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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생각

드문드문 생각나는 기억들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너무 많지 않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한다. 그동안 엄마와 그 많은 세월을 살아왔는데..... 언젠가 엄마에 대한 자서전을 하나 써드리고 싶은 소망이 있다.. 혹시 작은 수필집이라도.. 이를 위해서 엄마의 이야기를 여기에 적어보아야 겠다. 조금씩 생각나는대로...

 

(1) 엄마, 분유를 찜통에 찌다

 

오늘 나는 즉흥적으로 만든 일명 우유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다. 그냥 간단하다. 영화광인 나는 영화 한편을 보느라 저녁을 건너뛰어야만 될 위기에 처했고, 이때 냉장고에 우유가 있고 콩물이 있길래 우유와 콩물을 반반씩 부어 끓였다. 그랬더니 크림처럼 걸죽하고 제법 맛이 났다. 여기에 라면 반으로 잘라 넣은 것이 전부.. 쫄깃한 라면을 젓가락으로 건져서 올리브오일과 간장을 섞은 소스에 찍어먹는 것이 내가 개발한 요리이다. 그래도 맛있었다. 다음에는 정말 폼나게 크림 스파게티를 만들어봐야 겠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먹으면서도 엄마생각을 했다. 옛날에 충주 달천강가에 살 때 "물난리"가 났었다. 어느해 여름, 날짜는 8월 19일 이었는데, 비가 너무 와서 강이 범람한 것이다. 쓰나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강물이 허리춤까지 오는 것을 저만치서 바라보면서 강둑을 서둘러 올라 산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 다음날 산위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황토강으로 묻혔었다. 그 강물은 지금도 계속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이다.

이 물난리로 인하여 그해는 학교수업이 중단되고 몇달간 나와 동생은 외삼촌댁에서 기거했었다. 몇달 후 집에 돌아가니, 어느새 기와집이 덩그러니 새로 지어져 있다. 아버지의 친척분이 부랴부랴 1-2개월만에 지은 집이란다. 달랑 방 3칸에 부엌이 하나있고, 방들의 중간에는 마루가 있는게 전부 였다. 화장실은 당연히 밖에 원시적인 형태로 존재했기때문에 집안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터였다. 나는 그때 알았다. 집을 이렇게 빨리도 짓는 구나.

엄마는 우리가 돌아오자, 그때 구호품으로 받아 놓았던 미제 분유가루를 시루에 쪄 주었다. 이 대목이 계속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다. 우유는 고사하고 분유가루를 처음 본 엄마는 이것을 어떻게 요리하는 줄 모르셨던 것이다. 엄마는 분유를 밀가루처럼 생각해서 물에 개어서 시루에 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쿡쿡 웃음이 나온다. 찐 우유가루는 정말 딱딱했던 것 같다. 바로 먹어도 시원치 않은데 조금 나두면 딱딱하다 못해 이빨도 안들어간다. 그것을 씹다 못해 빨아먹었던 생각을 하며 엄마가 생각나서 웃음이 절로 난다.

 

(2) 엄마, 닭을 내다 팔다

 

물난리가 난 후 며칠만에 우리는 산에서 내려왔었다. 그 당시 볏집으로 지붕을 해 얹은 흙집인 우리집은 온데 간데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웰빙집이었는데...... 엄마와 우리가족은 산밑에서 며칠 임시로 거주하면서 집에 가서 흙더미속에 남은 것들을 추렸다. 추릴 것도 없었는데, 우리 집은 과수원을 하고 있었고, 엄마는 과수원 모퉁이에 닭을 몇십마리 기르고 있었다. 이 닭들이 다 죽어있었던 것이다. 어찌나 마음이 상했던지...... 그러나, 엄마는 정말 강했다. 엄마는 슬퍼할 틈도 없이 그 닭들을 깨끗이 씻어서 충주 장에 내다 판 것이다.

그때 엄마가 지하수를 길어 올리는 펌프옆에 앉아서 닭을 다듬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3) 엄마, 사과장수를 하다

 

아버지는 국민학교 선생으로는 7남매인 자식들 학교도 보낼 수 없음을 깨닫고, 충주 달천에서 과수원을 하셨다. 그러나, 국민학교 선생이 과연 과수원을 잘 하실수 있었을까? 아버지는 겨우내 무슨 영농책자를 들여다 보셨지만, 나무에 달린 사과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았다.

결국, 사과들은 영세규모로 수확이 되었고, 이것을 도매로 넘기기도 어려운 형편에 처했다. 이때 엄마의 힘이 또 나왔다. 엄마는 리어커에 사과를 궤짝채 담아서 충주 시내 영화관 근처에서 리어커를 세워두고 사과를 파셨다. 이때 아버지도 물론 같이 가셨고, 큰 오빠도 동원이 되곤 했다.

우리는 엄마를 기다리린 것인지, 엄마가 들고 들어오시는 크림빵을 기다린 것지도 모르게 밤늦도록 엄마를 기다렸다.

 

(4) 엄마, 시를 짓다

 

몇년이 지나 우리집은 충주시내로 나왔다. 아버지는 과수원으로도 7남매를 키우기 어려우셔서 결국, 충주 시내에서 조그만 문방구점을 시작하셨다.

드디어 나는 충주시내에서 국민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일명 남한강 국민학교이다. 나는 지역이름이 들어가 있는 이 학교가 무척 좋았다.

나는 촌에서 온 아이라 기가 죽어 있을 줄 알았는데, 전해 그렇지 않았나보다. 3월달에 새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시내학교로 전학을 갔었는데, 나는 가자 마자 보기좋게 1등을 했다. 아버지가 어찌나 신기하게 생각하시고 좋아하시던지.. 그 기억이 생생하다. 아무도 내게 그런 기대를 안했었나보다..

어느날 담임선생님은 내가 쓴 몇개의 동시들을 보기좋게 복도에 전시하시더니, 나보고 문예반을 하라고 하셨다. 나는 뜬금없이 문예반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5월달 쯤 탄금대로 전체 국민학생들이 소풍을 가는날 도내 글짓기 대회도 같이 있었다. 나는 그 대회에 나가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왠일, 내가 너무 긴장했나보다. 아침에 설사를 하고 열이나고.. 도저히 못가겠는 거였다.

이때 나는 아마 숨고 싶었다보다.

그런데, 엄마는 내 속마음을 아셨는지 내 손목을 잡아 끌고는 탄금대로 향했다. 도착하니 막 백일장이 진행되려고 하고 있었다. 시의 제목이 주어졌다. "꽃"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난감했다. 꽃이라니...... 한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꽃이다.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백일장 근처 풀밭에 앉아서 멍하니 있는 나에게 엄마가 슬며시 다가와서 힌트를 주셨다^^ 시를 한번도 읽어보지 않으신 엄마인데......엄마는 외할아버지께서 여자는 배우면 안된다면서 안가르쳐서 배우지 못한 대표적인 한국여성이다. 외할아버지네는 매우 잘 사셨다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지금도 이 생각만 하면 외할아버지가 정말 밉다..

어쨋든 엄마는 내게 많은 힌트를 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엄마가 시를 읊고 내가 받아적는 수준이었다..

지금 언뜻 생각나는 것은 "꽃이 피었네..이 산에도 저 산에도 예쁘게 피었네...꽃은 이내 아가 얼굴이 되었네.. " 등등 이었던 것 같다.... 어쨋든 나는 그렇게 엄마의 읊조림을 대부분 적고는 마지못해 내고 나왔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얼마 뒤에 전교학생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 앞으로 내 이름이 불려졌다. 내가 시 부문 장려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놀랄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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