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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sili님의 [자존감의 정치...] 에 관련된 글.

 

며칠전 블로그를 통해서 보게된 홍세화 대표의 편지는 감동적이었다. 나는 그저 개인적으로 몇 권의 책을 읽어본 것 밖에는 다른 인연이 없지만, 경제위기 상황을 비교적 잘 파악하고 계신 것 같고, 원칙적 입장을 잘 견지해나가실 수 있는 성숙한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감동을 받았던 이유는 아마도 앞으로 나의 전망과 관련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당원이었던 적도 없고, 그런 운동을 해본 적도 없지만, 늘 나의 과제 안에 당의 문제를 모순적으로 담고 있었던 것 같다. 국가의 문제처럼 당의 문제도 변혁의 문제설정 안에 두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통합진보당의 성립과정은 많은 문제들을 보여준 것 같은데, 특히 진보신당 명망가들의 입장 정리는 가관이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그런 문제들을 예방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위기의 상황을 맞게된 당 자체의 구조와 역량의 문제는 그저 그 명망가에게 책임을 돌린다고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그 원인은 아직 진보신당에 남아 있는 이들, 나아가 진보신당을 여전히 나름대로 지지하는 이들이 과거 공유했던 어떤 지향과 관련될지도 모르겠다. 사회당과의 통합이 어떤 토론과 성찰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당 운동의 성격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의회공간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되, 그 성과를 일상적 사회/대중운동에 축적하면서, 궁극적으로 변혁적 사회운동의 역량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동안의 원칙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남한의 변혁 운동은 그 목적에 식민/분단의 극복이라는 남한의 특수한 과제를 반영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어쩌면 그동안의 이론적 무기는 이미 낡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낡은 무기를 통한 실천의 한계에 다다랐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의회 및 정당운동 공간에서 물질적 힘을 얻지 못하고 그것이 당운동의 자체의 위기를 확인한다면 '하방'은 아마도 무기를 되찾기 위해 민중 옆에서 이론을 벼리는 과정이 될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와 노신이 말했듯이 말이다. 어떤 새로운 형식을 향한 고민이 되겠지만, 그 역시 이론 내부에서의 작업으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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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리군 선생 소개(2009)

예전에 2009년 대만 교통대학 수업 때에 제공된 전리군 선생의 소개글이다. 중간에 일부 오류는 바로 잡았다. 아마도 이 글은 진광흥 선생이 쓴 것으로 보인다. 몇 가지 핵심 포인트를 짚어주고 있다.

 

***

 

http://www.srcs.nctu.edu.tw/srcs/teachers_cv_13.htm

 

전리군 선생은 북경대학 중문과 퇴직 교수로서 동아시아 지역 사상계의 대표적 인물이자 1980년대 이래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문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노신 연구로 저명하며, 북경대학 학생들이 평가한 "가장 인기 있는 열 명의 교수"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39년생으로 북경대학 중문과 신문전공에 입학하여, 1960년 인민대학 신문과를 졸업했다. 1960년에서 1978년까지 귀주성 안순 지역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8년 북경대학 중문과 문학연구생으로 입학하여, 왕요(王瑤), 엄가염(嚴家炎) 선생으로부터 사사 받았고, 1981년 졸업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았다. 1988년 5월 "노신과 당대 청년을 소통시키는 가교가 되기"라는 제목으로 발언하여 회의에서 열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일부 당대 청년의 눈 속의 노신", "일부 당대 청년의 눈 속의 주작인"이라는 두 편의 글을 <노신연구동태>에 발표하여 노신 연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에 북경대학에서 두 차례의 학교차원의 공개 강연을 했고, "나의 노신관"을 이야기하여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노신을 독립적 사상가로 삼는 전리군 교수는 독특한 사유방식, 독특한 사상명제, 그리고 독특한 표현방식을 갖는 '노신사상'의 실험을 제공해준다.

 

전리군 선생은 노신사상만 잘 이해하고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찍이 중국 대륙의 80년대 문화열 속에서 문학발전을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사회경제상황'과 '문학' 사이에 '문화'의 매개적 작용이 있음을 발견하였고, 90년대의 진일보한 연구에서 20세기 문학을 이 세기의 역사적 중심 과제로 위치짓었다. '전면적 현대화 실현'의 큰 배경 속에서 '현대문학'과 '현대교육', '현대출판', '현대정치' 사이의 상호 관계를 고찰하여, '문학 외부관계 연구' 영역에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었다.

 

전리군 선생의 저작은 매우 많고, 출판된 수가 50여종에 달한다. 그의 대표작은 <영혼의 탐색>, <노신과의 조우>, <주작인전>, <풍부한 고통-돈키호테와 햄릿의 동이>, <1948: 천지현황> 등을 들 수 있다. 최신작으로는 2007년 옥스포드에서 출판한 <망각을 거부하라: 1957년학 연구필기>와 2008년 대만에서 출판한 <나의 정신자서전: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및 <나의 회고와 반성>이 있다.

 

전리군 선생은 2002년 퇴직 이후 다시 중학교와 귀주로 돌아가서, 어문교육과 서부 농촌 교육 및 지방문화연구에 주목하였고, 동시에 현대 민간사상사연구에 종사하였다. 전리군 선생의 중요성은 중국 문화대혁명, 79년 민주개혁, 89년 천안문 등 중대한 역사 사건을 경험하고, 근 50년의 중국의 역동적 역사 기억, 정치와 사회 개혁사조를 가지고 중국 민주운동에 대해 예리한 비판과 성찰을 내놓고 있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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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20218-20120223

현실 생활의 조건이 학습과 연구에 영향을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현실과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긍정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불안은 종종 연구 자체를 왜곡시키거나 그안에 모순을 삽입한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가 확실치 않기 때문에 나는 늘 어정쩡한 태도를 갖게 되는 것 같고, 이는 다시 논문 구상 안에 반영된다. 상호참조라는 미명으로 이 곤란을 지나치고자 했지만, 진광흥 교수와의 논의 중에 이는 거의 불가능함이 밝혀진듯 하다. 참조의 축은 결국 둘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이는 내가 알고 있던 결론의 재발견인데, 나의 현실적 불안은 이를 회피하고 두 개의 축을 설정하도록 했던 것 같다.

 

전리군의 비판/해체적 효과는 중국 내부와 남한/서구에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인데, 이는 남한의 보편주의적/비판적 중국연구의 식민성의 문제와 닿아 있다. 나는 이를 1980년대 중후반의 인식론적 체계의 전환과 관련짓고자했고, 하나의 징후로서 박현채 선생의 사구체논쟁의 이론주의적 전개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결국 전리군은 하나의 '방법'이 되었던 것인데, 굳이 꼭 전리군이어야 하는지, 꼭 중국(연구)이 방법이 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 이는 사실 북조선 및 분단에 대한 맹목을 드러내고 자기문제화하기 위한 과정에서 배치되었던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과 중국의 역사적 경험의 공유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동아시아에서 중국-북한과 남한-일본이라는 대칭적 축을 상정하고, 이 안에서 중국/일본의 쌍을 넘어서는 계기를 분단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사고 안에는 여러가지 공백들이 있는데, 내가 짧은 시간 안에 쉽게 메울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장기적인 연구 계획으로 가져가면서 일단 서랍에 넣어두자. 특히 우선 박현채와 관련한 부분은 땅 속에 묻어 둔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반영될 것 같다. 암튼 화요일 진 교수와 논의를 하고 며칠을 생각하면서 결론을 지었다. 연구는 전리군의 사상적 특징과 방법에 집중될 것이다. 그런데 인물의 사상에 대한 연구라는 것은 대상에 대한 충실한 이해와 적절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럴 만한 능력이 내게 있는지 자신이 없다.

 

2009년 가을에 입학에서 이제 2012년 2월 봄학기(6학기)가 시작되었다. 학기의 시작과 함께 그동안 오랜 숙원이었던 지도교수 문제가 해결되었다. 한편 진광흥 교수는 이번 학기 처음으로 "인터아시아문화연구 입문"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데, 지난 화요일 수업을 듣고 왔다. 외국인 학생이 주로 듣는데, 처음으로 본인의 저작들과 InterAsia Cultural Studies를 교재로 삼아 수업을 진행해서, 더욱 일목요연하게 그의 방법과 개입실천의 문제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그 외에 이번학기에 대금화(戴錦華, 따이진화) 선생님의 수업도 준비되어 있다. 수업은 "포스트-냉전 이후의 사회와 문화, 그 곤경"으로 되어 있다. 종종 청강을 해보려고 한다.

 

인터아시아문화연구 입문(陳光興)

http://www.srcs.nctu.edu.tw/srcs/course_intro/course_1002_06.htm

 

포스트-냉전 이후의 사회와 문화, 그 곤경(戴錦華)

http://www.srcs.nctu.edu.tw/srcs/course_intro/course_1002_0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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