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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1/14
    [교안]노동자운동,역사와 미래
    겨울철쭉
  2. 2007/11/09
    태왕사신기, 영웅의 시대?(2)
    겨울철쭉
  3. 2007/11/08
    이상은, 태양의 영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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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11/07
    [교안]자본주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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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7/11/04
    [독서]중국노동자의 기억의 정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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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11/03
    친구들과 술 진탕 먹은 다음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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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11/01
    [독서]빅토르 세르주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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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11/01
    "코리아연방공화국"광고덧글에 한마디(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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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10/28
    다른 '시간들'과 만나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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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10/22
    유럽여행 수난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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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노동자운동,역사와 미래

지난 주 교육에 이어서 두 번째로 진행한 노동조합 간부교육의 두 번째 주제는 노동자운동의 역사와 전망. 전체적으로 조직발전 전망을 논의하기 위한 사전단계로 진행되는 교육이기 때문에, 노동자운동이 처한 현재의 조건에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공유하기 위한 내용이 요청되는 강의였다.
(지난 교육에 대한 글은 : [교안]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참고)

교안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교안2차] 노동자운동, 역사와 미래

교육의 난점들

지난 번 교육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나 자신에게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어쩌면 더욱 그런데, 정리할수록 분량은 방대해지지만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할지는 더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두 시간 가량의 교육으로 노동자운동 200~300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그 전망까지 담는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 수도 있다.

몇가지 강조점을 다른 노동운동사, 노동운동 전망 교육과 달리 두려고 했지만 그것들을 상호결합시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꼭 교육기술상의 문제만은 아닌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평의회 운동의 역사와 현재 요청되는 사회운동적(혹은 사회변혁적) 노동자운동을 결합시켜서 이야기하기에 쉽지 않다. 이론적인 연결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지점도 있는 것이다.

한편, 강조점의 문제에 있어서는 실제 강의를 진행하는 것이 그것을 잡아내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조합원들의 반응을 보면서, 그리고 내가 스스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어느 지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단지 교육상의 강조점의 문제만은 아니고, 실제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할 쟁점들을 인식하는 과정인데, 교육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함께 교육된다고 할까. 따라서 교안 자체는 내용이 방만하지만 실제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교안자체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진행하면서 오히려 긴장감과 속도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교육을 준비하고 교안을 작성하면서 애초에 의도했던 것은 올해 여름과 가을에 각각 진행된 사회진보연대의 “사회운동세미나” 중 내가 맡았던 “세계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쉽게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손을 대기 시작하자 완전히 새로 쓰지 않으면 노조의 기초간부교육 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급하게 새로 쓰다 보니 내용적으로 부실하거나 심지어 틀린 부분도 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런 주제의 교육은 좀 더 교육 시간을 여유있게 잡을 필요가 있다. 물론 애초 교육기획처럼 역사와 전망을 결합해서 진행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의 교육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경우에는) 90분짜리 교육을 이어서 두 강의를 배치하는 방법인 것같다. 이번에 내가 진행한 강의는 총 2시간10분이 소요되었다.(앉아있는 조합원동지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

강조되어야할 것

교안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몇가지가 있다.

일단,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교육하는 데서는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경험이라도) 사건들의 나열을 넘어서야한다는 것이다. 사건들이 처하는 역사적 맥락을 당시의 자본주의 구조, 운동의 발전과 함께 제시하고 따라서 그것이 현재에 갖는 의미를 공유해야한다. 특히 이를 위해서는 실버의 <노동의 힘>을 참고하는 것이 유리한데, 역사적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세기적인 노동자운동의 형태를 단지 ‘덜 발전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 인식하고 현재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노동자운동사의 많은 교재, 교안들은 노동자운동의 발전을 직선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구조적 인식이 취약하다.)

운동사 부분에서는 교안의 구성방식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강조되어야할 것들도 있다.
시간상 관계 때문에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지만 여성노동자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젠더편향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반영되어야한다. 전망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적 시각을 결합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또한 국제주의가 강조되어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민족주의와 결합한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해야한다. 이 부분도 시간적인 문제 때문에 충분히 강조하지 못해 아쉬운 내용. 이러한 비판을 위해서는 전쟁들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이 쟁취한 “민족국가의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약이자 독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쉽게 제시해야하는데 기술적으로도 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평의회 성격의 노동자운동의 역사에 대한 제시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교안은 노조-당을 중심으로 운동사를 제시하는 데, 이 속에서 평의회 운동의 경험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가 어떤 식으로 대안세계를 만드는 역량을 갖고 있는지를--따라서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평의회운동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조될 필요가 있는 사건들은 파리코뮌-러시아소비에트-1919~20년 독일?이탈리아의 혁명적 경험-해방이후 전평과 자주관리?인민위원회-중국의 문화대혁명 등이다. (파리코뮌이나 전평의 경험을 평의회운동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은데, 검토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이번에는 일단 교육적인 측면에서 그렇게 설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전망의 부분에서는 사회운동적 노동자운동, 대안세계화운동의 일부로서 노동자운동, 지역을 중심으로, 비정규직노동자 등 새로운 운동주체를 형성하는 것의 중요성, 페미니즘과 국제주의 등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노조 간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인만큼 핵심은, 새로운 운동주체가 과거의 운동관행(기업별 경제주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열어가야한다는 것. 그것을 위한 운동의 요소들을 제시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존 교육의 문제점

교육을 준비하면서 기존의 노동운동사 교안과 '노동운동의 전망‘을 주제로 한 교안들을 검토했다. 몇가지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노동자운동사에 있어서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사건들의 직선적인 나열인 경우가 많다. 민주노총의 교육비디오 중에 유명한 “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라는 것이 있는데, 간단한 조합원 교육을 위해서는 좋은 방법이지만 간부, 활동가 교육으로 넘어가면 적절치 않다. 그런데 간부 정도를 대상으로 하는 교안도 그런 식이 많다. 이제까지 단계적으로 발전해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식의 제시는, 글쎄, 미신적인 경험주의라고 할까, 의지주의라고 할까. 오히려 현재 우리의 노동자운동이 어떤 위기에 빠져있다면 그 원인을 역사적으로 인식하고 또한 대안도 역사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을 텐데 말이다.

(물론 역사적 경험 속에서 ‘감동’을 느끼도록 하고 결의를 주는 교육이 있다. 박준성 선생의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와 같은 것이 그런데, 그런 교육은 나름의 고유한 목표가 따로 있는 것으로 그 자체가 매우 훌륭한 교육이다. 그에 비해서 내가 진행하고자 한 것은 보다 전략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역사를 제시하는 것이라 목표상에 차이가 있다. 양자가 비교 대상은 아닌 것.)

또한 많은 경우에 “노동자운동”이라기보다는 “노동운동”에 대한 설명. 따라서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이 싸워왔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에 주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노동’을 쟁점으로 하는 운동만이 아니라, 노동자가 해왔던 투쟁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의 전망에 대한 교육들을 보자. 많은 노조에서 ‘관성적으로’ 진행하는 교육이기도 하다. 특히 노조의 공식교육들은 연초에 만든 노조의 연간 사업계획(+정세분석)을 적당히 짜깁기 한 것들이 많은 데, 노조의 사업계획을 집행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될 때에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고 해도, 교안은 나열적인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가 위기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지표를 제시하다가 비정규직 확산 등 노동자의 위기를 말할 때에는 연결고리가 없이 그냥 언급. 그러다가 노동운동의 과제로는 신자유주의 반대, 비정규직 철폐, 전쟁반대.. 대체 이런 식의 투쟁과제를 나열하는 데 이것들이 현재의 자본주의로서의 신자유주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혹은 각자의 운동과제끼리는 무슨 연관이 있는지가 제시되는 경우가 드물다. 이런 식의 교육은 개별의 투쟁과제를 소개하는 것일 수는 있지만, 그들이 과연 “어떤 방향”인지를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다.

===
내가 작성한 교안도 한계가 분명하다. 특히 강의에서 강조한 내용이나 설명한 ‘구조적 원인’을 제대로 교안에 담은 것도 아니고, 내가 비판한 ‘역사적 사건들의 나열’이 나의 교안에서도 반복된다. (시간이 없어서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의 교안의 내용을 카피한 경우도 있다.) 따라서 추후에 다른 기회가 있다면 보완되고 수정될 필요가 있는 것들. 필요한 동지들이 있다면 직접 해주어도 좋을 것 같다. 노동자 교육을 내용적으로 혁신하기 위한 토론을 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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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 영웅의 시대?

요즘에 태왕사신기를 재밌게 보고 있다. 사실 요즘에 그나마 시간이 있기 때문에 보는 셈인데, 여행을 다녀와서 지난 주에 14회를 처음 본 후에 1회부터 주말내내 찾아봤다는,,;;

나도 영화나 드라마 보는 취향은 그저그래서 일단 판타지 줄거리에, 멜로 라인, 멋진 쌈박질 장면 등이 볼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CG는 별로라는 생각이 드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쪽에는 예산을 줄이다가 "싸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특히 태왕 담덕 역의 배용준은, 남자인 내가 봐도 정말 반할 정도로 멋있게 나온다.

재미있게 보다가 생각나서 몇가지.



신화, 영웅들의 시대

드라마의 배경은 고대. 좀 늦은 시기이기는 하지만 신화적인 시기로 그려진다.(고구려 정도는 이미 역사시대인데..;)

주인공인 태왕 담덕은 '영웅'이다.
그런데, 이 영웅에는 두 가지 정도의 부류가 있다. 전자는 영웅신화나 설화에 등장하는, 탄생-고난-성장-귀환으로 연결되는 일생을 사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타고난" 운명을 갖고 있어서 언젠가는 승리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고난을 겪어야하고 그 운명을 알아보고 돕는 것들을 만나야한다.

이런 영웅들은 매우 전형적이어서, 어느 민족들의 영웅신화, 설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홍길동전같은 중세소설에서도 그렇고, 지금 쓰여지는 소설이나 영화들에서도 활용되는 구조.

그런데, 또 다른 영웅들이 있는데,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세익스피어에서도 그렇지만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영웅들을 보자. 이들은 운명의 장난에 따라, 혹은 자신의 기질 때문에 비극적인 상황에 봉착하지만 자신의 고귀함을 지키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 된다. 이들은 파멸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고귀함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성격의 영웅은 그 위대함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기 때문에 더 위대하게 느껴진다. 두 가지의 영웅 성격이 결합할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나, 영화 '메트릭스'에 네오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튼, 태왕사신기의 영웅인 태왕 담덕은 전자의 성격에 가까운 인물. 그래서 14회 정도부터 시작해서 17회 정도에 이르러서는 고난을 거의 이기고 이제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렇게 되다 보니, 오히려 극적 재미가 반감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한편으로는 극적 재미를 주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반감하는, 이 드라마의 판타지적인 성격이 관련되어 있다.

기계신(deus ex machina)

14회, 15회를 TV에서 보고 앞 부분을 찾아서 다시 보면서 궁금했던 것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담덕이 어떻게 (신물을 다 찾을 때까지 임시라고는 하지만) 왕위에 오르는가하는 점이었다.

11회. 선왕을 살해한 것으로 의심받던 태왕 담덕은 신당에서 "가우리검"(심장에 칼을 박아넣고 죄를 지은 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하여 재판하는 제도라는 데, 중세시대의 마녀심판과 비슷한 것이다.)을 요구받는다. 심장에 칼을 찔린 담덕은 여기서 심장이 찔린 칼(동명왕검)이 한순간 가루로 변하면서 설아남는다. 그 결과로 짜자잔~ 선왕을 죽였다거나 귀족 자제들을 납치했다는 모든 의혹을 뒤로 하고 왕위 등극.

그 순간 당장 떠오른 것이 진중권 덕분에 유명해진 기계신(deus ex machina)이다.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사건자체의 필연성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외부적인 힘 덕분에 모순이 해결되는 상황을 비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개념. 여기서 동명왕검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렇다보니, 담덕이 왕위를 인정받는 것은 그의 고귀한 인품이나 고난을 헤치는 용기같은 것이라기 보다는(물론 그것들도 제시는 되지만), 판타스틱한 기적에 의한 것이 된다. 이렇게 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서 주인공 영웅을 도울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극적 긴장은 떨어질 수밖에. 4개의 신물을 모두 찾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것이지만, "가우리검" 장면은 특히 심했다.



인물들, 입체적이거나 밋밋한.

이런 상황이다보니, 태왕 담덕은 주인공이지만 점점 재미없고 더 밋밋한 인물이 되어간다. 물론 배용준의 멋진 외모 덕분에 여전히 (극에는 외적으로) 매력적이지만 말이다. 그의 성공은 그의 고귀한 영웅적 자질 때문이라기 보다는 초자연적인 힘들이 이미 닦아준 길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비해서, 오히려 태왕 담덕과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결국 대립하게 되는 기하(문소리)나 연호개(윤태영)가 더 입체적이고 극적인 인물이 된다. 이들에게는 내적인 갈등이 있고 고뇌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처한 운명 속에서 파멸되어간다. (아마 이들의 성품이 좀 더 고귀하게 그려졌더라면 이 드라마의 진정한 영웅은 태왕 담덕보다는 이들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극중 인물들의 사랑에서도 더 가슴을 울리는 것은 기하가 태왕 담덕에게서 멀어져가는 과정, 그리고 파멸을 예상하면서도 (기하를)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연호개의 경우다. 수지니(이지아)를 둘러싼 태왕 담덕과 처로(이필립)의 미묘한 감정보다도 더 그렇다.

오늘 방영한 17회에서 "(더 멀어지고 파멸하기 전에) 자신을 멈추어 달라"는 기하의 대사나, 지난주(아마 15회?)에서 연호개가 기하에게, "내가 필요없어져 버리더라도, 당신 손으로 내 가슴을 찔러줘요"라고 말하는 연호개의 경우가 더 생생하게 '사랑'이라는 감정의 느낌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드라마는 고대 귀족정 시대를 다룬다. 이것은 영웅들을 묘사하기에 쉬운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귀한 인간들의 귀족적 성품을 두드러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귀족정을 옹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성품의 인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귀족적 성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모든 것이 '평범'해지는 이 시대에는 고귀하고 위대한 영웅들을 그리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혹은 인간의 위대함을 억압하는 시대.) 그러다보니 별 같지도 않은 것들이 정치판에서 영웅 행세를 하려고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고대민족들의 역사

한편, 이 드라마는 '쥬신'이라는 이름으로 동이족들을 통칭하면서 이들이 같은 민족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말갈, 거란 등이 언급된다.

사실은 여기에 왜(倭)도 넣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하지 않는데, 왜를 포함해서 동이족을 지칭할 경우 '내선일체'를 상기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거란, 말갈을 언급하는 것은 이들이 지금은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있지 못할 뿐더러 그런 점에서 남한민족보다 열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일본은 '내선일체'를 말할 수 있지만 일본민족보다 열위에 있는 조선민족은 그것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기만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백제가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요서에 이르는 동부지역에 영토를 갖고 있었다는 설을 채용하지만, 마찬가지 맥락을 갖는 다른 가설, 백제와 왜가 연합왕국이었다는 주장을 인정하는 것같지는 않다. 이것 역시 일본에 대한 미묘한 입장 때문일텐데, 이 드라마가 일본자본의 적극적인 투자, 그리고 일본 수출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설적인 일이다. (혹은 그렇기 때문에 왜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드라마를 보면, 주요 전투장면은 황량한 초원과 사막지역에서 촬영한 것을 알 수 있다. 카자흐스탄의 스텝지역에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무대였던 만주에서의 촬영에 대해서 중국정부가 내용상 문제를 들어 불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수입과 방영도 불허할 방침이라고 한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동이족을 통칭하여 '쥬신'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한민족과 연관시키는 이 드라마의 내용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고대사를 두고 각 민족국가들이 벌이는 역사전쟁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만들어진 고대>라는 책에 대한 글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구성된 역사들에 대해서 말이다.

중국의 경우에 특히 실망스러운 것은 그들이 (말로라도) 체제의 성격으로 사회주의를, 그리고 다민족국가를 운영하는 원리로 민족간의 우애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에서라면, 오히려 각 민족들의 고유한 역사를 평등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면서도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민족적 우애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은 한족(漢族)의 주요 제국을 중심으로 역사를 구성하고, 다른 민족의 역사는 "지방정권"이라는 식으로 폄하하는데, 이는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한족의 패권적 역사관일 뿐이다. 이렇게 되는 데 티벳을 지원하는 미국과 같은 위협, 민족들의 분리독립의 위험이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과연 그것이 다민족 국가로서의 중국의 통일성을 유지하는데에 올바르고--게다가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의문이다.

드라마를 이런 식으로 만드는 한국이나, 그것을 금지하는 중국이나, 또 일본이나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드라마는 앞으로도 재미있게 보겠지만, 극 자체의 재미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힘들어질 것같고, 화려한 영상과 몇가지 극적 에피소드가 더 두드러지지 않을까 싶다. 아, 그리고 배용준을 비롯해서 인물들의 비주얼만으로도 아직은 충분히 볼만하고 앞으로도 상당히 그렇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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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태양의 영혼

이상은 앨범은 자주 듣지는 않는데도
(얼마전에 산 베토벤 전집을 천천히 듣는 중인데, 일단 그 "양"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들을 수록 왜 이렇게 좋은 곡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가끔 듣다가보면, 거의 "환장할" 지경이다. (이것도 병인가;;) 대체 왜 이런거지;;

이상은 13집 중,

태양의 영혼

커다란 해무리 무지개빛 테두리 눈이 부시게 환하네 천국이 가까운 듯
어린아이처럼 하늘만 계속 보았네 아름다운 빛 속으로 날아가고파
아 별들을 이어서 멜로디를 만들고 꽃들을 엮어 그림 그리고
바람을 담아서 시를 쓰고 그늘없는 미소를 모아 그대에게 드리리
나의 노래는 잊혀지겠지만 감사 드리리

나의 먹구름과 거칠은 모남이 조금씩이라도 바뀌길 기도해
높고 높은 그곳에 찬란한 빛 비추니 나의 모든 것들에 눈물이 나네
아 별들을 이어서 멜로딜 만들고 꽃들을 엮어 그림 그리고 음 바람을 담아서 시를 쓰고
조금씩 나아지기를 빛을 머금은 말과 눈빛과 미소를 세상의 어둠에 묻히지 않는
태양을 내 영혼속에 커다란 해무리 무지개 빛 테두리 눈이 부시게 환하네
어린아이처럼 하늘만 보았네 아름다운 그 빛 속으로



* 스피커모양 아이콘을 누르면 곡이 재생된다.
(다만 Firefox에서는 잘 되는데 IE7에서는 안되는 경우도 있는 것같다.)


==
인터넷에 검색을 하다보면 이상은의 '삶은 여행'이 '첫눈'이라는 영화에 삽입되면서 뮤직비디오로도 만들어진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사람들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이 뮤직비디오의 영상은 마치, 노래방에서 나오는 영상처럼 곡하고 (느낌이나, 심지어 속도도) 전혀 어울리지 않고 따로 노는 느낌이다.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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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조합 현장간부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집중 교육 프로그램 중 “우리가 사는 사회,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진행한 교안. 전체 교육 중에서 내가 맡은 것은 두 개의 강의인데, 이것과 함께 다음 강의는 “노동운동의 역사와 전망”이라는 주제.

참고삼아 필요한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다운받을 수 있다.
교안1차자본주의란무엇인가.hwp

사실 한계가 많은데, 게으르다보니 시간을 두고 준비하지 못한 것도 문제고 교육을 마치고 나니 초점을 정확히 맞추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의 강의에서 전달해야할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다소 복잡하게 구성된 것도 원인 중에 하나일 것이다.

교안의 개요

교안은 자본주의의 역사와 구조를 비정규직노조 현장간부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교안이 포함하는 내용은 이에 따라서 : △ 자본주의의 역사(아메리카 헤게모니 이전까지) △ 자본주의의 구조(자본의 증식과 착취) △ 자본주의와 계급투쟁의 정치 △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와 신자유주의(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본 남한자본주의의 발전과 정치) △ 신자유주의의 특성 △ 자본주의의의 미래 등에 대한 주제를 포괄한다.

특히 이러한 내용들을 설명하면서 각 주제가 구조적으로 관련되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계급투쟁을 필연적으로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의 파괴성과 함께 붕괴의 필연성을 제시하면서, 노동자계급이 경제적인 방어투쟁만이 아니라 대안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으로 나가야한다는 점까지 제시하는 것이 목표.(그것을 위한 운동의 내용은 다음 주 강의의 주제다.)

교육의 난점들

강의를 진행하면서 주로 어려웠던 점이 몇가지 있다.

첫째, 역사적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역사와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을 통합해서 설명하는 것. 자본주의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시종일관 결합하는 것은 별로 가능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특히 자본주의의 출현과 초기의 상업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동역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런 점이 있다. 이런 측면은 역사적 자본주의론을 비판하는 논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역사와 계급투쟁을 “선명하게” 연결시키는 데 난점이 있다는 측면과도 관계가 있다. (여기서는 “교육적인 효과” 때문에 무리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아니면 아예 별개의 주제로 진행해야하는 것일까?

둘째, 노동가치론과 이에 따라 잉여가치의 추출매커니즘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것은 교육을 함께한 간부조합원들이 제조업 사업장이 아니기 때문에 설명의 난점이 있었던 측면도 있겠지만, “노동자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교육의 방식, 논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안을 작성할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실제로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조합원들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설득력의 공백이 어느 지점에서 발생하는 지 당장 느껴진다.)

특히, 잉여가치에 대한 회계적인 설명을 지양하려다보니, 보통 잉여가치 추출의 도식으로 설명하는 “노동일 안에서 몇시간은 지불된 노동이고, 몇시간은 부불노동이다”라는 식의 설명을 진행하지는 않으려고 했던 측면이 있었다. 잉여가치를 양적인 측면으로 환원하는 회계적인 설명은 교육적인 목적에서 쉽게 설명할 수 있기는 한데, 별로 내용적으로 옳지는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무엇보다 잉여가치 추출은 계급투쟁이며 ‘생산관계’의 문제.)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경제학비판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교육적인 효과를 달성할 수 있는 설명방법이 무엇일지를 고민하게 된다.

셋째, 강의의 시간이나 분량 상 이데올로기 비판은 넣지 않았는데, 이것이 없이 계급투쟁에 대해서 특히 국가장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한된 시간, 분량 안에 결합할 수 있을까가 문제가 된다. 자칫 대중교육에는 적합하지 않게 한없이 학술적이 되거나 긴 시간을 요구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보니, 이제까지 마르크스주의를 도식화하는 이론과 설명방법들이 괜히 나타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스탈린주의 교과서의 도식들은 매우 깔끔한 설명이 가능하게 한다. 문제는 그것이 교육적인 목적을 넘어서 (물론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론 자체를 도식화하고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론적으로 올바르면서도 설득력있게 대중 교육이 가능한--이 말은 이론이 이를 통해 대중이데올로기로 전화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방식이 있을 것인가가 문제. 그것이 계속 연구되어야한다.

유사한 주제의 기존 교안들에 문제점

이런 점은 교안을 작성하면서 검토한 기존의 교안들을 보면서도 느낀 것이다. 교안들은 자본과 잉여가치에 대한 회계적인 설명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다소 도식적으로 자본주의 역사를 설명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공황을 설명하면서, “과잉생산 때문에 이윤율 저하가 나타나고 그래서 금융위기가 발생한다”는 식의 설명하다가 생산부문간의 불비례까지 언급하고 “공황의 극복을 위해 자본주의는 전쟁, 탈노동정책(???)을 취한다”는 부분도 있는데, 답답해질 지경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에서는 부정확한 개념들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고, 특히 사태의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빈곤화(혹은 양극화), 실업과 비정규직 확대 등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결과가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 한 채 단지 나열한다. 따라서 투쟁에 있어서도 결과에 대한 투쟁까지를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으로 제시하지만 정작 금융세계화(현시기의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 대안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적인 전망을 제기하지도 못한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그렇게 강조하지만 정작 그것이 “왜”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인지,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이후를 준비하기 위한 투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공백으로 남게 된다.

보완되면 더 의미있을 부분들

한편, 강의를 진행하면서 좀 더 보강하면 의미가 있겠다고 느낀 측면들도 있다.(조합원들이 관심을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용 중에는 20세기 자본주의 역사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도래했는지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에서 세계자본주의의 역사와 함께 남한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해서도 결합해서 강의를 진행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동학과 정치를 함께 설명하게 만든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경제발전, 한일수교나 유신, 전태일 열사의 분신, 부마항쟁-10/26-광주항쟁과 같은 정치적 사건, 전두환의 집권과 80년대 경제위기와 85년 이후의 3저 호황과 87년 대투쟁, IMF 구제금융위기, 대선 등까지 조합원들이 살아가면서 직면한 중요한 정치, 사회적 사건들의 원인을 제시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의 결론은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세력화(민주노동당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와 계급재형성, 대안사회 건설을 위한 투쟁 등) 조합원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연령대가 높은 조합원들이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좀 더 보완되면 재미있을 부분.

자본주의 사회 계급투쟁의 동역학을 통해서 계급적 단결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교육을 함께한 비정규직 노동자들 자신의 운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할 수 있다는 점도 풍부하게 보완하면 좋을 부분으로 생각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계급으로 나누어져 투쟁할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설명을 넘어서, 프롤레타리아의 분할과 그 반경향, 자본주의의 변화와 함께 형성되는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대표성과 비정규직 노동자 운동에 대한 설명 등.

이렇게 몇 가지 난점을 보완하고, 긍정적인 부분을 다듬는다면 더 좋은 교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난점들은 더 있을 것이고, 몇몇 부분에 이론적으로 정확치 않은 부분들도 있을 텐데 함께 점검할 필요가 있다. (게을러서 언제나 할지는 모르겠지만 ^^; 아마 언젠가 다른 교육을 할 기회가 있으면.)

조합원, 간부교육은 할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특히 매번 실제로 진행하면서 보완해야할 지점이 어디인지 등을 느낄 수 있다. 또 조합원들의 유언의 혹은 무언의 반응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번 교육에서도 (교육주제와 무관하기는 한 내용까지도 포함해서) 광주시청 비정규직 조합원동지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는 기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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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중국노동자의 기억의 정치


중국 노동자의 기억의 정치
백승욱 엮음 / 폴리테이아


문화대혁명에 대한 중국노동자들의 기억을 구술을 통해 다시 불러오고 재구성한 책이다.
저자들이 밝히는 것처럼 문혁은 당시와 마찬가지로 40년이 지난 지금도 매우 정치적인 쟁점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택한 지금의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문혁은 재앙이었다. 문혁은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한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도 계급투쟁이 지속되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따라서 급속한 자본주의적 재편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결합할 수 있는 폭발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회주의 정치의 측면에서, 공산당의 국가권력 장악 이후에 문혁은 국가와 당을 관통하는 혁명이라는 점에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스탈린주의 이후 관료주의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되어가던 사회주의는 중국에서 문혁을 거치면서 새로운 전망을 획득하기도 한다. 68혁명 과정에서 중국의 문혁이 주목되고, 이후에도 외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들을 당시 문혁에 참가한 노동자의 기억을 통해서 돌아본다는 것은 온갖 평가들--공식적이거나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들 속에서 문혁의 구체적인 실제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길이다. 이렇게 바라본 문혁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사건들의 나열을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전한다. 힘든 조사를 수행하고 정리한 저자들의 노력 덕분에 이런 기억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노동자들은 문혁 과정에서 무엇이었나? 노동자들은 문혁 속에서 능동적인 정치적인 주체로 거듭났다. 노동자들은 진정으로 자신이 ‘영도계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자신들의 사회주의 혁명을 밀고 가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자신들을 조직했다. 공장에서 자발적인 조직을 구성하고 진정으로 더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투쟁에 나선다. 심지어 당을 향해서도 투쟁하고 권력을 쟁취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인상적인 기억이었다. 문혁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당시의 입장, 지금의 입장에 따라서 평가가 다른 점도 있지만, 주로 개혁/개방 이후에 노동자들이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위치를 잃고 기계의 부품이 되고 열악한 상황에 내몰린다는 점을 비판한다.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문혁 당시 기억에 기반해서 조직된다는 점도 지적된다. 중국노동자들의 이후의 투쟁이 문혁의 기억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쟁점이다.(그것은 또한 세계 노동자운동의 미래와 자본주의 세계체제 앞날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문혁 과정에서 생산 현장에서 권력이 재구성되고 직책이나 지적 위계에 관계없이 평등한 관계가 만들어진다.(오히려 간부나 기술자보다 노동자가 우위에 선다.) 이와 함께 노동자 조직은 공선대로 대학에 파견되어 학생운동(홍위병, 학생 조반파)을 오히려 정치적으로 지도한다. 한편으로는 학생 홍위병이 문혁 초기에 공장에 진입하여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급진화시킨다. 지식에 따른 정치의 위계를 적극적으로 철폐하고 지식인과 노동자가 정치적으로 교통한다.

이와 함께 교육도 혁신된다. (이는 주로 문혁 중앙지도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공농병工農兵 대학과 같은 제도를 통해서 평범한 노동자, 농민, 병사들에게 고등교육의 문이 열린다. 초중등 교육이 농촌지역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생산과 결합하여 교실만의 학습을 벗어난다. (우리가 가진 교육제도의 관념, 즉 전일제로 교실수업만을 통해 지식을 주입하는 형태와는 달리 훨씬 더 긴밀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과 함께 생산에서도 혁신이 이루어지는 데, 노동자들이 능동적으로 구체적인 생산 현장을 바꾸어나가기 때문이다. 문혁 기간 동안 생산을 잘 수행하는 것도 투쟁의 중요한 쟁점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상과는 달리 생산이 중단되거나 파괴된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이 기간 동안 경제성장률 등은 매우 높은 수치를 기록하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능동적인 참여를 통해 생산력의 성격조차 바꾼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생산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생산력의 측면에서도 계급투쟁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생산력의 혁신은 사회주의 단계에서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문화혁명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한다는 점을 보여준다.(사회주의 단계가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혁명의 계속된 기간인 것처럼.)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기억을 통해서본 문혁은, 사회주의가 하나의 고정된 단계가 아니라 혁명의 계속이라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럴 수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매순간 모든 곳에서 노동자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지속되어야한다. 국가권력의 장악은 단지 시작일 뿐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지속적으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공장과 지역, 학교를 혁명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기억은 사회주의 정치를 사고하는데 있어서 문혁은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점을 다시 증명한다. 사회주의는 국가 운영-관리의 기술이 아니라 언제나 대중운동의 이념이라는 점. 이것은 현재의 우리 운동에 있어서도 매우 현재적인 쟁점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 이후에 너무나 쉽게 잊혀진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문혁의 기억을 돌아본다는 것은 사회주의를 사고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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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술 진탕 먹은 다음 날

친구놈들과 술을 진탕먹고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다음날 아침.
그런데,

경험도,
상처도,
통찰력도
이 녀석들을 보니


너무
적고
아직도 어리다
넌 도대체
그 동안 뭘 한거니
정말 관료질 온실 안에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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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빅토르 세르주 평전


빅토르 세르주 평전
수잔 와이스만 지음, 류한수 옮김 / 실천문학사

<빅토르 세르주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지금은 폐쇄된) 케산/세르쥬님의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블로그 글 중에서 세르주를 인용한 것이 있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용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실천문학사에 나온 책을 사두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여행을 다녀와서야 읽게 되었다.>


빅토르 세르주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한겨레21] 박노자, “실패한 혁명가”를 읽는다  참고

아나키스트에서 출발해서 볼세비키가 되었으며, 좌익반대파의 일원으로 수감되고 소련에서 추방된 혁명가.

빅토르 세르주는 소수파 중의 소수파였다. 그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반대한 소수파였고, 소련에서는 스탈린에 반대한, 그리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소수의 좌익반대파였으며, 트로츠키의 제4인터네셔널에 대해서도 종파주의이며 국제당을 만들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고립된 좌익반대파의 마지막 소수였다.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단지 우리가 기질적으로 정당치 못한 것에 더 참지 못하는 소수파이기 때문일까? (우리 역시 소수파인 이른바 ‘운동권’들일 뿐 아니라, 그 중에서 소수인 좌파이며, 좌파 중에서조차 소수파이다.)

세르주는 더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를 두고 벨기에인으로 자라났으며 프랑스에서 투쟁하고 수감되었다가 러시아혁명에 참여했고, 코민테른 성원으로 독일에서 혁명운동을 했으며, 소련에서 추방당하고 벨기에, 프랑스에서 투쟁하고 스페인 내전을 지원했고 나치 치하의 프랑스를 탈출해 멕시코에서 정치활동을 하다가 사망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20세기 초반의 공산주의 운동이 진정으로 국제적인 이념과 활동양식을 가졌던 시기, 그리고 그것이 파괴되어 가는 시기를 일생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는 또한 혁명가였지만 사회, 경제를 분석한 사회과학자였을 뿐 아니라, 혁명시기의 역사와 혁명가들의 전기를 서술했다. 언론을 위한 기사를 쓰기도 했고 시를 쓰고 소설을 출간하고 러시아어 저작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다른 사상 조류의 지식인들과도 풍부하게 교류했다. 그는 독특한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지식이 혁명과 관련해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열정을 다했다. 분과적이지 않은, 종합적인 지식인으로서 혁명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그는 왜 소수파 중에 소수파가 되었나? 그것은 그가 모든 것의 정당성에 대해서 회의하고 자신 속에서 반성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솔직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비극적이게도 이런 그의 자질이 그를 소수파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의 이런 정신을 사랑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미치광이같은 정세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볼세비키가 내전 이후에도 계급독재가 아니라 당독재를 지속하는 것을 반대했다. 노동자조직이 ‘노동자계급의 국가’에서 분쇄되는 것을 혁명의 후퇴라고 인식했다. 소련 사회의 관료주의를 비판했고, 자신도 그 일원이었던 좌익반대파가 실패하는 원인, 즉 그들의 당에 대한 본능적이고 맹목적인 충성심도 비판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망명한 좌익반대파의 사실상의 수장이었던 트로츠키에 대해서도 (그러나 노 혁명가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존경, 그리고 품위를 잃지 않은 채로) 스탈린의 거울대당이라 할 그의 종파주의와 권위주의를 비판했다.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에 대해서나 혹은 좌익반대파와 함께한 정치활동에 대해서 비판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르주에 대해서 읽는 이유는 그가 가진 진정으로 타협하지 않는 혁명가다운 정신 때문이다. 바로 혁명이 고립되고 패배하고 혁명가들이 변절하는 시대.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야만이 희망을 압살하는 시대.

세르주는 사방에서 역사의 나쁜 측면들에 마주했을 때, 그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고난을 헤쳐간 인물이다.(그런 점에서 그는 비록 ‘실패한’ 혁명가이지만 영웅이라고 할만하다.)

더욱 역설적이게도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같이) 근거없는 낙관주의에는 빠지지 않은 채로도 시종일관 희망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동지들이 망명지에서 탄압받고 소련 첩자들에게 살해당하고 자신도 살해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항로는 희망행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소렐)이라기보다는, 어떤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서도 담대하게 상대하겠다는 영웅적인 자세와 더 가까워보인다. 그가 모든 운명을 상대했던 방식들을 생각해자면 그렇다.

트로츠키주의자를 제외한 좌익반대파는 사실상 소멸했다는 점에서(게다가 트로츠키주의자도 사분오열되고 의미있는 혁명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반스탈린투쟁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체제,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훨씬 오래 국제 공산주의운동을 지배했다는 점에서, 소련 사회주의는 결코 갱신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민들에 의한 민주주의에 의해서 다음 혁명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체제경쟁에서 패배하고 붕괴했다는 점에서 그는 그의 시대에는 물론 훨씬 더 먼 미래에도 실패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의 전개방향과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더라도, 20세기 초중반의 세계에서 한명의 공산주의자였다면 얼마나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를 묻게 된다. 그것은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일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내가 더 용감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강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1.

좌익반대파들이 줄줄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당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당을 통해서 대중을 만나야한다는 강박, 당의 일괴암성에 대한 (신뢰하기 힘든) 신화가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당’이라고 생각한 것을 배신할 수 없었지만 그 ‘당’은 이미 스탈린의 권력도구가 된지 오래였던 것이다.

그러나 추방된 좌익반대파들은 당에 대한 사고를 쇄신한 것은 아닌데,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제4인터내셔널이라는 또 다른 국제당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 대응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문제삼았어야하는 것은 당형태 자체였을 것이다. 그들의 올바른 비판 중에는 이미 소련사회에서 대중운동은 존재하지 않으며 당이 국가와 융합하고 관료들의 지배가 완성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료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 체카(KGB의 전신)의 테러가 공공연히 사용된다는 점을 비판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들은 ‘당을 관통하는 투쟁’을 당 자체에 한정시킨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특히 중국의 문혁과 대비해서 그렇다. 문혁에서는 당내의 모순이 계급투쟁의 반영일 뿐 아니라, 계급투쟁 자체가 당을 관통한다는 점이 그러났다. 소련공산당 내의 투쟁에서 생존이 절박한 상황에서조차 좌익반대파들은 대중을 조직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은 당형태에 대한 맹목이 얼마나 견고한 것이었는지 보여준다.(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좌파들에게 그렇지만.)

(한편, 스탈린과의 당내 투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의 혁명주의 세력들은 국내에서는 숙청되고 유배되고 살해되어 청산되거나 외국에서는 개별적으로 고립되거나 코민테른 소속의 공산당들에게 탄압받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트로츠키주의 정도가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혁명에서 얻을 수 있는 역사의 긍정적인 측면은 인적으로는 거의 완전히 청산되거나 트로츠키주의 안에서 부분적으로만 계승될 수 있었을 뿐이다.)

2.

해외에 망명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을 위협한 것은 소련 스파이조직(체카 이후 게페우, 엔카베데, KGB로 바뀐다)의 항상적인 위협이었다. 이들은 혁명가들을 살해하는 것은 물론, 각국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조직에서 이들을 비방하는 임무를 맡거나 직접 망명 공산주의자들의 사회에 침투해서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책에는 이 과정에서 오히려 ‘변심’하고 양심고백을 하는 엔카베데 요원의 이야기도 있다.

이들은 단지 망명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에서는 (스탈린주의적인 통일사회당과 경쟁하는) 통일노동자당에 대해서도 테러를 자행했던 것이다. 이쯤되면 소련의 국제사업이 코민테른을 통해서 국제주의적인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스탈린주의 위성정권을 세우는 것에 초점이 가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데, 이런 점은 후에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과정, 이후 프라하의 봄 진압과 같은 사건에서 더 비극적으로 드러난다. 도대체 그나마 소련이 혁명세력이라고 믿을 수 있는 여지가 도대체 얼마나 남아있었던 것일까.

3.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탈린의 독재와 테러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해도) 대외 정책의 결정과정에서 소련 공산당의 결정이 처한 어려움은 생각하게 된다. 즉, 혁명 후 내전의 과정에서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해야하는가의 문제, 2차 대전 직전에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문제. 혹은 더 큰 전쟁을 촉발할 위험이 있는 상태에서 스페인내전과 같이 외국의 혁명투쟁을 직접 지원하는 문제 등.

이런 판단에서는 더 큰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치적 쟁점들을 쉽게만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문제들은 자칫하면 혁명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판단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쟁점들이기는 하다. 따라서 ‘쉬운’ 판단은 ‘안전빵’으로, 보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쟁점들에 직면해서 소련 공산당이 내린 결정은 “항상” 국제적인 혁명이 아니라 자국의 이해와 안전이라는 기준에서 판단되었다는 데 있다. (물론 “항상” 국제적인 혁명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유지한 채로.) 오히려 그들은 이 과정에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책임감과 이 때문에 생기는 갈등을 정작 별로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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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코리아연방공화국&quot;광고덧글에 한마디

아래 포스트에 "추파"라는 아이디로 덧글이 달렸다. ("추파"는 秋波 인가? 그럼 혹시 역정치선전?)

추파  2007/10/31  
http://www.vop.co.kr/new/news_view.html?serial=89958
이명박 후보는 국민성공시대, 정동영 후보는 가족행복시대를 말합니다. 권영길 후보는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이라면서 코리아연방공화국을 내세웠군요.
권영길 민주노동당이 제시한 '코리아연방공화국'은 어떤 나라일까요? 모든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꾸욱~

대선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가 여러 블로그에 달린 이 광고성 덧글, 게다가 덧글로 연결되어 있는 아래 글을 보고,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선거 얼마 남겨두지 않고, 격려는 커녕 이런 글 쓰게 되서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민주노동당 당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용대,'코리아연방'은 어떤 나라인가? <월간말>"민주노동당만의 고유한 국가대안"

나는 민주노동당 당원은 아니지만, 민주노동당이 괜찮은 운동단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매번 이런저런 선거 때마다 그래도 한표가 아까워서 투표소에 가지 않은 적은 없다.

하지만, 죄송하게도 50일도 남지 않은 이번 대선에는 아예 투표를 안할 생각이다. 그나마 투표소에 가서 찍는 수고를 하게하는 후보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이것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민주노동당 안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중에는 '내용(컨텐츠)가 없다'는 것도 있다. 꼭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민주노동당이 무엇을 말하고자하는지 그나마 관심있는 나 같은 이도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같다. (그나마 있는 '컨텐츠'도 답답할 따름이다. 권영길 후보의 홈페이지에 걸린 정책들, 특히 "대안경제와 민생"은 민주노동당 내부 경선 때 것이 그대로 걸려있다. 내용은 한마디로 '안습'이다.)

그런 점에서 위에 링크된 이용대 씨의 글은 참 역설적이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은 다른 사회에 대한 대안이 있으며 그것은 "코리아연방공화국"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코리아=고려'가 맞겠지) 역시 내용의 빈곤 혹은 부재를 보여주는 그 글에 긍정적인 점을 굳이 찾으라면, 운동진영이 (굳이 선거가 아니라도) 우리 사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상기시켜 준다는 점이다. 대안사회 이념의 필요성은 올해 여름에 사회운동포럼과 그 평가에서도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안사회의 상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이용대 씨처럼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름만 붙어있는 "코리아연방공화국"이 대안이라는 동어반복 식의 주장을 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게다가 위에 링크된 글에서 조차 이것이 국가대안인지 통일정책인지 글쓴이 스스로 혼란에 빠져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대안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운동의 이념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대안이념이었던, 그리고 많은 부분이 여전히 유효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겠지. 그리고 대안사회의 상이 제시되어야할 텐데, 그것은 어떤 고정된 모델이라기 보다는 운동을 진전시키기위해서, 대중의 상상력을 열기 위해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이러한 대안으로 가기 위한 경로가 제시되어야 비로소 대중들이 그것을 공론구가 아니라 현실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용대 씨에게도 그것들이 아예 없지는 않을 지 모른다. 사정상 밝히지 못했더라도 아마 운동이념은 민족주의화된 스탈린주의로서 김일성주의일 것같고, 대안사회의 상은 발전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통일로 완성된) 민족국가일 듯하고, 그것을 위한 경로는 대규모 군중집회와 선거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이용대 씨의 사정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닌데, 도대체 고집불통의 김일성주의자를 제외하고 민족주의+스탈린주의로 누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물론 민족주의로 설득되는 우파들이 있고, 스탈린주의로 설득되는 좌파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로 인해서 좌편향과 우편향 사이에서 분열증이 나타난다.) 게다가 대안사회의 상도 문제지만, 경로가 거의 부재하다.

예를 들어서 '진보적 이슈''를 선점하고 있는 문국현은 자신의 성장전략을 실현하기 위한 세부경로를 제시한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마치 실현가능해보인다. 문국현의 인기는 그가 진보진영이 주장해왔던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같은 쟁점에 대해서 마치 현재의 체제 안에서도 해결 가능한 방법이 있는 것처럼 제시한다는 데서도 나온다. (사실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 다른 정책과도 모순된다는 점은 다음 문제이다. 여기 선거판에서는 대중에게 어떻게 제시하느냐가 문제가 될 뿐이니 제2의 노무현으로서 문국현과 같은 포퓰리즘 정치인이 인기를 끌기 적당하다.)

하지만 권영길 후보에게서는 어떤 정책수단 혹은 대안정치로서 대중운동을 통해 그것을 만들겠다는 내용이 없다. 잘 다듬어서 제시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설마 100만 총궐기가 그 수단이라고 생각하나??)

권영길 후보의 선거정책으로 제시된 공약들은 주로 운동정치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선거정치를 통한 집권으로 가능한 것들이다. (북방대륙경제권 개척sic.이나 노동중심 혁신클러스터sic.같은 것들을 보라.) 그렇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정책수단이 제시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한 경로로 제시되는 것은 제도적 경로의 측면에서는 아예 없거나 혹은 100만 총궐기라는 사이비 운동정치의 방식이 된다. 그러니 내용의 부재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지만 선거정치라도 하려면 제대로 하시라는 것이다.)

다른 선거에서는 가족이나 운동하지 않는 친구에게 '그래도 민주노동당'이라는 이야기라도 했었는데, 이번에는 그것도 민망하다.

정치광고 덧글 붙이는 분에게도, 그런 내용으로 붙이면 오히려 표떨어지기 쉽상이니 다른 내용을 만들던가 아예 그만두시라고 충고하고 싶다. 그나마 내 경우에는 10%정도는 있던 투표소갈 의향이 이제 거의 없어져버렸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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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트를 쓰다가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한번 들어가보니 Firefox에서는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다. 민주노동당 정도면 MS 독점에 비판적일 것도 같은데, 정작 '생각뿐'인가 보다. 요즘에는 Firefox로 제대로 안보이는 사이트에는 아예 들어가지 않는데 민주노동당 홈페이지도 여기에 추가되고 말았다.(위에 덧글이 링크한 '민중의 소리'도 마찬가지다.) 한가지 더 씁쓸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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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간들'과 만나기


▶◀ 고 정해진 조합원의 명복을 빕니다.


지난주 며칠은 이런저런 일로 서울이 아닌 곳들에 있었다. 몇몇 동지들과 지리산 자락, 전라도 장수에도 한동안 있었다. 공공연맹에서 활동을 같이 하다가 지금은 다른 길을 찾는 동지들이다.

복수의 시간대들

지난 여행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시간은 동시대에도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흐르고, 심지어 한 사람 안에도 복수의 시간대들이 존재할 수 있다.

장수에서 내가 간 곳은 그런 곳이다.(물론 농촌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선배가 사는 집과 귀농한 이남곡 선생이 사는 산자락과 계곡이다. 오늘 하려고 했던 일을 내일 할 수도 있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한 자리에서 천천히 오래 이야기할 수 있다. 단풍지는 산을 그냥 앉아서 바라볼 수 있다. 서울에서라면 평생 볼 일이 없을, 도민체육대회에 가서 흘러간 가수들의 노래를 듣거나 아무 긴장감없는 자전거 경기를 구경할 수도 있다.

그곳은 '지금' 존재하고 서울에서는 버스로 네시간여 걸릴 뿐이지만, 다른 시간이 흐른다. 그 시간은 천천히, 그리고 나즈막하게 작은 바람처럼 나간다.(솔직히 앞으로 가는지, 어느 방향인지도 전혀 불확실하다.)

그래서 그곳에 흐르는 시간은, 그곳을 찾은 이방인에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시간이 흐르는 공간을 심어넣는다. 그것은 정신없이, 혹은 뒤죽박죽인 마음 속의 시계가 진정할 수 있도록 틈을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간대에 넣어야할 것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화석처럼 굳지 않고 오래, 푸르게 살아있어야하지만 천천히 존재해야하는 것들을 위해서.



돌아본다는 것

신뢰하기 힘든 기억들로 얼기설기 구성된 '나'라는 주체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어쩌면 전혀 쓸모없는 일일 수도 있고, 혹은 하나의 주체로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일일 수도 있다.

지난 여행을 하면서 돌아본 '나'는 그 전에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익숙한 것들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더 놀라운 것들이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나를 더 잘 이해하고 예상할 수 있게 되고, 나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이런 것을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장수에서 만난 선배, 동지들과 또 처음 뵌 이남곡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런 점에서 나의 경험이 어떤 보편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다. (이남곡 선생은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이후 사회운동을 하시다가 귀농한 분이다. 선배, 동지들과 만난 자리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정치적인 입장의 차이, 세대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또 처음 만난 분과 마음을 열고 대화한다는 것은 보통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때, 생명력을 갖고 다른 것을 창조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 특히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내외부의 투쟁 속에서 그런 공간을 갖지 못해왔다는 점. 그래서 그것은 누구에게는 개인의 고통과 좌절이 되기도 하고, 조직이 변질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어떤 개인들은 이 속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타락하기도 한다.

이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성찰이 각각의 개인들만에게만 아니라 집단적으로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상호적이어야한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속한 집단에서 나의 역할, 그리고 성찰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들도 중요하게 된다. 성찰도 시종일관 면벽수행와 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보다 '사회적인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들을 갖는 것에 대해서 더 흥미와 욕심이 생기게 되었다.



낯설게 보기

장수, 지리산 자락 단풍과 가을걷이가 아직 모두 끝나지 않은 들판은 너무나 아름답다. 먼 외국에도 자신들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한반도의 산과 들에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직 벼를 베지 않은 들판의 진한 노란색은, 추수전 남프랑스 아를을 담은 고흐의 진노랑과는 또 다른 빛을 낸다.(아마 아를의 하얗게 부숴지는 햇빛과 푸르고 투명한 한반도의 가을 햇빛의 차이 때문일 것같다.) 멀리 안개에 묻힌 산의 모습은, 한반도에서 왜 유화가 아니라 수묵화가 발달했는지 이해하게 한다. 그 모습은 유화의 붓터치보다는 먹물이 스미는 한지에 더 솔직하게 담길 것같다.

지난 여행에서 배운 것은, 존재하는 것들을 낯설게 보는 습관이다. 무심코 보아왔던 것들 속에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은 경이롭다. 여행과 아름다운 것들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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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수난기

사실은 여행 다녀와서가 더 수난 중이지만(─_─;) 여행 중 고생이 만만치 않았다. 고생하면서 배우는 것이기도 하고, 이제 다 지난 마당에 고생이야기는 재밌는 이야기거리일 수는 있지만, 정작 그 순간에는 땡볕 앞에서도 앞이 캄캄해진다. 내가 이 고생을 하러왔다니 미쳤지, 미쳤어.

여행 중에는 그런 일까지 주절대기에는 일기 정리할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에 별로 남기지 않았지만, 이제 끝난 마당이니, 일종의 무용담;;을 겸한 수난기. 주로 충실히 사전 준비를 해간 여행 초반보다는, 여행하면서 준비하고 다닌 중반 이후에 일들이 많다. 길 한두시간 헤멘 사소한 일들이야 더 많지만, 좀 큰 건들로 7대 위기. 역시 주로 헤멘 일들이다.
(사진은 좀 뜬금 없는 것들도 있는데, 정신없을 때는 사진찍을 생각도 나지 않는다.)

비엔나, 막차는 끊어지고 야밤에 길을 잃다

여행 중반의 비엔나. 이제는 여행도 좀 했겠다, 나름 길찾기는 자신만만. 게다가 6일 동안이나 베를린에 머물렀던 경험도 있으니 길찾는 데 필요한 독일어 단어 몇개는 알고 있다.

프라하에서 저녁열차를 타고 비엔나 중앙역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10시반. 예약한 민박집을 찾아가기 위해서 메모한 설명을 보고 트램(전차)를 탄다. 흠, 잘 가는군. 근데 좀 오래 가네.

그런데, 어머나, 이게 왜 갑자기 서지? 깜깜하고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길가에 트램은 서있고, 기사도 없다.(야간에 자동운전;;) 이런 종점이란 얘긴데.. 아차, 그럼 트램 번호가..? 설명서에 D번라고 나와있는데 0번을 탄 것이다. 으악.  자, 아직 시간이 있으니 주위에 다른 트램 정거장을 찾자.

몇분간 헤메다 다른 트램 정거장을 찾고, 일단 중앙역으로 되돌아가야지. 아, 금방오는구나.
에구구, 그런데 이게 또 10분만에 종점도착;; 이번에는 거꾸로 탓다. 하지만 아직 막차가 끊어진 것은 아니고, 막차에 도착한 트램은 10분후에 다시 출발. 11시50분, 전철역을 찾았다. 아, 그래 전철노선도 있다고 했지. 일단 타고 보자. 달려라. 마침 들어오는 열차 안착!

에구, 출발한 열차는 바로 어떤 한적한 곳으로 가더니 선다. 모양을 보니, 군자기지 지하철노조 갈 떄마다 봤던 바로 그 지하철차량기지;; 역시 막차였던거다. 문도 안열리고 10여분을 더 기다린다. 사람도 없고. 아, 이대로 비엔나의 지하철 객차에서 밤을 새야하는가.

다행히 열차는 다시 움직인다. 어디가는거지?
조금 달리더니 다시 전철역. 가만 있으면 되나 싶어서 두리번두리번하고 있는데, 친절한 비엔나 시민이 말을 건다. Where do you go? 아, 나요, 저,저,I'm going to 그린칭. 이 차는 거기 안가요, 반대편이라네요. 으악. 문이 닫히는 순간 급거 탈출, 망연자실.

지하철 역을 나오니 거리에는 차도 별로 없다. 아, 이번에는 비엔나 밤거리 노숙이란 말인가. 침낭은 다행히 가져오긴 했는데.

아차, 그래 민박집 전화번호! 수첩에 적어 두었던 것이 생각나서 뒤진다. 다행이, 전화번호가 있다. 로밍받은 핸드폰을 이때 처음 사용.(앞으로 국제전화비가 장난 아니게 나올 거다 아마) 민박집 아저씨왈, 친절하게도 차로 데리러와준다네. 30분쯤 기다리니 차가 온다. 도착하니 새벽 1시, 그래도 총 2시간반만에 구원받았으니 이번에는 여행 수난에서는 워밍업.
(위에는 수난기와 상관없는 다리가 길어보여서 맘에 드는 비엔나 노을에 비친 그림자 사진)

스위스, 진눈깨비 밤길에 숙소찾기

스위스에 숙소는 전망 좋다는 그린덴발트에 유스호스텔로 잡았다 시설도 좋다는 리뷰가 있다. 한국사람들은 가봤다는 리뷰가 없어서 좀 그렇지만, 흠 역시 좋은 숙소를 잘 못찾아가는 한국사람들 같으니라구.

사실, 스위스오는 길도 평탄치는 않았다. 비엔나에서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서 숙소를 나서고는 트램 정거장을 지나버린 것이다.(젠장, 정거장에 제대로 서기도 않고 신호대기하다가 지나가 버린거다) 두정거장이나 지나서 알아채고 내려서는 총17kg짜리 짐을 지고 전철역을 향해서 뛰기 시작한다. 중간에 (이번에도) 친절한 비엔나 신사분을 만나서 전철역을 묻고 겨우 찾았다.

내려서 달리는데 이번엔 마침 생전없던 표검사를 전철역 출구에서 경찰들이 하고 있다. I'm very late to my train, very busy!!!!!! 소용없다. 무조건 Ticket!! 가방을 뒤져서 예전에 쓰던 표 주고 무조건 달려서 겨우 잡아탔다. (바빠서 전철표 못사고 무임승차 했거덩;;) 경찰이 쫒아오지 않은게 천만다행.

여튼, 이렇게 도착한 스위스. 알프스 산에 올라가는 거점인 인터라켄 역으로 가는 동안에도, 유람선을 (무료로) 타기 위해 내렸다가 시간이 안되서 1시간을 헛탕치는 등 우여곡절을 겪고 도착. 그린덴발트로 갈아타고 등산열차를 오른다.

자, 그린데발트역, 여행책자에는 "역에서 조금 걷는다"라고 되어 있다. 뭐, 조금 걷나부지.
지도를 봐도 주소를 찾을 수가 없어 역무원에게 물어본다. 그러자 약도가 있는 쪽지 하나를 주는데, 흠, 멀지 않군. There is the busstop. 뭐 가까운거 같은데 뭐하러 버스비 낭비하겠어요. 자 베낭을 메고 터덜터덜. 그런데, 이런 쭉 오르막길. 약도에 나온 길은 가도가도 나오지 않는다. 아, 이건 길을 잘 못든건가, 되돌아갈까 생각하는 찰라, 표시된 가게가 나온다. 아, 이 옆으로 돌면 금방이구나. 크크

하지만, 가게를 지나고 지나고 지나고 지나고 (헉헉;;) 지나도 길은 나오지 않는다.
결국 20분을 한참 오르막을 올라서 교차로를 찾고 더 가파른 길을 10분을 더 걸어서 도착. 그런데, reception은 오후3시 이후에나 연답니다. 현재시간 10시 반;;;. 이대로 알프스의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결심하고 길을 거슬러 하이킹 코스로 돌입.(또 산을 올랐단 이야기죠.) 패스가 있으니 내려와서 슈퍼에서 저녁식사와 내일 도시락, 낼 저녁식사, 낼 모레 도시락, 저녁식사 등 식료품+와인+맥주을 잔뜩 산다.(스위스가 물가는 비싸지만 슈퍼는 용서할만 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지만, 야밤에 진눈깨비 내리면 악몽이 된다.)

그런데 올라가는 길은, 에구, 이제는 날이 산이라 벌써 어두워지고 흐린가 싶더니, 부슬비가 진눈깨비로 변한다. 잔뜩 무거운 짐을 양손에 지고, 깜깜해진 산길을 오른다. 아, 먹는거고 뭐고 다 버리고 싶은 알프스 그린덴발트의 오르막길.

아비뇽, 남프랑스 태양에 쓰러질뻔하다.

스위스를 나와서 다음 일정은 남프랑스. 일요일 새벽표를 예약하려고 했는데 벌써 매진이다. 할 수없이 낮에 도착하는 표를 산다. 리용을 거쳐서 아비뇽으로, 최종 구경 목적지는 아를. 숙소는 아비뇽에 알아봤다.(두군데나)

아비뇽 도착. 역시 남프랑스의 햇빛은 강렬하고 아름답군. 흠흠.
일단 알아본 숙소로 가자. 거의 30분을 그 베낭을 메고 간 곳에는 숙소가 없다. 아, 지도를 잘 못봤군, 건너편 블럭. 한시간만에 찾아간 호스텔. 역시 5시부터 접수한답니다. 현재시간 오후 2시;; 안돼, 시간낭비는 안돼. 두번째 숙소를 찾아 걷는다. 역시 30분을 헤메는데, 문득 약도와 지도를 자세히 비교해보니, 여긴 그냥 강건너가 아니라 강건너고 섬을 건너서도 한참인 곳이다.;;; 두시간을 헤메고 포기.

결국 기차로 20분 걸리는 아를에 가서 숙소를 잡기로 한다. 아를 도착, 이번에도 숙소를 찾아 간다. 여행책자에는 "조금 걷는다"라고 되어 있다. 헤메고 헤메고 30분. 여긴 도심을 지나서 철도역 반대편 교외잖아!! 결국 기진맥진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한다, 맥이 풀려서 짐을 풀고 나니 오후 6시;;


(아비뇽 근교의 황무지)

프랑스-이탈리아 국경, 야간열차의 위기

다음날 아비뇽을 거쳐서 이탈리아 피렌체로 간다. 기차역에서 아비뇽->니스 고속열차를 예약하고, 니스->피렌체 야간열차를 예약. (사실 이렇게 오는 데도 아를에서 짐보관소가 문을 닫아서 몇시간 만에 아비뇽과 아를을 두번 왕복하는 등 황당한 일은 계속되었다.)

자, 오후 4시, 기차를 타고 니스로 출발, 도중에 다리를 다친 중국인 모녀 짐도 들어주고 착한 일도 했다. 착한일 했으니 복이 오겠지, 왠걸.

야간열차를 갈아타고, 자리를 잡는다. 4명이 같이 쓰는 방인데, 모두 미국인인 것같다. 말을 걸고 (잘 모르겠지만 농담도 하고) 친절하다. 오, 좋은 외국인 일행이군. 그런데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어떤 사람이 와서는 "여긴 내 자린데요"(영어로;;), 아니거등요, 제 표에도 이 자리거등요.

5분후 차장 등장. 표 두개를 꼼꼼히 보더니 내 표를 주면서 하는말이,
"오늘 날짜가 아니군요" 으악!!!
한심한 아비뇽 역 역무원 아줌마가 엉뚱한 날짜로 표를 준거다. 아니, 어떻게 갈아타는 열차에 두 개를 서로 다른 날짜 표로 줄 수가 있지..? 혹시나 해서 메모까지 해서 줬는데. 항의해도 소용없다. 내리든가? 뭐???? 무조건 2등석 일반석으로 가란다. 그나마 가야지 어떻게, 생판모르는 프랑스-이탈리아 국경도시에 노숙할 수는 없으니.

밤새도룍 옆자리 단체관광온 미국애들(고등학생같다) 떠드는 데서 자는 둥 마는 둥. 이 객차가 피렌체로 가기는 하는건지 알 수도 없고.(유럽 기차들은 중간에 객차를 분리해서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하기 때문에 정해진 객차가 중요할 때가 있다)
피렌체에는 이런 상태에서 새벽에 도착했던 것이다. (피렌체에서 글에 올렸지만, 이렇게 와서 처음 식사한 레스토랑에서 사기 당할 뻔 했으니 짜증 지대로.)

로마, 아, 이 고지가 아닌가벼..

로마에서는 좀 여유있게 있겠다는 심산으로 예정보다 이틀을 더 머물렀다. 중간에 감기도 걸리고 하루는 앓아누워있기도 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역시 사고.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던 팔라티노 언덕의 로마 황제의 궁전 유적, 전차 경기장터에서 바라본 모습)

마지막날, 민박집 아저씨에게 "그 동안 잘 묵었네요" 빠이빠이하고, 아, 아테네 가는데 공항 빨리가는 방법 없나요? 묻는다. 그리스는 aegean이라는 저가 항공사 비행기를 타고 간다. 그럼, 전철 어디어디로 사서 버스타면 1유로에 갈 수 있어요. 오호, 책에는 11유로짜리 기차가 안내되어 있는데, 역시 현지 사람들에게 물어가는 게 절약하는 길이여..

여유있게 전철역찾고 공항에 도착. 자, 이제 chech in해야지.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예약한 aegean 항공이 보이지 않는다. information을 찾아서 물어본다. "우린 그런거 잘 몰라요" 하면서 짜증을 낸다. (역시 이탈리아는 좀 불친절하다.) 뭐야, 이거. 옆에 있는 경찰에게 다시 물어본다. "글쎄요", 아... 설마.....그럼 여기가 로마 FCO 공항 아닌가요? "여긴 campio 공항이랍니다. 거긴 다른 곳이에요"
... 으악! 민박집 아저씨가 엉뚱한 공항을 알려준거다.

부랴부랴 버스 바꿔타고 전철타고 중앙역가서 11유로짜리 기차를 간발의 차이로 탄다. 하지만 11시 비행기는 이미 출발, check in 포인트나 항공사 사무실도 문을 닫았다. 좌절과 절망. 이대로 로마에서 하루더 묵으면 여행 마지막 장소인 그리스 일정은 완전히 망가진다.

아, 그래 그럼 다음 비행기라도 예약하자. 보통 항공사들은 비행기 놓치면 다음 비행기를 주기도 하는데, 주말이라 좌석이 있을지도 알 수 없는데다가 (변경 안되는 것으로) 악명높은 저가항공사들이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전화.(전화비 장난 아님) 인터넷으로 예약 좀 해주라. 혹시 변경가능하면 취소하면 안될까.

밤 8시 비행기를 다시 예약하고 9시간을 로마 FCO 공항에서 기다린다. 식사 사먹기도 좌절스러워서 초코바 하나로 버틴다. 오후 6시, 이제 슬슬 check in하러가자. 내려가니 항공사 사무실에 사람이 있다. 어머나 반가워요, 제가 비행기 놓쳤는데요, 변경되나요?
Yes, of course!
(아하, 그렇군,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근데 제가 혹시 몰라서 새로 예약을 했는데요, 그럼 새로 예약한거는 취소되나요?
No!
"아니 왜 그런 (그런 어감이었다)을 하셨어요?"
라는 거다. 좌절. "하지만 다른 노선을 이용하시려면 변경가능해요", 그래 그럼 그리스에서 산토리니 섬에도 노선이 있지! "그럼 바꿔주세요!" "I can't do it, 본사 서비스센터로 전화하세요, 전화번호는 그리스에 어쩌구저쩌구"

그래, 그래도 10여만원 돈이 어디냐. 그리스로 국제전화, 콜센터와 통화한다. 앞에서 보고 이야기해도 잘 안되는데, 전화로 영어로 이런 상담이라니, 원. 어떻게 어떻게 의사는 전달됐지만 변경 수수료가 배값보다 비싸다. 아, 그럼 변경신청은 했지만 포기. 결국 비싼 항공권 두장을 사용해서 아테네로 간다.

드디어 교통사고.

산토리니 섬에서는 드디어 교통사고까지 만난다. (다른 글에도 올리기는 했지만)
배에서 만난 한국인 일행들이 렌트한 승용차가 운전미숙으로 길가 표지판에 박치기, 범퍼와 내부 지지대가 나갔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600유로!! (원화로 약 80만원!) 7명 일행이 나누어 내기로 했다. 으.. 배에서 만나서 동행하는게 아니었는데.. 집단으로 가면 숙박비 싸게 해준다는 유혹에 넘어가서 20유로 아끼고 100유로 손해봤다.

답답한 것은 또 그 다음이었는데, 일행 중 몇몇은, 수리비가 너무 비싸니하면서 경찰서를 가야한다는 둥, 하면서 따지기 시작. 아마 렌탈 업체의 그리스 사람도 황당했을 텐데, 차를 부순 것은 당신들인데 왜 오히려 큰 소리냐, 싶었을 것이다. (큰 소리 지르면 이긴다는 한국사람들의 신념;;)


(사고나고 나서는 더 삭막해 보이는 산토리니)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그 정도 사고에는 꽤 금액이 나오는데다가, 설사 좀 과하다고 해도 여긴 아테네에서 배로 8시간 걸리는 섬이고, 게다가 현지인들을 이길 수도 없다. 이렇게 몇몇 사람들 쌈박질 하는거 자리 뜰 수도 없어 지켜주다가 산토리니의 유명한 노을은 오늘도 포기.

아테네에서, 진짜 목숨위태했다고 생각한 순간

마지막 여행지, 아테네에서 아찔한 순간.
아테네에는 리카비토스 언덕이라는 곳이 있다. '늑대의 언덕'이라는 뜻. 아테네 여신이 아크로폴리스를 지켜주기 위해서 가져온 돌이 언덕이 되었다는 곳.

이 곳에서 본 전망이 멋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낮에 가기는 일정이 바쁘니, 한밤에 출발, 도착하니 11시 반이 넘었다. 등산열차(여행책자에는 '케이블카'라고 하지만, 글쎄, 좀 뻥이 심한거 아냐;;) 비슷한 것을 타고 조금 오르면 언덕 정상에 도착해서 전망대에 갈 수 있다.

이 곳에서 난간에 기대서 MP3로 이상은 13집 The 3rd Place에 첫곡 Nocturne을 듣다가, 순간적으로 그냥 뛰어내릴 뻔 했다. 음악 때문인지 야경 때문인지,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는지, 그냥 날아가버리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아찔해서 난간을 잡고 음악을 다 듣기는 했지만, 충동은 여전히 두근두근. 아찔했던 순간.
아, 그때 그냥 날아가 버릴 걸 그랬나하는 생각도 좀 들긴 하지만.


(사진이 작아서 느낌이 잘 안 산다. 야경 중 아크로폴리스 부분 파르테논 신전이 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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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보통 '여행 트러블'이라고 하는데, 낯선 나라에 가서 이런 정도의 문제가 없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충분히 긴장하고 주의한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도 많다. (내 경우도 많은 경우 내가 충분히 주의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그건 여행의 긴장이 풀어졌을 때 혹은 지나치게 자신만만 했을때 벌어진 일들이다.) 여행을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혹시라도 주눅들지 마시길, (많이들 하는 이야기이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면 정말로 다 추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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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아테네의 야경에서 언급한 노래, 이상은, Nocturne :

(흠.. 지난 포스트에 이어 이번에도 이상은;;)
이상은 13집에는 첫곡에 이 노래가 Nocturne라는 노래의 영어가사로, 마지막 곡으로 우리말(제목은 야상곡)로 부른다. Nocturne은 영어가사 노래이지만, 보기 쉽게 마지막곡인 우리말 '야상곡' 가사를 함께. 가사와 함께 곡을 들으면 왜 날아가버리려고 했는지 이해가 될 듯하다.
하지만 영어가사도 좋고, 노래는 영어가사가 더 자연스럽다. 영어가사로 노래를 먼저 지은 것같기도 하다.
 
** 음악들을 수 있는 곳 : 이상은 13집 The 3rd Place 네이버 블로그
 


Friday night the world has gone and disappeared
Forget worries, we are natural born anarchist
With our soul, we can reach to the stars
And that's far far away from the world
Let's just open our heart

Don’t cry don’t try, there’s nothing to loose , sweet night...
Thousands of breezes and spells
Stop trying stop crying
Just escape
Thousands of meanings are lighting bright now

Cherry blossom, ylang ylang
Get on the night boat with dancing gowns
And we get together to expel the devils, tonight
With all your colorful scents and spells.

Save your heart from those meaningless pain and tears
Forget yesterday ,we are drifting in eternal space.
Think once more, all we need is to be brave
Our soul is so supernatural
Let’s just open our eyes

Don’t cry don’t try
There’s nothing to loose forever
Life’s thousand of meanings to cherish
It’s sweet summer night

Cherry blossom, ylang ylang
Get on the night boat with dancing gowns
And we get together to expel the devils, tonight
With all your colorful scents and spells.

La la la~

Never worry there's a way
Cinnamon, peppermint and olive
Get on the night boat with dancing gowns
And we get together to praise the life, tonight
With your beautiful and pure smile

La la la ~

금요일 밤 세상은 사라져요
행복한 아나키스트가 되세요
우리 영혼은 저 별까지 갈 수 있죠
아주 먼 머나먼 곳까지
마음을 열어요

우울해 말고, 울지 말고
믿어봐요
기도는 이루어 지니까

잃어버린건 잊어버리고
찾아봐요
마음의 열쇠를

체리 블로썸, 일랑일랑
향기로운 여름 밤 하늘
영원에 가까운 우주를 바라봐요
색색깔의 싱싱한 꿈들을

금요일 밤 아름다운 색전구와
피아노와 웃음꽃 핀 보트로 오세요

우리 영혼은 저 달까지 갈 수 있죠
아주 먼 머나먼 곳까지
마음을 열어요

우울해 말고 울지 말고 믿어봐요
기도는 이루어지니
잃어버린 건 잊어버리고

체리 블로썸, 일랑일랑
향기로운 여름 밤 하늘
영원에 가까운 우주를 바라봐요
색색깔의 기도 같은 별들

라라라~

걱정말아요 길은 있어

과일과 꽃내음에 섞여
인생을 찬미하는 노래소리
날아올라요
머나먼 저 별 사이
샤갈의 그림 속처럼

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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