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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16
    엄마와 월악산(1)
    봄-1
  2. 2012/07/16
    엄마와 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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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1/06/27
    엄마는 무엇을 왜 챙피해할까?
    봄-1
  4. 2011/06/27
    아침 꽃잎
    봄-1
  5. 2011/04/11
    엄마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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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9/10/04
    흙묻은 기장떡 (4)
    봄-1
  7. 2007/05/21
    음성장에 가던 엄마(1)
    봄-1

엄마와 월악산

엄마는 1099나 되는 월악산 정상에 올랐던 적이 있다. 그것도 한 겨울에 흰 운동화만 신고 말이다.

 

어렷을적에 나는 산에 오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 한 겨울에 방학이라 충주에 내려온 나는 충주에 있는 친구들과 산에 가기로 했는데, 날씨가 너무 춥고 눈이 와서 그런지 모두들 안가겠다고 하면서 나오질 않았다. 나는 그래도 산에 꼭 가야겠다는 성미에 급기야 엄마에게 같이 가자고 졸랐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엄마와 나는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눈이 온 산인데도 무슨 생각으로 운동화를 신고 올랐을까? 아니 그 당시에는 등산화 하나 없어서 그냥 운동화를 신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마애불까지만 가기로 했지만, 엄마는 내가 언제 또 와보겠냐?면서 딸덕에 산에도 오르게 되었다고 하시며 기어이 정상을 향해 한발을 내딛었던 것 같다. 그때 사진기도 하나 없이 올라갔다 내려왔던 것이 좀 아쉽다..

 

간신히 정상까지 올랐으나 내려가는 것은 더 문제였다. 응달에 눈이 쌓여서 운동화로는 도저히 미끄러워서 내려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엄마가 하신 것은 그냥 눈위에 주저앉아서 눈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나도 그렇게 따라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두 모녀는 월악산 눈쌓인 계곡을 그대로 주저앉아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미끄러지면서 내려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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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절

엄마는 아주 젊으셨을때부터 절에 다니셨다. 엄마는 정말 절하러 절에 다니신 것 같다. 나는 엄마를 따라서 절에 가서 정말 절을 많이 했다.

 

충주에서 버스를 타고 신니면 방향으로 한참을 가면, 버스는 이내 넓은 논들 사이에 단 하나의 길인 신작로위에 우리를 내려놓고 휑하니 가버렸다.

 

떡을 하셨는지 쌀을 가지고 가셨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마는 머리에 큰 광주리를 이고 앞장서서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절은 산꼭대기에 있어서 꼬박 몇시간을 걷는지 모를 정도로 많이 걸었다.

 

얼마를 걸어올라갔는지 모를 정도로 올라갔을 때 내 앞에 나타난 절은 매우 실망스럽게도 허름한 절이었다. 스님도 머리도 대충 깎으시고 가족들도 거느리시고 계신 그런 절.. 그 절 꼭대기에는 산신당과 칠성당이 있었다. 칠성당에는 호랑이와 신선이 서 있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엄마는 꼭 이 칠성당에 들어가셔서 절을 하셨다. 나는 엄마 옆에서 따라서 절을 했다. 나는 절욕심도 많아서 엄마가 하는대로 그대로 따라했다.

 

나는 이후에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면서 그것이 샤마니즘 토테미즘 이라는 토속신앙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나는 학교들어가기 전이라 왜 호랑이에게 절을 해야하는가?하고 매우 궁금했었다.

 

절을 마치고 나왔을 때 엄마가 큰오빠의 이름을 걸어서 기왓장에 시주를 하셨던것을 기억한다. 엄마는 큰오빠만 잘되면 다 잘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마치 당신이 어릴적에 장남만 잘되면 다 잘되는줄 알고 딸들에게는 공부를 하나도 안가르쳤다는 당신의 아버지를 무심결에 따라하고 계셨던 것이다.

 

엄마가 이렇게 큰오빠를 끔찍히 여겼다는 것은 아마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오빠를 만나면 이 이야기를 해주어야지 (내가 증인이니까), 엄마가 얼마나 큰오빠를 끔찍하게 여겼는지......하면서도 매번 잊어버리는 터라 오빠에게 아직도 이야기를 하지 못한채 산다.

 

엄마가 오빠를 끔찍히 여겼던 것으로 기억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충주 역전동에 살 때다. 큰 오빠가 서울에 직장다니고 있을 때 위가 안좋다고 하니, 엄마는 제천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는 유태언니네 집에 나를 데리고 가서 야산과 들에 있는 쑥과 익모초를 뜯었다. 나도 익모초와 쑥을 뜯느라 애먹었다. 엄마는 한여름에도 불구하고 이 쑥과 익모초를  다리고 다려서 조총처럼 만들어서 오빠에게 주었다. 매우 썼던 그 약을 오빠는 다먹었을까?

 

나는 엄마의 큰아들에 대한 지극한 정성을 질투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내혼자 꿋꿋하게 서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때 내가 몰랐던 것은 엄마는 모든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엄마와 나는 저녁무렵에 절을 내려왔다. 나는 그때 절밥이 맛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여닐곱살 이었던 내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은 새파란 하늘과 절 아래로 물이 흐렀던 것 그리고 우물근처에 핀 보라색 꽃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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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무엇을 왜 챙피해할까?

요새는 시간이 날때 가능한 엄마와 같이 놀려고 한다.

 

오늘 화초를 들여다보는 엄마와 아버지의 사진을 찍었다. 어찌 그리 웃음이 나오던지..

 

엄마에 관한 책을 꼭 써보리라..

 

엄마에게 엄마관련한 책을 한번 써보면 어떨까?하고 물었다.

 

배운것도 없이 챙피하다고 하신다.

 

엄마네 여자형제들은 오빠만 배우면 다 잘사는 줄 알았다고 하신다.

 

외할아버지는 딸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셨다.

 

엄마가 오직 할 수 있었던 것은 집에 굴러다니는 재봉틀을 가지고 놀았던 것. 그래서 엄마는 지금도 옷을 잘 만드신다.

 

이것이 불과 몇십년 전의 일이다. 엄마세대가 이렇게 여성에게 왜곡된 시대였는가? 나는 정말 여성해방이 이루어지려면 정말 여성 의식의 물질적 기반이 무엇인지? 그것의 변화과정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해서 파악해야 될 것 같다. 정말 할 것도 많구나

 

엄마는 못배운것을 창피해하신다. 그래서 지금도 절에 가시는 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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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꽃잎

  아침 꽃잎

 

 

                                                   양성우

 

 

           오늘따라 그가 내 안에 가득하다. 밀물이듯이
           밤새 내 머리맡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마치 터질 것만 같이 가슴이 벅차오르다니
           내가 그의 거처가 되고 그릇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의 이름만 불러도 내 눈에 금세 눈물이 넘쳐흐름은,
           이미 그가 내 안에 아침 꽃잎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까닭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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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생각

드문드문 생각나는 기억들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너무 많지 않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한다. 그동안 엄마와 그 많은 세월을 살아왔는데..... 언젠가 엄마에 대한 자서전을 하나 써드리고 싶은 소망이 있다.. 혹시 작은 수필집이라도.. 이를 위해서 엄마의 이야기를 여기에 적어보아야 겠다. 조금씩 생각나는대로...

 

(1) 엄마, 분유를 찜통에 찌다

 

오늘 나는 즉흥적으로 만든 일명 우유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다. 그냥 간단하다. 영화광인 나는 영화 한편을 보느라 저녁을 건너뛰어야만 될 위기에 처했고, 이때 냉장고에 우유가 있고 콩물이 있길래 우유와 콩물을 반반씩 부어 끓였다. 그랬더니 크림처럼 걸죽하고 제법 맛이 났다. 여기에 라면 반으로 잘라 넣은 것이 전부.. 쫄깃한 라면을 젓가락으로 건져서 올리브오일과 간장을 섞은 소스에 찍어먹는 것이 내가 개발한 요리이다. 그래도 맛있었다. 다음에는 정말 폼나게 크림 스파게티를 만들어봐야 겠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먹으면서도 엄마생각을 했다. 옛날에 충주 달천강가에 살 때 "물난리"가 났었다. 어느해 여름, 날짜는 8월 19일 이었는데, 비가 너무 와서 강이 범람한 것이다. 쓰나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강물이 허리춤까지 오는 것을 저만치서 바라보면서 강둑을 서둘러 올라 산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 다음날 산위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황토강으로 묻혔었다. 그 강물은 지금도 계속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이다.

이 물난리로 인하여 그해는 학교수업이 중단되고 몇달간 나와 동생은 외삼촌댁에서 기거했었다. 몇달 후 집에 돌아가니, 어느새 기와집이 덩그러니 새로 지어져 있다. 아버지의 친척분이 부랴부랴 1-2개월만에 지은 집이란다. 달랑 방 3칸에 부엌이 하나있고, 방들의 중간에는 마루가 있는게 전부 였다. 화장실은 당연히 밖에 원시적인 형태로 존재했기때문에 집안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터였다. 나는 그때 알았다. 집을 이렇게 빨리도 짓는 구나.

엄마는 우리가 돌아오자, 그때 구호품으로 받아 놓았던 미제 분유가루를 시루에 쪄 주었다. 이 대목이 계속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다. 우유는 고사하고 분유가루를 처음 본 엄마는 이것을 어떻게 요리하는 줄 모르셨던 것이다. 엄마는 분유를 밀가루처럼 생각해서 물에 개어서 시루에 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쿡쿡 웃음이 나온다. 찐 우유가루는 정말 딱딱했던 것 같다. 바로 먹어도 시원치 않은데 조금 나두면 딱딱하다 못해 이빨도 안들어간다. 그것을 씹다 못해 빨아먹었던 생각을 하며 엄마가 생각나서 웃음이 절로 난다.

 

(2) 엄마, 닭을 내다 팔다

 

물난리가 난 후 며칠만에 우리는 산에서 내려왔었다. 그 당시 볏집으로 지붕을 해 얹은 흙집인 우리집은 온데 간데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웰빙집이었는데...... 엄마와 우리가족은 산밑에서 며칠 임시로 거주하면서 집에 가서 흙더미속에 남은 것들을 추렸다. 추릴 것도 없었는데, 우리 집은 과수원을 하고 있었고, 엄마는 과수원 모퉁이에 닭을 몇십마리 기르고 있었다. 이 닭들이 다 죽어있었던 것이다. 어찌나 마음이 상했던지...... 그러나, 엄마는 정말 강했다. 엄마는 슬퍼할 틈도 없이 그 닭들을 깨끗이 씻어서 충주 장에 내다 판 것이다.

그때 엄마가 지하수를 길어 올리는 펌프옆에 앉아서 닭을 다듬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3) 엄마, 사과장수를 하다

 

아버지는 국민학교 선생으로는 7남매인 자식들 학교도 보낼 수 없음을 깨닫고, 충주 달천에서 과수원을 하셨다. 그러나, 국민학교 선생이 과연 과수원을 잘 하실수 있었을까? 아버지는 겨우내 무슨 영농책자를 들여다 보셨지만, 나무에 달린 사과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았다.

결국, 사과들은 영세규모로 수확이 되었고, 이것을 도매로 넘기기도 어려운 형편에 처했다. 이때 엄마의 힘이 또 나왔다. 엄마는 리어커에 사과를 궤짝채 담아서 충주 시내 영화관 근처에서 리어커를 세워두고 사과를 파셨다. 이때 아버지도 물론 같이 가셨고, 큰 오빠도 동원이 되곤 했다.

우리는 엄마를 기다리린 것인지, 엄마가 들고 들어오시는 크림빵을 기다린 것지도 모르게 밤늦도록 엄마를 기다렸다.

 

(4) 엄마, 시를 짓다

 

몇년이 지나 우리집은 충주시내로 나왔다. 아버지는 과수원으로도 7남매를 키우기 어려우셔서 결국, 충주 시내에서 조그만 문방구점을 시작하셨다.

드디어 나는 충주시내에서 국민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일명 남한강 국민학교이다. 나는 지역이름이 들어가 있는 이 학교가 무척 좋았다.

나는 촌에서 온 아이라 기가 죽어 있을 줄 알았는데, 전해 그렇지 않았나보다. 3월달에 새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시내학교로 전학을 갔었는데, 나는 가자 마자 보기좋게 1등을 했다. 아버지가 어찌나 신기하게 생각하시고 좋아하시던지.. 그 기억이 생생하다. 아무도 내게 그런 기대를 안했었나보다..

어느날 담임선생님은 내가 쓴 몇개의 동시들을 보기좋게 복도에 전시하시더니, 나보고 문예반을 하라고 하셨다. 나는 뜬금없이 문예반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5월달 쯤 탄금대로 전체 국민학생들이 소풍을 가는날 도내 글짓기 대회도 같이 있었다. 나는 그 대회에 나가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왠일, 내가 너무 긴장했나보다. 아침에 설사를 하고 열이나고.. 도저히 못가겠는 거였다.

이때 나는 아마 숨고 싶었다보다.

그런데, 엄마는 내 속마음을 아셨는지 내 손목을 잡아 끌고는 탄금대로 향했다. 도착하니 막 백일장이 진행되려고 하고 있었다. 시의 제목이 주어졌다. "꽃"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난감했다. 꽃이라니...... 한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꽃이다.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백일장 근처 풀밭에 앉아서 멍하니 있는 나에게 엄마가 슬며시 다가와서 힌트를 주셨다^^ 시를 한번도 읽어보지 않으신 엄마인데......엄마는 외할아버지께서 여자는 배우면 안된다면서 안가르쳐서 배우지 못한 대표적인 한국여성이다. 외할아버지네는 매우 잘 사셨다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지금도 이 생각만 하면 외할아버지가 정말 밉다..

어쨋든 엄마는 내게 많은 힌트를 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엄마가 시를 읊고 내가 받아적는 수준이었다..

지금 언뜻 생각나는 것은 "꽃이 피었네..이 산에도 저 산에도 예쁘게 피었네...꽃은 이내 아가 얼굴이 되었네.. " 등등 이었던 것 같다.... 어쨋든 나는 그렇게 엄마의 읊조림을 대부분 적고는 마지못해 내고 나왔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얼마 뒤에 전교학생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 앞으로 내 이름이 불려졌다. 내가 시 부문 장려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놀랄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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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묻은 기장떡

추석날이다. 나는 모처럼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신바람 나 있다. 내가 일중독일까? 생각해보았지만 일중독은 아니다. 나는 내일 집회에 나갈것이고, 오늘은 그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목적없이, 일만 하는 사람은 아니니, 일중독자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오늘 가장 밀린 일이며 숙원이던 00동지의 직업성질환 관련 소견서를 완성하지 않았던가?

 

오늘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백혈병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데 온몸에서 열이 다 난다. 너무 일을 많이 해서인지 (오늘은 정말 단 5분도 한눈 팔지않고 일했다)? 아니면 아까 땅에 떨어진 사과와 삶은계란때문인지? (물론 사과와 계란에 다시 열을 가하여 세균을 죽이려고 했지만 혹시 몸속으로 세균의 침투가 너무 강했나?)

 

엉겹결에 땅에 떨어진 사과조각과 삶은계란조각을 주워먹은 것을 생각하면서, 옛일이 떠오른다. 우리가 살던 옛날에는 정말 땅에 떨어진 것들을 다 주워서 먹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릴때, 어느 장날,엄마와 아버지가 사과가 든 궤짝들을 한 리어카에 싣고 충주 시내에 나가셔서 파신후, 모처럼 영화를 보시겠다고, 영화관앞에 간 적이 있다. 나는 물론 뒤에서 졸졸 따라가기만 했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정말 영화를 좋아하셨는데, 충주에서도 30분이나 떨어진 달천이란 곳은 그 당시에 전기도 없는 실정이었으니, 라디오조차 없었던 것 같았다. 지금도 그 극장이 남아있다. 충주에는 두개의 극장, 아시아, 아카데미극장이 있었다. 아시아, 아카데미는 정말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어렸을 때는 똑같이 '아'로 시작한다는 생각에 두개를 항상 비교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본질을 몰랐을지나, 표면상으로 두개의 극장소유주들이 충주에서 꽤나하는 부자들이라는 소문과 두 극장이 라이벌이라는 소문 등등으로 항상 두 극장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는지 모른다.

 

어쨋든 극장앞에서 표를 사고, 아버지는 어디를 급히 다녀오시더니 기장떡을 사오셨다. 그때 그 떡은 술떡이라고도 불리웠는데, 흰쌀에 막걸리를 넣고 발효한 후, 떡판위에 맨드라미를 올려놓고 찌는 떡이다. 그때는 왜 맨드라미를 떡위에 얹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요새 맨드라미꽃의 꽃물이 훌륭한 음식재료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때, 아버지와 엄마는 저녁도 굶으시고, 영화보기를 택하였고, 저녁대신 아버지가 사오신 것이 이 기장떡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풀사.. 누가 떨어뜨렸는지 기억이 안나지만 기장떡이 땅에 떨어져 흙투성이가 되었다ㅠㅠ. 아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그 순간의 장면... 그것은 아직도 몇십년이 지나도록 나의 머리속에서 내가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할 때마다 떠올려지곤 한다.

 

그때, 우리는 그 흙투성이의 기장떡에서 흙을 떼어내면서 떡을 맛있게 먹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본 영화는 아마도 "월하의 공동묘지" 였던것 같다.. 그때는 그런 영화만 있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그당시를 떠올리시기 싫으시겠지만, 이제야 나는 그분들이 정말 행복하셨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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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장에 가던 엄마

물리적으로 떨어져있어서, 최근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돌아가면 많이 만나보리라.. 모내기전에 돌아가리라.. 황새떼 오기전에 돌아가리라^^ 아, 벌써 모내기를 마쳤나??). 이런 적막한 시기에 밀려오는 것이 엄마생각이다. 내가 만약 글을 알기시작한 5살이나 10살때부터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써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에 대한 기억으로 제일 처음 기억은 음성장에 나를 데리고 다녔을 때였다. 그때 나는 한 네살쯤 되었나보다.  충주에서 버스를 타고 한 1시간 (그때는 버스도 흙길을 가야했으니..) 남짓가면 음성이 나왔던것 같다. 엄마는 하루가 멀다고 음성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장보러가신것은 아니었다. 작은엄마네 가게를 도와주러 가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바로 밑에 동생이었던 작은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다 일찍 돌아가셨다. 작은엄마는 딸린 5명의 자식들을 먹여살려야 했다. 작은엄마의 호탕한 웃음과 씩씩한 목소리와 억센 팔뚝은 5남매를 기르고 보호하기위해서 발달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를 집에두고 가실수 없으니, 나와 내동생을 데리고 음성장을 도와주러 가신것이다. 멀리가시면서 나와 내동생을 집에두고 가실수 없다고 생각하신 것인지, 우리 둘을 데리고 장을 도와주러 가신것이다. 엄마가 둘을 다 데리고 가시기 어려울때면, 나는 아버지학교 (아버지는 그때 국민학교 선생님이셨다. 담임은 주로 1학년을 맡으셨었다.)에 나를 맡겨놓고 가시곤 했다. 나는 아버지학교에 있을때보다 엄마를 따라 음성장에 가는게 더 좋았다.

 

시골장은 매우 시끌벅적했고, 작은엄마가 장사하시는 곳은 큰 기와집으로 된 집에 여러가지 물건들이 즐비하게 쌓여있는 그야말로 아주 시골장터의 한 귀퉁이에 있었다.

 

나는 음성장에 엄마가 나를 데려갈때가 매우 즐거웠던 것 같다. 거기가면 마름모꼴의 사카린도 볼 수 있었고, 작고 동그란 모양의 단것 (지금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데, 인공감미료의 일종, 아마 감미정일것이다.)들이 많았다. 또 웬 빨간색, 파란색 등등 색색이 아롱진 과자들이 많았는지......

 

그러나 그때 무엇보다도 즐거웠던 것은 시골장터에서 사람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때 기억으로는 흰색와이셔츠같은 옷과 검은색이나 회색바지들 그리고는 검은고무신을 신은 모습이 바로 농부들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바로 몇년뒤에 아버지의 모습이었는데, 나의 아버지가 도저히 생업으로 교사직을 할수 없다며 (그당시 교사월급은 쌀한두가마니정도, 이것으로 8식구(막내동생은 아직 안태어났으니 아직은 8명이다)가 도저히 살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만두시고 충주 달천으로 들어가셨을 때 아버지가 입으셨던 옷도 바로 낡은 흰색와이셔츠에 검은바지였다.  

 

엄마의 일생동안의 노동은 끝이없었고, 나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의 노동을 보면서 자라온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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