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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열망은 해산되지 않는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을 근대 문명국가 명단에서 삭제시켰다.

우리나라도 가입해있는 베니스위원회(법을 통한 민주주의 유럽위원회)는 정당해산이 극도로 자제되어야 하며, 오직 민주적 헌법질서의 전복을 목적으로 한 폭력의 사용 또는 사용의 주장, 그를 통한 기본적 인권의 손상이 있는 경우에만 정당화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작년 11월 정당해산심판청구 이후 18차례의 헌법재판소 변론 과정에서 통합진보당이 폭력적 사회변혁을 추구했다는 근거가 밝혀진 바 없다. 특히 정당해산 청구의 근거가 된 내란음모 사건은 사법부가 무죄를 선고했고, 내란 시행의 주체라 할 수 있는 알오(RO)도 인정하지 않았다.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들의 집에서 총 한 자루, 죽창 하나 나온 바 없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이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북한식 사회주의’ 추구를 헌법재판관들만 알 수 있는 특유의 ‘관심법’으로 ‘숨은 목적’을 알아내서 해산시켰다.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적 이상과 가치’를 강령에 포함시키고 있었으나 아무 문제 되지 않았다. 그런데 통합진보당이 ‘사회주의적 이상과 가치’를 강령에서 삭제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으로 삼은 것은 70년 전 김일성이 사용한 표현이기 때문에 북한식 사회주의 추구 세력이라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판단이다. 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계된 사회주의 폭력혁명 세력으로 몰아 처단하던 군부독재 시절 판결문의 복사판이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주권재민의 민주주의를 부정했다.

안창호·조용호 재판관 의견으로 작성된 보충 의견에는 “피청구인(통합진보당) 주도세력과 북한의 각종 전술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 없이 그들의 글을 읽고 주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위험한 일”이라고 규정했다. 심지어 통합진보당을 뻐꾸기로, 국민들을 뱁새로, 한국 사회를 뱁새 둥지로 비유하며 뻐꾸기가 뱁새를 집어삼킬 것이기 때문에 우매한 국민들을 위해 자신들이 판단을 대신한다고 했다.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재판관들이다.

2004년 총선에서 13%의 정당지지 득표율로 원내에 진출한 이래 2012년 총선 10.3%, 가장 최근 실시된 6.4.지방선거에서도 4.3%의 국민이 지지해준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을 한낱 무지몽매한 대중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규정했다. 더구나 헌법 그 어디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국회의원 자격 상실까지 선고했다. 이는 서울 관악구, 성남 중원구, 광주 서구 주민들의 뜻은 물론 220만 정당투표자들의 주권을 부정한 것이다.

2014년 12월 19일,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헌법재판소는 존립 필요성을 상실했다.

현재의 헌법재판소는 87년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성과로 탄생했다. 헌법재판소에 정당해산 결정권을 준 것은 초헌법적 권력을 부여하자는 취지가 아니다. 1958년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의 정강정책이 북한노동당과 유사하다며 직권으로 강제 해산하고 당수 조봉암을 사형시켰다. 1961년 5. 16. 쿠데타 직후 모든 정당이 해산되었고, 1972년 유신헌법 선포 직후 국회가 해산되면서 정당 활동이 금지되었다. 전두환도 12. 12. 쿠데타 직후 모든 정당을 해산시켰다. 민주주의가 짓밟힐 때마다 감행되어온 정당해산의 비극적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정당해산권한을 정부가 아니라 헌법재판소가 갖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2014년의 헌법재판소는 정치적 중립성을 벗어던지고 법무부가 제공한 논리를 그대로 옮겨 읊는 시녀가 되었다.

2004년 ‘관습법’에 기초한 행정수도 이전 위헌 판결, 2009년 날치기 통과 미디어법 적법 판결, 2012년 곽노현 교육감에 대한 사후매수죄 합헌 판결로 신뢰를 잃어온 헌법재판소는 2014년 12월 19일을 끝으로 존립 이유를 완전히 상실했다.

2014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시계는 87년 6월 항쟁 이전으로 돌아갔다. 비록 소수정당이지만 총선에서 220만 국민이 표를 준 원내 제3당이 해산되는 나라는 획일적 전체주의 국가이다. 국제 엠네스티가 “한국 정부가 국가 안보를 가장해 야당 정치인들을 탄압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을 비롯하여, 뉴욕타임스, BBC, 로이터 통신 등 세계 유수한 언론사들이 한국에서 집회·표현·결사의 자유가 퇴행했다고 보도한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국제 사회의 눈이다.

종북몰이 성격의 민주주의 파괴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김진태 검찰총장은 헌법재판소 선고 직후 긴급 공안대책협의회 개최를 지시했고, '통진당 해산 국민운동본부'와 ‘활빈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정희 대표를 비롯한 통합진보당 10만 당원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보수단체의 고발을 근거로 정적과 진보세력을 탄압해온 정권의 행태 상 향후 통합진보당 관련자, 통합진보당과 유사한 의견을 가진 사람과 단체들에 대한 대대적 탄압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대선 부정 규탄 국면을 내란음모 조작사건을 터뜨려 넘어갔던 박근혜 정권이 정윤회 국정 농단 사건으로 콘크리트 지지율이 무너진 상황에서 종북 공안몰이에 집중할 것은 불문가지이다.

9명 중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낸 김이수 헌법재판관이 “독일에서 공산당 해산 결정이 이루어진 후 12만 5천여 명에 이르는 공산당 관련자가 수사를 받았고, 그 중 6~7천 명이 형사처벌을 받았다”며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일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고 우려한 것은 기우가 아니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렸지만 우리 국민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당분간 거센 공안통치가 기승을 부리겠지만 우리 국민은 유신과 긴급조치, 광주학살 이후 군부독재를 이겨낸 위대한 국민이다. 헌법재판소가 87년 6월 항쟁의 성과를 무위로 돌렸다고 우리 국민이 87년 이전 체제를 용인하지 않는다.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진보정당 15년 발자취가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사라질 리 만무하다. 통합진보당이 중앙선관위원회 목록에서 사라진다 하여 일하는 사람들의 진보정치에 대한 열망이 사라질 수 없다. 1979년 김영삼 총재 제명이 부마항쟁으로, 부마항쟁이 유신체제 종식으로 이어졌듯이 오늘 통합진보당 해산은 더 큰 저항을 불러올 것이며, 역사는 언제나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 되는 정방향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박근혜 정권도, 헌법재판소도 막을 수 없는 역사의 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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