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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8/11
    <인터내셔널가, 역사와 전망> 인트로(2)
    ninita
  2. 2004/08/11
    우리 동네에서 생긴 일 (2)
    ninita
  3. 2004/08/11
    우리 동네에서 생긴 일 (1)
    ninita

<인터내셔널가, 역사와 전망> 인트로


 

세계 각국의 인터내셔널가 모음 : http://plsong.com/bbs/view.php?id=minjung_album&no=103



 

제목 :인터내셔널가, 역사와 전망 The International
상영시간 :30분
제작년도 :00년  
- 제작 : 피터 밀러
- 감독 : 피터 밀러
- 편집 : 에이미 캐리 린튼
- 배급 : 피터 밀러 필름 주식회사 (Deboutles@aol.com)

- 작품 소개 :
노동자의 노래 <인터내셔널>의 기원과 노래가 각 역사적 시기의 투쟁과 맺은 관계, 그리고 그 현재적 의의를 다룬 작품이다. 미국, 중국(1989년 천안문 광장), 소련, 이스라엘, 필리핀, 스페인등 세계각지에서 각 시기에 인터내셔널이 불리워진 실제 자료와 피트 시거, 빌리 브랙을 비롯한 노동 가수들의 해설이 결합된다. 특히, 천안문과 스페인의 반파시즘 투쟁, 현재의 반지구화 투쟁에 걸쳐 세계 각지에서 20세기 전체에 걸쳐 대중들의 함성에 실려 불리워진 동서 고금의 인터내셔널가를 노래의 각소절을 이어서 연속적으로 편집한 프롤로그가 인상적이다.

 

(4월 정기상영 때도 상영했는데, 또 놓쳤다. ㅡ.ㅡ 비디오를 사야만 할까. 어쨌든 이제 8월이니 노동영화제도 슬슬 준비에 들어갈 시기일텐데... 올 노동영화제도 목빠지게 기다리는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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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서 생긴 일 (2)

(우리 동네다. 나는 고층아파트에 살지만,

고층아파트는 12동 뿐, 나머지는 5층 이하의 나즈막한 아파트들이다.)

(여기도 우리 동네다. 옛날에는 고위직 가족들이나 

외국인 기술자 가족들이 살았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문득 87년이 떠오른다. 포항에서 광양으로 이사온 지 2년 째, 난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없는 형편에 그래도 남들 다 하는 거라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해엔 인신매매단에 관한 흉흉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테레비에선 서울의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연일 데모하는 소식이 나왔고, 같이 테레비를 보던 엄만 "너 대학교 가서 데모질 하면 다리몽댕이 분질러버린다"라고 위협하곤 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외부 사람들(포스코 사원들은 주택단지 내에 살고 있었고, 그래서 단지 외의 사람들을 '우리'는 '외부 사람들'이라 불렀다.)이 데모를 하는 바람에 광양 장에 나갈 수 없었던 일이다.

원래 광양은 김양식으로 유명한 곳이었다.(김양식이 대한민국 최초로 시작된 곳으로 알고 있다.) 그 바다는 제철소가 들어설 곳으로 낙점됐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바다는 땅이 되었다.

그로 인해 강제이주를 당해 삶터를 잃어야만 했던 원주민들이 동네로 들어가는 길목 - 전남동부건설노조가 얼마 전에 막았던 - 을 막은 것이었다. 장날이라고 버스 타고 광양에 나갔다가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들고 씩씩대며 걸어들어온 엄마의 말에 따르면, 외부 사람들이 퇴비더미로 길을 막았고, 동네 사람들에게 그 퇴비를 던져대는 통에, 그거 피해서 걸어들어오느라 고생바가지를 썼다는 거다. 어디 나갈 때 포스코 마크가 찍힌 옷을 입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 회사에서 보상금은 아쉽지 않게 줬을텐데 왜 저 난리들인지 몰라.

그게 어디 단지 보상금만의 문제였으랴. (아쉽게 줬는지 아쉽지 않게 줬는지는 알 수 없다.) 어부였거나 농부였던 그들이 생소한 지역 혹은 생소한 직업군으로 내몰리며 겪었을 어려움과 고통을, 억만금이라도 '보상'할 수 있었을까.

우리 동네는 참 예쁘고 깨끗하고 조용하다. 어른들은 그래서 살기 좋다고들 한다. 학교 앞엔 오락실도, 떡볶이 장사도, 뽑기도, 만화가게도 없다. 그래서 애들 교육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하지만 코딱지만한 동네,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훤해서 별별 소문이 다 도는 동네, 아빠들은 똑같은 작업복, 애들은 똑같은 교복을 입지만 집전화번호부터 아빠들의 직위가 들어있고, 누구네 아빠는 차장, 누구네 아빠는 부장, 아빠 직책 따라 애들 씀씀이도 달라서 계급의 차이가 더 잔인하게 드러나던 동네. 아빠의 대학 나온 직속상관 딸과 한 반에 있어서, 죽어도 그 애는 이겨야만 했던 고졸 주임 어린 딸래미의 오기.

난 우리 동네를 죽도록 싫어했고, 지금도 싫어한다.

1년이면 두세 번도 찾아가지 않는 우리 동네,
잊고 살고 싶은데, 이렇게 또 내게 가슴 아프게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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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서 생긴 일 (1)

 

저 멀리 보이는 포스코 표지.

우리 동네로 들어가는 다리 입구에 서 있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이고 예쁘게 가꾸어진 우리 동네에서 어디든 오갈 때마다 보게 되는,

익숙하디 익숙한..



그 표지 앞 널따란 도로에, 전경과 노동자들이 한가득. 생소한..

 

익숙한 그 곳의 생소한 풍경. 묘한 기분. 씁쓸한 기분.

 

우리 동네는 원래 어디에도 없던 곳이었다. 바다를 메꿔 만든 땅.
70년대 개발의 신화가 아직도 전설처럼 떠도는 곳.

(누가 새벽을 불태우는가, 따위의 책들이 집집마다 있다. 그걸 보는 사람이 있는지는 미지수.)
박태준은 신이요, 개발은 선인 곳.

 

그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건설노동자들의 파업은,
나의 부모님을 비롯한 우리 동네 어른들에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관련기사]
"그냥은 안내려간다, 2선 준비 중이다"
총파업 27일차 플랜트노동자 포스코 2차 상경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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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이 뭔지, 하청업체가 뭔지, 건설현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들의 일이 1년 365일 안정적인지 어떤지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그저 그들이 현재 일당 6-8만원이 모자라 50% 인상해 달라고 데모한다고, 그렇게들 생각할 뿐이다.

 

특히 동네 엄마들에게 포스코는, 좋은 회사고, 포스코에서 하는 일은 모두 옳고, 포스코는 누구에게나 정당한 대우를 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건 불경스런 일이다.

 

예전부터 그랬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싫다.
우리 동네가..

 

예전부터 그랬다.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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