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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밤
연탄 화로 위
고기안주가 지글대면
오랜 벗과 술한잔 건네고
지난날 무용담을 농삼아 질겅이며
커져가는 목청따라 흔쾌히 취해간다
북쪽에서 시작된 삭풍도
대폿집 창문 한켠 쉬어가고
연탄불에 발그레 익어가는 추억
파르한 새벽녘의 한기도 녹고
몇겹으로 감쌌던 맘들이 열렸다
황태덕장에 가보면
뾰족나온 주둥이 꿰여
비명마저 얼어붙은 명태떼들이
잿빛도시 속 벌거숭이로 대롱 매달려
한겨울 지나온 가난한 이들과 닮아있다
몇번 남은 추위마저
길게 늘어선 밤이 짧아지 듯
처마 끝 고드름이 물방울로 맺히듯
고요한 침묵으로 변할 것을 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말로 다 표현못하듯
거친 숨결을 토해내던 이 겨울도 정겹다
터벅 터벅 걸음 딛을 때마다
발끝에 걸리는 앉은뱅이 꽃처럼
주검처럼 가장 낮은 곳을 향해
겸손한 미소를 배우며 살기를
봄날 햇살을 기억해내고
그 날의 풋사랑이 봉인된 시간에 감사하며
어김없이 시작될 내일을 준비해야지
연탄불이 꺼지지 않도록
위아래 갈기를 게을리 않고
벗과의 인연이 동치미 익듯 맑은 빛
탐스럽고 뽀얗게 우러나는 시간
오늘 밤
어둠도 마냥 솜이불같다
새롭게 웃음짓기
그렇게 자리찾기
새해가 들어선 후 지역본부 사무처는
지난 평가와 더불어 올 한해 초벌계획과 더불어
새로운 업무 나누기를 진행했다.
그 결과
작년 한해 버거웠던 언론가 선전사업이 떨어지고
87년 20주년 계승사업이 온전히 내 몫으로 들어왔다
문화활동가로서나
노동운동을 시작한 후 어쩌면 내심 바랬던 일이다
분루를 흘려야만 했던 연말의 패배와
연초부터 뿌리가 흔들리는 것만 같이 터지는 사건들
이럴 때일 수록 늘 새로운 바람이 필요하다
난데없는 바람이 아니라
단단하게 묶여진 밑바닥으로 향하고 너르게 퍼지는 그런 바람
지도로만 봤던 낯선 땅
누구에게 알릴 겨를도 없이
하늘을 날아 반나절 걸려 도착해보니
이미 마중나와 있는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것 같은
또 다른 나
다잊고 지우고
또 그렇게 비우고 떠나왔다 여겼건만
맨 처음 내가 사랑했던 첫사랑이
또 맨 처음 나를 사랑했던 그녀가
마지막 사랑이길 바랬던 내 아내가
또 마지막 사랑인 듯 설레게 하는 그이가
공항 어귀부터
도시로 들어가는 길가에
토담으로 메워진 골목 한켠에
야시장 어스름 가로등 밑에
우두커니 서서
여행 하루만에 지쳐버린 나을 보듬는다
홀로 견디는 법을 배워가려
시작한 나의 서쪽 여행은
처음부터 제자리를 맴돈 것이랴
부질없다 여기고 훌훌 털어낸 것은
세상에 찌든 먼지가 아니라
다정한 그네들 숨결의 추억이랴
시작부터 끝을 보고 걷는 걸음만큼
사뭇 진지해지고
비장하게 내모는 것도 없다
십자가 메고 언덕길을 오르던 예수가 이미
운명을 걸고 원망보다는 사랑을 곱씹었다 했나
제 몸에 불을 당겨 세상에 빛이 되려 했던 이들도 그러했다
어쩌면 나도 나를
묻고서야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너무나 눈에 익어 낯선 이국의 도시 한 복판
욕정으로 가득찬 내 영혼을 묻고서야... ...
도종환 시인의 시어를 좋아한다
후배는 최근 교단에서 벗어나 요양중에 쓰여진 시들이 맘에 든다 하지만
난 이전부터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 녹여져 낱말이 된
그의 시를 읽으면서 위안을 얻곤 했다
폐사지
- 도종환
열정이 식으면서 노을도
하늘 한쪽을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마음이 잿더미인 사람들은
떠도는 동안 자주 폐허와 만나곤 했다
사원들은 수백 년을 걸어서
마침내 폐허의 완성에 이르렀지만
우리가 쌓은 성채가 무너지는 데는
채 몇 해가 걸리지 않았다
기울어진 내 성벽의 전돌이 허리를
땅에 대는 순간 폐허의 벌레들이 달려들어
내 생애를 분해해서는 땅속 깊이 내려갔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비문 하나 남기지 못한
왕국은 바로 잊혀지고
노을은 어둠으로 바뀌어 흔적 없이 지워졌다
영생의 선약 같은 말씀 한 모금 만들지 못하고
약초 뿌리 몇 개를 캐다만 나의 행로는
적막과 함께 마른 풀냄새를
바람에 흘려보내게 될 것이다
신화를 허공에 벽화처럼 새기고 싶어 하던 날들을
새들은 저희의 목소리로 비웃을 것이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은 반드시
폐허의 긴 복도를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길게 누운 채 마모되어 가는
돌부처들이 먼저 알았을 것이다
제국의 영광을 위해 이룩한 모든 것들도
폐허의 제단에 바쳐야 하는 날이 온다는 것을
나무의 씨앗과 뿌리에게 자신의 영역 전부를 맡기고
나머지도 새들의 잠자리로 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폐허의 따뜻하고 편안한 품 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몰
지평선을 향해 해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구릉 위에 있는 무너진 절터에서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사암으로 쌓은 성벽의 붉은 돌 위에도
노을은 장밋빛으로 깔리고
폐허는 황홀하였다
그가 폐사지 근처 어디를 혼자 떠돌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거기서였다
젊은 날 그와 나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고 싶어 했다
비슷한 시기에 둘 다 뇌옥에 갇혔고
그가 맨 앞에서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 흘리면
내 옷을 찢어 피투성이 된 그의 얼굴을 감쌌고
내가 쓰러지면 그가 옆에서 울었다
왕국이 가장 강성할 때 지은
거대한 사원도 무너져 있었다
끝이 안 보이는 병사들을 사열하던
왕의 테라스는 적막하였고
햇빛을 하얗게 달구어 공중으로 튕겨내던 창들도
영원히 하늘을 찌르지는 못했다
일몰 속에서 나는 우리가 꾸었던 꿈도
이루어지지 않은 꿈의 파편들도
다 그것대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꿈은 언제나 꿈의 크기보다 아름답게
손에 쥐어졌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안타까움이 남아 있는 날들을
부축해 끌고 가는 것이다
내일은 다시 내일의 신전이 지어지리라
시대의 객체로 밀려나 폐허의 변두리를
걷고 있을 덥수룩한 수염의 그를 생각했다
익명의 쓸쓸한 편력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지평선을 넘어가는 해가 그를 보고 있을 것이다
찬란한 폐허 위에 그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란 형틀에 놓이게 되는 순간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잡힌 나그네처럼 바둥대어 왔다.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잡고
자신의 쇠침대에 눕혀놓고는 길면 잘라내고,
짧으면 늘여서 침대의 크기에 맞춤했던 강도 프로크루스테스..
그렇게 폭압적인 것들은 빠져나갈 길을 처음부터 막아놓고 기다린다
손이 잘 닿지 않았던 지난 몇개월동안 과연 얼마나 발버둥쳤던가
그새 많은 눈물과 웃음이 교대로 지나쳐왔다.
새벽녘부터 보이지 않는 실로 짜놓은 거미줄은
해가 중천에 떠도 조용한 함정일 뿐... 날개짓 하는 작은 짐승들에게는
떼어낼 수 없는 고통과 회한의 시간이었을테다
번잡한 것들을 정리하고 새책 새연필 새공책을 꺼내서
새해의 바램들을 다짐해 적어가던 때의 순박함을 떠올린다.
얼마 가지 않아도 그 때의 순진한 욕심이
지금 품고 있는 서투른 욕정보다는 몇배 진실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죄를 정죄하게 하는 샘물이 있다해도
내가 지은 것들을 다 깨끗게 하지 못할 지니
침묵하고 또 침묵하는 것으로 더 깊은 무덤을 잠시라도 더디게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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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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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새'가 아니라 '금세'야.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