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토가 읽은 소설'에 해당되는 글 43건

  1. 시칠리아의 암소 2007/01/23
  2. 질식 2007/01/18
  3. 탈근대군주론 (3) 2007/01/05
  4. 조금 지쳐서... (1) 2007/01/03
  5. 활기 2007/01/03
  6. 옹알이 2007/01/03
  7. 긍정 (2) 2007/01/03
  8. 글쓰기 2007/01/03
  9. 죽음과 그녀와 나 (7) 2006/12/27
  10. 오해 (3) 2006/12/26

시칠리아의 암소

from 책에 대해 2007/01/23 15:41

그 문학은 사드, 아르토, 루셀, 초현실주의, 카프카, 바타이유, 블랑쇼로 이어지는 체험의 자리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육제적 죽음과 언어의 죽음을 동시에 맛본다. 그는 죽어가고 있다. 남아있는 것은 글쓰기의 모험뿐이다.

p 151

 

자기 소모적인 글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네르발은 계속 글을 썼으나 완성된 작품을 남기지 못했으며, 그것이 그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p 152

 

사유하는 주체 대신 사유의 사유를 대상으로 삼으면, 진/위와 관계 없는 사유, 통일성이 없는 사유, 그러면서도 사유라는 점에서는 통일성이 있는 사유가 살아남을 수 있다. 그 사유라는 주제 체계 속에서는 누가 말하든 관계없다(베케트), 혹은 무엇을 말하든 관계없다. 사유란 "모든 체계 내에서 그것을 벗어나는 움직임" 자체이다. ............그 사유야말로 자신의 본질을 찾아 ?g황하는 시대의 문학, 자신의 본모습을 찾기 위해 항상 다시 시작하는 시대의 문학이라는 블랑쇼적 문학, 아니 문학적 체험의 본질 그 자체이다................................. 문학도 "글쓰는 주체로서 자신에게 말을 하여, 자신을 태어나게 한 움직임 속에서 온갖 문학의 본질을 다시 파악하려 애쓰는" 문학만이 그의 주의를 끌며, 철학도 "무한한 지평 위에 놓인 끝없는 작업"으로서의 철학만이 그의 주의를 끈다. 자신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는 사유야말로 모든 전도. 전복의 기본 원리이다.

 

체계에서의 벗어남은 지배적 규칙, 법칙에서의 벗어남이며, 그런 의미에서 지배적 권력에서의 벗어남이다. 사유의 사유는 체계에서의 벗어남이며, 권력에서의 벗어남이다. 그것은 역으로 모든 사유는 체계에 의해 권력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뜻한다.

 

 

 

 

권력이 담론을 조정하는 것은, 그것이 권력을 행사할 위험을 제거하고 그것 때문에 뜻하지 아니한 사건들이 생기는 것을 막고, 그것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권력이 담론을 규제하는 절차는 대개 세 부류로 나뉠 수 있다.........세번째 부류는 말을 하는 주체에 대한 제한이다. 담론의 보존, 생산, 분배의 법칙을 고수하는 담화회(한국의 예를 들자면, 판소리 전수회), 말하는 주체를 예속시키고 그들을 모아 집단을 이루게 하는 주의, 주장(계속 한국의 예를 들자면, 운동권의 주의, 주장), 교육 등이 그 예들이다.

 

p154~155

 

 

 

"오늘날의 글쓰기는 표현의 주제를 뛰어넘었다." 그것은 내용에 따라서라기보다는 시니피앙의 본질에 따라 놓여진 기호의 놀이이다. 그것은 언어의 한계를 자꾸 위반하고 넘으려 한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행위의 과시가 아니라, 저자 대신에 시니피앙들이 솟아오르는 공간의 획득이다. 저자는 사라져가고 기호들의 놀이는 심해진다. 그러니 글쓰기는 당연히 저자의 죽음과 연결된다.

 

 

그런데 현대에서 작가의 삶은 작품 속에 들어가 불멸성의 근거가 되는 대신, 작품을 쓰면서 희생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글쓰기에는 개인성이 제외되고, 개인은 노동하다 죽는 누군가가 된다.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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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 15:41 2007/01/23 15:41

질식

from 책에 대해 2007/01/18 18:49

팔루악 팔라닉의 '질식'이라는 책을 읽었다.

팔루악 팔라닉은 내가 좋아하는 '파이트 클럽'이라는 영화의 원작을 쓴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그의 책을 처음 읽어보았다.

 

최근에, 내가 읽는 책들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그의 책 속에서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읽는다.

그러다보면 조금은 초라해지고 초라해지는 부분이 조금이라 절망하고 뭐 그런 식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읽는 책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던 적은 많지 않았다.

언제나, 내가 읽는 책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내가 나만의 것으로, 나혼자만의 힘으로 생각해내야할 새로운 것들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번역하는 분들에게는 안된 말이지만,

번역자의 글은 책을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독을 유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능하면 읽지 않는데,

이 책에서는 그 글이 아주 짧아서 실수로 한 눈에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밥오갯호.

 

조금은 실망해버렸다.

그가 그 책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가 따위는 모르는 것이 훨씬 낫다.

어째서 책과 현실을 연결시키려고 하는 걸까?

 

조금은 아쉬웠다. 그 조금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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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8 18:49 2007/01/18 18:49

탈근대군주론

from 책에 대해 2007/01/05 17:37

신기섭 기자님과 인연이 있어,

그분이 번역하신 <탈근대군주론>을 지금으로부터 꼭 1년하고 이틀전에 선물받았다.

워낙에 책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책선물, 게다가 역자의 선물이라니,

정말 기쁘기 그지 없었다.

 

책받은 자의 예의로, 감사의 덧글한번 남겼을 법도 한데,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한번도 인사를 드리지 않았다.

이 자리를 빌어 꾸벅~ (쉽게 넘어가려는...못보실지도 모르는데...)

 

흠...어떻게 말을 시작해야할까.

탈근대군주론, 이 책은 굉장하다.

 

우선은 어렵다.

거의 두페이지에 한명씩(혹은 더많이) 새로운 이론가와 실천의 예제들이 등장한다.

그 이름들에 익숙하지 않다면 아마도 책을 펼치는 순간 압도당할 가능성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쓴 저자보다도, 번역한 분께 정말 굉장하다는 평을 하고 싶다.

번역에 있어 인용문이야 말로 난감의 절정이 아닐까?

인용된 책들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채로는 번역을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울테니

인용된 책이나 사건들에 대해 느꼈을 역자의 부담이 내게도 전달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재밌다.

나는 이 책을 이론서라기보다는 소설책같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등장인물이 굉장히 많은 소설이랄까.

중간중간 거부감이 생겼던 부분도 있었지만, 꾹참고 읽으면 저자의 의도가 명확해진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 내가 머릿속에 그린 그림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거대하고 즐거운 연대체' 이다.

사람들이 하나하나 눈에 보인다.

그들은 고통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고

고통받지 않기 위해 연대하므로 서로를 지배하거나 서로에게 폭력적이지 않게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

그 거대한 연대체를 만들어가는데 필요한 건 그것이 필요하다는 믿음과 가능하다는 확신.

그런 믿음과 확신의 근거를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이렇게 한 줄로 줄여놓으면 뻔하고 진부해보이는 문장일 뿐이지만

책을 읽으면 더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좀 더 쉽게 쓸 수는 없을까 아쉽다.

이런 책을 읽으면 굉장히 재미있기는 하지만, 조금은 죄책감이 느껴지게 된다.

 

고등학교만 나온 내 동생이나(아, 동생, 미안, 지금은 전문대생이다),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개토가 한때 하던 멋진 것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우리 엄마,

아는척 하고 싶어하시고 나때문에 (말없이)민노당에 투표하시곤

민노당이 제일 낫지? 하시는  우리 아빠가(나름 비밀투표하신다)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사회주의 서적이 나왔으면 좋겠다. 

있는데 내가 모르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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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5 17:37 2007/01/05 17:37

조금 지쳐서...

from 책에 대해 2007/01/03 16:49

하나의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한없이 다른 불안들을 무릅쓰기까지 하려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루이 알튀세,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첫 페이지 마지막 문장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삶에서 단지 하나의 인위적 존재였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며, 또 내가 그들을 유혹함으로써 사랑하고자 했고 또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받고자 한 사람들, 그들로부터 차용한 인위적 수단과 사기라는 우회적 방법을 통해서만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죽은 자였다.

그리하여 나는 사실 자신의 근육을 움직이고 사용하는 데 의식적으로 능숙할 뿐만 아니라, 특히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 즉 내가 그들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그 사람들을 유혹하고 조종하는 데 능숙한 한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러한 조작된 사랑을 통해 그들로부터 내 존재에 대한 확인을 기대했던 것이다. 내가 시도한 유혹이 실패했을 때에만 내 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그 막연한 불안 속에서 내가 끊임없이 그리고 끔찍하게 회의를 품게 되는 그러한 존재에 대한 확인을.

 

루이 알튀세,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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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6:49 2007/01/03 16:49

활기

from 책에 대해 2007/01/03 12:46

내가 만약 즐거움에 따라 텍스트를 평가하기로 한다면, 이 책은 좋고 저 책은 나쁘다라는 말은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수상자 목록도 <비평>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평은 항상 전략적인 목적, 사회적인 효용성, 또 대개는 상상적인 포장만을 연루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텍스트가 이것은 지나치고 저것은 충분치 않다는 식의, 그런 규범적인 술어의 유희에 가담할 만큼 완벽해질 수 있다고는 측정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텍스트(이것은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는 내게 있어 전혀 형용사적인 것이 아닌 바로 이거야! 혹은 내게는 바로 이거야! 라는 판단만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게는>이라는 말은, 주관적인 것도 실존적인 것도 아닌 니체적인 것이다(...[결국 그것은 항상 똑같은 질문이다. 이 내게는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

 

텍스트의 활기는(그것 없이는 요컨대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을), 그 즐김에의 의지일 것이다.

텍스트가 요구를 초과하고, 옹알이를 극복하며, 이데올로기와 상상계가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언어의 문들인 형용사들의 사슬을 쳐부수고 넘쳐흐르는 바로 거기에서.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 '활기' 중(볼딕은 저자)

 

 

 

누구나 뭔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할 때, 그렇게 말한다. 내게는 이라고.

보르헤스는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S.D에게 헌정하며,

 

.... 나는 여하튼 잃고 있지 않은 내 자신의 핵 - 언어로 다루어질 수 없고, 꿈과 교환될 수 없고,

그리고 시간과, 환희와, 불행에 범접당하지 않은 가슴 깊은 곳 - 을 그녀에게 바친다.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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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2:46 2007/01/03 12:46

옹알이

from 책에 대해 2007/01/03 12:37

그러므로 모든 작가는 이렇게 말하리라. 미치광이는 될 수 없으며, 감히 건강하다고 말하지는 못하며, 그래서 신경증에 걸린 것이라고.

당신이 쓰고 있는 텍스트는 그것이 나를 욕망하고 잇다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 증거는 존재한다. 그것은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언어즐김의 학문이며, 그것의 카마수트라이다(이 학문에는 다만 글쓰기라는 개론서만이 존재한다).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 '옹알이'  중

 

 

 

 

바르트의 글 속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새롭게 자극하여,

나는 그의 글쓰기를 통해 아주 천천히 오르가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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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2:37 2007/01/03 12:37

긍정

from 책에 대해 2007/01/03 12:29

텍스트의 즐거움

 

내 삶의 유일한 열정은 공포였다 - 홉스

 

긍정(Affirmation)

텍스트의 즐거움, 그것은 베이컨의 가상장치처럼 결코 변명하지 않으며, 결코 설명하지 않는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선을 돌릴 것이다. 이것이 이제부터는 내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맨 첫페이지(볼딕은 저자에 의한 것)

 

 

 

 

훗, 웃음이 나왔다. 97년에 샀던 이 책에,

며칠전 내가 이를 앙다물고 썼던 문장이 그대로 들어있다.

 

정치적이거나, 문학적이거나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 나는 문학적 시선을 견지하는 수밖에.

 

진보블로그에서의 내 정체성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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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2:29 2007/01/03 12:29

글쓰기

from 책에 대해 2007/01/03 12:14

글쓰기란 반대로 언어행위를 넘어서 뿌리내리고 있다. 글쓰기는 하나의 선(line)이 아니라 씨앗처럼 전개되는 것이다. 글쓰기는 본질을 나타내며, 몰래 위협받고 있다. 글쓰기는 반(anti) 의사소통적이며 내성적이다. ...... 글쓰기 안에는 언어행위에 낯선 '상황'이 있다. 글쓰기에는 이미 더 이상 언어행위의 시선이 아닌 의도의 시선이 있다. 이 시선은 물론 언어행위에 대한 하나의 열정일 수 있다. 문학적 글쓰기에서처럼 말이다. 이시선은 또한 처벌의 위협일 수도 있다. 정치적 글쓰기에서처럼 말이다.....

 

바르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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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2:14 2007/01/03 12:14

죽음과 그녀와 나

from 책에 대해 2006/12/27 01:18

카와구치씨는 정말 멋지구나...하고 후기를 읽으면서 생각한다.

 

예전에,

새벽에 술먹고

길거리에서 늘어놓고 파는 만화책들 틈에서

우연히 발견해가지고 지갑을 탈탈 털어 샀던 [죽음과 그녀와 나]

 

있는 돈 다 털었더니 16권쯤 살 수 있어서

죽음과 그녀와 나 10권이랑 같이 6권의 다른 책도 구입해서,

16권을 들고 낑낑대며 히죽거리며 완전 취해서 집에 들어왔더랬다.

 

쿡쿡...6권은 집에 있던 책이었다지...그나마 완결도 되지 않은...

 

이런 느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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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7 01:18 2006/12/27 01:18

오해

from 책에 대해 2006/12/26 22:09

부르디외에 대해서 오해가 있는 것 같아,

결국 그렇게 써버린 내가 문제라서...

그게 계속 걸린다.

 

 

"즉 패러디, 광대극, 희화처럼 대상을 깎아 내리거나, 혹은 속어에서처럼 질을 저하시키는

전략으로 승화의 전략에 대응하고,

지배집단이 그들의 숭고성을 투사하고 인식하는 모든 '가치관'을

뒤죽박죽 뒤섞어 놓으려고 외설과 분뇨담을 사용하면서,

민중의 상상력은 차이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구별짓기를 비웃으며

카니발의 놀이처럼 타자와의 구별을 낳는 영혼의 쾌락을,

누구에게나 공통된 식욕과 성욕의 만족으로 환원시킨다."

 

-구별짓기 중에서 -

 

 

본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읽었다.

정말로 개인적인 반성이었다.

 

한 바퀴를 빙 돌아서 기껏...

 

이렇게 말이 꼬이고 안나올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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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6 22:09 2006/12/26 2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