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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절

엄마는 아주 젊으셨을때부터 절에 다니셨다. 엄마는 정말 절하러 절에 다니신 것 같다. 나는 엄마를 따라서 절에 가서 정말 절을 많이 했다.

 

충주에서 버스를 타고 신니면 방향으로 한참을 가면, 버스는 이내 넓은 논들 사이에 단 하나의 길인 신작로위에 우리를 내려놓고 휑하니 가버렸다.

 

떡을 하셨는지 쌀을 가지고 가셨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마는 머리에 큰 광주리를 이고 앞장서서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절은 산꼭대기에 있어서 꼬박 몇시간을 걷는지 모를 정도로 많이 걸었다.

 

얼마를 걸어올라갔는지 모를 정도로 올라갔을 때 내 앞에 나타난 절은 매우 실망스럽게도 허름한 절이었다. 스님도 머리도 대충 깎으시고 가족들도 거느리시고 계신 그런 절.. 그 절 꼭대기에는 산신당과 칠성당이 있었다. 칠성당에는 호랑이와 신선이 서 있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엄마는 꼭 이 칠성당에 들어가셔서 절을 하셨다. 나는 엄마 옆에서 따라서 절을 했다. 나는 절욕심도 많아서 엄마가 하는대로 그대로 따라했다.

 

나는 이후에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면서 그것이 샤마니즘 토테미즘 이라는 토속신앙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나는 학교들어가기 전이라 왜 호랑이에게 절을 해야하는가?하고 매우 궁금했었다.

 

절을 마치고 나왔을 때 엄마가 큰오빠의 이름을 걸어서 기왓장에 시주를 하셨던것을 기억한다. 엄마는 큰오빠만 잘되면 다 잘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마치 당신이 어릴적에 장남만 잘되면 다 잘되는줄 알고 딸들에게는 공부를 하나도 안가르쳤다는 당신의 아버지를 무심결에 따라하고 계셨던 것이다.

 

엄마가 이렇게 큰오빠를 끔찍히 여겼다는 것은 아마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오빠를 만나면 이 이야기를 해주어야지 (내가 증인이니까), 엄마가 얼마나 큰오빠를 끔찍하게 여겼는지......하면서도 매번 잊어버리는 터라 오빠에게 아직도 이야기를 하지 못한채 산다.

 

엄마가 오빠를 끔찍히 여겼던 것으로 기억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충주 역전동에 살 때다. 큰 오빠가 서울에 직장다니고 있을 때 위가 안좋다고 하니, 엄마는 제천에서 결혼하여 살고 있는 유태언니네 집에 나를 데리고 가서 야산과 들에 있는 쑥과 익모초를 뜯었다. 나도 익모초와 쑥을 뜯느라 애먹었다. 엄마는 한여름에도 불구하고 이 쑥과 익모초를  다리고 다려서 조총처럼 만들어서 오빠에게 주었다. 매우 썼던 그 약을 오빠는 다먹었을까?

 

나는 엄마의 큰아들에 대한 지극한 정성을 질투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내혼자 꿋꿋하게 서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때 내가 몰랐던 것은 엄마는 모든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엄마와 나는 저녁무렵에 절을 내려왔다. 나는 그때 절밥이 맛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여닐곱살 이었던 내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은 새파란 하늘과 절 아래로 물이 흐렀던 것 그리고 우물근처에 핀 보라색 꽃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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