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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부치는 시_환기미술관..

1.

환기미술관에 다녀왔다. 김환기, 김향안 부부의 작품과 글을 한데 모아 엮은 책 출간에 맞추어 '그림에 부치는 시'라는 특별전이 진행 중이다. 김향안은 구본웅의 이복동생으로 이상과의 사별 후에 김환기와 재혼한 여인이다. 그 자신도 화가이며 문필가라는. 친구가 읽으라며 일러준 신문기사에서, 나는 그들의 그림보다도 문장에 관심이 갔더랬다. 어찌 되었건 '반생을 강아지처럼' 살았던 화가 부부의 문장. 하여, 갤러리에 말끔하게 박힌 문자들을 보러 갔다. '넌 어째 그림이 아니라 글을 보러 온 것 같다?'던 말은 정작 내게 했던 말이었고, 그 친구라면 단박에 알아들었을 터.



 

2.

환기미술관은 종로구 부암동이라는, 청와대 뒷편으로 올라가야 닿는, 퍽 높은 동네에 있었고. 그런 동네가 그러하듯, 잘 사는 이들과 못 사는 이들이 뒤섞여 있는 듯했다. 서울이라 느껴지지 않는 고즈넉함. 환기미술관을 찾아들어가는 골목길은 적막하고 차가워 좋았다. 하얀 직사각 명판에 Musee Whanki라 쓰여진 입구를 지나쳐 계단을 조금 오르면, 미술관이 보인다. 이제 그 안과 밖을 훑어보고 있으니, 건축을 모르는 내 눈에도, 공간구성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2층이 그저 뻥 뚫린 채 계단과 복도로만 연결되어 있는데, 그 난간을 짚고 서서 1층 전시물을 내려다 보면, 전시물을 전시하는 데에도 디자인이 숨어 있구나 싶어 앗, 한다.

 

3.

3층 전시실을 오르는 계단 맞은편에는 직사각의 커다란 유리창이 있고, 5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태양빛이 그리로 붉게 스며들고 있었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를 때마다 얼굴을 물들이는 그 빛에 환하게 웃었다. 때맞춰 잘 왔구나. 그 가운데 놓여진 단아한 나무의자에 등을 맞대고 앉아 있으면 이 편으로는 환기의 그림이, 저 편으로는 향안의 그림이 수다스럽다.

 

 

4.

김환기는 현대문학의 겉표지를 비롯해 많은 책의 표지그림과 속지그림을 그렸다. 딴에는 고민고민해서 그려내는 그림들인데, 편집으로 넘어가면 싸인을 해 두어도 위아래가 바뀌는 경우가 있더라는, 하지만 어찌 타박하겠냐는 글을 보며 그에게 정을 준다. 그림 몇 장 보냈으니 표지할 거 빼고는 내다팔아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 주라는 하소체 어투에도 그만 마음을 뺏기고 만다. 그림만 그릴 줄 알았지 도통 삶에는 여우 같지 못 했던 그에게는, 그와 마찬가지로 예민한 감성을 지녔으되 강단 있는 여인이 평생을 함께 했다. 사실 김향안의 그림은 전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작품 아래 붙어있는 짧은 문장들 속에 비쳐지는 그녀의 자신감이 맘에 들었다. 환기와 환기의 예술을 정확히 이해하고 애틋하게 추억하면서도, 자신만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간 그녀가 아름다웠던 거지...

 

 

5.

환기의 책, 향안의 책, 이렇게 두 권의 수필집이 출간된 모양인데 한 권에 18000원이던가. 책의 두께만큼 입벌리고 섰다가 빈손으로 나왔다. 환기미술관에서 큰길로 나와 문득 아랫길을 조금 밟았더니 오래된 옛문이 하나 있다. 창의문(자하문)이란다. 그 아래로 난 작은 길과 길섶의 벤치는 한숨 돌리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아직은 빛의 온기가 남아있을 시간이라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모두에게 숨 돌릴 틈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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