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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천명관

1.

천명관, 이라는 작가는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처음 알았다. <금서를 만나다>, 이런 꼭지를 진행했던 것 같은데.. 데카메론이나 캔터베리 이야기, 열하일기 같은 고전을, 그다지 멋지지 않은 목소리로 찬찬히 소개해 나가는 그가 참 기이해 보였다. 그리고, 전혀 재미있게 소개하지 않음에도 그 모든 고전들이 궁금해졌던 건 왜일까.

 



2.

천명관, 이라는 이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 건, 그의 소설 <고래>를 읽어보라는 내 오랜 친구의 문자 덕분이었다. 얼마 전에 만났을 땐,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왔지?, 라고 평론가들이 혼비백산 했더라는 이야기도 직접 들었다. 물론 꼭 이같이 표현한 건 아니지만...

 

3.

총 3부 중 방금 2부의 마지막을 읽었다. 하룻밤 사이 300페이지를 읽었으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장을 덮을 수 없다는 친구의 이야기가 과연, 과장은 아니었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4.

어차피 줄거리를 요약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설화 같기도 하고 민담 같기도 하며 어느 선술집 구석에서 별볼일 없는 사내들이 불콰한 얼굴로 킥킥거리며 주고받을 법한 음담패설 같기도 한 일장춘몽의 대서사시를 그저 읽어보라고 할 밖에... 아무튼 상당히 잡스러운 장르의 혼합에, 이태 전 독립영화제에서 봤던 <제목 없는 이야기> 같은... 구라의 향연이되 가볍게 치부할 수만은 없는...

 

5.

현대문학의 지형도에서는 불쑥 튀어나온 괴물일 지 몰라도, 어쩐지 그가 소개하는 오래된 금서가 그의 스승이자 참고문헌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데카메론이 읽고 싶어졌다. 하핫. 이쯤에서 내가 캔터베리로 떠나기 전 나에게 전화를 걸어 캔터베리 이야기의 서문을 읽어주던 친구의 안부도 궁금해 지고, 캔터베리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그립기도 하며, 영국이라고 하면 런던 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캔터베리라는 어쩐지 촌스러운 지명을 얘기할 때마다 느꼈던 약간의 부끄러움도 떠오르고, <기사 윌리엄>에서 만담가로 묘사되는 초서의 입담에 한참 웃었던 기억도 난다. 

 

6.

- 이쯤 해두자. 진실은 모두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리고 다시, 이야기는 계속된다.

 

7.

고래, 거대함, 힘...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 같이 스러져간다. 또하나의 변주된 남근신화인가 하다가도 그 생각을 접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소멸에서 느껴지는 비애감.. 젠더로 바라보기엔 뭔가가 어긋나는 원시성과 근대성의 혼란이 있어서다..

 

8.

하루만에 두터운 소설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오랜만이다. 좋다. 이제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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