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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는 행복한 미래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들이 말하는 행복한 미래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나는 탈학교 청소년이다. 흔히 말하는 '홈스쿨러'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공부를 하진 않고 있으니까, 그냥 학교를 뛰쳐나온 '탈학교 청소년' 이라고 불리는 게 더 좋다.



얼마 전 나는 일제고사 투쟁에 함께 했었다.

나는 비록 학교를 다니지 않고, 시험을 보지 않지만 안 그래도 끔찍한 경쟁사회에 일제고사가 미칠 파장들이 너무 눈에 보여서 함께 했던 것이다. 청소년 농성을 하기도 하고, 성적으로 줄 세우겠다는 일제고사 통계자료를 찍어서 망치자는 청소년들의 오답선언을 받기위해 선전전을 뛰기도 하고, 등교거부를 준비하며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면서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왜 경쟁에 반대 하는 건데?' '경쟁 어느 정도 필요한 거 아냐?' '내 점수 알면 더 분발할 수 있잖아!'라는 이야기 들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무한경쟁을 믿으면 행복한 미래의 기회가 자신에게도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탈학교 청소년으로 살아 온 이야기


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안학교에서 정확히 1학년을 마치고 그만 두었다.

왜 대안학교를 갔고, 또 왜 대안학교를 그만 두었는지를 물어본다면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중학교에 대한 생각이 많이 암울했다.


중학교 가면 두발규제도 있고, 교복도 입어야 되고, 언니오빠들 보면 엄청 세게 맞기도 하고, 더군다나 내가 사는 안산은 고등학교가 비평준화이기 때문에 뭔지도 모르겠는 '내신' 이란 것에 목숨 거는 사람들을 간간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중학교 가면 시험도 자주보고, 시험 때문에 친구들이랑 사이가 안 좋아 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었는데 아마 엄마의 영향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경쟁을 좋게만 보진 않았던 것 같다.


뭐 이런 이유들로 대안학교에 가게 되었었고, 대안학교를 다니면서는 경쟁은 없었지만 그래도 학교는 학교라는 답답함으로 그만 두었다.


그 뒤에 가 봤던 대안교육을 이야기하는 곳들도 결국 경쟁을 유도하기도 하고, 권위주의로 학교를 형성해 버린다는 생각에 이제는 가지 않는다. 어떤 곳들에서는 숙제를 내주고, 잘해 온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아니면 벌을 주는 식으로 경쟁을 만든 곳도 있었고, '교사'라는 역할로 '그들'이 청소년들에게 무척 권위주의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며 규칙을 지키라고 화를 내는 곳도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규칙은 청소년들이 함께 이야기해서 만들었던 것이 아닌 '그들'이 만들고, 너희가 여기에 왔다면 지키라고 하는 것들이었고, 그렇다면 그것은 학교에 있는 교사들의 태도와 전혀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 되었다. 다른 곳의 '교사'가 내주었던 숙제 같은 경우는 독후감 쓰기, '대학(大學)'을 외우라는 것 같은 이걸 왜? 외워야하는지, 책을 읽고 독후감을 꼭 써야하는지에 대해 내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일반 학교와 다를 것 없이 우리와의 소통이 단절된 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식이었다. 독후감을 잘 써오는 사람에게 상으로 무언가를 준다는 것은 경쟁을 요구 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 것이었고, 대학구절을 외워오지 못하면 끝나고 남겨서라도 외우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주입식 교육 아닌가?



청소년 활동에 발을 딛고 생각한 경쟁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내가 지금 활동을 하고 있는 교육운동단체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지금까지 들어볼 수 없던 새로운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거기서 들었던 수능에 왜 목숨을 거는가? 경쟁이 좋은 것 인가? 선생이 필요하긴 한 거냐? 라는 질문들은 나를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 내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찝찝함'들이 내가 이유 없이 하는 반항이 아니라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찝찝했던 것뿐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청소년 활동이라는 새로운 곳으로 한발 두발 발을 뻗기 시작해서 지금은 한번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2008년 9월 즈음 처음 활동이란 것을 시작했을 때에도 일제고사 투쟁으로 시작했었고, 잠시 쉬다가 올해 3월 돌아와서 뛰어 들었던 것도 일제고사 투쟁이었다. 나는 그러면서 더욱더 무한경쟁 이라는 것에 반감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지들이 뭔데 우리들을 점수로 줄 세워 버리겠다는 거지?',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서 기뻐하는 것이, 또 그렇게 만드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아까 말 했듯이 내가 사는 안산은 비평준화 지역이라 고등학교를 내신과 연합고사점수로 간다. 작년에 16살 연합고사를 볼 나이인 학교를 다니는 친구랑 했었던 이야기가 있다. '시험점수는 나만 잘 나와야 된다고, 애들 다 잘 보면 내신이 안 올라' 라고 하는 친구에게 '그런 생각 너무 무섭지 않냐'고 물었더니 친구는 놀라있는 나를 보며 무언가 민망한 표정으로 하는 말은 '어쩔 수 없다고. 내신 높은 고등학교 가야되고, 대학 잘 보내는 학교 가야된다고,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잘 가야지 나중에 먹고 산다'고 이야기 하는 친구를 보며 나는 학교에 있는 경쟁이란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 이었구나 라는 것을 뭐랄까? 정말 처절하게 느꼈었다. 이 친구가 나를 볼 때 자주 했던 자신의 내신으로는 인문계에서 제일 안 좋은 C고 밖에 못 간다는 이야기와 어디학교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잘 보내느냐며 나에게 던지는 물음들에 내가 알 리가 있냐며 모른다고 답했지만, 이런 말들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꾸만 커져가는 '사람들은 왜 대학에 목숨을 거는 걸까?' 라는 의문이 있다. 그리고 나는 대학이라는 것이 경쟁을 권장하는 이 사회에 가장 큰 악순환이라고 생각된다.



대학을 가야만 하는 거야?


대학이란 것은 청소년들에게 환상이다. 그 환상(혹은 허상)은 '비청소년'들도 굳게 믿고 있고, 사회가 끊임없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비청소년'들은 청소년들에게 '좋은 회사 취직하는 행복한 미래를 위해 지금은 공부나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라'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나와 다른 청소년 활동가들도 주위에서 비슷한 이야기들을 많이 듣곤 한다. '활동도 중요하지만 우선 공부를 열심히 하고, 대학가서 높은 자리에서 이야기해야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라는 말들. 이런 말들이 만들어내는 암시 같은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모두의 머릿속에 심어져 버리는 것인가 보다.


난 한 때 '왜 다들 대학에 가야만 한다고 하는 걸까?', '대학에 가게 된다면 좋은 게 뭘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나는 대학의 필요성도 못 느끼고, 등록금 1000만원 시대에 저 돈을 내가면서 경쟁에 파묻히고 싶지도 않다. 내 주위에는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한번은 내가 대학에선 뭘 하는지 모르겠어서 주위의 누군가에게 대학에 가면 무얼 하느냐고 물어 보았을 때 들었던 대답은 웃으면서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노는 거라고, 와보면 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한 사람으로 대학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물어보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대학에 가면 무얼 하기에 다들 가라고 이야기하면서 가서 뭘 하는 지는 막상 대답하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나는 한참 고민을 하다가 내 나름대로 결론 까진 아니어도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그놈의 대학이 뭔지도 모르겠고, 대학을 가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행복한 미래라는 것도 내가 보기엔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서 더 좋은 대학에 가서 더 좋은(돈 많이 벌고, 안정된) 회사에 취직해서 그냥 그렇게 죽을 때까지 돈을 벌기 위해 사는 인생. 도대체 어디가 행복하다는 건지 난 전~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돈을 들여서 대학이란 것에 가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꿈은 조금 다르니까.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미래, 꿈


사람들은 꿈이란 것을 생각할 때 보통 직업을 생각한다.

너희는 꿈이 뭐니? 라는 '나이 많은'사람들의 진부한 질문들에 다들 '변호사', '의사', '선생님', '공무원' 이런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이야기하지 '어떻게 살고 싶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어떻게 살고 싶다는 것인 것 같은데 다들 왜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인지 물어보면 그저 '안정된 직업이니까', '돈 많이 버니까' 뭐 이런 엄청 사회에 찌든 대답들이 튀어나온다. 그렇지만 절대 저렇게 이야기하는 청소년들을 비난할 수 없다. 청소년들이 이렇게 이야기 하게 되는 것은 청소년기부터 끊임없이 경쟁을 가르치고 누구보다 잘하고 누구보다 높이 올라서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는 사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나도 초등학교 때는 (노력을 안 해서 여전히 글은 못 쓰지만) 그 때는 '내가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기분을 다른 사람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작가가 되고 싶었다. 중학생이 되고서는 뭐 그냥 스쳐 지나간 순간순간의 바램들이지만 '직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요리사', '번역가' 뭐 이런 식의 적어도 나중에 먹고 살 정도는 벌어야지 라며 돈을 벌 만하면서 내가 재밌을만한 일들 말이다.


그러나 활동을 시작하고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예전에는 비청소년기에 들어섰을 때 돈을 벌 생각을 해가며 '직업'을 골랐다면 지금은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모른 척 하며 나만 잘 살아가고 싶진 않아', '세상의 아픔들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조금 힘들고, 배고파도 내가 행복하게 살고 싶어'라는 바램들을 가지고 있다. 이게 나의 꿈이고, 조금 힘들지는 몰라도 내가 선택했다는 것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나의 미래인 것이다. 우리 집이 돈을 안 벌어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형편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더 이상 돈이란 문제는 그리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다.

 

아직 어려서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 두렵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서 돈 많이 벌어 안정된 삶을 사는 것 보다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면서 내가 선택한 일을 하고 싶다는 나의 꿈과 행복한 미래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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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5월인가 사람에 난다대신 썼던 글 ㅋㅋㅋㅋ

근데 작은책에도 올라갔어 ㅋㅋㅋㅋㅋㅋ

 

그나마 좀 낫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쪽팔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직 어려서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 두렵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서 돈 많이 벌어 안정된 삶을 사는 것 보다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면서 내가 선택한 일을 하고 싶다는 나의 꿈과 행복한 미래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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