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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투쟁은 더 아름답다:단식투쟁으로 투쟁에 입문한 강원도의 비정규직 유치원선생님들

알고보니, 강원도 전역에서 모였다.  동해, 영월, 강릉.. 철원까지....  그러나 다 모여봤자 25명이다.. 유치원선생님이니 다 여성이다. 비정규직으로 시작해서 벌써 애도 4명씩 낳았다. 20년간 비정규직으로 일해온것도 서러운데, 하루아침에 해고통지서를 받았다.

 

1년전 도교육청으로부터 통보를 받고는 여기저기 알아보기도 했단다. 그러나, 결국 모든 우회와 탄원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자마자 그대로 단식에 들어가버렸다.

 

단식장소는 바로 춘천 도교육청 앞이다. 소위 춘천에서 명소인 강남지역이다. 소양강 남쪽에 있는 곳이다. 번듯하게 세워진 도교육청 후문쪽은 2006년 전교조 김효문지부장님께서 "고교평준화와 교육평준화"를 위해서 목숨을 건 단식을 30일이 넘게 하신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바로 큰 길이 옆에 있는데, 이 길은 그 유명한 춘천마라톤길이다. 모든 마라토너들이 이 길을 지나간다. 이번 3월 1일에도 전국의 마라토너들이 이 길을 지나먼서 강원도지역 비정규직 유치원선생님들의 복직투쟁 (이미 2월 28일자로 해고되었으니, 이제 복직투쟁이다.)을 보았다. 나도 그날 보았지만^^

 

갑자기 시작한 단식에 부작용도 많았다. 건강장해가 급격하게 눈에 띄였다. 혈압이 급격하게 올라간 한 분은 두통을 심하게 호소했고, 몸무게가 일주일만에 10kg이상 빠진 한 분은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단식도중 한 분은 혈압이 계속 올라가서 결국은 중도에 병원으로 실려가야 했다. 단식을 하는 분들이 혈압이 이렇게 급격하게 올라가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처음 시작하는 투쟁인데,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잘하고 있다. 모든 구성원이 할일을 정해놓고, 서로 역할분담을 하고 있다. 단식을 하지 않고 있는 여성들은 저녁에 지역에서 열리는 환경미화노동자 후원회주점에도 참가하려고 부산하다.   

 

"전북 환경미화원노동자들이 원직복직승리를 했대요.." 나도 훈수를 들면서 이들 여성들이 끝까지 함께 하기를 바랬다.

 

그 와중에 김효문 전 전교조 지부장님이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투쟁기금을 슬쩍 전달하시면서 내것도 같이 내주셨다 (천막을 나오고나서야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결국 조금후에 유치원선생님들이 우리가 간다고 할때, 인사말을 하면서 나에게도 "투쟁기금에 감사" 한다고 했다.. 나는 결국 한마디 말도 못한채... '아이구 참..' 민망함을 느끼면서도.. 전 지부장님의 속은 도대체 어디까지 깊은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몇해 강원전교조를 힘있게 끌어오시고, 단식투쟁을 30일넘게 하신 구력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전 지부장님이 집근처까지 바래다주시는 동안 이 여성들이 이전에 전혀 투쟁이란 말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을 돌봐주는 전 지부장님은 정말 그들의 오라버니같다. 나는 그들의 의식적 발전에 빠른 진전이 있기를 기원한다.

 

나는 왠지 여성들의 공동체는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들은 지금 가사와 노동에서 모두 해방되고 있지 않는가? 물론 나의 해방이란 의미는 단순한 해방만의 뜻은 아닐것이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가족과 노동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오랜만에 그들자신과 관련된 시간을 모처럼 보내고 있는 것일게다. 생존의 사활이 걸린 이분들께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나의 "나이브"한 생각일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중이었다고 회상하리라......

 

그들의 얼굴과 언행에서 벌써 그들은 해방되고 있는 중인것을 그들이 벌써 알고 있을까?

 

 전국의 유치원선생님들이여, 또는 전교조선생님들, 혹시 사이버지지방문이라도 해주시려면 전교조 강원지부에 들어가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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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영의 용기와 행동을 지지합니다!!

트랙팩님의 [성폭력 생존자에 관한 지지와 연대] 에 관련된 글.

최지영의 용기와 행동을 지지합니다!!

 

내가 최지영을 본것은 2004년 가을이었다. 그해 10뭘말 몇몇 여성활동가와 같이 우리집에 놀러왔었다. 그때 우리집에와서 고등어도 구워먹고, 닭백숙도 해먹고 했지만, 미처 최지영의 고통과 고민을 완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때 이후로 나 스스로는 이 일을 까막게 잊고있었다. 아니, 여성의 문제에 대해서 나 스스로도 무지했었다고 반성한다.

 

나는 그토록 오랜기간의 고통을 벗어버리고, 힘차게 당당하게 서려는 최지영을 정말 좋아하고 지지한다. 왜? 그동안 멀게는 몇백년동안 가깝게는 내 생에의 몇십년동안 나 스스로도 여성의 존엄성을 내세우지 못하고 살았다. 길거리에서 여성을 폄하하는 남성들을 숱하게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은연중에 그들(남성)의 편이 되었었다. 그것은 기득권층 옆에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속에서도 여성?여성이 뭐야!! 하고 있었다.

 

최근 최지영이 나의 이런 벽을 완전히 깨주었다.

 

그녀의 고통이 너무 힘들었지만, 이제 많은 여성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 그녀는 당당하게 일어섰기때문이다.

 

최지영의 용기와 행동에 본받아 나 스스로도 여성해방, 노동해방, 인간해방을 위한 길에 힘차게 나갈 것이다. 지금이후로는 나는 어느 누구도 여성의 존엄성에 먹칠을 하는 인간이건 집단이건 철처하게 대응할 것이다.

 

여성해방은 먼 미래에서나 해야되는 일이 아닌것을 지금 노동해방과 함께 해야함을 이제야 절실하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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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부부의 토마토자루

트랙팩님의 [성폭력 생존자에 관한 지지와 연대] 에 관련된 글.

 

어느 시골부부의 토마토자루

 


 

나는 며칠전에 한적한 춘천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한 아주머니께서 토마토를 한자루 들고 가시는데, 꽤 무거워보였다. 그 옆에서 가시는 분이 남편인가 싶었는데, 빈손으로 그냥 옆에서 털레털레 지나가고 계셨다. 그 아주머니는 토마토자루를 어깨에 걸머매지도 못하시고, 마땅히 끌고 갈 바퀴달린 도구하나 없이 당지 두 손으로 자루를 움켜지고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뺀채 걷고 계셨다. ‘그러다가 허리다치실라......’ 걱정이 되어서 나는 지나가다 다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옆에 가시던 아저씨께서 토마토자루를 건네받는가 했다. ‘옳거니, 토마토자루를 남편분이 어깨에 메고 가실려고 하나보다.....’ 아풀싸! 그런 생각을 막 하고 있을 찰나에 다시 토마토자루는 아주머니의 머리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남편분은 잠깐 토마토자루를 들어서 아내의 머리위에 올려주기위해서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길에서 평화로운 풍경과 나무와 풀과 산들이 어우러진 이 곳에서 아주 평범해보이는 이 그림이 나에게는 왜 이렇게 분노감을 느끼게 했을까? 이 작은 시골길에서 보여진 이 작은 일이 바로 우리사회의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렇다, 바로 이 모습이 이시대의 남성과 여성의 모습이다. 남성은 여성의 시대적 억압과 굴레를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여성억압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토마토자루는 언제나 여성에게 있다. 여성의 손에, 여성의 머리위에...... 남성은 토마토자루를 다시 그 여성의 머리위에 얹어놓음으로써 여성에게 여성의 문제를 또 전가하고 있다. ‘토마토자루는 내것이 아니야. 네것이니 니가 알아서 해. 나는 단지 너의 짐을 너에게 다시 올려줄 뿐이야’


나는 이시대의 남성이 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 그런데 뭐가 잘못이야? 나는 적어도 다른 더 나쁜 일은 안하잖아’ 그런데, 이런 생각과 의식조차 자본주의의 때에 쩔어있는 것이며, 자본주의의 굴레속에 스스로를 가두어두고 있는 것이다. 남성들이 본인은 적어도 성폭력은 안하니까 면죄부를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성폭력 그 자체보다도 더러운 자본주의의 때에 찌들어있다고 말하고 싶다. 살인적인 폭력만이 폭력인가? 우리가 알지못하는 사이에 저지르는 무수한 자본주의적 굴레들, 그것들이 바로 우리가 닦아내고, 벗겨내여야 할 요소들이다. 우리의 세상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의식요소들을 하나하나 걷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자본주의적 굴레속에 찌들어있는 인간들은 자본가계급과 소부르조아들일 것이다. 의식있는 노동자계급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왜? 의식있는 노동자계급은 노동운동을 하느라 바쁠것이며, 더 좋은 세상을 동지들과 이웃들과 여성들과 아이들과 또 노인들과 나누어 가지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안에서 또 우리주변에서 우리의 동지들에게도 자본주의적 나쁜 관습들이 남아있을 수 있다. 우리는 현사회에서 미래의 사회를 완벽하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한 요소가 없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매일매일 정진을 통해서 나의 몸안에 남아있는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벗겨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남성들이 우선적으로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현재 이시기에 남성들이 반성하고 의식화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며 그것은 매우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 바로 남성들에겐 기회일 수 있다. 본인들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거나 하는 자본주의적 습관들을 떨쳐내는 것 말이다. 현재 사회는 자본주의사회이다. 이것을 부정할수도 없다. 우리의 현재의 모습도 바로 현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우리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제 서로 서로 반성하고 쇄신을 하자!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자. 이러한 모습들은 현재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에 대한 긴박한 대응을 절대로 늦추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여성들과 함께 할 때 더욱 더 운동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성들은 지금보다 훨씬 당당하게 매일 매일의 정치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서 자신을 더욱 발전시켜나가자. 인구의 반인 여성들이 자신의 타고난 능력에 비해서 자신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어느 시대를 가더라도 낭비일 것이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신의 정치적운동을 지속해 나가고 그 속에서 존경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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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부부의 토마토자루

어느 시골부부의 토마토자루 : 여성해방과 노동해방을 위한 노래

 

나는 며칠전에 한적한 춘천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한 아주머니께서 토마토를 한자루 들고 가시는데, 꽤 무거워보였다. 그 옆에서 가시는 분이 남편인가 싶었는데, 빈손으로 그냥 옆에서 털레털레 지나가고 계셨다. 그 아주머니는 토마토자루를 어깨에 걸머매지도 못하시고, 마땅히 끌고 갈 바퀴달린 도구하나 없이 당지 두 손으로 자루를 움켜지고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뺀채 걷고 계셨다. ‘그러다가 허리다치실라......’ 걱정이 되어서 나는 지나가다 다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옆에 가시던 아저씨께서 토마토자루를 건네받는가 했다. ‘옳거니, 토마토자루를 남편분이 어깨에 메고 가실려고 하나보다.....’ 아풀싸! 그런 생각을 막 하고 있을 찰나에 다시 토마토자루는 아주머니의 머리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남편분은 잠깐 토마토자루를 들어서 아내의 머리위에 올려주기위해서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길에서 평화로운 풍경과 나무와 풀과 산들이 어우러진 이 곳에서 아주 평범해보이는 이 그림이 나에게는 왜 이렇게 분노감을 느끼게 했을까? 이 작은 시골길에서 보여진 이 작은 일이 바로 우리사회의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렇다, 바로 이 모습이 이시대의 남성과 여성의 모습이다. 남성은 여성의 시대적 억압과 굴레를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여성억압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토마토자루는 언제나 여성에게 있다. 여성의 손에, 여성의 머리위에...... 남성은 토마토자루를 다시 그 여성의 머리위에 얹어놓음으로써 여성에게 여성의 문제를 또 전가하고 있다. ‘토마토자루는 내것이 아니야. 네것이니 니가 알아서 해. 나는 단지 너의 짐을 너에게 다시 올려줄 뿐이야’


나는 이시대의 남성이 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 그런데 뭐가 잘못이야? 나는 적어도 다른 더 나쁜 일은 안하잖아’ 그런데, 이런 생각과 의식조차 자본주의의 때에 쩔어있는 것이며, 자본주의의 굴레속에 스스로를 가두어두고 있는 것이다. 남성들이 본인은 적어도 성폭력은 안하니까 면죄부를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성폭력 그 자체보다도 더러운 자본주의의 때에 찌들어있다고 말하고 싶다. 살인적인 폭력만이 폭력인가? 우리가 알지못하는 사이에 저지르는 무수한 자본주의적 굴레들, 그것들이 바로 우리가 닦아내고, 벗겨내여야 할 요소들이다. 우리의 세상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의식요소들을 하나하나 걷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자본주의적 굴레속에 찌들어있는 인간들은 자본가계급과 소부르조아들일 것이다. 의식있는 노동자계급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왜? 의식있는 노동자계급은 노동운동을 하느라 바쁠것이며, 더 좋은 세상을 동지들과 이웃들과 여성들과 아이들과 또 노인들과 나누어 가지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안에서 또 우리주변에서 우리의 동지들에게도 자본주의적 나쁜 관습들이 남아있을 수 있다. 우리는 현사회에서 미래의 사회를 완벽하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한 요소가 없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매일매일 정진을 통해서 나의 몸안에 남아있는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벗겨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남성들이 우선적으로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현재 이시기에 남성들이 반성하고 의식화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며 그것은 매우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 바로 남성들에겐 기회일 수 있다. 본인들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거나 하는 자본주의적 습관들을 떨쳐내는 것 말이다. 현재 사회는 자본주의사회이다. 이것을 부정할수도 없다. 우리의 현재의 모습도 바로 현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우리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제 서로 서로 반성하고 쇄신을 하자!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자. 이러한 모습들은 현재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에 대한 긴박한 대응을 절대로 늦추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여성들과 함께 할 때 더욱 더 운동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성들은 지금보다 훨씬 당당하게 매일 매일의 정치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서 자신을 더욱 발전시켜나가자. 인구의 반인 여성들이 자신의 타고난 능력에 비해서 자신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어느 시대를 가더라도 낭비일 것이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신의 정치적운동을 지속해 나가고 그 속에서 존경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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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부부의 토마토자루 : 여성해방과 노동해방을 위한 노래

어느 시골부부의 토마토자루 : 여성해방과 노동해방을 위한 노래


나는 며칠전에 한적한 춘천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한 아주머니께서 토마토를 한자루 들고 가시는데, 꽤 무거워보였다. 그 옆에서 가시는 분이 남편인가 싶었는데, 빈손으로 그냥 옆에서 털레털레 지나가고 계셨다. 그 아주머니는 토마토자루를 어깨에 걸머매지도 못하시고, 마땅히 끌고 갈 바퀴달린 도구하나 없이 당지 두 손으로 자루를 움켜지고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뺀채 걷고 계셨다. ‘그러다가 허리다치실라......’ 걱정이 되어서 나는 지나가다 다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옆에 가시던 아저씨께서 토마토자루를 건네받는가 했다. ‘옳거니, 토마토자루를 남편분이 어깨에 메고 가실려고 하나보다.....’ 아풀싸! 그런 생각을 막 하고 있을 찰나에 다시 토마토자루는 아주머니의 머리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남편분은 잠깐 토마토자루를 들어서 아내의 머리위에 올려주기위해서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길에서 평화로운 풍경과 나무와 풀과 산들이 어우러진 이 곳에서 아주 평범해보이는 이 그림이 나에게는 왜 이렇게 분노감을 느끼게 했을까? 이 작은 시골길에서 보여진 이 작은 일이 바로 우리사회의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렇다, 바로 이 모습이 이시대의 남성과 여성의 모습이다. 남성은 여성의 시대적 억압과 굴레를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여성억압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토마토자루는 언제나 여성에게 있다. 여성의 손에, 여성의 머리위에...... 남성은 토마토자루를 다시 그 여성의 머리위에 얹어놓음으로써 여성에게 여성의 문제를 또 전가하고 있다. ‘토마토자루는 내것이 아니야. 네것이니 니가 알아서 해. 나는 단지 너의 짐을 너에게 다시 올려줄 뿐이야’


나는 이시대의 남성이 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 그런데 뭐가 잘못이야? 나는 적어도 다른 더 나쁜 일은 안하잖아’ 그런데, 이런 생각과 의식조차 자본주의의 때에 쩔어있는 것이며, 자본주의의 굴레속에 스스로를 가두어두고 있는 것이다. 남성들이 본인은 적어도 성폭력은 안하니까 면죄부를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성폭력 그 자체보다도 더러운 자본주의의 때에 찌들어있다고 말하고 싶다. 살인적인 폭력만이 폭력인가? 우리가 알지못하는 사이에 저지르는 무수한 자본주의적 굴레들, 그것들이 바로 우리가 닦아내고, 벗겨내여야 할 요소들이다. 우리의 세상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의식요소들을 하나하나 걷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자본주의적 굴레속에 찌들어있는 인간들은 자본가계급과 소부르조아들일 것이다. 의식있는 노동자계급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왜? 의식있는 노동자계급은 노동운동을 하느라 바쁠것이며, 더 좋은 세상을 동지들과 이웃들과 여성들과 아이들과 또 노인들과 나누어 가지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안에서 또 우리주변에서 우리의 동지들에게도 자본주의적 나쁜 관습들이 남아있을 수 있다. 우리는 현사회에서 미래의 사회를 완벽하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한 요소가 없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매일매일 정진을 통해서 나의 몸안에 남아있는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벗겨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남성들이 우선적으로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현재 이시기에 남성들이 반성하고 의식화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며 그것은 매우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 바로 남성들에겐 기회일 수 있다. 본인들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거나 하는 자본주의적 습관들을 떨쳐내는 것 말이다. 현재 사회는 자본주의사회이다. 이것을 부정할수도 없다. 우리의 현재의 모습도 바로 현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므로 우리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제 서로 서로 반성하고 쇄신을 하자!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자. 이러한 모습들은 현재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에 대한 긴박한 대응을 절대로 늦추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여성들과 함께 할 때 더욱 더 운동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성들은 지금보다 훨씬 당당하게 매일 매일의 정치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서 자신을 더욱 발전시켜나가자. 인구의 반인 여성들이 자신의 타고난 능력에 비해서 자신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어느 시대를 가더라도 낭비일 것이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신의 정치적운동을 지속해 나가고 그 속에서 존경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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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출산률저하와 저체중아출산률증가, 어디서부터 문제일까?

여성의 출산률저하와 저체중아출산률증가, 어디서부터 문제일까?


 

1998년 경제위기이후 여성의 출산률이 낮아지고 있는 반면, 저체중아출산률을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현재 여성의 사망률증가보다도 더 사회적으로 이슈화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출산률저하와 저체중아출산률의 증가인 것이다. 우리나라 여성의 출산률은 2000년 1.68%에서 2005년 1.34%로 세계평균 2.6%보다 훨씬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체중아출산률은 1995년 3.02%에서 2004년 4.14%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경제위기이후 증가폭이 더 커지고 있다.

현재 보건복지부가 분석한 저출산의 원인은 ‘결혼, 자녀가치관변화 및 양성평등의식부족’, ‘소득 고용불안정성’, ‘출산․자녀 양육비용부담’. ‘자녀양육의 사회적 인프라 미비’, ‘일․가정양립곤란’, ‘임신․출산 건강수준저하’ 등으로 보고되고 있다(세계일보 2006.01.15).

그런데,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여성의 출산률저하와 저체중아출산률증가는 여성의 비정규직화증가와 노동조건의 악화에 있다. 1998년 경제위기이후, 고용형태변화로 비정규직, 특히 임시직, 일용직이 증가하였는데, 특히 여성의 경우는 남성보다 비정규노동자의 증가추세가 뚜렷한데, 이는 주로 여성 일용노동자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것이다. 결국 1998년 경제위기이후 남성보다도 오히려 여성노동자들이 더욱 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장지연, 2001, 한국노동연구원보고서). 현 사회에서 여성노동자의 문제는 곧 비정규직의 문제이고, 비정규직의 문제가 곧 여성의 문제이다. 2001년 현재 남성임금노동자의 40%가 비정규직인데 반하여, 여성은 임금노동자의 70%이상이 비정규직이다.

2006년 발표된 정부(보건복지부)의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을 보면, 정부는 저출산에 따르는 미래세대육성을 위해 영유아 보육료, 교육비 지원대상을 저소득층위주에서 중산층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또 시간연장형 야간보육서비스활성화, 산전후 휴가급여 국가전액부담, 육아휴직제활성화, 임신출산의료비지원확대, 2010년까지 중산층이하 불임부부의 시험관아기 시술비 절반지원, 저소득층 출산가정의 가정방문서비스제, 유․사산휴가제 등을 도입하고 있다 (세계일보 2006.01.15).

그러나 출산률저하와 함께 동반하는 저체중아출산률의 증가의 주요원인이 1998년 경제위기이후 여성의 불안정노동과 비정규직노동이 여성의 낮은 사회계급으로 인한 경제적 물질적 결핍등으로 인한 것이라면, 정부의 출산률장려정책이 단지 여성의 가임이후의 시기부터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고용조건 노동조건속에서 건강장해양상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시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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