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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지음 / 한길사


비극과 혁명, 그리고 슬픔에 마주친 우리의 자세

결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신의 개념화에 입각해서 알튀세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정치에 대한 비전은 비극적tragique이라는 점을 인정하자...(중략).. 그것은 '대중들'(피지배 계급들, 인민계급들에 속하는 개인들의 잠재적 통일성)이 돌이킬수 없도록 분할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대중들이 두개의심금들, 그들 자신의 가상의두 개의 실존및 조직양식들 사이에서 내재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자.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또그 힘이 단순한 '관념들'의 힘과는 비교될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기능작용에 부합하는 '정상적' 행동과그 핵심에서는 항상 이미 잠재적 반역이 살아있는 그들의 경험의 공동체적,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적 결과들 사이에서 말이다. 그런데 후자의 측면이 전자의 측면보다 우세할 것이라는 어떤 보장도 절대로 없다.그 역도 마찬가지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中

혁명적 정치가 비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혁명적 낙관주의가 아니라 왜 비극이며, 또 그것은 비관주의 혹은 종말목적론과는 왜 구별되는 것일까?

그것은 미래에 대한 어떠한 보증도 없는 현재의 운동이다.(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를 위한 11개의 테제/발리바르)  따라서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정세의 변화, 대중의 움직임에 따라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실패해왔다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주체가 이데올로기적 미망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투쟁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이전에 쓴 포스트 <판의 미로, 랜드 앤 프리덤, 카탈로니아 찬가> 에서 언급한 것처럼,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운명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80년 광주에서 도청에 남은 시민군에게서, 1944년의 스페인 반군에게서 발견한다. 이것은 안티고네가 죽음의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나,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파멸에 이르는 운명 앞에서도 진실을 대면하려는 것, 자신이 죽을 운명으로 예언된 전투에 스스로 나서는 아킬레우스와 같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의 의미는 이러한 운명 앞에 선 주체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것에만 있지 않다.저자는  예술형식으로서 그리스 비극은 서사시와 서정시의 시대를 지나 '시민의 시대'에 적합한 형태, 폴리스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서사시는 세계(존재)의 총체성을 반영하고 정신의 완전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서사시가 보여주었던 질서있고 조화로운- 완전한 삶의 모형이 정치적 혼란 속에서 해체되면서 개인을 자각하는 서정시가 나타난다.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의 서정시인 사포Sappho는 이때 등장한다. 시인이 자신을 기억 속에서 반성할 때, 자신은 자립적인 정신으로 나타난다.

서사시의 비극성은 죽음과 삶의 비극성도 완전한 삶의 일부라는 점을 긍정하는 것으로 긍정된다. 이에 비해서 서정시의 비극성은 주체의 갈등과 분열에 뿌리를 둔다. 시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주체(조건과 정념)의 변화에 따라 주체가 타자가 되는 속에서 발생하는 슬픔을 보여준다.(아마도 그것은 시간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순간 안에도 존재하는 주체의 분열과 갈등을 생각해보자.)

(한편, 저자는 비극은 자기연민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극은 정신의 숭고함을 표현하지만, 특히 서정시의 경우에는 나르시시즘이나 자기연민으로 후퇴할 수 있다. 그런 예로 김수영의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를 든다. 우연찮게도, 나는 다른 글(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에서 김수영의 이 시를 비판한 적이 있다.)

자, 이제 서사시와 서정시의 시대를 지나 비극의 시대. 비극이라는 예술형식은 아테네의 민주주의 시대와 관련되어 있다. 고립된 주체를 공동체의 시민으로 도야하기 위한 예술. 사람들이 함께 비극 공연을 감상하고 광장에서 만날 수 있게 한다. 예술의 형태에 있어서도 코러스와 대화로 구성된 공연방식은 시민들의 교통을 상징한다. 그래서 코러스보다는 대화가 더 중요하다. 그것은 (코러스가 나타내는) 공동체로의 고양 이전에 시민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보존하는 가운데에서도 서로 마주치고 교통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럼 그러한 교통이 비극을 통해 느끼는 슬픔 속에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단지 그/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그/녀가 내 속에 들어와 머물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녀의 슬픔이 내 속에서 쉴 때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속에서 타인의 슬픔이 고요히 움직이는 것을 느낄 때인 것".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모두 고통받았고, 슬픔 속에서 평등하게 서로 만나게 된다.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의 눈물 속에서 자신의 슬픔을 발견하고 공감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위대한 예술인 그리스 비극이 가장 위대한 정치적 예술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혁명적 정치의 비극성에 대한 인식이 있는 한, 혁명적 정세를 이유로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은 지양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을 보증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 점에 대해서는 최원씨의 <비극의 의의 혹은 취중결론>이라는 글 참고) 책의 서문 한 구절을 인용하자.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정치는 내가 너와 만나 우리가 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가장 본질적인 계기는 만남이다. 그런 한에서 정치적 예술이란 단순한 저항예술도 아니고 반대로 관변예술도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적으로 만남을 지향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참된 의미에서 타인과 만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우리가 슬픔 속에 있을 때이다. 만남은 슬픔이 주는 선물인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이것에 대한 가장 심오한 증거이다. 그것은 정치적 예술로서 만남의 총체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만남이 오직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정치적 예술은 비극예술이 되었던 것이다. - 25쪽

물론, 경험 속에서는 유사한 슬픔을 공유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다. 만남의 그런 불가능성은 슬픔을 주체 안에 가두어 둘 것이지만, '자기연민'이 아닌 '교통'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처음 인용했던 발리바르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자. 비극적 관점은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해후, 과잉결정으로서의 혁명에 대한 사고.  혁명은 "낙관도 비관도 아니고 승리도 패배도 아닌 비극"인 이유.(『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윤소영)

그러나 비극적 관점이 비관적pessimiste 관점은 아니며, 종말목적론적fataliste 관점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모든 '계기'에서(모든 '단계'에서) 자본주의의 모순들 속에 착근된 하나의 가능성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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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책 한 권. 슬픔을 정념으로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준 책. 따라서 슬픔에 마주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 나의 슬픔 때문에/에도 불구하고 타인들-그/녀들과 만날 수 있어야한다는 점을 알려주는 책. 따라서 마침내 '나'라는 자명하지 않은 주체에 대해서 반성하고 고통의 원인을 인식하며, 그것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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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단체 활동가와 나눈 대화

연말이라 이런저런 송년회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자리에서 여성단체 상근하는 동기도 함께 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인사동에서 송년 번개 자리.

 

편한 술자리이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우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여성'(類로서의 여성이나 개인으로서의 여성이나)에 대해서나 '여성문제'에 대해서 정말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역시 이걸 확인한 자리. 특히 몇가지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별칭 부르기 운동

 

이건 딱히 여성문제라고 보긴 힘든 것이지만, 이야기하는 중에 운동단체 안에서 별칭부르기와 관련된 화제가 있었습니다. 전 이제까지 이런 별칭부르기가 그냥 일부 단체들 안에서 '재미있는 대안문화'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더군요. 잘 몰랐습니다.

 

자신의 이름(별칭)을 자신과 동료들이 정하는 과정도 그렇고, 호칭에 부여된 자신의 정체성을 주어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더군요. 직책과 나이를 떠나서 단체 안에서도 호혜-평등한 관계를 호칭 속에서 만들어간다는 점도 인상깊었습니다. 별칭부르기는 나이에 따라 존대말을 쓰는 관행을 폐지하는 것과 병행되는 데, 적극적으로 나이에 따른 위계를 폐지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노조와 같은 조직에서는 <담당--차장-부장-국장-실장-임원 > 등으로 이어지는 관료적 위계가 호칭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호칭 자체가 위계를 강화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호칭에 반대하는 한 동료를 함께 놀려먹었던 우리 사무실 분위기, 깊이 반성합니다.) 이런 관료적 위계는 활동가 사이에서도 호혜-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이 구성하고 있는 것과 같은 권위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본과 권력과 '동등'해지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규노조 교육을 하면서 항상 위원장, 혹은 지부장을 호칭 속에서나 다른 대우에서 존대해야 사측이 노조를 무시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교육을 해왔습니다. 위원장이나 지부장은 사장, 기관장과 동급이라는 인상을 주어야한다는 것이죠. 저도 이렇게 교육을 해왔습니다만, 별칭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과연 이게 맞는 것인지 고민이 됩니다. 노조를 구성하는 동지들간에 호혜-평등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기존에 자본이 부여한 관계방식(위계와 복종)과 다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는 않은지하는 것이죠. 사장, 기관장과 동등해지기 전에 조합원들 상호가 동등해져야하는 것은 아닌가.

 

노조가 조직적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현실적인 유용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미 자본이 부여한 위계가 판을 치고 있고 그것에 노동자들도 익숙한 상황도 있지요. 게다가 노조같은 경우에는 대중기관이라는 점에서 별칭을 쓰게 되면, 조직운영에 있어서 노조가 책임지는 대중들에게 혼란을 준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계를 호칭이 반영하고 호칭이 다시 관계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이념에 맞게 그것을 개조하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과도적이고 절충적인 방식이라도, 현재의 것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한다면 방법은 없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노조 등의 대중조직이 적극적으로 운동의 하나로 수용하면서 운동조직을 바꾸어갈 수는 없을까요?  현존하는 대중이데올로기를 단순히 수용-적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운동조직이 적극적으로 변용하는 과정으로서 말이죠. 사회운동단체에서 시작해 대중조직으로 확산되면서 조직문화를 바꾸어왔던 이제까지의 많은 시도들을 생각해보면, 의지가 있다면 방법이 없을 것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동지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행'이 지나는 중이라는.. ─_─;; 암튼 '유행'은 아니어야할 것같네요.)

 

(다만 나이를 전제하지 않고도 존중받을 만한 사람에게 상호 존칭을 사용하는 것이나 존대말을 사용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는 더 고민이 필요해보입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교사)와는 관계가 친근하더라도 존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지적 위계를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철폐하는 과정에서 존경과 존중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모두 폐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 사회진보연대같은 곳에서는 "~씨"라는 존칭을 붙이는 것이 관행이기도 한데, 서로 동등한 '시민'으로서 존중한다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서적 관계가 증발된 너무 메마른 호칭으로 느껴집니다. 결국 나이, 직책의 위계가 아니라, 호혜-평등하고 우애로운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면서도, 그것이 관계의 무정부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이 되어야할 듯.)

 

그리고 이런 호칭 문제는 가족 안에서도 문제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미 익숙하게 쓰여지는 가족관계의 호칭들, 형수, 올케, 며느리 등등 주로 여성과 관련해서 쓰여지는 호칭에 문제가 많더군요. 예를 들어 '올케'는 '오라비의 겨집'이라는 것이 어원이고, '며느리'는 '내 아들에게 딸려 더부살이 하는 이'라는 식으로 편견이 반영되어 있는 것들이라는 점 놀랍습니다. '집사람', '아내'와 같은 호칭이 문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부인'이라는 낱말도 문제가 있군요.(놀라움의 연속! 한편으로는 그럼 뭘로 칭해야하는지 오리무중.) 그래서 호칭을 변혁하는 문제, 대안을 만들어가는 문제가 가족 안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지적.

 

이런 호칭들을 바꾸자는 취지에서 여성단체가 진행하고 있는 켐페인입니다.

 

열악한 여성노동권

 

상담사례를 이야기하다가 나온 이야기들도 다소 놀라운 것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결혼을 이유로 여성이 당연퇴직하도록 공공연하게 강요하는 회사가 많다는 겁니다. 잘 알려진 어느 유명 제약회사는 여성들이 결혼과 함께 퇴사하게 하는 데, 이런 식으로 매년 엄청난 여성이 강제로 해고된다는 것이죠. 또 다른 어느 회사에는 노동조합이 있지만, 결혼을 이유로 하는 퇴직에 대해서 어쩌겠냐하는 반응이라고 하고 말이죠. 마치 80년대에 여성에 대해서 25세 정년 폐지 투쟁을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 아직도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많은 여성들이 이런 것들을 여전히 '체념'하고 그만둔다는 것이고 싸울 엄두를 두지 못한다는 것. 상담을 했던 여성들의 경우에도 결국 사측의 회유, 압력이나 가족의 만류에 의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고, 적절하게 사회적 문제로 제기하고 싸우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죠.

 

특히 이런 종류의 상담이 노조보다는 여성단체에 가는 것같은데, 이는 한편으로 노동조합이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 신뢰가 가는 집단으로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에 놀랐던 이유가, 노조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당연히 이런 일에 분노하고 뭔가 해보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소극적인 태도가 익숙하지 않아서였을 텐데요, 여성들의 경우에는 더 나서기 힘든 조건이 있다는 것이죠. 게다가 그나마 나서려고 해도 노조가 적절한 대안으로 생각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고 말입니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할지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한편, 제가 아래에 썼던 "우리은행, 그게 과연 '정규직화'일까"라는 포스트에서 주류여성운동들에 대해서 비판한 대목이 있습니다. 여연, 여노회 등이 우리은행의 조치가 가진 여성차별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환영을 표하는 데 대해서 여성단체로서의 역할이라도 충실히하라는 비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여성단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여성민우회같은 경우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제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성명]우리은행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박수는 시기상조) 싸잡아서 여성단체 비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이해되었다면 사과할 일입니다.

 

은폐와 부풀리기

 

마지막으로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노조가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요, '은폐와 부풀리기'라는 평가가 있다고 합니다. 조직 내에서 발생한 문제인 경우에는 '은폐', 자본과의 관계에서나 다른 정파와 관련된 경우 '부풀리기'.

어느 경우에나 다른 조건에 대한 종속변수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노동조합이 투쟁 중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해당 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폭로'하고 '활용'하는 것도 좋게만 볼 수는 없다는 지적. 그것이 투쟁과정에서 여성의 권리라는 측면으로 제기된다고 해도 여전히 가지는 한계가 있다는 점. 특히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은폐'하기 쉽상인 노조들이 말입니다. 이런 운동구조 속에 있는 저도 뭐라 말하기 힘든 일인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죠. 어려운 문제입니다.

 

매번의 사건들이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일반화하기에는 조심스러운 점이 있지만, 하나의 경향으로서, 그것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의 어떤 일을 보면서도 다시 느끼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성폭력 문제를 노조 내 정치와 연관시키면서 제기하는 일들을 보면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이번에는) 다른 또 한번조차도 비극으로 반복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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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끝나고 집에 오면서도 '정말 어려운 일들'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특히 남성의 입장에서는) 어렵기는 하지만 반드시 해결해나가야할 문제들. 문제가 무엇인지부터 지속적으로 배워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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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자세 (대우센터빌딩 투쟁에서.)

대우센터빌딩 투쟁이 해를 넘기고 있습니다.

28일,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진행할 '개관식', '점등식' 등 행사를 앞두고, 사측이 교섭을 요청하면서 어느 정도 해결의 가닥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지만, 역시나 한때를 모면하기 위한 기만적인 행태라는 것이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역시, 자본가놈들에게는 양심이란 것이 터럭만큼도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군요.

 

△ 금호아시아나가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로고도 이렇게 바꾼 것이지요. 이 간판 점등식을 한다고 천막을 치워달라는 요구로 교섭을 하자고 했던 겁니다. 노조는 요구안의 핵심인 '일괄재계약'을 전제로 사측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사측은 24시간도 안되어서 말을 바꿉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날 28일 집회는 간단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 쓰려고 한 것은 이런 사정은 아니구요, 서울경인공공서비스노조(이제는 전국공공서비스노조의 지부가 되었지만,)의 독특한 연대의 자세입니다.

 

집회가 끝나고 노조 집행부와 연대단위의 간담회가 진행되었습니다. 구권서 위원장 진행.

△ 노조사무실에서 진행된 연대단위간담회

 

간담회를 진행하면서 이번 투쟁의 진행경과와 의미, 이후 전망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투쟁방향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이야기이지만, 저는 아직까지 연대단위들과 이런 수준의 이야기를 나누는 투쟁은 본 적이 없습니다. 경험이 일천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투쟁일정에 동원하거나 지원방안 정도를 논의하는 정도였지, 투쟁의 의미 등에 대해서 토론하고, 투쟁전망, 조직상황에 대해서 깊은 수준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은 보지 못했었습니다.

 

이번 투쟁에 많은 연대단위가 함께하고, 연대가 확장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죠. 이건 단순히 당일 설명회의 문제라기 보다는 연대의 자세의 문제일 겁니다. 연대를 위한 이런 '성의'는 이제까지 계속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집회참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투쟁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과정.

 

특히 이 자리에는 학생동지들이 많이 있었는데, 학생동지들에게는 일종의 '교육'적인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 같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물론 이렇게 연대하는 학생동지들이 대견하기도 합니다. 구체적인 투쟁에 이렇게 열심히 연대하는 모습이 말이죠. 여기에 비하면 제가 학생운동을 할 때에는 '거창한' 정치적-정세적 목표가 있는 큰 집회에는 좀 나갔던 것같지만 이렇게 열악한 노동자들의 어려운 현장 투쟁에 연대한 경험은 별로 없다는 점에서 반성을 하게 됩니다.(사후적으로 반성하자면, 당시에는 '민중연대'의 의미를 너무 추상적으로, 정치적으로만 사고했던 것같습니다.)

 

이번 투쟁이 사측의 기만에 다시 한번 속은 셈이 되고 좀 더 길어질 전망입니다.(그렇다고 28일 당일 어떤 선택이 가능했을지는 고민입니다만..) 이런 속에서 연대의 힘은 계속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단지 연대단체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공유하고 자신들의 투쟁으로 만들어가는 이러한 과정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겠죠. 이번 투쟁의 주체들을 보면서 또 하나 중요하게 배우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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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운수 4연맹 통합대회 유회 & 운수노동자의 구조적 힘과 연합적 힘

풀소리님의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 잔치] 에 관련된 글.

4연맹 통합대회 유회, 이해하기 힘든 통합논의 과정

공공-운수 4연맹 통합대회는 어제(26일), 5시반 정도에 시작해서 8시 정도, 두시간 반만에 정족수 부족으로 유회되고 말았습니다.

어제 유회 사태에 대해서, 여러가지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대의원들이 많이 안오고 일찍갔다'는 식의 일반적인 문제제기는 별로 적당치 않다고 봅니다. 논의하는 과정 자체, 최종적으로 통합을 하자고 결정하는 과정 자체가 너무나 파행적이고 졸속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위에 풀소리님이 포스트에 쓴 것과 같이 말이죠.

지난 주말 통합이 무산되었다는 판단 이후에도, 연휴기간인 23,24,25일에도 계속 재논의가 반복되었을 뿐더러 최종적으로 하루를 남기고 심야에 '결국 통합' 결정이 이루어지고 맙니다. 이렇게 며칠을 두고 계속 엎치락 뒤치락하는 과정에서 대중적 공유는 물론 간부들 사이에도 엄청난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조직을 새로 만든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닌데 너무한다 싶었던 과정이었죠.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그랬으니 실제로 논의를 진행하신 동지들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결국, 투쟁을 통해 조직을 건설하지는 못할 망정, 논의라도 제대로 해야하는데 그 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셈입니다. 이러니 상층논의, 일정박기식 조직건설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지요. 통합대회에서 질의, 의견을 퍼부은 대의원동지들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발언을 하는 것 자체는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특히나' 이런 상황이었으니 발언을 자제하라는 의장의 발언에 대해서 발끈하는 대의원의 항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었다고 봅니다.) 조직의 의결단위의 핵심인 대의원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결이 제대로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후 공공연맹은 1월10일경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통합방침을 재확인하며, 중집을 비상대책위원회로 전환하여 운영하기로 했습니다.(중집위원회 결정) 아마 민주노총 선거 등의 일정을 고려해서 통합대회는 1월 중하순(17일?)에 다시 열리게 되겠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중적 공유, 토론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결정과정을 반복한다면 그 결과는 다시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남은 기간동안 정말로 통합의 의지가 있다면 조직 내 토론에 총력을 다해야겠죠.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 데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교훈이라도 얻지요.

사실 어제 통합대회 중 어느 조직 대의원의 발언은 충격이었습니다. "나는 운수노조만 만드는 줄 알고 왔는데, 와보니 연맹도 통합해서 만든다고 한다. 그럼 상급단체가 하나 더 늘어나는건데 이래도 되는거냐? 산별노조를 '또 하나의 상급단체'로 보는 시각도 시각이지만, 최소한 대의원들에게조차 어떤 논의와 합의가 있었는지도 공유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조직 내 공유가 안되었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는 점. 그러나 더 문제는 이것이 자기 조직 내에서 충분히 토론하지 못한 무책임함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말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운수부문의 전략적 중요성 : 구조적 힘

암튼, 회의 자체는 그렇다치고,
이런 상황이 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운수-공공을 분리하려는 경향은 신자유주의 정세에서 노동자 운동이 나갈 전망을 보아도 별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 이런 입장들이 오히려 논쟁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논의 과정에서 '봉합'된 이후에 이런 식으로 뒤에서 치고 들어와서 정상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가 문제입니다.

운수부문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전략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점은 실버가 <노동의 힘>에서 언급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운수노조 출범 자료집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남한의 물류-운수 산업도 확장되고 있고, 중국의 팽창과 더불어 동북아시아 물류산업도 크게 팽창하고 있습니다. (유라시아 철도나 동북아 물류중심국가와 같은 구상은 그 일환인 셈이죠.) 특히 신자유주의 하에서 생산의 국제적 팽창은 물류 산업이 확장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듭니다. 그러나 또 한편 적기생산방식JIT은  물류가 잠시라도 중단되면 생산 전체가 차질을 빚는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부품, 원자재 재고가 없기 때문이죠.) 따라서 운수 부문 중 특히 화물운송의 경우 전략적 중요성이 있고, 그 때문에 이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도 '구조적 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업종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야말로 '세상을 멈추는' 힘이 있습니다.


(남한의 노동조합운동이 대부분 그렇지만) 지금까지 제가 보기에는 이러한 구조적 힘을 해당 노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장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주체들의 노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워낙 노동조건이 열악한 상태에서 착취를 받고 있기 때문이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들의 문제를 보다 사회적인 문제, 다른 노동자들(예컨데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문제와 연결된 것으로 제시할 때만 보다 넓은 연대도 확보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운수노동자들이 이러한 힘을 '자신들만을 위해서' 사용하고자 할 때에는 이제까지 민주노조 운동이 밟아온 한계를 그대로 따라 밟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운수에만 갇히지 않는 조직적 전망을 가져야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라는 구호는 정당하고, 또 사실이지만, 새상을 멈춰서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까지 고민을 함께 하자는 것이죠. ('구조적 힘'이 가지는 한계는 이미 제조업 대공장의 투쟁이 가지는 한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의 대공장 노동자들은 구조적 힘을 갖고 있고 이것이 많은 성과를 가능하게 했지만, 노동의 불안정화, 자본의 생산에서의 철수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는 그 조차도 지키기 힘든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노조는 크게 늘어나는 비정규직노동자들과 울산 지역에서조차 점차 고립되어가고 있습니다. 운수부문의 노동자들은 이제 막 크게 일어나고 있지만 마찬가지 한계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연합적 힘에 대한 사고가 더 필요해지는 것이죠.)

신자유주의 하에서 도시 교통의 노동자 : 연합적 힘

화물운송에 비해서 여객운송, 특히 도시교통과 관련해서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문은 도시의 시민들로부터 지지가 필수적이고, 이 과정에서 힘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지역별로 노동이 이루어지고 지자체와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노동자, 사회운동과의 연대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부문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구조적 힘을 가지는 화물운송 분야와는 약간 다른 조건에 처할 텐데, 지역을 중심으로 보다 '연합적 힘'을 형성하기 위한 시도가 중요하게 됩니다. (버스노조의 여러 지역에서의 투쟁들은 지역연대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런 점에서 버스 뿐 아니라 택시의 경우에도 지역연대를 중심으로 사고해야할 조건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운수를 넘어서는 지역연대를 형성하기 위한 시도는 이들 조직이 더 힘을 기울여야할 것입니다.(하지만 택시는 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것같군요.) 이를 위해서는 지역연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슷한 조건에 있는 공공노조 쪽 조직들과도 연대를 강화하고 통합할 필요도 있을 겁니다. (또한 이런 점에서 거의 업종본부만을 중심적인 편제로 하는 운수노조의 구조는 안타깝습니다. 지역으로 확장하기 위한 계획이 --철도나 화물은 전국적인 구획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버스, 택시 쪽에서는--적극적으로 제기되어야하는 상황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어쩌면 '남의 조직'이지만 전망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같은 조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좀 주제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운수쪽 동지들에게 무례하다면 죄송.) 암튼, 결론적으로는 △ 운동의 전망을 갖는 데 있어서 구조적 힘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는 사업장-업종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전사회적인 변혁의 일환으로 구조적 힘을 사용하기 위한 고민이 더 강화되어야한다는 점, △ 운수 안에서도 연합적 힘을 강화해야할 부문이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측면에서는 조직 안팍으로 지역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 해야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운수동지들이 당장은 공공부문과 함께하기 위한 노력을, 이후에는 더 확장된 고민을 더 함께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겁니다.

어제 통합대회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많이 나갔네요.
통합이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대중적 논의를 함께 할 수 있도록 진행되어야한다는 점, 운수부문이 공공과 통합까지 발전을 사고하는 데 있어서 구조적 힘을 더 확장된 요구를 위해서 사용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역을 중심으로 연합적 힘을 강화할 필요가 있겠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군요. 아마도 모든 과정이 다시 시작되겠지만, 정말 '제대로' 되어야한다는 생각에서 끄적거려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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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 랜드 앤 프리덤, 카탈로니아 찬가

스페인 내전에 관한 세 개의 작품.

최근 개봉한 영화,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El Laberinto Del Fauno',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 그리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를 꼭 보라는 친구의 소개(소개만 하지 말고 같이 봐줄 것이지, 쳇 ^^;)에 따라서 보려고 준비하다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작품을 아예 더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예전에 읽었고, 지난 홈페이지에 관련 글을 쓰기도 했다. 번번히 볼 기회를 놓쳐서 부끄럽게도 아직 보지 못했던 '랜드 앤 프리덤'은 이번에야 보게 되었다. (eMule 프로그램을 열 몇시간 돌린 끝에 겨우 인터넷에서 다운받았다. 그래도 결국 파일을 다 받았으니 다행.)

 

1936년 스페인 :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

 

영화포스터에 보이는 붉은 깃발에 쓰여진 POUM은 '통일노동자당'의 약호다.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자신도 이 당이 주도한 민병대에 참가했다고 밝히는 바로 그 당.

 

영화는 혁명을 지키려는 투쟁과, 그것이 소진되는 과정을 그린다. 파시스트와 전투에서 죽은 동지를 묻는 처음 장례식 장면에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를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영원할 것이라는 결의로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당(통일사회당PSUC)의 탄압으로 숨진 동료를 묻을 때, 부르는 'A las Barricadas'(To The Barricades)는 참담하다.

 

영화는 혁명의 교과서라고 할 만큼 명대사로 가득하다. 아래 몇가지는 꼭 인용하고 싶은 것들.

 

해방된 마을에서 토지를 집단경작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다. 마을에서 혁명을 계속할 것인지, 혹은 적당히 미봉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 한 늙은 농부가 말한다.

 

"혁명은 새끼 밴 암소와 같아서,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암소와 송아지까지 잃게되고, 아이들은 굶게 돼"

자본주의 외국들에게 경계심을 갖게해서는 안된다는 둥 갖가지 핑계로 '온건한' 조치를 요구하는 데 대한 간명한 답변이다. 혁명은 중단하는 순간 후퇴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손녀딸이 낭송하는 윌리엄 모리스의 시(詩).

전투에 참여하라
아무도 실패할 수 없다

육신은 쇠하고 죽어가더라도

그 행위들은 모두 남아

승리를 이룰 것이므로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은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국제적 연대가 이루어진 투쟁이었지만, 가장 더러운 배신이 망쳐놓은 투쟁이기도 했다. 스탈린주의자들(PSUC)는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민중을 관리하려하고 혁명을 압살했다. 전선에서 부르조아 군대와 같이 계급과 위계제를 다시 도입하고 여성을 밥짓는 일로 축출했다.  도시에서 경찰을 부활시키고 '통제'를 도입하며 노동자의 파업을 금지한다. 아나키스트-공산주의자들이 접수한 공공기관을 정부가 '관리'하기 위해서 병력을 투입했다.

 

베르나르라는 의용군의 말을 더 들어보자.

"이봐, 민병대는 투쟁의 심장이라구. 스탈린은 우리를 두려워해. 서방세계와의 협정에 싸인하고 싶으니까. 이미 그렇게 했어. 프랑스와 협정을 맺었지. 협정에 싸인하기 위해서는 거부감을 없애고 우호적으로 보일 필요가 있지. 그런데 우리와 우리의 혁명을 지원하면 신뢰를 잃게 되는 셈이야. 그게 우리가 스탈린을 비난하는 이유야."

 

실제 역사는 진행된 대로. 스탈린은 배신하고 히틀러는 게르니카를 폭격했다.

게르니카에서의 학살(피카소).

게르니카

 

주인공격인 데이빗(사실 이 영화에선 모두가 주인공이다)은 PSUC의 입장을 지지하는 영국공산당 당원증을 찢어버리면서 이렇게 편지에 말한다.

"스탈린은 노동 계급을 장기말 처럼 이용할 뿐이야.

팔아 먹고 이용해 먹고 희생시킬 장기말."

 

데이빗은 이렇게 해서 (지금의 우리들이 그런 것처럼) '당없는 공산주의자'(알튀세르)가 되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당운동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미리 보여주는 듯한 장면.

 

아이러니한 것은 21세기 지금 우리 주변에도 여전히 한편으로 스탈린을 용인하면서 한편으로 당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화된 스탈린주의(주체주의자)들은 어치피 죽어다 깨어나도 스탈린주의자들일 수밖에 없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노동자 계급의 자발적 투쟁을 관리하려 들고, 협상하려드는 노조관료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당관료주의를 상징하는 스탈린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용인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혹은 그렇게 비판하는 주체주의자들(관료주의)이나 노조관료주의와 자신들이 공유하는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눈감기(맹목) 때문에?

(스탈린주의자들은 곳곳에서 혁명을 질식시켰는데,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르주님의 블로그; "북한 노동자계급은 역사적으로 침묵하는 계급인가?" 를 읽어보자. 아래로부터 대중의 자발적 투쟁을 혐오하는 스탈린주의자들이 마드리드의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나, 평양의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나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영화에 삽입된 노래 중 'A las Barricadas' (가자! 바리케이트로)라는 곡은 폴란드 혁명가인 La Varsovienne (The Song of Warsaw)라는 곡을 스페인 무정부주의자-공산주의자들이 개사해서 부른 노래다.  참세상 겨울잠프로 중 구닥다리노래창고 13회. "우리가 알고 모르는 번안가요들 1"에서도 소개와 함께 들을 수 있다. 김정환의 번안으로 메아리가 부르기도 했다.(새벽인가?) 암튼, 여기 링크를 따라가면 들을 수 있다.

 

가사가 이렇다. (Wikipedia 홈페이지에서 인용, 가사끝에 Confederation은 최대의 노동자조직-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한-이었던 CNT(전국노동자협회)를 뜻한다고 한다.)

△ '랜드 앤 프리덤'에 삽입된 곡

 

Black storms shake the sky
Black clouds blind us
Although death and pain await us
Against the enemy we must go

 
The most precious good is freedom
And we have to defend it
With courage and faith

 
Raise the revolutionary flag
Moving us forward with unstoppable triumph

(original: carrying the people to emancipation)
Working people march onwards to the battle
We have to smash the reaction (aries)

 
To the Barricades!
To the Barricades!
For the triumph
of the Confederation

 

 

1944년 스페인 :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El Laberinto Del Fauno'.

감독은 비극적인 현실을, 판타지라는 양식을 통해서 예술적인 비극으로 형상화해낸다. 판타지라는 장르가 이렇게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본 것도 놀라운 경험.

 

영화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이 거의 파시스트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있는 시점, '랜드 앤 프리덤'에서부터 8년 후, 1944년. 역설적이게도 2차대전의 유럽전선에서 나치들은 패망했지만, 프랑코는 승리한다. 얄타협정이 냉전의 국경선을 획정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최종적인 배신.

 

그러나 여전히 민병대는 남아 '반군'이 되어 투쟁한다. 마을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이 '잘 훈련된 정예부대'로 대체하고자했던 그 사람들이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민병대를 살해하고 무장해제하던, 제복을 차려입은 그 '정예부대'는 다 어디에 갔단 말인가?)

 

(여기서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 내 블로그의 제목인 '겨울철쭉'은 '녹슬은 해방구'라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아마도 1953~4년 겨울의 빨치산의 상황일 텐데, 혁명이 후퇴하고, 전투가 패배한 후, 그러나 여전히 투쟁하는 비극적인 상황. 이 영화의 민병대를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비극일 수 있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체가 자기 스스로에게 떳떳하며, 숭고하기 때문이다.)

 

영화 첫장면, 해설이 끝나고 첫대사.

"대체 저 많은 책을 어쩔 셈이니! 오필리아"

오호! 이건  내가 책을 또 살 때마다 주변에서 나에게 하는 낯익은 잔소리다. 어쩌긴요, 하나하나 가장 소중한데다가, 언젠간 다 읽을 거랍니다. 그 속에서 모험이 시작되죠. 일단 오필리아, 나와 공감.

 

오필리아는 책에 나온 요정 이야기를 믿는다. 그래서 요정을 만나고, 미로 속에서 판Fauno을 만난다.(판Fauno는 마치 POUM같은 어감이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은 책의 이야기도 요정 이야기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렇다. 산속 반군들은 노동자, 인민이 평등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책에 나온 것을 보고 믿었는지는 확실치 않더라도, 그들은 산속에서 책을 읽는다.) 그리고 반군과 함께하는 하녀 메르세테츠는 유일하게 오필리아를 믿어주는 사람이다. 그/녀들과 파시스트들 사이에는 전선이 그어져있다. 여기서 짧지만 빛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 구절을 다시 생각해보자.

 

..오히려 그들이 그들 자신의 가상의 요구들에 부응하여 행동하고 그 결과들을 도출해내려고 집단적으로 시도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기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에 반대하여 반역하는 것이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中


그/녀들은 모두 그것이 이데올로기이든, 판타지이든 자신의 '가상'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고 행동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현실에 반역하는 동지들이 된다.

'오필리아'는 '햄릿'에 나오는 이름이기도 하다.(아마 감독이 그 비교를 염두에 두었겠지만 말이다.) '햄릿'을 읽으면서 세익스피어가 오필리아를 너무나 수동적인 인물로 그렸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자면)  '햄릿'에서 그녀는 수동적이기 때문에 슬픈 정념을 상징한다.

 

이 영화에서도 오필리아는 슬픈 조건에 처하고, 우리에게 슬픈 감정을 불러오지만 그것은 '햄릿'에서의 오필리아와는 다르다. 오필리아는 이번에는 지극히 능동적이고, 자신의 죽음-희생도 스스로 선택한다. 따라서 그녀의 행동은 단지 슬픈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기쁜 정념'. 판타지와 현실 사이(사실 그 구분이 뭐 필요할까 싶지만)에서 슬프지만 기쁜, 기쁘지만 슬픈. 그래서 오필리아는 한편에서는 죽지만, 지하세계의 공주로 찬란하게 부활한다.

 

그래서 오필리아가 돌아가는 곳은 영화의 처음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빛의 세계. 지하에서 그곳의 아버지는 말한다.

"일어나거라, 내딸아. 어서 오너라.
너는 다른자의 순결한 피를 희생하지 않고 너 자신의 피를 흘렸구나
그것이 가장 어려운 마지막 과제란다"

이 시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전략)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세상의 미래를 가장 먼저 이룩한다

그렇다 생애는 추락보다 멀고 깊다

그렇다 패배를 죽음에 비유한 것은 옳지 않았다

무엇이 또 다시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씨앗이 아니다 일어서는 것은

이미 이룩된 것이다, 일어서라

이룩된 것이 보다 찬란하게 일어선다"

- 김정환, '에필로그' 『하나의 二人舞와 세 개의 一人舞』(1993)

소련의 몰락으로 한 시대가 최종적으로 패배한 (것으로 생각된) 후 쓰여진 시에서 우리는 유사한 비극적 감성을 느낀다.

 

그녀는 운명 앞에서 자신에게 끝까지 당당하기 때문에 이것은 숭고한 비극이다. 마치, 최종적인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투쟁을 계속하는 반군들처럼 말이다.

 

오필리아는 그래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그리스 비극은 단지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숭고한 정신을 형상화한다.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오필리아와 반군들에게도, 그리고 1953년 겨울의 빨치산과 80년 광주도청의 시민군에도 적용될 이야기. (그리고 어쩌면 20세기의 패배 이후에도 투쟁하는 우리들에게도 어쩌면, 언젠가.)

 

오로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만이 죽음의 운명을 통해 도리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죽음보다 더 큰 정신의 크기를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146쪽)

..여기서 고귀함이란 자기의 탁월함을 실현하는 것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고귀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죽음의 시험 앞에 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80년 광주의 전사들처럼, 삶은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선과 악이 싸우는 싸움터요, 때때로 그 싸움은 우리에게 의로움과 목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를 요구할 만큼 치열할 때가 있습니다. 트로이 성 앞에서 아킬레우스는 생존을 버리고 덕을 선택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운명보다 더 크고 강한 정신의 힘을 보였습니다. 80년 광주도청을 마지막으로 지켰던 사람들도 그랬겠지요.(151쪽)

-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한길사 中 

 

그래서 슬프지만 아름다운 영화. '랜드 앤 프리덤'과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 둘 모두 그렇다. 현실과 영화 세계의 진정한 비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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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2일; 하루의 절망과 희망.

12월22일, 금요일.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 다시 한번 절망과  어떤 희망.

 

09:30

 

은행연합회관 앞에서는 대우센터빌딩 비정규직노동자 동지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날 건물 안에서 원청인 대우건설을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정식으로 인수하고 사장을 선임하는 이사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모인 연대단체들과 조합원들은 대우건설을 규탄하고, 금호아시아나그룹에 강력한 경고를 전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말 그대로 '자본가'들의 집단인 은행연합회 앞에서, 정말 가진 것 하나없는(이젠 심지어 일자리조차 빼앗긴) 노동자들의 외침이란!

 

 

11:00

 

다시 대우센터빌딩 앞으로 이동, 연대집회를 진행했다. 대우센터빌딩 투쟁의 중요한 특징이라면, 집회를 매회 할 때마다 연대대오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한번도 줄어든 적이 없고, 매번 늘어나고 있다. 함께하는 조직도, 사람들도 말이다. 그래서 조합원동지들은 이 투쟁이 승리한다면 그건 연대의 힘 덕분일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포스트에서도 쓴 것처럼, 도시에서 서비스부문에 종사하는 불안정노동자들이 가진 것은 '연합적 힘' 뿐이다.

 

 

건너편 서울역 광장에서는 서울지하철노조의 집회가 같은 시간에 진행되고 있었다. 서울지하철노조 집행부는 현장 구조조정을 받아들이고 주5일제를 도입하는 요구안을 갖고 서울의 노사정기구인 '서울모델'의 사적 조정을 받았다가, 이 마저 서울시가 거부하자 파업을 경고하는 이상한 '투쟁' 중을 진행하는 중이다. 여튼, 지하철노조 집회에 들렸던 박준 동지가 (아마 우리는 섭외도 하지 않았던 것같은데도) 곧바로 달려와서 공연을 해주었다. 이 공연을 하곤 기륭투쟁으로 달려가신다. 정말 힘나고 고마운 공연.

 

이번 집회는 특히 서울경인공공서비스노조 동지들이 전국공공서비스노조(공공산별노조) 가입처리 된 이후에 열리는 것으로, 산별노조 황민호 위원장도 참석하는 등 더 힘이 났다. 많이 늦었지만, 공식적인 지원과 결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투쟁에서는 오랜만에 몸싸움이 없었다. 진입투쟁을 보류했기 때문인데, 사측이 다음주 26일 교섭을 하자고 요청했기 때문에 이번엔 넘어가기로 했다. 방금전에 열린 이사회에도 진입투쟁을 하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보류했다. (그런데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계속 읽어보시면 밑에 나온다.) 대신, 연대온 동지들의 염원을 모아서 풍선을 매다는 상징의식을 진행했다.

 

 

 

 

15:00

 

여의도 민주노총 집회. 수도권 간부 집중집회였다. 노사관계로드맵이 통과되는 날.

민주노총 집회는 예정시간보다 늦은 15:25분이나 되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6:10에 국회모형을 불태우는 상징의식으로 마쳤다. 시종일관 맥빠진 집회. 전날 투본대표자회의에서는 이미 끝난 판이니 마무리 정리집회 의미로 진행하기로 결정된 것으로 들었다. 집회를 진행하는 동안 로드맵은 국회 안에서 평화롭게 처리되었다.

참세상 기사 : 노사관계로드맵, 국회 본회의 통과

 

어이 없게도 집회를 진행한 40여분은 로드맵이 상정된 시간과 통과된 시간 사이에 정확하게 일치한다. 집회 사회자는 로드맵이 상정되었는지, 통과되었는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냥 집회는 그렇게 끝났다. 해산하려가다 뒤늦게 처리 소식을 들은 도대체 이게 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정말, 아무리 투쟁을 정리한다고 해도, 이렇게 할 수가 있는가, 그럼 아예아예 집회조차 하지 말든가!

 

너무나 무기력하게 민주노총의 2006년 하반기 투쟁, 노동자의 명운을 건 투쟁이라던 이 투쟁은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률과 노동권을 제약하는 법률을 나란히 통과시키고 바람빠진 풍선처럼 이렇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아마 내년 민주노총 선거에서 이 투쟁에 대한 평가가 주요한 쟁점이 되겠지만, 과연 그러한 평가-논쟁의 진정성을 대중들이 믿어줄 것인가조차 의문이다.

 

 

16:30

 

공공연맹과 화물, 택시, 버스 등 공공-운수 4연맹 통합논의 진행상황을 들었다.

26일 통합 대의원대회를 예정한 상태에서, 불과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민주택시연맹은 기존의 (통합준비위에서 진행된) 모든 합의를 뒤짚는 입장을 제출하여 논란이 거듭되고 있었다. '공공운수연맹'이 아니라 '운수공공연맹'으로 해야한다부터 시작해서, 공공연맹 수준의 의무금은 많으니 의무금을 인하하자, 그래서 재정이 부족하면 상근자 임금 수준을 삭감하자, 내년까지 함께 추진하기로 대표자회의에서 합의했던 '공공산별', '운수산별' 통합 합의는 없던 걸로 하자는 등  읽을 수록 눈을 의심하게 하는 내용들.

 

그런데 이날 10시부터 다시 진행된 통준위 논의에서는 26일 통합은 확정하되 내용은 계속 논의한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했던 것이다. 어떻게 통합 3일전까지(그 3일은 모두 크리스마스 연휴이다) 날짜를 박고 내용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통합될 조직의 명칭까지도 없는데 말이다. '날짜박기식' 통합에 대한 비판이 많았지만 이번엔 정말 너무들 했다. 통합 방식, 내용에 대한 대중적 논의, 공유는 고사하고라도 간부들, 심지어 통합되는 조직인 연맹 간부들도 거의 알지 못하는 내용이 '묻지마' 상태에서 진행되는 상황.

 

대중조직의 통합이라는 것이 최소한의 대중에 대한 책임마저 방기하고 마치 정치공학이 되어 버린 현실을 보고 있자니, 한없이 무기력해진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내가 만나는 간부들, 조합원들에게 26일 대의원대회에 무어라고 말하고 오라고 조직해야하나?

(이 글을 쓰는 중간에 문자 메시지가 왔다. 4연맹 통합이 무산되어 연맹 임시대대를 개최한다는 내용. 예정했던 날을 불과 이틀 남겨두고 최종적인 판단이 이루어지다니..)

 

 

19:00

 

긴급하게 문자 메시지가 왔다.

[대우:긴급] 용역깡패천막농성장침탈/7시30분 긴급규탄집회/연대부탁드립니다.

이런, 젠장!

 

급하게 달려간 대우센터빌딩 앞에는 아직 현장에 남아있는 용역깡패들과 함께 완전히 박살난 천막농성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천막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상태에서 무자비하게 천막을 박살냈다. 나중에 들으니, 이 과정에서 구권서 위원장은 몸에 휘발유를 끼엊고 불을 그으려고해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긴급하게 말렸지만 정말 큰 일 날뻔 했다. 몇몇 조합원들은 찰과상을 입는 등 다쳤다.

 

금요일 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급하게 달려왔다. 특히 당장 달려온 학생동지들 무척 고맙다. 조합원 동지들, 특히 아주머님들은 분이 풀리지 않아 용역들과 몸싸움을 하고, 항의하고, 계란을 던지시면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사측이 교섭을 하자고 해서 별다른 몸싸움도 없이 오전에 집회를 진행하기도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과 몇시간도 지나지 않아 폭력침탈이라니! 저 자본가놈들에게 양심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파렴치한 것들이다.

 

연대집회를 진행하면서 곧바로 다시 새 천막을 설치했다.

 

천막농성장을 용역깡패들이 철거하고 두 시간만에, 조합원들과 연대대오는 천막을 다시 완전하게 복구했다. 이런게 연대의 힘이다. 이런 게 희망이다.

 

농성장을 다시 설치하고 구권서 위원장은 발언을 통해서 사과하고, 살아서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투쟁하자고 결의를 밝힌다. 하지만, 구권서 위원장님, 사과하실 건 전혀 없어요. 무척 위험했지만, 당신의 마음은 그 자리의 모두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답니다.

 

(구권서 위원장은 노동운동판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훌륭한 활동가다. (나는 진정으로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존경할만한 노동운동 활동가를 아직까지 구권서 위원장을 포함해서 너냇명밖에 만나지 못했다.) 매번 집회가 끝난 후에 구권서 위원장은 학생들까지 연대단위를 모두 모아서 현재의 정황과 투쟁의 맥락, 이후 방향 등에 대해서 꼼꼼하게 설명한다. 연대단위가 모인 공대위 회의에서도 '지원'요구가 아니라 투쟁을 함께 논의한다. 물론, 노조 안에서도 조합원 동지들과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투쟁에 연대하는 단위들도 그냥 몸만 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의미를 공유하는 가운데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작은 배려다. 나는 많은 사업장을 가보았지만 이렇게 연대단위들에게도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함께 논의하는 투쟁현장은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했다. 이런 자세가 있기 때문에 연대의 힘이 모이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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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몇몇 간부들과 소주 한 잔을 하고, 이렇게 하루가 지났다. 이렇게 저들에게 속고 얻어맞고 다쳐도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이런 연대의 힘이 있기 때문에 곧 승리할 것이라고, 희망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확신했다. 

집에 도착해서 메일 하나를 쓰고 잠자리에 들었다.

 

22일 하루, 맥빠진 민주노총의 국회 앞 마무리, 원칙이 사라진 조직통합 논의, 사측의 기만과 용역깡패의 탄압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은 연대의 힘을 확인했고, 그 연대의 힘이 우리를 승리하게 할 것이라는 걸 서로 확인하면서 마무리했다. 절망들이 판을 치지만, 작지만 가장 강력한 어떤 희망들은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운동이 어디에서 취약하고 어디에서 강력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 새로 복구한 천막 농성장은 원래 자리에서 좀 떨어져서 남대문서 방향에 설치되어 있다. 크리스마스 연휴이지만 조합원은 상주한다. 지나시는 분들은 음료수라고 하나 사들고 잠시라도 연대방문을 해보시는 것은 어떻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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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 그게 과연 &quot;정규직화&quot;일까?

우리은행이 노사합의로 3100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했다고 난리다. 오늘 비정규직 투쟁사업장 집회 가서도 조합원들이 물어본다. "우리은행은 비정규직을 정규직도 시켜준다는데, 우리는..." 이런 반응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만난 한 민주노동당 활동가도 '좋은 거 아닌가요?'라고 물었던 것이 생각났다. 이런이런, 언론의 선전대로 우리 조합원들도 이걸 '비정규직 정규직화라고 생각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차, 비정규직 운동단위들의 명확한 입장이 필요한데!

 

이번 합의는 언론에 발표된 것처럼 요런 내용이다.  

△ 언론에 보도된 우리은행의 이번 조치 요약 (한국경제)

 언론에서는 특히 △ 정규직노조가 합의한 가운데 정규직 급여를 동결해서 복리후생 차별을 철폐하는 재원을 마련했다는 내용 △ 정부의 비정규직 법안이 (주로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식의 반응이다.  (말하자면 "비정규법안 반대투쟁한 민주노총, 뻘짓하느라 수고했다, 이제 임금이나 양보해라", 대략 이런 스토리다.)

 

물론 금융권과 경영계의 '우려'가 심각하다는, 예의 그 짜고 치는 고스톱은 여전히 이번에도 등장한다. 은행은 나름의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업종에 있어서는 적용하기 힘들 것이라는 진단도 친절하게 덧붙여준다.

 

우리은행의 이런 흐름은 이미 작년부터 준비되고 도입된 '직군분리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 정부의 비정규법안 내용에 따라 당연히 손봐야할 내용을 먼저 손본 것뿐이다. 어차피 2년 이상 고용된 경우에는 무기계약으로 전환해야하거나 해고해야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은행창구 업무 등은 복잡하고 숙련이 필요하기 때문에 해고하고 다시 훈련하는 것이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이번 조치는 이런 상황에 처한 은행자본의 지극히 '합리적 선택'일 뿐이다. 물론 '자본의 논리'에 따른 '합리'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일일히 이야기하는 그렇고 아래 링크를 참조하면 되겠다.

‘반정규직’은 말장난, 고용보장도 못해(일다)

‘금융권 신인사제도, 차별시정의 대상인가?’ 토론회(단병호 의원실)

 

위의 링크를 따라가보면 알겠지만, 이번 조치는 이미 상당부분이 준비되고 있던 것들이다. 상시업무 비정규직에 대해서 차별적인 직군을 신설하는 조치를 통해서 저임금과 차별을 고착화한 새로운 분할선을 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정규직과는 다른 별도의 저임금을 받고 승진의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새로운 직군의 도입이다. 따라서 기존의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의미의 '정규직화'보다는 (정부가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을 내면서 '정규직화' 대신 제시하여 지탄을 받았던) '무기계약화'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기간제 노동자의 계약기간만 기간의 정함이 없는 것으로 전환한다는 의미다. (임금은 은행측 주장에 따르면 현재 정규직의 70~80%이며 이 선을 유지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미 임금수준은 실제로는 40% 수준이라는 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따라서 기존의 저임금은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치는 정부의 비정규법안이 통과된 상황에서 저임금과 차별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다.

 

(* 언론의 평가 중에서는 그나마 거의 유일하게 한겨레 신문의 아래 사설이 문제를 지적한다. 이번 조치를 '2류정규직', '반쪽 정규직' 등으로 평가한다. 우리은행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남긴 과제 / 한겨레 12/21 사설

* 특히 이러한 조치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합법적인' 차별을 반영구적으로 고착할 것이다. 이번에 대상이 된 창구담당이나 사무지원, 콜센터 등은 거의 100% 여성노동자로 이루어져있다. 이런 조건에서 주류여성운동진영에서 이번 우리은행의 조치에 대해서 찬성의견을 낸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설사 일부 비정규직 관련단위, 노동단체에서 찬성의견을 내더라도 이런 점에서 여성운동단체는 반대입장을 분명히 해야하는 것 아닌가? 신자유주의에 편입된 NGO와 주류여성운동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은행 정규직화, 여성계 환경(프로메테우스 기사))

 

이는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과도 일맥상통하는데, 기간제 직접고용에 대해서는 일부를 무기계약으로 전환하되, 차별을 고착화하고, 나머지는 외주화하는 계획과 닮아 있다.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이 일관성을 가진다는 것, 정부가 말 그대로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을 통해 민간부분의 대응을 '선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발표에는 자세하게 나오지 않아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애초 초안에는 업무 부적합 경고 3번이면 해고, C, D 등급을 2년 이상 받으면 해고 등의 내용으로 매우 유연하게 해고할 수 있는 조치를 담고 있었다.(아마 상당부문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굳이 매년 계약을 갱신하면서 떨어내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인력을 정리할 수 있다.

 

이번 우리은행의 조치는 자본의 성격에 따라서 차별적인 방식으로 비정규직 문제에 대응할 것임을 보여준다. 은행업무와 같이 일정한 숙련이 필요한 업무에 대해서는 '무기계약화'의 방법으로 완전한 정규직화는 피하면서도 저임금을 유지할 수 있는 노동시장분할 전략이 사용될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경총의 '우려'와 같이 제조업에서는 이러한 방식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숙련도가 낮고 더 유연한 노동시장을 원하기 때문에 외주화가 계속 더 확산될 것이다. (공공부문은 업무특성에 따라 두가지가 혼재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은행이나 몇몇 공공기관에서 '무기계약'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번 법안의 통과 이후 △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2년 직전에 비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할 것이라는 점,△ 파견 업종이 확대될 것이라는 점, △ 파견용역이 확산될 것이라는 점 등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럼 이렇게 매우 제한된 영역에서 적용될 수 있을 뿐인 이번 합의를 이렇게 부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번 건은 정부와 자본이 비정규법안을 선전하기 위해서 판을 짰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비정규법안 통과 직후 이루어진 합의라는 점과, 이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대안으로 언론이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는 점, 청와대 등에서도 긍정적 평가를 내고 있다는 점, 사실상 '무기계약화'와 유사한 내용을 '정규직화'라고 선언하고 최대한의 언론효과를 노린다는 점 등등을 볼 때 그렇다. 이를 통해서 '정규직 노동조합의 양보를 통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라는 낯익은 도식을 한국노총을 이용해 훨씬 구체적으로 대중에게 제시한다. 이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자본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가 양보해야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번 우리은행의 합의에서도 복리후생 차별 해소를 위한 재원은 사측의 양보('추가비용부담'이라고 불리는)은 전혀 없이 정규직 임금인상을 양보한 결과로 자랑스럽게 선전되고 있지 않은가! 자본의 추가 부담이 없어 더 좋은 처방이라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진단이다.)

 

따라서, 당사자들에게 일정하게 (기간제보다는) 고용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것은 전체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방법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비정규직 문제의 원인을 혼동하게 만들고, 해결의 방법을 왜곡한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우리은행의 사례를 보면서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위험한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이다.(이 글을 쓰게 된 것도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우리은행 비정규직''이 수백계단을 급상승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의 투쟁으로 해결해야한다는 의지보다는, 정규직들의 양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러한 '요구'는 보수정치꾼들과 자본에 쉽게 활용될 수 있다. 그 양보가 요구되는 대상은 민주노총의 주요 사업장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민주노총의 정규직 대공장 사업장 노조들이 이러한 비판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있음은 분명하다는 점을 인정해야한다. 그 원인을 여기서 진단할 건 아니지만.)

 

따라서 우리은행의 이른바 '정규직 전환'이 가지는 문제와 환상에 대한 정확한 지적과 대중적 비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없다면 무엇이 희망인지를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이 분명하게 실천으로 제시해야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헛된 희망'을 비판할 자격도 없다. 이미 너무 늦고 있지만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누누히 지적하는 노동자 운동 혁신의 과제들과, 이에 따른 구체적인 행동계획들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스스로의 투쟁과 기존의 노조운동을 포함한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의 이에 대한 연대와 엄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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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전염병의 세계사 (Plagues and Peoples)


전염병의 세계사
윌리엄 맥닐 지음, 김우영 옮김 / 이산
 
인간에게 기생하는 두 가지 기생체, 감염성 질병을 유발하는 미시기생체(박테리아, 바이러스 등)와 거시기생체들(군대, 국가권력 등) 각각의 동학과 서로의 관계라는, 생소하지만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는 책이다. 저자인 윌리엄 맥닐은 <전쟁의 세계사>라는 책을 통해서, 군대체계, 무기 등으로 구성되는 군사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바 있다.


(<전쟁의 세계사>에 대한 소개는 '월간 사회운동'에 류주형이 이미 쓴 글을보면 될 것같다. 한편, 백승욱 선생은 <역사적 자본주의 강의>에서 아리기가 군사력의 발전과 자본주의라는 측면에서 맥닐을 참고한다고 말한다. 이래저래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연관되어 있는 셈인데, 과천연구실 세미나26권인 <보건의료:사회`생태적 분석을 위하여>에서도 맥닐의 이 책을 인용한다. 이러한 역사적 질병 분석이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 지는 궁금한 주제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감염성 질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한다는 점과, 미시 기생체, 거시 기생체라는 개념을 통해서 감염성 질병과 정치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거시 기생체'라는 개념은 정치-군사권력이 인류에게 또 하나의 '기생체'라는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지주, 국가 등의 거시기생도 인간들에게는 미시기생체와 마찬가지로 물질 순환에 개입하여 에너지를 빼앗아간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대사할 수 있는 물질이 제한되어 있다면, 따라서 거시기생과 미시기생이 '착취''할 수 있는 에너지가 제한되어 있다면 이 둘의 관계는 하나가 우세하면 다른 하나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시 기생체는 자연환경에 따라 훨씬 빨리 적응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회에서 미시기생이 우세하다.
 
예를 들어 고온 다습한 환경으로 전염성 질병이 발생하기 쉬운 아프리카 중부에서는 대규모 거시기생의 발달이 제한되었다. 거시기생이 발전하는 경우에도, 전염성 질병이 적은 냉대, 온대 지방과 아열대 지방에서는 문명의 양상에 차이가 발생한다. (적어도 중국인들이 양쯔강 유역으로 진출하는데 500~600년의 시간이 걸린 것과 같이 시간적 지연이 발생한다. 춤고 건조한 북부에서 이주한 농민들이 얕은 물에서 감염되는 기생충과 질병 때문에 너무 빨리 죽었던 것이다.)
 


저자는 다소 대담하게(스스로도 대담하고, 혹은 거의 근거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문명의 특성에 대해서 이런 설명을 도입한다. 예를 들어 미시기생이 더 우세한 인도에서 대중에게 끊임없는 질병과 갑작스런 죽음은 불교와 같은 허무주의적 종교를 낳았으며, 거시기생이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수준이었던 중국에서는 권력에 대한 통제가 중심이 되는 유교가 발전했다는 것이다. 정말 믿거나 말거나 일 수도 있지만,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의 발전과 같은 설명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도의 고온다습한 환경은 북쪽에서 침략한 아리안족 지배자가 이 지역 토착민인 피지배자에게 접근할 경우 질병을 옮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고, 이 것이 엄격한 분리('불가촉')를 촉진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북쪽에서온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토착민은 그 지역의 풍토병에 이미 적응하여 항체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고온다습한 환경에 있는 토착민이라면 더 많은 질병을 통해 다른 지역에서온 거시 기생체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질병은 다른 지역에서온 침략자들에게 하나의 장벽이 되었다.

그런데, 정반대의 경우가 극적으로 존재하는데, 아메리카가 이러한 경우다. '고립된 거대한 섬'과 같던 아메리카는 유라시아 대륙의 질병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은 수천년 동안의 질병의 교환을 통해서 많은 전염병 사망을 겪으면서 많은 질병과 안정적인 미시기생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문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전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 따라서 스페인 군대가 침략했을 때, 정작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질병으로 숨지게 된다. 통계에 의하면 아메리카 원주민은 겨우 10%정도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문명의 유지란 불가능하고, 자신들을 더 이상 지켜죽길 포기한 것같은 자신들의 종교와 신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급격하게 몰락한 이유이자 기독교를 그렇게 빨리 받아들인 이유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아메리카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어서, 유라시아에서도 이런 일은 부분적으로 계속되었다.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로마제국의 몰락, 동로마제국이 몰락에는 페스트의 창궐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량의 사망으로 인해 제국의 행정적 기반이 붕괴한 것이다. 중국의 경우에도 몽골 지배 하에 인구가 1/2수준까지 격감하는 대량 사망이 발생하는 데, 페스트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상황은 역시 몽골의 지배가 유지될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된다. 근대에도 동유럽에서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유라시아는 많은 감염성 질병을 교환해가고 항체를 보유할 수 있었다.

감염성 질병의 교환은 몽골의 침략과 같은 군사적 행동에 의해서나 실크로드, 근대무역의 발전과 같은 상업행위 등에 의해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진다.(몽골제국은 원난-버마원정을 통해 오지에 갇혔던 페스트를 스텝지역으로 확산시켰으며, 페스트가 확산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교역의 확대는 페스트를 전지역으로 확산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질병과 관계된 몽골의 몰락은 또한 이 질병과 관계된 유럽 중세의 몰락과 근대세계체계의 형성을 촉진하는 등 역사적 효과를 창출했다.) 많은 경우 전혀 새로운 질병의 출현은 해당 문명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는데, 중세말기 페스트의 창궐은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있다.

책은 우리의 상식을 허무는 사실들을 많이 제시한다. 대표적인 질문. 세계 인류는 점전적으로라도 증가해왔는가? 천만에, 앞서 중국의 인구가 1/2까지 줄어든 경우가 있다고 한 것처럼, 1/3~1/2의 인구가 전염성 질병으로 사망하고 문명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밖에도 AIDS가 원숭이로부터 전이된 것이 아닐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같은 것은 어쩌면 우리의 '상식'에는 어긋나지만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매독이 아메리카에서 유입되었다는 것도 부적절한 상식인데, 이전부터 유라시아에 존재하고 피부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이 점막을 통해 전염되는 것으로 전이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

이러한 감염성 질병의 확대는 근대 보건의료체제의 정비와 함께 많은 부분 축소되었다. 예를 들어 크림 전쟁 당시에, 전투에서 죽은 영국군보다 이질로 사망한 영국군이 10배는 될 정도였다. 군대에서 시작된 집단적 방역은 체계적인 의료행정이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감염성 질병이 전적으로 소멸될 수는 없다. 박테리아, 바이러스가 사라질 수 없을 뿐 아니라, 기생체와 숙주는 공진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에게 적합한 형태로 함께 진화하는 이상 감염성 질병의 완전한 박멸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인간은 동물과, 특히 가축과 미시기생체를 공유하고, 새로운 질병이 끊임없이 유입된다. 최근 조류독감AI, 구제역 파동과 같은 것은 이러한 역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새로운 질병들은 유전공학의 위험한 실험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여기서 감염성 질병의 새로운 양상도 자본주의의 발전과 관계된다. (<나쁜과학>에 대한 독서일기 참고)

따라서 이들 감염성 질병을 완전박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위험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진화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마치 홍역과 같은 질병이 치명적인 사망 원인에서 소아병으로 전환되고, 인간도 홍역균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많은 질병은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적응하거나 아니면 현재는 존재하지 않게되었다. 숙주인 사람에게도 덜 치명적이고 기생생물에게도 더 안전한 관계가 형성되어온 것이다.

과거의 현재의 질병은 그만큼 다르며 인류가 문명을 건설한 후 문명화된 질병들은 불과 수천년 동안에도 진화를 거듭해왔다. (숙주가 너무 빨리 사망하면 기생체도 존재할 수 없다. 페스트와 같은 질병이 한번의 큰 유행 후에 오랜 동안 자취를 감추는 것은 이러한 이유인데, 이는 기생체에게도 별로 유익하지 못한 방식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비감염성 질병이 확산된다는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노동강도 증가, 유해물질의 증가는 다양한 산업적 질병과 암과 같은 비감염성 질병을 확산시킨다. 이러한 질병을 감축하기 위해서는 생태계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가 필수적이다.(다양한 정신질환도 포함될 것이다.) 게다가 저자가 책을 쓴 이후에 우리는 프리온 단백질로 인한 질병을 만나게 되었다.(광우병) 프리온 단백질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와 같은 생명체가 아니며, 파괴되지 않는 유해한 단백질로서, 일종의 오염물질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생명활동 속에서 배태되었고 훨씬 치명적이다. 이러한 질병의 변화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특히 이러한 질병이 출현하는 새로운 조건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미시 기생체의 활동이 주요문명의 운명을 좌우할만큼 중요한 정세적 계기들이었다면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저자의 지적처럼 역사가들은 '질병의 세계사'에는 관심을 많이 갖지 않는데, 그것은 인간이 거의 통제-인식불가능했으며, 따라서 역사 속에서 순수한 우연적인 요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거가 부실한 부분이 많고 추론이 과도하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질병의 동학은 역사적 요인들과 분명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그러나 이는 인과관계이기는 하지만, 단지 기계적 인과관계일지 구조적 인과관계일지에 대해서는 더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각각의 층위에 어느 정도씩 편재할 수도 있다.) 이를 어떻게 더 명확한 관계로 인식하고, 역사적 질병학(?)을 구성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
 

  
미시기생체의 역사는 자본주의 하에서 보건의료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현재의 문제로 다시 인식할 수 있다. 아래의 책이 도움이 된다.


보건의료 : 사회 생태적 분석을 위하여
비센트 나바로 외 지음 /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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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승리', 천막쳤습니다!

 
** 수요일(20일)에는 18:30에 서울역 앞에서 촛불 문화제가 진행됩니다.
 
사실 이런 걸 아무리 '작다'고 표현해도 '승리'라고 할 수 있을진 고민되긴 하지만, 오랜만에 웃었습니다.  지난 주 용역깡패의 침탈로 인해서 많은 조합원들이 다치면서도 설치하지 못했던 대우센터빌딩 앞 농성천막을 오늘 드디어 설치했습니다. 가장 많은 연대대오 동지들이 모여주었고, 지난 주 경찰서에 대한 강력한 항의투쟁도 의미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 오늘 천막 설치 과정
   

물론 이 과정에서도 전투경찰들은 여전히 진입투쟁을 막기 위해서 건물을 지키고 있고, 건물 안에는 용역깡패들이 밖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다시 천막을 부수러 나오겠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습니다. 병역을 왔다가 졸지에 대우자본의 용역하청이 되어버린 전경들도 불쌍하긴 합니다.
 
△ 대우센터 건물 밖 전경과 건물 안 용역깡패들 
 
천막을 치고 노조 깃발을 달았습니다. 연대온 전국학생행진 깃발도 보이는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늘 투쟁에는 많은 동지들이 연대를 했고, 연대의 힘을 다시 확인하는 날이었습니다. 이 연대의 힘이 '연합적 힘'으로 나가기 위해서 더 필요한 것이 있을 겁니다. 비정규직 착취와 신자유주의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되겠죠. 
 
 
오늘 투쟁에서 많은 여성 조합원 아주머니들의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작은' 승리에 너무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반드시 승리해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 번 글에서 용역과, 전경과 싸우다 울다가 혼절하신 조합원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그 아주머니 조합원께서 투쟁사를 하십니다. 투쟁 속에서 강인해지는 조합원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같아서 감동했습니다. 이제는 울지 말고 투쟁하자던 지난 집회 때 김학철 동지의 절규가 귓가에 다시 울리는 것같습니다.
 
정말 작은 승리이지만 값집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용역들이 기습적으로 침탈할 수 있는 매우 취약한 거점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걱정도 됩니다.) 조합원동지들이 항상 농성장을 지키겠지만, 이것을 정말로 지키는 힘은 연대한 동지들의 투쟁일 겁니다. 언제든지 침탈하면 더 큰 투쟁, 더 결연한 투쟁이 기다린다는 것을 보여줄 때 저들이 더 이상 함부로 나서지 못하겠죠.
 
이 투쟁을 진행하면서 '연합적 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아직은 우리의 상황이 그에는 미달하는 '연대의 힘'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조직적 실천를 강화해가면서, 발전해가면서 진정으로 노동자-민중 '연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대'가 없는 곳에 '연합'이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니까 말이죠.
 
다음 집중 투쟁은 22일(금) 진행될 예정입니다.(시간과 장소는 논의 결과에 따라 별도로 공지될 예정이고, 공지되면 제 블로그에도 올리는 것으로 하죠.) 전에 쓴 것처럼 이번 주는 대우건설의 주주총회가 예정되어 있는 등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동지들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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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어떤 결과일까

개토님의 [넌 어느 별에서 왔니?] 에 관련된 글.

 

노동운동은 개판 오분전이지만, 그래도 테스트는 테스트. 피할 수 없다.ㅎ

테스트를 해보니, 목성에서 왔단다.

목성에서 온 사람
목성에서 온 사람
당신은 호기심이 왕성하여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매사에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당신은 열띤 토론을 즐깁니다.
당신은 외국의 문화와 언어에 매력을 느낍니다. 당신은 외출을 좋아하고 동물과 자유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과대포장할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하세요.
그렇게만하면 당신은 자신감과 관대함,공평함으로 유명해질것입니다.
너 어느 별에서 왔니?

좀 안맞는 것도 있는 것같지만, 암튼 재밋군.

근데 목성은 너무 뚱뚱한 별인데.. ^^;

 

요즘에 정치적 성향 알아보기가 또 유행이던데, 예전에 했던 결과를 보면,

Your political compass : Economic Left/Right: -9.63, Social Libertarian/Authoritarian: -7.08

(10점이 최고이고, 좌파쪽으로 9.63, 자유주의쪽으로 7.08)  나름 뿌듯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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