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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2/19
    딴지일보와 프레시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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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2/18
    삼성을 생각한다
    평발
  3. 2010/02/17
    자칫하면 자연사할 뻔한 블로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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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5/11
    촛불 1년이라...무엇을 바꿀마음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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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9/05/07
    세심하고 섬세한것! 개나 줘버렷(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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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9/04/28
    사퇴에 대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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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9/01/20
    [펌]"솔직히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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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9/01/15
    어청수의 장기를 어따 쓸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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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9/01/07
    '복잡한' 노무자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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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9/01/05
    상식이라는 이름의 몰상식
    평발

딴지일보와 프레시안...

한 때 딴지일보가 트렌드를 형성하던 시설이 있었다. 그리곤 김어준 총수의 외도. 그 다음부턴 그 똥코누르기 페이지가 나오는 딴지일보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목을 맸던 것은 프레시안. 익명에게 다중지성이라는 금관을 씌어주지 않고 기자의 이름이 또박또박 박힌 언론으로서 프레시안이 주로 방문하는 언론이 되었다. 해서 경향-프레시안 라인.

 

거기다 구독중인 '시사인'. 그런데 지난 주였던 고종석 선생이 칼럼에서 '딴지일보'에 대한 호감을 표명한 관계로 가끔 눈팅하다가, 당게시판에 심상정 인터뷰가 실렸다는 말을 듣고 본격적으로 들어가서 보았다.

 

이 정도면 포스팅을 하지 않겠는데... 오늘 유시민이 선거연합과 관련된 입장을 발표했고, 그것이 평소 RSS했던 것에 떴다. 그리곤 얼른 가서 읽어보았다. 

 

질감의 차이는 바로 '댓글'.

 

딴지일보의 댓글은 그야말로 노무현 살인 0적 중 1인으로 심상정이고,

 

프레시안의 댓글은 널 어떻게 믿냐로서 유시민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인터넷 언론사마다 이를테면 '구독자'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평소엔 드러나지 않다가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휘발성 높게 드러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딴지일보 댓글보다 프레시안 댓글에 공감이 갔던 것은 나의 정치적인 입장에 기인한 바도 있겠지만, 댓글의 수준문제였다. 뭐 맞춤법 맞추고 정중하며...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오프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온라인으로 한다는, 온-오프 일체형 댓글을 의미한다. 

 

온라인은 실질적인 인간관계의 다른 형식이지, 그것을 대체하거나 혹은 그것을 이원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나의 이데올로기다)

 

그런면에서 심상정의 인터뷰에 대해, 노무현을 갖다데는 사람한테는 최소한 자신에 대한 반성을 했던 '진보의 미래'를 읽어보지 않았냐고, 당신같은 사람이 인간 노무현을 두번 죽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고 진보의 확신에 대해 비웃는 사람에게는, 수십년간 한우물을 파왔던 바보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냐고 힐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노무현과 그 일당들은 어찌되었던 4년 동안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세금을 받아왔던 사람이며, 국민의 종복인 공무원 위에서 군림했던 이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마치 훈장처럼, 유일한 경험처럼 내세우는 것을 보면 당연히 그 떳떳함의 이유를 물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오늘 만난, 서울 모 구에서 구청장만들기를 하고 있는 노빠 선생은 진보신당의 입장이 '혹독하다'고 평했다. 이유는 민주당보러 먼저 버려라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았는데, 그들이 해왔던 정치는 언제나 +의 정치였지 -와 +가 발랜스를 맞춘 균형의 정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해서 손안에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 설사 진보진영과 나누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나라당에 빼앗기는 것과 동일한 감정경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정치의 진정성을 말한다면, 적어도 지역정치의 진정성을 말한다면 나는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 당파가 그 지역에 대해 그동안 얼마나 발언을 해왔는가라는 점이다. 평소의 관심은 전혀 없었던 이가 1년 동안을 학습용으로 허송세월 할 만큼 지방정치가 만만한 게 아니다. 평소 오세훈 시장에 대해서는 논평 한줄도 내놓지 못했던 민주당이 서울에 대한 지분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우습기 짝이 없다. 

 

지지율이라.

 

이에 대해선, 어제 노회찬이 내놓은 '진보의 재탄생'이라는 책표지를 보면서 아내와 다투었던 내용과 연관됨으로 다음 포스팅에서 메모해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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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아무리 엠비라도, 특정기사를 빼라 넣어라 하진 못한다. 취임초기 국민일보에 대한 기사개입으로 얼마나 욕을 쳐드셨나? 그대신 경영진이라 불리는, 밸도 없는 세력들을 순치시키는 간접적인 방식을 동원한다. 이 때의 부상은 대개 이력서의 한줄이다.

 

그런데 이런 엠비조차도 삼성이 해내는 공력에 비하면 조족지혈도 댈게 없다. <경향신문>이 삼성에 대해 작성한 '삼성을 생각한다'는 원고가 망명을 보냈다. 프레시안으로...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217155315&Section=02

 

글을 쓴이는 김상봉 교수로, 충격이 매우 크셨던 것으로 보인다. 해서 언론사를 끼고 토론회를 하자고 하지만, 선뜻 나서는 데가 있을리 없다.

 

경향신문의 사례는 나름 건전하고 원칙적인 신문이라 하더라도, 삼성이라는 이름앞에선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 고약한게, 삼성은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언론사가 알아서 기는 거다. 이럴 경우 삼성을 욕하는 게 매우 어색해 진다.

 

아니나 다를까, 김상봉 교수의 칼럼엔 예의 '국가대표기업'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최고는 흠집나지 않아야 한다는 영웅무오류주의는 사실 김일성의 사례에서나 박정희의 사례에서 똑같이 발견되는 한반도 정치의 특징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절망스럽다는 것

 

이었다. 스티브 잡스 정도의 간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버핏처럼 파격을 요구하는 것도, 게이츠처럼 혁신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양아치 수준은 벗어난 대한민국 최고기업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이다지도 어려운 일인가 싶다.

 

그런 주제에 국민에겐, 정직하라고? 국민의 부정직보다는 이건희의 특권이 우리 사회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역시, 삼성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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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하면 자연사할 뻔한 블로그라..

 1. 마지막 포스팅이 2009년 5월이라... 그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더라...


 2. 북마크가 되어 있는 진보블로그를 슬쩍 눈팅하면서도, '널 버리고 다른 블로그는 하지 않아'라며 안심시키는 것에 만족해왔다. 그런데 이제 슬며시 가슴에 손을 얹고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블로그를 쉰 이유가 없듯이 갑자기 시작하는데도 이유가 있을리 없다.


 3. 2010년. 이제 터닝포인트가 필요한 시기다. 떠날 사람들은 모두 떠난 벌판에 서 있지만, 이젠 추워서 계속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4. 아무래도... 사적으로 침윤해가는 내가 꼴뵈기 싫어서 블로그를 쉬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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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1년이라...무엇을 바꿀마음이 있었을까?

트랙팩님의 [촛불 1년] 에 관련된 글.

작년 이맘때 즈음이겠다.

진보블로그 트랙팩에서 '촛불이 어떤 의미인가'라는 주제를 내건 적이 있다. 그로부터 1년... 이젠 과거의 그 일에 대해 이야기 해보잔다.

난 이렇게 생각했었다.

결국 우리의 촛불은 정권의 후퇴를 가져오지도 않을 뿐더러, 민주주의의 심화를 가져오지도 않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 자발적 참여의 힘, 규정되지 않는 그 힘의 발견이 현재 2~30대가 겪는 정치적 무기력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적 신세대의 등장으로 유의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지금은? 난 지나치게 냉소적이었다고 보지만, 판단을 유보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촛불 정국의 승자와 패자를 꼽는데 분주하지만, 사실상 복수의 사건들로서 촛불은 각자의 입장에서 취사선택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어쨌든 현재의 모습에서 비추어 볼 수 밖에 없을 텐데, 결국 주체의 능동성은 남고 주체들의 결이 바뀌진 못한 사건이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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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하고 섬세한것! 개나 줘버렷

marishin님의 [요즘 심정] 에 관련된 글.

 

1. 목수정은 개인적으로 매우 잘 알던 이다. 그래서 그이에 대한 호불호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2. 마리신님이나 민노씨네나, 그리고 규항넷에서 관련 글을 보았고, 언뜻 언뜻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그들과 많이 다른데 그것이 나와 목과의 관계 때문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심리적인 거리두기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논리적 혹은 이성적인 방법에서라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3. 결국, 블로그에 메모를 남기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많은 훈수쟁이들과 내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민노씨의 글에 대해서는 발제를 하듯이 밑줄을 치며 반박하고 싶은 내용이 많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무의미 했기 때문인데, 이미 사태의 본질 -국립오페라단 문제-를 가리키는 이에게 손가락을 보라고 주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4. 진보신당 당게시판에서의 논란에서, 규항넷이 말했듯, 목을 지지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국립오페라단의 문제로 확장해주는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이 내내 걸렸다. 생각 외로 수준낮은 논란에 당황했다는 것이 금새 떠오르는 변명거리이지만, 사실은 실망했고 짜증났다.

내 스스로 아쉽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진흙탕에서 나도 난타전을 하면서 깨지고 깨고 했어야 했다는 자책이 들었기 때문이다.

5. 그런 점에서 보자면, 민노씨가 말하는 '상위 10% 진보를 위한 말'이라며 이야기 하는 행인의 말을 나는 이렇게 오독하고 싶어졌다. 따라서 진보는 모든 문제에 대해 즉, 인간관계에서 부터 그로 파생되는 인간적 예의, 또한 스스로를 100점 척도에서 어느 한 점에 위치지우는 성찰, 핵심을 전달하는 말하기 등등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부족하다'는 한계를 염두에 두라는 뜻으로 말이다.

적어도 내가 목이라면 나도 정명훈에 대해 그렇게 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나는 한계가 많은 사람이며, 시위현장에서도 아무 책임이 없을 것으로 확신하는 전경에게 이런 저런 말을 내뱉는다.

6. 민노씨의 블로그에 인용된 명예훼손과 관련된 법적 논의는 '법학 개론'시간을 연상시키는 지루한 것이며, 말에서 말하는 대상을 분리시키는 편리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생활인으로서 말하자면, 정명훈 개인이 명예훼손으로 느낀다면 고발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판단은 법원에서 내려진다. (신영철 사건은 법이 법문의 형식논리가 아니라 사람이 관여하는 이해타산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7. 이제 기억을 위해서 정리하자면,

난 정-목의 논란을 보면서, 강준만의 실명공개 논쟁이 떠올랐다. 그리고 조선일보의 이한우가 '스승의 등에 칼을 꽂았다'라는 표현에 근거해 명예훼손을 걸었고 승소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점잖은 척 많은 이들이 강준만의 활동에 대하여 목적은 공감하지만 방법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둥의 궤변을 늘어놓고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도 보았다.

이번엔 그 정도 수준은 아니지만,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경우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가지는 편리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편하다.

동의한다, 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 던가,

동의여부를 떠나서 방법상에 문제가 있었으니 문제다

등등의 태도는 솔직히 '구역질'이 난다.

8. 개인적으로는 사람이 사람에 대해 최대한 세심하고 섬세했으면 한다. 그리고 그것이 소위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일인 영역에서는 더욱 그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욕을 할 땐 욕을 하는 사회가 더욱 좋다. 저잣거리에서 무도회의 매너를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9. 목이 탈당했다. 좋다. 목이 탈당을 하고 그이를 욕하던 10명의 당원이 남고, 그이를 못마땅해하던 진보연 하던 이들이 진보신당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득인가?

10. 난 왜 진보를 언급하는 이들이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는 대중이나 90%의 국민들을 말하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운동은 같은 지향의 동지와 함께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민노씨가 진보신당에 얼마 만큼의 지지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목의 글에 가슴시원해 했던 오페라단의 해고 노동자들과 대비해, 그의 지지가 하등 고맙지가 않다. 난 오히려 오페라단과 함께 하는 이들의 요구로 정명훈을 만나러 가겠다고 결심한 목의 행동이 어떤 연대활동보다 우월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11. 이제 기억으로 남겠고, 목은 같은 당원은 아니지만 동지로서 계속 남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같은 당원이지만 동지가 될 수 없는 이들이 많아 지는 것도 고민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개인적인 호불호일뿐이다.

 

12. 사족이지만, 왜 난 괜히 점잖떠는 사람이 있으면 맘에 들지 않을까. 인격의 수양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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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퇴에 대해

박승흡 민주노동당 대변인이 사퇴했다.
한편으론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더 많은 편으론 '뭥미?'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이렇다.

1. 사퇴의 시기 문제

솔직히, 단일화의 결과를 인정하기 싫은, 그래서 조승수를 찍지 않아도 될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박승흡이 사퇴한 것 아닐까?

문제는 박승흡 개인이 아니라, 이번 단일화 결과를 인정하기 싫은 민노당의 본심이다.

종북주의? 그렇다면, 원내에서 민노당은 FTA를 추진했던 민주당과 어떻게 정책공조를 하나? 민노당이 볼때 종북주의 비판이 한미FTA추진보다 심각하다는 것인가?

분명, 박승흡의 사퇴를 두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이번 울산 선거에서 보이코트를 하는 세력들이 생길 것이다. 민노당 입장에서야 공식적으로 이를 막지도, 종용하지도 않을 테지만... 어찌되었던 득이 되는 셈.(내부의 불만을 분산시키면서도, 조승수가 안되면 금상첨화?)

2. 최고위원이자 대변인으로서의 문제

대변인은 당의 공식적인 입이다.

개인적으로 박승흡의 입장이 민노당의 대다수 입장과 동일할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런 박승흡의 결정이 이후에는 진보신당에게 유리한 판을 만들어 줄것이다.

진보신당 내부에서도 죽어도 민노당은 안돼라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이번 단일화에서 김창현으로 되었으면 그런사람들도 생겨나겠지. 하지만 절대 당직에 있는 사람은 그럴리 없다. 왜냐하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부터 어찌되었던 공동대응 요구가 지속적으로 있을텐데 미리 약점을 만들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런 점에서 박승흡 같은 사람의 행동은, 이후 진보신당이 공동대응 사업에 있어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너네 당 내부나 반MB전선에 대한 입장을 통일시키고 오라"는 등) 반종북주의 세력도 배제하고 한미FTA추진세력도 배제하면, 민노당이 주장하는  반MB전선은 도대체 누구랑 하겠다는 것인가?

3. 결국 민노당의 문제

어찌되었던 위기의식이라고 본다. 문제는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 서로에 대해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는 것인데, 이런 사람이 민노당에 더욱 많다는 것이 이번 사태의 배경이다.

진보신당이야 비 민노당 경험자가 당원의 60%가 넘는 상황이기 때문에, 민노당의 경험에 발목잡힐 이유가 없고, 그 60%의 신규 당원들 역시 '민주노동당이 있었음에도 입당하지 않았던' 전력이 있는 관계로 민노당에게 어떤 감정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런데 민노당이야 분당을 경험한 다수이자, 당사자들이 남은 곳 아닌가. 어쨌든 트라우마가 더욱 깊을 것이다.

뭐... 솔직히 웃고 말았지만(박승흡을 영웅시할 내부의 분위기가 뻔하기 때문에... 솔직히 편견이고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곱씹어 보면서, 지금 들었던 생각들을 기록하기 위해 급하게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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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quot;솔직히 말하라&quot;

 

 

 

 

 

 

 

 

 

 

 

 

  

 

 

 

 

- 역시 문제는 전달의 힘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가는 얼마나 위대한 직업인지.

- 익숙한 나조차도, 새롭게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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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청수의 장기를 어따 쓸꼬~

어청수가 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1월호 표지모델로 등장해 논란이 되고 있다.
(노컷뉴스 기사: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114800040)

이에 대해 장기기증운동본부는 이렇게 해명을 했다.
(해명: http://www.donor.or.kr/board/board01.aspx?bname=Bd_Rush_Notify&mode=view&boardID=1&thread=15000&pageNum=1&readCount=38&old=Bd_Question)

이와 같은 논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두 가지.

1번. 어청수와 장기기증까지 연결시키는 것이 오버일까?

기증본부의 말에 따르면, 경찰청이 공공기관으로는 유일하게 장기기증운동에 참여해주어서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표지모델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럴법한게 위의 기증본부 글을 보니 꽤나 많은 경찰들이 장기기증에 서약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개인기부자들이 반발한 것이다. 어청수가 표지모델인것이 기분나쁘다는 거다. 게시판의 글들을 보면 꽤나 감정적인 글에서부터(그냥 어청수 낯짝이 싫다는) 시민들을 폭도로 만든 어청수가 자신과 같이 장기기증을 한다는 데에 대한 심리적 타격을 호소하는 글까지 다양한 폭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어청수와 장기기증을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오버라고 말한다. 특정 사람에 대한 호불호로 장기기증이라는 행동을 부정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생각은 어짜피 장기기증을 택했을 때에도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이었고 그것을 어청수때문에라도 포기하는 것 역시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깃털처럼 가벼운 일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망치처럼 무거운 것이 세상 이치라. ^^

문제는 어떤 이들이 오버하든 말든, 매사에 정치적 옳바름을 실천하고자 하는 행위에 대해 이것과 저것을 다르니 별도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오류다. 사람의 머리는 그렇게 이 영역과 저 영역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시험을 못 본 사람이 주변사람한테 화를 내는 것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가?

해서 다음 문제로,

2번. 어청수의 장기기증운동은 그 자체로 착한일 일까?

서정주 시의 아름다움은 그의 친일행적과 무관하다?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적을 듯. 하지만 이건? 이명박이 참모진에게 알리지 않고 소망교회에서 하는 자선행사에 수억을 기부했다.

자선행사에 주목을 할 것인가, 소망교회에 주목할 것인가, 알리지 않은 선행에 주목할 것인가?

내가 이런 문제를 보는 관점은 일관성의 측면이다. 과연 과거에 이명박이 이런 행동을 한 일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먼저 던진다. 만약 없었다면, 그런 선행 따위야 4년 있다가 해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에 있는 자가 이런 저런 정치사회적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행할 자선행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어청수의 장기기증운동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된다. 그는 과거 지역청장일 시절엔 하지 않았던 행위를 경찰청장이 되고선 시행했다. 여기서 어청수의 종교적 목적이 의심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분명 기독교인으로서 선택한 선행의 일환으로 장기기증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그 밑의 경찰들은? 청장이 나서서 '나 장기기증한다'했는데, 그 밑은 자동적으로 '배를 째는 수준'이 아닐까? 재미있는 것은 기증본부의 해명을 보면, 경찰에 자극받아서 해병본부에서도 한단다. ^^

경찰이나 해병과 같은 집단에서 이런 집단헌혈이랄지, 장기기증이랄지가 잘되는 이유가 궁금한가. 그러면 군생활을 한 이에게 물어보면 알것이다.

내 생각엔, 경찰과 해병과 같은 상명하복의 조직문화가 있는 곳에선 최대한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조직의 원리상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보다는 조직의 논리를 선택할 가능성이 큰 집단이기 때문이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증본부 측이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경찰과 함께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만약 기증본부가 소위 '영업' 차원에서 경찰과 해병대와 손을 잡고 있다면... 사실 그것은 조직윤리상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왜 장기기증이며 무엇을 위한 장기기증이냐는 것이다.

이번 어청수와 장기기증 논란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고, 나름 정리를 해 보았다. 딱 한 문제가 남았는데, 만약 내가 장기기증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하필이면 어청수가 기증한 것 밖에는 없을 때 난 무엇을 선택할까라는 점이다.

솔직히 지금 입장에선, 깨끗하게 죽지 않나 싶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이를 비난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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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노무자의 정체

정부에서 발표한 뉴딜-녹색 일자리때문에 말이 많다. 특히 일자리의 질에 대해 이런 저런 논란이 있나본데, 재정기획부도 맨날 해명 기자회견 하느라 정신이 없나 보다.

 

해명 중 주요 내용이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단순노무직'이 다수가 아니다라는 변명이 있었나 본데, 이에 대한 댓글이 기가 막히다.

 

 

 

 

최고의 추천글인, 아, 단순노무직이 아니면 "복잡한 노무직이구나"라는 댓글이다. 눈물을 뺐다.

 

그리고 그 밑에 '용어의 정의'라는 댓글!!

 

사무실에서 눈치없이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즐겁다. 세상이 명랑하다는 증거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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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라는 이름의 몰상식

최근 언론노조 파업과 국회파행사건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다보면, 흥미로운 논리가 발견된다. 해서, 당시 내가 말했던 내용을 기억을 위해 가다듬어 놓는다.

한나라당의 언론관계법에 대해서 가장 대표적인 논리이자 상식으로 통하는 말은 아마도 "시청자의 권리"라는 것이라 본다. 최근 중앙일보도 방송이 재벌에 의해 장악되어 특정 계급의 이해만을 반영할 것이라는 마봉춘의 보도에 '그렇게 되면 시청자들이 보지 않을 것'이라며 반박했다는 글도 보았다.

이른바 '소비자 주권'의 논리.

어제 KBS 뉴스에서 이스라엘의 지상전 투입과 관련한 보도를 하면서 이스라엘 국방부장관을 인터뷰한 미국 언론의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 방송이 바로 머독이 소유하고 있는 폭스뉴스다. 모든 매체가 모든 뉴스원에 대해 동등한 접근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만 존재하는 가정일 뿐이다. 이명박은 당선 직후 <동아일보>에만 인터뷰를 하는 은전을 베풀지 않았던가.

그동안 매체의 프레임 형성권에 대해 집중하면서, 조중동 찌라시와 같은 행태가 많이 언급되었는데 문제는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조중동의 경우에는 사실전달이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을 포기하면서까지 마타도어로 일관하는 비언론인 셈이기 때문에, '언론사의 다양한 입장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이미 논외에 속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동을 보는 이유다. 내 주변에도 '조선일보를 알기위해 조선일보를 본다'던가 '조선일보의 정보력을 넘어서는 언론이 없다'는 등 다양한 조선일보 찬양론의 버전들이 존재한다. 경제적 영향력이 바로 정보 접근의 범위를 비약적으로 확대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왜 이렇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가? 그것은 삼성이라는 대재벌의 영향력 때문이다. 비공식적인 정보의 집중을 바탕으로 '직접' 관료집단과 소통하고 있는 연구소의 능력을 누가 넘어설 수 있겠는가.

만약 마봉춘이 재벌의 금가락지에 넘어가게 된다면, 여타 지상파에 비해 막대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시청자로 하여금 '볼 수 밖에 없게' 만들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은 시청자의 선택를 넘어서는 것이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이정도의 재벌방송은 모든 뉴스보도를 '자기실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시말해, "정부는 경제활성화를 위해 이런 저런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보도한다면, 며칠 뒤에 정부가 "경제활성화를 위해 이런 저런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상황이 그렇다면, 아무리 재벌이 소유한 마봉춘이 밉다하더라도 마봉춘을 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쉽게 생각해서 지금 이블로그를 보는 사람 중, 혹은 그 주변에서 여전히 조중동을 탐독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과연 그 사람들이 바보라 그럴까?

시청자의 선택권이란, 비대칭적인 정보량을 지닌 언론 매체 환경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마봉춘의 예능화보다 내가 더 우려하는 것은 이런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언론노조의 파업을 비롯하여 시민들의 투쟁은, 시청자의 선택권을 지키기위한 싸움이다.


다음으로 다수결의 논리.

새해랍시고 김영삼 옹께서 입을 여셨는데, 최근 국회 상황에 대해 '다수결의 원칙'을 강조하셨다 한다.
나름 합리적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꽤나 다수결의 논리를 들어가며 현 국회의 상황을 비판하곤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뭐 이들에게 한나라당도 예전에 그랬어!라고 말하면, '그래서 그렇게 욕하는 한나라당과 똑같은 짓을 해도 된다는 것이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다수결의 정체에 대해서다. 물론 다수결은 소수의견의 존중, 다수결의 관철방식이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소소한 제한들이 있지만, 일단 빼자.

국회의원은 국가를 구성하는 3개 주요한 기능 중 하나인 '입법행위'를 위한 대의자다. 유권자는 정치적 성향이나, 후보자와의 이해득실로 자신의 대의자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로 다수당과 소수당이 만들어진다.

다른 것은 다 떠나서, 한나라당에서 "국민들이 만들어준 국정운영의 권한"으로 "엠비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심각한 모순이 존재한다고 본다. 바로 다수결의 원칙에 위반된다는 것인데, 이명박이 합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가진 것도 맞고 한나라당이 선거를 통해 다수당이 된 것도 맞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4년이나 5년동안 무슨일이든 '다수의 의지'를 표방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여론조사가 참 많다는 점이다. 유권자의 48% 지지로 대통령이 된 이명박의 지지도가 30%라면 합법적인 권력 획득 이후의 권력운용과 관련된 정당성은 없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나? 그들이 말하는 다수결로 보자면, 국민 중 30%만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인데 말이다.

또한 국민의 60%가 한나라당의 언론관계법에 반대한다고 하는데, 민주주의의 원칙인 다수결에 따르면 이런 국민들의 의견에 따라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국회안의 다수와 소수는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한나라당이 소수당이면서도 몽니를 부리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언론관계법만 놓고 보자면, 한나라당 국회의원 1명은 고작해서 0.6 정도의 국민대표성을 지니고 있고 야당의원들은 1.5에서 1.6 정도의 국민대표성을 지니고 있는 셈인데, 한나라당 2명 정도 모여야 사람 1명 구실하면서 다수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지 않을까?

조중동이던 한나라당이든 곧잘 이용하는(절대 자신들이 소수일때는 이용하지 않는) 다수결의 원칙은 제도의 원인과 결과에만 존재하는 반푼짜리 원리인셈이다. 과정 속의 다수결을 따져보면, 한번 다수가 지속적으로 다수인 적은 별로 없다. 그게 민주주의 아닌가 말이다.

신년을 맞이하여 보기 힘든 사람들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고민해서 답을 해야 한다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그들이 말하는 상식이란 고작 상식처럼 보이는 비상식이자 몰상식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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