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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12/26
    한가함.(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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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12/21
    '멋진 그녀들' - 이주여성 다큐 기획(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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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12/20
    봄은 온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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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12/14
    내 친구 - 라디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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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5/12/08
    난 행복하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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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5/12/01
    기획서 쓰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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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5/11/30
    출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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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5/11/23
    펑펑 울다. - 이젠 씩씩해진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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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5/09/05
    이주제작노트-이해하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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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8/30
    뇌를 세척하기 위하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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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함.

부끄럽긴한데...

한가하다는 것이...

 

오늘은 좀 한가한 마음이 든다.

오늘 일정을 생각하면 그렇게 한가한 것은 아닌데

마음이 여유가 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1.

마음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어느 순간 아주 바빴다가 어느 순간 아주 한가하다.

이전에 생리를 할 때는 그 기복이 주기적이어서 어느정도 예측도 할 수 있고

원인을 알 수 있어서 대략 적응하며 지냈는데 생리를 안하니 그 주기도 예측하기 힘든듯도 하다. 임신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는 것 같다.

며칠전 친구들이 집에 와서 놀았는데 세쌍이 모였다. 나를 포함해 두쌍이 임신.

그 친구가 하는 말, 컴퓨터 하나에 파티션 없이 두개의 체제를 깐 것이 임신인 것 같다고 그러니 정말 정신 없을 수 밖에 없다고...ㅋㅋ...재미난 표현이다. 그럴만도 하다.

내 몸에서 내 심장 말고 다른 심장이 뛴다니...놀라운 일이다.

 

2.

임신한 필리핀 출신 언니를 만나고 왔다.

입덧 때문에 한달동안 필리핀에 갔다 와서인지 필리핀 가기 전에 봤을 때 보다 얼굴도 좋아보이고 입덧도 가신 듯 해서 편안해 보였다. 다행이다.

올 초에 한번 유산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언니는 항상 모든 것에 조심스럽다.

그때 먹었던 음식들, 했던 행동들은 다 안하고 싶어한다.

처음엔 유별나다고 생각했다가 그 마음이 아련해서 뭐라고 안하기로 했다.

나도 처음 임신 7주 정도 됐는데 허리가 너무 아파 놀라서 병원에 갔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아기 크기가 0.7cm 였는데 그 작은 아기가 어떻게 됐을까봐 겁이 나서 헐레벌덕 병원에 갔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작은 것이 사람을 이렇게 혼이 나가게 하는데 아이라는 것은 정말 부모에게 놀라운 존재인 것인가보다. 하며 놀랬던 기억이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언니의 유별난 행동도 마음도 이해할만 하다.

필리핀 언니는 벌써 아기 용품을 잔뜩 사다 놨다.

아기 옷, 젓병 셋트, 아기 파우더....등.. 이쁘다. 그렇게 아기에게 집중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오버하진 말아야지...

평생 일하는 엄마에게 조금씩 적응하게 그저 살아온 대로 살아야지.

언니의 아기나 나의 아기나 그저 튼튼하게 잘 나왔으면 좋겠다.

그것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3.

작업실이 생겨서 참 좋다. 집하고는 사뭇 다르다.

처음에는 작업실에 가야하는 것이 뭔가 일 같고 불편했는데

이젠 익숙해졌나 보다. 그리고 아무래도 일에 능률도 오른다.

집에서는 일이 있을때만 책상에 앉게 되는데 작업실에 있다 보니 이런 저런 일을 찾아서 하게 된다. 테이프 정리도 하게 되고 어디 지원 받을 곳은 없나 한번 더 찾아보게도 되고 작업과 관련된 최근 뉴스도 찾게 되고....이제 좀더 규칙적으로 작업실에 오도록 해야겠다.

 

4.

이런 컴의 시계가 잘못되어 있다.

6시다....송년회 하나가 7시에 있다.

애연가들이 많으니 가도 별 반가워하진 않겠지만 너무 오랫동안 못 봐서 그런지 보고 싶다. 잠깐이라도 가서 얼굴 한 번 보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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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그녀들' - 이주여성 다큐 기획

이주여성 다큐멘터리 제목을 '멋진 그녀들'로 할까해요.

항상 사는 게 해피한 것도 아니고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죠.

이주여성분들도 마찬가지죠. 저번 포스트에서 잠시 언급한 것 처럼 이제는 좀 더 그녀들의 상황을 그녀들의 시각을 중심으로 해서 담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자 합니다. 

평범한 우리들이 이 퍽퍽한 세상 살아가는 것이 전반적으로는 힘들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래 어쩌면 이렇게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은 멋진 일인게야" 그런 느낌이 들잖아요. 그런 느낌으로요. 그녀들도 그러하니까요. 

그래서 "멋진 그녀들".

 

같이 과정을 나누기 위해서 많이 부족하지만 기획의도를 올려 봐요.

대략 나온 가구성안은 있는데 사적인 정보들이 있는 것이라 안올리겠습니다.

조금씩 모양을 만들어가겠지만 그럴때 마다 조금씩 나눠볼까 합니다.

항상 숨가쁘게 작업을 하다 보니 제대로 주변 사람들과 나누질 못했어요.

요번에는 왠지 숨을 고르면서 갈 수 있을 듯 해요.

 

 



▣ 작품개요


늘어나는 국제결혼, 이주여성

대한민국에서는 한해 30만 쌍이 결혼을 하고 그 중 3만 쌍 가까이가 국제결혼을 한다. 그리고 이 중 대부분은 이주 ‘여성’이다. 처음엔 당혹스럽던 “*** 처녀와 결혼하세요” 라는 플래카드도 이제 더 이상은 낯설지 않은데, 이는 이주여성들의 놀라운 증가 추세 때문이기도 하다. 통계청 인구동태조사에 따르면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의 경우 2002년에 47명이었던 것이 이듬해인 2003년에는 1,403명으로 늘어났다.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이주여성은 이렇게 해가 다르게 증가하고 있다.


열등한 존재, 이주여성의 이미지

주류언론은 그들의 고통을 종종 다뤄왔다. 하지만 대중매체에서 볼 수 있는 이주여성은 단순히 폭력의 피해자일 뿐이다. TV는 그녀들이 처해 있는 상황의 부당함을 지적하기 보다는 그들이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낼 뿐이다. 

우린 가끔 이런 경험을 한다. 어떤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처음 그 이야기를 접했을 때의 충격은 잊게 되고 어느 새 아무 느낌이 없어진 경험. 가끔은 그 무감각이 도를 넘어 애초의 그 부조리가 당연하게 느껴지는 경험.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진실은 없어지고 단지 이미지와 느낌만 남아버린 경험.

주류언론을 통해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이주여성에 대한 경험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들이 불쌍한 사람임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영상의 반복 속에 어느 순간 우린 그들이 처한 불합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우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주 여성이 우리에 비해 열등한 존재라는 이미지였다. 그녀들은 열등하기 때문에 맞고 사는 것이고 이혼을 당하는 것이고 아이를 빼앗기는 것이며 본국으로 쫓겨나는 것이다.


이주여성, 이미지의 재발견

하지만 그녀들은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 그녀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하여 국제결혼을 선택했다. 국제결혼은 그녀들의 인생에서 커다란 도전이었으며 결혼 전 그들은 자신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만들어갈 행복한 꿈들을 설계했었다. 우리 머릿속 세상에서만 그들은 열등했다.


이 작업을 통해서 국제결혼으로 들어온 이주여성이 열등한 존재가 아니며 우리와 똑같이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존재라는 점을 보여줌으로서 이주여성의 이미지를 재발견하려 한다.


이주여성, 우리의 거울(-혹은 우리의 재발견, 이주 여성을 통해 우리의 이미지를 재발견한다는 의미)

한국에 온 이주여성의 많은 수는 가부장적인 가족과 사회로부터 다양한 고통을 당한다. 그들이 그런 문제를 겪는 것은 그들이 ‘이주’여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었고, 그 근저에는 그들이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열등하지 않으며, 우리와 똑같은 존재이다. 그들이 고통 받는 것은 ‘이주’한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주 ‘여성’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한국으로 왔다는 사실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억압을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할 뿐이다.

따라서, 이주여성은 우리의 거울이다. 한국사회의 가부장성을 비추는 거울이자 한국 여성들의 고통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녀들이 처해 있는 조건은 그녀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조건이다. 그리고 이 점을 확인하는 것은 곧 여성연대에 대한 꿈의 시작이기도 하다.


여성연대

이주 여성은 한국에 온 이후 가부장적인 사회의 다양한 병폐를 접하면서 주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삶을 당당히 일궈간다. 열등하지 않은 존재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그들의 노력은 우리의 노력과 동일하다. 그녀들은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고, 우리는 그녀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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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온다.

ㅋ...넘 심파적인가?

작업실 오는 길에 목련나무가 있다.

근데 이 추운날인데도 (오늘은 추위가 약간 풀렸지만 요 며칠 얼마나 추웠나? 우휴~)

목련봉우리가 이쁘게 있었다. 마치 봄이 코 앞에 와 있는 것 처럼 어찌나 이쁘게 있던지

좀만 기둘리면 하얀 목련이 필 것 같았다.

아...너도 이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있구나....뭐 그런 심파적인 생각을 하면서 걸어왔다.

 

열심히 썼던 기획서가 안됐다.

면접까지 가서 떨어지니 좀 속이 쓰리다.

이주여성 다큐멘터리 기획서는 버젼업을 3차례했다.

첫번째는 너무 부실하게 급조해서 안됐어도 수긍할만했다.

두번째는 좀 더 시간을 들이고 이런 저런 고민을 했는데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번이 세번째였는데, 사실 그 동안 자료조사한 것도 있고 언니들과 만나면서 들었던 이러저런한 것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기획서를 쓴 것 같아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안됐다고 어제 메일을 받았다. 면접을 하면서도 느낀 것인데 이주여성에 대한 피해, 어려움이 더 들어났으면 하는 바램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다. 

난 더 이상 이주여성을 객체화시켜서 그녀들의 어려움을 발가벗기는 것이 무엇에 도움이 되는 지 모르겠다. 이미 대중매체가 충분히 한 그일을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이주여성에 대한 인식은 이주여성은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일을 구태여 내가 해야 하나? 난 그러고 싶지 않다. 

 

다양한 관점이 있겠지만 난 그녀들의 삶을 그녀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듣고 싶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삶을 공감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들의 어려움을 함께 바꿔나가기 위해서 난 그녀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난 그저 징검다리가 되고 싶을 뿐이고 우리가 바라보는 그녀들이 아니라 그녀들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녀들의 삶.....

 

기획서가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내 관점에 나름대로 확신이 있다.

그리고 왠지 더 잘해야 한단 생각도 든다.  

 

같이 작업을 하는 후배에게는 미안하다.

작업비가 넉넉하면 사무실 유지나 이런 저런 장비 구입 등 할 것이 많은 데

아무래도 뼈 빠지게 알바하면서 작업해야 할 것 같아서 미안하다.

하지만 있잖어. 친구. 봄은 와.

글고 우리 관점이 난 좋다고 봐. 글고 매력적이 잖어.

잘해보자구. 우리.

 

이제 열심히 작업해 보자구.

골목길의 목련처럼 열심히 봄을 준비하자구~~~

 

블로그에도 열심히 생각을 올리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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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 라디카

라디카씨가 어제 출국했다.

14년 만에 네팔에 돌아가는 것이다.

기분이 어떨까?

2살때 놓고온 아들을 16살이 되서야 보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비행기에 올라 어떤 생각을 했을까?

참 궁금하다.

 

나는 좀 철이 덜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여전히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친구, 혹은 인간관계는 그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남녀관계던, 어떤 사회적으로 차이가 나는 관계이던간에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통을 한다. 그게 없으면 난 그만 그 관계가 지속되야 하는 이유를 모르고 힘들어 하다 어느순간 잊어서 날 보호하는 쪽으로 향하곤 했다.

 

이주작업을 하면서도 난 감독과 이주노동자의 관계보다는 친구, 동지의 관계이길 바랬다. 어느측면 그런 면도 있지만 가끔 현실적이지 못한 나에게 이주노동자들의 자신의 상황에 맞게 현실적인 결정을 내릴때는 찔끔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었던지 조금씩 이주노동자의 사회적 조건과 그것에 기반한 결정들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주노동자의 사회적 조건을 이해하면 할 수록 시혜적인 행동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참 싫었다. 그런 행동이 그동안 이주노동 운동안에서 주류를 차지했고 그러면서 이주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주체적이지 못한 운동에 대해 비판하며 일어났는데 난 조금씩 그런 모습이 되어간다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더욱 강박적으로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상호작용에 대해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관성은 무섭다. 가끔 이주노동자들은 나에게 시혜적인 자세를 취해주길 바랬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역시나 찔끔 좌절했던 기억이 있다. 어느 순간 친구가 아니라 동지가 아니라 그저 퍼주는 사람이 된 느낌이 들었다. 참 뭐랄까. 고갈된다는 느낌. 관계 안에서 고갈된다는 느낌을 받는 것 만큼 외로운 일이 있을까?

 

그럴때 라디카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내가 여성적 이슈 때문에 이주노동자들과 이견이 있어서 힘들어 할때 같이 의견을 나눴다. 여성이어서 그랬을까? 억압적인 사회를 경험해서 그랬을까? 언니와는 참 쉽게 의견을 나눌 수 있었고 같이 욕(?)도 하면서 답답함을 풀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어쩌면 가끔은 버거웠던 분위기를 견뎌냈는지도 모른다.

 

참 아쉬운 것은 언니의 삶을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는 것이다. 몇몇 단편적으로 담은 것은 있지만 그녀의 그 에너지를 담지 못한 것이 참 아쉽다.

언니의 이주노동자로서의 삶은 이주여성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이주의 경험을 종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 특유의 에너지로 하나 하나 겪어낸 것을 보면 참 감동적일 때가 있다.  

 

지금 바램이 있다면

그녀가 본국에 돌아가 아들을 만나고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정을 맘껏 나누고

그리고 그동안 그녀를 이래저래 힘들게 했던 엄마와도 단판을 짓고

그리고 그동안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그리고 긍정하길....

 

그리고 한 이년쯤 이후에 그녀를 만나고 싶다.

그녀, 샤말, 비두, 나의 주인공들을 만나고 싶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친구였는지, 친구는 어떠해야 하는 지 등을 이야기하고 싶다.

아마 그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계속된다2>가 되지 않을까?

 

언니, 그때까지 행복해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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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행복하다.

어제부로 난 행복하다.

 

의사샘한테 운동을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또 그동안 보약처럼 아껴두었던 알엠님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두편의 전작을 임신한 상태에서 만든 알엠님은 내겐 보약이다.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는지 몰라서 스트레스 만빵인 나에게

명쾌하게 이런 저런 조심해야 할 점,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글고 지금 상황이 참 특별한 때이고 이런 때에 작업을 할 수 있는 것 또한

정말 기쁨일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해줬다. 고맙다.

 

임신 5, 6, 7, 8 개월 중에는 태아도 엄마도 행복하단다.

그때 열심히 작업하면 된다고...스트레스만 받지 말고 말이다.

 

^^ 넘 재미난 이야기도 많이 해줬지만 사생활이니 이 정도...

 

어젠 정말 임신 이후로 많이 많이 행복한 하루였다.

 

근데 인생은 참말로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구성안에 베트남 촬영이 있는데 그걸 은근히 부탁해야지 했던

이주여성 관련 센터 활동가가 벌써 베트남에 갔다 왔단다.

1월에 간다고 하고선....으그....환장하겠다.

하지만 정말 무슨 수가 있겠지.

 

이젠 알엠님 말처럼 앞으로 열심히 촬영을 해야겠다.

입덧이 없어서 초반부터 배가 뽈록히 나온 내가 카메라를 들고

이리 저리 움직이면 좀 우수워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야 나도 계속 행복하고 아기도 계속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ㅎㅎ

 

얼렁 촬영 일정 잡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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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서 쓰기

이*리오라는 선배는 기획서를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번은 기획서 하나 가지고 4군데에선가 사전제작비를 받아 몇천만원으로 작업을 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 기록을  깰 수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렇게 받았는데도 선배는 남는 것이 없었다고 했다. 

아마도 남는 것은 없었지만(사실 바라지도 않지만 ^^;;) 아르바이트에서 조금은 해방이 돼서 오직!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면 됐지. 아니...그럴수만 있다면...흑흑...정말 부러운 일이다.  

 

또 기획서를 쓰고 있다.

그 동안 이주여성 관련해서 자료도 더 모았고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얻은 것이 있는데 그걸 나누고 싶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의 상황이 변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더 반영한 다큐를 만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마음만으로는 안되는 것이 '자유영혼'의 한계.

그래서 기획서를 쓴다. 뭔가 잡아줄 것이 필요해서.

그리고 작업비도 필요하고. ^^

 

근데 시간도 없고 아이디어도 막 떠오를 듯 하면서 안 떠오른다.

그래서 결국 컴 앞에 많이 앉아 있게 되고

그래서 결국 포스트를 또 쓴다.

 

기획의도는 대략 잡혔는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스타일을 잡고 가고 싶은데

안해본 것이어서 그런지 어색하고 닭살스럽다. ^^

 

휴우~~~

잘하고 싶다.

간지러울 만큼 즐겁고 재미난 다큐를 그녀들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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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참 다양한 공간에서 작업을 했다.

 

처음 영상 작업을 시작할 때는 장비가 없어서 대학로 어딘가에 있었던

영상 편집실에서 한시간에 얼마씩 내면서 20G 하는 컴을 빌려서 20분짜리 영상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편집 장비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무슨 용기가 있었던지 일을 맡아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다. 하루에 하나씩 프리미어 기능을 배워가며 영상을 만들어 납품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모르는 사람은 당해낼 수가 없나 보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무섭다.

 

그리고 나서는 옥탑방에서 생활을 하면서 한쪽에 컴을 장만해 놓고 모니터도 없이 데크도 없이 조그만 카메라로 프리뷰하면서 편집을 했었다. 옆에 사람이라도 있을라치면 미안해서 이어폰을 끼고 프리뷰를 했었다. 귀가 아파도 옆에서 괜찮다고 해도 생활과 작업을 동시에 해야 하는 그 공간에 대한 예의 같았다. 그것이....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난 누가 프리뷰를 하면서 미안해 하면서 이어폰을 찾으면 그냥 하라고 한다. 그게 작업실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아서. ㅋㅋ ...그렇게 생활과 작업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그래도 햇볕이 잘 든다며 좋아했다.

 

그러다 어렵게 방이 두개 있는 공간을 얻었을 때는 신이 났다. 나도 작업실이 생긴 것 같아 우쭐했다. 그래서 잠자는 공간에서 작업하는 방으로 갈 때는 옷도 갈아 입고 가고 정말 오만 '지랄'을 했다. 그래도 역시나 생활하는 공간과 일하는 공간은 분리될 수 없었다. 일을 하다 말고 빨래를 돌리고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고 했으니까.

 

지금? 난 출근을 한다.

얼마전 역시 옥탑이긴 하지만 이젠 명색히 "작업만 하는" 작업실을 마련하였다.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기도 하고 내가 이 공간을 잘 꾸려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정리가 안돼서 정신이 없는 공간이지만 아침에 출근해 올때면 기분이 좋다. 출근을 해서 보일러를 올리고 컴을 키고 라디오를 키고 창문 열어 환기도 시키고 그리고 일을 시작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거 아닌 공간일지 몰라도 내겐 참 여러 공간을 거쳐 온 작업실이다. 이제 이곳에서 작업만을 위한 짓꺼리를 하겠지. 벌써 한쪽면에는 전지를 두개 붙여 놨다. 이주여성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적을거다. 이 작업실이 어떤 모습이 될 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 다큐에 대한 사랑(닭살스럽다 @@;;)과 고민이 풀풀 넘쳐 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으아...

 

이제 이주여성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어여 기획서 써야 하는데...기획서를 쓰시오~~~슈아!!!

 

 

<공지>

곧 연말 파티를 열까 합니다.

날짜는 작업실을 같이 쓰고 있는 분과 상의를 해야 합니다.

곧 공지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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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울다. - 이젠 씩씩해진다.

오늘로 임신 14주가 되었다.

어제 오늘 몸이 안좋더니 조금씩 갈색혈이 나온다.

 

임신 6주 정도쯤에 그런 일이 있었다.

의사는 그저 조심하라고 될 수 있으면 누워 있으라고 했다.

위험한 시기이니 긴장되고 걱정되고 우선 하던 일들을 대폭 줄이고

한달 정도는 집에 들어 앉았다.

무섭고 어렵더라...그래도 그래야 한다니 그렇게 했다.

맨날 이리 저리 뛰어다니던 사람이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들고

그 시간에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경험이 있었던 일이 아니니

어렵더라. 그래도 그럭 저럭 한달을 보내고 나니

어느정도 적응이 된 듯 싶었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했다.

그런데 그만 갈색혈이 또 나왔다.

겁도 나고 해서 병원에 갔다.

 

 



병원은 갈 때 마다 놀랍다.

처음에는 임신을 알게 돼서 놀랬고

그 다음에는 아기 심장 소리를 들어서 놀랬고

그 다음에는 아기가 2주 새 3배가 커서 놀랬고

(그 전 주에는 0.7cm,  이주 후에는 2.2cm) 

그 다음에는 아기가 사람 모양을 해서 놀랬다.

(그 전까지는 아메바 모양이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아기가 막 움직인다. 이리 저리...

그래서 놀랬다.

 

그런데 갈색혈이 좀 보인다는 말에 의사는

"조심하셔야겠네요. 될 수 있으면 누워계시는 시간을 늘리세요." 한다.

 

아기가 막 움직인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점심을 먹고

다음 일정을 위해 가는 데 자꾸 의사의 말이 생각 나면서 막 서러워지는 거다.

'얼마나 더 조심해야 하나?' 한 숨이 나온다.

하고 싶은 일은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임신 12주만 지나면 안정기에 들어가니 그때까지만 조심하자 맘을 먹었는데

그리고 나면 일을 조금씩 할 수 있겠구나 했는데

아직도 조심하란 소릴 듣는다.

속상하다.

 

다음 일정은 촬영이었다.

임신 때문에 지체되고 있는

이주여성 다큐의 인트로로 쓸까해서 촬영을 하기로 했다.

이래 저래 걱정이 되고

도대체 얼만큼 움직여야 괜찮은지 몰라

후배에게 촬영을 맞겼다.

후배도 급히 맞겨진 촬영에 불편한가 보다.

열심히 이렇게 저렇게 촬영하지만 익숙하지도 않은 카메라를 가지고

촬영하는 게 영 불편해 보인다.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역시나 속상하다.

 

집에 돌아와서는 한동안 멍 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해야 하고 뭘 할 수 있을까

머리속으로 수백번을 대차 대조표를 만들고 지우고 한다.

 

그러다 눈물이 터졌다.

일이 많아서 몸이 너무 힘들어도 차라리 힘든 걸 택했던 것 같다.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몸이 힘들면 힘든 만큼 쾌감도 있었던 것 같다.

가끔 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넘는다는 생각에 기뻤던 기억도 있다.

잘하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뭔가 열심히 하는 것 만큼은 그런 대로 잘해서

내가 조금씩 확장된다는 생각에 기뻐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걸 못한다니...

막 목이 메인다.

 

눈물이 난다.

소리 없이 나오던 눈물이 어느새 엉엉 소리를 낸다.

에라모르겠다. 울자.

앞에서 해줄 것이 없어 같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같이 사시는 분(?)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울자.  

 

골이 아플 때까지 울고 나니

이젠 뱃속에 있는 애기에게도 미안해진다.

그래...

이젠 씩씩해지고 싶어졌다.

그래 씩씩해지자.

 

도대체 그 많은 여자들이 어떻게 아기를 낳고 기르고

자기 일을 하는지...난 도대체 그동안 모르고 살았다.

 

이제는 좀 알아봐야겠다.

 

그래 씩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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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제작노트-이해하기 1

이주여성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이유는 두가지 인데 하나는 이러저러한 일 때문에 물리적으로 시간이 안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는 것이다.

 

마음의 준비,

초반에 이주여성을 인터뷰 했었는데

인터뷰 내내 마음이 막막해서 힘들었다.

한국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통역도 있었기도 하지만

무엇 보다 그녀가 경험했던 이야기를 내가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녀의 경험에 대해 난 뭐라 할 수도 없고 그저 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참 힘들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없다. 뻔히 아는데 어찌 질문을 할 수 있을까?

질문을 통해 다시 한번 그녀가 아플텐데....

 

그런 생각에 겨우 인터뷰를 마치고 온 이후로는 카메라 들기가 겁난다.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느끼고 같이 화내고

지금 그러고만 있다.

 

하지만 또 다시 느끼는 어려움은.....이해하기 힘들다는 거다.

그렇게 힘든데 어찌 감당하며 살까?

머리로야 얼마든지 이해간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어찌 그럴까?

여전히 남는다.

이 질문은 나 뿐이 아닌 것 같다.

이 답을 잘 구해야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답을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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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세척하기 위하여

일다에 쓴 원고입니다.

일다에 나간 기사는 http://www.ildaro.com/Scripts/news/index.php?menu=ART&sub=View&art_menu=1&art_sub=1&idx=2005081500013&op_idx=&BBS_idx=

로 가면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비자로 들어오는 이주여성이 결국에는 다 같은 처지에 있고

자본주의 남성중심사회에서 이주여성은 여성이 갖는 모든 모순을 극렬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연대하자!

정도로 썼는데 뭐...역시나 시간 없이 급하게 써서 넘 아쉽고 아쉬운 글이 되었고

기사로 나가면서 변하게 됐지요. 그래도 일다 기자님이 이래 저래 기사에 맞게 코멘트를 주셔서 그나마 사람들이 읽기에 거북하지 않은 글이 된 듯도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아쉬운 것은 제목!!!

제가 처음 쓴 제목은 '뇌를 세척하기 위하여' 거거든요.

아쉽다. 이 제목.



 

뇌를 세척하기 위하여, 그리고 연대하기 위해서

주현숙(다큐멘터리 감독)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주여성 관련 다큐멘터리를 시작할 즈음이었다. 작업을 시작할 때는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관련 주제나 소재로 머리가 꽉 차 있게 된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머리 속은 온통 이주여성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무슨 말을 꺼내도 이주여성과 관련한 것들이었다. 게다가 이주여성과 관련한 사건들은 하나 같이 충격적인 일들이라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도 않았다. 당시 최대 고민은 ‘ 이주여성의 어려운 상황을 널리 알리면서도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이란 느낌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것인가’(‘이주여성의 특수한 조건을 여성 전반의 조건으로 환원하여 보여줄 것인가?’)였다. 


세뇌를 당하다


그렇게 고민에 푹 빠져있을 때였는데, 우연히 상식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과 함께한 자리를 하게 되었다. 난 역시나 자연스럽게 전날 만난 이주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60대 남자와 만난지 이틀만 결혼해서 한국에 온 이주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남편이 많이 때린 이야기, 남편의 거짓말로 임신중절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난 그 사건을 들을 때도 심장이 떨렸지만 말하는 순간에도 심장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난 약간은 흥분한 상태였고 그러한 일들이 너무 많은데 어쩌면 좋을지 답답한 마음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이러는 거 아닌가, “한국에 국제결혼 해 들어오면 맞는다는 거는 다 알고 들어오는 거 아니에요?” 이라고. 한참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 맞을 줄 알고 결혼을 한다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얘진 머릿속에 이러저러한 영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공중파 시사 프로그램에서 한번쯤은 봤음직한 영상들, 어눌한 말로 남편에게 혹은 남편의 식구들에게 맞은 이야기를 하는 이주여성의 모습이 머릿속에 하나둘 떠올랐다. 너무 빨리 영상들이 떠올라 숨이 가빴다. 하지만 각 영상들 속에 이주여성은 하나 같이 똑같은 모습이었고 반복된 모습이 날 울렁거리게 했다. 그 친구에게 난 아주 조그맣게 “맞을 줄 알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했지만 너무 작은 소리여서 들리지 않았을 거다. 


우린 가끔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어떤 이야기를 계속 반복 하여 들으면 그것이 처음에 줬던 충격은 어느새 날아가고 무뎌지는 경험, 가끔은 그 무뎌지는 것이 도를 넘어서 처음에는 이상했던 것들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경험. 그런 것을 세뇌라고 해야 하나? 대중매체에서 볼 수 있는 이주여성은 너무나 단순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러저러한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의 모습, 대중매체의 단편적이고 반복적인 이주여성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가 결국 이주여성은 ‘맞는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게 만들었고 이제 이주여성은 ‘당연히 맞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나 알고 있는 ‘진실’을 당사자인 이주여성만 모르고 한국에 왔을 리 없다는 생각에 까지 이른다. 무서운 일이다. 이 세상에 당연히 맞아도 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당연히 맞을 것을 알면서 오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우린 그렇게 세뇌를 당한 것이다.


이제 슬슬 뇌를 세척해야 될 때가 왔다.


이주여성의 본국에서 국제결혼에 대한 환상은 거대하다. 사회적으로 국제결혼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은 자신이 한국에 와서 맞아도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본국의 식구들에게 전할 수 없다. 심지어는 남편의 폭력에 맞서 이혼을 해도 본국으로 돌아가 식구들과 살 수도 없다. 주변의 눈이 무서운 것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에 가면 맞는 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조금만이라도 이주여성의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조건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조건이 아니라 다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조건들을 알아가는 것. 그래야만 다른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인간을 이해하기 위하여


한국에 현재 결혼하는 10쌍 중 한 쌍이 국제결혼을 한다. 작년만 해도 25만 명이 결혼을 했는데 그 중 2만 5천이 국제결혼이었다. 국제결혼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여성이주노동자 또한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는 ‘이주의 여성화’라고 해서 세계적인 추세이다. 국제결혼을 통해 가정으로 들어오든, 관광비자나 고용허가제, 산업연수생으로 2차 산업으로 들어오든, 성산업으로 들어오든, 이주여성을 가장 옥죄고 있는 것은 체류 문제이다. 체류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모든 문제가 왜곡되고 모순은 증폭된다.


국제결혼으로 들어온 이주여성은 체류와 관련해서 가장 힘든 것은 한국국적을 얻기 까지 2년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98년 국적법 개정 이후로는 결혼을 해도 2년 동안 한국에 합법적으로 체류해야만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다. 2년 동안, 6개월에서 1년씩 체류를 연장해주는 데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남편이 부인이 맘에 안 들면 더 이상 체류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그 2년 동안은 남편이 부당한 대우를 해도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한다. 이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혼을 하게 되면 남편에게 이혼의 귀책사유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 이상 한국에 더 이상 체류 할 수 없다.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한국인 여성이 그렇게 하려고 해도 어려운 판국에 체류신분이 불투명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여자가 남편의 귀책사유를 밝히기란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한국에 있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 일이냐고 할 테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혼을 하고 본국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너무나 큰 상처가 된다. 본국에서 조금이라도 살림의 주름을 펴줄 것이라고 기대됐던 딸이, 누나가, 언니가 빈손으로 이혼녀가 되서 돌아온다면 가족들은 외면하거나 주변에 그러한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에 이혼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본국으로 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런 역경을 이겨내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다짐을 한다 쳐도 아이가 있으면 상황은 또 달라진다. 아이를 데려갈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주여성들은 방황하다 다시 남편이 있는 집으로 들어간다.


2차 산업이나 성산업에 종사하는 이주여성노동자들도 체류문제로 고통 받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이주여성은 한국에 90년대 초반에 온 분인데, 한국에 온지 얼마 안돼서 다니던 공장 사장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데다 불법체류 신분에 경찰서에 갈 수도 없고 사장이 소문내면 나라로 돌려보내겠단 말에 두려워서 아무 대응도 못하고 다음날 조용히 짐을 싸서 공장을 옮겼다고 했다. 그때는 한국에 들어올 때 브로커에게 준 5 백만 원만 생각했다고 했다. 미등록 체류 문제로 고통 받기는 여성이나 남성, 모두 마찬가지지만  이주여성은 성폭력이라는 또 다른 고통을 받고 있다. 이제는 그러한 고통을 호소할 곳도 많이 생겼지만 하지만 이러한 정보들은 남성이주노동자를 중심으로 공유되기 때문에 그녀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남성이주노동자에 의지해 판단하고 행동하게 된다. 체류문제와는 다르지만 그녀들은 또 다른 문제로 괴로움을 겪는다. 다름 아닌 가족과의 관계 때문이다. 가족들과 떨어져 길게는 12년 짧게는 몇 년을 지내다 보니 가족 사이에서 그녀들은 그저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 정도로만 취급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가끔씩 그녀들은 내게 하소연한다.  “거기(본국) 사람들은 내가 여기서 쓰고 남는 돈을 보내는 줄 알아.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일 해서 그 돈을 버는 지 그걸 몰라. 그래서 답답해. 나랑 전화통화만 하면 돈 달라 그래. 누가 결혼해. 누가 아파. 누구 학교 가야해.”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난 갑갑하다. 그녀들이 그 관계에서 소외당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막막해 온다. 난 가끔 한 마디 거들기도 한다. “언니, 이제 돈 보내지 마요. 그냥 언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요.” 하지만 그녀들은 절대로 그렇게 못 할 것이다. 그래서 나도 답답해진다. 


우연이었을까? 내가 만난 이주여성들은 대부분 맏이이거나 아니면 어찌 되었든 집안의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학교를 가야하는 동생이 줄줄이 있어서 뒤를 돌봐줘야 하는 그녀들은 “왜 그렇게 맞고 살았어요?” 라는 속없는 질문에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살아 보려고 했지. 내가 언닌데 동생들 뒷바라지도 해야 하고, 언니가 되서 이혼하고 그러면 동생들 결혼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말이다. 적어도 우리 엄마, 이모 정도의 나이의 여자들이라면 저런 이야기를 했을 법도 하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그녀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로 왔다. 하지만 가난이라는 것이 벗어지는 것이었던가? 벗어지는 게 아니라 더 깊고 넓게 번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이는 들고 한국 땅에서는 계속 미등록이고 결국 그녀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빈손으로 돌아가서 여전히 가난할 그녀들, 혹은 어떻게든 버텨서 한국국적을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가난을 벗어나기 힘든 그녀들의 삶을 생각하면 이제 빈곤은 여성의 한 특징이란 생각까지 든다.


변방이 아닌 중심에 서서


난 이주여성을 만나면 만날수록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모든 역할의 극렬함을 본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결혼은 매매일 뿐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혹은 다양한 이러저러한 이름으로 포장되어서 그렇지 결혼은 매매일 뿐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국제결혼의 시스템은 그렇다고 쉽게 이야기 할 수 있게 한다. 이혼한 전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키울 사람이 없어서, 밭일을 할 사람이 없어서, 노모를 모실 사람이 없어서, 그 노골적인 국제결혼을 하게 된 남편들의 이유들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오히려 순수하다. 가족을 위해서 작업장의 성폭력도 참아냈을 이주여성노동자들을 볼 때면 그 가족들 얼굴이 떠올라 치가 떨린다. 하지만 정말 이러한 일이 이주여성들만의 일인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남성중심 사회를 사는 모든 여성의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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