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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7/03
    작업...(6)
    schua
  2. 2005/04/25
    빈곤화와 이주여성(7)
    schua
  3. 2005/04/10
    우열(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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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4/03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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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4/10/26
    이주노동자에게 집회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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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4/09/14
    #방글라데시 part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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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4/09/08
    #방글라데시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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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4/09/04
    #방글라데시 part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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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4/08/30
    # 아버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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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4/08/29
    이곳은...변명의 장(4)
    schua

작업...

오랜만에 청소를 했더니 오래 결렸다.

장장 5시간

.

청소라기 보다는 내다 버렸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도저히 정리가 안돼서 평소에는 거의 하지 않는 짓을 했다.

 

평소에는 청소를 할라치면 나중에 사용할 텐데 싶어서 버리지 못하고 쌓아만 놓는다.

그러다 문득 일년이 지나도록 안쓰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의미해...라고 생각해 보지만 그래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어딘가에 잘 둔다.

근데 막상 그것이 필요할 때는 어디 있는 지 몰라 또 산다. ㅜㅜ

정말 큰 맘 먹고 갔다 버렸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마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이 아닌가?

여전히 이런 저런 일이 남아 있긴 하지만 하나씩 정리하는 중이고...

다큐 작업에 시동을 걸고 있다 보니...기운이 나나 보다.

 

작업을 할 때는 면민해지는 것 같다.

모든 상황을 느끼고 정리하고 촬영하고 이야기 만들고..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해야 하고 또 동시에 집중해야 하는 작업.

여전히 세상에 대한 이해를 잘 하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뭔가를 이해했다고 느꼈을 때....

기쁨이다.

 

하지만 매 순간 순간은 여럽다.

지금도 한가지 고민에 빠져 있는데

다큐는 솔직한 작업인 지...아님 내가 순진한 것인 지..

내가 이해 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 고민의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내일 촬영이 있어서 이만 자야 한다.

포스트 쓰는 것을 또 놓칠까봐 우선 써 놓는다.

고민을 정리해서 올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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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화와 이주여성

"빈곤화와 이주여성"....최근의 화두다.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점점 더 가난하게 만들면서 이주하는 인구 중에 여성의 숫자가 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전부터 가난은 여성의 삶을 구속했다.

 

왜 그런 상황 말이다...집안이 가난해지면 제일 먼저 여자아이의 학업을 중단하는 상황, 혹은 여자아이가 경제활동을 시작하는 상황....그래서 여성은 가난해지고 가난해지고 가난해지는 상황....어쩌면 조금씩 상황은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맏이인 엄마가 동생들을 위해서 학업을 중단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그리고 나서도 동생들의 학비를 위해 양계장을 했던 것 처럼 말이다.

 

이번 다큐를 보고 사람들이 이런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엿 같다'(여기서 '아시아'는 가난한 나라의 은유이다. ) ......그리고 여성이주의 특수한 한 형태인 국제결혼으로 들어온 이주여성의 삶을 보면서 좀더 보편적인 질문이 모든이의 가슴속에 남길 바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같이 공유했으면 한다.

 



이제 슬슬 기획서를 구체화시켜야 하는데 민망할 정도로 드라마를 못 만들겠다.

다큐 작업이 픽션 작업과 다른 것이 아마 이 부분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내가 보기에는 말이다) 픽션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 되는 데 (물론 무지 어렵지만 말이다^^;;) 다큐작업은 우선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 감동도 있어야 하고 또 그 안에 입장을 들어내는 메시지도 있어야 한다. 휴우~~~~~~~~~

 

요즘 제일 고민이 되는 부분이 드라마이다.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는 대략 정리가 된 것 같은데...그 주제를 어떤 사실을 통해서 들어낼까? 요거이 매우 고민이 된다.

 

걱정도 된다. 국제결혼이란 매우 특수한 소재를 통해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을 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정말 이럴때 내공이 필요한 데...내가 그만한 일을 할 수 있을지..

 

어찌 보면 사람의 생활은 다 특수한 어떤 것인데...그 안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기 위해 우린 통계를 사용하기도 하고 다양한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닐까....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기획서를 쓸때 가장 힘든 것이 아직 있지도 않은 상황에 대해 상상하고 소설을 쓰며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다. ^^;; 아마도 사전 조사가 모자라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꾸 마음이 조급하다.

 

잘 할 수 있을까? 자꾸 이런 질문이 머리를 맴돈다. ㅠㅠ

그래서 죽을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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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열

* 이 글은 동동이님의 [매맞는 여성] 에 관련된 글입니다.

 

라디카 언니가 전화를 했다. 최근 들어 이런 저런 의욕이 떨어진 언니를 보고 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언니 목소리는 매우 가라 앉아 있었고 '뭐 하나 물어볼께요'로 말문을 연다. 언니는 가끔 존댓말을 사용한다. 그럴때는 나는 예민해진다. 뭔가 우리 둘의 관계가 아닌 사회적 관계를 언니가 투영하는 것 같아서 긴장하게 된다.

 

언니왈, 언니는 잘 모르는 사람인데, 건너 건너 아는 젊은 네팔 여자가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는 21살 정도 됐는데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온지 3~4개월 정도 됐고 임신을 한 상태인데 남편이 자꾸 때린다는 거다. 전화를 거는 지금 집을 나왔단다. 그런데 그녀는 한국말도 할 줄 모르고 자기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른단다. 경남 어딘것 같은데 서울에 언니가 있는 곳으로 오고 싶다고 했단다. 언니는 올 수 있겠냐고 하니. 잘 모르겠다고 했단다.

 

나는 빨리 가방이 있는 방으로 가, 가방 안에 있는 자료집을 찾아 이런 저런 전화번호를 불러줬다. 그리고 넘 흥분하지 말라고 언니 걱정하지 말고 다시 전화 오면 여기 전화번호 알려주고 서울에 와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라고 했다.

 

이주여성에 관한 다큐를 준비하면서 이런 저런 자료들을 둘러 보는 중이어서 여성이주관련한 단체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 넘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전화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경남쪽은 비가 오나...비는 피하고 있나? 꼬리에 무는 질문을 억누룰수가 없다.

 



자료조사 때문에 여성관련 인권센터에서 낸 토론회 자료집이며 신문기사들을 보고 있는데 정말 참 다양한 상황에서 맞는 여성들이 있다. 말도 하기 싫다. 맞는 여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고 많은 이들이 연구했고 논문도 수두룩할 거다. 하지만 참 숨막히는 것은 여성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는 거대한 먹구름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자라면서 '여성이기 때문'이란 인식 없이 자랐던 것 같다. 그러다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지 않다란 것을 알게 되면서 참 이상했다. 왜 평등하지 않아. 평등한데 당연히 평등한 존재들인데 그런 막막한 답답함이 있었다. 물론 이런 저런 책도 읽으면서 정말 왜 그러한 사회가 됐는지에 대한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내가 정말로 여성이 불평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그저 평등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올드패션이고 그 사람들이 현실적이지 않고 뭔가 이상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난 요즘 점점 무게를 느낀다. 역사 안에서 오랜 시간 동안 불평등했던 아니 더 구체적으로 존중 받지 못했던 그래서 항상 열등한 존재로 인식됐던 여성들의 역사가 느껴진다. 그래서 끔찍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답답함은 조금씩 가신다)

 

'여성이 열등하다'라는 이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생각들...

난 가끔 르귄의 <빼앗긴 자들>에서 읽은 한 대목이 생각난다. 그 대목을 읽을 때 난 소설인 줄도 잊고 줄을 쳤다.

(<빼앗긴 자들>에 대해서는  달군님의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 을 읽어보시길)

 

그는 왜 우주선 안에 여자가 없느냐고 물었고 키모에는 우주 화물선을 움직이는 것은 여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대답했다....키모에가 물었다. [쉐백 박사님, 그쪽 사회에선 여자들이 남자와 완전히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면서요. 사실입니까?] [여자를 남자 취급하다니, 그건 좋은 장비가 있는데도 써먹지 않는 꼴이겠는데요].....키모에는 당황해서 말했다 [아, 아뇨. 성적인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당신은, 그들은...., 그러니까 사회적인 지위 면에서 말입니다][지위라는 건 계급과 같은 건가요?]..........[남자들이 하는 일과 여자들 일 사이에 아무 구분이 없다는 게 정말이냐고요][그야 없지요. 아주 기계적인 데 기반을 두고 노동을 구분하는 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사람은 흥미, 재능, 힘에 따라서 일을 선택하오...., 성별이 무슨 상관인가요?][하지만 남자들이 육체적으로 더 강하잖습니까][그야 종종, 넓은 범위로는 그렇기는 하지요. 하지만 기계가 있는데 그게 뭐 중요한가요? 게다가 기계 없이 삽으로 땅을 파거나 등에 짐을 걸머질 때에도, 덩치 큰 남자들이 더 빠르기는 할지 몰라도 여자들이 더 오래 일하잖아요......, 난 종종 내가 여자들만큼 강인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는걸요]키모에는 충격을 받았는지 공손함을 깡그리 잃어버리고 그를 응시했다.[하지만 그런 손실을, 여성적인 것을 다, 우아함이라든가, 그런, 거기다 남성적인 자기 존중을 잃은다면, 아니 당신 일에서 여성들이 동등한 척할 순 없잖습니까? 물리학이나 수학이나 그런 지적인 분야에서요? 자신을 계속 그들 수준으로 낮춰줄 순 없잖아요?].............[그다지 그런 척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카모에][물론 저도 고도로 지적인 여성들을 알기는 합니다. 남자와 똑같이 생각할 수 있는 여자들 말입니다]

 

우열이라는 문제는 우라스의 사회 생활에서 중추적인 일임에 분명했다. 키모에가 스스로를 존중하기 위해 인간 종의 절반을 열등하게 여겨야 한다면, 여자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존중할까. 그들 역시 남자들을 열등하게 간주해야 하는 걸까?

 

난 정말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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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이번에 시작할 작업은 '여성이주'에 대한 것이다.

여성에 관한 것, 너무나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만났던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남성이주노동자이고 그리고 대부분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농후한 사회의 출신들이다 보니 '강고한'(?) 연대의식으로 무장한 나의 카메라를 멈추게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때면 '내가 모잘라서 그런 거다' 하면서 마음을 달래기도 했지만...힘든 시기를 보낸 것은 확실하다. 그 와중에서도 내가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이주노동자의 관계 때문이다. 같이 하면 즐겁고 끊임 없이 줘야 하는 관계가 아닌 서로 나눌 수 있는 관계, 가끔은 비숫한 고민을 나눌 수도 있고...정말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관계였다. 그래서 입버릇 처럼 '난 다음에는 꼭 여성이주노동자에 대한 다큐작업을 할거야.'하고 다녔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여성이주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하는 와중에 이주여성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급하게 제작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들어온 한 언니가 임신을 했는데 그 언니의 신원을 보증해줄 남편은 교도소에 있고 배속에 있는 아기의 상태가 안좋다고 그 언니의 상황이 국제결혼한 여성의 한국에서의 어려운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촬영을 의뢰했다.

 

여성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하는 와중에 그런 부탁이 오니...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게다가 그 언니가 촬영에 찬성을 했다 하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생판 얼굴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와서 자신의 매우 사적인 모습을 촬영하는 것을 그 언니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혹은 그녀의 불행을 좋은 기회다 하면서 촬영을 부탁한 센터를 믿을 수 있는지..그리고 좀더 근복적인 문제인데....그 언니의 고통을 내가 동요 없이 카메라에 담아 낼 수 있는 지....고민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스위스 갈때 봤던 태국여성이 생각났다. 비행기를 태국에서 갈아탔는데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장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 반 이상이 유럽남성과 태국여성 커플이었다. 나이도 대부분 유럽남성은 나이가 많고 태국여성들은 매우 젊거나 혹은 그 남성들 보다는 어려보였다. 난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매우 불쾌했다. 마치 성매매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한 것 같아 약간은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래서 붙들고 뭐라 해야하는데 하는 마음이었던 듯 하다. 계속 불편했던 정신이 결론을 내렸다. 제국주의 커플...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커다란 성매매 굴레 아래에서 오랫동안 숨죽여 살아왔다는.... 

 

여성이주센터에 계신 분을 만나니 그 분 왈, "이주란 상황에서 가정(국제결혼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셨다)으로 들어오든 2차 산업으로 들어오든 3차 산업으로 들어오든 다르지 않다고 본국을 떠나서 가족을 먹여살리려고 혹은 미래를 위해서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같은 것이다" 라는 것이다. 다른 분이 이야기해주신 국제결혼 실태는 정말 놀라운 것인데....잘못하면 그 분들에게 누를 끼칠 것 같아 지금은 적지 않겠다. 나중에 나의 생각이 정교히 정리되었을 때 올리도록 하겠다.

 

처음 여성이주노동자에 대한 작업을 하려 했을 때는 여성노동자에 중심이 맞춰졌다.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여성이주노동자들도 같이 겪는다는 것 단지 이주라는 것 때문에 한번 더 차별 당하고 억압 당하고 소외당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여성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같은 굴레를 공유하고 그렇기 때문에 연대해야 한다...뭐 그런 류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글로 쓰니 진부하네요. ^^;;) 그래서 국제결혼해서 이주해온 여성이주분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넘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데 여성이주센터에 계신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이주라는 것 안에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것을 들어낼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국제결혼은 여성만이 선택할 수 있는 이주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서글프다.

 

내게 힘들때 위안과 소통으로 편안함을 주었던 이주언니와의 이야기는 어쩌면 사적 다큐가 될 것 같다. 조금씩 조금씩 언니와 나의 관계가 나타나는 촬영을 할 것이다.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가 정말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지..성찰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 

 

하지만 국제결혼으로 들어온 언니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겠다. 물론 작업을 하다 보면 국제결혼을 해서 들어온 언니들에 대한 이야기만 하지는 않겠지만 이제 조금은 그 언니들과 함께 가정이라는 굴레가 아닌 좀더 넓은 공간에서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놀고 싶어졌다.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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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에게 집회란..

* 이 글은 썩은 돼지님의 [이 신발도 말을 하고 싶었을까?]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지난 2월 17일 굽다가 연행된 날이다.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 어이 없이 샤말을 길에서 납치한 것을 항의하는 집회였는데

맘 먹고 덤비는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의 집회 침탈을 가까스로 외환카드 노동자들과

연대하러 온 학생, 활동가들이 막고 있을 때

뒤쪽에서 굽다가 연행됐다.

굽다의 사지를 잡고 50m 정도 떨어져 있는 봉고로 데려 갔다.

난 그 상황을 보고 맥이 빠졌다.

들고 있던 카메라는 지 맘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대오를 향해 큰소리로 '여기 여기' 했다.

다들 정신이 없었던 지라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었다.

멀리서 연영석 동지가 달려오면서

'이럴 필요까지 없잖아. 당신들 이럴 필요 없잖아' 한다.

너무 상식적인 말인데 멍하게 들렸다.

그 영상을 보면 순간 순간이 멈춰진 스틸 같다.

그 장면만 지나면 다 괜찮아질 것 같은

그래서 꾹 참아보지만 그 장면은 계속 된다

현실과 희망의 괴리...

그 상황이 재연되고 그 상황을 어찌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일때면 그 장면에서 그땐 도망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미치기 십상이다.

 

 

그렇게 굽다를 잃고

우리는 명동농성단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버스 안에서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농성단에 도착해서는 다들 들머리에 앉아

넋을 놓았다.

그러다 신발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걸 찍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 다가오더니 그게 굽다 신발이란다.

그 소릴 듣고도 난

그 신발을 한참 찍었다.

마치 굽다가 투명인간이 되었고

신발만 내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굽다' 부르면 투명인간이 된 굽다가

'어 비즐리' 그러면서 나타날 것만 같았다.



이주노동자 집회에 가면 상식 밖의 상황이 많이 벌어진다.

아무 일도 아닌 것 가지고 경찰이 트집 잡고 험악한 분위기를 만든다.

어느 집회를 가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 일들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왜들 그러는지 왜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저렇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한국 사람이니까.

그런데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멸시.

까놓고 이야기하면 그거였다.

별 것도 없는 나라에서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면 멸시 좀 받고 살아야지

어디 집회까지 하고 지랄이야.

얼굴에 씌어 있다.

노골적일 때도 있다.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집회할 때였는데

처음으로 이주노동자가 이주노동자 집회에 왔다.

그랬더니 하는 말 "왜 여기까지 데려 오고 그래"

한국 활동가에게 하는 말이다.

그 활동가 왈 "이주노동자가 개입니까 데려오게"

통쾌했다. 하지만 그 경찰 말 정말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으면 웃으면 되는 데 웃음도 안나온다.

 

아무 권리도 없고 언제든 잡아채서 넣어 버리면

본국으로 돌려 보낼 수도 있고 어디 하나 거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주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아무런 권리가 없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주노동자가 집회에 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농성을 하면서 중요할 때 집회를 해야 하는 데

머뭇거리는 이주동지들을 보면 답답했다.

하지만 한번 연행되면

너무나 어처구니 없게도 어떤 방법도 없이 본국으로 추방되니

그러면서도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집회에 나가는 이주동지들을

볼 땐 정말 마음이 아프다.

 

한국에서의 자신의 삶이, 시간이 송두리째 강탈당할 수 있다는

그런 압력을 이겨내면서 이주동지들은 집회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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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part 3

1.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대뽀였던 듯 하다. 그냥 간다란 생각으로 가긴 갔는데 짧은 기간 동안 원하는 그림을 찍어야 한단 생각에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외국에 나가면 느끼는 해방감이 있다. 그래서 은근히 외국에 나가는 것을 즐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난 그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에 예외가 되는 상황. 난 아마도 그런 '이방인이 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사람들의 걸음 속도와는 다른 속도로 걸어도 되고 길 가다 한쪽 층계에 앉아 물줄기 처럼 흘러 어디론가 가버리는 사람들을 쳐다 봐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 그런데 방글라데시는 그게 아니다. 혼자서는 밖에 못나갈 수도 없었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밖에 한번 나갈라치면 온동네 사람들이 다 쳐다 본다. 여자 혼자 잘 다니지도 않거니와 외국여자이기 때문에 멀리서도 잘 보였나 보다. 같이 지내던 사람들도 그런 상황때문에 날 혼자 절대로 내보내지 않았다. 누군가 같이 갈 사람이 있거나 아니면 누군가 와서 데려 가는 상황이 되지 않으면 아에 밖에 나가게 하질 않았다. 이야기로 들으면 무슨 감옥 같겠지만 그게 그 사회의 소통이니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느끼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답답한 것뿐이지. 2. 또이모르, 이주 그래도 인복은 있었던 것인지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는 날 기꺼이 기거하게 해준 사람이 있었다. 한국에 7년 있다 돌아 간지 3개월 된 이주노동자 또이모르. 한국에서 출발 할 때 얼굴도 모르는 그에게 무슨 선물을 해야하는 지 다른 이주노동자들에게 물어 보니 '소주' 란다. 이슬람권 나라다 보니 술은 안된다. 그럼에도 이미 한국에서, 술 없이는 안되는 사회에서 십년 가까이 살고 간 이주노동자들에게 소주는 이미 금기가 아니다. 다른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네팔에서는 개고기를 먹는 것이 불법이란다. 아니 사람으로도 생각 안하는 듯 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주를 경험했던 이주노동자들이 네팔에 돌아가서도 그 맛이 생각이 나 동네에 많이 돌아다니는 개를 잡아 먹다 들켜서 신문에 났단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어디서 이런 걸 배웠냐 하니 '한국에서 배웠다고' 하드란다. 웃긴 이야기지만 이주란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곳에 가서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가서 사는 것이라는 사는 것은 서로 서로를 물들이고 스며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며들다..그래서 내가 아닌 내가 되어서 당혹스러워도 여전히 그게 나인걸 확이해야 하는 것, 그러다 그 당혹스러움도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려 이젠 또 다른 내가 되는 것... 그런데 한국에서의 이주는 그게 일방적이다. 이주노동자만 그렇게 살아야 하고 우린 여전히 그들과 살지 않는다. 3. 또이모르, 옥상 여하튼 또이모르씨도 소주가 반갑지만 부인에 어머니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던 것인지 가방에서 꺼내 보여준 소주를 다시 집어 넣으면서 웃기만 한다. 또이모르씨는 내가 약속을 잡을 때도 약속 잡은 집을 갈 때도 항상 같이 했다. 그러니 그와는 이야기 할 기회가 많았다. 거기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대단하다. 마치 친구 마냥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말에 뉘앙스도 있다. 반가운 일이다. 거기다 생각도 깊고 감성도 풍부하며 예민하다. 이런..아주 좋은 주인공 감인데... 그런데 그는 카메라가 싫단다. 그래서 그 많은 시간 동안 같이 있었는데도 그를 촬영할 수 없었다. 그는 카메라가 조금이라도 자기를 향할 것 같으면 돌아 앉거나 돌아서버린다. 참말로... 옥상... 40도 가까이 되는 더운 날에 유일하게 시원한 시간이 있었는데 그건 옥상에 올라 갔을 때다 해가 뉘엇뉘엇 지는 시간에 그곳에 가면 어찌나 시원한지... 또이모르씨도 한국에 있는 동안 유일하게 그리운 곳이 옥상이었다고 한다. 그 옥상에 해가 지는 시간에 올라가 별이 총총 보일 때까지 있곤했다. 그러면 그는 참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이주에 대한 그의 생각.. 뭐가 그리웠는지. 왜 이주를 하게 되었는지..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담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그 이야기를 담고 싶어 난 아쉽고 아쉬웠다. 그러다 한국으로 출발하는 그날..몇시간 전 그는 인터뷰에 응해줬다. 얼굴은 나오지 않게 해달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그는 이제 나의 친구였다.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는 거였다. 나는 소중히 담았다. 그는 이주를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는 나의 말에 얻은 것은 뭔가를 얻으려면 무언가를 잃어야 한다는 것이고 잃은 것은 자기 나라를 잃었다고 했다. 20대라는 시간...그 시간은 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배우는 시간이라고 그런데 그 시간에 다른 나라에 가서 살고 왔으니 자기 나라가 자기 나라 같지 않은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어떻게 적응을 해서 살아가야 하는 지 막막하다고.. 막막했다. 이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멀리 방글라데시 까지 왔지만 난 이주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기 나라가 자기 나라 같지 않다니..그럼 그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한국에서는 불법체류자, 자기 나라에서도 구성원으로서 소속감이 없고. 이게 이주란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가도 소속감이 없는 그래서 영원히 부유해야 하는 상황...그게 이주의 경험이 아닌가...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다. 그는 잘 적응해 가며 살고 있나. 그는 이제 방글라데시 사람이 되었나... 만나 보고 싶다. 하지만 그게 또 그를 더 더디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잘지내길 바란다. 좋은 친구, 내게 이주에 대해 이주의 본질에 대해 온존히 알게 해준 좋은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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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part 2

# 방글라데시 part 2 1. 방글라데시에 대한 경험을 제대로 정리하려고 하면 참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가슴도 아파야 할 것 같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할 것 같고...하지만 조금씩 해야지. 그래야지. 2. 우문 현답 사람들은 쉽게 돈 벌러 왔지 한다. 나도 그렇게 쉽게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그 다음 이곳에서 벌어지는 막막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급급했던 듯 하다. 그것도 맞다. 현실이 막막하니...그걸 바꾸는 데 노력하는 것이 뭐 잘못인가... 하지만 난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주노동자는 불법체류자도 아니고 그냥 노동자도 아니고 이주노동자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그냥 여성이 아니듯 그냥 노동자가 아니듯 여성노동자이듯 말이다. 그러니 '이주'란 뭔가 알아야했다. '이주' 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외로움', '그리움' 이었다. 얼마나 그리울까? 얼마나 외로울까? 난 이 질문을 머리 속에서 몇번이고 몇번이고 되뇌었던 듯 하다. 그 질문이 머리 속에 있을 때 부터 이주노동자들이 안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애뜻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아마 동정까지는 양심상 못하고 연민 엇비슷한 것이 느껴져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리움에 대한, 외로움에 대한 징후라도 보일라치면 소스라치게 오버해서 슬퍼하고 안타까워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 내가 방글라데시에 들어 서서 이주노동자의 가족을 만나니 턱하니 나온 질문이 보고 싶지 않냐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뻔뻔하단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때는 진지했다. 얼마나 보고 싶을까? 떠난지 7년, 혹은 10년 된 가족이 얼마나 보고 싶을까?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이해해 달라는 거였다. 보고 싶긴한데 여기 오면 다시 한국에 갈 수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그리고 덫붙인다. 돈문제 말고 일 거리가 없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목이 부어오는 것 같았다. 그 말이 준 외면과 내면이 한꺼번에 다가와 뜨끕했다. 외면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사람의 어림을 꼬집는 것 같았다. 세상 물정, 모르지...몰라도 한참 모르지... 그러니 비싼 비행기 값 쳐들여 와서는 보고 싶지 않냐고 묻지.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지형에 있는지. 무엇이 그들을 만들었는지. 나는 아직도 이주노동자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 거다. 먹고 살기 힘드니 왔지 일자리가 없으니 왔지. 난 대답할 수 있었지만 그게 정말 뭔지 모르고 있었던 거다. 산다는 것은 먹고 자고 입는 것이 아닌데, 산다는 것은 에너지를 가지고 뭔가를 하는 것인데 그들은 그걸 할 수 없다는 것이 괴로운 거고 그게 그리움 보다 먼저였단 생각이 들었다. 그 뭔가에는 물론 돈 버는 것도 포함된다. 그것도 아니라고 하면 진짜 세상 물정 모르는 거지. 그리고 그 내면의 그리움.. 이주 노동자의 그리움은, 순간 같다. 하지만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런 그리움이 아니라 내면에 흐르고 있는 강 같은...그렇게 일상은 쿨하지만 ...그러다 문뜩 수면위로 떠올라 찢어 놓고 가는 그리움... 그리고는 이해해달라는 말을 한다. 나 같으면 가서 공부 좀 더 하고 와라 라고 이야기했을 터인데 이해해 달란다. 난 한국인이고 그건 권력이다. 난 아무것도 안했지만 이미 그건 권력이다. 난 그것만 가지고는 나눌 수도 없고 같이 할 수도 없다. 그 관계가 엿 같았고 그 관계를 변화시킬 장치를 하지 않았단 생각이 들어 창피했다.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말지. 이해해 달라니... 나의 이해력의 한계. 나의 미성숙의 한계. 나의 게으름의 한계. 3. 저개발된... 저개발국 아니 우린 개발도상국이란 말을 더 많이 쓴다. 듣기 좋으니까. 개발 중이라고 하니까. 하지만 그건 하늘을 손바닥으로 덮는 격이다. 방글라데시 혹은 네팔 혹은 인도네시아...그곳은 저개발된 곳이다. 누군가에 의해서 저개발된 곳. 저개발된 상태가 누군가에게는 더 많은 이익을 주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상태를 자신의 능력의 한계라고 여기며 살아야 한다. 한국이 그보다 낫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단지 난 '저개발된' 이유가 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라고 이야기하고 싶은가 보다.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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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part 1

# 방글라데시 part 1 1. 방글라데시 이야기는 두번으로 나눠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이야기꾼이 아니다 보니 한번에 쌈박하게 잘 정리하지 못할 것 같다. 글이 너무 길면 읽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나 정신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2. 의문들 이주노동자 작업을 하면서 정말 끊임 없이 들었던 질문이.. "왜 이들은 본국을 떠날까" 였다. 쉽게 이야기하면 먹고 살기 힘들어서 일 자리가 없어서.. 그것 말고 다른 이유는? 혹은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뭘까? 왠지 그것만 가지고는 설득이 되지 않는 뭔가 석연찮은 것이 있었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다 자기 나라를 떠나지는 않으니까. 떠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다고 그 의문만 가지고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지는 않지. 3. 다른 정체성 다른 정체성... 이주노동자가 아닌 내가 이주노동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다른 대상과는 아주 다른 맥락에 있었던 것 같다. 잘 지내다가도 카메라만 들면 말을 멈춰버리거나 몸을 움추리는 사람들 앞에서 나도 그만큼 움추려 들고 당황스럽고 기가 죽기도 했다. '왜 나를 못 믿을까?' 어휴...이런 흉칙한 질문을 했던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철 없이 쪽팔린다. 그때 존 버거 아저씨의 '제 7의 인간'을 읽게 되었다. 거기에는 뭐랄까? 다른 정체성을 가진 것이 뭔지... 이주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둘 풀어 나간 글에서 난 다른 정체성, 다른 경험이 뭔지를 느끼게 된 거 같다. 출발, 일, 돌아감 이주가 겪게 되는 각 시점 마다 정확하게 표현해낸 글과 사진에 난 머리를 쳐야했고 가슴을 쳐야했다.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그러한지. 4. 떠나기로 맘 먹자 관계트기, 의문들, '제 7의 인간' 확인하기 방글라데시에 간다는 이야기가 나자 알고 지내던 이주노동자분들이 본국의 식구들에게 가져다 달라면서 하나 둘 짐 보따리를 맞기기 시작했다. 자꾸 들어오는 짐 때문에 나는 한 사람 당 1kg으로 제한해야했다. 그런데 한번은 한 친구가 한 보따리 뭔가를 주는데 그 안에는 비누, 치약, 화장품, 머리핀, 심지어는 화장품 샘플까지 5kg 정도 됐던 거 같다. 난 '어휴 1kg만 받는 다니까요' 하며 외로 꼬아 보았지만 식구들에게 이런 것들을 전해 주고 싶은 마음, 그걸 전해 주려고 하나 둘 모았던 마음들이 전해져 그저 서글프기만 했다. 하지만 더 서글푼 건 그의 가족을 만난 이후였던 것 같다. 본국의 식구들은 너무나 당연하단 듯이 그가 몇날을 모았을 것들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그가 어찌 지내는 지는 상관 없다는 듯이 그저 그곳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난 괜시리 속이 상했다. 난 그 집에 있으면 있을 수록 한국에 있는 그 이주노동자가 생각 났고 그는 이 식구들에게 뭔가 생각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주노동자 중엔 이런 경우가 많다. 이제는 그만 돌아가고 싶은데 이미 본국의 식구들은 그가 혹은 그녀가 벌어다 준 돈으로 일정정도 생활 수준이 높아졌고 그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누군가 끊임 없이 그 돈을 벌어야한다. 그러니 누군가는 계속 이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거고 그래서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에게 조금만 더 있지 그러니...하는 거다. 그도 그러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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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 1.

 

대체적으로 여자들은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엄마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시작은 어찌 되었건 대략 대학생이 되고 나서 일터인데...나는 유독 이른 시기에 엄마, 그리고

 

외할머니의 삶을 추적한 적이 있다. 그리고 엄마와 내 관계를 이해한 적이 있다.

 

외할머니는 17살에 큰딸인 엄마를 보셨다. 그러니 당연히 외할머니에게 엄마는 딸이 아닌

 

동반자, 혹은 동료 같은 존재 였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내릿사랑이란 것은

 

내가 봐도 찾아 보기 힘들다. 시간이 흘러서도 엄마는 외할머니를 외사랑했고

 

그 모습이 안타까워 가끔 여동생과 나는 할머니를 미워하기도 했다. 

 

그럼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도 부모잖니 나중에 후회 안하려고 그런다'

 

그 말이 더 안타까워 답답하기도 짜증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내게도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했던 것 처럼 행동 할 때가

 

종종있다.(많이 양보한 표현) 그럴때면 그 관계의 운명적인 고리가 보여...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묘한 감정들이 부굴부굴한다.

 

그래도 그 관계에 대한 고찰(?)이 있었기에 좀 나은 맘이 든 것이지

 

그 전에는 참 참기 힘들었다.

 

여하튼 대략의 엄마와 나 그리고 외할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내게

 

일정정도 평온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아버지....

 

모르겠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가 더 정확하겠지.

 

그저 어린 나이에 부모 여의고 힘들게 친척 집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아 오다

 

엄마를 만나 그런 대로 가족을 이루고 살 수 있었다 정도가 아버지의 역사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다.

 

 

# 2.

 

아버지와 다큐...

 

이주 노동자에 대한 다큐를 한답시고 일년이 넘게 뛰어 다닌 어느날.

 

가족 모임이 있어서 모였는데 난 아버지 옆에 있게 되었다.

 

다들 무슨 이야기인지 즐겁게 하는 데 문득 난 아버지도 이주노동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웃기는 일이다. 가까운 곳에 이주노동자가 있었는데 하는 생각에

 

그냥 슬쩍 물었다. '아빠, 아빠 사우디 아라비아에 갔을 때 노동조건은 어땠어?'

 

아빠는 이곳에서 일하는 것 보다 거기가 훨씬 노동 조건이 좋았다고 잔업도 없고

 

월급제로 일 할 수 있어서 가게 됐다고 하셨다. 18 개월 동안...

 

참 비교가 불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이주노동자에 비하면..

 

난 이야기가 안 될 거 같단 생각에 묻는 것을 멈췄다.

 

그런데 문뜩 외롭지는 않았을까 싶었다. 어렴풋이 기억에 나는 것은

 

아빠에게 보낸다고 하면서 엄마가 밤이면 우리 삼남매를 데려다 놓고

 

오래된 카세트에 학교에서 배운 노래며 아빠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아빠에게 그것들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외롭지는 않았어요?"

 

허허하게 던진 나의 질문에 아빠는 사뭇 진지하고 열띠게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그 외로움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

 

가슴이 탁 막혀 왔다.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는 아버지 입에서 한번도 나오지 않던 이야기였다.

 

'올커니' 했다.(나쁜년이다. 아니 미친년에 더 가깝다)

 

그리고는 아버지는 술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내셨는데

 

편지가 오기만은 기다린 밤들, 편지가 오면 그걸 가지고 가서 외등 밑에서

 

읽고 또 읽었던 때, 테이프는 듣고 또 듣고, 몇번 들으면 지겨워 질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멈추질 못해서 계속 듣고 또 들었던 때 이야기..

 

그리고 몇가지 이야기를 더 하셨던 거 같다.

 

그런데 어찌나 그 이야기들이 가슴에 다가오던지...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을 인터뷰를 해보면 A 상황에 A 를 물어 보면 A- 가 되던가

 

대게는 B가 되서 돌아 올때가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A라는 상황에 A를 이야기하는 거다.

 

가슴이 막막했지만

 

올커니 였다. 이거 구나 언어의 한계라는 게...

 

그러면서 속이 후련해졌다.

 

 

# 3.

 

가편 끝내기 삼일전

 

내게는 아무래도 언어의 한계를 뛰어 넘을 재간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옹졸한 나는 언어를 넘어서 소통을

 

제대로 찍어 내지 못했고 그래서 언어의 장벽이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문뜩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래 아버지한테 가서 인터뷰를 해야지..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이주노동자들이 한 이야기와 겹쳐져서 이주노동자 이야기를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들을 수 있을 꺼야...

 

얄팍한 속샘으로 얄팍한 일정을 가지고 담날 아버지에게 갔다.

 

 

# 4.

 

가편 끝내기 이틀전

 

아버지는 열심히 사다리차를 닦으시면서

 

자신의 차가 같이 일하는 40대 차 중에서 두번째로 깨끗하다며 자랑을 하셨다.

 

그럼 첫번째는 누구냐고 물으니...겸손의 표현이라며 조급한 딸을 놀리셨다. 

 

대략 스케치를 하고 집으로 들어와서 인터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제서야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 눈치채시고는 싫다신다.

 

막막하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다른 인터뷰였다면 당연히 이래 저래

 

어떤 방법으로 이야기를 시작할까 어떻게 하면 이야기 하기 편하게 만들까

 

고민고민해서 왔을 터인데...아버지는 그저 이야기하시겠지...

 

촬영을 어떻게 해야 편집 할때 편할까

 

그런 생각만 하고 왔다.

 

저번에는 그렇게 쉽게 이야기를 하시더니..왜?

 

막막하고 당황스러워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억지로 참아 가면서 아빠에게 화를 내보기도 하고 아무런 일 아니라는 듯

 

허세도 부려보았지만 아빠는 왜 이야기 못하는 지 하기 싫은지 변명을 하셨다.

 

내용은 그게 아닌데 변명처럼 하셨다.

 

변명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 게 미안하기도 하고 왜 변명까지 하시는 지

 

답답하기도 하고...

 

18개월이란 짧은...내가 만난 이주노동자 누구보다도 짧은 기간 동안

 

아버지는 뭘 느끼셨길래....저러실까...뭔지 이야기 하지 않으셨지만

 

내 눈 앞에는 아버지가 느꼈을 여러가지 것들이 파노라마 처럼 지나갔다.

 

노동자로...먹고 살기 힘들어...마지막에나야 찾을 법한 방법을 찾았다는...

 

아버지의 어눌한 말 속에서...영양 실조가 걸렸는데 안되겠다란 생각으로

 

갔다는 아버지말 속에서 가난은 부끄러운 것임을, 그리고 가난이 아버지를

 

그 멀리 가족도 버리고 가게 했다는 것을 아버지는 부끄러워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창피하고 쪽팔렸다. 막막하고 심난했다.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난 그들에게 당신들은 노동자이고 거기에다 이주노동자요.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당당히 삶을 살아가는 모습인지...끝없이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카메라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자본의 논리 아래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노동이 무엇이고 노동자라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 난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장 가까이 있는 노동자, 이주노동자에게 나는 어떻게 했던가?

 

가족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난 가족에게 별 부채의식도 없고 안타까움도 없다.

 

가끔 다행이란 생각만 한다.  다들 성실히 열심히 살아주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것도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것에 기준 삼아서 말이다.(참 싸가지 없는 년이다)

 

여하튼 내가 너무 쪽팔렸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소외시키면서 난 살았다는

 

생각에 쪽팔림이 이빠이여서 목구멍에서 쓴물이 넘어 왔고 눈에서는 붉은 눈물이

 

넘실거리고...

 

 

# 5.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18개월이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이주노동자는 이주노동자였던 것이다.

 

그것이 십년이든, 일년이든, 일개월이든, 하루든 이주노동자의 경험은

 

인간을 참 외롭고 사회의 바닥이란 느낌을 안 가질래야 안가질 수 없는 경험인 것이다.

 

난 그걸 모른체 아니 알려고 하지 않으며 살아온 것에 쪽팔렸고

 

정말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대략의 이야기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와 혹은 그녀와 오랫동안 같이 있었다고

 

그 혹은 그녀를 이해 할 수 있을까?

 

우린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존 버거 아저씨가 한 말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어떤 세계의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 세계의 모습을 해체하여 자기 시각으로 재조립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행한 일정한 선택을 이해하려면, 그가 부닥쳤거나 거절당했던

 

다른 선택의 결핍 상태를 상상 속에서 직시해 보아야 한다.

 

잘 먹는 사람들은 못 먹는 사람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서툴게나마 남의 경험을 파악할 수 있으려면

 

그 세계를 분해해서 재조립해 봐야만 하는 것이다.

 

남들의 주관 속에 들어가느니 하는 얘기는 오해에 이를 여지가 있다.

 

남들의 주관이란 똑같은 외부적 사실들에 대해서

 

단순히 내부적인 태도만이 다른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 중심부에 놓여져 있는 사실들의 별자리 자체가 다른 것이다.

                                             -----------

 

존 버거 만세!!!!!

 

 

# 6.

 

가편집 마지막 날

 

프롤로그에 넣을까 말까를 몇번이나 고민하다...

 

그래 다큐 덕분에 난 누군가를 한번 더 이해할 수 있었지 않았는가?

 

이 다큐를 보는 사람도 누군가를 한번 더 이해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다큐는 그런게 아닌가...누군가를 이해해가는 과정.

 

몇번을 보고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그러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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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변명의 장

변명의 장이 될 것 같습니다.

 

올해 5월에 마친 이주노동자 다큐멘터리 <계속 된다>에 대한 이야기을 할검니다.

 

다큐에서는 다 못했던 이야기 혹은...이때는 이런 고민을 했지요.

 

제가 그 상황에서 느꼈던 이주의 본질...등...할 말은 많을 듯 한데..

 

정말 변명의 장이 될 거 같아..약간은 주저 되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 제가 느낀  이주에 대한 것들을 같이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시작해 볼까 합니다.

 

블러그란 것이 개인 저널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무언가를 나눌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장이 아닌가 싶고

 

홈페이지나 그런 것과는 다르게 말이죠.

 

그런 개념에 힘을 얻어 그럼 한번 해볼까 했습니다.

 

중간 중간 스틸도 올릴 수 있으면 좋겠고..

 

이주 관련 자료들도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문화에 관한 것들도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죠..

 

겁이 나긴 하는데 그 만큼 할 일이 많이 생길 거 같아...

 

긴장도 되고 긴장이 되니..즐겁기도 하네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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