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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장에 가던 엄마

물리적으로 떨어져있어서, 최근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돌아가면 많이 만나보리라.. 모내기전에 돌아가리라.. 황새떼 오기전에 돌아가리라^^ 아, 벌써 모내기를 마쳤나??). 이런 적막한 시기에 밀려오는 것이 엄마생각이다. 내가 만약 글을 알기시작한 5살이나 10살때부터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써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에 대한 기억으로 제일 처음 기억은 음성장에 나를 데리고 다녔을 때였다. 그때 나는 한 네살쯤 되었나보다.  충주에서 버스를 타고 한 1시간 (그때는 버스도 흙길을 가야했으니..) 남짓가면 음성이 나왔던것 같다. 엄마는 하루가 멀다고 음성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장보러가신것은 아니었다. 작은엄마네 가게를 도와주러 가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바로 밑에 동생이었던 작은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다 일찍 돌아가셨다. 작은엄마는 딸린 5명의 자식들을 먹여살려야 했다. 작은엄마의 호탕한 웃음과 씩씩한 목소리와 억센 팔뚝은 5남매를 기르고 보호하기위해서 발달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를 집에두고 가실수 없으니, 나와 내동생을 데리고 음성장을 도와주러 가신것이다. 멀리가시면서 나와 내동생을 집에두고 가실수 없다고 생각하신 것인지, 우리 둘을 데리고 장을 도와주러 가신것이다. 엄마가 둘을 다 데리고 가시기 어려울때면, 나는 아버지학교 (아버지는 그때 국민학교 선생님이셨다. 담임은 주로 1학년을 맡으셨었다.)에 나를 맡겨놓고 가시곤 했다. 나는 아버지학교에 있을때보다 엄마를 따라 음성장에 가는게 더 좋았다.

 

시골장은 매우 시끌벅적했고, 작은엄마가 장사하시는 곳은 큰 기와집으로 된 집에 여러가지 물건들이 즐비하게 쌓여있는 그야말로 아주 시골장터의 한 귀퉁이에 있었다.

 

나는 음성장에 엄마가 나를 데려갈때가 매우 즐거웠던 것 같다. 거기가면 마름모꼴의 사카린도 볼 수 있었고, 작고 동그란 모양의 단것 (지금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데, 인공감미료의 일종, 아마 감미정일것이다.)들이 많았다. 또 웬 빨간색, 파란색 등등 색색이 아롱진 과자들이 많았는지......

 

그러나 그때 무엇보다도 즐거웠던 것은 시골장터에서 사람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때 기억으로는 흰색와이셔츠같은 옷과 검은색이나 회색바지들 그리고는 검은고무신을 신은 모습이 바로 농부들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바로 몇년뒤에 아버지의 모습이었는데, 나의 아버지가 도저히 생업으로 교사직을 할수 없다며 (그당시 교사월급은 쌀한두가마니정도, 이것으로 8식구(막내동생은 아직 안태어났으니 아직은 8명이다)가 도저히 살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만두시고 충주 달천으로 들어가셨을 때 아버지가 입으셨던 옷도 바로 낡은 흰색와이셔츠에 검은바지였다.  

 

엄마의 일생동안의 노동은 끝이없었고, 나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의 노동을 보면서 자라온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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