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비오는 날 술먹으니 ...

 

오늘 취재 나갔다가 꽤 고생했다. 이 부분은  취재 뒷이야기 디렉토리에 써야할지 모르겠지만 귀찮아서 그냥  묶을란다. 비 쫄딱 맞으면서 사진 때문에 대오 앞뒤로 뛰어다니느라 춥기도 했고...(근데 나온 사진들을 보면--;;) 사무실 들어와서 술 한잔 한데다가 후배도 사무실에 놀러 온지라 귀찮기도 하고 어차피 스케치 기산데 뭐...하는 맘에 기사도 대강 써버렸는데 막상 기사 쓰는것보다 업로드 시키는데 훨씬 고생했다. 나 원 참, 참 나 원, 혹은 원 나 참. 천상 난 사무실에서 밥이나 할 팔잔갑다.ㅠㅠ 여하튼 집에 와서 또 술 한잔 하고 나니까 추적거리는 날씨랑 노곤한 몸이랑 주중의 스트레스들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묘한 기분을 만든다.


누구의 포스트인지 까먹었지만 ‘진보넷 블로그에 글 쓰는데 부담감이 느껴진다’ 란 글이 있더라. 어느 정도는 나도 공감한다. 막 뽀다구 나는 글을 써야한다는 것보단 속내 드러내기가 눈치 보인다는 거지. 한다리 내지 두다리만 건너면 대강 아는 사람들로 이뤄진 공동체라 그런 거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 먹은 김에 기분도 꿀꿀해서 옛날이야기 하나 써 볼란다. 다른 블로거들의 관음증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다는 부대효과도 있을라나?


세상의 다른 모든 것처럼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거지만 ‘미선이’라는 밴드가 있었다. 멤버중 몇몇이 병역 때문에 흩어진지라 ‘루시드 폴’이라는 원 맨 밴드로 전환되었지. 그치만 사실 ‘미선이’는 알고 보면 꽤 유명한 밴드였다. 뭐 우리가 다 그렇듯이 나도 엥겔계수가 극도로 높은 생활을 해오고 있는데다 특히 책은 종종 사지만 음반에 대해선 극도로 소비절약을 하고 있지만 미선이껀 테잎과 씨디를 합쳐서 몇 장을 소장했었을 정도다..


지금에사 비주류인척 하는 주류인 이현우, 윤도현등 덕에 혹은 시류따라 인디씬에서 오버그라운드로 연착륙한 몇몇 밴드들 덕에 혹은 난체 하고 싶어하는 스노브들덕에 이렇고 저런 밴드들이 모던락이란 간판을 내걸고 꽤 인기를 끌고 있지만 98년 99년 즈음의 미선이는 나름대로 대단한 모던락 밴드였다. 아으 기회주의적으로 비주류를 참칭하는 수많은 주류들의 세상에서 진정한 비주류란 무엇인가?


머 쉽게 말하면 조용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하는 밴드였지만 엄청 드라이한 음악을 했었지..어케 보면 청승 모던 틱하고 미소년 추종자들이 좋아할 만한 밴드였지만. 글쎄...이 밴드가 정말 맘에 들었던 이유는 가사, 멜로디 라인, 보컬, 리듬 모든 것에서 완벽성을 추구하는게 엿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미선이 1집이었던가 2집이었던가는 모르겠는데 내가 꽤 뻑 갔던 노래의 제목은 ‘치질’이었다. 그 뿐이던가? 90년대 말 그 때부터 언론개혁, 국가보안법 문제들을 간간히 유치하지 않게 다룬 가사들을 보고 ‘뭔가 좀 다른데 ...’ 하다가 미선이의 리드싱어가 메아리 출신인데다가 민주노동당 당원이란 말을 나중에 듣곤 ‘하하 역시 우리 편이군’ 하고 혼자서 웃었기도 했었다.(이런걸 보면 나야 말로 원단 스노브다.)


여하튼 미선이가 갑자기 생각난건 엊그제 꿈에 XX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XX는 지금 SBS주말드라마에서 박예진의 동생이자 박은혜의 언니로 나오고 이요원이 시집가기 전에 장혁이랑 같이 나온 쓰레기 같은 드라마 ‘대망’에 출연한 어떤 탤런트를 지칭하는게 아니다. 바로 XX 때문에 미선이도 생각이 났다. 하이퍼텍스틱한 사고? 혹은 서지학적 사고? 하여튼.


제대후 복학 직후에 본의 아닌 스캔들을 잠시 일으켰었지만 그 스캔들은 금방 정리가 되었고 내가 ‘짝’사랑 하게 된건 XX였다. 돌이켜 보면 그닥 스타일이 빼어난 건 아니지만 동그란 눈, 오똑함을 넘어 거의 뾰죡한 코, 도톰한 입술과 나지막하면서 맑은 목소리의 소유자였던 바로 그 XX.....


XX한테 관심을 두면서부터 경쟁자들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다행히 XX는 그 경쟁자들한테 별 관심이 없더라.^^ 다만 XX가 짝사랑한 선배가 있었다는건 알았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즈음에도 역시 난 좀 외강내유하는 척했지만 XX랑 둘이서 술 먹을 땐 종종 징징거리기도 했었다. XX는 그 때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족들 이야기 힘든 자매 이야기도 해줬더랬지. 그런 대화들을 나눌땐 혹여~ 하는 기대도 했었는데 알고 보니 나 말고도 그 이야기 들은 사람들이 몇몇 더 있더라 ㅠ.ㅠ 글쎄...그 때 좀 더 징그럽게 따라다녔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내 생일 이었던가? 하여튼 어느 날 내 이마에 XX가 뽀뽀를 해준 날, 역설적으로 난 ‘아 끝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


지금 XX는 어디 있을라나? 아산 어디 깨 현장에 있다던 XX는 아직도 거기 있을라나?


근데 왜 그 때 XX는 자기 운동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 하고 권유하지 않았을까? 내가 영문과라서? 내 선배들이 ㅇㅇㅇ출신이라서? 아니면 나란 인간이 별 영양가 없다고 판단해서? 하긴 나도 그 때 XX한테 내가 고민하는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 한 기억은 없다. 왜 그랬을까?


사실 마음만 먹으면 두다리 정도 거쳐서 XX가 어디  있는지 확인 할 수도 있지 싶다. 가끔 그런 충동을 느끼기도 하고...그치만 휴..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다. 가끔씩 꿈에 나오는, 혼자 술 먹을때면 기억나는 XX... 어디서든 건강하고 자중자애하길 바랄 밖에. 언젠가 한 번은 다시 만나서 둘이 술먹고 싶은 XX...그 때도 가슴이 콩닥거릴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지금 읽고 싶은 책

바야흐로 히스패닉의 전성시대다. 정치적 슈퍼 파워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지만 Brics니 뭐니 떠들어대도 한 세대 정도 후면 히스패닉이 미국 뿐 아니라 세계를 뒤덮을 것이라는 전망들이 지배적이고 문화적으로 볼땐 벌써 히스패닉의 물결이 너무나 거세다. 아프로 쿠반 음악을 생각해보란 말이지... 물론 문학만 따지자면 서반아어 문학의 전통과 결과물은 이미 풍부하고도 화려하다. 일일이 예를 들 필요가 있을까마는 이십세기 후반만 따져도 요사, 네루다, 옥타비오 파스, 보르헤스 일일이 세기도 힘들 정도지 싶다. 최근에 유행하는 사람들만 따져도 세풀베다니 뭐니 상당히 많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한 사람이 바로 마르께스인데(마르께스는 소설가로서도 일류지만 저널리스트로서도 정말 대단한 결과물들을 남긴 사람이다. 몇 년전에도 탐사 보도물을 하나 내서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지) 아마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말을 유행 시킨 사람이 그가 아닌가 싶다. 마르케스 소설 중에 꼭 읽으려고 하는데 아직 못 읽은 작품이 있다.아 참..진보넷 사무실에 나오면서 겪는 단점이 딱 하나 있다(헤헤 설마 딱 하나일까?^^). 뭔고 하니 책을 제대로 못 본다는거다. 왜 그럴까? 바빠서? 피곤해서? 하여튼 그래서 요샌 출퇴근 할때 시집이라도 들고 다닐려고 애쓰는 편이다.

각설하고 마르께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명불허전 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기대하던 차에 내 유일한 링크 블로그에서 그 소설의 서평 (http://www.happian.net/blog/?no=31)을 읽었다.  서평을 읽고나니 더 기대가 되는군. 가을이라 더 그런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973년 오늘(9.11) 살바도르 아옌데, 쿠테타군에 의해 사망

1973년 9월 11일 칠레 산티아고 대통령궁에서 살바도르 아옌데가 쿠테타 군에 의해 피격되어 사망했다. 아옌데는 피노체트 반란군의 해외망명제안을 거부하고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소총으로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사살당했다.

 

 

아옌데 최후의 모습을 담은 사진.

 

사실 911하면 우리는 지난 2000년의 WTC빌딩에 대한 비행기 테러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지난 삼십여년간 911은 세계민중들에게 아옌데의 죽음으로 먼저 다가왔다. 언제던가? 공중파 방송에서도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를 상영하지 않았던가?

 

1908년에 태어난 아옌데는 칠레 대학 의학부 재학시절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칠레에는 합법화된 공산당이 있었으나 코민테른의 통제가 칠레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옌데는 사회당의 길을 걸었다. 52년 부터 세차례에 걸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당선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69년 12월 칠레의 대중운동 조직 MAPU를 비롯하여 사회당, 공산당,진보당, 사회당은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공산당의 대통령 후보는 외교관이자 정치가이며 위대한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였다. 네루다는 후보자리를 양보했다. 권력 싫어하는 사람이야 드문게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진리이지만 인상좋은 할아버지 시인 네루다는 정말 대통령 자리가 싫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인민연합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는 1970년 11월 5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는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권력이 선거를 통한 집권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칠레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자본과 백인 소수 상층부에 의한 경제적 지배, 극심한 빈부격차, 미군에 의해 교육받은 군부를 다 갖추고 있었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인민연합의 구리 광산 국유화, 경제 구조 재편에 대해 자본은 모든 수단을 다해 저항했다. 73년 칠레의 인플레이션은 300%에 달했고 운수자본가들은 상품 수송을 거부하며 사보타지를 일으켰다. 미국은 칠레의 주요 수출품인 구리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비축 구리를 국제 시장에 무차별로 풀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 민중들의 아옌데에 대한 지지는 강고했다. 73년 벌어진 총선에서 인민연합에 대한 지지율은 50%를 넘을 정도였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아옌데는 대통령 재신임 투표를 실시하고자 했다. 재신임안 통과가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바로 그 투표일에 쿠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쿠테타가 벌어진후 일주일 동안 칠레전역에서는 삼만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다. '벤세레모스'(단결하라)라는 노래로 선거운동극을 만들어 온 나라를 누비고 다니던 누에바 깐시온의 기수 '빅토르 하라'도 이 떄 산티아고 경기장에서 총을 맞고 죽고 말았다. 심지어 병석에 누워있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파블로 네루다 또한 살해당할 뻔 하였으나 겨우 살해를 피하고 그해에 자연사했다.(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 '영혼의 집'을 권한다. 이사벨 아옌데는 피노체트 집권 이후 망명한 저널리스트 출신 소설가이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나왔다. 초호화 캐스팅이었는데 주인공이 누구였더라? 제레미 아이언스 였나?)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의 앞날은 탄탄대로였다. 군사평의회 의장 자리에 앉은 피노체트는 미국과 영국의 비호하에 쿠테타 동료들을 숙청하고 대통령 자리를 거머 쥐었다.  사망자 3천여 명, 실종 1천여 명, 고문 불구자 10만 명, 국외추방 100만 명...이것이 바로 피노체트의 성적표이다.

 

고령으로 정권을 내어놓은 피노체트가 스페인에서 반인륜적 범죄로 기소되었을때 그의 구명에 적극 나섰던 사람은 바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이다. 대처가 뭐라 그랬더라? '위대한 용기를 지닌 이 인물에 대한 어떠한 법적 기소행위도 반대한다 그랬던가?' 피노체트에 얽힌 아햏햏한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니다. "오늘 군이 봉기한 이유는 이 혼란에서 조국을 구하겠다는 애국심뿐이다. 조국은 혼란 속에서 살바도르 아옌데의 맑스주의 정권에 유린당했다. 혁명위원회는 사법권과 언론 통제권을 갖게 되며 다음 조치가 있을 때까지 국회는 휴회한다. 이상"-이것이 피노체트 쿠테타 군의 포고문이다--;;

 

피노체트의 망령을 불러일으키는 자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올해 중앙일보는 '남미가 변한다' 어쩌고 저쩌고 하는 특집을 진행했다. 그 특집 기사에 따르면 칠레의 포퓰리즘적 전통을 꺠고 경제개혁이라는 길에 매진한 비젼있는 지도자가 바로 피노체트란다. 지랄병도 이 정도면 상당한 수준이다.

 

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자본과 군부, 미국 정부의 사보타지가 일어나고 삼십여년이 지난 오늘..이 역사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베네주엘라에서는 1998년 선거를 통해 우고 차베스가 집권했고 석유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등의 볼리바르 혁명을 이끌고 있다.  기득권, 자본, 미국은 그들이 아옌데에게 했던 만큼 소금 뿌리기를 계속 하고 있다. 02년 4월의 쿠테타 시도, 02년 12월의 석유 산업 사보타지에 이어 얼마전 소환 투표까지...다른 점이 있다면  아옌데보다는 차베스가 군부를 잘 통제하고 있다는 점.(우리나라 보수 신문들을 보면 차베스를 무슨 군바리 출신 독재자 비스무리하게 묘사하고 그에 저항하는 자들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처럼 그리는데 정말 쌍으로 웃기는 것들이라 하겠다)

 

아옌데 정권보다 차베스 정권의 생명력이 더 강해보이긴 하지만 미국을 등에 업은 베네주엘라 반정부 세력들은 공공연히 무장봉기와 쿠테타를 떠들고 다닌다. 이에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의 저자 타리크 알리를 비롯한 150명이 좌파 지식인들은 국경을 떠나 차베스 정부르 엄호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다.

 

사실 아옌데 정권의 비극을 두고 나온 분석들이 꽤 된다. 혁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한 개혁을 선택함에 따른 당연한 말로라는 분석도 있고 선거건 뭐건 간에 군대와 경찰이라는 폭력적 국가기관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 직접적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내 생각엔 뭐니뭐니 해도 미국탓이 제일 크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전투를 잠깐이라도 보거나 살바도르 아옌데, 빅토르 하라, 파블로 네루다의 장엄한 최후에 관한 글을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콧잔등이 시큰해질껄...앗 노무현 탄핵 당시에 아옌데가 어쩌고 우리가 지켜야할 민주정부 어쩌고 하면서 견강부회 하던 작자들이 많던데 각자 알아서 대가리 박고 반성하기 바란다.

 

다음은 쿠테타군이 대통령궁을 폭격하던 당시 칠레 국영 라디오와 전화를 통해 방송된 살바도르 아옌데의 최후의 연설 끝 부분이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3년 오늘(9.10) 멕시코 칸쿤에서 이경해 열사 자결

2003년 WTO 5차 각료회의가 열리던 멕시코의 휴양도시 칸쿤에서 농민운동가 이경해 열사가 할복 자결했다. 이경해는 한국 농업경영인 중앙연합회 회장, 한국 농어민 신문사 회장, 전북도 의원등 농업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활발하게 펼친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1990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펼쳐진 GATT반대 시위에서 할복한 바 있으며 2003년 2월에도 한달간 제네바의 WTO본부 앞에서 항의농성을 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경해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무엇이었나? 세계화, 좀 더 좁혀 말하자면 WTO, 더 좁혀 보다면 WTO 농업협정이 바로 그것이다.(WTO Agreement on Agriculture) 그리고 그 뒤에는 이미 한국 곡물 수입시장의 60%를 장악하고 있는 세계적 식량 메이저 카길(Cargil)이 있다. 심지어 농업 우르과이 라운드 협정의 기본판을 기초한 사람은 미농무차관 출신의 카길사 부회장이었던 댄 암스투츠이기도 하다. 카길과 WTO농업협정의 목표는 정확히 일치한다. 그것은 바로 남반부 시장의 개방과 농민농업을 기업농업으로 바꾸는 것이다.

 

현재 WTO규정은 무역에 대한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식량이 어떻게 생산되고 누가 식량생산을 통제하는지 결정하고  있다. 그 핵심에는 카길사의 아시아 시장 장악이 있다. 자족적인 아시아 식량경제를 의존적 경제로 변화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의 전략이다. 

  

카길에 대해 좀 더 짚어 보도록 하자. 흔히 세계 5대 곡물 메이저라고 부르는 회사들이 있다. 카길 외에도 루이 드레프스, 앙드레, 인터콘티넨털등이 그에 꼽히는데 99년 11월 카길은 인터콘티넨털의 곡물 사업 부문까지 인수했다. 카길의 02년 매출은 508억 달러, 순익은 8억2천만 달러. 상장 되지 않은 미국 개인 기업 중에 가장 큰 규모, 75인의 친인척에게 집중된 주식 수, 박정권 당시 쌀 수입과 미국 의회 로비를 둘러싼 박동선 게이트의 배후.

 

 

농민을 죽이고 농업을 죽이고 세계의 목줄과 먹거리를 자본으로 통제하겠다는 것이 카길과  WTO농업협정의 목표이고 이경해 열사는 그것을 폭로하며 전세계 농민과 민중을 대신해서 자결한 것이다. 어제부터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전국의 농민들은 쌀관세화를 반대하며 거리로 나선다. 이미 어제 그들은 90여대의 트랙터를 스스로 몰고 자신들의 목숨과도  같은 쌀을 갈아 엎었다. 꿇고 죽을 것인가 일어서서 살 것인가라는 갈림길 가운데 한국 농민들은 후자를 택했다. 오늘 우리는 이경해다.

 

이경해 열사가 자결한 바로 그 날 사파티스타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칸쿤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일부를 인용함으로 끝을 맺겠다. 

 

"우리들 모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세상 안에서 살되 종으로 살든가 아니면 세상 밖에 있으라는, 즉 삶을 버리라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으로 살든가, 아니면 죽으라는 이 선택을 따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안의 세상을 만드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세상에 인간성의 미래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전세계 다섯 대륙 곳곳에 살고 있는 민중들의 손아귀에 그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대안의 세계는 가능합니다.형제자매 여러분, 전세계에 걸쳐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한 이견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자들은 복종과 냉소주의, 어리석음, 전쟁, 파괴, 그리고 죽음 등을 세계화하려 합니다. 아래 있는 사람들은 저항과 희망, 창조성, 지성, 상상력, 삶, 추억,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의 건설을 세계화하려 합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우리는 세계무역기구(WTO)라는 죽음의 열차가 칸쿤은 물론 세계 모든 지역에서 탈선하기를 기원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런 중국집이 있다.(마오 제삿날 기념)

홍미루, 곽동각....짱깨집 이름이 아니라 사람이름이다. 홍미루는 노문과 선배 이름이고 곽동각은 고대 영문과 후배 이름이지...가끔 이렇게 중국집틱한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신속한 배달과 서비스 군만두를 무기로 삼는 정말 실력없는 중국집들이 동네마다 산재해 있지만 그래도 신촌엔 괜찮은 중국집들이 꽤 있다. 화교타운으로 유명한 연희동에 가면 본토인들이 하는 중국집들이 수도 없고 그 중엔 비싼 료릿집들도 있지만 허름하지만 짜사이(중국식 김치? 장아찌?) 까지 챙겨주는 저렴하고 먹을만한 식당들이 점점히 박혀있다.(예전엔 화교들이 하는 중국집엘 가면 대만 총통 사진을 떡하니 걸어놓곤 했다. 그런데 요즘 천수이벤 사진 걸어놓은 집은 하나도 못봤다. 왜일까? 아마도 천수이벤이 분리독립주의자이자 대만성 출신이라 실향민 취향에 안 맞는거겠지.)

 

연희동 쪽 아니라 신촌에도 갈만한 중식집들은 역시 꽤 있다. 물론 고등학교 때 참고서값 삥땅쳐서 구석 방 하나 턱 잡아 탕수육 하나 시켜놓고 간만에 뺴갈 기울이곤 했던 약간 지저분하지만 편안한 그야말로 중국집은 이젠 찾기가 힘들다.

 

게다가 짜장면이라고 말하면서 자장면이라고 표기하는 바로 그것, 이삿짐 들여놓고 풀기 직전에 먹는, 당구장이나 만화방에서 먹는 바로 그 자장면이 맛있는 곳은 찾기가 힘들다. 예전에 태원 같은 곳은 여기 짜장면 둘 이요 하고 주문하고 나무젓가락을 뽑아드는 순간에 턱하니 자장면이 나와 황당하기도 했었지^^ 요즘은 글쎄....신신원 쟁반짜장이 먹을만하긴 하지만 내 입맛엔 너무 달착지근하게 느껴지더라. 굴짬뽕으로 유명한 복성각 자장면이 먹음직한 갈색에다가 약간의 기름기가 돌면서 물기가 많고 풍성한게 고춧가루 착 쳐서 먹으면 어금니 사이에 신침이 돌게 하더라.

 

자장면에 한정하면 실망스럽지만 요리 먹을 집들이야 꽤 많다. 좁은 계단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야 하는 점이 외려 중국집 다운 신뢰를 주는 홍매도 그러하고 아까 말한 복성각도 그렇다. 물론 자유총연맹 옆에 있는 복성각은 옛날식 방을 갖춘게 아니라 룸을 갖춘 집이긴 하다. 명물 거리 쪽으로 가보자면 세계 삼대 요리라는 북경오리 카오야 집도 뭐 굳이 따지자면 중국집이긴 하고...(글쎄 여긴 비싸서리...) 매콤한 요리들로 여성팬들의 인기를 끌고 있고 한때 여러 언론을 타기도 했던 완차이도 퓨전 요리집에 가깝지만 난잡스럽지 않아 좋다. (근데 이 곳도 내 입맛엔 좀 맛이 가볍지...)

 

그리고 완차이랑 맞붙어 있는 리틀 차이나는 정말 강추 업소다. 여긴 좀 불편한 점이 있긴 하다. 일단 식사류를 팔지 않는다는 점, 저녁때만 문을 연다는 점, 테이블 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 등이 그 단점들인데 외려 식당이란게 좀 이런 맛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난잡하지 않은 빨간색으로 이미지를 통합한 인테리어 또한 식당과 잘 어울린다. 근데 식당 이름은 좀 너무 없어 보이지 않나? 리틀 차이나가 뭐람. 포인트가 없잖아...

 

리틀 차이나 같은 경우엔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평일에도 거의 손님들이 테이블을 가득채우고 있다. 술은 아주 다양한 종류를 팔고 있지만 료리가 그리 다양하지도 않다. 대략 열가지 정도? 그 중에서 국물이 있는 음식은 딱 한가지다. 게살스프가 그것인데 맵싸한 맛이 참으로 뛰어나다.그 밖에 요리들도 맛이 잡스럽거나 달착지근하지 않은게 입에 착착 붙는 편이다. 근데 이 집은 식사류를 팔지 않기도 하거니와 식당이라기 보다는 술집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래서 더 맘에 드는지도 모르겠다. 주고객층은 주로 이십대 중후반에서 삼십대 초반 정도.

 

일전에 이집에 갔다가 카운터 옆에서 숙제에 열중인 초등학교 2,3 학년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주인 딸래미를 보고 '넌 참 좋겠다. 난 어릴적에 우리집이 중국집 하는게 꿈이었었는데~' 하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 말을 엿들은 주인 아주머니 코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웃으시더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976년 오늘(9.9) 모택동 영면

1976년 오늘 모택동(1893~1976)이 83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사실 이 디렉토리를 꾸준히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마오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늘날 모택동을 이해하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아직도 마오주의에 입각해서 투쟁을 하는 세력들은 전세계에 몇군데 있고 중국에선 모택동 부적이 명절 선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이며 모택동을 냉혈한 마키아벨리스트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뿐인가? 마이크 타이슨의 팔뚝에는 체 와 더불어 마오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문신으로 박혀있다.

 

한 인물, 한 사건에 대한 진실한 해석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게 옳을 것이며 마오의 진실은 그에 대한 몇가지 해석 줄기 가운데 어딘가쯤 혼재되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에 대한 반대자나 지지자들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1911년 청년 마오가 혁명전선에 뛰어든 이래로 죽는 날까지 마오는 전근대적 농업사회에서의 반제투쟁과 사회주의 투쟁에 관한 교과서를 한 줄 한 줄 자신의 온 몸으로 써내려간 인물이다. 누구보다 철저한 공산주의자 였으면서도 창의력 있는 혁명가 였던 것이다.

 

모스크바랑 직접 라인을 대고 있던 이립삼 같은 초기 중공당 지도자들이나 프랑스 근공검학 출신인 등소평등과는 다르게 마오는 철저히 중국문화의 세례 속에서 커온 사람이다.(이것은 그의 큰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여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마오가 학습하던 영문판 공산당 선언이 후일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communist party 라는 원문에 마오가 달아놓은 주석은 뭔고 하니 '공산주의자 연회(宴會)'...--;; 파티가 당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잔치(연회)로 해석했다는 말인게다. 믿거나 말거나^^

 

항일 투쟁과 국공 내전 가운데서 마오가 남긴 주옥 같은 어록은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한다. '정권은 총부리에서 나온다'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울 수 있다' 등등

 

결국 대장정을 마치고 이차 국공합작을 통한  항일투쟁 중인 1943년 마오는 중공당 중앙정치국 주석, 중앙서기처 주석에 올랐고 죽을떄까지 중앙위원회 주석직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전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그 이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한국전쟁)에 장남 모안영을 참전시켰는데 모안영은 공중전 도중에 전사했다.

 

이후 인민공사, 대약진 운동, 문혁 와중에서 수많은 동지들을 숙청했고 좌편향적 정책들로 인해 인민들에게 해를 입혔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아직도 중국 인민들은 자주독립과 주권 수호,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의 그의 공이 과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중공당은 1981년 6월 당 중앙 11기 6중전회에서 '건국 이래 당의 역사적 몇가지 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 그 결의에 따르면 모택동 사상은 중국에서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이고 그것은 여전히 중공당의 중심사상이며 중국인민의 중요한 유산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앞으로 얼마나 우경화 해날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우경화와 별개로 능구렁이 중국인들이 마오에 대한 위와 같은 공식적 평가를 쉽게 바꿀 것 같진 않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벤트 결과 발표!!!

박근혜와 박근혜 미니홈피 사이월드 백만번째 방문객과의 데이트에 버금가는 빅 이벤트!

 

'peyo와 molot 사이에서' 천번째 방문객 이벤트가 성황리에 마감되었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천번째 방문객 행인께서 술을 끊었다고 하시니 행인께는 다음 기회에 감사의 마음을 표할 수 있는 자리를 가지도록 하면 어떨까 싶네요. 박근혜도 아마 백만한번째 사람하고 만남을 가졌다죠?

 

그렇다면 그 다음 1001번째 방문자는 달군 되시겠네요. 달군에게 이벤트 당첨자에 준하는 대우를 하도록 하고 참여를 희망하시는 자일리톨, 스머프 님등을 저렴한 회비--;;(절대 세종대왕 한 분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로 초청하고자 합니다. 추석 연휴 이전에는 반드시 모임을 갖는 것으로 해놓고 시간을 맞춰보도록 하지요. 참석 희망자들은 댓글을 달아주세요.  새끼줄 한 번 맞춰봅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골 때리는 열린우리당 인권위원장.

 며칠전에 국보법 관련 국회 취재를 나갔다. 민가협 하고 열우 인권위원장 조성래 의원 면담 자리였는데 사실 별 기대를 안하고 갔다. 열우당에도 국보철폐론자들이 꽤 많은 상황이니 인권위원장이면 당연하게 폐지론자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왠일 이람!! 자칭 인권변호사 출신 조성래는 강력한 폐지 반대론자 였던 것이다. 카메라가 없었기 떄문인지 조성래 의원은 황당한 발언들을 민가협 회원들 앞에서 계속 쏟아내더라. 기사화 한게 대부분인데 빠진 몇가지를 들어보자면...'우리한테 표를 주고 말고를 떠나서 국보법 폐지 반대라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우리는 화해와 관용 정신을 가져야 한다.'(이건 국보찬성론자들을 관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웩) '나에게 강요하지 마라'(국보철을)

 

민가협 엄마들은 뒤집어 지기 시작했고 한나라당이랑 다를바가 없다는 발언들을 했다. 조성래 왈 '부산 가서 물어보세요.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항상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사람입니다'

 

머 열우 내의 관료출신 어떤 의원이 이런식으로 말한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소위 인권변호사 출신의 인권위원장의 뚫린 입에서 저런 버라이어티한 발언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니까 참 황당터라.

 

조성래가 누군가? 초선의원이지만 노무현 직계 부산사단의 좌장으로 불리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난 조성래가 그냥 나오는 데로 말한게 아니라 어떤 노림수가 있는건 아닐까 하는 속셈이 든다. 그날 아침에 이미 조성래는 열우 전략회의인지 나발인지에서도 그런 말을 한 모양인데...여권이 국보철 하겠다는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심히 우려스럽다. 이 쉐이들이 안 나서면 사실 안 되는것 아닌가?

 

조성래의 황당한 발언들을 듣고 노회찬 의원실에 가서 일러주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멘트 딸라고...

 

첨에 노회찬의원은 안 믿더라. 황당해하면서...그래서 설마 내가 지어냈겠냐고? 진짜라고 몇번이나 강조하니까 믿더라--;; 기사화 하지 않은 노회찬의 말 한마디 '인권 변호사는 무슨 인권변호사 먹고 살라고 변호한거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긴급 공지!

이 블로그에 들어오시는 모든 분께 알립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방문자 수가 날로 증가하는 지라 감사의 의미로 이벤트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이 블로그의 1000번째 방문객을 저희 사무실(진보네트워크)로 모셔 제가 직접 요리한 안주로 술을 한 잔 대접하고자 합니다.

 

추세로 보아하건데 오늘 아니면 내일 당첨자가 가려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한가지 있긴 한데...누가 1000번째 방문자인지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여튼 그 방법은 제가 강구하겠습니다. 물론 이 이벤트를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아서 자신이 방문자 이면서도 쌩까는 분이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뭐 꼭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다들 마음의 준비 하시기 바랍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3년 오늘(9.8) 레니 리펜슈탈 영면.

미안하다. 오늘이 아니라 어제다--;; 이해해달라. 그래도 새벽 한시가 넘어서 퇴근하고 이걸 쓰고 있다. 어여삐 봐주기 바란다. ㅠ.ㅠ

 

2003년 9월 8일 다큐멘터리 감독, 극영화 감독, 사진 작가 그리고 스킨스쿠버 다이버인 레니 리펜슈탈이 101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레니 리펜슈탈은 20세기 여성 예술가 중에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미학적, 선동적 측면에서 볼때 이미 20세기 전반에 가장 완성된 형태의 결과물이었다. 무용가, 영화배우로 그녀의 예술 커리어가 시작됐지만 그녀 스스로가 표현대상으로 그치기엔 그녀의 예술적 능력이 너무 뛰어났다.

 

스스로 프로덕션을 차려 제작, 시나리오, 연출, 주연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북치고 장구쳐서 만든 작품 '푸른 빛'은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고 그녀는 곧 나치에 픽업된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전설적인 작품이 바로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 1934 감독 레니 리펜슈탈 출연 아돌프 히틀러, 루돌프 헤스, 파울 요제프 괴벨스' (출연진만 봐도 으스스 해지지 않나?)이다.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이 작품은 21세기 오늘날에도 보는 사람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든다.

 

120명의 스탭, 36대의 카메라, 8개월 간의 편집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난 이 작품은 그야말로 프로파간다의 극치다. 도입부에선 히틀러가 등장한다. 그 장면은 마치 메시아의 강림을 떠오르게 하며 또 다른 장면에선 히틀러가 20만명의 군인 사이를 헤치고 등장하는 샷이 나온다.  이 샷을 잡기 위해 리펜슈탈은 정면의 첨탑에 카메라를 설치하기 까기 했다. 그 외에 부감샷의 사용을 통한 장엄한 장면과 백그라운드 뮤직으로 쓰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Horst Wessel Marsch’까지...정말 이것이 예술이로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작품이다. 미학적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을 뛰어넘은 창작물이 있을까?

'의지의 승리'를 패러디 한 작품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앨런 파커 감독의 '핑크프로이드 더 월'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에 이르기까지...그리고 우리가 2차 대전 자료화면들에서 흔히 보이는 히틀러의 카리스마틱한 묘사들은 거의 전부가 이 작품에서 따온 것이다. 심지어 나치 패망 이후 이 작품은 나치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오랬동안 전세계적으로 방영금지작으로 묶여있기도 했다.

 

그녀의 천재성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전세계를 경악케 한 작품이 바로 이듬해 나왔으니 그 작품은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올림피아' 인 것이다. 이후 수많은 스포츠 중계와 상업적 영화들에 영감을 준 이 작품은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과 생동감 넘치는 경기 장면들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그 뒤로 매 올림픽 마다 만들어지는 기록영화들은 사실 전부가 이 작품의 패러디에 불과하다.

 

'올림피아'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다. 레니 리펜슈탈은 동양에서 온 과묵한 한 청년의 모습에 혼을 팔려버렸으니 그가 바로 '손기정'이다. 올림피아의 꼭지들 중에 가장 긴 시간이 할애된 부분이 바로 손기정의 마라톤 역주 장면인게다. 물론 올림피아 또한 나치스와 아리안 족의 우월성이란 주제의식이 과도하긴 하다. 이 지점에서 내가 미디어 참세상에 올린 기사를 하나 참조하라.- "축구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저항세력 되어 싸웠을 것"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0887&page=2&category1=3

 

어쩌면 당연한것인지 모르겠지만 2차대전 이후 리펜슈탈은 전범 재판까지 받았고(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실형은 안 살았다.) 그녀의 예술은 어떤 자본과 정치세력의 뒷받침도 못 받았다. 결국 리펜슈탈은 돈도 안들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장르를 찾았으니 그것이 바로 사진이었다.

 

그녀는 이후 아프리카의 풍경과 인간들을 사진으로 담아냈고 그 작업들 또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뿐인가? 71세에 스킨 스쿠버 자격증을 땄고 그 떄부터는 해저 카메라맨으로서 그녀의 예술을 이어나갔다. 100세 생일을 맞이하여 공개된 작품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해저의 인상'. 그녀는 이 작품으로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컴백을 전세계적 찬사 속에서 화려하게 해냈다.

 

2003년 레니 리펜슈탈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잘못은 히틀러를 만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예찬자와 비판자 모두에게 경악과 감탄을 남겨준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중 하나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의지의 승리’ 중 두 장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