어가 민중의 배움에 가하는 위협, 도시화가 민중의 자기 집을 짓는 능력에 가하는 위협과 유사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요한 제도적 노력은 반생산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교통에 있어서 시간을 소비하는 가속화,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커뮤니케이션,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높은 수준의 기술적 능력을 몸에 익히도록 하여 전체적으로는 무능력한 전문가 바보가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교육, 이 모든 것들은 의료에 의한 병원병의 생산과 지극히 닮은 현상들이다. 각각의 경우에 주요 제도적 분야는 그것을 만들고 기술적으로수단화하기 위한 특정한 목적으로부터 사회의 방향을 돌려놓고 있다. (17쪽)

 

 

 

 

보르네오에 역설적인 질병통제의 좋은 예가 있다. 말라리아 제압을 위하여 촌에서 사용된 살충제가 바퀴벌레에 축적되어 대부분의 바퀴벌레가 저항성을 갖게 되었다. 이 바퀴벌레를 도마뱀붙이가 잡아먹고 혼수상태에 빠져 고양이의 먹이가 되었다. 그 결과 고양이는 죽고 쥐들이 불어났다. 그리고 쥐들이 페스트를 전염시켰다. 그래서 군대는 고양이를 낙하산으로 정글의 마을에 투하해야 했다. (30쪽)

 

 

 

 

의사에 의해 가해지는 고통과 질병은 언제나 의료 행위의 한 부분이었다. 전문가의 무감각, 태만, 완전한 무능력 등은 낡은 형태의 이료 과오이다. 의사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에게 그 기술을 행사하는 기능인에서 과학적 법칙을 다양한 환자들에게 적용하는 전문가로 변모함에 따라, 의료 과오는 의사 개인의이름에 오점을 남기지도 않고, 거의 존중받다시피 하는 일이 되었다. 옛날에는 신뢰의 남용과 도덕적 결함이었던 것이, 현재에는 장치나 수술자의 우연적 사고라고 합리화되고 말았다. 복잡하게 기술화된 병원에서 태만은 '우연한 인간적 오류' 또는 '시스템의 고장'으로 미화되고, 무감각은 '과학적인 냉정함'으로 호도되며, 무능은 '전문적 장치의 부족'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진단과 치료의 비인간화는 의료 과오를 윤리적 문제에서 단순한 기술적 문제로 변모시켜 왔다. (39-40쪽)

 

 

 

 

나는 스스로 강해져 가는 이 제도적인 부정적 피드백의 고리를 고전 그리스어의 동의어에 따라 '의료의 네메시스(nemesis)'로 부르고자 한다. 그리스인은 자연의 힘 중에서 신들을 보았다. 그들에게 네메시스는, 신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특별히 지키고 있는 특권을 침략한 사람들을 습격하는 신들의 복수이다. 네메시스는 인간이기보다는 영웅이고자 하는 인간의 비인간적인 시도에 대하여 반드시 가해지는 벌이다. 수많은 그리스어의 추상명사와 같이 네메시스는 신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는 '교만', 곧 신의 속성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뻔뻔스러움에 대한 대자연의 반응을 상징한다. 현대의 위생상의  교만함이 새로운 의료 네메시스의 병상(病狀) 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44쪽)

 

 

 

근원적 독점은 하나의 단체, 또는 정부에 의한 독점 이상으로 뿌리 깊은 것이 된다. 그것은 수많은 형태를 갖는다. 교통 수단으로 붐비는 도시가 건설되면, 인간의 다리에 대한 평가는 낮아진다. 학교가 학습을 점유하게 되면 독학자의 가치는 낮아진다. 위기의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병원이 맡게 되면 병원은 사회에 새로운 죽음의 형식을 강요한다. 독점은 보통 시장을 매점하나 근원적 독점은 사람들이 스스로 행위하고 스스로 만드는 능력을 빼앗아 버린다. 상업상의 독점은 상품의 유통을 제한한다. 그리고 독점이 집요하게 되는 만큼, 비시장적인 사용가치는 마비된다. 근원적 독점은 나아가 자유와 독립을 침범한다. 그것은 환경의 형태를 바꾸고, 사람들에게 스스로 싸우는 힘을 주었던 환경의 여러 특징을 '전유하는' 것에 의해, 사회 전체에 사용가치를 상품으로 바꿔치기 할 것을 강요한다. 집약적 교육의 결과 독학자는 고용되지 않고, 집약적 농업은 자작 농부를 파괴하며 ,경찰의 배치는 지역 사회의 자기 통제를 좀먹는다. 의료의 유해한 확대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곧 상호치료, 자기 투약을 경범죄나 때로는 중죄로까지 만들어 버린다. 임상적 병원병이 위기적인 강도에 도달하여 그 사업 자체의 몰락에 의해서만 역전될 수 있을 때 의학적으로 불치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병원병은 전문가의 지배를 없애는 정치적 행동에 의해서만 역전될 수 있다. (51-52쪽)

 

 

 

 

의료화된 사회에서는 의사의 영향력이 지갑이나 약상자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분하는 분류에까지 미친다. 의료 관료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곧 자동차 운전이 가능한 자, 일을 하여서는 안 되는 자, 감금되어야 하는 자, 군인이 될 수 있는 자, 국경을 넘어도 되는 자, 요리해도 되는자, 매춘해도 되는 자, 미국 부통령에 출마할 수 없는 자, 사망자, 범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자, 범죄를 범할 경향이 있는 자 등이다. 1766년 11월 5일,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명령을 내려, 궁정의 의사들에게 건전한, 곧 '정확한' 증언을 보장하도록 하기 위하여 피의자가 고문에 이길 수 있는가 어떤가를 증명할 것을 요청했다. 이것은 명령에 의해 의학적 증명서를 설정한 최초의 법이었다. 그 후 형식을 충족시킨 보고서를 작성하고 진술서에 서명하는 것이 점점 다수의 의사로부터 시간을 뺏게 되었다. (86-87쪽)

 

 

 

 

일정한 제한은 있으나 유효한 의학적 치료의 엄밀한 한계는 오랫동안 질병으로 인정되어온 상태--류머티즘, 맹장염, 심장마비, 퇴행성질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더욱 최근에 의학적 치료에 대한 수요를 창출시킨 상태에 적용되고 있다. 예컨대 노년은 불안한 특권, 또는 비참한 종말이라고는 생각되었지만 결코 질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의사의 지시 하에 놓여직 ㅔ되고 말았다. 노인 치료에 대한 요구는 증가되고 있으나 그것은 생존하는 노인이 더욱 많다는 이유에서보다는, 노년은 치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인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91쪽)

 

 

 

전문가의 서비스에 의존하는 노인이 증가함에 따라, 노인을 위한 특별한 시설에 가두어지는 노인의 수도 증가된다. 반면 이웃 사람은 짐이 되는 사람들에게 더욱 냉담하게 된다. 이러한 시설은 노인 처리를 위한 현대적 전략으로 생각되고, 노인은 다른 사회에 의한 것보다는 공명정대하게, 덜 지독한 형식으로 수용된다. 입소 후 1년간의 사망률은 본래의 환경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의 사망률에 비하여 훨씬 높다. 가정으로부터 단절됨에 따라 다수의 중병이 나타나고 사망률도 오른다.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시설 입소를 희망하는 노인도 있다. 의존하는 것은 언제나 가혹한 것이고, 노인에게 있어서는 특히 그러하다. 젊은 시절의 특권이나 빈곤도 현대에는 노년기에 정점에 도달한다. 엄청난 부자와 확실한 독립성을 가진 인간만이 의료화되지 않은 자기 인생의 끝을 선택할 수 있다. 곧 빈민은 의료화에 굴종하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이 사는 사회가 풍부하게 되면 될수록 의료화는 극단 또는 보편적인 것이 된다. 노년을 전문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상태로 변모시킴에 따라, 노인은 세금으로 지탱되는 특권과 관련된 어떤 차원에서 자신이 수탈되고 있음을 통절히 느끼는 소수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때로는 비참하고 무시에 의해 크게 낙담하는 노인으로부터 가장 슬픈 소비자 그룹에 속할 자격이 있는 구성원으로 변모하는 것까지, 결코 충분한 것을 획득할 수 있도록 계획되고 있지는 않다. (94쪽)

 

 

 

위기의 의식화(그것은 병적인 사회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나)는 의료 담당자에게 세 가지를 부여한다. 그것은 보통으로는 군인만이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의료 담당자에게 부여한다. 위기라고 하는 압력 밑에서, 지휘관이라고 믿어지는 전문가는 쉽게 정의와 예의범절이라고 하는 일반적 규범으로부터 면제된다. 죽음을 통제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전상자를 치료하는 우선 순위를 선택할 수 있는 지휘자로, 그의 살인은 정책적으로 은폐되고 만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모든 행위가 위기의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매혹적인 변경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의료 기업에 의해 요구되는 시간의 폭과 지역 사회의 공간은, 종교적 또는 군사적 시공간과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것이 된다. 임종 관리의 의료화는 단지 불길한 꿈을 의식화하고 지겨운 노력에 대한 전문적 면허 확대하는 것만은 아니다. 곧 임종의 치료가 확대되는 것은 의사로 하여금 그가 요구하는 수단의 기술적 유효성을 증명할 필요를 없애버린다.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하는 그의 힘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마지막으로 환자의 죽음은 의사를 잠재적 통제와 비판의 피안에 방치한다. 환자의 마지막 시선과 '죽어 가는 자'의 일생의 전망 중에는 희망이란 없고 단지 의사의 마지막 기대가 있을 뿐이다. '위기'를 향한 어떠한 시설의 방향이라도, 거대한 일상적 무효를 정당화한다. (110-111쪽)

 

 

 

 

 

의료 처치가 '흑마술'이 되는 것은, 그것이 환자에게 스스로 치유하는 힘을 부여하는 대신에, 병자를 불구자로 만들어 자시에게 가해지는  치료를 훔쳐보는 자로 신비화시키는 때이다. 의료 처치가 '병든 종교'로 변하는 것은, 그것이 병자의 모든 기대를 과학과 그 기능에 집중시키고, 병자가 자신의 곤경에 관한 시적 해석을 구하거나, 고통을 당해본 사람--고인이든, 이웃사람이든--중에 존경할 만한 모범을 발견하는 것을 잊게 하는 의식으로서 나타날 대이다. 의료 처치는 그것이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관용을 증가시키는 동기와 훈련을  사회에 부여가힉 보다는, 환자를 전문적인 환경 속에 격리시키고 말았을 때에 '도덕적 퇴폐'에 의해 질병을 증가시킨다. 생의학의 이름 아래 생겨난 마술적 파괴, 종교적 상해, 그리고 도덕적 퇴폐는 사회적 병원병을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장치이다. 그것은 죽음의 의료화와 혼합되고 있다. (126-127쪽)

 

 

 

 

전통문화와 기술 문명은 정반대의 가정에서 출발한다. 모든 전통 문화에서 정신요법과 신앙 체계 그리고 고통을 참기 위해 필요로 하는 약은 일상생활 속의 행동에 포함되고, 현실은 냉엄하고 죽음은 회피될 수 없다고 하는 확신을 반영하고 있다. 20세기의 디스토피아, 반 유토피아에서 내부 및 외부의 고통스런 현실을 인내할 필요성은 사회 경제 시스템의 실패로 해석되고, 고통으 비정상적인 개입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긴급한 우발적 사건으로 다루어진다. (148쪽)

 

 

 

 

치유하는 자의 에토스는 종교, 민간 전승, 진통제의 용이한 이용이 일반인을 훈련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과 마찬가지의 위엄을 갖춘 실패에 대한 수용력을 의사에게도 부여했다. 현대 의료의 종사자들은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곧 그의 제 1의 방향 설정은 치료이지 치유가 아니다. 그는 인내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이 환기하는 의문 부호를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한 건의 서류 속에 모을 수 있는 불평의 목록 속에 떨어뜨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고통의 메커니즘을 알고 있음을 과시하고, 그리하여 환자의 동정으로의 초대를 뿌리치고 만다. (160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광주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하여 - 황석영 비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를, 그리고 5.18을 생각할때마다 떠오르는 책의 제목이다. 수많은 동료시민들의 죽음에 대한 광주의 슬픔은 그 자체로 시대의 어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둠 속에서도 끝없이 뜨거운 횃불을 피워올리며 어둠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지금 우리의 기억 한 가운데에 와 있다. 이제 30년이 다 되어가는 광주에 대해 이런 정도의 기억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결국 그 당시 광주의 주체들이 이 사건을 단지 소외된 지방 도시의 우울증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민중 전체의 아픔과 공감이 될 수 있도록 부단히 자신의 환부를 드러내는 모노드라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같은 책도 소설가 황석영이라는 배우의 입을 빌어 발화되는 광주항쟁 생존자들의 자기 독백이었고, 우리는 그 연극의 비장함과 아픔의 크기 때문에라도 관객으로 끌려나올 수 밖에 없던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기꺼이 광주의 아픔을 전해주는 확성기 역할을 했던 황석영이 얼마 전 광주항쟁(아, 그런데 그는 이를 신군부의 언어인 '광주사태'라고 표현했다!!) 같은 일이 영국에도 있고 프랑스에도 있고 때가 되면 다 있는 일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이명박을 '중도'라고 치켜세우며 중앙아시아 순방에 동행했다는 점에 대한 불만은 여기서 굳이 하지 않으련다. 이 정도 발언은 어떠한 분석도 필요 없는 노망난 늙은이의 망언이라고 해두고 넘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통과의례, 또는 성장통이라는 말인가? 어디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이고 무엇이 되기 위한 성장통인가? 그런데 나는 이렇게 황석영의 발언 심연의 의도를 따지기 이전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게 있다. 그래 좋다, 백번 양보해서 광주와 같은 아픔이 영국에도 있고 프랑스에도 있는 일이라고 치자. 두 나라 모두 엄연히 지배계급의 압제에 맞선 민중들의 혁명과 반란의 역사가 있는 나라이니만큼 그런일이 없을리 없겠지. 그러나 대륙의 양 끝에 자리잡고 있는 서로 다른 나라의 민중들의 경험이, 흙이 되어버린 망자들의 뼛가루와 그들의 관을 태극기로 씌워 보낼 수밖에 없었던 산자들의 고동치는 혈관 속에 오롯이 각인되어 있는 아픔의 기억을, 어떻게 그런 쉬운 한마디로 하향 평준화 시킬 수 있는가? 나는 광주의 아픔이 파리와 런던의 민중들이 겪었던 아픔보다 더 값지고 숭고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건 비교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거다. 오히려 다음의 사례가 말하는 것과 같이 황석영의 발언이 "광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저그런 '지옥'의 하나였을 뿐"임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4년 초, 포위 상태에 놓여 있던 사라예보에서 일 년 이상 거주해 왔던 영국의 포토저널리즘 작가 폴 로우는 절반 이상이 파괴되어 버린 어느 미술관을 빌려 자신이 찍어 왔던 사진들을 전시했다. 그 당시까지도 파괴되어 가고 있던 자신들의 도시를 찍은 새로운 사진을 간절히 보고싶어 했던 사라예보 주민들은 소말리아의 사진들이 포함된 데에 적잖이 언짢아했다. 로우는 소말리아의 사진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전문 사진작가이며, 그저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는 두 개의 작품을 전시했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사라예보 주민들로서도 언짢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타인들의 고통과 나란히 보여준다는 것은, 사라예보가 겪은 수난을 그저 [잔악행위의] 또 다른 사례일 뿐이라고 일축하면서, 양자의 고통을 비교하는 것(어느 지옥이 더 나쁜가?)이었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후, 165-166pp)
 
광주의 아픔은, 광주의 기억은, 그것이 한반도 민중, 나아가 세계 민중이 함께 아파해야 하고 함께 공감해야 하는 그런 보편성의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하는 것과 정확히 동시에, 다른 종류의 아픔으로 환원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호남의 특수한 아픔과 고통으로 기록되어져야만 한다. 광주의 그것을 파리와 런던 등 다른 도시들의 상흔과 같은 테이블에 올려놓고, "이 봐, 광주도 별거 아니잖아. 다른 나라에서도 다 겪는 일인데 뭘. 그것도 프랑스, 영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말이야. 그러니 우리가 그런 고통을 겪는 것 쯤은 선진국이 되기 위해 거쳐가야 할 성장통이라고 생각하면 돼."라고 말하는 것처럼 광주를 모욕하는 말이 또 있을까? 이런 발언은 또 광주의 상처를 한국이라는 '국가' 전체의 아픔으로 승화시키는 척 하면서 한국이 '정상적인'(??) 국가가 되는데 일조한 부품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것도 대륙 반대편 끝에 있는 다른 나라의 '부품'과 비교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프랑스가 민주국가로 발돋움 하는데 기여한 것처럼 광주항쟁도....." 그렇게 정상국가화에 기여한 부품이 되어버린 광주항쟁에서는 이제 윤상원이라는 이름도, 김남주라는 이름도, 그리고 도청을 사수하며 신군부와 맞선던 수많은 용감한 시민들의 이름도 사라지고 없다.(그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고 단지 '수많은'이라는 형용사로 덮어버리고만 나의 무지함을 망자들께서 용서해 주시길 바란다.) 그것 스스로는 고통을 느낄 수도, 고통을 나눌 수도 없는, 그 누구의 이름도 아닌 '국가 유공자'만이 남게 된다.
 
왜 '국가 유공자'는 고통을 느낄수도 나눌수도 없는가? 그것은 옛날 일이기 때문이다. 옛날 일이고 그 가해자들의 주범은 이미 10년도 더 전에 법정에 서서 심판을 받았다. 가해자는 처벌 받았고, 피해자는 금전상의, 명예상의 보상도 받았다. 그러니 잊어라! 굳이 필요한 기억이 있다면(어떤 기억이 필요한지는 비로소 '정상상태'가 되신 국가께서 친히 선정하신다) 박물관으로 보내버려라! 이제부터 기억은 박물관이(즉 '국가'가) 압수한다! 그 박물관 입구에서는 친히 '정상국가'의 경찰들이 치안을 맡아주겠다. 그러므로 이 박물관이 허락하지 않은 기억을 다시 되살려 박물관의 벽을 허무는 행위는 '정상국가'의 '정당한' 공권력으로 철저히 응징하겠다! 이것이 오늘날의 '정상국가'가 광주를 화석화시키는 방식이다. 그들이 볼 때 광주의 고통을 느끼고 나눈다는 것은 피해망상증에 걸린 환자가 이를 전염병으로 발전시켜 SI처럼 퍼뜨리는 행동쯤으로 보일 것이다. 치사하게 돈도 다 받아 처먹고서!!!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김상봉 교수가 오늘(2009.05.15) 아침 라디오 인터뷰에서 황석영을 비판했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김상봉 전남대 교수, “황석영의 자기망각, 굳이 변절로 표현하기도 꺼려져”>>, CBS 라디오) 그는 "다른 나라에도 시민이나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 발포가 있을 수 있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 당시의 신군부라는 건 합법적인 국가권력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 한반도 땅에 김상봉 교수가 말하는 의미의 합법적인 국가권력이 세워진 사례가 있는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 권력이 노동자와 시민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 권력의 합법성은 뿌리에서부터 부패되기 마련이다. 오히려 나는 그 국가권력이 정상적이었기 때문에 '발포'할 수 있었다고 본다. 광주의 유공자들에게 보상도 했고, 명예회복도 시켜준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바로 '정상국가'이기 때문에 백주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시민들을 짓밟는게 아닌가? 이건 정상국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은 만들어질때부터 공(空)문구였기 때문에 국가존립 여부를 여기에 기댈 필요는 없는 거고, 다만 인민주권을 끊임없이 기만하고 위장할 이데올로기만으로도 국가는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물론 그 정당성을 인정한 것은 극히 소수일 뿐이다. 그래서 1980년의 전두환, 2009년의 이명박 모두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준 그 '소수'에게 보답을 해야 했다. 그것이 자본주의적 국가의 정상적 정치행위 아닌가?1)
 
나는 여기서 갑자기 평생 학교와 병원 등 근대 문명 시스템을 비판하는데 지적 노력을 쏟아냈던 이반 일리히의 주장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박홍규 역, 미토, 2004. 원제는 >)에서 현대 의료 시스템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가한다. "현대 의료의 종사자들은 인내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이 환기하는 의문 부호를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한 건의 서류 속에 모을 수 있는 불평의 목록 속에 떨어뜨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160쪽)  현대 의료의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최소한 그것을 '동정'이라도 하려는 노력도 내팽겨친 채, 고통을 인위적인 분류 속에 밀어넣고 고통받는 주체와 '고통'을 끊임없이 분리시켜 '고통'을 '삭제'하려 한다. 그 결과 환자는 의사에게 점점 타율적인 존재가 되고, 스스로 고통을 인내하는 힘을 상실하게 된다.2)
 
일리히가 말하는 현대의료의 의사와 환자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광주항쟁의 생존자로 치환시켜 생각해 보자. 지난 몇 년간 국가폭력의 가해자였던 '국가'는 어느샌가 군복을 벗고 피해자들을 치료하는 의사의 까운을 입고 나타났다. 의사가 된 국가는 매년 5월 항쟁의 그날이 되면 고통의 환부를 제거하기 위한 집단 의료행위를 벌인다. 그러나 고통은 제거되기는 커녕 항쟁 이후의 지난 30년 역사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부호를 던진다. 민주주의에 대해, 온전한 해방에 대해 제기되는 의문 부호는 그러나, 끊임없이 국가에 의해 마침표가 될 것을 강요받는다. 그래서 2003년부터 병원장에 취임한 노무현 원장은 '비정규직'이라는 커져만 가는 의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몸에 불을 붙인 이용석 열사 등을 향해, "민주화된 시대에 낡은 투쟁방식을 고집한다"는 진찰결과를 내놓았다.(결국 피해망상에 빠졌다는 말 아닌가?) 그 진찰결과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생각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환자들은 결코 병원에 입원되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80년 광주는 단지 비극일 뿐이고 매우 우발적이며 비정상적인 사태일 뿐이라는 그들의 생각으로는 고통은 제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김상봉의 말마따나 국가와 민중의 항시적 전쟁상태였던 우리 근대사에서 광주는 필연이었다. 진정 고통의 종식을 바란다면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게 항복을 강요하고 치료받기를 요구할 게 아니라, 고통을 인내하면서도 전쟁상태에서 끝내 승리하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empowerment), 그리고 연대(solidarity)가 필요했다.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이와 같이 생존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연대해 줄 것을 호소한 실천적 문학의 상징이었다.
 
그랬던 황석영이 이번에 국립병원 의사로 취직했는가 보다. 그리고는 외친다.  "내 서류가방을 찾아보니까 너네가 겪고 있는 고통의 증상들은 다른 나라에서도 있던 사례더군. 그러니 뭐 특별한 것은 아니고, 우리 정신과에 와서 치료를 받도록 해."
 
 그래서 나는 감히 이렇게 주장한다. "광주를 그 스스로 말하게 하라! 광주의 기억은 국가의 것이 아니다. 그 아픈 기억을 낳은 환부를 간직하고 있는 이들, 그리고 이들과 소통하면서 상처를 치유하려고 연대하는 이들의 것이다. " 역사 속에 상처로 남은 우리의 모든 기억들은 이제 병원에서 퇴원하라. 그리고 아무도 광우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모두가 아팠던 2008년 5월 처럼, 모두가 광주의 상처를 안고 가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그러나 나의 이런 언급이 한편으로는 국가는 경제적, 계급적 관계의 반영일 뿐이라는 표출론적 국가관을 표출론적 국가관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겠다. 하지만 여기서 굳이 그런 오해를 낳을 수도 있는 언급을 한 것은 내가 표출론적 국가관을 지지해서라기 보다는 김상봉 교수의 발언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쓴 비유적인 궁여지책일 뿐이었음을 밝힌다.
 
2) 이와 같은 일리히의 현대 의료 비판에 대한 분석이 이 글의 주제는 아니므로 그의 주장에 대한 옳고 그름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여기서는 단지 그의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대한 비유만을 빌려오고자 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