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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리즈를 기획했다가 3탄 쓰고 꺽어졌던 게 기억이 난다.
할 말 다 한 것은 물론 아니고, 이렇게 욕바가지 퍼붓는 식은 아니겠다, 싶었던 것도 있고, 아이가 시시각각 자라면서 보이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내 생각도 시시각각 색깔이 달라졌던 것도 있고.
하여간에 아무튼 난 여전히 속에 할 말이 많다.
오늘 한겨레 신문의 오한숙희 인터뷰를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런 인터뷰는 오한숙희 쯤 되는 유명인이니까 통하는 거지, 그야말로 애 둘 있는 (그 중 하나가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사회적 의미를 더 가질 수도 없는) 아무개씨였다면 인터뷰가 나올 리도 없고(왜 인터뷰가 안될까, 이 인터뷰가 홍승현 녹음테이프보다야 불행히도 정치적 쑈로선 덜 유행하겠지만, 적어도 생방송에서 바지 내렸단 얘기보다는 재밌고 사회적 의미 인간학적 의미 오만배 더 많은데), 그냥 어느 수다 이상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미성숙과 그로 인한 사회적 인간적 역사적 불행과 비애가 고대로 드러나는 것인 것을....
규민이 어린이집의 장애아 통합교육 소위원회에 끌려들어갔다. 생각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저녁에만 모일 수 있는 모임 성격때문에 내 일은 아니고 남이 알아서 잘 해주길 바라는 일이었다가(저녁 시간이 자유롭다는 그 사회적 의미여!) 어찌어찌...
거기서 나는 많은 충격을 경험하였다. 당연한 일이다. 비장애의 몸을 갖고 삼십년을 넘게 한국사회에 (다른 곳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살면 장애에 관한 모든 것이 충격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를 키우는 모든 이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100% 동감할 것은, 그 아이가 건강하다는 것 하나로 새삼, 새사 새오 새륙 ...새오천만팔십구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는 것일 것이다.
건강하다는 것 그 자체는 물론 긍정도 만점짜리, 인간 인생의 요소이지만, 그것이 결여됨은 일파만파 엉뚱생뚱 다르고 다른 맥락으로 파생하여 그 사람이 사는 데 불편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이미 아니다.
아이를 키우고 난 후에 생명에 대한 사랑, 존중, 공감의 깊어짐을 말한다.
사실이다.
이라크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전쟁을 반대한다는 모성애를 암시하는 평화운동은 욕을 먹기도 하고 욕을 먹을만 하기도 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모성애가 특정 성(性)(혹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굳어져서 문제이지, 모성애는 실재하는 심리이고, 아름답고 심오하고 철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키우고 나니, 아이를 키운다는 게 무언지 알고 나니 이렇다.
기형아검사, 유전질환검사, 나는 다음에 또 임신이 되어도 그런 검사들을 받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까. 대단히 의심스럽다.
란 범주의 영화가 꽤 많을 텐데, 내가 좋아하는 배우를 남녀주인공으로해서, 이 범주의 영화가 또 나올 것이라는 소식을 보았다. 황정민과 전도연 주연의 <너는 내 운명>.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둘씩이나 나오니 꼭 보고 싶은데(그러고보니 <마지막늑대>와 <인어공주>를 여태 안보고 있구나), 포스터를 보니 이 둘은 결혼하나보다. 결국 사랑의 줄다리기 로맨틱 코메디인가, 사랑을 믿지 않았던 여자는 남자의 진심에 감동...어쩌구...흥미가 확 떨어진다. (그러나 볼 것이다,아마)
이 범주에 속하는 영화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봄날은 간다>이다. 말하지 않아도 남자의 가슴과 여자의 가슴이 절절하게 내 가슴을 쳤었다. 남자에겐 눈 앞의 사랑이 해발 구만리의 암벽이었고, 그런 남자를 전형적인 순간으로 바라보는 여자에겐 인생이 이미 해저 구만리의 심연이었다. 그들의 사랑과 인생, 나의 사랑과 인생을 감당 못 하고 나는 영화를 보며 무지하게 울었다.
그 둘이 끝까지 헤어져서 좋았다. 이영애가 우리 다시 만날까?라고 말을 할 수 있게되고, 유지태가 받은 화분을 돌려주고 뒤돌아 갈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인생에 대해 해피엔딩이어서.
<비포 선셋>도 좋았음.
<비포 선라이즈>의 후속편 소식을 들었을땐 소재 하나 잘 뽑아서 9년만에 또 울궈먹는구나, 싶었으나, 막상 보니 후속편 만들기를 아주 잘 했단 생각이 들었다.
전작이 단지 잘 뽑은 '소재'에 대한 영화였다면, 후편은 비로소 관계와 사랑과 인생에 대한 영화다운 영화같다는 느낌. 할 일이라곤 9년만에 만나 서로에게 자기 이야기를 쏟아붓는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그런데 왜 그러냔말이지. 왜 9년 후, 여자의 사랑관은 냉담해지고, 남자의 사랑관은 오히려 더 순애보에 가까워졌느냐고.
그러나 여자는 냉정한 자신의 사랑관은 자신의 아파트로 올라간 후부터 책상서랍에 꾸겨넣어버렸다는 양, 남자 앞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9년 전의 스물셋 소녀가 된다.
(남자야 9년 전의 스물---몇이더라-- 소년이 될 필요가 없다. 그는 지금도 너만을 사랑해, 일편단심 순정이니.)
그러니까 이 결말은 사실 논리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그런 게 뭔 상관이냐, 보는 이로 하여금 '희망'을 품게한다. 제이(에단 호크)가 비행기 타러 그냥 가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 9년을 기다린 사랑이 이제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 그러나 이건 냉정한 사랑관에 수혈을 해보자는 의미까지는 아닐테고, 단지 촉박한 비행기 출발시각 때문에 불안했던 심리가 비행기 따위는 아무렇게나 해버릴 수 있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게 되어서 일 것이다. 즉 사랑보다 상황.
9년 전 둘은 알고보니 섹스도 했었다. 그것도 두번이나 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9년만에 만나는 그 순간 각각의 표정이 정말 전형적이었다. 남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나, 여자는 태연하다. 나는 처음에 내숭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상 셋팅된 내숭이 아니라 동서양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문화에 굴복해온 호흡과 같은 내숭. 남자는 6개월 후 약속된 장소에 가고, 여자는 못 가는 설정처럼. 왜 하필 여자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못 가는가 말이다. 남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여자는 약속장소에 갔다가 맴돌며 밤을 새며 기다리다 실망하는 설정은 왜 아닌가 말이다. 이런 설정은 정말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나 같으면 할머니가 돌아가셨어도 뭔 핑계(스스로에게, 가족에게)를 대서라도 뛰쳐나가 그곳으로 갔을텐데, 나 같은 여자는 어떻게 해석되어야하고 어떻게 인생을 설계해야하는지 어떤 텍스트에도 나오지 않아 가끔 난감하다.
하여간에 둘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9년 후의 둘의 모습은 그래서 전형적이라고 할 수 밖에. 그러나 그 전형적인 현상 심도깊게 파헤치기를 이 영화에서 기대하기엔 전작의 그림자가 너무도 뚜렷하다. 둘의 끊임없는 수다가 그 경계를 왔다갔다 하면서 이 쪽과 저 쪽의 기대치를 다 만족시키는 것 같았으나, 결국 마지막엔 저 쪽으로 넘어가버렸다. 그래서 다음 속편엔 그 전형적인 형상을 심도깊게 파헤치는 쪽으로..
에단 호크 얼굴이 뭉개졌으나, 거리 모습이 너무 멋져서.
동화를 읽어주면서 주춤할 때가 있다. 그냥 씌여진 대로 읽어주기엔 무언가 속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 아시다시피 왜 늑대는 다짜고짜 양과 돼지와 빨간두건을 죽이려고 하고, 왜 새 왕비는 나타나자마자 백설공주를 죽이려고 하는가 말이다.
<백조왕자>를 요즘 읽어주고 있다.
열한명의 왕자와 막내 공주가 살고 있었는데, 새왕비가 이들을 없애려고 오빠들은 죄다 백조로 변하게 한다. 막내공주는 왕비를 피해 도망나와 쐐기풀을 뜯어다가 오빠들을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줄 옷을 짓는다. 말 한 마디 하지 못 한채. 그러자 그녀를 마녀로 오인한 사람들이 불태워 죽이려는 찰나, 공주는 열 한 벌의 옷을 거의 완성하고, 마침 날라오던 백조들은 공주가 던져주는 옷을 입고 다시 사람이 된다. 공주에 대한 의심은 풀리고 다시 행복하게 산다.
옛날 먼 옛날 내가 이 동화를 알게 되었을때, 이상야릇 신비한 분위기에 매혹되었었던 기억이 난다. 마법을 풀려면 말을 절대 하면 안된다. 쐐기풀을 뜯어 손가락에 피가 맺히도록 실을 뽑아 옷을 짜야한다. 이런 부분들. 사실 이 동화의 포인트도 그것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새왕비가 냅다 왕자들을 백조로 만들어버리고 막내공주를 쫓아내는 대목, 그러니까 별로 주목할 필요도 없는 배경부분을 읽으며 주춤주춤한다. 처음엔 뭐 잘못한 일이 있어서 왕자들이 벌을 받았다고 해야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니, 정말이지, 동화 속에서 등장하자마자 이유도 알 수 없는 못된 짓을 하는 캐릭터는 참으로 곤란하지 않은가. 그것도 하필 엄마가.
규민도 이상하게 생각되었나 보다. 집요하게 "왜애?"하고 묻는다.
나: (참으로 불편한 마음으로) 응, 새왕비가 나쁜 사람인가봐.
규민 : (그래도 미심쩍은지) 왜애?
나: (그러게 왜 그냐.) (이런 말은 정말 하기 싫었다.) 음, 가짜엄마인가봐.
여기서 잠깐, 요즘 규민의 진짜와 가짜 개념을 살펴보면,
소꼽놀이를 하면서, 진짜/가짜란 말을 쓰게 되었다.
가짜 밥 먹기, 진짜로 밥 먹는 게 아니고 먹는 흉내만 내는 것.
여기에서 파생하여, 가짜 밥-> 진짜 밥이 아닌 것-> 가짜 생선 -> 진짜 생선이 아닌 것 -> 고로 움직이지 못함
그리하여 나의 "가짜엄마인가봐."란 말에 규민 대답 : 움직이잖아.
역시 카메라를 늘 지니고 다니는 습관이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옷 보따리 두 개에다가 또 하나의 보따리를 양 손에 나눠 들고 있었다.
핸드백까지 어깨에 걸고.
요즘은 무조건 가벼운 짐, 그것이 움직임의 제 1의 조건이다.
어깨가 쑤시고 다리가 아퍼 지하철에서 빈자리가 보이면 쏜살같이 달려가 엉덩이부터 디밀고 본다. 다리를 구부려 앉을때 입에서는 어어어어이휴 소리가 난다.
한창 때 들고다니던 가방은 무조건 배낭, 그 안에 읽고있는 책은 물론이요, 혹 기분이 달라질 경우를 대비하여 소설도 하나 더 챙겨넣고, 사전도(사전은 왜?) 챙겨넣고, 하여 항상 바윗덩어리 가방을 메고다니면서도, 지하철의 빈자리는 소 닭 보듯 하였던 시절이 있었건만. 그러니 삼단 같은 머리채의 청춘들아 이 내몸이 늙었다고 괄시를 말게. 내일이면 그 청춘은 바람결에 사라지고 돌아보면 아득한 꿈이련가 할터이니. 이러니 무슨 얼어죽을 카메라인가 말이다.
그 동네는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숲 아래 있었는데, 세련되게 뽑아놓은 공원의 숲도 아니었고, 그냥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듯한 숲이었다. 듬성듬성 나무 아래 봉숭아와 무슨 덩쿨(나팔꽃인지 호박인지 -원래 이 둘의 차이를 정확히 알고 있으나, 기억이 가물가물)이 섞여있었다. 그러니까 모양이 꼭 시골길 같았다.(시골이라면 단지 '길' 정도의 모습이었는데, 도심 한복판이라 그 정도의 모습으로도 '숲'이 연상되었다.)
그런 숲 아래, 친구 집이 있었는데, 그 집 또한 도심 한복판 하고는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30년 전의 내 기억에서 고대로 불쑥 튀어나온 듯한 집. 시멘트로 마감한 오르막길 한쪽에 엉성한 시멘트 층계가 있고, 그 오르막길 위에 철 대문이 있었다. 철 대문은 대충 열려있는 모양이었고, 그 안으로 들어서니 양팔 벌린 너비의 기다란 시멘트 마당이 있었다.
그 집으로 가기 전, 나는 고양이 두마리를 보았다.
어느 집에서 이불을 담장에 걸어놨는데 그 이불 아래 두 마리가 누워 자고 있었다.
한 마리는 배를 한껏 늘어뜨려 아주 길고 긴 자세로 자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등을 바닥에 대고 앞 다리 한 쌍은 머리 옆으로 들어올려 만세 자세 처럼 하고는 땅에 내려놓고 뒷 다리 한 쌍은 공중을 향해 치켜 든 채 자고 있었다.
색깔도 비슷한 두 고양이. 그 모습이 한 편의 코메디 같기도 하고, 한 편의 소설 같기도 하여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 쯤에서 사진들이 들어있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음엔 꼭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자. 다른 짐들은 다 포기하더라도 사진기만은 놓치지 않는 자세,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극장전>을 보기 전에, 내가 감독도 아니면서, 은근히 이 영화 별루면 어떡하나, 걱정을 다 하고 있었다.
사실 홍상수가 -그의 영화에 관한 한- 그냥 그대로더라도 좋았을 것인데, 그는 무슨 계기였는지 획기적 전환점을 맞았다. 단지 영화에 대한 전환점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인간에 대한, 인생에 대한.
그것의 겸손하고도 순박하고 솔직한 고백,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나는 이 영화가 무지하게 재미있었다. 그리하여 그 다음 영화, <극장전>에 대해 기대와 벌써부터 애정과 한편으로 염려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뜸들이지 말고 결론부터 말한다면, 제목으로 붙였듯, 오, 놀라워라, 홍상수! <극장전>!
어떤 이는, "홍상수가 B급 무비를 만들었다", "완벽한 아마츄어리즘의 완성", "홍상수는 이제 브라이언 드팔마나 로만 폴란스키가 되려나보다" 라고 떠들며 흥분했다.
나는 B급 무비나, 아마츄어리즘이나, 브라이언 드팔마나, 로만 폴란스킨는 잘 모르지만, 그의 흥분에는 적극 동조할 수 있었다.
오, 정말 멋진 영화이니.
그 '전환점' 이후, 그는 정말 점점 사랑스러운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또한 대단하게도 이 영화는 보는 순간의 즐거움으로 끝이 아닌 것 같다. 영화를 본 지 사흘째, 여전히 영화의 대사와 장면은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떠나지 않는다. 희안한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대사들이 하나하나 다시 떠오르고 그것들이 죄다 주옥같은 명대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곱씹어 볼수록 앞의 대사가 뒤의 대사와, 앞의 장면과 뒤의 장면이 연결되며 매직아이처럼 새로운 그림을 스을쩍 물 위로 떠올리는 것 같기도 하다.
씨네21에서 영화검색을 해보았더니 주루룩 기사가 뜬다.
허문영과 정영일의 기사를 읽어봤더니 장난이 아니다. 이거 정말 진심으로 이렇게들 생각한 것일까, 흠.
(씨네21)
엄지원의 휀이 되었다. 연기, 정말 잘 한다. 김상경도 잘 하지만, 그보다 낫다.
(씨네21)
근데 정말 의문스러운 것은, 극중 이형수 감독이 멀쩡히 포스터에서(지금 사진의 김상경 뒤에 보이는) 상원역의 이기우였다가 마지막 병실에서 누워있을 땐 상원의 의붓아버지인 것 같은 아저씨 역의 김명수였을까... 처음엔 내가 잘못본 줄 알았다. 암말기 환자 분장때문에 상원역의 이기우였는데 헛갈린 줄 알고 캐스팅 자막 올라갈때 확인해보려고 했더니 자막에도 안나온다. 씨네21에 들어가서 확인해봤더니, 김명수 맞았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싶은 것은 사실 한두개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헛점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미로처럼 보인다. 이걸 읽으면 더 깊은 비밀을 알 수 있게 될 거 같은...
홍상수의 다음 영화, 정말 본격적으로 기대.
강남 교보, 1층 커피숍을 지나치다 그 멀리서도 안의 사람들이 쥐고 있는 커피잔이 눈에 띄어 냅다 들어갔다. 둥글고 뭉툭하고 큰 자기 잔. 장식없는 흰색. 이거면 내 속이 뒤집혀도 매일매일 커피를 마시겠다. 사실 난 커피를 좋아한다. 그러나 커피숍에서 돈 주고 사먹는 커피가 돈 하나도 안 아까웠던 적은 별로 없었다. 돈을 치르고 나올땐, 이 돈이면 차라리 뒀다 술 값에 보탤걸, 하는 생각이 꼭 뒷통수에 달라붙는다. 커피숍은, 뭐랄까, 하여튼 쓰잘데기 없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거기서 카프카의 <성>을 읽고 영감을 받아 그것만한 대작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런데 커피숍 밖에서는 안을 기웃하게 된다, 왠지. 영화에서 보는 빠리의 까페들, 아, 저기 가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꼭 머리 속에 달라붙는다.
그러고 들어가, 전망좋은 테이블을 잡고 앉아 맛있는 커피를 내가 좋아하는 뭉툭하고 큰 흰 자기 잔에 마시며 지나가는 빠리지엔느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땐 돈 생각이 안들까.
강남 교보 1층 커피숍에서 난 <성>도 아니고, 고등학교 불어 교과서를 읽고 있었다.
언젠간 들를 빠리의 까페를 위한 준비였다면 차라리 나았지, 과외 준비였다. 이 지긋지긋 이갈리는 과외를 아직까지 하고 있으니, 인생 정말 별거 아닌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하루빨리 소망과 허영을 구분하고, 담담한 소망만 가뿐하게 살 준비를 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꽤 만족스러웠다. 비록 교과서 따위를 읽고 있지만, 커피는 맛있고, 오랜만에 뭉툭하고 큰 흰 자기 잔을 손 안에 넣고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리고 있고, 더구나 외부를 향한 통유리창으로 주룩주룩 빗줄기와 젖은 땅이 보였다. 흠, 커피숍이란 이런 사치를 위한 것이군. 그 순간, 딱, 렛잇비가 나왔다.
아, 이것은 누구의 선물인가. 과외15년 인생을 어여삐 여긴 과외요정인가, 커피숍을 비로소 흡족하게 바라봄을 기특하게 여긴 커피숍요정인가. 렛잇비가 슬그머니 나오는 순간(그 피아노 소리),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 했다. 렛잇비는 그렇다.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렛잇비가 끝나고 예스터데이가 나왔다. 아, 이건 또 누구의 선물이란 말인가. 렛잇비와 예스터데이를 하나의 씨디에 묶어놓지 않았다고, 장삿속 밝은 비틀즈라 평했던, 1999년 영국문화원에서 열렸던 비틀즈 박람회 어느 하루 만났던 아줌마 아저씨 무리들이 (그들은 씨디를 사려고 씨디더미 앞에 서서 이것저것을 고르고 있었다) 떠오른다. 그들의 선곡은 정말 완벽하구나. 렛잇비에 이어 예스터데이라니, 기어이 눈물을 빗줄기마냥 주룩주룩 터뜨리려고...
폴 매카트니 엄마가 그랬대나, 존 레논 이모가 그랬대나, 맨날 기타만 치고 있으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 어떻게 먹고 살거냐고. 그 아줌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맨날 기타만 쳤던 사춘기가 수학문제 풀고 영어지문 읽었던 사춘기 보다 골백번 낫다. 인생은 정말 그런 것이다. 뭉툭하고 큰 흰 도자기 잔과 빗줄기와 렛잇비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오랜만에 뉴스를 봄.
에스비에스 8시 뉴스.
삐딱하고 못돼먹은 나는 뉴스에 등장하는 넥타이맨들이 너무나 싫다.
어떻게 나오든 싫다.
저 사람들, 저러고 돌아다니면서 배고픈 사람들 돈은 얼마나 허투루 쓰고 있을 것이며,
쓰잘데기 없는 정치, 경제, 행정, 문화 온갖 쓰레기는 얼마나 많이 만들고 있을 것이며,
저 인간들 때문에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고 많으며 앞으로도 많을 것이며,
전쟁이나 또 만들고 있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나는 뉴스를 보면 안된다.
한참 속으로(요즘은 그래도 속으로만) 욕을 하고 있는데, 갑작 여자가 한 컷 나왔다.
정부/공사 지방 이전 소식 이후, 한참동안 넥타이맨들이 나와 각계에서의 진단과 반응과 전망이랍시고 전달하고 이제는 소소한 소식들, 내부 직원들이 이래서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뒷소식 류의 뉴스 중이었다.
문득 한 여자가 나왔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지방으로 사무실 이전하면 결혼 때문에 걱정이에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울 것 같고... 그래서 직장을 옮길까 생각중이에요."
정말 거짓말처럼 유치하고 드럽고 치사하게 용의주도한 세상이라지.
후다닥 티뷔 꺼버렸다.
내가 날아다니는 꿈에 대해 여러번 떠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이상 안떠들겠다.)
아, 내가 그 꿈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발뒷꿈치를 살짝 들어올리고 무릎을 굽혔다가 펴면서 가볍게 점프한다. 두 팔도 좍 피고.
그러면 하늘로 스윽 올라갔더랬지.
몸이 떠오르는 그 느낌, 공기 사이를 유영하는 그 느낌, 땅바닥이 슉슉 뒤로 물러서는 걸 내려다보는 그 느낌, 나무 위로 공원 위로 들판 위로 날아다니던 그 느낌, 그 느낌.
(안 떠들겠다고 했는데 또 떠든다.)
그런데 더 이상 그 꿈을 안 꾼다고도 얘기했을 것이다.
그 이후 아주 가끔 변형된 날기를 시도하는 꿈이 있었다.
어젯밤 꿈,
나는 학교처럼 생긴 건물 안에서 윗층으로 윗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윗층으로 올라갈수록 벽과 천정이 골격만 있는 형태였고, 책상과 의자도 점점 없어지고 공간도 점점 좁아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영락없는 정글짐이다.)
도중 누군가 다가와 너도 할래? 물었다.
난 무서워,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뭘 하겠냐는 거였냐면, 그때 내 머리 바로 위에서, 그래서 마치 내 머리를 스치듯 행글라이더가 지나갔고, 저걸 나보고 타보겠냐는 거였다.
거대한 행글라이더였다.
그 거대한 삼각형이 거의 하늘을 덮을 듯 했다.
나는 계속해서 정글짐 위로 위로 올라갔고(거의 꼭대기가 가까와오자 그것은 무지 높은 위치였다. 땅이 보이지 않았다.), 올라가는 도중 행글라이더들이 계속 지나갔다. 내 머리 바로 위로. 그 떄마다 머리가 닿을까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어꺠를 바싹 움츠렸다.
나는 두 손으로 정글짐을 꼭 잡고 있어서 거의 엉금엉금 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고개만 빼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행글라이더가 지나갈때마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가 고개를 다시 빼고 하늘을 올려봤다가 하면서 거북이같이 굴었다.
그러다, 문득, 저게 바로 내가 원하던 것 아냐? 하는 깨달음이 왔다.
하늘을 날고 싶다고 했잖아. 저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건데.
아, 그러니까 이 꿈은 나에게 하늘을 날 기회를 다시 주기 위한 것인가보다.
근데 난 무서워서 엉금엉금 기기만 하고 전혀 탈 생각을 못 하고 있잖아.
예전처럼 그냥 몸이 가뿐 하늘로 떠오르는 것은 이제 꿈도 못 꾸고,
초라하게 행글라이더를 이용해야 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나마도 무서워 벌벌 떨고 있구나.... 등등을 꿈 속에서 모두 깨달았다.
한 남자는 동성애자가 분명했는데, 다른 한 사람은 모르겠다.
커다란 갈색 천 소파 위에 눕듯이 앉아있다가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모를 남자가 몸을 일으켜 동성애 남자의 바지를 벗기고 그의 것을 입으로 애무했다. 갑자기 내 앞에서.
보라색 면 바지가 소파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은 장난이었다. 내가 평소에 하지 않는 짓을 지금 하는 이유는 널 놀리기 위해서야,라는 듯한. 그러나 그 남자는 동성애자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빛이 그랬다.
한참을 깔깔대며 그러고 있으니, 동성애자는 진정으로 흥분하여 이번엔 자기가 애무해주겠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다른 남자는 얼른 몸을 뺐다. 아니야, 아니야, 됐어, 됐어, 하면서.
이 두사람은 지금 알 수 없는 이유로 날 감금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재빨리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내가, 나, 이제 집에 가봐야돼, 하고 일어나니, 둘은 장난을 그만두고 빨리 운동화를 꿰신느라 주춤주춤하면서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하고 외쳤다. 순간 공포감이 확 밀려왔다. 나는 태연한 척 하면서, 천천히 신발 신어,하고는 마침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던졌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대머리 노인(최근에 벤 킹슬리 영화를 봐서 그런듯)과 다른 몇몇 노인들이 있었다. 그들 뒤로 들어가 엘레베이터 벽에 몸을 착 붙이고 노인들의 뒷 모습을 봤다. 모두 깡 말랐다. 그래도 목 뒷덜미가 몇 겹 접혀있었다. 노인들은 내가 일행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나의 일행을 기다리느라 엘레베이터문의 오픈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도 안 들어오자 다시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거의 닫힐 무렵 두 남자가 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서둘러 층계로 달려내려가고 엘레베이터 문은 완전히 닫혔다.
엘레베이터는 층마다 멈추고 문을 열었다. 아무도 내리고 타지도 않았는데.
문이 열릴때마다 비상계단을 달려 내려가고 있는 그들과 마주 쳤다. 그들은 엘레베이터를 타지 않고 그냥 계속 층계를 뛰어내려갔다.
건물을 빠져나오니 앞에 고속도로가 펼쳐있었다.
고속도로에는 뜨거운 해때문에 이글이글 아지랭이가 잔뜩 깔려있었다.
거기에 큰 개들이 늑대처럼 어슬렁 대고 있었다.
저 개 좀 봐, 어느결에 내 옆에 선 동성애자가 말했다.
그 개는 네 다리로 걸으며 작은 다리 한 쌍을 어깨에 권투글러브를 걸친 모양처럼 늘어뜨리고 흔들흔들하며 걷고 있었다. 저게 정말 다릴까?하고 내가 물어보았다.
아지랭이 때문에 잘 안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하얀색 큰 개 한마리가 고속도로 한가운데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있었다. 허리 아래부분이 차에 깔렸는지 고개와 어깨만 좌우로 흔들 뿐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저기서 새끼를 낳고 있는건지도 몰라,하고 동성애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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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e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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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봄날은 간다랑, 비포선셋, 비포 선라이즈 참 잘 봤는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_+ 저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어도, 어떻게든 갈 것 같았어요.ㅠㅠ;;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