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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버스에서 깜박 졸다가, 아니 푹자다가 못 깨어나서 출판단지를 지나쳐 버렸다. 예전에도 종종 한 정거장 더 간 적은 있지만 눈 떠보니 낯선 풍경이 펼쳐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차가운 아침 바람에 졸음을 털어내고 주변을 살펴보니 모르는 길은 아니다. 여기서 회사까지는 대략 걸어서 30분 안쪽으로 떨어지는 거리. 어차피 파주로 이사오면 주로 자전거를 타겠지만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걷고싶은 날은 있을테고, 그럴땐 이 길을 걸을테니 뭐 잠도 쫓고 길도 익힐겸 걸어서 사무실에 왔다.

 

꾸무럭 거리던 하늘은 마침내 빗방울을 떨궈낸다.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쓰고 아무도 없는 길을 걷는다. 옆으로 지나가는 자동차의 굉음이 무시무시하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더라도 차도에서 자전거를 타지는 못하겠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노래를 목청껏 불어제낀다. 아무도 듣는 이 없으니 그렇게 크게 부를 수 있는거다. 자동차마저 없으면 좋았겠지만, 비오는 아침 혼자서 걷는 길은 충분히 좋았다. 둘레는 죄다 논밭이고 희미한 안개 덕분에 저 멀리 고층 빌딩과 아파트는 눈으로 식별이 안된다.

 

차분히 다소곳이 비는 내리고, 걷다보니 발등이 축축해온다. 요새 발이 아파 운동화를 신은 탓이다. 하기사 운동화 아닌 다른 신발은 모두 바닥이 갈라져 비오는 날은 아예 신을 수 없다. 비와 함께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여름밤 시원하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편지를 쓰던 청주교도소가 떠오르고, 이제는 만날 수 없게된 사람들이 떠오르고, 요새 맨날 늦게 들어온다고 걱정하시는 엄마 얼굴이 떠오르고, 먼 데 살아서 자주 볼 수 없는 친구 얼굴이 떠오르고, 아름다운 노래 가사가 떠오르고, 빗속을 자전거로 달려 다다른 산골 구멍가게에서 먹었던 고로케가 떠오른다. 가을비 혹은 겨울비일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이 비가 내게 많은 것을 선물해준다.

 

사무실에와서 노래를 듣는다. 오랫만에 더클래식의 '여우야'를 듣는다. 이런날은 그냥 일 안하고 하루종일 노래만 듣고 싶다. 사진첩을 꺼내어 오래된 기억들을 불러내고 싶다. 자다가 제 때 못내린 덕분에 여러가지 생각들, 감정들이 나를 찾아왔다. 괜찮다. 가끔씩 일부러 두어정거장 지나거 내려 걸어와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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