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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성 마비’를 넘어, 혼자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것!(2007.11.30.)

‘경직성 마비’를 넘어, 혼자 서서 걸을 수 있다는 것!

 

 

지금은 다시 기억하기도 끔찍하지만, 꼭 4년 반전에 아내가 교통사고로 척추신경을 다치고, 몇 차례 고비를 넘기면서 재활치료를 통해 조금씩 걷기 시작했을 때, ‘경직’과 ‘통증’이라는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경추 3번과 4번 신경이 손상을 입었지만, 그나마 다행히 신경이 전부 끊기지 않아 완전 전신마비는 모면할 수 있었고, “걸을 수 있다”는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재활 치료를 받는 중에 맞닿게 된 ‘도전’인 셈이었다.

사실 배설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즉 똥오줌을 스스로 가눌 수 없는 ‘완전마비’가 아니라는 점만으로도 위안을 삼고 있었는데, 힘겨운 물리치료의 결과로 근력이 생기고 신경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근력과 함께 ‘경직’이, 신경이 살아난 만큼의 ‘통증’이 동반된 것이다.

 

당시 재활 치료과정에서 알았지만, 마비에는 ‘경직성 마비’와 ‘이완성 마비’가 있었다.

‘경직성 마비’는 불필요하게 신경이 극도로 긴장하면서 온 몸이 뻣뻣하게 되는 것이고, ‘이완성 마비’는 몸이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못한 채 축 늘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아내는 ‘경직성 마비’였다.

조그만 자극에도 신경이 뻗쳤고, 사지 전체에 팽팽하게 긴장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경직만큼 통증이 수반됐다.

손상으로 흐트러진 신경은 온갖 알 수 없고 가눌 수 없는 통증을 뇌로 전달했다.

그 때마다 아내는 ‘경직’과 ‘통증’의 고통을 호소했다.

스스로 통제할 수도 없앨 수도 없다는 점에 절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초기 재활치료 과정에서는 이완성 마비에 비해 경직성 마비가 빨리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경직’으로 걷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잘 서고 잘 걷는다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다행히 경험이 풍부한 물리치료사는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통증’에 대해서는 “통증은 신경이 살아있다는 것”이라 위안해 주면서, “경직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무릎과 허리를 굽히고 무게 중심을 앞으로 옮기면서 그 탄력으로 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면서, ‘경직’으로 서는 것에 안주하지 않도록 물리치료를 했다.

지팡이나 기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서서 걸을 수 있을 즈음에, 물리치료사는 “지금 몸이 완전히 고정된 상태다. ‘안정’된 것과 ‘고정’된 것은 다르다. 몸통이 움직이면서 안정돼야 제대로 걸을 수 있다”고, ‘고정’된 몸과 ‘안정’된 몸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양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몸통’을 움직이면서 안정돼야 제대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혼자 걸으려면 위급한 상황에서 혼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병원은 온실이고, 바깥세상은 현장이기 때문이다.”

4년 반이 지난 지금, 아내는 아직도 양 손에 힘을 빼지 못하고 있고, 몸통이 자유롭지 못하며, 위급한 상황에서 혼자 대처할 수 없어서, 혼자 서서 걷기는 하지만 ‘제대로’ 걷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모든 사람이 갓난아기 시절에 이미 마친 걷기 학습을 아내는 지금 ‘의식적’으로 훈련하고 있다.

제대로 걷기 위해.

4년 전 6개월간의 재활치료를 마치고 병실을 나설 때 물리치료사가 했던 마지막 이야기가 아직도 귓전에 남아있다.

 

“경직은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다. 경직을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 한번은 넘어질 것이다. 그 때 어떻게 순간적으로 대처하느냐가 혼자 걸을 수 있는지에 관건이다.”

 

2007.11.30.

관악산 남쪽 기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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