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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7/19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
    봄-1
  2. 2012/07/17
    맨드라미꽃
    봄-1
  3. 2012/07/16
    엄마와 월악산(1)
    봄-1
  4. 2012/07/16
    엄마와 절(1)
    봄-1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마음을 산산이 흐트려 놓는다.

욕망의 대상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다투는 철학적 견해를 초월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도달하여

도를 얻은 사람은

'나는 지혜를 얻었으니

이제는 남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알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 말고,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무소의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의 유희나 오락

혹은 쾌락에 젖지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라.

꾸밈 없이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불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마음속의 다섯 가지 덮개를 벗기고

온갖 번노를 제거하여 의지하지 않으며

애욕의 허물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최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 정진하고

마음의 안일을 물리치고

수행에 게으르지 말며

용맹정진하여 몸의 힘과 지혜의 힘을 갖추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애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며,

벙어리도 되지 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빨이 억세고 뭇짐승의 왕인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궁벽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비와 고요와 동정과 해탈과 기쁨을

적당한 때에 따라 익히고

모든 세상을 저버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헤맴을 버리고

속박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파타'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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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꽃

[예전에 쓴 글임]

 

                                                                                  맨드라미꽃

 

내가 일하는 곳 5층엔 옥상이 있다. 옥상에 화분을 갔다놓고 맨드라미 꽃씨를 길가에서 받아다가 뿌렸다. 언젠가 강원도에 계시는 한 분이 맨드라미꽃으로 떡을 해먹는다는 말을 듣고는 한번 맨드라미떡을 해먹고 싶어서 몇년째 꽃씨를 뿌리는데, 떡은 한번도 못해먹고 꽃씨만 받아두었다가 다음 해에 뿌리곤 한다. 

 

올해에는 꽃씨를 비교적 소복히 뿌렸는데도 처음에는 맨드라미가 세포기만 크게 웃자라서 저는 나머지 꽃씨는 다 봄에 왔던 비바람에 날라갔나? 했더니, 좀 있으니, 화분 가득이 빽빽하게 조그만 맨드라미들이 낑겨서 나오기 시작했다.

 

매우 웃자란 세포기의 맨드라미의 그늘에서 가느당당하게 낑겨있는 작은 맨드라미풀이 가엽고 처량했다. 세포기는 벌써 진분홍 꽃까지 피웠는데, 말라깽이 가느당당한 나머지 풀들은 그저 살아갈수나 있을 지 생존이 염려스러운 놈들이다. 마치 인간세상의 생산관계를 보듯이, 소외하는 자와 소외당하는 자들이 있는 인간사회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다.

 

오늘 내일사이에 빨리 작은 맨드라미 포기들을 학교 운동장근처의 너른 들판에 옮겨심어서 해방시켜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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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월악산

엄마는 1099나 되는 월악산 정상에 올랐던 적이 있다. 그것도 한 겨울에 흰 운동화만 신고 말이다.

 

어렷을적에 나는 산에 오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 한 겨울에 방학이라 충주에 내려온 나는 충주에 있는 친구들과 산에 가기로 했는데, 날씨가 너무 춥고 눈이 와서 그런지 모두들 안가겠다고 하면서 나오질 않았다. 나는 그래도 산에 꼭 가야겠다는 성미에 급기야 엄마에게 같이 가자고 졸랐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엄마와 나는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눈이 온 산인데도 무슨 생각으로 운동화를 신고 올랐을까? 아니 그 당시에는 등산화 하나 없어서 그냥 운동화를 신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마애불까지만 가기로 했지만, 엄마는 내가 언제 또 와보겠냐?면서 딸덕에 산에도 오르게 되었다고 하시며 기어이 정상을 향해 한발을 내딛었던 것 같다. 그때 사진기도 하나 없이 올라갔다 내려왔던 것이 좀 아쉽다..

 

간신히 정상까지 올랐으나 내려가는 것은 더 문제였다. 응달에 눈이 쌓여서 운동화로는 도저히 미끄러워서 내려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엄마가 하신 것은 그냥 눈위에 주저앉아서 눈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나도 그렇게 따라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두 모녀는 월악산 눈쌓인 계곡을 그대로 주저앉아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미끄러지면서 내려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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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절

엄마는 아주 젊으셨을때부터 절에 다니셨다. 엄마는 정말 절하러 절에 다니신 것 같다. 나는 엄마를 따라서 절에 가서 정말 절을 많이 했다.

 

충주에서 버스를 타고 신니면 방향으로 한참을 가면, 버스는 이내 넓은 논들 사이에 단 하나의 길인 신작로위에 우리를 내려놓고 휑하니 가버렸다.

 

떡을 하셨는지 쌀을 가지고 가셨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마는 머리에 큰 광주리를 이고 앞장서서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절은 산꼭대기에 있어서 꼬박 몇시간을 걷는지 모를 정도로 많이 걸었다.

 

얼마를 걸어올라갔는지 모를 정도로 올라갔을 때 내 앞에 나타난 절은 매우 실망스럽게도 허름한 절이었다. 스님도 머리도 대충 깎으시고 가족들도 거느리시고 계신 그런 절.. 그 절 꼭대기에는 산신당과 칠성당이 있었다. 칠성당에는 호랑이와 신선이 서 있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엄마는 꼭 이 칠성당에 들어가셔서 절을 하셨다. 나는 엄마 옆에서 따라서 절을 했다. 나는 절욕심도 많아서 엄마가 하는대로 그대로 따라했다.

 

나는 이후에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면서 그것이 샤마니즘 토테미즘 이라는 토속신앙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나는 학교들어가기 전이라 왜 호랑이에게 절을 해야하는가?하고 매우 궁금했었다.

 

절을 마치고 나왔을 때 엄마가 큰오빠의 이름을 걸어서 기왓장에 시주를 하셨던것을 기억한다. 엄마는 큰오빠만 잘되면 다 잘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마치 당신이 어릴적에 장남만 잘되면 다 잘되는줄 알고 딸들에게는 공부를 하나도 안가르쳤다는 당신의 아버지를 무심결에 따라하고 계셨던 것이다.

 

엄마가 이렇게 큰오빠를 끔찍히 여겼다는 것은 아마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오빠를 만나면 이 이야기를 해주어야지 (내가 증인이니까), 엄마가 얼마나 큰오빠를 끔찍하게 여겼는지......하면서도 매번 잊어버리는 터라 오빠에게 아직도 이야기를 하지 못한채 산다.

 

엄마가 오빠를 끔찍히 여겼던 것으로 기억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충주 역전동에 살 때다. 큰 오빠가 서울에 직장다니고 있을 때 위가 안좋다고 하니, 엄마는 제천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는 유태언니네 집에 나를 데리고 가서 야산과 들에 있는 쑥과 익모초를 뜯었다. 나도 익모초와 쑥을 뜯느라 애먹었다. 엄마는 한여름에도 불구하고 이 쑥과 익모초를  다리고 다려서 조총처럼 만들어서 오빠에게 주었다. 매우 썼던 그 약을 오빠는 다먹었을까?

 

나는 엄마의 큰아들에 대한 지극한 정성을 질투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내혼자 꿋꿋하게 서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때 내가 몰랐던 것은 엄마는 모든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엄마와 나는 저녁무렵에 절을 내려왔다. 나는 그때 절밥이 맛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여닐곱살 이었던 내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은 새파란 하늘과 절 아래로 물이 흐렀던 것 그리고 우물근처에 핀 보라색 꽃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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