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제목 대로

대통령의 사람들> 개봉 30주년 맞아 재조명

15년전에 본 영화

 

워터게이트는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할리우드통신] <대통령의 사람들> 개봉 30주년 맞아 재조명
  2006-02-17 오후 2:56:42
  워터게이트 도청 스캔들(1972~74)을 파헤치는 워싱턴포스트지 기자들의 활약을 그린 알란 J. 파큘라 감독의 영화 <대통령 사람들>(1976년)이 개봉 30주년을 맞아 미국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이 영화의 개봉 30주년을 기념하는 DVD 특별판이 최근 출시돼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원작 저서도 인기가 다시 올라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DVD에는 밥 우드워드 역을 맡았던 로버트 레드포드의 해설을 비롯해, 닉슨 행정부의 내부 고발자였으며 '딥 스로트'의 실제인물로 밝혀진 마크 펠트 전 FBI 부국장에 대한 관련 자료 등이 수록돼 있다.
  
  AP통신은 <대통령 사람들>의 의미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데에는 단순히 30년이 됐다는 것뿐만 아니라, 닉슨 시대와 현재 부시 시대가 너무나도 흡사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와 관련된 정보조작, 아부 그라이브 이라크 수용소와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자행된 인권침해 은폐,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운 비밀도청 등 지금 현재 미국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행위와 과거 닉슨 행정부의 도청 및 부정이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AP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 사람들>을 자신의 영화배우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작품으로 회상하면서, "타자기와 전화기, 그리고 연필만을 무기 삼아 부정과의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을 그린 진정한 스릴러"로 평가했다. 또 "이 정부(부시행정부)에서는 '워터게이트'가 거의 매일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며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역사 교과서 속에 기록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란 점을 강조했다.
  
  그는 영화제작에 얽힌 뒷이야기도 털어놓았다. 레드포드는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영화제작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을 땐 아직 책이 완성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고 회상하면서 두 사람에게 "언론인의 시점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뤄보자"고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밝혔다.
  
  레드포드는 이 영화에 주연뿐만 아니라 공동제작자로 참여했다. 그는 "당시만해도 닉슨의 하야(1974년 8월 8일) 이후였던 만큼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이미 마무리된 워터게이트 사건을 영화로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다"며 "하지만 이것은 닉슨에 대한 것이 아니라 탐사보도와 진실을 위해 모든 것을 건 기자들에 관한 영화라고 설득해 겨우 제작 승인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영/프레시안무비 기자
 
  이 기사 마음에 든다! 프레시안 마음에 든다!
  ARS 후원금 1,000원 휴대폰 후원금 1,000원 (부가세 포함)
  “작지만, 좋은 신문 하나 내 손으로 키우고 싶다”  
  월:(3개월-1만원),연 AB(1년-3만/5년-10만원), 평생회원(평생-30만원 이상)
  (0) (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거부하는 팔레스타인

뮈닉을 보고나서 압박

 

 

거꾸로 읽는 세계사 中 --- 유시민


거부하는 팔레스타인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


 

1972년 8월 26일, 제 20회 올림픽이 서독의 뮌헨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세계 인류의 대제전, 평화와 상호 친선의 큰 잔치는 처음 열흘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9월 5일, TV중계를 지켜 보던 세계 각국 국민들을 경악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사건이 터졌다.
검은 복면으로 몸을 감싼 무장 게릴라가 올림픽 선수촌을 습격하여 이스라엘 선수 둘을 사살하고 아홉 명을 인질삼아 경찰과 대치한 것이다.
그들은 '검은 9월단'이라는 가장 과격한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의 전사들이었다.
평화의 제전은 순식간에 팔레스타인 아랍민족과 이스라엘 시온주의자 사이의 격렬한 증오와 투쟁의 무대로 돌변하였다.
게릴라들은 결국 모두 사살되고 말았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를 더없이 충격적인 방법으로 인류 앞에 제기하는 데 성공했다.
9월 8일 이스라엘 공군은 시리아와 레바논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

이 사건은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팔레스타인 무장 게릴라와 이스라엘 정부가 수없이 교환한 테러와 보복공격을 가장 명료하게 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잊을 만하면 또다시 신문 외신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곤 했던 크고 작은 폭탄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은 본질적으로 이 사건과 맥락을 같이 한 것이며, 이스라엘과 인접 아랍국가 사이의 끊임없는 무력충돌 역시 같은 이유로 일어난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그야말로 중동의 화약고이며, 그 화약고가 폭발할 때마다 기름으로 가득한 중동 일대에는 으레 화염이 치솟았다.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등 아랍국가들의 정치체계의 차이점과 각국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특수성 때문에 중동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명확히 이해하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는 팔레스타인문제를 중심으로 복잡한 중동문제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시온주의와 유태민족주의

이스라엘 건국을 가져온 시온주의(Zionism)가 싹튼 것은 공교롭게도 프랑스를 대혼란으로 몰아넣은 드레퓌스사건의 폭풍우 속에서였다.
1896년 드레퓌스를 비난하는 프랑스 군중의 반유태주의 폭동에 놀라 "유태국가"라는 책을 집필한 유태인 언론인이 있었다.
유럽 문화에 철저히 동화되어 있던 비엔나의 언론인 헤르즐(Teo Herzl)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유태 민족주의자로 전향했음을 고백하면서, 유럽의 유태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자기들끼리 따로 떨어져 나와 독립한 순수 유태국가를 세울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전에도 이같은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헤르즐의 책은 시온주의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유태인들은 어디에다 유태국가를 세울 것인지를 검토한 끝에 유태인들이 2천년 가까이 떠나 살았던 팔레스타인을 선택했다.
시온(Zion)은 유태교 성지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이름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 천국, 이상향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오니즘이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의미한다.
신앙심 깊은 유태인들의 메시아를 향한 열정, 성서가 일깨우는 정감들, 게다가 유태교를 등진 유태인들에게까지 영향력을 갖는 민족적 전통들에 비추어 팔레스타인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약속의 땅이었다.
1977년 11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수상 베긴이 한 연설은 이같은 유태인의 열망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외국 사람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조국에 돌아왔을 뿐입니다.
    우리 민족과 이 땅(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연계는 영원한 것입니다.
    ...... 바로 이곳에서 우리듸 예언자들이 성스러운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들려 오며, 이 성벽(예루살렘의 성벽) 속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옛날 유태 나라의 임금님들과 이스라엘 임금님들이 이곳을 통치하셨습니다.
    ...... 이땅에서 폭력에 의해 쫓겨나 있던 동안에도 우리는 하루도 이 땅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 시온으로 돌아온 것, 이 권리와 특권은 발포어선언에 의해 우리들에게 승인된 것입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인종차별의 철폐를 포함하는 사회주의혁명에 뛰어든 동유럽과 러시아의 유태인들과는 달리 팔레스타인 땅을 사 이민을 갔다.
그러나 이들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아랍계 주민들의 권리를 무시했다.
이는 당시 유럽을 풍미한 철학 사조에 물든 탓이었다.
유럽인은 유럽 밖의 영토를 자기네 마음대로 점령하고 지배할 수 있는 '주인없는 땅'처럼 여기고 있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
유태인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온주의가 고개를 든 바로 그때,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의 아랍민족 역시 같은 성격의 이념, 즉 아랍 민족주의에 눈뜨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는 민족자결의 미래를 그리면서 이민족 지배자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했다.
이같은 사실은 비록 시온주의자들이 인식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이미 두 민족 사이에 던져진 크나큰 불행의 씨앗임에 분명했다.

1880년대에는 두 민족이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총인구 50만 중 유태인은 2만5천이었으며 민족적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에서 유태인 박해가 시작되면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일에 열을 올려, 1914년에는 총인구 74만 가운데 유태인이 8만5천명으로 늘어났다.
아랍인들은 경계심을 품고서 터키 의회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터키의 부패한 관료들은 단지 형식적인 이주 제한조치만을 취하면서 제몫을 챙겼을 뿐이다.
이같은 시점에서 터키가 독일의 편을 들어 제1차 세계대전에 가담하자 팔레스타인 땅에는 회오리가 일어났다.

영국은 1915년 10월, 아랍인이 전쟁에 협력할 경우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을 아랍인들에게 넘겨주겠다는 소위 '맥마흔 서한'을 발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터키의 억압에 분노를 느끼고 있던 '메카의 수호자' 휴세인은 1916년 6월 5일을 기하여 스스로 아랍민족의 왕임을 자처했다.
그의 아들 파이잘과 영국인 T.E.로렌스가 이끈 베두인(사막 유목민) 부대는 신화적인 전투 끝에 터키군을 궤멸시키고 다마스커스에 입성했다.
그런데 영국 외상 발포어는 1917년 미국 유태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전쟁에 끌어내려고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지지하는 '발포어선언'을 발표했다.
이로써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 사이에 던져진 불씨는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열강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한번 아랍민족을 배신했다.
통일 아랍국가를 세우려는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열망과는 달리, 시리아와 레바논을 분리하여 이 두 나라를 프랑스가 신탁통치하고,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영국이 신턱통치하기로 마음대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연합국은 터키가 지배했던 아랍지역을 무려 20여 개의 식민지로 분할점령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시리아왕 파이잘을 공격하여 다마스커스를 점령했다.
영국은 발포어선언을 이행하려 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반(反)시온주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군의 비호를 받으며 이민을 계속한 유태인들은 1930년대 히틀러의 박해가 시작되자 홍수처럼 밀려들어 1936년에는 총인구 150만 가운데 28%인 43만에 이르렀다.
더욱이 우수한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온 유태인들은 효율성이 높은 농업 정착촌과 협동조합, 각종 산업시설과 금융기관, 노동조합과 정당, 행정조직들을 활발하게 건설함으로써 실질적인 국가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과격 시온주의자들은 비밀리에 군대조직까지 만들었다.
그러자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와 더불어 영국 정부에 대해서까지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도처에서 무장 게릴라가 출현하여 테러를 가했고, 영국을 규탄하는 파업과 시위가 잇달았다.
영국은 이같은 분쟁에 골머리를 썩이던 끝에 유태인의 수를 제한하고 팔레스타인을 유태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유태인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유태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메시아 사상을 내세운 것이다.

건국인가 침략인가

1945년 3월, 이집트, 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예멘 등 아랍국가의 대표들이 카이로에 모여 아랍연맹을 결성하고 아랍민족의 상호협력과 결속을 다짐했지만 분쟁에 휘말린 팔레스타인 대표는 참석할 수 없었다.
유태 비밀군대는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입국을 제한한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다.
테러와 습격, 맹목적인 보복이 난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넌더리가 난 영국은 이 문제를 국제연합에 떠넘겼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둘로 분리 독립시칸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니 국제연합은 그 결정을 집행할 힘이 없었고 영국은 무책임하게도 1948년 5월 15일을 기해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두 민족 사이의 유혈투쟁은 불가피해졌다.
영국 군대가 철수하기 전에 한 뼘이라도 넓은 지역을 확보하려는 양측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아랍 게릴라의 기습과 극우 시온주의 민병대의 잔혹한 보복이 반복된 몇 달간 이미 팔레스타인은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유태인 특공대가 아랍인 마을에서 254명의 남녀노소를 무차별 학살한 48년 5월 9일 사태는 전 아랍민족의 가슴에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1948년 5월 15일, 영국군은 마침내 골치 아픈 땅 팔레스타인을 버리고 철수했다.
그리고 같은 날 시온주의 지도자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다.
이는 아랍민족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이집트, 요르단 등 아랍국가들의 연합군인 아랍 해방군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제1차 중동전쟁이 터진 것이다.
유태 군대는 훈련이 잘 되고 사기가 높은 데다가 시온주의에 헌신적이었으며 무기 구입과 지원병 모집, 수송과 군사 전술 등 모든 면에서 효율적이고 조직적이었다.
반면 아랍 해방군은 전투경험이 부족한 데다 장교들이 나태하고 부패한 탓으로 사기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아 합동작전을 펼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우세한 입장에서 휴전협정을 맺어 팔레스타인 유태국가의 수립을 기정 사실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일단 만족했다.
그러나 아랍민족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외래 식민주의자들이 자기네의 영토위에 수많은 동포를 쫓아내고 세운 국가라고 생각했다.
요르단에 46만, 이집토에 20만, 레바논에 12만, 시리아에 8만 등 거의 100만에 가까운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침략자 이스라엘을 저주했다.
하루아침에 집과 농토와 생업을 잃어버렸고, 사랑하는 가족의 생사조차 알 길 없이 피난민 신세로 전락해 버린 자신들의 처지를 도저히 '기정사실'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배후에 미국의 검은 손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은 벤 구리온과 그가 속한 마파이당의 행정부와 의회를 수립하고 모든 유태인의 이주를 허용하는 '귀환법'을 제정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귀환 대열이 밀려들었다.
그 결과 전쟁 직전에 65만 유태인과 74만 아랍인이 거주하던 이스라엘 영토에는 1956년에 이르러 167만 유태인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버틴 아랍인은 겨우 2만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은 극히 간략하게 살펴본 이스라엘 건국사, 또는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침략사이다.
이것이 건국사인가 아니면 침략사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그리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석유파동이 일어난 74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을 편드는 주장만이 판을 쳤고 아랍의 처지를 옹호하는 의견은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이같은 사태는 한국이 '서방세계'의 일원으로서 특히 외교면에서 미국의 입김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 여론은 결코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물론 유태민족이 2천년 동안이나 극심한 인종차별을 당한 민족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특히 나치 독일이 저지른 대량학살은 그것을 방조하거나 적어도 방관한 유럽의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상당한 죄의식을 안겨 줄 정도였다.
유태인이 그같은 박해를 받아야 할 그 어떤 잘못도 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인종적 종교적 박해는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며, 유태민족이 보든 박해를 저항하여 평등한 민족적 권리를 찾거나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세웠다.
과연 유태민족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가.
그들 조상의 일부가 2천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땅이기 때문에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말세가 되면 황금시대가 팔레스타인에서 열리게 될 것이라는 유태쿄의 종말론적 예언이 그 땅의 소유권에 대한 유태인의 주관적 확신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더욱이 팔레스타인 땅에 자손을 퍼뜨리고 땅을 경작하면서 나름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가진 민족공동체를 가꾸어 온 것은 아랍인이었다.
그들에게는 자기네 종교의 메시아적 상상과 예언을 앞세워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유태인들은 어디까지나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시온주의자들은 자기의 불행한 처지와 고난에 대한 호소와 설득으로 협력을 구하지 않고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을 무력으로 몰아냄으로써 이스라엘을 세웠다.
그 숱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종교와 문화전통을 지켜 온 눈물겨운 과거와 그들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발전, 내게브 사막을 옥토로 가꾼 눈부신 업적과 나름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이 아무리 몽매하고 그들의 정치체제가 아무리 낙후한 것일지라도, 식민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아랍민중이 나름의 민족 주체성에 눈떠 그것을 수호하려는 열망을 가진 20세기 중반에 유태인이 휘두른 무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시온주의는 유태민족주의와 같지 않다.
시온주의는 다른 민족을 물리적인 힘으로 내쫓고 그 땅에 순수한 유태국가를 수립하려는 침략적 민족주의이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를 세움으로써 수천 년에 걸쳐 당해 온 박해와 불행을 종식시키겠다고 결심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그 불행을 고스란히 떠넘기는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했다.
만일 이러한 행위가 정당하다면 나치의 유태인 박해 역시 전적으로 나쁜 짓이라고 단죄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민국가 이스라엘이 밀물처럼 밀려든 이민자들을 먹여살기고 삼면을 포위한 아랍국가들을 꺾어 자기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거의 전적으로 미국 유태인들이 보내준 성금과 미국 정부의 차관, 그리고 나중에는 독일의 배상금에 힘입은 것이다.
물론 미국이 시온주의를 의도적으로 조장한 것은 아니지만, 개입과 간섭을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삼고 있던 미국은 이스라엘을 아랍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교두보로 이용했다. 때문에 아랍인들의 반(反)시온주의 항쟁은 반미투쟁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가게 된다.

팔레스타인문제는 중동 일대 아랍국가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통일 아랍국가에 대한 강한 열망을 지니고 있던 아랍민중은 이스라엘을 심장 깊숙히 들어와 박힌 제국주의 첨병으로 간주하였으므로 어느 나라의 지도자이든 이스라엘과 타협할 경우 민중의 저항에 부딪힐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아랍국가들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유태국가의 토대를 더욱 튼튼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아랍 각국의 혁명세력은 국내의 지배권력을 타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문제를 활용하려 했다.
이리하여 팔레스타인문제는 아랍 진영 내부갈등과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제 2차 중동전쟁, 이른바 수에즈전쟁은 이런 사정을 뚜렷이 드러냈다.
1952년 7월에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집트의 나세르는 혁명 4주년을 맞이하여 스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수에즈운하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권리를 박탈한 것이다.
그러자 격분한 프랑스와 영국은 이스라엘과 비밀협정을 맺어 수에즈운하를 탈환하려고 계획했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은 갑자기 시나이반도를 가로질러 수에즈운하로 진격했다.
다음날 영구과 프랑스군대가 이집트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운하 입구의 도시 포트사이드를 공격했다.
일주일간의 전토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했고 이집트는 영토의 일부를 잃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시대착오적인 침략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미국이 막대한 경제원조를 중동에 제공하면서 그 공백을 메꾸었다.
나세르는 전쟁에 지고서도 아랍의 영웅이 되었다.

무기와 올리브나무 가지

이스라엘이 건국 초기에 부딪친 난관은 주로 인접 아랍국가들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1964년부터는 새로운 사태와 마주하게 되었다.
1월에 열린 아랍 정상회담의 결정에 따라 같은 해 5월 팔레스타인사람들을 대표로 하는 할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출현한 것이다.
아랍연맹은 PLO를 팔레스타인의 유엔 대표로 임명하였으며, PLO는 아랍 전역에 흩어진 난민을 무장시켜 해방군을 조직했다.
바야흐로 주변 아랍국가들의 시혜와 힘에 의지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영토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든 것이다.
그러나 PLO의 앞길이 순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대부분 군주국가인 아랍 나라들은 이스라엘과 정면충돌할까 두려워 PLO르ㅣ 군대를 자기 영토 안에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사회주의 국가들과 이집트, 시리아 만이 PLO를 지원했다.
지지부진한 PLO의 활동에 분개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은 몰래 소규모 테러조직을 만들어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공격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기습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난민촌을 공격했다.
이같은 사태가 계속 심화되어 갔다.

제 3파 중동전쟁은 1967년 6월 5일에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었다.
6일간의 전쟁에서 아랍연맹은 또다시 참패했고 이집트는 시나이반도를 완전히 빼앗겼다.
PLO의 온건노선에 반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FLP)'을 비롯하여 수많은 급진적 게릴라조직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는 물론이요,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아랍세계의 수구(守舊) 집권층, 미국까지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68년 7월,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는 아라파트를 제3대 PLO의장으로 선출했다.
70년 9월에 아랍 민족주의와 비동맹운동의 기수였던 나세르가 암살됨으로써 PLO는 더욱 불리한 정세에 직면했다.
사회주의로 기울었던 나세르와는 달리 후임 대통령 사다트는 국유사업체를 민영화하고 미국에 접근하는 등 우경화된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PFLP는 서방 항공기 4대를 유럽 상공에서 납치하여 이집트와 요르단의 사막에서 폭파했다.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던 요르단왕 후세인은 즉각 미제 전투기를 동원하여 팔레스타인 게릴라 섬멸작전을 전개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동족의 손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1970년 9월의 일이다.
이같은 동족상잔을 기억하기 위해 좌익 게릴라들은 '검은 9월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뮌헨올림픽 선수촌 기습사건의 주인공들이다.

사다트는 제3차 중동전쟁 참패를 설욕하고 시나이 반도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걸고 1973년 10월 6일 수에즈운하를 건너 이스라엘 기지를 공격했다.
그는 자기 군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아랍 민중의 정치적 열광을 불러일으키고 싶엇던 것이다.
이 전쟁을 팔레스타인문제를 전세계적 긴급문제로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는데, 다름 아닌 석유 금수조치 때문이다.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 아라비아, 카타르, 아랍 토후국 연방 등 페르시아만 연안 여섯 나라는 석유의 공시가격을 배럴당 70센트 인상했다.
이란을 제외한 다섯 나라는 석유 생산의 25%를 삭감하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석유 자원을 무기삼아 서방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아랍의 힘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닉슨은 계속해서 하루 1천 톤씩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지만 아프리카와 유럽, 제3세계 나라들, 심지어 미국의 오른팔 일본까지도 재빨리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사다트는 3주간에 걸친 이 전쟁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지안 몇십 년 동안 우리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벌인 결사적인 테러 행위와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 폭격, 난민촌 습격, 학살과 파괴를 수없이 목격하였다.
폭탄을 실은 트럭을 몰고 미군 숙소 건물에 뛰어드는 소녀 테러리스트의 행동은 세계인을 소름끼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75년 이후에는 35만 난민이 거주하는 레바논이 이스라엘 민병대와 게릴라의 군사충돌로 인해 무정부상태의 전쟁터로 변하였으며, 그 상태는 15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사다트는 1979년 3월에 미국의 카터대통령이 보증하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한 대가로 시나이반도를 되돌려 받았지만 팔레스타인에는 평화가 찾아들지 않았다.
사다트는 아랍 미족주의의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란,이라크 전쟁과 페르시아만을 두고 이란과 미국이 벌인 군사 충돌, 이라크의 쿠웨이크 침략으로 일어난 걸프전쟁 등 큼직한 사건 때문에 한동안 팔레스타인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난 듯 보였다.
1971년 1월 이슬람 승려 호메이니를 앞세우고, 미국정부와 석유 메이저의 앞잡이처럼 행동했던 팔레비를 몰아낸 이란혁명은 사회주의혁명이 아니라 반미 민족혁명이었다.
그래서 미국정부는 이란 혁명정부에 이를갈며 이라크 독재자 후세인을 지원했다.
그런데 그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심가 후세인은 미국 정부한테서 지원받은 무기를 들고 쿠웨이트를 집어삼켰다.
기르던 개한테 물린 꼴이 된 미국은 유엔연합군을 이끌고 들어가 이라크 군대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후세인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패전했지만 미국을 혐오하는 아랍 민중에게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보복이 두려워 자기 땅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내쫓은 아랍의 반동적 군주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란과 같은 민족주의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 나라 안에서는 무자비한 독재정치를 실시했다.

이 모든 비극은 본질적으로 시온주의자의 침략과 미국의 제국주의 간섭정책에 대한 아랍 민중의 거부에서 비롯되었다.
아랍민족의 바다위에 뜬 유태인의 섬 이스라엘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지원 덕분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선지자가 예언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수천년 살아온 고향이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운명과 그 땅에 정착한 시온주의자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박해가 박해를 낳고 불행이 불행을 부르며 증오가 증오를 일으키고 테러와 보복학살이 꼬리를 물고 되풀이되는 수난의 땅 팔레스타인.
분명한 것은 세계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과 양심있는 지식인들이 민족의 자결권과 그리고 고행을 되찾으려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노력을 지지한다는 것뿐이다.

1974년 11월 13일 팔레스타인 게릴라 차림으로 만장의 박수를 받으며 유엔총회 연단에 오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에서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고와달라고 호소하면서 미국 국민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팔레스타인 인민의 자결을 위한 투쟁은 저세계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 무력과 탄압에 의해 강제된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비자발적 유배 상태는 종식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강토와 재산, 그리고 한 민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되찾고야 말 것입니다.
    나는 전세계에 대하여 우리 민족이 우리 자신의 고유한 영토 위에 민족 주권국가를 수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호소합니다.
    나는 한 손에 올리브 가지(화해의 상징)를, 다른 한 손에는 자유를 위한 전사(戰士)의 무기를 들고 여기에 왔습니다. 내손의 올리브 가지를 던져 버리지 않게 하십시오.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에는 전쟁이 벌어졌지만 그곳에서 평화가 다시 살아날 날이 올 것입니다.
    나는 PLO의 공식 대표로서, 또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의 한 지도자로서 현재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모든 유태인,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우리들과 더불어 평화스럽고 평등하게 살고자하는 유태인들에게 선언합니다. 내일의 팔레스타인을 위한 우리 모두의 희망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당신들을 우리들의 전망 속에 포함시킬 것입니다. ...... 우리들은 가장 관대한 해결책으로 팔레스타인 단일민주국가를 수립하여 우리 모두가 정의로운 편화 속에서 같이 살 수 있도록 유태인에게 권고합니다. 그곡에서야말로 기독교도, 유태교도,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의 정의 평등 우애, 그리고 발전하는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은 그것이 탄생한 이래 인종적, 종교적 동기에 의하여 고무된 적이 없으며,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의 투쟁 목표는 유태인 개개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종차별적 시온주의와 노골적인 침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혁명은 인간으로서의 유태인을 위한 혁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유태교와 시온주의를 구별합니다. 우리는 시온주의적 식민주의 책동에 반대하지만 유태교의 신앙은 존중할 것입니다......
    이 위대한 건물(유엔 본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적대적이고 호전적인 데토가 과연 미국의 진정한 의견인지 나는 미국 국민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다시 묻노니, 팔레스타인 인민이 당신들(미국)에 대하여 저지른 범죄가 모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들은 우리들과 싸우려 하는 것입니까. 정당화할 수 없는 적대감은 당신들의 이익에 실제로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 나는 미국과 아랍세계 사이의 진정한 우호 관계가 보다 새롭고 높은 차원에서 설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이 알아주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평화와 전쟁의 갈림길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1993년 9월 13일 아라파트는 미국 워싱턴 백악관 뜰에 나타났다.
그는 여기서 '철천지 원수'인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이스라엘 정부가 이스라엘 점령지역인 가자지구와 예리코 시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의 자치를 인정하는 평화회담에 서명한 것이다.
이 행사를 이끈 것은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었고 미국 구무장관과 러시아 외무장관이 증인 자격으로 서명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라파트는 '전사의 무기'를 버리고 '올리브 가지'를 치켜들었다. 암살을 피하려고 매일 잠자리를 옮기며 살아온 이 혁명가는 이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정치가로 변신한 것이다. 아라파트는 실로 '쓰디쓴 결단'을 내렸다. 2쳔년 전 조상들이 살았던 땅이라는 이유로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유태인들은 이 협정을 통해 자기네가 세운 나라를 인정받은 셈이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고향 땅 한 귀퉁이에서 자치 정부를 세우도록 허락 받았다." 역시 국제사회는 힘 센자가 왕노릇을 하는 모양이다.

80만 명의 가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몰려 사는 가자지구는 이스라엘의 점령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의 중심지인 동시에 해방기구와 그보다 더 과격한 무장투쟁 조직들의 거점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에서 정착촌을 만들 유태인도 5천 명이나 되는 탓으로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이스라엘 군대의 유혈 충돌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자주 일어나 이스라엘 정부는 골치를 썩이는 터였다.
요르단 강가 유명한 휴양지인 예리코 시는 예수가 기도하는 중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산 가까이 있는 도시이다.
아라파트는 튀니스에 있는 해방기구 본부를 이곳으로 옮길 생각이라고 한다.
예리코 시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장차 경제 재건을 위해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중심지 역할을 할 것이다.

이 평화 협정은 냉전체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심각한 분쟁을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협정의 산파 노릇을 한 사람은 노르웨이 외무장관 요한 외르겐 홀스트였다.
그는 이스라엘과 해방기구의 공식 평화협상이 벽에 부딪치자 말 그대로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양측 밀사를 자기 집으로 불러들여 숙식을 함께 하며 회담을 중재했다.
반 세기가 넘게 목숨을 걸고 싸운 두 진영 대표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협정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정착촌을 만들어 이스라엘 영토로 만드는 정책을 밀어분였지만 국제사회의 따가운 비난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강력한 인티파타(민중봉기)에 부딪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반세기 넘게 군사력으로 나라의 생존을 확보라혀고 해보았지만 중동 형화를 파괴하는 효과만 낳았을 뿐 수천 년 박해와 수십 년 전쟁에 지달린 유태인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무력충돌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해방기구보다 더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더 큰 힘을 얻게 되자 이제는 대화 상대조차 잃어버릴 지경에 빠졌다.
해방기구를 인정하고 타협하는 것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다.

해방기구도 비슷한 처지였다.
아라파트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져 외부의 군사지원을 잃어버렸다.
걸프전쟁 떼 미국과 싸우는 이라크 지도자 후세인을 지지한 탓으로 인근 아랍국가의 경제원조마저 끊어졌다.
이렇게 되자 조직 내부에서 아라파트의 지도력에 도전하는 세력이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는 땅을 내주고 평화를 얻어 보려는 라빈 수상과 타협하는 것만이 유일한 돌파구 였다.

아라파트는 "이 협정으로 한 세기나 계속된 고난과 괴로움이 끝나기를 진정으로 갈망하며 평화와 공존의 시대, 모두가 같은 권리를 누리는 새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자치협정에 따라 이스라엘 군대는 철수를 시작했고 해방기구는 경찰병력을 만들어 치안을 넘겨 받았다.
이스라엘은 감옥문을 열어 팔레스타인 정치범을 풀어 주었도 수만 명에 이르는 추방당한 사람들이 고행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과도정부로 변신했고 이 협정을 두손 들어 환영한 서방 선진국 정부들은 앞다투어 팔레스타인 재건을 돕기 위해 경제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주변 모든 아랍국가와 평화회담을 맺어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 받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왔다거나 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이 땅에 얽힌 문제가 너무나 복잡한 대다 그 동안 치른 희생이 너무나 컸고 쌓인 원한이 너무나 깊은 탓이다.
그래서 화해를 추구하는 라빈 정권과 팔레스타인 과도정부가 과연 험난하기 짝이 없는 갖가지 장애물을 넘어 평화와 공존과 번영의 땅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가장 골치 아픈 장애물은 이스라엘의 과격 시온주의 세력과 팔레스타인의 회교 원리주의 세력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상대방과 함께 사는 것을 해결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치협정을 비난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가 하면 아라파트를 암살하겠다고 공공연하게 협박한다.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과 민주해방전선 등 급진파는 PLO와는 별도로 수천 명 규모의 게릴라 부대를 거느리고 있다.
이들은 벌써 이스라엘 점령지구 안에서 자치협정에 반대하는 총파업과 시위를 벌였고 독자적으로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하기도 했다.
만약 자치정부가 짧은 시간에 경제를 재건하고 치안을 확립하여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면 이들 과격파가 득세하여 자치협정이 무의미해지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위험요소는 이스라엘 쪽도 있다.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민병대를 만든 유태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며 언제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데, 1994년 2월 25일 새벽에 일어난 헤브론사원 사건이 그 본보기이다.
요르단강 서쪽 헤브론의 한 이슬람 사원에서 한 유태인 정착민이 예배를 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마구 쏜 이사건으로 50명이 넘게 숨지고 수백명이 다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이스라엘 군대는 시위를 진압하면서 팔레스타인 젊은이를 여럿 쏘아 죽였다.
경비를 맡은 이스라엘 군일들이 무장한 유태인이 사원에 들어오는 것을 방관하였다고 해방기구가 강렬히 비난하고 나서 자치협정의 앞길에는 잔뜩 먹구름이 끼었다.
이스라엘 정부가 정착민들이 가진 무기를 회수하는 등 몇가지 조치를 취하여 사태가 진정되디는 했지만 과격 시온주의자들이 이런 사건을 벌일 가능성은 변함없이 남아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협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난날의 잘잘못은 덮어둔 채 지금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일단 군사력 행사를 자제함으로써 아랍 세계에서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슴 밑바닥에 쌓인 증오와 원한을 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릴 것이다.
그리고 유럽 기독교도들에게 수쳔 년간 박해와 수모를 당한 불행한 유태민족이 과격 시온주의를 잠재우고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웃과 화해하는 일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평화와 안식을 찾는 일도 불가능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제주4·3의 진실캐기

3광 작전이라... 일제가 난징 학살할 때 작전명 아니냐...

아래 다현사 붙인다.

 

 



제주4·3의 진실캐기 2006년 4월 3일  am 3:24
세상@속으로





하산인 /강요배



4월 3일, 오늘은 제주역사를 수난과 항쟁으로 또렷이 새겨진지 58년이 되는 비운의 날이다. 지천에 떠돌고 있는 4·3영령들의 넋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이 슬픈 역사에 대한 참담한 심정은 여전하다.

지난 25년 동안 4·3진상규명과 희생자 조사,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길거리에 나서 외쳐보기도 했고, 산천을 떠돌며 원귀들을 찾아 헤매기 했지만 아직까지도 섬은 잠들지 않은 채 눈 부릅뜨고 이 시대를 노려보고 있어서다. 변방에 우짖는 섬이라는 표현이 지금도 유효한 듯하다.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2003년 10월 31일 대통령이 공식사과 했지만 제주도민들의 아픔은 여전히 씻어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4·3진상규명 노력도 그 진실성이 의심된다. 명예회복은 말뿐이다. 진상규명 없이 이루어질 수도 없기 때문에 철저한 진상조사를 거쳐 명예회복의 디딤돌이 돼야 한다. 피해보상이라고 주는 거마비는 섬 주민의 가슴을 더 찢어 놓았다.

제주4·3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 진행과정을 짚어보면서 숨죽여 왔던 4·3의 진실에 한걸음 다가가 본다. 이 접근은 '수난사적 시각'을 바탕에 깔고 아픈 역사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무장폭동인지 민중항쟁인지를 가려낼 것이다.(아래의 4.3 전개과정 부분은 관련 연구자료를 재구성하고 몇가지 의견을 반영했다.)

3·1 시위와 미군정의 경찰의 총격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한 점 산으로 솟은 탐라. 척박한 자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공동체적 전통과 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침략자, 수탈자를 향한 저항 정신이 면면히 흐르는 섬. 


   ▲ 해방 /강요배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제주도민은 자치행정기구인 인민위원회를 설립했다.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는 미군정도 인정했듯이 제주도 전역을 지배한 사실상의 정부였다. 온건정책의 실시, 도민 생존권과 치안의 확보를 위한 일제 잔류군과의 투쟁 등으로 도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다. 미군정은 점차 이를 부인하고 서서히 탄압의 고삐를 쥐어갔다.

제주 4·3의 도화선은 3·1시위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 내의 제주읍을 비롯한 각 면에서 연인원 약 10만 명이 참가하여 조국의 완전한 해방을 촉구하는 3·1독립운동기념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됐다.
제주읍의 경우 오전 9시를 전후해 오현중 교정에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들어 온 약 2,000명의 학생과 군중이 3, I기념대회를 개최한 다음 본 대회장인 제주시 북국민학교를 향하여 행진해 나갔고, 이를 미군정이 저지하자 "미군은 이 땅에서 당장 물러가라"는 등의 반미구호를 외치면서 이를 돌파했다.

오전 11시 경 북국민학교에 집결한 약 3만 명의 군중은 '3.1기념 투쟁 제주도위원회'의 주최로 "3·1혁명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는" 것을 결의하는 대회를 성황리에 열었고, 이어 오후 2시 경 학교와 마을별로 나누어 가두 시위에 돌입하면서 해산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 50분 경, 관덕정 앞의 도민들이 거의 해산했을 때, 한 기마 경관의 말굽에 어린 소년이 채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마 경관이 아무런 응급조치 없이 유유히 경찰서 쪽으로 나아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투석을 시작했고 이어 총소리가 터졌다.

당시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총성 직전, 관덕정 광장에 시위대가 없었고 100∼150명의 관람 군중들만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때 한 소년이 기마 경관의 발굽에 치이는 소동에 이어진 발포는 위협사격의 수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등 뒤에 총탄을 맞았으며, 또한 관덕정 광장 복판에 쓰러진 사람도 없었다. 미군정 경찰은 명백하게 살인을 감행한 것이다. 6명이 피살되고 8명이 부상당했다.

제주도민의 항의 총파업과 미군정의 탄압

미군정의 학살에 대응하여 제주 도민은 "싸우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는 구호 아래 각 직장에 '31공동투쟁위원회' 및 시민 사이에 '3,1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3월 10일에는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제주도 전역에 걸쳐 총파업을 단행했다. 이 총파업은 3월 18일까지 진행됐는데, 여기에는 총파업 인원 40,852명, 행정기관 23개, 중등학교 13개, 초등학교 92개, 통신기관 8개, 교통기관 7개, 금융기관 8개, 실업단체, 공장, 회사 15개 등 전도의 각 기관이 참여하였고 심지어 애월, 모슬포, 중문지서 등의 경찰관까지 동조하는 바람에 섬 전역의 질서가 완전히 마비될 정도로 대중적인 호소력과 참여도를 보여주는 반미항쟁이었다.


서북청년단 입도 /강요배

제주 도민의 저항에 직면한 미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3월 14일 조병옥을 위시하여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반공청년단체를 파견하여 파업을 분쇄하였고, 곧이어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회' 간부와 직장별 주동자 검거에 나서 지속적으로 약 2,500명을 무더기로 검거하고 고문한 다음 이 중 250여 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이 과정에서 조병옥 등은 "제주도는 주민의 90% 이상이 빨갱이"라고 악의에 찬 선전을 계속했다. 서북 청년단원에게는 "제주도는 작은 모스크바"라고 집중적으로 교육했다. 더불어 미군정은 도 군정 수뇌부를 모두 강성 인물로 교체하여 탄압의 고삐를 바짝 죄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서북청년단은 북한에서의 사회개혁 당시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을 상실하여 남하한 세력들이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반공단체였다. 따라서 이들은 공산주의라면 생리적 거부감에 치를 떨었고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는 자에게는 무조건적인 공격을 가했다.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의 이러한 성향을 이용, '사상이 불손한 지역' 에 이 세력을 파견하여 민중들을 공격하는 하수인으로 삼았다. 이들은 봉급 없는 경찰 보조 기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활을 위하여 갈취와 약탈, 폭행을 무수히 진행했다. 이들은 제주 도민의 애국심을 심사한다면서 태극기와 이승만 초상화를 강매하였고, 이에 불응하면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가 하면, 죄 없는 남자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애인에게 접근하여 석방을 핑계로 강간하는 등의 행패를 자행했다. 이럼으로써 다른 식구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서청단원과의 정략 결혼에 응할 수밖에 없는 처녀들도 있었다.

총파업의 종식과 분노하는 민심, 그리고 입산

미국이 지휘하는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반공단체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전도에 걸친 총파업은 마침내 3월 18일 종식됐다. 그러나 총파업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이 제주 도민을 압살하기 위한 강경책이 날로 도를 더해가자 마침내 도민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위의 수단을 강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미군정은 어김없이 보복의 칼날을 휘둘렀다.

한편 미군정의 식민지 시대 못지 않은 곡물 공출 강요 또한 도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미군정은 제주도가 1946년과 1947년 연 2년째의 혹독한 흉년에 시달리고 있다는 지역 사정을 무시하고 곡물의 공출을 강요함으로써 도민들로 하여금 "미군정이 일제 때만도 못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했다

따라서 제주 도민은 중산간 부락을 중심으로 미군정의 이러한 공출 강요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제주도에서의 공출 실적율은 전국에서 가장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미군정은 8·15를 기하여 다시 도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여 '3·1시위사건' 이래 각지에서 발생하였던 사건의 관련자를 예비 검속하고 사상이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자는 모두 검거, 투옥했다. 이 결과 재개된 검거 열풍을 피하기 위하여 수십 명의 도민 지도자들이 방어적인 자위수단으로 한라산으로 입산하기 시작한 것을 시발로 하여 점차 많은 수의 도민들이 한라산으로 입산하기에 이르렀고, 동시에 경찰, 군에의 피난 입대와 해외 도피도 빈발하게 됐다.

'한국문제'의 UN 이관

한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한반도 내 시행이 불가능해지자 미국은 마침내 남쪽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이를 호도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책략으로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했다.

이에 따라 내려진 UN에서의 UN감시하의 남, 북한 총선거의 실시' 라는 '한국문제'에 관한 결정은, 결국 미국이 한반도의 북쪽을 제외한 지역에 강력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여 현상유지를 모색하고, 이것에 근거하여 사회주의권의 동북아시아 지역으로의 확산을 적극 저지, 봉쇄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대한반도 전략을 수정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이것은 동시에 이후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서는 미국의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어떠한 변혁세력도 사실상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민위원회 /강요배

미국의 대한반도 점령정책에 대한 남한민중의 항의와 투쟁이 '2·7구국투쟁' 등을 통하여 점차 가열되어 가는데, 미국은 특히 반미투쟁의 열기가 높고, 그 투쟁경험과 역량이 풍부한 제주 도민에 대한 집중적인 공세를 계속했다. 1948년 초에 이르러도 제주도에서는 도민들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과 이에 대한 제주 도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48년 4월 3일, 항쟁의 시작

1948년 4월 3일 자정, 드디어 항쟁의 신호탄인 봉화가 각 오름에서 붉게 타올랐다. 제주 섬사람들의  남로당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00여 명과 이를 따르는 1,000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0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했다. 이를 시작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숙사 및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요인과 관공리의 집을 공격했다.

왜 공격했는가. 무장대가 제주도민과 경찰관에게 보낸 2개의 '호소문'을 보자.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조선사람이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들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를 학살하는 매국매족노를 거꾸러뜨려야 한다...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시민 동포들이여!..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반미통일구국투쟁으로 제주 4·3은 시작된 것이다. 외세를 몰아내 완전한 민족해방을 이루기 위한 고난의 전투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무소불위의 군경토벌대가 제주 섬사람들을 처참하게 살육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초기 공격에 성공을 거둔 무장세력은 곧 도민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각 면단위로 투철한 사상성 및 전투 경험을 소유한 사람을 30명씩 선발하여 '인민유격대'를 조직했다.

유격대의 기습 공격에 놀란 미군정은 섬 전역으로 확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4월 5일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통행증제를 실시했다. 4월 10일에는 부산 주둔의 국방경비대 제5연대 제2대대를 제9연대에 배속하여 경비대의 병력을 증강시켰다. 또한 유격대와의 연고가 짙어서 진압작전을 효율적으로 치르기에 부적당한 제주 출신의 경찰 대신 육지에서 차출한 1,700여 명의 경찰을 급히 제주도로 배치했다.

특히 미군정은 국방경비대가 초기부터 도민의 불만을 정당한 것으로 보고 적극적인 진압작전을 추진하지 않는 것에 강력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제9연대장 김익렬에게 사람을 보내 '초토화작전' 을 계속 요구했다.

4·28 평화협상과 5·1 오라리 방화사건

김익렬은 초토화 작전을 거부했다. 미군정은 작전수행이 불가능하자 유격대와의 협상을 명령했다. 4월 28일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하여 72시간 내 전투중지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4.28평화협상에서 항쟁의 대표였던 김달삼이 경비대의 김익렬 중령에게 밝힌 4개항의 요구조건은 이렇다. 첫째, 단선단정 획책하는 미군철수, 둘째, 악질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철수, 셋째, 제주도민의 경찰편성까지 치안업무 경비대 수행, 넷째, 의거참여자의 전원 불문이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깨졌다. 피의 역사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누가 깼는가. 협상 다음날 미군정장관 딘(W. Dean)이 내도하면서 평화협상을 일방적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5월 I일 오전 12시 경 서북청년단 및 대동청년단 소속 청년 30여 명이 제주읍 외곽 오라리를 기습 공격했다. 12채의 민가가 불에 탔다. 이에 마을에서 1.5km가량 떨어진 민오름 주변에 있던 유격대원 20여 명이 총과 죽창을 들고 내려와 이 청년들과 맞붙었다. 청년들의 보고를 받은 경찰들이 즉각 출동하여 유격대가 이미 사라진 마을을 향해 총을 난사하며 들이닥쳤다.

이날 충돌과정에서 경찰관 가족 I명과 마을 주민 1명이 희생됐다. 경찰은 오후 4시 30분까지 마을에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심문하다가 김익렬 등의 국방경비대가 출현하자 황급히 마을에서 철수했다. 이
 사건 진상규명 과정에서 미군정과 경찰은 오라리방화사건이 우익청년에 의해 자행됐다는 국방경비대의 진상보고를 묵살하고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몰아 붙이는 조작을 감행했다. 그들은 동아일보 등의 언론을 통하여 보도조작을 요구했다. 사건 당시 오라리 상공을 정찰하면서 찍은 필름을 편집하여 '제주도의 5월 1일(May Day on Cheju-do)'이라는 기록 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유격대의 만행을 증언하는 홍보물로 이용했다.

5월 3일에는 미 고문관 드루스 대위의 지휘 하에 귀순자를 호송해 오던 제9연대 7명과 미군 사병 2명에게 괴한들이 총기를 난사하여 귀순자 중 일부가 죽고 나머지는 다시 산으로 도망하는 사건 이 발생했다. 경찰은 처음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발뺌하였지만, 미군에 의해 체포된 괴한 중 1명이 제주경찰서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건을 경찰과 미군정, 그리고 경비대 사이의 이간질을 시킬 목적으로 자행된 유격대의 경찰 가장기습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미군정은 이에 4·28평화협상과 이후 조작된 사건의 책임을 9연대와 김익렬에게 뒤집어 씌웠다. 미군정은 김익렬을 용공으로 몰아 해임하고 강경파인 박진경을 기용하여 대규모 초토화작전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5·10선거 거부투쟁과 박진경의 초토화작전



5.10 단독선거를 반대해 산으로 피신해 임시 주거하는 모습.

이에 대응하여 인민유격대는 5·10선거가 다가오자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이 일로 관련인사와 경찰, 우익청년단체 인사들이 살해됐고 각종 시설이 습격 당해 부서졌다. 제주도민들도 5·10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에 동참했다. 많은 선거 관련 공무원들이 근무지를 이탈하거나 선거사무를 보지 않았다. 도민들은 경찰 및 극우청년단체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향보단에 가입하기를 완강히 거부했고, 선거일이 되자 더욱 강화된 협박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입산해 버림으로써 적극적인 선거 거부를 단행했다.

이 결과로 제주도에서의 5·10선거는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의 선거가 무효화되고 남제주군 선거구만의 선거가 간신히 치러졌다. 도민들은 그들의 항쟁목표의 하나로서 5.10단선을 완벽하게 파탄시킨 것이다.

이에 미국은 즉각 제주도의 해안선을 봉쇄하고 박진경에게 초토화작전을 명령했다. 초토화작전을 명령받은 박진경은 5월 12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2개 마을에서 218명의 도민들을 체포한데 이어 5월중에만 무려 3,126명의 '포로'를 붙잡았다. 6월 중순이 되면서 '포로' 의 숫자는 6천명으로 늘어났다. 한라산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소하는 박진경의 강력한 투망식 토끼몰이식 공격은 도민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의 광폭함은 국방경비대에 대한 이전 도민의 호의적인 반응을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박진경과 국방경비대의 이와 같은 강력한 토벌에 대응하여 유격대는 5월말 '인민해방군'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도민들 또한 생존의 극한 상황에서 국방경비대의 동향을 적극적으로 탐지, 감시하기 시작했다.

6월 18일 토벌 방식에 불만을 품은 문상길 등이 박진경을 살해하자, 미군정은 최경록을 그 후임 에 임명하여 박진경 암살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한편, 도민들에 대한 수색작업을 계속했다. 이어 7월 15일에는 송요찬을 새로운 연대장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약 한달 동안 새로이 부대정비를 하게 한 다음 유격대에 대한 공격을 재개토록 했다.

8월 초순, 김달삼, 강규찬 등 유격대 주요 지휘관 6명이 해주의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 참석을 명분으로 제주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또한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등 정치일정으로 인하여 유격대는 장기항전 준비에 돌입했다. 경비대의 대유격대 진압작전 또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학살 -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



   4·3 당시 군과 경찰에 끌려간 주민들은 대부분 처형당했다.

그러나 부대를 정비한 송요찬이 9월초부터 대유격대 진압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무차별적인 초토화작전이 이우어졌다. 송요찬과 그의 뒤를 이은 김상겸에 의해 강력한 토끼 몰이식 수색작전과 모두 불사르고, 모두 죽이고, 모두 약탈하는, 그리하여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광(三光), 삼진(三盡) 작전이라는 천인공노할 대량학살작전이 전개됐다. 유격대는 축소되어 갔고, 유격대 세력의 몇 배에 달하는 숫자의 '폭도사살' 전과가 기록되어 갔다.

특히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국군 14연대의 여순 봉기를 진압한 10월 하순 이후에는 유격대와의 연결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소개작전'과 소개민 심사, 이를 명분으로 한 대량 학살이 연일 이어졌다.

1949년이 되자 정부와 미국의 주한임시군사고문단은 여순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함병선의 제2연대 병력을 제주도로 이동시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으로 토벌작전을 더욱 강화했다. 이러한 무자비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의 결과로 해안에서 4km 이상 떨어진 한라산에 오르는 부락은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완전히 초토화됐고, 학살을 피한 도민들은 삶을 찾아 다시 산으로, 해안의 안전지대로 도피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이들의 삶 또한 죽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입산한 도민들은 여전히 토벌대의 추적에 시달려야 했고 여기에 다시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라는 새로운 적과 직면했던 것이다. 해안부락의 안전지대로 피신한 도민들 또한 형편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산 사람과 협력한 마을 사람'으로, 또는 '공산당 물이 들었다'고 많은 의심과 감시의 눈초리를 겪어야 했으며, 끝내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소개된 마을을 유격대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대대적인 축성 작업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민보단원이 되어 이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의심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기아 /강요배

제2연대의 육해공군 연합작전에도 불구하고 유격대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정부와 미국은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지휘관 유재흥 대령, 참모장 함병선 중령)를 설치하고, 김용주 대령의 독립유격대대를 투입하여 유격대의 잔존 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최후의 총공세를 감행했다. 

유재흥 대령은 한편으로 3월 25일 기한의 사면계획을 발표하는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무장진압의 2단계 작전을 펼쳤다. 이 결과 사면기간 동안 강경한 토벌작전에 대한 공포와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는 죽음 같은 삶을 벗어나려는 하산민의 두려움과 의구심에 찬 투항이 늘어나고, 이들에 대한 회유, 고문, 협박 등을 통하여 유격대의 규모와 주둔 위치, 무장력 등이 속속 드러나게 됐다.

여전히 강경한 무장진압을 전개하던 유재흥 부대는 사면기간이 끝나자 즉각 대대적인 최후공격을 단행했다. 이 결과로 3윌 12일부터 4월 12일간의 한달 동안 유재흥 부대는 2,345명의 '유격대'를 살해 혹은 부상시켰고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하였으며, 동시에 3,600여 명의 유격대 동조자를 생포했다. 이러한 전과는 당시 미군 비밀 문서가 과장 집계 한 무장유격대의 숫자가 250여 명, 그리고 그 동조자의 숫자가 1,000~1,500명에 불과했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유격대 색출을 빙자하여 도민에게 가해진 철저한 대토벌, 대학살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제 유격대 세력은 거의 붕괴됐다. 이에 따라 1949년 4월 9일 이승만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폭동'이 종식되었음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같은 해 5월 10일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에 대한 재선거가 실시됐다. 5월 15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대부분의 군경이 17일, 18일에 걸쳐 육지로 철수했다.

7년 7개월의 피의 장막은 내려지고

그러나 도민학살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됐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4·3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뒤라 마을마다 다시 잡아들일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검거할 것을 지시했고, 예비검속에 붙잡힌 사람들은 대부분 집단 총살을 당했다. 예비검속으로 마을마다 수백 명씩 전도 차원에서 수천명이 다시 희생됐다.

이 와중에서 경찰은 대정, 한경, 한림, 애월, 안덕, 중문, 서귀 등지에서 이전에 체포됐다 풀려난 양민들을 예비검속이란 명목 하에 소집하여 모슬포 송악산 부근 섯알오름에 위치한 식민지 시대의 탄약고로 끌고 간 다음 이들을 참혹하게 학살했다.

사망자 192명, 도민들은 뒷날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수습하여 사계리 공동묘지에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의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를 조성하여 이들의 억울한 죽 음을 기리고 있다. 모슬포 '백조일손' 사건은 대표적인 예비검속 집단 학살사건이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됐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실로 7년 7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잠들지 않는 섬 /강요배

제주 4·3의 진행 과정을 통해 제주도는 3만∼5만여 명 이상의 사망자 이외에도 지역 공동체 전체가 와해되는 피해를 입었다. 160여 개 마을 전체가 참화를 입었으며 불타거나 파괴된 가호가 15,228호, 피해 가옥이 35,921동에 이르렀다. 이재민 수는 당시 전체 인구의 35% 가량인 91,732명이라고 나타났으나 실제로는 인구의 절반인 14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4·3'의 후유증은 제주 지역 공동체의 파괴와 굴절로 이어졌다. 지역사회를 이끌어 나가던 지도층과 지식층 대다수가 희생됐고, 살아남아도 용공 혐의에 짓눌려 정신적인 주체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엄청난 피해와 충격으로 공포에 가까운 피해의식이 체질화됐고 이로 인해 제주도민 전체의 의식과 삶이 오그라들었다. 특히 연좌제로 인한 피해도 최근까지 지속되어 왔다.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라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굴레로 인하여 공동체적인 정신문화가 파괴됐다. 그 이후 계속된 냉전과 분단을 배경으로 한 반공독재체제와 더불어 4·3을 침묵의 세월에 묻히게 했다.

국가테러리즘과 민중항쟁

미군정은 1945년 8월 16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 38선 이남의 유일한 법적 정부였고, 따라서 미군정은 양민학살에 대한 직접적인, 또는 최종적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이후 이승만 친미정권에 의한 제주민중 학살은 결국 국가가 져야할 책임이다.

제주 4·3항쟁을 장기화 시킨 책임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게 있다. 제주 4·3은 이런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살아남기 위한 항쟁이었다. 제주 4·3항쟁이 발발하게 된 1차적 원인 제공자는 당연히 미군정이요, 이에 기생하고 있는 이승만을 앞세운 친미친일 잔존세력들이다.

제주 4·3은 국가테러 대 민중의 저항이라는 충돌구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선 전국 통제력을 점차 제주도에까지 확산시켰던 미군정은 그 동안 자신들의 자율적 공동체 질서를 구축해놓고 있었던 제주도인민위원회 및 민중들과 충돌하게 되면서 국가 폭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자행한 무자비한 탄압은 국가권력의 정당한 행사와는 거리가 당연히 멀다.

한마디로 국가 테러다. 이런 국가 테러에 제주 민중들은 자신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저항했다. 제주 4·3사건을 민중항쟁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될 것 같다.
/굴렁쇠

 

...............................................................................................................................................

이 글은 <제주4.3연구소>,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4.3은 말한다>(제민일보)의 자료와 <미국의 한반도전략과 조선의 분단 : 4.3항쟁을 중심으로>(강정구, 전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제주4.3항쟁과 미군정정책>(정해구, 한국정치연구회 연구위원)의 논문을 기본텍스트로 삼았음을 밝혀둡니다.

 

 

진상보고.hwp

제주 4.3.항쟁 (박세길 - 다시쓰는 한국현대사1 中)

지은이 : 박세길

2.7 구국투쟁과 단선단정 반대투쟁을 경과하면서 남한 민중의 반미 반이승만 투쟁은 무장투쟁 단계로 발전하여 갔다.

이미 밝힌 대로 2.7 구국투쟁 이후 남한 각지에서는 농촌을 거점으로 한 야산대라는 초보적인 무장조직이 등장하였다. 야산대는 광폭한 탄압을 헤치고 효과적으로 투쟁을 벌여나가기 위한 민중의 자위조직으로서 정치활동을 위주로 낮은 단계의 무장항쟁을 수행하여 나갔다.

이러한 야산대의 활동은 4.3 제주 민중항쟁 등 지역적 봉기라는 계기를 맞이하면서 급속히 본격적인 유격전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볼 때 본격적인 무장항쟁의 불길을 당긴 4.3 제주 민중항쟁과 그것에 의해 촉발된 여순 봉기 그리고 계속되는 군대 내의 반란 등은 당시 해당 지역과 군 내부의 불가피한 사정에 따른 자연발생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즉, 4.3 제주항쟁은 가혹한 미 군정의 학정과 그것의 영속화를 의미하는 단선단정의 추진이라는 상황 하에서 유일한 최후의 선택으로서 감행되어졌다. 다시 말해서 학정의 노예로 전락되느냐, 무기를 들고 싸우느냐 하는 절박한 상황 하에서 남달리 의지가 굳은 제주 민중은 기꺼이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순 봉기도 동포에 대한 학살명령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총부리를 압제자에게 돌릴 것이냐 하는 막다른 기로에서 선택된 결과였다. 이후 대구 주둔 6연대에서 발생한 일련의 군장병 반란사태도 역시 동포에 대한 계속적인 학살 강요와 자신들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탄압 위협 하에서 발생하였다.

이렇듯 일련의 봉기는 민중들이 처해 있던 현실로부터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봉기에 참여한 무장세력이 대거 유격대로 전환함으로써 본격적인 유격전의 막을 올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무장항쟁의 전진 속도는 당시 남로당 등이 계획했던 것보다 상당히 빨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지역적 무장봉기의 발생이라는 새로운 정세에 대한 적응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서 상당부분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출발한 유격전은 거듭되는 군사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승만 정부를 정치적으로 폐퇴시켜 나감으로써 승리를 향해 한걸음씩 접근해 갔다.

우리는 이러한 당시 남한 민중의 치열한 부장항쟁 과정 속에서 외세와 그 주구세력들이 저지른 온갖 죄악상에 대한 분노와 함께 엄청난 희생에도 굴하지 않고 전진을 거듭하는 민중항쟁의 장엄한 순간들을 접하며 깊은 감동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 끓어 오르는 한라산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날
    하늘에서는 정찰기가 살인예고장을 살포하고
    바다에서는 함대가 경적을 울리고
    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그날
    빨갱이 마을이라 하여 80여 남녀 중학생들을
    금악벌관으로 몰고가 집단몰살하고 수장한 데 이어
    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나무기둥에 묶어두고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젖가슴을 도려내 폭포속으로 던져버린 그날
    한 무리의 정치깡패단이 열 일곱도 안된
    한 여고생을 윤간한 뒤 생매장해버린 그 가을 숲
    서귀포 임시감옥 속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몽키 스패너로 혓바닥까지 뽑아버리던 그날, 바로 그날
    관덕정 인민광장 앞에는 사지가 갈갈이 찢어져
    목이 짤린 얼굴은 얼굴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전봇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 이산하, "한라산"

본격적인 무장항재의 첫 도화선을 마련한 4.3 제주 민중항쟁의 진정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는 적어도 해방 이후 제주도를 둘러싸고 있었던 전반적 상황과 그 속에서 전개되었던 일련의 사태, 그리고 제주도의 특수한 역사적 전통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제주도는 식민지 조선 땅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가장 낙후하였으며 또한 가장 천대받는 고통과 서러움의 땅이었다.

이는 일본 식민통치 하에서 제주 민중의 절반 정도가 강제적인 징용,징병과 불가피한 이민으로 인해 본래의 삶의 터전에서 뿌리가 뽑힌 채 이국만리 머나먼 곳에서 온갖 고초와 수모를 강용반아야 했던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사실은 제주도가 일제 하에서도 집중적인 핍박의 대상이 되었음과 동시에 더이상 발붙이고 살 수 없을 정도로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해방 이후 제주도의 경제상태는 여전히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전재민들이 대거 귀향함에 따라 인구는 두 배 가까이 늘어났지만 생산능력은 오히려 줄어들게 됨으로써 가공할 물가상승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생산능력의 저하는 남한 전체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는 하였지만 특히 제주도는 식민지 경제의 파산과 남북의 분단으로 인해 민중들의 생활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다. 예컨대 그동안 북에서 공급되던 탄소가 부족하여 야간 고기잡이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또한 고루마를 사들였던 주정공장과 제주시에 전력을 공급해 오던 발전소가 석탄부족으로 거의 정지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제주도가 도로 승격하면서 가중되게 된 조세부담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제주 민중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심각한 불만을 느끼게 된 것은 이같은 경제적 곤란보다는 그것을 자신의 요구대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것에 의해서였다.

해방 직후 제주 민중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조금도 굴함이 없이 새조국 건설을 위한 놀라운 열정을 불태웠다.

9월 15일 제주읍 인민위원회를 시발로 각 지방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거기에서 선출된 대표위원에 의해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9월 22일). 이와 함께 도 부녀동맹, 교육자동맹, 노동조합, 소비조합, 제주문화협회 등 각종 대중단체가 잇달아 조직되어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민주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 나갔다.

이리하여 해방된 조국의 지방자치기관을 자신들의 손으로 건설한 제주민중들은 스스로 치안을 유지하고 구일본인 재산을 접수함과 동시에 일본군에게서 몰수한 군랭미를 무상분배하는 등 애국적 시책을 펴 나갔다. 따라서 인민위원회의 지도 아래 이루어지는 정책과 사업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불평도 있을 수 없었다.

제주 민중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새로운 세대를 교육하기 위한 각급 학교를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 나갔다. 그리고 학교나 부락에서 강습회가 개최되어, 잃었던 모국어와 빼앗긴 역사를 되찾는 학습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나아가 문화인들의 자주적 역량에 의해 "제주신보"가 발간되었다(9월 28일).

해방 후 약 2개월 남짓한 기간에 이루어 낸 이상과 같은 성과를 보면 제주 민중은 이미 높은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해방을 위한 제반 운동을 능히 추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제주 민중의 꿈과 노력도 역시 새로운 지배자 미 군정의 반동적 정책에 의해 급속히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을 겪어야 했다.

일단의 미군 부대가 이곳 제주섬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은 9월 28일 쟝에 이르러서였다. 미군의 진주와 함께 여타의 남한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때 도민의 기세에 눌려 숨을 죽이고 있었던 민족반역자들은 새로운 주인인 미 군정의 앞잡이가 되어 설쳐대기 시작했다.

미군은 제주도에 도착한 즉시 이들 민족반역자들을 축으로 하여 법원, 검찰 그리고 경찰 등 각종 폭압기구를 창설하였다. 이와 함께 1946년 1월 15일, 미 군정은 그동안 도민들이 자주적으로 관리해 오던 도민의 공공재산으로서의 구일본인 재산, 즉 적산을 송두리째 강탈하여 자기들 손에 거머쥐었다. 이렇게 하여 이곳 제주섬에서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작업이 미국인의 손에 의해 공공연하게 진행된 것이다. 미국인 마크 게인조차도 그의 "일본일기"에서 당시의 불미스런 사태진전에 대해 "나는 번뇌와 부끄러움으로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탄압하는 데 있어서 단연 으뜸간다 할 수 있을 야만적인 경찰국가가 우리 국가와 함께 탄생하고 있는 것을 보아 왔다."고 토로하였다.

제주 민중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추진하였던 제반 사업을 완전히 물거품으로 만드는 조치와 함께 여전히 완강하게 바티고 있었던 인민위원회와 각종 민주단체에 대한 파괴공작이 감행되었다.

본격적인 탄압의 첫 신호탄이 도었던 것은 1945년 12월에 발생한 이른바 '한라단' 사건이었다.

그동안 제주 민중들로부터 규탄의 대상이 되어왔던 재주 시내의 친일파들은 미군이 진주하자 비밀리에 한라단이라는 테러단을 조직하여 민주세력을 암살하기 위한 음모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던 1945년 12월 12일 밤 미군의 해산명령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와 성원에 여전히 끄덕없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던 도 인민위원회 사무실이 이들 '한라단'무리들에 의해 습격을 받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여기에 격앙된 젊은이들은 그 다음날 '테러 배격'을 외치며 도 군정청 앞에서 항의시위를 감행하였다. 이에 시민들이 대거 합세하였고 그에 따라 시위대는 순식간에 크게 불어났다. 마침네 민중의 분노가 하나로 결집되어 폭발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라단 깡패들은 드날 밤 또 다시 인민위원회를 습격하여 폭력을 위둘렀기 때문에 민중의 자위단체인 보안대는 어쩔 수 없이 자위의 일환으로 그들을 힘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보안대의 자위조치 소식을 들은 미군과 경찰은 수 십 대의 지프와 트럭에 나누어 타고 기관총과 소총을 쏘아대면서 인민위원회를 포위하고 마침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곤봉을 휘둘러 댔으며,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 모든 서류와 비품을 압수하고 50여 명의 애국자들을 검거, 투옥해 버렸다.

이 사건은 말할 필요도 없이 미 군정과 친일파들이 민주단체를 파괴하기 위한 음모의 일환으로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 군정은 이 '한라단 사건'을 통하여 전체 제주 민중에게 본격적인 탄압을 개시함과 동시에 피의 대량학살을 예고하는 불길한 서곡을 연주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제주 민중과 미 군정의 충돌은 단계적으로 확대되어 갔고 그 때마다 미 군정의 탄압은 강도를 더해 갔다.

제주 민중과 미 군정의 충돌은 1947년 3월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10월 인민항쟁의 격랑을 헤쳐 온 제주 민중은 1947년 3월 1일에 역사적인 3.1운동을 기념하는 집회를 추진하였다. 이에 대하여 군정 당국은 집회의 합법적 개최를 불허하고 나아가 이를 폭력으로 짓밟기 위한 조치로서 육지로부터 경찰을 추가 투입하는 등 강경한 태세로 대응하였다. 결국 평화적 시위를 계속하고 있던 제주 도민에 대해 미군과 경찰은 무자비한 발포행위로 맞섰고 그로 인해 소년 한 명의 목숨이 희생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유혈 참변에 대해 미 군정은 학살자를 처벌하고 민중 앞에 사죄하기는 커녕 오히려 탄압을 더욱 강화하면서 민주인사들에 대한 부당한 검거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군정 당국의 가장치 않은 행위는 결국 제주 민중 전체의 격렬한 항의투쟁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격분한 제주 민중은 드디어 3월 9일부터 일제히 총파업 투쟁에 궐기하게 되었다.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상인들의 단체철시가 그 뒤를 따랐으며 군정청 직원들도 불법탄압의 중지를 요구하며 파업에 합류하였다. 심지어는 대정, 조천, 중문 등 도내의 각 경찰지서원들과 재판소의 직원들도 발포 경찰의 처단과 경찰 책임자의 인책사임을 요구하며 파업투쟁에 돌입하였다.

이리하여 미국인과 극소수의 친일 모리배들만 제외하고는 제주도 내외 전 민중의 파업투쟁에 궐기하였으며 그 결과 도내의 모든 업무는 완전 마비되고 말았다.

이렇듯이 제주 민중의 놀라운 단결력과 투쟁력에 봉착한 미 군정은 다급한 나머지 대량의 무장경찰관과 '서북청년회', '민족청년단'등 악명높은 반동적 테러집단을 속속 투입하여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파업을 선동했던 자, 취로를 방해했던 자, 직장에서 집회를 개최했던 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검거하라."는 지령과 함께 테러 선풍이 도전체로 확산되어 갔다. 테러집단은 우익 경찰과 결합하여 이른바 '사람사냥'에 나섰다.

이 자들은 행정기관 소재지에 있는 관사나 민가를 불법으로 점거하여 "우리는 제 2의 모스크바--제주도를 공격하러 온 멸공대다"라고 큰소리치며, 온순한 주민을 '빨갱이', '동조자'라고 몰아부치며 위협했다. 이유도 없이 지나가는 행인을 짓밟아 집단폭행을 가하기도 하고 밀실애 감금하고는 잔인한 린치를 가하여 결국은 살상까지 자행하는 만행이 연일 계속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3월 2일에서 다음 달 초순까지 약 2,000여 명의 죄없는 민중이 두 평 남짓한 유치장이나 특설 감방에 수용딘 채 형을 기다리게 되었다. 또한 모든 양심적 인사들은 직장에서 쫓겨나 길거리에 내팽개쳐졌다. 아울러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단순히 저항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학교에서 추방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경찰비', '후원회비' 등의 명목으로 각종 기부금이 강요되어 주민들의 생활고를 극도로 압박하게 되었다. ( 경찰은 여러 가지 명목으로 금품을 갈취하여 부족한 자신들의 봉급을 채웠다. 또한 서북청년단 등 월남한 반공 피난민으로 구성된 테러단체들은 별다른 봉급이 주어지지 않는 상태였으므로, 주민들에 대한 갖가지 공갈, 사기 들을 거리낌없이 자행함으로써 스스로의 사복을 채울 수 밖에 없었다. )

제주 민중에 대한 미 군정의 탄압은 이제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보다 일상적인 성격을 띠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주 민중은 이같은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여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철저히 적대시하는 압제자들에 대해 대중적인 자위투젱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나갔다.

한 예로 1947년 8월 13일 조천면의 한 마을에서 벌어졌던 투쟁을 들 수 있다. 이날 하루종일 마을 입구를 망보던 소년선봉대가, 테러 집단이 가까이 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미리 약속된 대로 개울음 소리로 마을에 알렸다. 마을사람들은 즉시 있는 그대로의 무기를 가지고 함성을 지르며 길가로 달려나갔다. 이에 간담이 서늘해진 그들은 부랴부랴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같은 형태의 자위투쟁은 제주도 전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확산되어 갔으며 그에 따라 미 군정의 탄압도 더욱 악랄해져 갔다.

제주 민중이 대중적인 정치투쟁과 초보적인 자위투쟁의 단계를 넘어서서 보다 짜임새있는 무력저항의 형태로 진입하게 된 것은 암담하기만 한 미국의 통치를 영속화하게 된 단독선거 실시가 확실해진 식시였다.

미 군정과 경찰 그리고 우익 청년단체들의 야수적인 탄압에 의해 새 조국 건설의 꿈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처참하게 우린 당한 제주 민중들에게는 미국과 이승만 일파의 음모에 의한 단선던정을 저지하느냐 못하느냐가 죽는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중차대한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제주 민중은 미국과 이승만 일파의 단독선거 음모에 결사적으로 반대하여 나섰고 이에 대해 미 군정은 일관되게 폭력적 탄압으로 맞섰다.

1948년 2월 중순, 광범위한 제주 민중들은 안덕면 사계의 모래벌판에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집회를 가졌다. 바로 그때 안덕지서의 경찰대와 테러집단이 갑작스럽게 공격을 가해왔다. 잠재되었던 분노가 폭발하면서 집회에 참석 중이던 민중들은 즉가 돌멩이와 몽둥이를 가지고 그들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윽고 도망가는 지서장을 잡아 무장해제하고 민중재판에 부쳐 민중의 고혈을 빨아 먹던 잔학함을 심판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압제자들은 더욱더 강압적으로 대응하여 왔다.

미 군정은 충남, 전남지방으로부터 응원 경찰관을 계속 제주도로 증파하면서 토벌작전을 위한 모의훈련에 돌입하였다. 이와 동시에 전 도를 둘러싸고 검거망에 걸린 사람은 가리지 않고 '빨갱이'나 '동조자'라는 꼬리표를 붙여 체포하고 자학한 고문을 가하여 죽였다.

2.7 구국투쟁 직후 조천면 일대에는 경찰에 의한 집중적인 탄압이 가해지면서 다수의 주민이 체포되었다. 그리고는 남녀 구분없이 감방에 섞어 놓고, 부녀의 면전에서 남자를 발가벗겨 생식기를 흔들어 돌리게 하는 등 실로 비인간적인 만행을 강요했을 뿐 아니라 잔혹한 고문에 의하여 전도유망한 청년의 생명를 빼앗기도 하였다.

잇달아서 대정면 일대에 유혈의 대탄압을 전개하고 몸서리치는 테러를 가함과 동시에 양운하라는 주민을 고문 끝에 이윽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주민들 중에는 스파이가 있어서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하였다. 일례로 금풍리의 박행구는 양모라는 자의 밀고로 테러 집단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는 참변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제 제주 민중은 눈물로 나날을 보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절규, 비명, 신음소리와 날카로운 채찍소리뿐이었다. 이러한 폭정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점점 높아지고 그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주 민중은 오랜 기간에 걸쳐 외세와 봉건적 착취세력에 항거해 왔던 불굴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와 그에 항복한 봉건왕조에 대한 최후의 저항기지가 되었고 가까이 조선 말기에는 6 차례에 걸친 민중봉기의 경험이 있었다.

또한 해방 직후 제주 민중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던 귀환자들은 그들이 겪었던 혹독한 시련을 통하여 강인한 투쟁력과 진보적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극도의 압제적 상황과 결부되어 제주 민중으로 하여금 전면적인 무장항쟁으로 나아가도록 몰아부쳤다.

드디어 제주 민중은 유일한 최후의 선택으로서 무장봉기를 위한 준비작업에 하나같이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핵심적인 유격대 조직이 행정의 말단지구까지 만들어지고 민중의 저항 자위투쟁을 더욱 강화하는 조치가 주도면밀하게 취해졌다. 물 샐 틈 없는 경계망 속에서 무기와 군량미를 획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권력의 포악함을 증오하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갈망하는 전 제주 민중과 애국적인 장병, 경찰관,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지원에 힘입어 이러한 난관들도 하나씩 해결되어 나갔다. 확실히 민중들은 서로 단합하여 유격대의 손발이 되고 눈이 되고 귀가 되는 일에 기꺼이 호응하여 나섰다. 이는 당시의 절망적 상황 하에서 유격대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어주고 있었다는 점에서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권략측도 예전에 없던 규모로 경계망을 넓히고 집요한 '주모자 소탕'작전을 전개하면서 쌍방의 힘에 의한 대결은 점점더 불가피한 것이 되어 갔다.

 

2003년 4월에야 4.3. 항쟁의 진상을 밝힌 진상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첨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림인가 사진인가? 서민용 1만 채 '인형의 집'

이런 면에서는 멕시코도 우리나라보다 선진국인듯...

 

 

그림인가 사진인가? 서민용 1만 채 '인형의 집'
[팝뉴스 2006-02-15 14:41]


해외 네티즌들을 술렁이게 만든 사진이다.

사진 속에는 흡사 장난감 블록으로 만든 것 같은 집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색깔이 다를 뿐 모양도 다 비슷하고, 군인처럼 줄지어 서 있으며, 크기도 똑 같다. 마치 인형을 위한 장난감 집처럼 보인다.

얼마 전부터 이 사진들은 해외 네티즌들의 블로그에 나돌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대부분 네티즌들이 그림이나 CG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세상에 이런 집이 어디 있냐는 것.

그러나 현재는 이 사진들이 진짜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사진의 출처는 오스카 루이즈라는 헬기 조종사의 홈페이지 (homepage.mac.com/helipilot/PhotoAlbum31.html).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멕시코 시티 상공을 돌며 다양한 촬영한 사진들을 모아두었는데, 그 중 두 장의 사진은 익스타파루카 Ixtapaluca 지역의 '저소득층의 주택 단지'라고 소개해 놓고 있다.

사진의 진위를 가린 것은 바로 네티즌의 힘. 네티즌들이 위성 사진과 대조해 보고, 인근에 사는 사람의 증언도 나오면서 위 사진은 조작없는 진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영재 기자 (저작권자 팝뉴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만약 DJ가 한나라당 요구대로 방북을 연기한다면……

명 만평이다. 1년마다 선거있는 우리 상황에서...

 

 

만약 DJ가 한나라당 요구대로 방북을 연기한다면……
입력 :2006-02-16 16:43   조민성 시사만평가 (jodoll21@msn.com)


ⓒ 데일리서프라이즈
조민성 시사만평가의 다른 기사 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단일민족’ 교육 이대로 좋은가?

 

 

 

단일민족’ 교육 이대로 좋은가?
[KBS TV 2006-02-16 22:32]
<앵커 멘트>

미국 슈퍼볼 영웅 하인즈 워드 열풍을 계기로, 국내 혼혈인 차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단일 민족 교육이 과연 시대에 맞는것인지 논의의 장에 오르고 있습니다.

정홍규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우리 민족은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단일 민족 국가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한 대목입니다.

이처럼 우리 나라가 단일민족 국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 또 길이 보존해야 할만큼 가치있는 것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 "해방된 후에 국민교육용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민족을 국가차원에서 만들어 역사지식으로 국민에게 주입시킨 거죠."

그러나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는 이미 현실 속에서 깨지고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70만 명.. 전체 인구의 1.5%에 이릅니다.

지난 2000년 만2천 쌍에 불과했던 국제 결혼 인구도 지난 2004년에는 3만5천 쌍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나 국내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혼혈 학생의 수도 6천 명이 넘습니다.

이처럼 엄연히 우리 사회의 일원인 외국인이나 혼혈인들에게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교육은 자칫 배타적 순혈주의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인터뷰>강민정 (고등학교 2학년): "피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얘기하면 애들은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배우잖아요. 학교에서 그러니까 애들이 그 때문에 더 혼혈 애들을 괴롭히는 것 같아요."

때문에 최근 학계 일각에서는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교육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인터뷰>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혈통적 민족주의를 고집한다는 것은 우리와 혈통이 다른 사람들은 배제하고 그들에게는 어떤 불이익을 줘도 된다는 논리..."

국경이 해체되고 있는 세계화 시대, 배타적 민족주의를 주입하기 보다는 세계 시민임을 일깨워 주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KBS 뉴스 정홍규입니다.

[Copyright ⓒ KBS all right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관계정립은 이렇게 하자

68혁명에 관한 코멘트

 

 

관계정립은 이렇게 하자
입력 :2006-02-16 09:32   고은광순(한의사)
노태우 정부 시절, 1991년 6월 20일은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되었던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되어 처음으로 실시하는 866인의 광역(시,도)의회의원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구.시.군의원을 뽑는 기초의회의원선거는 3월에 이미 치렀다)

선거일을 며칠 앞두고 강남구청 근처를 걷고 있던 나는 차도와 인도를 하얗게 덮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선전물을 뿌리고 다니는 차를 보았다.

전민연, 전대협, 전노협, 전교조 ‘전’자 돌림인 너희들의 정체는...

전민련, 전대협, 전노협, 전교조...


이놈들은 ‘대한민국’이나 ‘한국’이란 표현대신에 꼭 ‘전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구나!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부정하겠다는 것이냐? 우리헌법과 제반 법규를 무시하며 우리정부를 타도대상으로 삼는 이유도 여기 있었구나! 이들이 모두 ‘전’자 돌림을 부치는데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는데 바로 “혁명투쟁의 승리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상하좌우의 혁명 조직간 연대성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적시한 ‘남조선 혁명승리를 위한 3대 요건’중 ‘대중화전술’에 기인한 것이었구나!

...(생략/ 전대협, 전노협, 전민련 각각에 대한 ‘빨갱이 운동권’의 ‘마각’을 폭로하는 내용)...

배운 놈들이 더 무섭다고 가장 악질적인 것이 ‘전교조’란 자다.

자고로 선생님은 부모와 같다고 했다... 그런데 자기가 노동자라고?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노동쟁의를 하겠다고? 그러고서도 ‘참교육’을 시킨다고? 그러한 선생님께 우리 자식을 맡기라고? ‘참교육’이라는 그럴듯한 너울을 쓰고 우리의 아이들을 꼬드겨 ‘민중혁명’의 제물로 삼으려는 진실로 가증스러운 자들이다...

만천하의 보통시민들이여!

...법을 집행하면 ‘인권’이 어떻고 ‘양심의 자유’가 어떻고 떠드는 가증스러운 자들, 저자들에게 애국시민의 무거운 철퇴를 내리자! 미친개들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대한민국 법의 관용을 베풀어 줄 수는 없다.

애국시민들이여, 일어나자! 그리고 ‘전’자 붙은 저 간악한 무리들을 이땅에서 영원히 추방하자!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완전히 씨를 말리자!!!!

91년 6월
대한반공청년회


분단을 근거로 북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늘 북의 위협을 내세우며 정권을 독점했던 박,전,노 군사독재 3형제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던 1961년부터 1992년 말까지 30여년을 냉전체제로 운영하면서 반공, 반북을 정권유지에 알뜰히 이용했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수지김 사건이다. 1987년, 홍콩에서 부부싸움 중 남편 윤태식에게 살해당한 수지김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치사사건으로 전 국민적 저항으로 위기상황에 빠진 전두환의 위기탈출용 도구가 되어 장세동의 국정원에 의해 ‘남편을 월북시키려 한 북한공작원’으로 조작된다.

아내를 살해한 파렴치범은 독재자를 위한 구원자가 되어 ‘반공투사’로 변신한 뒤 국정원의 보호 아래 잘 나가는 벤처기업의 사장이 되어 언론인과 정치인들에게 수천, 수억의 뇌물을 뿌리며 호의호식을 하는 한편, 수지김의 어머니, 형제자매는 실어증을 앓다가 화병으로 또는 정신이상, 술중독자가 되어 거리에서 죽거나 이혼을 당했다. 이렇게 국가권력에 의해 ‘국면전환용’으로 희생되었던 국민이 한 둘이었던가.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민청, 동백림 사건,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 등...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민주인사들뿐 아니라 가만히 있는 사람들까지 독재집단의 안녕을 위해 ‘빨갱이’로 모는 것은 저들의 ‘취미생활’이었다.

그런 사건들이 조작될 때마다 관제데모에 기꺼이 동원되어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고 북쪽 하늘에 대고 주먹 쥔 팔뚝을 휘두르며 저주를 퍼부어댔던 사람들은 반공연맹, 재향군인회 등 박,전,노 군사독재 3형제가 가꾸어왔던 극우 수구단체들과 보수 종교단체 사람들이었다. 한 마디로 하면 ‘무지하기 때문에 독재정권에 이용되어 눈치 없이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았던 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선거 때가 되면 저렇게 백주에 시내를 자동차로 질주하며 자기들 입맛에 맞는 선전물들을 뿌려대기도 했던 것이다.

(북은 북대로 얼마나 답답했을까. 보내지도 않은 간첩을 보냈다며 북을 향해 종주먹을 휘둘러대니 말이다. 오... 남과 북이 허심탄회하게 과거의 사실을 낱낱이 밝혀, 서로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비는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하루 빨리 성사되기를!!!)

최근 한나라당이 사학법 재개정을 주장하며 외치는 논리가 15년 전 극우 관변단체들이 거리에 뿌려대던 선전문귀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국정치가 아직 구시대에 발목 잡혀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한나라당은 그 주요한 축이며 구 관변단체들은 그들의 수족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8일 몇몇 극우단체 사람들이 동국대에 들어가 “강정구교수 직위해제를 강제하라, 국가보안법으로 엄중 처벌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강정구교수 직위해제를 반대하는 기자회견과 시위를 벌였는데, 가만히 서서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에게 극우단체 ‘선생님’들이 가까이 다가가 학생들을 방해한 모양이다. 밀고 밀리는 실갱이. 욕설도 난무하는 모양으로 돌발영상 편집과정에서 욕을 삭제하는 삐링 삐링 소리도 자주 들린다.

동영상의 제목은 ‘관계정립’

(여학생과 남학생들)
“어머, 어머” “아저씨 뭐에요?”, “저리 가요.”, “저리 가세요.”, “왜 그래요?”, “하지 마세요.” “당신들 왜 이래요?”
(‘선생님’들)
“이 싸가지 없는 **”, “ ‘아저씨’, 뭐여?” “‘당신’이 뭐야, ‘당신’이?”

(학생들)
“왜 때리세요?” “왜 때려요?” “왜 때려?”
(‘선생님’들)
“니들이 반말하니까 자식아 때리지!” “어우 이놈의 자식이” “야 이놈의 자식아”, “이, 이런 놈의 새끼” “선배한테 반말하는 것이, 너희 후배가 할 일이야, 자식아” “어우, 이런...”

(학생들)
“말로 하세요.”, “언제 반말했습니까?”, “후배 때리는 선배가 어디 있어요!”
(‘선생님’들)
“니들은 임마, 부모도 없어?”,“내가 이 자식아, 네 아버지 연세야.”, “왜 이렇게 철부지들인가?”, “니 아버지야 이놈아, 내가”


이런 소동을 벌이고 난후 강정구 교수의 직위해제를 촉구시위를 벌였던 극우단체들은 데일리서프라이즈를 비롯하여 몇몇 언론사가 자기들의 행위를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보도했다며 정정보도요구와 손해배상을 청구했다고 한다. 자기들 “단체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돼 회비와 후원금 확보에 심각한 장애가 우려 된다”는 것이다.

때맞춰 14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한국인의 갈등해소방식: 폭력을 중심으로’라는 연구보고서를 통해 나이 혹은 성역할에 보수적일수록 ‘폭력적’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전통적 성역할에 충실한 사람(집안일은 여자, 바깥일은 남자)이나 나이에 대한 권위주의가 강할수록 가족관계, 친구, 선후배 사이의 갈등해소 방식으로 언어폭력, 물리적 폭력을 더 자주 사용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68혁명은 대학생들이 일상의 삶의 문제들(동서세계의 냉전으로 인한 획일적 사회 분위기, 비좁은 건물, 구태의연한 강의내용과 평가제도, 암기와 주입식에 의존하는 전통적 교수법, 고학력 실업자의 양산, 여성에 대한 억압과 인종차별)에서 출발하여 일으킨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같은 사회학자들은 이를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인간관계를 보다 평등한 인간관계로 바꾸어 놓은, 인류 역사상 프랑스혁명보다도 더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30대 이상과는 말도 하지 말라”며 프랑스사회의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인간관계에 저항했는데 이는 사회구성원들 관계를 보다 평등한 인간관계로 바꾸어 놓는 계기로 작용했다. 동거, 피임기구의 판매가 자유로워지고 사제 간의 경어 사용이 폐지되었으며 공장, 정치, 교육, 방송... 어디에서든 수직적 소통방법은 무너지고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소통이 자리 잡게 되었다.

형님, 선배, 아버지 앞세우며 위계질서 속에서 호통을 치고 싶어 하는, 아직도 냉전체제 속에 길들여져 있는 가부장적인 사람들은 1968년의 프랑스라면 타도대상 1순위였을 것이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프랑스보다 40년 이상은 더 늦는 모양인가.

맞으면서도 꼬박 꼬박 “왜 때리세요?”, “언제 반말 했습니까?”, “말로 하세요.” 이렇게 대응하는 우리 대학생들이 안쓰럽다.(나는 말 잘 듣는 것보다 말이 잘 통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일찍부터 내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에게 존댓말을 쓰지 말라고 했고 지금까지 잘 소통하며 살고 있다.)

학생들에게 이 자식, 저 자식, 싸가지 없는 새끼들... 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당신들. 당신들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회비와 후원금이 들어오지 않을까봐 걱정되어 손해배상을 청구한다고요?

에고 에고...언어폭력, 물리적 폭력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미 지구촌에서 구닥다리로 치부된답니다. 그런 식의 태도로는 아내, 딸, 아들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당신들의 언행 뿐 아니라 당신들의 역사의식에도 문제가 있다는 거, 박,전,노는 당신들을 이용해 왔지만 이제 당신들의 거사를 고맙게 여길 국민은 많지 않다는 거. 그거 좀 알아주셨으면 하네요.

우리는 상호존중이라는 가치 아래 남북 간, 사회구성원들 간의 수평적 관계정립 등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답니다. 이제 당신들의 시대는 갔어요. 됐거든요.



외부 필자의 컬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관/련/기/사
보수단체 난입, 무차별 학생 폭행 동국대 아수라장 /이응탁 기자
“보수단체 회원, ‘×년’ 외치며 머리를 마구 때렸다” /이응탁 기자
‘동국대 사건’ 보수단체 “친북매체 투쟁” 본보 제소 /김현미 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또다시 '병풍특검' 빼든 한나라당

음... 노인네 욕보이고 확인 사살

자충수, 볼만 하겠군...

 

 

또다시 '병풍특검' 빼든 한나라당
이재오 "그간 말로만 얘기했지만 이번엔 제출"
텍스트만보기   김지은(Luna) 기자   
한나라당이 또다시 '병풍' 등 '3대 정치공작 특검'을 주장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은 지난 2002년 대선에서 제기된 이회창 전 총재 장남의 병역비리 의혹(이하 병풍)과 20만달러 수수 의혹, 한인옥씨 10억 수수설 등 '3대 사건'에 대해 2월 임시국회 중 특검법안을 제출하고 '정치공작근절을 위한 특별법' 또는 선거법개정안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한나라당은 지난 해 5월에도 기자회견을 열어 이들 사건에 대해 특검제 도입과 '정치공작근절특별법' 마련을 주장한 바 있다.

이재오 "'3대 정치공작' 때문에 눈앞에서 정권 빼앗겨..."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주요당직자회의에서 "한나라당은 이 세 사건의 배후와 밝혀지지 않은 정치적 의도에 대해 특검법을 제출하겠다"며 "적어도 5·31 지방선거 전에 특검이 실시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원내대표는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대해서도 "이 세 사건의 진상이 국민 앞에 명확히 가려져 앞으로 다시는 이런 정치공작을 벌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도 이런 정치공작에 의해 당선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다면 특검법에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압박했다.

또한 이 원내대표는 "만약 이 세 사건에 대해 지난 대선 중에 판결이 났다면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졌겠느냐. 한나라당으로서는 그야말로 눈앞에서 정권을 두고 빼앗긴, 비열한 정치공작 사건에 의해서 정권을 빼앗긴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면서 이 원내대표는 "집권당이 오는 지방선거나 내년 대선을 앞두고 이런 사건들을 또다시 벌이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다"며 재차 특검제 도입과 정치공작특별법 마련을 강조했다.

한나라당, 지난 해에도 '특검법' 주장... 우리·민주·민노는 '반대'

이에 앞서 한나라당은 지난해 5월 13일에도 기자회견을 열어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당시 대법원이 지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은폐 의혹을 제기한 김대업씨와 이를 보도한 <오마이뉴스> 등에 대한 민사소송에서 1억 6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확정판결을 내린 데 따른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지난 2002년 7월 김씨가 "김길부 전 병무청장과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병역비리 은폐 대책회의'를 열었다"고 주장하고 <오마이뉴스> 등이 이를 보도하자 "허위보도로 대선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며 소송을 제기했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대표는 "지난 대선 중 여당이 제기했던 이 세 사건이 모두 정치공작, 흑색선전이었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며 "앞으로 대선에 이런 악영향을 미치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규택 최고위원 등 당 지도부도 "이 문제에 대해 특검제를 도입해야 한다"며 "끝까지 가야한다"고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지난 해 한나라당은 특검법와 특별법 모두 제출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이재오 원내대표는 "한나라당이 그간 이 세 사건에 대해 그간 특검법을 말로만 얘기했는데 이번에는 특검법을 제출하겠다"고 의지를 보였다.

한편, 한나라당의 특검법 도입 주장에 열린우리당,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이 찬성할지는 미지수다. 지난 해에도 이들 세 당은 "대법원 판결까지 난 사건에 특검 실시는 무리"라며 특검제에 반대한 바 있다.
2006-02-14 11:38
ⓒ 2006 OhmyNews
내가 편집국장이라면...?
이제 네티즌들의 추천으로 오마이뉴스가 바뀝니다.
를 통해 기사를 추천하시면
추천점수에 따라 네티즌 편집판이 만들어집니다.

나에게 감동을 주는 기사, 함께 나누고픈 기사를
추천해보세요!
///////// [현재 0건]
기사가 맘에 드시나요? 좋은 기사 원고료는 기자 개인의 추가원고료 및 기자회원 지원비로 쓰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반론] 왜 한국만화는 여전히 이현세·허영만인가

 

 

 

한국만화가 일본만화 때문에 망했다고?
[반론] 왜 한국만화는 여전히 이현세·허영만인가
텍스트만보기   박형준(ctzxp) 기자   

관련기사
한국 만화, 어떻게 무너졌는가


▲ 동의할 수 없는 보수적 논조의 만화지만, 논리와 전문성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던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만화 <은과 금>
ⓒ 학산문화사
나는 영화뿐만 아니라 만화에도 푹 빠져 지내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도 그렇지만 그동안 나는 일본 만화 중심으로 만화 기사를 써왔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왜 일본 만화만을 소개하느냐는 독자들의 비판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내가 유독 일본 만화를 자주 이야기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국의 만화 마니아들은 영화 마니아들과 마찬가지로 탄탄한 이야기 구조의 만화를 좋아한다. 그들은 "만화는 만화일 뿐"이라는 보통 사람들의 선입견도 가지고 있지 않다. 때문에 마니아들은 특정 분야에서 전문가 못지않은 전문성과 구체성, 인간과 세상에 대한 성찰이 스며든 만화를 좋아한다. 무엇보다 빠질 수 없는 요소는 '독특함'이다.

내가 지금까지 소개해온 만화도 대체로 이런 점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었다. '독특함'과 '치밀한 논리', 그리고 '전문성'이라는 3가지 요소를 갖춘 만화하면 그림체가 다소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열렬히 환호한다. 나 또한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만화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전문성' 부재.

일본은 유독 자국 역사와 관련된 만화를 자주 출간한다. 300여 년 전 사망한 전설적인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와 100여 년 전에 사망한 막부의 치안조직이었던 신선조의 무사들을 여전히 영웅시한다. 하지만 한국 만화에서 우리 역사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한국 만화 몰락의 공범자, 일본만화·만화 대여점·불법 스캔

한국 만화가 몰락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복잡한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면이 많은데 일본 만화 개방, 만화 '대여점'의 탄생, '불법 스캔'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지금은 '산업'에 가까운 규모를 자랑하는 영화업계와는 달리 만화업계는 대부분 규모가 작은 편이다. 때문에 '공짜' 혹은 '저렴함'을 추구하는 네티즌에게 대처할 수 있는 내성을 키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만화는 '가볍게 한 번 읽고 마는 것'이라는, 사람들의 관념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집에서 5분 만 걸어가면 대여점에서 300원(경우에 따라서는 100원)이면 만화를 빌릴 수 있는데 굳이 만화를 구입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공유 사이트의 탄생과 더불어 인터넷으로 '공짜'로 만화를 볼 수 있게 됐다. '불법 스캔' 문제는 만화 마니아들이 통렬히 반성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 만화의 몰락이 단순히 그러한 구조적인 문제에서만 비롯됐을까? 물론 일본 만화 개방의 여파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마이뉴스> 유지호 시민기자가 <한국 만화, 어떻게 무너졌는가>에서 지적한대로 일본 만화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자금력을 앞세워 영세한 한국 만화출판업계를 유혹하며 물밀 듯이 밀려왔다.

▲ 만화 <신암행어사>의 표지
ⓒ 대원씨아이
하지만 독자가 판단하는 것은 다르다. 아무리 일본 만화가 막강한 자금력으로 만화출판업계를 공략했다 해도 한국 만화가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쉽게도 한국 만화는 여전히 '허영만'과 '이현세'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탄탄한 이야기'와 '전문성'을 추구하는 만화 작가들이 아직은 그들밖에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성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소재를 찾으려 하지 않고 단순히 일본 만화의 그림체를 모방하거나 무협 만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부 만화작가들의 안이한 인식도 문제다.

사실 나는 오늘 내가 좋아하는 한국만화에 대한 기사를 쓰려고 했다. 내가 소개하려던 <풍장의 시대>와 <신암행어사> 등은 역사를 소재로 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 일본 만화 못지않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만화가 있다면 독자들은 얼마든지 찾는다. 물론 소재도 꼭 역사일 필요도 없다. 일본 만화는 역사는 물론이고 교육, 경제와 함께 심지어 와인과 소년 교도소 문제까지도 그려내고 있다.

남은 것을 통렬한 자기 반성

영화도 마찬가지다. 몇몇 영화 마니아들은 한국 영화의 풍요 속에서도 '장르 영화 부재' 혹은 '장르화의 부재'를 꾸준히 지적하고 있다. 한국 영화는 안이하게 제작된 블록버스터와 멜로, 코미디가 장악하고 있을 뿐이다.

또 한국 영화감독들은 자신의 개성을 하나의 장르로 고정시켜 독자적인 마니아를 형성하는 데 열성을 기울이지 않는다. 독특한 소재를 이용하거나 전문성이 발휘되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도 드문 일이다.

유지호 기자는 '일본 만화 개방'을 들어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를 주장했다. 하지만 한국 만화의 문제는 '일본 만화 개방' 그 자체보다는 '대여점'과 '불법 스캔'과 같이 '공짜'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본만화보다 판이하게 떨어지는 질적인 문제로 몰락했다는 게 더 정확한 것 같다.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도 그 같지 않을까? 나도 개인적으로는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면 국내 대형 배급사의 눈에 들지 못하는 소규모 영화는 지금보다 훨씬 더 고사 당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한다. 하지만 스크린쿼터 문제를 상당히 냉랭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지적도 영화계가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혹자는 <왕의 남자>도 스크린쿼터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흥행 성적을 낼 수 없었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왕의 남자>가 소위 A급 배우도 출연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따분해 하는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소규모로 개봉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왕의 남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스크린쿼터라기보다는 네티즌들의 입소문이었다. 사람들이 항상 '해외 명품'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작품의 질에 대해서는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작품만 좋다면 국내 만화도 얼마든지 지금의 한국영화와 같은 반열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계와 만화계의 치열한 자기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관련
기사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신문의 제 블로그에도 보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국 만화, 어떻게 무너졌는가

 

 

 

한국 만화, 어떻게 무너졌는가
[주장] 스크린쿼터 없으면 한국 영화가 망하는 이유
텍스트만보기   유지호(ohsulgee) 기자   
나는 만화스토리 작가이다. 90년 <들개이빨>(허영만 그림)을 시작으로 50여 편의 만화스토리를 집필하였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는 한국만화의 황금기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허영만의 <오 한강> <카멜레온의 시>,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재학의 <검신검귀>, 고행석의 <구영탄 시리즈> 등이 쏟아져 나왔다. 주택가 골목길마다 만화방이 들어서 전국적으로 2만여 개가 넘는 만화방이 있었고, 권당 2~5만부가 유통되던 시기였다.

▲ <공포의 외인구단>
ⓒ 고려원미디어
경기가 좋다보니 만화제작은 선불금이 관행이었다. 출판사(자본주)들은 만화가에게 수억의 선불금을 지급했다. 덕분에 스토리작가나 데생맨, 배경맨들도 만화가에게 선불을 요구할 수 있었다. 서점 판매가 아니라 총판을 통해 만화방으로 배달하는 유통구조였고 서점 마진분이 작가에게 지급되었기에 인세는 책값의 30%나 되었다. 아무튼 좋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잘 나가던 한국만화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만화판 사람들의 표현대로 시장 자체가 없어졌다. 98년 정부가 일본만화의 수입을 허용한 순간 일어난 일이다.

출판사(자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만화는 제작비를 선불로 줘야 하며 30%나 되는 인세를 줘야 한다. 그러다 종종 선불금을 떼이거나 손해를 보는 일도 발생한다. 그런데 일본만화는 불과 5%의 인세를, 그것도 '후불'로 주면 그만이었다. 더구나 일본만화에 비하면 한국만화는 경쟁력도 떨어진다. 100여 개의 만화잡지가 있고 5~6백만 부가 판매되는 만화잡지가 여러 개 존재하는 '망가천국'과는 경쟁 자체가 되지 않았다. 만화 원고료만 해도 수십 배나 차이가 난다. 그러니 출판사(자본주)들이 투자 위험 없는 쉬운 돈벌이를 두고 한국만화에 투자하려 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출판사(자본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본만화 수입에 매달렸다. 곧 일본만화의 붐이 일어났다. 골목마다 들어섰던 만화방이 사라졌고 학교 앞 문방구엔 2000~3000원의 덤핑 가격에 일본만화가 깔렸다. <슬램덩크> <드래곤볼> 등은 수백만부가 팔렸고, 사라진 만화방을 대신하여 등장한 대여점의 책장은 일본만화로 가득 찼다. 일본만화를 수입한 업자들은 돈 방석 위에 앉았다. 이후 그들은 일본만화 수입에 매달렸고 일본 출판사와 수입계약을 맺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만화시장이 개방되고 채 1년도 안 되어 일어난 현상이다.

그러자 좀 우스운 일이 일어났다. 일본 만화 출판사들이 한국만화 살리기 운동에 나선 것이다. 한국만화 시장이 지나치게 축소되면 비난 여론이 일어날 것이고, 자칫 일본만화 개방 정책에 변화가 오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일본만화를 수입할 수 있는 자들의 자격 조건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만화잡지를 일정부수 이상 발행하는 출판사만이 일본만화를 수입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 <슬램덩크>
ⓒ 대원
99년경, 한국에 책 제작비용도 안 되는 1천 원짜리 만화잡지가 우르르 등장했던 것은 이런 까닭이다. 어쨌든 이 덕분에 대본소 만화시절 유명 만화가에게 고용되어 남의 그림을 그려주던 만화가들이 작가로 데뷔할 수 있었는데, 고료는 정상 고료의 3분의1도 안 되는 헐값이었다. 그런데 한국만화가 무너지는 것에 대해 한국정부가 전혀 개의치 않자, 일본 만화 출판사들이 시름을 덜었는지 그 자격 조건을 내세우지 않게 됐고 천 원짜리 잡지들도 곧 사라졌다.

지금 한국에선 대부분의 만화잡지는 사라졌고, 과거 20~30만부씩 발행되던 어린이 만화잡지들도 겨우 2~3만부가 팔린다고 한다.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한 몇몇 순정만화 잡지와 스포츠신문 만화 시장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만화 시장이 무너진 것이 일본만화 개방의 탓만은 아니다. 몇몇 유명 만화가들이 다른 만화가들을 수십 명씩 고용하여 대본소 만화를 대량생산하는 공장시스템이 오래도록 계속되었고 스토리작가의 권리는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때문에 다양한 캐릭터를 가진 신예만화가들이 등장하지 못했고 질 높은 스토리도 나오지 않았기에 만화시장이 점점 줄어들었던 것이다.

만화계 일각에선 이런 공장시스템이 무너져야 한국만화가 산다며 일본만화 수입 개방을 찬성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한국만화 시장이 이토록 무참하게 무너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왕의 남자>
ⓒ 이글픽처스
스크린쿼터가 없다면 곧 한국영화도 무너질 것이다. 한국영화가 이만큼 발전한 것은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기에 가능했다. 스크린쿼터 감시연대가 활동을 시작한 뒤, 극장주들은 스크린쿼터 일수를 지켜야만 했다.

극장주들은 한국영화를 틀어야만 했고, 극장 수입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관객이 찾는 한국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곧 한국영화에 대한 대자본의 투자가 이루어졌고 역량 있는 감독과 배우들이 등장하고 관객들이 호응하면서 한국영화의 붐이 일어난 것이다(그 전에는 자본주들이 한국영화에 투자했던 이유는 할리우드 영화를 수입하기 위한 자격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만일 스크린쿼터가 없어진다면 만화계에서 일어난 일이 영화에서 똑같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간단한 이치이다. 문화산업의 자본은 문화의 논리가 아닌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에 투자했던 삼성, 대우, 엘지 등의 대기업들이 몇몇 작품에서 손해를 보자 주저 없이 빠져나간 것이 자본의 논리다.

한국영화가 아무리 잘 나가도 아직은 대박 나는 영화보다 손해 보는 영화가 더 많다. '리스크'가 높은 것은 문화 산업의 본질적 속성이기도 하다. 극장주들은 리스크 없이 안정적으로 수익을 보장해주는 할리우드 영화를 상영할 수 있다면 굳이 리스크가 높은 한국영화에 투자를 할 이유가 없어진다.

또 할리우드 대자본이 마음만 먹으면 유통구조를 통해 얼마든지 한국 영화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 블록버스터 배급을 무기로 극장주가 한국영화 상영을 못 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도 있고, 더는 한국영화에 투자할 필요를 못 느끼도록 수입 가격 등에서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당장 경쟁력이 있으므로 만화처럼 한순간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에 대한 투자는 줄어들 것이고, 한국 영화의 편수도 줄어들고 시나브로 관객들도 떨어져 나갈 것이다.

미국이 스크린쿼터 문제를 이토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단지 돈의 논리만이 아니다. 문화는 의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라는 당의정 속에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을 침입하는 미국의 논리가 배어 있다.

사르트르가 "인류가 역사를 통해 쌓아놓은 문명적 가치와 도덕을 한순간에 야만으로 돌려버린 전쟁"이라고 말했던, 300만의 베트남 민중이 희생되었던 베트남 전쟁의 만행을 미화하고 포장한 <람보>를 보며 환호했던 80년대 초의 암울했던 시기로 되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관련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