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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1/31
    [교안] 자본주의의 위기, 노동자운동의 미래(2)
    겨울철쭉
  2. 2007/01/26
    대우빌딩 투쟁 승리, 86일째.(2)
    겨울철쭉
  3. 2007/01/19
    새흐름,「새로운 실천을 꿈꾸며」(2)
    겨울철쭉
  4. 2007/01/18
    김명호씨의 아이러니(17)
    겨울철쭉
  5. 2007/01/14
    [만화&]플루토Pluto, 아톰Atom(1)
    겨울철쭉
  6. 2007/01/12
    우리들의 미망迷妄 혹은 희망希望(2)
    겨울철쭉
  7. 2007/01/08
    [독서]산자와 죽은자
    겨울철쭉
  8. 2007/01/05
    남성으로 남성들에게; 그녀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자.(14)
    겨울철쭉
  9. 2007/01/03
    예상대로, 비정규직 대량해고 시작...!(1)
    겨울철쭉
  10. 2007/01/03
    조선일보의 여성혐오
    겨울철쭉

[교안] 자본주의의 위기, 노동자운동의 미래

작년 12월에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 강좌에서 "자본주의의 위기, 노동자운동의 미래"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진행한 강의 교안입니다. 제가 이런 주제로 교육을 할 위치는 아직 아닌데, 뭐 그래도 사례들을 곁들인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었던 것같습니다. 강의하면서 스스로 깨닫는 부분들도 있고 말이지요.

아래와 같은 두개의 인용문으로 시작했습니다.  사실 뭐 대부분의 내용이 제가 쓴 것이든 다른 사람이 쓴 것이든 짜집기 한 것이기는 하지만, 교안이라는 것의 운명이 본래 그렇죠.

… 따라서 노동자 조직들 (특히 계급정당)은 결코 노동자 운동의 총체성을 '대표'했던 것이 아니며 노동자 운동과 주기적으로 모순에 처해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노동자 조직의 대표성이 산업혁명의 특정단계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한 '집합 노동자'의 특정분파를 이상화하는 것에 토대를 두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대표성이 국가와 정치적 타협의 특정한 형태에 조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존 노동자 조직의 실천적 형태들에 반대하여 노동자 운동이 재구성되어야하는 순간이 항상 도래했다.
- 발리바르, 「계급투쟁에서 계급없는 투쟁으로」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과 노동계급의 지속적인 형성과 재형성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런 문제설정 덕택에 우리는 노동계급의 형성을, 통상적으로 제기되는 “누가 노동자인가?”라는 질문 속으로 던져버릴 위험성에서 비껴서 있게 된다. 노동계급의 역사적 존재형태라는 문제가 자본에 의한 노동시장의 분단, 인종·민족·젠더 등 비계급적 토대에 따른 노동계급의 배타적 자기 동일성의 형성, 국가에 의한 시민권의 경계 분할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경계긋기의 과정으로 역사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건은 (재)형성을 추동하는 기제를 어떻게 분석하느냐가 된다. 실버가 자본이동, 제품주기, 세계정치의 측면에서 노동운동의 지역적·세계적 추세와 근대세계체계의 변화가 맞물리는 지점, 즉 시간의 동학과 공간의 동학이 맞물리는 접합을 분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백승욱, 『노동의 힘』역자후기

신자유주의라는 정세와, 이 속에서 노동자계급이 전화한다면 노동자운동은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대의 확장, 대안세계화운동(그리고 여성운동, 반전평화운동)과 결합 등등.
 
교안파일(hwp) 다운로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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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빌딩 투쟁 승리, 86일째.

서경공공서비스지부 지부장 동지에게 이런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대우건설비정규투쟁위원회 일괄고용
민형사상면책합의
노조인정 25일15시 타결"


이 사진을 찍었던 것이 23일, 집중투쟁 기간 선포식 집회였으니까 최종적으로 합의, 타결된 25일이 86일째군요.

http://member.jinbo.net/rudnf/blog/p070123122604.gif

요즘같은 상황에서, 특히 오늘 코오롱동지들의 주점이 있었던 날 '장기투쟁'이었다고 말하기에 미안하기도 하지만, 고령의 노동자들에게 86일의 투쟁이란 ㅤㅉㅏㄻ은 기간이 아닙니다.

서경공공서비스지부 활동가동지들은, 항상 이 투쟁이 승리한다면 그것은 "연대의 힘" 덕분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습니다. 말 그대로, 이 투쟁에는 주변의 투쟁사업장 동지들, 지역노동자들, 학생동지들이 항상 헌신적으로 연대해주었습니다. 투쟁이 길어지면서도 항상 투쟁대오는 줄어들지 않았고, 강도높은 투쟁을 진행할 수록 더 많은 동지들이 모여주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는 무려 14명의 동지들이 투쟁과정에서 연행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결국 25일 최종적으로 투쟁의 성과를 얻어냈습니다. 물론 합의서는 합의서고, 현장에 들어가서 투쟁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미 계약을 체결한 용역사들은 인원을 줄이고 비용을 줄이는 것을 전제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따라서 복직한다고 해도 현장의 노동강도는 높아진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투쟁과정에서 형성된 조직력은 현장 투쟁에서도 다시 확인되어야합니다.

24일에는 서울역광장에서 330일째 파업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KTX동지들과 연대투쟁 문화제를 가졌습니다. 서울역을 앞뒤로 투쟁공간을 함께 하고 있는 두 사업장의 동지들은 그 동안 집회에는 서로 연대해왔지만 서로 같이 이런 행사는 못했었습니다. 어제 문화제는 날씨는 추웠지만 참 '따뜻한' 공간이었습니다.  진작부터 했어야했는데 말입니다.

http://member.jinbo.net/rudnf/blog/p070124193404.gifhttp://member.jinbo.net/rudnf/blog/p070124182748.gif

24일 서울역 문화제. "우리 어깨걸고 현장으로 돌아가자"   왼쪽은 꽃다지. 오른쪽은 고대 문선패 '단풍'. 맨앞에 있는 동지가 요즘 학생운동권 '스타'라는 군요. 예전에 주로 총학생회장이 그랬는데,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문선패 패장이 '스타'가 되는군요.
 
대우센터빌딩 동지들이 이 투쟁이 '연대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동지들이 그 연대를 자신의 실천 속에서 녹여낼 것이라는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연대가 연대를 부르는" 연대투쟁의 연쇄를 만들어가야겠습니다.

"늙고 힘없는 계약직 인생이지만
우리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투쟁으로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는 우리 조합원동지들에게 감동합니다.
http://member.jinbo.net/rudnf/blog/p070123122724.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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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흐름,「새로운 실천을 꿈꾸며」


'새로운 실천을 꿈꾸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는 금속노동자들" 엮음


재작년 금속연맹 임원 선거(박병규 선본)을 통해서 하나의 세력 혹은 경향(흐름)으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새흐름"은 작년 7월에 300여 페이지 분량의 책자를 발표했다. '노동운동의 발전과 미래를 고민한 글 모음'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소책자는 그 동안에 "새흐름"의 내부에서 공유되고 간간히 외부에도 제안되곤 했던 문서들을 정리해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새흐름'은 스스로의 주장처럼 명확한 조직적 형태를 취하기 보다는, 하나의 경향성이고 네트워크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경향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이 중에는 서로간에 매우 이질적인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정치적 방향에 있어서도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타 정파'들로부터는 이들의 비일관성이라든지, '새흐름'으로 분류된 일부의 문제점을 전체 '새흐름'의 문제인 것으로 부풀려 비난한다든지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새흐름'의 일부인 이상 비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문서로 제출된 입장을 살펴보는 것일테다. '새흐름'은 주로 금속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 소책자는 매우 흥미롭다. '조직'의 입장을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려니 부담되는 점도 없진 않지만, 암튼, 개인적인 느낌들이다. 우선 소책자의 핵심적인 주장, 내용을 살펴보고 몇가지를 평가해보자.


현장의 정서(자동차 대공장을 중심으로)

우선, 앞 부분은 현장의 정서를 금속 자동차 공장을 중심으로 진단한다. 현장활동가들의 증언을 모았기 때문에 생생하게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금속 외부의 활동가들에게는 좋은 읽기 경험이다.) 생산의 해외이전 추세, 98년 정리해고 경험 등으로 고용불안이 극히 심화되어 있다.(2007년 위기설 등) 이와 함께  “있을 때 벌자”는 분위기가 현장에 팽배하다.  이것은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지는 데 주40시간제 시행에도 불구하고 잔업을 확보하는 것이 노조의 능력으로 평가받는 것이 현실.

이  속에서 삶의 질은 오히려 지속적으로 저하된다. 그러나 잠재된 휴식에 대한 욕망은 이 이면에 팽배하다. 과도한 장시간 노동으로 인하여 가족의 위기가 발생하고 오히려 삶의 질을 저하되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불만도 잠복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노동조합의 현장 장악력은 저하되고 있다.  회사측의 일상적 회식을 통한 조직관리 등에 노동조합이 대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합원과 활동가의 거래’가 선거를 매개로 일어난다. 조합원은 자신의 실리를 직접 요구한다.  작업장 내부의 공동체성은 붕괴되는 중이다. ( 이는 새흐름이 노동자운동의 대안으로 ‘작업장 혁신’을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완성차와 부품사 노조의 갈등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 바이백 등에 대응하는 데에는 완성차의 지원이 필요하지만 무관심한 것이 현실이다.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관심하지만 (사업장에 따라서는) 투쟁이 ‘과도하다’는 정서도 존재한다. 그러나 노조는 구조조정의 방패막이로 사고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노동조합 활동의 관행과 타락

현장조직, 활동가들은 노조 선거에 대한 과도하게 몰입하고 있다. 현장투쟁보다 선거 대응이 중심이며 대공장 현장조직은 사실상 선거조직이라고 볼수 있다. 이들 현장조직들은 선거 때마다 후보의 인맥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새흐름의 이런 주장만이 아니라도, 이에 대한 연구논문도 많이 나와있다.) 그러나 중소사업장에서는 간부층을 충원하기 어려워 임원선거도 힘든 조건이다.

상급단체의 정파적 대립이 이러한 현장단위의 ‘맹목적’ 대립과 선거정치를 부추기고 있다.  운동노선에 따른 현장조직의 분립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이며  현장조직에 속하는 것이 작업장 배치 등에 있어서 일종의 ‘보험’을 드는 것으로 사고될 정도다.  상급단체에서도 간부의 인선이 ‘전문성’, ‘현장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줄’을 기반으로 형성되고 있다.

이  속에서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는 ‘노조 도구주의’가 만연한다.("자판기 노조") 노조가 노동자 민중과 투쟁하는 기관이 아니라 자신의 협소한 이권을 지키기 위한 이익단체,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업별로 담합적 노사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노조가 연대를 배제하고 이권을 단위 기업별 노조 안에서 나눌 뿐이며 그렇다면 전투적이라고 해도 담합적일 수 있다고 진단한다.  이를 비판하기 보다는 득표를 위해서 담합적 노사관계를 인정하는 정파들도 함께 문제가 있다.

민주노총 평가

주로 96-97년 총파업투쟁을 평가하면서 민주노총은 가두정치를 선택하기 보다는 의회 내의 타협을 통한 재협상을 선택했다고 비판한다. 민주노총은 IMF 이후 이갑용(현장파) 집행부도 총파업을 번복하면서 동일한 한계를 반복한다.  현대자동차 등 대공장에서도 비정규직 비율 16.9%유지합의라든가 식당여성노동자 정리해고 수용과 같이 신자유주의 공세에 후퇴해왔다.

새흐름은 민주노총의 위기에 몇가지 사례를 드는데 이런 것들이다. 대의원대회 정족수 미달, 재정자립 실패(정부보조금 수령), 한국노총과 차별성 약화 등. 특히 이들은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는 상층 지도부만의 위기는 아니라는 점. 실리주의는 현장에서 더욱 만연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대공장)현장에서 사용자로부터 관리되는 대의원, 활동가, 노조간부는 한편으로는 권력화되고 한편으로는 대중과 유리된다. "노동운동은 무능을 넘어 위선으로 나가고 있다"

지도부가 문제인가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도부 교체 전술은 한계가 분명하다. 98 노사정 합의 이후, 2002 4.2파업 철회 이후 비대위와 새 집행부가 구성되었지만 역시 제대로된 투쟁은 조직하지 못했다.따라서  지도부 교체가 대안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현장이 대안이라는 주장도 한계가 있다.  현장이 실리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점에서 “깨끗한 민주노조의 근거지”로만 사고할 수는 없으며 현장을 바꿀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정정파의 문제라는 주장도 한계가 있다. 정파들은 줄서기를 통한 권력장악에 몰두해왔다.  98년 이후 현장파-중앙파-국민파가 민주노총 권력을 번갈아 교체해왔지만 어느 집행부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역사가 있다. 따라서 특정정파가 민주노총 위기의 원인이라 주장하기 힘들다는 것이 명확하다. 모두가 위기의 공범이라는 인식이 필요한 대목. 그러나 현실에서 정파들은 역설적이게도 위기를 봉합하기 위한 정파연합을 발전시킨다.

노동단체 운동도 한계가 드러났다.  단체들은 독자적인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노조와 당의 정책사업을 대리하는 정도의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다.  정파들도 민주노총 내 정치에만 몰두하는 중이다.

또한 현장주의, 조합주의의 한계도 지적한다.  산업적, 지역적, 사회적 의제를 간과하는 ‘현장제일주의’는 협소하다는 것. 조합원의 실리주의와 계급적 노동운동의 원칙 사이에 동요하다가 전투적 실리주의로 전락해왔고 이는 (민주노동당을 통한) 조합주의적 정치활동으로 연결된다. 정치/경제의 분리로 노조의 실리주의는 정당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투쟁이냐 타협이냐’는 식의 (잘 못된) 대립구도는 결국 국민파의 입지만 강화시키고 있다.

각 정치운동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가한다.  민주노동당은 의회 선거정치에만 올인하고 사회운동을 외면하고 있다. 노동자의 힘은  ‘중앙파와 연합한 반국민파 결집’을 반복한다. 만약 ‘비제도적 투쟁정당’의 이상이 민노당 내에서 가능하다고만 하면 중앙파와 혹은 민주노동당 내 해방연대 등 좌파들과 차이가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의 힘은  정파운동의 방식 반복하는데, 노조 투쟁지원단체로 등장하다가 현장 셀을 꾸리고 조직원을 늘려가는 방식의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새흐름은 노힘에게 "오히려 자신의 정치계획을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또한 비합정파들. 이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전위’를 구성하고 대중을 지도하려 한다는 점에서 관념적이고 여전히 계몽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흐름은 "좌파 통합"은 불가능성하다고 말한다. ‘좌파’의 위치는 오직 ‘반우파’로만 확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내 좌파, 민주노총 내 좌파들) ‘공유 지반’이 없기 때문에 ‘좌파통합’노선은 불가능하다는 것. 이제까지 노동자의 힘은 좌파 중 중간정도의 스펙트럼으로 ‘좌파 좌장’ 역할로서, 중앙파와도 연합할 수 있고 비합좌파와도 연합할 수 있는 위치에서 힘을 발휘해왔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각 정파들의 차이가 소진되는 상황에서, 좌파가 단일한 정치노선을 갖지 못하는 현실에서 노동자의 힘을 중심으로한 좌파 결집론은 불가능(’활동가 조직‘)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좌파통합’ 보다는 새로운 질의 운동을 시작할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과제라는 주장이다.

운동적 대안

새흐름은 우선 운동의 현실, 즉 정파, 단체운동의 쇠퇴와 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재편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대안을 구성하자고 제안한다. 이 속에서  이념을 급진화하자,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자는 등의 주장을 하지만 이 소책자에서 그 실체는 모호하게만 나타난다. 다만  대안‘의제’를 만들자는 주장은 보다 구체적이다.

우선 "분배에서 개입과 통제로" 나가자고 제안한다.  경제투쟁으로 대공장의 임금은 인상되었지만 하청과 임금격차는 더욱 심화되었다. 노동과정에 대한 개입과 통제, 기업과 산업, 사회적 통제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기술을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제기하자는 것. 새흐름은 구조조정에 대한 개입과 통제를 통해 노동자가 작업장과 산업에 개입하는 것은 자본주의 소유관계에 대한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주장이 논란이 되는 사회적 합의와 관련된 것. "사회적 합의주의는 반대하지만 사회적 합의는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가 요구하고 정부와 자본이 받아들이는 것이 사회적 합의라면 국가차원의 교섭구조, 산업차원의 교섭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의제'를 통해 노동자를 사회적·정치적 계급으로 형성하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협소한 현장주의를 넘어서 재생산영역을 포괄하는 "계급형성"(의료, 주거 등)의 쟁점들이다.  재생산의 정치=생활의 정치=산업과 지역의 정치. 현장에서 재생산의 정치란 더 적게 더 쉽게 더 안전하게 일할 권리, 노동의 질을 추구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작업장 혁신이 제기된다. 그밖에 요구에 있어서 공세적인 투쟁, 시기에 있어서 계획된 투쟁, 투쟁형태의 혁신 등을 주장하고 사회적 연대 강화를 제기한다.

임단투도 혁신되어야하는데, 임금은 양의 문제에서 구조의 문제로 전환되어야한다. 산업연대임금을 형성하자는 제안은 여기서 나온다. 사회적 복지, 사회적 임금을 확보하자는 것. (완성차의 2004년 ‘사회기금’의 예)  단협은 경영과 산업의제에 개입할 수 있도록, 작업장 혁신을 위한 규범을 담아야한다. 대공장은 단협을 통해 경영권과 산업의제에 대한 개입과 통제의 근거를 만들고 그에 기초하여 생산과 투자계획에 대한 협상, 산업정책에 대한 협상에 주력해야한다.

이어서 임금전략, 고용전략, 노동의 질, 산업정책과 경영에 대한 개입과 통제를 요구하는 것으로 투쟁의제를 혁신하자고 제안한다. 산업적-사회적 의제란 이런 것들이다.

제조업 공동화에 대한 대응으로 산업정책에 개입. 이는 조합원의 단기 실리주의 극복의 방법이며, 노조의 사회적 고립에 대응, 노동운동의 전략적 발전 방향이다.(노동자가 사회적 주도계급으로 나선다) 이를 위해서는 임단협 수준이 아닌 운동전략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의제선점도 필요하다. 이와 함께  산업적·사회적 의제를 다루기 위한 교섭은 필요하다.(“아무런 대책없이 노사정위 불참을 주장하는 대안없는 반대를 외쳐서는 안된다.”)

새흐름의 주장 중 또한 독특한 것이 '작업장 혁신'이다. 작업장을 노동자 생애의 가장 중요한 터전으로 사고하자는 것이다.  작업장은 노동계급의 자기 훈련과 재생산의 핵심공간(작업장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응력필요)이라는 점에서 작업장 혁신은 단순히 작업현장투쟁이 아닌 자본전략에 대한 전면적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작업장 진단,작업장 ‘협상의 혁신’ 사업을 진행하자는 것.

조직적 대안

새흐름은 산별노조에 대해서 '널뛰기' 입장을 보여왔다. 신자유주의 시대, 산별노조 전환은 한계를 갖고 있다고 진단한다.(그래서 자동차 업종산별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어서 금속산별에서 “이중단일체계”를 제안하기도 했다.(업종과 지역 동시편제)) 그러나 이후 형성될 산별교섭과 투쟁은 (1) 산업정책⇒지역산업정책  (2) 지역적 공간적 동일성⇒지역공동체 두가지 방향이 가능하나, (1)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지역연대강화가 가지는 한계가 있다는 것.

정규직, 비정규직, 신세대 노동자, 정당 등 모두 새로운 운동 주체가 출현하기는 한계적.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가 네트워크 자체가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

 

구체적인 현장감각과 노동자운동이 처한 현실 분석

새흐름의 이 소책자의 전반부가 매우 흥미로운 이유는 생생한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 공간인 '현장'에 대한 진단은 구체적이고 치밀하다.

(나는 '현장' 개념에 대해서 예전 홈페이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현장"은 어떤 신비화된 공간도 아니며, 어떤 때는 계급적 입장에 맞게 투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보수적-퇴행적이기도 한 대중들의 삶의 공간 자체, 노동대중들이 노동"현장"에서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하나의 "사회"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모순들이 관통하는 모순적인 공간이다. - "현장" 개념의 모순과 난점)

특히 자동차 대공장 노동자들이 가진 △ 대중 이데올로기, △ 그것이 형성된 배경과, 또한 △ 그것이 노동조합 활동관행, 노조운동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연결고리를 해석하는 대목은 인상깊다. 이러한 분석들을 통해서 자동차 대공장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가지는  생산과정에서의 '구조적 힘'을 자각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는 아직 잘 방향잡지 못한 상황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럼 그 '방향'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가이다.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운동대안

그러나 이 소책자를 읽으면서 1/2 정도의 분량을 넘어가면서부터는 물음표가 쳐지기 시작한다. 운동의 대안을 제시하는 대목에서는 현실진단에 걸맞는 깊이가 부족하다. 그래서 새흐름의 현실진단과 대안은 대단히 불균형하게 느껴진다.

대표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작업장 혁신, 산업정책 개입과 같은 것들. 이런 과제들은 (이런말 죄송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연맹급의 노조 상급단체의 정책담당자의 현실적 고민이 될 만한 문제들이다. 문제는 이런 대안은 딱 그 정도의 수준이지, 애초에 새흐름이 제시하려고 했던 "노동운동의 발전과 미래"를 말하기에는 크게 미달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문제 분석과 대안 제시가 논리적으로도 불균등하기 때문이다. 현장의 문제로 제기된 것들이 발생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과정이다. 따라서 원인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안, 투쟁방향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로 나와야한다. 그런데 정작, 작업장 혁신, 산업정책 개입과 같은 것은 중요한 정책적 과제이기는 하지만 운동의 방향으로는 부정합하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교섭과 같은 쟁점에서는 혼란이 발생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코포라티즘의 위상, 국가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쉽게 산업정책 개입을 위한 사회적 교섭을 말하기 힘들 것이다. 공장이전과 같은 문제는 국가의 산업정책 개입의 문제라기 보다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본의 생산으로부터의 철수와 금융화, 초민족화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정책실무 차원에서 국가의 산업정책에 개입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겠지만 그것은 '운동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좌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작업장 혁신'과 같은 쟁점도 신자유주의 하에서 린생산, 적기생산과 같은 자본의 전략에 대한 면밀한 비판이 없이는 위험하게 동요할 수 있다.

정책실무 차원의, 실무적 고민은 산별노조와 관련된 입장에서는 동요로 나타난다. 사회운동과의 연대 확장이 중요하다는 새흐름이 오히려 업종 산별, 자동차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업종노조를 옹호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산별이 가결된 상황에서도 지역-업종본부의 '이중단일체계'를 주장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광역지역본부'를 주장한 좌파들보다 후퇴한 안이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지역본부를 골간으로 하자는 입장으로 전환하였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동요 역시, 실무적 고민이 정세 분석에 기반한 운동적 전망을 압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로 보인다. 이렇게 실무적인 단기 판단을 자주하다가는 자신의 정체성조차 혼란스러워지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지역운동과의 결합, 지역중심의 운동과 같은 쟁점에 대해 '의미는 인정하지만 현실 가능하지 않다'는 접근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는 자동차 산업에 주로 기반한 인식틀 때문이기도 하다.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은 사업장 내의 구조적 힘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지역적 연대를 통한 연합적 힘 형성에 소극적이었는데, 이런 경향이 새흐름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반복된다.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전형일 수는 더 이상 없다는 점에서, 이런 한계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고민하는 데 있어서 치명적일 수 있다.

넘어서야할 곳

그래서 안타깝다. 한 금속 활동가 동지는, 금속에서는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솔직한 사람'을 만나서 일을 함께 해야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적어도 새흐름은 그런 점에서 '솔직'하고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것이 '운동'인 이상 어떤 방향으로 하는 것인지는 결정적인 문제다.(솔직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옳은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전히 중요하다.) 새흐름은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인정하고,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옳은 말'만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들의 본질도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인식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매우 소중한 장점이다.

그러나, 운동적 대안을 내고 함께 투쟁하기 위해서는 더 나가야한다. 솔직한 것만으로 운동의 대안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의 원인을 인식하고 투쟁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인식이 필요하다. 현재에 있어서 그 고갱이는 신자유주의 비판이다. 이에 대한 인식이 누락되고는 보다 일반화된 대안을 제출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 비판이란, 단지 신자유주의가 나쁘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새흐름의 이 소책자도 충분히 하고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그것이 원인은 무엇인지, 따라서 어떻게 작동하고 노동자 민중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래서 어떻게 싸워야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새흐름의 이 소책자가 온 지점은 여기까지인 것같다. 자동차 대공장의 현실에 대한 인식,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정책, 운동의제 대안. 그러나 이 활동가들이 단지 자동차 업종 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 변혁운동의 일부로서 '노동자운동'을 하고자 한다면 한 걸음 더 나가야할 것같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실천'은 요원할 것이다. 새흐름 동지들이 "새로운 실천을 꿈꾸며"라는 소책자에서 보여준 진정성을 생각해본다면, 새흐름의 그런 전진은 우리 운동에 큰 성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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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씨의 아이러니

김명호 교수의 사건이 참세상에서도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재판부 기록을 보면, 이런 대목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증언을 기반으로 한 것이니까 이 것들도 사실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수업 중 학생들의 시위 소리가 귀에 거슬리자 '저런 새끼들이 학생이냐', '저런 놈들을 총으로 쏴 죽여버리고 싶다'라는 말을 한 점 △수업 중 공공연히 '내가 내년에 학과장이 되면 과내 모든 써클을 없애버리고 학생회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한 점 △학생들에게 '애가 어렸을 때 잠자는데 울길래 패버렸다', '성대 수학과 대학원생들은 쭉정이들이다'고 말한 점 △수학과 동아리 학생들에게 '씨팔놈', '개새끼'라는 욕설을 한 점

그냥, 뭐, 이렇다는 겁니다. 공대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저같은 사람 입장에서 이런 교수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선배 과학생회장은 91년 강경대 열사 투쟁 때 수업을 빼는 문제로 학과장면담하다가 재털이가 날아와 크게 위험하기도 했지요. 우리과만 그런것도 아니었죠. 그땐 참, 그런 인간도 덜된 자들이 교수랍시고 선생'질'한다는 게 분노스럽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했습니다. 나이도 들고 공학적 지식이 머리에 있으면 뭐합니까, 인간이 덜 되었는데 말이죠. 김명호 교수도 뭐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같습니다.

이번 판결 자체는 심각한 문제가 있고 사법부의 본질을 또 한번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명호라는 양반도 존경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그래서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김명호씨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던 것은 그것이 어느 방향이든 하는 사람인 것같은데(이번 "테러"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총쏴버리고 싶다고 했던 시위대 출신들, 없애버리겠다던 학생회 출신의 진보적인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사법부의 기만적인 작태에는 분노하면서도, 비판하면서도 (더구나 반동적인 사법부가 저런 증언들을 판결문에 인용한다는 것자체가 역겨운 일입니다. 이런 걸 증거로 제출한 삼성재단이 지배하는 성균관대 역시 그렇죠. 그들도 학생회 없애버리겠다는 데에는 동감하면서도 이런 걸 증거라고 내다니, 구역질 나옵니다. )
김명호씨를 그냥 옹호하는데 까지 가기엔 씁쓸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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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플루토Pluto, 아톰Atom

 
플루토 Pluto 
테츠카 오사무 지음, 우라사와 나오키 그림

술자리 대화에서 추천받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 <플루토>.
<20세기 소년>, <몬스터>, <마스터 키튼> 등을 그렸던 우라사와 나오키는 테츠카 오사무의 <철완鐵腕 아톰> 24~25화, "지상최대의 로봇"편에서 테마를 가져와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 테츠카 오사무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인지, '지음'을 그로 했다. 작품의 이미지, 인물 모든 곳에서 오마주를 확인할 수 있다.(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상최대의 로봇"편을 애니메이션으로 봐야한다.)  이제 일본 만화들이 세대를 넘어 세대간-재해석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작품소개는 주요 포탈사이트를 참고하시면 되겠고. 현재 국내에는 2권까지 정식발매되어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4권+a까지 볼 수 있다.)
"지상최대의 로봇" 편에 나오는 7개의 로봇과 이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플루토'가 나온다. 캐랙터들은 모두 재창조되었는데, 위에 책 표지에 나오는 것이 게지히트 형사(左)와 아톰(右)이다. 각각의 로봇 캐랙터 모두(인간도 마찬가지로) 보다 '인간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http://member.jinbo.net/rudnf/blog/pluto1.jpg  http://member.jinbo.net/rudnf/blog/atom1.gif
△ [左] <철완 아톰>에서 게지히트 형사와 플루토의 대면, [右]  <플루토>에서 아톰.

그들은 모두 '인간적'이다. "공각기동대"에서 시작해서 헐리우드의 "AI", "바이센티니얼 맨", "아이,로봇"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들의 인간화, 로봇이 인간과 유사한 영혼을 갖게 되는 이야기들은 많이 변주되어왔다. 그러나 그 원형은 아무래도 '아톰'이라고 할 만한데, 이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그들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마침내 '완벽한 로봇'은 증오와 분노, 질투, 그리고 슬픔까지(그렇다면 사랑까지),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된다는 (아톰의 원래 창조자인) 텐무 박사의 이야기는 이 작품이 놓여진 배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단지 '배경'이라고 말한다. 이 만화는 발달한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철완 아톰>이 처음 연재된 50년대초부터 60년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방영된 70년대는 일본의 전후복구와 경제부흥이 가시화되면서 마치 인간이 기계의 부속으로 완전히 편입되는 것으로 느껴졌던 시기, 그래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고민이 더욱 커진 시기다. 그런 고민은 비인간적인 것의 인간화라는 우회로를 통해서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묻는다. 인간은 인간적인 무엇을 갖고 있는가.

(그런 점에 비해서 "공각기동대"는 고유한 '인간'에 비해서는 '인공적인 지능' 자체에 촛점을 두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지만, 나는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맥락, 의미는 <철완 아톰>에 비해서 후퇴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특히 "공각기동대2-이노센스"는 더 심하다.) 그런 점에서 그것을 다시 복제하는 헐리우드는 말할 나위가 없다.)

http://member.jinbo.net/rudnf/blog/pluto2.gif그래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이 작품도 오히려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을 갖고 있는가. 그들은 전쟁에 가슴 아파하고, 아이를 돌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로봇을 지키려고 하고, 살아있는 것들/혹은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다.("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 해야지" /윤동주, 序詩) 증오와 분노로 고통받는다.(한 에피소드에 자신을 드러낸 플루토가 보여주는 감정은, 다른 것들보다 '슬픔'이다.) 당신들은 그것을 갖고 있는가.

"그 아이는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나는 마음이 벅차 올랐다. 로봇인 내가.."
(로봇 형사 게지히트가 아톰을 만나고 헤어지는 장면.)

고유하게 '인간적'이라고 정의된 것들에 대해서 질문하면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이 속에 존재하는 증오와 고통을, 인간적인 것의 또 한 부분으로 대면시킨다. 가장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영혼을 가진 플루토는 (오히려 아마도 그것 때문에) 고통받고 주체할 수 없는 폭력으로 나간다. 그런 점에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또한 단지 '인간적인 것'이 고유하게 '선한 것'으로 규정된 어떤 것들이 아니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증오와 고통에도 눈감지 말 것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합성을 눈앞에서 대면할 것을 요구한다.

'플루토'는 말하자면 그런 존재다. 인간을 비추어보는 거울.

한편, 로마신화의 플루토Pluto는 그리스신화의 하데스Hades, 저승의 신이다. 그래서 Pluto는 명왕성冥王星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년, 국제천문연맹의 결정으로 태양계의 형성planet이 아니라고 '결정'되고 소행성asteroid 134340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치 이 만화에서 플루토가 SOL228350..뭐 이런 이름을 달고 있는 것처럼. 작년에 이 결정이 있은 후에 '미국 방언협회'라는 단체가 plutoed라는 단어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고 한다. '추락하다, 위신이 떨어지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저승의 신이 이런 식으로 취급받아도 되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플루토, 하데스를 먼 태양계 외곽의 소행성대인 카이퍼벨트에 추방하고자하는 무의식들이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라사와 나오키가 보여주는 것처럼, 플루토-죽음은 인간적인 것-삶의 이면이며,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한 측면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고, 우리의 '인간적인 것'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고통들에도 대면해야한다. 마치 아톰이, 플루토에게 뛰어드는 것처럼. 그래서 그 속에서, 그것은 (주인공격인) 게지히트, 이건 또 하나의 당신이라고, 아니 (어쩌면) 당신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4권,Act27) 그때 아톰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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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미망迷妄 혹은 희망希望

나는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된 몇몇 글이나 논의에서, 산별노조 건설 자체가 노동자운동의 대안이 될 수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조직적 재편을 강제하는 정세를 창출하고 따라서 개입을 위한 열린 공간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런 점에서 공공연맹의 산별노조 건설(전국공공서비스노조 전환) 과정 속에서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운동과 친화적인 노동조합 구조를 조직하기 위한 나와 우리 동지들의 노력은 이런 계기들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속에서 기존의 고루하고 관료화된 노조 조직구조를 혁신하고 '운동'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을 복원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가 있다.

공교롭게도 공공연맹의 임시대의원대회가 성원부족으로 개회조차 못하고 무산된 날, 산별노조의 서울지역본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와 초기업-초업종 서울지역지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는 나름대로 알차게 진행되었다. 오전에 있었던 서울지역본부 논의(산별노조 서울지역 지부-지회 대표자회의)는 지역의 운동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논의를─현재 논의일정이 대단히 부실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진행했다. 그리고 저녁에 있었던 서울지역지부 준비모임도 의미있게 진행되었다.
 
▶ 당일 대의원대회와 관련된 참세상 기사
공공연맹 임시대대 개회도 못하고 무산
토론회에 이어 임시대대도 무산, 통합연맹 빨간불

 


지역을 단위로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사회복지부문 등을 중심으로 한 (초기업, 초업종) 지역지부를 건설하는 노력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전체 산별노조 조직질서 속에서 '보장'하기 위한 초업종 "업종본부"를 구성하는 노력이 병행된다.

('전국공공서비스노조'의 조직형태는 금속노조에도 미달하는 것으로, 광역지역본부와 업종본부 양자를 모두 골간으로 인정하고 두 본부에 모두 편제되는 것을 강제하고 있다. 이 부분은 마치 금속 새흐름이 예전에 주장한 "이중단일체계"와 유사하다. 게다가 금속에서도 많은 동지들이 반대했던 '한시적 기업지부' 또한 인정된다. 더더군다나 '한시적'이라는 말은 사실 수사에 불과한데, 이 기한을 3년으로 못박자는 주장은 주로 우파들의 고집으로 인해 '3년 후 논의한다'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덕분에 지역을 중심으로 운동하고자 하는 단위들도 의무적으로 "업종"본부에 편제되어야하는 곤란함이 발생한다. 게다가 전국단위 기업별노조에 속해있지만 지역중심의 운동을 전개하려는 동지들은 조직 내에서 구조적 제약을 받는 상황이다.)

각 지역에서 초기업, 초업종 지역지부를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지역에서는 이날 "서울지역지부 준비위" 1차 모임을 가졌다. 대부분의 "지부"단위가 기업별로 구성되고 있고, 그나마 '나은' 단위들이 업종지부를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시도는 지역차원에서 연대의 정신을 부활시키고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이념에 따라 조직을 구성하려 한다.  이러한 노력은 산별노조 자체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노조운동을 위한 '코어'를 형성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단위를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하고 조직 내 '경향'을 강화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조직 내적이 여건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일반화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어서, 대공장 사업장 활동가들이 산별노조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세사업장, 비정규직사업장의 경우 연합적 힘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적 조건으로서 산별노조가 의미가 있지만, 대공장 사업장에서는 그나마 존재했던 현장투쟁을 약화시키고 관료화를 부추길 염려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공장 현장파 활동가들의 산별부결운동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만, 자신의 사업장의 현장주의에 갖혀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하고 싶다. 노동자운동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은 대공장의 '사업장'이라는 현장보다는 오히려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지역'이라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각 지역에서 이러한 형태의 조직을 구성하는데 각 지역에서 주로 우선 나서는 조합원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방자치단체 비정규직 노동자, 용역-외주위탁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 시설관리노동자, 영세사업장 노동자, 학교비정규직노동자, 사회복지부문 노동자(보육, 자활기관, 사회복지시설 등)와 같은 사람들이다. 지역을 근간으로 해서 "연합적 힘"을 형성해야하는 노동자들이다.(이 '연합'의 대상이 노동조합으로만 제한되지 않으며 지역차원에서 사회운동도 그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회운동적 노조주의 경향을 가질 수 있는 조직적 여건이 형성되기도 한다.)

모임을 갖고 간단한 뒤풀이. 회의를 하면서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노조운동을 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함께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들을 확인했다. 뒤풀이를 하면서는 각자의 조건을 대화 속에서 확인하면서 어려움도 있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학교비정규직 동지들은 새롭게 조직되는 학교내 시설관리 노동자들과, 기존에 시설관리 용역 노동자를 조직했던 동지들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자활지부에서 조합원들이 만나는 청소용역, 사회서비스부문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을 함께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청소용역, 학교비정규직, 보육 등 여성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역에서 함께 만나고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사회복지, 사회서비스, 빈곤이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지역에서 여러 사회운동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이것은 공공부문 노조운동 안에서는 "사회공공성"이라고 불린다. 나는 이 개념에 다소 불만이 있지만 ^^;) 이렇게 가능성들을 찾아갔다.

(일전에 자활기관에서 일하는 블로거인 체게바라님과 사회서비스업무를 자활기관이 위탁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논쟁한 적이 있다. "근데 왜 굳이 청소용역입니까" 등. 이날 회의 뒤풀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하는 과정에서 참여주민을 조직하고 함께 투쟁할 수 있다는 점을, 이 과정에서 각각의 주체들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어려운 문제에 대한 현실의 답을 찾은 셈이다.)

이렇게 해서, 산별노조 내에서 우리가 새롭게 만드려고 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초업종, 초기업 조직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작은 감동도.

하지만, 그것이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지난 6월에 같은 방식으로  이미 조직해왔던  "지역공공서비스노조"에 대한 평가토론 워크샵을 진행하면서 한계를 너무나 분명하게 확인했던 것이다. 지역연대확장과 강화, 비정규직 조직화, 조합원의 주체화, 사회운동과의 연대의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마찬가지로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하게)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기업별 조직구조, 취약한 조직역량, 조직확대의 한계를 뼈져리게 평가했다. 따라서 지난 2~3년 동안의 각 지역에서의 실천에 대차대조표를 그려본다면 결코 좋은 성적을 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엊그제 있었던 초기업-초업종 지역지부를 구성하기 위한 모임도 지난 몇년간의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운동을 좀더 규모가 큰 서울지역에서, 산별노조 건설 이후라는 조건에서 반복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한계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확인한 희망希望은 어쩌면 미망迷妄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는 서울지역에서도 이제 처음 모여서, 지역을 중심으로, 사업장과 업종을 넘어선 노동자의 연대, 사회운동과의 연대, 비정규직 조직화라는 이념으로 만나지만 그것을 온전히 실현하는 조직을 만들 수 있을 지 솔직히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가 엊그제 잠시 서로 확인한 가능성들은, 지난 몇년간의 각 지역에서 실천에 대한 평가에 비해서는 너무나 연약하고 취약하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은 희망이라기보다 미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현재의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그것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고, 어쩌면 성공한 대차대조표를 만들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
몇 년 동안의 (비록 부정적인 부분들이 많이 지적되었다고 하더라도) 평가가 있고 교훈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실천을 함께 고민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자. 각 지역 동지들의  몇년 동안의 어려운 실천과 실패 덕분에 우리는 좀 더 나갈 수 있다.(그 실천들에 경의를!)

그래서, 그것의 모든 가능성들을 사고해야하겠지만, 다만, 희망하는 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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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산자와 죽은자


산 자와 죽은 자 1,2
제라르 모르디야 지음, 정혜용 옮김

  

(※ 열심히 썼다가 글이 등록이 안되고 날아갔는데 아주 힘빠지네요. 시스템을 탓할 것인가, 부주의를 탓할 것인가. 그래도 오기 발동. 다시 작성.)

 

프랑스의 소도시 로셀, '코스'라 불리는 공장폐쇄에 직면한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돌입한다. 한 신문은 이 소설을 "탈공업화 시대의 제르미날"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제르미날"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듯.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노동자들에게 어떤 삶을 강요하는지는 프랑스나 남한이나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같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너무 전형적이고 따라서 사실주의적인 소설. 등장하는 노동자 인물들의 대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의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만한 인식들이 어느 정도는 퍼져있으니 이런 묘사가 가능하겠지. 부럽다.)



생산에서 철수하는 자본, 금융세계화

 

이 소설의 주된 무대인 공장은 플라스틱필름을 제조하는 공장이다. 이 공장이 결국은 폐쇄되고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수밖에 없는 과정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과정에서 자본이 생산에서 철수하고 금융투기로 전환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1) 경쟁력이 약화된 공장을 한 초국적 기업이 인수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공적자금과 물질적, 행정적인 편의를 제공받는다.

(2) 그러나 이 기업은 생산을 남부유럽, 동유럽에 재배치하면서 물량을 감축하면서 수익성을 이유로 구조조정을 강요한다. 이를 이유로 다시 한번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을 받는다.

(3) 이 회사는 다시 미국계 금융투기자본인 한 페이퍼컴퍼니에 매각된다. 이제 완전히 청산. 이 투기자본은 공장이 가지고 있는 특허권만 매각하고 나머지는 폐기한다.

전체 과정 속에서 국가는 자본의 금융화를 재정적으로, 제도적으로 지원하면서 노동자의 불만을 적절히 관리하는 역할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는 어떤일이 벌어졌을까? 구조조정 과정에서 300여명의 노동자들 중 70여명이 정리해고되고 임금은 삭감된다. 그리고 최종적인 공장폐쇄 과정에서 전체 노동자들은 해고된다.

 

이런 과정은 자본이 생산에서 철수하여 완전히 금융화되는 과정이나, 생산의 초국적 재배치와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중심부, 반주변부 제조업이 처하게 되는 전형적인 상황이다.

 

작가가 이런 과정을 면밀하게 묘사하는 것은 프랑스에서 이런 식의 자본의 생산철수가 빈번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로서 금융화라는 쟁점이 대중적으로도 인식되는 사정도 더 이해할 수 있다.(ATTAC과 같은 대중적인 사회운동을 생각해보자.)

 

이에 비해서 남한에서 공장폐쇄는 주로 '해외이전', '산업공동화'로 이해된다. 강력한 생산기지로 부상하는 중국이 인접해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사회운동 진영에서조차 문제가 '금융화', '생산에서의 철수'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중국으로의 공장이전에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보다는 중국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촉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근 외환은행과 론스타, 오리온전기 사태 등에서도 보이는 것과 같이 금융투기, 금융화의 효과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뚜렷히 드러나는 중이다.

 

프랑스의 노동관행, 제도, 투쟁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에서 노동제도와 관련된 것들이다.

우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행동양식. 구조조정과 공장폐쇄가 진행되고 지방 소도시의 거의 유일한 공장인 300명짜리 직장이 사라질 위기가 되자, 이 문제는 지자체의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그리고 중앙정부 차원의 관심사로 등장한다. EU-정부-지자체가 해고 노동자들의 특별퇴직금을 분담하는 안까지 논의된다. (남한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노동조합과도 이러한 보상 방안을 두고 정부와 지자체가 직접 협상한다. (역시 남한에서는 거의 어림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국가의 폭력적인 본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투경찰이 등장하는 광경은 남한과 똑같다. 마지막 대규모 지역시위 과정에서 연대투쟁온 다른 공장의 노동자와 지역주민 여성이 각각 전투경찰 폭력으로 사망하고, 전투경찰도 한 명 죽는 사태가 발생한다. 지역주민 여성은 직격발사된 최루탄에 맞아서(이한열 열사처럼), 연대투쟁온 노동자는 곤봉에 맞아서(강경대 열사처럼) 죽는다.

 

한편, 정부가 이런 식의 교섭에 나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동조합의 입장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 '코스'공장 안에는 세 개의 노동조합 조직이 있다. (복수노조니까 당연하겠지. 사실, 노동자가 자기가 속하고 싶은 조직에 가입한다는 것은 시민적 권리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이를 노동법으로 규제하는 남한의 현실은 웃음거리가 되기 알맞다.)

 

노동총동맹CGT, 노동자의 힘FO, 민주노동동맹CFDT 새개의 조직이 있다. 일반적으로 CGT는 공산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FO는 우익적, 실리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것으로, CFDT는 사회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들에 대한 묘사는 흥미로운데 아마도 현실에서 이들이 취하는 입장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같다.

 

CGT는 입으로는 원칙적인 입장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런 입장을 갖고 투쟁을 하지도 일관되게 밀고 가지도 못한다. CFDT는 온건하게 '합리적인' 입장을 가지지만 반여성적인 구조조정에 동의하고 인종주의적인 모습도 보인다. 차라리 경제주의적인 입장에 충실한 FO가 솔직하게 자기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한다. 여튼간에 이들은 시종일관 조합원들을 통제하려고 하지만 시종일관 실패한다. 현장의 자발적인 투쟁(와일드캣 스트라이크가 빈발한다)에 밀려서 협상장에 나서는 것이 이들의 포지션이다.

 

CGT의 모습은 공장에서 지부대표의 모습 뿐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나온 간부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파견나온 중앙 간부는 시종일관 공장폐쇄를 기정사실화하고 특별해고수당을 더 확보하고, 직업훈련기간과 그 기간의 임금을 더 확보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하는 순간에도 이들을 기만하고 현장에서 합의되지 않은 안을 갖고 협상을 진행한다. 더구나 간부는 현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 아니라 정부(노동부와 지자체)와 협상하기 위한 '조정자'라는 신분으로 왔다.

 

이러한 모습은 민주노총의 '국민파 '보다도 우익적인 것으로서, 공산당을 지지하는 조직이라는 말이 민망한 일이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공장점거와 투쟁을 주도하는 급진적인 젊은 노동자들이 대부분 CGT 조합원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시종일관 CGT의 방침을 거부하고 투쟁을 밀고 나가지만 말이다. 결국, 마지막 국면에서 CGT 대표가 쓰러져 병원에 옮긴 사이에 FO, CFDT 대표들은 후퇴된 합의안에 '직권조인'하고 공장에 합의를 (노동자에게) 강요하러 온다.

 

여튼, 이런 모습을 보면 그나마 남한의 민주노조 운동은 전투성이나 원칙에 있어서는 '양반'인가 싶기도 한데, 씁쓸한 일이다.

 

지역투쟁

 

이 소설의 절정이라고 할만한 대규모 지역시위. 인근지역 공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결정도 없이 비공인파업에 돌입하여 연대한다. 지역주민들도 거리에 나선다. 지역주민들은 '코스' 노동자들의 친척이자 친구이며, 이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이런 방식의 지역투쟁이 가능한지는 알수 없는 일이지만, 지역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단체, 연대기구같은 것이 없이도 지역의 공동체성만 갖고 투쟁을 조직해서 나서는 모습은 놀랍다. 지역차원의 투쟁이 되기 위해서는 '지역민중연대'같은 조직도 중요하겠지만, 지역의 노동자`시민들이 공동체라는 관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와 여성노동자

 

첫번째 구조조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여성노동자들이다. 회사는 근속연수, 나이 등 여러가지로 '기준'을 만들지만 그것은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여성노동자들을 해고대상으로 이미 염두에 두고 작성한 것에 불과하다. 기준자체가 젠더편향적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여성들이 해고된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지자체는 직업훈련과 재고용을 약속했지만 정작 훈련받은 직업에 취직된 경우는 없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마당이니 취업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나마 취업한 경우라면 가정부, 보육, 웨이트리스 등이 저임금, 비공식, 하인 노동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여성들을 어디로 내모는지 보여준다. 여성의 권리가 증진된 국가로 알려져있지만 그 근본적인 양상은 남한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국제적인 '통일성'을 새삼 확인한다.

 

놀라운 여남관계 ; 다중성과 개방성

   

이 소설의 주요 플롯에서는 조금 떨어져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소설에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여남관계가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일 뿐 아니라 다중적이라는 점. 주인공 루디를 포함해서 많은 등장인물들이 결혼한 배우자가 아닌 남성, 여성과 성적 관계, 애정관계를 맺는다. (동성애도 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가책을 느낀다거나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결혼한 배우자를 사랑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의 애정관계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전에 이미 관계가 안좋은 경우.) 우리나라에서의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이 책을 읽은 한 동지는 이 책을 보면서 '폴리 아모리'라는 개념이 떠올랐다고 이야기했다.  비독점 다자연애, 혹은 개방결혼이라고 번역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아내가 결혼했다> 소설로 알려진 개념. 소설에서와 같은 상황을 나타낸다는 것인데, 이성애, 동성애에 대한 관념이 사회마다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다시 발견한다.

 

이러한 관계방식은 콜론타이의 자유결합과도 또 다른데, 같은 시기에조차 동시에 복수의 이성과 애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입장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제르미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을 "탈공업화 시대의 제르미날"이라고 한 평가가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이 소설은 제르미날의 구도와도 매우 유사하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구조 자체와 연결된 자본가의 착취와 폭력에 맞서 투쟁하고 그 과정에서 폭력도 돌발한다. 그러나 결국 노동자들은 패배하고 누군가는 죽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개별 투쟁이 패배하더라도, 자본가들이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손해를 보고 상처를 입는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단결이 가지는 힘과 한계를 모두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함부로 다룬다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훈으로 얻는데, 따라서 당면한 투쟁에 자본가가 승리하더라도 무작정 착취를 강화할 수만은 없게 된다. 제르미날Germinal, 혁명력, '싹트는 달'이라는 의미에 맞게.

 

이 책에서 주인공 격인 루디도 제르미날의 주인공인 에티엔느처럼 외지에서 온 사람이며, 젊은 노동자이고, 사회주의자이고 투쟁에 나서고, 또 패배한다. 그리고 작품의 맨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19세기와 21세기 두 세기를 넘어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유사한 방식(사실주의)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점이 어떻게 보면 놀랍다.

   

산자와 죽은자

 

소설의 제목은 산자와 죽은자. 이것을 작가가 어떤 의미에서 붙였는지 알수는 없지만, 산노동과 죽은노동이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자본가들에게 구조조정은 자본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 숫자를 통제하고 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수익률을 확보하기 위해 몇명의 노동자를 해고할 것인지, 해고수당을 얼마로 할 것인지 같은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자본가에게는 수익률과 다를 바없는 의미를 가지는 해고 노동자의 숫자는, 하나 하나가 한 노동자의 운명에 걸려있다.

 

이 소설에도 등장하는 노동자들도 그렇지만, 노동자들은 하나하나 생명이 있는 인간으로 구체적인 노동을 수행한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죽은 노동의 대리인일 뿐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인간=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노동자들이 쟁취하는 것은 시민권의 가장 중요한 실현. 이 책의 추천사에서 소설가 신경숙은 "새삼 훌륭한 시민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깊이 하게 하는 대작"이라고 썼다. 인간=시민으로서의 노동자의 권리가 곧 시민권이자 인권이라는 점에서, 신경숙의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시사적이다.(노동자가 시민이라는, 이 중요한 쟁점은 많은 경우에 잊혀지기 쉽상이지만 말이다.)

 

루디는 말한다.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면 공장장님이 옳습니다. 그 기계는 코스의 재산,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코스를 지배하고 있는 회사의 재산이겠죠. 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직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기계는 우리 것입니다. 이 기계에 그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노동이니까요."

 

--

마지막 덤으로.

루디를 비롯한 젊은 급진적 노동자들이 점거중인 공장의 작업실 하나를 폭파시킨 후. CGT 공장지부 대표인 피냐르와 루디의 대화.

"지금 자네들이 한 짓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나? 급진주의라고. 그럼, 급진주의란 뭔가? 그건 고용주들이 제일 반기는 것 아닌가?"

"그런 말은 신물나게 들었어요! 그러니 제발 더는 하지 마세요. 공산당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로 죽 그런 소리를 해대지 않았나요!"

 

 


 

덤으로 하나 더. '제르미날'과 같은 프랑스혁명 후 혁명력에 대해서.(펌)

 

1793년 10월 5일 국민회의가 소집되어서 달력 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법령을 통과 시킵니다. 그 내용으로는

1. 1년은 가을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 즉 추분에 시작된다. 옛 달력으로는 9월 22일에 해당한다. 이 날은 최대한 정확한 천문학적 측정을 토대로 정해진 것이다.

2. 1년은 모두 30일씩 갖는 12달로 나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가을 1월 : 포도 수확의 달(Vende'maire, 방데미에르)
   2월 : 안개의 달(Brumaire, 브뤼메르)
   3월 : 서리의 달(Frimaire, 프리메르)
겨울 4월 : 눈의 달(Nivose, 니보즈)
   5월 : 비의 달(Pluviose, 플뤼뷔오즈)
   6월 : 바람의 달(Ventose, 방토즈)
봄     7월 : 싹의 달(Germinal, 제르미날)
         8월 : 꽃의 달(Floreal, 플로레알)
      9월 : 풀의 달(Prairial, 프레리알)
여름 10월 : 추수의 달(Mseeidor, 메시도르)
   11월 : 더위의 달(Thermidor, 테르미도르)
   12월 : 열매의 달(Fructidor, 프뤽티도르)

3. 나머지 5일은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세력의 이름을 따라 상퀼로티드(Sansculottide)라고 통칭한다.

4. 윤년에는 여섯 번째 상퀼로티드를 추가한다. 윤년은 예전처럼 4년마다 오는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으로 정해지는데, 이것은 정확한 천문학적 관측을 통하여 새해 첫날, 즉 포도 수확의 달(방데미에르) 1일이 정확히 춘분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혁명 달력에 따른 윤년은 공화국 2년, 7년과 11년 이었다. 그레고리우스 달력에 의하면 1793년 1798년과 1802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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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으로 남성들에게; 그녀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자.

내가 밑에 포스트 <여성단체 활동가와 나눈 대화> 에서 언급했던 가족 내  불평등 호칭 바꾸기 켐페인이 있습니다.


아래 <조선일보의 여성혐오>라는 포스트에서 언급한 조선일보 등의 기사가 나간 이후에 켐페인 홈페이지가 난리입니다. '분노한 남성'들이 몰려왔는데,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제가 언급하지 않아도 상상들이 되실 겁니다.

그래서 작은 힘이라도 보태자는 차원에서 게시판에 글을 썼는데, 아래 글입니다. 원문은 여기



남성으로 남성들에게; 그녀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자.

이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서 남성으로서 한편으로 (익숙하게 보아온 광경이면서도) 다시 한 번 놀라기도 하고 답답한 느낌이다. 여성에게 차별적인 호칭을 바꾸자고 시작한, 그것도 "여성이 여성에게 쓰는 호칭"을 여성들 스스로 바꾸자고 제안한 이 켐페인에 오히려 남성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로 그런 남성들에게 같은 남성으로서 같이 생각해보자고 제안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여러가지 주장들이 있고, 몇몇 주장들은 호칭의 언어학적 기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견을 밝히는 글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아냥, 조롱, 분노를 담은 글이다. 일부는 성폭력적인 글도 있다. 이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그래서 '남성들의 분노'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어원 등에 대한 의견이 다르면 그냥 깔끔하게 그에 대한 입장만 밝히면 될 일이다.) 여성민우회는 남성들의 분노를 촉발시킬 만한 일을 한 것일까? 성평등한 호칭을 쓰자는 주장이 왜 남성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일까?
 
여기에는 복잡한 이유들도 많겠지만, 주로 남성들의 사고가 여성이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평등은 남성 자신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어와 같은 상징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 상징들은 물질적인 힘을 갖고, 언어의 평등은 관계의 평등으로 연결된다. 인간은 상징들 속에서 사고하기 때문이다.
 
(어떤 남성들은 '왜 경제도 어려운데 호칭 따위를 갖고 '국론'을 분열시키냐"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도 진정으로 호칭과 상징이 정치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게시판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논쟁에 '경제'와 '국론분열'이라니, 히틀러와 스탈린도 혀를 내두를 전체주의 사회가 따로없다.)
 
이 켐페인에서 여성들의 주장은 우리 언어 속에 내재되어 있고, 따라서 여전히 상징으로 작동하고 우리 행동에 영향을 주는 호칭들을 반성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예 적극적인 대체 호칭을 제시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을 '함께 고민해보자'고 열어두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성적 편견,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각을 스스로 반성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을 부정하고 눈을 감는 순간 자기반성이란 불가능하며, 자신에게 무의식적인 영향을 주는 호칭과 상징에 대한 비판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기반성이 불가능한 사람이란 타인과의 열린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게시판에서, 어쩌면 자신들과 상관없을지도 모르는 문제에 열을 올리는 남성들을 보자면, 같은 남성으로서 씁쓸해진다. 이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차별에 대해서 눈을 감고, 적극적으로 부정할 뿐더러(이렇게 하려면 세상을 자신의 관념에 따라 색안경을 끼고 바라봐야하는데, 그 개인들에게도 슬픈일이다), 성적 차별을 상징적인 수준에서부터라도 해결하자고 하는 여성들의 노력을 마치 자신의 권리에 대한 침해인 것처럼 반응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남의 권리를 억압할 권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서 평등하고 그에 따라 권리를 갖고 있다. 호칭에 있어서도 차별적인 언어에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다. 수천년 동안 (아마 수억명은 될) 여성들이 받았을, 이 호칭에 내재된 차별과 멸시로 인해 받았을 정신적 상처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따라서 여성들이 호칭에서조차 평등을 주장할 권리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존중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여성들이 자신들이 어떻게 불리기를 원하든, 그것은 여성들의 권리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의바른 토론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남성들이 고려했으면 하는 것은,(나 자신도 남성으로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지만) 여성들이 평등한 권리를 찾아가는 것이 남성들의 권리를 빼앗는 어떤 행위는 아니라는 점이다. 양성이 호혜-평등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 때, 남성도 자신에게 부과된 억압을 깨고 권리를 찾을 수 있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부과하는 전쟁과 폭력의 의무(우리 모두에게 군대는 얼마나 끔찍한 경험인가. 나도 30대 중반의 남성으로 철원 6사단에서 화기중대 보병으로 26개월을 복무했다. 그것은 다른 남성들처럼, 말로는 뭐라 하더라도 자신은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런 폭력의 경험이다. 군대를 찬양하는 친구 중에도 군대 다시 가겠다고 하는 녀석은 한명도 보지 못했다.)를 져야하고, 뼈골빠지게 생계부양자라는 의무를 져야한다. 가족의 대소사에서 부담되는 '어른'노릇, '남자'노릇을 해야하고, 또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압력에 시달린다. (정확하게는 결혼한 여성에게 '아들'을 강요하는 끔찍한 역할이다.) 도대체 이런 양성 차별과 억압 속에서 부여되는 남성으로서의 권리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 호혜평등한 관계를 서로 편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면 알량하고 사소한, 남의 권리를 침해해서 얻는 남성들의 '기득권'은 버리는 것이 속편할 것이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여성-남성의 권리를 제로섬게임인 것처럼 만든 데에는 군가산점 논쟁과 같은 것이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마땅히 시정되어야하는 것이었지만, 남성과 여성의 권리를 상호 침해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운동'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쟁점들, 그리고 남녀관계의 근본적인 측면에서 양성의 권리는 서로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호칭 문제로 촉발된 게시판 논란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성민우회라는 단체, 혹은 다른 여성단체들도 이런 호칭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을테니, '왜 호칭만 갖고 시비냐, 딴거나 해라'라는 말씀들은 그만하시길. (물론 그들이 언제나 옳다는 것은 아니며, 여성가족부의 '연말회식켐페인'처럼 진짜 뻘짓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호칭의 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성들이 수천년간 받아온 멸시와 상처를 치유하자는 제안이다. (언어 폭력을 포함해서) 폭력은 언제나 가하는 자들은 직접 느끼지 못하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다. (물론 폭력을 가하는 자들도 무의식과 영혼에 상처를 받고 인간성을 점차 상실해가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들도 성차별 구조의 희생자라고 말했다.) 이 켐페인은 그런 상처를 여성들이 서로 치유하기 위한 '그녀들의 일'이니 당신들과 나 같은 남성들은 그냥 좀 지켜보자. 여성들의 자기치유에 조차 욕설과 성폭력 언어를 가하는 잔인함이 당신들은 즐거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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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비정규직 대량해고 시작...!

작년 비정규법안 통과에 대해서 우려했던 것 것처럼, 대량해고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2년 기한을 설정한 만큼, 사용자들이 정규직전환이 아니라 2년단위의 주기적 해고로 대응할 것이라는 비판이 불과 법안 통과 한달여만에 현실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연말 재계약을 맞아 고용계약이 갱신되지 않은 경우들이 나타나고 있고, 새로 이루어지는 계약도 법안 시행일인 7월1일에 맞추기 위해서 6개월짜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도시철도공사의 경우 지난 해 재계약을 하나마니 하다가 6개월로 재계약)

오늘자 경향신문에 관련된 기사가 크게 나왔군요, 작년말부터 민주노총, 연맹, 단병호 의원실에 많은 상담과 '민원'이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 조직화와 투쟁으로 연결되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 아무래도 우리쪽의 조직적 대응이 미흡하기 때문인 것같습니다만.)

벌써 비정규직 ‘해고 사태’…반발 거세질듯
기업 11%만 “비정규직 전원 정규직 전환”
“7월이 오기전에…” 公기관 비정규직 칼바람
 


예산문제 같은 것이 있으니 미리 연초부터 선수치는 것이기도 하고, 행자부에 외주용역관련 예산검토, 무기계약대상선정이 1월까지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가 비정규직 처리에 '모범사용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죠. 법원 사례도 그런 것이구요. 자본의 '모범사용자'!

또한 기업들이 거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전환보다는 외주, 용역, 해고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보이는 것도 예상된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합니다.(111%라는 수치, 상공회의소 설문 결과가 기사화된 내용) 지금부터 7월까지 이러한 대량해고 사태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사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비정규법안과 함께 최저임금 일부 인상과 감시단속 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감액적용(70%) 도입에 대해서 사용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아 파트 관리 쪽 사용자 협회에서 만든 자료에서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  최근 경향은 △ 미화원(주로 여성고령)의 경우 계약상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인건비 절감. △ 경비원·시설관리(감시단속)의 경우 임금인상에 따른 구조조정(정원감축) 혹은 휴게시간 강요를 통한 임금인하가 흐름입니다. 휴게시간 강요 내용을 보면, 식사시간 2시간으로 잡고, 야간에 휴게시간 2시간 형식적으로 달아주는 식, 물론 모두 현장에서는 근무를 강요하겠죠. 기상천외합니다. 정말 머리들 좋습니다.

문 제는 운동진영의 발빠른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인데, 지금 늦어도 너무 늦습니다. 정부의 비정규법안에 대한 공격은 물론이고 조직화와 투쟁으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한데 말입니다.(물론 전비연 등 단위가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렇게는 부족합니다.) 민주노총이 당장 조직화와 투쟁은 못한다고 해도 여론화작업 같은 것이라도 해야합니다. 그러나 선거국면이 되어서 그런지 올스톱. 다른 단위들도(제가 있는 곳을 포함해서, 반성) 지리멸렬.

당장 광고,  선전전부터 시작해서, 비정규법안 피해사례에 대한 상담센터(노동법 상담과 함께 노동조합으로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설치, 주요사업장에 대한 조직화 등이 이루어져야합니다. 나름대로 이런 저런 사업들을 진행하고, 준비하는 것들도 있지만 사용자측은 훨씬 공세적이군요. 발빠르게 준비해도 너무 늦을까봐 걱정입니다.

그리고, 이건 여론화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단결하고 투쟁하는 계기가 되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해야합니다. 정부의 비정규법안 대응에 대해서 '예산확충'등 제도적 문제를 제기하고 요구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당사들의 투쟁이 만들어지는 것이겠죠.

경향신문의 이 기사에 대한 네이버 댓글을 보면 여러가지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차피 보수화된 포탈사이트 댓글이기는 하지만, 대중들의 관심과 분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왜 문제이고 어떻게 대응해야하는지를 빨리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 역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와 자본은 다시 정규직이 양보해야하는 식으로, 우리은행사례를 부풀리면서 선전해댈 겁니다.  

비정규법안 저지 투쟁을 하던 긴장감으로 다시 긴급하게 나서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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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여성혐오

조선일보의 패악질을 보려면 포탈사이트 뉴스가 적당하다.(포탈사이트의 뉴스메뉴가 문제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다른 신문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에 검색된 사회>여성 페이지.
여러 기사 중에서 조선일보 기사만 골라보자.

(1)"며느리·올케는 여성비하적 표현"…여성민우회 캠페인 논란
(2) 20~30대 여성 55% “난 페미니스트 아니다”
(3)여성운동, ‘거리’에서 ‘일상’ 속으로
(4)"여성부 폐지하라" 네티즌 서명운동에 관련사이트 다운

뭐 이런 것들이 있나 싶다. 단연 돋보이게도, 올라오는 족족 이런 기사.


(1)의 경우에는 내가 밑에 포스트 <여성단체 활동가와 나눈 대화> 에 서 링크했던 호칭바꾸기 켐페인(호락호락)에 대한 기사. 다른 언론들은 '이런 켐페인도 하더라', 혹은 '우리가 다시 생각해볼 거리가 되네', 이런 기조인데 반해서 조선일보는 "정말 먹고 살기 편해져서 할 짓 없는 사람들이 별 것도 아닌 것에 신경 쓰는 걸로 밖에 안보인다"라는 악플을 당당하게 기사에 실으면서 '논란'이라고 한다.

(2)의 경우, 여성들조차 페미니즘을 거부한다는 식의 주장. 여성들이 사회적 문제에 어떤 관점을 갖고 있나를 보기 보다는 "페미"라는 딱지붙이기를 시도하고, 이걸 거부하게 만드는 교묘한 기술. 역시 조선일보.

(3) 페미니즘의 위기 어쩌구하면서, '포스트페미니즘'을 소개한다.(조선일보, 니들이 페미니즘의 위기를 알아?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이야기하면서 각종 포스트주의 선전하던 행태가 생각난다.) 권력에 관심 안 갖고, "늘어난 고무줄 치마로 숄더백 만드는 법" 나누는 것이 페미니즘이 할 일이라는 말씀. 그런 것도 필요하겠지만, 역시 조선일보의 논지는, 그러니 "너희 여성들은 집안으로 들어가라"는 얘기다. 조선일보의 공포가 드러나는데, 그놈들은 여성이 어떤 식으로든 마초들의 배타적인 권력을 조금이라도 나누려고 한다는 데 견딜수 없어 하는 것이다.

(4) 뭐, 얘기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 기사. 조선일보 전체가 완전히 여성혐오주의자(misogynist )라는 걸 고백한다. "감히" 정부 부처에 "여성"부라니!, 뭐 이런 욕지거리.

마지막 사례와 같은 경우에 조선일보는 '여성가족부'라는 풀네임을 쓰진 않는다. "여성부"라고만 표현한다. 영리하다. 한편으로 이들은 여성혐오주의자들의 전통에 따라 "어머니(처녀)/창녀" 이분법에 빠져 있는데, 이들이 보기에 "여성가족부"라는 이름은 도저히 자기 머리로는 사고가 불가능한 개념이 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두뇌에서 언어형태로 처리가 되지 않는다. "여성가족부"라는 부처 명이 조선일보 기자들의 골통을 괴롭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도 짜증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여성가족부"라는 부처명 자체가 여성문제, 여성의 사회적 위상을 완전히 왜곡한다는 점에서, 조선일보와는 다른 이유에서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조롱조의 기사의 원인이 된 사건이 "연말 회식 후 성매매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회식비를 주겠다"는 여성가족부의 ─내가 봐도─황당한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벤트에 대해서 네티즌들이 여성가족부 홈페이지를 공격한다는 것인데, 거참,참,참,참!

관련해서 여성가족부의 행태를, 마초적이지 않은 시각에서 비판한 기사도 있다. 여성가족부도 조선일보 못지 않게 한가닥 한다. 성매매 문제에 대한 여성가족부와 주류여성운동의 입장이 가진 문제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정말 너무들 하시네.
‘방지’ 안된 여성부 성매매방지 ‘폭탄광고’
튀는 방식 선호 이벤트 번번이 말썽


한편, 조선일보의 이런 패악질은 증상으로서 '여성혐오'(Misogyny)라고 볼 수 있겠다.
여 성운동의 '성주류화전략'에 대한 우익적인, 마초적인 비판인 셈이다. (뭐, '비판'이라기 보다는 거의 정신병이지만.) 이들 사회적 위기에 대해서 여성혐오를 처방으로 제시한다. '여성들이 깝치기 때문에' 사회가 이 모양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자세는 박근혜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데, 조선일보가 왜 그런지를 최보은─대선에서 박근혜 지지를 선언한 <프리미어>편집장─씨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노동자 혐오, 이주노동자 혐오도 곁들여져있고 분리될 수 없다.

놈들이 노리는 효과는 위에 (1)번 기사에 이른바 "네티즌 의견"이라는 댓글로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굳이 찾아가서 보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는 좋다.)

성주류화전략이 여성문제를 해결할수 없어보이지만, 조선일보는 이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을 페미니즘 일반에 대한 비방에 활용하는 셈이다. 주류여성운동과 여성가족부와도 논쟁해야할 여성운동의 건강한 내부 토론과 발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조선일보는 더 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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