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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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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verway
  • 등록일
    2007/10/31 20:39
  • 수정일
    2007/10/3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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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지하철에서 바닷속에 로보트를 그려넣은 초등학생의 그림을 보았다. 해양수산부가 주관한 그림대회에서 수상한 작품이라고.

어릴적,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말이 가장 어려웠던 기억이 새삼 되살아났다.

눈에 보이는 것도 다 잘 모르는데,

머릿속에 무엇을 그려보라는 것인지...

참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상상력"이라는 단어였다.

소공녀의 여주인공인 세에라가 자신의 처지를 마치 공주와도 같다고 상상하며 현실의 아픔을 이겨냈다는 이야기는 다소 유치하게 여겨지기도 했었지.

 

지하철 충무로역에서 내려 4호선으로 갈아타는 길은 거의 피난길을 방불케한다. 한 걸음이라도

올라가는 계단 가까이에 갈 수 있는 칸에는 사람이 미어터지고, 오르내리는 계단은 한사람만 삐끗해도

대형사고 이어질만큼 비장하다. 오늘 아침엔 한 젊은 여성이 막판까지 앉아서 책보다가 뒤늦게 나를 밀치고 내리려고 마구 힘을 쓰길래 나도 모르게 저절로 소리를 쳤다. "나도 내려요" 하고.

하루하루를 각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더욱 상상력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껴졌다.

한편, 상상력이라는 단어와

희망이라는 말이 겹쳐지면서

과연 어떤 희망을 갖고, 무엇을 희망하며 살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분명 희망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믿는 것. 그 믿음에 기대와

설렘이 담겨있는 것. 그것이 희망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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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생협과의 관계 회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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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verway
  • 등록일
    2007/10/30 09:48
  • 수정일
    2007/10/3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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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스럽게 의료생협에서 활동하는 간호사들을 만나야겠노라고 요청하고,

정작 만나러 가자니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진 않다.

느낌 그대로를,

판단 그대로를,

조심스럽게 건네야 하겠다.

 

누구도 잘 인정하려들지는 않겠지만,

나름 주인의식을 갖고 있는 탓에

짧은 경험을 가지고

나에게 의료생협을 설명, 아니 그 가치를 설득하려고 들면

속에서 화가 치민다. 공격성이 마구 솟아나는 이유가 무얼까 짚어보니

주인의식이다. 내꺼였다라는 생각, 그동안 내놓을만한 지속적인 공헌이 없었을뿐이지

심정적으로는 내꺼라는 생각이 확실한 탓이다.

 

이제, 다시 관계를 맺고 주인으로서 내 역할을 찾아보고자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주인이 될 수 있기는 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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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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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07/10/30 09:42
  • 수정일
    2007/10/3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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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랫만이다. 두달 남짓, 정신없이(?), 아니 가위에 눌린 듯 살았노라.

이제

살살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지면서

따스한 시선으로

차근차근히

다가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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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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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verway
  • 등록일
    2007/08/07 11:09
  • 수정일
    2007/08/0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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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잘 해 놓고, 집에서 거의 일주일을 지냈다.

소소한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가족과 친지를 초대하여 함께 식사도 하고,

책도 읽고 (나중에 기록으로 정리를 해두고 싶다),

영화도 한편 보았다.

 

충분히 휴식이 되었다 싶었는데...

이번 주 들어 해야 할 일이 밀려 있어

어제부터 긴장하고 덤벼들어서 그런지

오늘 아침

일어나는데 허리가 영 불편하다. 굽히기가 어렵고, 뻣뻣하고 가벼운 통증까지 있다.

 

누구마냥 침을 맞아야 할지,

쏟아지는 비를 뚫고, 거금 들여 출근하여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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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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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7/21 00:23
  • 수정일
    2007/07/21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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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없어질 때면 언제나 양가감정으로 갈등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삿짐을 싸고 내일이면 내집으로 옮겨가는데...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싶으면서 더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2005년 8월6일부터니까 근 2년이다. 문간방살이가.

감정을 잘 조절하면서 지냈던 언니도 만감이 교차하는 듯,

영 마음이 편하지 않다.

온전히 고맙고 좋기만 하지 못하고,

웬지 괜한 고생을 감수한 듯 다소 생색을 내고 싶은 치기도 생긴다.

......

 

내가 누군가를 먼저 배려하고, 내것을 나누고, 내 욕심을 줄였을 때

언제나

난 끝까지 그 여유를 지키지 못하는 것 같다. 힘들어지면 그만 도중에

언제 그랬냐는 듯, 빡빡해지고, 상대방의 부족함을 탓하고, 선의를 몰라준다고 섭섭해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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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었던...

교과서 개정작업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

정말로 내키지 않지만,

참여할 사람들을 모아 메일을 모두 보냈다.

신기하게도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답장에, 모임 일정도 한방에 결정이 났다.

새로운 팀웤,

아무쪼록 가르치는 이로써 부끄럼없는 결과물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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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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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07/07/10 14:26
  • 수정일
    2007/07/10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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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중 학교식당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몇몇 동료들과 이리저리 점심 먹을 곳을 골라 다녀야 하는데

오늘은 비가 주적주적 와서

칼국수 먹자고 나섰는데, 식당이 없어져 버렸다.

대신, 이태리 식당에서 스파게티로...

 

정말 공감없는 이런저런 남의 이야기와 자기 주장으로 두시간을 지내고 오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든다.

서로 싫어 하는 것은 분명아닌데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가질 수는 없다.

소통의 고리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일지 잘 모르겠다.

 

리더쉽이 필요한 것인지,

필요하다고 내가 나서야 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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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끝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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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verway
  • 등록일
    2007/06/27 10:18
  • 수정일
    2007/06/2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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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 성적처리, 교수연수 등등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연례행사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6월은 가고

다시 한 여름의 문턱에 들어섰다.

조카손녀 돌보는 할머니 노릇이 간간히 추가되면서

생활은 더욱 번잡하기만 한데,

아무래도

집 공사가 끝나고 이사를 해야 평안을 찾을 것 같다.

 

프로젝트의 끝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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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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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07/06/05 11:24
  • 수정일
    2007/06/0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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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원래 집으로 들어갈 일정이 잡혔다.

6월15일 이후 공사를 시작하면, 7월 초에는 들어가리라 기대하고...

다만, 대대적인 공사할 것을 생각하니 심란하다.

부른게 값이고,

꼼꼼히 따지자니 머리 아프고..

그래도 원칙은 정하자. 침실을 작은 방으로, 큰 방으로 책상과 책장을 두는 방으로, 부엌의 주방기기를

현대화하는 데에 비중을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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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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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07/05/18 13:15
  • 수정일
    2007/05/18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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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다이제스트라는 잡지에

내가 만난 가톨릭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청탁받아

보내고 나니

갑자기 내가

신앙인으로 세상에 커밍아웃한 느낌이 든다.

 

내가 만난 가톨릭

 



제가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았던 것은 제 나이 서른 넷이었던 1994년입니다. 대학에 입학했던 해 종교생활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때 교회를 소개했던 고등학교 동창의 인도로 기독교 신자로 살아왔던 나였기에 이른 바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던 것이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거의 10여년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 오지 못했으나 주일이면 집 근처 성당에 가서 미사를 참관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한주간의 잘못을 고백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성찬전례를 거쳐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성체를 받아모시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하는 미사의 전례를 통해 가톨릭 신앙의 형식과 절차를 엿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 졸업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했던 박사학위 과정을 마쳤을 때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가톨릭신자가 되겠다고 작정했던 것입니다. 당시, 3년만에 박사학위를 마칠만큼, 온 힘을 다해 나름대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학위를 마치고 나니 전임강사 자리를 얻지 못한 체 지내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팽팽했던 고무줄을 갑자기 놓았을 때의 그 충격과 공허함이 힘들어서 ‘삶의 근본’을 돌아보는 기회가 필요했었습니다. 그 후로 원하던 취직도 하고, 세상 일에 쫒겨 바쁘게 지내온 지 벌써 십여년이 넘었습니다. 마흔 중반을 넘긴 지금, 제게 있어 신앙은 어떤 의미인지 지나온 시간을 돌아봅니다.



Ⅰ. 아버지와의 올바른 관계


박사학위를 마쳤을 때 저는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지금 그 시절을 기억해보면 하루 종일 잠을 잤던 것 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가족들에 대해서도, 친구들에 대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가급적 안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매일 미사를 드리러 다녔습니다. 처음으로 평일 오전 미사 중에 우연히 장례미사를 참석해 보기도 하고, 수험생을 위한 가족미사에도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주일미사와 달리 평일 미사는 조용한 가운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분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요. 제게는 특히 가족관계에 대해 많이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가족 중에서도 지금은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6남매중 넷째 딸이기 때문에 아들을 원하셨던 부모님들에게는 그리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경상도분이신 아버지는 자녀를 돌보는 일은 모두 어머니에게 맡기신 아주 권위적인 분이셨는데,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더욱더 자식들에게 엄격해지셨습니다. 성장기의 저에게 아버지는 자식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것을 늘 강조하셨고, 실패나 부족함은 잘 용납하지 않으셨던 분이셨지요. 제 위의 언니, 오빠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종종 충돌하고 아버지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저는 그런 갈등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부 잘하고 모범적인 학생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좋은 대학을 나오고 박사학위도 따고, 유능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여 누가 보아도 잘 자라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시고 시골 고향으로 낙향하여 외롭게 지내시는 형편이 되셨더군요. 대학에 들어간 이후 저는 필요한 때에만 아버지를 만나뵙곤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어떤 어려움을 겪으시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고, 그래야 한다는 생각도 갖지 못했었습니다. 제가 말썽없이 잘 자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식된 도리를 다했다는 자만심에 차있었습니다.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 속을 썩였던 다른 형제들은 오히려 고향에 내려가신 아버지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염려를 참 많이 했는데, 저는 그만큼 애틋해 하지 못하고 무심히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사 중에 제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주기도문을 외울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느님을 부르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이지요. 그러면서, 제가 아버지라 부른 하느님에 대해서도 친아버지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태도가 그래도 반영이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 아버지 앞에서 항상 떳떳해야 했던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도 저는 늘 바르고 당당한 자세를 보이고자 애썼던 것이지요. 저의 약함과 부족함, 모순됨, 더러움 등등은 대로 내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저의 책임이었으니까요. 하느님은 제 아버지보다도 더 엄격하시고 강하신 분이기 때문에 한치의 잘못도 용납될 수 없으리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태도는 성경말씀과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더군요.  로마서 3장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신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제가 잘 나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본래 누구라도 올바른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제 잘못이나 부족함 등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의 부족함과 불완점함에도 불구하고 한없는 자비와 안타까움으로 저를 지켜보시는 하느님의 심정을 헤아려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저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내어놓을 수 있게 된 경험이었습니다.

이어서 제 아버지에 대해서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자식인 제 입장만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의 입장에 서보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애쓰며 살아내는 자식을 묵묵히 지켜 보시며 당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시고, 자식에게 끝내 당당하시지 못한 처지가 얼마나 견디기 힘드셨을까 싶더군요. 노후의 외로움도 말없이 참으시고 혼자 감당하고 계시겠구나 싶으면서 그 후로 제 마음이 아버지께로 많이 움직일 수가 되었습니다.


Ⅱ. 평화의 인사


제가 대학을 다녔던 시절은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대학생의 사명과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접했던 예수님은 억눌린 자를 해방하시기 위해 오셨고, 불의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저도 대학을 다니던 중 한 해를 휴학하고 공장에 들어가서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살아보겠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낮은 곳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겠다고 약속한 기독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그 생활은 6개월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우선은 몸이 너무 힘들었고, 그 힘든 생활을 이겨낼 수 있을만큼 제가 이념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었고, 우울한 날들이었습니다. 다시 복학을 하여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직장인으로서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던 중 87년 당시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어 함께 일하자는 동기들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하였습니다. 대학시절의 실패경험도 있었고, 서로 다른 역할을 통해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농성과 파업, 경찰서 연행 등 연일 어려움을 겪는 동기나 후배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제 안에 쌓이는 것은 죄책감이었습니다. 저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살고 있다는 부담감이 늘 저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성당에 가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 기도를 할 때마다 평범한 일상에 안주하여 살고 있는 제 자신이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사순시기동안 미사중 읽게 되는 복음말씀은 보다 결연한 결단과 실천을 제게 강요하는 듯 했습니다. 한 개인이 평안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그렇게 살 수 없는 다수의 민중들에게 죄를 짓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저를 힘들게 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힘들게 사순시기를 보냈던 그 해, 부활주일 이후에 부활을 하시고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너희들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고 말씀하셨다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고난과 십자가, 고통의 삶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주고 가신 것은 바로 ‘평화’라는 것입니다. 한번도 예수님의 삶을 생각할 때 떠올릴 수 없었던 단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매 미사 때마다 교우들끼리 평화를 빌어주는 인사를 나누었더군요. 매번 미사 때마다 나누던 평화의 인사가 그저 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싶고, 예수님을 믿는 삶은 평화를 누리는 삶 그 자체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제게 원하시는 것은 고통 속에서 안간힘을 쓰며  죄책감에 눌려 지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평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웠는지 모릅니다. 제 안에 평화를 누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상의 평화를 위해 책임을 질 수 있는지,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어떻게 세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질서에 맞설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Ⅲ.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3년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1년간 미국에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서로 바빠서 주말에나 함께 지냈던 남편과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다보니 결혼한 지 18년 만에 새로 갈등을 겪게 되더군요. 우선, 초기 정착을 앞두고 여러 가지 챙겨야 할 일이 많았기에 서로 예민해졌던 탓도 있었고, 평소 가사일을 하지 않았던 제가 하루 세끼 식사와 청소, 빨래 등을 해내는 것에 대한 부담이 갑자기 늘어난 탓도 컸습니다. 게다가 남편은 짧은 기간이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성과물을 안고 돌아가겠다는 욕심(?)탓에 잔득긴장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서로 바쁘게 지내면서 제가 남편에게 의존적인 자세를 많이 극복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낯선 상황에 처하니 그렇지가 않더군요. 사소한 일상에서도 자꾸 남편의 판단을 구하게 되고, 그럴수록 남편은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저로 인해서 자신의 부담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듯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가에 대해 제가 따져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월, 섭섭했던 일들도 파노라마처럼 떠올랐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한 제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우울한 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제가 1년간 살았던 동네에는 아주 오래된 성당이 있었지요. 케네디대통령이 어릴적 유아세례를 받았음을 자랑할만큼 백인들이 오래전부터 신앙생활을 하며 잘 가꾸어 온 성당이었습니다. 매주 한결같이 성가를 인도하던 봉사자도 인상적이었고, 매일 아침미사에서 성경봉독을 하던 금발의 여인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많이 참석하는 주일 아침미사에서는 신부님이 강론을 하실 때 아이들을 제대 앞에 불러 모으시고 마치 예수님처럼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쉽고도 재미있게 복음을 전해주시는 것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우울한 생활중에 큰 위로가 되었던 아름다운 성당분위기에 힙입어 사순시기를 맞아서 매일 미사 드리기를 작정하고 실천해보았습니다. 눈이 많이 오던 날도, 비가 오던 날도 빠지지 않고 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아침에 가지 못하면 점심이나 저녁미사에라도 갔습니다. 성금요일을 앞둔 목요일 아침이었지요. 제가 잘 모르고 아침미사가 있으려니 하고 성당을 들어섰는데, 아무도 없이 텅 비었더군요. 순간, 미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그냥 돌아서 나올 수는 없었습니다. 조용히 혼자 예수님 십자가상을 바라보며 앉았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지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 때, 분명 제 귀에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가슴이 확 뜨거워지더군요. 확실히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제가 공연히 남편이 사랑이 부족하다고 탓하고, 그를 사랑하기 보다는 의존하려고 애썼던 것이군요’라고 예수님께 제가 답했습니다. 당신께서 이렇게 손수 목숨을 내어주실 만큼 저를 사랑하시는데 제가 몰랐던 것입니다. 미사 때마다 드리는 성찬의 예식이 바로 당신께서 저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셨음을 기념하는 것인데, 그동안 저를 위한 것이었음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막연한 우리, 인류, 인간을 위한 것이려니... 저를 위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사랑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 때의 그 벅찬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후로 매 미사 중에 모시는 성체는 “너를 사랑한다”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임을 제가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한강을 따라 걸었습니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살아온 제 인생 중에 함께 하신 하느님을 새롭게 다시 만납니다. 

태어나서 이 나이까지 살아오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한 순간도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누군가를 보내셔서 저를 돌보게 하시고, 도움을 주셨으며 힘들 때 위로받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끌려 제가 이리저리 헤멜 때, 어디로 갈지 몰라 앞날을 두려워할 때, 항상 하느님 앞으로 불러서 당신께서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해주시고 힘을 주시고 다시 나아가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이날까지 잘 지켜주시고 키워오신 소중한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미미한 저를 통해 드러나게 하실려고 저에게 오늘 하루를 허락하셨음을 믿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고, 온전히 감사드리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임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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