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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요지경

어제 주간동아 이나리 기자(이 양반은 신동아 에 있었는데 주간 동아로 옮긴 모양이다. 이 양반은  탁월한 인터뷰어다.황호택 따위는 잽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열정과 결핍이라는 단행본도 낸걸로 아는데 통화해보니 역시 우라까이에 급급한 다른기자들과는 다르더라. 나도 오래 이야기 할 맛이 났고...) 랑 통화하다가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루당에서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물타기 하는건 이미 알고 있었고 뭐 지들 그럴만도 하겠지 싶었지만...어제 정확한 워딩을 들으니 황당하고 열받고 아조 기분이 더러워졌다.

 

1. 열우 과거사 캐내기 조직을 가동중인데 그 팀의 첫작품이 신기남 건이다.(고로 나는 그 조직의 일원이라는 셈)

 

2. 내가 자료를 들고 한나라당 갔다가 신빙성 없다는 이유로 못팔고 그 담에는 다른 당 갔다가 그래도 못 팔아서 결국 인터넷으로 터뜨렸다.(이런 이야기 하는 넘들은 내 원글을 읽어봤을까?)

 

1,2를 슬슬 기자들한테 흘리면서 한 번 캐보라고 한단다. 뭐하나걸리면 다행이고 아니면 말고란거겠지...나쁜쉐이들..게다가 유시민이 했다는 소리를 듣곤 기가 턱 막히더라.

 

이나리 기자한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다가 난 이렇게 답했다.

 

"'사실 우리 학교 총장 출신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하고 선배인 이광재, 서갑원 의원등으로 부터 당권파를 쳐내기 위한 오더를 받았다 그래서 기획한 건이다!!' 라고 말했다고 류시민 의원께 꼭 전해주세요."

 

막 웃더니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사실은 오픈해도 되겠냐기에 그러라고 했다.

 

그래 니들맘대로 갖고 놀아라. 하여튼 나중에 제자리에만 돌려놓길 바란다는 심정이다. 엄마가 그제 들려준 이야기로도 황당했건만...울엄마랑 정형근 여동생이랑 고등학교 동창이다. 친구들 모임에서 정형근 동생이 이번 건을 듣고 막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고 한다--;; 사위삼고 싶다고 했다나 머라나?  울 엄마도 얼척이 없어 하고...아 하여튼 세상은 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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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오늘(8.28) 후안 사마란치,제 1회 서울 평화상 수상결정

1990년 8월 28일 후안 사마란치 당시 IOC위원장이 제 1회 서울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상금은 미화 20만불.

 

서울 평화상이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상이다. 88올림픽이 끝나고 흑자를 좀 많이 봤다고 해서 전두환의 명에 의해 제정된 상인데 그야말로 일해재단이랑 삐까먹는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수상자 면면을 살펴보자. 제 1회 사마란치 IOC위원장, 제 2회 조지 슐츠 당시 미 국무부 장관, 제 3회 국경없는 의사회, 제 4회 코피 아난 UN사무총장, 제 5회 오가카 사다코 UN고등 판무관, 제 6회 옥스팜.

 

사마란치는 올림픽을 통해 세계평화에 이바지 했다는 명목으로 조지 슐츠는 냉전체제를 타파했다는 명목으로(우엑. 이 자는 로널드 레이건의 오른팔로서 군비경쟁을 통해 소비에트를 어려움에 빠뜨린 바로 그 자가 아닌가?)수상했다. 그러나 사마란치가 88올림픽 개최권 획득에 힘 실어줬다는 이유로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마디로 정주영의 불도저식 로비에 넘어가준 댓가로 상도 받는다는것인데....진정한 꿩먹고 알먹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수상자만 보면 3회 부터는 뭐 좀 그럴듯하긴 하다. (이 상은 이년에 한번씩 시상된다.) 그러나 수상자들은 이 상의 권위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금의 액수에 놀라고 있는 형편이고 현재 서울평화상의 주체인 서울평화재단의 이사장은 이철승(해방정국 우익학생운동의 거두이자 사쿠라 야당정치인 출신의 반핵반김 전선의 선봉장)이 세번째로 연임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안 사마란치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후안 사마란치는 카탈루냐 지방의 은행가 집안 출신이다.(그렇다 조지 오웰의 소설 '카탈루냐 찬가'의 바로 그 카탈루냐이다.) 카탈루냐 지방은 스페인 내에서 바스크 와 더불어 독립적인 지역으로서 스페인 내전 당시에 공화파의 중심지역이기도 했다. 카탈루냐 찬가를 읽어보길...프랑코 왕당파가 아닌 스탈린 주의자들에 의해 무정부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공격받는 비참한 상황이 상세하게 다뤄지고 있다.

 

하여튼...후안 사마란치는 1920년 출생해 내란 이후 독재자 프랑코의 졸개로서 한 세상 잘 보낸 인물이다. 프랑코 정권의 외교관으로 출발했다가(몽골, 소련 대사 역임) 국제 스포츠계에 발을 들여다놓은 이후 승승장구 IOC위원장의 자리에 까지 올랐다.(한마디로 박정희 정권 외교관, 경호실 간부 출신으로 국제태권도 연맹을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빵에 들어가 지금은 콩밥을 잡숫고 있는 운용은 사마란치의 작은 버젼이라고 할 수있다.)

 

사마란치가 올림픽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던가? 1980년 IOC위원장에 오른 직후 올림픽은 냉전의 도구로서 사용되었다.(88올림픽이 냉전 올림픽의 마지막 꽃이었다.) 그 뿐 아니라 강력한 상업화 정책을 통해 그나마 체면 차리던 근대올림픽을 다국적 기업의 선전장으로 탈바꿈 시켰다. 막판에 자기 고향에 올림픽 개최 한 번 몰아준다음 명예위원장으로 자리를 바꿔치우고 지금도 잘먹고 잘 살고 있다.

 

첨언: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여전히 사마란치는 초특급 vip대우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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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오늘(8.27) 장준하 출생

 먼저 '오늘은' 을 기다리는 극소수의 독자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드디어 빵꾸를 냈다.--;;

변명을 하자면 이사와 결혼식(내 결혼식이 아니다!)을 비롯한 개인적 용무들이 많았다는건데...많은 이해 있기를 바란다. 물론 언젠가 또 빵꾸를 내겠지만 노력하겠다는 말씀 다시 드린다.

 

 1918년 8월 27일 장준하(1918-1975)가 평북 의주에서 출생했다.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는 꼿꼿한 대쪽의 그것이다. 장준하는 삭주 대관 보통학교를 거쳐(리영희도 삭주 대관 보통 학교출신이다.) 선천 신성중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일본신학교에서 학병으로 징집된후 이른바 '6천리 장정' (장준하의 '돌베게'와 김준엽의 '장정'을  참고하라. 나 개인적으론 돌베게보다 장정을 흥미롭게 읽어싸.)을 통해 광복군에 몸을 담았다.

 

그의 광복군 생활은 일년정도 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특기할 만한 사실은 김준엽과 함께 OSS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OSS- CIA의 전신으로 이차대전 당시 미군 정보기관) OSS교육은 국내진공을 위한 것이었으나 일군이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을 국내진공하고자 하는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김구가 일본의 빠른 항복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만일 일군의 항복이 좀 늦어졌고 광복군이 진공을 했다면 해방정국의 방향추는 아마도 좀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여러 증언들에 의하면 장준하는 해방정국에서 장준하는 광적이리만큼 반공적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우익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의 교무처장을 역임했는데 조선민족청년단은 육이오 와중의 부산정치파동(이승만 장기집권을 위해 국회를 압박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에 연루되기도 한 조직이다.

 

또한 장준하는 술 먹는 자리에서 잔을 뒤집어 놓고 성경책을꺼내 술상에 놓는 사람이었다고도 한다. 족청 교무처장으로 지낼 당시 훈련생들이 무기명으로 쓴 논문의 필적을 조사해, 누구 누구가 공산당 같다고 할 정도로 극우 사상을 가졌었다고도 전해진다.

 

장준하의 이런 극우성은 어디서 비롯된것일까? 물론 리영희도 통역장교 출신, 문익환도 마찬기지이고 함석헌은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의 배후 조종자 였을정도로 당시 서북출신 기독교문화권의 지식인들은 특히 우익적 면모를 강하게 보였었다.

 

한가지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보자면 장준하가 몸담고 있던 광복군이 적들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이나 다니고 마지막에 가까스로 미군에 의해 훈련을 받게 된데 반해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는 항일 전선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데 대한 자격지심은 아닐런지? 

 

장준하의 반박정희 투쟁은 너무나 잘알려졌기에 여기선 생략하기로 한다. 2공화국 당시인 1961년 1월 장준하는 국토건설본부의 기획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이은 516 쿠테타로 그 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국토건설본부의 사업안은 이름만 바뀐채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도용되었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포천 약사봉에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죽음은 실족사로 밝혀졌으나 의심의 여지가 너무나 많았고 아직도 의문사 진상규명 대상에 포함되어 있고 국정원이 제시판 과거사 과제에도 포함되어있다.

 

첨언: 청년 장준하라는 뮤지컬이 한참 공연중이다. 이부영은 장준하 기념사업회 회장이란 명목으로 자기 선전에 장준하를 잘 써먹고 있고 노무현도 직접 관람했다. 장준하 정신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발언도 남기면서...그리고 8월 28일 자이툰 부대 본진이 성남공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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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판 올림픽 뒷이야기

올림픽 건 기사쓰다. 야마는 잘 잡았다고 생각했건만 다 써놓고 보니 기대에 못미친다.--;;

 

방송사 사람들은 뭐 쪼잔하게 그런걸 따지냐는 눈치였고 방송위원회는 어느정도 수긍하더라.

정윤수와의 통화는 재밌었다. 내가 제기한 문제에 동의하면서 자기가 알아서 좔좔좔 이야기를 풀어놓더라. 새로운 해설자들의 발굴이 필요하다는걸 계속 강조하던데...그건 아마 자기가 축구해설하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낸듯^^

 

목소리도 꽤 좋고 감각도 있으니까 해설하면 잘 하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만 민족주의, 엄청난 오바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 축구소비 문화에 정윤수가 어울릴까 생각해보면 고개가 꺄우뚱해지기도 한다.

 

운동판에 있던 사람중에 신현준은 대중음악을 꿰어 차서 한자릴 차지 했고 정윤수는 월드컵을 기점으로 축구에선 독특하고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예전엔 재수없다라는 생각도 들었는데(김규항의 비판글로 인한 영향도 있었던듯)  요즘에는 머 그냥 재밌으면 되지 하는 생각이다.

 

사실 여주 갔던 이야기를 먼저 풀어놓아야 되는데 그거 할려면 사진도 올리고 뭐 할일이 많아서 그냥 이거 부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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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오늘(8.26) 미국, 여성 참정권 인정

 1920년 오늘 미국은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1792년 <여성권리옹호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적극적으로 여성의 평등과 권리를 주장한 이래로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 치세의 19세기말과 20세기초  영국의 활동가 에밀리 굴덴 팽크허스트와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는 주목할 만 하다. 제국주의 영국의 팽창과 더불어 남성들의 선거권은 점차 확대되고 있었으나 여성 정치권은 무시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경우 1913년 한해동안만  12차례 단식 투쟁을 벌였다고 한다. 또한 시위의 양상은 점점 격렬해져갔다. 1913년 WSPU의 일원인 에밀리 데이비슨이란 여인이  경마장에 난입해 시위를 벌이다가 말발굽에 밟혀 사망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투쟁은 더욱 강화디었고 건물들이 파괴되고 불타기에 이른다.

 

결국 일차대전의 발발과 여성 노동력에 대한 수요의 급증으로 영국에선 1918년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뒤이은 1920년 미국에서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다. 미국의 여성 참정권 획득은 수잔 B 엔터니에 빚진바가 크다. 1820년 태어난 그녀는 재산권법 제정으로 시작하여 여성의 권위 향상을 위해 지칠줄 모르고 뛰었으나 결국 참정권 획득을 보지 못하고 눈감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1898년 <여권통문>이라는 글을 통해 최초로 여성 참정권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후 1919년 4.11 대한민국 임시정부 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여귀천및 빈부의 계급이 무관하게 일체평등' 이라고 명시했다.

 

실질적으로는 대한민국 제헌의회 선거 부터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으나 한국의 여권이 그만큼 인정 받았다고 말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한국의 여성참정권이 정부수립과 동시에 보장된 것은 여성의 목소리와 투쟁에 의해 획득 되었다기 보단(근우회등이 일제강점기 부터 여성운동을 펼치긴 하였으나 김활란등 일부 상층부가 열매를 다 따먹었다는 평가가 있다) 좋은거 다 갖다 붙인 헌법  덕인 부분이 크다고 말할 수있지 않을까? 스스로의 투쟁에 의해 얻어지지 않은 권리이기에 소중함이 덜 했었을 수도 있는듯 하다.(사실 이런 말 하기 상당히 조심스럽다)

 

참정권의 획득은 첫발에 불과하다! 평등세상의 대장정에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광 있기를..

 

첨언: 2004년 5월 16일 쿠웨이트 내각은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마침내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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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노조, 진로, 이라크 축구 뒷이야기

여기는 어떤 글을 쓰게 될까?  난 물론 molot지만 이 디렉토리는 peyo가 취재 과정에 겪은 일들, 이런저런 사정으로 기사화 되지 못한 일들, 취재 과정의 소회들을 molot가 편하게 써내려가는 그런 공간이 될거란게지....

 

취재 하는 동안 지하철건은 솔직히 재미없었고 힘도 별로 안났고--;; 기사 쓰기 전에는 지하철 파업이 고모양 고꼴로 끝난게 열받기도 하고 지난세월 내가 거기 사수대 뛴게 아깝기도 해서 까대볼까 싶었는데 막상 어깨에 힘 쭉 빠진 조합원들 만나니까...내 힘도 빠지더라. 위원장 직대 만나기 전엔 으휴...싶었는데 이야기들 듣고 삼각취재 해보니까 저 사람도 어쩔 수 없구나..싶더라. 그냥 서로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배일도의 추억을 꺼내어 같이 씹어주며 동지애를 나눴다 ㅋㅋㅋ

기사 올릴때 남한 최대의 지하조직이란 미다시(제목)을 뽑은게 그들의 맘을 아프게 한건 아닌지 싶어 여전히 마음 한 켠이 아리다.

 

진로건은 거의 책상에서 쓴 기사지만 반응이 좋아서 (감사 전화를 받고 남들이 내 기사 받아 쓰는걸 확인했을?? 혼자서 뿌듯해했었지^^)기분 좋았다. 취재 중에모건 스탠리측 전화번호를 발굴해내 그 넘한테 전화 했을때 황당해 하던 꼴을 보니 어찌나 신나던지 ㅋㅋㅋ

진로는 한노총 사업장이다. 이 회사는 사실 노사협력 대상--;; 같은 웃긴 상을 받은 경험도 있고 비정규직도 거의 안 쓰는데다가 거의 근속년수가 높은 직원들이 많고 워낙 일들을 잘하는지라 회사랑 사이도 좋은 사업장이다. 골드만삭스 10쉐들이 노략질 한 이후에야 좀 빡셔지긴 했지만 솔직히 법정관리 업체 치곤 그나마 대우도 나쁘지 않은 편이고 하여튼 뭐 그렇다. 이번 파업들어가고도 사측은 배짱 튕기는데 자기들이 먼저 쫄고 있으니...결국은 조정안 비슷하게 타결되고 말았는데(첨엔 중노위 조정안을 사측이 거부하는 웃긴 일이 있었다.) 좀 안타깝다. 우리는 이런 사업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재벌 좋아하는 대안연대 이찬근이랑 민노총 허영구가 투기자본 감시센터인가 먼가를 만들었다는데 걍 갑갑할 따름이다.

 

이라크 축구팀건은 프레시안에서 국제면은 Znet(www.zmag.org 이 사이트를 자주 활용하시길 권한다. 거의 미국판 미디어 참세상--;; 이라 할 수 있다. 프레시안이라던가 한겨레 혹은 기타 진보적 국제뉴스들은 거의 여기 올라온걸 우라까이-재탕, 남의 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약간 보충해서 쓰는거- 한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촘스키 등등이 여기서 활동하고 있다. 영어가 두려운가? 나도 영어 못한다! 논적인 글은 좀 어려울 수 있겠지만 인터뷰 따서 올린 거 부터 보면 접근이 쉬울 수 있다.)

스포츠 면은 Si(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www.cnnsi.com 뭐 한마디로 세계최대의 스포츠 매체이지...요즘 이라크 축구팀의 부시공격발언들은 다 여기를 통해서 알려진거다)를 우라까이 한다는걸 눈치 챘기 ??문에 나도 Zmag이랑 Si 그리고 이라크 인들의 포털 격인 www.aliraqui.org를 서핑하면서 정보를 모아서 썼다. (아 이런 영업비밀을 누설하면 안 되는데--;;)

 

알이라키 닷 오알쥐 들어가서 이라크 사람들 반응을 보니 참 짠하더라 . 베를린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땃을때 조선 민중들 마음이 그랬을까? 기사에도 썼지만 만약 우리나라가 파라과이 꺽고 이라크랑 붙었다면 하는 생각을 하니....정말 진게 백번다행이다. 올림픽 대표 애들 군대가야 되긴 하지만..어쩌랴. 노무현을 욕하거라.

 

오늘 안타깝게도 이라크는 파라과이 한테 3:1 로 져서 결승진출이 좌절됐다. 그러나 이라크 축구팀은 너무나 큰일을 해냈다. 이라크 인들이 아직 살아있음을, 그들은 다른 어느 나라와도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뿐인가? 조지 부시의 웃긴 행위에 대해 날카로운 일침을 날렸다. 누가 이라크 팀의 승리와 이라크 인들의 환호를 비웃으랴! 저항으로서의 민족주의는 역시 유효하다.

 

에구..나는 왜 이렇게 글만 쓰면 길어지나 모르겠다. 김훈 글을 그렇게 많이 읽고 좋아라 하건만..

이 글은 고마 여기서 시마이 하자.

 

첨언:뒷담화(談話)라는 잘못된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물론 뒤에서 하는 이야기란 의미의 뒷담화도 의미는 통한다. 그러나 뒷다마가 맞는 표현이다. '뒷다마 깐다.' 할때의 뒷다마는 뒷통수를 말하는 것이다. 원래 다마는 구슬을 일컫는 말이다. 예컨데 당구치는걸 다마 친다라고 한다던지, 전구 다마라는 표현, 구슬치기가 아니라 다마치기라는 표현등이 다마의 올바른 용례이다. 우리말을 풍요롭게 하는 일본말을 많이 사용하자! 일본말은 우리말의 시다바리 역할을 하며 우리의 어휘를 풍요롭게 한다.(이 지점에서 당신에게 복거일의 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권한다. 복거일의 지속되는 헛소리에도 불구하고 내가 복거일을 싫어할 수 만은 없게만든게 이 소설이다. 이 소설 보고난뒤 복씨가 몇년전부터 영어공용론 주장하는걸 떠올려 보라. 복거일은 진짜 분열적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거다)

 진짜로 여기서 시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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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오늘(8.25) 박홍 주사파 파문 터뜨리다.

1994년 8월 25일 당시 서강대 총장 박홍이 여의도 클럽 토론회에서 1987년 이후 전국 대학에서 배출된 주사파 세력이 15,000에서 30,000명에 이르고 이들이 졸업후 정치, 언론등 각계로 진출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취임 당시 '어떠한 동맹도 민족에 우선할 수 없다'라는 파격적 취임사를 통해 전향적 모습을 보였지만 김영삼의 개혁드라이브는 94년으로 접어들어가며 흐지부지 되는 모습을 보였다.뒤이어 94년 봄 김영삼은 우루과이 라운드 쌀개방 파동을 통해 '대통령 직을 걸고 쌀개방만은 막겠다'던 자신의 호언장담을 썡까버렸다.

 

곧 이어 정국돌파용으로 김영삼은 김일성에게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놀랍게도 김일성 또한 그 회담을 전격적으로 수락했다.(정국 돌파와 여론 반전을 위한 김영삼의 노림수와 대북봉쇄와 자연재해, 천리마식 경제개발의 한계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김일성의 속셈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속셈이야 어떻든 전향적인 제안이었고 남북관계는 유화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조선일보 조차도 어리둥절해 했고 대놓고 반대하지 못했던 하여튼 김영삼 특유의 퍼스낼러티가 발휘된 사건이었다.

 

한편 민족주의 정국에도 불구하고 94년 6월 24일 지하철 노조는 파업을 벌였고 철도 기관사들 역시 전평 총파업 이후 최초로 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좌파 학생들은 농활을 미룬채 궤도 농활을 외치며 연대투쟁에 돌입했으나(나 또한 미제의 압잡이가 되기 위한 카투사 원서를 찢어버리......고 간게 아니라 투덜거리면서--;; 합류했다)   가열찬 투쟁은 남북 정상회담에 묻혀 학생운동의 다수였던 NL계열의 큰 호응을 얻진 못했다.

 

이러던중  별안간 들려온 김일성의 사망 소식은 정국을 급반전 시켰다.

 

어리둥절 해 하던 다수 언론과 다르게 조선일보는 발빠르게 김일성 까대기를 시작했고 뒤이어 정부가 조문을 할 용의는 없는지 물었던 당시 민주당 이부영 의원에 대한 공격, 각 학교에서 터진 조문 파동.....유화적이었던 사회분위기는 공안정국으로 급반전됐다. 언론, 보수정치권, 경찰, 검찰, 안기부는 그야말로 물만난 고기가 되어버렸다. 당시 우리과도 과방을 싹 뒤집어서 관련 문건들을 정리했을 정도였다.

 

이 때 독재에 저항했던, 학생운동권의 친구였던, 술고래라는 설명과 함께 범상치 않은 외모를 자랑하면 (BGM 두둥)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가 바로 그 였다.

 

박홍 총장은 94년 8월 25일 그 유명한 주사파 발언을 하였다. 주사파가 몇만명이고 그 중에 자신이 회개 시킨 사람이 수백이라는 둥, 예수께서도 일찌기 성전앞의 환전상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셨다는 둥 심지어 사노맹 뒤에 사로청이 있고 그 뒤엔 김정일이 있다는 골때리는 발언까지 하셨다.

 

물론 뭐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당시 주사파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주사파가 사회 각처에 진출한것도 사실이다. 노무현의 오른팔로 삼성에서 승용차로 불법 정치자금 수십억 떙긴게 뽀록나 지금은 영등포 구치소에서 김대중의 오른팔이었던 박지원과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있는 안희정, 그 안희정도 그 유명한 구국동맹의 일원 아니었던가? 미문화원 점거를 배후에서 기획했다던 전 삼민투 위원장 한나라당 고진화 의원도 계시지 않던가? 어디 주사파 뿐인가? 에전엔 남로당원들도 많았고 남로당원들도 사회 각처에 진출하지 않았던가?(대표적인 예가 박정희^^)  

 

하지만 당시 박홍 총장의 그 발언은 우습지만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언론들은 박홍 총장을 용기있는 지식인, 시대의 양심으로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주사파를 구체적으로 거명하라는 질문들에 대해서 박홍은  스스로 나타나기 바란다고 말했으며 증거가 있냐는 물음에 대해선 증거 묻는 사람이 바로 주사파라는 심오한 답변을 내어놓았다--;; 그 뿐인가? 김일성 장학금을 탄 사람이 교수가 되어 있다는 연속된 발언들을 통해서 박홍 총장은 자신의 선배격인 매카시의 수준을 우습게 뛰어넘어버렸다.

 

수많은 사람들을 빵으로 보내 콩밥을 멕였던 박홍 총장은 이후 서강대 예수회 재단 이사장으로 영전해갔다. 그리고 박홍 총장 아니 박홍 재단 이사장님은 오늘날까지 이 사회의 공산화를 막기위한 험난한 길의 중심에 서 계신다. 지난 8월 17일 박홍 재단 이사장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부 사학의 비리를 이유로 모든 사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것은 사회주의화 교육을 하자는 것이고 공산주의화하자는 것이다. 사학이 바로 설 수 있도록 지원은 못해 줄 망정 경영권을 빼앗아 교사ㆍ교수들에게 주자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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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오늘(8.24) 미국, 공산주의자 단속법 제정

 헥헥 자정 이전에 그날 글 쓴다는게 역시 힘들군....

 

1954년 8월 24일 미국 의회는 '공산주의자 단속법'을 제정했다. 국가보안법이라던지 치안유지법 같은 그럴 듯 한 이름을 가진 법들도 많은데 역시 미국은 화끈하게^^ 공산주의자 단속법(Communist Control Act) 이란 이름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공산주의자 단속법 하면 바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조지프 R 매카시 위스컨신 주 상원의원. 상원의원이 대단한 권세이긴 하지만 한 주당 두명씩 있는것이 상원의원이니 상원의원 명함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는 힘들지만 매카시는 그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이다. 우리에게 50년대는 한국전쟁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미국의 50년대는 '매카시 시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매카시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 들어있는 종이 몇장을 말아쥐고 ' 이 안에 소련과 내통해 간첩행위를 하는 자들의 명단이 있소이다' 고 외쳐서 온 세계를 떠들석 하게 한 이후 이른바 '비미국적 반동행위' 상원청문회(HUAC, House committee on Un-Americas Activites)를 열고 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비미국적 반동행위 상원 청문회(헥헥 길기도 길다. 예전엔 집회 이름도 긴 것 많았는데 '우리민족 가로막는 반동적 제국주의 미국 규탄과 전노구속을 위한 서부총련 투쟁대회' 뭐 이런식 말이지...) 를 장식한 명단들을 화려하다. 로널드 레이건, 월트 디즈니, 엘리아 카잔등은 매카시의 압잡이로서 동료들을 팔아먹었고(이 당시 레이건은 연예노조 위원장이었다. 어디에나 자기 조직 팔아먹는 이런 개쉑들이 있다.)  찰리 채플린, 아서 밀러, 번스타인, 브레히트 등이 이 떄 톡톡히 고생한 사람이다. 결국 찰리 채플린은 스위스로 망명하기에 이르렀고ㅠㅠ

 

몇년전 이상한 역사 재평가 흐름을 타고 배신자 엘리야 카잔이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묘하게도 왼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앉은채로 침묵하거나 야유를 보낸 반면 오른 쪽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다수는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찰리 채플린이 죽기 얼마전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을 탈 때 전 관객이 일어서서 끝없는 기립박수를 보내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1949년 폴 스위지가 만든 먼슬리 리뷰 창간호에 Why Socialism? 이라는 멋진 글을 발표하여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자랑스럽게 해준 아인슈타인 조차도 공산주의자 단속법의 거미줄에 포착되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단속법 자체가 수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는데가 아인슈타인의 대중적 인기는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너무나 높았다. 그리하야 미 연방수사국과 매카시는 아인슈타인을 단속 대상에 넣는 대신에 괴상한 천재의 이미지를 퍼뜨리기 시작했고 아직도 아인슈타인에 대한 괴상한 천재란 이미지는 지배적이다.

 

이후 매카시의 뻥은 점점 실체를 드러냈고 미국시민 사회도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매카시의 정치적 생명은 끝장이 났고 법 제정 한지 삼년이 지나 불행한 죽음을 맞았다. 결국 공산주의자 통제법은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판정을 받아 소멸되고 말았다.

 

그리고 조지 부시는 2001년 10월 역시 그 이름도 황당한 '애국법'(Patriot Act)를 만들었다. 애국법은 미국 민중 뿐 아니라 해외인사에 대한 무차별적 도청, 감시, 통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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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오늘(8.23)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

 1939년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되다. 서명자는 당시 소련 인민위원회 의장겸 외무인민위원 비야슬라체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스탈린의 수많은 실책들이 지적 되지만 독소불가침 조약이야 말로 대표적 실책으로 기억되고 있다. 파시스트 독일과 소비에트가 어찌 조약을 체결할 수 있냐는 비분강개 외에도 이 조약이 낳은 어이 없는 결과들은 너무나 많다.

 

동유럽과 발트해 지역을 사이좋게 독소가 분할한 이 조약에 의해 폴란드는 동서로 나뉘어 독소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발트 국가들은 소련에 합병되었다. 물론 독소불가침 조약이 꺠진 후 독일과 소련이 발트 지역을 두고 서로 다퉜으나 결국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는 소비에트에 합병되었다. 오직 영웅적이고 전설적 투쟁을 펼친 핀란드 많이 독립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임을 스탈린과 소비에트에게만 온전히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38년 9월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와 영국은 뮌헨 회담을 통해 독일의 수데텐 병합을 추인했을 뿐더러  38년11월 프랑스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의 분열로 인민전선 정부가 몰락하고 들어선 보수주의 정부는 소련에 우호적이지 못했다.

 

앗 회의다. tobecontinued 

 

하여튼 곧 독소불가침 조약은 뽀개지고 기나긴 독소전쟁이 벌어졌고 히틀러 또한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았다. 스탈린과 별개로 소비에트 인민들의 투쟁은 영웅적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관련된 영화중에선 주드 로 와 애드 해리스가 독소 양측의 스나이퍼로 숨막히는 대결을 벌였던 에네미 앳 더 게이트 를 추천함.

 

에이 연속해서 쓸려니까 흥이 안나네...

 

다음 날짜부터는 좀 더 성의있게 쓰겠으니 이건 그냥 넘어가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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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오늘(8.22) 마이클 콜린스 영면.

 내가 매체에서 일하게 되면 꼭 해봐야지 하고 욕심 냈던게 바로 이런 꼭지다. 진보넷에도 천일야화 코너가 있는데 나도 예전에 어디다가 '세헤라자데'라는 이름으로 진보천일야화를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ㅠ.ㅠ)연재한 적이 있다.

 

그냥 오늘의 소사를 쭉 읊어주는게 아니라 그 가운데 좀 좌파적이면서도 현재에도 의미가 있을 만한 사건을 하나 골라서 자세히 소개하고 의미를 부여하는거....마치 한국일보에서 고종석이 하는 것 처럼 말야.

 

매체에서 일하긴 하지만 블로그에다가 이런 코너를 만드는것 하고 우리 매체는 상관이 없지만--;; 언젠가 써먹을 날이 있을테지 하고 자위해본다.

근데 이건 그렇게 힘든 작업은 아니지만 극도의 성실성이 필요한 작업이임엔 분명하다. 고로 매일 매일 블로그에 업데이트 시킬 수 없다는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얼마나 오래 갈지, 얼마나 자주 뺴먹을진 모르겠지만...하여튼 오늘 이 작업을 시작해본다.

 

1922년 8월 22일 IRA의 창설자 마이클 콜린스가 32년의 짧지만 화끈한 그리고 아직도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삶을 마감했다. 마이클 콜린스는 우리나라엔 리암 니슨과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하고 닐 조단이 감독한 영화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16년 더블린 부활절 투쟁이 영국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된 후 마이클 콜린스는 에이몬 드 발레라와 함께 처형을 모면하고 투옥되었다. 출옥 발레라는 신페인당의 의장이 되고 마이클 콜린스는 정보담당으로 활동했다. 마이클 콜린스는 이후 조직내 암약하는 영국 프락치들을 색출해 처형하며 성가를 높였다. 지난한 투쟁 이후 결국 영국은 마침내 평화를 선포하고 협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마이클 콜린스는 자신이 게릴라 전사이지 정치가가 아니라며(!)  협상 대표자로 선정된 걸 거부하다가 결국 협상대표로 선출됐다.

 

그러나 비타협적인 게릴라 마이클 콜린스가 들고 돌아온 런던협약의 주된 내용은 아일랜드의 분할이었다.(아직도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이고 지금은 좀 뜸하지만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졌던 IRA와 영국군의 충돌과 피의 역사는 유명하다. 얼마전 개봉한 블러디 선데이란 영화를 떠올려 보길. 그리고 신지 마카리가 쓰고 슈 아카나가 그린 뽀대나는 니고시에이터 만화 '용오' 에서도 IRA와 북아일랜드를 다룬 꼭지가 등장한다.) 아일랜드 의회는 협약을 비준하고 완전 독립을 요구하는 발레라는 의회를 탈퇴했다. 뭘 잘못 먹었는지 갑자기 마이클 콜린스는 평화를 떠들고 다니다가 동지들에게 열라게 욕을 잡숫다. 결국 영국군과의 싸움이 아닌 협약파-반협약파의 충돌이 벌어진 가운데 마이클 콜린스는 저격에 의해 짧고 화끈하지만 약간 헷갈리는 삶을 82년전 오늘 마감했다.

 협약 거부를 외치며 무기를 들었고 마이클 콜린스 저격의 배후에 있다고 의심받는  에이몬 드 발레라는 웃기기 짝이 없게도 1926년 협약안을 받아들이고 수상을 거쳐 초대 대통령 자리를 꿰어 찬다. 그리고 1966년 "역사는 마이클 콜린스가 위대했으며 나의 식견이 짧았음을 기록할 것이다."
라는 유명한 발언을 했다. 내가 보기에 그 발언은 발레라 자신이 민중을 배신하고 협약안을 받아들이고 게다가 대통령 자리까지 올라가 영국하고 충돌하는 척 하면서도 뒤론 쇼부 치면서 한 세월 잘 보낸 점에 대한 캄플라쥐에 불과하다.

 

결국 예전 자신의 비타협적 투쟁 노선은 잘못된것이고 마이클 콜린스의 노선이 옳은 것이다란게지. 자신의 기만적 행보는 마이클 콜린스의 옳은 노선을 따른 것이고 따라서 합리적인 것이라는걸 강조하기 위한 궤변에 불과한것이 라고 난 생각한다.( 뭐 물론 난 아일랜드 사람이 아니고 그  역사에 정통하지 못하기에 반론이 있을 수 있을게다. 내 관점이 이렇다는 거지)다. 하여튼 마이클 콜린스에 대한 평가는 아일랜드 내에서 아직까지도 엇갈리고 있다고 한다. 고향에 세워지는 기념물들이 족족 뽀개질 정도로...

 

아마 아일랜드 주류층에선 평가가 긍정적이고 비주류 쪽에선 평가가 나쁜 모양인데...이승만하고 비교하면 총들고 싸웠던 마이클 콜린스가 지하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겠지만 비슷한 면모가 있는것 같긴하다. 일단 국가의 건설이 중요하다(지가 대통령 해먹을려고 친일파 대거 중용하고 미국에 빌붙은 이승만 하고 마이클 콜린스를 동일 선상에 놓는건 어불성설이긴 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온갖 힘을 쏟았던 것, 그에 대해 평가가 엇갈리는 지점에선 마찬가지라는 거지..

 

조직내에서 강온 대립이 있을때 강경파가 온건파를 공격해서 쳐내는 경우들은 드물지 않다. 근데 그 노선 투쟁에서 선명성을 무기로 권력을 잡은 강경파가 지가 쳐낸 온건파 보다 더 역겨운 짓거리를 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개혁의 화신인양 굴면서 이매진을 BGM으로 깔고 눈물 흘리는 연기를 통해 집권한 노무현을 보라! 저건 허위고 권력 잡으면 바뀌기마련이라고 비판을 이미 가했지만서도 씨바 미국 없으면 강제노동수용소에 있을거라면서 꼬리 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나?

 

첨언: 크라잉 게임에서 IRA 를 좀 묘하게 그려가지고 지네 나라에서 엄청 욕먹은 닐 조단은 마이클 콜린스를 영화화하면서는 그를 만방 영웅으로 그렸다. 이 영화 이전에 이미 쉰들러 리스트, 롭 로이 등에서 고뇌에 찼지만 결단력 있는 영웅의 이미지를 보였고 키가 190이 넘는 리암 니슨을 마이클 콜린스 역할에 캐스팅 했을때 부터 그 방향은 결정 됐는지도 모르지(그리고 리암 니슨 또한 아일리쉬다) 그리고 마이클 콜린스를 장식하기 위해 줄리아 로버츠를 애인으로 붙여주기도 했고... 하여튼 흥미로운 소재긴 했지만 영화 자체는 그닥 재밌지는 않았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아 그러고 보니 롭 로이에서도 리암 니슨은 잉글랜드에 저항하는 스코티시 영웅이었네..이제 웨일즈 저항 영웅만 남은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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