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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그곳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 등록일
    2004/11/01 20:23
  • 수정일
    2004/11/01 20:23

광주는 그곳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피바랜 광주>

변성찬(영화평론가, ‘연구공간 수유+너머’ 회원)

2004년 5월 18일, 광주 망월동의 5.18 광주 묘지에서 ‘제24주년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이 거행된다. 노무현 대통령 내외는 물론, 박근혜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처음으로’ 참석한, 말 그대로 전국민적인 행사이다. <피바랜 광주>는, 역설적이게도 전국민적 행사가 되면서 빛 바래가는 빛고을 광주의 ‘오늘’을 추적하고 있다. 대통령이 분향하는 모습이 현장에 준비된 대형 모니터로 중계되고 있다. 행사장에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 자발적 참석자들은 그 모니터를 ‘구경’하고 있다. <피바랜 광주>의 카메라-시선은, 아마도 그날 저녁 9시 뉴스에 편집-방영되었을, 그 모니터 속 이미지의 ‘이면’을 향하고 있다.


가령, 그 무대 뒤의 풍경은 이러하다. 국가 원수가 참석함으로 인해 ‘당연히’ 이루어지는 통제와 검문 검색으로 인해, 전국에서 찾아온 자발적 참석자들은 ‘새삼스러운’ 기나긴 교통 정체를 감내해야만 한다. 그들은 차에서 내려 차라리 걷기로 마음 먹는다. 흰 소복에 조촐한 제수 보따리를 들고 행사장을 들어서려던 유가족 할머니는, 갑자기 자신을 제지하며 그 제수 보따리를 빼앗듯 나꿔채는 검색 요원의 행동에 깜작 놀란다. 행사장 입구의 혼잡으로 빨리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국회의원들을 향해 카메라는 자꾸 귀찮은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카메라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자꾸 자기 줄의 앞을 초조하게 바라본다. 그때 들려오는 기쁨에 찬 목소리: “국회의원은 그냥 가도 된대요!”





<피바랜 광주>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시작된다. 5.18 광주 묘지로 들어서는 텅 빈 진입로, 길 가의 ‘민들레’에 이중 인화되는 부처님께 절하고 있는 여인의 이미지, 그 이미지 위를 흐르고 있는 헌시(獻詩), 광주가 결코 80년 5월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증언하는 그곳의 수많은 열사들의 묘. 강경대, 이철규, 이한열, 이내창, 박관현, 그리고 무명 열사들...무덤 앞에서 정성스레 제사를 지내고 끝내 오열하는 유가족. <피바랜 광주>의 카메라는 질문과 의문으로 흔들린다. ‘저렇게 많은 묘지’가 왜 생겼는지, 그 죽음이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한 것인지, 다른 나라 사람들에 의한 것인지’를 물어보는 천진한 아이의 질문은 참 당황스럽다. 순식간에 진압되어 미처 카메라에 담지 못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행사 참여 반대 시위와 그것에 대한 취재 통제는 또 한 번 당황스럽다. 흔들리던 <피바랜 광주>의 카메라는 끝내 울분을 토한다. 학살의 원흉들에 표를 던진 부산-경남의 이해 못할 민심에 울분을 토하는 한 경상도 할머니의 울분에 길게 공명하던 카메라는, 끝내 직설적인 몽타주로 자신의 울분을 발화한다. 죽어있는 지렁이 위에 꼬여있는 파리떼들. 오늘의 광주는 그 파리떼들 때문에 ‘피바래’ 가고 있다. 그 파리떼들의 행사를 구경해야만 하는 우리는 죽어있는 지렁이다.


<피바랜 광주>는 경건한 애도의 심정과, 흔들리는 의문의 시선과, 터져나오는 울분의 목소리로 오늘의 광주를 묻고 있다. 그 카메라는 차마 24년전의 광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직 그 24년전의 광주를 온전하게 애도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카메라-시선에는 이제야 비로소 그 온전한 애도의 준비를 수행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있기도 하다. 우리의 이웃에는 ‘아마도 대부분 생매장되었을 광주 행불자’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제작을 준비하는 깨어있는 양심(사진 및 다큐멘터리 작가 박성배씨)이 있으며, 이라크 파병 반대 투쟁으로 ‘광주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행동하는 양심이 있다. 5.18 민주화 운동 전야제에서 불태워지고 있는 성조기, 그것은 아마도 오늘 우리가 수행하고 있으며 또 수행해야 할, 광주에 대한 대항 역사 쓰기의 몸짓일 것이다. 아직 우리는 24년전 광주를 온전하게 애도할 준비조차 못하고 있지만, 그러한 대항 역사 쓰기의 몸짓이 있는 한, 아직 죽은 지렁이인 것은 아니다. 밟힐수록 꿈틀거리는 생명력, 그것이 지렁이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피바랜 광주>와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사실. 첫째, 5.18 광주 민주화 항쟁 과정에서의 행불자로 신청된 사람들의 숫자는 363명이다. 그 중 현재까지 ‘인정’된 사람들의 숫자는 70명이다. 둘째, 제24주년 5.18 광주 민중 항쟁 기념식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 전남도청 앞에서는 ‘이라크 파병 반대 광주 전남 비상 국민 행동’의 기자 회견이 있었다. 국민 행동은 이라크 침공 반대 성명 발표와 함께, 도청에서 망월동 묘역에 이르는 국군 파병 철회를 위한 삼보일배를 실행했다. 오늘 광주는, 아직 많은 것을 ‘매장’당하고 있지만, 벌써 그 죽음의 원한에서 떨쳐일어나고 있다. 다음은, 그 되살아나고 있는 ‘광주 정신’을 담고 있는 성명서의 한 부분이다.

"80년 광주가 목숨걸고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가? 광주정신은 인권과 평화라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로 승화될 때 의미가 있다. 지금 이라크에서 천인공노할 미국의 만행이 저질러지고 있다면 광주는 그곳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80년 5월의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 이라크 침략전쟁에 국군을 파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5월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5.18묘지까지 고행을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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