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만만하게 봤다 큰 코 다치다, 해 넘어 겨우 당도한 곳 위태(2012년 7월 27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준비는 많이 했다. 배낭도 새로 사고 등산화도 사고. 한 짝이 있었지만 스틱도 하나 더 주문하고, 혹시나 몰라 손전등까지 함께 주문했으니. 둘레길 전제 지도는 물론이고, 구간별 지도도 일일이 프린트하고. 것도 모자라 바우길을 걸으면서 유용하게 쓴 GPS를 가져가기 위해 둘레길 트랙까지 구했으니. 휴가철과 겹치는 것 같아 두 번, 세 번 확인하며 일주일치  예약까지 한 민박은 출발 열흘 전에 마쳤고. 이만하면 다 준비됐다, 싶었다. 그리고.....
 
 
 
 
 
 
 
 
 
 
 
 
 
 
 
 
 
어제 기차에서만도 꼬박 8시간이 넘게 걸려서 온 하동읍에서. 내일부터 고생 많이 할 터이니 오늘부터 힘 빼지 마라며, 터미널에서부터 손수 차로 민박집까지 데리고 와주신 주인아저씨. 반찬이 너무 많이 남아 죄송한 마음까지 들게 진수성찬을 차려주신 주인 아주머니. 언제와도 푸근함으로 맞아주는 지리산만큼이나 푸근한 인심에 탁, 그만 마음을 놓았던 건 아니었나, 싶었다. 하지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던 삼화실 게스트하우스를 지나자마자 시작된 가파른 오르막길. 며칠을 고민고민하다 반대로 걷는 게 햇볕을 덜 받겠다 싶었는데, 이거 웬걸. 아스팔트길이 끝나고 산길로 접어들었는데도 계속 얼굴로 비치는 해. 겨우 8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바람 한 점 없는 푹푹 찌는 날씨. 땀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모기떼들까지. 겨우겨우 첫 고개, 느닷없이 나는 오줌냄새에 오줌을 지릴 만치 높아 오줌고개라 부르고 싶은 존티고개를 넘어가는데. 이거 만만치가 않겠다, 걱정이 이만저만이다.
 
 
 
 
 
 
 
 
 
 
 
 
 
 
 
 
고개를 넘어 만난 첫 마을, 상존티마을 정자에서 잠시 땀을 훔치고. 관점마을을 지나서는 작은 고개를 또 넘기도 했지만, 이제 해도 등 뒤로 넘어가고 길도 평탄한 하니 걷기가 한결 수월하다. 또 멀리서 봐도 범상치 않다, 싶은 화월마을 당산 벚나무 아래에선 달게 쪽잠도 자고. 때 맞춰 밥도 먹었지만.
 
두 번이나 바꿔가며 가져간 돗자리가 햇빛을 고스란히 반사시키는 바람에. 하동호 아래 축구장 나무그늘에서 두 시간 넘게 쉬는 동안 통구이가 되다, 이거 안 되겠다 싶어 길을 나섰는데. 제일 더운 때 하동댐을 기어오르는 셈이니. 둘레길 휴게소에 도착하니 더위 먹는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이 난다. 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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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시간 넘게 그늘에서 쉬다 길을 나섰지만. 다시 만난 고개 초입에서 거의 무더위에 실신하다시피. 가니 되돌아가니 실랑이를 하다 겨우 출발. 지나는 길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대나무 숲과 계곡물이 번갈아 나오며 몸을 호사롭게 하지만. 연신 흐르는 땀 때문에 머리와 목에 물을 퍼부어도 역부족. 더구나 엎친 데 덮친 격. 궁항마을을 지나면서 지기 시작한 해가 오율마을에 이르니 어둑어둑, GPS는 전원이 나가고. 겨우겨우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몸은 천근만근, 민박집은 통 보이질 않는다. 분명 아까 전화했을 때 40분이면 된다고 했는데.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난다. 
 

겨우 포장길에 내려서니 저만치서 자동차 불빛이 보이는데,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발이 후들후들하다. 다행히 든든한 정돌이가 앞장을 서고, 도착한 민박집에서 찬 물에 씻고 밥을 먹으니 쪼매 살 것 같다. 허나 아저씨 얘기론 오늘 밤 달이 지고나면 별빛이 쏟아질 거라는데. 만만하게 봤다 큰 코 다치고. 겨우 해 넘어 당도한 곳, 위태에서 혼절하듯 잠에 빠지고 만다. 내일 예약했던 마을 체험관이 빵꾸가 나 일정을 바꿔야 하는데도..... 아무래도 많이 준비한 거는 죄다 자잘한 것들이고, 정작 준비해야 할 것은 하지 못한 듯. 튼튼한 몸, 일주일 내리 산을 타야 한다는 각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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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0 13:59 2012/09/10 13:59
1.
숨이 턱 막히더군요. 원체 수학을 싫어해 문과를 선택했던 터라. 그래도 전공이 경제학이니 수학이 전혀 없진 않겠지, 생각했는데. 1학년 첫 전공과목 수업부터 수요, 공급 곡선을 미적분으로 그려내더니. 2학년이 되자 과목 자체가 아예 경제수학에 경제통계더군요. 게다가 전공 교수들은 부전공으로 계량경제니 경제통계 같은 것들을 해놔서인지. 아, 정말 숨이 턱턱 막히더라구요. 평생 안 보고 넘어갈 줄 알았던 정석 2-2를 펼쳐놓고 확률, 통계에 4×4 행렬까지 하려니.
 
하지만 그것까진 어느 정도 참을만했습니다. 안 되는 머리지만 어찌어찌 수학공부(?)는 따라 갈만 했는데. 헌데 그 전공 교수들 말입니다. 나중에 들어온 한 사람 빼곤 모조리 미국물을 먹어서인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끽해야 케인즈학파 언저리 정도가 한 명, 나머진 죄다 고전경제학들을 전공 했더군요. 이러니 교과과정은 싹 다 주류경제학으로만 채워졌고, 언감생심 정치경제학 혹은 맑스주의 경제학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나마 기대했던 한 과목, 경제사마저 그 나중에 들어온. 식민지근대화론을 얘기하는 사람이 강의를 차지하고 들어왔으니. 컥.
 
그러던 어느 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2학년 1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지요. 몇 명의 선배들과 동기들이 강의실에 모였더랬습니다. 돌이켜보면 거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창립취지문도 대자보로 여기저기 붙이고, 회원도 미리 받고 했으니 조촐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열 댓 명이 모여 소위 주류경제학이 판치는 학과 분위기를 쇄신하고 대안 경제학을 학과에, 학내에 보급하자며, ‘정치경제학연구학회’ 발족식을 했습니다. 아름아름 맑스주의를 공부하던 선배들이 몇 있긴 했지만 이끌어주는 교수 한 명 없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비주류경제학을 공부해보자며 나선 것이었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2. 
숨이 턱 막히더군요. 두꺼운 책 두께도 그렇거니와. 한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그 많은 ‘사건’들-하지만 이도 웬만한 역사학자가 아니구서야 어찌 다 알 수 있을까요-에 대한 깊고 풍부한 이해. 그리고 그것에 바탕을 둔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물론 이 때문에 단숨에 책을 읽어 내려가기가 쉽진 않지만-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더라구요.
 
하지만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혁명’에 관한 새로운 발견, 비주류에서도 다시 비주류적 해석으로 나아가는 사고의 전환, ‘자유의지’로 뭉친 민중에 대한 믿음을 올곧게 느낄 수 있는데 이르러서는. 기억으론 다 담나내기 조차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다시 천천히 음미해야겠다는 생각이 슬쩍 고개를 내밉니다. 한마디로 두 번, 세 번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이지요.
 
3.
첫 1년은 처참했습니다. 그나마 있었던 선배들은 졸업 학년이 되면서 활동 폭이 좁아졌고,  회원은 절반 이상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리고 후배들은 통 학회에 관심을 두질 않았지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처음 학회를 제안했던 선배들 가운데 그래도 끝까지 해보자며 두 명의 선배가 나섰습니다. 그리고 동기들 가운데 광주에서 올라온 늦깎이 형을 중심으로 학생회 일을 맡고 있던 몇 명이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리고 곧 주 1회 세미나와 월 1회 토론회를 시작했습니다. 요란하게 말잔치만 하지 말고 내실을 기하자는 의미였지요.
 
그 해 여름, 후배들과 함께 지리산엘 올랐습니다. 천왕봉 아래 장터목산장에 두 동의 텐트를 치고는 대접에 소주를 가득 부어 마시며 학회 정회원 승격식도 하고. 다음 날은 광주 망월동에도 갔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지리산도 그렇고, 망월동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차편도 변변치 않아 꽤나 긴 길을 걸어야 했지만. 지리산 자락을 걷는 동안에도 묘역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내내 모두들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천왕봉에 올라 굽이굽이 피어린 산자락들을 굽어보며. 또 구묘역에 늘어선 묘비 하나, 하나, 한 글자, 한 글자 가슴에 새기는 내내. 눈물을 흘리지 않은 회원들은 한 명도 없었더랬습니다.
 
하지만, 그 눈물들은 그리 오래 흐리지 않았습니다. 계엄군에 갇힌 광주의 민중들은 죽음을 앞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기어이 ‘자율공동체’를 만들어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래 이내 눈물은 환희와 용솟음, ‘격정’으로 바뀌었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지리산 산행과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는 ‘정경연’ 정회원이 되는 통과의례가 됐지요. 물론 15년도 넘게 지난 지금도 후배들은 여전히 지리산엘 또 광주엘 가고 있구요. 아픈 역사 속에서 건져낸 ‘격정’이 여전히 주류경제학만을 유일경제학으로 치부하는 학풍 속에서도 꿋꿋이 학회를 이끌어 오고 있는 힘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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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6 01:14 2010/11/26 01:14

둘째 날, 촉동마을에서 오도재를 넘어 함양까지(2006년 4월 30일)

 

<함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30분 넘게 쉬어갔던 간판도 없는 조그만 가게 앞 평상>

 

8시가 조금 안된 시간에 출발했는데도 벌써 등 뒤가 따가울 정도로 햇살이 장난 아니다. 산장에서 조금 위쪽으로 오르니 당초 하루 머무르려고 했던 촉동마을이고, 왼편 산 아래쪽으로 사진으로만 보았던 아원농원도 보인다. 사람이 살기 가장 좋은 곳이 해발 600에서 700미터라고 하는데 이 마을이 바로 그렇다. 언제고 다시 들렀으면 하는 마을이다.

 

오도재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있다고 하는 지리산조망공원까지 가는 길은 다시 걷기 싫을 마음이 생길 정도다. 가파른 길도 길이거니와 4월의 햇빛 같지 않은 따가운 햇살 때문에 연신 땀이 흐른다. 당연히 발걸음이 더딜 수밖에. 100 걸음 오르고 쉬고 또 100 걸음 오르고 쉬기를 반복한다.

 

산장 아주머니 말씀으로는 산책 삼아 30분이면 충분히 오른다고 했는데, 족히 한 시간은 걸어서야 ‘오도재휴게소’에 도착했다. 날씨가 흐려 또렷하게는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 천왕봉에서 시작해서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이 보인다. 그리고 발아래로는 계단식 논이며 밭이 이어져 있다.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인데 이곳까지 오면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바람까지 마중 나오니 몸도 한결 가뿐해진다.

 

쉴 때는 몰랐는데 다시 걸으려고 하니 뱃속이 요란하다. 건너 띈 아침 대신 뭐라도 요기를 해야겠는데, 휴게소 문이 굳게 잠겨 있다. 가게 안을 살펴보니 불은 켜져 있고 음악소리마저 흘러나오고 있다. 잠시 다른 일을 보러 가셨나? 좀 기다려볼까?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지만 사람은커녕 차 한 대 지나지 않는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그대로 출발해야 하는지. 결국 큰 소리로 사람을 불러본다.

 

“사람 없어요. 배고파 쓰러져요”

 

한참을 그리 떠들고 나니 휴게소 2층 창문이 빼꼼이 열리며 아저씨 한 분이 우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체면이고 뭐고 없다.

 

“아저씨. 문 좀 열어주세요”

 

  

 

덕분에 이제까지 맛보았던 그 어떤 라면보다도 맛난 라면을 먹을 수는 있었지만 우리가 그리 떠드는 통에 ‘얼마나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이 놀랬을까?’하니 마음 한 구석이 편치만은 않다. 엊그제 노고단에서도 산에서는 아무리 조그만 소리라도 자연에게는 폭풍우 치는 소리와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배고픔에 그새 잊어버린 것이니, 너무 한심하다.

 

그래도 겉표지에 박정희가 죽었다는 글이 큼지막하게 쓰인 ‘썬데이서울’에, 옛 물건들을 장식 삼아 오도산방이라는 찻집까지 함께 운영하는 오도재휴게소는, 꼭 한번 들러 찬밥이라며 내어주기 어려워하시는 주인 내외의 넉넉함을 느껴야 할 곳이니 빠뜨리지 말자. 다만 주인장이 보이지 않거들랑 조용히 2층 창문으로 돌맹이 하나만 던지도록 하면 될 듯하다.

 

오도재 정상에서 함양으로 이어지는 24번 국도까지의 길은 반대편에서 걸어 왔더라면 십중팔구 포기했을 거다. 그만큼 오르막길도 길게 이어져있고 경사도 가파르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변변한 가게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거야 원. 단단히 준비하지 않고서는 정말 난감한 길이다. 그래도 내려오는 길 이쪽저쪽, 외설적이라고만 알려져 있으나 실은 봉건질서 속의 지배계급과 민중들의 삶을 풍자한 ‘변강쇠가’의 변강쇠와 옹녀를 상품화한 여러 가지 볼거리가 있어 지루하지만은 않다.

 

가까운 백장암 계곡에는 변강쇠와 옹녀가 놀았다고 전해지는 옹녀탕과 변강쇠가 기력을 보충했다는 득독골 등을 찾아 볼 수 있고, 변강쇠를 응징하기 위해 모인 8도의 장승들을 재현한 ‘변강쇠 쌈지공원’도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고 걷고 있는 이 길 주변에는 변강쇠 집터와 무덤자리도 있으니 참 재미나다. 마지막으로 마천의 벽송사는 팔도의 장승들로부터 응징을 받아 죽게 된다는, ‘변강쇠가’의 내용과는 다른 이유에서지만 머리 부분이 반쯤 타 있는 여장승이 있어 묘한 분위기를 풍기니 이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구불구불 참 재미난 길이다. 지안재 고갯길>

촉동마을에서 시작해 사진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찾아왔을 지안재 고갯길을 꾸불꾸불 돌아 내려오니 길은 24번 국도로 이어지는데 어째 슈퍼하나 보이지가 않다. 재를 넘으며 참았던 갈증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조금만 가면 함양이겠거니 ‘참자’ 하며 걸으니 정말 고갯길 돌아 함양 읍내가 눈에 들어온다. 때마침 간판도 달지 않았지만 평상 하나만은 커다란 동네 구멍가게가 눈에 들어오니 쉬어가기에 딱이다.

 

이젠 평상만 보면 신발 끈부터 풀고 올라선다. 그리고 누가 보든 말든 대자로 누워 눈을 감고 10분이고 20분이고 쉬는 게 몸에 배었다. 그렇게 30분을 넘게 평상에 누워 바람에 날리는 봄 향기를 맡다, 시원한 물 한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서울행 시외버스 출발시간이 다가온다. 서둘러 길을 나서는데 몸과 마음 모두 가볍기만 하다.

 

* 여덟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뱀사골에서 산내까지는 861번 지방도로, 산내에서 실상사를 지나 오도재로 오르는 길 입구까지는 60번 지방도로, 오도재 가는 길은 1023번 지방도로, 다시 함양으로 가는 길은 24번 국도다. 거리로는 약 30Km다. 첫째 날은 약 6시간, 둘째 날은 8시간 정도 걸었다.

    

* 가고, 오고

지리산 뱀사골은 남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시내버스와 시외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물론 시내버스는 시외버스보다 가격은 저렴하나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들쭉날쭉하니 시외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서울에서 남원은 기차 편도 그렇고 고속버스도 그렇고 쉽게 이동할 수 있으며, 함양에서 서울은 거창을 경유해 남부터미널까지 운행하는 고속버스가 하루 10차례 운행하고, 동서울터미널까지 운행하는 고속버스는 7차례 운행한다. 다행히 밤 10시 이후에도 심야고속이 있으니 안심이다.

 

* 잠잘 곳

산내를 제외하고는 오도재 정상 아래 촉동마을까지는 민박은 전혀 없고 간간이 음식점만 보인다. 촉동마을에는 우리가 머물려고 했던 ‘아원농원’과 머물렀던 ‘물레방아산장’이 있다. 다만 ‘아원농원’에서 하루 쉬어가고자 한다면 미리 연락을 취해야 할 것이다. 촉동마을에서 함양까지는 오도재 정상 지나 계곡에 민박과 음식점이 몇 있으나 그 이외에는 함양 초입까지 변변한 슈퍼하나 없으니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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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6 11:34 2009/06/26 11:34

첫째 날, 뱀사골에서 오도재 아래 촉동마을까지(2006년 4월 29일)

 

남원에서 출발한 뱀사골 행 시외버스는 지리산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을 거침없이 질주한다. 가만히 보니 오늘 오후 내내 걸어야 할 길이 채 30분도 걸리지 않는 것 같다.

 

뱀사골에서 산내까지는 지리산의 장대한 산세를, 그러면서도 푸근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길이다. 큰 산 만큼이나 큰 계곡, 큰 나무들이 있어 걷기 좋은데, 때마침 입산금지기간이라 인적마저 드물다.

 

<정말 소박하고 아담하다: 실상사 경내> 

 

산사라고 하지만 절 뒤로 보이는 지리산 자락이 아니라면 산사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너른 들판에 자리잡고 있는 실상사는 여느 절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찌보면 아무렇겠나 버려 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절간 풍경도 그렇고,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특별하게 경계 삼지 않은 것도 그렇고, 여느 절의 일주문과는 다른 일주문이 보여주고 있듯이 공동체적 귀농의 중심에 있는 것도 그렇고, 절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불거진 눈이며, 뭉툭한 코, 투툼한 입을 갖고 있는 석장승 얼굴에서 우리네 민중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렇다.

                                                                                                                               

절 구경을 마치고 오도재를 향하는데, 인월에서 시작해 이곳 실상사를 지나 함양까지 이어진 이 길이 느림의 상상력을 쏟아내고 있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얼마 전 실상사 인근 마을주민들은 국도건설을 반대하는 나섰으니, 지역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땅을 무조건 파헤치는 방향으로 길을 내지 말자면서, 지금의 길을 조금만 폭을 넓혀 보행자와 자전거, 농기계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자고 했단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4차선의 길로 넓혀지거나, 산이 뚫리거나, 다리가 새로 놓이지 않고, 농군들을 위한 갓길만이 넓어지게 됐으니, 사방에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는 길을 내려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 큰 발걸음이다.

 

오도재로 오르는 길은 1023번 지방도로는 오가는 차도 없어 무척 한적한 길이다. 오른편으로는 뱀사골, 백무동, 칠선 등에서부터 흘러온 물들이 모여 제법 큰 계곡을 이루며 따라오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오랜만에 신발까지 벗고 물장난이다.

                                                                                                   

오도재로 향하는 길로 접어드니 그새 5시가 넘었다. 당초 오도재 정상아래 촉동마을에 자리잡은 ‘아원농원’에서 머물려고 했는데 그만 연락처를 가져오지 않아 어찌해야 할지. 더구나 농원 외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어 하루 머물다 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이것저것 물어볼 수라도 있으련만. 해가 떨어지기 전에 촉동마을까지 간다면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한참을 지도를 보며 어쩔까 하지만 답이 없다. 결국 밤길을 걷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출발이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해는 점점 짧아지고 길은 점점 가팔라 오는데 촉동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도 버스정류장이 있어 다음 마을이 촉동인 거는 알겠는데 당체 끝간데 없이 오르기만 하고 마을은 보이지 않는 거다. 씩씩대며 또 한참을 오르는데 인심 좋게 생기신 아저씨 한 분이 차를 멈춰 놓고는 우리를 불러 세운다.

 

“어디꺼정 가는고? 날이 지는디. 타소”

“죄송한데요. 저희는 걸어서 여행하는 중이거든요. 혹시 이 근처에 민박할 만한 곳이 어디 없나요?”

“걸어서 여글 넘는다꼬? 어허. 어째쓰까나. 어. 민박이라꼬? 일단 타소. 저 위에 올라가면 뭐가 있긴 있거든”

“예”

 

모르겠다. 일단 트럭에 오르고 본다. 헌데 이런. 코앞에 민박을 겸한 식당이 있는 거 아닌가? 다시 내릴 수밖에.

 

“아저씨 고맙습니다”

 

여기가 촉동마을인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나 인심 좋게 생기신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를 맞이한다.

 

“저 죄송한데요. 여기 아원농원이라고 혹시 아시나요?”

“아. 알죠. 우리 마을 사람인디. 거그 갈라고 허요? 거그는 어떻게 아셨지? 요그 길 따라 쭉 올라가믄 마을이거든요. 그 마을 위쪽에 아원농원이 있어요. 마을 들어가기 전 다리에서 왼쪽 길로 쭉 올라가면 되는디”

“예. 감사합니다”

 

어찌할까 잠시 고민이다. ‘방 값은 하루 밤 묵으시는 건 3만원이며 갖고 계신 어떤 물건으로도 숙박 값 지불 가능하며, 하루 4시간 품앗이에 하루 숙식제공 등 모든 수단도 환영입니다. 진보 활동을 하시는 분은 무료로 쉬어 가시길 바라며 제가 담은 술로 대접도 해드리고 싶습니다’라며 손길을 기다리는 아원농원에 하루 머물며 살아가는 이야기와 술맛을 볼까, 이것도 인연인데 여기 물레방아 산장에서 하루 머물까. 이미 해는 지고 있고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결국 나중 인연을 따르기로 한다. 다만 인심 좋은 아저씨 덕에 고갯길 100여 미터를 거꾸로 걸어 내려갔다 다시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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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4 00:08 2009/06/14 0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