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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래 <제스쳐 라이프>

지금 막,은 아니고 약 두어시간 전 다 읽었다.

사실 이 소설을 읽을 생각은 아니었다. 일단 작가 이름이 좀 후져보이고.

책 표지 날개에 쓰인 작가양력에는 그가 한때 월가에서 증권맨으로 일했다고 했는데, 딱 증권맨의 이름 같지 않은가(내가 그렇다고 증권맨을 폄훼하는 것이냐,한다면, 사실 그렇다). 이 번 책에는 다행히 붙어있지 않지만, 데뷔작 <영원한 이방인>의 표지 날개에는 작가사진까지 붙어있는데, 그 사진 또한 영락없는 증권맨의 얼굴이었다.

이 바쁜 세상에 증권맨이 쓴 책까지 볼 여유는 없지.

 

그래서 볼 생각이 없었는데, 듣도보도 못한 제목의 책 <영원한 이방인>을 어느날 갑자기 들고다니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작가의 또 다른 책 <제스쳐 라이프>를 연이어 사고, 결국은 이 책이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는 둥의 소릴 하는 전모작가 때문에 호기심이 슬쩍 일어 한 번 보자 하고 책을 들었다가 1,2권을 3일 만에 후루룩 끝내 버리게 되고 말았다(1,2 권이라지만 사실 짧다). 아, 전직 증권맨, 생긴 것도 증권맨, 이름도 증권맨인 사람의 이토록 고요하고 슬픈 소설이라니!

 

그 전모작가의 짧은 독후감을 다시 보았다. 역시 작가는 다르다. 내가 얼레발설레발 떠드는 것보다 낫겠다. 옮기자면,

 

영원한 이방인은 사실 데뷔작이라서 그런지 무척 매력이 있지만 문체는 어딘가 안정되어 있지 않은 인상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아예 거대한 심해로 그걸 가라앉혀 놓았다. 감정의 조절, 특히 감정의 절제는 소설에서는 무척 중요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커다란 감정의 비

누방울을 만들어놓고 끝까지 그걸 줄타기하듯 터뜨리지 않았다.  (나라면 단번에 터뜨린 뒤에, 너무 슬퍼서 할 수 없었어......지랄을 할 것이다.)

 

 알려진대로 이 소설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꽤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단, 여성의 굴절된 삶이라는 면 보다는 야만의 세기인 20세기, 그 얼굴에 난 잔인한 흉터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역사적인 맥락을 늘 떠올린다.

 

 그도 이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하는 충격이 그 출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사람들은 잊을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맥락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에서 사람들이 산처럼 쌓여 죽어갔는데도 어떻게 사람들은 그 위에 햄버거 가게를 세우고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일 것이다. 어쨌든, 20세기가 폭력과 혁명세기, 혹은 야만과 광기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틀림없이 망각의 세기, 단절의 세기가 될 것이다. 안 그런가, 여러분?

 

 난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이 소설을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 꼽고 싶다. 시간 나면 한번 읽어보시길..

 

<제스쳐 라이프>를 내려놓고 서둘러 <영원한 이방인>을 들었더니, 이 全작가가 그건 당신한텐 좀 별루일 수 있겠는데, 했다. 그래서 그냥 내려놨다. 내 귀는 참 얇기도 하지. 진짜 얇다.

 

나의 개인적 소견을 살짝 보태자면, 어느 작가는 데뷔 기념 인터뷰에서 <영원한 이방인>이 자기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해준 고마운 소설이라고 하였었는데, <제스쳐 라이프>를 읽고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둥이 치는 하늘에 동시에 무지개가 걸리는 행운이 나에게 찾아와 나도 데뷔 기념 인터뷰 비스무리 한 걸 혹이라도 할 수 있게 된다면, 나도 그때 <제스쳐 라이프>를 두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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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 1

누구나 다 그렇지만, 규민도 옛날 얘기 듣기를 좋아해 자기 전엔 언제나 옛날 얘기 해달라고 조른다. 아이 수준에 맞는 짧막 이야기를 그때그때 만드느라 진을 뺐었다. (요즘은 어휘력과 이해력이 부쩍 늘어 선녀와 나뭇꾼, 잭과 콩나무를 해줘도 된다.) 규민이 열렬 좋아해 여러번 재신청을 받았던 얘기 중, 전수찬의 '문 얘기'와 '동그라미 얘기'가 있다. 도대체 왜 그토록 좋아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문 얘기 : 옛날에 옛날에(처음에 꼭 이렇게 시작해야한다. 안 그러면 빠꾸당한다.) 문이 하나 있었어. 애기가 와서, 문아 열려라, 그러는데 안 열리는 거야. 어~ 왜 안 열리지? 문아, 열려라. 애기가 아무리 말해도 문은 열리지 않았어. 그러더니 문이 말하기를, 밥 잘 안 먹고 잠도 코 잘 안자고, 치카치카 잘 안하는 애기한테는 문 안 열어줄거야. 하는거야. 그래서 애기는 집에 가서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떼도 안 부리고, 치카치카도 잘 하고 다시 와서 문아, 열려라, 했더니, 이번에는 문이 스르륵 열리더래. 끝. (이런 시덥잖은 교육용 이야기라니.. 그래도 규민은 번번히 '문 얘기 해줘'하고 졸랐다.)

 

동그라미 얘기 : (당시 규민이 돼지 얼굴을 그리기 위해 동그라미 그리기를 열심히 연습하면서 동그라미, 세모, 네모에 관심이 많았었다.) 옛날에 옛날에 동그라미가 있었어. 그런데, 동그라미가 막 굴러가다가 탁 넘어져서 한 쪽 귀퉁이가 떨어져나가 잃어버렸어. 그래서 떼굴떼굴 굴러가지 못하는거야. 동그라미는 너무 슬퍼서 자기 한 쪽 귀퉁이를 막 찾으러 다녔어. 그러다가 세모를 만났는데, 이게 내가 잃어버린 귀퉁인가 하고 세모를 끼어봤더니 안 맞는거야. 그래서 다시 울면서 가다가 네모를 만났는데, 네모가, 동그라미야, 내가 도와줄께, 해서 껴봤는데도 떼굴떼굴 굴러갈 수가 없었어. 어떡하지, 하면서 가고 있었는데, 저 쪽에 뭐가 있는거야. 가봤더니 바로 그 귀퉁이였어. 그래서 너무 반가워서 철썩 끼우고 또 떼굴떼굴 굴러갔대. 끝.

 

(지금은 이렇게 동그라미를 제법 잘 그린다. 며칠 전 그린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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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비디오, <빌리지>

비디오 가게 아저씨가 고개를 살레살레하며, 이거 끝이 영 별루던데, 했다.

우디 알렌과 크리스티나 리치의 <애니씽 엘스>(이게 찾아보니 03년도 영화던데, 왜 이제서야?)와 <빌리지> 둘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전수찬이 적극 <빌리지>로 밀고 가는 중이었다. 나는 최대한 재미있는 것으로 골라야했다. 규민이가 7시부터 자는, 이 일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행운을 최대한 누려야하므로. 사실 요즘 영화를 너무 드문드문 보아서, 비디오가게 진열대 사이를 걷고 있자니 보고 싶은 영화들이 쏟아져 쌓일 지경이었다. 고민하고 자시고도 없이 <애니씽 엘스>며, <빌리지>며, 케이트 허드슨 주연의 영화며, 전도연의 <인어공주>, 욘사마와 전도연의 <스캔달>, 고날과 몇몇이 좋았다했던 <미치고 싶을 때>, 내가 좋아하는 까뜨린느 브레야의 <횃걸>, 한 번은 왠지 봐주어야할 것 같은 <올드보이>(아직도 안 봄), 사실은 올드보이 보다 더 보고 싶은 <복수는 나의 것>...

 

요즘 나는 '할일강박' 같은 거에 시달리고 있는 듯 하다.

영화도, 즐겁게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한 것을 숙제화하고 있다.

인생이 숙제천지로 콱 막혀있다.

한의사가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했는데.

한의사 말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산들 뭔 부귀영화 입신양명 금의옥식 불굴불멸 왕생극락을 누린다고, 허.

 

비디오가게 아저씨가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지만, <빌리지>가 최종낙찰 되었다.

<애니씽 엘스>는 로맨틱 코메디라던데, 일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행운으로, 반짝 행복보다는 무언가 진지한, 인생을 성찰하며 진리를 반추하는 기회를 얻고 싶었기 때문에(로멘틱 코메디에 대한 편견).

 

<빌리지>가 그렇다고 인생을 성찰하며 진리를 반추하는 기회를 주었는가 하면, 결과적으로 아니올시다 인데, 하지만 여러가지 곰곰 곱씹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감독은 기껏 섬세하게 은둔의 모습을 그려놓고서 왜 그들을 우스꽝이로 만들었을까. 공포정치라면  타겟은 다른 데 있지 않은가.

 

감독은 사실 그런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그가 가지고 있던 관심은 스산한 분위기 만들기, 그러다가 오싹 카메라 움직이기, 갑자기 한 번 짱 놀래키기. <스크림>식으로 말고. 이미 그의 전작 <싸인>에서 연습했던 듯이, 묵직하고 둔중하게. 그래서 어떤 장면은, 장면 자체만으로 아름답고도 공포스럽도록 완벽하여 기억에 남도록.

예를 들면, 치자색 망토를 두른 맹인 처녀가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를 감지하고 공포에 싸여 두손을 맹렬히 휘저으며 앞을 살피는 중, 그 바로 뒤 초록잎사귀의 고목이 한 그루 서 있고, 그 고목 에 비껴서 빨간 망토를 두른 살인마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어깨를 움츠린 채 처녀를 노리며 서있다.  카메라는 가로등 정도의 위치에서 그들을 내려다 보고.

또 예를 들면, 사랑하고 동시에 인생의 스승인 아버지가 어딘가로 이끌어가며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어떤 사건의 등장을 얘기할 것이라고 느낄 즈음 아버지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지 마라."라고 말을 툭 던진다. 그 둘을 뒤에서 얌전히 쫓던 카메라도 갑자기 툭 정지하더니, 이야기를 듣던 딸을 중심으로 두고 반바퀴 주루룩 돌아 그녀 앞에 탁 선다. 그녀의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하는 표정.

 

그 은둔자들은 거의 완벽한 평화 속에 살고 있었다. 아무도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저능아(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돈 많은 사람도 따로 없고, 권력자도 따로 없다. 대소사를 결정하는 원로회가 있을 뿐이고, 원로회는 모두에게 건의와 질문을 받는다.

작은 마을을 이루고 옹기종기 사는 그들 모습은 어찌 보면 도피와 은둔과 낙원을 꿈꾸는 이들의 청사진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기괴한 사건이 발생한다. 주기적으로. 이 사건은 그들을 공포스럽게 하면서 그들을 더욱 단결시켰다. 결국 이 공포정치가 모든 것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리고 마는데, 여기서 더 얘기하는 것은 이 영화를 안 봤는데 앞으로 혹 보게될 사람을 위해서 할 짓이 아니므로 입을 닫으며 하여간에 개인은 집단에 우위한다,는 정치스러운 결론은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접기로하고, 도피와 은둔과 낙원을 꿈꾸는 이들의 청사진이 될 수도 있는 작은 마을의 옹기종기는 보다 현명하게 평화를 이루길 바랄 뿐이다.

 

 


 

 

비디오가게 아저씨가 고개를 살레살레 저은 만큼 꽝은 아니었다. 그 아저씨도 도피와 은둔과 낙원을 꿈꾸는 분이시라 결말에 상처받았나.

호와퀸 휘닉스가 나는 리버 휘닉스보다 더 좋던데, 이 영화에서는 너무도 건실한 일등 신랑감으로 나온다. 저 사진에서 그는 드디어 그 무겁고도 섹시한 입술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열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네 생각부터 한다고 말해서 무엇하겠어. 하루 종일 너와 함께 있을 생각만 하고 있다고 말해서 무엇하겠어." 라며 사랑 고백을 한다.  어느 여자가 감동받지 않겠는가. 둘은 그 즉시 열렬한 키스를 한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저렇게 과묵한 스타일의 남자는 연애나 결혼이나 다 꽝이다. 저런 가슴 절절한 대사는 곧, "사랑한다고 꼭 말해야 돼? 그거 말해서 무엇하겠어." 가슴 터지는 대사로 바뀔 가능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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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화당 낸골딘 사진집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런데, 토요일 아침, 우연히 찾았다.

토요일 밤, 남은 포도주와, 첫맛은 산뜻하나 뒷맛은 고린내가 나는 농주를 마시고 약간 알딸딸한 기분에 아침에 찾은 그것을 들췄다가 아, 괜히 기분만 뒤숭숭해졌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 사진, 이 잔인한 사진. 그리고 또 이거

 

 

우리, 서로에게 이런 사진 허하기 하자.

가식적인 우리 관계에 이건 너무 무리인가.

그럼 이건.

 

 

옛날에 내가 흉내낸다고 오방 난리를 치며 찍었다가 개뿔, 흉내는 커녕 그지발싸개로도 못쓸 사진 하나 찍었던 그 모델도 눈에 띈다.

 

 

우리도 누드사진을, 예술을 위해, 서로의 자유로운 예술혼을 위해 허해주는 게 어떨까.

 

이제부터, 늘 사진기를 들고다니기로 또 새삼 결심했다.

근데 문제는 사진기를 들고다니냐 아니냐가 아니다.

배워야한다.

갑자기 어디서 사진을 배우냐, 하고 인터넷을 열라 뒤지다가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 여성의 눈으로 사진을 찍기 어쩌구하는 강좌를 기웃했더니 수요일 밤 9시 시보마넌, 한겨레 문화센터 토요일 오전내내 이십마넌, 시간도 안되고 돈도 엄꼬, 미디어아카데미에서 오마넌에 나도 비디오저널리스트 어쩌구하는 비디오카메라 촬영 및 편집 강의가 있어 그럼 이거나(더군다나 강의가 끝나면 수강료 오마넌은 돌려주는 시스템이라고 한다.)했다가, 아무래도 시간이 맞으려면 하고 광진문화센터를 찾아보니 이건 석달에 사마넌, 강사도 광진구 각종 사진대회 상을 휩쓴 사진작가협회 소속 사진작가님. 음, 근데 이건 왜 끌리지 않을까. 결국 돈도 엄꼬 애엄마 주제에 그냥 독학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옛날 보던 책을 꺼내어 그래, 다시 처음부터 꼼꼼히 읽어가며 실습해보는거야,하고서는 빛의 성질 어쩌구 카메라 옵스큐라 어쩌구가 나오는 1장 한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다가 뻗어 자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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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솔

하얗다 상이 몇 번 우리집에서 자고갔다.

한 번은 그 다음날 일본으로 출장 예정이어서 (고향에 가며 '출장간다'라고 말하는 건 좋을까, 나쁠까. 고향은 닳고 닳은 단어라지만, 그말에 동의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향이란 단어에 연상되는 이미지는 가슴 뻐근하게한다.) 가방에 세면도구들을 챙겨왔었는지, 아침엔 당당하게 자기 칫솔을 꺼내어 썼다.

그러고는 그 칫솔을 놓고갔다.

 

음, 이걸 어쩌나.

1초 생각하고, 그냥 그대로 두었다.

그냥 그대로 둔 것이 하얗다 상이 다음에 올 것을 대비하는 착한 마음이었다면 이런 곤란한 벌을 하늘이 주지 않았을까.

하룻밤을 다른 곳에서 자게 되었을때, 세면도구 챙길 것을 전수찬에게 부탁했더니, 이냥반이 자기칫솔, 규민칫솔은 다 잘 챙기고서는 내것이랍시고 하얗다 상의 칫솔을 가져왔다.

그걸로는 왠지 도저히 이를 닦을 수 없었다. 그김에 이 안 닦고 먹고 자고 했다.

(그랬더니, 이게 늙어가는 징조인가, 지금 한쪽 잇몸이 마구 시리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 세면도구를 제자리에 정리하던 중, 하얗다 상 칫솔을 들고 또다시 음, 이걸 어쩌나 1초간 생각하였다. 모조리 칫솔꽂이에 꽂아두었으면 한 번에 일이 끝날 것을, 칫솔꽂이까지 걸어가서 몇몇 칫솔은 꽂아두고 다시 돌아서서 쓰레기통까지 걸어가 하얗다 상 칫솔만 따로 버리는 수고를 했다. 어차피 이 집 안에선 필요없는 물건인 걸, 남의 칫솔로 수채구멍 청소하기도 그렇고 버리자.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갈잎을 먹으면 죽는다고, 애초에 게으름뱅이 짓을 했으면 게으름뱅이 다운 마감을 할 것이지, 괜한 이중의 노동을 해가지고 하늘은 일을 한 번 더 꼬아 벌을 주셨다.

 

어젯밤 하얗다 상이 또 우리집에서 자고 갔다.

오늘 아침 일어나 그는 아껴두었던 나의 새 칫솔을 썼다.

아까와 뜯지도 못하고 있던 걸.. 무심하게 뜯어제껴져 한 쪽에 나뒹굴고 있는 포장, 공포 속에 떨며 마모되었을 여리딘 여린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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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라디오 광고

배용준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당신을 좋은 집에서 살게 해주는 것"이라고 목소리 깔며 얘기하는 라디오 광고를 들을 때마다 웃어야하는 건지 비웃어야하는 건지 (결국 웃긴 웃는 것이군) 헛갈리던 것이 몇달째였는데, 또 헛갈리는 것이 하나 더 나왔다.

 

"장바구니 챙겨야지" "비닐포장을 줄이기 위해 장바구니를 준비하는 당신, 고맙습니다."

"건전지는 따로 버려야지" "환경을 생각해서 건전지는 따로 버리는 당신, 고맙습니다."

 

엇, 건전지, 따로 버리는 거던가?

이거 무수은, 무(또 뭐더라...)로 제작되어 이제부터는 따로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게 90년대 말이었는데, 그 사이 다시 수은건전지가 나오는 건가, 아니면 따로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해놓고 알아보니 그러면 안되는 거여서 번복했었나..

사실, 건전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마다 1초간 망설이긴 했었다, 그냥, 왠지.

만약 따로 버려야하는 것이라면 따로 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할때처럼 왜 신문에 알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또 왜 건전지 수거함은 하늘에 별따기 마냥 보기 힘든 것인가.

나는, 모든 항목에서 점수를 받고, 다시한번, 자타가 공인하는 '지구지킴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딱 한 항목에서 날려버리고 이 탓을 누구한테 해야하는지, 어디부터 잘 못 된건지 찝찝한 기분으로 한참을 짚어보았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정신차리고 보니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97년말, 연세대학교 공대 도서관 건물 안의 한 장면.  도서관 내부 벽에 붙어있던 작은 의견란 앞 청바지와 누런 색 쎄무 자켓을 입고 긴 생머리를 하고 서있던 한 여자. 그 의견란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끄적끄적 그녀가 적고 있었던 것은, "공대 내 건전지 수거함을 만들어주세요."란 문장 아래, "건전지는 이제 무수은, 무(....기억 안난..)로 제작되어 분리수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녀가 펜을 내려놓자 마자 마침 화장실에서 돌아온 그녀의 애인, 그것을 보고, 입끝을 귀에 걸며, "당신은 아네뜨 베닝같아"한다.(그 당시 무슨 영화에서 마이클 더글라스는 미국대통령으로 나오고 아네트 베닝은 환경운동가로 나와 환경에 대해 썰을 풀자 마이클 더글라스가 그 모습에 반하였다) 

 

아, 그 여자, 그 당시, 정말 아름다웠구나, 미친년 널 뛰듯 머리를 산발하고 있어도, 가끔은 쥐잡아먹은 듯 시뻘건 립스틱만 얼굴에 동동 띄웠어도, 다 헤진 청바지와 다 헤진 30년된 쎄무 자켓이 그럴싸하게 어울리며 너무도 아름다웠었구나, 이 생각을 한참 하고 자빠져있었다. 건전지 분리수거가 잘 안 알려진 문제의 책임은 저 멀리 집어던져놓고.

 

이제는 알겠다, 그 때 그녀가 정말 아름다웠었다는 걸. 아, 젊음이란, 지나고 나니 이렇게 가슴 끓듯 절절히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이제는 미친년 널 뛰는 머리를 하면, 그야말로 미친년 널을 뛰고있고, 쥐잡아먹은 시뻘건 립스틱을 발라볼라치면, 살짝 바르자마자 누가 그새 혹 봤을까 깜짝 놀라 허둥지둥 지우기 바쁘고, 헤진 청바지와 누렁 쎄무자켓은 버티기 자세같다. "그거 그렇게 버리면 오염원이야."라고 한 소리하면, '아네뜨 베닝'은 커녕, '저 아줌마 저 잔소리'표정이 돌아오고....

 

20대, 나에겐 다 지나가주었다는 것이 좋았어, 라고 시건방을 떨었더니, 이제와서 이렇게 그리울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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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무슨 비가 게릴라처럼 온다.

꿈에서 봤던 몽롱한 안개비를 기다렸는데.

그러면 우산도 없이 밖으로 나가, 꿈에서처럼 그냥 맞으며 걸어가려고 했는데.

옥상에는 내가 어제 널어놓은 이불 세개가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을 것이다.

바람에 마구 흔들리며.

옥상에 이불 널어놓고 저집 여편네는 어디 갔냐고, 옆 건물 사람들이 한 마디할 이 여편네는 그냥 밖의 비만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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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이를 봤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그녀와 나는 어디론가를 자꾸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기때문에 그녀의 옆 얼굴만을 볼 수 있었다.

굉장한 이야기가 나와서 기억해두었다가 꼭 꿈을 깨고나면 적어두어야지, 했는데, 손톱만큼도 기억이 안 난다.

 

유영이를 만난 후 (꿈이 설정해둔) 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공원 같은 곳에 앉아있었는데, 주위의 빌딩 옥상에서 사람들이 5분 10분 간격으로 떨어졌다. 어머, 저기, 누가 떨어져. 했는데, 주위 사람들은 무반응이었다. 요즘은 원래 저렇게 사람들이 떨어져 자살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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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문학포럼 관람기 2

둘째날은 운이 좋았다.

규민이 어린이집 일정상 아침 9시까지 어린이집에 등원해야해서 곧 세종문화회관으로 뛰어갈 수 있었다. 아침 10시 시작하는 토론회가 두 개, 무얼 고를까, 갈등.

하나는 내 청춘의 히로인, 오정희가 발제자로 나오신다. 그러나, 주제가 또 그만그만한 것, <힘의 질서와 인간 가치:독재, 전쟁 그리고 평화>.

같은 시각 다른 것은 <영구평화의 이상>.

독재, 전쟁, 힘의 시대를 거쳤으니, 이젠 평화도 영구평화를 얘기해야 시원하지, 하고 <영구평화의 이상>을 보기로 했다. 주제 발표는 로버트 하스(시인이라함)와 최장집교수.

그런데 늦었다. 로버트 하스의 발표 앞대가리를 빼먹는 바람에 집중하고 앉아있지 못하고 화장실도 왔다갔다 (그러느라 회의장 밖에 나갔더니, 누가 다가와, 저기 혹시 xxx씨 아니세요? 했다. 순간 나한테 떠오른 생각은 주책맞게, 엇! 난 소설가도 아닌데 어떻게 알지?였다. 내가 전혀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결과는 시시껍절하게 그냥 대학 1년 후배였다. 한편으로는 약간의 안도감, 그래, 졸업하고 그렇게 팍 변한 건 아닌가보다..) 해서 로버트 하스의 발표는 뭐가 뭔소린지 잘 모르겠다. 내가 깜짝 놀라며 감동을 받은 것은 최장집 교수때문이었다.

 

최장집 교수는 '한반도 평화조건'이란 글을 준비했는데, 그 글 안 몇가지 표현, 예를 들면, 북한을 언급할때 북한/북핵이라고 표시한다든지, 민주주의나 자유, 인권이란 가치 개입없이 평화공존 자체를 목표로한 남북한 관계라든지, 하는 표현들이 주위 토론자와 거기에 있던 몇 원로들(박이문 교수를 포함)의 의심을 샀다. 질문이 이어졌다. '북한 슬래쉬 북핵'이란 표현은 북핵을 인정하는 것이냐, (북한과의 관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놔둘 수 있느냐 등.

 

최장집 교수의 답변은 너무도, 너무나도 평범, 평이한 것들이었는데도, 그토록 평범하고 평이해서 단박에 이해되는 말을 붙들고 똑같은 질문이 반복해서 던져졌다. 말하자면, 북핵은 북한의 존립문제와 링크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 등을 상대하는 대외적 의미에서) 북한과 북핵을 연결하여 표현한 것이다...(최장집 교수의 대답, 이러면 다시 질문) 그렇다면 당신은 북핵을 인정하고 있는가. 북핵이 있다/없다 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북핵은, 북한의 존립을 인정하면 피할 수 있는 문제다. (라고 최장집 교수 다시 대답. 그럼 또 빙딱같은 질문) 북핵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인가. (이런 찐따 질문에도 다시 최장집 답변) 물론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너무도 간단하게 피할 방법(북한의 존립 인정)이 있다. 그런데 이 간단한 방법을 미국은 시도하지 않는다. 나는 북한 측보다는 미국이 오히려 북핵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코메디 쇼같은 일련의 이런 우문현답 씨리즈를 보면서, 나는 그 뒤 이어질, 북의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 그대로 놔둘 것이냐,란 그의 대답이 궁금했다. 북의 인권 문제라면, 나도 '빨리 바뀌어야하는데'편 중 하나였다. 그의 대답은, 역시, 너무도, 너무나도 평범, 평이한 것, 그것은 초음속으로 날아가 나의 의식의 허영, 거기 있던 모든 이들의 의식의 허영을 꿰부수고 진리에 꽂혔다; 정치는 매우 다이나믹한 것이다. 인권문제가 있다는 판단(우월의식) 하에 어떠한 개입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그 체재 안에서는 어쨌든 인위적이며, 어떠하든 위험하다.

 

하하하,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 했다.

다시 한 번 세상의 진리는 아른아른 머리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쪼그리고 잘 보면 알 수 있는 땅바닥에 있음을...

북한이 인권문제 심각하다고 말하는 집단 치고 인권문제 없는 집단 있는가. 뭐 묻은 것들이 뭐 묻은 거 나무란다고. 하물며 북한의 인권문제는 복합적이다. 바로 손가락질하는 그 놈들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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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한다 마음먹었으니 더 잊어먹기전에 국제문학포람 관람기 씀

오에 겐자부로씨가 대단한 소설가라는 건 따로 말을 안 들어도 알만하겠는데, 유종호 평론가왈, 오에 겐자부로씨가 20대때 싸르트르와 대담을 했다고. 역시 될 사람은 떡잎부터 다른건지, 세상에 그런 20대가 있어도 되는건가. 나는 서른중반이 되어도 조느라고 '구토'를 다 읽어낼 수 없는데. 그런데 그런 20대와 노벨문학상의 그 사람은 순진하고도 겸손하고도 착한 아이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문학'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에 겐자부로씨의 책이라면, 제목때문에 읽었던 '性的인간'이 전부인 나는 정말 그이 앞에서 다 시들어빠진 시금치쪼가리처럼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오에 겐자부로씨의 발표가 있던 <인간가치와 정치변화>를 현장에서 직접 들었던 것은 아니다. 10시반 시작인데, 규민이 데려다주고 집에 온 시각이 10시15분인것을 세종문화회관까지 15분만에 무슨 수로 가나. 2시 <문학과 보편적 인간가치>를 들으러 갔더니, 박이문교수, 오에 겐자부로씨가 앞줄에 앉아있었었다. 발제문책자를 사서 뒤늦게 오에 겐자부로씨의 발표를 읽었다. 오에 겐자부로씨와 함께 발표를 했던 사람은 김우창이란 평론가였는데, 이 사람 무지 쪽팔렸었겠다. 오에 겐자부로씨의 글은, 짧고도, 읽기 쉽고도, 노작가의 평화에의 절절한 호소가 가슴 찌릿찌릿 하였다. 반해, 김우창씨 글은 뭔 소린지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주술이 하여간에 무지하게 길었다.

 

오에 겐자부로씨는 자신이 쓰고 있는 지금의 소설에서부터 글을 시작하였다. 아마 이것이 자기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일 것이라면서. 자기 생애 마지막 소설일 것이라 생각하며 글을 쓰는 작가의 느낌은 어떠한 걸까. 김윤식씨였나, 다른 사람이었나 아무튼 누가 그러길, 오에 겐자부로씨가 이 짧은 일정에서도 호텔에서 원고지를 놓고 글을 수정하고 있더라고.

 

박이문교수와 오에 겐자부로선생이 앞줄에 앉고 그 뒷줄에 내가 앉아 들은 토론회는 <문학과 보편적 인간가치>였다. 르 클레지오, 유종호, 루이스 세풀베다, 황석영씨가 주제 발표를, 김인환(평론가라함), 이인성(소설가라함)이 토론자로 나왔다. 사회자는 김화영 교수. 김화영교수는 여전히 한국어를 불어처럼 발음한다. '뒤에' 같은 단어는 특히 그렇다. 입술을 너무 앞으로 내밀어서 그런 거 같다. 생글생글 웃으며 간간히 농담을 하는 모습이 지금 이 토론회가 무척이나 즐거운 듯. 김화영교수는 그럴 양반이다. 소설가들 사이에서 문학을 얘기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평생 소년처럼 행복해하며 문학을 읽고 공부하고 글을 쓰고 했을 그 양반이 순간 가슴 뻐근하게 부러웠다.

 

보편적 인간가치,라니 뭘 갖다 대도 다 그럴듯할 포괄적인 주제라, 발표문들이 다 예수님 부처님말씀처럼 지루하게 옳은 소리들 뿐이었다. <인간가치와 정치변화>도 포괄적 주제이긴 마찬가지인데, 오에 겐자부로씨는 그토록 감동적인 발표문을 쓰셨건만.

이인성씨는 생긴 것도 꼭 멸치같아 염승주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말투도 염승주랑 비슷하였다. 툭툭 시비조로 던지는 말투, 약간 옆으로 꼬나보면서. 이런 식의 형식위주의, 딱딱한 토론회는 정말 재미없다고. 재미있는 얘기를 하자고. (유종호 평론가 빼고) 죄다 유명한 소설가이시니 각자 글 쓰는 얘기 좀 해달라고. 옳거니.

김화영교수는 이인성씨의 이런 지적에도 싱글벙글이다. 자기가 준비모임에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딱딱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단다.

그 이후로 나온 얘기들이 실제로 재미있었다. 르 클레지오씨는 마르고 키가 크고 눈매가 깊은데다가 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라 여자들로부터 인기만방일 타입이었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미래소년 코난 친구, 판초처럼 생겼다.

오늘은 여기까지, 규민을 데릴러 가야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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