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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19
    공공노조;선거-관료제-민주주의etc.
    겨울철쭉
  2. 2007/02/18
    김명호 관련글을 다시 보다가.
    겨울철쭉
  3. 2007/02/12
    [독서]사람풍경, 천개의 공감
    겨울철쭉
  4. 2007/02/11
    산별노조-지역운동에 대한 추가적인 토론
    겨울철쭉
  5. 2007/02/09
    공공노조, 쟁점과 전망
    겨울철쭉
  6. 2007/02/07
    pc 바탕화면을 바꾼다는 것(2)
    겨울철쭉
  7. 2007/02/04
    당,노조 활동가들의 노동조합(3)
    겨울철쭉

공공노조;선거-관료제-민주주의etc.

영국 인민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돼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 루소, "사회계약론" 3권.

 

 

무한히 복잡한 공공노조 선거제도

 

공공노조 선거 기간이다.(투표는 21~23일 동안 진행된다.) 금속노조는 1차 선거가 끝나고 결선이 예정되어 있다. 금속노조보다는 작지만 유례없는 규모와 복잡한 조건 속에서 진행되는 선거를 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당장 걱정되는 것은, 이 선거가 과연 제대로 진행될 수 있겠느냐는 불안. 이것은 선거제도의 지나친 복잡성과 관련있다. 아래 공공노조에 대한 글에서, 공공노조가 지역본부-업종본부의 이중골간 체계를 인정하면서 관료조직이 두배로 확대되고 말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러한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서 선거는 두배로 진행되고 있다.

 

한명의 조합원이 투표해야하는 투표용지는, [중앙 위원장/처장], [지역본부 본부장/처장], [업종본부 본부장/처장], [지역선출 중앙대의원], [업종선출 중앙대의원]다섯개 선거에 여성할당 별도 투표용지까지 모두 7장이다. 후보는 특히 대의원의 경우 큰 선거구는 12~16명에 이르는데, 이 결과 한명의 조합원이 투표해야하는 후보자수는 무려 30여명에 이른다. 이번 선거와 지부-지회 선거를 겸하는 경우에는 그 수는 더 늘어난다. 게다가 현재 규약규정상 3월 중에 지역본부, 업종본부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해서 이러한 규모의 선거를 한번 더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이쯤되면 "조합원을 표찍는 기계로 전락.."운운은 더 이상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선거를 많이 한다고 민주주의가 증진되는 것은 아닌만큼 나는 3월 선거는 하지 않도록 제도를 개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산별노조 건설 직후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30여명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조합원에게 어떻게 느껴질까? 투표용지에는 얼굴도, 소속사업장도 없이 오직 성명 세 글자 뿐이다. 게다가 투표방식 역시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너무나 엄격하다. 각 종이박스로된 투표함은 모두 20곳을 봉인해야하며, 각 투표용지에 지부 선관위원의 날인이 필요하고, 각 비표는 따로 봉인해서 23일 저녁까지 개표소에 인편인든 퀵이든 박스채로 모두 보내야한다. 볼펜기표는 금지되며 반드시 인주를 사용해야하고... 나는 내가 조직하고 주로 대해왔던 환경미화, 청소, 경비 고령의 노동자들이 이걸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당장, 투표용지가 빠졌다는 전화를 받으면 어떤 경우에는 (선거구가 다르기 때문에) 단지 옆 지부와 투표용지 크기가 다를 뿐인 경우들도 있다..

 

투표에서 ; 민주주의 조건

 

이쯤되면 직선투표가 과연 '민주주의'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부터의 조직구성,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조합원을 고문하는 수준이라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30여명을 모두 투표해야하는 서울대병원분회 조합원들은 근무 중 현장에서 뛰어다니다가 이 투표를 해야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최소한 고민해야할 것들이 (그야말로) 대규모로 누락되고 있다. 아무리 선거가 복잡하더라도 선거제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원칙이 있는 법일텐데, 실무적으로 바쁘다는 이유로─다른 말로 하면 관료기구의 편의를 위해서─면밀하게 보지 않는 것들. 누구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선거제도는 가장 쉽게 구성되어야한다. 가장 지적으로 부족한 조합원의 눈높이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제도 전반은 사무전문직 조합원들의 수준, 가장 높은 수준에 맞추어져있다. 이 기준에 따라가지 못하는 비주류-교육수준이 낮고, 고령이며, 행정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여성들은 권리를 행사하는 데 곤란을 겪는다.

 

바쁘더라도 더 신경써야하는 부분도 있다. 10여명의 이름이 있는 투표용지에 최소한 사진이나 사업장같은 기초 인적 사항이 들어가지 않으면 구별할 수도 없을 정도다. 조합원 선거 공보물에는 대의원의 경우 '엑셀'로 만든 표가 그대로 건조하게 들어간 정도여서 내 선거구 후보를 찾는데 나조차 곤란을 겪을 정도다.(그나마 서울본부의 경우 사진-경력-출마의 변이 담긴 포스터를 겨우 제작했다.)

 

물론, 선거구의 크기, 후보의 크기와 같은 면에서 지역 선거구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나의 경우에도 신경쓰지 못한 부분이 있다.(초기업 선거구를 만드는 것을 관건으로 보다보니 일부 선거구는 너무 비대해졌다.)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선거구도 더 분할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느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선거가 복잡해지는 것은 지역-업종 이중골간체계에다가 과도한 선거제도, 불친절한 선거행정.. 등의 복합물이다. 우리가 버려야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민주주의와 지역-현장에 밀착한 운동구조, 그리고 가장 낮은 조합원의 눈높이에 맞춘 제도의 구성을 지킨다면 버릴 수 있는 것들도 많을 텐데.

 

노조에서 대안적인 조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노조에서의 선거는 또한 지속적으로 대안적인 관계, 대안적인 조직을 실현해나가야한다는 점에서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 산별노조를 건설하자마자 관료조직이 (제대로 구성되고 작동하지도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복잡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말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가 행정은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국가관리들이 우리들이 위임한 사업의 단순한 집행자, 즉 책임을 지며 소환 가능하고 근소한 보수를 받는 "감독과 부기 계원"(물론 여기에는 모든 종류와 모든 등급의 기술자들이 포함된다)의 역할로 끌어내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프롤레타리트적 임무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하면서 먼저 시작할 수 있고 또 먼저 시작해야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 같은 시작은 대규모 생산을 토대로 하여 저절로 모든 관료제의 점진적인 "사멸"로 나갈 것이다. 또한 그러한 식은 더욱더 단순화되는 감독과 계산의 기능을 모든 사람이 순번대로 수행하여 나중에는 그것이 습관이 되는, 그리하여 결국 특수한 인간계층의 특별한 기능은 소멸되어 버리는 그러한 질서─괄호없는, 즉 임금노예제와 같은 유보조건이 없는 질서─가 점차 조성되게 할 것이다. (돌베게 판, 71쪽)

 

그러나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이 또한 중요하다.

 

...왜냐하면 국가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직무의 기능들이 주민 대다수에 의해, 나중에는 주민 모두에 의해 이해되고 수행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통제와 회계사무로 전화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05쪽)

...모든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또 실제로 사회적 생산을 관리하게 되며 독립적으로 계산을 하게될 그 때에는.. (137쪽)

 

노조기구를 전화하는 것이 사회주의에서 국가의 전화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조직에서 노동자의 자기통치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에 착목해야하는지를 발견할 수는 있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갈 사회에 미리 훈련될 것이다.

 

여기서 두개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는 행정이 더욱 단순해져서 누구나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 그리고 이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적 차이가 감축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되는 것이다. 이는 노조에서도 (선거제도까지 포함하여) 노조행정의 단순화, 그리고 단순히 선거를 조합원 머리위로 위해서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교육과 훈련─을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레닌의 첫번째 인용문은 하나의 논쟁점을 포함하고 있다. 노조 활동가들의 경우 억압적인 자본주의국가의 '국가관리'가 아니며 '감독과 부기계원'도 아니라는 점. 유기적 지식인이자 활동가라는 점에서 '단순한 집행자'로 끌어내려가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 문제는 지적 차이를 감축하면서 대안적인 조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순번대로"

 

레닌의 첫번째 인용문중에 주목할 만한 한 단어가 있다. "순번대로".

레닌은 베른슈타인이 이러한 자신의 주장(마르크스의 주장)을 "원시적" 민주주의라고 비웃었다고 말하면서 반박한다.(62쪽) 따라서 이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하의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논의는 주로 "선거는 민주적인가/버나드 마넹"에서 참고한 것이다.)

 

아테네에서 공직은 (선출되는 것도 있었으나) 추첨에서 의해서 선발되었다. 오늘날, 대의제가 지배적인 "민주정"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그것은 간단히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시민이 지배자이자 피지배자가 되어야하기 때문에 그것은 적절한 제도이다.(아리스토텔레스) 그것은  시민들이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운영에 적합하도록 교육되고 훈련될 것을 요구한다.(정체의 필수적인 유지조건으로서 시민들 사이의 지적차이의 감축) 그리고 그것은 평의회, 법정, 입법 위원회, 민회 등 다양한 기구를 구성하고 필요한 자리에는 선출제를 택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는 시민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가 인민 그자체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인민의 규모의 문제, 기술적 문제는 전혀 아닌데, 충분히 대규모 조직에서도 추첨은 가능하다.(법정의 배심원제도와 같이 현재도 운영되고 있으며 충분히 가능하다.) 시민들의 평등한 권리에는 추첨이 더 적절해보인다. 추첨이 무정부적으로 아무나 고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제도와 기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은 다시 상기해야한다.

 

(이번 공공노조 선거에서 자신이 좌파라고 주장하는 어떤 후보는 자신이 "지도자형"이며 "실무자형"과는 다르기 때문에 위원장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노조가 지향해야할 '민주정'에 대한 생각에 큰 차이가 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조합원-노동자들은 누구나 공동체에서 지도자이자 피지도자이다. 그것을 고양하고 공동체의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선출될 후보가 특권적인 "지도자형"이 될 것을 요구하는 모델은 전혀 아니다.)

 

한편, 여기서 시민 개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민은 "일차적으로 민주정에서 존재한다." 시민은 "판결권과 집행권에 참여하는 자이다." 시민은 민주정에서만 가능할 뿐 아니라, 민주정은 판결권과 집행권을 시민에게 부여한다. 그것이 민주정.

 

레닌이 말하는 민주주의 제도에서도 그러한 순번, 혹은 추첨이 사회의 운영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묘사하는데서 나타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노조에서는 그런 것이 불가능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 대의원 제도와 같은 경우에는 추첨을 통할 수도 있는 문제다. 아테네에서처럼,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출마하고, 추첨하며, 다만 선출될 경우에는 회의 참가에 따르는 일급을 지급할 수 있다.(무한히 복잡한 선거제도에 돈을 쓰는 것보다는 이것이 적절한 '민주주의 비용'일 것이다.) 지금의 선거에서 20~30명이 출마한 선거구에서 기계적으로 투표하는 것보다는 민주적이다.

 

(대부분의 선거구가 미달이거나 후보자와 선출자수와 같기 때문에 선거제도가 변별력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없을 뿐더러, 경선이 된다 치더라도 대사업장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며 중소영세사업장은 불리하다. 게다가 과반수 이상 득표해야 당선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나마 정상적으로 노조 기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간부들은 조합원들에게 "모두 투표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과제들

 

지금 진행되는 선거의 이례성─그 규모 등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새로 만든 조직의 첫선거이며 따라서 아직 '관례'가 아니고 우리에게 '낯설다'는 점─ 은 노조에서 선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미 민주노총 직선제 주장에서도 직선제가 만능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했던 적도 있지만, 민주주의는 제도의 문제이자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지금 문제는 관료제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합원 사이의 민주주의를 증진할 의지와 고민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일부 정파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장 민주주의"라는 말을 수없이 한다고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제도의 문제이자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문제의 복잡성 속에서 끈기있게 작업할 수 있어야 겨우 가능할 수 있는 문제다. 물론 첫 시도에서 우리에게는 끈기보다는 감각과 속도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많이 늦었고, 당장은 이번 주의 선거, 투표-개표까지 실제로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선거 이후 다시 평가들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그 평가가 선거의 문제들의 해결책으로 다시 한번 관료제의 편의성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증진할 수 있도록 논쟁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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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관련글을 다시 보다가.

겨울철쭉님의 [김명호씨의 아이러니] 에 관련된 글. (내 글에 트랙백)

별로 인기없는 내 블로그에 폭발적인 댓글이 달린 위의 글을 보면서 이유를 생각해봤다. 흠흠..

왜 이런 짦막한 단상이 사람들의 '분노'(내가 느끼기엔 그렇다)를 불러일으켰을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 사건에 대해 교수노조를 비롯한 지식인 단체들의 대응의 성격은, "(대학-제도권) 지식인들의 경제투쟁"이었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같다. 사실 사법부의 전횡을 고발하려면, 더 분노할 만한 사건은 언제나 더 많았기 때문이다. 최근에만 해도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사법부가 돈과 권력 앞에서 어떠한 입장을 갖는지 보여주는 너무나 적나라한 사례였다.

 

김명호 사건과 굳이 비교해보더라도, 이번 건에서는 삼성의 모든 범죄행위는 무죄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제기한 김성환 위원장은 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유죄 판결에다가 집유까지 엎어서 곱징역을 살아야했다. 그냥 피고(성균관대)가 무죄가 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이후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 김성환 위원장의 옥중 투쟁과 부모님 상, 최근 엠네스티의 양심수 인정 등...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사건들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여러가지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사법부의 권력-자본 유착과 전횡을 폭로하려면 김성환 위원장 사건이 더 심각하고, '극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명호 사건은 언론은 물론 지식인들에게도 다른 대접을 받았는데(물론 후자는 전자의 효과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언론도 만약 아무리 석궁 사건 할애비라고 해도 삼성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신속하게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그럼 지식인들에게는?

 

김명호 사건에 (대학의) 지식인들이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학의 재임용제도의 불합리성과, 이 속에서 드러나는 대학권력의 전횡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법부의 문제로 보자면,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수많은 판결에서 반복된 문제를 다시 한번 드러낸 것이고, 최근의 다른 사건에 비해서 그 정도가 심각한 것도 아니다.

 

(나는 "비해서"라고 했으니 오해 없으시길, 나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의 판결이 많은 사건에서 이미 일상적이라는 것. 다만 여기서 지식인들이 자신의 문제를 '일반화'하려는 속성이 작용한다. 지식인들은 어쩌면 자신의 특수한 문제인 대학제도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을 사법부의 문제로, 일반화해서 제기한다. 뭐, 나쁘지는 않지만 때로는 다소 뜬금없는 비약이 될 수도 있는 만큼 솔직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문제를 제기하려면 오히려 솔직해지는 것이 좋다. 사법부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대중에게도 호소력을 갖는 그런 '대의'를 스스로 믿기 이전에, 이 사건에서는 대학 재임용제도의 문제가 결정적이라는 것을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최원씨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결론이지만 다소 다른 맥락에서.) 하지만 그런 경우에라도 '재임용제도'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지식생산과 공유의 민주화라는 문제의식으로 나갈 때 최소한 대학 내 지식인들의 경제투쟁을 넘어설 것이라는 점은 언급해두자.

 

나는 이제 김명호가 선생으로서 존경받을만 하지는 않다고 하는 말이 그런 입장에서는 분노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하지만 그가 대학에서 선생으로서 존경받을 만한지는 여전히 전혀 확신할 수 없다.) 재임용 문제가 쟁점이될 때, 그 사람이 교수 자격이 있느냐 아니냐가 핵심적인 쟁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의미에서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문제가 사법부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이 핵심쟁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김명호의 교수로서의 자격에 대한 비판에 분노하는 입장들이다.

 

결국, 이 문제는 대학-제도 내의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법부의 문제'를 제기하려면 지식인으로서 스스로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 사건과 같은 것에 그 만큼의 정력을 투자해서 공동대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글에 달린 댓글에 '징후'를 언급한 적이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대학제도권 內이든, 비제도권이든) 지식인들도 자기분석과 자기비판이 필요한 법이다. 무의식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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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사람풍경, 천개의 공감


사람풍경
김형경 지음 / 예담

천 개의 공감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정신분석학의 여러 개념들은, 나에게는 말 그대로 '개념'들일 뿐이었다. 물론 자기분석을 해보는 과정에서나, 몇번의 정신과 상담에서 드문드문 그 개념들의 현실적 의미를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그 개념들은 현실의 지시대상이 불분명한 채, 이론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점유하는 토픽(topique)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두 책은 그 개념들이 현실의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나에게 있어 추상적인 개념들이 현실의 지시대상을 획득했다고나 할까. 놀라운 독서 경험. 사람들에게 추천하거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사람풍경>은 외국을 여행하면서 있었던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정신분석의 개념들, 혹은 사람들의 정념의 정신분석학적 의미를 설명한다. 낯선 곳에서의 여행이, 그 '낯선 것'들을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도 알았다.(그래서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 의미있는 것이란 걸 이제야 알다니!) 

 

<천개의 공감>은 신문에 연재된 상담을 묶은 책으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는 사람들의 사례를 분석하고 나름의 처방을 내려주고 있다. 역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저자가 각각의 책에서 솔직하게 자기분석의 결과를 책 속에서 드러내는 덕분에 이해가 쉽다. 그것은 또한 똑같이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와 내가 유사한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다고 느꼈다면 아마 다른 독자들도 그랬을 텐데,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이 유사한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형경은 소설가다. 오랜 동안 정신분석치료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비전문가인 작가가 이렇게 구체적이고 능수능란하게 사례들과, 개념들을 다루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서 서로 논쟁하는 상이한 학파들의 개념을 편리하게 끌어 쓸 수 있다는 것이, 드문드문 서로 논리적으로 정합하지 않는 설명을 내놓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정도는 독자들이 가려읽을 일이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이 나의 이야기로, 어떤 것은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려왔다. 무엇보다 각각의 주체 안에 그런 여러가지 정신적인 문제들이 복합적이며, 그나마 내가 나를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게다. 많은 사람들이 또 그런 각자의 문제를 나와 유사하게 갖고 있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위안이 된다. 많은 이들과 동병상련.

 

이 책들을 통해서 우리 경험의 어떤 구체적인 요소들이, 그를 통해 형성된 무의식의 어떤 측면들이 우리에게 어떤 문제들을 나타나게 하는 지 알 수 있다. 그것도 평범한 우리 모두가, 한국 사회의 가족구조에서 겪었을 문제들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건 매우 값진 일인데, 추상적인 개념 이전에 우리가 가족 속에서 어릴 적부터 겪었을  문제들을 한국의 가족형태, 이 가족형태의 모순 속에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우리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례가 된다.(어쩌면 소설가로서 저자의 묘사능력이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다.)

 

책을 읽는 동안,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내내 나 자신을 돌아보느라 독서의 속도가 나지 않는다. 나에게 이런 상황은 정신의 어떤 요소를 형성시켰을까, 그래서 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의 충족 혹은 좌절에 어떻게 반응해왔을까, 때로 그것이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상처도 되었겠구나..

 

그렇게 해서, 나 자신의 고유한 문제를 인식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을 한결 더 객관적으로 대면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단번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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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1

 

정신분석 치료는 너무 비싸고 시간도 많이 들어서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은 엄두를 내기 힘든게 사실이다. 이런 종류의 치료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때, 건강보험은 물론 이려니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얻어내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뜻맞는 사람들이 있으면 같이 해볼 만한 운동의 하나라는 생각도 든다.

 

그건 그렇고 책을 읽으면서 생각난 노래 두가지만 언급해보자.

 

우선, 델리스파이스의 '동병상련'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푸른사막"님의 블로그

어쩌면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왜냐하면 모든 문제들의 근원에 있는 '사랑'이라는 정념이 시작되는 데서, 김형경이 지적하는 것처럼 (자신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사랑을 선택하는 병리적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Simon & 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 Water.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나야"님의 블로그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 When tears are in your eyes.
I'll dry them all, I'm on your side.
Oh, 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s just can't be f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여기서 "I"란 말 그대로 그 누구보다 "나"일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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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2

 

다만 정신분석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경향인 것같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정신분석이 특정한 치료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그 치료의 결과는 사회의 '정상적' 관계망 속으로 환자를 복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 결과, 기존의 사회적 관념에서 부적절하거나 병리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것은 '교정'의 대상이되고 이데올로기적 통념이 '정상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이런 것은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근대 정신의학의 성격으로 지적한 것이다. 정신의학과 결합한 형태로 진행되는 정신분석의 특수성(한국에서만 그런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형경이 제시하는 정신분석의 실천도 본질적으로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서 직장에서 반항적인 여성에 대해서 외디푸스 컴플렉스단계를 제대로 거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거나(-따라서 그 단계를 반복해야한다고 말할 때), 군복무가 나르시즘을 치유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거나하는 언급 등이 있다. 정상가족이 정신건강을 위해서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도 있다. 매번의 정신적 문제가 해결되는 목표는 '가족의 유지'가 되기도 한다.(그럼 다른 가족 형태를 시험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해로운 일로, 지양되어야하나?)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통념, '정상'이라고 규정된 정신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체의 무의식을 치료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신분석과 이를 통한 치유의 결과가 기존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통념에 기초한 '정상적인 상태'에 이르러야만 주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설사 그렇다고해도, 그렇다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다른 종류의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단적인 주체는 치료의 대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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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노조-지역운동에 대한 추가적인 토론

지난 2월9일(금)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에서는 "산별노조 시대, 노동자운동과 지역사회운동"이라는 이름의 정책워크샵이 열렸습니다. 토론자의 한명으로 참석했습니다. 아래에 올린 <공공노조, 쟁점과 전망>을 다소 수정-보완해서 토론문으로 제출했습니다. 회원들과 지역의 몇몇 노조 활동가 동지들이 함께 한 가운데 의미있는 토론들이 있었습니다. 토론을 하면서 몇가지 생각난 지점들.

 

지역에서 노조가 사회운동을 함께 한다는 것

 

이 것은 노조가 자신의 문제를 지역의 문제로 제기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것인데요, 두 가지 과정이 결합되어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1) 우선 다소 중장기적으로 지역 공동체의 문제로 노조의 문제가 인식될 수 있어야한다는 것. 이는 노조의 다양한 노력이 필요할 것인데, 운동프로그램들만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죠. (2) 덧붙여 노조가 자신의 문제를 신자유주의의 문제로 제기할 수 있어야한다는 점.(사업장의 구조조정 문제와 같은 것이라도 말이지요.) 특히 두 번째 과정을 통해서 지역공동체가 처한 문제와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문제의 동일한 원인을 공동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이 속에서 노조는 자신의 투쟁을 광범위한 사회운동의 일부로서 위치지울 수 있겠죠.

 

두 가지는 서로 상이한 실천프로그램들을 요구할 것인데, 그것은 노조의 상황이나 지역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역차원에서 상시적으로 노동조합운동, 사회운동들이 공동의 운동을 기획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런 기획이 이런저런 조직적 조건, 인적 연계망을 통해서 활성화된 곳에서 이런 시도들은 어느 정도 성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역경제살리기"

 

신자유주의 불균등 발전전략 속에서 배제된 지역에서는 특히나 '지역경제살리기'라는 이데올로기가 강력합니다. 노동자들의 장기투쟁이 전개되는 지역에서는 어디서나 이런 식의 운동이 지역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데요, 건설노동자들이 투쟁했던 포항에서도, 현대하이스코 투쟁이 있었던 순천에서도, 건설플랜트, 현대차 노동자들이 투쟁했던 울산에서도 비슷합니다. 이건 결국 블랙홀이 되어서 노동자들의 요구의 해결이라는 것도 이런 틀에서 제기되기도 하는데, 그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죠. 심지어 민주노동당 마저도 울산시장선거에서 "오토밸리의 적임자는 민주노동당"이라는 식의 공약이 제시되었는데, 대안적인 지역운동에 대한 방향이 없이 지역발전주의에 포섭되고 그것을 강화하는 꼴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지역경제살리기"와 다른 방식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제기될 수 있고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생각해보아야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저보다는 비수도권지역의 동지들이 더 답을 줄 수 있을 것같군요.)

 

그밖에 토론문에 이런 내용을 추가했었죠. 참고로.



 1. 산별노조 건설과 지역운동 강화는 별개의 과정

 

o 현재 산별노조 건설운동은 지역운동을 강화한다거나 사회운동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 추진되는 것은 아님. 다만, 그러한 운동을 강화할 수 있는 정세적 조건이 형성된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주의해야


o 역사적으로도 산별노조 건설이 자동적으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노조운동의 활성화로 귀결된 것은 아니며 이는 별개의 운동과제로서 조직내에서 추진되어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 특히 사회운동적 성격의 강화라는 쟁점은 ‘사회공공성’이라는 정책방향으로 제시되는 데 이것을 넘어서는 운동기획이 또한 도입되어야한다는 점.


o 오히려 산별노조 자체의 적극적인 의의는 ‘초기업’, ‘초업종’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음. 노동자들이 단위 기업 안에서 협소한 경제적 이익을 방어하는 것을 넘어서는 최초의 단계라는 점
- 이러한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 과정에서 초기업적 운영, 초업종 운영은 각별히 강조될 필요가 있음. (산별노조 조직구조와 관련된 논쟁은 이러한 쟁점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조직형식적 논쟁이라는 한계가 있음. 오히려 적극적으로 내용적인 논쟁이 필요한 시점.)

 

2. 지역운동 강화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반대,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결되어야함

 

o 지역운동은 그 자체가 독자적인 질을 갖는 것은 아니며, 지역자체를 강조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운동적인 의의가 확보되는 것은 아님


o 지역공동체의 특수한 이익을 위한 운동으로 전개될 경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보편적인 노동자계급 주체를 형성하려고 하는 시도와는 무관하게 진행, 현실에서 지역운동을 강조하는 일련의 흐름은 지역차원의 특수한 이익을 강조하는 경향도 존재함 :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의 ‘오토밸리’ 활성화 공약


o 그러나 지역공동체와 노동조합이 사회운동의 측면에서 결합하는 사례는 보편적인 정치투쟁과 연결될 때 가능했음. 현재의 시기에 그것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반대,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결되어야함


o 이를 위해서는 지역차원의 운동전략이 노조운동과 사회운동 일반에서 공동으로 수립될 필요가 있음. 현재 상황에서는 오히려 산별노조의 지역조직이 사회운동적 의제를 외삽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음.

 

3. 지역차원의 ‘공동체 형성’이라는 문제가 특별히 강조되어야함

 

o 공공노조의 경우는 더욱 심한데, 노동자들의 생활조건, 문화는 모두 천차만별임. (공공노조의 경우 같은 지역안에서도 임금차이가 수배에 이르고 직종도 고액연봉 연구자에서 청소원에 이르기까지 다양)


o 지역차원에서 조직적 단결을 이루어내고 ‘같은 지역의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식-조직이데올로기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음. ‘시혜’가 아니라 연대를 위해서는 정체성 형성에 대한 개입이 필수적임. 이러한 공동체 의식을 형성해야하기 위해서는 문화 사업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함.


o 이는 노동자 문화 운동에 다른 접근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기업별노조(업종별) 운동을 넘어서 노동자 운동의 ‘일반화’를 위해서 필수적인 과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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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노조, 쟁점과 전망

월간 사회운동에 실릴 공공산별노조 관련 글입니다. 아직 2월호인데 아직 안 나온 것같네요. (아마 편집과정에서 조금 수정은 있겠죠)

공공노조도 현재 노조운동의 산별노조 전환과 관련해서 (금속보다는 중요성이 덜 할지도 모르겠지만) 주목해야할 과정입니다. 하지만 금속과는 또 다르게 관심 대상이 아니거나 혹은 잘 소개가 되고 있지 못합니다. 가장 큰 원인은 논쟁이 부재-과소결정되고 관료적인 건설과정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가진 과정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 2대 직선임원, 대의원 선거가 진행중입니다. 처음하는 직선선거라 이 실무를 진행하는 입장에서도 만만치 않군요. 또 조합원들이 '직선'이라는 명분 하에서 표찍는 기계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고민도 됩니다. 어떤 선거구에서는 한 조합원이 30여명의 후보에게 투표해야하는데, 이건 거의 말 그대로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 합니다. (직선제는 어쩌면 활동가들의 편리한 알리바이. 한 조합원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30여명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게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되냐는 겁니다.)

지역본부와 함께 업종본부를 골간으로 이중적으로 인정하다보니 생긴 문제이기는 하지만서도, 더 근본적인 문제는 초기업적인 활동이 개시되기도 전에 형식부터 규약-규정의 형식논리에 따라서 만드려다보니 조합원들에게 그 책임과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산별의 내용보다 형식을 우선 만드려다보니 생긴 문제라고 할 수 잇는데, 더 큰 문제는 조합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일 겁니다.

그걸 조금이라도 넘어보려고 아둥바둥(이런 표현이 이렇게 절실한 적이 없습니다)하고는 있지만 쉽지는 않군요. 제도의 한계에 여전히 제한됩니다. 이후, 공공노조의 지역활동을 조직하고 창출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해야할 텐데 그것 역시도 쉽지만은 않은 과정. 그래도 아래 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의미와 한계가 모두 공존하는 상황이니, 정세의 호기를 포착해야겠죠.
 



공공연맹을 중심으로 진행된 공공부문 산별노조 건설 노력은 작년 11월30일 “전국공공서비스노조”(이하 “공공노조”)가 출범 발기인대회를 개최하면서 실질적인 조직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조합원 직선으로 선출하는 1기 집행부 선거가 준비 중에 있기 때문에, 여전히 공공노조는 ‘건설과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현재 약 3만5천여명의 조합원이 가입되어 있다. 공공노조는 주로 공공연맹 가맹조직을 중심으로 기업별노조 혹은 (기업별 지부를 중심으로 한) 업종노조의 조직전환을 통해 구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기존 노조들의 조직전환을 통한 합병이라는 방식으로서, 산별 “전환”의 의미, 쟁점이 어떻게 형성될 것인가를 규정하는 조건이 된다.

산별노조 출범 이전까지의 여러 쟁점은 산별노조 출범 이후에는 변화된 조건에서 다른 방식으로 전위되고 있다. 그러나 전체 과정의 쟁점은 일관된 흐름을 갖는데, 이는 산별노조라는 하나의 조직형태를 둘러싼 서로 다른 이해를 반영한다. 특히 현재 시점은 11월30일 이후 2월 28일까지로 예정된 1기 과도기 집행부의 임기가 막바지로 접어들고, 직선제로 선출되는 2기 집행부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이와 함께 새로운 쟁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는 산별노조 출범 이전의 쟁점들에 대해서 모두 언급하기는 힘들고, 다만 현재의 쟁점과 구체적으로 연관된 것까지만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기업별 노조의 조직전환과정이라는 특수성 혹은 한계

공공노조는 주로 기업별 노조, 혹은 기업별 조직을 골간으로 하는 업종노조(문화예술노조, 시설관리노조 등이 여기 속한다)들의 통합을 통해 건설되었다. 따라서 조직 형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은 기존의 활동단위였던 기업별 조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재편할 것인가와 연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산별노조 건설이란 기업별 노조를 넘어선 더 큰 단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시되지만, 많은 ‘산별노조’들에서 실제 활동은 기업별 조직단위를 기본으로 하는 방식을 넘어서지 못해왔다. 이는 노동자 의식을 기업 내에 제약하는 것으로 이해된 기업별 조직을 넘어서는 것이 산별노조의 실질적인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노조의 합병을 통해 규모를 키우고 이를 통해 (결국은 기업 내부로 귀결되는)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산별노조 건설의 현실적인 이유는 기업별 조직과 활동방식을 넘어서기 위한 운동을 활성화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공공노조도 기업별 구조를 점차 극복하고 통합력을 증진하기 위한 과제를 안고 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은 논쟁적이다. 산별노조 출범과정에서 △ 조직의 골간단위를 (광역)지역본부로 완전 재편하며, △ 200명 이하의 중소사업장은 초기업 통합지부를 구성하도록 하는 등의 방안은 3년간 유예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특히 조직의 골간단위를 (광역)지역본부로 완전히 재편하는 방안은 일부 노조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기본방침으로 ‘선언’은 되었으나 강제력은 없는 상태다. (현재 공공노조는 지역본부와 업종본부를 모두 골간으로 인정하는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기업별 구조를 넘어서는 산별노조를 만들기 위한 쟁점은 지역본부 강화냐, 업종본부 유지냐는 논쟁과 혼재되어 진행되었다. 장기적인 조직의 재편방향에서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구조가 옳다는 것이 동의되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는 큰 이견을 보였다.

특히 주로 업종본부의 유지, 활성화에 관심을 갖는 동지들은 기존에 ‘소산별노조’(업종노조)를 구성하고 있던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공공산별노조 내부에서 기존의 조직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산별노조’들이 산별노조 건설과정에서 보여준 입장은, 소산별이라는 ‘과정’을 경과하면 산별운영을 더 차근차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산별노조로 전환한 소산별노조 조직들은 여전히 기존의 조직체계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으며, 지역에서 보다 폭넓은 단결을 위해 자신을 넘어서는 데는 소극적이거나 역행했다. 또 공공연맹 내 대표적인 소산별노조였던 과학기술노조, 공공연구전문노조, 발전산업노조 등은 오히려 공공노조로 전환하지 못하거나 이를 위한 논의계획도 잡고 있지 못한 상태로 여전히 ‘소산별노조’(업종노조)로 남아있다.

지역본부와 업종본부

결국 조직형태는 절충적으로 구성되었다. 조직의 골간으로 업종본부와 지역본부를 모두 인정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다만,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을 발전시킨다는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서 대의원, 사업비, 인력 등에서 지역본부에 가중치를 두는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절충’은 조직 구조를 과도하게 복잡하게 만들 뿐 아니라, 향후 운영과정에서 권한의 충돌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모든 종류의 집행기구, 대의기구의 선거를 이중으로 진행해야하며, 사업도 이중으로 진행된다. 이로 인해 노동조합 관료조직이 더 비대하게 구성되어야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논의 과정에서 업종본부는 그 규모는 크게, 개수는 적게, 지역본부는 가능한 지역에 최대한 설치하는 것을 방향으로 했다. 여기에는 가까운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사업을 활성화하고자한 의도도 반영되었다.

지역중심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

이러한 상황에서도 지역중심의 연대를 강화하고 이를 조직구조에도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진행된다. 이러한 노력들은 산별노조 건설이 열어놓은 조직 재편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우선 초업종 지역지부를 산별노조 안에 구성하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초업종 지역지부란, 조직의 구성과 활동에 있어서 기업별 활동을 넘어설 뿐 아니라 업종별 활동도 넘어서 통합조직을 구성하고 지역연대를 강화하는 것을 지향으로 한다. 한 지역에서 서로 다른 사업장, 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도 같은 지역 조직틀 안에서 일상활동과 투쟁을 함께 하면서 조직을 융합하는 것이다.

주로 기존에 “지역공공서비스노조” 등 지역노조들이 활동했던 광주전남, 대구경북, 전북, 서울 등에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산별노조의 활동과 조직형태가 지역을 중심으로 해야한다는 문제의식 하에서 이를 우선 실현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을 우선 함께 하는 단위들은 앞서 언급한 “(舊)지역공공서비스노조”들과 주로 보육, 자활, 사회복지시설 등 사회복지 관련 노조, 학교비정규직 단위 등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이다. 전국에 지역별로 산재하고 있거나, 저임금,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고, 지방자치단체 등과도 직간접적인 사용자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 부문의 노동자들은 지역을 중심으로 연대를 확장하는 것이 노조활동을 강화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또한 이들 조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을 조직자체의 지향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지역을 단위로 하는 적극적인 조직화 사업으로 나타난다.*1)

주1) (舊)지역공공서비스노조 활동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공공연맹 서울지역본부 건설과 지역 노동자 사회운동」, 박준형(월간 사회운동 2006.6)을 참고

이들 뿐 아니라 주로 보건의료노조에서 탈퇴한 병원사업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舊)의료연대노조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운동의 강화를 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최소한 기업별지부를 넘어선 지역단위의 업종지부를 구성하고자하며, 각 지역에서 중소영세병원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사업을 핵심으로 배치하고 있다. 또한 장기적 전망으로는 초업종지역지부를 구성해야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각 지역에서 초업종 지역지부를 구성하고자하는 단위들(사회복지 관련 단위, 舊지역공공서비스노조, 舊의료연대노조)은 지역중심의 연대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별도의 업종본부 설치를 논의하게 된다. 현재 “사회연대본부”라는 이름으로 구성된 이 업종본부에는 (舊)사회보험노조(국민건강보험공단), (舊)사회연대연금노조(국민연금공단)까지 함께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이런 과정에서 애초 골간조직의 한 축으로 규정되었던 ‘업종본부’는 사회연대본부, 통합본부, 환경에너지본부, 공공시설환경본부라는 4개의 업종본부가 설치되는 것으로 논의가 정리된다. (통합본부는 독자적인 업종본부를 설치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은 단위들이 함께 구성한 것으로, 정보통신, 문화예술, 경제사회단체 등을 포괄한다.) 사회연대본부는 물론 ‘통합본부’까지 ‘초업종 업종본부’인 상황에서 이들은 전체 조직의 2/3정도를 점하고 있다.*2) 게다가 지방자치단체를 직간접 사용자로 하기 때문에 지역중심의 활동이 필수적인 공공시설환경본부까지 감안하면, 실제로 업종본부 위상에 맞게 실질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단위는 아직 1만명 미만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환경에너지본부 정도에 불과하다.

주2) ‘초업종 업종본부’라고 내가 칭한 용어 자체가 업종본부 설치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기본적으로 많은 업종의 노동자가 함께 조직을 구성할 수밖에 없는 공공부문에 있어서 ‘초업종’이라는 것은 모든 조직단위 구성의 기본적인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조건은 결국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구조를 편제하고 활동을 배치하는 방향으로 공공노조가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

<전국공공서비스노조 조직구성>
o 지역본부(12개) : 서울본부, 경기본부, 인천본부, 강원본부, 충북본부, 대전충남본부, 전북본부, 광전제주본부, 대구경북본부, 울산본부, 부산본부, 경남본부,
o 업종본부(4개) : 통합본부, 공공시설본부, 사회연대본부, 환경에너지본부

일정에 쫓긴 건설과 현장의 부담

한편, 건설일정을 먼저 확정하고 조직형식적인 투표 절차 등을 중심으로 구성하기 시작한 산별노조 건설은 여러 가지 지점에서 점차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산별전환 투표를 독려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논의되거나 검토되지 못한 쟁점들이 현장에 잠복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산별노조로 전환하면 조합비를 그렇게 많이 산별노조 중앙에 올리는지 몰랐다고 하면서 불만을 토로하는 현장간부도 있을 정도다.

현재 조직정비과정을 선거라는 계기를 통해 일단락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정해진 일정을 중심으로 조직전환을 독려한 결과, 많은 무리가 나타나고 있다. 조직재편에 대해서 현장의 조합원들과 논의는커녕 이해조차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초의 직선제 선거가 준비되고 있지만, 각 집행단위, 대의원 선거를 위한 후보도 미달사태를 겪을 것이 우려된다. 이런 조건에서 2월초부터 선거일정에 돌입하면 조합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공동활동의 경험이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생소한 조직출신의 후보들에게 투표부터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직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각종 회의는 사업장 단위의 기본적인 노조활동을 마비시킬 정도이다. 현장간부들이 임단협 준비, 현장간담회와 같은 기본적인 일정조차 소화하기 힘들다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러한 문제는 조직을 우선 형식적으로 통합하고 내용을 만들어가는 경로를 취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더구나 내용적 준비를 하는 것은 물론 형식적인 준비를 하기에도 3개월이라는 과도기 집행부 임기는 너무 짧았다는 것도 확인되고 있다.

전망 ; 가능성과 한계의 공간으로서 산별노조

눈썰미 있는 독자들은 이러한 논쟁들을 살펴보면서, 과도하게 조직형태에 논란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공공노조에서는 금속노조와도 다르게 과연 산별노조를 통해서 어떤 투쟁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거의 제기되지 않고 있다. 하다못해 올해 산별노조의 임금요구는 어떻게 만들 것인지, 1년차 산별노조의 핵심투쟁 의제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산별교섭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모두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혹은 쟁점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진행되는 이유는 산별노조 건설이 투쟁을 통한 단결의 확대보다는 조직 통합에 더 방점이 찍혀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우선 지적할 수 있다. 특히 2006년에 7월에 공공연맹이 집중하고자 했던 대정부 투쟁이 사실상 맥없이 마무리된 상황도 산별조직 하의 공동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활성화되지 못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조직형태에 논란이 계속 집중되는 이유는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다. 공장단위의 조직형태를 취하는 제조업과는 달리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의 조직형태가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점, 금속노조와는 달리 산별노조의 축적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조직논의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조직형태 논의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데, 이를 통해서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중심으로 노조운동을 재편하고자하는 다양한 시도가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산별노조 건설의 하나의 ‘효과’로서 그 동안 지지부진했던 지역운동 강화를 위한 실질적인 논의가 촉발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초업종) 지역지부는 산별노조로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논의조차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대기업노조의 지역조직들을 지역사업에 결합시키는 것도 산별노조로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더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을 통해서 새로운 조직적 가능성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산별노조 건설과정에서 이렇게 새로운 운동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몇몇 공간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특히 각급 집행단위, 대의기구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준비를 비롯해 산별중앙-업종/지역본부 등 상급조직을 구성하는데 많은 역량이 집중되고 있다. 이로 인해서 출범한 지 불과 2개월에 불과한 공공노조에 벌써 현장공동화, 관료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공공노조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건설과정’에서 몇 가지 점이 특히 강조되어야한다.

우선, 산별노조 건설 과정이 조직체계에 대한 논란을 넘어서 산별노조 차원의 투쟁과 일상활동 등 ‘사업’이 실질적으로 준비되어야한다. 조직체계를 제대로 세우기 위한 준비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러한 각급 조직의 구성이 투쟁, 사업과는 분리될 수 없다. 선거기간이라는 이유로 이들 논의가 서로 분리되고 연기된다면 조직형식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지역본부라면 지역차원에서 지방자치단체를 사용자로 하는 조직들의 교섭쟁취 투쟁, 지역공동 임단투와 지역교섭단 구성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 사업들은 지역차원에서 ‘공공성’을 쟁점으로 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야한다. 산별노조 중앙 역시 올해 임단투부터 시작하여 ‘공공성’을 쟁점으로 한 사회적 투쟁까지 나가기 위한 계획이 준비되어야한다.

두 번째로, 산별중앙, 지역본부, 업종본부 설치과정이 현장공동화 혹은 관료기구의 비대화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매우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이들 기구나 사업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식의 주장은 아니다. 산별노조 건설은 기업별 현장의 활동을 지역, 산업으로 확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 상급기구의 구성과 강화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각급 단위의 사업이 현장활동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집중되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일상활동과 투쟁을 함께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인 지역본부 사업과, 이 사업과 각 지부 사업의 결합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세 번째로, 지역을 중심으로 연대활동을 활성화할 수 있는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져야한다. 산별노조 안에서 지역차원의 단결을 확대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민주노총 지역본부 사업에 대한 결합력을 강화하는 등 산별노조를 넘어서는 지역차원의 단결에 기여해야한다. 또한 지역적 단결의 확장이란 지역의 노동자 운동 뿐 아니라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확장-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지역사업을 강화하고, 지역 내 연대투쟁을 활성화하는 것을 조직적 목표로 해야한다. 이러한 과정은 조직재편 과정에서도 앞서 언급한 (초업종)지역지부의 구성, 지역본부의 강화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공공노조의 건설과정은 다른 이미 건설된 산별노조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강력한 현실적 제약 속에 놓여있다. 따라서 이 노조는 이전의 다른 경험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기업별조직의 연합체의 역할을 반복할 수도 있으며 그럴 가능성이 오히려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노조는 ‘보다’ 지역에 가깝게, ‘보다’ 사회운동에 가깝게 운동을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있다는 점을 지적해야한다. 따라서 이미 건설된 산별노조 가 이러한 운동적 지향을 강화할 수 있는 산별노조의 사업을 수립하고 지역적 거점들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지역적 거점을 강화하는 노력은 일부 공간에서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일부에서는 운동적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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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운수산별노조와 공공-운수 4개 연맹 통합>

공공연맹, 화물통준위, 민주택시연맹, 민주버스노조 등, 4개 공공-운수 연맹 조직의 통합은 공공노조와 운수노조 건설 논의 과정의 결과이다. 애초 공공연맹 내에서 산별노조 건설의 경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쟁점은 결국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를 별도로 건설하고 이를 재통합하는 것으로 논의가 정리되었다. 이는 최소한 공공연맹이 포괄하는 업종을 하나의 노조로 통합해야한다는 주장과, 몇 개의 업종노조를 우선 건설하고 이를 재통합하자는 주장이 경합한 결과였다. ‘몇 개의 노조’를 공공노조와 운수노조 정도로 정리해서 합의된 셈이다.

이러한 건설경로에 관한 논쟁은 이미 금속산업에서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해 벌어진 논쟁과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대산별조직을 건설하고 이를 지역중심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입장과, (비록 대산별노조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업종별 조직을 활성화하고자한 입장이 서로 대립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2005년 5월, 민주버스, 민주택시, 화물통준위, 공공연맹 4조직 대표가 회합하고 ”운수노동자들의 대단결과 산별 건설을 위해 공동 노력한다“고 합의한다. 이는 공공연맹 내외의 운수조직과 산별노조 건설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논의는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2006년 안에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를 별도로 건설하되 2007년 말까지 재통합한다는 합의를 만들게 된다. 이에 따라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는 각각 2006년 11월30일과 12월26일 창립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은 정치적 타협의 결과다. 조합원들은 오히려 ”1년 후에 합칠 조직을 왜 따로 만드냐“고 묻는다.

그러나 운수노조 출범은 공공-운수 4연맹 통합과 밀접하게 연관된 과정으로서, 연맹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출범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통합과정은 각 조직의 이견으로 인해서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민주택시연맹 등이 통합예정 1주일을 앞두고 제출한 새로운 입장은 기존의 통합관련 논의를 모두 혼란에 빠트리면서 통합대의원대회 하루 전까지도 개최 여부가 결정되지도 공지되지도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결국 12월26일 통합대의원대회가 진행되었지만 결국 성원미달로 회의 중간에 유회되었다. 해를 넘겨 1월23일 다시 개최되어 비로소 통합이 이루어졌지만 이 기간 동안에도 현장토론 등은 거의 진행되지 못하였다.

운동의 역사들이 서로 다른 조직들이 공동투쟁의 과정도 없이 ‘통합준비위’ 몇 명의 논의를 통해서 조직을 통합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지지부진한 논의과정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 과정에서 조직통합에 대한 각 단위노조, 현장 논의는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게다가 사실상 운수노조를 출범시키기 위해 진행된 연맹통합과정은 기존의 조직적 질을 상승시키는 과정이라기보다는 하향평준화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공공연맹의 지역본부는 통합연맹에서는 모두 해체되고 지역협의회 수준으로 격하되었는데, 이는 별도 의결기구, 상근자, 예산도 없다는 의미다. 기존이 연맹 기능도 대폭 축소된다.

공공-운수 4연맹 통합은 조직통합을 통해 규모를 확대하고자하는 시도가 얼마나 조직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직적 단결의 확대가 공동사업, 공동투쟁을 전제하지 않고 추진될 때에는 최소한의 민주적인 토론조차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 결과, 조직적 질을 상승시키는 효과도 만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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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바탕화면을 바꾼다는 것

하루중 많은 시간 동안 pc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바탕화면은 나름대로 사소하지만 신경쓰이는 고려사항이다. 바탕화면을 어떤 이미지로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격이나 정서가 드러나기도 한다. 아니면 일부러 무미건조한 바탕화면을 쓰거나 아니면 아예 그림없는 단색으로 쓰기도 한다.

 

내가 사용하는 pc는 세 개인데, 하나는 집에 있는 개인 pc, 사무실 pc, 그리고 노트북까지다. 각각에 깔려있는 바탕화면들은 다르기도 하고 공통되기도 하는데, 여튼 평균 한달 정도 주기로는 바뀌는 것같다. 바탕화면바꾸기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기분전환 수단 중에 하나다. 그리고 이 것들은 어느 정도는 그 당시의 기분을 반영하기도 하는데, 그런 점에서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무실 pc에는 이런 화면이 깔려있다. (이 바탕화면들은 모두  "가까바탕화면"creensaver.pe.kr s 사이트에서 다운 받은 것이다. 가장 괜찮은 바탕화면 사이트. 이미지가 커서 로딩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겠다.)

 

 [크게보기]

 

주로 업무용으로, 낮에 사용하는 pc에는 요즘에는 이 그림이 깔려있고, 노트북도 비슷한 이미지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집에 개인 pc에는 이런 그림이 깔려있다.

 

[크게보기] 

 

역시 밤에 많이 쓰는 pc여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개인적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

이 그림을 보고 물끄러미 있으면 그림 속 눈발날리는 강변에 서 있는 것같고, 걷고 있는 것같고, 길을 걷다가 누군지 모를 어떤 사람이 손을 내밀 것같다. 역시, 깊은 밤에 와인이라도 한두잔 마셨을 때 이야기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어디론가 이어진,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라는 것. 그곳을 걸어가면 어디에 닿을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어디론가 이어진 길을 걷는다. 길을 욕망하는 내가 만날 길은 어디로 이어져있을까. 숲속의 그 길은 어디로, 그리고 눈발날리는 강변, 밤길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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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노조 활동가들의 노동조합

EM님의 [상근자 노조 논쟁(?)에 부쳐] 에 관련된 글.

 

민주노동당의 상근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일로 논쟁이 되고 있던 즈음, (뭐 우리밖에는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지만 ^^;) 나를 포함한 공공연맹의 상근활동가들도 공공노조의 지부형태로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의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지금 진행되는 선거인 명부가 확정되는 2월18일 전에 가입절차를 마무리할 것을 상근활동가동지들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했고, 며칠후 '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민주노동당노동조합의 간부를 이런저런 일로 우연찮게 보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연맹의 상근활동가 동지들에게 적극적으로 공공노조에 집단 가입할 것을 제안했던 이유는, 우리가 그 운영에 함께 하는 조직에 정당한 일원으로 책임을 갖고 또한 그에 걸맞는 발언을 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제안하고 나서 보니 주로 "전진"쪽 선배상근활동가들은 이미 각자 개별적으로 가입원서를 공공노조에 제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참.) 그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단지 '월급받고 채용된 사람'의 위치에 남는다면 그것은 계속 관료기구의 실무자가 될 뿐이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핵심적인 것은 '멤버쉽'이었던 것이다.

 

사실, 채용 상근활동가들은 유리한 조직적 위치에서 큰 힘을 발휘할 때도 있지만  부당한 배제를 당하기도 한다. 연맹에 있는 1/3 정도의 상근활동가들은 단위 노동조합에서 직선간부의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나머지 동지들도 단위노조의 경험이 있는가의 여부를 떠나서 책임있고 훌륭한 동지들이 많다. 하지만 정당한 조직적 멤버쉽을 갖지 못한 모호한 상태에 있었다. 연맹 소속 노조의 직선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사업장을 퇴직하고 연맹에 채용상근자로 올라온 동지라도 같은 상황.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서는 배제되었다. 다만 (힘쓰는 정파에 속한 경우에) 정파들을 통해서 비공개적으로 개입하는, 부적절한 관행만이 그것의 결과였다.

 

나는 공공노조의 '연맹사무처지부'(일단 향후 초업종 지역지부가 구성되기 전까지는 독자적인 지부형태를 취하기로 했다. 서울지역지역지부가 구성되는대로 통합하는 것을 전제로 지부를 설치했다. 서울지역의 초업종지역지부와 관련해서는 이 블로그의 <우리들의 미망 혹은 희망>을 참조.)가 상근활동가들이 공공노조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점과 더불어, 일반적인 노동조합 활동과는 달라야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EM님이 위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에 비해서 일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노동자가 아니라거나, 노조를 만들 수 없다거나 하는 주장의 문제점은 이미 EM님이 정리했거니와, 적어도 그것들을 쟁점으로 제기하는 수준은 넘어야 의미있는 논쟁이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이 구조적으로 가지는 한계 때문이다. 노조에서 활동하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직하다면, 노동조합 조직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1번인 '법 이데올로기'에 기초하고 있다. 그 이데올로기는 노동조합의 조직적 기반을 규정할 뿐 아니라, 매시기 활동의 모든 측면에 전방위적으로 침투한다. 우리는 매순간 그것들과 전투를 치루어야한다.

 

노동조합은 조직의 구조, 운영방식, 활동의 범위, 활동양식 등 전반을 노동관계법을 중심으로 한 부르조아 법에 의해서 규정되는 제도다. 그래서 그것은 (알튀세르가 탁월하게 지적했듯이) 역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의 하나이다. 노동조합의 규약이라는 것도 사실 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닌데, 규약으로 풀리지 않는 (내부운영 등에 대한) 쟁점이 종종 법정으로 간다는 사실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 노동조합의 활동과정에서도 그것은 느낄 수 있다. 노동조합의 활동은 부르조아 국가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무해하다고 인정된 경제적 투쟁에 국한되며, 그것을 관리한다. 경제투쟁이 한계를 넘어서 법의 규제를 받는 순간까지가 노동조합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이다.

 

물론 최근의 경험에서도 80년대말과 전노협 시기에는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가장 빛나는 시기이며 항상 기억해야하는 투쟁이다. 우리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이유라면, 그 속에서 이러한 법적 제한에 갇히지 않는/을 주체를 형성하는 계기를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때로만 성공하지만, 지속적인 과정이다. 노동자들이 결사체인 노동조합이 법 이데올로기에만 제한되지는 않는 자신의 생명력을 갖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은 그 과정에 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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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에 대해서는 (직접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알튀세르를 인용하자.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1970)」,『아미앵에서의 주장/1991,솔』에 실림, 무엇보다 전체를 직접 읽는 것이 좋겠지만.)

"계급투쟁은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들 속에서, 따라서 AIE들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들 속에서 표현되고 시행된다. 그러나 계급투쟁은 이러한 형태들을 훨씬 넘어선다. 그리고 피착취계급의 투쟁이 또한 AIE들의 형태들 속에서 시행될 수 있고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라는 무기를 권력을 쥔 계급들에게로 돌릴 수 있는 것은, 계급투쟁이 그러한 형태를 넘어서기 때문이다."(각주11, 강조는 원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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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들도, 자신의 조직형태를 노조로 규정하는 순간 같은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들의 노동조합은, 그 제도 자체의 정의에 따라 '사용자'를 누군가로 정의하고 '단체협약', '임금협약'을 요구하며,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을 모아내려한다. 그리고 이에 걸맞게 자기 조직 구조를 형성한다. 그것이 노조 활동의 시작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굳이 만들 조직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를 묻게된다. 이러한 노조 기구의 한계를 인식하는 활동가들이라면 오히려 평의회 형태를 조직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적인 발언을 하기 위해서 상호 평등한 관계에서 토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 말이다. 설사 그것이 노동조합의 형태를 취했더라도 그 운영이 기존의 노동조합과 같은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 점에서, 사후적인 이야기이지만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내가 민주노동당 상근자였다면 민주노동당과 같은 경우에는 '당직자 평의회'와 같은 형태를 제안했을 것같다.(물론 조직형태만이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조직이데올로기'가 작동하며, 그것은 조직의 성격자체를 규정하는 충분히 강력한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조합 형태를 취하는 것은 가볍게 볼,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동당과 같은 조직 안에서도 노동조합 조직형태를 반복한다는 것은 그 당이 스스로도 대안적인 구조와 운영을 실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노동당 노동조합을 만든 동지들만의 책임은 아니며, 당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그것이 당직자들에게 당지도부와 자신들의 관계가 '노사관계'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날 때 당직자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얼마나 가능할까?  다만 노동조합이라는 조직형태로 인해 부여되는 가상--부르조아 법이 제한하는 구조와 운영--에 스스로 빠지지 말아야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노조형태를 취한 상황에서 어떤 방식이 가능할까? 그것은 당사자들이 우선 고민해야할 문제이지만, 만약 민주노동당노동조합이 공공노조에 가입하게 된다면 지역별로 사회복지, 비정규직 등 운동과제에 '조합원으로서' 해당 현장의 노동자들과 결합하는 방법도 있을 것같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전형적인 '노조'활동과는 또 다른 방식의 노조활동일 것이고, 노조 안에서 사회운동을 강화하는 또 다른 의미의 활동이겠지만.)

 

"연맹사무처지부" 경우는 다를까? 나의 경우에는 '멤버쉽'이 가장 문제라고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참여한 상근활동가 모두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함께 했을 것이고, 그중 다수는 기존의 노동조합 활동관행을 더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찬가지의 위험에 처해있다. 이것 역시 일차적으로는 자본주의적 노사관계에 가까운 무엇이 우리 내부에서도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날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적어도 활동가들의 조직이라면 자본주의적 노사관계를 조직 내에서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지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한다.

 

물론 민주노동당 안에서나, 공공연맹 안에서나 그것은 조직의 객관적 현실이라는 한계에 규정당하고 있다. (말하자면 조직들 자체가 다른 관계를 실현하기에는 아직 너무 "후지다".) 그러나 주체적으로도 부르조아 법이 부여한 가상에 갇힐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러한 진술이 이제 '조합원'이 된 사람들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라는 것도 알고 있다. 민주노동당에서 '노동조합'까지가 가능했던 이유는 당기구의 한계만이 아니라 주체들의 한계까지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공연맹에서도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이와 함께 주체적인 측면에서도 더욱 강조되어야할 것은, 이러한 노동조합들이 조직의 상근관료들이 조합원을 대신하는, 관료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럴 위험이 상당하다.) 그들도 발언권이 있지만, 구조적으로 그것은 과잉대표될 수밖에 없는 위험이 있다. 따라서, 상근활동가들을 직접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하려는 시도에 진실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강조되어야한다. 그것이 자신의 관료적 지위를 강화하고 권력화를 비호하는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노동조합과는 다른 조직이어야한다. 그것은 지속적이고, (모순의) 이중의 항에 대항해야하는 어려운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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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민주노동당에서 '노동조합'이 적절치 않다고 비판하는 동지들의 진술이, 일면적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동시에, 그 형태를 '노동조합'으로 결정한 동지들에게도 항상 자기비판-자기지양이 필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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