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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46호> KEC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KEC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파업 256일, 직장폐쇄 243일, 지부장 분신 120일.... KEC 투쟁 상황일지는 매일 이렇게 시작된다.

 

작년 10월 21일 210명의 조합원들이 공장 울타리를 뚫고 1공장 점거농성에 들어가던 날, 밖에 남겨진 조합원들의 마음은 두 가지였다. “제발 다치지만 마라.” “이번엔 끝내자.”

 

갓 스물의 여성노동자 삼총사도 공장안 점거농성에 합류했다. 이들은 공장 입사 3개월, 조합원이 된지 사흘만인 6월 9일 파업에 참가했다. 같은 부서 언니들이 다 참가하는 파업이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동조합 조합원이 됐지만 사실 노동조합이 뭔지, 파업이 뭔지 알지 못했다.

 

반면 KEC 자본은 2010년이 노조무력화의 중대한 해가 될 거란 계산을 이미 끝낸 상태였다. 1월 1일 기습적으로 날치기 통과된 ‘노조법’ 즉, 타임오프와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는 노조무력화를 통한 구조조정의 달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자본에게 비빌 언덕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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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중의소리)

 

치밀하고 치명적인 자본의 공격

 

KEC 투쟁은 지회가 예감하고 준비했던 수준을 뛰어넘는 투쟁이었다. 88년 노조설립 이후 22년간 비교적 원만한 노사관계를 지속해왔던 KEC에서 용역깡패 투입과 직장폐쇄, 철저하게 계산된 교섭거부로 세팅된 노조파괴 프로그램이 작동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2010년 벽두부터 경주 발레오만도에서 자행되었던 노조파괴 공작이 이미 힘을 얻은 상태였다. 23년간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는, 연대투쟁의 모범이라 일컫는 금속노조 경주지부 최대 지회인 발레오만도가 그렇게 허무하게 금속노조의 깃발을 빼앗기게 되리라고 예상치 못했으나 자본의 공격은 치밀하고 치명적이었다.

 

KEC지회 조합원들은 파업이 일주일이면 싸움이 끝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파업 초기부터 회사의 대응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고, 6월 말이 다가오면서 이런 공격은 지회의 파업을 불법으로 몰아가려는 저들의 의도된 행위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회사는 평화적 합법파업이 진행 중인 동안 단 한 번도 교섭을 요청하지 않았다. 도리어 “불법파업에 법과 원칙으로 대응하겠다”며 노골적으로 강공을 예고했다. 직장폐쇄 직전에는 전 조합원에게 면담을 실시하고 “즉각 업무복귀, 거부할 경우 징계, 손배, 용역투입”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또한 임단협 전에 실시한 조합원 실태조사를 활용해 고향에 있는 가족들 앞으로 협박편지를 발송했다. “불법파업으로 공장이 망하게 생겼다. 이에 참가할 경우 징계와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며 가족까지 위협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흔들리지 않았고, 회사는 마침내 6월 29일 밤 450명이 넘는 용역들 투입했다. 6월 30일 밤 0시 40분 경 KEC 사내 여성기숙사에 남녀용역이 투입되었고 조합원들이 잠든 기숙사는 한밤 중 침입자들이 자행한 욕설과 폭력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신희 사측 교섭대표는 그 시각 같은 자리에서 이를 목격하고 있었다.

 

자본은 늘 예상을 뛰어넘는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려 한다. 그러나 KEC지회 조합원들은 오히려 분노가 폭발했다. 기숙사에서 쫓겨난 여성조합원들과 집에서 쉬고 있던 조합원들은 새벽 2시 공장 정문 앞으로 집결했다. 이미 새까맣게 깔린 용역들이 정문을 가로막고 있었고 저들은 소화기를 난사했다. 

 

조합원의 분노는 식지 않았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파업 250여일을 넘겼지만 조합원들의 분노는 식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토록 ‘가족같기’를 강요하던 회사가 짐승만도 못한 전쟁을 벌이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 더 치를 떨었다. 그리고 자본은 코오롱이던 KEC던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주노조를 지키겠다는, 권리가 있는 노동자로 일터로 돌아가겠다는 KEC 동지들의 투쟁은 그렇게 한여름을 지나면서 익어갔다.

 

그러나 자본도 한 치 흔들림이 없었다. 파업 120여일이 지나도록 용역들의 일상적 감시와 폭력, 회사의 철저한 교섭거부로 어떤 해결점도 보이지 않았다. 지회는 결단해야 했다. 합법적이고 평화적 투쟁으로 더 버티며 갈 것인지, 임시직과 2교대 근무로 생산을 가동하고 있는 공장을 세워 전면전을 벌일 것인지 고민했다. 추석이 다가오면서 회사는 마지막 업무복귀명령이라며 대오를 다시 흔들기 시작했고, 조합원들은 업무에 복귀하는 이들이 나올 때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제발 더는 흔들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10월 국정감사가 있었지만 경총을 위시한 자본가집단과 한나라당은 곽정소 회장의 국정감사 증인 채택을 거부했다. 지회는 여의도에서 단식으로 이를 압박했지만 저들의 연대는 공고했다. 지회는 조합원들과 함께 10월 총력투쟁을 선포하고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해서 현장으로 들어가자고 결의했다. 결국 그 총력투쟁은 공장점거투쟁으로 나타났고, 이 과정에서 이신희는 교섭을 미끼로 경찰과 짜고 지부장을 유인했고, 이에 저항하던 지부장은 몸에 불을 붙였다. 넉 달 동안 구미공단 안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던 KEC 투쟁은 전국투쟁의 최대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전국노동자들의 투쟁을 호소했고 야 5당도 공동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구미로 내려왔다. 그러나 이명박정권은 노동자가 죽어나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총은 “분신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며 자본이 벌이는 살육전에서 밀리지 말 것을 KEC사측에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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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일 구미지부장이 입원한 한강성심병원을 찾아온 이소선어머니 (사진=매일노동뉴스)

 

분신으로 얻은 교섭, 그러나...

 

공장점거가 이어지던 14일간은 말 그대로 피가 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어떤 음식물도 반입되지 못했고 점거 중인 조합원들은 배고픔과 추위, 공포와 싸워야 했다. 11월 3일 처음으로 회사가 앞으로 교섭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210명의 노동자가 공장을 점거하고 한 노동자가 분신을 한 끝에 자본은 겨우 교섭의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점거 후 조합원들은 “도대체 어떻게 싸워야 하나?”를 두고 지쳐갔다. 그보다 더 절박한 것은 생계의 어려움이었다. 죽어도 이대로 회사를 용서할 수 없는데, 가족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한다. 먹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징계해고 40명, 정직 등 115명, 숱한 고소고발 사건과 손배가압류 협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KEC지회 조합원들은 안다. 이 잔인한 전쟁의 끝은 우리 투쟁에 달렸다는 것을. 끝질긴 자가 승리한다는 것을. 부도덕한 저들을 이대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정권과 자본의 노조무력화 투쟁의 전국적 대리전인 KEC 투쟁에 민주노조의 미래가 달렸다는 것을.

 

그래서 조합원들은 모진 겨울을 견디며 승리의 날을 다시 준비하고 있다. 구속된 동지들과 무엇보다 몸을 던져 동지를 지키려했던 지부장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자본에 굴할 수가 없다. KEC 동지의 투쟁을 응원하는 것은 민주노조 조합원들의 임무다.●

 

- 배태선 (민주노총 구미지부 사무국장)

 

(2011년 3월 3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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