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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생활인

藝術人生님의 [2012/01/02] 에 관련된 글.

 

프레시안에서 연재되는 '동아시아를 묻다'가 일단락된 모양이다. 솔직히 이병한 씨는 그동안 창비 그룹이 보여준 것에 나름의 연구를 가미한 것 같고, 윤여일 씨는 손가孫歌선생의 아시아 담론을 나름 재구성한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둘 사이의 긴장이 둘 사이의 각각 열 편의 주고 받는 대화를 통해 잘 드러났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 외에도 조금씨 결이 다른 다양한 아시아 시각들이 존재한다. 내가 아는 예에는 왕휘, 진광흥, 사카이 나오키 등이 있다. 

 

나는 사실 아시아 담론 자체를 이론이나 학문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데, 그것은 정말 '방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알튀세르가 정의했던 '철학'과 유사한 것인데, 이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지만 비판적 효과를 내며 담론 지형을 바꾸는 것이다. '방법'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방법' 안에 머무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승자박이라 할 수 있다.

 

암튼, 흥미롭게도 내가 이 연재에 대해 간단히 논평했던 부분을 이병한 씨가 그 연재물의 마지막 글 도입부에 인용하였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209014903&Section=05 내가 제기한 문제는 지식인 중심주의와 국가주의의 민중배제적 동거를 문제삼았던 것이었는데, 이병한 씨는 본인의 국가주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수긍하면서도, '동거' 자체의 문제를 통해 역사 속의 주체의 문제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를 천착하기 보다는, 민중을 생활인으로 가볍게 대체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병한 씨는 민중과 코뮌을 동시에 부정하면서, 마치 '민중'을 모래성을 쌓는 비현실적 혁명주의자의 것으로 보고, (윤여일 씨의) '코뮌'을 지식인의 철옹성이라고 보는 듯 하다. 그런데 그는 생활인이 어떤 개념인지, 어떤 함의를 갖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논리는 조금 극단화하면 여론조사를 통해 드러나는 요동치는 국민의 뜻에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반지성주의적이라 할 수 있고, 다시 말해 포퓰리즘적 수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나오는 정책적 제언들은 아마도 실용주의적 국가관과 근접할 것으로 보인다.

 

내가 바라보는 민중, 그리고 나아가 민족은 물론 이병한 씨가 추측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나는 아직도 이를 명확하게 개념화하지 못하는 상황이고, 나 개인의 지적인 성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를 내실화하는 과정을 길게 남겨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박현채 선생의 민족민중론으로부터 추출하였던 문제의식에서 보면, 민중은 민족을 전제한 민중이며,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이다. 따라서, 보편주의적으로 외부로부터 주어진 관념적 주체가 아니면서도, 역사적 각 계기 속에서 그 구체적 모순을 담지하는 계급연합적 주체이기도 하다. 국가를 문제삼음에 있어 무턱대고 개념화되지 않은 민간이나 생활인을 들먹이는 것은 지식인의 몫을 팽개치는 것이다. 우리는 민간이나 생활인이라는 수사가 매우 국가주의적일 수 있음을 많이 보아왔다. 간단히 말해 국가와 다른 것 같지만 사실상 궁극적으로 국가의 재상산에 기여하는 그러한 '민간' 말이다. 국가이든 자본이든 그 변혁의 동력은 그 내부의 구조적 모순로부터 나온다. "국가를 에둘러간다"는 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만약 민간이나 생활인이 형식적으로 국가를 회피하면서 실질적으로 국가를 재생산/강화하는 것이 되지 않으려면, 결국 국가가 작동하는 기제와 구조 그리고 그 역사적 계기로부터 그 변혁의 가능성을 조망해야할 것이다. 여기에서 식민과 분단을 낳았던 역사적 자본주의에 대한 내재적인 분석과 비판이 전제로서 주어진다. 다시 말해 국가에 대한 비판적 사유는 민중의 전제가 되는 '민족'에 대한 '역사'적이고 '경제학'적인 분석에 의해 주어진다. 여기서 경계할 것은 식민과 분단을 외부적인 요인으로 환원하는 여러 시각들인데, 이들은 '국제적' 수준에서는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수사를 마음껏 동원하지만, '국내적' 수준에서는 사실상 매우 자유주의적인 논의에 머문다. 나는 세계체계론이 그렇게 우익적으로 원용된 결과의 하나로서 분단체제론을 그 예로 들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또한 역사와 정치가 결렬된 전형적 예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내가 보기에 동/아시아가 유의미하다면 그것은 보편주의/세계주의와 국가주의에 동시에 비판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비판성 자체에 머무는 이론적 시도가 아주 의미 없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 비판성을 어떻게 무기로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무기는 전투를 위한 무기이지, 재생산과 통합을 위한 무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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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와 '분단'의 문제설정

藝術人生님의 [동아시아] 에 관련된 글.

 

우리의 동아시아론은 마땅히 북조선에 부여되어야 할 중요성과 위상이 불분명하고, 오히려 북조선과 통일이 남한을 중심으로한 국가주의적 서사에 수동적으로 동원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매우 문제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지적 시도가 식민과 분단의 역사를 당대의 정치성 및 주체형성과 관련짓지 못하는 가운데 역사학의 맹목적 국가주의 정치로 표현되고 있어 더욱 안타깝다.

 

그런데, 다른 한 축에서 동아시아론은 북조선을 아예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하는데, 지식인 중심적 사유라 할만한 이러한 동아시아론는 역으로 모종의 이론주의로 빠지면서 북조선을 배제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되기도 한다. 아마도 중국과 일본이 어떤 사상적 전형성을 가진 상호 참조의 대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여기에서 한국 나아가 북조선은 미래의 과제로 주어진다. 적어도 과제로 인식됨은 긍정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오히려 중국과 일본은 그 전형성의 차원 때문에 참조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거울상이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근대 과정에서 이러한 거울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문제설정으로서 분단을 제시할 수 있고, 이는 분단체제론과 달리 탈식민과 탈근대의 집단적 정치의 실험이 응축된 현장으로서의 한반도,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의 분단이다. 우리는 관련한 탈식민의 실험을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를 분단의 문제설정에서 파악해야지 우리는 탈식민을 탈근대와 연결지을 수 있다. 우리는 이로부터 기존의 거울상을 깨부수면서 중국과 일본의 탈식민과 탈근대 운동을 재구성하고, 인터아시아적 연대의 계보를 지역적 차원에서 재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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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藝術人生님의 [노신, 리영희 그리고 전리군] 에 관련된 글.

 

동아시아 또는 아시아 담론에서 보이는 아시아를 실체화하지 않는 존재론적 고민은 나름 국가중심적 접근을 비판하는데 유용하지만 이런 고민이 어떻게 인식론을 배제하지 않고 지식인의 공허한 담론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을지가 문제이다. 근대적 전환 속에서 내적 혁명을 시도했던 식민지의 사상과 운동적 실천을 통한 인터아시아적 접근은 한편으로 유/무의식적으로 국가중심적 사고에 의해 회고적으로 구성된 아시아 담론에 비판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민중이라는 역사적 주체를 사고하지 못하는 지식인 중심적 사고와도 갈등적이다. 이는 이론과 사상에 있어서 국민국가화의 과정 속에서 망각된 모종의 초국적성을 복원하여 재평가하는 길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복원과 재평가의 시각을 외부에서 찾기 보다는 외부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아시아 내부의 상호성과 내재성을 중심으로 찾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전통으로의 회귀도 아니고, 국가중심적 역사의 아시아적 재서술도 아니며, 지식인 중심적 아시아론도 아니다. 오히려, 근대성의 극복이자, 탈국가적이면서 민족적이되 국민적이지 않으며, 지식과 민중을 분리하지 않는다.

 

전리군 선생의 노신좌익과 박현채 선생의 민족민중론의 유사성, 그리고 전리군 선생의 정신사 연구와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의 상보성은 각기 중국과 남한의 사상적 곤란을 드러내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들의 사상적 연원으로부터 민족적이며 국제주의적인 사유를 해냈던 반/식민지의 사상 및 운동적 실천을 재인식하고 보편성의 재구성의 지침을 추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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