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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은 다 딸내미 시집 안 보내려고 하지 않아요?"

 

결혼이란 절대 해악이라고 믿었던 시기를 극복하고(세월이 약이다), 나도 역시 나이 먹으니 내 서방과 내 자식이 (정신적, 정서적) 비빌 언덕인가?라며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뭐니뭐니해도 내 딸이 보물이다.

다시 없을 것 같은 존재를 만나고, 나는 인생과 인간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배우며 다시 태어나............암튼 씽글의 친구들에게, '절대적으로'  비혼을 주장하기가 약간은 혼동스러운 상태.

 

주로, '결혼은 아니더래도, 아이는...(혹은 딸아이는)'이라는 단서를 달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서른후반의 나이를 먹고도 그것을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비겁하다.  더구나 내가 비혼모도 아닌데.

 

나의 결혼관의 정체는 무어냐.

나는 가끔 규민에게 결혼을 허락할 것인지(예전에는 죽었다깨어도, 혈서를 쓰는 한이 있어도, '제발 그냥 같이 살아라, 결혼은 절대 안된다' 주장이었다.), 혹은 권할 것인지(서른아홉의 씽글인 규민 앞에서 나는 그녀의 결혼 가능성에 초연할까?) 고민한다.

얼마전 만났던, 그 엄마의 나이는 잘 모르겠고, 큰 딸 아이가 열한살이 된 (작은 딸아이는 네살) 여자가, 얼굴에 고민 한 가닥의 흔적도 비추지 않고, "엄마들은 다 딸내미 시집 안 보내려고 하지 않아요?"라고 해서, 꽤 안심(?)이 되기도 했었다. 결혼은 권할 것이(사랑하는 딸에게 권할 것이 절대) 못 되는 것 맞구나........

 

 

 

나의 남편과 나는 2007년, 결혼 9년차를 맞이하여, 앞서 밝혔듯이 둘의 관계를 위한 프로젝트를 발촉하였다. 둘다 그냥저냥은 참을 수 없는 예민하고 지랄맞은 성격이라(그냥저냥 넘어가는 성격이라면 이미 우리둘은 잘 산다; 함께 집안일도 잘 하고, 함께 나들이도 잘 하고, 집안 대소사는 반드시 둘이 상의하고 결정하고 등등등....), 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총력을 다해 극복해서 평화롭게 잘 살자며 결의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남편은 놀랄만한 제안를 했었다.

 

내가 친구로 부터 들은 김형경의 <천 개의 공감> 이란 책의 내용을 잠깐 남편에게 수다떤 적이 있었는데, 남편이 이 책을 도서관에서 찾아보고 자신도 큰 공감을 하며 책을 빌려와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같이(동시에) 이 책을 보고, 함께 얘기하자고. 자신에 대해, 서로에 대해.(이 제안 뒤에 남편은 잠깐의 독후감을 얘기했는데, 자신에 대한 고백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그에게 감동했는데, 내가 잠깐, 스치듯이 얘기한, 내 친구와의 수다 사이에 등장했던 얘기를 그가 도서관에서 찾아볼 만큼 진지하게 들었었다는 것에 무엇보다도. 그리고 자신과 솔직한 마주보기를 한 그 용기.)

 

오오... (그렇다, 우리 사이는 그냥저냥은 아주 좋다.)

 

 

나는 약속대로 그 책을 들춰본다.

(남편은 도서관 책을 반납하고 교보에서 직접 책을 샀다.)

 

 

 

 

나는 지금껏 남자들이, 그들의 엄마에게 고이고이 대접받고 숭배받으며 자라서 성인이 되어도 엄마 앞의 유아로부터 성장하지 못 하여, 그들 앞에 있는 여성이라면 다 엄마노릇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짐작을 하였다.

마누라가 바로 엄마의 연장인 것이다.

 

그런데 또 이런 생각도 든다.

그들 중 어떤 개인은, 어느 개인이 그러하듯, 자신의 부모로부터 충만한 사랑을 받지 못하여, 유아기 때 받아야할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여, 유아기 욕구의 충분한 충족을 하지 못한 어느 개인이 그러하듯, 성인이 되어도 그것을, 왜곡된 채, 갈망하는 것이다.

 

 

그럼 남자는 사랑을 받아도 어린애, 못 받아도 어린애????

 

 

남자는, 부모 중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역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내가 부모 중 엄마가 보여주었던 역할을 점점 고스란히 닮아가고 있는 것처럼.

그러면  또 뻔하다.

우리 세대 아버지 중 얼마나 가족 중의 아버지, 부부 중의 남편이란 역할을 잘 해냈겠는가.

더구나 왜곡된 관계가 이데올로기로 강요되던 시대였다.

 

남자들의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의 부부(나 뿐 아니라 인류전체) 관계가 나쁜 것은 온당하다.

(뭐, 새삼... 예전부터 짐작한 것.)

 

남자들의 과거를 생각하니 지금의 부부관계가 나쁜 것이 온당한 것 처럼, 지금 남자아이들의 모습을 둘러보니 미래의 부부관계도 온당 나쁠 것이다. 100% 확실하다.

 

여전히 남자들의 퇴근은 자정을 넘나들고(아버지와 남편은 여전히 부재중), 부부관계는 가부장적 어린애 식이다(부부관계 좋아보이는 사람의 비결은, (백에 아흔아홉) 큰 아들 치고 다 받아주라는....).(큰 아들 치라니, 남자들이여, 너무 모욕적이지 않은가.. )

 

 

나는 다시.... 규민에게 도저히 결혼을 권하지는 못 하겠다. 허락할 수도 없겠다. (엄마의 허락과 관계없이 결혼은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래, 해라, 하고나서 나더러 왜 허락했냐고 항의하지 말고.)

 

그래서, 규민이가 서른이 되기 전(설마 스물은 아니겠지) 나의 숙제;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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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영화, <메종 드 히미코>/<엘리자베스타운>

어찌어찌하여 나는 또 감기로 절절 누워있음.

학기 중도 아닌데, 방학 한가운데, 이 무슨 챙피스런 일. 나의 체력은 정말 바닥?

오늘 할 일은 죄다 취소하고 하루종일 뒹굴겠음, 결심.

그동안 컴퓨터를 붙잡고 일을 많이 해서인지(방학에는 행정잡무에 시달림) 왼쪽눈이 시리고 아파 오늘 하루 전자파에서 좀 벗어나보자,중얼중얼하면서 비디오가게에 갔다?

그런데, 나, 정말 늙었나보다.

영화 본지 삼천만년만이라, 죄다 안 본 영화들 투성이인데, 그 많은 새로운 영화들 말고 옛날에 내가 좋아했던 영화들이 다시 보고싶어지는 것이다. 자꾸 그 쪽에 손이 가려는 것을 자제하며 고른 영화는 (한 편도 아니고 두 편)......

 

 

 

<엘리자베스 타운 Elizabeth town>

백인남녀가 나오는 것은 이제 정말 손이 안 가는구나, 하는 순간, 눈에 띄었음.

 

 

 

그러나 눈에 띄었다고 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카메론 크로우 어쩌구 하는 이름이 뒷통수에 걸리면서.. 이 사람이 누구더라, 누구더라,  누구더라, 누구더라.... 느끼한 그 남자는 러셀 크로우인데... 비디오 껍데기를 구석구석 살펴보니, <올모스트 훼이모스>의 감독이었었다고.그렇다, <올모스트 훼이모스> 이것은 내가 좋아했던 영화, 이 영화에서 페니 레인을 보고 케이트 허드슨을 좋아하게되었지. 록 밴드 '스틸워터' 콘서트를 좇아다니며 '롤링스톤즈'잡지에 기사를 쓰게된 고등학생 이야기. 70년대 음악이 좍 나오고. 재미있었다, 그 영화.

 

그래서 이 영화까지 빌리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케이트 허드슨은 아니지만, 비슷한 커스틴 던스트다. 원래 <올모스트 훼이모스>에서도 커스틴 던스트가 페니 레인 역을 하기로 했었는데, 얘가 싫다는 바람에 케이트 허드슨에게로 돌아갔던 거였단다. 덕분에 케이트 허드슨만 땡잡았지.

 

카메론 크로우가 어디가나, 이 영화도 초반부부터 옛날 음악 좍 깔리며  시작.

그런데 너무 미국스럽다. 그 수다하며, 표정하며, 설정하며... 이런 게 눈에 걸려서 영화를 잘 못 보겠다. 커스틴 던스트와 남자주인공 올란도 블룸(얘 이름은 어쨰 올란도 일까, 나는 자꾸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가 생각나 머리 속에 딴생각이 떠오름)은 비행기에서 만나 헤어지고는, 전화데이트를 하는데, 전화기를 붙잡고 정말 밤을 샌다. 저런 미친 짓. 나는 스물초반에도 저런 짓은 안 했다. 밤에 잠 안 자고 할 짓이 없어서 전화기를 붙잡고 밤을 새냐. (아, 싸우느라고 전화기 붙잡고 새벽까지 있었던 적은 있었나보다.)

 

올란도 블룸의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바람에 장례식을 치루게 되는데, 엄마 역으로 수잔 새런든이 나온다.  장례식장에서 남편을 기리는 한 말씀 하는데.. 나는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데서 눈물이....

....이러이러해서 당신 없는 세상은 너무 달라요, 당신이 없으니까 나는 벼라별 경험을 하게 되죠... 당신, 좋은 남편이었어요, 보고싶어요. 곧 만나요, 안녕....  뭐, 이런 대사... '아, 남편 죽은 다음에 저런 대사를 하면서 남편을 그리워할 수 있다면 좋겠다' , 이런 류의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주루룩 흘렸던 것 같다... 으...

 

그리고 장례식장에는 레너드 스키너드의 '후리 버드'가 나온다. '후리 버드'는 <올모스트 훼이모스>안에서도 참으로 사랑스러운 장면에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도 꽤나 독특하게 의미심장한 장면에 나온다. 카메론 크로우가 디게 좋아하나보다.

 

 

 

 커스틴 던스트와 올랜도 블룸은 키스를 자제해 가며, 우리가 이런 것을 자제할 수 있다니 정말 훌륭하지 않냐, 우린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라며 저렇게 따로따로 앉아 일출만 볼 때는 언제고, 곧 사랑해,하고 엉겨붙는다. 영화에서 선남선녀가 나오면 다 커플이 되는 양식을 깨보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까리하다가 결국 뻔하게 흐른다.  앞에 전화씬에서 벌써 이 뻔한 커플링은 예고된 편. 그래도 이제는 영화에서 선남선녀가 무조건적으로 맺어진다는 피하려고 하는 분위기인가보다. 잘 된 일이다. 하지만 헐리웃에서는 어쩔 수 없이 뻔할 뻔자 일 것이다.

 

그리고 본 영화는 <메종 드 히미코>

이거 <조제, 물고기...>감독이 만든 거라고 해서 일찌감치 보고싶었던 거라, 당장 비디오껍데기를 빼들었으나, 표지에 너무 잘생긴 남자배우가 주인공으로 떡 나와서 망설였다. 저런 식의 잘 생긴 얼굴은 영화 보는 데 방해되기 때문이다.

 

 

<조제, 물고기..>에서도 그러더니, 감독이 예쁜 남자를 너무 좋아하는 것 아냐?!

오다기리 죠라고 하는데,

 

 

헉, 숨 막혀. 이러니 어떻게 영화를 잘 볼 수가 있나. (허리하고 엉덩이 선은 또 어떻고..)

특히 마지막 장면의, '뽀뽀해도 돼?'하는 데부터, 뒤로 돌려 두 번 더 봤음. 오다기리 죠 보려고.

'뽀뽀해도 돼?'부분이랑, 여자주인공을 이끌어 안으로 들어가는 부분이랑 표정 예술임.

머리 속에 확 박아놓고 싶어. 그 표정.

 

 

그나저나, 남자 얘기가 아니라, 영화 얘기를 하자면, 아... 저런 집, 나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내내...  은퇴한 (남성)게이들의 공동체, 메종 드 히미코. 워낙에 이곳이 아름다워서 별다른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런 공동체라면, 나도 남성게이가 되어 들어가면 안될까....

 

영화를 보다보니, 잘생긴 남자가 저 역을 맡을 수 밖에 없었겠다는 생각.

저 남자는 그러니까, 여자주인공의 아버지의 애인 역인데, 아버지는 오래전에 게이선언을 하고 아내와 자식을 떠났었다. 그러니 여자주인공은 아버지를 생리적으로 미워할 밖에.. 아버지 애인이란 작자는 도저히 눈에 들어올 수도 없는 인물이다. 그러니 둘이 잠깐 눈이 맞으려면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여야 했을 것이란 생각. 저 잘생긴 얼굴에 자꾸자꾸 눈이 가고, 자꾸자꾸 마음이 끌리도록.

영화에 선남선녀가 나오면 둘은 결국 커플이 되는 법칙. 이것이 게이영화에서는 예외가 되나했더니, 여전히다. 역시 이성애는 막강이데올로기?? 둘이 살짝 눈이 맞을 기미가 보이기 훨씬 전부터 나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 남자랑 저 여자랑 키스 한 번 하지않고 영화가 끝나는 것은 뭔가 아깝다?라는 느낌을 나도 모르게 갖고있었다. 게이영화를 보면서, 게이인 남자를 보면서 그 남자가 잘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여자와 자꾸 로맨스를 엮어주려는 심정은 이성애자인 나를 위한 심리적 작동이겠지? 저런 남자가 아무리 게이라지만, 그래도 여자랑 한 번 쯤은 키스를 해주어야 ............ 이성애자인 나의 가능성을 열어놓으려... ......

 

영화도 끝까지 나의 이런 심리를 '안돼'라고 못 한다.

마지막에, 오다기리 죠(저 잘생긴 남자)와 여주인공이 지금껏 관계를 청산하며 버스정류장까지 걷는 장면.

남자는 여자가 회사 사장이랑 잤다는 얘기를 회사 사장한테 들었다고 여자한테 말한다.

(배경설명 좀더 하자면, 그 회사 사장이랑 오다기리 죠가 사업건으로 만날 예정이었는데, 그때 한 번 잘 수 있을까,하고 오다기리 죠가 기대했던 적이 있었음)

그러면서 하는 말, "좀 부러웠어."

"네가 부러웠다는 게 아니고, 너의 회사 사장이..."

 

흠... 그러니까 나도 이성애자가 되어 너랑 자고 싶다는 말씀?

(둘은 살짝 눈이 맞아 시도를 했다가 오다기리 죠가 할 수 없다고 멈춰버린 적이 있었음)

 

생각해보니, 나도 레즈비언이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이 생각이 드니, 오다기리 죠의 저 대사는 굳이 쌍심지에 불을 켜며 듣지 않아도 될 말인듯..

그냥 부럽다는 거지, 뭐. 너랑 섹스를 한 남자가. 나도 너랑 자고 싶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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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 그것이 사랑

규민이 지금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을 조만간 그만두게 되어, 당분간 인기 인사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밥 한 번 같이 먹자고 대기 중. (회사든 뭐든 그만 둘 때도 이런 적은 없었지. 정작 내가 당사자일 때는 어정쩡한 관계, 어정쩡한 끝맺음인데, 애가 당사자가 되니까 쌍방 친한 척 하기 편하다. 서운해, 아쉬워, 가지마, 가기 싫어, 보고싶어 어떡해.....가 쏟아진다. )  그거 한 바퀴 돌자치니 수첩에 스케줄이 빡빡하다.

그래서 서둘러 스타트를 끊었다. 엊그제 토요일, 엄마둘이 백세주를 놓고 마주 앉았다.

 

 

하여 진탕 벌어진 수다 판.

애엄마들의 수다는 일단 무궁무진 이어진다는 특성.

각자 뒷통수에 무얼 담고 있는지를 까끌까끌하게 느끼지 않아도 통 크게 돌아간다는 특성.

 

역시 애가 중심이 되어주어 그런가보다.

나를 중심으로 얘기했을 때는..... 어디 그랬나.... 대화는 뚝뚝 끊기기 일쑤였어.

그래도 내 뒷통수에 무얼 담고 있는지 들키지 않아서  뚝뚝 끊기는 대화가 더 좋았다. 아니, 대화를 아예 갖지 않았지.

 

그 엄마와 나는 서로 애 키운 역사를 일단 꿰었다.

그리고 애 키우기 일반론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이런 애, 저런 애, 이런 케이스, 저런 케이스를 얘기하다보니, 어느덧 상통하는 진리가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feeling secure,  사랑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모두 벼라별 어려움을 겪는다.

식사습관, 간식습관, 배변습관, 관계맺기,언어,학습,사회성,....  모두 걱정 한가지씩은 다 하고 있다.

 

 

아이가 이런 어려움을 갖고 있을 때...

 

음... 이것은 말과 글이 다르다.

윗 글을 다시 보면,

'아이가 이런 어려움을 갖고 있을 때'...

평이하고 평이한 문장이다.

그 어떤 뒷말, 부연이 따르지 않는, 따를 필요가 없는.

 

그런데, 현실에서는 막상 그런 문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린이집에서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아이를 말 할 때,

보통은,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 하는 아이...' 혹은 '사회 적응이 안되는 아이', '예민한 아이'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아이가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 하는 문제를 갖고 있는 경우'라거나,

'아이가 사회적응의 문제를 갖고 있는 경우'라고 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문제를 보지 않고, 아이를 본다.

아이의 문제를 보지않고, 문제아를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른들은 문제를 고쳐보려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고쳐보려고 한다.

 

어린이집에 얼마전까지 논쟁의 중심이었던 한 남자아이(만 네살)가 있었다.

걜 두고 뒷얘기도 많았고, 앞얘기도 많았었는데, 어른들은 한참 쿵덕쿵덕 어쩌구 저쩌구 뒷얘기 앞얘기 하는 동안,  아이는 어느새 의젓이가 되어있었다.

매일 자정을 넘겨 퇴근하고, 주말이면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낚시와 축구를 다녔던 아빠가 변한 것이었다.

때로는 동화책 아홉권을 읽어주었다고 했다.

(동화책 읽기가 얼마나 힘든 노동인지 아시는 분은 안다. 세 권만 읽어도 지친다.)

 

사실 부모가 변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부모는 변하지 않으면서 아이에게 변하라고 하는 일......

 

아이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병에 걸리면 낫게한다고 잘 자라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잘 자라지 못 하면 어려움을 겪고, 그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것저것 문제거리다.

아이가 잘 자라려면 바로 사랑을 먹고 살아야하는 것이다.

자신이 듬뿍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feeling secure.

(요즘에는 애를 오냐오냐 키워서 버릇없다는 식의 평이 많지만, 그것은 죄다 사랑이 아닌 듯.

돈으로 대신 때우거나(나도 그런거 가끔하는데, 늦게 퇴근한 날이 많은 주말에 장난감 하나를 큰 거 사준다든지, 몸이 피곤한 날에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여놓는다든지...), 컨디션 좋은 날 무지 잘 받아주었다가 컨디션 나쁜 날엔 내가 짜증을 낸다든가, 식의 왔다갔다...)

 

이것이 바로 성장의 베이스라는 생각.

이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그야말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 한 경우, 문제는 어른이 되어도 계속 드러난다. 나의 경우가 그럴테고, 당신의 경우가 그럴 것이다.

 

아이를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

따뜻하게 성장의 베이스를 깔아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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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민 어록 4

남편이 들려준 이야기.

 

어제 저녁은 남편이 어린이집에 애를 데릴러 갔다.

아침에는 나와 함께 갔는데, 그 때 장난감 공 하나를 가지고 가서 규민이 개인 바구니에 넣어두었음. 원래 그 어린이집은 개인 장난감 가져오기를 금하는 규칙이 있는데, 아이들이 이 규칙을 잘 이해하고 잘 따르고 있다.

 

저녁에 만난 규민과 남편,

남편 ; "자, 이제 파카 입고 집에 가자."

규민 ; 미적미적.. 무언가 미련..

남편 : "왜애?"

규민 : "여기서 말 할 수 없어."

남편 : "괜찮아, 여기 아무도 없잖아. 너랑 나랑 둘 밖에 없어. 말 해도 돼."

규민 ; "그럼 귓속말로."  아빠 귓가에 얼굴과 손을 가져가다가 말고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더니 혼자 고민하는 표정, 이어 혼잣말; " 말 해도 되나?"하고는 쓱 웃음.

남편 ; 이 심각한 고민 의식을 치르는 규민의 표정을 혼자 즐거이 바라보고는, "무슨 일인데?

          말하기  어려우면 말 안 해도 돼."

규민 ; 마침내 결심, 귓속말로, 최대한 속삭이며, "자앙,나안,가암"

    

 

오, 이 진솔하고 진지한 동심의 시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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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민 어록 3

"엄마, 담배를 피면 폐에 안 조오치?"

"엉." (얘가 이런 소린 어디서 들었을까. 담배에 대한 어린 아이의 관심은 대단하기도 하다.

금단의 것에 대한 호기심은 본능인가.)

"폐는 가슴 속에 있는 스펀지 같은 거야. 근데 담배를 피우면 거기에 나쁜 공기가 들어가서 안 좋아."

"그렇구나. 와, 규민이 잘 아네. 규민이는 그런 거를 어떻게 알았어?"

"응, 그냥 책 보고 알았어."(어린이집에 그런 책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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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의 관계가꾸기 프로젝트

새해 우선 프로젝트로 관계가꾸기를 만장일치 택함

 

규칙 1. 논리에 맞고 그름 보다 상대의 감정 배려를 우선한다.

규칙 2. 논의의 진행 중에도 언제든지 감정이 상하면, "타임"을 외치고, "나 좀 기분 상한것 같아." 고백한다.

규칙 3. 위의 경우, 무조건 논의를 중단하고, 그 사람의 감정 회복에 집중한다.

규칙 4. 내 머리 속에 나의 논리 보다 상대가 들어올 여유를 먼저 확보한다.

 

어때? 훌륭하지?

결혼 9년차(꺄악)의 부부 관계, 더 이상 위험하다는 진단으로, 2007년은 관계가꾸기 해로 잡았음.

일단 여기까지 만장일치 합의했다는 데 뿌듯뿌듯하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너무 쪽팔리지 않으면 가끔 보고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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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is matter of timing

이라 붙여놓은 유영의 글이 가슴 절절하다.

 

글의 내용은 사실 가슴 절절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담담, 평안, 소탈인데, 

그 제목을 달기까지, 사랑을 가지고 뒤흔들고 흔들리고 잡아채고 채이며 내달렸던 그녀의 연애사가 만져지면서, 새삼..... 오래된 기억에 가슴이 절절하다.

 

 

그런데, 나는 그렇다,  유영의 기억에는 가슴이 절절한데, 정작 내 과거사에는 그닥 가슴 절절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는 나의 나름대로 정리가 있다;  "모든 연애는 자기애더라,"라고......

 

결국 내가 한 사랑은 내 그릇 안에서 물튀기기 정도 밖에 되지 못했다는,  내 그릇이 작고 넉넉하지 못하다는 사적 고백이겠지만, 씨실날실 한 올 한 올이 어떻게 끼워졌는지 그 내막을 알고 있는 내 연애사에 관한 한, 아무튼 그것은...... 후에 되돌아봤을 때 가슴 절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이런 생각 와중에, 나는 아래의 글을 만났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에 있는 글이라는데, 아직 그 책을 읽지는 못함(빌려주기로 한 사람 잊지않고 빌려주기 바람 ).

 

 

가부장제 사회가 작동할 수 있는 근본적인 구조 중의 하나는, 남성이 여성의 친밀성 능력과 감정 노동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남자 ―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의 저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많은 여성들이 남자와 연애할 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남자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자신 속에 내재된 풍부한 감성과 사랑의 능력을, 상대 남자의 매력으로 오인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성과 사랑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여성이 한다. 여성이 노동을 그만두는 순간, 대부분의 관계도 끝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배려, 보살핌, 사랑의 생산을 위해 별다른 노동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별 분업인데, 남성들은 주로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사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가족이나 연애 관계에서 관계성을 경시 혹은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육체 노동, 감정 노동, 정신 노동에 무임승차한다. 관계에서 남성의 '과묵함'이나 모든 면에서 감정적이지 않으려는 심리는 이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연애를 하고 있는, 혹은 연애를 하였다는 여자들/남자들에게서 당신이 사랑한 것은 정말 무엇이(었)냐고 묻고 싶었다.  <클로져>에서 내가 나딸리 포트만에게 가장 많은 박수를 보냈던 것은,  그녀만이 인간 연애의 한계인 '자기애'를 벗어난,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인간이고 그녀는 사랑을 가르쳐주려온 천사라고 묘사하였었지.)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후에 생각해 볼수록 그녀 역시 '자기애'를 한 것이었다. 다만 그녀는 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에 대해. 자신에 대해. 

결코 그녀가 한 것이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은 무엇일까.

'올 유 니드 이즈 러브'라고 했던 존은 사랑을 알고 죽었을까.

'쉬 게이브 미 모어, 쉬 게이브 미 올.... 알러뷰'라고 했던 폴은 분명 사랑을 모르는 게 틀림없다.

 

 

사랑은, 슈타이너(라고 발도르프 교육을 처음 만든 인지학자이다.....)가 제시한 문장에 의하면, 인류의 다음 진화해야할 방향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지금껏 사랑이라하는 것이 건네주는 느낌으로는 참으로 믿지 못할 하나마나한 허접한 소리인 것이다. 그러나 어디 사랑이란 게 그런 것인가. 인류의 진화 운운.....이 그런 것인가.

 

나는 슈타이너 종교를 막 영접한 상태로 슈타이너가 한 말이라면 일단 감동부터 먹고 보는 상황이라, 그의 이 말로 인해 (이 말은, 역시 굉장히 감동적이었던 닷새짜리 강의 중에 나왔던 한 문장으로서, 그 강의 전체가 무지하게 감동적이어서 강의 전체에 대한 리뷰를 해야 그나마 이 문장으로 전달받은 내 감동의 깊이를 전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사랑'을 생각하고 있다. 요즘.

 

인류가 다음 진화해야할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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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버드(William Byrd)

우리집에 저 사람의 씨디가 생기게 된 것은 어언 칠팔년전 일로, 어떻게 우리집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경위는 기억나지 않지만, 原주인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지금 그 육신은 독일에 묶여 철학인지 무언지를 공부하고 있고 그 영혼은 대기층 어딘가를 떠돌며 방황을 하고 있는 정*원씨이다.

 

그가 이 씨디를 어찌어찌하여 우리집에 흘러들어오게한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이 씨디를 주인에게 무척 돌려주고 싶어하며(나에게 전혀 상관없는 물건인데다, 물건은 주인을 찾아주어야한다는 양심에 따라) 그의 육신이 한국으로 돌아와 만나게 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부산에서 연수를 받는 동안 이런 일이 일어났다.

 

얼마전에 떠들은 바 있는 그 '멋진 남자'로 부터 음악수업을 받았는데, 그 음악 수업은 이론과 합창이었다. 나는 이제껏 귓등으로 장조니 단조니 5도 화음이니 하는 단어를 들어봤긴 봐서 산수계산을 하듯 어쩌구저쩌구 따져 객관식 음악시험의 답 맞추기용으로는 써먹을 수 있었지만,  정말 그것이 음악으로서 어떤 것인지 도통 외계인 세상의 것으로만 느껴왔었는데,  이번에 생전 처음으로 음을 느끼고, 음과 음 화음을 느끼고, 장조와 단조를 느껴본 것이었다.

 

그것은 음악에의 첫 개안인 것이었다.

 

그러면서 덩달아  합창시간에 부른 노래들 또한 나에게 처음으로 노래를 하는 느낌을 주면서, 그 때 불렀던 각종 화음과 장조와 단조의 노래들을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하곤 하였는데, 그 중에서 유럽 중세시대의 라틴어 노래 하나를 유독 자주 흥얼흥얼하였다.

 

그 곡의 작곡가는 윌리엄 버드였다. 버드라고 발음되는지 어떤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BYRD라는 그 철자를 보고 왠지 낯이 익다, 싶었다.

돌아와서 무언가 짚히는 게 있어 씨디를 찾아보니, 그랬다, 칠팔년전에 우연히 우리집에 안착한 그 씨디가 윌리엄 버드의 씨디였던 것이 맞았다.

이 씨디와 나의 인연은 그리하여 칠팔년이란 세월이 쌓인 후에나 정식으로 맺어진 것이다.

돌아오자마자 씨디플레이어에 올린 이 사람의 곡들은 칠팔년 간의 서먹함이 새봄에 눈처럼 녹아 사라지고 예전부터 아주 친했던 것 같이 군다.

 

나는 이제 정*원씨를 만나도 씨디를 돌려줄 생각이 없다. 싹 입을 씻을 작정이다. 이 씨디의 새주인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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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퀴즈

HelterSkelter님의 [비틀즈 새 앨범 "HATE" 공개???] 에 관련된 글.

 

비틀즈 리믹스

http://www.thebeatleshate.com/index_eng.html

여기에서 들을 수 있음.

 

'굳 모닝'의 닭 울음과 의미심장한 (항상 이 가사는 무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줄리아'의 'Half of what i say is meaningless'로 시작.

 

계속 듣고 있자니, 미닝리스하다.

미닝리스한 리믹스 짓을 하면서, 들어봤자 의미없어,하고 앞대가리에서 고백하는 듯한.

의미없는 짓거리지만 근질근질했던 손을 움직이며 낄낄 재미있어했었을 디제이들의 노고에 박수를...

 

그 디제이들은 그렇게 재미를 찾았고, 그리고 우리는,

<인트로/ 레볼루션23>은, <굳모닝>, <줄리아>,<헬터스케터>,<레볼루션9>...또 뭐가 있었더라....  조각맞추기를 하는 것은...  몇날며칠 술자리를 이어주었던 비틀즈 퀴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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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남자

지금 부산에 와있습니다.

부산에 와서 열흘간 수업을 받고 있는 생활을 지금 세번째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멋진 남자를 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사실 남자가 거의 없습니다.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성비가 얼마나 불균형한지 알겠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거의 없는 가운데에도 멋진 남자가 하나 있으니 나쁘지는 않군요. 남자가 바글바글한데 죄다 쓸다리 없어보이는 것 보다 백 배 나은 일입니다.

 

이 남자, 처음 보는 순간부터 눈을 반짝 하게 했습니다.

 

엄마는 미국인이고, 아빠는 덴마크인이랍니다.

백인남자인 것입니다. 제가 이 얘길 빠뜨렸군요. 한국남자가 아닙니다.

큰 덩치에 중절모를 쓰고 있는데, 그 모자를 벗으면 더벅머리가 나옵니다.

꼭 드루 베리무어처럼 코 아래에서 입술을 움직입니다. 모았다가 열고 다시 모아서 살짝 비틀고 앙징맞은 혀로 살짝살짝 물었다 놓는 입술. 눈을 떼굴떼굴 굴리며 헤헤 웃었다가 하하 웃었다가 하는 표정 때문에 도대체가 몇 살 쯤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소개를 하면서 영화 <아마데우스>가 자기한테 음악을 하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는데, 그 영화를 스무살에 봤다는 겁니다. 음악을 하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는 영화가 비디오로 본 영화일 것 같지는 않고, 극장에서 개봉작을 봤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대충 마흔살이 넘었을 거란 계산이.... (<아마데우스> 개봉했던 때가 대충 이십 여 년 전 맞지?)

 

음악 운운했는데, 맞습니다. 그 남자는 음악을 하는 남자입니다.

원래 영국에서 살고 있는데 부산에 온 이유는 부산에 수업 받으러 간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음악 수업을 해주기 위해섭니다. 지금 저의 음악선생님인 것입니다.

 

그의 첫 수업에서, 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음악을 알게된 것 같았답니다.

 

그의 수업이 어떠하였는지 여기에 글로 옮기는 것은 하지않겠습니다.

아무리 자판을 뒤집어 이리저리 조합하여 찍어봐도 그의 음악 수업을 묘사하기에 적절하지 못하군요. 몇 줄 적어가다가 죄다 지웠습니다.

 

 

음악 수업이란 그렇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교 다니며 내가 받았던 그 숱한 저주받을 음악수업들이여.

 

그 남자는 마흔두살이랍니다. 우리 나이로 마흔세살이겠습니다.

처음에, 스물아홉이라고 대답했는데, 진짜인 줄 알았습니다.

헤헤 웃으며 마흔둘이라는데, 이게 농담이고 아까 답이 진짜 같았습니다.

청년 같은 이 남자, 그런데 벌써 아이가 셋이랍니다. 큰 아이는 벌써 열다섯이랍니다.

 

 

아이가 잘 때 오음계 음악을 연주해주고, 아이가 넘어져 무릎이 깨지면 천상으로 올라가는 듯한 화음(4도 화음이었나....)을 노래해준다는 (오늘 수업이 화음에 대한 이론이었는데, 그러면서 나온 이야기) 이 남자.

 

어떤 남자가 멋있어보이는 것이 참으로 오래간만이라, 오래도록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즐겁게. 나의 눈을 오랜만에 이토록 즐겁게 해주는 그에게 감사하면서.

서른후반으로 가는 나이에 남자가 멋있게 느껴지는 느낌은 참으로 오래간만이면서 참으로 감사할 일이더군요. 이 남자랑 뭐 어떻게 해보고싶다는 욕망의 느낌이 아니라, 그 상대에게 감사한 느낌.

 

멋있음의 감상, 남자가 멋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 인간이 멋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 인생이 멋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런 것들을 받아서 고맙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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