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파견 간부·병사 7명의 육성고백…홍보영상과 현실은 너무 달랐다 … 부대 안에 갇혀 고립감과 답답함, 이유 없는 증오에 사로잡힌 젊은이들

▣ 김민경 인턴기자 yukishiro9@naver.com
▣ 이혜민 인턴기자 taormina@hanmail.net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1진(2004.8~2005.2)·사단 직할대 행정병 출신 ㄱ(23)씨

“그곳에 가면 대가를 치르리라”

어릴 적 <머나먼 정글>이나 <패트리어트> 같은 영화를 보면서 군인들의 희생정신과 의리,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동경한 때가 있었다. 선생님이 장래희망을 물으면 나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군인’이라고 대답했다.


△ 침략전쟁에서부터 평화 유지 및 재건복구까지. 자이툰은 그 사이 어디쯤에 위치할까? 자이툰 부대원들이 내무반 앞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

주변 사람들을 꼭 지켜주리라는 허황된 약속을 하기도 했다. 사실 조국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할 수 없었던 나로선 그저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 애국조회 시간의 묵념,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따위가 ‘주어진’ 조국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대학에 오게 됐고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 가던 무렵, 통과의례처럼 군대라는 곳에 가게 됐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꿈’이 실현된 것이다. 우습게도 군대 생활에는 잘 적응했다. 규칙적인 생활과 강요된 규율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비판적 사고를 빼앗아갔다. 국가가 부여해준 국토 방위의 신성한 의무는 계급사회의 권위를 통해 복종만을 강요했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러던 차에 2003년 제2차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다. 논란 끝에 파병이 결정됐다. 기회는 누구에게도 열려 있었다. 난 숨 막히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다. 알량한 반전의식을 뒤로한 채 그곳의 현실을 보기 위해 지원을 했다. 2004년 뜨거운 여름, 많은 시민·학생들이 파병을 반대하며 기지 입구를 막았지만 여명도 트지 않은 이른 새벽 헬기를 타고 우리는 공중으로 유유히 그곳을 통과했다.

이라크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아르빌은 저항세력이 존재하는 한 전쟁터였지만 한국군은 우리 안의 ‘영토’에서 평온했다. 이따금 총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우리는 우리가 고용한 쿠르드 용병의 보호 속에서, 화분을 키우고 전갈 채집을 하면서 조금씩 이곳 갈등의 땅 이라크에 오게 된 이유를 망각하기 시작했다.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누구를 위해 총을 들고 이 먼 곳까지 왔든 간에 명예를 얻을 수 있었고 한 달에 1809달러의 생명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용병’이라 불렀다. 그 고용주가 미국인지 한국인지 아니면 건설업체나 석유기업인지 불분명했지만 말이다.

가끔씩 사고가 나기도 했다. 무리한 기지 건설 작업 중에 발목이 잘리는 병사, 전류가 흐르는 샤워실 손잡이를 잡고 감전으로 쓰러진 병사, 도색 작업 중에 기계 폭발로 온몸이 페인트와 섞여버린 채 숨진 하청 노동자….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는 여럿이었다. TV에서만 볼 수 있었던 대통령이나 장관, 국회의원들이 조금의 돈과 음식을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포옹하고 악수도 했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시켰다.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군.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전우들을 믿었을 뿐이다.

몇 명의 정신장애를 보이는 녀석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소문일 뿐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누구도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다. 이라크 저항세력은 어느새 동맹국 미국의 적이 아닌 우리의 적이 되어 있었다. 쿠웨이트 버지니아 캠프를 출발해 바그다드를 거쳐 아르빌로 이동하는 파발마 작전(지상 이동 작전)을 수행한 내무실 동료는 처음으로 살인에 대한 충동을 가졌노라 고백한 적이 있다. 운전병인 이 녀석은 차량 앞에 나타나는 어떤 것도 밀어버리라는 상부의 명령에 의구심을 갖고 재차 확인을 해야 했다.


△ 자이툰 사단장은 이라크 파병이 또 다른 ‘한류’라고 말한다. 이라크인들에게도 과연 한류로 받아들여질까? 2004년 10원 자이툰부대 교대병력 300여명이 환영을 받으면서 대한항공 전세기에 몸을 싣고 있다.

바그다드를 경유하는 순간부터 총알이 옆으로 튀고 로켓포가 날아와 폭발할 때 묘한 흥분을 느꼈다고 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뭐든 밀어버려도 됩니까?”라고 물었다. 옆에 탑승한 그 간부는 힘주어 말했다. “그래, 다 밀어버렷!”

우리는 누군지도 모르는 이 땅의 주인을 향해 증오를 품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증오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김선일씨가 죽었을 때도 그랬다. 우리는 그의 죽음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의 죽음으로 와 닿지 않았다. 다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연기된 파병이 아쉬웠으니까. 하지만 누구도 우리를 쉽게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또한 피해자라는 것은 일말의 변명 이전에 나의 진심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라크에서는 한국군이 우리만의 기지 안에 갇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쿠웨이트에서 여러 동맹국 병사들을 만나보았지만 이번 전쟁이 옳다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한국군은 철군 계획도 없다.

자이툰에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경험자로서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 군생활이 힘들어서 또는 무료해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면 당신은 훗날 더 힘들고 더 무료해질 것이라고.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면 그 돈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공병대대 간부 ㅈ씨, ㅅ씨(2진)

“놀고 있는 인원이 너무 많다”

“파병, 왜 하냐”라고들 말한다. 직접 갔다온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들 자기 열정으로 간 거다. 나도 ‘가서 죽어도 좋다. 잘 다녀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다녀온 지금도 자이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은 없다. 사실 자이툰보다 한국 부대가 더 힘들다. 우리는 “죽고 싶은 거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낫다”라고 얘기하곤 했다.

물론 자이툰에서도 스트레스가 있다. 외롭고, 힘들고, 고생도 한다. 하지만 한국에 비하면 훨씬 낫다. 먼저 간 선배들도 “이라크 와라, 돈도 많이 벌고 좋다”고 얘기해줬다. 나중엔 돌아오기 싫을 정도였다.

하지만 거기서 놀고 있는 인원이 너무 많다. 거기 가서 돈 받은 사람으로서는 좋았지만, 세금 내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는 세금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한 명이 갈 때마다 월급이며 항공 비용, 장비, 필수품 등 비용이 상당하다. 안전한 곳인데 경계 인원이 너무 많다.

공병도 너무 많다. 일반인들의 인식과 달리 공병이 무슨 큰 건물을 지어주는 게 아니다. 우리 군이 하는 건 공사 발주와 감독뿐이다. 민사협조본부에서 현지 감독관을 고용하고, 감독관이 현지 일꾼을 고용해서 일을 하면 공병 간부가 한 달에 한 번 나가서 현장을 확인하고 공사 일지를 체크한다. 그것도 소대장 1명이 가서 한다. 병사들은 그런 일과는 관계가 없다. 병사들이 현지인을 위해 하는 일은 도색, 전기 수리 등 작은 일이다.


나도 간부지만 6개월 주둔 기간에 예닐곱 번 나가봤다. 대부분의 공병이 주둔지 안에 머물며 우리 군이 주둔하는 데 필요한 시설을 만든다. 밖에 한 번도 못 나가본 애들이 많으니 “니네도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나가봐야지” 하고 배려 차원에서 일부러 내보내주기도 한다.

파병의 당초 목적이 재건사업인데, 가서 우리 주둔지를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안으로만 계속 움츠러든 것도 문제다. 높은 분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안전’이라서, 일을 많이 하는 것보다 사고 없이 복귀하는 걸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파병이 국익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말 그들에게 쓸모 있는 걸 제공했다기보다는, 국가 이미지를 위해서 한 거 아닐까. 미군이 옛날에 우리나라에 껌과 초콜릿을 나눠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미국의 이미지가 좋은 것처럼, 그런 효과가 있을 거라고. 개인적으론 쿠르드 사람들에게 건물을 지어주고 대민사업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전투병을 보낸다면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이익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통신대대 행정병 ㅈ씨(1진)

“어려운 집안 출신이 대부분”

인사과에 있었기 때문에 부대원들의 출신이나 배경을 볼 수 있었다. 절반쯤은 부모 중 한 분이 없거나 두 분 다 없는 사람들이었다. 반수는 집이 어려워서 빚 갚으러 왔다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집도 내가 이라크에 간다고 할 때 반대가 많았다. 사실 어지간한 집에선 잘 안 보내려 하고 좀 어려운 집에서 오는 편이다. 지역별로도 지방 출신이 많고 서울 출신은 별로 없었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서울 출신이 많아야 하는데, 80% 정도가 지방 출신이었던 것 같다. 우리 대대에서도 서울 4년제 대학을 다니는 사람은 6명뿐이었다.

의무대대 의무병 ㄱ씨(2진)

“편하게 해주지 않았다면 미쳤을 것”

거기 있는 동안 위에서 스트레스 관리를 많이 해줬다. 음악회가 열리고 농구시합·배구시합을 하며 회식도 한다. 병사들을 교육할 때 계속 강조한다. “너희는 대한민국에서 뽑아온 최고의 요원”이라며 자부심을 심어주고 치켜세워준다. 그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위와 향수병만 빼면 자이툰이 한국보다 편했다. 편하게 해주지 않았다면 거기선 미쳐버릴 거다. 자이툰에선 점심 시간이나 쉬는 시간도 확실히 보장해준다. 자기 할 일만 하면 간섭하지 않는다. 내무반 시설은 한국보다 좋다. 개인 침대와 수납장, 에어컨, TV… 플레이스테이션도 많이 하고, 디지털 카메라와 MP3가 허용되니까 음악 듣고 KBS월드도 본다. 다른 부대에서는 농악, 태권도 시범, 제빵 기술 교육도 했다.

특공대 ㅇ씨(2진)

“오늘 하루 참으면 7만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 이라크에 다녀오면 남을 게 많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녀온 지금 생각해보니, 남은 건 돈뿐이었다. 다른 건 별로 남는 게 없었다.

영내에 머무르는 동안은 공격받을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초소 근처에 떨어진 폭탄 파편이 튀어서 장비가 망가진 일은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안에 있으니까 안전한 편이었다. 처음엔 전쟁터라서 좀 긴장도 하고 무섭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테러첩보가 들어와도 별일이 없고, 방탄조끼를 안 입어도 별일이 없으니까 점점 무뎌진다.

거기 있는 건 정말 답답했다. 그런 느낌은 다들 받았을 것 같다. 6개월 동안 밖에도 못 나가고 계속 같은 사람들이랑 지내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다. 그곳 생활은 정말 지루하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다. 그때는 동기들과 “오늘 하루 참으면 7만원!”(웃음), 그러면서 버텼다. 처음 이라크 갈 땐 “돈 안 줘도 가겠다”는 생각으로 갔다. 돈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새로운 경험을 원한 건데, 계속 있다 보니 결국 의미가 없더라. 그나마 돈이라도 받아서 좋은 거다. 그래도 한국에선 훈련이 있고, 준비하고 나가고 정비하고 교육하지만, 자이툰의 하루 일과는 오전에 근무 나가고, 밥 먹고, 작업하고, 밥 먹고, 근무 선다. 쉬는 시간에도 작업 준비를 한다. 피곤하고 지루했다. 거기선 병사 개개인이 전부 총과 실탄을 가지고 다니까, 딴 생각 못하게 하려고 위에서 계속 일을 시키는 거 아니냐는 생각도 했다.

수송대대 운전병 ㅅ씨(3진)

“나라를 위한 삽질이었나”

자이툰 홍보 동영상을 봤다. 어려운 점은 다 빼놓고 좋은 거만 찍어서 만들었더라. 이라크 아이들과 같이 놀고 웃는 장면이 나오는데 우린 계속 힘들게 삽질만 했다. 이제는 언론에서도 자이툰은 잊혀진 것 같다. 예전엔 교대병력 갈 때 신문에 조그맣게라도 나왔는데 이젠 다들 관심이 없다. 나도 잊고 있었다.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난다. 자이툰에 대해 누가 물어봐도 “그냥… 별로 안 위험하고, 뭐 괜찮았어” 정도밖에 할 말이 없더라.

가기 전에는 기대가 컸다. 돈도 무시할 수 없었고 25일 동안의 휴가도 정말 큰 유인이었다. 하지만 거기 있는 동안 ‘자이툰, 이거 다 헛수고 아니야’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해봤자 한국에 도움 되는 건 없는 게 아니냐’ 하고 허무할 때가 많았다. 나라를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좋은 경험을 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우린 거기 돈 벌러 간 것뿐이지.

본부 행정병 ㄱ씨(2진)

“세탁기 때문에 싸움 터지기도 했다”

‘내가 어떤 것까지 해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자이툰에 지원했다. 일종의 도전인 셈이다. 막상 가보니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달랐다. 위험하진 않았지만, 신문에서 ‘이라크를 도와주러 간다’ ‘평화를 위해 간다’고 해서 그럴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가면 6개월 동안 똑같은 곳에서 반복되는 일만 한다. 하루 일과가 이렇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8시에 사무실 가서 일하고, 11시쯤에 점심 먹고,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낮잠을 잔다. 너무 덥기 때문에. 그리고 오후 3~4시에 일을 더 한다. 원래는 4시에 일과가 끝나고 자유시간을 가진다.

그런데 도착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박격포 사건’이 터졌다. 그 일이 터진 뒤부터 4시에 일과가 끝나면 컨테이너 주변에 둘러쌀 모래주머니를 만들었다. 컨테이너가 몇백 개 있으니까 일이 엄청 많았다. 게다가 그렇게 만든 모래주머니가 햇빛을 오래 받으면 잘 터진다. 그래서 무너지면 다시 만들고, 다시 쌓는 작업이 끝없이 계속됐다. 한국에서도 안 한 삽질을 원없이 했다.

스트레스가 많은데 밖에는 나갈 수 없다. 납치 같은 거 생기면 한국에서 철군하라고 할 테니까 못 나가게 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 다들 예민해져서 싸움도 많이 난다. 세탁기 때문에 싸운 경우도 있다. 남의 빨래 빼내고 자기 빨래를 돌리다가 싸움이 났다. 한쪽이 코뼈가 부러져서 때린 쪽이 결국 ‘원복’(귀국 조처)됐다. 대책으로 체육대회 같은 걸 열어주는데 더 스트레스 받는다. 설문조사도 하는데 맨 위에 군번이랑 이름 다 쓰는 설문조사다. 거기다 누가 사실대로 쓰겠나. 한때 내가 쓴 설문지가 바로 높은 사람한테 가서 그 사람이 이거 읽고 고쳐주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이름까지 밝히고 솔직하게 썼다. 누가 스트레스를 주냐는 문항에 부대장 이름을 써냈다. 나중에 부대장이 다 읽고 날 불러다 엄청 욕을 하더라.

쿠르드족을 돕긴 도운 것 같은데 그게 국익에 도움이 되는진 모르겠다. 그리고 정말 돕고 싶었다면 군대에 들일 예산을 다른 쪽에 썼다면 훨씬 더 많이 도와줬을 것이다.

국방부 홍보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애들이랑 놀고 민사작전(재건·복구)을 한 사람은 소수다. 우리가 거기에 간 목표는 뭔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무사히 돌아오는 거다. 대외적으론 평화 재건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진짜 이유는 미국이 요청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 거 아닌가. 군인이 2년 동안 3천 명씩 서너 번 다녀갔는데 아무도 안 죽었다는 건 오히려 신기한 일이다. 하지만 그건 달리 말하면 그만큼 외부 활동을 안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냐면, 바그다드 주둔 미군한테 폭탄 테러가 났다 하면 우리도 문 다 걸어잠그고 조용히 지낸다. 한 15일 지나면 그제야 나가서 (쿠르드인들에게) 사탕을 나눠준다. 또 어디서 일이 났다 하면 다 들어와서 죽은 듯이 지낸다. 명분 없이 간 파병 아닌가. 거기서 우리끼리 하는 말로 “이라크에 가는 이유는 군 간부들을 진급시켜주기 위해서다. 병사들은 ‘뒤치다꺼리’ 하러 온 거다”고 할 정도였다.


“파병 이유는 한-미 동맹 강화”

자이툰 출신 100명 설문조사… 절반 이상이 한국과 비슷하거나 더 큰 스트레스 받아

벌써 1만여 명이 다녀왔다. 2004년, 파병에 대한 찬반 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자이툰은 도망치듯 이라크로 떠났다. 파병 반대 시위대가 경기 광주 특전교육단 입구를 막으며 자이툰의 출국을 저지하려 했고, 군은 이를 피해 부대원을 하루 일찍 빼돌리거나 새벽에 헬기로 ‘야반도주’시켰다.


△ 자이툰 부대의 외곽 경계는 쿠르드 민병대의 몫이다. 그래서 농담처럼 쿠르드인들이 자이툰부대를 지켜주고 있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촌극을 벌여야 할 만큼 한국군의 파병을 둘러싼 논란은 뜨거웠다. 하지만 떠나는 그들에게 집중됐던 세간의 이목은, 막상 이라크에 다녀온 1만여 명의 장병들이 사회에 복귀해 있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흩어져 있다. 병사 개개인이 그곳에서 실제로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돌아왔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한겨레21>은 자이툰 출신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조사는 지난 8월1~21일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진행됐다. 대상자는 귀국한 1진부터 3진까지의 전 자이툰 부대원 중 현재 전역한 이들이다.

‘자이툰이 주둔하는 실제 이유가 뭐냐’는 물음엔 다수가 ‘미국의 요청과 한-미 동맹의 강화를 위해서’(41명)라고 답했다. ‘이라크 재건 복구’(27명)와 ‘평화 유지’(7명)라고 답한 전역자는 그리 많지 않다. 미국의 요청과 동맹관계 때문에 한국군이 끌려가듯이 이라크로 파병됐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자이툰의 주둔 이유가 ‘국내 기업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본 응답자도 17명이나 됐으나, 인터뷰 과정에서 만난 이들 가운데 국내 기업들이 성공적으로 이라크에 진출하고 있다고 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자이툰 생활에 대한 장병 개인의 전반적인 만족도는 높은 편이었다. 자이툰부대에 지원하며 기대했던 것들을 실제로 얻었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63명이 ‘기대 이상 얻었다’고 답했다. 이어 ‘그저 그렇다’(22명) →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10명) → ‘잘 모르겠다’(5명) 순으로 나타났다. 파병을 지원한 이들이 기대한 것은 ‘새로운 경험’(71명)이 압도적이었다. 인터뷰에서 만난 자이툰 부대원들은 “외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비행기도 타보고 외국 사람도 만나봐서 시야가 넓어졌다” “남들은 할 수 없는 특이한 경험을 원했다” 등의 의견을 붙였다. 그 외에 ‘파병 수당을 얻기 위해서’(11명) → ‘한국에서의 군생활 중 답답함을 느껴서’(8명) → ‘취직이나 진급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4명) → ‘이라크인을 도와주러 간다는 자부심을 느껴서’(1명) → ‘기타’(5명) 등의 순이었다.

병사들이 느끼는 자이툰 생활에 따른 스트레스는 한국에 있을 때와 비슷하거나 컸다는 응답이 예상외로 많았다. 한국과 ‘비슷했다’(24명), ‘훨씬 컸다’(13명), ‘다소 컸다’(18명)는 응답이 절반을 넘었다. 한국에서보다 스트레스가 ‘적었다’(31명), ‘훨씬 적었다’(13명)고 답한 사람은 모두 44명이었다.


△ 이들은 외부의 위협보다 지루한 일상과 싸우고 있다. 자이툰 부대원들이 내무반에서 전투식량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자이툰에서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답한 응답자만을 따로 떼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선후임이나 간부들과의 관계’(10명) → ‘답답한 환경’(5명) → ‘위험 노출’(2명) → ‘파병에 대한 회의감’(1명)이란 응답이 순서대로 나왔다. 향수병과 과도한 업무량 등 ‘기타’ 의견은 11명이었다. 자이툰이 내전 중인 이라크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에 주둔했지만, 병사들의 절반은 외부의 공격에 대한 위협을 어느 정도 체감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평소 안전의 위협을 어느 정도 느꼈냐’는 물음에 ‘매우 크게 느꼈다’(3명)와 ‘어느 정도 느꼈다’(44명)가 ‘별로 느끼지 못했다’(43명)과 ‘전혀 느끼지 못했다’(9명)와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켓포 피격 사건, 독극물 테러 미수 사건 등 간헐적인 외부의 위협이 전쟁터에 와 있다는 인식의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자이툰 출신들이 거의 하나같이 첫 번째로 꼽는 불만인 울타리 안의 답답한 생활도 조사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응답자 중 67명이 6개월 동안 0~6, 7회 바깥출입을 했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는 응답자만 23명에 달했다.

병사들 개인의 차원에서 당초 이라크 파병의 명분이던 이라크 평화 유지와 재건 사업의 성공 여부에 대해선 긍정적 평가가 절대 다수였다. ‘다소 성공적이었다’(50명)와 ‘매우 성공적이었다’(28명)는 응답은 절반을 훨씬 넘었다. ‘거의 성공적이지 못했다’(5명)와 ‘전혀 성공적이지 않았다’(3명)는 응답은 소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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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6 15:40 2006/09/06 1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