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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홍대앞으로 뛴 날 밤.

유시민 사진 따위나 올릴 수 없어서 이 molot도 오늘 내 블로그에 사진으로 데뷔한다--;;

보기 힘들어도 이해해달라! 뭐 또 이해 안해주면 어쩔텐가?

 

그저께 술을 너무 많이 먹고 홀딱 벗고 잤더니 바로 어제 감기로 되돌아왔다. 이런걸 보면 참 우리 몸은 신기하다. 받은만큼 되돌려주니까...간만에 멤버들이 모인 탓인지 술자리는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하지만  편하고 뭐 그랬다.

 

사진 중독자 때문에 좀 귀찮긴 했지만 술 많이 먹으니까 안 찍더만. 멤버들 모인 술자리 아니랄까봐 막내는 지갑 잃어버리고 나머지는 우리 집에 와서 잤다. 황씨를 집에 데려오면 안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 술처먹으면 온 집을 어지르고 지저분하게 해놓고 나간다는거...아니나 다를까 퇴근해서 본 집은 온통 담배꼬바리, 침뱉아논 휴지 투성이였다는거--;; 결혼해서 저런식으로 놀면 박살날건데..

 


'담배불 붙이는 molot' by evo

 

이게 어디였더라? 업소 이름은 생각이 안나지만 전자다트가 우리 옆에 있어서 신경 와방 쓰였던 기억은 남는다. 참 우연히 '익명의 지하철 대의원'도 만나서 같이 밥먹었었네...차수 변경을 몇차례 하며 가진 술자리가 남긴건 뭔가 생각해보니 별게 없구나...생사확인 외엔...

 

정현종의 시집 '나는 별 아저씨'를 보면 '담배를 보는 일곱가지 눈'이라는 시가 있다.

 

인용하면 좋겠는데 생각이 안 나누나...각자 찾아서 읽어들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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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오늘(9.3) 통일 베트남 초대 대통령 호치민 영면

1969년 8월 3일 통일 베트남의 초대 대통령 호치민(1890~1969)이 영면했다. 현실 정치인 중에 그리고 실제로 권력을 잡았던 일인자 중에 호치민 만큼 제나라 민중과 세계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인물이 있을까? 뭐 세종대왕이 있다고???

 

호치민은 등소평 처럼 젊은 시절 프랑스에서 수학했다. (물론 팔자좋게 유학 간건 아니고 고학을 했지) 1차 대전 이후 베르사이유 강화 회의가 열렸을때 피뜨거운 젊은 프랑스 공산당원 호치민은 호치민은 민족자결 원칙으로 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한참 헛바람을 불어넣은 우드로 윌슨 앞으로 서한을 띄우기도 하지만 전달되지 못했다.

 

이후 모스크바에 체류하며 스탈린, 이립삼들과 교류를 쌓으며 점차 성가를 높이게 된다. 이 와주엥 웃지못할 사건이 있었으니 호치민의 사망설이 널리 퍼지고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가 대형 오보 한 번 했다.) 심지어 1931년 모스크바에선 호치민의 장례식이 열리기도 했다.

 

이후 41년 고국 땅을 밟은 호치민은 그 이름도 유명한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 주석직에 오른다. 여러 과정을 거쳐 53년 마침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게 된다. 이 와중에 400킬로키터에 이르는 갱도를 둟어서 주요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었고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갱도 전투는 이후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된다. (김일성 또한 이에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제국주의 프랑스가 물러난 후 그 자리는 미국이 메꿨고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분단된다. 그 때부터 또 지난한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이 시작됐다. 여기서 그 지난한 투쟁의 경과를 풀 필요는 없을듯하다.

 

평생을 독신으로 민중의 곁에서 보낸 호치민은 68혁명당시에는 구호로 불리었다. 체와 호는 자유와 저항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아이콘이었다.(물론 일세계 특유의 오리엔턴리즘도 작용했겠지)

 

결국 호치민은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그 옆에는 가족 하나 없었다. 베트남 인민들은 사이공시의 이름을 호치민시로 바꿈으로써 그에게 말없는 찬사를 보냈다.

 

 68년 호치민의 전기를 쓴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쟝 라쿠튀르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세계의 지도자 중에서 실제로 호치민처럼 창조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만들어내는 것을 지키는 수호자이며, 근원임과 동시에 방향을 가리키며, 사상임과 동시에 실천이며, 국가임과 동시에 혁명이며, 고난의 행자임과 동시에 정치지도자이고, 사람좋은 아저씨임과 동시에 전쟁지도자인 인물은 한 명도 없다."

 

첨언: 호치민은 평소에 목민심서를 항상 옆에 두고 읽었다고 한다.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레이건한테 눈도장 찍으러 가던 전두환도 기내에서 목민심서(한문본)을 옆자리에 두고 있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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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오늘(9.2)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

1945년 9월 2일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동시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미, 소 양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안을 발표했다.

 

이차대전의 종결 외에 이 사건은 두가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미 최고 사령부(GHQ)가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다는 것(최고 통치자는 맥아더, 전후 일본 국민들은 맥아더를 마치 천황처럼 모셨다. 자신들을 패배시킨 점령군 최고사령관을 뼛속 깊이 통치자로 인정했다는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좀 이상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미 국무부의 대령 두명이 (이 중의 하나는 나중에 미 국무장관까지 오른 러스크이다.)사무실에서 지도를 보며 그은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게 된 점이다.

 

9월 2일 항복문서 조인 이전에 사실 다 짜여 있긴 했지만 미 최고사령부는 천황에게 손을 대지로 안기로 결정했다. 실제 전후 일본에서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는 세력은 공산주의자(다른 세력들은 전부다 침략전쟁에 동의, 참여했기 때문에) 밖에 없을 뿐더러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일본도 빨간 물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소비에트의 확장에 대응하기 위해선 천황이라는 구심점을 남겨둬야만 한다는 미국의 판단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 국내에서도 일억 총참회론 이라는 하나마나한 이론이 갑자기 퍼지기 시작하면서 천황은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글들과 가라타니 고진의 여러 책들을 참조하라. 특히 고진의 윤리21은 분량도 작고 쉬운 것이 참 읽을 만 하다.(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서도)

 

일본에 대한 성공적와 대중적 인기의 급등으로 간이 배밖에 나오기 시작한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와중에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기까지 했다.그 유명한 만주 원폭 투하론이 그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좀 아는 척하는 우파들은 625때 만주에 원폭만 투하했어도 통일 된 건데 말야 하면서 헛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결국 맥아더는 하와이로 불려가서 짤리고 말고 미의회에서 나름대로 유명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퇴역했다. 당연히 대통령 후보가 될 줄 알았지만 역시 이차대전의 영웅이고 서민적 풍모를 지닌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자리에 올라 한국전쟁에도 휴전 드라이브를 걸었다.

 

파월이 그나마 부시 정권에서 비둘기파인것이나 아이젠하워가 한국전쟁의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이 된 후 그 공약을 지킨걸 보면 군바리들이 총 무서운 줄 아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반도의 미소 분할 점령 과정은 다들 알겠거니 싶어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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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오늘(9.1) 리비아 쿠테타 일어나 왕정 무너지다.

미안하다. 오늘이 아니라 어제다. 사실 이거 몇명이나 보는지 알 수도 없고 반응도 차가움에도 불구하고 귀찮기는 와방 귀찮은데 확 때려치울까 싶기도 하다--;; 달랑 한 열흘 했는데 이렇게 빨리 위기에 봉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집 인터넷이 갑자기 안되는지라 사무실에서 밖에 못하는 탓도 크다. 이해해달라.

 

1969년 9월 1일 리비아에서 카다피 대위가 쿠테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렸다. 60년대 3세계 쿠테타 열풍의 막차를 탄 것이다. 왕정을 무너뜨린 쿠테타 그리고 그냥 쿠테타가 60년대에는 참 많았다. 금방 생각나는것만 해도 터키, 이라크, 한국, 이집트, 리비아...

 

그 공통점은 한국을 제외하곤 제 나라 민중들의 지지를 받은 쿠테타였다는 것이다.(사실 516 터졌을때 좋아했다란 양반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긴 하다.) 식민지 신세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빅 브러더들은 자신들이 통제하기 쉬운 통치자를 원했기에 부패한 구 왕족들을 골라서 왕권을 쥐어주고 배후조종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 왕가들은 민중들의 이해와 요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식민 종주국과 자신들의 이해에만 집중 했었고 불만은 거의 폭발 수준에 달했던 것이다. 그게 바로 60년대 동시다발적 쿠테타의 배경이다.

 

60년대에 뽀개진 왕정과 유사한 행태를 보이는 왕정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우디 아라비아.

 

하여튼 리비아 민중들은 쿠테타를 열렬히 환영하고 카다피 대위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선뜻 받아들였다. 쿠테타 하자 말자 지 계급장에 지가 별네개씩 다는 짓거리 하는 우리나라 쿠테타 대빵들과 달리 카다피는 쿠테타 이후 이십년이 지나서야 대령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물론 지금 카다피의 공식직책은 국가원수 이다.

 

동아건설의 대수로 공사등으로 인해 우리와도 친숙한 리비아는 카다피 집권 이후 지속적으로 독자노선을 걸었고 카다피는 미국의 공적 2호라면 서러울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매일 잠자리를 바꾸기도 했다는데...

 

물론 리비아가 꾸준히 독자노선을 걸을 수 있는 바탕에는 풍부한 원유매장량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제와 억압위주의 통치가 아닌 민중들의 지지에 기반한 통치가 더 큰 기반이 아닐까 한다. 미국이 섣불리 카다피를 건드리지 못한 것도 그 탓일게고....

 

마냥 멋지기만 하던 카다피도 맛이 가는 모습을 요즘은 조금씩 보이고 있다. 리비아 축구협회 회장인 카다피의 아들이 이탈리아 프로축구팀 유벤투스의 이사가 되지 않나? 페루쟈에 선수로 등록하지 않나...

 

국제적으로도 리비아는 조금씩 변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팬암 항공기 폭파 사건의 배후로 오랫동안 경제적 제제를 받던 리비아는 이라크가 박살나는 모습을 보고 쫄았는지 모르겠는데 미국과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다. 이라크 하나로도 벅찬 미국 또한 짝짜꿍을 맞추고 있고..

 

카다피가 맨날 들고 다니는 그린 북(green book, 이슬람과 사회주의의 짬뽕)을 보면 주체사상이 생각나기도 한다.

 

요즘 나타나는 카다피의 적극적 세계화(?)가 민중들의 생존과 자유를 위한 것인지 자기 권력의 연장을 위한 것인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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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개혁 토론회, 열린졸린당

 엊그제 국회로 직출해서 언론개혁 토론회를 취재하고 왔다. 머 뻔하고 뻔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지라 별 재미는 없었다. 뭔가 돌출발언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 햇던 거지...

 

최근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에서 참여연대, 민언련에 대한 공세의 수위가 높아져 가고 이기에 민주노동당이 민언련에 어떤 대립각을 세우지 않을까도 내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우리 당의 언론정책은 민언련등과 대동소이 합니다..........--;;' 영 재미없었다.

 

민언련 최민희사무총장은 참 명불허전이더라. 조선일보야 나도 싫어하지만 방송개혁 주장하는 것은 언론개혁에 물타기 하려는 짓이라는 둥, 뜬금없는 한나라당 공격을 비롯하야 참으로 대통령 보시기 어여쁘겠더라.

 

토론회 내내 류시민 의원은 꼴불견이었다. 싸가지 없음을 촌철살인으로 착각하는 모양인지 참 보기 뭐한 발언과 자세들이 계속 되었다. 남들 다 똑바로 앉아있는데 비스듬히 기대서 티꺼운 표정 짓고 있는것 부터 해서 남 발언할때 옆사람하고 잡담하기 등등 다양한 밉상의 자세를 온몸으로 구현했다.

 

 


 

내가 포착한 사진이다. 토론회 시작 전에 인사발언, 김재홍 의원의 모두 발언등이 있을때 고개 팍 제끼고 졸고 있더라. 기사에 써먹고 싶었지만 차마 못썼다. 이렇게 라도 써먹어야지...

개인적으로 내 블로그에 처음으로 올라오는 사진이 유시민 의원 것이라니....심히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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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오늘(8.31) 폴란드 자유노조 '연대' 설립

이 연재물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시는 극소수의 독자들에게 유감의 마음을 전한다. 어제는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빼먹고 말았다. 구구한 변명은 하지 않겠다.--;;

 

1980년 8월 31일 폴란드 자유노조 '연대'(Solidarity)가 그다니스크 조선 노동자 레흐 바웬사의 주도하에 설립되었다. 요즘은 이런 연대 저런 연대 참 많지만 ..(난 심지어 '살아있는 연대'라는 슬로건을 내 건 선거팀에도 있었던 적이 있다.)연대라는 말이 아주 흔하지만 solidarity(연대)가 고유명사로 세계적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는 바로 폴란드 자유노조의 설립이었다.

 

앗 인터뷰 해야 된다. tobecontinued

 

사실 폴란드는 동독, 체코와 더불어 구 동구권내에선 선진국으로 분류되었다. 어설프게 김일성 흉내낸 차우셰스쿠가 깽판친 루마니아나 알바니아 같은 국가들에 비해선 정치, 경제적 면에서 확실히 우위를 보였던 것이다. 뿐인가? 좀 경우는 다르지만 교황까지 배출한 국가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또한 현실사회주의 특유의 관료주의, 비밀경찰의 전횡, 보신주의, 노동자 직접행동에 대한 통제등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햇다. 그리하여 연대노조가 설립된 것이다.

 

근데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의 80년은 어떠했던가? 공산주의 국가 폴란드에서 자유노조 가 설립되 위원장이 반정부 발언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고 수만 대오를 이끌고 파업을 했던 그 80년의 한국은 피와 눈물로 점철되있었다. 군부는 자기네 나라 시민들을 향해 총과 칼을 휘둘렀다......

 

연대노조의 정치적 효과는 미묘하다. 레이건 정권은 연대노조에 대해 열렬한 찬사를 보냈고 연대노조를 최대한 이용했다. 공산권을 비난하는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바웬사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두 폴란드 인은 80년대 내내 친미진영의 선전도구로 사용되었었다, 자신의 의도가 어떤가와는 상관없이....

 

바웬사는 연대노조 활동으로 인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수상을 위해 국외로 나가면 다시 입국하지 못할까봐 그는 출국하지도 않았다. 평화상 수상과 이런 저런 일들은 미국에 의해 충분히 이용되었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그는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에 참여해 '연대' 노조와 다른 노조들의 법적 지위 회복, 새로 부활된 폴란드 의회 구성을 위한 자유로운 의원선거, 대통령직의 설치, 일정한 경제적 변화조치의 발표 등을 얻어냈다. 결국 1990년 폴란드의 초대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직 수행기간 내내 벌어진 경제적, 사회적 혼란과 무기력함은 그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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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오늘(8.30) 한국노총 결성

내일 아니지 오늘은 각종 회의와 기사로 인해 바쁠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에 이봉주를 응원하면서 미리 써놓고 자고자 한다.

 

1961년 8월 30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16개의 산별노조와 1개의 연합노조를 거느리고 출범했다.

 

'우리 노동자는 생산의 직접 담당자이고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다. 또한 우리는 사회정의 실현의 선구자이고 평화의 강력한 옹호자이며 전진적 문화 창조의 주역이다. 우리 노동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같은 역사적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하여 장구한 시일에 걸쳐 조직적 통일을 바탕으로 자유·민주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줄기차게 매진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힘찬 전진을 수행해 나갈 것이다.'

 

윗 글은 어디에서 발췌했게? 예전에 하종강의 홈피를 어슬렁거리다가 읽고 감동먹은 글인데 놀랍게도 한국노총 선언의 맨 앞부분이다--;;

 

일제에 의한 자본주의 이식이후 한국 노동운동은 피와 땀의 역사를 써왔다. 일제하에서 수많은 적색노조가 노동해방과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했고 원산 제네스트에는 일본 노동자들도 적극 협력하여 아름다운 국제주의를 구현했었다. 해방 이후 전평의 투쟁에 맞서 이승만이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결성을 지시했다. 이후 전평이 불법화 되어 해산당하고 대한노동조합 총연합회가 결성되니 이것이 바로 한국노총의 직접적 전신인 것이다. 

 

독립촉성노동총연맹은 용산 철도파업, 46 총파업을 깨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웠으니 그 선봉에 선 분이 바로 장군이 아들 긴또깡 (김두한)이다. 아마 '야인시대' 에도 관련된 꼭지가 방영된 것으로 아는데..

 

하여튼 대한노동조합 총연합회는 반공전선, 노동운동 파괴 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며 자유당의 외곽부대로서 그 소임을 충분히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6 직후 해산 되었다가 약 세달 후인 8월 30일 박정희의 재가를 얻어 한국노총을 드디어 건설했다.

 

한국노총은 그로부터 약 삼십년간 사이비, 어용의 한길로 매진해왔다. 물론 한국노총 원풍모방지부, YH노조, 동일방직 노조등 몇몇 민주 노조들이 있었으나 그 노조들은 만날 한국노총에 의해 탄압받기 일쑤였다. 한국노총은 반공궐기대회의 주요 멤버였고 재수 좋으면 위원장들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픽업되기도 했다. 또한 87년 4월 13일 전두환이 호헌선언을 한 이후 한국노총은 예총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호헌지지선언을 하며 '직선제는 안돼'를 외쳤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세워진 이후 한국노총은 설자리를 위협받기 시작했고 90년대 이후에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91년 ILO가입을 필두로 하여 노동법 개악 반대투쟁에선 민노총이랑 연대하기도 하는등 이젠 한노총 위원장이 삭발을 한다거나 한노총 사업장에서 빨간 머리띠가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제 과거의 행적들을 근거로 오늘의 한노총을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첨언: 04년 5월 취임한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한달 만에 한국노총 중앙조직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직급별 호봉 대신 직무 경력과 능력에 따른 다면평가를 실시해 연봉제를 도입한다. ▶성과급을 도입, 상여금 600% 중 200%를 본부별 평가를 통해 차등 지급한다. ▶장기적으로 평가를 통한 개인별 차등지급제를 추진한다'.그 와중에 76명의 한국노총 사무국 직원중 30명이 넘는 인원이 노총을 떠났다. 또한 노총은 또 주5일 근무제 도입에 맞춰 월차휴가와 하계휴가는 폐지하고 연차휴가는 축소하기로 했다. 아햏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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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오늘(8.29) 영국과 중국 난징조약 체결

아 귀찮아 죽겠다ㅠ.ㅠ 하여튼 가는데 까지 가보자.--;;

 

1842년 8월 29일 영국과 중국이 아편 전쟁 종결을 위한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난징조약은 극동에서 맺어진 대표적  불평등 조약이다. 조선, 중국, 일본에서 이후 맺어진 수많은 불평등 조약의 모델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심지어 일본은 미국 해군 제독 페리에 의해 맺어진 자신들의 불평등 조약을 조선에 그대로 써먹기도 했다.(강화도 조약) 

 

난징에 정박중인 영국 군함 콘월리스 호 선상에서(콘월리스라..어디서 들어본 기억이 나지 않나? 헐리우드 영화 '패트리어트'에서 귀족적 후까시를 자랑하다가 맨날 멜 깁슨 에게 뒷통수를 맞던 영국 장군의 이름이 바로 콘월리스다.) 청나라 전권대사 기영과 영국 전구대사 포틴저가 이 조약을 조인했다. 비준서는 1843년 홍콩에서 교환됐다. 주요 내용만 짚어보자면 1) 홍콩의 영국 할양. 2)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5개항의 개항. 3)개항장에 영사 설치 4) 전베 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 몰수당한 아편 보상금으로 600만불 영국 지불 5)공행과 같은 독점상인 폐지(공행은 우리나라의 시전상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6) 관세의 제한 7) 청,영 두나라 관리의 대등한 교섭

 

이 강제적이고도 불평등한 조약에 대해 알기 위해선 먼저 아편전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산업혁명 이후 상품시장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영국은 중국과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청나라의 비단, 차, 도자기는 영국 내의 대표적 인기 사치품이었기에 무역역조 현상은 심각했다. 중상주의 정책이 일반적이던 당시로서는 용인 할 수 없을 정도의 무역적자가 발생했던 것이다. 물론 은의 대거 유입으로 청나라의 인플레이션 현상도 꽤 심각했지만...

 

영국이 인식하기에 이 무역역조의 근본원인은 광동 무역체제였다. 중국의 유일한 대외무역 창구는 광주였고 청의 허가를 얻은 공행이라는 독점적 상인길드를 통해서만 거래가 가능했다. 몇번 사신을 파견해 광동 무역체제를 혁파하고자 애썼으나 답답할 것이 없는 청나라가 그것을 들어줄리는 만무했다. 이 때 영국이 비장의 무기로 삼은 상품이 있었으니 바로 그것이 아편이었다. 사실 영국에서 아편은 고급 상품이기도 햇다. 쿨리지를 비롯한 19세기 영국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아편에 취해 쓴 작품들이 많고 또한 아편을 찬양하는 작품들도 다수 있을 정도였으니....

 

영국의 정책은 대성공을 거두어 중국은 아편 중독자로 넘쳐났고 1830년대에 들어선 무역역조 현상이 역전되었으니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드디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청나라 군대내의 아편중독자 급증, 관리들의 아편중독등으로 국가가 흔들흔들할 지경에 이르자 청나라 도광제는 임칙서라는 칼을 뺴들었다.

 

흠차대신(전권대신이라는 의미이다. 김용의 소설 녹정기를 떠올리라. 위소보가 강희의 흠차대신으로서 많은 활약을 하지 않았던가?)  임칙서는 청렴, 과감을 무기로 유명무실했던 아편 금지령을 확고히 하고 영국상인의 아편을 몰수 하였는데 영국은 이에 대해 황당하게도 전쟁으로 대항했다. 지리멸렬한 전투 끝에 결국 그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결국 난징조약으로 연결된 것이다.

 

사실 영국 국내에서도 이 비도덕적인 전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컸었다. 그러나 영국이 이 전쟁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편 재배가 식민지 인도에서 큰 지위를 차지 하고 있었고 아편을 통해 중국으로 얻어진 은이 영국 중심 세계무역의 밸런스를 결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무역상 군사상 근거지 획득이란 요구들을 일거에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아편전쟁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어떤 전쟁이 생각나지 않는지?

 

 

첨언: 1997년 7월 1일을 기해 홍콩은 중국에 반환되었다. 이 때 영국의 마지막 총독 패튼은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유니언 잭을 내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무슨 의미였는진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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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률성과 정설송 이야기-2

작사는 정률성이 안한것으로 알고 이 노래가 팔로군, 인민해방군 식으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바귀기도 했다던데 모택동 이름이 나오고 그러는게 좀 구려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머 소련 국가 '천년의 흥망'은 더 심하다--;;

 

천년의 흥망( 구 소련 국가)

1
자유로운 공화국들의 굳건한 연방을 위대한 루스가 영원히 결속했다.
민족들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 강력한 하나의 소비에트 연방 만세
영광있으라, 자유로운 우리 조국, 민족들의 우의는 믿음직한 보루
인민의 힘 레닌의 당은 우리를 공산주의 승리의 길로 이끈다
2
뇌우 사이로 자유의 햇살이 우리에게 빛났고 위대한 레닌이
우리에게 길을 비추어주었다.레닌은 민족들을 올바른 대의에
눈뜨게 해주었고, 노동하고 헌신하도록 우리를 격려했다
영광있으라, 자유로운 우리 조국, 민족들의 우의는 믿음직한 보루
인민의 힘 레닌의 당은 우리를 공산주의 승리의 길로 이끈다
3
불멸의 공산주의 사상의 승리 속에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본다.
영광스러운 조국의 붉은 깃발에 우리는 언제나 헌신적으로 충성한다.
영광있으라, 자유로운 우리 조국, 민족들의 우의는 믿음직한 보루
인민의 힘 레닌의 당은 우리를 공산주의 승리의 길로 이끈다

하여튼 지난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개막식에선 인민해방군 행진곡이 우렁차게 퍼지고

중국 십억 인민들이 그에 감동 먹는걸 보고 나도 뻑갔다.(아 이 얄팍한 싸구려 감성이라니ㅠ.ㅠ)

작곡가가 정률성이라고 소개가 되던데 왜 아나운서는 정률성이 한국 사람이란 이야길 안 할까 하며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때 고2였나? 이런걸 보면 어릴땐 나도 좀 민족주의자였군..아 난 어떻게 그때에 정률성을 알았나 궁금해 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노태우 정권때 사회주의에 관련된 내용이 좀 해금되고 한참 중국에다가 러브콜을 보냈어다. 이 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김학철. 이 분은 독립적으로 다뤄야할 만한 비중의 인물이다. 하여튼 이 분의 책이 그 때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소설은 '해란강아 말하라' '격정시대' 등이었고 수필집 혹은 자서전 비슷한게 '최후의 분대장'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추억을 이야기 하랴' 등이었다.

 

난 그때 최후의 분대장과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추억을 이야기 하랴 를 읽었었는데 재미, 감동, 모르던 뒷이야기 충족 이 세가지 측면에서 만땅이었다. 그 책을 보면 정률성 정설송 이야기가 자세히 다뤄진다. 같이 활동하던 동지였기에...

 

결국 죽을 고생, 산 고생 다한 이 정-정 부부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북조선의 수립으로 팔자가 좀 피기 시작한다. 정설송은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으로 평양주재 중국대사가 되었고(이후 멕시코, 네덜란드 대사등을 지낸다.) 정률성은 수 많은 동지들과 함께 북조선 건설에 참여해 인민군협주단장을 지낸다. 이 때 사건이 터졌으니 정률성이 인민군 합창단의 여 소프라노와 바람을 폈고 그것이 뽀록이 난것이다. 정설송은 양부양모에게 SOS를 쳤고 북경에선 바로 정률성을 소환--;;  그 기간중에도 정률성은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했고 이 노래는 아직도 조선인민군의 공식군가이다.

 

50년 11월 정률성은 중국공산당으로 완전 소환되어 중국에서 활동을 한다. 이것이 정말 다행인것이 무시무시한 연안파 숙청때 무정을 비롯한 수많은 투사들이 다 김일성에게 목숨을 앗겨버린것이다. 무정이나 다른 사람들이 중공당에 바로 라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숙청을 가차 없었다. 초대 인민군 항공대장을 지낸 김학철의 매제 또한 이 때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이후 중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정률성은 문혁당시 당연하게 4인방한테 갈굼을 많이 당하고 고생 좀 하다가 58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정률성이 조선의용대 행진곡을 만들고 김학철이 혁명연극 대본을 쓰면서 일제와 맞서 싸우던 태항산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조선인과 중국인이 함께 국제주의 원칙하에 동지로서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에 맞서 투쟁하던 그 역사는 얼마나 감동적인지....

 

아 오늘날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물론 그 때도 민생단 사건 같은 것으로 인해 조선인 출신 당원들이 깨강정이 나기도 했었다. 그 이전에 김산 의 예도 있고...하지만 광동 코뮌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 그리고 이른바 항미원조 투쟁까지 그 시절은 얼마나 좋았나? 주은래가 자기 조상들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해 조선족에게 사과한 글을 기억해보라...)

 

특히 짝퉁사회주의 아니 조중동등에 의해 자본주의를 하려면 저렇게 하라고 칭찬 받는 오늘날 중국...니들 정말 반성 좀 해라. 후진타오 특히 너 말야! 

 

첨언: `2004광주국제영화제' 특별작으로 정률성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태양을 향해서' 가 상영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볼 기회가 없을까? 2002년 9월 중국에서 송 지앙보 (Song jiang bo) 감독에 의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라는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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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률성과 정설송 이야기-1

 아 일 안된다...진행하던 기사 마무리 지을려고 사무실 나왔건만 집중력도 떨어지고 평소같으면 머릿속에서 하드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데 오늘은 하드도 안 돌아간다. 푹신한 의자 있는 맥줏집에서 시원한 맥주 마시면서(좀 톡쏘는거..국산 같으면 레드락) 노가리나 풀었으면 좋겠다.

 

집중력이 자꾸 떨어져서 밥까지 했건만 마찬가지다. (오늘 메뉴는 자장밥이었다. 감자 대2, 당근 대1, 양파 대2, 돼지고기 300g, 춘장 1봉, 레시피 생략)

 

다음까페에서 정은임 방송 다시듣기 찾아서 들으려는데 그것도 잘 안된다. 짜증 이빠이...--;;

 

손노가리나 풀어야겠다. 일전에 자일리톨님에게 정설송에 대해 이야기 해주겠다고 약속한 바도 있고 오늘 저녁은 중화요리를 만들기도 했고(정확히는 중화풍이지..) 역사왜곡이 어쩌고 하며 중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정설송-정률성 부부 이야기나 한 판 해볼란다.

 

정률성은 광주출신으로 조선혁명군정치학교, 중국공산당 산하 노신 예술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 팔로군, 해방이후 북한 인민군 합주단장등을 지낸 음악가이자 사회주의 혁명가이다. 그는 김학철, 무정, 석정 윤세주, 주덕해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에 입각해 반제국주의, 반일 투쟁과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해 싸운 사람이다.

 

정설송은 자녀가 없는 주은래-등영초 부부의 양녀로서 1941년 정률성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정설송은 그 당시 항일군정학교 여학생 대대장이었다고 한다. (이 둘의 결혼에 어려움이 많았는데-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반당분자로 처형당한 이후 중국공산당 내의 많은 조선인들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무정의 적극적 도움으로 결국 결혼에 골인 했단다.)

 

하여튼 정률성과 많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에 소속되어 반일 투쟁에 나섰었다. 결국 태항산 전투에서 석정 윤세주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전사하고  포로로 잡히면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그 이후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조선의용대는 당당한 한 축으로서 인정 받을 수 있었고 56개 소수민족중 몇개 민족만 자치주를 건설하는데 포함될 수있었다. 주덕해는 연변자치주 건설의 핵심적 인물이고 초대 자치주 주장을 지냈다.

 

자꾸 이야기가 딴데로 세는데 정률성은 38년 봄 힘든 대장정을 마치고 너무나 초라한 조직으로 연안에 자리잡은 공산당의 기세를 돋구기 위해 연안송(延安頌) 을 발표했다. 이것이 중화인민공화국 3대 음악가이자 최고의 혁명음악가로 불리는 정률성의 시작이었다.

 

연안송은 공산당 점령지구에서 국민당 점령지구로 화북지방으로 나아가 동남아까지 급속도로 전파되었다고 한다.(나도 이건 못들어봈다--;;)

 

이후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로서 활동하면서 전투중에도 지속적으로 음악들을 발표하였으니 그 중의 대표작이 '조선의용대 행진곡' 인것이다. 이 노래는 라 마르세이예즈가 그랬던 것처럼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고 마침내 팔로군 행진곡으로 격상하기에 이른다.

 

중국본토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팔로군이 더 이상 국민당군 산하 팔로군이 아니라 인민해방군의 깃발 하에 싸우게 되던때 팔로군 행진곡은 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격상된다.(아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땐 얼마나 기분이 묘하던지...괜히자랑스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통일을 선포한 1949년 이후 인민해방군 행진곡은 중국의 국가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 가사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여
조국의 대지에서
민족의 희망을 등에 걸머지고
우리들은 백전백승의 역량이다

두려움 없이
절대 굴복하지 않고
용감하게 투쟁하여
적들을 깨끗이 소멸할 때까지
모택동의 기치를 높이 휘날린다.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

 

너무 길다 . 짤라서 써야겠다. tobe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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