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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냉면의 길

 

새벽녘이면 날씨가 꽤 쌀쌀하기 까지 하고 일교차가 높아 감기 걸린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낮에는 여전히 더운데다가 태풍 불어온다고 습도까지 많은지라 아직도 냉면 생각이 난다.왔다갔다 하다 보면 냉면집에 아직도 사람들이 꽤 많더라. 


일전에 선배에게 식사 대접을 할 일이 있었다.(내가 멀쩡히 돈 잘버는 선배한테 식사대접을 한다는 말은 내가 시간을 내주고 메뉴도 골라주고 계산은 그 선배가 한다는 뜻이다 ^^V 근데 어떤 후배가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접하겠다면 정중히 사양하겠다--;;) 그 선배랑 무슨 일로 이틀간 시간을 같이 보내긴 했지만 좀 느끼한 식사들의 연속이었는지라 저녁은 깔끔한 것으로 먹기로 합의를 봤었다. 정통적 요리를 좋아하지만 에쓰닉한 요리나 각종 퓨전요리도 즐기는 나는 베트남 퍼 를 제안했으나 그 선배는 개운하게 김치찌게를 먹자고 했고 김치찌게를 받아안기엔 속이 그닥 좋지 않다는 반론이  이어진 끝에 냉면을 먹으러 가기로 합의를 봤다. 을밀대를 갈까 하다가 좌회전을 놓치고 을지면옥을 갈까 하다가 저녁시간에 을지로로 차 몰고 들어갔다가 나오는건 죽음이 아닐까 싶어서 신촌으로 왔었다.


기실 신촌에도 그나마 전통을 자랑하는 냉면집들이 몇 군데 있긴 하다. 예컨데 명물거리에 있는 고박사 냉면(이 곳은 정말 명실이 상부하지 못한 곳이다. 사리는 한 젓가락 집으면 끝이고...육수도 글쎄...)도 있고 우정스포츠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냉면집들이 몇 군데 있고 또 현대백화점 에스컬레이트 입구 맞은편의 함흥냉면집도 최상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퀄러티를 보장하는 곳이다. 그런 곳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배를 끌고 간 곳은 율촌냉면(구월산 족발집에서 아래로 오십미터 정도, 현대백화점 일층 옆문 바로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이었다. 왜냐면? 내가 저녁타임에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 지성의 명철함보다 대중운동의 우위를 믿는 나로서는 꿩 잡는 게 매라는 고래의 격언을 믿을 수 밖에 없고 사람 몰리는 곳이 맛집이라는 진리의 역관계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뜨, 그러나 냉면을 먹은 후 선배는 나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나는 담담히 그 욕설을 배불리 먹었다. 자, 그렇다면 율촌 칡 냉면이 맛이 없었던가? 따지자면 꼭 그런건 아니다. 가게에 들어 갔을때 테이블이 딱 하나 남아있었던 것을 보고 '음 잘왔군' 하는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었으나 너무 시끌벅적하고 어린 친구들이 많았던걸 보곤 좀 의심의 여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여튼 그러다가 칡냉면 대짜 두 그릇이 서브되어왔다.


이건 뭐...그래 맛있다면 맛있을 수도 있다만 그 맛이라는게...학교 앞 분식점 냉면맛이라는게 문제였다. 나도 매운 음식 좋아하고 매워서 맛있는 음식도 있고 매워야만 하는 음식도 있다. 그리고 단 음식도 마찬가지다.(단 음식 일반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치만 냉면이 그래선 안된다.


근데 이 냉면은 매콤달콤의 극치였다. 고삐리때 학교 앞 분식점에서 그 당시 가격으로 천이백원 주고 먹던 냉면, 지금도 어느 중고등학교 앞 분식점에 가면 이천오백원 정도를 주고 먹을 수 있는 그 냉면...바로 그 맛이었던게다--;;사골육수와 동치미 국물이 조화된 시원하면서 구수한 육수는 간 곳이 없고 사이다에 고춧가루 탄 맛의 육수가 그 자리를 차지했으며 씹히는 맛이 중요한 편육과 채썬 배도 없고 냉면 그릇에 담긴 거라곤 시커먼 칡사리와 오이, 무채, 시뻘건 고춧가루 그리고 마치 물에 빠져죽은 개미떼 같은 통깨들...


물론 나도 이런 음식들 먹고 또 어떨땐 좋아하기 까지 한다. 근데 이건 말이지 라면 집 혹은 수제비 집에서 곁다리 메뉴로 끼워 판다던가 아니면 떡볶이를 서브메뉴로 하는 냉면 전문 분식집의 맛인거지 냉면과 설렁탕을 메인으로 내세우는 식당의 맛이 아닌게다.


언어가 그렇듯이 음식 또한 언중 아니 식중(衆)에 맞춰 갈 수 밖에 없고 또 맞춰가야만 한다만 이런 분식점 냉면을 5500원씩이나 받아먹고 또 그런 식당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건 뭔가 좀 찝찝하다. 나 또한 언젠가  붐비지는 않되 주인과 손님 서로가 만족해 하는 일품요릿집을 했으면 하는 꿈(--;;)이 있어 그런지 모르겠지만 뜬금없이 메이냐드 케인즈의 발언이 생각난다. 뭐랬더라? 자본주의하의 경제가 돌아가는게 미인대회랑 마찬가지긴 한데 개별 주체들이 좋아하는 미인을 고르는게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미인을 고르는거라 했던가? 어쩌면 이 글 읽고, ‘그래 내가 원하던 냉면은 바로 이거야’ 하면서 찾아갈 사람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네.

 

 

첨언: 이 글은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내 글을 수정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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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오늘(9.7) 멕시코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영면

1949년 9월 7일 멕시코의 화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Jose  Clemente Orozco,1883-1949) 가 영면했다.  오로스코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레스코 화가로 꼽힌다. 오로스코 라는 이름만 들으면 누굴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듯 싶어 오로스코와 항상 함께 등장하는 두 이름을 나열해본다. 그 이름들은 바로 디에고 리베라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오로스코, 리베라, 시케이로스 이 3인은 멕시코 벽화운동의 주역으로서 전세게를 휩쓸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소설들 보다 더 일찍 마술적 리얼리즘과 민중의 생활을 프레스코 벽화로 널리 알렸다. 힙합문화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그래피티 또한 이들의 벽화운동의 세례를 깊이 받았고 바스키야를 비롯한 현대 미술들도 이들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심지어 80년대 이후 나타난 한국의 벽화운동, 걸개그림 운동들 또한 이들에게 뿌리를 대고 있다.

 

그렇다면 멕시코 벽화운동은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멕시코 벽화운동은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에밀리오 사파타와 판쵸 비야의 혁명에 닿는다. 멕시코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보다 오히려 더 앞선 것으로 20세기 최초의 사회혁명으로 불린다.

 

사파타와 판쵸비야는 결국 혁명 이후 죽임을 당하고 오브레곤이라는 정치지도자가 통일을 하게 되었지만 오브레곤 또한 사파타의 농업개혁-무상 농지 분배, 이 문제로 인해 아직까지도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은 투쟁하고 있다.-을 자신의 혁명정부에서 받아들였고 곧이어 그 혁명정부는 1917년 혁명헌법을 통해 국토와 지하자원이 국가소유임을 명확히 함으로 미국의 간섭을 거부했다.(멕시코는 알고 보면 뜨거운 전통을 지닌 나라다. 멕시코의 대표적 대학인 UNAM대학 또한 전세계 대학중에 투쟁 순위로 따지자면 몇 손가락 안에 들만하다.)

 

뿐만 아니라 정교의 분리, 혁명의 주역이었던 메스티조와 인디언의 지위 향상등에서 볼때 금세기 전반부 멕시코는 눈부셨다. 트로츠키가 왜 뜬금없이 멕시코로 망명해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 뒤에는 이런 배경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여튼 멕시코 혁명을 마무리 지은 오브레곤 정권은 작가 호세 바스콘셀로스를 문교부 장관에 임명했다. 바스콘셀로스는 종합적 국가 교육안을 실행했으니 문맹, 무학에 시달리는 농민과 자녀들을 위해 많은 교사들은 하방시켰다. 국가차원의 브나로드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교사들은 살해, 폭력에 시달렸다. 농부들이 교육 받는 것을 두려워한 멕시코 대 농장주들의 짓인 것이다.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의 대부들은 오늘날에도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교사들은 계속 시골로 시골로 향했고 국가 또한 굴하지 않았다.  

 

이러한 국가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가 바로 벽화 지원 계획이었던 것이다.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벽화(프레스코화)를 그릴 수 있도록  화가들에게 공간과 자금을 지원한 것이다. 멕시코 벽화운동은 이렇게 시작된것이니 오로스코, 리베라와 시케이로스는 벽화운동을 이끌며 민중들을 자극했다. 이 운동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전세계적 이슈로 떠올랐다. 얼마전 이 시대를 다뤘던 영화도 나오지 않았던가? 셀마 헤이엑 주연의 '프리다 칼로'( 사실 이런거 보면 유명하고 대단했던 넘들도 여성들한테 대하는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근데 이런 전통을 가진 멕시코에서 왜 오늘날에도 사파타의 후예들 (사파티스타)들이 치아파스에서 투쟁하고 있을까?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역시 여기에도 적용된다. 멕시코 혁명정부는 1927년 제도혁명당을 창당했다. 제도 혁명당은 라틴 아메리카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당으로 불리는데 너무 성공적인 나머지 70여년을 장기집권 해버린 것이다--;; 제도혁명당의 존재는 모든 급진적인 정치세력들의 부상을 막았고 제도혁명당 지도부는 그들의 투쟁 대상이었던 아시엔다(대농장주)와 미국과 앞으로는 싸우면서 뒤로는 짝짜궁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비판적 지지 뭐 이딴거 생각나지 않나?)

 

그리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메스티조에게 사회적 시민권을, 제국주의의 간섭 철폐라는 사파타의 혁명정신과(제도 혁명당이 배반해버린) 사파타의 후예들이 다시 나타난 게다.  사파티스타는 NAFTA(북미 자유무역협정) 발효에 맞추어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며 치아파스 라칸돈 정글에서 1994년 1월 1일 봉기g했다.  "오늘, 우리는 말한다. 이제 그만좀 해!(Ya! Basta!)"....그들이 내건 선언문의 제목이다. (몇년전에 어떤 학생운동 그룹이 이걸 따와서 쓰기도 하더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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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 이번엔 꼭 되라!

나도 앙겔루스 노부스를 읽었답니다. 진중권 이름값이 한창 인지라 출간될때 언론도  꽤 탓고 책도 어느 정도 팔린 모양이던데 정작 책이 꽤 나간 후에는 전혀 이슈화가 못 되더군요.

 

그 책을 읽으면서 뭐랄까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지요. 진중권의 최대 장점중의 하나인 스타일 상의 경쾌함이 엿보이지 않더라구요. 아마 온라인 상에서 온갖 글들 쏟아놓고 정치적 이슈들로 이전투구 하는데다가 신문 같은데서도 진중권한테 원하는게 그런 것이니 자기도 좀 힘들었겠죠. 그래서 맘 먹고 쓴 책이라 오히려 역편향을 보인건 아닌가 싶네요.

 

신천사라 길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앙겔로스 노부스를 번역한 말이군요.^^ 

 

'미래를 위해 과거를 조직하라!등 뒤의 미래가 아니라 파국의 현재를 바라보라.' 이런 진중권의 벤야민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만...그래도 나 자신은 과거의 재구성, 현재를 조직화 하는 것은 전망을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촌시런, 단선적인, 좀 안이한 관점을 져버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미래로 밀려나다니...머 미래로 밀려나는게 맞기야 하겠지만 인정하기 싫은 것도 같고 ㅠ.ㅠ

 

첨언: 이 글은 新天使(신천사)와 연쇄 작용 에 관한 트랙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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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국으로 살펴본 신촌의 외식 문화

집에서 요리를 잘 안 한지가 벌써 몇달이 지났다. 일단 집에서 밥먹는 횟수가 줄어든 탓도 있고 식 재료를 사놓았다가 상해서 몇 번 버린 이후로(김치 냉장고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김치 맛도 유지되고 야채랑 과일도 정말 오래 가던데..)는 기껏 해 먹어봐야 통조림 꽁치 조림, 카레, 김치찌게, 된장찌게 정도다. 레시피도 자꾸 까먹는것 같고 요리 실력도 줄어드는 듯 해서 속이 상한다.(요즘 사무실에선 엄청나게 요리하고 있지--;; 직책수당 신설하랏!)

 나는 음식 만드는것도 즐기고 맛있는 음식 찾아먹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다. 회사 다닐 땐 나름대로 특기와 취미를 살렸는데 요즘은...ㅠ.ㅠ 맛난 음식 해먹는 것, 찾아서 사먹는 데 돈도 필요하긴 하지만 필수적인건 외려 부지런함이다.

 

이렇게 먹는 것에 예민한 나의 관점에서 볼때 내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신촌은 정말 맘에 안 드는 동네다. 이 동네 정말 먹을 것 없다.(패밀리 레스토랑이나 패스트 푸드점 같은 공장표 음식을 제외하곤) 명물거리에 몇군데 돈주고 사먹을 만한 메뉴와 맛을 갖춘 식당들이 있긴하지만...

 글쎄 내 생각엔 20대 여성의 비위 맞추는데 급급한 나머지 맛보다는 음식의 외형이나 인테리어, 화장실 시설에만 신경쓰는 집들이 다수 인 듯 하다. 그러나 어쩌랴 업주들은 여성의 지갑을 여는 것도 여성이요 남성의 지갑을 여는 것도 여성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니~

경상도 음식이 맛없다는건 널리 받아들여지는 통설이지만 부경지역 음식 중엔 손에 꼽을 만한 것이 몇가지 있다. 특히 단품 식사류에 강점을 보인다. 예컨데 돼지국밥, 밀면, 경상도식 추어탕 등등이다. 그 중에서도 첫손을 꼽으라면 그건 지상 최고의 해장국인 복국일게다.

부산 본가(아 물론 삼년전에 이사가 지금은 아파트 촌에 살지만) 주위에 법원, 검찰청, 대학병원, 구 도청, 학교등이 산재해 있었기에 참 맛깔 난 음식점 들이 많았다. 말 그대로 료릿집들도 많았지만 까다로운 공무원들 입맛을 맞추기 위한 재첩국, 복국, 추어탕 집들은 가격대 성능대비가 참으로 훌륭했고 지금도 그렇더라.

하여튼 요즘 복국이 정말 먹고 싶다. 신촌 이 동네도 복집들 몇군데가 있더라만 딱 보면 꽝이라는걸 안다. 새로 간판 올리는 주제에 무슨 무슨 전통의 복집 어쩌고 하는 과대포장을 하는 곳들, 객단가 높일 라고 무조건 복사시미나 복정식을 주메뉴로 떡하니 내미는 곳 하며 정말 맘에 안 든다.  일반 한식류 특히 단품 전문점 같은 경우엔 식당 겉모습과 주인장 인상만 봐도 맛있는 집인지 아닌지 바로 진단이 나온다. 물론 임대료나 권리금이 높은 탓도 있겠지만 객단가 높인다고 어디 매출이 뛰고 회전률이 높아지던가?

 

서린동 SK 본관 옆에 있는 식사 시간이면 대가리 터지는 모 식당의 경우 메뉴는 사시사철 5000원 짜리 대구탕 하나다. 강남권도 그렇다. 무등산 이나 삼원 가든 같은 곳도 물론 있지만 5500 혹은 6000짜리 설렁탕으로 저력을 자랑하는 식당들이야 말로 진정한 그 동네의 강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볼때 신촌의 음식문화는 너무나 저급하다. 이건 기본적인 퀄러티는 유지하되 양과 가격에서 강점을 보이는 대학가 공통의 장점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생겼다가 망하길 반복하고 한 해는 찜닭의 광풍 한해는 불닭의 광풍식의 지랄 용천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으니..이런 저급성은 업주들만의 탓이 아니라 지역 소비자들의 취향에 기인하는 바도 클거다.

 

그나마 신촌에서 저력을 자랑하는 식당(구월산이나 철대문집)은 서대문 지역 아저씨, 아줌마들과넥타이 부대가 주력군인 실정이다. 문화의 불모지 신림에도 순대볶음을 랜드마크로 내밀고 고대 앞은 아직도 제기시장이나 이모집이 건재한데 신촌은 뭘 랜드마크로 내밀 수 있겠나? 신계치나 신선 설농탕도 돈 좀 벌곤 공장이 되버렸다.

복국 이야기 하려다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버렸는데 복국은 정말 훌륭한 음식이다. 일단 복국은 자격증 소지자들이 끓인다.(아 물론 식당 주방에서 메인 볼라면 조리사 자격증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도 개나 소나 다 따는 자격증이 아니라 독극물 관리사에 버금가는 조련과 경력을 쌓아야 얻을 수 있는 복조리사 자격증 소지자들이 끓이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집이던 일단 기본은 유지한다.

 

그리고 모든 뛰어난 음식이 그렇듯 복국은 재료 자체의 맛을 충분히 끌어내는데 역점을 두는 음식이다. 들어가는 거라곤 복, 콩나물, 미나리, 다진 마늘 약간, 소금 약간이 전부다. 쫀득쫀득과 쫄깃쫄깃의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씹는 맛을 지닌 껍질 부터 흰살 생선 특유의 퍽퍽함과는 거리가 있는 담백함을 지닌 속살을 초간장에 찍어 먹는 맛은 말할 것도 없을 뿐더러 시원하면서도 위를 묵직하게 눌러주는 그 맑은 국물 맛에 비견될 만한 것은 없다. 잘 끓인 전주 남부시장식 콩나물국 정도가 비견될 만하다.

아 침이 키보드 위로 막 떨어지려고 하는구나. 특히 술 먹은 담날 사우나 후에 복국 한 그릇 떄리고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을 훔치는 그 맛이란~ 캬....

첨언: 이 글은 약 4개월전 싸이 미니 홈피에 쓴 글을 약간 수정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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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마시께따' 디렉토리 와 어원의 소개

이 디렉토리에선 음식에 관한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간단한 요리교실에서 부터 음식 비평, 식문화 비평, 맛집 소개, 절대 피해야 할 식당 소개까지 그리고 식문화와 사회현상, 철학, 역사 속의 음식 등등 하여튼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들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사실 이런 걸 쓰려면 잘 먹고 자주 만들고 그래야 되는데 요즘 나의 식단은 거의 일식삼찬 수준이고 맛난거 사먹으러 다닐 시간과 능력이...ㅠ.ㅠ 그래서 글을 써서라도 먹거리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이 디렉토리를 만들었다. 초기엔 예전에 내가 썼던 글들이 자주 올라오게 될 듯 하다.

 

근데 걱정 되는게 한가지가 있다. 사실 음식에 관한 웹컨텐츠들이 인기를 끌려면 화려한 사진빨을 자랑해야 하는데 내 능력상 그건 정말 무리다--;; 하지만 화려한 사진 보고 흘리는 침보다 글을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흘리는 침이 양도 많고 훨씬 끈적끈적 할거야^^

 

첨언: 아 참 '라 마시께따'라는 디렉토리 제목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것 같아 어원을 밝힌다. 97년도에 유럽을 세달 동안 돌아다닌적이 있었다. 서유럽에선 비싸서 맛난 것도 잘 못 먹고 닭도리탕이나 해먹고 돌아다니곤 하다가 유럽의 변방으로 가선 참 잘 먹고 다녔다. 그 중에서 이베리아 반도 음식이 참 맘에 들더만....바르셀로나, 마드리드 같은데야 물가 비싸지만 스페인에서도 시골로 내려가면 빠에야 같은건 적당한 가격에 많은 양과 풍부한 맛^^

 

특히 교통이 불리해 남들은 잘 안가는 포르투갈을 갔을땐 정말 죽였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버스를 타고 그리 오래 가지 않으면 카보 다 로카 (로카 곶,유럽의 끝이다. 거기서 헤엄쳐서 계속 가면 아메리카 대륙이 나온다. 섬하나, 바위 하나 보이지 않는 끝없는 수평선이 보이는데 정말 매혹적인 곳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해남 땅끝은 좀 별로다. 섬들이 워낙 점점히 박혀있는지라 땅끝이란 기분이 안 난단 말이지.)   

 

아 잡설이 너무 길었다. 하여튼 그 리스본 뒷골목에 있는 포르투갈 정통요리 전문 식당(파도 공연도 한다.) 의 이름이 바로 '라 마시께따' 이다.................라고 할 줄 알았겠지만 '열라 마시께따'(맛있겠다)란 경상도 사투리에서 그냥 '열'을 떼버린고 지은 이름이 바로 '라 마시께따' 인 것이다. ㅋㅋㅋ

 

뭐라고??? 열받는 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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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오늘(9.6) 건준,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1945년 9월 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주석은 이승만--;; 헷갈리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지적하는 거지만 건준의 '인공'과 이북의 '인공'은 줄임말은 같지만 다른거다. 건준의 인공은 말했다시피 조선인민공화국이고 이북의 그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말이지.

 

이 디렉토리를 관심있게 읽어보고 있는 사람은 눈치챘겠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사건들은 상호 영향을 받고 있다. 45년 9월 6일 건준이 좀 급작스레 인공을 선언한 것은 4일 전 있었던 일본 항복 조인식(45.9.2) 의 영향이 크다. 미소의 분할점령이 공식화 되자 건준 측에선 마음이 급해졌고 양측 군대가 본격적으로 조선반도 전체를 점령하기 전에 건준의 위상을 기정사실화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좀 급작스럽게 인공을 선언했는데 기정사실화는 커녕 미소양군은 기냥 썡까버렸다.(소련은 약간 다르긴 하다.) 미소양군 뿐인가? 좌에서 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파의 정치지도자들 조차 콧방귀만 뀌어버렸으니...오늘날의 관점에서 볼때 조급한 인공의 선언은 패착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인공 선언 이후 건준은 착착 인민위원회로 조직을 전환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는 극우반공주의자를 제외한 좌파 부터 중도우파까지 다 참여했었다고 한다. (심지어 김대중도...이거 떄문에 빨갱이 소리를 오래 듣긴 했지만.) 그러나 그 인민위원회들을 인공이 제대로 제어 할 수 있었느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올시다ㅠ.ㅠ

 

물론 인공 선언은 조급했지만 그 주체인 여운형은 일제최말기에 이미 건국동맹을 조직했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로 부터 치안유지를 부탁받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직후 대중성이 있으면서도 친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국내 정치지도자는 여운형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각 지역별로 자치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컸기에 45년 8월 31일에는 건준 지부가 전국적으로 145개에 달했다고 한다.

 

하여튼 미 군정의 통제가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이승만이 45년 10월 16일에 미군용기를 타고 귀국해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인공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아버리면서 인공은 점차로 유명무실해졌다. 비극이라기엔 좀 비장미가 떨어지고 소극이라기엔 너무 꿀꿀한 사건이다.

 

그런데.....건준은 뭐가 좋다고 이승만을 인공의 주석으로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렸을까? 임시정부 주석당시의 공금횡령, 조선의 미국편입 주장 논란등으로 임정라인과 사이가 클어진지가 수십년이고 골수 반공주의자라 좌익계 항일세력과도 친하지 않고 미국에서도 장인환, 전명운 의사 재판 통역 거부부터 시작된 지속된 스캔들로 악명을 떨쳤는데 말야..

 

여기서 한 에피소드를 들여다 보자.

 

해방 후 첫 여론조사는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 사이에 실시됐다. 그 결과는 당시 우익 성향의 선구회가 펴낸 잡지 《선구》12월호에 게재됐다.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 1위는 누구일까? 몽양 여운형이다. 2위는 이승만. 1위와 2위의 차이는 12%로 몽양이 33%의 지지를 받았다. ‘생존 인물 중 최고의 혁명가“를 묻는 질문에도 몽양은 단연 1위였다. 그러나 정작 ‘내각이 조직될 경우 대통령감으로 적당한 인물’항목에서는 이승만이 1위를 차지했으며 여운형은 외무부장감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 이유가 뭘까? 내가 추측하기엔 이승만도 일단 항일은 항일인게 확실한데다가 큰 항일 단체 옆에서 좋던 나쁘던 항상 소란을 일으켰기에 독립투쟁의 중심인물로서 민중들에게 확고히 인식되었던게 아닐까? 게다가 초대 임정주석이기도 했을뿐더러 일본의 자리를 미국이 차지하게 됨에 따라 미국박사, 영어능통한 이승만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는 클 수 밖에 없었던것 같고..

 

권력을 잡고자 하는 자들이여 이슈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말지어다! 잊혀지는 것보다야 욕먹는게 훨씬 낫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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퀵 라이더 이야기

미디어의 역할이 뭘까? 폭로? 고발? 뭐가 제일 중요한 역할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의제선정도 몇손가락 안엔 꼽힐꺼다. 그런면에서 이 기사는 영 꽝이다.--;;

 

라이더 연대(퀵서비스 오토바이 기사들의 모임 http://onquick.ce.ro)의 초동주체 두사람의 전화를 받고 인터뷰를 하면서 간만에 좀 찡한 걸 느꼈다. 뭐 찡하고 열받는 일들이야  많지만 내가 짐작도 하지 못한 곳에 숨겨진 진실들을 알게되서 느낀 찡함은 또 다른더라.

 

구구절절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하여튼 난 기사는 기사고 이 양반들의 조직화와 투쟁에 직접적 도움을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 또 의제화 시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매명욕이 그 안에 1%도 없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일단 내 기사 자체는 아무 반향도 없다.--;; 그리고 몇군데 다른 매체에다가 초동주체 연락처랑 상황들을 토스했는데 역시 별 무반응(한군데서 월요일날 취재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분들이 그동안 총연맹 서울본부, 서비스 연맹등등도 좀 쑤시고 다닌 모양인데 별 호응이 없는듯 하여 컨택 시킬만한 곳을 좀 알아봤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고...그냥 서울본부에만 잘 부탁한다고 전화 한 통 떄렸는데 어케 될란간 두고 봐야 알겠다. 우리 센터에 호스팅 하면 보안 문제나 고소고발 건은 걱정 안해도 된단 말을 하긴 했는데...꼭 영업 뛰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만 찝찝했고..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가 나간 후에 초동주체로 부터 감사전화를 받았다.^^ 꺽꺽 목메는 음성이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리는데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고 뭐라 말해야 될지도 모를 정도로 흥분하시더라. 내가 미안할 정도로...이 때 기분은 참 좋았다. 이런 느낌 계속 갖고 가야지...

 

그 통화 이후에 '그래 내 눈엔 안보이지만 어딘가에선 라이더 연대 문제가 아젠다로 떠오르겠거니'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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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오늘(9.5) 북한특사 허담, 비밀리에 서울방문하여 전두환과 회동

1985년 9월 5일 당시 북한 대남담당비서 허담과 유엔대사 한시해가 비밀리에 휴전선을 넘어와 전두환과 회동했다. 허담은 '각하(전두환)과의 평양 상봉이 이뤄지길 기대한다"는 김일성의 친서를 갖고 방문했으며 그로 부터 두달 뒤에는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과 박철언  청와대 보좌관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동을 가졌다.

 

알다시피 휴전 후 대북밀사는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72년에는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상호방문이 있었고 그들은 각각 박정희, 김일성과 회동을 갖기도 했다. 그 결과 물이 7.4 남북공동성명이다.  뿐인가? 516 직후 내려온 비운의 밀사 황태성(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친구로 대구경북 10.1항쟁의 적극적 가담자, 남로당계열로 북에서 경공업성 부상을 지냄)도 있지 않은가? 물론 그 뒤에도 밀사는 있었다.

 

 90년에는 당시 안기부장 서동권이 북에 밀파되어 김일성, 김정일과 연속 회동을 가졌다. 이들은 남북교류협력법이 생기기전에 비밀리에 대한민국을 잠입탈출하여 김일성에 대한 극찬(주석님, 애국자운운)을 하며 고무, 찬양을 하고 한국의 정보를 알림과 동시에 대화를 합의함으로 백번 죽어 마땅한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이다! 그러나 molot는 국보법은 국보가 아닐뿐더러 당장 폐지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기 떄문에 이들을 국보법으로 소급적용 처벌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이런 남북 간의 비밀 회동들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짚어보아야 한다.

 

먼저 516 직후 파견된 밀사 황태성은 간첩죄로 사형 당했다. 박정희와 개인적 친분이 깊었던 그는 왜 사형당했을까? 여기에서 지난  '오늘은'의 한편을 떠올리시라.(이 디렉토리를 꾸준히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의 차이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리비아 카다피의 쿠테타를 설명하면서 60년대 말 3세계에선 청년장교들에 의한 쿠테타가 대유행이었다고 밝힌바 있다. 그 성격은 주로 민족주의적, 반기득권(기득권은 친미세력), 사회주의가 가미된 경제체제를 핵심으로 한다. 한국의 쿠테타 또한 농촌 출신의 청년장교, 사회주의 전력이 있는 박정희 중심, 구체제에 대한 환멸등을 기본 배경으로 깔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케네디 미 행정부로 부터 상당한 의심을 받았던 것이다.

 

그 의심 받은대로라도 하면 좀 좋으련만 박정희군부 세력은 친미만이 살길이요.를 외치고 있던 차라 황태성을 접촉하면 미국이 갈굴까 싶어서 기냥 바로 총살에 처해버린것이다.

 

72년의 남북 밀사 파견 또한 별 다르지 않다. 어느정도 장기집권과 경제성장에 자신을 얻은 남북의 독재자들은 국내정치에 이용하기 위한 속셈으로 밀사를 파견하고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그것에 흥분했던 남북 양측의 민중들만 속은 셈이었다. 자 72년 남북공동성명 이후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의 확립, 김정일의 전면배치, 왕창 숙청하고 그 나마 남았던 제 세력의 숙청으로 이어졌고 남한에서는 10월 유신--;;체제가 들어선 것이다. 도대체 이게 머냐고????

 

이 지점에서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에 대한 기억을 각자 되짚어 보시라. 그리고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라는 개념 또한 떠올려보시라. 남한에선 북한이 독재하니까 우리도 대응하기 위해선 민족적 민주주의(우웩)을 강화해야 한다며 설레발을 떤거고 북한에선 미국의 압잽이 박정희가 독재를 하니 우리도 천리마 정신을 강화해야 하고 주체를 중심으로 뭉쳐야 된다며 민중들은 쪼게 된거다.

 

85년도 그닥 다르지 않다. 뜬금없이 대통령 자리를 꿰찬 전두환은 81년 1월 국정연설에서 조건없는 최고책임자의 상호방문을  여론타개책의 일환으로 제시했다. 북한의 반응은 썰렁했으나 83년 아웅산 테러 이후 북에 대한 국제 여론이 싸늘해지자 84년에 들어서면서 북한 또한 대화의 필요성(혹은 대화하는 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두환은 85년 초에 영원한 의리맨 장세동에게 정상회담 추진을 명했고 결국 그 와중에 남북한의 밀사가 상호방문을 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정상회담에는 이르지 못했으니..그 이유를 짚어도록 하자.

 

당시 안기부 문건에 따르면 남측의 정상회담 추진목표에는 북의 대남혁명전략 포기 유도 및 전쟁방지, 북의 남북한, 미국 3자회담 주장 무력화, 86년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등이 포함돼 있었고 북의 회담 전제조건은 정상회담 내용은 7·4 공동성명에 근거한 통일방안 마련과  불가침 선언이 되어야 하며 그 선행조건은  군사훈련 중단(지금은 안하는 팀스피리트), 상호비방 중지 등이었다. 둘 다 한발짝도 양보 안하니 될 턱이 있다.

 

하여튼 이런 생쇼 특사 파견은 남북 양측 독재자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있어왔다. 앞으론 박터지게 싸우면서 뒤로는 지들끼리 '딜'하고 말야. 그러면서 민중들은 맨날 반공궐기 대회나 미제규탄대회에 동원이나 시키고...

 

결국 00년 615에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전세계에서 이 광경을 보며 가장 배아파 한 사람은 누구? 바로 03)  이전에 비하면 확실히 전향적이긴 하지만 5억불을 싸발랐느니 하며 보수정치권에서 싸우는 꼴이라던지, 우리는 태양민족이에여~ 조선민족이여 일어나세~ 615선언만 이행하면 만고 장땡~을 외치고 있는 일부 운동세력을 보면 내 참. 멀어도 많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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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뉴스 베타 서비스 실시!!

포털들이 제각기 뉴스 서비스를 실시해 재미를 보고 있는 가운데 세계최강자(?)구글이 드디어 한국판 뉴스 서비스를 개시한다. 현재는 베타 서비스( http://news.google.co.kr/?promo=hpp-newskr)

 

미국판으로는 몇년전(정확히는 모르겠음. 일이년전일지도)부터 서비스를 개시했는데 그 알고리즘을 그대로 한국에 도입한것이다.

 

뉴스 편집이 자체 알고리즘에 따라 자동으로 실행되고 그 개별 뉴스마다 관련뉴스들이 또 자동으로 따라붙는다. 지금 확인 해보라. 일단 엄청난 정보량과 일목요연한 분류가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즉 에디터가 기사 중요도를 판단해서 편집하는게 아니라 키워드 검색으로 모아진 뉴스들의 클릭수를 중심으로 하여, 그 기사를 실은 매체의 인터넷 영향력 (예컨데 같은 내용의 기사가 조선일보와 한겨레에 떳다 치자. 한겨레 기사가 클릭수가 월등히 높다면 한겨레 기사가 위로 올라가겟지만 클릭수가 같다고 가정할땐 조선일보 기사가 위로 뜬다, 왜냐? 웹상에서의 지표와 영향력을 볼때  디지털 조선이 더 우월하기 떄문이다.) 까지 포함한 기준들이 알고리즘에 적용되어 자동 편집되는거다. 놀랍지 않은가?? ( http://news.google.co.kr/intl/ko_kr/about_google_news.html )

 

미국현지 포털들의 뉴스서비스 시장이 어떤식으로 할거되고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스킨과 디자인만 좀 가다듬으면 한국구글의 뉴스서비스는 돌풍을 일으킬 것 같다. 카인즈도 타격을 입을테고 네이버 뉴스도 큰 타격을 입겠군. 자체 기사를 생산하는 다음은 그 비중을 높이고자 애쓸것 같고..

 

구글뉴스를 한 참 들여다 보고 있는데 보면 볼 수록 기가 질린다.오리지널 판 구글 뉴스의 특징은 시시각각 뉴스 방향이 널뛰듯 한다는건데(십분전에는 보수적 기조이다가 십분후에는 또 열라 진보적 기조로 돌변) 그건 이 뉴스의 독특한 편집 시스템 떄문이다. 미국판 구글뉴스에서도 검증됐듯이 여기서 현재 여론의 추이를 캐취할 수 있다. 예컨데 캐리를 칭찬하는 기사가 부시를 칭찬하는 기사보다 상위에 여러개가 동시다발적으로 뜬다면 현재 캐리를 칭찬하는 뉴스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내고 있다는거다. (물론 캐리 지지율이 지금 높다는 식으로 바로 연결되는건 아니다. 하지만  눈 빠른 사람들은 연관성을 찾아내겠지)

 

뿐만 아니라 구글 뉴스 각국판을 보면 그 해당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는거다. 이런건 우리도 유용하게 써먹으면 될 듯 하다.

 

하여튼 요약하자면 다른 사이트들에서 생노가다해서 결과물을 내놓으면 구글은 그걸 지표화해서 알멩이만 뺴먹는 시스템인거다. --;; 아 위대한 google이여......ㅠ.ㅠ

 

인터넷 미디어 종사자로서(얼마나 됐다고--;;) 정말 갈 길이 멀다는게 다시금 느껴진다.

자본으로 무장한 저들의 재주는 끝간데 없이 농간을 부린다. 현장에 노트북(노트북 컴퓨터가 아니다. 말그대로 노트북-수첩, 공책)을 들고가서 기사 쓰는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

 

아 힘빠져라~ 하지만 어딘가에 약한고리가 있겠거니...그 고리가 절대반지려니 하고 찾으러 가자구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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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오늘(9.4) 아파치족 추장 제로니모, 5년의 투쟁을 접고 애리조나주에서 투항

 1886년 9월 4일 아파치족 추장 제로니모가 5년간의 투쟁을 접고 35명의 전사들을 거느린채 아리조나주에서 넬슨 마일드 장군에게 투항했다.

 

사실 널리 알려진 제로니모라는 이름은 인디언 전사의 이름이 아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고야플레이'(하품하는 사람)이고 제로니모라는 이름은 죽기 6년전 네덜란드 개신교회 신자로 개종하면서 개명한 이름이다.

 

투항직전에 제로니모의 목에는 3,000$의 현상금이 걸려있었고(지금 화폐가치로 따지면 거의 오사마 빈 라덴 수준의 현상금이다) 제로니모는 '역마차' '아파치'등등 수많은 서부영화에서 악역으로 등장했다. (개중에 품위있는 전사로 그린 영화도 있다만)

 

아파치 족에게는 호전적이고 잔인한 부족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고 심지어 아파치란 이름은 미군의 주력 공격헬기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하여튼 제로니모는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일대에서 화력과 인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어차피 제로니모가 전투를 시작하게 된 것도 미국연방 정부 때문이다. 인디언들을 서족으로 서쪽으로 몰아내던 미국의 프런티어가 결국 태평양까지 다다르게 되자 미국 연방정부는 19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보호구역이라는 우리 안에 가두고자 했다.

 

이에 반발한 것이 바로 아파치족이고 제로니모 인 것이다. 제로니모의 투항을 끝으로 아메리카 인디언과 미 연방정부의 집단적 충돌을 끝이 났다. 그 이후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박제화 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제로니모는 1909년 2월 17일 오클라호마의 실 요새에서 전쟁포로의 신분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첨언:제로니모 자신이 구술한 자서전이 올해 한국에서도 출간된것으로 안다. 나도 북리뷰 기사만 봤을뿐 읽어보진 못했다. 출판사는 '우물이 있는 집'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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